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1월 21일 화요일

뭔가 궁색한 강대국

닉슨은 브랙퍼스트(Breakfast) 작전 실시 3일전인 3월 13일에 국방장관 레어드(Melvin R. Laird)와 만나 레어드의 남베트남 철군안에 대해 논의했다. 레어드는 휠러(Earl G. Wheeler) 대장과 함께 사이공에서 에이브럼스(Creighton W. Abrams, Jr) 대장 및 MACV 참모진을 만나 철군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막 워싱턴에 도착한 참이었다. 베트남의 미군 지휘관들은 이미 1년 전부터 철군에 대해서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워싱턴으로부터 명확한 지침은 받지 못했고 그에 대한 계획도 세우지 않고 있었다. 베트남에 파견된 장성들은 철군은 북베트남과 상호 철수를 위한 협상의 일환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에이브럼스 대장은 신속한 철군안에 찬성하는 대신 평정작전의 진도, 남베트남군의 강화, 적의 공격 완화 등 세가지 점이 개선돼야 철군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레어드는 이 의견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동의했지만 닉슨 행정부의 집권 초기 내에 철군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정치권의 요구에 더 중점을 두고 있었다. 레어드는 에이브럼스에게 “새 행정부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하기 전에(재선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 3개월, 6개월, 9개월, 기왕이면 3-4개월 안에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레어드는 온건파가 아니었고 존슨 행정부 보다 더 강력한 군사적 대응을 선호했지만 그는 무엇보다 미국내의 정치적 동향에 민감했고 워싱턴이나 사이공에서 논의되고 있는 강경책은 실제로 실행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레어드는 남베트남에서 군사적 승리를 거두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닉슨의 베트남 정책은 잘해봐야 전쟁의 베트남화를 통해 남베트남군이 미국의 철수에 따른 공백을 메꿀 수 있도록 육성하고 북베트남과 미국의 상호 철군을 이끌어 내는데 그칠 것이었다. 그러나 레어드는 남베트남 군의 전투력을 강화하는 것 보다 지속적으로 작전을 펼치는 MACV의 기본적인 방침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또 북베트남과의 협상이 신속히 진행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레어드는 이 점을 고려해 키신저의 협상 진행이나 에이브럼스의 견해와 상관없이 철군 계획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레어드는 1968년 까지만 해도 워싱턴의 그 누구도 고려하지 않고 있던 점진적인 일방적 철군을 기본 방침으로 결정했다. (후략)

Jeffrey Kimball, Nixson's Vietnam War, p.137~138


천자국의 굴욕.

럼즈펠드가 이라크를 쳐들어 갈 때 자신이 저것과 비슷한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생각 했을까?

미국의 베트남화는 결국 돈만 잡아먹은 실패작이 됐다. 오늘 워싱턴포스트에는 이라크군 재건이 뭔가 꼬여가고 있다는 요지의 기사가 하나 떴다. 이라크는 정치상황도 복잡하게 꼬여버렸으나 베트남보다 더 지독한 진창이라고 해야 하나?

사족 하나 더

위의 기사에서 이 부분은 정말 웃겼다.

Some of the American officers even faulted their own lack of understanding of the task.

"If I had to do it again, I know I'd do it completely different,"

reported Maj. Mike Sullivan, who advised an Iraqi army battalion in 2004.

"I went there with the wrong attitude and I thought I understood Iraq and the history because I had seen PowerPoint slides, but I really did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