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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25일 일요일

Robert M. Citino著, The Wehrmacht Retreats : Fighting a Lost War, 1943



로버트 시티노Robert M. Citino는 17세기 부터 20세기에 이르는 독일 군사사를 다루는 흥미로운 저작들을 잇따라 발표해 왔습니다. 시티노의 대표작인 The German Way of War : From the Thirty Years’ War to the Third ReichDeath of the Wehrmacht : The German Campaigns of 1942는 기동을 통한 단기 결전을 추구하는 프로이센-독일의 군사사상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어떠한 도전을 받고 한계에 부딛히게 되었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Death of the Wehrmacht에서는 작전 단위의 기동전을 통해 전략적인 열세를 상쇄하려 한 독일군의 시도가 처절하게 실패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시티노의 저작에서는 독일의 군사사상이 상대적으로 면적이 좁고, 잘 발달된 도시가 많은 서유럽과 중부유럽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합니다. 유럽의 한가운데에 있어 수많은 적국에 둘러 쌓여 있기 때문에 최대한 신속히 승리를 거두어야 하고 이때문에 단기간에 승부를 보기 위한 작전적 기동이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군사사상은 산업화의 시대를 맞아 본격적으로 도전을 받게 되었고 1차대전에서 독일은 패배하게 됩니다. 하지만 독일 군부는 1차대전의 경험을 통해 기동전에 대한 신념을 더 굳히게 됩니다. 소모전을 피하기 위해서 더욱 더 기동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독일의 전쟁 방식은 1940년 서부전역의 대승리를 통해 옳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1941년 소련을 침공하게 되면서 문제는 달라집니다. 소련의 광대한 국토와 막대한 인적자원, 산업동원력은 독일이 1941년 부터 1942년 까지 가한 일련의 전략적 공세를 분쇄해 버립니다. 북아프리카에서의 패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티노는 이 모든 것이 독일의 전쟁 방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 이었다고 지적합니다.


The Wehrmacht Retreats : Fighting a Lost War, 1943Death of the Wehrmacht의 후속편으로 1942년 전역에서 그 한계를 드러낸 독일군이 서서히 무너져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시티노는 이 시기의 독일군이 한계에 봉착한 전통적인 작전적 기동전으로 연합군의 반격에 맞서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 책에서는 튀니지, 1943년 초의 동부전선, 시칠리아, 쿠르스크 전투, 1943년의 이탈리아 전선, 1943년 하반기의 동부전선의 작전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각각의 전역을 분석하면서 독일의 전통적인 기동전 사상이 어떠한 한계를 드러냈는가를 지적합니다. 이를 통해 전통적인 프로이센-독일 장교단의 몰락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수백년에 걸쳐 발전해온 독일의 군사 사상이 한계에 봉착했을 때, 군사사상과 함께 유지된 프로이센-독일 장교단이라는 사회 계층도 함께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입니다. 이러한 틀에서 만슈타인, 클루게, 케셀링, 롬멜과 같은 독일 고급 장교단에 대해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1943년의 지중해 전역에 대한 서술에서는 막강한 보급 역량, 압도적인 항공력과 해군전력을 보유한 미영연합군 앞에서 독일군이 감행한 일련의 반격이 잇따라 분쇄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독일군은 우수한 군대였고 뛰어난 작전 수행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수많은 작전-전술 단위의 반격에서 그것을 입증했습니다. 또한 저자는 1942년~1943년에 걸친 롬멜의 퇴각 과정과 1943년 이탈리아군의 무장해제와 같은 군사적인 업적을 높게 평가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독일군은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그리고 살레르노에서 항상 신속하게 기동 전력을 집중하여 연합군의 취약한 지점을 타격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의 작전-전술적인 역량은 초기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미영 연합군의 막강한 항공력과 해군력, 그리고 방대한 보급에 의해 분쇄됩니다. 시티노는 연합군, 특히 미군이 독일군 보다 덜 공격적이고 작전 수행능력이 떨어졌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방대한 보급에 의해 뒷받침 되는 화력으로 충분히 상쇄할 수 있는 것 이었다고 지적합니다. 확실히, 저자가 지적하는 대로 압도적인 포병화력과 항공력을 가지고 있는데 굳이 보병의 희생을 무릅쓸 필요는 없는 것 입니다. 시티노는 독일군 장성들이 회고록 같은 사료를 활용해 시칠리아와 살레르노의 해안에서 독일군의 기갑전력이 연합군의 함포사격과 포병화력에 소모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독일군은 뛰어난 전투력으로 연합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강요할 수 있었지만 결국 소모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1943년의 동부전선에 대한 평가도 유사합니다. 소련은 방대한 전장이었고 소련군은 막대한 규모였습니다. 1943년 하계 전역에서 나타난 것 처럼 독일군이 한 지역에서 공세를 위해 역량을 집중할 때 소련군은 독일의 공격을 막아내면서도 동시에 여러 축선에 걸쳐 공세를 감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일 장교단은 우수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지만 1943년 시점에서는 소련 장교단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우수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또한 소련군은 1943년에 와서도 일련의 전술적 패배를 겪으며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있었지만 동시에 독일군을 소모시키며 서서히 붕괴시켜갔습니다. 그리고 쿠르스크에서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반격을 시작했을 때 독일군은 더 이상 이것을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오룔 돌출부 방어전 처럼 독일군 특유의 기동을 통해 소련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힐 수 있었지만 독일군 또한 함께 소모되었고 독일의 전통적인 전쟁 수행방식은 기울어진 추를 돌리는데 어떠한 역할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저자는 독일의 전통적인 전쟁 수행방식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독일 장교단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독일군 지휘관 중에서 최고로 꼽히는 만슈타인 조차도 단기전, 기동전의 전통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인물이었으며 산업화된 시대의 전쟁을 이해하고 해결책을 내놓을 수는 없는 인물이었다고 지적하는 것 입니다. 만슈타인이 거둔 최대의 승리인 1943년 초 우크라이나 전역 또한 이러한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건이었다고 평합니다. 소련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히고 전선을 안정시켰지만 결코 전략적인 균형을 되돌린 것은 아니었다고 그 한계를 지적합니다. 다른 독일 장군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평가를 합니다. 특히 범 지구적 단위의 전략적인 견해를 갖춘 인물이 거의 전무했다는 점을 혹독하게 비판합니다. 만슈타인 조차도 작전 이상의 범주를 바라보는 통찰력은 없었다고 보는 것 입니다. 저자가 독일 장성중에서 가장 크게 비판하는 것은 알베르트 케셀링입니다. 시티노는 알베르트 케셀링에 대한 전통적인 평가는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것이라고 봅니다. 케셀링의 이탈리아 방어전은 방어하기에 유리한 지형에서 점진적으로 철수하면서 소모전을 전개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만약 케셀링이 이탈리아에서 했던 것과 같은 방어전을 소련과 같은 환경에서 전개했다면 어떤 결과가 왔겠느냐며 반문합니다. 오히려 롬멜에 대한 평가가 좋은 편 입니다. 시티노는 롬멜이 엘알라메인 전투 이후 전개한 퇴각전에서 보여준 역량과 이탈리아 방어전략에서 보여준 통찰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독일군 지휘관들이 산업화된 시대의 전쟁에서 보여준 한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헤르만 발크의 회고록에서 인용한 다음의 구절은 20세기의 산업화된 총력전에서 독일의 전쟁 수행방식이 직면한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dem wir nichts entgegensetzen konnten.)


2011년 12월 28일 수요일

1942년 여름의 르제프 전투에 대한 잡담

르제프 지구에서는 1941년 말부터 1943년 초 까지 장기간의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군사사가 데이빗 글랜츠David M. Glantz가 1942년 겨울의 르제프 전투, 일명 마르스 작전을 다룬 Zhukov’s Greatest Defeat : The Red Army’s Epic Disaster in Operation Mars, 1942(University Press of Kansas)라는 저작을 발표할 때 까지 국제적인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독일어권에서도 1990년대 이전까지 이 전투를 직접적으로 다룬 단행본이라고는 호르스트 그로스만Horst GrossmannRschew, Eckpfeiler der Ostfront, (Podzun Verlag, 1962) 정도가 나왔을 뿐이니 말입니다. 르제프 지구의 전투는 1941년 겨울~1942년 봄 사이에는 모스크바 전투의 일부로서 간략하게 다루어 졌고 1942년 여름에는 독일군 하계 공세 당시 소련군의 반격 작전의 일부로서 간략하게 다루어졌으며 1942년~1943년 겨울에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그 직후 전개된 소련군의 동계대공세의 일환으로 서술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2차대전 종전 이후 50년이 넘도록 이 전투를 다룬 독립적인 저작이 200쪽도 안되는 그로스만의 책 한권이었다는 것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로스만의 저작은 1987년에도 재판이 되었죠. 그만큼 연구가 없었다는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데이빗 글랜츠의 저작이 큰 반향을 일으킨 뒤 러시아에서도 이 전투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글랜츠의 저작은 물론 위에서 언급한 그로스만의 저작 또한 러시아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일단 그 이전까지는 소련과 러시아에서 르제프 전투가 제대로 주목받지를 못했고 역사서술에서도 제외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을 타고 준비되다가 소련의 붕괴로 간행되지 못한 소련의 2차대전 공간사에서도 르제프 전투에 관한 내용은 다루어 지지 못했다고 합니다.1) 글랜츠의 문제 제기 이후 러시아에서도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고 러시아의 선구적인 연구인 올렉 콘드라체프Олег Кондратьев의 저작은 독일어로 번역되어 러시아 바깥에 소개되기도 했습니다.(영어로 번역되어 더 널리 알려지지 못한 건 유감이군요)2) 하지만 콘드라체프의 연구는 지나치게 독일군의 시각에 경도 되었으며 분량도 많지 않아 러시아에서는 팜플렛 수준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 모양입니다.3) 콘드라체프는 그로스만의 저작을 러시아어로 번역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사실 콘드라체프의 저작은 그로스만의 저작보다도 분량이 더 적습니다;;;; 훨씬 많은 사료를 활용할 수 있게된 시점에서 나온 후속연구가 1960년대의 저작을 크게 뛰어넘지 못했다는 점은 안타깝지요. 르제프 전투에 대한 러시아의 시각을 담은 보다 주목할 만한 연구는 2008년에 출간된 스베틀라나 게라시모바Светлана ГерасимоваРжев 42 : Позицонная боиня(르제프 42년 : 진지전)은 르제프 돌출부의 형성에서 1943년 독일군이 뷔펠Büffel작전을 실행하여 돌출부에서 후퇴할 때 까지를 잘 정리했습니다. 특히 1942년 7월 말 부터 9월까지 전개된 소련의 르제프 지구 공세(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를 비중있게 다루었다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것 처럼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독일의 하계대공세 당시 소련이 감행한 일련의 반격작전의 일부로 간략하게 언급되어 왔습니다. 독소전쟁사에 대한 영어권의 대표적인 저작인 존 에릭슨John EricksonThe Road to Stalingrad : Stalin’s War with Germany,(Yale University Press, 1999) 에서는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에 대해 단 두 쪽만을 할애하고 있으며 전투의 의의에 대해서도 독일군의 주공을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었다는 정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4) 그로스만의 저작을 제외하면 냉전기의 저작 중에서 이 하계공세에 대해 가장 충실하게 설명한 것은 얼 짐케Earl F. Ziemke와 마그나 바우어Magna E. Bauer의 공저인 Moscow to Stalingrad : Decision in the East, (Military Heritage Press, 1988)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 책에서도 1942년 여름의 르제프 전투는 독일군 하계공세시기의 주변부적인 사건으로 다루어지고 있기는 합니다만 중부전선에서 독일군의 공세계획과 소련군의 선제공격, 이에 맞선 독일측의 대응을 잘 정리하고 있지요.5)

소련군의 제2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데이빗 글랜츠라는 유명한 군사사가에 의해 단행본 한권 분량으로 다뤄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2차 공세에는 미치지 못해도 대규모 공세작전이었던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아직까지는 르제프를 둘러싼 장기간의 공방전의 일부로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에 대해  짤막한 잡담을 해 보지요.
소련군의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7월 30일 개시되어 9월 말 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작전에 투입된 소련군의 전력은 상당한 규모입니다. 두개의 전선군이 참여했으니 상당한 규모이라고 할 수 있지요. 여기에는 칼리닌 전선군 예하의 30군, 29군, 3항공군과 서부전선군 예하의 31군, 20군, 5군, 33군, 1항공군이 투입되었습니다. 총 전력은 43개 소총병사단, 72개 소총병여단, 21개 전차여단, 연대급 이상의 포병부대 67개, 근위박격포(다연장) 부대 37개 였습니다. 공세를 위해 작전을 앞두고 기갑전력과 포병이 대폭 보강되었습니다. 러시아 쪽의 기록에 따르면 칼리닌 전선군 예하의 30군은 전차 390대를, 서부전선군 예하의 5군은 120대, 33군은 256대를 보유했으며 주공이라고 할 수 있는 31군과 20군, 6, 8 전차군단의 네 부대는 949대의 전차를 보유했습니다. 포병 전력은 33군의 경우 1km당 40~45문, 주공인 20군은 1km당 122문, 칼리닌 전선군(30, 29군)은 1km당 115~140문이었습니다. 소련측은 이를 통해 주공인 31군 정면에서는 보병에서 4:1, 포병에서 6:1, 기갑에서 22:1, 20군 정면에서는 보병에서 6.9:1, 포병에서 6.2:1, 기갑에서 7.2:1의 우세를 확보했다고 판단했습니다.6)
독일측은 7월 마지막 주가 되어서야 소련군의 집결을 파악했지만 이것을 단순한 기만으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7월 30일 칼리닌 전선군의 30군과 29군이 한시간의 공격준비사격후 공격을 개시했고 이어 8월 4일에는 주공인 31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31군의 공격은 독일 161보병사단의 방어선을 완전히 붕괴시켰습니다. 모델이 지휘하던 9군에는 가용한 예비대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때문에 중부집단군 사령관 클루게가 히틀러를 설득하여 제한적인 공세작전이었던 뷔르벨빈트Wirbelwind 작전을 위해 사용하려던 1, 2, 5기갑사단과 78, 102보병사단이 시체브카 방면의 위협을 저지하기 위해 급거 동원됩니다. 한편 주코프는 완전히 붕괴된 161보병사단의 구역에 기동부대인 6, 8전차군단과 제2근위 기병군단을 투입해 전과를 확대하려 했고 독일군의 예비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축차투입되었습니다. 히틀러는 뷔르벨빈트 작전을 원래 계획 보다 제한적인 규모라도 감행하고자 했으나 8월 11일 시작된 이 작전은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소련군의 1단계 공격은 8월 23일에 종료되었고 이후 9월 초순까지 산발적인 교전이 이어졌습니다. 소련군의 2단계 공격은 9월 9일 시작되었고 30군은 르제프를, 31군은 주브초프를 공격했습니다. 특히 31군의 공격은 매우 강력해서 예비대로 있던 그로스 도이칠란트 차량화보병사단이 이 지구에 투입되게 됩니다. 그러나 9월 15일 소련군의 주공인 31군이 독일 72보병사단의 방어를 돌파하지 못하고 돈좌됨으로서 독일군에 있어서 위기는 지나가게 됩니다. 16일부터 3일간 계속된 비로 소강상태가 지속되었고 비가 그친 뒤 재개된 31군의 공격은 피해가 복구되지 못한 상태여서 그 이전만큼 강력하지가 못했습니다. 실질적으로 9월 24일 소련군의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종결됩니다.7)

상당히 대규모 전투였는데 이 작전에서 소련군이 입은 피해는 냉전이 지나고도 한참 지나서야 알려졌습니다. 데이빗 글랜츠가 르제프 전투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 이후 러시아 연구자들도 이 연구에 뛰어들면서 비로서 이 전투의 실상이 조금씩 밝혀 지기 시작한 것 입니다. 러시아 연구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에서 소련군이 입은 인명손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표.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시기 소련군의 인명손실
기 간
인명손실
30군
8월~9월
99,820
29군
8월~9월
16,267
31군
8월 4일~9월 15일
43,321
20군
8월 4일~9월 10일
60,453
5군
8월 7일~9월 15일
28,984
33군
8월 10일~9월 15일
42,327
[표 출처 : Светлана Герасимова, Ржев 42 : Позицонная боиня,(ЭКСМО, 2008), p.137]

다른 자료에 따르면 7월 말에서 9월 말 까지 29군은 51,000명, 30군은 117,000명, 31군은 90,000명, 20군은 60,000명의 인명손실을 입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이 작전에서 렐류센코Д. Д. Лелюшенко소 장이 지휘한 30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30군은 작전 개시당시 144,3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가 종료될 무렵에는 72,400명으로 전력이 50% 가까이 감소했습니다. 르제프를 둘러싼 소모전이 전개되면서 엄청난 손실을 입은 것 입니다. 이 부대는 작전 기간 중 45,000명 정도의 보충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편제를 유지할 정도의 전력이 남은 셈 입니다. 주공이었던 31군은 작전 개시 당시 138,800명이었으나 작전이 종료될 무렵에는 78,800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29군은 같은 기간 동안 57,800명에서 24,800명으로 줄어들었고 20군은 90,600명에서 45,100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8)  병력보충을 계속 받으면서도 작전이 종료될 무렵에는 50% 수준으로 감소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토록 엄청난 인명손실이 발생한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전통적인 역사서술에서 르제프 전투는 배제되어 왔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선 뒤에야 러시아 연구자들이 이 주제를 연구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아직까지 나온 성과들을 스탈린그라드나 쿠르스크와 같은 유명한 전투들과 비교하기가 어려운 수준입니다. 독립된 단행본들을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라니 안타까운 일 이지요.

하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데이빗 글랜츠가 제2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을 다룬 단행본의 서두에서 밝힌 것 처럼 르제프 전투에 있어 인간적인 측면입니다.9) 한 차례의 전투에서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은 싸움이 1년이 넘도록 계속되었는데 60년 가까이 지난 뒤에서야 조금씩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는 점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들게 합니다. 이 글에서 인용한 미하일로바의 글에는 르제프 전투를 경험한 미하일 클류에프라는 사람의 경험담이 짧게 실려있습니다.

삽코보 출신의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클류에프는 (그가 가진 문서에 따르면) 2월 17일 징집되어 3월 12일 부상을 당했는데 입대선서를 한 것은 1942년 5월 1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마을에서 징집된 42명이 (군복도 지급받지 못한채) 스웨터를 걸친 채로 전투에 투입된 이야기, 스타리차에서 르제프까지의 정처없는 여정, 그리고 이렇게 행군하는 동안 소총을 쏘는 방법을 그들 스스로 배워야 했던 이야기 등을 털어놓았다.10)

클류에프의 경험은 르제프에서 죽어간 다른 수많은 소련인들도 공유하는 것 일 겁니다. 클류에프와 함께 징집된 같은 마을의 42명 중 입대선서를 할 때 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몇 명이고 르제프 전투가 끝날 때 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몇 명일까요? 그리고 데이빗 글랜츠 같은 역사가가 르제프에 대한 진실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면 클류에프와 같은 이들의 묻혀진 이야기는 언제 쯤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을까요? 미하일로바가 지적한 것 처럼 르제프 전투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려 했을 무렵에는 이미 당시의 생존자들이 80대에 접어든 시점이었습니다. 수십만명의 생명이 정권이 원하는 역사를 쓰기 위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숨겨져 왔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두렵기까지 합니다.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이러한 문제에 공감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1) Tati’ana Mikhailova, “The Battle of Rzhev : Ideology instead of Statistics”,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18(2005), p.360
2) 독일어판의 제목은 러시아어판의 제목을 그대로 옮긴 Die Schlacht von Rshew: Ein halbes Jahrhundert Schweigen(르제프 전투 : 반백년의 침묵)입니다.
3) Mikhailova, ibid., p.361
4) John Erickson, The Road to Stalingrad : Stalin’s War with Germany,(Yale University Press, 1999), pp.381~382
5) Earl F. Ziemke and Magna E. Bauer, Moscow to Stalingrad : Decision in the East, (Military Heritage Press, 1988), pp.398~408
6) Светлана Герасимова, Ржев 42 : Позицонная боиня,(ЭКСМО, 2008), pp.112~113
7) Ziemke and Bauer, ibid., pp.400~408
8) Mikhailova, ibid., p.364
9) David M. Glantz, Zhukov’s Greatest Defeat : The Red Army’s Epic Disaster in Operation Mars, 1942,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9), p.2
10) Mikhailova, ibid., p.3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