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밴플리트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밴플리트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7년 3월 29일 수요일

레마겐 교두보 전투당시 미3군단장 밀리킨 소장 해임에 관한 잡설

포스팅 “패튼의 전과 과장에 대한 하지스의 비난”에 문기야님이 달아주신 댓글을 읽으니 레마겐 교두보 전투 당시 미3군단장 밀리킨 소장이 해임된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는군요.


먼저 사건의 개요를 살펴보는게 좋겠습니다. 미육군 공간사 The Last Offensive는 레마겐 교두보를 둘러싼 전투와 밀리킨 소장John Millikin의 해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1군사령관 하지스 장군은 작전 초기 부터 레마겐 철교와 교두보를 담당한 제3군단장 밀리킨 장군의 지휘를 불신하고 있었다. 하지스와 제1군 사령부의 참모장교들은 라인강 양안에 배치된 미군부대에 대한 통제가 형편없으며 라인강 동안의 미군부대 배치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하다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3월 9일 아이젠하워 장군이 라인강 동안의 교두보를 점진적으로 확대하라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하지스 장군은 제3군단의 진격이 느리고 독일군이 육안관측으로 레마겐 철교에 포격을 유도할 수 없도록 공세를 펼치지도 못하고 있다며 짜증을 냈다. 

밀리킨 장군은 3월 9일 제9기갑사단장 레오나드 장군에게 레마겐 철교 일대의 모든 군사활동을 통제하도록 하고 라인강 동안에 배치된 미군부대는 모두 제9보병사단장 크레이그 장군이 관할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하지스 장군의 불평은 끊이질 않았다. 제3군단은 얼마전 까지 패튼의 제3군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제1군 사령부는 밀리킨과 원활한 관계가 아니었다. 하지스와 그의 참모진은 공공연하게 “레마겐 교두보 일대의 지휘를 7군단장 콜린스 장군에게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밀리킨 장군이 직면한 문제는 심각했다. 그는 직접 레마겐 다리까지 나가 지휘했지만 라인강 동안에 배치된 미군부대는 시간에 맞춰 정확한 보고를 하지 못했다. 이렇게 우발적으로 실시된 작전의 경우 초기에는 작전에 필요한 물자와 지원 부대를 충분히 확보할 수 없었다. 특히 통신부대가 부족했다. 차량통행이나 포격으로 레마겐 철교에 부설한 전화선은 자주 끊어졌고, 파편이나 라인강의 빠른 물살 때문에 강을 따라 가설한 전화선도 제 기능을 못했다. 레마겐 철교가 혼잡했기 때문에 연락장교들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고 무전통신도 큰 도움이 되질 못했다. 

레마겐 교두보로 재배치된 보병부대들은 도착하는 대로 시급히 필요한 지구에 축차적으로 투입됐다. 심지어 연대단위 편성 조차 유지하지 않은채 투입하기도 했고 여러 사단의 부대들이 뒤죽박죽으로 섞이는게 다반사였다. 작전 자체가 짧은 시간동안 우발적으로 일어난데다 지형 문제까지 있는 상태에서 이런식으로 부대를 운용하니 문제는 더 커졌다.
밀리킨 장군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두보를 신속하게 확장하는 것 보다는 체계적이로 점진적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3월 8일에 3단계에 걸쳐 교두보를 확장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1단계는 레마겐 철교의 북쪽과 남쪽으로 2.5마일을 진격해 독일군이 더이상 철교를 소화기로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2단계에 확장의 목표는 독일군의 포병관측을 중단시키는 것 이었다. 마지막 3단계는 북쪽으로는 본Bonn, 남쪽으로는 안더나흐Andernach, 그리고 동쪽으로는 고속도로까지 진출해 독일군이 교두보를 더이상 포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중략) 

밀리킨 장군은 교두보가 확대되는 경과를 바르게 파악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교두보의 부대를 가장 효과적으로 운용하려면 란Lahn 강 유역과 프랑크푸르트Frankfurt-카셀Kassel 회랑으로 진격해야 한다고 판단해 군단 주공을 동쪽과 동남쪽에 두기로 했다. 이것은 앞서 브래들리와 아이젠하워 장군도 동의한 것 이었다. 밀리킨은 이렇게 해야 독일군이 레마겐 철교에 포격을 유도하는 것을 가장 빨리 중단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스 장군은 제3군단이 제일 먼저 북쪽으로 진격해 콜린스 장군의 제7군단의 도하점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작전 4일차인 3월 11일까지도 이 점을 밀리킨에게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이날 밀리킨은 처음으로 철교를 건너 라인강 동안의 교두보로 갔다. 하지스는 3군단이 북쪽으로 진격해야 하며 주공을 이 방향에 두어야 한다고 몇 번 언급하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물론 밀리킨은 이정도의 언급만으로 하지스의 의도를 이해했다. 그는 제78보병사단의 정면을 축소하고 제9보병사단의 대부분을 북동방향으로 진격하도록 했다. 다음날인 3월 12일 교두보 남쪽과 동남쪽을 인계받기 위해  제99보병사단의 주력이 도착했다. 밀리킨은 제99보병사단의 부대들을 원 소속사단으로 복귀시키도록 했다. 하지만 이미 북쪽으로 신속히 진출할 수 있는 기회는 사라졌다.

(독일군의 반격에 대한 서술은 생략)

바이어라인Fritz Bayerlein 장군은 제130보병사단을 공격에 사용할 수 없다면 미군에 대한 효과적인 역습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라인강을 건넌 미군이 레마겐 교두보에 증원군을 더 투입한다면 미군을 격퇴할 만한 병력을 동원하는게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모델 원수의 판단 덕분에 밀리킨 장군이 주공을 투입한 지구에서 미군의 진격은 둔화됐다. 이때문에 하지스 장군은 계속해서 밀리킨의 지휘방식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

(독일군의 반격에 대한 서술은 생략) 

그동안 레마겐 교두보는 꾸준히 확장됐지만 그 속도는 느렸다. 하지스 장군은 밀리킨 장군의 지휘방식을 여전히 불신했다. 그는 3월 15일에 제12집단군사령관 브래들리 장군을 만나 밀리킨을 해임하는 방안을 의논했다. 

“레마겐 교두보에서 싸우고 있는 우리 장병들은 매우 존중합니다. 하지만 지휘관이 문제입니다.” 

브래들리는 하지스의 주장에 동의하고 밀리킨의 후임을 알아보라고 한 뒤 제1군 사령부를 떠났다. 이틀 뒤 제90보병사단을 지휘했던 밴 플리트 소장이 제1군 사령부에 도착해 제3군단장에 임명됐다. 하지스는 오후 3시가 되기 조금 전 밀리킨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쁜 소식이 있소.” 

그리고 하지스는 밀리킨이 제3군단장에서 해임됐다고 통보했다. 밀리킨은 하지스가 말을 마칠때 까지 기다렸다. 

“사령관님. 저도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레마겐 철교가 무너졌습니다.” 

Charles B. MacDonald, The Last Offensive, (Center of Military History, US ARmy 1993) , pp.223~229.



이 일화를 보면 하지스라는 인물은 꽤 주관이 강한 인물이었던 듯 합니다. 밀리킨 장군이 애초에 제3군단 주공을 동쪽과 동남쪽으로 한 것은 제12집단군사령관 브래들리 장군의 의도였기 때문입니다. 하지스가 상급 사령부의 의도에 반하여 자신의 의견을 관철한 것이죠. 미육군 공간사의 서술을 보면 확실히 밀리킨 소장이 억울한 측면이 있습니다.

밀리킨 소장의 해임이 결정된 3월 15일에 있었던 브래들리와 하지스의 회의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을 하는게 좋겠습니다. 1945년 3월 15일자 제1군 사령관 일지는 이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오경 브래들리 장군은 참모장 앨런 장군을 대동하고 제1군사령부를 방문했다. 브래들리 장군은 어제 대장으로 진급했지만 아직 별 세개만을 달고 있었다. 브래들리 장군과 하지스 장군, 그리고 참모진은 사령관 집무실에서 한시간 반 가량 비공개로 회의를 한 뒤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외출했다. 브래들리 장군은 라인강 서안에서 독일군의 저항이 모두 끝나기 전에는 교두보를 동쪽으로 확대하는데 힘을 쏟아서는 안된다는 연합군최고사령부SHAEF의 공식 방침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하지스 장군은 이 방침에 반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몽고메리의 제21집단군이 연합군최고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북쪽에서 대규모 도하를 하기 전에 ‘양동작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건을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몽고메리가 전화를 걸고 5분 뒤에 미 제1군이 라인강을 도하해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그는 더이상 양동작전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참모장 앨런 장군은 패치 장군이 패튼 장군에게 보낸 전문 이야기를 꺼냈다. 패치와 패튼은 서로 즐겁게 장난을 쳤다. 패치 장군은 “제3군이 라인강에 꼴지로 도착한 것을 축하함. 그럴 줄 알았음.”라는 전문을 보냈다. 패튼 장군은 답신으로 “라인강을 첫 번째로 도하할 부대가 전문을 보내줘 정말 감사함.” 그리고 브래들리 장군은 독일 장군 세명이 항복하기 위해 미군 부대를 찾아 돌아다녔다는 농담을 꺼냈다. 독일 장군들은 대공포병들을 발견하고는 그들에게 적의가 없으며 항복하겠다는 뜻을 보이려고 루거 권총을 땅바닥에 던졌다. 그러자 미군들은 루거 권총을 얻으려고 득달같이 달려들었지만 장군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우리는 연합군최고사령부가 레마겐 교두보 확대를 원하지 않았으며 기존에 세워둔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이유로 제1군이 라인강을 도하했다는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좋았던 분위기가 나빠졌다. 연합군최고사령부는 북쪽에서 라인강을 도하하는 쪽을 선호했고 우리 제1군이 확보한 교두보에 중점을 둘 의도가 없음이 확실했다.  

그리고 하지스 장군은 브래들리 장군과 밀리킨 장군을 해임하고 새로 제3군단장을 임명하는 문제를 상의했다. 두 사람은 밀리킨 장군이 유능하긴 하지만 돌발상황에 대응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하지스 장군이 직접 개입하기 전 까지는 레마겐 교두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는 점에 동의했다. 밀리킨 장군은 패튼 장군 휘하에 있을때도 의견 충돌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래서 패튼은 제3군단을 제1군에 떠넘긴 것이다. 새로운 제3군단장 후보로는 하몬Ernest N. Harmon, 밴 플리트, 개피Hugh Joseph Gaffey 등이 거론됐다. 하지스 장군은 하몬 소장을 선호했지만 브래들리 대장은 제15군 사령부가 하몬 장군의 인사이동에 찬성할지 의문이라고 답했다. 제3군단은 아직 하지스 장군의 의도대로 고속도로까지 진출하지 못했지만 0.5마일만 더 진격하면 되는 상황이다. 오늘 제99보병사단이 돌출부 남쪽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제9보병사단) 60보병연대는 로르샤이트Lorscheid를 점령했으며 (제9보병사단) 47보병연대는 적이 강력하게 방어하는 채석장을 점령하고 장교 2명과 사병 100명을 포로로 잡았다. 교두보 전체에 걸쳐 약 2,000야드를 진격했다. 하지스 장군은 제9보병사단의 성과가 평소 사단의 실력에 미치지 못한다고 약간 불만을 표했다. 하지스 장군은 저녁에 이렇게 말했다. 

“레마겐 교두보에서 싸우고 있는 우리 장병들은 매우 존중합니다. 하지만 지휘관이 문제입니다.” 

William C. Sylvan and Francis G. Smith Jr.. Normandy to Victory: The War Diary of General Courtney H. Hodges and the First U.S. Army (The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08) Kindle Locations 4619-4639.


이 일지에서도 하지스 장군이 상급 사령부에 상당한 불만이 있었음이 잘 나타납니다. 제1군이 라인강돌파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데 영국군인 몽고메리를 정치적으로 배려하는 듯한 움직임에 불만을 나타내고 있지요. 그리고 최대한 점잖은 표현을 쓰고 있지만 제3군단장 밀리킨 소장에 대해서도 격렬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국내에도 소개된 밴 플리트 평전 『승리의 신념: 밴 플리트 장군 일대기』에서는 밀리킨의 보직해임에 대해 미육군 공간사 보다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짝 다른 서술이 하나 보입니다. 이 부분도 직접 인용을 하겠습니다.



바로 이날 제3군단장 밀리킨 장군은 보직해임되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영국에서 근무하는 동안에도 하지스 장군과 존 밀리킨 장군간의 불협화음을 잘 알고 있었다. 밴은 과거에 패튼 장군이 자신 앞에서 ‘벌지’ 전투에 임하는 밀리킨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난한 사실을 기억하였다. 이제 밴 플리트 장군은 밀리킨이 물러나고 자신이 그 공백을 메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밴은 또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휘권인수가 좋지 않은 경우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다음날 아침 일찍 제1군사령부로 가기 위해 자신의 전용비행기를 준비시켰다. 브래들리의 전화를 받은 바로 그 다음날 아침, 밴 플리트 장군은 가볍게 짐을 꾸리고 전속부관과 운전병을 대동한 채 지휘관 전용항공기에 탑재 가능한 지프 1대만을 싣고 제1군사령부로 향했다. 

밴 플리트가 도착하여 신고를 마치자 하지스 중장은 그에게 밀리킨 장군을 대신하여 제3군단장의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밀리킨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어.”라고 하지스가 말했다. 이에 밴은 “밀리킨도 제가 제3군단의 지휘권을 인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하지스는 “아니, 자네가 가서 직접 말하게. 밀리킨에게 제1군사령부로 출두하라고 전해주게.”라고 대답하며 급한 업무를 핑계로 돌아섰다. 밴은 자신이 직접 밀리킨 장군에게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몹시 언짢았다. 또한 이러한 방식의 보직해임은 군 전통에 어긋나는 것 이었다. 브래들리나 하지스 둘 중 한 사람이 밀리킨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보직해임을 통보하거나, 보다 나은 것은 직접 밀리킨을 찾아가 보직해임시키는 용기를 보여줬어야 했다. 밴은 또한 그 자신이 밀리킨보다 후임이고, 몇 개월 전 제3군단의 벌지공격 때만 해도 제90사단장으로서 그의 휘하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난처해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밴은 지휘권을 인수하기 위해 즉시 이동하였다. 

밴 플리트는 지휘소에 있던 밀리킨을 찾아가 보직해임의 소식을 전했다. 밴은 당시 밀리킨의 표정에 나타났던 충격받은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직업군인으로서 보직해임을 당한다는 것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비극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고급장교의 경우 그 충격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보통 군 생활이 끝장났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직해임의 경우는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긴다. 설사 정황에 비추어 볼 때, 보직해임이 부당했다고 판단되더라도 그 오명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밴은 솔직히 밀리킨의 보직해임이 정당하다고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보직해임으로 자신이 득을 보게 되는 상황에서 밀리킨에게 그 소식을 직접 전해야하는 일에 몹시 당혹해 하였다. 

밴은 불편한 심정으로 밀리킨과 함께 군단 지휘소에 있으면서 이러한 소식을 밀리킨이 매우 기분 나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밀리킨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밴은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보직해임의 이유가 무엇인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밀리킨은 하지스에게 전화를 걸었고, 하지스는 그의 보직해임을 확인해 주었다. 끝내 밀리킨은 전화에다 대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데 여기도 반갑지 않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레마겐의 철교가 붕괴되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제1군사령부의 부대일지에는 3월 17일 하지스 장군이 밀리킨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보직해임되었고 후임으로 밴 플리트가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통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밴이 밀리킨의 지휘소에 도착하기 전에 이 전화가 걸려온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밀리킨이 하지스 장군에게 확인전화한 것을 그렇게 기록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폴 F. 브레임/육군교육사령부 번역실 옮김, 『승리의 신념 : 밴 플리트 장군 일대기』(봉명, 2002), 193~194쪽.


다시 미1군사령관 일지를 인용하겠습니다. 여기에는 위의 사실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후 두시에 하지스 장군은 지휘소에서 밴 플리트 장군을 만나 환영인사를 하고 약 한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하지스 장군은 브래들리 장군이 밀리킨 소장의 후임을 보내준 것을 아주 기뻐했다. 오후 2시 50분에 하지스 장군은 밀리킨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쁜 소식이 있소.” 그는 밀리킨에게 해임 사실을 알리고 원한다면 내일 군단사령부를 떠나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하지스 장군의 말이 끝나자 밀리킨 소장이 말했다. “사령관님. 저도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레마겐 철교가 무너졌습니다.” 

William C. Sylvan and Francis G. Smith Jr.. Normandy to Victory: The War Diary of General Courtney H. Hodges and the First U.S. Army (The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08) Kindle Locations 4661-4665.


하지스의 성격을 고려하더라도 밀리킨의 해임과 그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비록 벌지전투 시기 부터 군단지휘능력에 비판을 받아왔다고는 하나 레마겐 교두보 전투 자체는 무난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굳이 군단장을 교체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벌지전투 당시 미국 군단장들의 지휘방식에 대해 책을 쓴 해롤드 윈튼Harold R. Winton은 밀리킨에 대해 우호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의 평가는 이렇습니다.


밀리킨이 해임된데는 그의 책임도 없지 않다. 3월 11일에 제9보병사단 참모장은 하지스 장군의 부관에게 라인강 동안의 교두보가 혼란하기 때문에 군단장이 직접 전방을 시찰하면서 상황을 통제해야 하지만, 밀리킨은 교두보에 거의 오질 않는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밀리킨이 해임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제1군의 “일가족”이 아닌 아웃사이더였던데 있었다. 그는 좋지 못한 시기에 좋지 못한 장소에 있었던 것이다. 

Harold R. Winton, Corps Commanders of the Bulge: Six American Generals and Victory in the Ardennes,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7), pp.354~355.

2013년 8월 4일 일요일

한국전쟁 시기 미군의 보급에 대한 밴 플리트의 평


한국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을 역임한 밴 플리트의 인터뷰 녹취록을 조금씩 읽는 중 입니다. 오늘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보급에 대한 밴 플리트의 평을 소개해 보지요. 꽤 재미있습니다. 특히 보급에 대한 밴 플리트의 관점을 잘 보여주는 부분 같군요.

윌리엄스 중령 : 장군님. 우리 미군에 대해서는... 우리 미군이 한국전쟁, 아니 전쟁을 치를 때 마다 지나치게 많은 장비를 갖추고 보급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밴 플리트 : 아니오. 전혀. 전투에 임하는 군인은 불가피한 경우라면 기본적인 필수품 조차 없는 상황에서 싸울 수 있어야 하지. 하지만 우리 군인들에게 더 잘 해줄 수 있다면 최고로 해 줘야 하는 법이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하지. 우리는 미국 본토, 유럽, 그리고 한국의 산악지대 등 어디에서건 가장 훌륭한 급식을 했소. 아군은 매일 보급을 받았고 아이스크림 같은 특식도 자주 받았소. 통조림 아이스크림을 사용하는 아이스크림 만드는 기계를 모든 사단이 가지고 있었소. 통조림 아이스크림은 걸쭉한 액체나 분말 형태였는데 물을 섞어서 얼리기만 하면 아이스크림을 만들 수 있었소. 그리고 차량 종점이나 철도 종점, 보급소에서 보급품을 추진하기 위해서 한국인으로 구성된 보급부대를 두었소. 한국인 보급부대는 지게(A frame)를 갖추고 있었는데 지게로 무거운 물품을 운반할 수 있었소. 한국인 보급부대는 식량, 탄약, 그밖의 보급품을 등에 짊어지고 전투부대에 전달했소. 그래서 아군이 보급을 잘 받을 수 있었던 것이오. 한국군은 별도의 급식을 받았는데 정말 부실하기 짝이 없었소. 한국인들은 그렇게 먹는 것에 익숙했지만. 급식은 대부분 밥이었고 일주일에 한 두번 정도 생선이나 고기를 먹는 수준이었고. 밥에 간장(soybean sauce)과 김치를 곁들여 먹는 것이었소. 김치는 절인 배추인데 자우어크라우트Sauerkraut 같은 음식이오. 김치는 밥을 먹을 때 맛도 내고 비타민도 보충해 주는 음식이었소. 한국군인은 하루에 11센트로 급식을 할 수 있었는데 우리 미군은, 내가 생각하기에 하루에 급식비로 5달러는 소요됐던것 같소. 요리를 할 줄 아는 취사병들은 꽤 맛있는 급식을 했소. 하지만 몇몇 실력없는 취사병들은 근사한 스테이크도 망쳐버리곤 했지. 급식을 제대로 준비하는건 정말 문제였소. 이 문제를 돕기 위해 많은 강사와 감독관이 파견됐소. 그 중에서도 특히 조지 머디키언George Mardikian씨가 기억에 남는구려. 머디키언씨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오마르 카얌Omar Khayyam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이었소. 그는 1차대전이 끝난 뒤 유럽에서 후버 전 대통령과 함께 식량구호활동을 한 바 있소. 그리고 미국을 매우 사랑하는 사람이었지. 머디키언씨는 아르메니아 출신으로 요리 전문가가 되었소. 그는 한국을 방문했을 때 모든 취사장을 시찰한 뒤 급양담당 부사관들과 취사병, 그 외의 취사관련 인원들을 가르쳤소. 머디키언씨는 육군부의 지시로 한국을 방문한 것이었소. 그래. 우리 군의 급식은 최고였지.
“Interview with General James A. Van Fleet by Lieutenant Colonel Bruce Williams, Tape 4”(1973. 3. 3), Senior Officers Debriefing Program, US Army Military History Institute, pp.47~48.

모든 군대가 병사들을 잘 먹이려 하지만 실제로 그게 가능한 군대는 흔치 않지요. 후방에서 물자를 준비하고 이것을 전방으로 추진해서 배급하는 과정이 딱딱 맞아떨어져야만 가능한 일이니 말입니다.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전방의 군인들은 그야말로 개고생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미국은 풍부한 생산력과 이것을 전장으로 수송할 수 있는 수단, 그리고 뛰어난 행정 조직 등 필요한 것을 제대로 갖춘 유일한 나라가 아닐까 싶습니다.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고기를 수송하기 위해 냉동선을 선구적으로 운영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잠수함 까지 아이스크림 제조 기계를 갖출 정도로 보급에 신경을 쓴 것을 보면 그저 부럽다는 생각 말고는 드는게 없을 정도입니다. 밴 플리트가 이 인터뷰에서 미군의 급식이 최고라고 자부한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 싶군요.


2013년 5월 12일 일요일

밴 플리트의 현리 전투 회고담

현리 전투는 한국전쟁에서 한국군이 당한 패배 중 손꼽히는 참패입니다. 워낙 유명한 전투이니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이 전투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당시 제3군단을 지휘하고 있던 유재흥 장군에 관한 것 입니다. 특히 제3군단이 붕괴된 뒤 밴플리트 장군과 나눈 대화는 너무나 유명해서 곳곳에서 인용되고 있지요.


이 포스팅에서는 이에 대한 밴 플리트 대장의 회고를 소개해 보려 합니다.



(전략)


윌리엄스 중령 :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진 이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밴 플리트 : 아니, 아니. 5월에 중국군이 또 한번 공세를 감행했었소. 이 이야기를 하는게 좋겠네.


윌리엄스 중령 : 계속 말씀해 주십시오.


밴 플리트 : 적군은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 동부와 중부에 병력을 증강하고 5월에 공세를 감행했소. (중국군은) 이 공세에서 꽤 많이 진격해서 돌출부가 형성되었지. 중국군은 공세가 중단될 때 까지 50마일 정도를 진격했소. 나는 4월의 공세를 통해 적은 모든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적은 필요한 물자를 확보할 수 없었고 탄약이 크게 부족했소. 적의 선두 제대는 농사 짓는 사람들이 쓰는 말로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죽을(die on the vine)” 것이었고 공세를 멈출 수 밖에 없었소.


적군은 한국군 제2군단과 그 예하의 2개 사단을 쓸어버렸소. 한국군 총참모장 정일권 장군과 나는 동해안으로 비행기를 타고 간 뒤 차량편을 구해서 군단장을 찾아가 만났소. 군단장은 유(재흥) 장군이었소. 나는 유재흥에게 물었소.


“유장군, 당신의 군단은 어디 있소?(General Yu, where is your corps?)”


유재흥은 이렇게 대답했소.


“모르겠습니다.(I don’t know)”


“수송수단과 야포를 모두 잃었소?(Have they lost all of their transportation and artillery?)”


그는 이렇게 대답했소.


“그런 것 같습니다.(I think so.)”


나는 이렇게 말했소.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부로 해체할 것이오. 그 예하의 2개 사단도 마찬가지요. 귀관은 나와 함께 온 정일권 장군에게 전출 신고를 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정일권 장군은 최대한 패잔병과 장비를 수습하도록 하시오.(General Yu, your corps is deactivatied as of now, and so are your two divisions. You will report back to General Chung, here with me, for reassignment. In the meantime, General Chung, you collect all the stagglers and equipment you can.)”


유재흥 장군은 나중에 2개국에서 대사를 역임했소. 우리 두 사람은 몇 번 만났고 지금 그는 한국 국방부 장관이오. 유재흥 장군은 좋은 친구요. 우리는 만날 때 마다 현리 전투의 일을 생각하며 웃곤 한다오.(He is very warm friend of mine, and every time we meet, we have a smile remembering that action.) 한국에서 나는 완전한 지휘권을 행사했소. 불행히도 베트남에서는 우리가 완전한 지휘권을 행사하지 못했지.


다시 적군에 대해서 말하면, 나는 적의 진격이 한계에 달했으며 적이 진격을 재개하려면 더 많은 준비와 재보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소. 나는 중국군의 공세 3일차에 제2보병사단과 웨스트모어랜드 대령이 지휘하는 제187공수여단... 전투단으로 적의 측후방을 공격했소. 이 두 부대는 돌파하여 동해안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아군 부대와 접촉하는데 성공했소. 대승을 거둔 것이오. 그리고 적군이 완전히 패배했기 때문에 나는 한국군으로 상륙부대를 편성해서 원산을 탈환하고 적군의 후방을 점령하도록 하려고 했소. 그러나 리지웨이 장군은 이 작전을 위해 일본으로 부터 상륙함정과 보급물자를 지원할 수 없으므로 승인을 거부했소. 나는 이렇게 말했소.


“맷. 이 작전은 추격전입니다. 그리고 추격전에는 병력의 일부만 투입하기 때문에 탄약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추격전의 사례를 연구해보면 내 말이 사실이란 걸 알 것이오. 패튼 장군이 프랑스에서 추격전을 펼친 것이나 다른 추격전 사례를 보면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이 투입되었고 탄약 소모량도 많지 않았음을 알 수 있소. 추격전을 펼치는 부대는 식량과 연료가 필요하지. 하지만 아군이 추격을 시작한 직후 휴전회담이 시작되어 나는 진격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소.


윌리엄스 중령 : 제가 알기로는 현리에서 패배한 것은 한국군 제3군단 이고 유재흥 장군 예하의 사단은 한국군 제5사단과 제7사단 이었습니다.


밴 플리트 : 내가 기억하기론 한국군 제2군단인데.


윌리엄스 중령 : 제2군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틀렸을 수도 있지요.


밴 플리트 : 중령. 좋은 질문을 여러가지 해 주었는데 내가 따로 적어 놓은 것이나 다른 기록을 보고 답변하는 게 아니라 20여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대답한다는 것을 유의해 주시오.


(후략)


“Interview with General James A. Van Fleet by Lieutenant Colonel Bruce Williams, Tape 4”(1973. 3. 3), Senior Officers Debriefing Program, US Army Military History Institute, pp.26~28.


다른 내용은 익히 알던 것이었는데 밴 플리트가 이런 참패를 당한 유재흥과 꽤 친해졌다는게 다소 의외였습니다. 게다가 현리 전투 패배를 가지고 서로 낄낄거릴 정도가 되었다니 말입니다(;;;;)

2011년 5월 10일 화요일

현리전투와 리지웨이의 한국군 평가

중국군의 1951년 춘계공세는 UN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국군은 이 과정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고 이것은 한국군에 대한 평가에 부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UN군사령관 리지웨이는 1951년 5월 21일 육군부에 보낸 전문에서 미군 및 한국군 부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1. 본인은 모든 미군 군단, 미군 사단, 그리고 한국군 제1사단을 방문하였고 이 모든 부대들이 사기가 높으며 전투를 훌륭히 수행했음을 특기하고자 한다. 나는 특히 적의 주공에서도 주요한 공격을 받은 러프너(Clark Louis Ruffner) 소장의 미육군 제2보병사단을 특기하고 싶다. 나는 제2보병사단이 보수적으로 평가하더라도 자신들의 피해의 20배가 넘는 손실을 적에게 입혔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 국민들에게 밴 플리트 장군의 미육군 제8군과 이를 지원하는 공군 및 해군의 탁월한 능력, 용맹성, 그리고 투지를 고취할 것이다.

1. Having visited all US Corps, all US Divisions, and the 1st ROK Division, I wish to cite all these units to you for superior spirit and conduct in battle. I particularly cite the US Army’s 2nd Infantry Division, Major General C L Ruffner, commanding, which has received the principal blow of the hostile main effort. It has inflicted losses, which conservatively estimated, exceed, I belive, 20 times its own. It would be an inspiration to our people to know of the professional competence, the gallantry, and the fighting spirit of General Van Fleet’s Eighth US Army and its supporting Air Force and Naval Forces.

2. 한국군 제2사단과 제6사단은 적의 가벼운 공격, 그리고 때로는 강력한 공격에 맞서 매우 훌륭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아직 자세한 사항이 파악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군 제3, 5, 7, 9사단은 형편없었고 막대한 양의 장비를 상실한 것이 명백하다. 한국군 제1군단은 적과의 교전이 제한적이긴 했으나 잘 싸웠다. 이런 유감스러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2. ROK 2nd and 6th Divisions have performed very creditable against moderate and in some cases strong enemy attacks. Although full details still lacking, it is clear that ROK 3rd, 5th, 7th and 9th Divisions have performed discreditably with loss of large amounts of equipment. ROK I Corps has done well though it has had little contact. We are continuing our efforts to correct this lamentable situation.

3. 이승만 대통령은 5월 18일 언론 회견에서 미국이 잘 훈련되어 있는 한국군에게 장비를 제공한다면 미군을 철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발언했다. 본인은 무초 대사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런 말도 안되고 유해한 발언은 그만 둘 것을 권유하려 한다. 본인은 이 문제를 국무부를 통해 제기하고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강한 압박을 가하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3. President Rhee was reported to have stated to Press on 18 May that, if US would equip his already well trained Soldiers, American Troops could be withdrawn. I continue to seek through Ambassador Muccio to induce President Rhee to cease making such flagrant and damaging statements. I suggest consideration be given to presenting the matter through channels to Department of State with object of having strong pressure brought to bear to correct this situation.

4. 이 전문의 첫 번째 문단은 언론에 공개할 것을 요청함.

리지웨이

4. Recommend that 1st part of this message be released to Press.

Ridgway

CX62985(1951. 5. 21), James A. Van Fleet Papers, Box 86, Republic of Korea Army.

2번 항목은 현리 전투가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끼쳤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미군에 비해 화력이 부족하고 병력으로도 열세라는 문제를 고려해야 하긴 합니다만 1951년 초의 한국군이 심각한 문제가 있었음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한국군이 중국군에게 약하다는 점이 수 차례의 전투로 드러나긴 했습니다만 현리전투는 그 중에서도 최악의 패전이었습니다.

리지웨이가 3번에서 지적한 것 처럼 현리전투는 그동안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한국군의 증강을 추진하고 있던 이승만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습니다. 한꺼번에 군단급 제대가 와해되고 장비를 대량을 상실하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낯이 두꺼워도 무작정 군사원조를 하라고 요구할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이승만은 1950년 말 부터 국민방위군으로 대표되는 대규모 병력동원과 이를 위한 무기조달에 주력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무기조달의 경우는 미국이 원조를 해 주지 않을 경우 캐나다를 통해 소총을 조달하는 방안까지 고려되었을 정도로 이승만은 병력 증강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리전투는 이승만의 병력 증강 시도에 치명타였습니다.

유명한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현리 전투의 결과 한국군에 미군 지휘관을 배치하는 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될 정도로 한국군 장교단의 지휘능력은 불신의 대상이 됩니다. 그랬다면 한국군이 태평양전쟁 이전의 필리핀군과 비슷해 졌겠지요.

2010년 8월 19일 목요일

패튼의 셔먼 사랑?

우리가 생각하기엔 참 이해가 안가는 일이지만 패튼은 많은 사람이 형편없다고 생각한 셔먼 전차를 이상하게도 높게 평가했습니다. 미군이나 영국군 지휘관들의 2차대전 회고록을 보면 셔먼의 불쌍한 성능에 대한 한탄(?)이 꽤 많은데 만약 패튼이 오래 살아남아 회고록을 썼다면 셔먼에 대해 어떤 평을 했을지 궁금하군요.

어쨌든 2차대전 중 패튼은 기이할 정도로 셔먼에 대해 높은 신뢰를 보였습니다. 황당하게 들리지만 패튼은 전쟁 중 셔먼에 대해 “세계 최고의 전차”라고 평하기도 했다지요.*  물론 속으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허세를 부렸던 것 같습니다. 패튼은 독일 전차에 대한 ‘루머’가 전차병들은 물론 미국 본토에서 전차를 생산하는 노동자들의 사기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 우려해서 허세를 부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패튼과 셔먼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정말 패튼의 진심이 뭐였을지 궁금합니다.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죠.

노년에 밴(플리트)은 일부 사람들이 뛰어나지만 기이하다고 생각한 패튼 장군의 뛰어난 쇼맨십 사례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패튼 장군은 밴 플리트와 함께 이동하던 중, 밴의 제7기갑사단 전차가 포탑 전면에 모래자루를 덮은 채 지나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패튼 장군은 행렬을 정지시키고 마구 욕을 퍼부어 대며 대열의 첫번째 전차로 뛰어가 동체에 덮여 있던 모래 자루들을 길가로 던져 버렸다.

“너희 지휘관들은 모래자루가 전차의 포탄 충격을 증폭시켜 전차 승무원들이 모두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이냐?”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모든 전차가 모래주머니를 치우고 출발하였으며, 패튼 장군은 이 광경을 지프 위에 올라서서 쳐다보았다. 모래자루의 필요성은 논란거리가 될 수 있겠지만 패튼 장군의 이러한 행동은 모든 장병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것 만은 틀림없다.

폴 F. 브레임/육군교육사령부 번역실 옮김, 『승리의 신념 : 밴 플리트 장군 일대기』(봉명, 2002), 205쪽

제 개인적으로는 저게 전쟁이 거의 끝날 무렵에 일어났으니 말이지 만약 1944년에 미군 전차병들이 독일 전차에 골머리를 앓던 때 저런 짓을 했다면 전차병들이 가만히 있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패튼은 미국 전차의 성능에 대한 혹평이 이어지자 셔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We’ve got the finest tanks in the World!”. Daivd E. Johnson, Fast Tanks and Heavy Bombers : Innovation in the U. S. Army 1917-1945(Cornell University, 1998), p.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