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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16일 금요일

스티븐 잘로가의 2차대전 기갑전 저작에 관한 잡담

아마 스티븐 잘로가는 기갑전과 관련해 가장 유명한 저술가일 것 입니다. 기갑전에 대한 저술을 오랫동안 해 왔고 다루는 범위도 매우 광범위합니다. 최근 몇년간은 제2차대전 시기 유럽전선의 기갑전에 대한 저작을  집중적으로 간행하면서 ‘독일 기갑부대의 신화’를 깨트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잘로가의 주장은 큰 틀에서 매우 합리적입니다. 그는 기갑전에서 개별 전차의 성능 문제를 무시할 수 는 없으나 타 병과와의 협동, 전차 승무원의 숙련도 같은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잘로가가 제시하는 대전제는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례를 분석하는데 있어서는 꽤 많은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미군 기갑부대의 작전을 설명하는데 있어 그렇습니다.


먼저 사료의 활용이 부적절합니다. 잘로가가 자주 사용하는 자료 중 하나는 ‘Ballistic Research Laboratories Memorandum Report 798’입니다. 잘로가는 Panther vs Sherman (Duel)의 결론 부분에서 이 자료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미육군의 탄도학연구소는 전차전에서 승리하는데 어떤 요소가 중요한지 파악하기 위해서 전차전에 대한 작전연구를 수행했다. 전쟁 중에는 어느 진영도 통계자료를 규칙적으로 취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탄도학연구소의 분석팀은 미 3기갑사단과 4기갑사단의 기록을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이 두 기갑사단은 미군의 다른 기갑사단들과 비교했을때 평균, 혹은 그 이상의 전차전을 경험했다. 총 98건의 교전을 골라내 계량화 했으며 시기는 1944년 8월 부터 12월 말 까지였다. 이 중 33건이 아르덴느 전투 시기의 교전이었다.”1)


이 서술만 보면 98건 모두가 전차 대 전차의 교전을 분석한 것이라는 인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98건에는 전차 대 대전차포, 전차 대 보병 교전까지 포함되어 있어 순수한 전차전에 해당하는 사례는 훨씬 적습니다. 게다가 잘로가가 비판하고 싶어하는 셔먼 대 판터의 교전 결과로 한정하면 그 사례는 더 줄어들고 그것도 대부분 로렌 전역 시기의 사례로 한정됩니다. BRL798에 실려있는 아르덴느 전투 시기 셔먼 대 판터의 교전 사례는 제3기갑사단이 9건, 제4기갑사단이 6건에 불과합니다.


잘로가는 이 부족한 사례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해 냅니다.


“셔먼과 판터가 격돌한 29건의 전투를 보면 평균적으로 셔먼이 판터보다 1.2배 많았다. 이 자료를 보면 판터는 방어 전투시 셔먼에 비해 1.1배 효율적이었으나, 셔먼이 방어 전투시에는 판터에 비해 8.4배 효율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셔먼은 전체적으로 판터에 비해 3.6배 효율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 보고서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 전쟁 기간 중 있었던 전형적인 셔먼 대 판터의 교전 양상을 보여주지는 못할 것이며, 그 원인은 데이터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셔먼과 판터의 교환비율이 5대 1이라는 대중적으로 널리 퍼져있는 소문은 역사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  전차전의 결과는 기술적인 측면 보다는 전술적인 상황에 더 큰 영향을 받았다. 기술적으로 우수하더라도 전술적인 상황이 더 큰 영향을 끼쳤다. 경험이 풍부한 전차장이 적을 먼저 발견할 가능성이 높았고, 훈련이 잘 된 승무원들이 잘 협력해서 선제 공격을 가할 가능성이 높았고, 우수한 사수가 먼저 적을 명중 시킬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전차전에서는 전차병의 훈련 수준은 중요한 요인이었다. 하지만 우수한 승무원이 우수한 전차를 타고 전진해올 때 그저 그런 수준의 승무원이 그저 그런 수준의 전차에 타고 매복을 하고 있었다면 매복을 하고 있는 쪽이 우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2)


여기서 잘로가가 말한 29건 중 다수는 벌지 전투 이전, 특히 로렌 전역의 제4기갑사단의 교전 사례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BRL798에서 벌지전투 당시 제3기갑사단의 셔먼과 판터의 교전 결과만 놓고 분석하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순수하게 셔먼과 판터가 교전한 전투에서는 판터 1대가 격파될 때 셔먼 13대가 격파되는 결과가 나옵니다.(셔먼 총 13대 파괴, 판터 총 1대 파괴). 제 3기갑사단의 교전결과에 M5까지 포함했을 때는 좀 낫습니다. 판터 1대가 격파될 때 미국 전차 11.3대가 격파된다는 결과가 나옵니다.(미국 전차 총 34대 파괴, 판터 3대 파괴) 그리고 구축전차까지 포함하면 판터 1대가 격파될 때 미국 기갑차량 7대가 격파되는 걸로 나옵니다.(미국 기갑차량 총 35대 파괴, 판터 5대 파괴) 이것이 교차검증은 전혀 거치지 않은, 미군 기록에만 의존한 결과임을 고려한다면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잘로가가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려고 노력하는 로렌 전역당시 4기갑사단의 경우, 전투 보고서가 심각하게 전과를 과장하고 있으며 이 점은 잘로가의 다른 저작인 Armored Champion: The Top Tanks of World War II에서도 인정하고 있습니다.3) 그러니 전투보고서들을 교차검증 없이 그대로 인용한 BRL798의 결론도 좀 회의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잘로가는 같은 해에 나온 Armored Thunderbolt: The U.S. Army Sherman in World War II에서도 동일한 자료를 동일한 방식으로 인용해 동일한 주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4)


잘로가는 이상할 정도로 로렌 전역에 집착하고 있는데 얼마전에는 로렌 전역을 다룬 단행본을 한권 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지그프리트 방어선 전역에서 있었던 기갑전들은 소규모 전투에 불과하다며 언급을 회피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미군이 고전한 사례로 꼽히는 푸펜도르프 전투 같은 것은 잘로가의 저작에서 거의 언급이 안된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참고로, 푸펜도르프 전투는 미육군의 제2차세계대전 공간사에서 퍼싱 전차의 개발사를 서술하기 전에 미군과 독일군의 기갑 장비의 성능 격차를 논하면서  중요하게 언급하는 전투입니다.5)  


※ BRL798의 로렌전역 데이터 분석에 관해서는 "미 제4기갑사단이 아라쿠르 전투에서 거둔 전과에 대한 잡설"에서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물론 잘로가는 BRL798에 있는 사례 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로가의 다른 저작들을 보면 그가 의도적으로 미군에게 유리한 사례만을 뽑아내려고 한다는 의심을 거둘 수 없습니다. 그는 Armored Champion: The Top Tanks of World War II에서 벌지 전투 당시의 기갑전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2주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아르덴느에 투입된 독일 전차연대들은 완전히 격파됐다. 최강의 부대였던 8개의 판터 대대들은 전투가 시작될 당시 415대의 판터를 가지고 있었으나 전투가 끝날 무렵에는 가동 가능한 숫자가 105대로 줄어들었다. 전체 손실 중 180대는 완전 손실이었고 나머지는 파손, 혹은 기계적 고장에 의한 손실이었다. 이 전투에서도 또다시 판터의 기계적 신뢰성 문제가 드러났는데 특히 최종 구동축이 심각했다. 부하가 많이 걸리는 판터의 변속기는 경험이 많은 조종수나 다룰수 있었지만, 아르덴느 전투에 투입된 신참 승무원들은 새로 생산된 전차를 늦게 수령했거나 훈련에 필요한 연료를 조달하기 힘들어서 제대로 훈련을 받을 수 없었다. 독일측 기록에 따르면 아르덴느 공세 당시 상실한 전차의 절반 이상은 기계 고장으로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미군은 아르덴느 전투에서 독일군 보다 더 많은 전차를 잃었지만 그 이유는 단지 미군이 더 많은 전차를 보유했기 때문이었다.(U.S. tank losses in the Ardennes were numerically greater than German losses simply because the U.S. Army had so many more tanks.) 아르덴느 전투의 대부분을 담당한 미 제1군은 12월 말 까지 약 320대의 셔먼을 잃었고 그 중 90대는 M4A1/ A3(76mm)였다. 이 손실은 미 제1군의 12월 중 일일 평균 전차보유대수의 1/4에 해당하는 것 이었다. 미 제1군은 지속적으로 장비를 보충받아서 1944년 12월 말에는 1,085대의 셔먼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중 980대가 가동가능한 상태였고 기계적 불량이나 전투 중 손상으로 수리 중인 것은 9퍼센트에 불과했다.”6)


전차가 많아서 미군의 손실이 더 많았다는 서술은 읽는 이를 벙찌게 만듭니다. 태평양 전선의 미군이 일본군 보다 더 많은 비행기를 보유했다고 더 많은 비행기를 잃은 건 아니잖습니까. 벌지전투 기갑전에 대한 잘로가의 서술은 꽤 일관적인데 미군에게 불리한 결과가 나온 전투는 일절 언급을 회피한다는 점 입니다. 잘로가는 벌지 전투 초기에 투입된 미 1군 예하 기갑사단들이 막대한 손실을 입은 점은 언급을 하지 않고 다만 “아르덴느 공세 초기에는 전차전이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서술로 대충 넘어갑니다.7) 비슷한 서술은 노르트빈트 작전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나타납니다. 노르트빈트 작전에서도 미 12기갑사단이 큰 손실을 입고 많은 전차를 노획당했지만 잘로가는 그런 점은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작전에 투입된 독일군의 손실이 컸다는 점만 언급하고 있을 뿐 입니다.8)


그리고 자료의 취사선택 만큼이나 납득하기 어려운 점은 논쟁이 될 만한 부분에서 근거를 밝히지 않고 대충 넘어가는 경향입니다. 잘로가는 독일 군수산업계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면서 티거의 생산 가격에 대해서 이런 주장을 합니다.


“독일의 전차 생산 가격을 추산하는데 있어 또 한가지 문제점은 1943년의 ‘아돌프 히틀러 전차 생산계획’의 성과가 정치적으로 활용됐으며, 알베르트 슈페어의 군수생산부가 판터와 같은 신형 전차가 비용적으로 크게 효율적이라는 점을 선전하고, 전차 생산에 필요한 자본 투자의 규모를 감추거나 조작하려 했기 때문이다. 독일군에게 납품된 티거 I 한대의 가격은 300,000 마르크였으나 일본에 판매된 티거 I은 645,000천 마르크였다는 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이것이 기반 시설에 투자한 비용까지 반영한 실제 비용에 가까울 것이다.(It’s worth noting that the price for a Tiger I tank for the German army was about 300,000 RM, but the example sold to Japan was priced at 645,000 RM, an amount more likely to reflect the actual cost including industrial infrastructure investment.)9)


티거의 실제 가격이 알려진 것 보다 두 배는 축소됐다는 굉장한 주장인데 근거는 없습니다. 일본에 판매된 티거의 가격이 645,000마르크였던 이유는 전차 외에 각종 소모품, 설계 도면, 운송 비용 등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토마스 젠츠 같은 연구자들이 이미 언급한 바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로가는 특별히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과격한 주장을 합니다. 잘로가의 저작들을 보다 보면 이렇게 주장의 근거가 필요한 부분에서 이렇다 할 출처를 제시하지 않는 경우를 간혹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잘로가는 독일군의 전차 손실 기록은 완전 손실만 기록하고 격파되어 본국으로 수송되는 차량 등을 집계에서 누락하고 있어 신뢰할 수 없다는 주장을 반복합니다.10) 물론 이것은 어느 정도 타당합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실제 완전 손실은 어느 정도 이고 완파되어 본국으로 수송된 전차는 어느 정도 인지 입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잘로가는 몇가지 정황 증거는 제시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독일측 기록의 문제점은 비판하지만 미군 기록의 문제점은 지적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는 경향이 계속되는 한 잘로가의 저작은 앞으로도 의구심을 가지고 볼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주석
1) Steven J. Zaloga, Panther vs Sherman (Duel), (2008, Osprey Publishing. Kindle Edition) Kindle Locations 1067-1071.
2) Panther vs Sherman (Duel), Kindle Locations 1086-1095.
3) 1944년 9월 독일군이 로렌 전역에서 상실한 기갑차량은 총 341대이며, 미국측은 같은기간 총 1,214대의 독일 기갑차량을 격파한 것으로 집계했다고 합니다. 미국이 주장한 독일 기갑차량 격파대수는 독일군이 공세 시작전 보유한 기갑차량의 2배에 달합니다.  Steven J. Zaloga, Armored Champion: The Top Tanks of World War II, (2015, Stackpole Books. Kindle Edition)
4) Steven J. Zaloga, Armored Thunderbolt: The U.S. Army Sherman in World War II, (2008, Stackpole Books), p.231.
5) Lida Mayo, The Ordnance Department : On Beachhead and Battlefront, (1991, USGPO), pp.325~326; 참고로 David E. Johnson, Fast Tanks and Heavy Bombers: Innovation in the U.S. Army, (1998, Cornell University Press), p.195에서는 푸펜도르프 전투에서 미 2기갑사단이 57대의 전차를 상실한 반면 전차전에서 독일군의 손실은 판터 2대, 티거 II 2대에 불과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독일쪽 기록과는 조금 차이를 보이는데 독일측 기록에 따르면 전차전에서 격파된 티거 II는 1대이고 세대가 미군의 중곡사포 포격에 격파됐다고 합니다. 판터 손실은 정확히 평가하지 못하겠습니다.
6) Armored Champion: The Top Tanks of World War II, Kindle Locations 3841-3851.
7) Armored Champion: The Top Tanks of World War II, Kindle Locations 3807-3811. Armored Thunderbolt: The U.S. Army Sherman in World War II에서는 그나마 좀 더 자세히 서술하고 있지만 미군 기갑사단들의 고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8) Armored Champion: The Top Tanks of World War II, Kindle Locations 3852-3858.
9) Armored Champion: The Top Tanks of World War II, Kindle Locations 651-655.
10) Armored Champion: The Top Tanks of World War II, Kindle Locations 3572-3577.


2016년 8월 9일 화요일

[번역글] 리마 기관차 공장과 최초의 셔먼 전차

번역글 하나 나갑니다.


오늘은 The Armor Journal 3호(2015년 여름호)에 실린 마이크 헤인스Mike Haines의 “The Lima Locomotive Works: First Sherman Tanks”를 번역해 봤습니다. 리마 기관차 공장의 셔먼 생산 역사와 이곳에서 생산한 차량의 특징을 간략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글 때문에 이 잡지를 샀는데 생각보다 내용이 짤막하고 특별한 내용이 없어서 실망했습니다. 돈이 아까우니 번역이라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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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 기관차 공장과 최초의 셔먼 전차


마이크 헤인스


1940년 프랑스 전역에서 전차를 대량으로 상실한 영국은 상실한 차량을 보충하는 것은 물론 독일의 본토 침공 위협에 맞서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최대한 빨리 3,650대의 전차를 조달해야 했지만 영국은 충분한 생산 능력이 없었다. 결국 영국 정부는 미국에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전차 조달 사절단’을 보냈다. 미국 또한 유럽의 위기 때문에 전차를 필요로 했다. 또한 영국의 전차 원조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기존의 전차 보다 더 무거운 전차를 생산할 수 있는 설비를 증설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은 기관차와 철도 화차 생산 공장들이 전차와 같은 중장비 생산으로 쉽게 전환할 수 있는 생산경험이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 때문에 영국의 전차 조달 사절단은 오하이오 리마Lima의 리마 기관차 공장과 접촉해 전차 생산 가능 여부를 타진했다.


리마 기관차 공장Lima Locomotive Works, 이하 LLW는 1859년 소규모 농기구 수리공장으로 시작했으며 이때의 사명은 리마 농업사Lima Agricultural Works였다. 1869년 제재업자 에프라임 셰이Ephraim Shay가 리마 농업사에 자신이 설계한 목재 수송용 기관차를 생산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의 설계안은 기어식 구동장치를 가지고 있어 기존의 피스톤식 구동계를 가진 기관차 보다 견인력이 강했다. 리마 농업사는 셰이가 설계한 기관차를 생산하기로 하고 면허생산을 시작했다. 2년 뒤 리마 농업사의 주력 상품은 기관차가 되었다. 리마 농업사는 1870년 조직 개편을 거친 뒤 사명을 변경했다. 새 사명은 리마 기계 회사Lima Machine Company가 되었고 1892년 새로 설립된 리마 기관차 공장에 매각됐다. 합병 이후에도 이 회사는 한동안 판매량이 떨어진 셰이 기관차를 생산했다. 1920년대에 리마 기관차 공장은 훨씬 강력한 증기기관차를 개발했으며 이 기관차는 수퍼파워라는 별명이 붙었다. 신형 기관차는 증기기관 업계에 혁명을 일으켰고 리마 기관차 공장은 다시 한번 중요한 기업으로 발돋움 했다.


영국 전차 조달 사절단은 LLW 경영진과의 협상에서 LLW측이 100대의 M3 전차를 생산해 영국에 공급한다면 전차 생산을 위해 20만 평방피트 규모의 공장을 건설하도록 비용을 대겠다고 제안했다. LLW는 영국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전차 생산 공장 건설이 거의 마무리 되어 M3 생산 준비가 갖춰질 무렵 신형 T6 중형전차의 설계와 시험이 거의 완료됐다. 1941년 12월 T6 전차는 정식 채용됐으며 용접식 차체는 M4, 주조식 차체는 M4A1으로 명명됐다. 이 때문에 공장이 완공도 되기 전에 100대의 M3을 생산하기로 한 계약이 M4A1을 생산하는 것으로 변경됐다.


T6 중형전차의 설계는 M3 전차의 개발과 시험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됐다. M3 전차는 영국군이 프랑스 전선에서 상대한 75mm 단포신 4호전차와 대등한 화력을 지닌 전차를 급히 조달하기 위해 임시 변통으로 채용한 차량이었다. 미국의 중형전차 개발계획 초기에는 75mm포를 탑재할 수 있는 포탑을 생산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M3은 주포를 차체 오른쪽에 장착하고 포탑에는 37mm포를 탑재했다. 하지만 M3이 생산에 들어가기 직전에 75mm M2 주포를 장착할 수 있는 포탑이 개발되어 T6의 개발이 시작됐다. 전차 개발을 앞당기기 위해 M3와 M4는 모두 기존의 M2 중형전차의 차체 하부를 개량해서 사용했다. T6의 시제품은 주조로 만든 일체형 차체 상부에 차체 양 측으로 승무원 해치가 달려 있었다. 그러나 T6의 시험이 완료될 무렵 차체 측면의 승무원 해치가 차체 측면 방어력을 떨어트리고 탄약 탑재량을 제한한다는 점 때문에 이를 제거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LLW는 아직 M3 생산을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회사들 처럼 M4 생산을 위해 라인을 전환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LLW는 M4 셔먼 탱크를 최초로 생산하는 공장이 되었다. 영국 정부는 생산 대수를 400대로 늘리도록 계약을 변경했으며 1942년 2월 LLW에서 첫 번째 셔먼이 생산됐다. 첫 번째 생산차량은 1942년 3월 메릴랜드의 에버딘 시험장으로 보내졌다. 두 번째 생산차량은 영국 전차 조달 사절단장 마이클 디워Michael Dewar를 기리기 위해 ‘마이클’로 명명됐다. ‘마이클’은 오늘날 까지 남아있으며 현재 영국 보빙턴 전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LLW는 1942년에 820대의 M4A1을 생산했으며 1943년에는 835대를 생산했다. LLW에서 초기에 생산한 셔먼은 M3에 장착된 것과 비슷한 여닫이식 커버가 달린 포수 조준경이 장착되어 있었다. 이것은 얼마뒤에 일반적인 페리스코프식 포수 조준경으로 대체되었다. 커버가 달린 포수 조준경이 장착된 셔먼의 생산 대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20대 남짓으로 추정된다. 초기 생산분 셔먼의 또다른 특징은 차체에 장착되어 조종수가 발사하는 2정의 고정식 0.30 구경 기관총이었다. 이것 또한 조기에 폐지되었다. 또한 초기 생산분 중에는 조종수와 무전수용 직안식 관측창이 달린 차량도 있었는데 이 또한 정확한 생산대수를 파악할 수 없다. 직안식 관측창 또한 조기에 폐지됐다.


LLW에서 생산한 셔먼들은 다른 공장에서 생산한 차량들과 동일한 개량이 이루어졌다. 그 중 하나는 변속기 커버가 3단에서 주조식 일체형으로 변경된 것이다. 또한 초기에는 폭이 좁은 M34 포방패를 달고 있었으나 개량형들은 폭이 넓은 M34A1 포방패를 장착했다. 초기에 생산된 커버 달린 조준경이 장착된 D50878형 포탑은 나중에 우측면 장갑이 강화되고 피스톨 포트가 제거된 D50878형으로 개량됐다.


LLW에서 생산한 후기의 셔먼들은 LLW공장 생산형 만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차체를 들어올릴때 케이블을 연결하는 돌기이다. 이 돌기는 일반적으로 차체 양 측면에 대칭으로 장착된다. 하지만 1943년 늦여름 LLW에서 생산한 차량들은 차체를 주조할때 돌기까지 일체형으로 만들었으며 측면으로 45도 기울어져있다. 두 번째 특징은 ‘그리즐리형 홈Grizzly groove’이다. 이 홈은 폭 5~6인치로 차체 후부 윗 부분에 파여있다. 이 홈은 캐나다에서 생산한 그리즐리와 램 전차에도 있는데 엔진 점검창 주변에 고인 물을 빼내기 위한 용도로 추정된다. 또한 프레스드 스틸 카Pressed Steel Car에서 생산한 M4A1 중 일부도 이런 홈이 파여있지만 여기서 생산한 셔먼들은 앞서 말한 차체 돌기가 일체형이 아니다.


1943년 9월 LLW의 셔먼 생산 계약이 만료됐다. 이때까지 생산된 셔먼은 1,655대였다. LLW는 1943년에 전차 외에도 110대의 M12 훈련용 포탑을 만들었다. 이것은 셔먼 포탑에서 장갑을 제거한 장비였다. 또한 LLW는 M32 전차구난차량의 개발에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LLW는 M4를 기반으로 시험용 차량 T5를 제작했다. T5E1은 M4A1 차체 기반이었고 T5E2는 M4A2 차체 반이었다. LLW는 1943년과 1944년에 26대의 M32B2(T5E2)를 생산했으며, 1945년에는 20대의 M32B3(T5E3)을 생산했다. 또한 LLW가 생산한 기관차와 크레인도 전쟁 수행에 큰 기여를 했다.


전쟁이 끝난 뒤 LLW는 전차 생산 공장을 크레인과 굴착기 생산으로 전환했다. 기관차 공장에서는 계속 기관차를 생산했다. 하지만 디젤 기관차가 주류가 되면서 LLW는 시류를 따라잡지 못했고 결국 1947년에는 디젤엔진을 생산하는 오하이오 해밀턴Hamilton에 위치한 General Machinery Corporation과 합병했다. 합병한 회사의 명칭은 리마 해밀턴이었다. 하지만 이 조치는 너무 늦었다. 합병 이후 회사는 147대의 디젤 기관차를 생산했지만 이 제품들은 경쟁력이 없었다. 리마 해밀턴은 기관차 부분을 살리기 위한 마지막 조치로 1950년 볼드윈 기관차 공장Baldwin Locomotive Works과 합병했다. 새로운 법인의 명칭은 볼드윈 리마 해밀턴이었다. 하지만 1951년에는 기관차 생산을 전면 중단했다. 다만 중장비 생산은 계속했다. 1971년 볼드윈 리마 해밀턴은 클라크 이큅먼트Clark Equipment에 매각됐으며 1981년 마침내 문을 닫았다.


볼드윈 리마 해밀턴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군수물자 생산을 계속했다. 그 중 하나는 M48 차체를 생산해 포드에 공급하는 것 이었고 다른 하나는 2½톤 트럭과 5톤 트럭을 레커차로 개조하는 것 이었다.


오하이오 리마의 LLW는 1943년 부터 1944년 까지 불과 1,655대의 셔먼을 생산하는데 그쳤지만 이 도시는 오늘날에도 전차 생산으로 유명하다. LLW가 있던 곳에서 남서쪽으로 2마일 떨어진 곳에는 M1, M1A1, M1A2 에이브럼스 전차의 생산과 창정비를 담당하는 통합체계생산센터Joint Systems Manufacturing Center가 있다. 이곳은 스트라이커 계열 장갑차의 부품도 생산하고 있다. 이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리마를 자유 세계의 전차 수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2016년 6월 6일 월요일

한국전쟁기 미육군 전차대대의 전차포탄 보유 비율에 관한 잡담


한국전쟁 당시 전차전은 주로 1950년 7~10월 사이에 일어났고, 전차는 대부분의 기간에 보병 지원 임무에 투입되었습니다. 그리고 7~10월 사이의 전차전도 대부분 소대 이하의 규모로 전개됐습니다. 그래서 당시 미군 전차들은 화력지원을 위해 고폭탄 중심으로 탄을 탑재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낙동강 전선에서 격전이 벌어지던 8월 말, 미 8군 소속 전차대대들의 전차 포탄 보유 현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표. 1950년 8월 31일 미 8군 소속 전차대대의 전차포탄 보유현황

73대대
70대대
6대대
89대대
72대대
76mm
76mm HE
-
4,753
-
5,618
4,033
76mm APCT
-
-
-
933
671
76mm HVAP
-
790
-
136
98
76mm 백린연막탄
-
667
-
786
566
90mm
90mm HE/ MT신관
1,372
386
1,286
353
600
90mm HE/ PD신관
3,070
863
1,075
767
1,343
90mm HE
1,960
563
1,875
500
875
90mm APCT
946
266
887
236
444
90mm HVAP
99
28
93
22
43
90mm 백린연막탄
209
59
196
45
91
“Ordnance Daily Activity Report”(1950. 8. 31), War Diary: Headquarters Eighth United States Army Korea(1950. 8. 31), RG407 Records of the Adjutant General's Office U.S. Army: Command Reports, 1949 - 1954(Entry NM3 429), Eighth Army(EUSAK).

철갑탄 대비 고폭탄의 비중이 매우 높은 것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실제 포탄 소모량에 대한 기록이 있으면 더 명확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겠지만, 보유량만 가지고도 당시 미군 전차 부대의 운용 양상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2016년 2월 1일 월요일

독일군 제128대전차대대의 T-34 운용 보고서

며칠 전에 올린 [번역글] T-34에 대한 재론(再論)을 보충하기 위해 글을 하나 올립니다. T-34를 대량으로 노획해 사용한 독일군의 평가입니다.


이 보고서는 예전에 소개했던 “NARA 소장 독일노획문서에 대한 잡상 - 4. 독일기갑총감부문서 T78 R620”에 실린 보고서입니다. 독일군 제128대전차대대 2중대2./Panzerjäger-Abteilung 128가 T-34와 SU-85를 운용한 결과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지난 번 글의 내용에 나온 것 처럼 엔진을 비롯한 구동계통에 대해서는 혹평하고 있지만 주포 등 무장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를 하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특히 900m 이상의 원거리에서도 명중탄을 기록했다는 기록이 눈에 띕니다. 이미 알고 계시는 분도 많겠습니다만, 이 보고서에 이야기 하는 T-43은 T-34를 말하는 겁니다. 독일군 일선 부대의 보고서에서 말하는 T-43은 크게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전차장 큐폴라가 달린 T-34/76이고 또 다른 하나는 T-34/85를 지칭하는 경우입니다. 오늘 올리는 보고서에서 말하는 T-43은 전자입니다.


참고로 이 보고서는 꽤 유명해서 토마스 젠츠의 Panzer Tracts 19-2에도 이 보고서의 영어 번역본이 실려 있습니다. 다만 젠츠가 내는 책이 다 그렇듯 정확한 출처 명기는 안되어 있습니다.



보고서: 소련제 전차 T-43과 SU-85의 정비유지 및 운용.주) 

소련제 전차의 견인과 유지정비는 아군의 훈련을 잘 받은 전차병이라 할지라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전차의 엔진과 조종방법을 충분히 숙달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독일 전차병에게 소련제 전차를 지급할 때는 전환교육 기간이 많이 필요하다. 

본 중대는 처음에 9대의 소련제 전차를 보급받았는데 이 중 8대의 변속장치가 고장난 상태였다. 이 차량들이 바른 방식으로 운용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일부 차량은 클러치도 고장이 났다. 

소련제 전차의 고장난 부품은 수리하거나 교체해야 했는데, 차량 내부의 부품 중에는 신품이 없어서 처음에는 그 중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부품 조달을 이곳 저곳에서 노획한 전차에서 의존하고 있어서 교체할 부품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같은 형식의 차량을 대량으로 획득할 수 있어야 노획한 전차를 장기간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고 본다. 

아군의 정비 도구는 소련제 전차의 구동계통과 무장의 일부를 정비하는데 적합하지 못하다. 소련제 전차의 정비에 필요한 공구를 설계하고 제작하는데는  상당한 기술이 필요했다. 이런 방식을 모든 부대에 동일하게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노획한 소련제 전차를 운용한 시간은 길지 않지만, 소련제 전차는 항속거리가 길고 최고 속도도 빠르다는 것은 섣부른 일반화이다. 중대가 운용한 소련제 전차의 최고 속도는 시속 10~12km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30분간 기동을 하면 최소한 15분에서 20분 정도는 엔진 냉각을 위해 정지해야 했다.
적의 신형 전차를 운용하는데 있어 가장 문제가 되었고 고장을 자주 일으킨 것은 조향클러치였다. 거친 지형에서 행군하거나 공격기동을 할 때는 자주 방향 전환을 해야 하는데 이럴때 조향클러치가 자주 과열되고 오일이 새어나오곤 했다. 그 결과 더 이상 클러치를 조작할 수 없어서 전차가 기동 불능이 되곤했다. 그 경우에는 클러치를 즉시 식혀준 뒤 디젤유를 발라줘야 했다. 

소련제 전차의 무장을 운용 경험에 의거해 평가하자면, 7.62cm 전차포의 사격성능은 훌륭하다. 정밀하게 조작하여 사격을 하면 장거리에서도 명중율이 높았다. 차재 기관총도 비슷하다. 차재 기관총은 천천히 사격을 하면 명중율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고장도 잘 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본 중대가 운용한 돌격포(SU-85)의 8.5cm 주포도 훌륭했다. 이 포의 실제 관통력을 7.62cm 전차포와 비교했을 때는 아직 정확하게 평가할 수 없다. 고폭탄을 사용했을때는 7.62cm 전차포에 비해 훨씬 먼 거리에서도 정확한 사격이 가능했다.
소련제 전차에 탑재되는 광학장비는 독일제 광학장비에 비해 뒤떨어졌다. 독일군 전차포수는 소련제 조준기에 숙달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소련제 조준경으로 명중탄이나 유효탄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어려웠다. 소련제 T-43 전차의 포수는 조준경 외에 그 왼쪽 앞에 있는 파노라마식 관측경도 사용할 수 있다. 본 중대는 포수용 파노라마식 관측경에 더해 장전수 위치에도 파노라마식 관측경 하나를 추가하여 명중 여부를 보다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소련제 전차의 또 다른 문제점은 단차, 혹은 부대를 지휘하면서 사격을 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이다. 때문에 중대단위의 사격 지휘에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해 부대 단위의 성과에도 제한이 있었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T-43은 전차장 큐폴라가 있어서 지휘를 하면서 동시에 사격 명령을 내리는게 용이한 편이다. 다만 이 전차장 큐폴라에는 외부 관측용으로 매우 작은 관측창이 다섯개 달려 있는데 이것으론 불충분하다. 

소련제 돌격포 SU-85는 이와 달라서 지휘관용 큐폴라가 따로 없다. 소련측은 돌격포의 승무원을 네명으로 정했는데 이 중에서 전차장이 사수를 겸하고 있다.
본 중대는 소련제 돌격포의 승무원 배치를 조금 변경했다. 조종수 1명, 무전수 1명(무전수가 필요에 따라 파노라마식 관측경으로 관측을 보조하도록 했다.) 사수 1명(사수는 포 조준경만 사용하도록 했다.) 다음으로 장전수 1명과 전차장이었다.  전차장은 해치를 열고, 해치의 문 한쪽을 방탄판으로 삼아 차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외부를 관측하면서 단차를 지휘하고 포격 지시도 내리도록 했다. 

T-43과 SU-85는 해치를 모두 닫은 상태에서는 안전한 주행과 지휘를 할 수 없었다. 이것을 보여주는 예로서 본 중대가 이아시Iaşi 교두보 전투의 이틀 동안 경험한 일을 들 수 있다. 하루는  적의 전차 네 대가 참호에 빠졌는데 자력으로는 벗어날 수 없었기에 견인을 시도했지만 아군의 사격으로 이것을 분쇄했다. 둘째 날도 마찬가지 였다.
전투 마지막 날에는 아군 보병의 공격을 지원하던 도중 숲에 있는 적의 사격을 받아 중대의 노획 전차 전차장들이 일시적으로 해치를 닫아야만 했다. 이 때문에 전차를 안정적으로 지휘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아군이 사용하던 노획전차 중 두대가 적의 참호에 빠져버렸다. 이 중 한대는 많은 시간을 들여 자력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다른 한 대는 전투가 끝나고 숲을 완전히 점령한 뒤에야 다른 차량의 견인을 받아 끌어낼 수 있었다. 

노획 전차를 운용하는데 있어 또 다른 어려운 점은 탄약 보급이다. 본 중대는 적 전차를 노획하여 탄약을 확보하고 있다. 탄약을 지속적으로 공급받기 위해서는 격파된 적 전차에서 탄약을 긁어모으는 등의 방식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다. 본 중대는 거의 매일 전선에 부대 일부를 보내서 탄약과 고장난 부품을 교체하는데 필요한 부품을 조달하고 있다. 

지금까지 설명한 바에 의거해 본 중대는 노획한 적 전차를 전차로서 운용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다고 본다. 이아시 교두보 전투의 마지막 날 거둔 성과를 고려하면 노획한 적 전차는 대전차 자주포로 운용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본다. 노획 전차는 적의 대전차소총과 중구경의 대전차포에 거의 타격을 받지 않았다. 포격 또한 승무원에게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다. 공격시 전차장은 전차장 큐폴라의 해치를 열면 관측을 자세하고 충분하게 할 수 있었다. 

본 중대는 5월 30일 제14기갑사단 소속의 한 기갑척탄병연대가 프루트Prut 강변의 골러에슈티Golăiești 근교의 숲을 공격하는 것을 지원하여 적의 주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도록 했다. 5월 31일에는 제23기갑사단의 한 기갑척탄병연대가 프루트 강변의 스탄차Stanca남서쪽의 한 고지를 공격하는 것을 지원해 1개 대대가 적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도록 했다. 전투 과정에서 수많은 벙커를 고폭탄 사격으로 격파했으며 수많은 대전차총과 경대전차포 1문을 파괴했다. 6월 1일에는 제79보병사단 소속의 1개 전투단이 스탄차의 지점197  남서쪽의 분지를 방어하는 것을 지원했다. 낮 12:00경 본 중대의 전차 4대는 적 전차부대가 스탄차 남쪽의 지점197과 198 방면의 고지를 공격해 왔을 때 적 전차 1대를 격파하고 다른 두 대를 기동불능으로 만들었다. 교전 거리는 900~1100m였다. 6월 2일에는 대대 전체가 지점189와 그 서쪽에 대한 적 공격을 방어하는데 투입되었다. 낮 12:00경 적 전차부대가 전날과 같은 방면에서 스탄차 남쪽의 고지군을 공격해 왔다. 본 중대는 그중 네대의 전차를 격파해 불길에 휩싸이게 만들었으며 두대는 기동 불능으로 만들었다. 

6월 1일에 격파한 적 전차 세대는 T-34였다. 6월 2일에 격파한 적 전차 중 3대는 셔먼이었고 3대는 T-34였다.

본 중대는 5월 30일 전투에 투입되었을 때 2대의 SU-85 돌격포와 5대의 T-43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손실: 
T-43 1대: 지뢰를 밟아 완전히 파괴되었다. 
T-43 1대: 지뢰를 밟아 궤도, 보기륜, 유동륜이 파괴됨(중대 정비반에서 수리에 들어감) 
T-43 1대: 변속기 고장(중대 정비반에서 수리에 들어감) 

5월 31일에 본 중대는 2대의 SU-85 돌격포와 2대의 T-43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손실: 
돌격포 1대: 조향 클러치 고장(중대 정비반에서 수리에 들어감) 
T-43 1대: 배터리 손상(현장에서 곧바로 새 배터리로 교체해 수리함) 
T-43 1대: 메인 클러치 손상(중대 정비반에서 수리에 들어감) 

6월 1일 본 중대는 1대의 SU-85 돌격포와  3대의 T-43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날은 손실이 없었다. 

6월 2일 본 중대는 1대의 SU-85 돌격포와 4대의 T-43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날 오후 1대의 SU-85 돌격포가 정비를 마치고 복귀했다. 손실은 없었다.

주) “Erfahrungsbericht: über die Instandsetzung und Einsatz russischer Panzerkampfwagen vom Typ T43 und SU85”(1944. 6. 2), H16/201, RG242 T78 R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