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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24일 토요일

미군과 독일군 장비의 비교 평가에 관한 미 제2기갑사단장의 보고서 - 6




한동안 잊고 있었던(;;;;;;) 주제로군요. 지난편이 올라간게 2014년 이라니(;;;;;) 오늘은 중위~소위급 장교들의 증언을 소개합니다. 이 보고서에 실려있는 초급 장교들의 증언은 미군과 독일군 기갑장비의 성능격차를 이야기하는 서적에서 자주 인용되었기 때문에 접해보신 분이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 밖의 다른 무기에 대한 평가도 흥미롭습니다. 초급지휘관들 부터는 미군 전차의 절대적인 열세를 증언하고 있어서 내용이 대동소이 합니다. 그래도 이왕 번역을 시작했으니 이 보고서를 전부 번역한 뒤 제3기갑사단장이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보고서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제2기갑사단장의 보고서는 부사관과 사병들의 증언을 담은 부분만 번역하면 마무리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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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알로니어John J. Allonier 소위

본인은 M4 중형전차로 5호전차와 교전한 바 있다. 5호전차는 아군의 M4 보다 우수하다. 독일 전차의 강철 궤도는 우리가 사용하는 강철궤도 보다 내구성이 낮지만 접지압을 훨씬 좋게 해준다. 5호전차는 두꺼운 장갑을 가지고 있지만 기동성도 우수하다. 5호전차의 주포는 관통력이 높아서 아군의 75mm포 보다 훨씬 우수하다. 차체 기관총 사수용 관측창 또한 5호전차의 중요한 특징이다.

Issac D. White(Major General, Commanding General 2nd Armored Division), United States vs. German Equipment, (Merriam Press, 2011),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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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윈 릭Edwin H. Reeg 중위, 소대장

판처파우스트를 사격해 본 경험이 있는데 미제 무기 중에서는 이것과 비교할 만한 것이 없다. 100미터 거리에서 명중을 시킬 수 있었다. 판처파우스트는 매우 정확도가 높고 사격하는 것도 쉬우며 5호전차와 야크트판터의 정면 장갑에 대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명중만 하면 관통을 시킬 수 있었다. 개활지에서는 좋은 폭발 효과를 보여주었으나 지면이 질퍽한 곳에서는 45발 중 한발 꼴로 불발이 일어났다. 판처파우스트는 우리가 사용하는 바주카와 비교했을 때 파괴력이 강하지만 유효 사거리는 약간 짧고, 따로 정비할 필요가 없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 무기는 발사하는 것이 쉽고 발사하고 나서 발사관을 버리면 된다. 아군도 판처파우스트와 유사한 무기를 지급받는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일제 바주카포의 발사관은 아군의 것과 비교했을 때 특별히 나은 점이 없다. 하지만 탄약은 훨씬 위력이 좋다. 미제 바주카포로는 관통하지 못하는 장갑도 독일제 바주카포로는 뚫을 수 있었다. 또한 훨씬 먼 거리에서도 관통을 보장할 수 있다.

ibid.,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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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롤드 실즈Harold A. Shields 중위, 제66전차연대 A중대

1945년 3월 2일 제66전차연대 2대대는 라인강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대대 목표인 독일의 피흘렌Fichlen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아군 중형전차 세대가(4호전차 차체에 장포신 75mm포를 탑재한) 적의 자주포 한대에 격파되었다. 내가 지휘하는 M24 경전차 소대는 800야드 거리에서 이 자주포에 사격을 가했다. 우리 소대는 총 25발을 발사했으며 대부분이 철갑탄이었다. 적 자주포의 경사진 정면장갑은 모든 철갑탄을 튕겨냈다. 제66전차연대 I중대의 76mm포를 탑재한 중형전차 몇대가 이 자주포에 사격을 가했지만 이들이 쏜 포탄 역시 튕겨나갔다. I중대가 적 자주포에 사격을 가한 거리는 600야드 정도였다. 적 자주포는 양 옆으로 건물을 끼고 있어서 측면을 공격할 수가 없었고 오직 정면에서만 사격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다음날인 3월 3일에 이 자주포를 직접 살펴보았다. 철갑탄은 단 한발도 정면을 관통하지 못했다. 아군의 포탄은 정면장갑에 약간의 흠집만 내고 튕겨나갔다. 그리고 이 자주포가 격파한 세대의 아군 전차도 살펴보았다. 세대 모두 독일군 자주포가 쏜 한발의 포탄에 관통이 되었으며 이 중 한대는 포탑 측면에 맞은 포탄이 반대편까지 뚫고 나갔다.

1944년 11월 17일 제66전차연대 2대대는 독일의 에데렌Ederen을 확보하는 임무를 위해 푸펜도르프Puffendorf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에데렌으로 진격하던 중 아군의 M5A1과 M4의 접지압을 독일군의 5호전차와 비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에데렌에 진입할 때 내가 탄 전차는 5호전차가 지나간 자국 바로 옆으로 지나갔다. 나는 두 전차의 야지 기동능력을 비교해 보고 싶어졌다. 나는 전차에서 내려 판터 전차의 궤도 자국을 내 전차의 것과 비교해 봤다. 5호전차의 궤도자국은 지면에서 2인치 정도 파여 있었는데 내가 탄 M5A1 전차의 궤도 자국은 3.5인치에서 4인치 정도 파여 있었다. 그리고 M4 중형전차의 궤도 자국은 5인치에서 6인치 정도 파여 있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독일 5호전차의 무게는 45톤으로 내가 탔던 15톤 급의 M5A1 전차 보다 세배나 무거웠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M4 중형전차는 30톤 이다.

ibid., pp.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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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맥퀼렌Robert V. McQuillen 소위, 제66전차연대 A중대

나는 1944년 8월 18일쯤에 엘뵈프Elbeouf 근교에서 1개 소대의 M5A1 전차를 지휘하여 (75mm포와 76mm포를 탑재한 M4 중형전차를 장비한) 제66전차연대 G중대의 측면을 엄호하고 있었다. 우리는 적의 6호전차 세대로 부터 사격을 받았고 아군의 중형전차 세대가 격파됐다. 이 중 두대는 전소되었다. 독일 전차를 발견하자 마자 아군 중형전차들은 대응사격을 실시해 두대를 퇴각시켰다. 적의 세번째 전차는 궤도가 벗겨져 승무원들이 버리고 달아났다. 아군의 M4 중형전차들은 이 버려진 전차에 약 400야드 거리에서 76mm포를 발사했다. 세발의 포탄이 튕겨나갔다. 나중에 살펴보니 76mm 포탄은 겨우 2인치 정도를 뚫어 정면장갑에 살짝 흠집만 낸 수준이었다.

ibid.,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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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크레이크래프트David O. Craycraft 중위, 제66전차연대 3대대

5호전차의 조준경은 M4전차의 조준경 보다 우수하다. 독일제 조준경은 훨씬 또렷하고, 배율 조절이 가능하며, 배율이 높다. 게다가 거리 측정 기능도 있다. 하지만 밀폐된 상태에서는 미국제 전차의 시야가 훨씬 우수하다. M4 전차의 포탑 선회 속도는 5호 전차 보다 두 배 이상 빨라서 아군 전차는 표적에 대해 훨씬 빨리 대응할 수 있다. 5호전차는 넓은 궤도와 현가장치의 특성 때문에 셔먼 보다 우수한 접지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신형 현가장치를 가진 M4A3E8의 등장으로 아군 전차의 접지력도 크게 향상됐다. 5호전차는 마력이 높은 엔진을 장착해 강력하다. 5호전차의 무게는 기동력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M4의 기동성이 5호전차보다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5호전차의 내부 탄약배치는 M4보다 나을게 없다.

M24전차는 M5 보다 훨씬 뛰어나다. 하지만 장갑이 약한건 마찬가지이다. 이 전차를 자주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이상의 평가를 할 수는 없다.

미제 반궤도 장갑차는 독일군의 것 보다 훨씬 우수하다. 하지만 독일제 장갑차는 더 날카롭게 선회할 수 있다. 양측의 반궤도장갑차는 장갑이 너무 얇아 탑승한 보병을 그렇게 잘 보호하지 못한다. 미제 반궤도 장갑차는 독일 장갑차 보다 탑승과 하차가 훨씬 쉽다. 전차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미제 2½톤 트럭은 독일제 트럭보다 훨씬 우수하다. 특히 캡 오버(Cap-over-engine) 형식의 트럭은 미제가 훨씬 많은 적재 공간을 가지고 있다.

미제 지프는 거의 완벽에 가깝다.

88mm포는 ‘최강의 포’로 통한다. 미제 90mm포 보다 관통력과 정확도가 높다. 미제 90mm포는 포구초속이 너무 낮다. 독일의 75mm포가 미제 76mm포 보다 우수한 이유도 동일하다.

미제 30구경 기관총은 우리가 가진 장비 중에서도 최고로 꼽을 만하다. 발사속도도 적절하다. 매우 잘 만들어졌으며 혹독한 환경에서도 신뢰할 수 있다. 아군의 50구경 기관총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우수하다. 대공용으로 탁월하다. 하지만 차량에 탑재하는 방식은 지상 공격에 부적절하다. 50구경 기관총은 경계 진지에서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독일제 기관단총은 아군의 소화기보다 훨씬 우수하다. 발사속도도 빠르고 정확도도 높다.

아군의 카빈은 탄걸림이 잦아 인기가 없다. 게다가 탄의 위력과 살상력까지 낮다. 톰슨 기관단총은 근접 전투에서 많은 장병들이 선호하는 무기이다. 발사속도도 양호하고 공격해오는 적 보병에 대해 높은 저지력을 가지고 있다.

독일군의 바주카포는 구경이 크고 관통력도 높다. 조준장치도 아군의 바주카포 보다 뛰어나다. 미제 바주카포 포탄은 불발율도 높다.

아군의 피복류는 현재 독일군이 착용하는 모든 피복류에 비해 우수하다. 과거 독일군의 엘리트 부대는 훌륭한 피복류를 지급받았지만 현재는 피복류의 질이 급락했다. 혹한기 작전에 유용한 피복류는 다음과 같다. 1) 구형 야전상의와 바지; 2) 덧신 형식의 방한화(Shoe pacs); 3) 모직 안감으로 만들어진 벙어리장갑; 4) 모직 모자와 신형 후드 등. 코트의 방한 성능은 좋지만 너무 거추장 스럽다. 그리고 기갑 병과에서 널리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하다.

독일제 쌍안경은 아군의 것 보다 특별히 우수하지 않다.

ibid., pp.7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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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브루스Thomas K. Bruce 소위, 중형전차소대 소대장

본인은 프랑스 전역에 오래 참전하지는 않았으나 적군과 아군의 장비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왔다.

개인적으로 독일 전차는 모두 아군의 M4 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적 전차의 장갑은 아군 전차의 장갑 보다 훨씬 더 철갑탄을 잘 막아낸다. 아군 전차의 장갑이 독일 전차의 장갑 보다 나은 점 한가지는 고폭탄에 대한 방어력이 훨씬 높다는 점이다. 아군 전차의 장갑은 고폭탄을 맞을 경우 맞은 부위가 파이는 정도이지만 독일 전차의 장갑은 금이 가거나 깨져버리는 경향이 있다. 한번은 내가 지휘한 전차가 100야드 거리에서 지연신관을 장착한 75mm 고폭탄으로 4호전차의 포탑 전면 장갑을 완전히 관통한 일이 있다.

이 밖에 다른 대전차무기를 비교하면, 아군의 것은 독일제 보다 열등하다. 특히 바주카포는 독일제가 훨씬 우수하다. 본인은 직접 독일제 바주카포를 시험해 봤는데, M4 전차에 시험사격을 했을때 모든 부위를 관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밖에 대부분의 장비는 독일제가 미제에 비해 열등하다. 특히 독일군의 차량과 피복류는 아군의 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ibid.,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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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터 몽고메리Coulter M. Montgomery 중위, 제66전차연대

아군 전차의 조준경 조준선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배율이 충분치 않다. 신형 조준경은 구형에 비해 많이 개선됐지만 여전히 배율이 부족하다. 독일제 조준경은 렌즈의 품질이 우수한 듯 하다. 아군 전차의 페리스코프를 10배율이나 12배율로 만들수는 없는가? 페리스코프의 시야를 희생할 필요는 없지만 배율이 너무 낮다. 포수가 페리스코프를 사용하는게 너무 불편하다. 전차의 궤도도 넓어져야 한다. 신형 E8 현가장치는 기존의 현가장치 보다 훨씬 접지력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독일 전차의 접지력에는 미치지 못한다. 전차의 내부 구조에 대해서는 별 불만이 없다. 전차의 내부 구조는 아군 전차가 독일 전차 보다 훨씬 우수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76mm포를 탑재한 전차가 그렇다. 76mm포를 탑재한 전차는 75mm를 탑재한 전차 보다 훨씬 편하다. 전차병들의 고충을 아는 사람이 설계했다고 생각된다.

우리 부대에서는 T26 전차를 본 사람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 전차가 올바른 방향으로 진보를 이룩했다고 생각한다. 신형 전차는 독일 전차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주포와 방어력을 갖췄다고 알고 있다.

기타 장비.

경전차. 75mm포를 탑재한 신형 경전차는 훌륭하다. 이 전차는 거의 모든 임무에 투입할 수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M5는 전차로서 쓸만한 물건이 아니다. 독일군 경전차는 상대해 본 일이 없어서 아군의 경전차와 비교 평가할 수 없다.

반궤도장갑차. 아군의 것이 독일제 보다 우수하다. 하지만 독일제 보다 나아봤자 쓸데가 없다. 반궤도 장갑차는 접지력이 형편없고 방어력도 낮아 대부분의 적 화기를 막아내지 못한다.

트럭.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아군의 2½톤 트럭은 세계 최고의 트럭이다. 독일제 트럭보다 모든 면에서 우수하다. 아군의 지프도 마찬가지로 최고다.

아군의 소화기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다. 하지만 30구경 기관총의 총열 교체를 좀 더 쉽게 할 필요는 있다. 독일제 기관총은 총열을 순식간에 교체할 수 있다. 하지만 아군 기관총은 지속사격 능력과 정확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왕이면 아군의 중화기도 좀 더 잘 만들수는 없었는가? 아군 화포, 특히 전차포의 포구초속이 좀 더 높았으면 한다. 독일군과 영국군은 더 많은 장약을 넣은 포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포를 만든다.

바주카포. 바주카포를 처음 개발한건 우리다. 그런데 이것 말고는 내세울 게 없다. 독일제 바주카와 비교하면 정말 형편없다. 위력 뿐만 아니라 명중율도 독일제가 높다.

피복류. 아군의 피복은 훌륭하다. 독일군의 군복보다 훨씬 실용적이다. 다만 일부 품목은 적군이 더 훌륭하다. 아군의 고글은 정말 저질이다. 독일제가 훨씬 좋다. 그리고 독일군의 동계 장비는 아군보다 우수한 것 같다.

ibid., pp.8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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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헌리John M. Hunley 소위, 박격포 소대장.

개인적으로 아군의 81mm 박격포는 보병 지원 임무에 있어서 독일제 81mm 박격포와 대등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갑부대의 화력 지원에 있어서는 독일제 120mm 박격포가 훨씬 유용하다고 확신한다. 기갑부대의 화력 지원을 위해서는 155mm 곡사포 수준의 사거리와 파괴력, 그리고 현재 사용되는 아군의 박격포 보다 훨씬 정확도가 높은 무기가 필요하다. 또한 개인적으로 자주박격포의 차대는 반궤도 장갑차 보다 중장갑을 갖춘 차량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경전차나 중형전차의 차대에 360도 회전이 가능한 포가를 올리면 좋을 것이다. 최근의 작전 처럼 평야 지대에서 박격포의 짧은 사거리로 인해 전차 부대를 근거리에서 지원해야 하는 경우 반궤도장갑차를 장비한 박격포 소대는 적의 직사 중화기에 극도로 취약했으며, 특히 마을이나 요새화된 거점을 우회해야 하는 경우 그런 위험이 있었다. 이런 위협을 극복하려면 중장갑을 갖춘 차대가 필요하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박격포와 포탄에 대해 평가를 하자면, 먼저 접촉신관을 장착한 M56포탄의 위력이 매우 좋다고 생각한다. 근접신관을 장착한 M43A1과 M56, M57 포탄도 적에게는 큰 위협이다. 만약 M56포탄에 접촉 모드와 지연 모드를 선택할 수 있는 신관을 장착하게 된다면 기존의 목적은 물론 다른 목적에도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박격포 소대를 완전 궤도 차량으로 편성하면 전차를 훨씬 잘 따라다닐 수 있으며 참호나 도랑 같은 장애물도 쉽게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ibid., pp.8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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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A. 루이스O. A. Lewis 중위

독일군은 무연화약을 사용하고 있어서 위치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아군의 전차포는 쏘자 마자 위치가 발각된다.

독일군이 사용하는 1인용 천막은 위장무늬가 들어가 있고 접어서 판초로도 사용할 수 있어 아군이 사용하는 것 보다 좋다.

ibid.,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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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세이델Frank Seydel Jr., 소위, 소대장.

본인은 3월 3일 독일 보징호벤Bosinghoven에서 약 600야드 정도의 거리에서 두대의 5호전차와 교전했다. 이때 나는 76mm포 탑재 전차를 타고 있었고 초탄은 피모철갑탄(APC)을 썼다. 초탄은 명중했으나 그대로 튕겨나갔다. 500야드 거리에서 다시 한발을 더 발사해 명중한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다음에 철갑탄과 고폭탄을 합쳐 10발을 더 발사하고 나서야 독일 전차가 화염에 휩싸였다. 이때의 경험으로 독일군의 전차는 우수한 장갑을 가졌지만 포탑 선회속도가 형편없이 느리다는 점을 알게 됐다. 적 전차를 격파한 뒤 내 전차를 좀 더 유리한 위치로 이동시켜서 불타는 적 전차를 관찰한 결과 이런 결론을 얻었다.

ibid.,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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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쇼펠William L. Schaufel 중위, 중대장

1945년 2월 27일 독일 오버아모트Oberamot에서 도로를 봉쇄하고 있던 내 중대의 제2소대는 약 3,600야드 거리에서 6호전차 두대의 공격을 받았다. 셔먼 두 대가 격파됐다. 우리는 초속 3,400피트 76mm 고속철갑탄(HVAP)을 7발 발사했으나 모두 경사장갑에 튕겨나갔다. 6호전차의 우수한 광학장비와 포구초속의 높은 주포 때문에 아군은 화력에서 열세였다. 타이거 전차에 연막탄을 발사하자 적은 철수했다. 독일군은 연막을 치는 것이 포병이나 전폭기에 목표물을 지시하는 행동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5호전차의 경우 고속철갑탄은 1,500야드 거리에서 효과가 있다. 아군 전차는 5호전차 보다 포탑 선회속도가 빨라서 적의 측면으로 우회기동을 할 때 유리하다. 우리는 4호 자주포의 측면으로 기동한 뒤 800야드 거리에서 76mm포로 사격을 해 이를 격파했다. 적 자주포는 회전포탑이 없는게 단점이다. 이 전투는 1944년 11월 16일 독일의 플로버리히Floverich에서 있었다. 이때 우리는 4발의 피모철갑탄과 지연신관을 장착한 고폭탄을 사용했다.

아군 전차는 차고가 높아서 적에게 훌륭한 목표물이다. 그리고 방사형 엔진은 출력도 낮은데다가 정비에 많은 손이 간다.

ibid.,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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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럴 오일러Ural E. Oyler 중위, 소대장.

독일군의 포구초속이 높은 전차포와 M4 중형전차의 75mm 주포를 비교하면 아군의 전차포는 실망스럽다. 과거 많은 전투에서 아군은 우리와 동일한 구경의 전차포를 사용하는 적과 교전했다. 독일 우박Uback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아군은 포구초속이 높은 75mm 포의 공격을 받아 항공지원을 받을 때 까지 전진을 할 수 없었다. 만약 아군도 독일 전차를 격파할 수 있는 포구초속이 높은 전차포가 있었다면 진격이 지체될 일도 없었을 것이며 전투 초반에 피격된 전차를 제외하고는 손실도 없었을 것이다.

독일군과 미군이 사용하는 탄약을 비교평가하면, 먼저 우유병 처럼 생긴 탄피를 도입해서 포구초속을 더 높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군이 사용하는 75mm 탄약은 독일군의 75mm 탄약 보다 형편없다. 마찬가지로 아군의 76mm 철갑탄의 관통력도 높여야 한다.

아군 전차의 고무패드가 달린 궤도와 독일 전차의 궤도를 비교해보면 아군의 모든 궤도차량의 궤도폭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일 기갑차량과 교전을 했을때 아군 전차가 연약한 지반에서는 독일 전차를 따라잡지 못하는 경우를 숱하게 목격했다.

신형 M4A3E8 전차는 많은 개량이 이루어져 훌륭한 성능을 발휘하고 있다. 차체 정면 장갑과 포탑 측면 장갑이 여전히 약하다는 점을 빼면 전차병들이 바라던 바를 적용하고 있다. M4A3E8에 고속철갑탄(HVAP)를 대량으로 보급한다면 독일 전차를 능히 대적할 수 있다고 본다.

ibid., pp.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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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런스 스워드Clarence R. Sward 소위, 소대장.

1944년 11월 17일 독일 푸펜도르프에서 게레온스바일러 방면으로 공격하던 중 M4 전차 1개 중대가 나의 경전차 소대를 앞서 철길을 건넜다. 아군 전차들이 400야드 정도 전진했을때 독일군이 사격을 개시했고 아군 중형전차들도 응사했다. 20분 동안 중형전차 9대와 경전차 1대가 격파됐지만 독일 전차는 단 한대도 격파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목격한 적 차량은 전차 혹은 자주포 네대였다.

ibid.,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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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라록William E. Larock 소위, 소대장.

1944년 11월 16일 내가 탄 M5A1 경전차는 40야드 거리에서 독일군의 바주카포 공격을 받았다. 이 공격으로 직경 1인치 정도의 구멍이 뚫렸고 파편이 차내로 튀어들어왔다. 피격된 부위는 차체 좌측면 후부였다. 어쩌면 최소 두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을지도 모르지만, 조종수가 평소 피격된 위치에 외투를 둘둘 말아서 보관하고 있었던 덕분에 사망자가 없었다. 하지만 이 공격으로 세명이 부상을 당해 2개월간 병원 신세를 져야했다. 차체 내부에는 큰 피해가 없었다.

ibid.,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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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코스토우Peter Kostow 중위, 제67전차연대 C중대 소대장.

50야드 거리에서 독일군 8명을 발견하고 37mm 산탄(Canister)를 발사한 일이 있다. 독일군은 포탄의 발사음과 폭발에 겁을 먹고 항복했다. 하지만 포로들은 상처 하나 없었다.

경전차를 몰고 적에 대해 정면 공격을 감행한 일이 있었다. 적의 5호전차 2대를 만나 수많은 37mm 철갑탄을 발사했지만 무력했다. 적은 우리 경전차 두대를 격파해 화염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우리는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ibid.,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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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화이트James A. Whiter Jr., 중위, 제67전차연대 중대장.

본인이 소대장 보직에 있었을 때의 일이다. 독일의 게레온스바일러 인근에서 아군의 좌측으로 우회하려는 5호전차 한대를 발견하고 소대의 화력을 집중해 공격했다. 800야드 거리에서 사격을 개시해 적 전차가 후퇴하도록 했다. 교전을 계속하면서 거리가 1500야드까지 벌어졌다. 나의 소대는 75mm M4전차 3대와 76mm M4전차 2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내가 직접 목격한 명중탄만 해도 75mm와 76mm를 합쳐 10발이었다. 5호전차는 엄폐가 가능한 지점에 도달하자 내가 탄 차량에 명중탄을 날렸고 내 전차는 관통당해 화염에 휩싸였다. 개인적으로는 포구제퇴기가 달린 M4A3E8이 여지껏 내가 본 아군 차량 중 최고라고 생각한다. 고속철갑탄을 대량으로 보급받을 수 있다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본다.

ibid.,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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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오스본Thomas H. Osborne 중위, 제67전차연대 I중대 부중대장

2500야드 거리에서 적 6호전차를 목격한 일이 있다. 적 전차는 측면을 우리쪽에 드러내고 있었고 두개의 수로가 지나가는 능선 위에 호를 파서 차체를 숨기고 있었다. 다른 부대가 전진하려고 했으나 두 대의 전차만 잃고 후퇴해야 했다. 적 전차는 능선 위에서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버틴 끝에 탄약이 소모되어 후퇴했다. 이때 내가 지휘한 소대는 적의 6호전차를 몰아내기 위해 수많은 철갑탄, 연막탄, 고폭탄을 발사했다. 우리 소대만 최소한 75mm 철갑탄 10발에서 15발 정도를 명중시켰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도 전진할 수 없었고 적 전차의 승무원들도 아군의 공격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 같다.

ibid., p.109.

2018년 2월 23일 금요일

어떤 문화충격(?)

1946년 크라이슬러에서 간행한 社史를 읽다보니 재미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독일의 공업 수준에 대한 평가인데 꽤 인상적이군요. 미국(크라이슬러)의 업적을 드높이기 위해 독일의 역량을 과장해서 평가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만.

독일인은 우수한 기술자들이다. 독일 산업계는 전쟁 말기까지도 기술자를 양성하는데 4년간의 교육기간을 적용했으며, 결국 군부의 압력 때문에 마지못해 교육 기간을 3년으로 단축했다. 숙련된 기술자와 공구를 생산하는 장인, 기술자는 병역을 면제받았다. 우리 미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정밀 측정장비도 독일의 어지간한 공장에는 보급되어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독일에 파견된 미국측 전쟁보상위원회 위원들은 독일 산업계의 공업생산량 및 인구 대비 첨단 공작 기계 보유량이 미국 보다 월등히 많은 것에 충격을 받았다. 독일 산업계는 최신 공작기계를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어서 패전 직전 까지도 1교대 근무를 시행할 정도였다. 독일 정부는 낡은 기계를 계속 사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공작기계의 감가상각내용연수를 1년으로 제한할 정도였다. 우리 미국의 세법에서는 공작기계에 대해 일반적으로 20년의 감가상각내용연수를 적용하고 있다. 
Wesley W. Stout, "Tanks are mighty fine things!": How Chrysler's Detroit tank arsenal built the tanks that helped win WW II, (Chrysler Corporation, 1946), pp.76~77.

2018년 2월 22일 목요일

Robert M. Citino著, The Wehrmacht's Last Stand: The German Campaigns of 1944~1945


Robert M. Citino著, The Wehrmacht Retreats : Fighting a Lost War, 1943


2017년에 출간된 로버트 시티노의 The Wehrmacht's Last Stand는 프로이센-독일의 전쟁방식의 탄생과 몰락을 추적하는 연작 The German Way of War : From the Thirty Years’ War to the Third ReichDeath of the Wehrmacht : The German Campaigns of 1942, 그리고 The Wehrmacht Retreats : Fighting a Lost War, 1943의 마지막 권입니다. 첫 번째 책 The German Way of War에서는 중부유럽을 지리적 배경으로 단기 결전에 초점을 맞춘 독일식 전쟁수행방식이 등장하고 1940년 프랑스 전역에서 그 정점을 찍는 과정을 서술했습니다. 두 번째 책인 Death of the Wehrmacht는 독일군이 소련과 북아프리카로 전장을 확대해 나가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공간의 확대와 단기전으로 격퇴할 수 없는 막대한 물량을 갖춘 적 앞에서 예봉이 꺾이는 과정을 추적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권인 The Wehrmacht Retreats에서는 동서 양면으로 조여오는 연합군의 압박에 전통적인 기동전으로 대응한 독일군의 전쟁 수행 방식이 무너지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마지막권인 이 책은 상당히 재미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핵심적인 이야기를 기존의 저작에서 모두 풀어놓았기 때문에 신선함은 덜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시티노는 독일군의 전쟁 수행방식의 핵심은 '가난한 국가의 가난한 군대'인 독일군이 승리하기 위해서 단기결전을 추구하는데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장의 공간적인 규모가 확대되고 군대의 규모가 커지면서 독일의 전쟁 수행 방식은 한계에 봉착했고 그 결과는 1942년 이후 계속되는 패배로 이어졌다고 지적합니다. 저자는 Death of the Wehrmacht와 The Wehrmacht Retreats에서 이것을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마지막권인 The Wehrmacht's Last Stand는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완전히 소모된 독일군이 철저하게 붕괴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독일군은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기까지 전술-작전 단위에서 강력한 면모를 보여주었지만 이것은 전략적인 실책을 만회할 수 없었습니다. 저자가 1944년 여름 동부전선의 전황을 설명하면서 "독일군이 국지적인 승리를 거두면 전선의 다른 곳에서 더 큰 구멍이 뚫리고 있었다"고 평가한 구절은 이 책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1943년 이후 전략적인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한 독일군은 "수술대 위의 환자처럼" 무기력하게 동서 양면으로 큰 타격을 받으며 붕괴됩니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독일식 전쟁 방식은 어떠한 해법도 제시하지 못 합니다. 저자는 1944년 초 만슈타인과 히틀러의 논쟁을 그 예로 듭니다. 만슈타인은 군사적(작전적)으로 타당한 대안을 제시하지만 그 대안에는 정치적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었고, 히틀러는 정치적으로 타당한 주장을 펼치지만 군사적으로는 재앙을 불러오는 주장만을 펼쳤을 뿐 입니다. 1940년 이후 전략적인 초점을 상실한 채 작전적인 승리를 맹신하며 불리한 환경을 조성한 결과 독일군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게 된 것 입니다.

저자는 1944년 여름 동서 양면으로 연합군의 대공세에 직면해 독일군 수뇌부가 내린 전략적 판단을 비판하면서 그 비합리성을 지적합니다. 1944년 여름 서부전선 방어를 다룬 부분에서는 히틀러 체제하에서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지휘체계의 파탄을 보여줍니다. 국방군 총사령부로 만들어진 OKW는 3군 통합작전 지휘 보다는 비대한 육군을 견제하기 위한 관료기구의 성격이 강했고, 예하의 3군은 이 체제하에서 통합작전 보다는 타군을 정치적으로 견제해 왔으며 이 모순이 결국 1944년 프랑스 방어의 실패로 나타난다는 것 입니다. 서부전구 사령관 룬트슈테트는 명목상 서부전선의 3군을 통합 지휘해야 하지만 실제로 공군과 해군은 서부전구 사령부 보다는 자군 사령부의 지휘통제를 받았으며, 육군을 지휘하는 롬멜도 룬트슈테트를 무시하고 히틀러에 직보하는 등의 난맥상을 보였다고 지적합니다. 지휘체계의 난맥은 기갑사단의 분산 배치라는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르는 원인이 됩니다. 전략적인 파국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히틀러를 정점으로 한 최고수뇌부의 오판을 거듭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1944년 여름 소련군의 하계대공세 직전 히틀러가 내린 여러가지 잘못된 결정들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시티노는 히틀러를 비판하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하계 공세 직전 철수를 주장하다가 히틀러의 압박에 물러선 뒤 히틀러의 전선 사수 명령만을 수동적으로 전달하는데 그친 무기력한 지휘관 부슈, 적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 없이 낙관적인 예측만으로 허황된 작전을 수립하는 요들, 연합군의 역량을 과소평가하며 이탈리아에서 무의미한 소모전을 전개한 케셀링 등 고위 장성들의 실책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물론 1944년 1월 만슈타인이 거둔 우마니 지구의 승리, 1944년 8월 모델이 바르샤바에서 거둔 승리 등 독일군의 작전적인 탁월함을 보여준 사례도 빠트리지 않고 언급합니다. 저자는 전쟁 말기 까지도 독일군은 기동과 화력을 조합한 작전에서 우수한 수준을 유지했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독일군의 모든 지휘관들이 군수보급과 정보라는 측면에서 형편없었음을 빠트리지 않고 지적합니다. 또한 이들은 정치, 대전략, 경제에 완전히 무지했다고 평가합니다. 즉 독일 장교단은 현대의 총력전을 수행하기에 부족한 집단이었다는 것입니다. 장교단이 전쟁 말기로 갈수록 히틀러에 충성하며 정치화된 점도 빠트리지 않고 비판합니다. 결론 부분에서는 패전이 임박하자 부하들을 버리고 도망친 쇠르너의 초라한 말로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처럼 독일 장교단의 몰락을 보여주기에 알맞은 사례도 없을 것 입니다.

부대 명칭 오류 같은 소소한 문제가 있지만 상당히 재미있고 균형잡힌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맥락상 앞선 책들에 논리적으로 부속되어 있다 보니 뭔가 좀 애매한 느낌이 있습니다.


2018년 1월 26일 금요일

굿우드 작전 당시 제503중전차대대 122호 티거2 격파에 관한 잡설

얼마전 Panzersaurs Kez님이 굿우드 작전 당시 격파된 독일 제503중전차대대 122호 티거2에 관한 글을 써 주셨습니다. 유명한 독일 기갑부대 연구자 볼프강 슈나이더의 Tiger in Combat에 소개된 독일과 영국 양측의 주장을 균형있게 소개하면서 분석하는 글 입니다. 자세하게 분석을 해 주셔서 저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는 영국쪽 주장에 손을 들어주는 입장이지만 꽤 복잡한 문제라서 확신은 못 하겠습니다. Panzersaurs Kez님이 좋은 글을 써 주셨으니 저도 몇가지 이야기를 더 하는게 좋겠습니다.(타이젠과 고어맨의 증언은 Panzersaurs Kez님의 블로그에 있으니 이 글에서는 별도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영국에서 나온 문헌들은 여전히 존 고어맨(John Gorman)의 주장을 강력히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비교적 최신 저작으로 2015년에 나온 Stephen NapierThe Armored Campaign in Normandy, June~August 1944도 존 고어맨의 증언을 신뢰하고 있습니다.1) 다만 고어맨의 증언만 인용할 뿐 참고문헌에 있는 슈나이더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반박하지는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네이피어가 어째서 볼프강 슈나이더의 주장을 기각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굿우드 작전에 관해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저작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이안 대글리시(Ian Daglish)Operation Goodwood에서는 기본적으로 고어맨의 주장에 힘을 실어 서술하면서 동시에 타이젠의 증언을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대글리시는 전투 현장에 독일군 대전차포도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타이젠의 증언도 어느정도는 근거가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2) 
 
제가 잠정적으로 고어맨의 주장을 지지하는 이유는 고어맨의 증언이 시기적으로 더 빠르다는 점 외에도 그가 원래 탑승한 셔먼을 잃고 갈아탄 파이어플라이 승무원들이 고어맨이 이날 전투로 전공십자훈장(Military Cross)을 수여받았을때 반박을 하지 않았다는 점 입니다. 고어맨의 전공십자훈장은 아일랜드 근위연대 제2전차대대가 노르망디 전역에서 처음 수여받은 것 입니다. 고어맨의 주장이 허위라면 수훈 심사과정에서 파이어플라이 승무원들이 충분히 이의제기를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또한 영국군 측에서 해당 전차의 잔해를 조사할 기회가 있었으니 영국군은 고어맨의 주장을 검증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습니다.(저는 개인적으로 영국군의 전과 검증 체계는 독일군과 비슷한 신뢰도를 지닌다고 평가합니다. 미군의 경우는 이들보다 신뢰도가 조금 떨어진다고 보고, 소련군의 검증 체계는 가장 믿을 수 없다고 봅니다.) 
 
503중전차대대사가 영어로 출간되고 볼프강 슈나이더의 연구가 나온 이래 영어권에서도 고어맨의 주장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비판하는 의견이 있습니다. 고어맨에 대한 비판 중 주목해야 할 하나는 그가 말년에 한 주장이 약간 달라졌다는 점 입니다. 고어맨은 말년에 회고록을 냈는데 회고록에 실린 해당 전투의 정황은 다음과 같습니다.3) 
 
원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타이거 로얄(티거2)’ 같은 단어는 그대로 옮깁니다. 
 
이제 우리 중대는 상당한 거리를 진격했으며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단편적인 정보들을 취합해 보니 독일군은 이미 혼란상태를 극복한 듯 했다. 이윽고 우리 앞에 제11기갑사단의 전차 여러대가 나타났다. 대부분의 전차가 피격되어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승무원들은 불타는 탱크에서 전우들을 구출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참담한 광경이었다. 그들을 도울 방법이 없었다. 이날 아침만 해도 쓸모없는 물건이라고 생각했던 궤도식 구급차가 많은 장병의 목숨을 구했다.

제임스 바론(James Baron)에게 최대 속도로 가속하라고 명령했다. 하빈슨(Harbinson) 하사의 전차는 200야드 정도 뒤에 따라오고 있었다. 송전탑을 표지판 삼아 따라가다가 우리 중대의 본대를 발견했다. 우리 중대는 카니(Cagny) 서쪽에서 돈좌되어 있었다. 토니 도먼(Tony Dorman: 중대장)은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계속 전진하라고 격하게 손짓을 했다. 이번 작전의 전략은 샐리스버리 평원과 요크셔 고원에서 했던 기동훈련 처럼 신속하게 돌격해 카니의 동쪽으로 우회하는데 성패가 달려있었다. 도먼이 나에게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생각해서 밀밭으로 전진했다. 밀밭 끝의 생울타리까지 간 뒤 방향을 전환해 생울타리를 따라 나 있는 좁은 길을 따라 이동했다. 우리의 오른쪽에 또 다른 생울타리가 직각 방향으로 나 있었다. 
이 방향으로 들어서자 무시무시한 광경이 펼쳐졌다. 300야드 전방에 한 대의 타이거 로얄이 있었고 그 뒤에는 타이거 세대가 이를 지원하고 있었다. 타이거 로얄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지 잠깐 설명하자. 독일은 전차 생산에서 양보다 질을 우선했다. 그들은 미국의 전차 생산량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꺼운 장갑과 포신이 20피트에 달하는 88mm 대공포를 단 전차를 설계했다. 그야말로 전쟁 중에 생산된 것 중에서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전차라 하겠다. 이런 괴물이 있다는 정보는 우리도 알고 있었다. 바론 상병과 나는 이럴때 어떻게 할 지 의논한 일이 있었다. 우리는 만약 타이거 로얄을 마주친다면 해군의 충각 전술을 따라서 그냥 들이받아 버리자고 결정했다. 그는 타이거 로얄의 88mm 포탑이 선회속도가 느리니 셔먼의 속력을 이용해 대응하는게 좋다고 동의했다. 좀 미친것 같지만 75mm 포를 단 셔먼으로 대응하려면 이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타이거 로얄의 포탑은 우리 쪽에서 90도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방향은 제2대대 토니 도먼의 전차가 있던 쪽이었다. 우리 전차는 고폭탄을 장전하고 있었다. 내 사수 앨버트 숄리스(Alber Scholes)와 나는 철갑탄은 아무 효과가 없으니 차라리 고폭탄 쪽이 낫다는데 동의했다. 이건 꽤 괜찮은 판단이었다. 바론 상병이 타이거 로얄을 향해 돌진하는 동안 숄스는 50야드 거리에서 적 전차의 포탑에 고폭탄을 명중시켰다. 이 폭발은 좁은 포탑안의 승무원들에게 충격을 줬고 우리가 돌진하는 순간 적 전차장이 포탑 밖으로 머리를 드러냈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을 못하고 어리벙벙한 것 같았다. 다른 타이거 세대의 지원을 받고 있던 타이거 로얄의 전차장은 강력한 장갑의 보호를 받으며 우수한 88mm포로 아군 전차들을 공격하려 하던 중 근거리에 나타난 우리 전차를 쏘기 위해 포탑을 느리게 선회하기 시작했다. 우리 전차는 적 전차의 좌측 후방을 들이받았다. 독일 전차병들은 전차에서 탈출하기 시작했다. 다른 타이거 3대가 우리 전차를 조준하고 있었다나는 탈출하라고 명령했다. 독일군과 우리는 두대의 전차 사이의 좁은 공간에 갇혔다. 
이때 하빈슨 하사의 전차가 생울타리 귀퉁이에서 나타나 용감하게도 타이거 3대를 상대로 전투를 개시했다. 바론 상병이 외쳤다. “어서 피하십시오!” 나는 승무원들을 데리고 생울타리 쪽으로 도망쳤다. 우리는 무성하게 자란 밀밭으로 모망쳐 일단 숨었다. 하빈슨 하사의 전차는 근거리에서 타이거 전차의 명중탄을 맞았다. 우리는 승무원 다섯명이 모두 전사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지 의논하고 있는데 불쑥 한 사람이 은신처로 뛰어들었다. 전방 기관총 사수 애그뉴 일병이었다. 내가 탈출 명령을 내렸을때 애그뉴 일병은 해치를 열고 나오다가 적 전차의 사격을 받아 다시 전차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는 포탑쪽의 해치를 열고 나오다가 몇 사람이 오른쪽 방향의 생울타리로 도망치는걸 언뜻 보았다. 그래서 그리로 따라가 그들이 숨어있던 도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타이거 전차의 승무원들이 아니던가. 애그뉴 일병은 독일군들에게 경례를 한 뒤 다시 반대 방향으로 줄행랑 쳤다. 운이 좋아 우리와 합류할 수 있었다.

서부전선에서 마주친 단 한대의 타이거 로얄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지만 승리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뭔가를 하다가 만 느낌이었다. 나는 승무원들에게 숨어서 기다리라고 명령한 뒤 밀밭을 가로질러 400야드 쯤 떨어진 아래쪽의 숲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한대의 파이어플라이를 발견했는데 승무원들이 버린 것 처럼 보였다. 포탑 위로 올라가 안을 들여다 보니 머리가 날아간 워크맨(Workman) 하사의 시체가 포미 위로 쓰러져 있었다. 사수와 장전수는 충격을 받아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내가 전차를 발견하기 전에 타이거 로얄에 명중탄을 맞아 워크맨의 머리가 날아간게 분명했다.

나는 승무원들의 도움을 받아 워크맨 하사의 시체를 치운 뒤 조준경과 페리스코프를 닦았다. 조종수에게 타이거 로얄을 발견했던 밀밭 끄트머리의 생울타리 쪽의 좁은 길로 전진하라고 명령을 내리자 그는 지체없이 전진했다. 그때는 다행히도 타이거의 포탑이 우리를 겨냥하고 있지 않았다. 생울타리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속도를 줄였다. 세대의 타이거가 아까 봤던 위치에 있었다. 타이거 로얄과 내가 원래 탔던 발리라게(Ballyraggett)’는 충돌한 채로 멈춰 있었다. 첫번째 목표는 타이거 로얄이었다. 초탄은 너무 높이 날아갔다. 포수가 떨고 있었다. 두 번째 탄이 타이거 로얄을 맞췄다. 그 다음에는 발리라게를 쏴서 적이 회수하거나 조종하지 못하게 했다. 다른 세대의 타이거가 내가 탄 파이어플라이쪽으로 포탑을 돌리고 있어서 생울타리를 따라 100피트 정도 이동한 뒤 다시 적 전차가 보이는 위치로 이동했다. 이때 적 전차의 포탑은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네 발의 포탄을 발사했고 이 중 두발이 명중했다. 타이거 한대가 다시 우리쪽으로 포탑을 돌렸다. 사격 위치를 바꾸기 위해 길 쪽으로 후퇴했다.

불타는 셔먼 전차쪽으로 다가가자 구덩이에서 불 붙은 허수아비 처럼 보이는 세개의 형상이 튀어나왔다. 하빈슨 하사와 그의 사수, 장전수였다. 우리는 이들을 셔먼의 엔진 데크 위에 태우고 전속력으로 밀밭을 가로질러 후퇴했다. 연대 구호소를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군의관 립만(Ripman) 박사의 의료진이 있었다. 하빈슨과 다른 두명의 승무원은 치료를 받았다. 이날 밤 하빈슨 하사는 성형외과 전문의 매킨도(McIndoe)씨가 있는 링필드의 화상전문병원으로 후송되었다. 하빈슨 하사는 그후 2주 정도 더 생존했으며 그의 어머니와 누나에게 말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신의 50%에 심한 화상을 입어서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셔먼 전차는 워낙 불에 잘 타다 보니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이 많았다. 우리는 토미 쿠커라는 스토브로 요리를 하곤 했는데 독일군은 이걸 가지고 섬뜩한 농담을 했다. 셔먼 전차에 토미 쿠커라는 별명을 붙인 것이다.”  
 
고어맨의 증언을 신뢰하지 않는 쪽에서는 고어맨이 말년에 한 증언이 초기의 증언과 조금 차이가 있다는 점을 미심쩍게 생각합니다. 고어맨의 회고록이 좀 부정확한 점도 비판을 받습니다. 그는 노년에 노르망디 전역 당시 제503중전차대대 3중대에서 소대장으로 있었던 로젠(Richard Freiherr von Rosen)을 만나 이때의 전투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어맨의 회고록에는 부대명 부터 틀려있습니다. 503중전차대대를 제204중전차대대라고 쓰고 있는 것이죠.4) 노년에 기억력이 감퇴해서 이런 착오가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나 고어맨의 증언에 의문을 표하는 측에서는 이런 오류를 지적하기도 합니다. 물론 타이젠도 자신이 탔던 전차의 차량번호를 잘못 기억하는 등의 오류가 있습니다.5) 두 사람의 증언을 검증할 수 있는 자료가 좀 더 있으면 결론을 보다 확실히 내릴 수 있겠죠. 
 
대립하는 두가지의 주장이 있는데 고어맨 쪽은 최소 두대의 전차에 탄 승무원들이 증언을 해 주었고 훈장 수여 심사에서도 이것을 받아들였다는 점이 유리합니다. 반면 타이젠의 증언도 논리적이고 무엇보다 독일군의 대전차포 배치현황 등 그의 증언을 뒷받침할 정황 증거도 있습니다. 일단 저는 약간 유보적인 입장에서 고어맨의 주장을 지지하는 쪽인데 122호 전차의 피격 상태를 자세히 분석한 보고서만 하나 있어도 이렇게 헷갈리지는 않을 듯 싶습니다.

 
 
1) Stephen Napier, The Armored Campaign in Normandy, June~August 1944, (Casemate, 2015), p.221.
2) Ian Daglish, Operation Goodwood(Pen and Sword, 2004), pp.163~166.
3) John Gorman, The Times of My Life(Pen and Sword, 2003), pp.38~40.
4) John Gorman, Ibid., p.51.
5) Franz-Wilhelm Lochmann(Hrsg.), Erinnerung an die Tiger-Abteilung 503 - Die schwere Panzerabteilung 503 an den Brennpunkten der Front in Ost und West(Verlaghaus Würzburg - Flechsig). p.426.
 
 

2018년 1월 10일 수요일

신속한 지뢰 제거 방법 - 2



"주코프가 설명해 준 소련군의 지뢰지대 돌파 방법은 꽤 인상적이었다. 적의 사격을 받으며 지뢰 지대를 돌파하려면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우리의 기술자들은 지뢰 지대를 안전하게 개척할 수 있도록 여러가지 장비를 개발했지만, 지뢰 지대를 돌파하는 데는 항상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주코프 원수는 소련군의 지뢰 지대 돌파 방법을 설명해 줬다. '지뢰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대인지뢰와 대전차지뢰죠. 소련군은 지뢰 지대를 마주치면 그냥 돌격합니다. 독일군이 지뢰지대 대신 강력한 부대를 투입해 방어할 경우와 비교해 보면 대인지뢰로 인한 인명피해는 적의 기관총이나 포격에 입는 인명피해와 비슷할 겁니다. 보병들이 공격하다가 대전차지뢰를 밟아도 폭발하지는 않으니까 보병들이 지뢰지대를 돌파해 교두보를 구축한 다음에 공병을 투입해 차량이 지나갈 수 있도록 대전차지뢰를 해체하는 겁니다.'
Dwight D. Eisenhower, Crusade in Europe (William Heinemann Ltd, 1949), pp.510~511

2017년 12월 22일 금요일

Panzer Krieg Vol 1. German Armoured Operations at Stalingrad

제이슨 마크(Jason D. Mark)의 신작 Panzer Krieg Vol 1. German Armoured Operations at Stalingrad를 막 받아서 훑어보는 중 입니다. 이 책은 원래 Stalingrad: Graveyard of the Panzers라는 제목으로 기획되었다가 집필 과정에서 훨씬 터프한(!!!) 제목으로 바뀌었습니다.

Panzer Kreig은 103전차대대, 129전차대대, 160전차대대 등 1942년 하계공세 당시 독일군 차량화보병사단에 배속되었던 전차대대들의 작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책의 구성은 제이슨 마크가 기존에 냈던 다른 책들과 동일합니다. 현존하는 1차 사료와 증언 구술자료를 극한으로 활용한 미시적인 서술이 이 저작의 특징입니다. 특히 각 부대의 '최후의 생존자'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것은 마크의 저작에서 일관적으로 다루는 내용이지만 읽는 이들에게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안겨줍니다. 책의 부록으로 실려있는 각 대대별 가동 전차 현황표는 제이슨 마크의 치밀한 연구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NARA에 소장된 독일군 노획문서 사본을 철저하게 분석해서 하루 단위의 전차 보유 변동을 추적하는데서 읽는이를 완전히 압도합니다. 현 시점에서 입수 가능한 야전군, 군단, 사단의 문서를 철저하게 분석했다는 것을 주석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43년 이후 독일군 기갑사단에 대해 비슷한 시도를 했던 Kamen Nevenkin의 Fire Brigades: The Panzer Divisions 1943 - 1945가 기갑총감부 문서철 단 하나만을 활용해서 월별 통계를 정리하는데 그쳤다는 점을 상기하면 비록 시간적 범위는 짧을지언정 제이슨 마크가 연구에 투입한 노력이 얼마나 되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단점이라면 A4판형으로 전작들에 비해 훨씬 커졌다는 것을 꼽겠습니다. Leaping Horseman 출판사에서 내는 책들은 고급종이를 써서 책이 무거운게 사실이지만 이번에는 판형도 그냥 들고 보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커졌습니다. 책장에 꽃아 넣는 것도 일이로군요. 물론 책에 수록된 수많은 기록사진들을 생각하면 판형이 커진 것은 어쩔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우 훌륭한 연구입니다. 앞으로도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인용하게 될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2017년 12월 3일 일요일

러시아 정부 공식 통계의 쿠르스크 전투 관련 내용에 대한 비판



아래의 내용은 레프 로푸호프스키Лев Николаевич Лопуховский와 보리스 카발레르치크Boris Kavalerchik 공저, The Price of Victory: The Red Army’s Casualties in the Great Patriotic War (Pen and Sword, 2017)의 2장 일부(55~67쪽)를 번역한 것 입니다. 지난번에 소개했었던 로푸호프스키의 글(러시아의 퇴행적 역사인식에 대한 로푸호프스키의 비판)과 바로 연결되는 내용이어서 번역을 했습니다. 크리보셰프의 통계에 대한 문제제기는 워낙에 많아서 영어로 번역된 글만 해도 몇편이 있을 정도입니다. 보리스 소콜로프의 비판은 제 블로그에서도 몇년 전에 소개한 바 있습니다.(2차대전기 소련의 인명피해를 연구하는데 있어서의 문제점) 크리보셰프의 연구팀이 정리한 통계는 현재 이를 대체할 만한 자료가 없어 꾸준히 인용되고 있습니다만, 워낙 엉성하기 때문에 개별 작전단위로 많은 비판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포스팅에서 소개하는 사례도 그 중 하나입니다. 전투에서 발생하는 교환비 문제는 작전사 연구에서 있어 중요한 요소인데 소련-러시아의 공식 연구들은 이 점에서 심각한 하자가 있다는 로푸호프스키의 주장은 경청할 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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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략)


작전에서 발생한 사상사 수치를 축소하는 사례는 비단 1941년의 패배한 작전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크리보셰프Григорий Федотович Кривошеев의 연구집단은 심지어 소련군이 승승장구 하던 제2차대전 하반기의 작전에서도 독소 양측의 사상자 교환비가 너무 큰 경우에는 이를 은폐하기 위해 소련군 사상자를 축소했다. 예를 들어 1943년 7월 5일 부터 23일까지 소련 중부 전선군, 보로네지 전선군, 스텝 전선군이 참전한 쿠르스크 전략방어작전기의 통계를 살펴보자. 이 작전에는 오룔-쿠르스크 축선 방어작전과 벨고로드-쿠르스크 축선 방어작전이 포함된다. 크리보셰프의 책에서는 이 작전을 이렇게 설명한다.


“중부 전선군과 보로네지 전선군은 방어작전을 통해 독일 파시스트 군대 충격집단의 전투력을 소진시키고 그 진격을 저지했다. 이로서 오룔과 벨고로드-하리코프 축선에서 반격으로 이행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 쿠르스크 돌출부의 소련군을 격파하려는 히틀러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122)


소련군은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적군 보다 훨씬 많은 인명희생을 치르고 더 많은 무기와  물자를 상실했다. 그 상세한 내역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크리보셰프가 정리한 쿠르스크 방어작전에서 붉은군대가 입은 손실을 살펴보자.(표 5.) 이 표를 보면 스텝 전선군의 사상자는 보로네지 전선군의 사상자와 거의 비슷해서 고작 90명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두 전선군의 사상자를 합친 뒤 딱 둘로 나눈게 아니냐는 느낌이 들 정도다. 사상자 숫자는 동일하고 두 전선군의 전투서열만 다를 뿐이다.


표5. 쿠르스크 전략방어작전 기간 중의 전투서열과 병력 및 사상자 통계
부대 및 작전 참여일수
작전 개시 당시 전투서열과 병력
작전에서 발생한 인명손실
부대
병력
완전손실
부상 및 질병
총계
일평균
중부전선군
(43.7.5~11)
41개 소총병사단
1개 대전차사단
4개 전차군단
5개 소총병여단
3개 독립전차여단
3개 요새지대
738,000
15,336
18,561
33,897
4,842
보로네지전선군
(전기간)
35개 소총병사단
1개 기계화군단
4개 전차군단
6개 독립전차여단
534,700
27,542
46,350
73,892
3,889
스텝전선군
(43.7.9~23)
-
-
27,452
42,606
70,058
4,670
총계
77개 사단
9개 전차 및 기계화군단
14개 여단
3개 요새지대
1,272,700
70,330
107,517
177,847
9,360
Россия и СССР в войнах XX века, p.285


크리보셰프의 연구집단은 스텝 전선군이 전투에 투입된 시점의 전투서열과 병력 통계를 의도적으로 누락하고 있다. 단지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스텝 전선군 사령부와 네 개(제5근위군, 제27군, 제47군, 제53군)의 야전군, 제5근위전차군, 제5항공군, 5개 전차군단, 1개 기계화군단, 19개 사단, 1개 여단이 증원되었다고 언급할 뿐이다.123) 크리보셰프는 스텝 전선군이 7월 9일 전투에 투입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무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총사령부 예비대로 후방에 대기하고 있었던 스텝 군관구가 전선군으로 개칭된 것은 7월 10일이다. 당시 스텝 전선군은 전선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후방에 있었다. 스텝전선군이 전투에 투입된 것은 7월 19일이었고 예하 부대들이 실제로 전투를 시작한 것은 7월 20일이었다.
보로네지 전선군의 방어 작전은 공식적으로 7월 23일 종료됐다. 이 날자는 1943년 7월 24일 최고사령부가 쿠르스크 전투의 결과에 대해 발표한 포고에 따른 것이다. 최고사령부 포고는 ‘7월 23일, 바로 어제 독일군이 오룔 지구와 벨고로드 북부 지구에서 쿠르스크 방면으로 감행한 7월 공세를 최종적으로 격퇴했다.” 즉 스텝전선군이 전투에 참여한 것은 불과 4일 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크리보셰프의 통계에 따르면 스텝전선군은 전력의 13.8%를 잃었고 그 손실이 19일에 걸쳐 격전을 치른 보로네지 전선군과 같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제5근위전차군과 제5근위군이 전투에 투입된 날자를 적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 두 부대는 당시 보로네지 전선군 소속이었다. 스텝 전선군 사령관 코네프Иван Степанович Конев는 완편 상태인 자도프Алексей Семёнович Жадов의 제5근위군과 로트미스트로프Павел Алексеевич Ротмистров의 제5근위전차군을 차출당하고 그 대신 전력이 약화된 슈밀로프Михаил Степанович Шумилов의 제8근위군과 크류쵼킨Василий Дмитриевич Крючёнкин의 제69군을 배속받게 된 조치에 격렬히 반발했다. 이러한 병력 이동으로 스텝 전선군은 55,000명의 병력을 잃었다. 코네프의 참모장 카자코프Михаил Ильич Казаков에 따르면 스텝 전선군 사령부는 최고사령부로 부터 보로네지 전선군에 배속될 예정인 제47군 소속 사단에서 병력을 차출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다. 제47군도 병력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선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3월에 제47군에서 병력을 차출했다. 이렇게 해서 약 10개 대대를 차출해 제69군의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크리보셰프 연구집단은 쿠르스크 전략방어작전에 투입된 소련군의 총 병력을 계산하면서 스텝 전선군을 빠트렸다. 이 오류를 정정해보자. 1943년 7월 20일 스텝 전선군의 병력은 다음과 같았다. 편제표 상으로는 572,683명, 실제 병력은 451,524명이었다. 이중 제4근위군은 83,391명(편제상 83,385명), 제7근위군은 80,367명(편제상 118,919명), 제47군은 82,831명(편제상 93,807명), 제53군 72,035명(편제상 85,480명), 제69군 70,028명(편제상 111,562명), 제5항공군 16,316명(편제상 18,220명), 전선군 직할대 46,556명(편제상 61,310명).124) 7월에 제27군과 제47군은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다. 7월20일 기준으로 스텝 전선군의 제1제대 공격부대로 투입된 제7근위군과 제69군, 제53군 등 3개 야전군의 총 병력은 222,400명이었다. 크리보셰프 연구집단은 스텝 전선군의 사상자를 집계할 때 7월 20일 부터 23일까지의 기간만 포함했다. 하지만 최고사령부의 문서를 보면 보로네지 전선군과 스텝 전선군 예하 부대들은 7월 23일 이후에도 공격을 계속했다.(제5근위전차군은 예외이다.) 7월 23일 이후에 발생한 인명 손실도 포함하는게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던 사단들은 적의 공세 개시선인 벨고로드 선을 점령하려 했기 때문에 7월 말 까지도 전투가 계속됐다. 예를들어 제93근위소총병사단은 부대원들의 체력과 정신력이 고갈되어 7월 30일 공세를 중단했다. 이때 사단의 실 전투병력은 220명에 불과했다.125) 제5근위군은 7월 23일 이후의 작전에서 거의 8,000명을 잃었다. 이 수치는 이 부대가 7월에 입은 총 인명손실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것이다. 제69군은 14,000명을 잃었다. 7월 23일 이후에 발생한 인명손실은 어디에 넣어야 하는가? 그냥 아무데나 포함시키면 되는가?
크리보셰프 연구집단은 보로네지 전선군의 사상자 일부를 스텝 전선군 사상자에 포함시켜 두 전선군의 총 사상자와 완전손실을 비슷하게 만들었다. 쿠르스크 전투의 추이를 보면 두 전선군의 사상자 숫자가 동일할 수 없다는 점이 명백하다. 1943년 7월 24일 보로네지 전선군 참모장이 총참모부에 제출한 보고서를 보면 보로네지 전선군은 19일간의 작전에서 100,932명의 병력을 잃었다. 이것은 크리보셰프의 통계보다 27,040명이 더 많은 것이다. 게다가 독일군의 주력이 공세 개시선으로 퇴각한 7월 20일에서 31일 사이에 코네프의 스텝전선군은 34,449명의 사병과 장교를 잃었는데 이 수치는 크리보셰프의 팀이 집계한 스텝전선군 인명손실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이다.126) 연방국방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한 사료를 분석한 결과 표6과 같이 완전히 다른 통계가 나왔다.(스텝전선군의 인명손실은 2와 5에 있다.)


표6. 다양한 자료 출처를 통해 집계한 쿠르스크 전략방어작전 기간 중 보로네지 전선군과 스텝 전선군의 인명손실
인명손실 유형
크리보셰프의 통계
(7월 5일~23일: 총19일)*
각 전선군 사령부의 보고내용**
작전 전 기간


7월 전체
7월 4일~16일
7월 16일~22일
(1)
(2)
7월 4일~22일
(3)
(4)
(5)
(6)
보로네지 전선군
완전손실
27,542
46,505
42,977
3,528
61,302
전사자

20,578
18,097
2,481
30,003
행불자

25,898
24,851
1,047
31,226
부상 및 질병
46,350
54,427
47,272
7,155
92,196
총계
73,892
100,932
90,249
10,683
154,352
스텝전선군

7월 9일~23일


7월 20일~31일
7월 전체
완전손실
27,452

-
8,657
8,748
전사자


-
6,167
6,258
행불자


-
2,490
2,490
부상 및 질병
42,606

-
25,683
25,792
총계
70,058
21,000
-
34,340
34,686
양 전선군 총계
143,950
122,000
-
45,023
189,038
*Гриф секретности снят : потери Вооруженных Сил СССР в войнах, p.188
**TsAMO RF, f.203, op.2843, d.301, 1. 255; f.240, op. 2785, d. 3,1.294ob.
***Ibid., f.203, op.2870, d.44, 11. 801, 840, 848, 931; f.426, op. 10753, d.8; 240, op. 2795, d.35, 1. 123; f. 7th Guard Army, op. 5317, d.11, 1. 376(필자가 직접 계산함. 이 표의 사상자 분류는 주요 범주만 표시한 것임.)


어째서 각 전선군의 사상자 통계가 이토록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인가? 7월의 사상자 보고를 살펴보자. 실제 사례를 보면 (그리고 크리보셰프도 인정한 바와 같이) 인명피해 유형과 계급별로 나누어 집계한 월간 사상자 보고가 훨씬 완전하고 정확하다.(표 6의 6번 항목) 게다가 보로네지 전선군과 스텝 전선군은 7월 말 까지도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월말이 되면 사령부는 훨씬 자세한 사상자 집계를 할 수 있게 된다.
월간 사상자 보고에 따르면 보로네지 전선군은 1943년 7월 1일 부터 30일까지 총 99,596명의 사병과 장교를 잃었다.127)  이 수치는 보로네지 전선군 참모장의 보고서에 있는 통계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보로네지 전선군의 사상자를 계급별로 집계한 통계가 있는 사료가 더 있다. 이 자료에 있는 보로네지 전선군의 사상자 숫자는 『기밀해제: 소련군이 전쟁에서 입은 인명손실Гриф секретности снят : потери Вооруженных Сил СССР в войнах』 에 실린 사상자보다  1.5배나 더 많다.(표 7을 참고하라.)


표7. 보로네지 전선군이 1943년 7월에 입은 인명손실

장  교
부사관
사  병
총  계
7월 1일~15일
7,648
31,574
70,877
110,099
7월 15일~8월 1일
2,911
10,035
25,294
38,240
총  계
10,559
41,609
96,171
148,339
비  율
7.1
28.1
64.8
100.0
TsAMO RF, f.203, op.2843, d.427, 1. 17.


이렇게 많은 차이가 생긴 이유는 스텝 전선군으로 배속 변경된 제7근위군과 제69군에서 7월1일 부터 15일까지 발생한 사상자(제 7근위군 23,390명, 제69군 26,267명, 총 52,657명)를 보고에서 제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텝 전선군의 문서에는 이 두 야전군이 배속된 시점 부터 사상자를 집계하고 있다. 이게 논리적으로 옳다. 코네프는 자신이 지휘하지도 않았던 부대가 입은 인명손실의 책임을 질 생각이 없었다.(코네프가 살아있었다면 크리보셰프의 통계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 제7근위군과 제69군이 7월 5일 부터 20일까지 입은 인명손실은 보로네지 전선군과 스텝 전선군의 보고에서 누락됐다. 이런 통계를 신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오락가락하는 통계를 정리해 보자. 표8에 있는 두 전선군의 사상자 통계는 집계를 보다 명확하고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정리한 것이다. 제7근위군과 제69군의 사상자 통계는 두 시기로 나누었다. 7월 1일 부터 19일까지는 보로네지 전선군에 포함시켰고(7월 1일 부터 15일까지 집계한 수치 보다 훨씬 손실이 많다.), 7월 20일 부터 31일까지는 스텝 전선군에 포함시켰다. 이렇게 해야 두 전선군의 사상자 통계를 작전의 추이에 맞춰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표 8을 참고하라.)
스텝 전선군에서 증원 받은 야전군을 포함할 경우 보로네지 전선군의 사상자는 사병과 장교 154,600명이 된다. 이것은 전선군 총 병력의 24%에 해당한다. 보로네지 전선군은 스텝 전선군 보다 4.5배 많은 인명손실을 냈다. 스텝 전선군은 총 병력의 7.7%에 해당하는 병력을 잃었다.128) 즉 크리보셰프의 통계는 7월 5일 부터 19일까지 제7근위군과 제69군이 입은 인명손실을 누락한 것이 맞다. 두 전선군이 7월 4일 부터 16일까지의 방어작전 기간 중 입은 일평균 인명손실은 최소 12,000명의 사병과 장교다. 이 수치는 표5에 정리된 수치 보다 세배나 많다.
그러므로 보충병력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보로네지 전선군과 스텝 전선군이 1943년 7월에 잃은 병력은 최소 190,000명에 달한다. 특히 행방불명자가 많았는데 그 숫자는 33,000명으로 총 인명손실의 20%에 달한다. 행방불명자의 대다수가 포로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독일 사료에 따르면 독일군은 7월 13일까지 24,000명의 소련군을 생포했고 7월 13일 부터 16일까지 10,000명을 더 사로잡았다.129) 소련군이 독일군 보다 더 많은 병력과 장비를 보유했음을 감안하면 이것은 엄청난 손실이다.
1943년 7월의 전투에서 가장 큰 인명피해를 입은 부대는 제69군이었다. 제69군은 40,500명을 잃었고 이중 18,800명이 완전손실이었다.(총 손실의 46%) 그리고 이 중에서 12,400명이 행방불명자였다.(총 손실의 31%) 제7근위군은 7월에 38,300명을 잃었다. 이 중 포로는 4,000명이었다. 이 두 야전군은 79,000명의 사병과 장교를 잃었다. 스텝 전선군에 배속되기 전 까지 입은 손실은 55,000명이고 이 중 14,500명(총 손실의 26%)가 행방불명자이다.130)
1943년 7월에 발생한 인명 손실 통계를 보다 정확히 산출함으로서 양 전선군이 7월 23일까지의 방어작전에서 입은 인명피해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계산 과정까지 설명하면 글이 매우 길어지므로 집계 결과만 바로 공개한다. 보로네지 전선군은 7월 한달간 154,600명의 병력을 잃었다. 방어작전 기간 중의 인명피해는 제27군과 제47군을 제외하고 144,000명이다. 이것은 배속된 예비대까지 포함할 경우 작전 시작 당시 보로네지 전선군 총병력의 22%가 된다. 일 평균 사상자는 7,579명으로 공식 통계보다 두 배나 많다. 스텝 전선군은 7월 20일 부터 23일 사이에 22,000명을 잃었는데 이것은 총 병력의 5%에 해당한다. 일 평균 인명손실은 5,500명이다. 두 전선군은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 전선에서 166,000명을 잃었는데 이 수치는 크리보셰프의 공식 집계보다 22,000명 더 많다.


표8. 1943년 7월 보로네지 전선군과 스텝 전선군의 인명피해*

부대
인명손실
총계**
완전손실
질병 및 부상
포로
기타
전사
실종
총계
부상
질병
보로네지전선군
5근위전차군(7월 6일 이후)
10,545
2,780
1,079
3,859
6,465
174
2
45
2근위전차군단
2,314
789
27
816
1,450
46

2
2전차군단(7월 8일 이후)
2,669
490
1,094
1,584
1,073
9

3
5근위군
23,848
4,881
1,070
5,951
16,981
790

126
6근위군
28,784
5,051
8,041
13,092
14,718
732
36
206
1전차군
12,929
3,517
2,145
5,662
6,847
378

42
40군
10,784
1,430
2,565
3,995
5,138
1,530
2
119
38군
3,813
460
271
731
1,856
1,171

55
27군****
1,362
28

28
56
1,188

90
47군****
1,254
34

34
52
1,122

46
2항공군
588
97
352
449
92
39

8
전선군직할대
706
101
20
121
243
328

14
제7근위군과 제69군을 제외한 전선군 총계
99,596
19,658
16,664
36,322
54,971
7,507
40
756
제69군(7월 1일~19일)
26,415
4,351
10,587
14,938
11,024
387
27
39
제7근위군(7월 1일~19일)
28,578
6,086
3,969
10,055
17,867
591
6
59
전선군총계
154,589
30,095
31,220
61,315
83,862
8,485
73
854
스텝전선군(7월 20일~31일)
69군
14,105
2,018
1,807
3,825
9,927
295
43
15
7근위군*****
9,713
2,222
102
2,324
7,066
286
2
35
53군
10,239
1,860
407
2,267
7,345
605

22
5군 및 전선군 직할대
392
66
180
246
57
60

29
전선군 총계
34,449
6,166
2,496
8,662
24,395
1,246
45
101
양 전선군 합계
189,038
36,261
33,716
69,977
108,257
9,731
118
955
*TsAMO RF, f.203, op.2870, d.44, 11. 801, 840, 848, 931; f.426, op. 10753, d.8; f.240, op.2795, d.35, 1. 123; f. 7th Guard Army, op.5317, d.11, 1. 37.
**사상자를 집계할때 병력 보충 현황은 제외했다.
***각 부대의 보고서에 따른 것이다.
****제27군과 제47군은 7월에는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다.
*****제81근위소총병사단의 사상자 4,152명은 제7근위군에 포함시켰다.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전선의 방어작전에서 보로네지 전선군과 스텝 전선군은 독일군 보다 3.8배나 많은 인명손실을 입은 것이다.(44,000명 대 166,000명)131)


크리보셰프가 집계한 중부 전선군의 사상자 통계도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크리보셰프는 중부 전선군이 총 병력의 4.6%인 33,897명을 잃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중부 전선군의 병력은 오룔 공세작전이 개시된 7월 12일 시점에 이미 92,700명이나 줄어든 상태였다.132) 다른 사료를 보면 이 시기 중부 전선군의 병력은 711,570명에서 640,975명으로 70,595명이 줄어있었고 전투병력만 꼽으면 510,983명에서 440,383명으로 70,600명이 줄어 있었다.133) 이 수치에 주목하자. 방어작전 기간 중 중부 전선군의 전투서열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2개 소총병여단이 전투서열에서 빠지고 새로 1개 전차여단이 배속됐다. 즉 편제 개편으로 인한 병력 변화는 최대 7,000명이다. 중부전선군은 7월 5일 부터 11일 사이에 7월 1일 기준 전선군 총 병력의 12%에 달하는 63,000명을 잃었는데 이것은 전투손실이 틀림없다. 이 수치는 크리보셰프가 제시한 인명손실 보다 29,000명이나 더 많은 것이다.
중부 전선군, 보로네지 전선군, 스텝 전선군 등 총 3개 전선군은 쿠르스크 방어작전 기간 중 229,000명의 병력을 잃었다. 이 수치는 크리보셰프의 『기밀해제』에 실린 수치 보다 85,000명이나 더 많은 것이다. 같은 시기 독일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의 병력 손실은 약 70,000명이다. 즉 양측의 교환비는 1:3.3(70,000:229,000)으로 독일군이 유리하다.134)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소련군의 인명손실을 집계할때는 오직 연방국방문서보관소의 사료만을 활용하는 데도 이렇게 큰 차이가 발생하고 완전히 다른 결론이 도출된다는 점이다. 즉 붉은군대의 인명손실을 다시 검증해서 집계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대부분의 경우 사상자가 증가할 것이다.


2005년 말 제2차세계대전사 학회의 모임에서 크리보셰프는 ‘기존에 발표된 통계를 바로잡을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부정적으로 답했다. 우리 중 한 사람(로푸호프스키)은 이날 크리보셰프에게 프로호로브카 전투를 연구한 책을 증정하면서 그에게 『기밀해제』에 실린 각 전선군의 사상자 통계를 조작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다. 『기밀해제』 집필에 참여한 연구자들은 통계를 조작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크리보셰프의 연구팀원 중 한 사람이 로푸호프스키의 주소를 받아 적은 뒤 반드시 답변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로푸호프스키는 아직도 크리보셰프의 답변을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로푸호프스키의 연구도 크리보셰프의 연구와 동일한 사료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총참모부의 장교들과 사적으로 대화를 나누었을때 그들은 당시 총참모부 문서보관소의 소장과 기념사업회 회장을 비판하는 것은 헛수고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들의 공적인 지위 때문에 붉은군대가 대조국전쟁에서 입은 인명손실 문제에 있어서 공식적인 노선을 지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붉은 군대의 사상자 통계를 이렇게 조작하는 것일까? 어째서 『기밀해제』의 집필자들은 스텝 전선군 사령부가 7월 20일 부터 31일까지 발생한 인명손실을 보고한 내용을 무시하는 것일까? 이들은 『기밀해제』 개정판에서 쿠르스크 전략방어작전을 다루는 분량을 두 배로 늘리고 ‘양군의 병력 구성’과 ‘작전의 추이’를 다루는 소절을 추가했다.135) 하지만 구판과 마찬가지로 스텝 전선군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신판에서도 스텝 전선군과 보로네지 전선군의 사상자 숫자는 동일하다. 보로네지 전선군과 스텝 전선군의 사상자 통계를 아무런 근거 없이 나눈 것은 보로네지 전선군이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독일군과의 교환비가 불리했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의도라고 판단된다.
쿠르스크 방어작전에서 소련군은 독일군의 공세를 격퇴하기 위해 막대한 인명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이때문에 간혹 아군이 먼저 숫적인 우위를 활용해 전략 공세로 나가 독일군의 공세를 사전에 막는게 훨씬 나았을 것이며 전략적으로 방어를 취한것이 실책이었다는 의견이 나온다. 오늘날 사건의 결과를 아는 상태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우리는 방어를 취한 것이 실책이었다기 보다는 숫적인 우위를 살리지 못한 것 자체가 문제였다고 본다.
1968년 쿠르스크 전투 승리 25주년을 맞아 군사과학 학술대회가 열렸다. 전투의 결과에 대한 토론에서 이 당시의 정치적 환경을 고려하면 꽤 대담한 결론이 나왔다.


“쿠르스크 전투는 물론 대조국전쟁 시기의 다른 전투와 작전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사상자 문제를 주의깊게 조사할 필요성이 시급하다고 판단된다. 전투로 인해 발생한 사상자를 밝혀야만 쿠르스크 전투에서 각 야전군과 지휘관들이 수행한 역할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136)


『기밀해제』의 발간은 쿠르스크 전투의 승리 50주년에 맞춰 이뤄졌다. 그리고 1993년 7월 12일 전례 없는 행사가 열렸다. 소련의 적국이었던 독일 군사사가들이 참여한 군사사 학술대회가 열린 것이다. 당시 독일연방군사사 연구소의 연구원이었던 역사학 박사 칼 하인츠 프리저Karl-Heinz Frieser 중령을 필두로 한 독일 연구자들이 학술대회에 참석했다. 프리저 중령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과 사료들을 소개했다.137)
독일에서도 쿠르스크 전투 50주년을 기념해 유사한 학술행사를 기획했다. 크리보셰프의 연구집단이 독일 학자들과의 논쟁에 대비해 쿠르스크 방어작전에 관한 내용을 손질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때문에 『기밀해제』 집필진은 스텝 전선군과 그 손실에 대한 언급을 회피한 것이다. 군사백과사전의 신판에도 스텝 전선군이 쿠르스크 돌출부 방어작전에서 수행한 역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방어 전투 기간 중 보로네지 전선군과 중부 전선군 예하 부대들은 적 충격집단을 소모시켰다. 독일군은 공세 기간 중 100,000명의 병력과 1,200대의 전차, 850대의 야포와 박격포, 1,500대 이상의 항공기를 잃었다.”138) 독일군의 손실을 어떤 자료로 집계한 것인지는 일절 언급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한 날조를 통해 양측의 교환비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맞췄다. 중부 전선군과 보로네지 전선군은 크리보세프의 집계에 따라 107,800명을 잃었고 독일군은 100,000명을 잃었다. 속편하게도 이런 통계를 들고 국제학술대회에 나간 것이다.


독일 잉골슈타트Ingolstadt에서 열린 학술대회에 참석했던 러시아 연구자 한 명은 쿠르스크 전투 당시 양측의 교환비는 4.3:1로 독일군이 우세했다고 평가했다. 독일군의 공세 단계에서는 2:1로 독일군이 우세했고 아군의 반격 단계에서는 6:1로 소련군이 불리했다는 것이다.139) 아군의 반격 단계에서의 손실 추정치는 스텝 전선군의 사상자를 비정상적으로 높게 평가한 것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물론 쿠르스크 전투에서 발생한 인명손실을 축소한 것은 1941년의 패배에서 입은 인명손실을 축소한 것에 비하면 약과다. 하지만 이 경우 크리보셰프 연구집단의 정치적 편향성과 대조국전쟁의 극적인 전환점인 쿠르스크 전투의 실상을 날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크리보셰프 연구집단은 인명손실 뿐만 아니라 무기와 물자의 손실도 날조하는 일관성을 보여줬다.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관 바투틴Николай Федорович Ватутин 장군은 보고서에서 보로네지 전선군이 1,387대의 전차와 33대의 자주포를 잃었다고 밝혔다. 한편 보로네지 전선군 참모부는 7월 5일 부터 23일까지 전선군이 전차 1,571대와 자주포 57대를 잃었다고 보고했다.140) 그런데 크리보셰프의 연구를 보면 중부 전선군, 보로네지 전선군, 스텝 전선군을 합친 손실이 전차와 자주포 1,614대에 불과하다141) 이건 보로네지 전선군이 잃은 기갑차량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붉은군대 기갑총국의 7월 23일자 보고서를 보면 보로네지 전선군은 총 2,924대의 전차 중 1,254대를 잃었다.(이것은 증원된 전차 부대까지 포함한 수치이다.) 또 다른 문서를 보면 보로네지 전선군은 7월 5일 부터 13일까지 1,223대의 전차를 잃었다고 되어 있다.(만약 이 문서가 사실이라면 보로네지 전선군이 그 다음주에 입은 전차 손실은 고작 31대 밖에 안되고, 이것은 제5근위전차군의 손실통계와도 맞지 않는다.)
7월 17일 기갑총국 부참모장 자예프Дмитрий Иванович Заев 대령은 보로네지 전선군이 7월 5일 부터 15일까지 890대의 전차를 잃었다고 보고했다.(전차와 자주포를 모두 합친 것으로 추정된다.)142) 자예프는 제5근위전차군의 전차 손실을 누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로트미스트로프의 제5근위전차군이 입은 손실(전차와 자주포 334대)을 여기에 더하면 비슷한 수치가 나온다. 1,224대 또는 1,254대의 손실이다. 보로네지 전선군의 전차 손실이 1,254대라고 치면 7월 20일 기준으로 3개 전선군은 1,900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보고서들에 기록된 보로네지 전선군 손실의 평균치(전차와 자주포 1,500대)와 독일군의 전차 손실(320)을 비교하면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전선에서 양군의 기갑차량 교환비는 4.7:1로 독일군이 우세하다.143)
1993년 9월 잉골슈타트에서 열린 제35회 국제군사사학회에 참석했던 소련 대표 중 한명인 벤코프 대령(총참모부 문서보관소 소장 겸 추모사업회의 회장)은 크리보셰프 연구팀의 통계를 인용했다. 그는 보로네지 전선군이 890대의 전차를 잃은 반면 독일 남부집단군은 2,644대의 전차와 35대의 자주포를 잃었다고 주장했다.(소련측 기록을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중부전선군은 7월 5일 부터 15일까지 651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잃었지만 같은 기간 독일 중부집단군은 928대를 잃었다고 주장했다.144) 이 학술대회에 참가한 독일 연구자들이 이 ‘발견’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국방위원회 성원이자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였던 말렌코프Георгий Максимилианович Маленков가 이끄는 조사단이 제5근위전차군의 반격 실패와 막대한 손실의 원인을 조사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다. 말렌코프 위원회가 보로네지 전선군을 조사한 수백쪽에 달하는 보고서는 현재 러시아 대통령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다.(이 문서고는 과거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문서고였다.) 일반 연구자들은 이 문서고에 들어갈 수 없다. 왜 이 보고서는 아직도 기밀인가? 쿠르스크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독일군이고 승리한 것은 소련군이 아니던가? 즉 뭔가 숨겨야 할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바실례프스키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Василевский가 스탈린에게 보고한 것 처럼 병력과 전차의 손실은 단순한 통계 문제가 아니다. 말렌코프 보고서에는 양군의 교환비가 큰 차이를 보인 원인이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공격자가 방어자 보다 세배 많은 손실을 입는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후략)


주 석
122) Rossiia i SSSR v voinakh XX veka, 2001, p.285.
123) Ibid.
124) TsAMO RF, f. 240, op.2795, d.38, 1. 1.
125) TsAMO RF, f.1262, op. 1, d. 28, ll. 2~7; d. 11, ll. 11~33. 소총병 사단의 전투 병력은 소총병 부대와 정찰대, 공병대를 합산한 것이다.
126)  Ibid., f. 240, op. 2795, d. 35, 1. 123.
127) TsAMO RF, f. 203, op. 2870, d.44, 1. 931.
128) 스텝 전선군의 병력은 1943년 7월 20일 기준으로 451,524명이었다.(편제표 상으로는 572,683명). 세부 내역은 다음과 같다. 제4근위군93,391명(83,385명), 제7근위군 80,637명(118,919명), 제47군 82,381명(93,807명), 제53군 72,035명(85,480명), 제69군 70,028명(111,562명), 제5항공군 16,316명(18,220명), 전선군 직할대 46,556명(61,310명) 이 통계의 출처는 TsAMO RF, f.240, op.2795, d.38, 1. 1.이다.
129) E. Manstein, Uteriannye pobedy(Moscow: ACT, 1999), pp.532, 535.
130) 각 야전군과 전선군의 구체적인 사상자 통계는 L. N. Lopukhovsky, Prokhorovka, Bez grifa sekretnosto, (Moscow: Iauza-Eksmo, 2008), pp.503~14를 참고하라.
131) 자세한 사항은 ibid., pp.521~3을 참고하라.
132) Grif Sekretnosti Sniat, pp.188, 189.
133) Russky arkhiv: Velikaia Otechestvennaia. Kurskaia bitva. Dokumentry i materialy. 27 marta-23 avgusta 1943 g., Vol. 15(4-4) (Moscow: TERRA, 1997), pp. 394, 395, 401.
134) 자세한 사항은 Lopukhovsky, Prokhorovka, Bez grifa sekretnosto, p.524~5를 참고하라.
135) G. F. Krivosheev, V. M. Andronikov, P. D. Burikov, et al., Rossiia i SSSR v voinakh XX veka. Kniga poter’ (Moscow: Veche, 2010), pp.299~301.
136) 자세한 사항은 Lopukhovsky, Prokhorovka, Bez grifa sekretnosto, p.549를 참고하라.
137) K. H. Frieser, Paper: ‘The German Offensive against Kursk. Illusions and Legendes.’
138) Voennaia entsiklopediia, Vol.4 (Moscow: IVI, 1999), p.361.
139) N. M. Ramanichev, ‘Bitva pod Kurskom. Doklad na simpoziume v Ingol’shtadte’, Vortrage zur Miltärgeschichte, Vol.15.(Hamburg, Berlin, Bonn; Verlag E. S. Mittler und Sohn: 1996), p.62.
140) TsAMO RF, f. 236, op.2673, d.6, 11. 48~51; f.203, op.2843, d.301, 1. 204.
141) Russia and the USSR in Wars of the 20th Century, 2001, p.485.
142) K. H. Frieser, ‘Schlagen aus der Nachhand- Schlagen aus der Vorhand. Die Schlachten von Charkov und Kursk’ Vortrage zur Miltärgeschichte, Vol.15., p.129, 주석 57.
143) 자세한 사항은 Lopukhovsky, Prokhorovka, Bez grifa sekretnosto, pp.488~92, 501, 502를 참고하라.
144) I. N. Venkov, ‘Doklad na simposiume v Ingol’stdte’, Vortrage zur Miltärgeschichte, Vol.15., p.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