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에 출간된 『국방개론(國防槪論)』을 읽다 보니 책의 후반부에 통일 이후의 군사력 증강에 대한 김홍일 소장의 구상이 나와 있었습니다. 기갑사단과 차량화사단의 편성 등 흥미로운 내용이 있어서 해당 부분을 한번 발췌해 봅니다.
오래된 책이다 보니 맞춤법을 요즘 사용하는 언어에 가깝게 고쳤습니다.
먼저 우리나라는 육군국 일까, 해군국 일까, 아니라면 육해군병진국 일까.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나라는 해안선이 면적에 비하여 과장(過長)함으로 해군국이 될 소질을 가졌다. 그러나 우리는 해외식민지를 가지지 못하였을 뿐더러 장래에도 가질 희망이 박약하다. 인국(隣國)인 소련, 중국이 모두 육군국 이요, 강대한 해군국 이던 일본도 패전으로 다시 해군재건이 불능케 되었다. 이것으로 보면 우리에게 가장 위협이 많은 것은 육군이매 우리는 육군을 주로, 해군은 보조로 국방군을 건설해야 할 것이다.
육군은 공세적 작전을 취하야 적을 국내로 들이지 않고 전장을 국외로 정해야 하겠음으로 중급장비사단의 1만2천명을 1개 사단으로 하고 최소 상비군 15개 사단은 있어야 한다. 그 중에서 만주와 시베리아의 대평원작전에 최소로써 3개 장갑사단과 3개 모터화사단이 필요하고 국경 산악지대작전에 2개 산악사단이 요구된다.
국력에 비하여 강대한 육군은 짧은 시일 안에 편성키 곤란함으로 통일 전에 남한에서 우선 강고한 기초를 세우고 통일 후에는 3, 4년 예산으로 수보(遂步) 건설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얼마만한 물자와 경제가 필요한가, 그 개념으로 보통 1개 장갑사단의 장비를 열거해 본다.
차량
輕탱크 287량
中탱크 110량
정찰차 276량
運兵트럭 28량
이륜 모터싸이클 408량
삼륜 모터싸이클 201량
화물트럭 1000량
무기
0.30 重기관총 44정
0.30 경기관총 412정
0.50 기관포 113정
37mm 대전차포 36문
60mm 박격포 21문
75mm 평사포 8문
75mm 유탄포 24문
81mm 박격포 16문
105mm 유탄포 12문
※탱크 車上의 기관총과 화포는 計入치 않았다.
이 외에도 병원차, 수리차, 보급차 등 다수 차량이 있다.
金弘一, 『國防槪論』, 高麗書籍株式會社, 1949, 82~85쪽
이 글을 읽은 느낌은 지난번에 썼던 ‘이청천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과도 비슷합니다. 김홍일 소장도 이청천과 비슷하게 한국의 주적은 ‘북괴’가 아니라 소련과 중국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래에 건설될 통일 한국군 15개 사단 중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6개 사단을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작전할 기계화 부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김홍일 소장이 이 글을 쓰던 1948년~1949년 초만 하더라도 남한에서는 북한 인민군은 별볼일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괴뢰들은 제껴 두고 이들의 상전인 중국과 소련을 상대할 구상을 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이것은 이청천의 구상과도 동일한 배경에서 나온 것 입니다.
다음으로 흥미로운 점은 기갑사단의 장비 문제입니다. 먼저 과도하게 기계화장비에 대한 의존이 높고 보병의 비율은 기형적일 정도로 작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2차대전 당시의 기동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나온 구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비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경전차와 중전차의 비율이 2:1라는 것 입니다. ‘이청천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에서 이청천은 ‘차량화연대’의 경전차와 중전차 비율을 5:1로 잡고 있었는데 이것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여전히 경전차의 비중이 극도로 높습니다. 그리고 정찰용 장갑차까지 경전차에 포함시킬 경우에는 이 비율이 5:1 정도가 되는데 왜 이렇게 남한의 군사지도자들은 경전차에 집착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가 없습니다. 보병의 비중이 기형적으로 작다 보니 보병 수송용 차량은 28대에 불과한 반면 기갑장비가 많다 보니 보급용 트럭은 무려 1,000대에 달합니다. 보급에 대한 개념은 가지고 있으니 그나마 낫다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사단의 편제는 둘째치고 소련을 가상적으로 시베리아 작전까지 상정하고 있는데 고작 6개의 기갑사단과 차량화사단으로 공세작전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구상하고 있다는 것이 좀 난감합니다. 아무래도 현대전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나온 구상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런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해방이후~대한민국 초기 한국의 군사지도자들은 거의 대부분 이런 비현실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신생국가의 군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희망찬 구상이란 점에서는 좋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군의 최고 수뇌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점은 유감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