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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21일 화요일

아데나워, 그리고 동맹에 대한 잡담

요즘 읽고 있는 책 중에 Steven J. Brady의 Eisenhower and Adenauer : Alliance maintenance under pressure, 1953-1960이 있습니다. 이제 막 읽기 시작해서 진도가 별로 나가지 않았는데 앞 부분 부터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부분은 1953년 미국을 방문한 아데나워가 아이젠하워에게 한국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독일 의료인력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한 부분입니다. 명목상으로는 의료인력 지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간접적으로나마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군사적 기여를 하겠다는 의사 표명인 셈이지요. 사실 이때는 독일의 재무장 논의가 급물살을 타던 시점이라 이건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무렵  기민당은 10만명 수준의 군대 창설을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지원이 절실했고 쓸모있는 동맹이라는 점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이후 소련의 엉성한(???) 평화공세에도 불구하고 친미-친서방노선을 고수해 나갔습니다. 이것은 독일이 통일 된 뒤 돌아보니 결과적으로 매우 현명한 선택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결과를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겠지만. 2차대전 이후의 소련은 독일을 위험한 잠재 적국으로 보았기 때문에 독일을 중립화 해 실질적으로 무력화하려고 기도했습니다. 물론 아데나워같은 보수진영의 선수들은 이런 엉성한 속임수를 간단히 꿰뚫어 보았기 때문에 친미노선을 고수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요즘 중국이 한미동맹을 약화시키고 한국을 중립적으로 만들려고 기도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역시나 흐루쇼프 이래의 엉성한 속임수인게 한눈에 보이는데 문제는 이런 조잡한 수작이 의외로 민족주의적인 진영에서 잘 먹히는 것 처럼 보이는 겁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긴 합니다만 한미동맹이 존속하려면 한국 쪽에서 동맹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줘야 합니다. 그런데 민족주의적인 진영은 이런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요. 한국전쟁 직후와 같이 대립구도가 명확한 상황에서는 동맹이 비교적 잘 기능했습니다만 냉전이 끝나고 표면적으로 평화가 정착된 지금 시점에서는 안보적 동맹이 제대로 돌아가기가 어렵습니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점은 흐루쇼프가 엉성한(?!?!) 평화공세를 시작했을 때 한국 내의 일부 민족주의적 지식인들은 이것을 새로운 변화의 전조로 받아들였다는 점 입니다. 그리고 1960년대에는 제3세계의 부상을 바라보면서 미국에 종속(?!?!)된 상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현재의 한미동맹 구도에 비판적인 집단 중 일부는 바로 1960년대에 뿌리를 둔 지식인들이지요. 물론 저도 미래를 내다보는 재주가 없으니 예언은 할 수 없습니다만 과거 이러한 민족주의적 지식인들의 전망이 계속해서 빗나간 것을 생각한다면 이들의 주장이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2010년 10월 6일 수요일

어떤 희망사항


이 블로그가 늘 그래왔듯 썰렁한 이야기나 해볼까 합니다.

미군이 서부유럽에서 본격적으로 독일군과 대규모 기갑전을 벌이면서 미제 전차가 독일군의 전차에 비해 여러모로 열세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물론 이런 현실을 억지로 외면하려 한 패튼과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사실은 사실이지요. 미육군은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부랴부랴 신형전차의 배치를 서두르게 됩니다. 나중에 M-26으로 불리게 될 이 물건은 상당한 기대를 받았던 모양입니다.

아이젠하워도 M-26에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그는 육군참모총장 마샬(George C. Marshall)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육군의 장비 중 지프와 M-1 소총 말고는 독일군의 무기보다 나은게 없다는 비판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가 신형 T-26을 대량으로 확보하기만 한다면, 특히 강화된 90mm 포를 탑재한 더 최신형의 전차를 가지게 된다면 우리 기갑부대는 기동성과 숫자는 물론 화력 면에서도 우위에 서게 될 것 같소.”

Forrest C. Pogue, George C. Marchall : Organizer of Victory 1943-1945(Viking Press, 1973), p.553

그런데 아이젠하워가 이 편지를 마샬에게 보낸 것은 1945년 3월 12일 이었습니다. 아이젠하워의 희망사항과 달리 미군 기갑부대가 독일 기갑부대를 질적으로 압도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높은 분들은 잘 몰라요
이게 다 셔먼 때문이다

2009년 9월 22일 화요일

높은 분들은 잘 몰라요

1944년 여름의 어느 날,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병기과는 가동불능이 된 독일 전차 두 대를 몬티(몽고메리)가 살펴볼 수 있도록 그의 지휘소로 가져왔다. 한 대는 튀니지의 제벨스(Djebels)에서 아군의 셔먼들을 압도한 것과 같은 형식으로 납작한 형태를 한 63톤의 6호전차 E형 티거였다. 그 옆에는 아군의 대전차포를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경사진 전면장갑을 가진 50톤급의 5호전차 판터가 있었다. 티거는 무겁고 둥근 포탑에 장포신 88을 탑재하고 있었다. 이 전차의 (포탑 전면은) 장갑의 두께가 7인치에 달했다. 티거는 아프리카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럽에서도 연합군이 전장에 투입한 모든 전차를 압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티거의 엔진은 겨우 650마력에 불과했으며 이때문에 고장이 잦았다. 사실 티거의 기계적 고장에 따른 손실이 전투에서 연합군이 격파한 것 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가벼운 판터, 또는 5호전차는 그 중량에 비해 엔진 출력이 더 좋은 편이었다. 티거는 공포스러운 88을 탑재했는데 판터는 그 대신 장포신에 높은 포구초속을 가진 75mm포를 탑재하고 있었다. 판터는 이러한 무장과 경사진 차체 때문에 아군의 셔먼에 비해 훨씬 우세했다.

셔먼은 원래 75mm포를 탑재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독일전차들의 두터운 전면장갑에는 완전히 무용지물인 무기였다. 셔먼은 독일 전차를 둘러싸고 측면에서 명중탄을 날려야만 격파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군 전차병들은 종종 독일전차를 격파하기 위해서 한대나 두대의 전차와 그 승무원들을 잃게 된다고 불평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독일 전차들을 격파할 수는 있었지만 그 대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한도 이상으로 더 많은 전차를 잃어야 했다. 병기국은 그 뒤 75mm포를 높은 포구초속을 가진 신형 76mm포로 교체하는 것을 앞당겼다. 그러나 이 신형 전차포 조차 적 전차의 장갑을 관통하지 못하고 튕겨나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아이젠하워는 신형 76mm포의 성능 부족에 대해 전해듣자 분통을 터뜨렸다.

"자네 말은 우리의 76이 이 판터들을 격파하지 못한다는 뜻인가? 이런, 나는 이 포가 이번 전쟁에서 죽여주는 포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Why, I thought it was going to be the wonder gun of the war"

나(브래들리)는 이렇게 말했다.

"어. 이게 75보다 낫긴 합니다만 신형 탄두는 훨씬 작습니다. 이 탄두는 독일 전차의 (전면)장갑을 뚫지 못하지요."

아이크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투덜거렸다.

"왜 나는 항상 이런 문제에 대해서 뒤늦게 알게 되는건가? 병기국에서는 나한테 76은 독일놈들이 가진 것은 모조리 잡을 수 있다고 했단 말이야.(Ordnance told me this 76 would take care of anything the German had.) 지금은 자네로 부터 76은 저 빌어먹을 것들을 박살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구만."1)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아이젠하워는 일선의 병사들은 이미 잘 알고 있던 사실을 1944년 7월이 넘어서야 알게 됐습니다. 사실 북아프리카에서 티거를 비롯한 독일 전차들에게 호된 신고식을 치른 뒤에도 미군 고위층은 셔먼의 성능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병사들의 실전경험 부족이 문제라고 생각했으며 일부는 1944년이 될 때 까지도 75mm를 탑재한 셔먼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2) 1943년 여름, 몇대의 판터를 노획한 소련이 이 중 한대를 영국에 제공했고 판터에 대한 기술적 분석도 이루어졌지만 미군 정보당국은 판터도 티거와 마찬가지로 독립 부대에서 소규모로 운용될 것으로 예측했다고 합니다. 1943년 말 까지만 하더라도 미군 정보당국은 판터가 기갑사단의 주력 장비가 될 것이라는 예측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44년 2월이 되어서야 독일군의 기갑사단 편제가 개편되었으며 판터를 장비한 전차대대가 기갑사단 당 1개 대대는 편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등 고위 지휘관들은 이 정보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3) 연합군 고위 지휘관들은 노르망디 상륙 이후에야 판터의 위력을 실감하게 됐습니다만 단시일 내에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이미 늦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44년 겨울, 아르덴느에서 독일군이 대규모 기갑부대를 동원해 반격을 감행하자 그때 까지 셔먼에 기대를 걸고 있던 지휘관들도 생각을 고쳐먹게 됐다고 합니다. 게다가 전선의 병사들이 미국으로 보내는 편지에 전장에서 경험한 독일 전차의 괴력을 언급했기 때문에 미국 국내에서도 전차의 성능문제는 심각한 문제로 떠오릅니다. 1945년 초 부터 미국 언론들은 군 당국에 전차의 성능문제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4) 뉴욕타임즈의 특파원 핸슨 볼드윈(Hanson Baldwin)은 군 고위층이 전차의 성능격차를 왜곡하고 있다며 의회가 나서서 조사할 것을 촉구하기까지 합니다.5)

좀 놀라운 것은 아이젠하워는 일선 전차병들의 경험을 소개한 언론 기사가 쏟아진 이후에도 여전히 독일군과 미군의 전차 성능격차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아이젠하워는 1945년 3월 18일 2기갑사단장 화이트(I. D. White) 준장과 3기갑사단장 로즈(Maurice Rose) 소장에게 이 문제를 조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두 사단장이 병사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보고서로 정리해서 올린 뒤에야 아이젠하워는 전차의 성능격차를 인정하고 육군부에 이 보고서의 내용을 전달하게 됩니다.6) 뭔가 손을 쓰기에는 늦어도 한참 늦은 시점이었습니다.


1) Omar N. Bradley, A Soldier's Story, Henry Holt and Company, 1951, pp.322-323
2) David E. Johnson, Fast Tanks and Heavy Bombers : Innovation in the U.S.Army 1917-1945, Cornell University Press, 1998, p.191
3) Steve Zaloga, Armored Thunderbolt : The U.S. Army Sherman in World War II, Stackpole, 2008, p.97
4) David E. Johnson, ibid., p.194
5) Steve Zaloga, ibid., p.268
6) David E. Johnson, ibid., pp.196-199

※ 이와 관련해서, 채승병님의 'M26 퍼싱 전차의 배치 지연은 누구의 책임인가?'도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아주 재미있습니다.

2008년 6월 5일 목요일

2차대전 중 미-영 공군 지휘관들의 갈등 문제

서로 잘났다는 사람들을 모아 놓으면 이런 일이 발생한다는군요.

비록 영국 공군과 미국 육군항공대의 경우 육군, 해군에서 있었던 것 만큼 지휘관들간의 갈등이 심각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육군이나 해군보다 더 나았다고 보기도 어렵다. 영국과 미국의 많은 고위 장교들은 그들의 뛰어난 능력과 전쟁 이후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고위 지휘관들 중에서 연합원정공군(AEAF, Allied Expeditionary Air Force) 사령관 리-맬러리(Trafford Leigh-Mallory) 대장(Air Chief Marshal)은 같은 영국인인 테더(Arthur Tedder)를 싫어했으며 또 자신의 하급자이며 제 2전술항공군(Second British Tactical Air Force) 사령관인 커닝햄(Arthur Coningham)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커닝햄 역시 자신의 상급자인 리-맬러리를 혐오했기 때문에 테더의 역할 중 하나는 커닝햄과 리-맬러리 사이를 중재하는 것 이었다.
1943년 12월 미 전략공군(U. S. Strategic Air Force) 사령관에 임명된 스파츠(Carl Spaatz) 중장역시 리-맬러리와 사이가 나빴으며 그는 전술공군 출신이 자신의 전략 공군부대를 건드리는 것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이점은 당시 영국공군 폭격기사령부(Bomber Command) 사령관이었던 해리스(Arthur Harris) 대장도 마찬가지였는데 해리스는 폭격기부대를 마치 자신의 “영지”와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인관계가 원활했던 제 8공군 사령관 둘리틀(James Doolittle) 중장도 제 8공군 예하의 전투기부대를 폭격기 호위 대신 전술작전에 투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극도로 반대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 강인하고 굳은 의지를 가진 장군들이 의견 일치를 보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이들은 협력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었다.

또한 공군과 육군 지휘관들간의 관계도 원만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치력이 뛰어난 아이젠하워 조차도 리-맬러리의 성질은 견뎌내질 못 했으며 두 사람이 만나면 아이젠하워는 감정을 자제하지 못 했다. 아이젠하워의 참모장이었던 비델 스미스(Walter Bedell Smith) 중장에 따르면 연합군 지휘관 중에서 몽고메리를 제외하면 아이젠하워의 인내심을 바닥낼 정도로 성격이 더러운 인물은 리-맬러리가 유일했다고 한다.
미국 제 1군사령관 브래들리(Omar Bradley) 장군은 제 9공군 사령관 브레러튼(Lewis Brereton) 소장이나 제 9전술항공군 사령관 퀘사다(Elwood Quesada) 소장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괴팍한 제 21집단군 사령관 몽고메리 원수는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임무를 잘 수행했던 커닝햄이 (자신에게)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그를 싫어했다. 실제로, 몽고메리는 프랑스에 상륙한 이후 자신의 사령부 건물을 커닝햄과 같은 곳이 두지 않으려 했다. 이 때문에 브룩(Alan Brook) 원수가 몽고메리를 설득하는 것을 돕기 위해 노르망디로 갈 것을 자청할 정도였다. 결국 몽고메리와 커닝햄이 서로 이웃한 건물에 사령부를 설치한 것은 1944년 9월이 되어서 였지만 전쟁이 끝날 때 까지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혐오감을 해소하지 못 했다.

그렇기 때문에 각 지휘관들간의 관계는 연합군 공군의 조직력이 평균 이상의 우수한 성과를 보인 원인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D-데이가 있기 수 개월 전에 영국측은 미군이 자신들의 전략 폭격기 부대를 영국군의 통제하에 넣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을 알게 됐으며 영국군 내부에서도 해리스는 폭격기 사령부를 전술 공군적 사고방식을 가진 리-맬러리의 휘하에 넣는 것에 반대하고 있었다. 결국 공식적인 명령계통에 반하는 이상한 절충이 이뤄졌다. 리-맬러리는 명목상 원정공군 사령관이었지만 전략 폭격기 부대와 예하 전투기 부대는 (실제로는 해리스와 스파츠가 지휘했지만) 형식상 공군참모총장(Chief of the Air Staff)인 포탈(Charles Portal) 대장의 지휘를 받았다. 1944년 4월 14일(비공식적으로는 이보다 빨랐다)에 오버로드 작전에 투입되는 모든 공군부대는 전구사령관인 아이젠하워의 지휘를 받게 됐다. 그러나 전략공군 부대의 운용은 아이젠하워의 공군 대리인 테더가 담당했으며 실질적인 작전 지휘는 스파츠와 해리스의 담당이었다.; 그리고 전술공군만이 사령관인 리-맬러리의 통제를 받았다. 이런 절충안은 지휘관들간의 분란을 막는데는 어느 정도 기여했지만 명령 계통이 명확하지 않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물론 긍정적인 요소도 존재했다. 고위 지휘관들의 아래 단계에서, 즉 영국과 미국의 전술 지휘관들의 관계는 대개 좋았다. 83 Group 사령관인 브로더스트(Harry Broadhurst) 소장(Air Vice Marshall)은 미국측의 퀘사다와 사이가 좋았으며 퀘사다는 커닝햄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고위 지휘관들 – 테더, 커닝햄, 브레러튼, 스파츠, 해리스 – 은 항공 작전을 조율하기 위해 거의 매일 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는 보통 오전 11시에 열렸으며 참석자들은 그 전날 있었던 상황에 대해 토의하고 다음날 작전의 지침을 만들었다. 참석자들은 오버로드 작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으며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서로간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휘관들간의 관계와 항공 전역의 지휘 체계는 연합군이 성공한 원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Alan Wilt, "The Air Campaign", D-Day 1944,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4), pp.135~139

아이젠하워가 주최하는 작전회의에 몽고메리와 리-맬러리의 더블 콤보가 들어가면 볼만했을 듯 싶습니다.

2006년 10월 16일 월요일

Die Gefangenen - Guido Knopp

귀도 크놉(Guido Knopp)의 저작들은 대부분 방송용 다큐멘터리와 함께 기획됐고 독일 제 3제국 시기를 다루고 있다. 이중 일부는 국내에도 번역된 바 있다.

Die Gefangenen은 2003년 ZDF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로 편성표를 보니 책 또한 다큐멘터리와 같은 구성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하긴, 그러고 보니 이건 크놉의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다. 어쨌건 2003년에 한 이 다큐멘터리는 아직 보지 못했으니 뭐라고 말 할건 없고 간단히 이 책을 훑어본 느낌만 적어볼까 한다.

첫 장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생포된 포로들부터 시작해 바그라티온 작전까지 동부전선에서 생포된 포로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주제는 잘 알려져 있고 다른 저작들에서도 많이 다루는지라 특별히 흥미가 당기진 않는다.
두 번째 장은 영국에 잡힌 포로들의 이야기이고 세 번째 장은 소련에 강제 이송된 민간인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강제 이송된 민간인들의 이야기는 이전에는 단편적으로 접했는데 이 책에서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네 번째 장은 포로생활치고는 팔자가 늘어졌다는 미국의 포로수용소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이 장에는 재미있는 사진이 많다.(대표적인 것이라면 역시 콜라를 마시면서 즐거워하는 독일 포로들. 코카콜라 광고에 이 사진을 써먹으면 어떨가?)
다섯번째 장은 전쟁 종결 직후 독일내의 임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들의 생고생을 다루고 있다. 이 주제는 우익 작가들이 “아이젠하워의 학살” 같은 선정적인 제목으로 즐겨 써먹는 소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프랑스에 끌려간 포로들의 이야기도 있는데 원래 유태인의 추방지로 고려됐던 마다가스카르에 독일 포로수용소가 설치됐다는 것은 꽤 아이러니하다.
마지막 장은 포로들, 특히 소련에 수용됐던 포로들의 귀환 과정을 다루고 있다. 어떻게 보면 2차 대전은 사실상 이 때 끝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전쟁으로 완전히 붕괴된 한 세대의 이야기가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장이다.

간혹 2차 대전당시 독일인들이 겪은 고난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독일은 전범국이네” 어쩌구 하는 이야기들을 신물나게 듣게 된다. 글쎄? 하지만 역사적인 고통이 어떤 한 집단의 전유물 인 것 처럼 떠드는 것 보다 더한 위선이 어디 있겠는가. 어차피 전쟁은 모든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 뿐이다. 가끔씩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여 보는 것도 정신건강엔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를 딱딱하지 않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이책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다. 오늘부터 조금씩 번역을 해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