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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18일 수요일

미 제4기갑사단이 아라쿠르 전투에서 거둔 전과에 대한 잡설



며칠전 페이스 북에서 제2차 세계대전 기 미육군 전차부대의 전투 보고서와 여기에 기반한 전후 작전연구의 신뢰성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원 자료가 되는 전투 보고서와 전차 승무원들의 인터뷰가 제대로 교차검증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 기반한 작전 연구도 좀 회의적인 시각으로 봐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했지요. 전투 보고서 등을 보면 약간 의구심이 드는 내용도 많은데 이것들을 일일이 교차검증 하는 것이 매우 어려우니 이것을 사용하더라도 신뢰성에 대해서는 한발짝 물러서서 회의적인 관점을 가지는게 어떻겠냐는 것 입니다. 페이스북에서는 통계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으니 블로그에서 간략하게 나마 다뤄보는게 좋을 듯 합니다.


이때 이야기를 꺼낸 미 제4기갑사단의 로렌 전역 전투 결과에 대해 이야기를 조금 해 보지요. 여기 나온 통계들은 모두 1954년 6월에 나온 “Ballistic Research Laboratories Memorandum Report 798”에 기반한 것 입니다. 이 연구는 총 98건의 교전 사례를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1~54까지는 제3기갑사단의 교전 사례이고 55~98은 미 제4기갑사단의 교전 사례입니다. 이 중에서 55~67번 교전 사례는 아라쿠르(Arracourt) 전투에서 있었던 교전으로 여기에 판터와의 교전 데이터가 가장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M4셔먼 및 TD가 판터와 교전한 사례들을 꼽아 보았습니다.


표1. 로렌 전역에서 미 제4기갑사단 소속 셔먼과 판터의 교전 결과(거리 단위 야드)
교전 사례
격파 거리
판터 격파
셔먼 손실
57a
75
2
0
57b
600
1
0
57c
900
5
0
57d
1300
3
0
57e
500
3
0
57f
2000
1
0
64a
900
2
0
64b
600
1
0
66
800
0
2
67a
600
2
0
67b
900
2
0
67c
1500
0
1
67d
1500
0
1
67e
1500
2
0
67f
1300
2
0
[표 출처: “Ballistic Research Laboratories Memorandum Report 798”(1954. 6), Appendix; Data on World War II tank Engagements: Involving the U.S. Third and Fourth Armored Divisions, (Merriam press, 2012), pp.33~37.]


이 도표를 거리 별로 정리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옵니다.


표2. 로렌 전역에서 미 제4기갑사단 소속 셔먼과 판터의 교전 결과(격파 거리에 따른 구분)
격파 거리
판터 격파
셔먼 손실
1~500
5
0
500~1000
13
2
1000~1500
2
2
1500야드 이상
1
0
[표 출처: “Ballistic Research Laboratories Memorandum Report 798”(1954. 6), Appendix; Data on World War II tank Engagements: Involving the U.S. Third and Fourth Armored Divisions, (Merriam press, 2012), pp.33~37.]


이 데이터를 보면 전반적으로 셔먼이 압승을 거두고 있는데 그나마 판터는 교전 거리가 멀어야 약간의 성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음은 로렌 전역에서 미 제4기갑사단에 배속된 TD(대부분 M18 헬캣)가 판터를 상대로 거둔 전과를 정리한 것 입니다. 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TD의 교전 결과는 더욱 놀랍습니다.


표3. 로렌 전역에서 미 제4기갑사단 소속 TD와 판터의 교전 결과(거리 단위 야드)
교전 사례
격파 거리
판터 격파
TD 손실
55a
100
2
1
55b
1900
3
0
55c
600
0
2
55d
600
2
0
56a
1000
4
0
56b
800
1
0
56c
1100
1
0
56d
1200
2
0
58a
400
2
0
58b
300
1
0
58c
1600
1
0
58d
1800
1
0
58e
3000
1
0
[표 출처: “Ballistic Research Laboratories Memorandum Report 798”(1954. 6), Appendix; Data on World War II tank Engagements: Involving the U.S. Third and Fourth Armored Divisions, (Merriam press, 2012), pp.43~44.]


이 표를 다시 거리 별로 분류한 것은 아래와 같습니다.


표4. 로렌 전역에서 미 제4기갑사단 소속 TD와 판터의 교전 결과(격파 거리에 따른 구분)
격파 거리
판터 격파
TD 손실
1~500
5
1
500~1000
7
2
1000~1500
3
0
1500야드 이상
6
0
[표 출처: “Ballistic Research Laboratories Memorandum Report 798”(1954. 6), Appendix; Data on World War II tank Engagements: Involving the U.S. Third and Fourth Armored Divisions, (Merriam press, 2012), pp.43~44.]


전반적으로 꽤 놀라운 내용이 많은데 TD가 3,000야드에서 판터를 격파했다거나 75mm포 탑재형으로 추정되는 셔먼이 2,000야드에서 판터를 격파했다는 보고는 일단 의구심이 듭니다. TD의 경우는 시계가 훨씬 좋고 셔먼의 경우 전차병 숙련도가 높아 1,500야드에서도 명중탄을 날리는 기록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만 미군의 광학장비는 독일군의 광학장비 보다 성능이 나쁘고 주포의 위력도 부족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회의적인 생각이 들게 됩니다. 게다가 경험이 풍부한 미군 전차병 조차도 장비 식별에 상당한 애를 먹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사실 셔먼이나 TD가 1,500야드 이상에서 판터를 격파했다는 주장은 다소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이 연구에 사용된 자료는 승무원들의 인터뷰와 작전 보고에만 한정되어 있어 독일측 기록과의 교차 검증은 전혀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1,000야드 이내에서 달성한 격파 기록은 신뢰성이 높다고 보고 1,000야드 이상, 특히 1,500야드 이상의 거리에서 달성한 격파 기록은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로렌 전역에 투입된 미군의 셔먼은 대부분 75mm 탑재 셔먼이어서 관통력을 고려하면 1,000야드 이상에서는 판터를 상대로 유효한 타격을 주기가 어렵고 전차용 광학장비는 미국측이 인정하듯 독일군의 광학장비 보다 성능이 나빠서 원거리에서의 표적 확인에 문제가 많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독일군의 기록과 교차 검증이 전혀 안된 미국측의 일방적인 기록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2007년 3월 30일 금요일

1차대전 당시 알자스-로렌의 병역 기피와 탈영문제

요즘 농담거리가 잘 생각나지 않다 보니 자꾸 번역글로 때우고 있습니다.

이번 글은 1차대전 기간 중 엘사스-로트링엔(알자스-로렌) 출신 사람들의 병역 기피 및 탈영에 대한 내용입니다. 한국내 게시판을 보면 친독일적(?) 네티즌 들이 알자스-로렌은 독일 땅이다~ 라면서 열심히 키보드 투쟁을 하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정작 당사자들은 어떻게 생각했을 까요?

자. 스크롤을 하십시오!

독일 육군의 엘사스-로트링엔 출신자들

1차대전 발발 당시 해외에 거주하던 엘사스-로트링엔에 거주하는 징집연령자 16,000명 중 징집통지서를 받고 귀국한 사람은 불과 4,000명 밖에 안 된다는 점을 보면 이들의 독일에 대한 충성심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했을 때 최소한 7,000명 이상이 병역회피 사유로 재판에 회부된 상태였다. 1차대전 기간 동안 17,650명의 엘사스-로트링엔 사람이 프랑스 육군에 복무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징집연령대의 남성들은 대규모로 국경을 넘어 도망쳤다. 보통은 20-150명씩 무리를 지어 국경을 넘거나 아예 마을 전체의 남성들이 도망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최소한 전쟁 발발과 동시에 3,000명의 남성이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도망쳤다. 스위스와 인접한 국경지대에서는 국경을 넘는 병역기피자의 대열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엘사스-로트링엔이 국경지대라는 점은 부수적인 요인에 불과했다. 상(上)엘사스의 관구 사령관은 이 지역의 주민들이 “애국심이 없으며” “병역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만연해 있기 때문에 이들은 병역을 (영광이 아니라) “처벌”로 받아들여진다고 지적했다. 한 마을의 시장은 병력 소집을 방해하려 했다. 많은 지역에서 병역 회피가 계속됐는데 상엘사스의 마르키르히(Markirch)에서는 전체 인구 11,800명 중 700명의 남성이 병역회피를 위해 잠적했다. 그리고 1917년 6월이 되자 병력 적령기의 남성 427명 중 213명이 스위스로 달아났다. 이 때문에 병역소집통지는 징집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배달했으며 무장병력이 동반했다. 로트링엔과 하(下)엘사스에서도 역시 “엄청나게 많은” 남성들이 병역을 회피했다.

역설적이게도 독일 군부역시 엘사스-로트링엔 지역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징집을 사용했기 때문에 병역에 대한 부정적인 성향은 더욱 강해졌다. 1915년 8월, 육군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엘사스와 로트링엔의 성인 남성 거의 대부분을 소집했다. “병역, 또는 노동에 적합한” 최대한의 기준이 적용됐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런 가혹한 방식 때문에 징집이 잘 되기 보다는 반발만 늘어났다. 전쟁 초기부터 징집은 엘사스-로트링엔 전 지역에서 인기가 없었다. 전쟁의 종결이 가까워지자 더 많은 민간인들이 징집을 피해 잠적했다.

징집될 경우 엘사스-로트링엔 출신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차별에 대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저항했다. 이들은 같은 고향 출신자들을 규합해서 위험한 명령을 거부하고 종종 탈영이나 폭동을 일으켰다. 독일 군부는 특히 탈영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대응했다. 탈영은 부대의 사기를 떨어트릴 뿐 아니라 군의 기밀을 적에게 넘겨줄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었다. 전투중에 발생하는 포로와 실제로 탈영해서 항복한 경우가 굉장히 모호하기 때문에 탈영에 대한 통계는 주의해서 살펴봐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사스-로트링엔 출신 병사들의 탈영율이 높았다는 점은 확실하다. 1917년 7월에 독일육군 부참모장은 최소한 1,000명 이상의 엘사스-로트링엔 출신 병사들이 탈영했으며 달리 말하면 10,000명 중 80명이 탈영했다고 기록했다. 일반적인 독일군의 탈영율은 10,000명 당 1명 이었다. 그리고 1917년 12월에서 1918년 9월까지 530명이 더 탈영했다.

Alan Kramer, "Wackes at War : Alsace-Lorraine and the failure of German national mobilization 1914-1918", State, society and mobilization on Europe during the First World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pp.110-112

한국의 인터넷 게시판에 알자스-로렌 사람들 보다 더 독일적인 한국어 사용자가 있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