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여운형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여운형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09년 12월 18일 금요일

러시아식 저녁식사에 대한 여운형의 추억

1921년, 코민테른은 워싱턴회의에 맞불을 놓는 차원에서 '극동피압박민족대회'를 개최합니다. 이 대회는 서유럽과 미국 등 서방열강의 전후처리에 실망한 식민지 지식인들의 호응을 얻었고 조선에서도 많은 대표자를 파견합니다. 여기에는 여운형, 김규식, 이동휘, 홍범도 등 이름만 대도 알 수 있는 민족운동의 거두들이 대거 참여하게 됩니다. 여운형은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모스크바로 가게 되는데 내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상태라 고생이 꽤 심했던 모양입니다. 여운형은 모스크바를 향해 출발하기 전날의 저녁식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일부러 역부(驛夫)대신 우리를 차깐으로 안내한 러시아동무가 준비해 가지고 온 초에 불을 켜니 얼룽거리는 누런 광선의 히미한 조명이 그려내는 차실(車室) 한복판의 광경은 자못 황량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의자의 '쿳숀'은 다 떨어저서 밑바닥의 나무가 보기 싫게 노출되어 있고 천정에는 거미줄까지 보였다. 마루판에는 물론 두꺼운 먼지가 우리의 발자국을 번듯하게 색여주었다.

일행이 먼지를 툭툭털며 한복판에 모여앉어 자리를 잡고나니 곧 저녁식사가 시작되었다. 우리보다 훨신 뒤떨어져서 들어온 다른 러시아동무가 검은 나무토막을 하나 가슴에 안는 듯이하고 들어오더니 가지고 온 도끼로 패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스토-브'에 땔나무인 줄만 알았더니 그것은 의외에도 검정'빵' 이었다. 밀가루 뿐만 아니라 집푸래기 가루까지도 다분히 섞인 이 검정'빵'을 원악 오래 묵힌데다가 추위에 꽝꽝 얼어서 나무패듯이 도끼로 찍기전에는 도저히 쪼개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검정빵 밖에 연어알과 무엇인지 이름 모를 소름에 저린 생선이 우리에게 급여된 저녁음식의 전부였다. 물론 차도 붙었으나 때무든 양철찻잔과 집이나 삶은 물 같은 누르틉틉한 차물빛은 그다지 식욕을 끄는 것은 되지 못하였다. 양고기 밖에는 먹지를 않는 몽고 동무들은 물론 조선 동무들도 모도 이 심히 살풍경한 반찬에는 감히 손도 대려고 하지 않었다. 그러나 나는 연어알을 조금하고 검정빵을 찻물에 충분히 축인것을 조금 먹어 보았다. 내가 먹는 바람에 다른 동무들도 차물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각사탕도 오직 한개 씩 밖에는 차레에 오지 않었다.

그럭저럭 저녁밥의 흉내를 내고나니 이 뜻밖에 황량한 저녁식사는 우리들 일동의 활발한 이야기 꺼리가 되었다. 내일도 모레도 여행하는 동안에 때마다의 식사가 늘 이러면 어떨까하는 불안이 누구의 말틈에도 새여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물론 당시의 러시아를 전국적으로 휩쓸고 지나간 저 대기근의 뒤를 이은 극도의 식량결핍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또 그 조악한 식량에 의하여서도 능히 역사가 그들의 어깨우에 얹어주는 모든 짐을 하나로 거절하지 않고 씩씩하게 지어나가는 이 땅의 새로운 민중정신의 감화력이 우리의 이따위 불안같은 것은 오직 웃음거리에 지나지 못한 것임을 잘 알게 하여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呂運亨,「모스크바 印象」, 夢陽呂運亨先生全集發刊委員會, 『夢陽 呂運亨 全集 1』, 한울, 1991, 64~65쪽에서 재인용.

독립운동을 위해 모스크바로 떠나는 심각한 상황에 대한 묘사이건만 빵을 도끼로 쪼개는 부분에서는 살짝 웃음이 나오는걸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일단 독립운동을 하려면 식성부터 좋아야 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식성이 까탈스러우니 저당시 살았다면 독립운동은 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2008년 1월 9일 수요일

채병덕과 여운형에 관한 일화

아래 글에 Cato님이 다신 댓글을 읽고 나니 갑자기 생각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채병덕이 공산주의자는 아니더라도 해방 전후에는 좌익과 약간의 관계는 있었음을 시사해주는 내용입니다. 만주군 출신으로 해방 이후에는 국군준비대 부사령이었고 해방 전에는 건국동맹에서 군사문제를 담당했던 박승환의 부인 김순자(金順子)의 증언에 따르면 해방 전에 여운형과 채병덕 간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몽양의 얘기로는 채병덕을 만나서 담판을 했다고 해요. 자기가 유사시에 요구할 때는 무기를 공급해 주기로까지 했다는 얘기를 몽양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몽양 얘기는 채병덕 뿐만 아니라 그 공장에 중요한 간부들 중에 건국동맹의 중요맹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유사시에는 무기를 탈취해 공급하기로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후에 개성신문사 부사장을 지낸 인물을 만났습니다. 편집이 아닌 공무계통 기술자로 가주 유능한 선반기술자였지요. 이 사람 얘기로는 자기가 주안 조병창의 선반직장 이었는데 건국동맹 맹원이었다는 겁니다. 이래서 자기가 몽양도 몇 번 만나고 몽양이 요구할 때 무장, 수류탄, 보총 심지어 경기관총까지도 공급할 수 있도록 다 짜놓고 있었다고 장황하게 설명했습니다. 이때 몽양이 조병창 공장 간부 중에 건국동맹 맹원이 있었다는 얘기가 바로 이 사람을 두고 한 말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몽양은 주안 조병창에서 채병덕 하고만 관계를 가진 것이 아니라 직장장으로 있던 조선인도 포섭해 무장봉기 준비에 골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한울, 1995, 103~104쪽

이런 일도 있었으니 채병덕에 대한 의심이 생겨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채병덕도 상당히 흥미로운 인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