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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11일 목요일

관대한 스탈린 동지

스탈린 동지의 관대함(???)을 엿볼수 있는 일화 하나입니다.

기묘하게도 스탈린이 중국에 대해 소련으로부터 무기와 장비를 구입할 수 있도록 하는 추가적인 대부에 동의한 뒤 중국이 이것을 환불하는 문제와 환불 방법에 대한 문제는 공식적으로 제기되지 않았다. 그 결과, 상환은 이루어 질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중국은 무기 도입 비용의 상당부분을 지불했으나 어떤 경우에는 스탈린이 그 부담을 덜어주기도 했다.

한 가지 사례를 들면 스탈린은 중국이 인민군 2개 사단(1950년 초 북한군에 합류한 2개의 조선계 사단과는 별도로)에 장비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소련이 전쟁 중 공급했던 64개 사단 분량의 장비 가격 중 20개 사단 분의 가격을 면제해 주었다. 중국은 나머지 무기에 대한 비용은 분할해서 지급했다. 모든 차관은 연간 10억 위안의 비율로 상환되어 1965년 말에는 모두 청산되었다.

중국 공군의 항공기들은 제4차 전역(1951년 1월 25일-4월 21일)에서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으며 그 후 인민해방군은 (총 22개 중) 10개 전투기사단을 교대로 전쟁에 투입했다. 초기에 소련 당국자들은 소련군의 장비에 MiG-15가 대량으로 도입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게는 MiG-9 전투기만을 판매하는데 동의했다. 중국측이 구식인 MiG-9 전투기는 미군의 최신예 항공기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항의하자 소련 당국자들은 중국측이 소련제 무기를 무시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마침내 스탈린에게 까지 알려지자 스탈린은 중국에게 372대의 MiG-15를 판매하도록 지시했다.

Sergei N. Goncharov, John W. Lewis, Xue Litai, Uncertain Partners :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p.201

사실 스탈린 동지를 찬양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냥 땜빵 포스팅입니다.;;;;;

2009년 1월 9일 금요일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관한 연구」(2008) - 김태우

국내의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 성과는 방대한 양이 축적되어 있지만 상당수가 전쟁의 기원과 발발과정, 또는 휴전과정과 그 영향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전쟁 시기에 초점을 맞춘 연구도 대부분은 전쟁기의 학살, 피난민 문제 등 사회사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지요. 본격적인 군사사 연구는 거의 대부분 국방부의 전사편찬위원회에 의해 주도되고 있으며 흥미로운 민간 연구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김태우(金泰佑)의 서울대학교 박사논문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관한 연구」(2008)는 한국전쟁의 군사적 측면을 다룬 보기 드문 연구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합니다.


게다가 재미있습니다!!!


한국전쟁 시기의 미공군 작전에 대한 연구로는 스튜어트(James T. Stewart)의 Airpower: The Decisive Force in Korea, 퍼트렐(Robert F. Futrell)의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Korea 1950-1953, 크레인(Conrad C. Crane)의 American Airpower Strategy in Korea, 1950-1953등이 있습니다. 냉전기에 출간된 스튜어트와 퍼트렐의 연구는 시기적 한계와 미국 공군의 공식적인 견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제약이 있습니다. 반면 냉전 이후 출간된 크레인의 연구는 미공군의 입장을 반영한 기존 연구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면서 냉전기에는 잘 언급되지 않았던 측면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습니다.

참고로 퍼트렐의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Korea 1950-1953미공군군사사연구소(Air Force Historical Studies Office)에서 pdf 형식으로 전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는 이 주제에 대한 가장 최근의 연구답게 90년대 이후 공개된 방대한 미공군 자료들을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공군, 또는 미국인의 입장에서 간과하기 쉬운 북한과 공산군측의 입장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는 점도 장점입니다. 시기적으론 1950년부터 1951년에 대부분의 내용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 후반의 작전에 대한 서술이 부족한 편이지만 그에 대해서는 기존의 연구들이 잘 다루고 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저자는 한국전쟁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이 지나치게 전쟁의 정치적, 사회적 측면에 집중된 나머지 전쟁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논문은 한국전쟁기 수행된 미군의 항공작전을 군사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논문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미공군의 폭격정책이 형성된 과정과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미공군의 지휘운용체제를 다루고 있으며 두 번째로는 전쟁 초기 북한지역에 감행된 미공군의 ‘전략폭격’작전을, 세 번째로는 전쟁 초기 남한 지역의 전술항공작전, 네 번째로는 중국군 참전 이후 공군에 의한 초토화 작전과 전선 고착 이후 항공압력전략으로 선회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미공군의 폭격정책이 형성되는 과정을 고찰한 1장은 1차대전과 2차대전 시기 미공군을 비롯한 열강들의 폭격 교리가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논문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하고자 하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주로 2차자료를 활용하고 있고 또 영어권 자료에 집중되어 지금 시각에서는 약간 잘못된 부분이 보입니다.(독일 공군의 폭격 정책에 대한 설명이 대표적입니다) 그렇지만 본문의 이해를 위한 도입부로서 매우 잘 서술되었다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제독의 반란’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다뤄줬으면 좋았겠지만 곁가지를 너무 많이 치면 논문이 산으로 갈 수 밖에 없지요.
2장에서는 전쟁 초기 미공군이 수행한 북한 지역에 대한 전략폭격을 다루고 있습니다. 역시 한국에서 나온 연구 답게 미국인들이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 북한의 대응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 좋습니다. 전쟁 초기에 북한 공군이 섬멸 되었기 때문에 북한의 대응은 방공호 건설과 피해 복구 등 철저히 수동적인 것에 제한 되었지만 이러한 수동적인 대응도 나름대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3장에서는 전쟁 초기 남한 지역에서의 전술지원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는 미군에 의한 민간인 폭격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입니다. 저자는 전쟁 초기 미공군이 효과적인 지상지원을 할 수 없었던 이유로 제5공군이 미국의 방어적 전략에 의해 일본의 방공에 중점을 두고 개편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지상군에 대한 전술지원 체계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인민군의 진격에 의해 전선의 상황이 유동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에 효과적인 지상지원이 어려웠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미공군의 압도적인 전력에 눌린 북한군이 점점 은폐에서 신경 쓰고 야간 작전으로 전환한 것도 미공군의 지상지원능력의 효과를 떨어트린 요소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요소들이 결합되어 남한 지역에서 많은 민간인 희생을 일으켰다고 봅니다.
2장과 3장이 1950년 6월부터 겨울까지의 짧은 기간을 다룬 반면 4장에서는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 이후부터 전쟁 종결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중국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후퇴하는 미군이 초토화 작전의 일환으로 공군력을 동원한 것과 전선 교착 이후 미공군이 항공압력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분량에 비해서 다루는 시기가 방대하기 때문에 서술의 밀도가 떨어지는 감이 있습니다. 특히 2장과 3장에서는 노획문서 등 북한 문헌의 활용을 통해 북한측의 대응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데 비해 4장에서는 북한의 공식 문건이나 소련을 통해 공개된 문건 등으로 자료가 제한되고 있습니다. 1951년 이후로는 노획문건이 급감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미국의 폭격으로 인한 북한 사회의 변동에 대한 평가입니다. 저자는 미국의 폭격으로 북한 경제의 기반이 송두리째 붕괴되었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전후 국가 주도의 농업집단화가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 비해 신속하고 원활하게 수행되었다고 평가합니다.

이 논문은 기존에 국내의 한국전쟁 연구가 거의 방치한 군사적 측면을 심도 깊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높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저자는 군사사상은 물론 미공군의 장비, 전술 등의 측면에 대해서도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충실한 서술은 군사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미군의 ‘폭격’에 초점을 맞춘 만큼 1951년 이후의 항공작전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 제공전투에 대한 서술이 거의 없다는 점은 섭섭하지만 그 점까지 다뤘다간 분량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났을 것 입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공개된 문헌을 통해 북한측 시각을 최대한 공정하게 반영하려 했다는 점은 미국측 연구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미덕입니다. 아무래도 언어의 한계 때문에 미국의 한국전쟁 연구는 반쪽 짜리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데 이렇게 한국인의 시각에서 군사적 측면을 다룬 연구가 나왔다는 점은 매우 반가운 일 입니다.

당장 단행본으로 나와줬으면 하는 재미있는 논문입니다.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에게 적극 추천합니다.

2008년 8월 19일 화요일

이박사의 허풍실력

이승만은 매우 머리가 잘 돌아가는 정치인 인데다 꽤 괴상한 감각을 가진 도박꾼이었습니다. 보통 선수들끼리 한판 벌인다면 상대방이 뻔히 알고 있는 문제를 건드려서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 짓은 하지 않을 텐데 이박사는 그런 상식을 과감히 무너뜨리는 면이 있었습니다. 다음의 일화는 그런 점을 잘 보여줍니다.


이박사 : 반대로, 우리 한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남한의 국민들 뿐 만 아니라 북한의 동포들의 생명도 책임지고 있소. 최근 25만에서 30만 사이의 잘 무장된 공산군이 공격 준비를 마쳤다는 정보를 입수했소. 공산군은 해주에서 서울을 포격할 수 있는 4문의 아주 큰 대포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오.

로버츠 준장 : (해주에서 서울까지는) 44마일이나 됩니다! 저는 그런 대포가 있다는 이야길 처음 듣습니다.

President : On the other hand, from the Korean point of view, we are responsible for the lives of the Korean people in the south as well as in the North. We are informed that some red army from 250,000 to 300,000 well equipped, are ready to attack. They have four big gun that when they are fire them from Haiju the shells will land in Seoul.

Gen Roberts : That is 44 miles! I have not heard of this.

「Conference at Capitol, August 12, 1949」, 『RG 338, Provisional Military Advisory Group, 1949~53 Box 12』

이승만은 1950년 이전 군사원조를 요청할 때는 제정신과 광기를 오락가락 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이 경우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물론 북한에 대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보고 받는 로버츠가 이승만의 저런 허풍에 속아넘어갈 리는 당연히 없었습니다. 게다가 70km나 날아가는 장거리포(!)가 있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황당한 것이지요. 하지만 이승만의 이런 황당한 허풍은 종종 상대방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물론 이승만을 혐오하게 되는 역효과도 동반하긴 했습니다만.

가끔 이박사의 이런 황당한 측면을 패러디 해서 한국판 뮨하우젠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종종 듭니다.

2007년 12월 17일 월요일

전쟁은 운빨이다! - 수도사단 기갑연대 1대대의 원산비행장 전투(?)

수도사단 기갑연대가 원산에 입성했을 때 제 1대대장이었던 정세진(丁世鎭) 선생의 회고입니다. 이 황당한 이야기는 잘 아시는 분들도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제 1대대는 비행장을 경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때 대대 보급관이 시내에서 막걸리를 찾아내어 휘발유 드럼통에서 휘발유를 쏟아버리고 9드럼의 술을 가져왔다.
나는 각 중대에 2드럼씩 나누어 주게 하여 오랜만에 쇠고기를 곁들여 소대별로 회식하도록 하였다. 북한의 10월은 저녁이 되자 날씨가 추워지는데다 행군과 전투에 지친 대대 장병들이 술에 곤드레 취했을 때 였다.

‘적이 역습하고 있으니 대대도 철수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러나 술에 너무 취해있어 부대행동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이때 다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으나 이 실정을 그대로 보고할 수 없었다.
‘여기를 사수하겠습니다’고 白연대장에게 보고하고 말았다. 백연대장은 ‘1개 대대가 빠지지 못하고 적중에 고립되면 곤란하니 즉각 철수하라’고 재차 엄명하여 내가 송요찬 사단장에게 ‘사수하겠습니다’고 보고했더니 ‘빨리 철수하라. 사단이 모두 나왔는데 너희 대대만 안나오면 안돼’하여 ‘사수할 자신 있습니다. 적이 근접해와 전화를 끊겠습니다’고 한 후 아예 모든 유무선을 끊어버렸다.
그런 후 나는 각 중대장에게 ‘종교인이나 술 먹지 않은 사병을 뽑아 경계병으로 배치하되 적이 근접하여도 절대로 사격하지 말라. 적이 사격해와도 응전하지 말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내가 비행장 2층 건물에서 보았더니 몇 대의 적 전차가 굉음을 울리면서 비행장으로 들어오더니 연속적으로 사격을 가한다. 그러나 대대에서는 누구도 응사를 하지 않아 얼마 후 쥐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아군이 없는 것으로 판단했는지 적이 그대로 돌아서 비행장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긴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아침에 사단이 재 공격해 올 때 나는 대대를 철도 옆에 배치하여 측방에서 엄호사격하여 사단공격에 기여했다. 비행장에는 적 전차 3대가 들어왔던 흔적이 있었다. 곧 송요찬 사단장은 비행장에 들어오자마자 나의 손을 잡으며 ‘너는 용감했다. 전 사단이 빠지는데 너만 남아서 사수하겠다고 하더니 정말 사수해 주었구나. 대대장병들에게 나의 뜻을 전해 달라’고 하면서 몇 번이고 악수하고 돌아갔다. 나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렇다고 ‘실상은 대대원들이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라는 말은 송장군께서 돌아갈 때 까지 못 했다.

漢南戰友會, 『번개부대의 6•25혈전기 : 육군독립 기갑연대사』(漢南戰友會,1997), 302~303쪽

독소전쟁 당시 독일측의 기록을 보면 도시나 마을을 점령한 소련군들이 술만 발견하면 일단 먹고 뻗어버리는 통에 역습을 들어가면 어이없게 승리했다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해도 그려려니 하는데… 문제는 북한군이 공격을 해 오고도 그냥 지나가서 무사했다는 것 입니다.

과연 전쟁에는 운이 따라야 하는 모양입니다.

2007년 1월 4일 목요일

4일자 중앙일보 기사

오늘자 중앙일보에 아주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났습니다.

북한 파워 그룹 대해부 <상> 권력 지도가 바뀌었다


권력서열에서 인민군의 약진이 두드러 지고 있다는 내용이군요. 인민군 고위 간부들은 노동당원을 겸하고 있으니 당내 서열도 당연히 높아졌겠지요. 아주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50-60년대에 군대에 대한 당의 장악력을 철저히 하기 위해서 군 간부들을 두들겼던 것과 비교하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선군정치 타령을 줄기차게 해 대더니만 결국 이런 결과가 나오는군요.

스탈린 동무의 경우 군대의 목소리가 커질 것 같으면 적절한 선에서 손을 봐 주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쓸데없이 목소리를 높였던 투하체프스키가 골로 간 것이나 허파에 바람이 들어가 건방을 떨던 주코프가 좌천된 것이 대표적이죠.

그러나 북한은 90년대 중반 지방당 조직이 붕괴된 이후 군대에 대한 의존이 커지고 있어 군대의 목소리가 계속 커지더라도 이들을 손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추세가 더 강화될 것 같은 찝찝한 느낌이 드는군요.

두 번째로 재미있는 것은 유학파가 줄어들고 김일성 대학 출신이 우세를 보이는 가운데 만경대 학원 출신이 조금 늘었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보면 국내파로 권력 핵심부를 채우고 있는 것 같은데 이들은 별로 개혁 개방에 관심이 없을 것 같아 보이는군요.

2007년에는 대선도 있는데 과연 저 양반들이 어떤 대남정책을 펼칠지 별로 즐겁지 않은 호기심이 당깁니다.

2006년 10월 18일 수요일

북조선 인민들은 없는 배도 만들어 격침시킨다!

박군님 블로그를 보니 아주 재미있는 글이 하나 실려 있다. 출처가 된 책의 정확한 서지 사항이 어떻게 되는 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웃기다 못해 짜증이 난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어찌하다 북조선의 군사 백과사전에서 읽은 ‘미제의 중순양함 발찌모르’ 이야기가 생각난다.

원문이 있는 사이트들은 ‘유해 사이트’로 접속이 차단돼 있으니 인터넷 정신병동 자주민보에 실린 글로 대체한다.

(전략)
사실 그보다 4년 전에 조선인민군의 어뢰정은 그보다 더 큰 전과를 거둔 바 있었다. 1950년 7월 2일 4시경, 4척의 어뢰정으로 편성된 제2어뢰정대는 4시간 항행 끝에 주문진 앞바다에서 미군 함선집단을 발견했다. 포화를 무릅쓰고 1000미터 거리까지 접근해 21, 22, 23호 어뢰정이 연속 발사한 3발의 어뢰는 전부 중순양함 “발티모르”호를 명중. 뒤이어 600미터 거리까지 접근해 발사한 어뢰로 경순양함을 명중. 연속 강타를 받은 “발티모르”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침몰되었다.

당시 정대장 김군옥은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은 첫 해군으로 되었고 뒷날 군사교육을 거쳐 기지장이 되었다. 그는 <인민들 속에서 60>(조선노동당 출판사, 2000년 9월 출판)에 “세계해전사에 빛나는 기적은 이렇게 마련되였다”는 제목의 글을 발표해 싸움 뒤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김일성 주석은 당시 미 함선집단은 “우리 해군함대가 저들과 상대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방심하고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적 함선들이 부두나 연해에 정박해 있을 때 불의에 타격하면 능히 적함선집단을 소멸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한다. 김군옥은 그 말에 따라 과감하게 행동해 성공했다는데, 사실 어뢰정으로 공격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노릇이었다. 어느 서방군사평론가가 “황소와 땅벌(북에서는 ‘따벌’이라 표기)의 싸움”이라고 평했다는데 아주 근사한 비유이다.


참고로, 북한쪽에서 운영하는 사이트는 막는데 이런 정신나간 헛소리가 실리는 사이트는 내버려 두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렇다면 한국전쟁에서 ‘발찌모르’ 또는‘볼티모어급’순양함이 격침된 사례가 있을까?

볼티모어급 중순양함은 다음과 같다.

Baltimore (CA-68) : 1956년 퇴역
Boston (CA-69) : 1970년 퇴역
Canberra (CA-70) : 1970년 퇴역
Quincy (CA-71) : 1946년 퇴역, 재취역후 한국전쟁 참가, 1954년 퇴역
Pittsburgh (CA-72) : 1947년 퇴역, 1951년 재취역, 1956년 퇴역
St. Paul (CA-73) : 한국전쟁 참가, 1971년 퇴역
Columbus (CA-74) : 1975년 퇴역
Helena (CA-75) : 한국전쟁 참가, 1963년 퇴역
Oregon City (CA-122) = 오레곤 급 : 1947년 퇴역
Albany (CA-123) = 오레곤 급 : 1967년 퇴역
Rochester (CA-124) = 오레곤 급 : 한국전쟁 참가, 1961년 퇴역
Bremerton (CA-130) : 한국전쟁 참가, 1960년 퇴역
Fall River (CA-131) : 1947년 퇴역
Macon (CA-132) : 1950년 퇴역, 1950년 재취역, 1961년 퇴역
Toledo (CA-133) : 한국전쟁 참가, 1960년 퇴역
Los Angeles (CA-135) : 한국전쟁 참가, 1963년 퇴역
Chicago (CA-136) : 1947년 퇴역, 1964년 재취역, 1980년 퇴역

그런데 북한의 어뢰정에 격침된 볼티모어급은 단 한척도 없다. 볼티모어급 중순양함 중에서 북한군의 공격으로 다소나마 피해를 입은 것은 CA-135 로스앤젤레스 정도인데 이 녀석에 피해를 입힌 것은 해안포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네임쉽인 이른바 ‘발찌모르’는 한국전쟁 기간 동안 아예 지중해 함대에 배속돼 있었다고 한다. 즉 북조선 인민들은 지중해에 있는 배도 동해바다로 워프시켜서 격침시킬 정도의 능력을 갖춘 것이다.

어떨 때는 이런식으로 망상을 만들어 나가는 북조선 동포들을 보면 정말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과연 통일이 된다고 치면 북한인들은 그동안 살고 있던 곳이 참 조악한 매트릭스에 불과하다는걸 깨달을 텐데 현실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까?

2006년 9월 21일 목요일

1958년 북한 군대의 숙청에 대한 개인적인 의문 하나

개인적으로 북한군의 1958년 대규모 숙청은 상당히 흥미있는 사건이다. 내가 가장 관심을 가지는 문제는 (물론 정확히 파악하는게 불가능 하겠지만) 이 숙청으로 군을 완전히 장악한 만주파 지휘관들의 능력이다.

이야기를 잠깐 돌려 소련의 경우를 보면 1937년-38년의 육군에 대한 숙청은 흐루쇼프 시기에 스탈린 격하와 함께 선전한 것 처럼 군의 유능한 간부단을 완전히 쓸어 버린 것은 아니었다. 스탈린 반대파의 주장대로 정말 유능한 간부들이 숙청으로 전멸했다면 주코프와 샤포쉬니코프는 하늘에서 떨어진 인간이 틀림없고 그외에 전쟁 초-중기에 군의 중추를 담당한 사단장 이상급의 장교들은 무었이겠는가? 1990년대 중반 이후 숙청이 소련군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영미권 소련학계에서 많은 재평가가 이뤄진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우리의 북조선은?

북조선의 군대 숙청은 전쟁이 끝나고 5년이나 지나 이뤄졌다는게 가장 큰 문제다. 소련은 숙청 직후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장교단의 자질을 검증할 기회가 있었지만 북한의 경우 군대 숙청을 통해 한국전쟁에서 자질을 검증 받은 연안계와 소련계가 사실상 전멸했다. 물론 만주파의 군사적 자질을 폄하할 수는 없기 때문에 궁금함이 더 하다.

일단 연안계의 경우 민족보위부상 김웅, 총참모장 리권무, 부참모장 최인, 총정치국부국장 김을규, 공군사령관 왕련, 해군참모장 김칠성 등 1958년까지 남아있던 고위간부단이 완전히 전멸당하고 소련계는 소련으로 망명, 또는 귀국해 버렸다.

결국 그 자리를 메운 것은 만주계였는데 과연 이들의 지휘능력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가 궁금한 점이다.(물론 소련측은 매우 낮게 평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려면 이들 만주계가 한국 전쟁 기간 중 어느 정도의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신뢰할 수 있을 만한 자료가 있어야 될텐데 현재 내 수준에서 그런 자료를 입수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다고 북한쪽의 선전용 찌라시들을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북한쪽 일차 사료들이 공개된다면야 좋겠지만 그게 빠른 시일 내에 가능할 것 같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