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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8일 월요일

서부전선으로의 차출에 반대한 동부전선의 독일 병사들

동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 병사들은 서부전선으로의 이동 명령이 떨어지면 매우 두려워 했다고 합니다.

어떤 병사들은 서부전선으로 차출되지 않기 위해서 폭동까지 일으켰다는군요.

농담이 아닙니다.

1차 대전 때는 그랬다는군요.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을 서부전선으로 이동시키려 하자 이들은 반항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많은 병사들은 서부전선으로의 이동명령을 자신들의 부대에 대한 처벌행위로 받아들였다. 병사들은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는 기차의 바깥에 "플랑드르에서 도축할 소떼"나 "동부에서 온 죄수들" 같은 낙서를 했다. 약삭빠른 병사들은 서부전선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탈영해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잡으려 했다. 이미 1917년 중반 부터 독일군 사령부는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는 도중 병력의 10% 가량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양한 조치가 취해졌다. 소규모 수송부대를 보다 직접적으로 감독하는 것, 수상한 병사들을 체포하는 것, 병사들을 무장해제해서 기차가 이동하는 동안 기차안에서 총을 쏘지 못하게 하는 것, 소란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는 열차편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는 것 등이었다.

이런 강제적인 조치는 병사들의 사기만 떨어트렸다. 1918년, 드빈스크에서는 5천명의 병사가 (서부전선으로의) 이동 명령을 거부해 처벌 받았고 같은해 10월에는 하리코프에서 (서부전선으로의) 이동 명령을 받은 2천명의 병사가 폭동을 일으켰다. 예비병력을 필요로 하던 최고사령부는 러시아의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병사들이 한참 뒤에 신뢰하기 어려운데다 수용소에 있는 동안 볼셰비즘에 우호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기 전 까지는 이들을 다시 서부전선으로 보내기도 했다. 이제 동부전선에는 나이 많은 예비역이나 향토방위대, 그리고 (충성심이 의심되는) 알자스 출신이나 폴란드계 병사들이 배치되었다.

Vejas Gabriel Liulevicius, War Land on the Eastern Front : Culture, National Identity and German Occupation in World War I(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p.213

2차대전때는 이야기가 살짝 달라져서 동부전선이 딱히 인기가 없었다죠.

2007년 3월 30일 금요일

1차대전 당시 알자스-로렌의 병역 기피와 탈영문제

요즘 농담거리가 잘 생각나지 않다 보니 자꾸 번역글로 때우고 있습니다.

이번 글은 1차대전 기간 중 엘사스-로트링엔(알자스-로렌) 출신 사람들의 병역 기피 및 탈영에 대한 내용입니다. 한국내 게시판을 보면 친독일적(?) 네티즌 들이 알자스-로렌은 독일 땅이다~ 라면서 열심히 키보드 투쟁을 하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정작 당사자들은 어떻게 생각했을 까요?

자. 스크롤을 하십시오!

독일 육군의 엘사스-로트링엔 출신자들

1차대전 발발 당시 해외에 거주하던 엘사스-로트링엔에 거주하는 징집연령자 16,000명 중 징집통지서를 받고 귀국한 사람은 불과 4,000명 밖에 안 된다는 점을 보면 이들의 독일에 대한 충성심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했을 때 최소한 7,000명 이상이 병역회피 사유로 재판에 회부된 상태였다. 1차대전 기간 동안 17,650명의 엘사스-로트링엔 사람이 프랑스 육군에 복무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징집연령대의 남성들은 대규모로 국경을 넘어 도망쳤다. 보통은 20-150명씩 무리를 지어 국경을 넘거나 아예 마을 전체의 남성들이 도망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최소한 전쟁 발발과 동시에 3,000명의 남성이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도망쳤다. 스위스와 인접한 국경지대에서는 국경을 넘는 병역기피자의 대열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엘사스-로트링엔이 국경지대라는 점은 부수적인 요인에 불과했다. 상(上)엘사스의 관구 사령관은 이 지역의 주민들이 “애국심이 없으며” “병역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만연해 있기 때문에 이들은 병역을 (영광이 아니라) “처벌”로 받아들여진다고 지적했다. 한 마을의 시장은 병력 소집을 방해하려 했다. 많은 지역에서 병역 회피가 계속됐는데 상엘사스의 마르키르히(Markirch)에서는 전체 인구 11,800명 중 700명의 남성이 병역회피를 위해 잠적했다. 그리고 1917년 6월이 되자 병력 적령기의 남성 427명 중 213명이 스위스로 달아났다. 이 때문에 병역소집통지는 징집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배달했으며 무장병력이 동반했다. 로트링엔과 하(下)엘사스에서도 역시 “엄청나게 많은” 남성들이 병역을 회피했다.

역설적이게도 독일 군부역시 엘사스-로트링엔 지역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징집을 사용했기 때문에 병역에 대한 부정적인 성향은 더욱 강해졌다. 1915년 8월, 육군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엘사스와 로트링엔의 성인 남성 거의 대부분을 소집했다. “병역, 또는 노동에 적합한” 최대한의 기준이 적용됐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런 가혹한 방식 때문에 징집이 잘 되기 보다는 반발만 늘어났다. 전쟁 초기부터 징집은 엘사스-로트링엔 전 지역에서 인기가 없었다. 전쟁의 종결이 가까워지자 더 많은 민간인들이 징집을 피해 잠적했다.

징집될 경우 엘사스-로트링엔 출신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차별에 대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저항했다. 이들은 같은 고향 출신자들을 규합해서 위험한 명령을 거부하고 종종 탈영이나 폭동을 일으켰다. 독일 군부는 특히 탈영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대응했다. 탈영은 부대의 사기를 떨어트릴 뿐 아니라 군의 기밀을 적에게 넘겨줄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었다. 전투중에 발생하는 포로와 실제로 탈영해서 항복한 경우가 굉장히 모호하기 때문에 탈영에 대한 통계는 주의해서 살펴봐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사스-로트링엔 출신 병사들의 탈영율이 높았다는 점은 확실하다. 1917년 7월에 독일육군 부참모장은 최소한 1,000명 이상의 엘사스-로트링엔 출신 병사들이 탈영했으며 달리 말하면 10,000명 중 80명이 탈영했다고 기록했다. 일반적인 독일군의 탈영율은 10,000명 당 1명 이었다. 그리고 1917년 12월에서 1918년 9월까지 530명이 더 탈영했다.

Alan Kramer, "Wackes at War : Alsace-Lorraine and the failure of German national mobilization 1914-1918", State, society and mobilization on Europe during the First World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pp.110-112

한국의 인터넷 게시판에 알자스-로렌 사람들 보다 더 독일적인 한국어 사용자가 있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