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전차대대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전차대대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1년 8월 27일 토요일

읽는이를 답답하게 하는 일본 육군의 대전차전 사례 하나

2차대전 당시 일본군 보병의 빈약한 대전차전 능력은 아주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래서 유럽전선이었다면 전차들이 보병의 손쉬운 사냥감이 되었을 상황이라도 일본군은 별 볼일 없는 성과만 거뒀던 것 같습니다. 아래의 사례는 레이터 전투 당시의 일화입니다. 보시면 아시기겠지만 보병이 제대로 된 대전차 화기를 갖췄다면 그야말로 전차가 큰 피해를 봤을 상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차를 공격한 쪽이 일본군이었다는 것이죠;;;;

제763전차대대는 96보병사단에 배속되었다. 이 대대는 상륙 당일 산 호세San Jose인근에 상륙했다. 763전차대대는 보병을 지원하면서 내륙으로 수천 야드를 진격했지만 해안가 뒤로 펼쳐진 습지대에 가로 막혀 옴싹달싹 못하게 되었다. 보병들만 계속해서 전진했다.

10월 22일, C중대와 D중대의 3소대는 무르고 질척거리는 지형에 가로막혀 다시 해안으로 되돌아가 가야 했다. 이들은 해안에 도착하자 (북서쪽으로 4마일 떨어진) 피카스Pikas로 가는 길을 찾은 뒤 그곳에서 어려움에 처해 있는 383보병연대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찰스 파이페Charles G. Fyfe중위가 지휘하는 C중대의 1개 소대에 래퍼티David M. Rafferty가 지휘하는 D중대의 경전차 소대가 배속되어 이 임무를 맡게 됐다. 보병들은 이 전차 부대들이 지나가야 할 지역을 거쳐서 진격했지만 일본군을 정글에서 완전히 소탕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전차들이 지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의 오른쪽 측면의 카트몬Catmon산에는 우회하고 넘어간 일본군의 대규모 거점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차를 보호할 보병이 전혀 배속되지 않았다.

피카스로 가는 길은 상태가 나쁜데다 구불구불했고 교량은 통과 가능한 하중이 낮았다. 대열을 선도하는 중형전차가 교량을 망가트렸기 때문에 후속하던 경전차들은 전차가 건널 수 있는 얕은 여울목을 찾아야 했다. 이 때문에 경전차 소대는 다소 뒤쳐지게 되었다.

보병이 배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전차와 중형전차 모두 지나가는 길에 있는 여울, 커브길, 오르막길 마다 주의를 하며 지나갈 필요가 있었다. 경전차들이 막 한 고비를 넘기려 했을 때 도로 왼편의 덤불 속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며 갑자기 막대기에 달린 폭약을 가진 일본군 한명이 덤불속에서 튀어 나와 선두 전차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일본군 병사는 후속하던 전차의 사격에 의해 중간에 쓰러졌다. 길을 따라 수백 야드 더 전진하자 도로의 오른편에 있는 무성한 덩쿨속에서 또 다른 일본 병사가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선두 전차가 당해서 오른쪽 궤도가 파괴되었다. 전차장 래퍼티 중위는 자신의 전차를 수리하는 동안 소대의 다른 전차들에게 자신의 전차를 둘러싸고 경계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차들이 경계 대형을 취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적군이 공격해 왔다. 군도를 휘두르는 장교가 이끄는 약 30명의 일본군이 덤불 속에서 튀어나왔다. 일본군들은 고함을 지르고 사격을 퍼부으면서 전차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일본군 장교는 뭔가를 잘못 알고 있었는지 자신만만하여 마지막 전차로 달려들었고 차체의 기관총을 군도로 힘껏 내리쳐 반쪽을 내려고 했다. 그 장교는 곧바로 다른 전차의 기관총에 벌집이 되었다. 짧지만 요란한 교전이 끝나자 일본군은 후퇴했지만 계속해서 가까운 거리에서 경전차 소대를 소화기로 공격했다.

그때 중형전차 소대는 상당히 앞서가고 있었다. 래퍼티 중위는 파이페 중위에게 무전을 날려 그의 소대가 어려움에 처했다고 알렸다. 일본군의 사격 때문에 노출된 상태에서 이동하는 것이 어려웠고 경전차는 공간이 좁아서 기동불능이 된 전차의 승무원들 까지 태울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전차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파이페 중위는 경전차 소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으나 전차 한대 만을 좁은 길을 따라 돌려보낼 수 있었다. 이 전차는 불운에 처한 경전차 소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래퍼티 중위와 그의 부하들은 자신들의 전차의 탈출용 해치로 빠져나와 도랑을 따라 기어서 구출하러 온 중형 전차의 탈출용 해치로 들어갔다. 그리고 경전차 소대는 후퇴를 하려 했다.

일본군의 강력한 사격 때문에 이 기동은 매우 어려웠다. 다른 전차 한대가 막대기 폭약에 맞았다. 이동하는 것 보다는 정지해 있는 것이 덜 위험한 것으로 보였다. 파이페 중위에게 교신이 취해졌고 파이페 중위는 다시 중대장에게 알렸다. 그리고 경전차 소대는 그 위치에 남아 일본군이 모습을 드러내면 사격을 산발적으로 가했다.

마침내 C중대에서 다른 중형전차 소대가 도착했다. 일본군은 격퇴되었고 부대 전체가 중대 지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루가 꼬박 지나갔다. 조금도 진격을 할 수 없었다. 전차 한대를 상실했다. 전차들은 383보병연대에 도착하지 못했다.

Committee 16, Officers Advanced Course  The Armored School, Armor in Leyte : Sixth Army Operations, 17 Oct-26 Dec 44, (1949). pp.94~97

전차에게 불리한 정글에서, 게다가 좁은 도로를 중심으로 지원하는 보병조차 없이 고립된 경전차 1개 소대를 격파하지 못한 것 입니다. 일본군의 대전차 전력이 얼마나 빈약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같은 시기의 독일군 이었다면 763전차대대 D중대의 경전차 소대는 물론이고 구원하러 달려온 C중대의 중형전차 소대도 상당한 손실을 각오해야 했을 것 입니다. 실제로 독소전 초기 다소 빈약한 대전차 화력을 갖췄던 독일 보병들이 위에서 제시한 사례와 같은 지형에서 T-34나 KV 등의 강력한 전차를 상대로 보여준 실력을 보면 일본군은 장비만이 문제였던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전차의 성능이 보잘것 없었던 1935년의 이탈리아-이디오피아 전쟁만 하더라도 보병들이 변변한 대전차 화기 없이 경전차를 때려잡을 수 있었습니다만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 전차는 기술적으로 무서운 발전을 이뤘지요. 사실 셔먼은 그렇다 하더라도 1944년 기준으로 별볼일 없는 성능이었던 스튜어트 경전차들 조차 격파하기 어려운 상대였다니 일본 육군은 장비면에서 정말 답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2010년 10월 14일 목요일

뭔가 이상한 인종차별;;;;

1945 년 4월 2일, 뷔딩엔 인근에서 미군에게 포위된  6SS 산악사단은 부대를 소규모로 나누어 돌파를 시도했습니다. 포위망을 형성한 미군 부대 중에는 흑인으로 편성된 제761전차대대도 있었는데 이 대대의 한 장교에 따르면 이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전투 임무에서 우리는 독일군을 숲에서 몰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우리는 낮게 사격을 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부하들에게 말했다. 제군들, 사격을 좀 높이 해서 나무들을 날려 버려라. 이렇게 해서 파편이 좀 더 많이 튀었고 많은 나무들이 쓰러졌으며 독일군들을 숲에서 나오게 할 수 있었다. 독일군들은 백기를 흔들면서 외쳤다.

“Kameraden!(전우들!) ”

나는 부하들에게 해치를 잠그고 전차 안에 있다가 적들이 전차 가까이 오거든 그대로 보병들에게 넘기라고 했다. 그런데 몇몇 친구가 해치를 약간 일찍 열었다. 독일놈들이 이걸 보더니 말했다.

“Schwarze Soldaten!(흑인 군인이다!)”

독일놈들 사이에 이 소리가 퍼지더니 녀석들은 다시 그 좆같은 숲으로 기어 들어가 버렸다.

-제761대대 C중대장 찰스 게이츠(Charles Gates) 대위의 회고

Joe W. Wilson, Jr, The 761st Black Panther Tank Battalion in World War II(McFarland, 1999), p.168

물론 다시 숲으로 들어갔던 독일군들은 생각을 고쳐 먹고 항복 했다지만 미군들은 기분이 별로 였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