빌리는 지구인들이 벌이는 그 전쟁과 같은 살인 행위에 트랄파마도어인들이 곤혹스러워하거나 경악을 금치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지구인들의 잔학성과 굉장한 무기들이 결합되면 결국에는 순결한 우주의 한 부분이, 나아가 전체가 파괴될 수도 있다고 염려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에 관한 질문은 한번도 나오지 않았고, 빌리 자신이 말을 꺼낸 뒤에야 비로소 나왔다. 동물원 관객 중에 누군가가 해설자를 통해 지금까지 트랄파마도어에서 배운 것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빌리의 대답은 이랬다.
“한 행성의 모든 주민이 어떻게 이렇게 평화롭게 살 수 있는지요! 아시다시피, 나는 태초 이래 무의미한 살육에 열중해 온 행성에서 왔습니다. 내 나라 사람들이 급수탑에 넣고 산 채로 삶아 죽인 여학생들의 시체를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당시 자기들이 절대 악과 싸우고 있다는 긍지에 차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빌리는 드레스덴에서 삶아져 죽은 시체들을 보았다.
“그 뿐입니까? 나는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에는 삶아져 죽은 여학생들의 오빠와 아버지들이 살육한 인간들의 지방으로 만든 촛불로 밤을 밝혔습니다. 지구인들은 우주의 골칫거리임이 분명합니다! 다른 행성들이 지금은 무사하더라도 곧 지구 때문에 위험에 빠지게 될 겁니다. 그러니 내게 비결을 좀 가르쳐 주세요. 내가 지구로 가져가서 우리 모두를 구원할 수 있게요. 어떻게 한 행성이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까?”
빌리는 자기가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트랄파마도어인들이 작은 손을 쥐어 눈을 가리는 것을 보고는 당혹했다. 이제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그 몸짓이 무슨 뜻인지는 분명했다. 그가 바보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 이었다.
“제발- 말씀 좀 해 주세요?”
그는 몹시 풀이 죽어 안내원에게 말했다.
“내 말이 뭐가 그리 바보 같다는 거지요?”
“우린 우주가 어떻게 멸망할지 아는데-” 하고 안내원이 말했다. “지구는 그 일과 아무 관계가 없소. 지구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만 빼면.”
“어떻게- 우주가 멸망합니까?” 빌리가 말했다.
“우리가 날려 버리지. 비행접시에 쓸 새 연료를 실험하다가 말이오. 트랄파마도어의 시험 조종사 하나가 시동 버튼을 누르면 온 우주가 사라져 버리는 거요.”
그렇게 가는 거지.
“당신들은 그것을 알고 있으니까 예방할 방법도 있을 것 아니에요?” 빌리가 말했다. “그 조종사가 버튼을 누르지 못하게 할 수 없습니까?”
“그는 이제까지 늘 버튼을 눌렀고 앞으로도 늘 그럴 거요. 우리는 늘 그에게 그렇게 하게 했고, 앞으로도 늘 그럴 거요. 그 순간은 그런 식으로 되도록 만들어져 있으니까.”
“그렇다면-” 하고 빌리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구에서 전쟁을 예방한다는 생각도 어리석은 거군요.”
“물론이오.”
“하지만 이 행성은 평화롭잖아요?”
“오늘은 그렇소. 다른 날들은 당신이 보았거나 읽은 어떤 전쟁보다 잔혹한 전쟁을 벌이지. 우리가 전쟁에 대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그래서 우리는 그냥 전쟁을 보지 않을 뿐이오. 무시해 버리는 거지. 우리는 영원토록 즐거운 순간들만 보며 지내요. 오늘 동물원에서 처럼. 이 순간은 정말 멋지지 않소?”
“멋집니다.”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지구인들도 그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거요. 끔찍한 시간은 외면해 버리고 좋은 시간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오.”
커트 보네거트 지음/박웅희 옮김, 『제5도살장, 혹은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 죽음과 추는 의무적인 춤』, (아이필드, 2005), 138~141쪽
2012년 8월 9일 목요일
외계문명(?????)의 지혜
꽤 즐겁게 읽었던 소설의 한 토막.
2009년 1월 5일 월요일
Napoleon's Last Victory and the Emergence of Modern War - by Robert M. Epstein
Ladenijoa님이 트라헨베르크(Trachtenberg)계획에 대한 글을 써 주셔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대 나폴레옹 필살전법 - 트라헨베르크 플랜
약간 아쉬운 점 이라면 나폴레옹 전쟁 후기의 전투들이 1807년 이전의 전투들과 성격 면에서 크게 달라졌다는 점을 설명해 주셨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것 입니다. 1813년 뤼첸(Lützen)과 바우첸(Bautzen)에서 프랑스군은 수적으로 열세한 동맹군에 대해 거의 비슷하거나 더 많은 인명손실을 입으면서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1805년과 1806년에 오스트리아-러시아와 프로이센을 상대로 거둔 눈부신 승리들은 나폴레옹의 전성기 실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입니다. 나폴레옹은 저 두 전역에서 동맹군을 상대로 적의 주력을 섬멸하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서 외교적으로 크게 유리한 강화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807년의 아일라우(Eylau)전투를 시작으로 해서 프랑스군이 전장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우위는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809년의 바그람(Wagram)전투는 나폴레옹의 승리로 끝나기는 했지만 이제 프랑스군이 언제나 전술적으로 동맹군을 압도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그렇다면 1805년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동맹군이 전장에서 프랑스군과 거의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한 것일까요?
오늘 이야기 하고 자 하는 엡스타인(Robert M. Epstein)의 ‘Napoleon's Last Victory and the Emergence of Modern War’는 바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저작입니다. 저자인 엡스타인은 1809년의 바그람(Wagram)전투를 분석해 이 전역을 기점으로 나폴레옹 전쟁은 물론 근대전쟁의 성격도 변화했다고 주장합니다.
엡스타인이 주목하는 점은 이 전역에서 나폴레옹이 승리하기는 했지만 더 이상 결정적인 승리는 거두지 못했다는 점 입니다. 나폴레옹은 1805년과 1806년의 전역에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일방적인 대승리를 거두면서 외교적으로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두 전역에서 동맹군은 항상 결전장에서 프랑스군에게 주력이 격멸되는 참패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1809년 전역에서는 나폴레옹이 똑 같은 승리를 달성할 수 없었던 것 입니다.
엡스타인은 그 원인으로 1805년 이후 동맹군도 프랑스와 동일한 군제개혁에 성공한 점을 사례로 들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이 전역 이후로 프랑스를 모방한 군-군단-사단-여단으로 이어지는 지휘체계를 완성합니다. 러시아군은 1807년의 아일라우 전투 당시 불완전한 군단-사단체제로 전투에 참여했지만 1809년까지 전쟁을 준비할 기회가 있었던 오스트리아는 군단-사단체제로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을 실험할 기회가 1809년에 찾아옵니다.
※ 초기 프랑스군의 사단편제에 대해서는 예전에 글을 한 편 썼습니다.
-> 프랑스군의 사단편제 : 1763~1804
1809년 전역은 나폴레옹에게 있어서 자신의 적이 이전과는 크게 달라졌다는 점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바그람 전역의 초반인 아스페른-에슬링(Aspern-Essling)전투에서는 나폴레옹이 직접지휘하고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뒤이은 결전인 바그람 전투에서도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을 후퇴시키긴 하지만 수많은 인명피해를 내고도 적의 주력을 격멸하는데 실패하고 맙니다.
저자인 엡스타인은 1809년 전역이 본격적인 근대전쟁의 막을 열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전의 전역에서 나폴레옹은 한 차례의 전역에서 결전을 이끌어내 적을 무너뜨렸지만 1809년 전역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도 군단-사단 체제로 개편되면서 프랑스군이 과거에 누리던 전략적 기동의 우위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나폴레옹은 과거 한 개 군으로 편성되어 느리게 이동하던 적을 상대로 군단단위로 분산된 부대를 신속하게 전개해 전략적으로 포위, 결전으로 이끌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폴레옹의 적들도 군단단위로 기동하게 됨으로서 프랑스군의 이러한 기동성의 우위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군단단위로 넓은 전장에 산개해 이동함으로서 군단단위의 산발적인 교전의 가능성이 늘어나고 중앙의 사령부에서 전장을 통제하기가 더 어려워 졌습니다. 모든 장군들이 나폴레옹과 같은 천재일 수는 없었습니다. 1813년의 독일전역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시작된 근대적 전쟁의 여러 측면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프랑스군과 동맹군은 단 한차례의 결전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 졌습니다. 나폴레옹은 여전히 뤼첸, 바우첸, 그리고 드레스덴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어느 것도 결정적인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결전을 기대하면서 라이프치히에서 동맹군과 싸웠지만 이 전투는 양측 모두에 끔찍한 인명손실을 입힌 소모전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1813~14년의 전역에서 나폴레옹은 계속해서 전술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프랑스군은 점진적으로 소모되어 갔으며 이것은 나폴레옹의 전략적 패배로 이어집니다.
저자인 엡스타인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창조했지만 이해할 수 는 없었던 전쟁의 역동성에 의해 타도된 것이다.”
분량도 많지 않고 재미있게 쓰여져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근대 이후의 전쟁사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은 한번 읽어 보시길 추천합니다.
대 나폴레옹 필살전법 - 트라헨베르크 플랜
약간 아쉬운 점 이라면 나폴레옹 전쟁 후기의 전투들이 1807년 이전의 전투들과 성격 면에서 크게 달라졌다는 점을 설명해 주셨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것 입니다. 1813년 뤼첸(Lützen)과 바우첸(Bautzen)에서 프랑스군은 수적으로 열세한 동맹군에 대해 거의 비슷하거나 더 많은 인명손실을 입으면서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1805년과 1806년에 오스트리아-러시아와 프로이센을 상대로 거둔 눈부신 승리들은 나폴레옹의 전성기 실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입니다. 나폴레옹은 저 두 전역에서 동맹군을 상대로 적의 주력을 섬멸하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서 외교적으로 크게 유리한 강화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807년의 아일라우(Eylau)전투를 시작으로 해서 프랑스군이 전장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우위는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809년의 바그람(Wagram)전투는 나폴레옹의 승리로 끝나기는 했지만 이제 프랑스군이 언제나 전술적으로 동맹군을 압도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그렇다면 1805년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동맹군이 전장에서 프랑스군과 거의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한 것일까요?
오늘 이야기 하고 자 하는 엡스타인(Robert M. Epstein)의 ‘Napoleon's Last Victory and the Emergence of Modern War’는 바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저작입니다. 저자인 엡스타인은 1809년의 바그람(Wagram)전투를 분석해 이 전역을 기점으로 나폴레옹 전쟁은 물론 근대전쟁의 성격도 변화했다고 주장합니다.
엡스타인이 주목하는 점은 이 전역에서 나폴레옹이 승리하기는 했지만 더 이상 결정적인 승리는 거두지 못했다는 점 입니다. 나폴레옹은 1805년과 1806년의 전역에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일방적인 대승리를 거두면서 외교적으로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두 전역에서 동맹군은 항상 결전장에서 프랑스군에게 주력이 격멸되는 참패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1809년 전역에서는 나폴레옹이 똑 같은 승리를 달성할 수 없었던 것 입니다.
엡스타인은 그 원인으로 1805년 이후 동맹군도 프랑스와 동일한 군제개혁에 성공한 점을 사례로 들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이 전역 이후로 프랑스를 모방한 군-군단-사단-여단으로 이어지는 지휘체계를 완성합니다. 러시아군은 1807년의 아일라우 전투 당시 불완전한 군단-사단체제로 전투에 참여했지만 1809년까지 전쟁을 준비할 기회가 있었던 오스트리아는 군단-사단체제로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을 실험할 기회가 1809년에 찾아옵니다.
※ 초기 프랑스군의 사단편제에 대해서는 예전에 글을 한 편 썼습니다.
-> 프랑스군의 사단편제 : 1763~1804
1809년 전역은 나폴레옹에게 있어서 자신의 적이 이전과는 크게 달라졌다는 점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바그람 전역의 초반인 아스페른-에슬링(Aspern-Essling)전투에서는 나폴레옹이 직접지휘하고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뒤이은 결전인 바그람 전투에서도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을 후퇴시키긴 하지만 수많은 인명피해를 내고도 적의 주력을 격멸하는데 실패하고 맙니다.
저자인 엡스타인은 1809년 전역이 본격적인 근대전쟁의 막을 열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전의 전역에서 나폴레옹은 한 차례의 전역에서 결전을 이끌어내 적을 무너뜨렸지만 1809년 전역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도 군단-사단 체제로 개편되면서 프랑스군이 과거에 누리던 전략적 기동의 우위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나폴레옹은 과거 한 개 군으로 편성되어 느리게 이동하던 적을 상대로 군단단위로 분산된 부대를 신속하게 전개해 전략적으로 포위, 결전으로 이끌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폴레옹의 적들도 군단단위로 기동하게 됨으로서 프랑스군의 이러한 기동성의 우위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군단단위로 넓은 전장에 산개해 이동함으로서 군단단위의 산발적인 교전의 가능성이 늘어나고 중앙의 사령부에서 전장을 통제하기가 더 어려워 졌습니다. 모든 장군들이 나폴레옹과 같은 천재일 수는 없었습니다. 1813년의 독일전역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시작된 근대적 전쟁의 여러 측면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프랑스군과 동맹군은 단 한차례의 결전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 졌습니다. 나폴레옹은 여전히 뤼첸, 바우첸, 그리고 드레스덴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어느 것도 결정적인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결전을 기대하면서 라이프치히에서 동맹군과 싸웠지만 이 전투는 양측 모두에 끔찍한 인명손실을 입힌 소모전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1813~14년의 전역에서 나폴레옹은 계속해서 전술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프랑스군은 점진적으로 소모되어 갔으며 이것은 나폴레옹의 전략적 패배로 이어집니다.
저자인 엡스타인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창조했지만 이해할 수 는 없었던 전쟁의 역동성에 의해 타도된 것이다.”
분량도 많지 않고 재미있게 쓰여져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근대 이후의 전쟁사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은 한번 읽어 보시길 추천합니다.
2008년 3월 24일 월요일
드레스덴
베를린에서 하루를 묵은 뒤 다음날인 일요일은 드레스덴으로 향했습니다. 드레스덴 가는 IC에서 치즈와 빵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때웠습니다. 드레스덴은 예전에 프라하에 놀러갈 때 시간이 없어 잠깐 들러 점심만 먹었던 곳 입니다. 물론 이번 여행에서도 시간이 별로 없어 구시가지 일부만 날림으로 구경해 아주 아쉬웠습니다.
이게 볼품없어 보여도 예상외로 맛있었습니다
창밖 경치를 감상하며 잡생각을 하다 보니 금방 드레스덴역에 도착했습니다.
어차피 드레스덴 중앙역에서 구시가지까지는 거리가 얼마 안되기 때문에 걸어갔습니다. 가는 길에 드레스덴 시청이 있더군요.
시청 앞에는 사회주의의 흔적이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시청에서 조금 더 가니 테아터플라츠(Theaterplatz)가 나옵니다.
작센의 국왕 요한의 동상
젬퍼오페라하우스(Semperoper)
오페라까지 볼 시간은 없어서 바로 쯔빙어 궁으로 들어갔습니다. 쯔빙어 궁에는 아주 좋은 볼거리가 두개 있지요.
하나는 미술관이고
다른 하나는 무기 박물관 입니다.
일단 미술관 부터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미술관은 그림이 많아 사진촬영이 허가되지 않았기 때문에 찍은게 없습니다. 대신 원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 많아 시간을 여기서 엄청나게 잡아먹었습니다. 돈내고 들어간 것이다 보니 전시된 그림을 모두 구경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더군요.
기껏 찍은 거라곤 이런 사진 정도입니다. 이곳을 구경했다는 생색내기용이죠. 중간에 지난 2002년 대홍수로 손상된 그림들을 복구하는 과정을 전시해 놓은 것도 있었는데 꽤 재미있었습니다. 물론 경비원이 옆에서 감시하고 있어 사진은 못 찍었습니다.
잠깐 창 밖을 내다봤습니다. 겨울이라 썰렁해 보이더군요.
사진은 못건지고 시간만 잡아먹은 미술관 다음으로는 무기박물관을 구경했습니다. 미술관에서 끊은 표로 이곳도 함께 구경할 수 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무기박물관은 돈을 내면 사진촬영이 허가가 됐습니다.
아. 역시! 돈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전시실을 가득메운 15~17세기의 화려한 갑옷들!
이 갑옷은 유일하게 바보같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도검, 총기류 등 다양한 무기들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다양한 수발총이 전시되어 있어 좋더군요. 문제는 쓸만한 사진을 제대로 못 건졌다는 것 입니다.
오스만 투르크군의 개인화기와 군장류
그러나 역시 기사의 갑옷은 말갑옷과 한 세트여야 뽀대가 나지요.
개인적으로 가장 멋졌던 전시물입니다
무기박물관을 구경한 뒤 궁의 안뜰을 구경하고 나왔습니다.
다시 테아터플라츠로 돌아나와서 시내 구경을 시작했습니다.
Hofkirche
드레스덴 투어버스. 이게 너무 타고 싶었으나 돈이 없어서...
중간에 왠 발굴현장이 하나 있더군요. 규모가 제법 큰 발굴현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모교회(Frauenkirche) 까지 도착하니 슬슬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우. 한시간만 더 일찍 일어날것을!
성모교회는 1945년 공습의 흔적이 아주 잘 남아있었습니다. 복원한 부분과 공습에서 남은 부분이 뚜렷이 구분되지요.
1945년의 대공습으로 파괴된 성모교회의 잔해
유럽을 피바다로 몰아넣으신 루터선생...
겨울이라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니 바로 어둠이 깔렸습니다. 당장 다음날은 함부르크로 떠날 계획이라 어쩔수 없이 이 멋진 도시를 떠야 했습니다.
중앙역에 도착하니 밤이 됐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베를린행 기차가 연착되어 잠시 역에서 머무르며 군것질을 할 수 있었습니다.
창밖 경치를 감상하며 잡생각을 하다 보니 금방 드레스덴역에 도착했습니다.
어차피 드레스덴 중앙역에서 구시가지까지는 거리가 얼마 안되기 때문에 걸어갔습니다. 가는 길에 드레스덴 시청이 있더군요.
시청 앞에는 사회주의의 흔적이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시청에서 조금 더 가니 테아터플라츠(Theaterplatz)가 나옵니다.
오페라까지 볼 시간은 없어서 바로 쯔빙어 궁으로 들어갔습니다. 쯔빙어 궁에는 아주 좋은 볼거리가 두개 있지요.
하나는 미술관이고
다른 하나는 무기 박물관 입니다.
일단 미술관 부터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미술관은 그림이 많아 사진촬영이 허가되지 않았기 때문에 찍은게 없습니다. 대신 원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 많아 시간을 여기서 엄청나게 잡아먹었습니다. 돈내고 들어간 것이다 보니 전시된 그림을 모두 구경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더군요.
기껏 찍은 거라곤 이런 사진 정도입니다. 이곳을 구경했다는 생색내기용이죠. 중간에 지난 2002년 대홍수로 손상된 그림들을 복구하는 과정을 전시해 놓은 것도 있었는데 꽤 재미있었습니다. 물론 경비원이 옆에서 감시하고 있어 사진은 못 찍었습니다.
잠깐 창 밖을 내다봤습니다. 겨울이라 썰렁해 보이더군요.
사진은 못건지고 시간만 잡아먹은 미술관 다음으로는 무기박물관을 구경했습니다. 미술관에서 끊은 표로 이곳도 함께 구경할 수 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무기박물관은 돈을 내면 사진촬영이 허가가 됐습니다.
아. 역시! 돈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전시실을 가득메운 15~17세기의 화려한 갑옷들!
그리고 도검, 총기류 등 다양한 무기들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다양한 수발총이 전시되어 있어 좋더군요. 문제는 쓸만한 사진을 제대로 못 건졌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역시 기사의 갑옷은 말갑옷과 한 세트여야 뽀대가 나지요.
무기박물관을 구경한 뒤 궁의 안뜰을 구경하고 나왔습니다.
다시 테아터플라츠로 돌아나와서 시내 구경을 시작했습니다.
중간에 왠 발굴현장이 하나 있더군요. 규모가 제법 큰 발굴현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모교회(Frauenkirche) 까지 도착하니 슬슬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우. 한시간만 더 일찍 일어날것을!
성모교회는 1945년 공습의 흔적이 아주 잘 남아있었습니다. 복원한 부분과 공습에서 남은 부분이 뚜렷이 구분되지요.
겨울이라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니 바로 어둠이 깔렸습니다. 당장 다음날은 함부르크로 떠날 계획이라 어쩔수 없이 이 멋진 도시를 떠야 했습니다.
중앙역에 도착하니 밤이 됐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베를린행 기차가 연착되어 잠시 역에서 머무르며 군것질을 할 수 있었습니다.
2007년 4월 17일 화요일
1주일 전에 커트 보네것이 사망했었군요
회원으로 가입한 어느 북클럽의 뉴스레터를 받고야 커트 보네것이 1주일 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Kurt Vonnegut dies at 84
이상하게도 요 몇달 동안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세상을 뜨고 있습니다. 부흐하임도 그렇고.
보네것을 추모(?)하기 위해서 제 5도살장을 다시 읽어 볼까 생각중입니다.
Kurt Vonnegut dies at 84
이상하게도 요 몇달 동안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세상을 뜨고 있습니다. 부흐하임도 그렇고.
보네것을 추모(?)하기 위해서 제 5도살장을 다시 읽어 볼까 생각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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