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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26일 수요일

함부르크, 킬, 플렌스부르크

일요일에 드레스덴을 얼렁뚱땅 구경한 뒤 베를린으로 돌아와 다시 한번 친구의 집으로 쳐들어갔습니다.(이 어린양은 낯짝이 두껍거든요.)
편히 푸욱~ 쉰 뒤 아침에 길을 나섰습니다. 일요일에도 비가 올것 같은 날씨였는데 월요일 부터 비가 주룩 주룩 내리더군요.

베를린 안녕~

함부르크에 가는 이유는 두 가지 였습니다. 첫 번째는 킬로 가는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서, 그리고 두 번째는 책을 사기 위해서 였습니다. 함부르크에는 군사서적을 취급하는 서점이 몇 곳 있지요. 물론 시간과 돈이 부족해 다 갈 수 는 없었습니다만.

함부르크 중앙역

중앙역에서 Holstenstrasse로 가는 S 반으로 갈아탔습니다.



이날 찾아간 서점은 예전에 페리스코프 게시판에 간단히 소개한 적이 있지요.

바로 여기!

5년만에 뵌 주인장 아주머니는 귀여운 아들이 하나 생기셨습니다. 오호. 그러나 5년전 문을 열면 우렁차게 울리던 사이렌은 고장이 난건지 잘 안울리더군요.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항상 돈 보다 책이 많다는 것

비가 내려서 그런지 거리는 썰렁~ 했습니다.


책을 몇 권 산 뒤 함부르크 중앙역으로 되돌아가 킬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의외로 킬 까지 가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더군요.

킬 중앙역

킬 중앙역은 좀 평범하게 생겨서 별다른 인상이 없었습니다.


중앙역은 물론이요 시가지도 평범했습니다.


그렇다면 킬에는 뭐하러 왔느냐?

항구 보러 왔습니다!

그러나 킬은 좀 썰렁한 항구더군요. 시끌벅적한 함부르크와는 분위기가 반대였습니다.



물론 그냥 항구를 보러 온 건 아니었습니다. 킬 하면 독일해군을 대표하는 곳이니 독일해군 기지 구경을 해야지요!

해군기지로 가는 길에 자그마한 수족관이 하나 있었습니다. 공사중이라 어수선 하더군요.



그리고 다시 썰렁한 부두를 따라 계속 걸었습니다. 비와 함께 맞는 북해의 겨울 바람은 정말 좋더군요!(진짜로요)


보통 도시에 비둘기가 있다면 항구 도시에는 갈매기가 있다!

계속 걷다 보니 기념비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무엇인가 살펴보니 1차대전 당시 전사한 독일 해군 병사들을 기리는 기념비더군요.


그리고 기념비에 뭔가 덤으로 붙어있는게 있었으니...


2차대전 당시 독일해군 돌격대대 병사들을 기리는 표식이었습니다. 어쩌다 1차대전 기념비에 더부살이를 하게 된건지.

그리고 계속 걸어 해군기지에 도착했습니다. 물론 관광객이 멋대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밖에서 배를 구경할 수는 있었습니다.



아. 그러나 100년 전 쯤에는 최고의 오타쿠 빌헬름 2세의 위풍당당한 전함들이 위용을 뽐냈을 이곳에는 밋밋하니 멋이라곤 없는 군함들이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군항을 대충 구경한 뒤 다음 목표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목표는 킬 운하였습니다. 킬의 거의 유일한 관광명소(?) 라더군요.

조금 더 걸어 운하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야밤이라 사진을 찍어봐야 시커먼 바닷물 밖엔 안보이고 또 기념사진을 찍으려 해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으니....(하긴, 버스 종점에다 저녁이고 비까지 내리니 사람이 있을리가 없겠지요.)

돌아오는 길에 헌 책방 몇 곳을 발견했습니다. 한 블럭안에 옹기종기 모여있더군요.

은은한 전등 아래 놓인 책들이 정말 보기 좋습니다.

처음 들어간 이 책방의 쥔장은 우아하게 생긴 여자분이었고 주로 소설류를 많이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책장 한 구석으로 사회과학 분야를 취급하고 있었고 10유로 이하의 쓸만한 책들이 가득 있더군요.

헌 책을 몇 권 산 뒤 킬 중앙역으로 돌아왔습니다. 플렌스부르크행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역 구내서점에서 시간을 때웠는데 독일의 많은 역 구내서점이 그렇듯 군사서적을 여러권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서점에서 책을 구경하다가 다시 플렌스부르크행 기차를 탔습니다. 플렌스부르크 같은 독일 끄트머리의 촌동네는 뭘 하러 가느냐?
2차대전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다 아시겠지만 플렌스부르크는 제 3제국이 실질적으로 최후를 맞은 동네입니다. 되니츠 제독의 임시정부가 피난한 곳이지요. 늘 제 3제국이 최후를 맞은 플렌스부르크라는 동네는 어떤 동네인가 궁금해 하던 차였으니 킬 까지 온 김에 덤으로 구경하기로 한 것이지요.

그런데 도착해 보니 정말 촌동네였습니다.

플렌스부르크역

역에서 내려 시내를 돌아다녀 봤는데 정말 아무도 없더군요. 하긴. 야밤에 비까지 내리는데 특별한 일도 없이 싸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을리가 있나요...

썰렁~

작은 여관이라도 잡고 다음날 아침에 답사를 해 볼까 생각도 했는데 아무래도 여행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아 포기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올 기회가 있겠지요.

다시 플렌스부르크 역으로 돌아왔습니다.

썰렁한 역 안

킬로 돌아가는 썰렁한 기차 안

킬로 돌아가는 기차는 정말 썰렁했습니다. 어쩌다 한 두명 타는 정도여서 너무나 조용하더군요.


킬 역에 도착해서 다시 함부르크로 가는 막차를 기다렸습니다. 역시 킬 역도 썰렁~ 했습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함부르크로 돌아가는 막차도 썰렁~ 했습니다. 조용하니 잠자기에 딱 좋더군요. 너무 편안하고 아늑해서 이대로 아침까지 달렸으면 싶었습니다.

끝까지 썰렁~

2008년 1월 7일 월요일

독일군도 상륙작전을 할 줄 안다! : 1917년 10월의 알비온 작전

2008-01-07 / PM 10:50 본문 조금 추가하고 지도도 넣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감행된 대규모 상륙작전인 갈리폴리 전투는 연합군에게 대재앙으로 기록됐습니다. 하지만 신통하게도 이 전쟁에서 물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독일군이 당당하게(?) 상륙작전에 성공한 일이 있었으니 그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틀란트 전투 이후 독일 해군은 사실상 항구에 틀어 박혀 노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서양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손가락만 빨고 놀 수는 없는 법. 다행히도 독일 해군이 놀 곳이 있긴 있었으니 바로 발틱해 였습니다. 1917년 10월, 독일은 할일 없는 해군을 동원해 리가만의 세 섬, 사레마(Saaremaa, 독일/스웨덴어로는 Ösel)와 히우마(Hiiumaa, 독일/스웨덴어로는 Dagö), 무우(Muhu, 독일/스웨덴어로는 Moon, Mohn)에 상륙작전을 감행합니다. 이 작전은 꽤 멋진 이름을 달게 됐는데 그 이름은 바로 알비온(Albion) 이었습니다.



1. 알비온 작전의 준비

알비온 작전의 필요성이 처음 제기된 것은 해군에 의해서 였습니다. 독일군은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하기 위해서 리가를 제압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리가만의 입구를 막고 있는 사레마와 히우마를 먼저 떨어트려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해군은 1915년 하반기부터 이 지역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육군에 리가 지역에 대한 공세의 필요성을 제기합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독일 육군은 서부전선에서 먼저 결판을 낸다는 전략을 고수하고 있었고 육군참모총장인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은 그의 무덤이 될 베르덩에 대한 공세 준비에 몰두하느라 해군의 제안에 대해서는 약간의 관심만 보였습니다. 해군은 다시 1916년 3월에 보다 구체적인 작전안을 내놓지만 여전히 팔켄하인의 관심은 베르덩에 있었습니다.

베르덩 공세가 결국 피박으로 끝나자 독일육군은 동부전선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육군은 1916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리가에 대한 공세를 계획하기 시작했습니다. 12월에 나온 첫번째 계획안은 후티어(Oskar von Hutier)의 제 8군이 드비나 강 까지 진출하는 비교적 소박(?)한 것 이었지만 팔켄하인의 후임인 루덴도르프는 이 계획을 좀 더 확대시키길 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17년 8월에 최종 승인된 계획안은 제 8군이 리가 전체를 장악하고 그 후속으로 상륙부대가 사레마, 히우마, 무우에 상륙하는 것 이었습니다.
리가를 장악한 다음 단계인 상륙작전은 카텐(Hugo von Kathen) 보병대장이 지휘하는 제 23예비군단이 수행할 계획이었고 상륙부대는 에스토르프(Ludwig von Estorff) 중장의 제 42보병사단 이었습니다. 제 42보병사단은 제 65보병여단 사령부와 함께 상륙작전을 위해서 사단 예하의 17, 131, 138 보병연대 외에 추가적으로 255 보병연대와 제 2자전거 보병여단, 그리고 독립 돌격중대들을 배속 받았습니다.
루덴도르프는 해군과 작전을 조율하기 위해서 1917년 8월 13일 해군작전국장인 카이저링크(Walther von Keyserlingk) 해군중장과 회의를 가집니다. 이날 회의에서 육군은 9월 초 까지 리가를 함락시키고 그 이후 1개 사단을 투입해 세 섬을 제압한다는 계획을 알렸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독일 해군의 사정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유틀란트 전투 이후 항구에 틀어박혀 별다른 일없이 빈둥거리다 보니 사기는 떨어지고 별다른 활동이 없다 보니 식량 배급도 줄어드는 악재가 겹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1917년에 8월 2일에는 식량 사정의 악화에 불만을 품은 전함 프린츠레겐트 루이트폴드(Prinzregent Luitpold),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Fridrich der Große), 카이저(Kaiser), 카이저린(Kaiserin), 베스트팔(Westphal)의 수병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이 폭동은 진압되고 주동자 두 명이 군사재판에 의해 처형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렇게 알비온 작전 직전 독일 해군의 상황은 매우 어수선했습니다.
또 대해함대(Hochseeflotte) 사령관인 셰어 제독은 발틱해 작전에 자신의 함대를 동원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셰어는 대해함대의 주 전장은 어디까지나 북해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육군을 지원하기 위해 발틱해로 병력을 쪼개는 것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했습니다. 셰어 제독은 1917년 9월 11일에 열린 회의에 자신의 대리인인 우슬라(Ludolf von Usslar) 대령을 보내 알비온 작전에 대한 반대의견을 명확히 했습니다. 여기에 발틱해 사령관(Oberbefehlshaber der Ostsee)인 하인리히공(Albert Wilhelm Heinrich von Preußen, 빌헬름 2세의 동생입니다)도 셰어의 의견에 찬성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황제인 빌헬름 2세가 개입해 알비온 작전을 개시하도록 결정합니다. 빌헬름 2세의 작전 개시 명령은 9월 19일에 떨어졌고 이 명령을 하달 받은 제 8군 사령부는 9월 24일에 육군의 작전 계획을 완성하고 이것을 제 23예비군단에 하달합니다.

해군은 알비온 작전을 위해 제 3, 4전대(Geschwader)와 제 2초계집단(Aufklärungsgruppe), 제 2, 9어뢰전단(Torpedoboots Flottille) 을 중심으로 총 10척의 전함을 포함 300척의 군함을 동원했습니다. 이 중 병력 수송선은 19척 이었습니다. 함대의 지휘는 슈미트(Erhard Schmidt) 제독이 맡았으며 기함은 순양전함 몰트케 였습니다. 그리고 상륙부대는 위에서 언급한 증강된 42보병사단으로 총 전력은 병력 24,596명, 말 8473마리, 야포 40문과 차량 2,490대였고 여기에 30일 치의 보급품이 함께 수송되었습니다. 여기에 비행기 65대와 비행선 5대가 투입되는 말 그대로 입체전이 수행될 계획이었습니다.

한편, 러시아는 독일군의 주력이 상륙할 사레마에 6인치 에서 12인치에 달하는 해안포를 배치하고 있었으며 해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대량의 기뢰를 부설해 놓고 있었습니다. 이점은 독일 해군이 크게 우려하는 바였습니다. 또한 독일은 러시아가 세 섬에 2개 보병사단을 배치해 놓고 있는 것으로 보았고 여기에 더해 러시아 해군이 상륙 저지를 위해 투입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독일 해군은 러시아군의 방어가 상대적으로 약한 사레마 섬의 북쪽, 타가만 일대를 상륙 지점으로 정했습니다. 타가만 일대는 6인치 해안포대가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러시아군이 타가만에 대한 상륙을 눈치채지 못 하도록 리가 만으로 통하는 Sõrve 반도에 기만 공격을 실시하도록 했습니다. 이 기만 공격에는 제 4전대의 전함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와 쾨니히 알베르트 두 척이 투입되어 러시아군의 12인치 포대를 공격할 예정이었습니다. 두 척의 전함이 러시아군의 주의를 끄는 동안 제 1진인 4,500명은 타가만에 상륙해 상륙 지점의 6인치 해안포대를 제압하고 그 뒤로 제 2진 3,000명이 상륙해 나머지 사단 부대가 상륙할 교두보를 확보해야 했습니다.



2. 알비온작전의 개시

알비온 작전의 준비 단계인 지상 작전은 순조로웠습니다. 후티어의 제 8군은 러시아 제 12군에 사상자 25,000명과 야포 262문을 상실하는 피해를 입히고 9월 3일에는 리가 전체를 장악했습니다. 이에 비해 독일 제 8군의 손실은 4,200명에 그쳤습니다.

상륙은 9월 30일로 예정되었지만 기상이 악화되어 취소되었습니다. 상륙 작전을 총괄하는 제 8군 사령관 후티어는 기상 악화로 상륙이 연기되는 것을 우려해 마침내 10월 8일에 작전을 개시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상륙 부대와 물자의 적재는 9일 시작되어 10일에 완료됐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11일 상륙 부대가 출발합니다.

상륙부대는 12일 오전 3시에 타가만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상륙 부대는 타가만 북쪽 12km 지점에서 정지한 뒤 기뢰 제거작업과 상륙 부대의 전개를 시작했습니다. 상륙 부대 지휘관인 카텐 보병대장은 오전 4시 30분에 상륙 개시 명령을 내렸고 상륙 부대의 제 1진인 제 138보병연대 1대대와 제 10돌격중대가 어뢰정에 탑승해 해안으로 돌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해안에 가까워 지면서 러시아군의 해안포대로 부터 공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해군은 상륙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전함으로 해안포대에 대한 제압사격을 시작해 해안포들을 제압했습니다. 상륙부대의 제 1진은 해군의 지원에 힘입어 오전 6시 18분까지 상륙과 장비 하역을 마쳤습니다.
주력 부대가 타가만에 상륙을 감행하는 동안 제 2자전거 보병여단이 주축이 된 조공 부대도 파메로트(Pamerot)에 상륙을 시작했습니다. 조공 부대의 화력지원은 전함 바이에른(Bayern)과 그로서 쿠어퓌르스트(Grosser Kurfürst)경순양함 엠덴(Emden)이 담당했습니다. 이들은 해안포대를 침묵시키는데는 성공했지만 기뢰지대에 들어가게 되어 전함 바이에른이 대파되었습니다.
교두보가 확보되자 후속 부대인 제 138보병연대 주력과 제 131보병연대가 상륙했고 그 뒤를 제 17보병연대와 255보병연대가 따랐습니다. 이 와중에 제 138연대 2대대를 실은 수송선이 기뢰와 접촉했고 이들은 수송선에서 내려 나무 보트로 상륙했습니다. 상륙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13일 저녁까지 주력 부대는 물론 조공 부대인 제 2자전거 보병여단과 18돌격중대까지 상륙을 완료했습니다.

타가만의 상륙

하지만 다음날인 13일 기상이 악화되어 야포와 차량, 마필의 하역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파고가 심해 장비를 하역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 입니다. 하지만 기상상태가 호전될 때 까지 기다리다가는 러시아군이 증원되거나 방어태세를 굳힐 수 있었습니다.

결국 에스토르프 중장은 위험하지만 과감한 결단을 내립니다. 즉 포병의 지원없이 상륙한 보병부대만 가지고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심한 것 이었습니다. 에스트로프는 제 131보병연대는 남서쪽으로 진출해 Sõrve반도를 제압하고 제 255보병연대와 제 1자전거대대, 그리고 제 65보병여단이 지휘하는 17, 138보병연대는 사레마의 가장 큰 도시인 쿠레사레(Kuressaare 독일식 지명은 아렌스부르크Arensburg)를 점령하도록 했습니다. 쿠레사레는 인구 5,000명에 사레마의 가장 큰 항구였고 또 비행장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공인 제 2자전거 보병여단과 18돌격중대는 오리사레(Orissaare, 독일식 지명은 오리사르Orrisar) 방면으로 진출해 러시아군의 퇴로를 북익에서 포위하도록 했습니다.
이 결정은 당시 상황으로 봤을 때 나쁘지 않은 것 이었지만 기상이 악화되어 이들을 지원할 항공기들이 작전을 할 수 없었습니다. 독일군은 항공기에 정찰을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이점을 제외하면 작전의 진행은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제 131보병연대는 Sõrve반도를 손쉽게 제압하고 12인치 해안포대의 러시아군을 후퇴시켰습니다. 러시아군은 해안포가 독일군에 손에 그대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포의 핵심 부품을 파괴하고 무사히 철수했습니다.
한편, 제 255보병연대는 쿠레사레로 진격하는 도중 러시아군의 1개 기병연대(?)로부터 공격받았지만 이것을 격퇴시켰고 17연대와 138연대도 러시아군 방어선과 접촉해 이것을 돌파하고 포로 1,000명을 잡는 전과를 거뒀습니다. 이날 저녁 255연대의 정찰대는 러시아군이 쿠레사레를 버리고 퇴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에스토르프 중장은 러시아군을 신속히 추격하기 위해 다음날인 14일도 보병 부대만으로 추격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에스토르프는 러시아군이 무우섬으로 퇴각하는 것을 신속히 저지하기를 바랬기 때문에 중화기 없이 보병만으로 공격하는 무리수를 두었습니다. 다행히 이것이 성공하기는 했습니다만. 하지만 14일에는 비가 내려 보병의 이동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레사레를 점령한 3개 보병연대는 강행군으로 오리사레까지 진출, 조공 부대와 함께 러시아군을 협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한편, 독일 해군은 이날 러시아 해군의 구축함대와 교전, 구축함 그롬(Гром)을 격침시켰습니다. 그 대신 독일군도 교전 도중 어뢰정 한 척을 상실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10월 15일, 오리사레에 집결한 독일군은 고립된 러시아군에게 총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서 독일군은 군함 일부를 사레마와 무우 사이의 해협으로 투입했습니다. 이미 오리사레에 도착해 있던 제 2자전거 보병여단과 18돌격중대는 무우섬에 상륙해 러시아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제 138, 255보병연대가 포위된 러시아군을 소탕했습니다. 독일군은 이 공격으로 수비대장인 이바노프와 그의 참모진, 포로 5,000명을 생포하고 야포 8문, 기관총 8정과 말 200마리를 노획했습니다.
러시아 해군은 무우의 수비대 7,000명도 포위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해상으로 철수시키고 해군 함정들도 사레마 수역에서 철수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러시아 해군은 독일 해군과의 교전으로 전노급 전함인 슬라바(Слава)가 대파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러시아 해군은 독일군의 소해정 몇 척과 어뢰정 1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지만 독일군과의 전력차가 커서 더 이상의 전투는 무리였습니다. 그리고 발틱해에서 작전 중이던 영국 해군의 잠수함 C32도 사레마 근처 해역에서 독일 해군에 의해 격침 당했습니다.

작전은 대 성공이었습니다. 독일군은 해군 쪽에서 전사 131명과 부상 60명, 육군 쪽에서는 전사 54명과 부상 141명의 피해를 입은 반면 러시아군은 제 107, 118보병사단 등 2개 사단이 완전히 분쇄되고 포로 2만명과 포 141문, 그리고 사레마의 해안포 전부를 상실하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반면 러시아 해군은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선전했다고 평가됩니다.


참고자료

Richard L. DiNardo, Huns with Web-Feet : Operation Albion 1917, War in History 2005 12
Holger Herwig, The First World War : Germany and Austria-Hungary 1914-1918, Arnold, 1997
Norman Stone, The Eastern Front 1914-17, Penguin, 1975, 1998

2007년 12월 23일 일요일

지나치게 심각한 영국인들 - 1941년 듀잉(Dewing) 위원회가 예상한 독일군의 영국상륙계획

좀 황당하더라도 웃진 마세요.

1940년 가을의 시점에서 영국군 수뇌부는 여전히 히틀러가 영국을 침공할 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판단은 당시 기준으로는 물론 오늘날의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매우 합리적인 추론에 의해 세워진 것 입니다. 즉 독일은 장기전과 두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싸우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1941년 중으로 영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을 단행할 것 이라는 논리였습니다.

이 때문에 영국은 1940년 11월에 독일군의 예상되는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일환으로 독일측의 의도를 분석하기 위한 FOES (Future Operations Enemy Section)를 설치했습니다. 이 조직은 1941년 3월에 해체됩니다만 독일의 침공에 대한 대비는 계속하게 됩니다. 흥미롭게도 영국은 독소전이 개시된 이후에도 독일군의 영국 본토 침공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1941년 7월, 영국 전쟁성은 혹시라도 있을 지 모를 독일의 본토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서 작전국장(Director of Military Operations)인 듀잉(R. II. Dewing) 소장을 책임자로 하는 소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위원회는 1941년 12월 독일군이 1942년 봄에 영국 본토를 침공할 경우를 상정하고 예상되는 침공 작전에 대한 보고서 -"Invasion 1942: Form and Scale of Attack”– 를 제출합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현재의 시각에서 봤을 때 독일군의 공격 능력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한 물건입니다만 제법 장대한 스케일 때문에 흥미롭습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고 합니다.

이 보고서는 1942년에 독일이 소련을 KO 시킨 뒤 서부전선을 제외한 전 전선에서 전략 방어를 실시하고 그 대신 모든 역량을 영국본토 침공에 쏟는다는 상황을 가정하고 만들어졌습니다. 이 보고서가 가정하고 있는 독일군의 공격계획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즉 모든 전력을 단기간에 집중해 영국 본토에 상륙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이 보고서는 독일군이 기상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하는 1942년 4월 1일에 침공할 것을 가정하고 구체적인 독일군의 작전과 투입 병력 규모에 대해 추정했습니다. 여기에 따르면 독일군은 1940년 여름과 같은 축차적인 소모전을 피하고 해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훈련부대를 제외한 모든 공군력을 침공 당일에 출동시키고 상륙부대도 동시에 발진시킬 것으로 상정했습니다. 침공 첫 48시간 동안 독일군의 예상 출격회수는 중형폭격기 2,800소티, 급강하폭격기 600소티, 그리고 전투기 4,000소티였습니다. 이렇게 압도적인 전력을 단기간에 투사해 영국 동남부의 제공권을 장악하고 동시에 침공함대도 발진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너무 엄청난 것이라 내부적으로도 좀 뻥이 센거 아니냐는 논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침공부대의 규모도 실제 독일은 꿈도 못 꿀 수준이었습니다. 먼저 공격 첫날 새벽에 16,000명의 공수부대와 100대의 경전차가 상륙해안에 강하, 또는 글라이더로 투입되어 후속 부대가 착륙할 비행장을 확보하고 인근의 전투기 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 것 으로 예상했습니다. 다음 단계로는 양동작전을 위해 티르피츠가 주축이 된 호위함대의 호위를 받는 1개 기갑사단과 2~3개 보병사단 규모의 상륙부대가 첫날 요크셔(Yorkshire) 일대에 상륙을 감행할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력 상륙부대의 규모도 독일로서는 꿈도 못 꿀 황당한 것 이었는데 방어군을 압도하기 위해서 320척의 전차양륙정, 1,250척의 중형 바지선, 970척의 소형 바지선을 동원해 병력 22만, 전차 750대, 박격포 및 야포 9,000문에 달하는 전력을 침공 첫 날에 램스게이트(Ramsgate)-세인트 마가렛(St. Margaret), 포크스톤(Folkestone)-뉴 롬니(New Romney), 벡스힐(Bexhill)-이스트본(Eastbourne), 워팅(Worthing)-보그너(Bognor) 지구에 투입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인들은 독일측이 해군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보급로 주변에 엄청난 규모의 기뢰와 해안포를 설치하는 한편 영국 해군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160척의 U-보트를 출동시킬 것으로 보았습니다.
첫날 상륙이 성공하면 당연히 후속 부대가 쏟아져 들어올 것 인데 상륙부대의 규모 만큼이나 후속부대의 규모도 황당한 수준이었습니다. 이 계획은 최소한 상륙 8일차 까지 12개 보병사단(이중 8개 사단은 축소편제)과 6개 기갑사단, 그리고 15개 독립기갑여단이 교두보를 통해 투입될 것으로 상정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 계획은 당시의 영국인들도 좀 황당한 규모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히틀러가 진짜로 침공해온다면 예상 이외의 미친짓을 할 지도 모른다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계획이 만들어질 10~12월 무렵에는 당장이라도 소련이 붕괴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으니 히틀러가 다음 단계로 전력을 다해 영국을 칠 것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영국인들에게 이렇게 심각한 구석도 있었다니 나름대로 재미있습니다.

2007년 10월 21일 일요일

독일 국방군의 연령별 징집현황

2차대전과 관련된 글을 하나 쓰다가 통째로 날려 먹었습니다. 마우스가 고장나서 왼쪽 버튼이 잘 안먹히고 오작동을 가끔씩 하는데 이것 때문에 본문 전체 드랙 + Del + Ctrl S 콤보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이쿠.

별로 긴 글이 아니긴 합니다만 같은걸 또 쓰자니 지겨워서 재미있는 통계자료로 때워볼까 합니다.

아래의 표 두개는 Rüdiger Overmans의 Deutsche militärische Verluste im Zweiten Weltkrieg에서 발췌한 것 입니다. 첫 번째 표는 222쪽에서 발췌 한 것으로 전쟁 시기에 따른 징집 연령대를 보여주고 있으며 두 번째 표는 226쪽에서 발췌 한 것으로 각 군별 징집 연령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표 1. 시기별 징집 연령대

첫 번째 표가 흥미로운 점은 이미 전쟁 초기부터 나이 40이 넘은 노땅들이 대규모로 징집되고 있다는 것 입니다. 이 표를 보시면 1900년생 이상의 남성의 대부분은 1941년 독소전쟁 발발이전에 징집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통념은 전쟁 후기로 가면서 병력 부족을 메꾸기 위해 나이 많은 사람도 징집했다는 것인데 최소한 Overmans의 통계에 따르면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전쟁 초에 징집된 나이 많은 병력들은 후방 부대나 예비부대에 배속되어 있다가 인력 부족이 심화되면서 일선부대의 전투병력으로 빠졌다고 보는게 타당할 것 같습니다.

표 2. 각 군별 징집연령대

두 번째 표는 각 군별 징집연령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원 수 옆의 백분율은 각 군의 전체 징집 인원에서 해당 연령대가 어느 정도의 비율인가를 나타냅니다.
이 표가 재미있는 것은 해군의 경우 육군과 공군에 비해 1900년 이전 출생자와 1921년 이후 출생자의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 입니다. 공군은 연령 비율이 어중간한 편이며 육군은 해군과 공군에 비해 1906~1920년 출생자가 상대적으로 많습니다. 아무래도 순수 전투병력이 가장 많이 필요했던 것이 육군인지라 인력배치가 육군 중심으로 된 것 같습니다.

2007년 2월 24일 토요일

Lothar-Günther Buchheim 사망...

Das Boot의 작가 Lothar-Günther Buchheim이 사망했습니다.

Lothar-Günther Buchheim ist tot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했을 수 있는 전쟁의 또 다른 면을 보여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06년 11월 21일 화요일

독일 국방군의 급여체계(재탕!!!)

원래 페리스코프 포럼에 올렸던 내용인데 현재 그곳이 운영자님의 사정으로 인해 폐쇄됐으므로 여기다가 재탕을 해볼까 합니다.

==============(이 하 재 탕)==============

독일 국방군(Wehrmacht)의 급여 체계

독일 국방군의 급여체계는 25개의 급여등급(Besoldungsgruppen)으로 나뉘는 기본급과 전시 주둔지역의 부대에 일상 생활에 필요한 지출을 위해 지급되는 전시수당(Wehrsold), 주둔지의 주택 비용으로 지급되는 주택수당(Wohnungsgeldzuschuß), 자녀를 가진 군인에게 지급되는 자녀양육수당(Kinderzuschläge), 특별수당(Zulage)등이 있습니다.

1. 기본급

독일 국방군의 기본급은 25개 등급으로 나뉩니다. 독일 국방군의 기본급여 등급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습니다. 기본급여는 주택수당과 합산되어 지급 됩니다. 주택 수당은 계급 등급에 따라 I부터 VII까지 7개 등급으로 나뉩니다. 전쟁 초기의 급여 체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아래의 금액은 “연봉”입니다.

A. 장성급(Besoldungsgruppe 1~ Besoldungsgruppe 4)

Besoldungsgruppe 1, Wohnungsgeldzuschuß I(1942년부터 Besoldungsgruppe 1a)
26550 마르크
국방군 총 사령관(der Chef des Oberkommandos der Wehrmacht)
각 군 총 사령관(die Oberbefehlshaber der Wehrmachtteile)
원수 – 1942년부터
대제독(Großadmiral) – 1942년부터

Besoldungsgruppe 2, Wohnungsgeldzuschuß I
24,000마르크
상급대장, 해군상급대장(Generaladmiral), 대장, 해군대장(Admiral)

Besoldungsgruppe 1은 1942년 4월부터 Besoldungsgruppe 1a와 Besoldungsgruppe 1b로 나뉘었습니다. Besoldungsgruppe 1b에는 상급대장과 해군 상급대장이 포함됩니다. 대장과 해군대장은 기존의 Besoldungsgruppe 2에 들어갑니다. Besoldungsgruppe 1가 두개의 등급으로 나뉜 것은 1940년부터 원수 계급이 생기면서 새로 생긴 계급에 맞는 급여 등급이 필요해서 였습니다. 1942년에 새 급여 체계가 생기기 전 까지 원수와 대제독은 행정부의 장관급의 급여를 받았다고 하는 군요.

Besoldungsgruppe 1b, Wohnungsgeldzuschuß I
25,500마르크
상급대장, 해군 상급대장

Besoldungsgruppe 3, Wohnungsgeldzuschuß I
19,000마르크
중장, 해군중장(Vizeadmiral), 군의, 수의병과 중장급(Generalstabarzt, Admiralstabarzt, Generalstabveterinar)

Besoldungsgruppe 4, Wohnungsgeldzuschuß II
16,000마르크
소장, 해군소장(Konteradmiral), 군의, 수의병과 소장급(Generalarzt, Admiralarzt, Generalveterinar)

B. 영관급(Besoldungsgruppe 5~7)

Besoldungsgruppe 5, Wohnungsgeldzuschuß II
12,600마르크
대령과 대령급 군의, 수의병과 장교(Oberstarzt, Flottenarzt, Oberstveterinar)

Besoldungsgruppe 6, Wohnungsgeldzuschuß III
9,700마르크
중령과 중령급 군의, 수의병과 장교(Oberfeldarzt, Geschwaderarzt, Oberfeldveterinar)

Besoldungsgruppe 7, Wohnungsgeldzuschuß III
7,700~8,400마르크
소령과 소령급 군의, 수의병과 장교(Oberstabarzt, Marineoberstabarzt, Oberstabveterinar)

C. 위관급(Besoldungsgruppe 8~ Besoldungsgruppe 16)

Besoldungsgruppe 8
Wohnungsgeldzuschuß III : 4,800~6,900마르크, 대위와 대위급 군의, 수의병과 장교(Stabarzt, Marinestabarzt, Stabveterinar), 호봉(Dienstaltersstufe) 2등급
Wohnungsgeldzuschuß IV : 4,800~6,000마르크, 대위와 대위급 군의, 수의병과 장교, 호봉 1등급

※Dienstaltersstufe를 번역할 뾰족한 단어가 생각이 안나서 의미가 가장 비슷할 듯한 호봉으로 옮겼습니다.

Besoldungsgruppe 9, Wohnungsgeldzuschuß IV
3,400-3,700-4,000-4,200마르크
중위

Besoldungsgruppe 10,
2,400-2,700-3,000-3,400-3,700-4,000-4,200
소위
Wohnungsgeldzuschuß IV – 호봉 4등급
Wohnungsgeldzuschuß V – 호봉 1등급부터 3등급까지

Besoldungsgruppe 11, Wohnungsgeldzuschuß IV
3,400-3,800-4,200마르크
중위, 소위급 간부(군의, 수의 병과, Oberarzt, Marineoberassistenzarzt, Oberveterinar, Assistenzarzt, Marineassistenzarzt, Veterinar)

Besoldungsgruppe 12, Wohnungsgeldzuschuß III
7,650-8,680마르크
군악병과 중령(Obermusikinspizient)

Besoldungsgruppe 13, Wohnungsgeldzuschuß III
6,350-6,750-7,150
군악병과 소령(Musikinspizient)

Besoldungsgruppe 14, Wohnungsgeldzuschuß IV
5,000-5,250-5,500마르크
군악병과 대위(Stabmusikmeister)

Besoldungsgruppe 15, Wohnungsgeldzuschuß IV
3,960-4,160-4,360-4,590-4,848마르크
군악병과 중위(Obermusikmeister)

Besoldungsgruppe 16
2,930-3,170-3,470-3,620-3,770마르크
군악병과 소위(Musikmeister)
Wohnungsgeldzuschuß V – 호봉 1, 2등급
Wohnungsgeldzuschuß IV – 호봉 3 등급

D. 부사관급(Besoldungsgruppe 17~ Besoldungsgruppe 22)

Besoldungsgruppe 17, Wohnungsgeldzuschuß IV
3,400-3,600-3,800-4,000마르크
주임원사급(병기 정비(Oberwaffenwarte, Festungsoberwerkmeister), 말 편자 수리(Oberhufbeschlagslehrmeister))

Besoldungsgruppe 18
2,500-2,700-2,850-3,050-3,250-3,400-3,600마르크
원사급(Festungswerkmeister, Hufbeschlagslehrmeister)
Wohnungsgeldzuschuß IV – 호봉 6등급
Wohnungsgeldzuschuß V – 호봉 1~5등급

※ Oberwaffenwarte, Festungsoberwerkmeister, Oberhufbeschlagslehrmeister, Festungswerkmeister, Hufbeschlagslehrmeister는 상사(Stabsfeldwebel) 보다 위의 계급입니다. 원사라는 표현이 적당하지 않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독일 국방군의 분류상 부사관 계급이고 마땅한 번역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주임원사와 원사급으로 옮겼습니다.

Besoldungsgruppe 19

Besoldungsgruppe 19, Wohnungsgeldzuschuß V : 2,550마르크
상사(Stabsfeldwebel), 상사급 병기 담당관(Waffenwarte) 13-14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19, Wohnungsgeldzuschuß V : 2,742마르크
상사, 상사급 병기 담당관 15-16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19, Wohnungsgeldzuschuß V : 2,934마르크
상사, 상사급 병기 담당관 17-18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0

Besoldungsgruppe 20a, Wohnungsgeldzuschuß V : 2,454마르크
중사, 중사급 병기 담당관 13-14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0a, Wohnungsgeldzuschuß V : 2,646마르크
중사, 중사급 병기 담당관 15-16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0a, Wohnungsgeldzuschuß V : 2,838마르크
중사, 중사급 병기 담당관 17-18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0b, Wohnungsgeldzuschuß V
2,400마르크
중사, 중사급 군의(Unterarzt) 수의병과(Unterveterinar) 12년 미만 근무

Besoldungsgruppe 21

Besoldungsgruppe 21a, Wohnungsgeldzuschuß V : 2,394마르크
하사, 13-14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1a, Wohnungsgeldzuschuß V : 2,520마르크
하사, 15-16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1a, Wohnungsgeldzuschuß V : 2,646마르크
하사, 17-18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1b, Wohnungsgeldzuschuß V : 2,340마르크
하사, 12년 미만 근무

Besoldungsgruppe 22

Besoldungsgruppe 22a, Wohnungsgeldzuschuß VI : 2,322마르크
병장, 13-14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2a, Wohnungsgeldzuschuß VI : 2,424마르크
병장, 15-16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2a, Wohnungsgeldzuschuß VI : 2,514마르크
병장, 17-18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2b, Wohnungsgeldzuschuß VI : 2,040-2,160마르크
병장, 12년 미만 근무

E. 사병급(Besoldungsgruppe 23~ Besoldungsgruppe 25)

Besoldungsgruppe 23

Besoldungsgruppe 23a, Wohnungsgeldzuschuß VI : 2,064마르크
상병, 13-14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3a, Wohnungsgeldzuschuß VI : 2,166마르크
상병, 15-16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3a, Wohnungsgeldzuschuß VI : 2,256마르크
상병, 17-18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3b, Wohnungsgeldzuschuß VI : 1,536-1,920마르크
상병, 12년 미만 근무

Besoldungsgruppe 24, Wohnungsgeldzuschuß VI : 1,680-1,740-1,800마르크
일병

Besoldungsgruppe 25, Wohnungsgeldzuschuß VII : 1,410마르크
이병

2. 전시수당(Wehrsold)

전시수당은 독일군이 유럽 각지를 점령한 뒤 현지에 주둔하는 병력에게 생활에 필요한 경비를 추가로 지급하기 위해서 도입 되었습니다. 전시 수당 지급은 16개 등급으로 나뉩니다. 아래의 수치는 월 급여 입니다.

1a : 국방군 총사령관, 각군 사령관 : 300마르크
1b : 상급대장 : 270 마르크
2 : 대장 : 240 마르크
3 : 중장 : 210 마르크
4 : 소장 : 180 마르크
5 : 대령 : 150 마르크
6 : 중령 : 120 마르크
7 : 소령 : 108 마르크
8 : 대위 : 96 마르크
9 : 중위 : 81 마르크
10 : 소위 : 72 마르크
11 : 상사, 중사 : 60 마르크
12 : 하사, 상급수습사관(Oberfahnrich) : 54 마르크
13 : 병장, 수습사관(Fahnrich) : 45 마르크
14 : 상병 : 42 마르크
15 : 일병, 근무 연한 2년 이상의 이병 : 36 마르크
16 : 근무연한 2년 이하의 일병과 이병 : 30 마르크

전시 수당이 지급된 지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덜란드, 벨기에 : 1940년 9월 1일부터
노르웨이 : 1940년 10월 1일부터
프랑스, 덴마크 : 1940년 11월 1일부터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 1941년 7월 1일부터
발트 3국, 구 폴란드 동부, 구 핀란드 영토 : 1941년 7월 1일부터

3. 자녀 양육수당(Kinderzuschläge)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 Reichswehr의 자녀 양육수당은 다음과 같이 지급되었습니다.

한 자녀 : 월 10 마르크
두 자녀 : 월 20 마르크
세자녀, 네자녀 : 각 25 마르크
다섯자녀 이상 : 각 30 마르크

이 규정은 1938년 6월 30일 까지 시행 되었고 1938년 7월 1일부터 적용된 새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자녀 : 10 마르크
두 자녀 : 20 마르크
세 자녀 : 25 마르크
네 자녀 이상 : 각 30 마르크

그러다가 1941년 1월 1일 부터는 일괄 20 마르크로 통일되었습니다.

4. 특별수당(Zulage)

잠수함 승무원이나 강하병의 경우 특별 수당이 지급 되었습니다. 특수 병과이고 위험도가 상대적으로 높았기 때문입니다.

강하병특별수당(Fallschirmschützenzulage)은 강하부대의 모든 부대원들에게 계급에 상관없이 일괄적으로 월 75마르크가 지급 되었습니다. 강하학교등의 교육 기관에서 훈련 중의 강하 부대원은 월 30마르크를 받았습니다.

잠수수당(Tauchzulage)은 잠수함이 출항한 날짜를 기준으로 일 단위로 지급 되었습니다. 1941년 3월 1일부터 적용된 규정에 따르면 소위 이상의 장교는 하루에 일괄 4 마르크를, 상사와 중사는 3마르크를, 하사부터 상병까지는 2.50마르크를, 그 이하의 사병들은 1.50마르크를 받았습니다.

아프리카수당(Afrikazulage)는 북아프리카에 파병된 장교와 사병들에게 특별히 지급 된 수당입니다. 사막이 사람 살기에 좋지 않은 지역이다 보니 특별 수당이 지급 되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수당은 장교의 경우 매일 4 마르크, 부사관의 경우 매일 3 마르크, 사병의 경우 매일 2 마르크를 지급 받았습니다.

지뢰제거수당(Zulage für Minensuchen)은 공병들에게 특별히 지급된 수당으로 지뢰 제거에 투입된 기간동안 매일 1 마르크씩 지급 되었습니다.

5. 장성급직위 지출경비(Dienstaufwandentschädigungen der Generale)

이 수당은 장성급 이상 고위 지휘관들이 작전 지역에서 직책에 맞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특별히 지급되는 경비 입니다. 이 수당은 직책에 따라 다음과 같이 책정 되었습니다.

집단군 사령관 : 월 250 마르크
야전군 사령관 : 월 250 마르크
군단장급, 군관구, 상급 지휘부(예를 들면 포병지휘부) 지휘관 : 150 마르크
사단장급 지휘관 : 월 50 마르크

1940년 이후 새로 생긴 원수급 장성들은 월 400마르크를 지급 받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