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에 먹고사는 문제로 업데이트가 전혀안되고 있어 민망하군요. 블로그에 밀덕썰 푸는게 소소한 삶의 재미 중 하나인데 말입니다.
예전에 어디에 투고하려고 썼던 뻘글 한 편 투척합니다. 만헤이 전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원래 연재하려 했던 곳의 특성상 자료출처나 주석은 없습니다. 뭐, 전부 다 제 블로그에서 오래전에 했던 이야기이니 이곳을 꾸준히 들르신 분들이라면 지겨우시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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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크만의 기묘한 모험
독일군의 야심찬 아르덴느 공세가 미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좌절되어 가고 있던 1944년 12월 24일, N15도로가
지나가는 교통 요충지인 만헤이(Manhay)가 독일 무장친위대 제2기갑사단
‘다스 라이히(Das Reich)’에 점령됐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편찬된 미육군의 공간사에서는 이날 밤 독일군이 노획한 셔먼 전차를 앞세우고 미군으로
위장해 만헤이를 점령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독일측 참전자들의 증언이 공개되면서 만헤이 전투는 미육군의
설명과는 다르게 전개됐음이 밝혀졌다. 이날 만헤이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아르덴느 전투가 시작될 무렵 ‘다스 라이히’ 사단은
제6기갑군의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었다. 1944년 12월 19일, B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는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던 ‘다스 라이히’ 사단을
투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무렵 독일군을 괴롭히던 고질적인 연료부족 때문에 ‘다스 라이히’ 사단은 투입 명령을 받고도 이동을 할 수 없었다. ‘다스 라이히’ 사단에 대한 연료보급은 12월 22일 오전이 지나서야 마무리 되었다. 보급을 마친 ‘다스 라이히’ 사단은 N15 도로를 따라 북상하다가 바하끄 쁘헤듀흐(Baraque Fraiture)에서
미 82공수사단 325글라이더 보병연대 2대대와 여기에 배속된 미 3기갑사단 32전차연대 3대대 소속의 1개
전차소대의 저항에 부딛혔다. ‘다스 라이히’ 전차연대 7중대의 4호전차와 미 32전차연대 3대대의 셔먼 전차간에 전차전이 벌어졌다. 독일측은 4대의 4호전차를 잃었고 미군은
11대의 셔먼전차와 다수의 차량을 상실하고 바하끄 쁘헤듀흐에서 퇴각했다. 그러나 23일부터 24일까지 미육군항공대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만헤이를 목표로
한 독일군의 진격은 저지되었다. 일부 독일 전차병들은 끊임없는 공습으로 공황상태에 빠져 전차를 버리고
도망치기까지 했다. 여기에 바하끄 쁘헤듀흐를 탈환하기 위해 미 3기갑사단과 82공수사단이 병력을 증원하면서 독일군은 더욱 곤경에 빠졌다.
결국 독일군은 미군의 공습을 피해 야습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다스 라이히’ 전차연대장 루돌프엔셀링(Rudolf Enseling) SS중령은 만헤이 방면에 대한 야습에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던 1대대 4중대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4중대는 경험이 풍부한 장교였던 오르트빈 폴(Ortwin Pohl)
SS대위가
지휘하고 있었다. 폴 대위는 우수한 지휘관이자 전차 에이스였다. 그는
노르망디 전선에서 12대의 미군 전차를 격파한 바 있었다. 그리고
그의 부관이 바로 유명한 전차에이스 에른스트 바르크만(Ernst Barkmann) SS상사였다. 바르크만 상사는 노르망디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으며 특히 쿠탕스 가도의 전투로 명성을 떨쳤다. 1소대는 아르덴느 공세 직전 임관한 크노케(Heinrich Knocke) SS소위가, 2소대는 비스만(Alfred Wissmann) SS소위가, 3소대는 경험이 풍부한 부사관인 프란츠 프라우셔(Franz
Frauscher) SS원사가 지휘하고 있었다. 각 소대는 모두 5대의 판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중대본부는 폴 대위의 402호차와 바르크만 상사의 401호차 2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한 4중대를
지원하기 위해 만프레트 하게샤이머(Manfred Hargesheimer) SS중위가 지휘하는 2중대 소속의 판터 6대가 4중대에
배속됐다. 그리고 전차를 지원하기 위해 제3SS기갑척탄병연대 16중대(공병중대)가 배속됐다.
16시38분에 4중대의 전차들은 오데뉴(Odeigne)에
집결해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공격의 선봉에 서는 것은 베테랑인 프라우셔 원사가 지휘하는 3소대였다. 3소대의 뒤에는 중대본부가 따랐고 그 뒤에는 2소대, 그리고 최후위에는 경험이 부족한 1소대가 배치됐다.
한편 4중대의 정면에는 미 3기갑사단의 올린 브루스터(Olin F. Brewster) 중령이 지휘하는 TF브루스터가 배치되어
있었다. TF브루스터는 3기갑사단 32전차연대 소속의 3개 전차소대,
36기계화보병연대 I중대 병력 일부, 82공수사단 509강하연대 병력 일부, 그리고
75보병사단 290보병연대 C중대 등 잡다한
부대로 급조된 전투단이었다.
오후 10시, 예정대로 공격이 개시됐다.
만헤이 방면으로 북상하던 4중대는 곧 TF브루스터
소속의 전차들과 격돌했다. 짧지만 격렬한 전투가 전개됐고 프라우셔 원사의 판터가 피격됐다. 미군은 셔먼 전차 두대를 잃고 북쪽으로 후퇴했다. 4중대는 잠시
진격을 멈추고 재정비에 들어갔으며 프라우셔 원사는 지휘를 위해 전차를 바꿔탔다.
그런데 혼란의 와중에
상황 전달을 받지 못한 바르크만 상사는 중대가 잠시 진격을 멈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단독으로 북상했다. 바르크만
상사는 자신이 낙오됐다고 생각한 나머지 아군을 만날 때 까지 계속 북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군이 아니라 만헤이를 방어하고 있던 미 7기갑사단 A전투단 40전차대대 소속의 셔먼 전차였다. 셔먼 전차장 마티어스(Mathias) 하사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바르크만의 판터를 아군의 셔먼 전차로 착각했다. 남쪽에는 아군이 배치되어 있었으니 당연한 것 이었다. 바르크만 상사는
마티어스 하사의 셔먼 전차를 프라우셔의 판터라고 착각해 그 옆에 정지하고 말을 걸었다. 마티어스 하사는
갑자기 독일어가 들리자 당황해서 포탑 안으로 들어가 해치를 잠궈버렸다. 바르크만도 상대의 반응에 당황했다. 옆에 있는 전차를 다시 살펴보니 후미등이 미군의 붉은 색이 아닌가! 판터의
후미등은 녹색이었다. 당황한 바르크만은 인터폰에 소리를 질렀다.
“포수! 옆에 있는 전차는 적 전차다! 쏴라!(Richtschütze! Panzer neben uns ist ein
Feindpanzer! Abchießen!)“
사수인 호르스트 포겐도르프(Horst Poggendorf) SS병장도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다.
“쏠 수가 없습니다! 포탑을 돌릴 수
없어요!(Abschießen geht nicht! Turmschwenkwerk klemmt!)“
두 대의 전차가 너무 가까이 붙어있다 보니 판터의 포신이 걸려서 포탑을 회전 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판터 조종수인 그룬드마이어(Grundmeyer) SS상병이 순발력을 발휘했다. 포탑을 돌릴 수 있도록 판터를 재빨리 후진 시킨 것 이었다. 포겐도르프 병장도
때를 놓치지 않고 셔먼을 격파했다. 놀랍게도 마티어스 하사를 비롯한 셔먼의 승무원들은 살아남았는데 근거리에서
발사된 판터의 포탄이 셔먼의 후부까지 관통해 버리는 바람에 내부에는 피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티어스
하사는 부상을을 입은 포수를 구출해 탈출했다.
이제 바르크만은 자신이 적진 한가운데에 고립됐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는 이 상황에서 그대로 전진하는 것을 택했다. 마티어스 하사의 셔먼을 격파하고 이동하던 바르크만의 앞에
제814대전차대대 B중대 소속의 M10 구축전차
두 대가 나타났다. 이들도 바르크만의 판터를 아군의 셔먼으로 오인해 사격을 가하지 않았다. 포겐도르프는 신속하게 사격을 가해 두 대의 M10을 격파했다. 바르크만은 미군 전차가 계속해서 나타나자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이동하기로 했다. 다시
전진하던 바르크만의 앞에 제40전차대대 C중대 소속의 셔먼 아홉대가
나타났다. 바르크만은 천연덕스럽게 계속 이동했고 미군들은 바르크만의 전차를 아군 전차로 생각해 한 발의 사격도
가하지 않았다. 바르크만은 그곳을 벗어나 만헤이 교차로에 도착했다. 바르크만은
원래 그랑므닐 방면으로 가려고 했으나 셔먼 전차 세대가 그랑므닐 방향에서 오는 것을 보고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그대로 만헤이로 돌입하기로 했다. 만헤이는 철수를 준비하는 미군 차량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미군은 철수 준비로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바르크만의 판터가 만헤이에 돌입했을 때도 한동안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정체를 들키지 않을 수는 없었다. 미군들은 갑자기 만헤이 한 복판에 독일 전차가 나타난 것을 깨닫고
혼란에 빠졌다. 바르크만은 앞에서 다가오던 지프를 그대로 깔아뭉갠 뒤 전속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미군 운전병들도 질주하는 판터를 피해 차량을 모느라 우왕좌왕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미군 전차들이 바르크만의 셔먼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한대의 M5 스튜어트가
판터의 앞을 막았으나 바르크만의 판터는 그대로 스튜어트를 들이받고 전진했다. 그리고 포탑을 6시 방향으로 회전시켜 추격해 오는 미군 전차들을 차례대로 격파하기 시작했다. 바르크만의
판터는 만헤이를 벗어나 마을 외곽의 숲으로 달아났다. 바르크만은 혼란에 빠진 미군이 추격을 멈춘 것을 확인한
뒤 숲 속에 숨기로 했다. 판터의 엔진이 이상을 일으켜 더 이상 이동하는 것이 위험했다.
바르크만이 만헤이에서 좌충우돌 하는 동안 전열을 가다듬은 4중대는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때 미 40전차대대 C중대 소속의 셔먼 한 대가 4중대의 판터들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다. 프라우셔는 즉시 조명탄을 발사한 뒤 이 셔먼을 격파했다. C중대의 나머지 셔먼
전차들도 순식간에 격파됐다. 미군 전차병들은 대부분 전차 밖에 나와 휴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기습이었다. C중대를 전멸시킨 4중대는 만헤이로 돌입했다. 그러나
바르크만이 이미 한바탕 난리를 피운 뒤라 미군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또 다시 프라우셔의 판터가 셔먼의 근거리
사격에 피격됐다. 프라우셔의 뒤를 따르던 판터가 즉시 반격을 가해 셔먼을 격파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프라우셔와 승무원들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프라우셔는
다시 전차를 갈아타고 지휘를 해야 했다.
4중대는 만헤이를 점령한 뒤 다시 방향을 돌려 그랑므닐 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미 628대전차대대 소속의 M10 구축전차들이
포격을 가해 3소대의 베테랑 전차장인 오스카 피셔의 판터가 격파되고 피셔도 전사했다. 피셔의 판터는 도로를 막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공격 기동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랑므닐을
둘러싸고 포격전이 전개되는 와중에 4중대장 폴 대위가 부상을 입고 후송됐다. 폴
대위의 중대장 차량은 크노케 소위의 포수가 인계했다. 중대장 차량은 만헤이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피셔의 판터를 우회하는 와중에 판터 네 대가 미군의 대전차 지뢰를 밟고 기동불능이 됐다. 4중대의 공격이 난관에 부딛혔다. 4중대는 미군의 방어를 물리치고 그랑므닐
서쪽의 에흐제(Erezze)에 도착해 다시 재정비에 들어갔다. 폴 대위가
후송됐기 때문에 4중대에 배속되어 있던 하게샤이머 중위가 지휘권을 인계받았다. 그런데
하게샤이머 중위도 낙오된 미군의 총격에 어깨에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결국 4중대의
간부들은 다시 그랑므닐로 후퇴해 방어태세를 갖추기로 결정했다.
12월 24일 밤의 전투로 7기갑사단 A전투단은 21대의 전차를 잃었고, 40전차대대 A중대장 앨런(Malcolm O.
Allen) 대위가 포로가 되고 D중대장 휴즈(Walter J.
Hughes) 대위가 전사하는 등 420여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한편, 숲속에 숨어있던 바르크만은 상황이 정리된 것으로 보이자 다시
만헤이로 돌아왔다. 만헤이에는 중대장의 판터가 대기하고 있었다. 바르크만은
중대장차의 임시 전차장과 상의를 한 뒤 건물 사이에 전차를 숨기고 방어 태세를 취하기로 했다. 12월 25일 오전, 미군은 만헤이를 탈환하기 위해 7기갑사단
31전차대대 B중대를 투입했다. B중대
소속의 셔먼 다섯대는 만헤이를 향해 전진하다가 바르크만을 비롯한 4중대 본부 판터 두대의 포격으로 전멸했다. 잠시 뒤 올프(Emerson Wolfe) 대위가 지휘하는 본대의 셔먼 10대가 도착했으나
앞서 투입된 선발대가 전멸한 것을 보고는 공격을 머뭇거렸다. 만헤이 탈환을 지휘하기 위해 도착한 7기갑사단 B전투단장 브루스 클라크(Bruce
Clark) 준장은 올프 대위에게 즉시 공격하라고 명령했으나 올프 대위는 판터가 매복하고 있는 상황에서 엄폐물 없는 개활지로 돌격하는
것은 불리하다고 설명했다. 클라크 준장은 올프 대위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해 공격 명령을 취소했다. 한편 그랑므닐 방면을 방어하고 있던 4중대의 주력은 TF맥조지(McGeorge) 소속의 셔먼 전차 17대와 교전해 15대를 격파하는 피해를 입혔다.
미군은 만헤이와
그랑므닐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12월 25일부터 27일까지 8개 포병대대를 동원해 포격을 퍼부었다. 여기에 미육군항공대가 가세해 만헤이-그랑므닐의 독일군은 옴싹달싹
할 수 없었다. 크노케 소위의 411호차가 미군의 포격으로
격파됐다. 4중대는 포격이 뜸해진 25일 밤에 만헤이를 버리고
남쪽으로 철수했다. 바르크만의 대담한 모험으로 독일군은 만헤이를 비교적 쉽게 점령할 수 있었으나 전쟁을
운으로만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바르크만의 모험은 제2차
세계대전의 특이한 일화로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