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7일 월요일

중국 건국 60주년 행사가 기대되는군요

北京で建国60年軍事パレードの予行演習

이번 10월 1일은 중국 건국 60주년이지요.

지난 6일 천안문 광장 일대에서 전차와 자주포를 동원한 대규모 예행연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민해방군 건군 80주년이었던 2007년에 베이징에 놀러가서 99식 전차를 구경한 뒤로 인민해방군의 기갑장비에 대해 관심이 생겼는지라 이번 행사가 꽤 기대됩니다. 군사 퍼레이드에서 전차처럼 위용을 과시하는데 적당한 장비는 드물지요.

대량학살의 요건

씁슬한 이야기 하나...

르완다는 서구지정학에 대한 비백인 비평가들이 보기에는 아프리카의 문제에 대해 미국과 유럽은 별 차이가 없을 뿐 아니라 워싱턴과 다른 유럽국가들이 아프리카인의 목숨의 가치를 서방 또는 백인들의 목숨과 비교할 때 이중잣대를 사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였다. 그들은 서방에서는, 적어도 서방의 일부에서는 유럽인이 유럽인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보스니아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지만 아프리카인이 아프리카인에게 가하는 폭력에 대해서는 거의 완전히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즉 서구의 기준에서 아프리카인이란 실체가 없으며 정체성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유럽은 역사적으로 미국 사회의 요람으로 인식되었고 미국과 바다를 건너 접하고 있으며, 게다가 미국의 국가안보적 이해관계에 중요한 지역이었다. 유럽에서 국경을 넘어 퍼져나가는 폭력사태는 항상 아프리카의 경계를 넘어 퍼져나가는 폭력사태 보다 미국의 정책입안가들에게 더 큰 영향을 주었다.

(중략)


워싱턴은 르완다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소말리아 사태의 정치적 결과로 이미 충분한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최대한 작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지만 그것은 아프리카에서 전혀 가능하지 않았다. 클린턴 행정부의 국무부 공보담당관은 이전의 부시 행정부의 전임자들이 보스니아 문제를 담당할 때 그랬던 것과 큰 차이가 없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르완다 사태를 대량학살(Genocide)라고 칭하는 것 조차 꺼렸다. 4월 28일, 한 기자가 국무부 대변인 크리스틴 셀리(Christine Shelly)에게 국무부는 르완다의 폭력사태를 대량학살로 보는지 질문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 기자께서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비록 대량학살이라는 용어는 엄밀한 법률적 개념이 아니나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매우 정확한 법률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대량학살이라는 용어에는 다른 요인들도 포함됩니다."

국무부 출입기자들은 이 발언은 관료적 발언의 놀라운 사례로서 어떤 발언을 하건 도덕적으로 타격을 받기 때문에 아무것도 이야기 하지 않으면서 이야기를 하겠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5월로 접어들면서 대량학살의 징후는 더욱 더 명확해 졌고 UN은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다. 미국은 물자를 지원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UN군이 르완다를 이동할 수 있도록 보병수송장갑차가 보내질 것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물자의 대여 조건, 장갑차의 도색, 그리고 어떠한 표시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 때문에 천천히 지연되고 있었다. 한 주가 지날 때 마다 사망자가 늘어만 갔다. 어느 순간 사망자의 추정치는 50만명이 되었고 그 숫자는 꾸준히 늘어만 갔으나 워싱턴에서는 논의만 계속하고 있었다.

만약 이 사태가 대량학살이라면 행정부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 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지침은 대량학살이 아니라 '대량학살적 행위(acts of genocide)'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6월 10일, 크리스틴 셀리는 국무부가 대량학살적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믿을수 있는 모든 근거가 있다고 말했다. 이 브리핑에 참석한 한 기자는 얼마나 많은 대량학살적 행위가 일어나야 대량학살이 되는지 질문했다. 셀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질문은 제 직위에서 대답할 수 없는 것 입니다."

다른 기자가 질문했다.

"국무부가 대량학살이라는 단어를 단독으로 사용하지 않는 대신 대량학살의 앞 부분에 "~적 행위"라는 단어를 붙이라는 지침을 가지고 있다는게 사실입니까?"

셀리의 답변은 정부가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을 반영했다.

"제가 받은 지침은... 즉... 즉 제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용어를 사용하라는 것 입니다. 저는... 저는...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데 모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표현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특정 사안에 대해서 절대적인 규정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정의(定義)는 있습니다. 저는 신중한 검토를 거쳐 선정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조지 오웰이 그녀가 당황한 모습을 봤다면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David Halberstam, War in a Time of Peace : Bush, Clinton, and the Generals, Scribner, 2001, pp.273, 276~277

이 당시 미국의 행동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었는데 도덕적인 비난'만' 받았습니다. 세상일이 대개 이렇게 돌아간다는 것은 참 씁슬한 일이지요.


잡담 하나. 크리스틴 셀리는 2005년 12월 17일 병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링크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2009년 9월 6일 일요일

Brummbär

얼마전에 친구로 부터 모형 하나를 받았습니다. 드래곤에서 예전에 발매한 브룸베어였습니다. 동네 문방구 한 구석에 방치되어 있는걸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원고도 대략 마감해서 보냈고 금요일에 급한 업무도 처리해서 주말에는 모형이나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친구가 준 브룸베어가 있으니 이 녀석을 한번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옛날 물건이어서 그런지 부품 구성도 상대적으로 단촐하고 복잡하지 않아 좋았습니다. 그런데 몇몇 부품은 밀핀이 황당한 위치에 나 있어서 신경끄고 조립하기로 했습니다.


전투실이 큼지막 해서 밋밋한 감이 적지 않게 있는데 그래도 가분수(?)적인 맛도 나고 나름 육중한 느낌도 있어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드래곤의 예전 제품들에 딸려 있는 트랙은 좀 귀찮아 보이더군요.




다듬다가 귀찮아서 이 정도만 하고 나머지는 나중에 하기로 했습니다.




대략 주포만 달아 놓고 다시 가조립을 한 번 해 봤습니다. 딱딱 잘 맞는게 느낌은 좋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윤민혁님이 주신 타미야의 1/48 헤처도 조립했습니다. 타미야의 1/48 제품 중 만드는 재미가 가장 쏠쏠했던 물건 같습니다. 한 번 더 만들어 볼까 생각중입니다.

2009년 9월 1일 화요일

흥미로운 가정

오늘은 쉬는 시간에 결론 부분을 남겨두고 거의 2년 가까이 방치해 둔 The Military Legacy of the Civil War를 마저 다 읽었습니다.


저자인 Jay Luvaas는 남북전쟁이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의 주요 열강의 군사교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고찰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남북전쟁 발발부터 1차대전 발발직전 까지의 시기를 서술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전반부는 미국에 파견된 각국 무관단의 활동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고 후반부는 유럽에서는 미국의 내전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남북전쟁은 새로운 군사기술이 대규모로 활용되어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유럽에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군사교리에 있어서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남북전쟁이 군사교리 면에서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이유는 유럽의 군인들은 연방과 남부연합 모두를 아마추어 군인들로 한수 낮춰보는 경향이 있었고 거의 동시기에 유럽에서도 보불전쟁과 같은 대규모 전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굳이 '수준낮은' 미국으로 부터 교훈을 얻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 입니다. 그나마 미국의 경험이 유럽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북독일연방과 프랑스의 기병 전술정도였다고 합니다.


유럽의 군사사상가들이 남북전쟁을 재평가하게 된 것은 1차대전이라는 전례없는 소모전을 경험한 이후였습니다. 1차대전에서 유럽국가들이 경험한 전략적 문제는 바로 50년전의 전쟁에서 미국인들이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1차대전 이후 유럽, 특히 영국의 군사사상가들이 남북전쟁의 교훈을 재평가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고찰하고 있습니다. 주로 언급되는 것은 풀러와 리델하트의 남북전쟁 연구인데 특히 리델하트가 기동전 이론을 연구하면서 남북전쟁 당시의 대규모 기병운용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Luvaas는 이 부분에서 꽤 재미있는 추론을 하나 하고 있습니다. Luvaas는 짤막하게 리델하트와 독일 장군들간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리델하트의 많은 저작들이 2차대전 이전에 독일어로 번역되었고 그가 만난 독일 장군들도 번역된 것 중 일부를 읽었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비록 직설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북전쟁 당시의 기병전술이 독일 장군들의 기동전 사상에 '미미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하는 흥미로운 떡밥을 던지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이 책은 1959년에 초판이 나왔고 제가 읽은 개정판도 1988년에 나온 것이라 리델하트가 독일의 군사사상에 끼친 영향이 과대평가되었다는 근래의 연구들을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저자가 90년대 이후에 이 책을 썼다면 이런 재미있는 추론을 하지는 못했겠지요. 이제 이런 추론을 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발상 자체는 꽤 참신하다는 느낌입니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