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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6일 금요일

[번역글] 문서보관소의 전투- 러시아의 감춰진 과거를 밝히다

이 글은 작년(2016) 3월 24일 모스크바 타임즈에 실린 피터 홉슨Peter HobsonBattle in the Archives - Uncovering Russia's Secret Past 를 번역한 것 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글이 있었다는걸 너무 늦게 알아서 아쉽습니다. 러시아인들에게 만연한 스탈린 시대에 대한 향수에 대한 비판은 한국 사회에도 어느 정도 시사점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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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보관소의 전투- 러시아의 감춰진 과거를 밝히다

피터 홉슨

1941년, 나치의 기갑사단들은 독일에서 수백마일 떨어진 곳에서 갓 얼어붙은 땅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 육박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공세는 일련의 격렬한 전투 끝에 돈좌됐다. 붉은군대 제316소총병사단의 장병 28명은 독일군의 전차 18대를 격파해 나치의 진격을 좌절시키는데 공헌했지만 모두 산화했고 이 소식은 널리 퍼져나갔다. ‘판필로프의 28인의 근위병’ 이야기는 소련의 상징이 됐다. 소련 전역에서 이들을 기리기 위해 거리의 이름을 바꾸고, 기념물을 세웠다. 이들의 이야기는 모스크바시의 시가市歌에도 실렸다. 학교에서는 아동들에게 근위병 28인의 이름을 가르쳤다.

그런데 작년(2015)에 판필로프의 28인의 근위병 이야기가 논쟁의 대상이 됐다.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장을 오랫동안 지낸 세르게이 미로넨코는 이 이야기가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근거가 되는 문서를 공개했다. 공개된 문서는 28인의 영웅담이 종군기자에 의해 조작된 것임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소련 정부는 사실을 은폐하고 증거를 감추었다. 이 사실이 공개되자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으며 러시아 문화부장관 블라디미르 메딘스키는 미로넨코를 비난했다. 그는 미로넨코가 문서를 주의해서 다뤘어야 하며, 해석은 다른 사람들의 몫이라고 주장했다. 3월 중순에 미로넨코는 좌천됐다. 올해 65세의 미로넨코는 모스크바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직위 변경을 원한 것은 본인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로넨코의 동료들은 분개했다. 이들은 미로넨코가 정부의 새로운 역사관의 희생양이며, 문화부장관 메딘스키는 정부의 역사관을 옹호한다고 주장한다.

진실이 무엇이건간에 미로넨코의 사임은 한 시대의 끝을 상징한다. 그가 국립문서보관소에서 근무한 24년은 러시아 현대사를 관통한다. 그가 근무하기 시작했을때는 소련 전역에서 개방의 물결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은퇴하는 현재는 국수적이고 권위적인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와 소련 역사에 있어 불편한 진실을 은폐하려한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자유화

미로넨코는 모스크바의 소련 과학아카데미의 역사학자로 있으면서 소련의 붕괴를 목격했다. 그는 낡은 이상에 교조적으로 얽매인 맑시스트 동료들이 얼마나 지루한 사람들이었는지 회고했다. 미로넨코는 이 낡은 사상이 붕괴되는 것을 목격했다. 반체제 성향의 인사들은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이용해 사회의 움직임을 주도하려 했으며 공산당 관료들이 숨기고 있는 비밀들을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 미로넨코는 정권의 검열 체계가 점진적으로 와해되는 것을 목격했다. 수십년간 검열의 대상이었던 책들이 출간되었으며 국민들은 스탈린의 탄압과 수용소의 실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1991년 8월 공산주의 강경파의 쿠데타가 실패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움직였다. 보리스 옐친이 집권하자 완전한 투명성이 러시아의 새로운 시대정신이 되었다. KGB와 공산당이 권력을 잃고 소련의 모든 체제가 총체적으로 무너져내리면서 방대한 양의 문헌을 남겼다. 동시에 정부는 과도한 기밀 유지를 폐지하고 문헌을 열람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했다. 대중들은 지식을 원했고 미로넨코는 그것을 제공하는 일을 맡았다. 미로넨코는 1992년 새로운 러시아의 국립문서보관소장이 됐다. 그는 최대한 많은 정보를 대중에게 제공하려고 노력했으며, 언론과 긴밀히 협력하는 한편 수많은 전시회를 기획하고 새롭게 공개되는 문서 목록을 작성했다. 또한 사료에 기반한 수백편의 짧은 TV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핵심은 러시아인들이 ‘팩트’를 직접 대면하도록 하는 것 이었다. “해설보다는 더 많은 문서를 제공하는 것 이었습니다.” 미로넨코는 이렇게 회고했다. “사료가 직접 이야기하도록 하자는 것이죠.” 그는 대대적인 문헌 공개를 감독했다. 1992년 당시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는 자료의 40%가 기밀로 분류되어 있었다. 1993년 한해에만 30여만건의 문서가 기밀해제됐다. 미로넨코는 그것을 ‘문서보관소의 혁명’이라고 불렀다.


제약

그러나 기밀을 해제한다는것은 말이 쉬웠지 실행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한가지 문제는 기밀해제가 정부 고위층에 의해 시작됐다는 점이었다. 1990년대 초에 생산된지 30년이 넘은 문서는 모두 기밀해제하라는 법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절차는 자동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역사가 니키타 페트로프는 이렇게 회고했다. “문헌을 공개하기 전에 수백만건에 달하는 문서들에 전문가 검토와 의견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그 문서를 생산한 부서나 소장하고 있는 부서의 의견을 반영해야 했다. 해당 부서들은 기밀을 유지하는 쪽을 선호했는데, 기밀 정보를 다룰 경우 보너스를 받았기 때문이다. 페트로프는 “정부의 의견을 반영하는 전문가들과 계속해서 싸워야 했습니다. 이들은 전반적으로 문서 공개에 소극적이었으니까요.”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문서 공개 규정이 까다로워지기 시작했다. 1993년에 더 까다로운 기밀해제 절차가 도입되었다. 기존에는 문서보관소의 직권으로 기밀해제를 결정할 수 있었다. 1996년에 ‘국가기밀 수호를 위한 위원회’가 기밀해제를 담당하게 됐다. 이 기구의 명칭은 국가의 방침이 변화했음을 보여주었다. 페트로프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 위원회는 현재 기밀로 분류된 것들을 책임졌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기밀들은 공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위원회는 기밀해제를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한편, 일부 국가 기관들은 기밀해제를 거부했다. 옐친은 러시아의 모든 문서보관소를 국립문서보관소의 미로넨코가 관할하도록 했지만 러시아 외무부와 국방부, 그리고 KGB의 후신인 연방보안국은 예외가 되었다. 이들 기관들은 1990년대 초반에 약간의 자료만 이관한 뒤 1990년대 중반이 되자 문서 공개를 중단했다. 기밀해제에 대한 저항이 강해지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적인 기반이 등장했다. 관계자들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알아야 할 역사는 어떠한 것인가? 영웅적인 이야기인가 아니면 범죄로 가득한 이야기들인가?


이데올로기

옐친 행정부는 이런 문제제기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페트로프에 따르면 1990년대에 권력을 잡았던 자유주의자들은 이 논쟁의 승자가 자신들이라고 생각했다. 러시아의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와 개방의 가치에 대해 스스로 내린 결론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은 틀렸다. 옐친 시대의 혼란과 경제적 궁핍은 민주주의와 러시아 정부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 역사가 알렉세이 마카로프는 러시아인들이 이미 1990년대 초반에 역사적 진실에 대해 진절머리를 냈다고 회고했다. 역사가와 대중을 연결하는 언론인들은 점차 과거사 문제에 대해 침묵하기 시작했다. 공산당 시대의 범죄에 대한 면죄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소련의 과거에 대한 진실이 사라진 자리를 신화와 소련에 대한 향수가 채우려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2000년에 집권하자마자 변화된 분위기를 이용하려 했다. 페트로프는 “러시아 정부는 돌연 러시아와 소련은 역사의 밝은면과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으니 굳이 어두운 면을 부각할 필요는 없다고 선언했습니다.”고 말했다. 역사의 밝은면에 대한 답은 빨리 나왔다. 러시아의 상징으로서, 그리고 소련에 대한 정당화의 일환으로 나치에 맞선 영웅적인 투쟁의 이야기가 다시 힘을 얻었다. 판필로프의 근위대원 이야기 같은 것들이 다시 힘을 얻었다. 스탈린이 나치의 기습 공격을 예측하는데 실패한 것이나, 소련이 히틀러와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것, 그리고 붉은군대가 동유럽에서 저지른 폭력 같은 것은 은폐되었다.

정치인이자 대중 역사서적 저술가였던 블라디미르 메딘스키가 2012년 문화부장관에 임명됐다. 페트로프는 메딘스키의 문화부장관 임명은 반계몽주의의 정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역사가 아스콜드 이반칙은 메딘스키의 역사관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메딘스키는 민간단체인 ‘개방된 러시아’가 주최한 좌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적 진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조국전쟁 당시의 영웅적 행위들을 교회에서 성인들의 삶을 가르치는 것 처럼 대해야 합니다.”

메딘스키는 예산 지원과 발언의 수위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러시아의 예술과 문화, 역사학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메딘스키 휘하의 문화부는 영웅들을 다룬 영화와 전시회가 꾸준히 나오도록 예산을 지원하고 여러가지 후원을 했다. 이러한 것들은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루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지난해에 개봉할 예정이었던 판필로프의 28인의 근위병 이야기였다. 마카로프는 정부의 전략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정부당국이 영광된 역사에 매달리는 이유는 이것 말고는 의존할게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수호하기

역사에 대한 무관심은 비밀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완벽한 환경이다. 대중이 실질적으로 압력을 가하지 않는한 정부 당국은 앞으로도 자료 공개를 막을 것이다.
현재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의 소장 자료중 ‘비밀’로 분류된 것은 5퍼센트에 불과하다. 미로넨코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에서 4~5퍼센트라고 한다. 하지만 국방 및 안보 관계 기관이 소장하고 있는 기밀문서들은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문서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수조자 없다.

30년이 지난 문서를 자동적으로 기밀해제하는 법령은 밥먹듯이 무시된다. 자료 공개를 위한 싸움은 법정으로 옮겨갔지만 관계 기관들은 자료 공개를 거부하기가 일수다. 페트로프는 1940년대 후반에 생산된 문서중 국가 기밀이 아니거나 자료명이 없는 것들을 공개하라는 소송을 냈으나 2010년에 패소했다. 페트로프는 정부 당국이 그들의 정보 통제를 제약하는 선례를 남기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한다.
정보 기구들은 역사적인 문서들이 보복 공격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여지껏 없었다. 마카로프에 따르면 이들 기관들은 과거의 문서에도 현재 사용되는 방식이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이것은 참으로 괴상한 주장이다. 그렇다면 현재 러시아의 보안조직들이 여전히 스탈린의 비밀경찰 NKVD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운영된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소련의 역사는 부분적으로 모호한 부분이 많다. 공산정권 시기의 대외정책의 전모는 여전히 국가 기밀이다. 소련의 정보 조직을 연구하는 페트로프에 따르면 특히 20세기 초~중반에 서구 제국주의 질서를 타도하기 위해 이루어진 사보타지와 체제 전복 공작에 관한 정보가 특히 비공개라고 한다. 러시아 정부는 검열을 통해 공산당이 중동과 라틴 아메리카의 테러 조직을 지원한 사실과, 붉은군대가 나치를 물리치면서 동유럽을 장악한 과정에 관한 정보를 차단하고 있다.
역사가들은 아직도 1940년 카틴에서 2만명의 폴란드 장교들을 학살한 사건의 개요 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1990년에 수행한 카틴 학살에 대한 조사 자료를 2004년에 다시 기밀로 분류했고, 학살 피해자들의 개인 정보 공개도 중지했다. 러시아 정부가 이러는 이유가 프로파간다 목적 때문인지, 아니면 책임 소재를 밝히지 않으려는 것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가 정보를 완전히 공개할 생각이 없는 것은 확실하다.

결국 판필로프의 28인의 근위병 이야기로 돌아가게 된다. 페트로프는 “러시아도 변해가고 지배 엘리트들의 시각도 변해갑니다. 하지만 미로넨코만은 변하지 않았지요”라고 말했다. 현재 미로넨코는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의 연구과장이다. 역사적인 기록물을 널리 공개하려는 그의 열정은 여전하다. 사실 미로넨코는 여전히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더 많은 문서들을 공개하고 있다. 최근 미로넨코는 스탈린에 관한 단행본과 나치에 협력한 부역자들에 대한 단행본을 내놓았다. 미로넨코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사람들의 관점은 다양합니다. 이 다양한 관점들을 모두 침울한 색깔로 물들일 수는 없지요. ”

하지만 여전히 러시아 사회의 일각에서는 자국의 역사를 외면하려는 경향이 있다. 미로넨코는 이 문제점을 이렇게 분석한다. “예를들어 스탈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핵심은 사람들이 스탈린에 대해 모르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 당시를 잊으려 한다는 것이죠. 스탈린을 옹호하는 것은 항의하는 목소리입니다. 부정부패와 공정하지 못한 사법부, 관료제에 항의하는 것이죠. 사람들은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만약 스탈린이 지금 살아있다면 너희 썅놈의 새끼들에게 본때를 보여줄텐데!”

그는 잘못된 세계관을 비판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코메르산트의 기자 한명은 미로넨코를 인터뷰하면서 자신은 판필로프의 근위대원들을 영웅으로 생각하면서 자라왔으며 지금에 와서 견해를 바꾸기는 싫다고 말했다. 미로넨코는 딱 잘라 이야기 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여기 사료가 뒷받침 하는 역사적 진실이 있습니다. 나머지는 심리학자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죠.”

2012년 10월 13일 토요일

후지사키 이치히로 주미일본대사의 강연을 갔다 왔습니다

어제는 NARA에 가지 않고 브루킹스 재단에서 주최하는 주미일본대사 후지사키 이치히로(藤崎 一郎)의 강연을 갔다 왔습니다. 영어 공부도 할 겸, 현재 시끄러운 현안에 대한 일본 외교관의 입장은 어떤가 들어볼 겸 갔는데 생각보다는 조금 심심한 강연이었습니다.

후지사키 이치히로(藤崎 一郎) 주미일본대사

강연제목은 Japan in Asia였습니다. 좀 모범답안 같은 분위기를 풍기긴 했습니다.

후지사키 대사는 주로 경제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점은 일본경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현재 서구에서 바라보는 것 처럼 심각한 위기는 아니라는 것 이었습니다. 일본대사는 현재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미국과 독일의 리더쉽 부재를 일본에 빗댄 이코노미스트를 가지고 가벼운 농담을 던지면서 일본경제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직업외교관 답게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더군요.

"오바하지 맙시다."
다음으로는 에너지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지난 후쿠시마 참사 이후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의존을 줄이려는 노력이 진행중이며 앞으로 성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이야기 했습니다.

원래 기대했던 센카쿠 문제라던가 과거사문제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이야기가 없었고 오키나와의 미군 재배치 문제에 대해서도 일본정부의 공식입장을 대변하는 모범답안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도 미군 재배치 문제는 나름 재미있더군요. 오키나와의 미군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지역의 안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요지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현재 골치가 아픈 후텐마 기지 문제도 간략하게 언급을 했는데 메모를 해 놓지 않아서 기억이 정확하지가 않네요;;;;

나름 재미있었던 부분은 현재 일본 청년들의 도전 정신의 부족을 질타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이건 무슨 일본판 20대 XXX론인가 싶었는데 일본 청년들이 일본에 만족하여 더 큰 세상에 도전하려는 성향이 없다는 이야기 였습니다. 일본 청년들의 시야가 일본 안으로 좁아지는 것에 대한 우려라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일본인들의 평균적인 영어 능력 부족에 대해서도 우려했습니다. 일본의 외국어 교육은 실패했다는;;;; 이 이야기를 듣고 있다보니 제 짧은 영어 실력이 생각나서 민망하더군요.

일본대사의 연설이 끝난뒤 사회자의 정리가 있고나서 방청석의 질문이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많이 제기된 질문은 센카쿠 문제였습니다. 홍콩에서 온 중국인 한명과 타이완 인 두명이 센카쿠 문제를 제기했는데 일본대사는 당연히 일본정부의 공식입장을 설명하고 끝냈습니다. 다소 귀찮아 한다는 느낌도 들더군요. 그리고 필리핀인으로 생각되는 여성 한명이 일본의 군사력을 "억제(Deterrence)"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느냐는 요지로 질문을 했는데 일본대사는 일본의 군사력은 어디까지나 "방어"를 위한 것이지 억제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답변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 유학생 한명이 위안부 문제와 과거사 문제를 제기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일본정부가 아시아여성기금을 만드는 등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 왔음을 강조하는 판에 박힌 답변을 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심심한 강연이었지만 직업외교관의 태도나 화술을 구경하는 재미는 있었습니다. 특히 민감한 질문에 대해서 자신은 정책입안자가 아니라 옵저버의 위치에 있다고 전제하면서 답변하는게 기억에 남는군요.

2007년 6월 24일 일요일

Die Schlacht bei Tannenberg 1914

한달 반 만에 집에 내려와서 그 동안 주문했던 책 들을 정리하는 중 입니다.

이번에 온 놈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놈은 Melchior Verlag에서 출간한 Die Schlacht bei Tannenberg 1914 입니다. 이 책은 1927~1930년에 Gerhard Stalling 출판사에서 Schlachten des Weltkrieges 시리즈로 나온 책 중 하나입니다. 저는 이 책을 1차대전을 다룬 다른 책 들의 각주나 참고문헌 목록에서만 보다가 Melchior에서 이 시리즈를 다시 출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시험삼아 먼저 탄넨베르크 전투를 주문했습니다. 탄넨베르크 전투에 대해서는 D. Showalter의 꽤 재미있는 책이 있긴 하지만 1차 대전이 끝난지 얼마 안된 시점의 독일인들의 시각도 매우 궁금하더군요.

이 책을 훑어 보니 좋은 점과 난감한 점이 하나씩 있습니다.

먼저 좋은 점은 책에 들어 있는 15개의 지도가 모두 낱장으로 분리되어 스캔하기 편하다는 점 입니다.

난감한 점 이라면 본문의 활자체 까지 1927년판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 입니다. 즉 우리가 흔히 보는 활자체가 아니라 Blackletter, 즉 고딕폰트로 되어 있다는 것 입니다. 저는 이런 활자체는 별로 익숙치 않아서 읽기가 난감하더군요.

책 자체가 1927년판을 그대로 다시 만들어서 그런지 펜화로 된 삽화가 많이 들어 있는데 꽤 마음에 듭니다. 물론 당시의 사진자료들도 꽤 많이 실려있습니다.

이 출판사의 사이트에 들어가서 보니 다른 시리즈들은 분량이 150~200쪽 정도로 내용이 다소 빈약해 보입니다. 일단 이 책을 한번 읽어 보고 나서 나머지 시리즈들을 구매할지 생각해 봐야 겠습니다.

※ 이번에 도착한 책 중에서는 이 것 외에 Daniel Niemetz의 Das feldgraue Erbe도 꽤 흥미있어 보입니다. 독일 국방군이 동독군에 끼친 인적 유산에 대해 다룬 책인데 과거 청산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한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독일의 사례는 어떨까 싶어 산 책 입니다. 대충 훑어 보니 1970년대 초반까지는 국방군 출신의 부사관 계층이 동독군 내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군요.

※ 잠시 TV를 보니 故 이은주씨가 나오는 영화를 해 주는군요. 목소리만 빼면 아주 멋진 배우인데 참 아깝게 일찍 갔습니다.

2006년 8월 14일 월요일

귄터 그라스의 인터뷰

귄터 그라스가 Frankfurter Allgemeiner Zeitung을 통해 자신이 전쟁 말기에 무장친위대 대원으로 복무했다는 사실을 밝히자 세상이 조금 시끄러워졌다.

이게 8월 11일자 기사이니 한참 뒷북은 뒷북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귄터 그라스가 무장친위대 대원이었다는 이야기 가지고 시끄러운게 많으니 한번 올려본다.

번역이 엉망이고 문장이 투박해서 읽으시는 분들의 양해를 먼저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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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60년이 지나서야 침묵을 깼는가?

2006년 8월 11일

귄터 그라스가 60년 만에 최초로 자신이 무장 친위대(Waffen SS) 대원이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는 15세에 잠수함 승무원에 지원했었으며 17세에는 노동봉사단으로 “소집(einberufen)” 됐다가 무장친위대 “프룬츠베르크” 사단으로 입대하게 됐다. 그라스는 9월에 출간될 자신의 회고록 “양파 껍질을 벗길 때(Beim Hauten der Zwiebel)”에서 단치히에서 보낸 유년기와 목숨을 잃을 뻔 했던 군인으로 보낸 전쟁 막바지 기간, 그리고 포로 시기와 전쟁 직후의 혼란기에 대해 이야기 할 예정이다.

-회고록의 제목이 “양파 껍질을 벗길 때” 입니다. 여기서 양파란 무엇을 뜻하는 건가요?

이번 회고록을 어떤 식으로 쓸 것인지 결정해야 했는데 이건 매우 어려운 일 이었습니다. 우리의 기억과 자화상은 왜곡될 가능성이 있고 실제로 왜곡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까요. 우리는 과거의 경험에 대해 변명하고, 미화하며, 하나의 일화로 치부하려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진실성에 대한 의문은 모든 문학적 회고록이 안고 있는 문제인데 나는 이런 문제들을 드러내고 밝히는 형식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양파라는 비유를 들었습니다. 마치 양파의 껍질을 벗기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껍질이 나오 듯 글을 쓸 때 계속해서 문장이 이어지면 그 의미가 다소 명확하고 읽을 만 해 지지만 결국 생동감은 잃게 됩니다.

-회고록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나는 회고록에 대해 이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회고록을 쓰기에 앞서 시작의 어려움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대부분의 회고록들은 독자들이 한 가지 사실이 그랬고 다른 것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믿게 하려고 합니다. 나에게 있어 형식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솔직하게 서술하고 싶습니다.

-이번 회고록은 유년기부터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이야기 대신 전쟁이 발발한 열 두 살 되던 때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시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2차 세계대전은 요점(Drehpunkt)이자 핵심(Angelpunkt) 입니다. 전쟁의 발발로 제 가족도 외부의 문제에 휩쓸리게 됐기 때문에 2차 대전은 제 유년기의 끝을 알리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삼촌은 폴란드의 우체국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발발하자 연락이 끊어졌고 다시는 사촌들과 만날 수 없게 됐습니다. 나중에 듣기로는 즉결재판으로 처형 됐다고 하더군요.
제 어머니의 외가인 카슈브계(Kaschubish) 친척들은 전쟁 이전만 해도 자주 왕래가 있었는데 갑자기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처음으로 외할머니가 우리를 찿아 오셨는데 농장에서 어떤 물건을 가져 오셨고 우리집에서 석유를 얻어 가셨죠. 물자가 부족해져서 외할머니가 계신 곳에서는 석유를 구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가족간의 유대는 더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제 부모님은 나중에는 현실에 맞춰 그때 그때의 실정에 맞춰 생활해야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의 기억과 성향을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찾고 있습니다. 회고록을 쓰는데 도움이 된 가족들의 자료는 없습니까?

저는 피난민 꼬마(Flüchtlingskind) – 저는 이제 80대를 바라보는 나이 이지만 아직도 스스로를 이렇게 부릅니다 – 이기 때문에 그런 물건이 없습니다. 제 책에서 보덴제, 아니면 뉘른베르크 출신인 친구들이 여전히 졸업증명서와 그들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저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지금 남은 것은 제 어머니가 보관하신 사진 몇 장이 고작 입니다. 또 저는 나에게 유리한 이야기를 할 때에도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선생님이 전쟁 중 잃어 버린 유년기의 물건 중에는 처음으로 쓴 소설의 원고도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네, 그 소설은 신성로마제국의 제위가 공석이었던 13세기의 대공위시대(Interregnums)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소설 이었습니다. 그 소설은 중세의 비밀 재판,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몰락, 죽음과 혼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 소설에서 제가 창조한 가공의 인물들은 1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두 죽습니다. 다시는 등장하지 않지요. 그렇지만 저는 이 소설을 쓰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 뒤로 등장인물들을 효율적으로 쓰게 됐습니다. 툴라 포크립케(Tulla Pokriefke)와 오스카 마체라트(Oskar Matzerath)는 처음 등장한 소설에서도 살아 남고 그 뒤에 쓴 소설에도 등장하지요.

-선생님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쉬라흐(Baldur von Schirachs)의 진술을 듣고 나서야 독일의 대량 학살에 대해 알게 됐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최근 처음으로 무장친위대 대원이었다는 사실을 밝혀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왜 지금 그 사실을 밝히시는 것 입니까?

무장친위대 대원이었다는 사실은 언제나 저를 짓눌렀습니다. 이 시기에 대해 그 동안 침묵했던 이유는 이번에 나올 회고록에 설명해 놓았습니다. 드디어 털어 놓을 때가 된 것이지요...

-무장친위대에 배속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입대를 결심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아니면 친위대로 징집된다는 명령이 따로 있었습니까?

저 자신도 제가 어떻게 친위대로 징집되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소집 명령서를 통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제가 처음 드레스덴에 도착했을 때 그 사실을 알게 됐을까요? 저는 그 이상은 모르겠습니다.

-노동봉사단에 소속돼 있었을 때 동료들과 무장친위대에 입대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은 없습니까? 그시기에 소년들이 모이면 그런 주제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까?

회고록에도 적어 놨는데 당시 소년들의 공통적인 관심사는 칼을 연마하는 것 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이것 뿐 이었습니다. 저는 황달에 걸렸었는데 한 2주 정도 병을 앓았습니다. 황달이 나은 뒤에는 다시 칼 가는 것을 했고 낡은 도구들로 약간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어쨌든 이것은 기록했습니다.

-그것을 꼭 기록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어느 누구도 선생님에게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내 스스로 원해서 한 것 입니다.

-왜 자원해서 군에 입대하려 했습니까?

나는 그저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답답함으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이런 것들을 끝내고 싶었기 때문에 군에 자원해서 입대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억에 남는 일 이었습니다. 군에 지원했을 때 저는 15세 였는데 지원 이후의 과정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같은 나이 또래들이 많이 있었는데 노동 봉사단으로 배치됐고 일년 정도 지난 뒤 갑자기 전출 명령서를 받게 됐습니다. 그리고 아마 드레스덴에 도착해서야 우리가 무장 친위대로 가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됐을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셨습니까?

그 당시에 말인가요? 아닙니다. 나중에서야 친위대에 입대한 것에 대해서 죄의식을 가지게 됐습니다. 나는 이후 항상 의문을 가지게 됐습니다. 나는 그 때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을 수 없었는가?

-선생님은 같은 세대 중에서는 처음으로 과거의 과오를 밝히고 독일 역사의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다뤘습니다. 선생님은 무엇을 위해 비판을 하셨던 것 입니까?

네. 오늘날 독일에는 나치에 저항했다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히틀러가 권력을 잡을 수 있었을까요?
50년 전으로 되돌아 가서 내가 처음 양철북을 구상하게 된 발단을 알려주고 싶군요. 무조건 항복이 아니라 독일이 붕괴된 1945년 이전에 어떤 일이 일어 났었습니까?
독일의 상황은 암흑 그 자체였습니다. 불쌍한 독일인들은 검은 옷을 입은 무리들의 유혹에 빠져들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 이었습니다. 저는 어린시절 이 모든 것을 생생히 체험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열광과 감격에 휩싸인 채로 말입니다. 그리고 또 저 역시 유혹에 빠진 것 입니다.
저는 양철북과 곧 출간될 제 회고록을 통해 이 열광과 이것의 원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