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ugust 31, 2008

한 베트남 여성의 병역기피에 대한 견해

베트남 전쟁 말기 볼티모어 선(Baltimore Sun)의 홍콩 특파원이었던 아놀드 아이작(Arnold R. Isaacs)이 베트남에 취재 갔을 때의 일화라는 군요.

전투에서 한 명의 청년이 죽어갈 때 또 반대편에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때로는 수년간 잠적한 사람들도 있었다 – 그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정부군이 우리 마을에 오는 경우는 병역기피자를 색출할 때 였습니다.” (빈 안 Bihn An) 마을의 한 주민은 이렇게 증언했다. “정부군은 한 번 왔다가 한참 뒤에 다시 오거나 때로는 일주일에서 이주일 정도 매일 왔습니다. 보통 한 두 명 정도를 적발하거나 아니면 허탕을 치기도 했지요.” 비록 빈 안 마을의 청년들 중 상당수는 군대에 징집되지는 않았으나 그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 했다. “청년들이 군대를 피해 숨을 때 그들은 집에 숨어야 했기 때문에 밖에서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마을의 한 여성은 이렇게 증언했다. “그래서 그들의 가족은 고통을 겪어야 했지요.”

빈 안 마을에서 몇 마일 더 떨어진 국경을 인접한 짜우 독(Chau Doc) 주에 위치한 하안(河岸) 지대의 호아 하오(Hoa Hao) 마을의 촌장은 마을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반감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청년들은 징병을 거부하려 했고 실제로 병역을 회피했다고 말했다. “아주 가난한 청년들 만이 군대에 자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숫자는 별로 많지 않았지요.”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군대가 와서 그들을 체포할 때만 군대에 갔습니다. 그래서 군대가 징집하러 오지 않는 이상 군대에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군대도 병역 기피자들을 모두 잡아들이지는 못 했습니다. 기피자의 수가 너무 많았거든요.” 그는 마치 농부들이 호랑이나 태풍 같은 자연재해를 다루는 것 처럼 병역 문제를 이야기 했다. 촌장의 집 1층에서 촌장 주위에 쭈그리고 앉아 이야기를 듣던 마을 사람들도 고개를 그덕이며 그 말에 동의했다.

뒤에 나는 한 베트남인 친구에게 베트남 사람들은 병역을 기피하면서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냐고 물어봤다. 그런데 그녀는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다.

“병역기피는 밥 먹는 것과 같아. 병역 기피는 살기 위해서 하는 거잖아. 그게 다야. 너는 식사를 할 때 부끄러움을 느끼니?”

Arnold R. Isaacs, 『Without Honor : Defeat in Vietnam and Cambodia』,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3, p.298

아이작이 베트남 취재를 갔던 1973년은 미군의 철수 이후 격화된 북베트남의 공세로 전사자가 급증하고 있었습니다. 1973년에만 25,473명의 남베트남군이 전사했는데 이것은 1968년과 1972년을 제외하면 베트남전쟁 기간 중 남베트남군이 가장 많은 전사자를 낸 것 이었습니다. 전쟁은 언제 끝날 지 모르는 판에 사망자는 늘어나고 있었으니 병역기피는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한 베트남 여성의 말 처럼 살아남는 것이 중요해 지니 다른 것은 부차적인 것이 되는 것 이죠. 결국 남베트남이 패배한 가장 큰 원인은 장기전을 수행하면서 국민동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점에 있는데 그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은 부패한 정부에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 입니다.

이런 점을 보면 만약 한국전쟁이 베트남 만큼이나 장기화 되었을 때 이승만 정권은 생존할 수 있었을 까 의문이 들더군요. 사실 요즘도 사회부조리에 대한 환멸의 목소리가 많이 들리다 보니 유사시 한국의 생존여부가 의심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비록 완벽한 해결책은 아닐지라도 시민들의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합리적이고 상식적으로 운영되는 정부가 필요한데 지금 정부는;;;;;;

Saturday, August 30, 2008

미드나이트 미트 트레인(Midnight Meat Train)

국내 개봉 뒤 예상 보다 호평이 많아서 영화를 직접 보기로 했습니다.

과연. 걸작 까지는 아니더라도 호평을 받을 만 하더군요. 극장에서 공포영화를 본 것은 사일런트 힐 이후 처음인데 영화가 끝날 때 까지 심장이 덜덜덜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여지껏 봤던 공포영화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 하더군요. 제 옆에서 부부동반으로 관람하던 분들도 계셨는데 부인 분께서 영화 중반 이후 마구 짜증을 내더군요;;;;; 아무래도 귀가한 이후 남편 분이 무사하진 못했을 거라는데 백원을 걸어볼까 합니다. 저는 서울극장 7관에서 봤는데 의외로 부인이나 애인을 동반하고 보러 온 분들이 많더군요. 아니. 하필 이런 영화를?

영화를 본 뒤 친구와 이야기 하면서 생각했지만 역시 이 영화가 덜덜덜 한 이유는 귀신이나 좀비 같은 것은 있을 리가 없지만 사람을 식용으로 가공하는 살인마는 있을 법 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실제로 외국의 연쇄살인범 중에서는 사람을 꿀꺽한 경우가 더러 있죠. 물론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괴물은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습니다만…
듣던 것 만큼 살인이나 시체를 가공하는 장면의 묘사가 잔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설정이나 연출 때문에 매우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영화에서 가장 끔찍했던 장면은 마지막에 주인공의 애인이 살해당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정말 섬뜩하더군요.
전체적으로는 섬뜩한 영화였는데 영화 중간에 나온 마호가니와 퀸튼 잭슨(Quinton Rampage Jackson)의 격투나 영화 마지막에 주인공과 마호가니의 결투는 조금 웃겼습니다. 재미있었다고 해야 하려나… 잭슨은 마호가니와 치고 받고 싸우면서 웃기는 대사를 주절거리는데 그게 정말 웃깁니다! 그리고 주인공이 사람의 뼈를 가지고 마호가니와 격투를 벌이는 것을 보다가 무의식 중에 킬킬 거렸더니 옆자리의 아주머니가 저를 쳐다보더군요. 조금 뻘쭘 했습니다.
주인공이 살인범 마호가니를 추적하면서 점차 변화해가는 것도 흥미 있었습니다. 채식주의자인 주인공은 마호가니를 추적하다가 식성이 변화해 고기를 먹는 장면은 섬뜩했습니다. 손가락으로 스테이크의 육즙을 찍어먹는 장면이 정말 덜덜덜 하더군요.

꽤 재미있는 영화였습니다. 도시괴담류의 이야기 거리를 아주 그럴싸하게 잘 가공했더군요. 마치 보통 라면으로 만든 근사한 요리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아직 원작을 읽어 보지 못했는데 한번 꼭 읽어봐야 겠습니다. 이런 장르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재미있게 보실 수 있겠습니다.

후야오방의 북한에 대한 평가

『정치가는 역사의 법정에 선 피고』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나카소네 대담록을 읽는 중인데 북한에 대한 재미있는 언급이 하나 있더군요. 나카소네가 1984년 중국을 방문해 후야오방(胡耀邦, 호요방)을 만났을 때 후야오방이 했던 이야기라는데 그 부분을 발췌해 봅니다.

사토 : 이야기가 약간 뒤로 돌아갑니다만, 1984년 3월에 중국에 가셨지요?

나카소네 : 네. 최초의 공식방문이었지요. 그때까지는 호요방 씨가 아직 건재하였으므로 대환영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북경대학에서 강연까지 했고 그것이 중국 전체에 TV로 방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강연이 끝난 다음 학생들이 이것저것 의견을 듣고 싶다기에 30명 정도 학생들과 간담을 했는데 일문일답하는 내용이 방영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학생들이, 야스쿠니신사참배 반대 전단도 뿌리고 데모도 하면서 나카소네 반대운동을 했어요.(웃음)

사토 : 중국에서 북한 문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지요?

나카소네 : 그때까지 남북한간의 화합에 대해서는 “결국 중국과 소련, 미국과 일본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과 북이 대화를 하게 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러나 그에 앞서서 한국전쟁의 교전국들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겠다. 그러니 남북한과 미국, 중국의 4자회담을 하라.”고 권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북한은 “한국은 제외시키고 3자회담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그러니 호요방 씨에게 “그런 불합리한 억지주장은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중국이 4자회담에 응하도록 설득시켜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왜냐하면 전두환 씨로부터 “당신은 미국과 친하고 중국과도 사이가 좋으니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알선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런 이야기를 건냈던 것 입니다. 그랬더니 – 이것은 솔직한 대답이었다고 생각되는데 – 호요방 씨가 “북한은 심리적으로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여서 중국도 다루기 힘들다. 그러한 북한에 대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입장이 못 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마치 위험한 폭발물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느낌이 그 당시부터 있었어요. 아마 북한은 현재 미국에 대해서 포커게임을 하고 있듯이 중국과도 그런 게임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사토 : 알만합니다.

나카소네 : 그러므로 중국으로서도 북한문제는 귀찮고 다루기 힘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소련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패권주의에 반대하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이토 다카시, 사토 세이사부로, 성완종 번역,『정치가는 역사의 법정에 선 피고』, 한송, 1998, 384~385쪽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북한은 확실히 ‘자율성’이 강한 국가입니다. 사실 자폐적이라고부르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 같긴 합니다만…. 소련으로부터 복구원조를 받아먹던 50년대 중반에도 소련의 통제가 제대로 먹히지 않았고 천리마운동 이후로는 그야말로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했지요. 지루한 핵 협상과정을 통해 잘 나타났듯 북한에 대한 중국과 러시아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러니 80년대 초반에는 인용한 글에서 후야오방이 밝혔듯 중국이나 소련의 말이 더욱 더 먹히지 않았을 것 입니다.
북한의 자율성(또는 자폐증)은 북한을 상대하는데 있어서 아주 골치 아픈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처럼 북한과 그럭 저럭 말이 통하는 국가가 필요한 것이겠지요. 북한에 대한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높아졌으니 정치적 영향력도 어느 정도는 높아지지 않았을까 싶은데 또 50년대의 경우를 보면 그렇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잘 모르겠군요.;;;; 물론 미국이나 일본보다는 중국이 미치는 영향력이 크겠지만 어떤 때는 북한 문제에서 중국의 역할이 종이전화기에 달린 실 밖에 안되는 것 처럼 보이니 말입니다.

Thursday, August 28, 2008

[妄想大百科事典] KBS 강하작전

KBS 강하작전

2008년 정부군이 감행한 대규모 공수작전. 이 작전을 계기로 반정부군의 아성이던 KBS가 정부군에게 장악되었다. 이병순과 정연주라는 공수부대간의 대결로도 유명하다.


작전의 배경

2007년 대선의 패배 이후 청와대를 빼앗긴 반정부군은 KBS, MBC 등 방송사를 거점으로 방어선을 형성했다. 정부군은 청와대 점령의 여세를 몰아 방송사들을 압박하며 공세를 준비했으나 반정부군은 광우병 문제를 앞세워 파쇄공격을 감행, 정부군의 공세 역량에 일시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초기의 성공에 고무된 반정부군은 무리한 공세를 반복해 6월 하순 이후 공세역량이 급속히 저하되었다. 반정부군의 대공세 초기에 공황상태를 보이며 지리멸렬했던 정부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광우병 공세 당시 반정부군의 강력한 근거지였던 방송사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정부군은 7월 17일 구본홍을 주력으로 대규모 공수작전을 실행, 이 작전을 성공시켜 YTN을 장악하는데 성공했으며 MBC는 반정부군에서 이탈, 정부군에 투항 함으로서 KBS 공격을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한편, 정연주는 6월 17일부터 계속된 검찰의 소환공격을 잘 막아내며 공수부대로서의 명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작전준비

반정부군은 KBS 방어를 위해서 정연주 공수부대를 주력으로 민주당의 의원부대와 한겨레, 오마이뉴스 등 언론부대를 증원했으며 시민단체를 주축으로 한 대규모의 게릴라부대를 투입했다. 정부군은 YTN 강하작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방어 주력인 정연주를 조기에 제압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작전안을 수립했다. 이미 정연주는 5차례에 걸친 검찰의 소환공격을 모두 방어해 공수부대 역사상 최강의 철면피라는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정부군은 정연주의 낮짝 두께를 고려할 때 통상적인 소환공격은 효과가 없다고 판단, 검찰에 의한 전격적인 체포를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작전의 실행

8월 12일, 체포영장을 증원받은 서울중앙지검 조사부는 재정비를 위해 방어진지에서 이탈한 정연주를 방배동에서 포착해 격멸하는데 성공했다. 검찰의 신속한 공격으로 정연주가 무력화되자 반정부군은 뒤늦게 한겨레와 오마이뉴스를 동원해 반격에 나섰으나 조중동의 강력한 화력지원에 힘입은 정부군은 반정부군의 역습을 쉽게 분쇄했다. 민주당과 시민단체들도 반격에 가담했으나 전투력이 미약해 전세에는 하등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주력부대인 정연주 공수부대가 괴멸되자 KBS 방어선은 일시에 붕괴되었다. 정부군은 마지막으로 8월 25일 이병순 공수부대를 강하시켜 KBS 장악에 성공했다. 반정부군은 괴멸되어 KBS에서 퇴각했으며 현재 정부군은 소탕작전을 진행 중이다.

Wednesday, August 27, 2008

한겨레 21의 표지...

오늘 지하철 가판대에 있는 '한겨레 21' 725호의 표지를 보게 됐는데 보자 마자 실소를 터트렸습니다. 이명박이 히틀러와 서 있는 모습을 표지로 올리고 제목으로는 '파시즘의 전주곡'이라고 달아놨군요. 이건 한국 극우파가 반대세력은 무조건 빨갱이로 몰던것과 다를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명박 정권에 어떤 파시즘적 요소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권위주의적 측면이 강한것은 사실인데 강한 권위주의는 파시즘을 구성하는 일부 요소일 뿐이지 파시즘 자체는 아닌데 말입니다.

한겨레가 골수 독자층을 제외하면 신뢰를 상실한지 한참 된것 같은데 이번 한겨레 21의 한심한 표지와 표지제목을 보니 어쩔 수 없는 일 인것 같습니다. 뭐랄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굳건한 지지층의 입맛에 맞는 기사만 만들어 낸다는 느낌이군요.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에서 한겨레가 체질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가 없진 않았던 것 같은데 오히려 같은 기간동안 한겨레는 오히려 퇴행적인 면만 보여준 것 같습니다. 한겨레는 상업적 목적을 가진 언론인 것은 틀림없는데 언제까지나 한줌 밖에 안되는 진보(?) 성향의 독자들에만 안주할 것인지 궁금하군요.

그나마 한국에 존재하는 희귀한 진보언론인 한겨레가 이렇게 퇴행적인 모습만 보이고 있으니 보수적인 저 조차도 난감함을 느낍니다.

독일군 6보병사단사 전문이 공개된 사이트

웹서핑을 하다 보니 Horst Grossmann의 독일 제 6보병사단사, 『Geschichte der rheinisch-westfaelischen 6. Infanterie-Division 1939-1945』의 전문이 올라와 있는 사이트를 찿았습니다. 1958년판을 그대로 스캔해서 올렸는데 사이트 주인장의 근성은 정말 존경할 만한 수준입니다. 다소 아쉬운 점이라면 PDF 파일이 아니라 각각의 낱장을 그림파일로 올려놨다는 점 정도가 되겠군요.

『Geschichte der rheinisch-westfaelischen 6. Infanterie-Division 1939-1945』

그런데 이 책의 저작권 문제는 어떻게 되는건지 궁금하군요.

Monday, August 25, 2008

독서생활에 지장이...

환율 폭등 1,079원..3년9개월래 최고(종합) - 연합뉴스

이건 뭐 대책이 없죠;;;;;;

유로도 여전히 강한데다 달러까지 이모양이니 난감합니다. 사야할 책이 산더미 같은데...

빈 - 둘째날 : Naschmarkt, 오스트리아 육군박물관

빈에서의 둘째날이 밝았습니다. 그런데 하루종일 부슬비가 내리는 날씨여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둘째날은 토요일이어서 오전에는 Naschmarkt로 헌책을 사러 나갔습니다. 물론 시장을 돌아다니며 군것질 하는 것도 포함해서...



사실 책을 산다고 나왔으나 막상 시장에 들어오니 먹는 것에 더 정신이 팔립니다. 싱싱한 치즈를 한덩어리 사서 아침으로 먹었습니다.

아흥~♪

동양상회는 여전하더군요. 이 가게는 아는 분이 많으 실 것 같습니다.


Naschmarkt는 말 그대로 '먹자시장(?)' 정도 되겠습니다만 이것 저것 다 팝니다. 동대문에 가깝죠.



헌 책을 몇 권 산 뒤 다시 군것질을 조금 한 뒤 바로 오스트리아 육군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5년 전에도 갔었는데 그때 일부 구역이 공사중이어서 모두 관람하지를 못 했거든요.

오스트리아 육군박물관은 빈 남부역 근처에 있어서 찾기가 쉽지요.


그런데 빈 남부역에 유로라인 버스가 들어오는걸 처음 알았습니다. 5년 전에도 그랬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요.


드디어 박물관에 도착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군의 병영으로 쓰이던 건물이라 남다른 포스(?)를 풍깁니다.


건물 외곽의 회랑과 박물관 정문 바로 앞에는 오스트리아군이 18~19세기에 사용했던 화포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100파운드 구포(1751년형)

6파운드 포(1764년형)

6파운드 포(1838년형)

그리고 의외의 물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니가 왜 여기 있는거야!

이제 표를 사서 본격적으로 박물관 관람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물품보관소의 보관표가 좀 허접합니다.


당연히 1층 부터 관람을 시작했습니다. 주 전시실로 들어가기 전에 작은 기획전시가 하나 있더군요. 2차대전 당시 공습을 테마로 한 전시였습니다.


먼저 본토방공전에서 독일 정규군을 지원한 다양한 보조인력들의 복장을 전시해 놓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공군여성보조원 전화교환수와 피난민을 재현한 마네킹이 가장 인상깊더군요.



기획전시실을 지나 1층 주전시실로 들어갑니다. 1층에는 1866년 부터 1차대전 종전까지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아래의 야포는 1차대전 중 사용된 10cm Kanone M99 같은데 정확히 잘 모르겠습니다. 의외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포병에 대한 사진자료를 찾기가 어렵더군요.



다음은 오스트리아 산악부대의 동계 장비입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프란츠 요셉 1세(Franz Joseph I)의 군복입니다.



이외에도 영국군 등 외국군대의 명예연대장 복장이 몇 벌 더 있었는데 사진이 잘못나와서 올리지는 못 합니다.

1차대전 당시 오스트리아군의 주력 중기관총. M1907

1층 전시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870~1890년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요란한 군복들입니다. 일부분만 올리는게 아쉽군요.


Leibgarde-Reiter의 행사용 제복

제28보병연대 사병

제6울란연대 사병

향토연대(Landesschützenregimet)의 엽병

제5용기병연대의 중위

그리고 1차대전 시기의 전시물로 넘어갑니다.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사라예보에서 저격당할 때 탄 승용차


1차대전 관련 전시물 중에서 다양한 선전포스터가 눈에 띄었는데 특히 아래의 전시공채 포스터는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기가 좋군요.


그리고 다시 1차대전 시기의 군복들이 이어집니다.

제8용기병연대의 상병(1914/15)

울란연대의 사병(1914/15)

후사르연대의 사병(1914/15)

대전 초기 독일군

대전 초기 세르비아군

대전 초기 이탈리아군 알피니연대원

그리고 대전 후반기 전시실로 넘어가는 중간에 중화기류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38cm Haubitze M1916

7.5cm Gebirigskanone M1915

15cm Feldhaubitze M1914

그리고 대전 후반기의 전시물이 이어집니다. 대전 후반기의 군복들은 대전 초기의 군복에 비해 화려함이 줄어들었고 오히려 2차대전 초기의 군복들과 비슷한 느낌을 풍깁니다.

대전 후기 오스트리아군 보병

오스트리아군 조종사

대전 후기의 보병대위(67보병연대)

대전 후기 오스트리아군의 3톤트럭, A-XII-930

이렇게 대략 1층 관람을 마치는데도 시간이 한참 걸렸습니다. 생각해 보니 원래 2층 관람에 중점을 두려고 했는데 1차대전기 전시물에 정신이 팔리다 보니 깜빡 했습니다.

건물 곳곳의 기둥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배출한 명장들의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프란츠 요셉 1세의 흉상...


2층에는 16세기 말 부터 19세기 초 까지의 전시물들이 있습니다.

일단 30년 전쟁부터 시작하게 되는 군요. 아직까지 갑옷이 그럭 저럭 효용이 있던 시절의 물건들입니다. 갑옷제작 기술이 완성에 달한 시기의 물건들이라 제법 멋있죠. 드레스덴에서 봤던 갑옷들에 비해서는 덜 화려하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습니다.




1620년경의 머스킷티어

1632년경의 보병 부사관

1620년경의 창병

1620년경의 중기병(Kürassier)

1620년경의 Arquebusier

1610년경의 Lanzierer

30년 전쟁기의 전시물 다음에는 17~18세기 터키와의 전쟁에 대한 전시물들이 있습니다. 터키와의 전쟁에서 노획한 무기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개머리판이 화려하게 장식된 오스만 투르크군의 수발총은 하나 가지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다음으로는 18세기 전시실로 넘어갔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여기서 부터는 시간도 부족하고 메모리카드 용량도 문제가 있어서 사진을 많이 찍지 못했습니다. 사실 여기까지 오니까 박물관이 문 닫을 시간이 되어 관람도 다 마치지 못 했습니다.

전시물의 구성은 다른 전시실과 비슷했는데 한 가지 멋진 점이 더 있었습니다. 전시실을 가득 메운 대형 기록화들이 그야말로 압권이었습니다. 도록을 구매하려 했는데 관람시간이 종료되어 기념품점이 문을 닫는 바람이 실패해서 너무 아쉬웠습니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돈이 없어 도록을 사지 못 했는데 두 번째 방문에서는 시간이 없어 실패하네요.;;;; 뭐, 다음에 세번째로 갈 때는 사와야 겠습니다.

아래의 그림은 1759년 11월 21일 막센(Maxen)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의 항복을 받는 모습을 묘사한 기록화 입니다. 일반적으로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에서는 프로이센의 승률이 높은 편이라 이런 그림을 구경하는 것은 꽤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관람에서도 방대한 전시물 덕분에 전체를 다 관람하는데 실패하고 또 기념품 점에서 책을 사는데도 실패했습니다. 결국 다음에 빈을 세번째 방문할 때는 꼭 전체를 관람해야 겠습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친 뒤 남역 근처에 있는 한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는데 식당 주인장이 전직 권투선수였습니다. 잠깐이지만 세계 챔피언도 했더군요. 이 양반의 이야기는 빈의 세번째 날에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Thursday, August 21, 2008

이청천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

지난 글에서는 이박사의 허풍 실력을 다뤘습니다. 이미 제 블로그에서는 이박사에 대한 괴이한 이야기들을 짤막하게 몇 번 다룬바 있습니다. 하나 같이 상식을 벗어난 희한한 이야기들이다 보니 반응도 제법 좋더군요.

그런데 40년대 후반의 조선은 매우 어수선한 곳 이었던지라 이박사가 아니더라도 창의적인 발상을 하는 인물은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중경 임정의 광복군 사령관 이청천(지청천) 장군 되시겠습니다.

1947년 9월에 이청천은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한국 정부 수립 이후의 국군 창설에 대해 자신의 구상을 담은 서한을 보냈습니다. 이 서한은 조금 긴 편인데 주한미군 사령부 정보참모부의 주간보고서에 실린 덕에 오늘날 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청천은 하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극동 지역에서 소련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자신이 만든 대동청년단을 주축으로 30만명 규모의 한국군을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차피 구상이니 병력 규모가 좀 많은 것은 봐 줄 만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편지에 포함된 이 30만 규모 한국군에 필요한 장비 목록입니다.

이청천이 제시한 30만 규모 한국군에 필요한 군사장비의 수량은 대략 이랬다고 합니다.


다른 것은 둘째치고 30만 규모의 군대에 전차는 2,000대가 필요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게다가 공군력의 규모도 장난이 아니지요. 그리고 군 편제도 매우 요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보병연대와 차량화연대, 그리고 항공연대의 편제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름만 연대고 실제로는 사단급 편제입니다. 항공연대의 규모도 굉장히 커서 1개 연대에 저 많은 항공기를 몰아넣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봐도 번역상의 실수는 아닌 것 같고;;;;; 일단 저런 황당한 요청을 하면 미국이 순순히 저 막대한 양의 장비를 원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지도 의문입니다. 과연 무슨 생각으로 저런 황당한 편지를 보낸건지 궁금하더군요.

이청천이 무슨 생각에서 저런 황당한 제안을 한 것인지는 알수가 없습니다. 이청천은 정규적인 군사경력이 짧았기 때문에 고차원적인 군사문제에는 깡통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맥락에서 생각하면 저런 황당한 발상을 한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습니다.

※ 예전에 한번 언급했었던 상해 임시정부의 군사편제도 이것과 비슷한 어딘가 엉성한 면을 보여주고 있죠. 아무래도 독립운동한 양반들은 군사적 재능은 별로 없었던 모양입니다.

아직 국방경비대도 3만이 안되던 시절에 이런 웅대한(?) 발상을 하고 있었던 걸 보면 이장군도 상당한 덕후기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Wednesday, August 20, 2008

The Battle of the Somme : A Topographical History - Gerald Gliddon

글을 쓰는 대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사건을 고르는 것은 꽤 위험한 행위 입니다. 유명한 만큼 기존에 명성을 날리는 수많은 저작들이 있고 또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경쟁자들이 즐비하니 만큼 상당한 수준이 아닌 이상 쉽게 주목 받지 못하고 묻힐 가능성이 많지요. 이런 점은 군사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일 것 입니다. 2차대전사에 있어서 노르망디 전역이나 벌지 전투를 다루는 서적은 무수히 많지만 흥미를 유발하고 독창적인 책은 상대적으로 적고 종이나 낭비하는 지루하고 개성 없는 저작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1차 대전에 있어서 위에서 언급한 것과 유사한 경우를 들라면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솜(Somme) 전투일 것 입니다. 이 전투는 영국군 수뇌부의 어리석은 지휘로 인한 가공할 규모의 인명피해는 물론이고 전차가 최초로 실전 투입된 전투로도, 그리고 이후 수개월간 이어진 처절한 격전으로 유명합니다. 그런 만큼 이 전투에 대해서는 영어권과 독일어권에서 많은 저작이 쏟아져 나왔으며 요즘도 꾸준히 관련 서적들이 새로 출간되거나 재발간 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평이한 서술방식으로는 주목을 받기가 어려운 분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987년에 처음 발간 된 이 책, The Battle of the Somme : A Topographical History는 꽤 재미있는 방식으로 솜 전투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제가 가지고 있는 2000년 판을 기준으로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저자가 연대기순의 평이한 기술을 피하고 대신 전투가 벌어진 각 지역을 단위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미리 결론을 내리자면 저자인 Gerald Gliddon의 접근 방식은 상당히 좋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첫 발간 당시의 서평은 많이 읽어 보지 못 했지만 저자가 취하고 있는 참신한 접근 방식은 꽤 높은 점수를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저작은 솜 전투에 대해 개괄 이상의 지식을 갖춘 사람에게는 꽤 유용한 참고 서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책의 서술은 전투가 벌어진 공간 위주로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Hamel 항목을 보면 Hamel이라는 지역에 대해 지리적인 개괄을 한 뒤 이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를 연대기 순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공간 중심적인 서술 방식 때문에 비교적 많은 양의 지도가 포함되어 있는 점도 좋습니다. 또 책의 뒷 부분에는 솜 전투의 경과를 시기별로 요약해 놓았는데 이것도 꽤 유용합니다. 매일의 기상상태와 온도가 적혀 있어 좋은 자료가 됩니다. 부록으로는 영국군과 독일군의 전투서열이 실려 있는데 평범하지만 정리가 잘 돼서 나쁘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장점은 반대로 단점이기도 합니다. 공간 위주의 서술을 하다 보니 내용을 지명의 알파벳 순서대로 배열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내용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가 없습니다. 솜 전투에 대한 사전 지식이 부족한 사람이 읽는 다면 내용 정리가 제대로 되기 어렵지요. 즉 솜 전투에 대한 개설서로는 부적합 하다고 하겠습니다.
또 서술이 철저히 영국군 중심으로 되어 있다는 점도 치명적인 단점입니다. 저자는 각각의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영국군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잘 설명해 놓았지만 독일 측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장점이 많은 책이라 1차대전 사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한번 읽어 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Tuesday, August 19, 2008

이박사의 허풍실력

이승만은 매우 머리가 잘 돌아가는 정치인 인데다 꽤 괴상한 감각을 가진 도박꾼이었습니다. 보통 선수들끼리 한판 벌인다면 상대방이 뻔히 알고 있는 문제를 건드려서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 짓은 하지 않을 텐데 이박사는 그런 상식을 과감히 무너뜨리는 면이 있었습니다. 다음의 일화는 그런 점을 잘 보여줍니다.


이박사 : 반대로, 우리 한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남한의 국민들 뿐 만 아니라 북한의 동포들의 생명도 책임지고 있소. 최근 25만에서 30만 사이의 잘 무장된 공산군이 공격 준비를 마쳤다는 정보를 입수했소. 공산군은 해주에서 서울을 포격할 수 있는 4문의 아주 큰 대포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오.

로버츠 준장 : (해주에서 서울까지는) 44마일이나 됩니다! 저는 그런 대포가 있다는 이야길 처음 듣습니다.

President : On the other hand, from the Korean point of view, we are responsible for the lives of the Korean people in the south as well as in the North. We are informed that some red army from 250,000 to 300,000 well equipped, are ready to attack. They have four big gun that when they are fire them from Haiju the shells will land in Seoul.

Gen Roberts : That is 44 miles! I have not heard of this.

「Conference at Capitol, August 12, 1949」, 『RG 338, Provisional Military Advisory Group, 1949~53 Box 12』

이승만은 1950년 이전 군사원조를 요청할 때는 제정신과 광기를 오락가락 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이 경우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물론 북한에 대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보고 받는 로버츠가 이승만의 저런 허풍에 속아넘어갈 리는 당연히 없었습니다. 게다가 70km나 날아가는 장거리포(!)가 있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황당한 것이지요. 하지만 이승만의 이런 황당한 허풍은 종종 상대방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물론 이승만을 혐오하게 되는 역효과도 동반하긴 했습니다만.

가끔 이박사의 이런 황당한 측면을 패러디 해서 한국판 뮨하우젠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종종 듭니다.

Friday, August 15, 2008

빈 - 첫째날

간만에 여행 이야길 올립니다. 이번엔 좀 짧습니다.

잘츠부르크와 린츠 구경을 마친 뒤 마지막 목적지인 빈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유레일도 만료되었고 귀국하기 전 까지 빈에서 삐대기로 결심했습니다. 원래는 빈에 이틀만 머무른 뒤 뮌헨으로 돌아가 뮌헨의 박물관 구경을 하려 했는데 막상 오랫만에 빈에 도착하니 이 매력적인 도시를 그냥 떠날 수 가 없더군요. 참고로 5년전 빈에 갔을 때는 이 근사한 도시에 일주일간 머물렀습니다.

간만에 도착한 빈의 인상은 좀 썰렁하다... 였습니다. 역시 막차를 타고 도착해서 그런지 서부역은 썰렁하더군요.



대충 역 근처에서 제일 싼 호텔을 찾아 하루를 보냈습니다.

이제 빈에서의 첫째날이 시작이군요.

대략 8시 정도에 일어나 다시 서부역으로 돌아가 3일뒤 탑승할 뮌헨행 야간 열차표를 예약한 뒤 다시 Wien Karte를 한 장 샀습니다. 고맙게도 이 카드의 유효기간은 3일 이더군요.

8시 부터 10시까지는 어슬렁 거리며 시내 구경을 했습니다. 사실 5년 전에 일주일간 머무르긴 했지만 구경 못한 박물관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어서 3일 동안 어딜 구경하고 어딜 말아야 할 지 고민이 되더군요. 슈테판 성당(Stephansdom)은 5년전에 구경했었는데 한 번 더 구경할 까 하다가 보수공사를 하고 있어서 그냥 지나갔습니다.


두어시간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어딜 갈 것인지 정했습니다. Albertina 미술관을 구경하는 것이 좋겠더군요. 마침 아래와 같은 전시도 하고 있겠다 구미가 당겼습니다.


점심 먹는 것은 포기하고 부지런히 Albertina 미술관으로 갔습니다.


Albertina 미술관 공식 홈페이지



왜 빈 첫째날에 찍은 사진이 별로 없냐면 바로 이 Albertina 미술관 때문이었습니다. 대략 10시 30분에 들어갔는데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오후 5시가 되어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더군요. 전시물이 방대해서 하루를 다 털어넣어야 했습니다. 특히 특별전시인 바틀리너 컬렉션의 규모가 정말 어마어마 했습니다. 바틀리너 컬렉션을 구경하고 나니 사실상 다른 전시물을 구경할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아~ 멋진 그림이 많았는데 당연히 사진 촬영은 허가가 되지 않아 찍지를 못했으니 너무 아쉬웠습니다. 도록을 구매하고 싶었는데 이제 예산이 달랑달랑 한지라 엄두도 못 내겠더군요.

결국 하루 일정은 이렇게 간단히 마치고 마지막으로 서점 한 곳을 들렀습니다. 바로 5년 전에 들렀던 발터 클뤼겔 선생의 헌책방입니다.


오랫만에 다시 이곳에 들르니 너무 반가웠습니다. 이 서점은 군사서적을 비교적 많이 갖춰놓고 있는데다 가격도 저렴하게 책정해 놓고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래의 Das Reich 사단사의 경우 전부 다 해서 100유로 밖에 안하더군요. 가격표를 본 뒤 제가 저것들을 낱권으로 구하는데 쏟아넣은 돈을 생각하고 속이 쓰렸습니다.


아래 사진은 5년전 여름에 처음 갔을 때 찍은 사진입니다. 성능이 구린 스캐너로 스캔해서 그런지 그림이 좀 그렇군요.


물론 주인장이신 클뤼겔 선생도 정정하셔서 매우 반가웠습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사진 한장 찍기를 청하니 마지 못해 허락을 해 주셨습니다. 솔직히 너무 반갑긴 했지만 노인분을 괴롭힌 것 같아 양심에 찔리더군요.


음. 그러고 보니 이번은 내용이 좀 부족한 것 같군요. 약간 썰렁한 감이 없잖으니 저녁 식사 사진으로 부족분을 보충하겠습니다.


Wednesday, August 13, 2008

간만의 짐바브웨 이야기

그루지야 사태는 정말 정신없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휴전에 동의했다더니 몇 시간 안돼서 러시아군이 츠빌리시 방향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뉴스도 나오는군요.

카프카즈쪽 이야긴 정신이 없으니 간만에 짐바브웨 이야길 해볼까 합니다. 이쪽도 꽤 질질끌고 있습니다만 그루지야 보다는 상황 파악이 조금 되는 것 같습니다.

Mugabe hopes to cling to power by agreeing coalition deal with breakaway MDC faction

Reports of Side Deal in Zimbabwe

Robert Mugabe 'strikes deal to exclude Morgan Tsvangirai'

그루지야 사태가 터져서 짐바브웨에 대한 관심은 약간 덜해진 것 같습니다. 역시나 무가베는 독재자들이 잘 써먹는 야당 분열공작을 펼치고 있습니다. 야당을 분열시켜 가지고 노는 것은 남조선에서도 익히 봐오던 것이라 조금 반갑기까지 하군요. 최근의 언론보도를 보면 무탐바라(Arthur Mutambara)가 무가베에 붙어서 창기라이(Morgan Tsvangirai)를 고립시키려는 형국입니다. 아주 전형적이고 흔해빠졌지만 꽤 효과가 있는 수법이죠. 물론 창기라이를 지지하는 영국 등 서방국가들이 창기라이에게 권력을 넘기도록 무가베를 압박하고 있긴 합니다만 인간의 권력욕이란 무한하니 무가베가 어디까지 나갈지 궁금합니다.

짐바브웨 사태는 평소 개인적으로 의문을 가지고 있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이라 그 추이가 흥미롭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생각이 정리되는 대로 잡설을 하나 풀어볼까 합니다.

Tuesday, August 12, 2008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군 포로의 대우문제

보불전쟁 당시 북독일연방의 프랑스군 포로 대우에 대한 꽤 재미있는 글을 하나 읽었습니다. 문제의 글은 『On the Road to Total War : The American Civil War and the German Wars of Unification, 1861~1871』에 실린 Mafred Botzenhart의 「French Prisoner of War in Germany, 1870~71」라는 글인데 분량은 좀 짧더군요.

가장 흥미로운 점은 프랑스군 포로의 사망률이 상당히 낮다는 것 입니다. 1871년 2월까지 북독일연방내의 포로수용소로 이송 된 285,124명의 프랑스군 포로 중 사망자는 7,230명으로 전체 포로 중 2.3%에 불과한 규모라고 합니다. 같은 책에 실린 Reid Mitchell의 글을 보면 남북전쟁 당시 북군 포로 195,000명과 남군포로 215,000명 중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한 포로의 숫자는 각각 30,000명과 26,000명으로 나타나는데 이것과 비교해 보면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 포로의 사망률은 매우 낮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포로들의 상태는 매우 비참해서 독일까지 이송된 대부분의 포로들은 낮은 건강상태에 전투로 인한 정신적 충격, 포로가 됐다는 스트레스 등이 겹쳐져 아주 엉망이었다고는 합니다만 그런 것 치고는 사망률이 꽤 낮습니다. 전체 포로의 숫자는 384,000명이고 독일로 이송되지 않은 나머지는 프랑스 현지의 수용소에 수감되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전체 포로를 상대로 조사하더라도 전체적인 경향은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텐데 가장 먼저 프랑스군 포로들이 상대적으로 짧은 포로생활을 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남북전쟁 당시의 포로들은 몇 년씩 포로생활을 했지만 보불전쟁 당시의 프랑스 포로들은 길어야 몇 달 정도의 수용소 생활을 한 뒤 석방되었지요.

그리고 포로에 대한 대우도 남북전쟁 당시의 미국보다는 북독일연방쪽이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제대로 지켜졌는지는 의문스럽지만 1870년 7월30일 프로이센 전쟁성이 제정한 규정에 따르면 프랑스군 포로는 해당 계급의 북독일연방 군인에 상응하는 생활 수준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자인 Botzenhart는 프랑스군 포로의 탈출 시도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이유를 비록 포로에 대한 처우가 뭐 같긴 하지만 참지 못 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같은 글에 인용된 사례를 보면 독일 측은 적십자의 구호품이나 현금 전달에 대해 최대한 협조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일선의 포로수용소장들은 업무가 늘어나는 것에 짜증을 내긴 했지만 어쨌건 국제법은 착실히 준수했다고 합니다. 1870년 겨울에 프랑스 본토와 포로수용소간의 우편 시스템이 자리 잡힌 이후 프랑스에서 오는 우편물의 폭증으로 포로수용소의 우체국들은 상당 기간 동안 업무 폭증으로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잉골슈타트(Ingolstadt)의 한 포로수용소에는 하루 평균 600통의 편지가 왔는데 이것은 포로수용소 우체국의 하루 검열능력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프랑스군 장교포로의 처우는 더욱 좋았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장교포로들은 호텔이나 지역 유지의 자택에 거주했으며 구호품으로 포도주까지 받아 먹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고급 장교들의 경우는 친구들과 함께 지내기 위해서 포로 수용소를 옮겨달라고 신청하는 경우도 있었고 게다가 이런 신청은 잘 받아들여졌다고 하는군요.

보불전쟁은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극도의 증오심을 불러일으킨 전쟁이었는데 막상 포로들에 대한 처우, 특히 사회 지도층이라 할 만한 고급장교들에 대한 처우가 점잖은 편이었다는 것은 꽤 흥미롭습니다.

Sunday, August 10, 2008

소련-러시아 장교단의 붕괴와 그 후유증 : 1987~

올림픽이 조용히 치러지나 했더니 러시아가 그루지아를 공격해서 꽤 시끄러워 졌습니다. 때마침 라피에사쥬님이 이번 사태에 대해 잘 정리된 글을 올려주셔서 흥미롭게 잘 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 밀리터리 매니아(???) 들이 인터넷 게시판들에 올려놓은 의견을 보면 실제 이상으로 현재 러시아의 행동이나 능력을 과장되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아직도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미국과 맞먹는 강대국이라고 인식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진짜’ 충격이었습니다. 러시아의 군사력은 1990년대 초반 소련의 해제와 뒤이은 군대의 구조적 붕괴의 충격에서 겨우 회복되는 단계에 있을 뿐입니다. 국경을 인접한 작은 나라와 군사분쟁을 벌이는 것을 가지고 소련의 부활이니 푸짜르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들을 보면 어이가 없을 지경입니다.

러시아의 군사력이 미국과 비교했을 때 얼마나 취약한 상황에 처해있는 가는 조금 부지런히 관련 자료들을 구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 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러시아군 장교단의 현실이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러시아의 장교단은 구소련 시절과 비교하면 형편없는 규모로 줄어들었고 이것을 다시 소련 시절의 규모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정말 엄청난 과업이라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러시아 장교단이 처한 현실을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고르바초프 말기의 소련 장교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련에서 장교라는 직업은 1970년대 까지는 매우 선호되고 있었지만 1980년대로 들어가면서 조금씩 기피되는 직업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198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 장교라는 직업이 경제적으로 큰 매력이 없었다는 점이 큰 문제였습니다. 장교의 낮은 생활수준은 소련이 건국된 이후 붕괴될 때 까지 여전했기 때문에 중견 간부급 이상의 부패문제는 근절할 수 없는 문제일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1980년대로 들어가면 도시 중산층들이 장교에 지원하는 비율은 계속 낮아졌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 한 것은 교육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농촌출신들이었습니다. 물론 군사기술의 발전으로 장교가 되기는 더 어려워 졌기 때문에 농촌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1980년대로 들어가면 장교의 정원을 채우는 것이 매우 어려워 집니다. 예를 들면 모스크바 군관구는 1987년에 새로 임관하는 장교가 정원에서 19% 부족했는데 1988년에는 무려 43%가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Roger Reese가 지적하듯 1980년대의 장교단은 군인으로서의 자부심 보다는 안정적인 급여 등 현실적인 이유에서 장교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마나 장교라는 직종의 매력이었던 안정성이 사라지자 소련 장교단은 순식간에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이미 1988년부터 위관급 장교들이 대량으로 전역을 신청하고 있었고 이것은 그대로 소련이 붕괴할 때 까지 지속됩니다. 소련 장교단의 열악한 생활 수준은 고르바초프의 방어 중심의 군사정책으로 동유럽에서 철수한 병력이 본토로 들어오면서 더 심각해 집니다. 대표적인 것이 주택 부족문제였는데 1990년 2월 경에는 집이 없는 장교가 128,100명에 달할 지경이었습니다. 또 장교의 급여수준도 매우 형편없었습니다. 1990년 소위의 월급은 270 루블이었는데 당시 자녀 없는 부부의 최저 한달 생계비는 290루블이었습니다. 게다가 개혁개방 정책으로 서방, 특히 미국 장교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장교단 사이에 퍼지면서 소련 장교단의 사기는 급강하해 버립니다. 이런 형편이었기 때문에 소련이 붕괴되기 전에 국가를 지켜야 할 장교단이 먼저 붕괴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소련의 붕괴는 이미 시작된 소련-러시아 군대의 붕괴를 가속화 시켰는데 특히 장교단에 가해진 타격은 엄청났습니다. 이미 소련이 붕괴되기 전부터 열악한 생활수준 때문에 장교단은 급속히 감소하고 있었는데 소련의 붕괴로 그나마 보장되던 안정성 조차 사라지자 장교단의 해체는 제동을 걸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됩니다.
가장 큰 원인은 역시 경제적 곤란이었습니다. 이미 군대가 형편없이 쪼그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부는 경제난으로 그나마 남아있는 장교들 조차 제대로 대우해 줄 수 없었습니다. 1994년에도 집없는 장교가 12만명에 달했는데 이것은 훨씬 많은 장교가 있었던 1990년과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이었으니 장교를 지망하는 사람은 급격히 감소합니다. 1989년의 경우 장교를 지원하는 경쟁률이 1:1.9였는데 1993년에는 1:1.35가 됩니다. 여기에 장교를 지원하는 지원자의 자질도 1980년대 이래로 꾸준히 하락하고 있었으니 통계에 가려진 내용은 더욱 더 참담했습니다. 1992년 러시아 국방부가 병력 감축을 위해 36,000명을 조기전역 시키겠다고 발표하자 59,163명이 전역을 신청했고 1993년에 다시 19,674명을 전역시키려 했을 때는 무려 60,033명이 전역해 버립니다. 1992년부터 1994년 사이 러시아 국방부는 71,000명의 장교를 감축하려 했는데 실제로는 155,000명이 자발적으로 전역해 버렸고 게다가 그 절반이 30세 미만의 청년 장교들이었습니다. 러시아 군의 미래를 짊어질 중핵이 무너져 버린 것 입니다. 게다가 이 시기는 암울했던 옐친 행정부가 경제난 때문에 군사비를 계속해서 삭감하고 있었으니 달력이 넘어갈수록 장교 부족은 심각해 졌습니다. 1995년에는 사관학교 생도의 50%가 임관 전에 자퇴할 정도였고 이것은 초급장교의 부족을 가져왔습니다. 같은해에 장교 부족은 정원의 25%였는데 위관급의 경우는 정원에서 50%가 미달이었습니다. 이 해의 군축에서 위관급 장교는 2,500명을 전역시킬 예정이었는데 실제 전역한 인원은 11,000명이었습니다. 젊은 장교들은 늦기전에 사회에서 기회를 잡기 위해 주저않고 군대를 떠났습니다. 1998년 유가 폭락으로 인한 경제난은 정부의 월급에 의존하는 장교들에게 최악의 고난이었습니다. 같은 해 기준으로 소위의 월급은 354루블, 중령은 2,135루블이었는데 당시 러시아에서 빈곤층으로 분류되는 3인 가족 가구의 평균 소득은 2,600 루블이었습니다. 즉 중령 조차도 빈곤층 수준의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입니다. 이것은 장교들의 대규모 자살을 불러왔는데 1998년 러시아 전체 자살자의 60%가 장교였다는 통계는 이 시기 러시아 장교단이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국내에도 번역된 『How to Make War』의 1995년판에서 저자인 James F. Dunnigan은 당시 러시아 군대가 처한 문제점을 수습하는데 수년은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이것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란 점에서 꽤 잘 맞은 예언 같습니다.

1998년은 지금까지 러시아 장교단이 겪었던 최악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장교단은 계속해서 축소되었고 새로 보충되는 인력의 질적 수준도 80년대에 비해 크게 낮아졌습니다. 게다가 남아있는 장교의 80%도 미래에 대해 비관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최악이라 할 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넘기면서 상황은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푸틴 집권 이후 군인의 생활수준 개선을 위한 직접적인 조치, 예를 들어 급여 인상 등이 적극적으로 시행된 것이 주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교단의 생활수준은 민간인에 비해 여전히 낮았으며 푸틴 집권 초기인 2001년의 경우 여전히 92,000명의 장교가 관사를 지급받지 못했으며 이 중 45,000명은 아예 거주할 집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러시아의 경제가 유가 회복에 힘입어 조금씩 개선되고 있었지만 경제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했기 때문에 장교단은 특히 더 큰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2004년에 장교 급여가 인상되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위관급 장교의 대량 전역사태가 다시 벌어졌던 것이 대표적입니다. 장교단의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서 2005년 러시아 의회는 소위의 월급을 7,485 루블로 인상하겠다는 발표를 했는데 같은 해 3인 가족의 최저 생계비는 7,594 루블이었습니다. 장교의 열악한 생활수준을 개선하기 위해서 2006년에 푸틴 대통령은 3년에 걸쳐 장교의 급여를 67% 인상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고 현재 이 공약은 고유가를 바탕으로 착실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2008년 현재까지도 러시아 장교단의 생활수준은 민간사회에 비해 조금 뒤떨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며 체첸과 같은 위험지역 근무를 지원하는 장교가 많은 것도 추가수당을 받아 조금이라도 생계를 개선하기 위한 것 입니다.
푸틴 행정부가 옐친 시기의 군사적 붕괴상태를 다소 나마 개선시킨 것은 사실인데 어떻게 보면 러시아의 장교단 자체가 붕괴될 대로 붕괴되어 최저점에 도달했기 때문에 개선된 것으로 보일 뿐이지 소련군이 전성기에 달했던 시절의 장교단 수준에는 발끝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현재 상태의 러시아로서는 지금 있는 장교단의 생활수준을 유지, 또는 향상시키면서 장교단을 확충할 수단이 뾰족하지 않다는 것 입니다. 장교단의 확충 없이 군사력을 증강하기는 어렵습니다. 러시아가 현재 규모의 군대를 유지하면서 준비태세와 숙련도를 높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다시 병력을 증강시켜 미국과 맞설만한 수준으로 만드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현재의 러시아 군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그 중 장교는 얼마인지는 웹에서 검색해도 충분히 나오는 것들이니 더 부연설명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러시아의 군사력 증강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장기적으로 지켜봐야 할 문제이지 국내 언론 기사에 가끔씩 보도되는 자극적인 몇 줄의 기사만 가지고 호들갑 떠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참고문헌
James F. Dunnigan/김병관 역, 『현대전의 실체』, 현실적 지성, 1995
Dale R. Herspring, 『The Kremlin and the High Command : Presidential Impact on the Russian Military from Gorbachev to Putin』,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6
William E. Odom, 『The Collapse of the Soviet Military』, Yale University Press, 1998
Roger. R. Reese, 『Red Commanders : A Social History of the Soviet Army Officer Corps, 1918~1991』,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Brian D. Taylor, 『Politics and the Russian Army : Civil-Military Relations, 1689~20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Anne C Aldis, Roger N McDermott(ed), 『Russian Military Reform, 1992-2002』, Routledge, 2003

다크나이트에 대한 감상

지난주에 올 여름 최고의 화제작인 ‘다크 나이트’를 봤습니다. 격찬을 받은 영화여서 그만큼 호기심이 더 했는데 다행히 충분히 칭찬받을 만한 근사한 영화였습니다. 물론 아쉬운 점이 있기야 합니다만.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점을 먼저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이미 ‘배트맨 비긴즈’에서 보여줬지만 놀란 감독의 배트맨 세계관은 팀 버튼의 세계관과는 달라서 현실적인 요소가 제법 강합니다. 특히 이번 ‘다크 나이트’에서는 배트맨이 해외 출장까지 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배트맨 영화들이 고담시라는 가상의 공간에서만 이야기가 진행됐던 것과는 반대로 ‘다크 나이트’에는 홍콩이라는 실제 공간이 고담이라는 가상의 공간과 병존하고 있습니다. 사실적인 공간묘사에 걸맞게 등장하는 배트맨의 적들도 사실적(!)으로 묘사됩니다. 초반부 은행 습격장면이나 영화 중반의 추격 장면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고담시 SWAT팀의 존재는 마이클 만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 했습니다.

하지만 약간 불만인 점도 있긴 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액션 장면의 연출이 영화의 전반적 수준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 입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지적하셨지만 중반의 추격 장면에서는 공간의 이동이 자연스럽지 못하게 처리되어 마치 편집을 하다 만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배트맨 비긴즈에서도 액션 장면의 연출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었는데 ‘다크 나이트’에서도 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는 중요 등장인물인 하비 덴트의 묘사가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영화 전반부에서는 매우 정상적인 인물로 묘사되던 하비 덴트는 약혼자의 죽음을 계기로 범죄자로 돌변하는데 삼류 신파극이 아닌 이상에야 이것은 한 인간을 극단적으로 변화시키는 동기로는 크게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투 페이스도 꽤 매력적인 캐릭터여서 조금 더 잘 살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더군요.

마지막으로는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 되는 ‘조커’입니다. 이미 많은 매체에서 조커 연기에 대해 히스 레저 최고의 연기 등으로 격찬을 했는데 훌륭한 연기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의 격찬이 어울리는 수준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미친놈(!) 연기는 기본만 해도 그럴싸하게 보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번 영화에서 히스 레저의 연기도 기본 이상을 한 것이라고 봅니다. 오히려 판타지적 색채가 강한 팀 버튼의 영화에서 잭 니콜슨이 소화했던 조커가 히스 레저의 조커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됩니다. 히스 레저의 연기에 대한 격찬은 그가 비극적으로 삶을 마쳤기 때문에 덧 씌워진 후광효과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네. 물론 히스 레저의 연기는 좋았습니다.

영화를 보는 중간에 여성 분들 중에는 극장을 나가는 분들도 조금 있었는데 대체적으로 여성 보다는 남성들의 호응도가 더 높았던 것 같습니다.

Thursday, August 7, 2008

Street of Fire도 속편이 나올까?

가끔 들르는 영화 블로그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올라왔습니다.

Albert Pyun Takes on 'Streets of Fire' Sequel?

예전에 비디오로 여러번 봤던 영화인데 과연 속편이 만들어 질지 궁금하군요. 미국 영화계 소식을 보면 유별나게 리메이크나 속편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나오다 나오다 이런 영화도 속편 이야기가 나오는군요.

이 영화는 당시 거물이었던 월터 힐 감독이 야심차게 만들었으나 하필이면 그 해 혜성처럼 나타난 터미네이터의 그늘에 가려버린 물건입니다. 그리고 이야기 구조는 엄청나게 단순해서 어린양 같은 아둔한 사람에게 딱 맞는 영화이기도 하죠. 줄거리라고 해봐야 폭주족이 예쁜 여가수를 납치해가니 그 여자의 전 애인인 주인공이 샷건 한자루 챙겨들고 가서 구출해 오는 것 입니다. 그런데 이 어린양은 왜 이런 단순한 영화를 여러번 봤느냐?

여주인공이 전성기의 다이안 레인(Diane Lane)이었거든요. 요즘은 나카마 유키에(仲間由紀恵) 빠돌이로 지내고 있습니다만 예전에는 다이안 레인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어차피 속편이 나오더라도 다이안 레인은 나오지 않을테니 볼 일은 없겠군요.

럼즈펠드의 쪼잔함.

럼즈펠드는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예를 들면, 럼즈펠드는 자신의 사무실에 있는 유리그릇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 했다. 럼즈펠드는 다른 사람들에게 만약 자신이 누군가를 칭찬한다면 그때마다 사무실의 유리그릇에 동전을 하나 넣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유리그릇을 채우지 않기 위해 골몰했다.

Dale R. Herspring, 『Rumsfeld’s Wars : The Arrogance of Powe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8, p.47

아우. 쪼잔한 변태색휘...

Tuesday, August 5, 2008

Same Shit, Different Asshole

얼마전에 읽은 책에 꽤 재미있는 구절이 하나 있더군요. 그 부분을 인용해 봅니다.

다구치에 이어 일본민족기원론자로 알려진 인물은 잡지 '일본주의'에서 기독교를 공격했던 기무라 타카다로우(木村應太郞)였다. '일본주의'가 구미문화배격과 일본지상주의를 내세우면서 쓰보이에게 황색인종은 열등하지 않다는 기사를 쓰게 하거나 일본인의 뇌가 크다는 미국 학자의 연구를 신나게 소개했던 것은 3장에서 언급한 바 있다.

기무라가 ‘세계적 연구에 기초한 일본태고사’를 발표한 것은 일한병합 다음해인 1911년이었다. 서문에서 거론했던 다음 문장은 내용과 집필동기를 잘 이야기 하고 있다.

"옛날 신무천황을 오나라 태백의 후예라고 했다가 재난을 당한 학자가 있었지만 지금 대학의 많은 학자들은 그보다도 못하게 일본인의 기원을 남양원주민이라고 하거나 혹은 만주나 몽고의 미개한 야만인으로 기원을 삼거나 혹은 조선에서 도래한 인종이라고 하여 일본인종 열등기원론을 말해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

일본민족은 아시아나 남양의 '열등기원'이 아니라고 기무라는 말한다. 그는 제국대학 같은 곳은 '일본인종열등주의자' 및 '저능학자의 소굴'이라고 하면서 그에 비해 오히려 서양인의 일본인종관에는 “일본인을 아리안족이라고 하여 일본인의 우월성을 인정하는”경우가 있다고 칭찬한다.

기무라의 설은 성서나 그리스신화와 기기신화, 그리고 그리스어와 일본어의 유사성을 들어 그리스·아리안 민족이 동천(東遷)하여 일본에 이르렀다고 주장한 것 이었다. 그에 따르면 이자나기가 저승국에 간 것은 그리스신화의 오르페우스와 같은 것이고, 가타카나의 'ナ'는 한자의 '十', 로마 숫자 'X'는 불교의 '卍', 기독교의 십자가와 같은 것이고, 유태교나 기독교의 사상은 일본사상의 표절이다. 나아가 '다카아마노하라는 아르메니아'이고 오호누시노미코토는 구약성서의 요셉이고 신공황후는 조선반도가 아니라 이탈리아반도를 정복한 것이라고 말한다.

기무라에 따르면 "일본민족은 오랜 세월 동안 극동의 작은 섬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사상이나 포부가 비굴해져 일청·일로전쟁에서 승리하여 "자신이 지닌 역량을 지각한 듯하나 아직 충분히 자각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래서 그는 "일본민족의 태고사는 실로 세계 태고사거나 중심사"라는 것을 보여주자는 것 이었다.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 조현설 역, 『일본 단일민족신화의 기원』, 소명출판, 2003, 235~237쪽

※쓰보이 쇼우고로우(坪井正五郞)는 도쿄제국대학교수와 도쿄인류학회회장을 지낸 인물입니다. 쓰보이 쇼우고로우의 학문적 활동에 대해서는 이 글을 참조 하십시오.

과연. 20세기 초 일본 우익들이 좀 멀쩡한 정신상태를 가졌다면 친일파들이 환단고기 따위를 만들어 정박아들을 현혹하는 비극은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인류학자들에 대한 기무라의 공격을 보자니 환빠들이 멀쩡한 역사학자들을 공격하는 걸 보는 듯해 쓴웃음이 날 정도입니다. "일본민족은 오랜 세월 동안 극동의 작은 섬에 갇혀"라는 부분은 한민족이 반도에 갇혀 대륙의 기상을 잃었다는 환빠들의 망발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을 정도죠.

집단적인 열등감을 이따위로 표출하는 걸 보면 일본의 저질우익이나 남조선의 환빠의 관계는 가히 Same Shit, Different Asshole인 것 같습니다.

미육군항공대의 공세에 대한 독일공군의 대응 : 1945년 2월 부터 5월 까지

보덴플라테(Bodenplatte) 작전으로 독일공군의 전투기 부대는 사실상 붕괴되고 맙니다. 그러나 사정이 어찌되었건 근성(???)의 독일공군은 끝까지 싸움을 계속합니다. 이 글에서는 보덴플라테 작전 이후 대충 정비를 마친 독일공군 주간전투기 부대가 항복까지 서부전선에서 미육군항공대의 주간 전략폭격에 맞선 마지막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1945년 2월 1일, 독일본토방공을 담당한 제국항공군(Luftflotte Reich)의 주간전투기 부대는 제1전투기사단(1. Jagddivision) 예하에 다음과 같이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Stab./JG 7 : Me 262
I./JG 7 : Me 262
III./JG 7 : Me 262
JGr 10 : Fw 190
II./ZG 76 : Me 410
Stab./JG 300 : Fw 190
I./JG 300 : Bf 109
II.(Sturm)/JG 300 : Fw 190
III./JG 300 : Bf 109
IV./JG 300 : Bf 109
IV./JG 54 : Fw 190
Stab./JG 301 : Fw 190
I./JG 301 : Fw 190
II./JG 301 : Fw 190
III./JG 301 : Ta 152
II./JG 3 : Bf 109
Stab./JG 400 : Me 163
I./JG 400 : Me 163
II./JG 400 : Me 163

편제를 보면 아시겠지만 상당수의 주간전투기 부대들이 보덴플라테 작전 수행을 위해서 제2전투기군단(II . Jagdkorps)으로 이동한 뒤 심각한 장비와 인력의 손실을 입어 2월 초의 시점에서는 재편성 중이었기 때문에 제1전투기사단에는 저 정도의 전력밖에 없었습니다. 독일의 야심찬 아르덴느 공세는 주저앉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한 보덴플라테 작전도 심각한 손실을 내고 종결되었는데 승리의(!) 미국은 빌빌거리는 독일공군이 숨돌릴 새도 없이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소련군의 동계 대공세로 그나마 가용 가능한 전투기 부대들이 동부전선(이라고 해 봐야 독일 동부)로 몰려가는 통에 미군 전략폭격기 부대를 저지할 전력은 태부족이었습니다. 게다가 방공의 중핵인 대공포 부대도 동부전선의 붕괴를 막기 위해 지상전에 돌려지는 상황이었습니다. 1945년 1월 말 독일공군은 지상부대 지원을 위해 110개 중대공포 포대와 58개 중형/경대공포 포대를 동부전선으로 이동시켰습니다.

그나마 긍정적인 진전이 있었다면 JG 7과 KG(J) 54 두 비행단이 Me 262를 편제에 가깝게 보충 받았다는 정도였지만 전체적으로 우울한 상황을 놓고 보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에 불과한 개선이었습니다. 2월 9일 미 제8공군은 1,296대의 중폭격기를 출격시켜 합성석유공장과 주요 철도시설을 타격했는데 독일공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67대의 프로펠러전투기와 숫자 미상의 Me 262를 발진시켰습니다. 70대도 안되는 프로펠러전투기들은 미군 호위전투기의 벽을 뚫지 못했고 Me 262의 전과도 매우 신통 찮았습니다. 독일측은 제트기들이 8대의 B-17과 1대의 P-51을 격추했다고 주장했는데 그 반대로 미군의 호위 전투기에 의해서 6대의 262를 잃었습니다. 이 손실은 모두 폭격기 부대를 개편한 KG(J) 54에서 나왔는데 이 비행단의 조종사들은 전투기 전술에는 전혀 익숙하지 못해 이런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있었던 드레스덴 주간 공습에서도 독일공군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 했습니다. 2월 14일 제 8공군은 1, 2, 3 항공사단 소속의 중폭격기 1,377대를 출격시켜 드레스덴과 켐니츠(Chemnitz)를 공격했습니다. 독일공군은 이에 대항해 JG 300과 301소속의 프로펠러전투기 146대와 수 미상의 Me 262를 출격시켰지만 B-17 한대를 격추하는데 그쳤고 손실은 20대의 프로펠러전투기와 1대의 Me 262였습니다. 2월 9일의 경우도 그랬지만 보덴플라테 작전의 여파에서 회복되지 못한 독일공군의 주간전투기 부대는 두터운 호위전투기의 벽을 뚫을 수 없었습니다.

2월 22일, 미 육군항공대는 클라리온(CLARION) 작전을 발동, 23일까지 독일 본토의 철도시설에 대한 집중공격을 감행합니다. 이 공격은 미 육군항공대가 1944년 10월 이래로 야심차게 준비한 작전으로 일거에 독일의 교통체계를 붕괴시켜 독일의 전쟁수행능력에 타격을 입히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이날 독일공군은 이륙해봐야 일방적으로 학살당할것이 뻔한 프로펠러 전투기들은 아예 출격시키지 않고 JG 7의 Me 262 32대를 출격시켰습니다. 32대의 제트기는 2대의 B-17과 4대의 P-51을 격추시켰지만 피해도 커서 32대 중 6대가 격추됐습니다. 독일공군의 무력함에도 불구하고 독일철도청(Reichsbahn)은 폭격당한 철도망을 기적적으로 복구시키는데 성공합니다. 물론 전쟁의 결과에는 하등 영향을 끼치지 못 했지만 말입니다. 25일의 공격에는 독일공군이 가용한 전투기부대를 모두 동원했지만 역시 성과는 신통치 못했습니다. 미 육군항공대는 2월 19일부터 3월 4일까지 매일 1,000대 이상의 중폭격기를 출격시켰고 독일공군의 저항은 매우 미약했습니다. 3월 2일에는 합성석유 공장에 대한 폭격을 저지하기 위해서 I./KG(J)의 Me 262 14대와 JG 301, JG 302의 Fw 190, Bf 109, Ta 152 198대가 출격했는데 전과는 폭격기 3대와 전투기 5대 격추에 불과했고 오히려 Me 262 2대와 프로펠러 전투기 43대를 잃는 끔찍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결국 2월~3월의 절망적인 전투 이후 미군의 호위전투기들을 상대할 수 없는 프로펠러 전투기 부대의 출격은 극도로 제한되었고 유일하게 이를 돌파할 수 있는 ME 262를 장비한 부대와 대공포대만이 꾸준히 미군을 상대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독일공군의 전력 증강은 공군중장이 지휘하는 특이한 제트기 부대 하나가 새로 창설된 것 과 R4M 공대공 로켓탄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 정도였습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독일 공군의 제트기 운용 전술은 3월에 접어들면서 상당히 개선되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3월 18일, 미 제8공군은 약 1,300대의 중폭격기를 출격시켜 베를린에 대한 대규모 폭격을 감행했습니다. 이날 전투에서 바이센베르거(Weisenberger) 소령이 지휘한 JG 7의 ME 262들은 R4M 공대공로켓을 대량으로 사용해 미군측에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날 출격한 제트기들은 1대만 격추되었고 그 대신 6대의 B-17을 격추시켰으며 이 외에도 수십대의 폭격기에 치명적인 파손을 입혔습니다. 이날 전투는 미군측의 주목을 끌었고 3월 21일 둘리틀은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독일 공군의 제트기 부대가 위협적인 신전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미군은 다음날부터 21일 까지 제트기 비행장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는데 이 전투로 2~3월간 꾸준히 싸워온 JG 300과 301은 더 이상 대규모 작전이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었습니다. 특히 JG 301은 이 전투의 결과 2개 비행대대를 해체하게 됩니다. 또 3월 22일과 23일에 걸친 비행장 공습작전으로 재편성 중이던 III./JG 54도 사실상 괴멸되어 더 이상 전투에 나서지 못하게 됩니다. 24일에는 JG 300의 돌격비행대대인 II.(Sturm)/JG 300과 III./KG(J) 54가 미군의 비행장 공습으로 괴멸됩니다. 특히 후자는 단 한차례의 공습으로 50대의 ME 262를 잃었습니다. 이날 하루 동안 서부전선의 독일 전투기 부대는 막대한 수의 항공기 뿐만 아니라 31명의 조종사가 전사 또는 실종되는 타격을 받았습니다. 물론 미군도 비행장 공격에서 전투기부대를 중심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붕괴직전의 독일공군과 비교한다면 미약한 손실이었습니다. 3월 25일부터 29일까지 독일의 기상상태가 악화되어 미 육군항공대의 주간출격은 제한되었지만 이미 붕괴된 독일공군에게는 숨돌릴 시간도 되지 못 했습니다. 미군은 30일과 31일 다시 주간폭격을 재개했고 31일에는 영국공군 폭격기사령부의 중폭격기 469대가 가세했습니다. 이날은 JG 7이 최대의 전과를 올린 날이었는데 Me 262들은 호위전투기 없이 비행하던 캐나다 공군의 폭격기들을 요격해 한대의 손실도 없이 11대를 격추시켰습니다.

4월로 접어들면서 독일공군의 상황은 전형적인 붕괴직전의 혼란 상태였습니다. 4월 9일 제국항공군 소속 전투기 부대는 다음과 같이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4월의 전투에서 독일 공군의 전투기 부대는 거의 조직적인 저항을 보이지 못 했습니다. 오직 제트기를 장비한 부대만이 최후까지 조직적인 저항을 했을 뿐 이것 조차도 미육군항공대의 호위 전투기 부대에 압도되는 형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4월 10일 미 제8공군이 1,315대의 중폭격기를 출격시켰을 때 독일측은 63대의 ME 262를 출격시켜 10대의 폭격기를 격추시켰지만 905대에 달하는 호위 전투기들은 착륙을 시도하는 제트기들을 공격해 27대를 격추시켰습니다. 4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독일 공군은 남은 전력을 남부독일과 체코로 이동시켜 저항을 계속했지만 이미 이 시점에서는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이 무렵 JG 1이 He 162로 장비를 교체하는 등 필사적인 노력이 있었지만 전황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었습니다.
4월 19일의 전투는 ME 262 부대가 미 제8공군의 중폭격기를 마지막으로 격추한 전투가 되었습니다. 이날 제490폭격비행단은 6대의 B-17을 잃었는데 이들은 독일 공군의 제트기에 의해 마지막으로 격추된 미군의 중폭격기였습니다. 4월 25일 미 제8공군은 589대의 B-17과 B-24를 출격시켰는데 독일공군 전투기 부대의 저항은 없었으며 6대의 폭격기가 대공포에 격추되었습니다. 이것은 제8공군의 마지막 전략폭격 임무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독일공군의 저항은 끝났습니다. 1945년 2월부터 5월까지 서부전선의 주간공중전은 미군이 독일 공군을 일방적으로 두들기는 양상으로 전개되었지만 미군의 손실도 결코 적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기간 중 미 제8공군을 중심으로 북서유럽에서 작전한 미 육군항공대의 항공기 손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여기에 지중해전역으로 구분되는 15공군등의 손실을 더하면 상당한 규모가 됩니다. 1945년 2월 시점에서 독일의 방공망은 붕괴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측에 상당한 손실을 입혔던 것 입니다.

참고서적
Donald Caldwell and Richard Muller, 『The Luftwaffe over Germany : Defense of the Reich』, Greenhill Books, 2007
Richard G. Davis, 『Carl A. Spaatz and the Air War in Europe』, Center for Air Force History, 1993
Roger Freeman, 『The Mighty Eight : A History of the Units, Men and Machines of the US 8th Air Force』, Cassell, 1970/2000
Werner Girbig, 『Start im Morgengrauen : Eine Chronik vom Untergang der deutschen Jagdwaffe im Westen 1944/1945』, Motorbuch Verlag, 1975
Alfred Price, 『The Last Year of the Luftwaffe : May 1944 to May 1945』, Greenhill Books, 1991/2000
Edward B. Westermann, 『FLAK : German Anti-Aircraft Defenses, 1914~1945』,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1

Friday, August 1, 2008

북한의 전후 복구에 대한 전석담의 논문

며칠 전에 「전후 복구시기 북한에 대한 약간의 잡설」이란 제목으로 포스팅을 하나 했는데 나츠메님이 참고문헌에 대해서 물어 보셨습니다. 사실 네이버 블로그를 포함해서 4년 정도 블로그질을 하다 보니 재탕 또는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하게 되고 그래서 가끔 참고서적을 빼고 글을 쓸 때가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제 블로그에 자주 오시는 분 들이라면 어떤 글은 어디서 베낀 것인지 아실 것이라고 생각해서죠. 그렇다 보니 이번에도 무의식적으로 참고문헌을 생략해 버렸습니다. 어쨌건 나츠메님에게 대략 답글 형식으로 간단하게 답변을 드렸는데 그러다가 중요한 논문 하나를 빠뜨렸습니다.

바로 전석담이 쓴 「조선로동당의 령도하에 전후 사회주의 건설에서 조선인민이 달성한 성과와 그 의의」라는 논문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전석담은 1940년대 조선에서는 꽤 유명했던 경제사학자 였습니다. 당연히 월북했고 월북한 뒤에도 꽤 잘 나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석담이 1960년에 력사논문집 제4집을 통해 발표한 이 논문은 전후복구기의 북한 경제에 대해서 많이 인용되는 논문 중 하나입니다. 일단 이 시기의 북한 경제를 연구하는 남한 등 북한 외부의 연구자들은 북한의 1차 자료를 거의 활용할 수 없으니 2차 자료 중에서 신뢰도가 높은 것을 인용할 수 밖에 없지요. 일단 전석담의 이 논문은 발표 시기도 이르고 또 저자의 이름값도 있고 해서 꽤 많이 인용됩니다. 제가 자주 참고하는 김연철의 북한의 산업화의 경제정책 같은 경우도 전후 복구기의 북한 경제통계에 대해서는 전석담의 논문을 많이 인용하고 있지요. 물론 전석담의 논문은 선전 목적이 강해서 그저 듣기 좋은 이야기나 잔뜩 실려 있을 뿐 전후복구기의 여러 측면을 살펴보기에는 한참 부족한 글 입니다. 뭐,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백 배 낫죠. 하여튼 전석담의 논문은 1950년대 후반 북한의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이야기 할 때 반드시 인용되는 꽤 중요한 논문입니다. 글에 있는 내용을 비판적으로 봐야 하지만 북한의 전후복구기의 실상을 살펴보는데 있어 꽤 중요한 글 입니다.

참고로, 전석담의 이 논문이 실린 력사논문집 제 4집은 1960년에 출간됐는데 이 논문집은 전후복구의 성과를 과시하기 위한 선전 목적의 논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석담의 논문외에 함께 실려 있는 논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덕호, 「우리나라에서 집단적 혁신 운동의 발생 발전」
리국순, 「흥남비료공장 노동자들이 걸어온 승리의 길」 – 이 논문은 일제시기부터 전후복구기까지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꽤 읽을만 합니다.
엄창동, 「제1호 용광로와 해탄로의 복구 개건을 위한 황해제철소 로동자들의 투쟁」
리상준, 「조선로동당의 농업 협동화 정책과 평남도에서의 그의 승리적 실현」

이 논문들은 모두 선전목적이 강해 수령님 보시기에 좋은 내용만 가득하지만 어쨌든 이 시기 북한의 경제정책과 산업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은 됩니다. 다행히도 1990년대 이후로 러시아나 동유럽의 자료를 활용해 이 시기의 북한을 다룬 연구들이 가끔 나오고 있으니 이런 연구들을 참고해 비판적으로 읽는다면 더 좋을 것 입니다.

이 논문집은 국회도서관의 독도자료실에 비치되어 있으니 궁금하신 분은 한번 읽어 보십시오.

국방부가 지정한 불온서적 목록을 보다 보니

어제 한겨레에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실렸더군요. 벌써 많은 분들이 이야기를 하셨는데 저는 좀 늦게 봤습니다.

군, 대학교재·베스트셀러도 “불온서적”

불온서적 목록에 오른 서적 상당수는 왜 올라갔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책 들입니다. 그런데 리스트를 보니 낯익은 물건들이 몇 개 있군요.

바로 도서출판615에서 나온 『북한의 미사일 전략』과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입니다. 제 블로그에 자주 오시는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이 두 책은 책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쓰레기 들이죠. 불온서적이라고 보다는 불량서적이 적절할 듯 싶습니다. 도서출판 615의 찌질한 행각에 대해서는 예전에 포스팅 한게 있습니다.

천하의 쓰레기 출판사 - 도서출판 615 (2)


천하의 쓰레기 출판사 - 도서출판 615

그런데 한겨레의 보도 이후 불온서적 목록에 올라간 다른 책들이 잘 팔린다는데 거기에 편승해 도서출판 615의 저 쓰레기들도 다시 출간될까 두렵습니다. 국방부의 불온서적 목록에 올랐다고 해서 모든 책이 억울한 것은 아니니 도서출판 615의 쓰레기들을 읽는 분들은 없으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