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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25일 일요일

Robert M. Citino著, The Wehrmacht Retreats : Fighting a Lost War, 1943



로버트 시티노Robert M. Citino는 17세기 부터 20세기에 이르는 독일 군사사를 다루는 흥미로운 저작들을 잇따라 발표해 왔습니다. 시티노의 대표작인 The German Way of War : From the Thirty Years’ War to the Third ReichDeath of the Wehrmacht : The German Campaigns of 1942는 기동을 통한 단기 결전을 추구하는 프로이센-독일의 군사사상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어떠한 도전을 받고 한계에 부딛히게 되었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Death of the Wehrmacht에서는 작전 단위의 기동전을 통해 전략적인 열세를 상쇄하려 한 독일군의 시도가 처절하게 실패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시티노의 저작에서는 독일의 군사사상이 상대적으로 면적이 좁고, 잘 발달된 도시가 많은 서유럽과 중부유럽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합니다. 유럽의 한가운데에 있어 수많은 적국에 둘러 쌓여 있기 때문에 최대한 신속히 승리를 거두어야 하고 이때문에 단기간에 승부를 보기 위한 작전적 기동이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군사사상은 산업화의 시대를 맞아 본격적으로 도전을 받게 되었고 1차대전에서 독일은 패배하게 됩니다. 하지만 독일 군부는 1차대전의 경험을 통해 기동전에 대한 신념을 더 굳히게 됩니다. 소모전을 피하기 위해서 더욱 더 기동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독일의 전쟁 방식은 1940년 서부전역의 대승리를 통해 옳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1941년 소련을 침공하게 되면서 문제는 달라집니다. 소련의 광대한 국토와 막대한 인적자원, 산업동원력은 독일이 1941년 부터 1942년 까지 가한 일련의 전략적 공세를 분쇄해 버립니다. 북아프리카에서의 패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티노는 이 모든 것이 독일의 전쟁 방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 이었다고 지적합니다.


The Wehrmacht Retreats : Fighting a Lost War, 1943Death of the Wehrmacht의 후속편으로 1942년 전역에서 그 한계를 드러낸 독일군이 서서히 무너져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시티노는 이 시기의 독일군이 한계에 봉착한 전통적인 작전적 기동전으로 연합군의 반격에 맞서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 책에서는 튀니지, 1943년 초의 동부전선, 시칠리아, 쿠르스크 전투, 1943년의 이탈리아 전선, 1943년 하반기의 동부전선의 작전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각각의 전역을 분석하면서 독일의 전통적인 기동전 사상이 어떠한 한계를 드러냈는가를 지적합니다. 이를 통해 전통적인 프로이센-독일 장교단의 몰락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수백년에 걸쳐 발전해온 독일의 군사 사상이 한계에 봉착했을 때, 군사사상과 함께 유지된 프로이센-독일 장교단이라는 사회 계층도 함께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입니다. 이러한 틀에서 만슈타인, 클루게, 케셀링, 롬멜과 같은 독일 고급 장교단에 대해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1943년의 지중해 전역에 대한 서술에서는 막강한 보급 역량, 압도적인 항공력과 해군전력을 보유한 미영연합군 앞에서 독일군이 감행한 일련의 반격이 잇따라 분쇄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독일군은 우수한 군대였고 뛰어난 작전 수행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수많은 작전-전술 단위의 반격에서 그것을 입증했습니다. 또한 저자는 1942년~1943년에 걸친 롬멜의 퇴각 과정과 1943년 이탈리아군의 무장해제와 같은 군사적인 업적을 높게 평가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독일군은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그리고 살레르노에서 항상 신속하게 기동 전력을 집중하여 연합군의 취약한 지점을 타격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의 작전-전술적인 역량은 초기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미영 연합군의 막강한 항공력과 해군력, 그리고 방대한 보급에 의해 분쇄됩니다. 시티노는 연합군, 특히 미군이 독일군 보다 덜 공격적이고 작전 수행능력이 떨어졌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방대한 보급에 의해 뒷받침 되는 화력으로 충분히 상쇄할 수 있는 것 이었다고 지적합니다. 확실히, 저자가 지적하는 대로 압도적인 포병화력과 항공력을 가지고 있는데 굳이 보병의 희생을 무릅쓸 필요는 없는 것 입니다. 시티노는 독일군 장성들이 회고록 같은 사료를 활용해 시칠리아와 살레르노의 해안에서 독일군의 기갑전력이 연합군의 함포사격과 포병화력에 소모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독일군은 뛰어난 전투력으로 연합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강요할 수 있었지만 결국 소모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1943년의 동부전선에 대한 평가도 유사합니다. 소련은 방대한 전장이었고 소련군은 막대한 규모였습니다. 1943년 하계 전역에서 나타난 것 처럼 독일군이 한 지역에서 공세를 위해 역량을 집중할 때 소련군은 독일의 공격을 막아내면서도 동시에 여러 축선에 걸쳐 공세를 감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일 장교단은 우수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지만 1943년 시점에서는 소련 장교단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우수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또한 소련군은 1943년에 와서도 일련의 전술적 패배를 겪으며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있었지만 동시에 독일군을 소모시키며 서서히 붕괴시켜갔습니다. 그리고 쿠르스크에서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반격을 시작했을 때 독일군은 더 이상 이것을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오룔 돌출부 방어전 처럼 독일군 특유의 기동을 통해 소련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힐 수 있었지만 독일군 또한 함께 소모되었고 독일의 전통적인 전쟁 수행방식은 기울어진 추를 돌리는데 어떠한 역할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저자는 독일의 전통적인 전쟁 수행방식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독일 장교단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독일군 지휘관 중에서 최고로 꼽히는 만슈타인 조차도 단기전, 기동전의 전통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인물이었으며 산업화된 시대의 전쟁을 이해하고 해결책을 내놓을 수는 없는 인물이었다고 지적하는 것 입니다. 만슈타인이 거둔 최대의 승리인 1943년 초 우크라이나 전역 또한 이러한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건이었다고 평합니다. 소련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히고 전선을 안정시켰지만 결코 전략적인 균형을 되돌린 것은 아니었다고 그 한계를 지적합니다. 다른 독일 장군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평가를 합니다. 특히 범 지구적 단위의 전략적인 견해를 갖춘 인물이 거의 전무했다는 점을 혹독하게 비판합니다. 만슈타인 조차도 작전 이상의 범주를 바라보는 통찰력은 없었다고 보는 것 입니다. 저자가 독일 장성중에서 가장 크게 비판하는 것은 알베르트 케셀링입니다. 시티노는 알베르트 케셀링에 대한 전통적인 평가는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것이라고 봅니다. 케셀링의 이탈리아 방어전은 방어하기에 유리한 지형에서 점진적으로 철수하면서 소모전을 전개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만약 케셀링이 이탈리아에서 했던 것과 같은 방어전을 소련과 같은 환경에서 전개했다면 어떤 결과가 왔겠느냐며 반문합니다. 오히려 롬멜에 대한 평가가 좋은 편 입니다. 시티노는 롬멜이 엘알라메인 전투 이후 전개한 퇴각전에서 보여준 역량과 이탈리아 방어전략에서 보여준 통찰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독일군 지휘관들이 산업화된 시대의 전쟁에서 보여준 한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헤르만 발크의 회고록에서 인용한 다음의 구절은 20세기의 산업화된 총력전에서 독일의 전쟁 수행방식이 직면한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dem wir nichts entgegensetzen konnten.)


2012년 11월 13일 화요일

"제프" 디트리히와 미국 정신과의사의 면담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당시 피고인들의 정신상담을 담당했던 미국 정신과의사 리언 골든슨Leon Goldensohn의 면담록을 읽는 중 입니다. 나치 독일의 굵직한 거물들이 나오니 재미있게 술술 잘 읽히는군요. 오늘은 “제프” 디트리히Josef Sepp Dietrich를 면담한 부분을 읽었는데 이것도 역시나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 하나를 발췌해 보지요. 1946년 2월 28일에 있었던 면담이라고 합니다.

골든슨 : 히틀러가 1940년 이전에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합니까?

디트리히 : 물론이오. 전쟁을 일으켰잖소. 전쟁에 진 패자는 한심해 보이는 법이지. 독일의 외교는 형편 없었소.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 부터 말이오.

골든슨 : 무슨 이야기입니까?

디트리히 : 지도를 한번 펼쳐봐요. 독일이 어디에 붙어 있습니까? 독일을 둘러싼 나라들을 한번 봅시다. 그리고 독일의 적국과 우방국을 찾아 보시오. 그러면 내가 하는 말이 무슨 소린지 알 게요.

Leon Goldensohn(Author), Robert Gellately(Editor), Nuremberg Interviews : An american psychiatrist’s conversations with the defendants and witnesses, (Vintage Books, 2004), p.283

양면전쟁을 두 번이나 경험한 군인다운 평가입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재미있는 또 다른 요소는 여러 인물들의 주관적인 인물평입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인물평이니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게 많습니다. 골든슨은 디트리히에게 롬멜에 대해 물어봅니다. 디트리히는 롬멜에 대해 꽤 냉정한 평가를 내립니다.

디트리히 : 롬멜 원수는 나와 대략 비슷한 연배였소. 기갑전에 능통한 장군이라고 하기는 조금 그랬지.

골든슨 : 롬멜 원수가 유능한 기갑부대 지휘관이 아니란 겁니까?

디트리히 : 평범한 수준이었소.

(디트리히는 롬멜에 대해 매우 냉정했다.)

디트리히 : 병과를 바꾸는건 어려운 일이오. 롬멜 원수는 보병전에 능통한 장군이라고 해야겠지. 롬멜 원수는 침착하지 못한 성격이라서 모든 것을 한번에 해치우길 원했소. 그리고 나면 흥미를 잃어버렸지. 나는 노르망디에서 그의 부하였소. 롬멜 원수가 좋은 장군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지. 성공을 거두면 괜찮았지만 상황이 역전되면 침울해 졌소.

Leon Goldensohn(Author), Robert Gellately(Editor), ibid., p.280

디트리히는 면담에서 자신이 카톨릭 신도임을 강조하면서 나치즘에 경도된 인물은 아니었다고 자신을 변호합니다. 이러한 자기 변론은 전후 서독에 거주한 무장친위대 출신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논조라 꽤 재미있습니다.  몇년전 포스팅 했던 “기이한 도덕적 먹이사슬”에 인용한 글 처럼 나치당의 사조직이 아니라 독일군의 일원이었음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2012년 6월 18일 월요일

독일 기갑사단의 보급부대 운용 - 북아프리카의 제15기갑사단 사례

국내에도 번역본이 출간된 『보급전의 역사』덕분에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많은분들이 2차대전기 군수보급문제에 대해 이해를 넓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보급문제를 주로 거시적인 작전단위에서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보급부대의 편성같은 세부적인 문제도 다루지만 어디까지나 본문의 맥락을 끊지 않는 범위내에서 제한을 하고 있지요.

그러고보면 2차대전기 독일군의 사단급의 전술단위에서 보급문제를 다루는 독립적인 글을 찿는 것은 더 어려운 일 같습니다. 제가 읽어본 글 중에서는 스톨피R. H. S. StolfiGerman Panzers on the Offensive의 127쪽에서 131쪽까지 독일 제15기갑사단의 보급부대 운용을 짤막하게 다룬 절이 그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분량은 많지 않지만 아프리카 전선의 사단급 보급부대 편성과 운용을 잘 설명해 놓아 이해하기가 쉽고 유용합니다. 그 내용을 정리해 보지요.

제15기갑사단의 보급부대는 제33보급대대Panzer-Divisions-Nachschubführer 33였습니다. 이 부대는 대대급 부대로 북아프리카로 출동할 당시 총 12개의 보급대Kolonne와 사단의 예비전차를 수송하는 40톤급 제33보충전차수송대Panzer-Ersatzteil-Kolonne 33, 그리고 3개 정비중대Kraftwagen-Werkstatt-Kompanie로 편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북아프리카에서 새로 2개 보급대가 추가되어 제33보급대대는 총 14개 보급대를 예하에 두게 됩니다. 각 보급대는 30톤의 수송능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제8~제11 수송대는 연료운반, 제13~제14 수송대는 물을 운반했습니다. 일반적으로 1개 보급대는 10대의 트럭으로 편성되었는데 독일군이 차량표준화가 되어 있지 않아서 각 보급대의 수송능력에 맞춰 차량이 배치되는 경우도 흔했던 모양입니다. 한편 사단 군수참모부도 보급품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보급대대와 함께 움직였습니다. 또한 무전기를 탑재한 3대의 통신트럭과 차량화된 8문의 20mm 대공포와 37mm 대전차포가  배치되어 기관총 14정에 불과한 보급대대의 빈약한 방어능력을 보충했습니다. 이 외에도 자체적인 방어능력을 갖추기 위한 시도가 계속되는데 1942년 2월에는 아프리카 기갑군이 각 수송대의 수송용 차량은 2명이 탑승하여 한명이 자체 방어를 담당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보급부대를 호위하는 것은 꽤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영국군의 정찰부대나 영국군에 고용된 현지인들의 습격은 물론 공습이 다반사였습니다. 게다가 유동적인 전선 상황 때문에 영국군의 전차부대와 마주치는 최악의 경우도 일어났으니 말입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1941년 기준으로 37mm 대전차포 정도면 영국군의 장갑차는 물론 부실한 순항전차들도 제한적으로 상대할 수 있었다는 점 이었습니다. 심지어 20mm 대공포의 철갑탄으로 영국군 순항전차의 측면을 노려 격파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뒤에는 박격포를 장비한 차량화보병 1개 소대가 추가되었고 경우에 따라 노획한 영국군의 중장비를 배속시키기도 했습니다.

롬멜의 1942년 하계공세에서 가잘라 방어선을 둘러싼 전투가 유동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독일군 보급부대는 다양한 위협에 스스로 대처해야만 했습니다. 보급대는 후방에 위치한 기갑군 물자집적소에서 최전방의 사단집적소로 끊임없이 물자를 실어날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독일군은  가잘라 방어선을 조기에 분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보급로가 비르 하케임Bir Hacheim을 끼고 우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영국군은 이 길게 늘어진 보급로를 수시로 타격했으니 독일군으로서는 환장할 일이었겠지요. 저자인 스톨피는 이러한 상황이 마치 해전의 유동성과 같았다고 평가하는데 저도 괜찮은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2012년 4월 9일 월요일

리델하트는 어떤 맥락에서 한국전쟁기 북한군의 기갑부대 운용을 비판했는가?

날림번역 하나 나갑니다.

오늘 소개할 글은 리델 하트의 “Tank Warfare - And Its Future”라는 글 입니다. 이 글은 원래 The Infantry Journal에 1951년 7월 부터 12월까지 연재된 글인데 1952년 11월, 미국의 Military Review에 다시 한번 소개되었습니다. 한국에서도 한국전쟁과 관련된 부분이 소개되어 잘 알려진 글이지요. 그런데 전체적인 맥락과 분리되어 한국전쟁 관련 부분만 소개되다 보니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국내에서는 이 글이 한국전쟁 초기 북한군의 전차 운용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소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리델 하트는 2차대전 당시의 기갑부대 운용에 대한 완전히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북한군의 전차 운용을 비판한 것이기 때문에 리델 하트의 비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리델 하트의 한국 전쟁기 북한군 기갑부대에 대한 평가는 큰 틀에서 잘못된 정보를 기반으로 전개하는 논리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리델 하트는 이 글에서 수많은 오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리델 하트가 얻을 수 있었던 2차대전기 기갑전투에 대한 많은 정보가 독일 장성들을 통해 왜곡된 것이었다는 점이 큰 원인입니다.

※ 리델 하트와 독일 장군들의 요상한 공생관계에 대해서는 “책은 이렇게 만들어진다”를 보십시오.

게다가 리델 하트가 잘못된 정보에 자신의 이론을 끼워맞추고 있기 때문에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 글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전간기 독일과 소련의 기갑이론과 기갑부대 육성에 관한 내용은 완전한 오류이다.

2. 독일의 기갑부대 운용에 대해서 마비 이론을 적용하여 역사적인 사실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3. 2차대전기 소련의 기갑부대 운용에 대해서도 완전히 잘못된 서술을 하고 있다.

리델 하트가 이 글을 쓴 이유는 2차대전 이후의 전차 무용론을 비판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본적인 전제는 타당하지만 자신의 이론과 잘못된 정보를 결합하는 점은 문제가 있습니다. 북한의 기갑부대 운용에 대한 분석은 일정부분 타당하지만 깔려있는 기본 전제가 완전히 틀려있으니 문제이지요. 이런 오류들을 감안하고 한번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전차전과 그 미래(Tank Warfare - And Its Future)
리델 하트(B. H. Liddel Hart)

“전차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너무 많은 전차를 보유하고 있다. 전차는 한계에 도달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기갑전은 조만간 옛날 이야기가 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세 관계자의 발언은 지난 사반세기에 걸쳐 오랫동안 계속된 유사한 발언 중에서 뽑아낸 것이다.
첫번째 발언은 지난 1928년에 세계최초로 편성되었던 영국 육군의 “시험기갑부대Experimental Armoured Force” 를 해체할 당시 언론회견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여러 군인들은 이 새로운 기동 부대의 공세적 잠재능력에 재빠르게 주목하여 히틀러가 집권하자 그의 지원을 받으면서 이와 같은 기동부대를 신속하게 만들었다. 1940년에 독일은 서부의 방어선을 붕괴시키고 프랑스를 패배시켰으며 바다라는 장벽을 가진 덕분에 영국만이 겨우 자국이 처음 개발했던 무기에 의해 패배하는 것을 모면했을 뿐이다.
두 번째 발언은 1944년 2월 윈스턴 처칠이 한 것이다. 처칠이 1차대전 당시 전차의 대부격인 인물이었던 데다가 2차대전 초기 독일이 전차를 이용하여 충격적인 성과를 거둔 까닭에 처칠이 복귀하였음을 감안하면 의외의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1944년 초엽에 처칠은 그에게 자문하는 사람들 때문에 전차의 시대는 “끝났다고” 믿었다. 불과 몇달 뒤 패튼의 기갑부대는 노르망디를 돌파해 프랑스를 격류처럼 휩쓸면서 1940년과 같은 기갑부대의 돌진을 정반대의 방향으로 해냈다.
세번째 발언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몇 주 전 미국의 육군부장관이 한 것이다. 페이스Frank Pace, Jr. 육군부장관은 전문 참모진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에 그를 비난할수는 없을 것이다. 높은 계급의 군인 중 많은 수가 10년 전의 영국과 프랑스의 군수뇌부들 처럼 전차의 위협을 극복해냈다는 생각을 망설임 없이 하고 있었다. 이들의 예측은 과학자들에 의해 더욱 조장되었다. 아직 검증도 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생산조차 되지 않은 신무기에 지나치게 믿음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전 차와 관련된 문제에서 군인들의 통찰력이 흐려지는 것 보다 군사적으로 근시안적인 일이 반복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1차대전 당시 책임있는 위치에 있던 이들이 전차의 잠재력이 입증되기 전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은 제법 오래된 이야기이다. 이후 30여년간 고위층에 있는 군인들은 “전차는 끝장났다”고 되풀이해서 주장하다가 그들이 끝장났다고 주장한 전차가 무덤에서 튀어나올때 마다 허를 찔렸다.
가장 최근의 사례는 1950년 6월 북한이 남한을 침공한 것이다. 전쟁 초반 침략자들이 거둔 신속한 승리의 원인은 200여대 남짓한, 북한인이 조종하는 소련제 전차로 편성된 고작 4개 전차대대의 충격효과에 있었다. 한국군의 병력은 침략자들에 비해 큰 차이가 나지는 않았지만 얼마 되지도 않는 전차에 견뎌내질 못했다. 방어선을 강화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에 투입된 미군들 또한 얼마 되지도 않는 전차들로 인한 위협이 그들이 예측했던 것 이상으로 엄청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북한군의 전차로 인한 충격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10년전 여름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침략군의 전차 보유대수는 물론 전차의 크기도 과장되었다. 한국에 파견된 종군기자들이 침략군은 60톤급 전차를 사용하고 있다는 보도를 했기 때문에 소련이 자신의 위성국에게 스탈린 전차의 최신형인 IS-3을 원조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까지 나왔다. 실제로는 공격에 30톤급의 T-34보다 강력한 전차는 투입되지 않았는데 T-34는 지난 1941년 처음 실전에 투입된 장비이다. T-34는 지금까지 상대한 방어용, 대전차용 무기들을 격파하는데 충분히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북한군의 부산 진격이 수리에 필요한 부품의 부족으로 인해 전차들이 소모되어 가면서 추동력을 잃었다는 것 보다 중요한 사실은 없다. 낙동강을 도하한 이래 북한군의 공세는 거의 대부분 연속적인 보병의 돌격으로 이루어졌고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미국은 T-34를 상대할 수 있는 M-26과 M-46을 장비한 증원군이 도착할 때 까지 시간을 벌수 있었다. UN군의 반격은 기갑전력의 균형이 뒤집힌 이후에야 가능했던 것이다.


‘뒤떨어진 방식의’ 운용

이후 한국전쟁의 전역에서 전차의 역할은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부분적으로 양측의 전차들간에 성능적으로 두드러지는 격차가 없다는데 있다. 또 다른 면에서 보면 겨울이 닥치면서 지면의 상태가 악화되었다는데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전차가 운용된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단지 보병 지원을 위해 소규모로 운용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1차대전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 뒤떨어진 운용방식이며 이렇게 해서는 결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가 없다. 공산군은 이러한 방식 이상의 발전을 하지 못했다. 서방의 군대는 더 발전된 방식을 잊어버렸으며 이때문에 북한군의 기세가 꺾이고 기갑부대의 증원도 없는 상태에서 신속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기갑전투에 정통했으며 한국전선에서 종군중인 필자의 친구가 최근에 보낸 편지를 인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한국전쟁에서 전차는 주로 공격의 선두에 세우거나 보병을 지원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전차를 이렇게 사용하는 것 보다는 훨씬 현명한 방식으로 운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형전차를 가지고 있는데 적에게는 소화기나 자동화기, 박격포 정도 밖에 없는데 전차로 신속하게 적진 깊숙히 돌파해 들어가서 혼란을 일으키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한국전쟁에서는 이렇게 하지 못했지만 나는 이렇게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기갑부대의 전투부대에 더 많은 타격력을 부여하고 기갑부대를 지원하는 방대한 규모의 지원부대 일부를 감축해야 한다는 당신의 이론이 현대전에 대한 해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련의 위협

서유럽 전체는 수많은 소련 전차사단들로 부터 침공의 위협을 받고 있다. 소련군의 175개 현역사단 중 55개 사단이 ‘전차사단’, 혹은 전차 전력에서 거의 전차사단에 준하는(80% 정도)  ‘기계화사단’인 것으로 추정된다. 더 심상치 않은 것은 현재 소련 점령지역에 배치된 부대의 상당수가 이러한 기동사단이라는 점이다. 최소한 25개의 기동사단이 전진배치되어 있어서 신속한 진격이 가능할 것으로 알려져있다. 초기에 투입될 공격부대의 규모는 전차 6,000여대에 달하며 이것은 한반도에 있는 소규모의 기갑전력과 비교하면 압도적이라 할 수 있다.
한동안 소련 전차전력을 숫자로 상대할 수 있을 가능성이 없는데다가 서방의 전차가 질적으로 우세를 확보할수 있을지 조차 불확실하기 때문에 소련의 전차 위협을 우세한 전술로 상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전술적 우위가 가지는 중요성은 충분하다. 1940년 당시 독일군의 전차부대는 프랑스군의 전차에 비해 숫적으로도 열세였고 질적으로도 열세였으나 몇주만에 프랑스 육군을 산산조각내고 프랑스를 휩쓸어버렸다. 1941년에도 독일군의 전차부대는 소련군에 비해서 숫적으로 압도적인 열세에 놓여있었지만 소련군 전차부대의 대다수를 섬멸했으며 겨울이 닥치기 전 까지 소련이 개전 당시 보유하고 있던 전력의 거의 대부분을 전멸시켰다. 이 두개의 사례에서 독일군은 전차를 대규모 부대로 운용하는 법을 알고 있었지만 적은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


용어상의 혼란

“전차전Tank Warfare”과 “전차를 동반한 전투Warfare with Tanks”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이 두개의 용어는 일반 대중 뿐만아니라 군사전문가들도 자주 혼동하고 있다. 이런 차이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차가 처음 등장한 때로 거슬러 올라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최초의 실전 투입

전차는 1916년 9월 15일 영국의 솜Somme 공세에 처음으로 투입되었다. 전차는 양측이 참호에 의존하면서 발생한 치명적인 영향으로 인한 교착상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양측이 참호를 파면서 전황은 정체되었다. 일반적인 공격 방식으로는 잘 구축된 참호의 이점을 살린 방어군을 극복하는데 효과가 없었으며 기관총이 휩쓸어 버리는 지대를 돌파하려는 거듭된 시도는 사상자만 늘리며 실패로 돌아갔다. 프랑스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전장이 교착상태에 빠지기 이전인 전쟁 초기에 독일이 유린한 프랑스 영토로 부터 침략자들을 축출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1915년에 여러차례의 보병 제파 공격을 감행했는데 이로 인해서 전쟁 기간중은 물론 전쟁 이후에도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물적, 심리적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교착상태를 타개할 해결책은 영국이 장갑과 무한궤도, 가솔린 엔진과 야포를 결합함으로써 만들어졌다.
전차는 솜 공세에서 처음 실전을 치렀을때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 이유는 군 수뇌부가 전차의 “초기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승무원들이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소수의 전차를 서둘러서 투입한데에 있다. 그러나 1917년 11월 20일 캉브레Cambrai에서 380대의 전차가 힌덴부르크 방어선에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했을 때는 커다란 돌파구를 뚫을 수 있었다. 이듬해에 일어난 대성공의 전조라 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전차 개발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도 독자적으로 비슷한 종류의 참호 돌파용 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돌격전차Char d’assaut라 고 불렀다. 프랑스의 개발은 영국 보다 뒤쳐졌는데 그 이유는 프랑스군 수뇌부에게 전차의 잠재성을 설득하는 것이 어려웠던데 있었다. 1917년의 첫 실전은 실망스러운 결과를 가져왔으나 프랑스는 곧이어 작지만 신뢰성있는 르노 전차를 개발했으며 르노전차는 전쟁의 향방을 바꾸어 놓은 1918년 7월의 마른 반격작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8월 8일에는 아미앵Amiens 근교에서 영국군의 전차 460대가 또 한번의 기습적인 공격을 통해 루덴도르프가 “독일 육군에 있어 암흑과도 같았던 날”이라고 할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후속 공세로 루덴도르프는 전차야 말로 독일의 “가장 위협적인 적”이었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전차를 동반한 개별적인 공세가 적의 방어선에 깊은 균열을 내기는 했어도 방어선을 완전히 돌파할 수는 없었다. 돌파구를 확대하기에는 전차가 너무 느렸으며, 기병은 방어력이 취약했고, 보병은 느린데다가 방어력까지 취약했다. 그렇기 때문에 전투에서 거둔 승리의 성과는 결정적이지가 못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에서는 1차대전 당시 도출된 개념에 따라 훨씬 빠른 전차를 개발해냈다. 이것은 “전차를 동반한 전투”에 머무르지 않고 “전차전”의 전망을 보여주는 것 이었다. 이것의 의미와 중요성을 이해하려면 전차가 개발되기 이전의 이야기, 즉 전차가 없던 시절의 전쟁, 혹은 고대의 전쟁으로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전차라고 이름이 붙게된 병기는 두 가지의 주요 구성요소로 인해 새로운면이 있었다. 무한궤도와 가솔린엔진이 그것이다. 전차가 개발되도록 만든 문제점들도 부분적으로 새로운 요소라 할 만했다. 방어적인 목적에서 참호와 철조망을 결합한 것과 기관총으로 탄막을 쳐서 접근로를 쓸어버리는 것 이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것들은 무척이나 오래된 문제들을 극대화한 것에 불과하다. 1차대전 당시의 전차는 오래된 해결방법을 현대적으로 응용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전차는 고대 전쟁에서 성곽을 극복하기 위해 사용된 공성추와 투석기, 로마군의 거북이(testudo) 대형, 공성탑에 대응하는 무기이다.
1차대전 이후 개발된 고속 전차는 이것을 생산하도록 한 사상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과거의 사상과는 대응하는 면을 가지고 있었다. 고속전차는 고대 전쟁에서 적의 전투대형을 와해시키기 위해서 사용한 전차나 전투용 코끼리와 비슷하다. 그러나 이것 보다 더 가까운 것은 전쟁이 보다 결정적이었던 시기에 군대의 주된 충격수단이었던 마갑을 장비한 기병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고속전차는 “기병부대”에 현대적인 공세적 기동력을 부여하여 기병이 전장을 지배했던 황금기를 부활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기병을 기계화 한다면 고속전차를 활용해 적이 재편성하는 것 보다 더 빠르게 혼란을 확대할 수 있을 것이며 적이 돌파구를 메우기 전에 밀고 들어갈 수 있을 것이므로 돌파구를 완전한 돌파로 이어지게 할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새로운 개념을 확대한 것이 고속의 기갑부대를 전략적으로, 본대로 부터 독립적으로 운용하고 적의 주 보급로를 교란하기 위해 후방 깊숙한 곳의 병참선을 차단하기 위한 장거리 기동을 실시하는 것 등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서 적의 모든 야전군과 저항력을 마비시킬 수 있을 것 이었다.


부활한 기병

필자가 ‘부활한 기병으로서의 전차’, 특히 전략적 확대라는 개념을 발전시키는데 산파역할을 했다는 것에 관해서, 어떻게 이것을 발전시켰는지 관심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 개념은 처음에 13세기 몽골이 동쪽으로는 중국을 휩쓸고 서쪽으로는 중동은 물론 유럽의 동쪽 절반을 휩쓸었던 그때, 징기스칸이 완전히 기동화된 군대를 가지고 수행한 장기간의 기동을 연구하고 있을 때 떠올랐다. 현대화된 ‘몽골식’ 작전에 대한 개념은 영국 육군의 ‘시험기갑부대’를 훈련할 당시 주안점이었으며 맥아더 장군의 주목을 받아서 1935년에 그가 육군참모총장으로써 작성한 보고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1929년에 출간한 셔먼 장군에 관한 저서에서 미국내전 당시 서부전역을 연구하면서 이 개념을 철도에 보급을 의존하는 현대의 대규모 군대에 맞서 적용하는 문제를 더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다. 셔먼이 조지아와 캐롤라이나를 따라 진격하면서  리의 보급로를 차단한 것과 포레스트의 교란 공격으로 부터 얻어낸 교훈을 종합한 것이 기갑부대의 ‘전략종심돌파deep strategic penentration‘ 방법을 이끌어내는 기초가 되었다.
그 이후 전차의 역사는 전차를 보병 지원을 지원하기 위해 사용하는 초기의 개념과 독립된 기동 병종이라는 새로운 개념간의 지속적인 대결이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이것들을 “공성추” 개념과 “부활한 기병” 개념으로 부를수 있을 것이다. 두 가지 개념 모두 약간의 수정을 겪었다. 예를 들면 “공성추” 개념의 경우 보전협동에 어려움이 늘어나는 점에도 불구하고 더 빠른 전차가 보병을 지원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을 인식하였다. 한편 “부활한 기병” 개념의 경우는 전차가 장애물을 극복하는 것을 지원하기 위하여 기갑부대에 기동화된 보병을 포함할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수정일 뿐 기본적으로 다르고 본질적으로 대립하는 두 개념이 근본적으로 변화한 것은 아니었다.


“국가별” 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독일이나 소련, 미국 어디에도 전차 운용에 있어 ‘국가별’로 구분되는 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두가지의 기본 개념은 모든 국가들에 각기 다른 색상의 경계선처럼 이어지고 있다. 각국의 교리를 구분해서 살펴보는 것은 어떤 기본사상이 지배적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살펴보기 위한데 있다.


프랑스 육군

1차대전 이후 프랑스 육군은 소련군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큰 육군이었으며 가장 많은 숫자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육군은 ‘공성추 개념’을 자국군의 기본적인 전차 교리로 유지하고 있었으며 전차 부대는 보병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사례는 자연스럽게 유럽과 다른 지역의 육군에 영향을 끼쳤다. 미육군은 프랑스의 뒤를 따랐으며 1928년에는 영국군과 유사한 시험기갑부대를 편성하려 했으나 얼마안가 그 실험을 중단했다. 미육군은 나중에 가서야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했으며 기병을 ‘기갑기병’으로 전환했다.


영국 육군

영국 육군은 1차대전이 종결된 무렵 전차부대가 보병이나 기병과는 구분되는 또 다른 병종으로서 독립부대로 편제된 유리한 상황에 있었다. 구습과 전통의 제약을 받지 않고 새로운 사상을 발전시키는데 있어 유리한 점이었다. 영국은 시속 20~30마일의 속력을 낼 수 있는 전차 생산에서 기술적 우위를 확보함으로써 새로운 전술 교리를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그리하여 1920년대 중반 영국군 총참모부는 이것을 영국 육군의 전차 교리로 채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보병은 전차의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어서 1930년대에 영국군 총참모부는 이 요구를 받아들여 전차군단 내에 보병과 함께 작전을 할 특수전차로 편성된 전차대대들을 두도록 하는 한편, 기갑사단의 역할은 비슷한 목적으로 개편된 기병부대와 나누도록 하였다. 이것은 영국의 얼마 안되는 기갑전력이 지나치게 분산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전차의 운용과 관련 정책 집행에 참여한 고위 간부 중 전차를 이해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독일 육군

독일군은 베르사유 조약 체제하에서 전차를 보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독일군은 1933년에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을 당시 프랑스와는 달리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전차나 교리 때문에 방해를 받지 않았으며 새롭게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그동안 독일 장교들은 해외의 경향을 신중하게 관찰했으며 프랑스 대신 전후 영국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독일 장교단은 그들이 선택한 거대한 공세 잠재력을 가진 방식에 대해 히틀러의 지원을 얻었다. 독일 육군은 기갑사단을 편성하는데 집중하였으며 이렇게 해서 보병 지원에 노력을 낭비하지 않았다. 독일군은 1940년까지 새로운 형태의 기갑사단 10개를 편성하였다. 독일군의 기갑사단은 전체 육군에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지만 프랑스군의 전선을 돌파했으며 훨씬 많은 보병사단들이 전선에 등장하기도 전에 사실상 서부전역을 종결지었다.
2차대전이 일어나기 몇년 전 부터 프랑스군도 비슷한 형태의 사단을 약간 창설했지만 프랑스군 수뇌부는 기존의 교리를 떨쳐내지 못 했으며 기동사단들을 분산 운용하는 한편 대부분의 전차 전력을 보병 직접지원에 할당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독일군은 프랑스 전차 부대를 차례대로 섬멸하거나 우회해 버릴 수 있었다. 독일 기갑부대를 육성한 주역이자 당시 돌파를 이끌었던 구데리안이 “전략종심돌파”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에 그 효과는 더욱 더 치명적이었다. 구데리안은 마비된 프랑스군을 상대로 전략종심돌파를 감행해 순식간에 붕괴시켰다.
1941년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소련의 통치 계급은 전차의 중요성을 매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붉은군대에 대량의 전차를 배치했다. 그러나 소련 전차부대는 대규모 부대의 기동에 필요한 기술이나 무전기를 갖추지 못했으며 대부분의 전차를 보병 지원을 위해 소규모로 분산 배치해 놓고 있었다. 그리하여 소련 기갑부대는 독일 군의 집중적인 공격에 쉽게 무너졌다. 그러나 소련의 방대한 영토와 진창이 소련의 붕괴를 막았으며 1942년에도 그것이 되풀이됨으로서 소련은 개선된 대전차 방어전술과 훨씬 나은 전차 부대를 준비할 시간을 벌었다.
북아프리카에서는 1940~1941년 사이에 단 하나의 영국군 기갑사단이 새로운 방식에 따라 운영되었는데 이것은 20배나 많은 이탈리아군을 섬멸할 수 있었던 주된 원인이었다. 그러나 공세적인 전차 전술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전차와 대전차포를 조합한 방어전술을 최초로 능숙하게 구사한 장군이었던 롬멜의 등장으로 판세가 뒤집어졌다. 롬멜은 적의 전차부대를 덫으로 끌어들여 격파한 다음 자신의 전차부대를 투입해서 적의 후방 깊숙히 돌파해 들어가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전차전의 전환점

이것은 전차 전술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전차는 1차대전 당시 공세용 무기로 개발되었고 오랫동안 그 방식으로만 사용되었다. 영국군은 1918년 3월 독일군의 공세를 맞아 전차를 방어적으로 운용해 보려했으나 실패했다. 영국군 전차의 속력이 너무 느렸기 때문에 전선에서 가까운 후방에 소규모로 분산되어 배치되었으며 이로인해 어떤 지점에서도 집중된 강력한 역습을 가할 수 없었다. 많은 전차들이 장거리 이동이나 후퇴 중 연료가 떨어져 독일군에게 노획당했다. 1940년에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공격에 대응해 같은 방식의 분산 운용을 했을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프랑스군의 전차 부대는 중요한 지점에 없거나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소규모여서 독일군 전차의 집중된 공격에 압도당했다. 프랑스군은 전차를 방어적으로 운용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으며 방어가 필요한 경우에 대응할 새로운 방어전술을 개발하지도 않았다. 전차를 이용한 방어의 가치를 입증한 것이 롬멜이었다.


소모전

그러나 전차의 방어적 역할이 입증된 것은 전차전의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전차의 생산이 크게 증가하면서 연합군이 우세해지면서 더욱 더 그렇게 되었다. 연합군의 지휘관들은 전차를 대규모로 운용하는 방법을 몰랐으며 단지 계속해서 벌어지는 숫적인 격차를 활용한 소모전으로 독일군의 전력을 고갈시키기 위해 수많은 전차를 가지고 소규모의 교전만 다발적으로 전개했을 뿐이었다. 연합군 지휘관들은 소모전으로 독일의 작은 자원을 고갈시킬 수 있다면 독일 전차 한대에 연합군 전차 두세대를 잃어버리는 것도 감당할 수 있었다.


전차전술의 퇴보

이러한 경향은 보병이 계속해서 전차의 지원을 요구하고 전차병들은 더더욱 강력한 주포를 요구함으로써 강해졌다. 전차병들은 자신들의 기동술에 대한 믿음을 잃어갔고 그래서  더더욱 강력한 주포와 강력한 장갑을 요구했다. 그래서 전차는 더 커지고 더 무거워졌고 기동력은 저하되었다. 그리고 전차전술은 1920~30년대의 개념에서 1차대전 당시의 초보적인 수준으로 퇴보했다.


중전차의 영향

독일은 56톤급의 티거와 67톤급의 쾨니히스티거를 개발하여 퇴보적인 경향을 더했다. 이 괴물들은 공세를 신속하게 종심 깊은 돌파로 이어가기에는 지나치게 느리고 둔했으나 독일군이 쇠퇴해가면서 방어를 강요당하던 무렵에 등장했으며 방어전에서는 독일군 전선을 돌파하려는 연합군의 전차에게 무시무시한 적수가 되었다.
이러한 요소들이 뒤섞인 결과 전쟁 말기의 전차전은 개별 전차간, 또는 소규모 전차부대간의 화력전으로 퇴보하였다. 독일군의 전차 전력이 흔적 수준으로 줄어들면서 약간의 예외가 나타나기는 하였다. 바로 연합군이 노르망디에서 돌파를 시도하기 직전이 그러했다. 그러나 전쟁 후반기의 전차전은 대부분 부대단위의 신속한 기동보다는 개별 전차별 사격능력이 더 중요한 일련의 포격전에 불과했다.


한국전선의 방식

한국에서도 상황은 여전하다. 한국전선의 기갑 작전에서도 동일한 방식이 반복되고 있다. 사실 솔직하게 말한다면 한국전선의 전차전은 ‘방식’이나 ‘작전’이라고 부르기에는 뚜렷한 형태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선의 사례들은 ‘전차전’이 아니라 ‘전차를 동반한 전투’의 중요성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북한군의 전술

북한군의 전차 운용은 독일이 침공작전에서 사용한 ‘전략적’인 방식, 즉 독립된 기갑부대가 다른 부대들을 훨씬 앞질러서 종심 돌파를 하는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겠다. 북한군 전차부대의 진격을 살펴보면 소련군이나 다른 국가의 군대가 2차대전 중후반기에 사용한 방식을 그냥 따라한 ‘전술적’인 방식으로 보인다. 즉 소규모의 전차로 보병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북한군은 기갑전투단을 구성하는데 필요한 기계화 부대가 부족해서 제한적인 방식을 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 한군은 기습과 개전 초반의 순조로운 진격에도 불구하고 첫주에 겨우 50마일을 진격하는데 그쳤다. 독일군은 1941년 소련에서 개전 첫날에 그 정도는 충분히 진격했으며 1주일이 지난 뒤에는 200마일 이상 진격했다. 만약 북한군이 구데리안과 같은 방식으로 작전할 수 있었다면 미국의 증권군이 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한반도 전역을 석권했을 것이다.


앞으로 어떤 방식이 계속될 것인가?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한가지 확실한 것은 전차가 ‘공성추’ 개념에서 ‘부활한 기병’ 혹은 ‘몽골’ 개념으로 되돌아가지 않는이상 과거와 같은 지위를 미래에도 가질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전환이 가능하지 않다고 하기 전에 전차의 개발과 전차 부대의 편성에 관한 새로운 경향이 제시하는 가능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차 설계의 변화

전차 주포의 대구경화를 주도했던 경험 많은 독일의 기갑부대 지휘관들은 보다 효과적인 사격을 위해서 사격 위치를 신속하게 변경하고 사거리를 좁힐 수 있도록 해 주는 기동력이 훨씬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판단은 그들이 소련과의 교전 경험을 포함해 매우 폭넓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독일 기갑부대 지휘관들은 전차의 방어력은 화력과 기동력에 비해 부차적인 요소로 생각하고 있다.
지 금은 전차의 대형화 추세를 바꾸어 놓아야 할 때이다. 미래의 전차는 야간투시장비는 물론 아마도 레이더도 장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방사능으로 오염된 지대를 안전하게 안전하게 돌파할 능력도 갖추어야 할 것이다. 만약 이러한 새로운 요구사항들이 강력한 주포에 전방위 방어력을 갖춘 장갑과 결합한다면 전차는 갈수록 둔중한 괴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전차의 설계를 단순화 해야 한다. 기계화된 골리앗이 아니라 기계화된 다윗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주무장을 외부에 장착하여 관측과 사격, 그리고 재장전을 기계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차체도 소형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투실은 조종에 필요한 기구와 세명의 승무원이 탑승할 수 있는 크기가 될 것이다. 로켓이나 무반동포와 같은 새로개발된 강력한 화력의 무장을 개발하여 더 많은 개선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이 전쟁 말기에 개발한 신형 잠수함에 탑재했던 과산화수소 추진장치와 같은 새로운 방식의 동력기관을 개발한다면 전차의 중량을 더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숫자 대 성능

전차의 숫자와 성능(개별 전차의)간의 균형은 맞추기가 어렵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몽골과 전성기의 비잔티움의 전술에서 어느 한가지 요소에 의존하는 것 보다는 두가지 요소를 조합하는 것이 더 우월하다는 경향을 찾아볼 수가 있다. 전술적인 문제 뿐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에서도 각국 정부가 50~70톤 정도의 전차를 필요한만큼 대량으로 도입하지는 못할 것이다.


조직의 변화

또한 조직면에서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1940년에는 일반적이지 않았던 기갑부대가 오늘날은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2차대전 이후 서방국가의 군대들은 비슷한 방식을 답습하고 있을 뿐이다.
서방국가의 기갑부대들은 항공공격으로 인해 마비되지 않도록 조직을 재편해야 한다. 서방의 군대는 1944~45년 기간 동안 누렸던 방대한 항공력의 지원을 받으면서 그러한 지원이 없는 적을 상대로 싸웠던 이점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다. 침략군에 대항해 기동하기에 앞서 소련공군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고려해야 한다. 소련공군은 상대방이 수백대의 항공기를 동원할 수 밖에 없는 지점에 수천대의 지상공격기를 투입할 수 있다. 게다가 서방 군대는 소련군 보다 보급 소요가 더 크기 때문에 마비가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서방국가들은 숫적으로 압도적인 상대와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맞서기 위해서는 적군을 기동으로 압도할 수 있도록 전략적, 전술적으로 기동화 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이야기는 규모가 작은 기갑부대가 전장에서 극도의 기동성을 발휘하여 사격 진지를 신속히 변경할 수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사단급의 기갑부대는 한 지구에서 다른 지구로 이동하여 종심깊게 “치고 빠지는” 기동방어를 실시해 적을 저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편제가 필요하다. 1940년에 결정적인 위력을 발휘했던 기갑사단은 필자가 1920년에 구상했던 개념을 실현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었다. 기갑사단의 모든 차량은 험지 주파능력과 최소한의 소화기 및 파편 방어력을 가져야 한다.


융통성의 부족

오늘날의 기갑사단들은 기동면에서 융통성이 부족하다. 기갑사단의 길다란 행군대열은 마치 창의 손잡이 만큼이나 경직되어 있다. 이것을 기계로 만들어진 뱀 같은 구조로 발전시켜야 한다.


전차의 증강, 지원부대의 감축

또한 지원부대의 규모를 줄여야 한다. 전차의 타격력이 가장 치명적인 효과를 발휘하려면 취약한 지점에 신속하게 대량의 전차를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비대한 편제로는 좁은 지역에서 여러개 사단의 선두에 전차를 집중하는 것이 어려우며, 더우기 신속하게 집중하기란 더 어렵다. 전차의 집중을 보다 실행가능하게 하려면 각 사단의 보조 부대를 감축해서 전차가 차지하는 비중을 높여야 한다.
기갑사단의 창설에 영감을 준 개념은 기동성을 얻고 탄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전성기의 기병이 전장에서 수행한 역할과 같이 승차 전투를 하기 위해서였다. 도보로 전투하는 병력을 포함하는 것은 전술적으로 필요하다. 엄폐물 뒤에 숨은 적을 찿아내거나 다양한 방어 임무를 위해서이다. 그러나 전투시 하차하는 승차 보병의 비중을 전차와 자주포와 같이 탑승전투를 수행하는 병력과 비슷하거나 더 높게 편제하는 것은 근본적인 오류이다.
또한 승차보병은 기갑전력과 동등한 야지주행능력을 갖춰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완전히 궤도화된 경장갑 차량이 필요하다. 그러지 못한다면 승차보병은 전차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전차를 근접하여 지원하지 못할 것이다. 전쟁기의 경험을 보면 보병이 신속하게 개입할 수 있을 경우 보병의 숫자는 많을 필요가 없다. 만약 진정한 기계화보병이라 할 수 있는 “기갑 보병Tank Marines” 1개 중대를 필요할 경우 즉시 투입할 수 있다면 보통 차량화 보병 1개대대의 저항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늦게 투입된다면 장애물이 보강되어 이를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전쟁에서 시간이란 결정적인 것이다.


보급문제

충분한 기동력을 얻기 위해서는 사단의 보급 소요를 줄여야 한다. 기갑부대는 ‘가볍게’ 기동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셔먼이 그의 부대를 기동성 있게 하기 위해서 했던 것 처럼 거추장스러운 요소들을 제거해야 한다. 현재 기갑부대의 규모를 줄이고 간소화 하기 위해서는 셔먼과 같은 인물이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기갑부대는 병참선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으로 수일간, 혹은 몇주간 작전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공중으로 보급을 한다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만약 장갑관통력이 높은 무장을 갖춘 경전차를 개발하게 된다면 완전한 항공수송이 가능한 기갑사단을 편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단은 소련 내륙의 카스피해 근교에 강하시켜 소련의 중요한 보급로를 교란할 수 있을 것이며 특히 전략폭격이 초래한 혼란을 활용하기 위해 투입한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전차의 위력 확대

전쟁의 혁신을 가져오기 위해서, 조직이나 전차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 처럼 기갑부대의 위력을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에서 더 나아 확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완전히 기동화된 전력을 갖춘다면, 서방은 현재와 같이 소련에 대한 포위망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련이 이와 같은 전력을 갖추었는데 서방은 그러지 못한다면 1940년 보다 더 심각한 재앙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서방 국가들의 기회

현재까지 소련의 전차 전술은 ‘공성추’ 개념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의 사례를 보면 여전히 보병을 근접 지원하는 방식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이 서방을 공격하기로 결심할 경우 이와는 다른 기갑전술을 사용할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진정한 ‘전차전’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만큼 그러한 전술을 개발하는데 장애가 있을 것이다. 서방국가들은 군사지도자들이 상상력과 통찰력을 갖추기만 한다면 새롭게 기술적, 전술적인 도약을 할 여지가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는 많은 보병 장교들이 신형 바주카포로 어떠한 전차라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많은 공군 장교들이 어떠한 전차 부대가 진격해 오더라도 저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었다. 실전에서의 경험은 이러한 생각들과 모두 반대되는 것 이었다.
필자는 바주카포의 유효사거리가 현재의 세배에서 네배이상 늘어나지 않는다면 확실한 ‘전차킬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정도의 사거리를 확보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만약 그것을 달성하게 된다하더라도 방어력의 가치를 무너뜨릴수는 있겠지만 전차의 근본적인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야지를 고속으로 기동하여 타격을 가할수 있는 능력의 가치를 무너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전차를 무력화 하는데는 전술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핵무기를 개발하거나 어떠한 방호장비도 무력화 할 수 있는 화학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더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무기를 먼저 개발할 가능성은 서방국가들이 더 높다. 그리고 그런 무기를 개발하게 된다면 앞서 언급한 새로운 유형의 기갑부대를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마련될 것이다. 새로운 유형의 기갑부대는 현재의 군대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적군의 마비된 상태를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B. H. Liddel Hart, “Tank Warfare - And Its Future”, Military Review(1952. 11), pp.73~82

2012년 4월 1일 일요일

『패튼과 롬멜』, (일조각, 2012)

얼마전 일조각에서 2차세계대전에 대한 책을 새로 출간했습니다.『패튼과 롬멜 : 현대 기동전의 두 영웅』(원제 : Patton And Rommel: Men of War in the Twentieth Century) 입니다. 이 책의 번역자인 황규만 장군은『롬멜 전사록』을 번역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요. 이 책이 번역 중이라는 소식을 들은지는 조금 됐는데 출판사의 내부 사정으로 출간이 지연되어 올해에 출간된 것이라고 합니다. 한국어판의 부제는 ‘현대 기동전의 두 영웅’인데 상당히 잘 지은 제목 같습니다.

데니스 쇼월터Dennis ShowalterTannenberg: Clash of Empires 1914등으로 유명한 군사사가로 근대 독일군사사를 연구하는 연구자입니다. 『패튼과 롬멜』은 두 군인의 출생에서 최후까지를 연대기 적으로 따라가면서 관련된 역사ㆍ사회적 배경을 함께 서술하고 있는데 이 점에서 쇼월터는 상당히 괜찮은 실력을 보여줍니다. 제목에서 잘 나타나는 것 처럼 패튼과 롬멜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강하지만 두 인물의 과오에 대한 비판을 소홀히 하지 않고 있어 상당히 좋은 개설서라고 생각이 됩니다.

위에서 이야기 한 것 처럼 이 책은 개설서입니다. 미국인 독자들을 대상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미국의 대중들에게 친숙한 패튼과  롬멜이라는 두 인물을 선정하고 이들의 일생을 따라가면서 미국과 독일의 군사제도ㆍ군사문화에 대한 비교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미국과는 전혀 다른 독일의 군사제도와 군사문화를 비교하여 개괄적인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양쪽 모두에 익숙치 않은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매우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책의 서술 방식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을 드리는 것도 좋겠군요. 저자가 독일 군사사연구자인 만큼 그가 강점을 보이고 있는, 롬멜에 대해 서술한 부분을 예로 들어보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롬멜이 군대에 입대하는 부분에서는 그 당시 독일의 장교임관제도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1차대전 초기 전역에서는 독일의 동원제도가 가진 문제점을 짚고 넘어갑니다. 다시 1차대전이 끝난 이후에는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 군대의 혼란과 군사제도 개편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인물들이 겪는 사건마다 관련된 문제에 대한 해설을 곁들임으로서 설명이 필요한 내용을 별도의 주석으로 처리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서술을 하는 것이 강점이라고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자료 출처 정도는 주석으로 달아주는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리고 마찬가지로 패튼에 대한 서술을 하는 부분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에 독자는 미국과 독일의 군사제도ㆍ군사문화를 비교하면서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저자는 패튼과 롬멜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우호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우호적인 시각은 롬멜에 대한 서술에서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단순히 긍정적인 평가로만 일관하지는 않습니다. 롬멜에 대한 서술에서는 독일 군사사학계의 비판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으며 특히 영국군의 십자군 작전 당시 롬멜의 지휘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합니다. 특히 롬멜에 대한 비판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고급제대 지휘관으로서의 시야 부족이 아프리카 전역 초기 문제점으로 작용했음을 지적합니다. 물론 롬멜에 대한 모든 비판을 수용하는 것은 아니어서 토브룩 공격 당시 제5경사단장 슈트라이히Johannes Streich와의 갈등에 대한 유명한 일화에서는 슈트라이히의 증언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역시 논란의 대상이었던 1944년 초 서부전선의 기갑사단 배분 문제에 대해서는 히틀러의 우유부단함에 더 큰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패튼에 대한 서술도 롬멜과 비슷하게 우호적인 기조를 유지하면서 명백한 결점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패튼의 인격적인 결함을 자주 지적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군요. 물론 패튼의 가장 큰 실책이라 할 수 있는 M-26 도입과정의 판단착오 역시 빠지지 않고 넘어가고 있습니다.

번역판의 문체는 상당히 좋습니다. 편집과 교열을 담당하신 분이 상당히 실력이 좋으신 분 같군요. 제 개인적으로는 황규만 장군이 이전에 번역했던 다른 책들과 비교했을 때 더 읽기 편하게 윤문이 되어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약간의 사소한 오류와 오탈자가 있으며 몇몇 군사용어의 경우 약간 어색한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물론 군사용어, 특히 독일군과 관련된 군사용어의 대부분은 아직 표준화된 한국어 용례가 없으므로 어쩔수 없긴 합니다.

상당히 좋은 개설서여서 국내의 반응이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런 개설서들이 꾸준히 출간되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