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 6일 일요일

독일장교 비더만의 소련 포로수용소 생활

역시, "독일육군 제 5기갑대대에 대한 짧은 이야기"에서 파생된 글 입니다.

바보이반님이 재미있는 댓글을 달아주셨더군요. 바보이반님의 댓글을 읽고 나니 전에 한번 읽었던 비더만(Gottlob Herbert Bidermann)의 회고록이 생각났습니다. 비더만은 평범한(?) 보병사단의 평범한(?) 장교였지만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동부전선에서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인데다 결정적으로 포로생활을 아주 운좋게 마친 경우입니다. 비더만의 회고록에서 그의 포로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일부 발췌해 봤습니다.

1945년~1946년 겨울의 이야기는 다른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비참했던 것으로 묘사됩니다.

작업반은 눈 덮인 숲으로 보내져 그 곳에서 수작업으로 나무를 베어야 했다. 숲에서 하는 모든 작업은 기계의 도움 없이 행해졌다. 우리는 도끼로 나무를 베고 톱으로 나무를 켠 뒤 다시 그것을 해머와 쐐기로 쪼갰다. 이런 중노동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식량이 배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 안가 최초의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수용소 주위의 토지는 거의 콘크리트 만큼이나 단단하게 얼어 붙었기 때문에 사망자의 시체는 보다 부드러운 늪지대에 매장해야 했다. 우리는 늪지의 땅을 긁어서 파내어 죽은 사람들이 안식을 취할 곳을 만들었다. 나는 시체 매장반으로 작업을 나갔을 때 산딸기를 발견해서 그것을 비타민을 섭취할 수 있었다.
사망자 중에는 자로티(Sarotti)가 있었다. 물론 자로티는 그의 성은 아니었지만 그는 유명한 북해 지역 항구도시의 사업가 집안출신이었으며 북부 독일의 자로티 초콜렛 공장을 경영했었다. 그의 침상은 바로 나의 아래에 있었는데 어느날 아침 내가 잠에서 깼을 때 나는 그의 머리가 한 쪽으로 젖혀져 턱에 약간의 피가 말라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자로티의 시체를 밤 사이에 죽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늪으로 가져가 매장했다.
사망자의 숫자는 계속해서 급증했고 그 중에는 온스트메팅엔(Onstmettingen) 출신의 교사 헤르만과 엔드링엔(Endringen) 출신의 젊은 드레셔,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이 포함되었다. 1945년과 1946년 겨울 사이에 내가 있던 수용소에 있던 포로 중 3분의 1 이상은 그들의 긴 여정의 마지막을 임시 공동묘지에서 마치게 되었다.

Gottlob Herbert Bidermann , Translated by Derek S. Zumbro, In Deadly Combat : A German Soldier’s Memoir of the Eastern Front,(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0), pp.302-303

그리고 1946년 봄이 되고 보다 큰 수용소로 이송된 비더만은 대우가 약간 개선된 점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처음으로 장교 포로들에게 특별히 배급되는 물자를 받았는데 그것은 열 다섯 개피의 담배와 하루 5그램의 설탕이었다. 사병 포로들은 마호르카 담배를 받았다.

Ibid. p.306

우리는 수용소에서 계속해서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사망률은 작년의 사망률 보다는 낮았다.

Ibid. p.307

몇 주가 지나고 몇 달이 지나갔다. 우리는 포로가 된 지 2년만에 처음으로 고향에서 온 편지를 받게 되었다. 우리는 절박하게 쓰여진 이 편지들에 답장을 보냈고 이 답장들은 우리의 가족들에게 우리가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포로수용소에 여전히 살아 있음을 알려주었다. 마침내 오스트리아 출신의 전우들과 알자스 출신의 포로들은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빈의 현명한 정치인이 포로 문제에 영향을 끼친 것 이었다. 독일 출신의 포로들도 곧 석방된다는 소문이 파다해졌다. 비록 최소한의 건강을 유지할 수준은 못 되었지만 식량 배급도 개선되었다.

Ibid. p.308

그리고 모범수(?) 비더만은 1948년에 석방되어 고향 땅을 밟게 됩니다. 이점에서 1950년에 석방된 일반 포로나 1955년에야 석방된 무장친위대나 경찰 출신 포로에 비하면 아주 행운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추가. 비더만의 회고록에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발터 셰흐터를(walter Schaechterle) 대위는 쿠어란트 집단군에서 통신장교로 있었다. 어느날 아침 셰흐터를 대위는 스페인 의용군 장교들과 함께 형편없는 식사에 항의해 노동을 거부했다. 이들은 사병들도 자신들의 항의에 참여해 주길 기대하고 행동을 했으나 사병들은 수용소내의 반파시스트 집단의 강한 압력을 받고 있어서 그렇게 할 수 가 없었다.
곧 분노한 경비병들이 막사로 쳐들어와 총부리로 장교들을 막사 밖으로 끌어냈다. 발터 셰흐터를과 두 명의 스페인인 장교는 따로 분리되어 격리 수용되었다. 그들은 사보타지 혐의로 종신형–보통 25년 정도-을 선고 받았고 키르기스탄 동쪽의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나는 셰흐터를이 이송되기 직전 그와 이야기할 기회를 얻었고 그는 자신의 부모님에게 자신이 어떻게 됐는지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뒤에 그와의 약속을 지켰다. 발터의 아버지는 비티히하임(Bietigheim)에 있는 리놀륨 공장의 이사로 있었고 2년이 넘도록 스웨덴을 통해서 아들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발터의 아버지는 소련 고위 관료들에게 막대한 양의 미국 달러를 바친 뒤 마침내 아들을 석방시키는데 성공했다. 나는 1950년대에 펠바흐(Fellbach)에서 발터를 만나 와인을 마시며 재회를 축하했다.

Ibid. p. 309

과연 달러신의 권능은 무한합니다. 자본주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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