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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28일 수요일

1942년 여름의 르제프 전투에 대한 잡담

르제프 지구에서는 1941년 말부터 1943년 초 까지 장기간의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군사사가 데이빗 글랜츠David M. Glantz가 1942년 겨울의 르제프 전투, 일명 마르스 작전을 다룬 Zhukov’s Greatest Defeat : The Red Army’s Epic Disaster in Operation Mars, 1942(University Press of Kansas)라는 저작을 발표할 때 까지 국제적인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독일어권에서도 1990년대 이전까지 이 전투를 직접적으로 다룬 단행본이라고는 호르스트 그로스만Horst GrossmannRschew, Eckpfeiler der Ostfront, (Podzun Verlag, 1962) 정도가 나왔을 뿐이니 말입니다. 르제프 지구의 전투는 1941년 겨울~1942년 봄 사이에는 모스크바 전투의 일부로서 간략하게 다루어 졌고 1942년 여름에는 독일군 하계 공세 당시 소련군의 반격 작전의 일부로서 간략하게 다루어졌으며 1942년~1943년 겨울에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그 직후 전개된 소련군의 동계대공세의 일환으로 서술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2차대전 종전 이후 50년이 넘도록 이 전투를 다룬 독립적인 저작이 200쪽도 안되는 그로스만의 책 한권이었다는 것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로스만의 저작은 1987년에도 재판이 되었죠. 그만큼 연구가 없었다는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데이빗 글랜츠의 저작이 큰 반향을 일으킨 뒤 러시아에서도 이 전투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글랜츠의 저작은 물론 위에서 언급한 그로스만의 저작 또한 러시아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일단 그 이전까지는 소련과 러시아에서 르제프 전투가 제대로 주목받지를 못했고 역사서술에서도 제외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을 타고 준비되다가 소련의 붕괴로 간행되지 못한 소련의 2차대전 공간사에서도 르제프 전투에 관한 내용은 다루어 지지 못했다고 합니다.1) 글랜츠의 문제 제기 이후 러시아에서도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고 러시아의 선구적인 연구인 올렉 콘드라체프Олег Кондратьев의 저작은 독일어로 번역되어 러시아 바깥에 소개되기도 했습니다.(영어로 번역되어 더 널리 알려지지 못한 건 유감이군요)2) 하지만 콘드라체프의 연구는 지나치게 독일군의 시각에 경도 되었으며 분량도 많지 않아 러시아에서는 팜플렛 수준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 모양입니다.3) 콘드라체프는 그로스만의 저작을 러시아어로 번역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사실 콘드라체프의 저작은 그로스만의 저작보다도 분량이 더 적습니다;;;; 훨씬 많은 사료를 활용할 수 있게된 시점에서 나온 후속연구가 1960년대의 저작을 크게 뛰어넘지 못했다는 점은 안타깝지요. 르제프 전투에 대한 러시아의 시각을 담은 보다 주목할 만한 연구는 2008년에 출간된 스베틀라나 게라시모바Светлана ГерасимоваРжев 42 : Позицонная боиня(르제프 42년 : 진지전)은 르제프 돌출부의 형성에서 1943년 독일군이 뷔펠Büffel작전을 실행하여 돌출부에서 후퇴할 때 까지를 잘 정리했습니다. 특히 1942년 7월 말 부터 9월까지 전개된 소련의 르제프 지구 공세(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를 비중있게 다루었다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것 처럼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독일의 하계대공세 당시 소련이 감행한 일련의 반격작전의 일부로 간략하게 언급되어 왔습니다. 독소전쟁사에 대한 영어권의 대표적인 저작인 존 에릭슨John EricksonThe Road to Stalingrad : Stalin’s War with Germany,(Yale University Press, 1999) 에서는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에 대해 단 두 쪽만을 할애하고 있으며 전투의 의의에 대해서도 독일군의 주공을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었다는 정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4) 그로스만의 저작을 제외하면 냉전기의 저작 중에서 이 하계공세에 대해 가장 충실하게 설명한 것은 얼 짐케Earl F. Ziemke와 마그나 바우어Magna E. Bauer의 공저인 Moscow to Stalingrad : Decision in the East, (Military Heritage Press, 1988)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 책에서도 1942년 여름의 르제프 전투는 독일군 하계공세시기의 주변부적인 사건으로 다루어지고 있기는 합니다만 중부전선에서 독일군의 공세계획과 소련군의 선제공격, 이에 맞선 독일측의 대응을 잘 정리하고 있지요.5)

소련군의 제2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데이빗 글랜츠라는 유명한 군사사가에 의해 단행본 한권 분량으로 다뤄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2차 공세에는 미치지 못해도 대규모 공세작전이었던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아직까지는 르제프를 둘러싼 장기간의 공방전의 일부로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에 대해  짤막한 잡담을 해 보지요.
소련군의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7월 30일 개시되어 9월 말 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작전에 투입된 소련군의 전력은 상당한 규모입니다. 두개의 전선군이 참여했으니 상당한 규모이라고 할 수 있지요. 여기에는 칼리닌 전선군 예하의 30군, 29군, 3항공군과 서부전선군 예하의 31군, 20군, 5군, 33군, 1항공군이 투입되었습니다. 총 전력은 43개 소총병사단, 72개 소총병여단, 21개 전차여단, 연대급 이상의 포병부대 67개, 근위박격포(다연장) 부대 37개 였습니다. 공세를 위해 작전을 앞두고 기갑전력과 포병이 대폭 보강되었습니다. 러시아 쪽의 기록에 따르면 칼리닌 전선군 예하의 30군은 전차 390대를, 서부전선군 예하의 5군은 120대, 33군은 256대를 보유했으며 주공이라고 할 수 있는 31군과 20군, 6, 8 전차군단의 네 부대는 949대의 전차를 보유했습니다. 포병 전력은 33군의 경우 1km당 40~45문, 주공인 20군은 1km당 122문, 칼리닌 전선군(30, 29군)은 1km당 115~140문이었습니다. 소련측은 이를 통해 주공인 31군 정면에서는 보병에서 4:1, 포병에서 6:1, 기갑에서 22:1, 20군 정면에서는 보병에서 6.9:1, 포병에서 6.2:1, 기갑에서 7.2:1의 우세를 확보했다고 판단했습니다.6)
독일측은 7월 마지막 주가 되어서야 소련군의 집결을 파악했지만 이것을 단순한 기만으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7월 30일 칼리닌 전선군의 30군과 29군이 한시간의 공격준비사격후 공격을 개시했고 이어 8월 4일에는 주공인 31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31군의 공격은 독일 161보병사단의 방어선을 완전히 붕괴시켰습니다. 모델이 지휘하던 9군에는 가용한 예비대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때문에 중부집단군 사령관 클루게가 히틀러를 설득하여 제한적인 공세작전이었던 뷔르벨빈트Wirbelwind 작전을 위해 사용하려던 1, 2, 5기갑사단과 78, 102보병사단이 시체브카 방면의 위협을 저지하기 위해 급거 동원됩니다. 한편 주코프는 완전히 붕괴된 161보병사단의 구역에 기동부대인 6, 8전차군단과 제2근위 기병군단을 투입해 전과를 확대하려 했고 독일군의 예비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축차투입되었습니다. 히틀러는 뷔르벨빈트 작전을 원래 계획 보다 제한적인 규모라도 감행하고자 했으나 8월 11일 시작된 이 작전은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소련군의 1단계 공격은 8월 23일에 종료되었고 이후 9월 초순까지 산발적인 교전이 이어졌습니다. 소련군의 2단계 공격은 9월 9일 시작되었고 30군은 르제프를, 31군은 주브초프를 공격했습니다. 특히 31군의 공격은 매우 강력해서 예비대로 있던 그로스 도이칠란트 차량화보병사단이 이 지구에 투입되게 됩니다. 그러나 9월 15일 소련군의 주공인 31군이 독일 72보병사단의 방어를 돌파하지 못하고 돈좌됨으로서 독일군에 있어서 위기는 지나가게 됩니다. 16일부터 3일간 계속된 비로 소강상태가 지속되었고 비가 그친 뒤 재개된 31군의 공격은 피해가 복구되지 못한 상태여서 그 이전만큼 강력하지가 못했습니다. 실질적으로 9월 24일 소련군의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은 종결됩니다.7)

상당히 대규모 전투였는데 이 작전에서 소련군이 입은 피해는 냉전이 지나고도 한참 지나서야 알려졌습니다. 데이빗 글랜츠가 르제프 전투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 이후 러시아 연구자들도 이 연구에 뛰어들면서 비로서 이 전투의 실상이 조금씩 밝혀 지기 시작한 것 입니다. 러시아 연구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에서 소련군이 입은 인명손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표.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시기 소련군의 인명손실
기 간
인명손실
30군
8월~9월
99,820
29군
8월~9월
16,267
31군
8월 4일~9월 15일
43,321
20군
8월 4일~9월 10일
60,453
5군
8월 7일~9월 15일
28,984
33군
8월 10일~9월 15일
42,327
[표 출처 : Светлана Герасимова, Ржев 42 : Позицонная боиня,(ЭКСМО, 2008), p.137]

다른 자료에 따르면 7월 말에서 9월 말 까지 29군은 51,000명, 30군은 117,000명, 31군은 90,000명, 20군은 60,000명의 인명손실을 입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이 작전에서 렐류센코Д. Д. Лелюшенко소 장이 지휘한 30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30군은 작전 개시당시 144,3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제1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가 종료될 무렵에는 72,400명으로 전력이 50% 가까이 감소했습니다. 르제프를 둘러싼 소모전이 전개되면서 엄청난 손실을 입은 것 입니다. 이 부대는 작전 기간 중 45,000명 정도의 보충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편제를 유지할 정도의 전력이 남은 셈 입니다. 주공이었던 31군은 작전 개시 당시 138,800명이었으나 작전이 종료될 무렵에는 78,800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29군은 같은 기간 동안 57,800명에서 24,800명으로 줄어들었고 20군은 90,600명에서 45,100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8)  병력보충을 계속 받으면서도 작전이 종료될 무렵에는 50% 수준으로 감소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토록 엄청난 인명손실이 발생한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전통적인 역사서술에서 르제프 전투는 배제되어 왔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선 뒤에야 러시아 연구자들이 이 주제를 연구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아직까지 나온 성과들을 스탈린그라드나 쿠르스크와 같은 유명한 전투들과 비교하기가 어려운 수준입니다. 독립된 단행본들을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라니 안타까운 일 이지요.

하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데이빗 글랜츠가 제2차 르제프-시체브카 공세작전을 다룬 단행본의 서두에서 밝힌 것 처럼 르제프 전투에 있어 인간적인 측면입니다.9) 한 차례의 전투에서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은 싸움이 1년이 넘도록 계속되었는데 60년 가까이 지난 뒤에서야 조금씩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는 점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들게 합니다. 이 글에서 인용한 미하일로바의 글에는 르제프 전투를 경험한 미하일 클류에프라는 사람의 경험담이 짧게 실려있습니다.

삽코보 출신의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클류에프는 (그가 가진 문서에 따르면) 2월 17일 징집되어 3월 12일 부상을 당했는데 입대선서를 한 것은 1942년 5월 1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마을에서 징집된 42명이 (군복도 지급받지 못한채) 스웨터를 걸친 채로 전투에 투입된 이야기, 스타리차에서 르제프까지의 정처없는 여정, 그리고 이렇게 행군하는 동안 소총을 쏘는 방법을 그들 스스로 배워야 했던 이야기 등을 털어놓았다.10)

클류에프의 경험은 르제프에서 죽어간 다른 수많은 소련인들도 공유하는 것 일 겁니다. 클류에프와 함께 징집된 같은 마을의 42명 중 입대선서를 할 때 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몇 명이고 르제프 전투가 끝날 때 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몇 명일까요? 그리고 데이빗 글랜츠 같은 역사가가 르제프에 대한 진실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면 클류에프와 같은 이들의 묻혀진 이야기는 언제 쯤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을까요? 미하일로바가 지적한 것 처럼 르제프 전투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려 했을 무렵에는 이미 당시의 생존자들이 80대에 접어든 시점이었습니다. 수십만명의 생명이 정권이 원하는 역사를 쓰기 위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숨겨져 왔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두렵기까지 합니다.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이러한 문제에 공감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1) Tati’ana Mikhailova, “The Battle of Rzhev : Ideology instead of Statistics”,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18(2005), p.360
2) 독일어판의 제목은 러시아어판의 제목을 그대로 옮긴 Die Schlacht von Rshew: Ein halbes Jahrhundert Schweigen(르제프 전투 : 반백년의 침묵)입니다.
3) Mikhailova, ibid., p.361
4) John Erickson, The Road to Stalingrad : Stalin’s War with Germany,(Yale University Press, 1999), pp.381~382
5) Earl F. Ziemke and Magna E. Bauer, Moscow to Stalingrad : Decision in the East, (Military Heritage Press, 1988), pp.398~408
6) Светлана Герасимова, Ржев 42 : Позицонная боиня,(ЭКСМО, 2008), pp.112~113
7) Ziemke and Bauer, ibid., pp.400~408
8) Mikhailova, ibid., p.364
9) David M. Glantz, Zhukov’s Greatest Defeat : The Red Army’s Epic Disaster in Operation Mars, 1942,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9), p.2
10) Mikhailova, ibid., p.362

2011년 11월 17일 목요일

예일대 출판부의 2012년 봄 카탈로그를 살펴보니

예일대학교 출판부의 2012년 봄 카탈로그를 살펴 보니 당연히 재미있어 보이는 책이 몇 권 눈에 들어옵니다. 몇 권은 꼭 사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4월에는 2011년 세계를 뒤흔든 아랍의 봄에 대한 단행본이 한권 나올 모양입니다. The Battle for the Arba Spirng이라는 제목인데 출간된 뒤 서평을 보고 구매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5월 출간예정작 중에서는 Thomas Friedrich의 Hitler's Berlin : Abused City가 눈에 띄입니다. 히틀러가 베를린을 어떻게 변화시켜 나갔는지, 그리고 변화시켜 가려 했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군요. 도시계획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겠지만 꽤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나오는대로 구매할 생각입니다.

6월에는 네 권의 책이 눈에 들어옵니다.
첫 번째는 Alison Pargeter의 Libya : The Rise and Fall of Qaddafi입니다. 리비아 문제에 생소한 미국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만큼 제게도 꽤 도움이 될 것 같군요. 일단 서평이 나오면 구매를 생각해 봐야 겠습니다.
유명한 Annals of Communism Series에서는 레닌그라드 전투에 대한 자료들을 엮은 The Leningrad Blockade가 출간될 예정이라는군요. 전부 66종의 문서가 실릴 예정이라는데 매우 기대가 됩니다.특히 공산당과 비밀경찰이 어떤 식으로 도시의 통제를 유지했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 해줄 것 같습니다. 이건 무조건 구매입니다.
세번째는 2차대전 직후 독일인에 대한 인종청소를 다룬 R. M. Douglas의 Orderly and Humane 입니다.역시 무조건 구매해야 겠습니다.
마지막으로 Mordechai Bar-On의 모세 다얀 전기가 눈에 들어옵니다. 꽤 재미있을 것 같은데 이건 서평을 보고 생각해 보는게 좋겠군요.

2011년 4월 30일 토요일

인도군단에 대한 총통각하의 단평

예전에 자유인도군단에 대한 글을 짤막하게 쓴 적이 있습니다. 독일군에 소속된 외국인 부대 중에서도 아주 재미있는 부대라서 조금 관심이 있던 차에 오늘 책을 읽다 보니 전쟁 말기에 히틀러가 자유인도군단에 대해 평을 한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평이라 한번 올려봅니다.

인도군단은 웃음거리야! 인도인들은 이 한마리도 죽이지 못해서 그냥 물어뜯기고 있지 않나. 인도인들은 영국놈도 죽이질 못해. 그놈들에게 영국놈들을 상대하라는건 내 생각에 정말 바보같은 짓이야. 우리 편에 있는 인도인들이 보스의 지휘를 받는 인도인들 보다 용감하게 싸울 수 있겠나? 일본은 영국놈들로 부터 인도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보스의 지휘 하에 있는 인도인 부대를 버마에 투입했지. 그런데 정말 빨리 도망을 쳤잖아. 인도인 병사들이 독일군에 있다고 더 용감해 지겠나? 내 생각에 인도인들에게 염주나 쥐어주던가 그 비슷한걸 시킨다면 세상에서 가장 끈기있는 군인이 될거야. 하지만 그들을 실전에 투입하는건 정말 웃기는 일이지. 인도인들이 얼마나 강한가? 게다가 이건 바보같은 짓이야. 만약 무기가 남아돈다면 선전 목적에서 이런 장난질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무기가 남아도는 것도 아닌데 선전 목적으로 이런 장난질을 하는 건 정당화할 수 없어.”

Walter Warlimont, Im Hauptquartier der deutschen Wehrmacht 1939 bis 1945 : Band II, (Weltbild Verlag, 1990), s.542

총통각하의 독설은 수준급입니다;;;;

이 발언을 보면 인도인에 대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종적 편견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지요. 하지만 히틀러의 발언에 있는 내용들을 상상해 보면 정말 웃깁니다.

2011년 1월 30일 일요일

의욕상실

무장친위대 출신의 군사 저술가인 빌헬름 티케(Wilhelm Tieke)는 2차대전에 관한 출중한 저작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많은 분들이 잘 아시는 SS 2기갑군단사가 있지요. 티케는 자신이 실제 참전자이다 보니 전쟁의 다양한 측면을 잘 이해하고 있고 그래서 더 훌륭한 저술가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티케는 베를린 전투를 다룬 저작, Das Ende zwischen Oder und Elbe : Der Kampf um Berlin 1945에서 전쟁중에 생산된 문서자료에 대해 날카로운 지적을 하나 하고 있습니다.

베를린을 둘러싼 최후의 전투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책이 나와 있지만 그 대부분은 아돌프 히틀러와 수상관저를 둘러싼 사건들을 다루었을 뿐이다. 전선에서 벌어진 혼란스러운 전투를 시간의 경과에 따라 치밀하게 다룬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는데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나는 이것을 해 보기로 했다.

얼마전 미국에서 프라이부르크(Freiburg)에 있는 연방문서보관소-군사분과(Bundesarchiv-Militärarchiv)에 반환한 바익셀 집단군(Heeresgruppe Weichsel)과 그 집단군에 배속된 야전군의 자료들은 큰 도움이 되었으며 이 책에 광범위하게 인용되었다. 이렇게 해서 전투의 경과를 하루 단위로 서술할 수 있었으며 여기에 참전 군인들의 구술자료가 추가되었다. (독일과 소련) 양측의 지휘관들과 병사들이 공식적으로 또는 비공식적으로 남긴 회고록과 기록들도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만 기록들이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저작도  완벽하게 정확하다고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내 개인적인 경험을 보면, 특히 전쟁 말기의 군부대 일지들(Kriegstagebücher)의 경우 허위로 기록되는 경우가 간혹 있다 보니 “적의 완강한 저항에도 역습에 성공했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 역습 같은 것은 시작도 하지 않은 일도 있었다.

Wilhelm Tieke, Das Ende zwischen Oder und Elbe : Der Kampf um Berlin 1945(Motorbuch Verlag, 2.auflage, 1992), s.9

무장친위대 조차도 전쟁 말기에는 죽기가 싫어서 하지도 않은 공격을 했다는 허위보고를 하는 경우가 꽤 있다는 이야기죠. 사실 이런 종류의 군대 비화는 어느 나라나 다 있습니다만. 하여튼 티케는 역사서술에 있어 아주 중요한 문제 한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료에 대한 충실한 검토와 비판입니다.

2010년 4월 5일 월요일

육탄 10용사와 정신전투법

슈타인호프님이 '육탄 10용사'에 대한 글을 한 편 쓰셔서 엮인 글을 하나 써 볼까 합니다.

선전 도구로서 육탄 10용사가 어떻게 사용되었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당시 육탄 10용사는 정부의 매우 좋은 선전대상이었습니다. '북괴'에 비해 물질적으로 열세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초인적인 정신력과 자기희생으로 '승리'를 이끌어 낸 원동력이었으니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국방부가 발간하던 『國防』1949년 6월호에는 육탄 10용사를 찬양하는 특집 기사가 여러 편 실렸는데 그 중 재미있는 글 하나를 조금 인용해 보겠습니다.

오호라 장재(壯哉)여! 오호라 비재(悲哉)여 육탄십용사!

그대들은 세계전사에 볼수없는 쾌거를 감행하였나니 이는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전투력의 극치를 세계에 선양하였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의 극도발달에 의하여 원자력 내지 우주선(宇宙線) 이용이 가능하다고 하는 금일에 있어서 그러한 신비력을 발양한 것은 다만 한국용사의 아름다운 희생에서만 수긍되는 것이니 이것은 세계만방의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전투정신이라고 자랑할 수 있는 역사적 기념비가 않일 수 없다.

과학의 힘을 믿고 싸우는 민족! 무기의 위력 만을 의지하고 싸우는 군대! 그것은 언제나 정신앞에 굴복하고 말 것이니 과학 보다도 무기 보다도 더 위대한 것은 군인의 정신 그것임을 새삼스럽게 강조하고 시픈 소이(所以)다.

대동아전쟁, 이른바 동양평화를 위하고 싸왔다는 제2차세계대전에 있어서도 원자탄의 히로시마 폭격이 제아모리 인간살생을 혹독히 하였다 하드라도 좀더 강렬한 전투력과 필사의 정신력이 대비하고 있었다면 원자력쯤은 문제밖에 있었을른지도 모른다. 과학을 무시하는 전쟁, 무기를 소홀히 하는 전법은 20세기 현금(現今)에 있어서 용인될 수 없는 지론일른지 모르지만 원자력이나 무기 역시 인간의 정신활동의 범위권에서만 가능할 수 있는 것임으로 나는 정신 제일주의를 고집하고 싶은 것이다.

세계전사를 들추어볼때 저 불란서의 쨘다-크의 기책도 오로지 정신에서 출발하여 정신에 끝이였고 나폴레온의 알프스 정복도 과학력이나 무기력(武器力)이 아니였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제2차세계대전에 있어서 일본이 패망하였다는 것은 물론 무기력, 과학력의 소치라고 하겠지만 그보다도 앞서는 것은 전국민의 정신쇠퇴에 기인함이 더욱 컷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군인만이 담당하는 것은 아니다. 전민족이 일심동체가 되어 전쟁에 임함으로써 언제나 필승을 기할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고금을 통해서 어느나라의 역사를 들추어 보드라도 잘 알수있는 것이니 용사를 길러낸 총후의 지성이 없다면 제아모리 출중한 군인이라고 하드라도 목숨을 나라에 받칠 동기를 맨들수 없는 것이라고 본다. 지금은 패망한 영웅이 되어 있는 독일의 히틀러나 이태리의 뭇소리니를 보드라도 그들은 어디까지나 과학력과 무력을 위주로한 정치운동이 아니라 정신력에 입각한 민족혼의 규합이였고 정신전투의 신봉자이였다는 것을 우리는 긍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정신전투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짖는 유물론적 이념이 아니라 자유를 사랑하고 평화를 찬미하는 우리 민주주의 신봉자들의 절대이념인 유심론(唯心論)적 세계관인 것이다.

李鍾泰, 「꽃으로 떠러진 十柱花郞」, 『國防』(1949. 6), 6~7쪽

당시 한국군의 궁색한 상황과 안보적 불안을 고려하면 이렇게 정신력을 극도로 강조하는 것도 이해를 못할 것은 없겠습니다만 정신력으로 원자력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이야긴 좀 심하죠... 그나저나 민주주의 국가의 군인이 히틀러와 무솔리니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으니 이것도 참;;;;;

2010년 1월 7일 목요일

또 하나의 전선 : 2차대전 중 독일과 영국의 안방전선

넵. 많은 분들이 눈치 채셨겠지만 불법날림번역 땜빵포스팅입니다. 그래도 살짝 재미있는 내용입니다. 바로 2차대전의 가장 중요한 전선 중 하나인 '안방전선'의 이야기 이지요.

독일과 영국 여성들의 생활은 두 나라의 전세가 점차 변화해가면서 총력전의 다섯가지 요소로 부터 영향을 받았다. 첫 번째는 대규모의 전시 동원으로 인해 가족구성원의 남성들이 군대나 공장에 징집되면서 수많은 여성들이 잠시 남성들과 떨어져 지내거나, 또는 떨어져 지낼 가능성이 높아지거나, 영원히 이별해야만 했다. 두 번째로 독일과 영국 모두 자국의 군인이나 외국군인, 전쟁포로, (독일의 경우에는) 외국인 노동자 등 외부 남성들과 접촉하는 경우가 늘어났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민간인을 목표로 한 폭격으로 대규모의 구호업무와 소개가 벌어졌다는 점이다. 네 번째는 경제적인 총력전으로 물자의 부족과 배급, 그리고 암시장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다섯번째는 남성들이 징집되었기 때문에 여성들이 전쟁 수행에 필요한 민간 업무나 군대의 보조적인 업무에 투입되거나 군에 지원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요인들이 여성들의 삶에 끼친 영향은 나라마다 달랐으며 또한 개인의 환경별로도 달랐다. 특히 독일의 경우 "가치있는" 사람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에 대한 공식적인 처우는 "인종적인 적"으로 구분되는 사람들과는 천양지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여성들과 독일의 "가치있는" 여성들이 총력전으로 부터 받은 영향은 비슷한 면이 많았으며 또한 다른 점도 많았다. 현지 여성들과 외국인들과의 관계는 다른 점이 많다고 여겨져왔다. 그러나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전쟁 수행을 위해 여성들을 동원한 지역에서는 다른 점 보다는 비슷한 점이 많았을 것이다.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독일의 경우 남성이 전선에 투입되거나 점령지역에 배치되어 가정을 비우는 경우가 영국 보다 많았고 그 기간도 더 길었다는 것이다. 사상자의 숫자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독일 남성 중 300만명이 전사한 반면 영국군의 사망자는 독일의 10분의 1정도에 불과했다. 이때문에 독일은 영국보다 과부, 자식을 잃은 어머니, 아버지를 잃은 딸, 형제를 잃은 여성, 애인을 잃은 여성이 훨씬 많을 수 밖에 없었다. 독일에서는 남성들의 사망으로 인한 여성들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1941년 11월 부터 약혼한 여성이 임신한 상태에서 남자가 전사했을 때 "영혼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해 태어나게 할 아이를 사생아로 만들지 않도록 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독일에서는 전사자의 숫자가 많았던 만큼 전쟁포로와 실종자도 영국에 비해 훨씬 많아서 전쟁 말기와 종전 직후에는 수많은 독일 여성들이 현실적인 이유에서 독신을 택했다. 자신의 남자가 북아프리카나 중동, 극동 전선에 배치된 영국 여성들의 경우 불안감이 심했겠지만 이런 경우는 상대적으로 드물었으며 1944년 중반 이전까지 군대에 징집된 영국 남성의 상당수는 영국 본토에서 훈련을 받으며 지루한 안정을 누리고 있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장기간 가족과 가정으로 부터 떨어지게 되면서 가정에 있어서나 사회생활에 있어서나 익숙하지 않은 책임을 떠맏아야 했다. 여성들은 상점이라던가 독일에서는 작은 농장(여성들은 전쟁전에는 남편의 지도하에 가끔씩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과 같은 가업을 담당해야 했던 것이다. 여성들은 재주껏 아이를 키워야 했으며 어머니가 노동을 하는 경우 아이들이 탈선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포이커트(Deltlev J. K. Peukert)의 연구에 따르면 독일의 반체제 청소년 조직이었던 에델바이스 해적단(Edelweißpiraten)에 참여한 아이들은 대개 아버지가 전사한 집안 출신이었다고 한다.

전쟁으로 부부나 연인들이 생이별하게 되면서 평화시에는 안정적이었던 관계들이 심한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지역의 남성들이 군대나 산업계에 동원된 상태에서 다른 지역이나 다른 나라의 남성들이 쏟아져 들어온 곳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영국은 전쟁 전 기간에 걸쳐 외국 군대의 점령을 받지 않았고 독일도 1944년 말 까지는 마찬가지였지만 두 나라 모두 전쟁 기간 중 군부대의 이동이 빈번했으며 전선으로 파병되기 전 징집된 신병들이 자국 내의 군부대로 입소했다. 영국은 전쟁 대부분의 기간 동안 프랑스군, 네덜란드군, 폴란드 군 등 약 50만명 정도의 외국군대가 주둔했으며 1944년 6월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에는 그 숫자가 거의 150만명에 달했다. 많은 여성들이 군인들을 호기심과 일상생활의 즐거움의 대상으로 여겼으며 종종 이들로 부터 성병을 옮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성행위를 매개로 한 질병이 1941년 부터 1942년 사이에 급증했으며 독일의 함부르크에서는 1942년에 질병에 걸린 여성의 3분의 2가 군인들로 부터 성병에 감염된 것으로 나타났다. 독일에서는 도시에서 시골로 피난한 여성들이 근처에 군부대가 있을 경우 이곳의 군인들과 접촉했으며 정부는 10대 소녀들이 군인들의 왕래가 빈번한 기차역이나 그 밖의 지역에 출몰하는 것에 대해 자주 우려를 포명했다. 군인을 남편으로 둔 많은 독일 여성들은 특히 전쟁 후반기로 갈수록 생과부로 지내는 기간이 늘어났으며 군인들이 독일 본토나 외국에서 부정한 짓을 저지른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자신들도 비슷한 쾌락을 즐기려 했다. 독일 정부는 여성들의 문란한 행위에 대해 점점 우려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1942년에는 "전선의 병사들에 대한 모욕죄"를 도입한 데 이어 다시 간통한 여성은 가족수당의 지급 대상에서 제외했고 1943년 3월에는 전사한 군인의 아내가 부정을 저질렀을 경우 연금 지금대상에서 제외하기 위해서 "사후 이혼"을 합법화 했다.

한편 영국과 독일은 시간상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미군이 대규모로 주둔했다. 크리스타벨 빌렌베르크(Christabel Bielenberg)는 독일에서 만난 미군 조종사의 "건강하면서도 행복해 보이며 또한 풍요로운" 모습에 대해 기록하기도 했으며 영국 여성들은 미군의 "멋진 군복과 .... 많은 돈, 그리고 자잘한 사치품을 무한정 가지고 있는 듯한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전쟁 말기에 독일 여성들의 곤경은 심각했으며 독일의 공공시설들은 파손되거나 완전히 파괴되었고 식량 조차 얻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많은 여성들이 점령군인 연합군, 특히 미군과 관계를 가지면서 초콜렛이나 나일론 스타킹과 같은 물건을 불법적으로 구했으며 이것들을 직접 쓰거나 식량을 얻기 위한 물물교환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뷔르템베르크의 하일브론(Heilbronn)에 진주한 미군들은 "얼마 안가 뒤스부르크(Duisburg)에서 피난온 문란한 여자나 초콜렛으로 유혹한 슈바벤(Schwaben) 여자들을 자신의 여자친구로 삼았다." 영국에서도 물자 부족은 심각했다. "우리는 자크마(Jacqmar) 스카프나 나일론 스타킹을 가지고 싶어 하는 여자들을 항상 의심했다. 그 여자들이 (미군들과) 자유롭게 어울린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외국 군인들을 사귀고 싶어하는 젊은 여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화장품과 나일론 스타킹, 그리고 초콜렛을 무한정 가지고 있는 외국 군인들에게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실정, 그리고 실제보다 부풀려진 소문들은 병사들의 사기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크랭(J. A. Crang)은 "멋진데다 돈 많은 캐나다군과 미군이 (영국 본토에) 주둔하게 되면서 영국군 병사들 사이에서 불안감이 조성되었다"는 점을 잘 서술했다. 영국군은 이 문제에 크게 신경썼으며 공무원들을 동원해 떨어져 지내는 부부가 결혼생활이 파탄에 이르지 않도록 중재하도록 했다. 외국군대가 떠나면서 "안도하는 분위기가 퍼졌으며 ... 아이를 가진 채 남겨진 많은 독신여성들은 외국 군인들이 오지 않았으면 하고 원망했다."

당당하고 상대적으로 풍족한 외국군인들이 외롭고 불행한 여자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동안 다른 한편에는 사회적, 성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었다. 영국에 수용된 독일과 이탈리아군 전쟁포로들은 공식적인 방침에도 불구하고 영국 여성들과 접촉했으며 음식이나 다른 물품들을 얻기도 했다. 또한 영국 여자와 전쟁 포로간에 성적인 접촉도 있었지만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었다. 1943년 부터 영국으로 이송된 전쟁 포로가 급증했으며 이중 일부는 농가에 배치되어 일을 거들었지만 대부분은 포로수용소에 갇혀 엄격하게 격리되었다. 게다가 연합군, 특히 미군이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에 전쟁포로들은 인기가 없을 수 밖에 없었다. 영국과 달리 독일은 1939년 부터 외국인 노동자와 전쟁포로가 많았으며 이 숫자는 1944년에 7백만명으로 최고에 이르렀다. 많은 포로들이, 특히 폴란드인,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포로들이 독일의 농업 노동력으로 활용되었으며 이들은 가족 농장에 함께 살았는데 전쟁 후반기에는 가정의 유일한 남성 노동력인 경우도 있었다. 독일에서는 영국에 비해 여성들이 노동력을 의존하고 있는 외국인들과 성적인 관계를 가질 동기(성적으로 매력을 느끼거나 도는 농장일을 돕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이거나)와 기회가 훨씬 많았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치욕적이게도 이탈리아 포로의 유혹에 넘어간 유부녀들은 매우 심한 도덕적인 경멸의 대상"이 되는데 그쳤으나 독일에서는 외국인과 사랑에 빠진 "아리아인" 여성은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거나 때로는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다. 독일에서는 지역의 나치당 간부들이 여자들을 수용소로 보내기 전에 공개적으로 삭발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1941년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영국에서는 전쟁포로와 친밀하게 지내는 것은 단지 국가에 대한 충성과 전통적인 성적 도덕의 문제였으나 독일에서는 정권의 과도한 인종적 정책으로 "혈통을 더럽히는 행위"는 가혹한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Jill Stephenson, "The Home Front in "Total War" : Women in Germany and Britain in the Second World War", A World at Total War : Global Conflict and the Politics of Destruction, 1937~1945,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pp.213~217

인용한 글에서 설명하고 있듯 총력전 체제하에서 전통적인 가정과 여성의 역할은 완전히 산산조각 나게 됩니다. 물론 유럽에서 전쟁과 외국군대의 주둔같은 것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지만 2차대전은 그 규모면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사회에 미친 충격이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독일은 총력전 체제로 장기간 전쟁을 치르면서 여성의 역할이 확대된데다 패전으로 인해 수백만의 외국군대가 쏟아져들어오는 사상초유의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인 가족과 여성의 역할이 유지될 수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요. 인용한 글에서 나타난 것 처럼 독일이 정부적인 차원에서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 특히나 성적으로 정숙한 여성성을 지키기 위한 제도를 강구한 이유는 아마도 전통적인 여성역할의 붕괴가 사회적으로 감당하기 힘겨울 정도로 걷잡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 입니다. 효과가 신통치 않았던 모양입니다만.

이렇게 이미 장기간의 전쟁으로 전통적인 도덕이 위태위태해진 독일 사회에 미국이라는 재미있는 존재가 등장하면서 사태는 콩가루로 변해갑니다. 윌러비(John Willoughby)는 'The Sexual Behavior of American GIs during the Early Years of the Occupation of Germany'라 는 제목의 소논문에서 점령 초기 미군 당국이 독일 민간인들과의 사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지만 현실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는 점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점령군인 미군이 인기가 많다보니 점령초기 부터 여기에 반감을 가진 독일 남자들이 미군을 공격하는 사례가 간혹 발생했다고 하지요. 그리고 마치 한국의 인터넷 게시판에서 보수적 성향의 남자들이 여성들의 허영심이나 성적인 방종을 비난하는 것 처럼 점령초기의 독일에서도 미군과 사귀는 여자들을 비난하는 벽보가 붙기도 했다고 합니다. 약간 더 골때리는 것은 미국쪽에서도 일부 인사들은 독일 여자들이 순진한 미군 병사들을 사냥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는 것 입니다. 이런 점은 한국전쟁기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매춘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도덕적인 비난이 꽤 심했다고 하지요.(한국전쟁기 매춘과 이에 대한 반응에 대해서는 이임하의 『여성, 전쟁을 넘어 일어서다』를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다음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는 전쟁포로가 현지 여성들을 유혹하는 경우입니다. 연합군에 사로잡힌 독일군 포로보다 독일군에 사로잡힌 소련군 포로가 이 점에서 유리했다는 점이 흥미롭지요. 물론 전쟁초기 소련군 포로의 경우는 독일의 농장에 배치받기 전에 요단강을 건너갈 확률이 더 높긴 했습니다만. 토마스 크레취만이 주연으로 나온 독일영화 스탈린그라드에서도 영화 중간에 한 병사가 마누라가 외국인과 바람이 났다며 분통을 터뜨리는 장면이 있기도 합니다. 물론 영국이나 미국으로 이송된 독일군 포로 중에서도 현지 여성을 꼬셔서 눌러 앉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이런 사례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귀도 크놉(Guido Knopp)의 다큐멘터리에도 나온 게오르그 게르트너(George Gärtner)가 있을 겁니다. 이 양반은 포로수용소를 탈출한 뒤 미국 여자와 결혼해서 미국 시민권까지 취득했다죠;;;; 하지만 인용한 글에도 나와 있듯 여자들에게 훨씬 매력적인 풍족한 양키들이 있었던 까닭에 독일군 포로들은 여자 문제에서는 독일 본토의 러시아인이나 폴란드인보다 더 못했던 모양입니다.


역시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2009년 12월 13일 일요일

히틀러 집권기 독일의 보탄(Wotan)신앙

히틀러 집권기의 보탄(Wotan, 오딘) 신앙은 과거 이글루스 시절에 댓글로 한 번 언급했던 문제인데 이글루스를 날려먹었으니 재탕을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인용한 책은 "그 때의 그 책" 입니다.

히틀러가 독일을 통치하던 시기(1933~1945)에는 이단 신앙이 널리 고취되었다는 서술이 많은데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원인 중에는 1933년 의회에서 가톨릭 정당의 나치당 지지가 있었는데 이로인해 나치당은 집권당이 될 수 있었다. 수많은 가톨릭과 개신교 성직자들이 나치 정권을 열렬하게 지지했다. 나치 정권이 이교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은 2차세계대전 중의 전시선전을 통해 형성되었다. 신비학자(Occultist) 루이스 스펜스(Lewis Spence)는 대독일선전의 일환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쓰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오딘과 토르 신앙'으로 알려져 있는 고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의 신앙은 수많은 문학적 찬양의 대상이었다. 나는 민속학과 신화학을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고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신앙이 다른 하급 종교는 물론 폴리네시아나 고대 페루의 신앙과 비교하더라도 특별히 품격있거나 흥미로운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고대 독일신앙은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극단적인 나치 광신자들이 부활시키려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히틀러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몰락한다면 인위적으로 부활시킨 다른 이교신앙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히믈러와 헤스라는 두 명의 '극단적인 나치 광신자'들은 우수인종이 미래의 지배자가 된다는 믿음을 고무하는 아리아 신비주의를 적극적으로 추종했던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히틀러는 1941년에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보탄(Wotan) 신앙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것 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야. 우리의 고대 신화는 기독교 신앙이 확립되었을 때 더이상 살아남을 수 없게 되었으니까."

스펜스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군사적 전통에 기반하고 있는 국가사회주의를 "나치의 이단 교회"인 다신신앙과 결부시키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존 요웰(John Yeowell)의 최근 연구는 다신교도들이 나치 독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커녕 박해받는 존재였다는 점을 밝혀냈다. 다신종교의 지도자들은 나치정권에 의해 탄압받고 체포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루넨마이스터(Runenmeister) 프리드리히 베른하르트 마르비(Friedrich Bernhard Marby)는 1936년에 체포되어 이후 9년동안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마르비만 체포된 것이 아니었다. 1941년에 하인리히 히믈러의 명령에 의해 수많은 다신교와 밀교 단체가 불법화 되었다.(이 중에는 보탄 숭배자이며 아리아주의자였던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의 추종자들도 포함되었다.) 수많은 다신교도들이 다른 히틀러 정권의 희생자들처럼 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Prudence Jones and Nigel Pannick, A History of Pagan Europe, (Routlege, 2000), pp.218~219

물론 여기서 제가 인용한 구절은 사실의 일부분을 전달할 뿐 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프리드리히 마르비가 탄압받았던 원인으로는 다신교간의 교파 분쟁으로 히믈러의 지원을 받은 교파가 승리한 결과라는 주장이 있으며 히틀러의 경멸에도 불구하고 나치당의 소수 인사들이 이교도 신앙에 심취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나치 집권기를 통해 독일의 전통 신앙이 광범위하게 부활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와 만화같은 대중매체를 통해 이런 이상한 선입견이 확산되는 것은 찝찝한 일이지요.

2009년 9월 26일 토요일

Inside Hitler's High Command 한국어판 출간

간만에 교보문고에 들렀다가 재미있는 책을 몇 권 발견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Geoffrey P. Megargee의 'Inside Hitler's High Command'의 한국어판인『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였습니다. KODEF의 안보총서 시리즈 중 하나로 출간되었는데 출간일을 확인해 보니 9월 7일이었습니다. 그동안 KODEF의 안보총서는 주로 개설서 위주로 출간되었기에 이런 심도깊은 서적이 출간되었다는데 반가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 책은 2차대전 당시 히틀러가 군사문제에 깊히 관여한 것이 패전의 큰 원인이라는 전후 독일 장군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저자는 독일 고위 장교단은 히틀러의 집권 초기에만 어느 정도 저항을 했을 뿐 2차대전으로 치닫기 시작하면서 히틀러의 전략적 방침을 그대로 수용했으며 그때문에 패전의 책임을 히틀러와 함께 나눠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군 고위 사령부는 보급과 정보에서 비참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이었으며 2차 대전 초기 부터 전략적으로 형편없는 상태에서 작전적, 전술적인 우위로 승리를 거둔 것으로 평가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소련에 대한 침공등 심각한 전략적 오류를 저질렀으며 결국 패전으로 다다를 수 밖에 없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2001년 초에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기존에 가지고 있던 통념들과 배치되는 내용으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는데 이제 한국어판도 나오게 되었다니 매우 반가운 일 입니다. 마치 'Blitzkireg Legende'의 한국어판, 『전격전의 전설』이 출간되었을 때 처럼 즐겁습니다. 게다가 가격도 2만5천원으로 매우 착하더군요. 많은 분들이 이 저작을 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KODEF에서 출간한 (별로 좋은 책은 아닌 것 같지만) 『나는 탁상 위의 전략은 믿지 않는다』의 경우 '리더쉽' 이라는 측면을 강조해서 경영서적(???)으로도 호평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도 조직의 실패사례로 경영인들에게 꽤 많은 시시점을 줄 수 있을테니 잘만하면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능한 인재들이 모인 조직이 재앙적인 실패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독일군 수뇌부는 아주 흥미로운 소재이지요.

※ 제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한국어판도 구입해서 원서와 대조해 보고 싶은데 지갑이 가벼워서 그런 호사는 누리지 못 할 것 같습니다. 번역하신 분이 군사사적을 전문적으로 번역하신 분이니 번역은 훌륭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두 번째는 한스 델브뤽(Hans Delbrück)의 'Geschichte der Kriegskunst im Rahmen der politischen Geschichte'의 번역판인『병법사-정치사의 범주 내에서』였습니다. 이 책이 번역된다는 소식은 2007년 말에 처음 들었는데 예상보다 빨리 출간되었더군요. 방대한 저작이라 한국어로 완역되어 소개되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원서에 맞춰 총 4권으로 출간되었는데 문제라면 각 권의 가격이 후덜덜하다는 것 입니다. 각권은 3만원에서 4만원대를 오가는 데 아무래도 개인이 구매하여 소장하기에는 살짝 부담스러울 듯 싶습니다.
델브뤽은 제 블로그에서도 몇 번 언급했듯 뛰어난 군사사가 일 뿐 아니라 군사평론가로서 군사사상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입니다. 언제 한번 짤막하게 정리해서 소개를 해 보고 싶은데 그러고 보면 예고만 해 놓고 아직 쓰지 못한 글이 많군요;;;;

두 권 모두 군사사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강력히 추천하는 바 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저작들이 한국어로 소개되는 것을 보면 앞으로 또 어떤 저작이 소개될지 기대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왕이면 제가 읽지 못한 것으로 번역되면 좋겠습니다만.

2009년 7월 21일 화요일

20일의 독일연방군 선서식

독일 연방군은 7월 20일의 히틀러 암살 시도를 기념해서 이날 신병 선서식을 하는 것이 관례라고 합니다. 올해의 선서식은 연방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렸으며 메르켈 총리가 직접 참석했습니다. 연방군과 시민들을 보다 가깝게 하자는 취지였다고 하는군요.

한편 선서식이 있던 도중 베를린에서는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요구하는 반전시위가 있었다고 합니다. 10대 초반의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이 세명이나 사살됐다는 흉흉한 소식이 전해진 직후이기도 하니 올해 선서식은 꼬였다는 느낌입니다.


Budeswehr-Gelöbnis vor Reichstag(Spiegel)

2009년 2월 10일 화요일

이박사는 밀리터리매니아?

1949년 초의 어느 날, 국무회의에 참석한 이박사께서 갑자기 이런 이야길 하셨습니다.

찦車에 鐵板을 加工하야 鐵匣車를 우리의 손으로 優良品을 생산할 수 있다하니 五十臺 可量 製作하여 보는 것도 좋겠다.

第十二回 國務會議錄, 檀紀四二八二年 一月二十一日

이박사 말씀인즉, 이런 물건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죠.


아무래도 건국 초의 대한민국은 안보적으로 불안한 나라이다 보니 대통령인 이박사가 군대에 관심이 많은건 당연하겠습니다만 이렇게 시시콜콜한데 까지 신경쓰는걸 보면 좀 묘합니다. 물론 다른 기록을 보더라도 이승만은 군사 무기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건 알 수 있습니다만 이런 잡다한 물건까지 관심을 가질 줄이야. 어쩌면 우리의 초대 대통령은 밀리터리매니아 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대한민국이 충분한 돈과 기술이 있었다면 이박사의 국방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었을까요 아니면 더 매니악한 기질을 발휘해 히총통 처럼 됐을까요? 하여튼 여러모로 재미있는 양반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박사에게 지프를 개조해 장갑차를 만들자는 이야기는 누가 처음 꺼냈을까요? 이게 정말 궁금합니다.

2009년 1월 12일 월요일

Germany and the Axis Powers - by Richard L. DiNardo

옛날 농담 하나.

히틀러와 도죠가 지옥에서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히틀러가 말하길.




“다음 전쟁은 이탈리아를 빼고 합시다.”

이 썰렁한 개그가 상징하듯 2차대전 당시 독일과 그 동맹국들간의 공조체계는 엉망이었습니다. 이미 푀르스터(Jurgen Förster) 같은 쟁쟁한 연구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명확한 결론을 내려놓고 있습니다.

디나르도(Richard L. DiNardo)의 Germany and the Axis Powers 역시 독일과 동맹국들의 관계에 대해서 기존의 연구들과 동일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물론 붕어빵 같이 똑같은 내용이라면 굳이 책을 쓸 필요가 없었겠지요. 디나르도는 독일과 동맹국들의 관계를 각각 전략 차원과 작전 차원에서 고찰하고 있습니다.

작전 단위에서는 독일군의 각 병종 별로 동맹국들과의 협력의 성과가 달랐습니다. 저자는 독일 공군이 동맹군과의 관계에서 가장 양호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합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지중해 전역에서 몰타에 대한 공격과 루마니아의 플로예슈티(Ploieşti) 방공전을 꼽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일 공군도 궁극적으로는 동맹국들을 하위 동반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중요한 기술 협력에서는 비협조적이었다는 한계를 지적합니다. 독일 육군과 동맹국의 관계는 최악이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동부전선입니다. 독일 육군은 동부전선에 대규모의 동맹군을 끌어들였지만 정작 동맹국에 대한 군사원조와 보급에는 비협조적이었으며 이것은 1942~43년 겨울의 대재앙으로 이어졌다고 비판합니다. 동부전선에서 동맹군 사령부에 파견된 독일연락장교들은 종종 상대방이 무례한 간섭으로 여길 정도로 행동해 거부감을 키우는 등 문제가 많았다고 합니다. 아마 동부전선의 독일과 그 동맹국들의 관계는 한국전쟁 당시 한국과 미국의 관계와 비교하면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자가 독일 육군에서 예외적인 존재로 꼽는 것은 롬멜인데 저자는 롬멜은 동맹군인 이탈리아군을 잘 활용했다고 높게 평가합니다.

저자는 전략 단위의 동맹 관계에 대해서는 더욱 혹독한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점으로는 미국과 영국과 같이 통일된 전략적 지휘체계가 없었다는 꼽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문제점 때문에 이탈리아가 아프리카와 발칸반도에서 무모한 모험을 벌여 독일을 수렁에 빠트린 것을 막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독일과 그 동맹국들의 전략적 이해 관계가 제각각 이었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합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이해관계 차이는 지중해 전역에서 문제를 일으켰고 동부전선에서도 동맹국들이 각각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치중했기 때문에 1944년에 파탄을 가져왔다는 것 입니다. 독일의 동맹국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핀란드도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1942년 말부터 전쟁에서 빠질 구실만 찾았으며 독일의 지원 약속에도 불구하고 공세에 무관심했다는 점은 독일과 동맹국들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제가 가장 흥미 있게 생각한 것은 독일은 미국보다 뒤떨어지는 산업력으로 미국이 자국의 동맹국들에게 했던 것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점 입니다. 독일은 동맹국들에게 군사 및 경제원조를 하면서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은 미국이 아니었으니 이런 체제가 제대로 굴러갈 수는 없었습니다. 이탈리아는 우수한 해군을 가졌지만 석유 부족으로 1942년 초부터 작전에 지장을 받았습니다. 독일은 지중해 전역을 위해서 이탈리아 해군에 대한 석유 보급에 신경 썼지만 독일의 능력으로는 이탈리아 해군을 지원하는 것이 역부족이었습니다. 1943년 이후 동맹국들은 독일에 더욱 더 많은 원조를 요구했지만 이제는 독일 스스로도 자국의 필요량을 채우는데 급급해 졌습니다.

저자는 독일이 1차대전의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고 비판합니다. 독일은 1차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라는 제 1의 동맹국을 단순한 하위 협력자로 대했는데 그러한 과오를 2차대전에서도 반복했습니다. 특히 전략적 차원에서의 동맹 관계는 완전한 실패 그 자체였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반대로 독일의 적국들은 1차대전과 2차대전 모두 독일보다는 양호한 동맹관계를 유지했습니다. 1차대전 당시 영국-프랑스의 관계나 미국-영국의 관계는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물론 이들의 관계는 독일과 그 동맹국들과는 달리 동등한 입장에서 관계가 가능한 강대국들이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독일의 주요 동맹국들은 하나 같이 독일보다 국력이 압도적으로 떨어지는 국가들이었고 열강 대접을 받던 이탈리아도 그 점에서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만약 독일이 자국과 동등한 수준의 동맹을 가졌다면 2차대전사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한국전쟁시기 한미관계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꽤 많습니다. 한국은 월등한 국력의 강대국을 동맹으로 가진 만큼 이 저작이 충분한 시사성을 가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2008년 12월 10일 수요일

자유인도군단(Freie Indische Legion)

원래 슈타인호프님이 올려주신 글에 호응해서 올리려 했는데 좀 늦어졌습니다. 이준님도 관련 글을 한 편 써 주셨군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당연한 말 이겠지만 어느 나라건 간에 외국인의 자국군대 입대에 대한 법적 근거는 있기 마련이고 독일도 당연히 그런 법적 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935년 5월 21일에 제정된 독일 국방법(Wehrgesetz)의 1조 1항은 모든 ‘독일남성’을 대상으로 국방의무를 부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독일 국적자가 아닌 외국인과 무국적자의 경우에는 18조 4항에 의거해 총통의 허가를 받을 경우 자원입대가 가능했습니다. 외국인의 자원입대를 허가하는 권한은 다시 1935년 6월 26일에 전쟁성장관(Reichskriegsminister)에게 주어졌다가 1938년 2월 4일에는 국방군총사령관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하자 국방군사령부는 1939년 10월 7일자로 이중국적자, 무국적자, 외국인, 독일계 외국인(Volksdeutschen)의 국방군 입대를 허용하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러한 법령과 명령들이 전쟁 기간 중 잡다한 외국인 지원병 부대를 편성하는 근거가 됩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지요.

독일은 전쟁 초반부터 잡다한 외국인 의용부대를 편성합니다. 이것이 본격화 된 것은 독소전 발발 이후이지만 그 이전에도 서유럽에서 모병활동이 있었지요. 어쨌건 초기에는 유럽인 위주로 외국인 입대를 허용했지만 소련 및 미국과의 전쟁으로 전쟁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독일군도 인종전시장이 되어 버립니다.

독일이 인도인 부대를 편성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941년 4월 3일 찬드라 보스(Chandra Bose)가 소련을 경유해 독일로 입국한 뒤였습니다. 슈타인호프님의 글에 잘 나와 있는데 보세는 스탈린이 인도 독립문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자 크게 실망해서 독일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보세가 독일로 오자 독일 외무성은 그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트로트 주 졸츠(Adam von Trott zu Solz) 참사관의 관할하에 ‘인도 특별국(Sonderreferats Indien)’을 설치합니다. 그러나 히틀러도 스탈린 처럼 인도 독립문제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보스는 1941년 4월 29일에 처음으로 인도군 포로를 중심으로 인도독립군을 편성하자는 주장을 했으나 독일측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스는 독일 측에 소련의 지원을 얻어 아프가니스탄을 통해 인도독립군을 인도로 진격시키자는 제안을 했는데 이 방안은 현실성이 부족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보스는 독일에 도착한지 1년이 지난 1942년 5월 27일에 히틀러와 회견하고 인도 독립문제를 논의했으나 역시 별다른 결과는 없었습니다.

한편, 이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펀자브 출신의 이슬람교도인 무함마드 셰다이(Mohammed Iqbal Shedai)라는 독립운동가가 반영 선전 활동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셰다이는 종교 때문에 이슬람 중심의 인도독립운동을 구상하고 있었지만 1941년 12월 보스와 회담한 뒤에는 힌두교도와의 협력으로 돌아섭니다. 두 사람은 독일과 이탈리아를 움직여 인도독립군을 편성하자는데 합의합니다. 보스의 활동으로 독일과 이탈리아 정부는 인도독립군 편성에 동의하게 됩니다. 인도독립군의 근간은 북아프리카에서 포로가 되어 이탈리아에 수용된 인도군 포로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42년 6월 자유인도군단(Freie Indische Legion, 이하 인도군단)이 창설됩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정부와의 합의에 따라 1942년 7월에 1,738명의 인도인 포로가 기차편으로 독일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에 롬멜이 1942년 6월 21일에 토브룩을 함락시키면서 추가로 6천여명의 인도군 포로가 잡히게 됩니다. 인도군 포로가 갑자기 늘어났기 때문에 이 무렵부터 인도 독립군을 연대 급으로 편성하는 방안이 고려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이탈리아에서 공작원으로 공수훈련을 받고 있던 80명의 인도군 포로가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도 자체적으로 인도군 포로들을 활용할 계획은 가지고 있었으나 1942년 이후 사실상 이 계획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막상 포로들을 받고 보니 보스 휘하의 인도군단에 지원하지 않는 포로들이 많았습니다. 1942년 7월에 인도군단에 자원한 포로는 280명에 불과했고 이것은 당초 보스의 예상을 밑도는 규모였습니다. 이탈리아로부터 인도받은 포로 중 인도군단에 지원하지 않은 자들은 다시 안나부르크(Annaburg)와 람스도르프(Lamsdorf)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여기서 모집을 계속했습니다. 독일군은 최초의 자원자가 모집되자 작센의 프랑켄베르크(Frankenberg)에서 첫 번째 대대의 편성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드레스덴 근교의 쾨니히스브뤽에 훈련소가 설치되고 이후의 부대편성과 훈련은 이곳에서 이루어 집니다. 그리고 인도군단의 본대와 별도로 50명이 브란덴부르크 교도연대(Lehrregiment Brandenburg)로 보내져 특수공작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도군단의 편성 초기에는 자원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초기의 지원자 중에는 부사관 이상의 포로가 전혀 없어 소대 편성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독일측은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부사관 교육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여기에 포로들은 거의 대부분 독일어를 몰랐기 때문에 독일어 교육부터 시켜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한줌밖에 안되는 포로들이 또 다시 카스트와 종교별로 나뉘었습니다. 포로 중 50%는 힌두교도, 25%는 이슬람교도, 20%는 시크교도, 5%는 기독교도였는데 이들을 그냥 섞어놓으니 문제가 없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인도군단은 1942년 10월까지 추가 지원자를 받아들여 대대급으로 확장됩니다. 첫 인도군 대대의 지휘관은 크라페(Kurt Krappe) 소령이었습니다. 이 대대는 42년 10월 보스와 주독일본대사관 무관 등의 참관하에 대대훈련 시범을 보입니다. 물론 이것은 선전 목적이 강한 훈련이었습니다. 인도군단은 1943년 2월에는 제3대대의 창설을 마치고 총 15개 중대 3,000명으로 증강됩니다.

그런데 이때는 동부전선과 아프리카 전선 모두 정신 없이 꼬여가던 시점이라 독일군 수뇌부는 인도군단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보스도 독일의 태도에 실망해 일본으로 떠나버렸고 인도군단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어쨌든 1개 연대를 만들어 놓았으니 그냥 놀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국방군 총사령부는 인도군단을 프랑스로 보내버립니다. 그러나 인도군단 병사들 중 일부는 당초 인도독립전쟁을 위해 자원한 만큼 프랑스로 갈 수 없다고 항의하며 시위를 벌입니다. 독일측은 이 중 주모자 두 명은 6년형을 선고하고 이외에 시위에 가담한 40명도 수용소로 보내버립니다.

서부전선으로 이동명령을 받은 인도군단은 1943년 5월 벨기에로 이동해 제16공군야전사단에 배속됩니다. 이때 인도군단은 제950보병연대로 개편됩니다. 연대장은 크라페 소령이 중령으로 진급해서 맡게 되었습니다. 16공군야전사단에 배속된 2개 대대는 다시 네덜란드로 이동해 1대대는 Ymuiden에, 2대대는 Texel섬에 배치됩니다. 인도군단의 2개대대는 다시 1943년 9월에 남부프랑스로 이동해 제344보병사단에 배속됩니다. 1944년 1월 8일에 제159예비사단이 보르도를 담당하게 되자 인도군단은 159예비사단으로 배속 변경됩니다. 인도 자원병에 대한 교육훈련은 지속적으로 실시되어 1943년 10월 1일에는 12명의 인도인 부사관이 소위로 임관되었습니다. 역시 비슷한 시기에 독일-힌두어 사전이 보급되어 언어 문제도 그럭저럭 해결되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1944년 6월 30일, 인도군단의 9중대(장교 3명, 부사관 및 사병 199명)에 이탈리아 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9중대는 278보병사단에 배속되어 44년 7월 리미니(Rimini)에 배치됩니다. 9중대는 1945년 1월까지 이탈리아 전선에서 빨치산 토벌전을 수행하게 됩니다. 인도군단의 나머지 병력은 연합군이 남부 프랑스에 상륙한 이후 퇴각전 과정에서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교전했는데 이중 레지스탕스에 항복한 29명이 9월 22일에 학살되어 영국과 프랑스의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합니다. 프랑스 측은 인도군단이 퇴각 과정에서 범죄행위를 자행했기 때문이라고 항의했는데 실제로 인도군단 병력이 레지스탕스와 교전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민간인을 살해하고 약탈행위를 한 사례가 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독일 국경으로의 퇴각 과정에서 인도군단 병사 중 상당수가 탈영하기도 합니다. 인도군단 3대대는 9월 16일에 미군과 교전하게 되는데 별다른 중장비가 없는데다 전의도 없어서 그대로 붕괴되어 버립니다. 제3대대가 콜마-스트라스부르 지구에 도착했을 때는 대대 병력 중 300명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프랑스에서 퇴각한 이후 인도군단은 후방 경계 및 진지 공사 등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인도군단이 프랑스에서 퇴각전을 치르는 동안 인도군단에 관심을 가진 고위층이 한 명 나타났습니다. 친위대의 몸집 불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히믈러였습니다. 인도군단은 1944년 8월 8일부로 친위대 해외국(Auswärtigen Amt) 관할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인도군단이 퇴각전 중이었기 때문에 크라페 중령이 계속해서 지휘관으로 있었습니다. 퇴각전을 치르고 알자스에 도착한 인도군단은 그제서야 자신들의 관할이 친위대로 넘어간 것을 알게 됩니다.

1944년 11월, 인도군단은 다시 독일 영내로 이동해 라스타트(Rastatt)와 뷜(Bühl) 지구에 주둔하다가 다시 12월 말에는 호이베르크(Heuberg) 훈련장으로 이동합니다. 이 무렵 인도군단은 사실상 전투부대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였고 1945년 초에는 계속 후퇴만 하다가 4월에 모든 전투장비를 독일측에 반납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인도군단의 일부는 스위스로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군단 대부분은 프랑스군의 포로가 됩니다. 본대와는 떨어져 있던 인도군단의 보충대대(Ersatzbataillon)는 미군에 항복합니다.

인도군단 소속 병사들이 항복한 뒤에 있었던 일은 슈타인호프님의 글에 설명이 잘 되어 있으니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서적
Rudolf Absolon, Die Wehrmacht im Dritten Reich Band V, Harald Boldt Verlag, 1988
Carlos Caballero Jurado, Foreign Volunteers of the Wehrmacht 1941~45, Osprey, 1983
Franz W. Seidler, Avantgarde für Europa : Ausländische Freiwillige in Wehrmacht und Waffen-SS, Pour le Merite, 2004

※ 위에서 언급한 저작 들 중 Carlos Caballero Jurado의 Foreign Volunteers of the Wehrmacht 1941~45는 오류가 몇 가지 있더군요. 인도군단에 대한 내용 자체도 짤막하긴 하지만 연대 편성에 대해 나와 있어서 참고했습니다.

2008년 10월 7일 화요일

스탈린 동지의 동종혐오

꽤 재미있는 스탈린 전기의 저자인 라진스키(Edvard Radzinsky)는 스탈린과 히틀러는 서로를 혐오했지만 동시에 또 비슷한 점이 많은 인간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니 스탈린과 히틀러의 관계는 동종혐오라고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스탈린의 혐오감은 소련의 언론들에 다소 기묘한 방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바로 ‘무시’ 였습니다.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는 1933년 1월 30일에 있었던 히틀러의 집권을 1면에 싣지 않고 그 대신 다른 면에 짤막한 단신으로 처리했다. 두 신문은 같은 해 2월 제국의회 방화사건이 일어나자 이것을 대서특필했고 또 히틀러에게 절대권력을 안겨준 3월의 수권법(授權法, Ermächtigungsgesetz) 통과에 대해서는 더 많은 비중을 뒀으나 얼마 있지 않아 이 사건들은 ‘제1차 소연방 집단농장 돌격노동자 대회’의 개최 소식에 밀려 지면에서 사라져버렸다. 프라우다는 독일에서 공산당원에 대해 자행되는 테러에 대해서는 자주 보도했지만 독일의 정치적 상황 변화에 대해서는 몇 달 동안 한 줄의 사설도 내지 않았다. 비록 히틀러의 등장으로 서구의 지식인들 중 일부가 소련을 민주주의의 보루로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소련 자체의 인식에는 그다지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Jeffrey Brooks, 『Thank you, Comrade Stalin! : Soviet Public Culture from Revolution to Cold War』,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0, 2001, p.151

물론 1939년의 독소불가침 조약으로 독일과 히틀러에 대한 태도는 갑자기 돌변했지만 오래 지속될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결국 레닌과 트로츠키에 이어 ‘스탈린의 세 번째 스승(라진스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히틀러는 스탈린에게 패배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아. 그러나 서쪽의 호적수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동방에서 새로운 골칫거리가 등장했습니다.

그는 바로.




毛主席万岁!




네. 스탈린은 마오 주석에게도 히총통과 마찬가지의 혐오감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니 소련의 언론들이 마오 주석을 어떻게 취급했을지는 다들 짐작하시겠지요.

이렇게 중국혁명에 대한 찬사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었다. - 소련 언론들은 마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관영지인 ‘노보예 브레먀(Новое Время)’는 마오에 대해 단지 혁명의 지도자라고만 언급했을 뿐 그가 제2차 전원회의에서 채택된 여러 계획들의 창시자라는 점과 그가 맑스-레닌주의에 기여한 점을 모두 무시했다. 그리고 뒤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수립되었을 때 ‘노보예 브레먀’의 사설은 마오의 이름 자체를 언급하지 않았다; 전원회의에 대해서는 스탈린의 “천재적인 예언”이 실현된 것이라고 지적했을 뿐이다. 이와 비교했을 때 프라우다의 사설은 마오에 대해 단 한번 언급했으나 그것도 마오의 발언 중 중국혁명의 승리는 소련의 영향과 원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을 인용하기 위한 것 이었다.

Sergei N. Goncharov, John W. Lewis, Xue Litai, 『Uncertain Partners :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p.46

그렇습니다. 대인배가 갖춰야 할 품성에는 쪼잔함이 필수인 것입니다.

2008년 7월 17일 목요일

총통각하 생가방문 + 잘츠부르크, 린츠

바로 전날에는 아주 편하게 잘 잤습니다. 기분 좋게 잠을 잘 자서 그런지 평범한 아침 식사도 아주 근사하게 느껴지더군요.


아침식사도 즐겁게 마치고 호텔을 나섰습니다. 호텔을 나와서 호텔 앞에 붙은 설명을 보니 300년 정도 된 호텔이더군요.


그런데 브라우나우 암 인 같은 시골에는 왜 왔느냐?

바로 이분 때문에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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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안 백만볼트!!!

그렇습니다. 이 시골동네에는 이분의 생가가 있는 것이죠.

바로 이 집입니다.


총통의 생가이긴 하지만 총통각하는 그다지 착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기념비는 당연히 없습니다. 대신 집 앞에는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추모비가 대신 서 있습니다.




히틀러 생가의 바로 옆 건물은 엑스박스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게임가게가 들어 앉아 있었습니다. 이 가게는 덤으로 포르노도 취급하더군요.


히틀러 생가로 가는 길에 지나갔던 탑인데 돌아가면서 보니 1966년에 재건한 탑이더군요. 처음 봤을 때는 꽤 오래된 물건인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콘크리트로 만들었던 예전의 광화문을 생각하니 복원 하나는 잘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브라우나우 시내(라고 해봐야 얼마 안되는)를 잠시 구경했습니다.

브라우나우의 Rathaus. 이런 작은동네의 Rathaus는 뭐라고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간단히 시내 구경을 마친 뒤 잘즈부르크로 가기 위해서 기차역으로 돌아갔습니다.



린츠와 마찬가지로 잘즈부르크도 기차를 두 번 갈아타야 합니다.


독일도 그렇지만 시골의 철도 노선은 중간 중간 귀여운 간이역들이 많아서 여행객들을 즐겁게 합니다.


물론 지나가는 풍경들도 마음을 편하게 해 주지요. 여름철에 왔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그리고 잘즈부르크에 도착했습니다. 만약 전날 기차에서 졸지만 않았다면 오후 늦게 브라우나우 암 인에 도착해 히틀러 생가를 구경한 뒤 다시 밤 기차로 잘즈부르크로 돌아왔을 텐데 졸다가 린츠까지 가는 바람에 계획이 어긋나 버렸습니다.



역 앞에는 1차 대전당시 Kaiserschützen 연대들에 소속된 전몰용사들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예술의 도시 입구에서 전쟁의 흔적을 마주치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Kaiserschützen 연대 전몰자 추모비

※ Kaiserschützen에 대한 영문판 위키피디아 항목은 매우 소략합니다. 독일어판 위키피디아 항목이 훨씬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더군요.

시간이 넉넉하다면 역에서 구시가지 중심까지 걸어갔겠지만 이미 반나절은 날려먹은 터라 별수 없이 버스를 탔습니다. 일단 성당광장과 잘즈부르크 성을 우선적으로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성당 광장에는 커다란 체스판도 있더군요. 사진으로는 많이 봤는데 직접 보니 더 재미있어 보였습니다.




성당 내부는 매우 근사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사진을 모두 말아먹었습니다. 제대로 찍힌게 한 장도 없어서 못 올리게 됐습니다.;;;;;

그리고 다시 성당광장으로 나와 잘즈부르크 성으로 올라가는 전동차를 타러 갔습니다.

목표가 보인다!!!



전동차를 타고 올라가는게 예전에 한 번 가봤던 하이델베르크 성이 생각나더군요. 물론 반쯤 폐허가 된 하이델베르크 성과는 달리 잘즈부르크 성은 아주 상태가 양호해서 즐거웠습니다만.

산 꼭대기로 올라가니 전망이 정말 좋았습니다!



잠시 경치를 감상한 뒤 성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성 내부의 많은 구역을 관람할 수 없었습니다. 당장 기념품 가게 하나와 화장실을 제외하곤 다른 부대 시설들도 문을 닫았더군요. 비수기라 그런건지... 달리 설명문도 없어서 영문을 모르겠더군요. 여름에 다시 오라는 건지...(물론 여름에 또 간다면야 저는 정말 좋겠습니다만.)


그런데 성 안에서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설마 오스트리아에도 허 총재님이 공화당 지부를 만드셨나 싶었습니다!


성에서 내부를 관람할 수 있었던 장소는 몇 군데 되지 않았습니다.

한 방에는 잘즈부르크성이 건립된 당시 부터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기 까지의 변화과정을 모형으로 전시해 놓고 있었습니다. 꽤 재미있더군요.









이 방 말고 감옥으로 쓰이던 작은 방도 구경했는데 너무 어두워서 제 고물 똑딱이로는 사진이 잘 안나오더군요. 전망대 까지 올라가는데 중간에 아무 사진도 없으면 휑할것 같아 그냥 복도 사진을 한 장 올립니다.


성 위의 전망대로 올라가니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어서 눈을 뜨기가 조금 어려웠습니다. 다행히 금방 바람이 잦아 들더군요.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 보다 보니 꽤 멋진 집이 한 채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작은 지도에는 별 다른 설명이 없는걸 보니 유명한 건물은 아닌 것 같은데 경치 하난 좋더군요.


전망대 위에 서서 한참 경치를 구경하다 보니 갑자기 미나스 티리스의 성벽위에 올라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거 영화를 너무 열심히 봤나...



다음으로는 마리오네트를 전시해 놓은 방이 있었는데 이건 뭔가 잘즈부르크 성과 안 어울리는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군사시설이었던 건물에 인형을 전시해 놓으니 뭔가 괴이한 느낌이 들더군요.


잘즈부르크 성의 유명한 곳 몇 군데를 구경할 수 없어서 아쉽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냥 내려왔습니다. 다른 관광지들도 다 비슷하지만 왜 이렇게 겨울에는 구경하지 못하는 곳이 많은지 모르겠네요.

내려와서 간식으로 슈니첼을 넣은 샌드위치를 사 먹었습니다. 뜨끈뜨끈 했다면 좋았겠지만 원래 이 어린양은 느끼한 것을 좋아하는 지라 먹을만 하더군요.


그리고 구시가지 구경을 계속 했습니다. 중간에 모차르트 생가에도 들렀는데 사진은 찍지 않았습니다.

St.Blasius Kirche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니 역시 모차르트를 벗겨먹고 사는 동네라는걸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도플러의 생가도 잘츠부르크에 있다는건 이날 처음 알았습니다.


다음으로는 모차르트가 이사해서 살았던 집으로 가 봤습니다. 모차르트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관광객들의 유로를 빨아먹는 곳이죠.


기념관 내부의 전시물 구성이나 배치는 만족스러웠습니다. 중간에 모차르트가 여행했던 지역을 표시해 주는 대형 지도도 있었는데 이게 가장 멋지더군요.





모차르트 기념관을 구경한 뒤 잘츠부르크 중앙역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시간이 넉넉했다면 Leopoldskron을 구경하고 싶었는데 여긴 나중에 여름철에 오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쉽지만 이미 시간을 너무 많이 썼는지라...


그리고 다음 목적지인 린츠로 향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인스부르크→브라우나우 암 인→잘츠부르크→린츠 순서가 되어야 했는데 하필 전날 기차에서 졸다가 잘즈부르크를 지나쳐 버려서 인스부르크→린츠→브라우나우 암 인→잘츠부르크의 순서가 되다 보니 린츠 구경은 애시당초 물건너 갔습니다. 지도를 보면 아시겠지만 잘츠부르크에서 브라우나우로 가는 거리가 린츠에서 브라우나우로 가는 거리보다 훨씬 짧지요. 정말 이럴땐 시간이 너무 아깝습니다.


하지만 그냥 린츠를 지나치기도 아쉬워서 잠시 들러 저녁이나 먹고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시내 구경을 잠시 하다가 혹시 뭐 재미있는 책이 없을까 싶어 한 대형서점에 들어갔는데 2차대전사 서적은 개설서들 뿐이고 톰 크루즈 자서전 같은 것만 잔뜩 쌓여 있더군요. 역시 헌책방이 최고 입니다.


저녁은 터키 요리 비스무리한 음식을 파는 터키인 가게에서 먹었습니다. 터키 요리를 독일인들 입맛에 맞게 바꾼 음식들을 팔았는데 마치 한국의 중국집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한 뒤 마지막 목적지인 빈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렸습니다. 여행의 마지막이 보이기 시작하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즐겁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빈으로 가는 마지막 ICE를 기다리면서 맥주를 한 병 마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