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14일 수요일

인터넷의 유용함

어떤 책을 읽던 중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인용한 재미있는 구절이 나오더군요. 영어로 "The deeper we delve in search of these causes the more of them we find"라고 번역된 부분이었는데 책에는 어디서 인용했는지 따로 설명이 없어서 출처가 꽤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구글 검색창에 해당 구문을 넣고 검색하니 전쟁과 평화 9권 1장이 뜨더군요. 만약 인터넷이 없었다면 영어로 번역된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일일이 읽어보며 이 구절을 찾기 위해 골머리를 앓았을 텐데 인터넷 덕분에 그런 수고를 덜게 되었습니다.

잡담하나. 그런데 평소에 고전을 즐겨 읽었더라면 바로 알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문학과 담을 쌓고 살다 보니 결국 교양인과는 거리가 먼 아주 재미없는 사람이 된것 같습니다;;;;

2009년 10월 13일 화요일

이태준의 스탈린그라드 기행기

이태준(李泰俊)은 식민지 시기의 문인 중 가장 유명한 편인데 해방 이후 월북해버려 노태우 정권하에서 월북작가에 대한 해금조치가 있기 전 까지는 국내에서 합법적으로 그의 작품들을 접할 수 없었습니다. 네. 물론 이 어린양도 문학쪽에는 관심이 없지만 북한 현대사에는 관심이 있다 보니 이태준의 글들을 조금 읽은 편인데 그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것이 논픽션인 『소련기행』입니다.

『소련기행』은 이태준이 1946년 8월 소련을 방문해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스탈린그라드 등 여러 지역을 여행한 경험을 기록한 글로 소련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이 강하긴 해도 종전 직후 소련의 모습을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스탈린그라드를 다룬 부분은 매우 재미있는데 이 중 마마예프 쿠르간에 대한 묘사가 아주 좋습니다. 해당 부분을 인용해 봅니다.

9월 19일.

일찍부터 전적(戰跡) 구경을 나섰다. 먼저 옆에 있는 전사광장, 여기는 이번 싸움(독소전쟁)보다 10월 혁명 때 혁명군 54명이 사형받은 광장으로 기념되는데 광장 중앙에는 공원처럼 된 그들의 묘가 화원과 화환과 기념비로 장식되어 있다. 광장 주위는 모다 속은 타버린 거죽만 5, 6층의 대건물들로 둘리웠는데 그 독군사령관(파울루스)이 잡힌 백화점, 혁명 때 '혁명군'이란 신문이 발간되던 집, 이런 유서 깊은 집들이 지하에서 발굴된 고대의 유적들처럼 잔해들과 침묵으로 둘려 있었다.

다음으로는 강변에 가까이 있는 침입하는 독군을 향해 최초의 공격을 개시한 '5월 9일광장' 그리고 바로 그 옆인 '빠블로브 군조관(дом павлова)'을 구경하였다. 과히 크지 않은 벽돌 4층의 건물인데 독군에게 포위되어 우군과 연락이 끊어진 곳에서 하졸 8명을 다리고 빠블로브(Якоб Павлов) 군조가 57일간 싸워 네 명은 죽고 군조와 다른 네 명은 지하도를 뚫고 생환하여 영웅 빠블로브는 지금 독일 점령지에 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공동주택으로 쓰고 있으나 이 집을 기념키 위해 먼저 나선 것이 '첼까쓰운동'의 주인공 알렉산드라 첼까쓰 여사로서 가장 맹렬한 사격을 받어 허물어진 한편을 서툴은 솜씨로나마 고쳐 쌓어서 집 면목을 유지시킨 것이 이 여사였다. 이것을 시작으로 '여자들도 벽돌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에서 '첼까쓰운동'이 일어난 것이니 이 집에서 영웅 두 사람이 난 것이였다. 전후좌우 할 것 없이 용케 무너지지 않었고 벽돌 한 장 한 장 성한 장이 별로 없다. 창마다 문마다에는 더욱 사격이 집중되어 창틀, 문틀은 모두 새로 고쳐 쌓었다.

여기서부터 10리나 되게 공장지대만을 지나보는데, 공장이 무너지고 불타고 한 것은 철근의 난마(亂麻) 무데기요, 큰 빌딩만큼한 석유탱크, 까쓰탱크가 무수한데 모두 불에 녹아 바람 빠진 고무주머니가 되어 어떤 것은 아주 주저앉어버렸다. 이런 공장지대엔 큰 건물들이 벌써 많이 새로 서있었다. 우리는 공장구경은 오다 하기로 하고 그 길로 '마마애브' 구릉으로 왔다.

이 언덕은 스딸린그라드의 유일한 고지로서 여기를 차지하고 못하는 것이 서로 승패의 운명을 결하는 것이 되였다. 주위 10리는 넘을까 고도도 시가에서 4, 50척 될지한 정도다. 나무도 별로 없다. 잔숲이 군데군데 있으나 그 뒤에 자란 것들일 것이다. 큰 전차 한 대가 보인다. 이것은 기념으로 남겨둔 것으로 우군 응원전차대가 가장 깊이 들어왔던 선봉전차였다 한다. 탄피는 걸음마다 밟히고 가장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은 여기 저기 해변에 조개껍질 나부끼듯 하는 임자 없는 쇠 전투모들이다. 산적했던 전차, 트럭, 대포, 비행기, 기관총 등의 잔해를 기계로 긁어가고 철모, 혹은 벌써 자루가 썩고 녹투성이가 된 총신들은 다시 부스러기로 떨어진 것이라 한다. 뒹구는 철모는 탄환에 구멍 뚤린 것도 많었다. 독군 시체만 14만이 넘었다니 이 임자 없는 전투모인들 얼마나 많었으랴! 장비 좋은 독군으로도 가장 중장비와 중포(重砲), 중전차(重戰車)로 들어왔던 곳이 여기라 한다. 이 언덕에서만 독군의 시체 14만 7천, 포로가 9만 1천, 그 중에 장관만 25명, 장교 2천5백, 대포 4천, 자동차 6만, 비행기 3천여대 였다 한다. 적시(敵屍)만 14만7천! 얼마나 많은 피였을까! 여기 저기 피 묻은 군복자락 썩는 것이 그냥 나부낀다. 푹신푹신한이 붉으레한 황사언덕, 걸음마다 아직도 신바닥에 피가 배일 것 같다. 더욱 언덕 밑에서 독군포로들이 수도공사로 땅을 파고 있는 것과 건너편 마을 가까이서 꽝 소리가 나더니 검은 연기가, 영화에서 보던 폭탄처럼 올려솟는 것이 실감을 준다. 전적을 설명해주던 장교의 말에 의하면 아직도 지뢰가 가끔 저렇게 터지기 때문에 길 이외에는 들어서기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태진, 『소련기행ㆍ농토ㆍ먼지』, 깊은샘, 2001, 112~114쪽

구글 블로거의 라벨 제한

글을 수정하다가 라벨(다른 블로그의 태그 정도 되겠군요) 제한에 걸렸다는 오류 메시지가 나와서 당황했습니다. 구글 블로거는 라벨을 최대 2000개 까지만 허용한다는 군요. 이런 저런 글을 쓰다 보면 여러가지의 라벨을 달게 되는데 구글이 인심(?)을 써서 라벨 제한을 올려주거나 해제하지 않는 이상 새로운 라벨은 더 달수 없을 것 같습니다. 기존 라벨 중 잘 쓰지 않는 것을 몇 개 지워볼까 했는데 그것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겠더군요.

2009년 10월 11일 일요일

동부전선의 이탈리아군 장비 상태에 대한 독일군의 평가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1942년 하계공세를 준비하고 있던 1942년 6월, 이탈리아군에 배속된 독일군 연락본부(Verbindungskommandos)는 이탈리아군의 장비현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2. 장비상태(Ausrüstung)

a) 화기 및 장비
: 보병용 소화기 - 기관총과 박격포는 쓸만하다. (이탈리아군의) 기관단총은 각 부대에 보급된 수량이 적다.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부족한 수량은 보충되었다.
: 포병 - 사단포병의 75mm와 100mm포는 사정거리와 위력이 부족하다. 군단포병의 105mm포(사정거리 13km)는 훌륭한 포이다. 단점은 탄도가 곧은 편이라는 것이다. 현재 포신은 과도하게 사격한 상태이다. 교체할 포신이 수송중에 있다. 대전차용 탄약이 전혀 없다. 75mm와 20mm 대공포는 훌륭한 장비이나 마찬가지로 대전차용 탄약이 전혀 없다.
: 대전차포 - 보병연대와 군단 직할, 사단 직할의 대전차 부대는 공통으로 47mm를 장비하고 있다. 포의 위력에 있어 독일군의 구형 37mm포에 상응한다. 포구초속은 360m/sec이며 유효사거리는 700m라고 말해지고 있지만 실제로는200m에 불과하다. 소련군의 중형 전차 및 중전차에 대항할 장비가 부족하다. 75mm 대공포는...(후략)
: 공병장비 - 목재부교는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에서 성능을 입증했다. 독자적인 건설 방법으로 통과중량(Tragfähigkeit)을 5-10톤에서 7-13톤으로 증가시켰다.
: 통신장비 - 수량과 성능 모두 불충분하며 유선전화기의 경우 구식이고 습기에 민감한데다 케이블도 부족하다. 무선통신장비는 부분적으로 현대화되어있고 성능도 좋은 편 이지만 야전에서의 유용성이 떨어진다.

b) 차량현황
: 현재 기동성이 심각하게 감소된 상태이다. 이탈리아군의 차량 가동 현황은 다음과 같다. 쾌속(Celere)사단 75%, 파수비오(Pasubio)사단과 토리노(Torino)사단은 35~40%. 모든 정비부대를 통합하고 현재 보충용 차량을 배치하는 방법으로 (군수참모의 견해에 따르면) 2개 사단의 차량가동율을 3주 이내에 15~20% 정도 상승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밖에 현재 이탈리아군은 차량화된 수송부대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새로 배치된 차량 : 매우 좋은 인상을 주고 있다. 더 많은 수송부대가 (이탈리아) 8군의 차량수송에 투입되고 있다. 보병부대의 차량인 1톤 트럭(LKW)을 수송용차량으로써 평가하면 강력한 엔진을 가지고 있으나 야지주행능력은 굴곡이 없는 지형에 한정되어 있다. 2륜 오토바이와 3륜 오토바이는 훌륭한 장비이다. 화물차의 대부분은 디젤을 사용하고 있으며 가솔린을 사용하는 차량은 일반적으로 반궤도차량, 고기동 트럭(화학대대에 배치된), 트레일러(Karette), 병력수송차량 및 오토바이 등 [으로 제한되어 있다] 평상시의 소모는 2/3이 디젤이고 1/3이 가솔린이며 모든 차량의 운용에는 V.S*가 1/2에서 1/2이다.

c) 마필현황

각 기병연대와 마필화 포병연대의 마필 현황은 (편제의) 50% 수준이다. 보충용 마필이 도착하는 중이다. 보병연대의 노새는 마찬가지로 (편제의) 50%이다.

d) 피복

정상적이다. 동계 피복은 대부분 항공수송을 통해 적시에 도착하였다. 매우 훌륭하다.(Sehr Zweckmäßig) 하계피복은 상의만이 확보된 상태이다.1)
*1V.S.(Verbrauchssatz)는 해당 부대의 전 차량이 100km 이동할 수 있는 연료량을 뜻함.

독일군의 평가는 이탈리아군의 고질적인 약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화기의 부족, 통신수단의 부족, 수송수단의 부족.

이 세가지 모두 현대 전쟁에서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고 특히 기동전이 중심이었던 동부전선에서는 그야말로 중요한 요소였지요. 불행하게도 이탈리아군은 이 모든 것을 결여하고 있었습니다. 피복상태는 양호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옷이 좋다고 싸움을 잘 하는건 아니죠;;;;

동부전선에 파견된 이탈리아군은 이 시점에서는 제8군으로 개편되어 있었습니다. 인용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단들은 1941년 파견된 이탈리아 러시아원정군단, CSIR(Corpo di Spedizione Italiano in Russia)에 소속되어 있던 부대들로 고참사단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CSIR에 배속된 사단들은 제가 예전에 쓴 '동부전선의 이탈리아군'에서 언급했듯 명칭상으로는 모두 그럴싸한 차량화사단(Divisioni autotrasportabile), 쾌속사단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명목상으로는 차량화 사단이었던 파수비오 사단과 토리노 사단은 소련으로 출동할 당시 부터 말로만 차량화였고 보병연대는 도보 부대였다고 하지요.2) 어쨌든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될 당시에는 소련군이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군의 이런 약점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이탈리아군은 키예프 포위전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했으며 스탈리노를 점령하는데도 꽤 기여를 해서 클라이스트 장군도 호평을 했다고 하지요.3)

하지만 1942년으로 접어들면서 이런 약점은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이탈리아군은 1941/42년의 겨울 방어전에서도 꽤 괜찮은 성과를 냈지만 상당한 장비를 손실했고 이 때문에 원래부터 좋지 않던 사단들의 장비상태도 더 나빠졌다는 점 입니다. 독일군은 이탈리아군이 동부전선의 작전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1941년에 무솔리니가 이탈리아군을 추가로 파병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수송능력의 부족등을 이유로 거부한 바 있었습니다.4) 그러나 잘 아시다 시피 독일은 1941/42년 겨울에 큰 타격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하계공세 준비를 위해 이탈리아 등 동맹국들에게 추가 파병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탈리아가 추가로 파병한 사단들은 1941년에 파병한 사단들에 비해 장비면에서 나을것이 없는 부대들이었고 이러한 부대들은 1942/43년 겨울에는 소련군의 반격에 그야말로 철저하게 박살이 나게 됩니다.

※소련군의 동계공세 당시 이탈리아군의 장비 현황에 대해서는 '동부전선의 이탈리아군'에 간략하게 정리해 놓았습니다.

특히 위에서 언급했듯 차량을 포함한 기동수단의 부족은 공격 보다 방어전에서 결정적인 약점이 됩니다. 알피니 군단과 같은 정예부대는 전력의 열세에도 분전했지만 장비의 열세를 만회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반 보병사단이었던 라벤나(Ravenna) 사단은 1942/43년의 동계전투에서 야포를 포함한 각종 장비를 90%이상 상실했습니다.5) 만약 충분한 수송/견인수단이 확보되어 있었다면 피해를 조금 더 줄일 수 있었을 것 입니다. 수송수단의 부족은 장비 뿐 아니라 병력손실을 크게 만든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소련군이 12월 25일에 알렉세예보-로소브스코예를 차단하자 후퇴하던 이탈리아군은 와해되어 1만5천명 이상이 생포되었습니다.6) 독일군도 차량 등 수송수단의 약화가 심각해진 1943년 이후로는 비슷한 경우가 많아집니다.

이탈리아 제8군이 동계전투에서 괴멸된 뒤에도 이탈리아 측은 최소한 이탈리아군 1개 군단은 동부전선에 잔류시키고자 했다고 합니다.7) 그러나 결국 이탈리아군은 동부전선에서 발을 빼게 됩니다. 이 무렵이 되면 이탈리아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었으니 말입니다. 1943년으로 접어들면 미영연합군이 이탈리아 본토로 침공해 오기 시작하지요. 하지만 이탈리아의 빈약한 공업능력을 고려해 본다면 이탈리아가 항복하지 않은 상태에서 1개 군단을 동부전선에 잔류시켰다 하더라도 그 전력은 1941년의 CSIR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1) 'Bericht des Deutschen Verbindungskommandos über das italienische Expeditionskorps vom 9. Juni 1942', Thomas Schlemmer(Hrsg), Die Italiener an der Ostfront 1942/43 : Dokumente zu Mussolinis Krieg gegen die Sowjetunion, Oldenbourg, 2005, ss.95~96에서 재인용.
2) Gerhard Schreiber, 'Italiens Teilnahme am Krieg gegen die Sowjetunion', Stalingrad, Piper, 1992, s.259.
3) Richard L. DiNardo, Germany and the Axis Powers : From coalition to Collaps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p.127.
4) DiNardo, ibid. p.129.
5) 'Gefechtsbericht des Deutschen Verbindungskommandos bei der Division "Ravenna" vom 20.März 1943', Thomas Schlemmer(Hrsg), Die Italiener an der Ostfront 1942/43 : Dokumente zu Mussolinis Krieg gegen die Sowjetunion, s.123에서 재인용.
6) Peter Gosztony, Hitlers Fremde Heere : Das Schicksal der nichtdeutschen Armeen im Ostfeldzug, Econ Verlag, 1976, s.319.
7) DiNardo, ibid. p.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