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31일 일요일

한 베트남 여성의 병역기피에 대한 견해

베트남 전쟁 말기 볼티모어 선(Baltimore Sun)의 홍콩 특파원이었던 아놀드 아이작(Arnold R. Isaacs)이 베트남에 취재 갔을 때의 일화라는 군요.

전투에서 한 명의 청년이 죽어갈 때 또 반대편에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때로는 수년간 잠적한 사람들도 있었다 – 그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정부군이 우리 마을에 오는 경우는 병역기피자를 색출할 때 였습니다.” (빈 안 Bihn An) 마을의 한 주민은 이렇게 증언했다. “정부군은 한 번 왔다가 한참 뒤에 다시 오거나 때로는 일주일에서 이주일 정도 매일 왔습니다. 보통 한 두 명 정도를 적발하거나 아니면 허탕을 치기도 했지요.” 비록 빈 안 마을의 청년들 중 상당수는 군대에 징집되지는 않았으나 그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 했다. “청년들이 군대를 피해 숨을 때 그들은 집에 숨어야 했기 때문에 밖에서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마을의 한 여성은 이렇게 증언했다. “그래서 그들의 가족은 고통을 겪어야 했지요.”

빈 안 마을에서 몇 마일 더 떨어진 국경을 인접한 짜우 독(Chau Doc) 주에 위치한 하안(河岸) 지대의 호아 하오(Hoa Hao) 마을의 촌장은 마을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반감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청년들은 징병을 거부하려 했고 실제로 병역을 회피했다고 말했다. “아주 가난한 청년들 만이 군대에 자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숫자는 별로 많지 않았지요.”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군대가 와서 그들을 체포할 때만 군대에 갔습니다. 그래서 군대가 징집하러 오지 않는 이상 군대에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군대도 병역 기피자들을 모두 잡아들이지는 못 했습니다. 기피자의 수가 너무 많았거든요.” 그는 마치 농부들이 호랑이나 태풍 같은 자연재해를 다루는 것 처럼 병역 문제를 이야기 했다. 촌장의 집 1층에서 촌장 주위에 쭈그리고 앉아 이야기를 듣던 마을 사람들도 고개를 그덕이며 그 말에 동의했다.

뒤에 나는 한 베트남인 친구에게 베트남 사람들은 병역을 기피하면서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냐고 물어봤다. 그런데 그녀는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다.

“병역기피는 밥 먹는 것과 같아. 병역 기피는 살기 위해서 하는 거잖아. 그게 다야. 너는 식사를 할 때 부끄러움을 느끼니?”

Arnold R. Isaacs, Without Honor : Defeat in Vietnam and Cambodia(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3), p.298

아이작이 베트남 취재를 갔던 1973년은 미군의 철수 이후 격화된 북베트남의 공세로 전사자가 급증하고 있었습니다. 1973년에만 25,473명의 남베트남군이 전사했는데 이것은 1968년과 1972년을 제외하면 베트남전쟁 기간 중 남베트남군이 가장 많은 전사자를 낸 것 이었습니다. 전쟁은 언제 끝날 지 모르는 판에 사망자는 늘어나고 있었으니 병역기피는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한 베트남 여성의 말 처럼 살아남는 것이 중요해 지니 다른 것은 부차적인 것이 되는 것 이죠. 결국 남베트남이 패배한 가장 큰 원인은 장기전을 수행하면서 국민동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점에 있는데 그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은 부패한 정부에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 입니다.

이런 점을 보면 만약 한국전쟁이 베트남 만큼이나 장기화 되었을 때 이승만 정권은 생존할 수 있었을 까 의문이 들더군요. 사실 요즘도 사회부조리에 대한 환멸의 목소리가 많이 들리다 보니 유사시 한국의 생존여부가 의심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비록 완벽한 해결책은 아닐지라도 시민들의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합리적이고 상식적으로 운영되는 정부가 필요한데 지금 정부는;;;;;;

2008년 8월 30일 토요일

미드나이트 미트 트레인(Midnight Meat Train)

국내 개봉 뒤 예상 보다 호평이 많아서 영화를 직접 보기로 했습니다.

과연. 걸작 까지는 아니더라도 호평을 받을 만 하더군요. 극장에서 공포영화를 본 것은 사일런트 힐 이후 처음인데 영화가 끝날 때 까지 심장이 덜덜덜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여지껏 봤던 공포영화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 하더군요. 제 옆에서 부부동반으로 관람하던 분들도 계셨는데 부인 분께서 영화 중반 이후 마구 짜증을 내더군요;;;;; 아무래도 귀가한 이후 남편 분이 무사하진 못했을 거라는데 백원을 걸어볼까 합니다. 저는 서울극장 7관에서 봤는데 의외로 부인이나 애인을 동반하고 보러 온 분들이 많더군요. 아니. 하필 이런 영화를?

영화를 본 뒤 친구와 이야기 하면서 생각했지만 역시 이 영화가 덜덜덜 한 이유는 귀신이나 좀비 같은 것은 있을 리가 없지만 사람을 식용으로 가공하는 살인마는 있을 법 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실제로 외국의 연쇄살인범 중에서는 사람을 꿀꺽한 경우가 더러 있죠. 물론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괴물은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습니다만…
듣던 것 만큼 살인이나 시체를 가공하는 장면의 묘사가 잔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설정이나 연출 때문에 매우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영화에서 가장 끔찍했던 장면은 마지막에 주인공의 애인이 살해당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정말 섬뜩하더군요.
전체적으로는 섬뜩한 영화였는데 영화 중간에 나온 마호가니와 퀸튼 잭슨(Quinton Rampage Jackson)의 격투나 영화 마지막에 주인공과 마호가니의 결투는 조금 웃겼습니다. 재미있었다고 해야 하려나… 잭슨은 마호가니와 치고 받고 싸우면서 웃기는 대사를 주절거리는데 그게 정말 웃깁니다! 그리고 주인공이 사람의 뼈를 가지고 마호가니와 격투를 벌이는 것을 보다가 무의식 중에 킬킬 거렸더니 옆자리의 아주머니가 저를 쳐다보더군요. 조금 뻘쭘 했습니다.
주인공이 살인범 마호가니를 추적하면서 점차 변화해가는 것도 흥미 있었습니다. 채식주의자인 주인공은 마호가니를 추적하다가 식성이 변화해 고기를 먹는 장면은 섬뜩했습니다. 손가락으로 스테이크의 육즙을 찍어먹는 장면이 정말 덜덜덜 하더군요.

꽤 재미있는 영화였습니다. 도시괴담류의 이야기 거리를 아주 그럴싸하게 잘 가공했더군요. 마치 보통 라면으로 만든 근사한 요리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아직 원작을 읽어 보지 못했는데 한번 꼭 읽어봐야 겠습니다. 이런 장르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재미있게 보실 수 있겠습니다.

후야오방의 북한에 대한 평가

『정치가는 역사의 법정에 선 피고』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나카소네 대담록을 읽는 중인데 북한에 대한 재미있는 언급이 하나 있더군요. 나카소네가 1984년 중국을 방문해 후야오방(胡耀邦, 호요방)을 만났을 때 후야오방이 했던 이야기라는데 그 부분을 발췌해 봅니다.

사토 : 이야기가 약간 뒤로 돌아갑니다만, 1984년 3월에 중국에 가셨지요?

나카소네 : 네. 최초의 공식방문이었지요. 그때까지는 호요방 씨가 아직 건재하였으므로 대환영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북경대학에서 강연까지 했고 그것이 중국 전체에 TV로 방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강연이 끝난 다음 학생들이 이것저것 의견을 듣고 싶다기에 30명 정도 학생들과 간담을 했는데 일문일답하는 내용이 방영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학생들이, 야스쿠니신사참배 반대 전단도 뿌리고 데모도 하면서 나카소네 반대운동을 했어요.(웃음)

사토 : 중국에서 북한 문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지요?

나카소네 : 그때까지 남북한간의 화합에 대해서는 “결국 중국과 소련, 미국과 일본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과 북이 대화를 하게 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러나 그에 앞서서 한국전쟁의 교전국들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겠다. 그러니 남북한과 미국, 중국의 4자회담을 하라.”고 권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북한은 “한국은 제외시키고 3자회담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그러니 호요방 씨에게 “그런 불합리한 억지주장은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중국이 4자회담에 응하도록 설득시켜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왜냐하면 전두환 씨로부터 “당신은 미국과 친하고 중국과도 사이가 좋으니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알선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런 이야기를 건냈던 것 입니다. 그랬더니 – 이것은 솔직한 대답이었다고 생각되는데 – 호요방 씨가 “북한은 심리적으로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여서 중국도 다루기 힘들다. 그러한 북한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입장이 못 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마치 위험한 폭발물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느낌이 그 당시부터 있었어요. 아마 북한은 현재 미국에 대해서 포커게임을 하고 있듯이 중국과도 그런 게임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사토 : 알만합니다.

나카소네 : 그러므로 중국으로서도 북한문제는 귀찮고 다루기 힘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소련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패권주의에 반대하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이토 다카시, 사토 세이사부로, 성완종 번역,『정치가는 역사의 법정에 선 피고』, 한송, 1998, 384~385쪽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북한은 확실히 ‘자율성’이 강한 국가입니다. 사실 자폐적이라고부르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 같긴 합니다만…. 소련으로부터 복구원조를 받아먹던 50년대 중반에도 소련의 통제가 제대로 먹히지 않았고 천리마운동 이후로는 그야말로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했지요. 지루한 핵 협상과정을 통해 잘 나타났듯 북한에 대한 중국과 러시아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러니 80년대 초반에는 인용한 글에서 후야오방이 밝혔듯 중국이나 소련의 말이 더욱 더 먹히지 않았을 것 입니다.
북한의 자율성(또는 자폐증)은 북한을 상대하는데 있어서 아주 골치 아픈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처럼 북한과 그럭 저럭 말이 통하는 국가가 필요한 것이겠지요. 북한에 대한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높아졌으니 정치적 영향력도 어느 정도는 높아지지 않았을까 싶은데 또 50년대의 경우를 보면 그렇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잘 모르겠군요.;;;; 물론 미국이나 일본보다는 중국이 미치는 영향력이 크겠지만 어떤 때는 북한 문제에서 중국의 역할이 종이전화기에 달린 실 밖에 안되는 것 처럼 보이니 말입니다.

2008년 8월 27일 수요일

독일군 6보병사단사 전문이 공개된 사이트

웹서핑을 하다 보니 Horst Grossmann의 독일 제 6보병사단사, 『Geschichte der rheinisch-westfaelischen 6. Infanterie-Division 1939-1945』의 전문이 올라와 있는 사이트를 찿았습니다. 1958년판을 그대로 스캔해서 올렸는데 사이트 주인장의 근성은 정말 존경할 만한 수준입니다. 다소 아쉬운 점이라면 PDF 파일이 아니라 각각의 낱장을 그림파일로 올려놨다는 점 정도가 되겠군요.

『Geschichte der rheinisch-westfaelischen 6. Infanterie-Division 1939-1945』

그런데 이 책의 저작권 문제는 어떻게 되는건지 궁금하군요.

2008년 8월 25일 월요일

독서생활에 지장이...

환율 폭등 1,079원..3년9개월래 최고(종합) - 연합뉴스

이건 뭐 대책이 없죠;;;;;;

유로도 여전히 강한데다 달러까지 이모양이니 난감합니다. 사야할 책이 산더미 같은데...

빈 - 둘째날 : Naschmarkt, 오스트리아 육군박물관

빈에서의 둘째날이 밝았습니다. 그런데 하루종일 부슬비가 내리는 날씨여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둘째날은 토요일이어서 오전에는 Naschmarkt로 헌책을 사러 나갔습니다. 물론 시장을 돌아다니며 군것질 하는 것도 포함해서...



사실 책을 산다고 나왔으나 막상 시장에 들어오니 먹는 것에 더 정신이 팔립니다. 싱싱한 치즈를 한덩어리 사서 아침으로 먹었습니다.

아흥~♪

동양상회는 여전하더군요. 이 가게는 아는 분이 많으 실 것 같습니다.


Naschmarkt는 말 그대로 '먹자시장(?)' 정도 되겠습니다만 이것 저것 다 팝니다. 동대문에 가깝죠.



헌 책을 몇 권 산 뒤 다시 군것질을 조금 한 뒤 바로 오스트리아 육군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5년 전에도 갔었는데 그때 일부 구역이 공사중이어서 모두 관람하지를 못 했거든요.

오스트리아 육군박물관은 빈 남부역 근처에 있어서 찾기가 쉽지요.


그런데 빈 남부역에 유로라인 버스가 들어오는걸 처음 알았습니다. 5년 전에도 그랬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요.


드디어 박물관에 도착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군의 병영으로 쓰이던 건물이라 남다른 포스(?)를 풍깁니다.


건물 외곽의 회랑과 박물관 정문 바로 앞에는 오스트리아군이 18~19세기에 사용했던 화포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100파운드 구포(1751년형)

6파운드 포(1764년형)

6파운드 포(1838년형)

그리고 의외의 물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니가 왜 여기 있는거야!

이제 표를 사서 본격적으로 박물관 관람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물품보관소의 보관표가 좀 허접합니다.


당연히 1층 부터 관람을 시작했습니다. 주 전시실로 들어가기 전에 작은 기획전시가 하나 있더군요. 2차대전 당시 공습을 테마로 한 전시였습니다.


먼저 본토방공전에서 독일 정규군을 지원한 다양한 보조인력들의 복장을 전시해 놓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공군여성보조원 전화교환수와 피난민을 재현한 마네킹이 가장 인상깊더군요.



기획전시실을 지나 1층 주전시실로 들어갑니다. 1층에는 1866년 부터 1차대전 종전까지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아래의 야포는 1차대전 중 사용된 10cm Kanone M99 같은데 정확히 잘 모르겠습니다. 의외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포병에 대한 사진자료를 찾기가 어렵더군요.



다음은 오스트리아 산악부대의 동계 장비입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프란츠 요셉 1세(Franz Joseph I)의 군복입니다.



이외에도 영국군 등 외국군대의 명예연대장 복장이 몇 벌 더 있었는데 사진이 잘못나와서 올리지는 못 합니다.

1차대전 당시 오스트리아군의 주력 중기관총. M1907

1층 전시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870~1890년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요란한 군복들입니다. 일부분만 올리는게 아쉽군요.


Leibgarde-Reiter의 행사용 제복

제28보병연대 사병

제6울란연대 사병

향토연대(Landesschützenregimet)의 엽병

제5용기병연대의 중위

그리고 1차대전 시기의 전시물로 넘어갑니다.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사라예보에서 저격당할 때 탄 승용차


1차대전 관련 전시물 중에서 다양한 선전포스터가 눈에 띄었는데 특히 아래의 전시공채 포스터는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기가 좋군요.


그리고 다시 1차대전 시기의 군복들이 이어집니다.

제8용기병연대의 상병(1914/15)

울란연대의 사병(1914/15)

후사르연대의 사병(1914/15)

대전 초기 독일군

대전 초기 세르비아군

대전 초기 이탈리아군 알피니연대원

그리고 대전 후반기 전시실로 넘어가는 중간에 중화기류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38cm Haubitze M1916

7.5cm Gebirigskanone M1915

15cm Feldhaubitze M1914

그리고 대전 후반기의 전시물이 이어집니다. 대전 후반기의 군복들은 대전 초기의 군복에 비해 화려함이 줄어들었고 오히려 2차대전 초기의 군복들과 비슷한 느낌을 풍깁니다.

대전 후기 오스트리아군 보병

오스트리아군 조종사

대전 후기의 보병대위(67보병연대)

대전 후기 오스트리아군의 3톤트럭, A-XII-930

이렇게 대략 1층 관람을 마치는데도 시간이 한참 걸렸습니다. 생각해 보니 원래 2층 관람에 중점을 두려고 했는데 1차대전기 전시물에 정신이 팔리다 보니 깜빡 했습니다.

건물 곳곳의 기둥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배출한 명장들의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프란츠 요셉 1세의 흉상...


2층에는 16세기 말 부터 19세기 초 까지의 전시물들이 있습니다.

일단 30년 전쟁부터 시작하게 되는 군요. 아직까지 갑옷이 그럭 저럭 효용이 있던 시절의 물건들입니다. 갑옷제작 기술이 완성에 달한 시기의 물건들이라 제법 멋있죠. 드레스덴에서 봤던 갑옷들에 비해서는 덜 화려하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습니다.




1620년경의 머스킷티어

1632년경의 보병 부사관

1620년경의 창병

1620년경의 중기병(Kürassier)

1620년경의 Arquebusier

1610년경의 Lanzierer

30년 전쟁기의 전시물 다음에는 17~18세기 터키와의 전쟁에 대한 전시물들이 있습니다. 터키와의 전쟁에서 노획한 무기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개머리판이 화려하게 장식된 오스만 투르크군의 수발총은 하나 가지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다음으로는 18세기 전시실로 넘어갔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여기서 부터는 시간도 부족하고 메모리카드 용량도 문제가 있어서 사진을 많이 찍지 못했습니다. 사실 여기까지 오니까 박물관이 문 닫을 시간이 되어 관람도 다 마치지 못 했습니다.

전시물의 구성은 다른 전시실과 비슷했는데 한 가지 멋진 점이 더 있었습니다. 전시실을 가득 메운 대형 기록화들이 그야말로 압권이었습니다. 도록을 구매하려 했는데 관람시간이 종료되어 기념품점이 문을 닫는 바람이 실패해서 너무 아쉬웠습니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돈이 없어 도록을 사지 못 했는데 두 번째 방문에서는 시간이 없어 실패하네요.;;;; 뭐, 다음에 세번째로 갈 때는 사와야 겠습니다.

아래의 그림은 1759년 11월 21일 막센(Maxen)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의 항복을 받는 모습을 묘사한 기록화 입니다. 일반적으로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에서는 프로이센의 승률이 높은 편이라 이런 그림을 구경하는 것은 꽤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관람에서도 방대한 전시물 덕분에 전체를 다 관람하는데 실패하고 또 기념품 점에서 책을 사는데도 실패했습니다. 결국 다음에 빈을 세번째 방문할 때는 꼭 전체를 관람해야 겠습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친 뒤 남역 근처에 있는 한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는데 식당 주인장이 전직 권투선수였습니다. 잠깐이지만 세계 챔피언도 했더군요. 이 양반의 이야기는 빈의 세번째 날에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