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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5일 토요일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핵무기 사용계획에 대한 어떤 제독의 비판

1960년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전쟁계획을 보다보면 미국과 NATO만큼이나 핵무기의 대량 사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게 섬뜩합니다. 예방공격을 위한 계획들을 보면 전술핵은 물론 전략로켓군도 동원되는 점이 눈에 띄는데 그 결과를 어떻게 감당하려 했던 것인지 궁금합니다.(이 점에서는 미국과 NATO의 계획도 마찬가지 이긴 합니다만.) 이런 정신나간 계획에 대해서는 당대에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던 모양입니다. 예전에 언급했었던 서독 국방장관 슈트라우스의 발언에 나타난 것 처럼 핵무기라는 존재는 당대의 전략가들을 꽤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소련해군의 데레뱐코 제독이 당서기장 흐루쇼프에게 보낸 서한은 합리적인 생각을 가진 소련 군인들이 핵무기 사용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단 한가지 사안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핵무기에 환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미래에 살아갈 행성은 어디이며, 이들이 군대를 보내 영토를 정복하려고 계획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핵무기를 사용하는 상황에서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핵무기에 환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그들이 우리 군대를 어떤 혼란에 빠트릴지 알고는 있을까요? [중략]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군대가 전쟁 초기에 추구해야 할 전략적인 목표는 아군, 특히 공수부대와 차량화 부대를 활용한 신속한 돌파와 공격을 통해 서유럽 중부에 있는 침략국가들의 영토를 점령하고 신속하게 대서양까지 진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군이 진격하게 될 전 전선에 걸쳐 방사능으로 토지와 물, 공기가 오염된 장벽을 만들겠다는 자들은 정말 어리석기 그지없습니다. 아군이 하루에 최대 100km를 진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공격 자체가 좌절될 수도 있습니다. 서유럽과 같이 좁은 지역에서 핵무기를 이렇게 무분별하게 사용한다면 방사능에 오염된 수백만의 민간인이 발생할 뿐만 아니라 서풍으로 인해 우리의 군대와 소련의 우랄 지역에 이르는 사회주의 국가의 인민들까지 수십년 동안 방사능 오염에 시달리게 될 것 입니다. [중략] 핵미사일을 이용해서 승리하겠다는 생각은 집어치워야 합니다. 핵무기에 환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나름대로 전략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 것 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현대 전쟁의 다양한 양상과 방법을 좌우할 수는 없습니다. 

콘스탄틴 데레뱐코Константин И Деревянко 제독이 1961년 8월 1일 흐루쇼프에게 보낸 서한 

Matthias Uhl, ‘Soviet and Warsaw Pact Military Strategy from Stalin to Brezhnev : The Transformation from “Strategic Defense” to “Unlimited Nuclear War”, 1945-1968’, Blueprint for Battle : Planning for War in Central Europe, 1948~1968(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12), p.40

2013년 9월 5일 목요일

나토의 전진방어전략에 대한 체코슬로바키아군의 평가

지난번에 올렸던 “1960년대 독일연방군 제1군단의 방어계획”과 관련해서 포스팅을 하나 합니다. 잠깐 언급했던 1965년에 작성된 체코슬로바키아군 참모부의 정보평가입니다. 1960년대 초반 나토군의 전략 변화에 대해 평가한 내용인데 인용한 책의 해제에 따르면 소련에서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보고서라고 하는군요. 소련이 붕괴되고 동구권의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냉전기 바르샤바조약기구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는 사료가 많아졌지만 러시아의 자료 공개는 여전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과거 바르샤바조약기구에 속했던 소련 위성국들의 자료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점은 꽤 아쉬운 점입니다. 아무래도 소련 자료가 부족한 상태에서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하위 동맹이었던 국가들의 부분적인 자료를 통해 전체를 재구성 해야 하니 말입니다.


이 보고서에서 눈에 띄는 것은 나토군의 전략 변화를 공세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즉 독일 영내에서의 방어전 뿐만 아니라 전략적인 공세로 이행하기 위한 준비로서 “전진방어”를 채택했다고 보는 것 이지요. 그리고 2차세계대전의 경험을 반영해서 독일군에 대한 평가가 높은 편입니다.


영어 중역인 점을 감안하고 읽어 주십시오. 영어로 번역하면서 편집자가 생략한 부분이 많은게 유감입니다.


[...전략] 나토 사령부는 현재 사회주의 국가들과 자본주의 국가들의 군사력을 비교하는데 있어 전면적인 핵전쟁은 물론 제한적인 전쟁도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이에따라 제한전에 대한 이론을 정교하게 가다듬었는데 이 이론은 중부유럽전역의 연합군의 작전 준비태세, 특히 최근 수년간의 준비태세를 반영하고 있다.
[...중략] 제한전쟁은 두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한가지는 부여된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서 충분한 병력을 신속하게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한가지 문제는 군사력을 운용하면서  제한전쟁이 전면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최대한 막아야 한다는 점이다. 서방은 유럽에 충분한 재래식 전력을 배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서 제한적인 핵무기 사용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중략] 제한전 개념은 특히 미국이 선도하고 있는데 이 개념에서는 군사적인 목적과 정치적인 목적을 점진적으로 달성하는 동시에 전면적인 핵전쟁이 발생할 위험을 최소화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 수뇌부는 전면핵전쟁의 파괴력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나토에서는 국제적인 긴장이 단기간, 혹은 장기간 이어진 이후 전면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유리한 군사적, 정치적 정세가 조성될 경우 갑작스럽게 발생할 수도 있다고 본다. 전면 핵전쟁이 발생할 수 있는 유리한 정세로는 정치적 갈등이 격화되거나 어느 한 진영의 지도국가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군사력을 감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경우로는 단계적으로 특정한 제한조건을 넘어서면서 제한전쟁이 전면 핵전쟁으로 발전하는 경우를 꼽을 수 있을 것인데 이 경우는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어느 한 참전국이 사용하는 수단에 전혀 다르게 대응하거나, 어떤 징후를 잘못 해석하거나, 사람의 실수나 장비의 오류 때문에 제한전쟁이 전면 핵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 (현재) 나토군 수뇌부는 기습적인 전면 핵전쟁을 감행하는 계획에 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 
[...중략]  국가안보에 대한 직간접적인 위협에 직면해서 필요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이 전쟁 말고는 없을 경우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 이 모호한 개념은 여전히 나토군 수뇌부, 특히 미국이 전면 핵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으며 나토가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재의 전략개념인 이른바 “유연 대응flexible response”은 제한전, 그리고 유리한 상황이나 어쩔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서 전면전을 수행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 개념은 군사적인 관점과 정치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공격적이고, 해로우며 결과적으로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제한전 이론은 이론적인 측면, 특히 전쟁의 정치적, 군사적 목표, 병력과 군사적 수단의 활용, 그리고 목표의 선정이라는 관점에서 봤을때 명확하지 않은 요소로 가득차 있어서 일관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나토군 수뇌부는 평화시에도 양 진영의 강력한 군사력이 대치하고 있는 유럽 전역에서 제한전이 적절하게 수행될 수 있을지에 대해 확산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제한전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는 문제는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나토군 수뇌부는 나토군이 심각한 손실을 입거나 요충지를 상실하게 될 경우, 혹은 재래식 전쟁으로 의도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경우에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다. 이러한 원칙은 제한전 이론이 특히 중부유럽전역의 정세하에서 적용하기에는 문제가 많다는 점을 보여준다. [중략…]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과 전쟁 그 자체에 대한 생각이 점진적으로 변화하게 되면서 1963년에는 독일연방공화국과 다른 유럽내 나토 가맹국들의 주도로 ‘전진 방어Forward Defense’라는 새로운 개념이 채택되었다. 이 개념에서 다루고 있는 영역은 단지 독일연방공화국의 영토 뿐이다. 본질적으로 전진 방어 개념에는 유럽전역의 환경에 새로운 원칙을 정교하게 가다듬어 적용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 개념은  독일연방공화국의 영토를 지켜내는 한편 공세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하여 단기간 내에 전장을 독일민주공화국과 체코슬로바키아로 옮기기 위해서 독일연방공화국의 동부 국경에서 능동적인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다. 

[...중략] 나토군의 작전 준비태세에 대한 전략 개념의 영향력. 
연합군의 작전적 준비태세를 보면 전면핵전쟁과 함께 나토군이 재래식 무기와 핵무기를 함께 사용하는 제한전쟁을 감행하는 것을 고려하는 전략 개념을 채택했음을 알 수 있다. [중략…] 
1960년 경까지 실시되었던 대규모의 훈련들은 동서양진영이 무장 충돌을 하게 된다면 어떠한 경우건 모든 종류의 핵무기를 대량으로 사용하는 것에 입각한 “대량보복” 개념에 따라 실시되었으며 병력 동원과 예비 전력의 집결에 필요한 시간을 벌고 반격으로 이행할 준비를 갖추기 위해 유연한 방어를 전개하였다. 핵공격을 가하는 수단은 공군이 유일했다.[중략…] 
이 무렵 실시된 훈련들은 모두 방어 작전을 위해 실시되었다. 이것은 그 당시에 존재하던 개념과 나토 지상군의 임무를 반영한 것이었다. 나토군의 전쟁 시나리오는 전쟁의 위협이 장기간 지속되는 상황을 가정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는 군부대의 전투 대비태세를 완료할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며, 동원에 필요한 일부 조치를 이행할 수 있을 것이고 사전에 준비된 작전 조치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핵공격이라는 전략적 수단 중에서 공군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전쟁에서 완벽한 기습을 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되었다.[중략…]
[...중략] 훈련 시나리오에서 “대량보복” 개념에 입각한 중요한 변화들은 “전진방어” 개념의 채택으로 폐기되었다. 이러한 훈련들은 유럽전역에서  최소한 일시적으로라도 제한적인 전쟁을 수행한다는 나토의 개념을 따른 것이었다. 교전은 방어작전으로서 짧은 기간 동안 수행되었다. 방어작전 단계에서는 재래식무기만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에서는 작전-전술단위, 전술단위의 핵무기가 동원되었고 그 시기는 작전이 개시되고 수시간에서 수일이 지난 뒤였다. 나토군은 보통 적군이 선제 핵공격을 실시할 경우 핵무기를 사용했다.
이 시점에서 전쟁의 위협이 증대되는 기간이 훨씬 짧아졌다. 이때문에 전투 준비태세를 갖춰야 할 시간도 훨씬 짧아졌다. 전투 태세를 준비하고 완료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적이 아군의 준비 태세를 감지하는 것과 대응 수단을 마련하는 것을 회피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작전적 기습을 가능하게 했다.
“전진방어”를 채택함으로써 군의 작전 편성은 1960년 이전의 군사 훈련에서 적용되었던 것과 비교하여 근본적으로 변화했으며 특히 중부 집단의 경우가 그러하다. [중략...] 적의 일선 제대는 두개의 야전군(미 제7군과 프랑스 제1군)으로 구성되었고 일선제대와는 별도로 1~2개 집단의 제2선 예비 제대가 편성되었다.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상대하는 제1선 제대에 프랑스군 집단(제3기계화사단, 제1기갑사단)이 배치된 것, 또는 독일군 제2군단이 프랑스 제1군의 작전 통제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로 필센Plzeň-뉘른베르크Nürnberg와 린츠Linz-뮌헨München 축선의 중부 집단 우익이 크게 강화되었다.
이러한 개념상의 변화는 초기 전투 기간에 작전을 수행하는데도 반영되었다. 지금까지의 군사훈련을 보면 나토 연합군이 초기에는 기동 방어를 실시하고 있지만 갈수록 능동적으로 작전하고 있으며 전체 전투 주기가 (2~3일 정도로 ) 짧아졌다. 또한 후퇴 종심도 (최대 120km 정도로) 현저히 짧아졌다. 비록 반격으로 전환하는 것은 훈련하지 않았지만 이전 보다 더 빨리 반격을 하기 위해서 방어 단계를 강력한 역습으로 마무리 하고 있다.
[...중략] 1962년 이래로 중부유럽전구에서는 제한전 개념에 따라 훈련을 실시했다. 초기에는 1개 집단군 단위의 훈련(그랜드슬램1Grand Slam 1과 그랜드슬램2)에 적용되었으나 1963년 부터는 중부유럽전구 전체를 대상으로 한 훈련(Lion Ver)에, 1964년에는 유럽 전체를 대상으로 한 훈련(Fallex-64)에 적용되었다. 
나토군은 1964년 이전에는 적군이 먼저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에만 핵무기를 사용했다. 1964년 훈련에서는 나토군 방어선의 돌파구를 분쇄하거나 공세를 성공적으로 실시하기 위해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했다. 이에 대한 적군의 대응, 즉 보복을 위해 핵무기를 무제한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전면 핵전쟁으로 이어졌다.
[...중략] 1962년의 훈련에서는 전투 작전이 시작된 지 3일차(46시간)에 적을 저지하기 위해 국경에서 50~150km 떨어진 지역에서 사용되었다. 1963년에는 전투 작전이 시작되고 불과 10시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전력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 핵무기를 사용했다. 적군의 진격은 30~100km 정도에서 돈좌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 나토군의 성과는 무시해도 될 정도였다. 1964년 가을의 기동훈련에서 핵무기는 전쟁이 시작된 지 34시간차에 사용되었으며 이 시점에서 전방의 방어선이 돌파당해 적군은 국경에서 30~80km를 돌파해온 상태였다.
[...중략] 이같은 훈련을 보면 연합군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전투를 오랫동안 효과적으로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원인은 전력 격차가 크기 때문이며, 이점은 재래식 전쟁이 시작된 초기에 더욱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나토군 수뇌부는 전력격차가 크다는 점 때문에 제한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 조건으로 전면 핵전쟁을 감행할 수 있도록 군의 준비태세를 갖추려 하고 있다. 

[...중략] 요약, 결론.
[...중략] 각 국의 참모진 중에서 이것을 가장 잘 준비하고 있는 것은 독일에 주둔한 미군 참모부다. 독일주둔 미군은 지난 한해 동안 심혈을 기울여 준비를 했다. 미군은 연합 훈련에 참가하는 것 외에도 자체적으로 대규모의 훈련을 실시했다. 
서독군 참모부는 작전적 준비태세를 갖춘다는 목표를 달성했다. 서독군은 연합훈련을 진행하면서 연합군의 범주 내에서 임무를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서독군 참모부의 고급 장교들은 대부분 과거 히틀러 군대에서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은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은 나이가 많기 때문에 얼마 안가 이것이 문제가 될 것이다. 독일군의 작전적 준비태세는 미육군과 거의 맞먹는다. 
프랑스군에서 가장 준비가 잘 된 참모진은 제1군의 참모진이다. 프랑스 본토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의 참모진은 준비태세는 최근에 와서야 강화되었다. 프랑스군은 오랫 동안의 식민지 전쟁으로 생긴 문제점을 없애고 미군과 동등한 수준으로 준비태세를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프랑스군 참모진은 특정한 상황하에서의 전투 행동에 필요한 조직과 운영에 있어서는 많은 경험을 갖추고 있다. 

영문번역 : Marian J. Kratochvil.
“Document No.28 : Warsaw Pact Intelligence on NATO’s Strategy and Combat Readiness, 1965”, Vojtech mastny and Malcolm Byrne(ed.), A Cardboard Castle? : An Inside History of the Warsaw Pact 1955~1991, (CEU Press, 2005) pp.170~173.

2013년 8월 22일 목요일

1960년대 독일연방군 제1군단의 방어계획

Blueprint for Battle : Planning for War in Central Europe, 1948~1968을 읽는 중 입니다. 진도가 더뎌서 이제야 겨우 헬무트 하머리히Helmut Hammerlich가 쓴 제10장 “Fighting for the Heart of Germany”를 읽고 있습니다. 제10장은 1960년대 초반 북독일의 방어를 담당한 독일연방군 제1군단의 전시 방어계획을 다루고 있습니다.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해 방어종심이 짧은 독일의 전략적 고민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더군요.


제10장에서는 1963년 9월에 나온 연합군중부유럽사령부CINCENT, Commander in Chief, Allied Forces Central Europe의 긴급방어계획EDP, Emergence Defense Plan 1-63호 이후의 방어 계획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긴급방어계획 1-63호는 주방어선을 베저Weser-레흐Lech 강을 잇는 선으로 설정해 독일연방공화국 영토의 90%를 방어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전까지의 방어계획이 주방어선을 엠스Ems-네카Neckar강으로 설정해서 독일연방공화국 영토의 50%를 포기하는 것에 비하면 방어구역을 크게 늘린 것이고 독일이 정치적으로도 용납할 수 있는 범위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경우 가장 큰 문제는 최대한 전방에서 바르샤바조약군의 주력을 맞아 싸우기 위해서 지연전을 펼쳐야 하기 때문에 작전적 융통성이 제한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영토를 최대한 사수해야 하니 선택의 폭은 좁아지는 것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제1군단, 영국 제1군단, 벨기에 제1군단과 함께 독일 북부의 방어를 담당한 독일연방군 제1군단은 예하에 제3기갑사단, 제1기갑척탄병사단, 제11기갑척탄병사단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제11기갑척탄병사단은 예하의 제33기갑척탄병여단을 나토 북부집단군NORTHAG, NATO’s Northern Army Group 예비대인 제7기갑척탄병사단에 배속하게 되어 있어서 실제 전력은 2개 기갑척탄병여단으로 제한되었습니다. 이 3개사단의 기갑전력은 전차 600대와 장갑차 700대였습니다. 그런데 독일 제1군단이 1차로 상대하게 될 소련 제3충격군은 4개 전차사단과 1개 차량화소총병사단, 전차 1,600대와 장갑차 1,400대를 보유한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고 제2파 제대로는 제2근위전차군, 또는 제20근위군 소속의 11개 사단이 투입될 것이라고 보고 있었습니다. 전쟁 초반에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를 감당하면서 최대한 좁은 지역에서 적을 저지해야 하는 것 이었습니다. 1965년에 계획을 개정해서 제7기갑척탄병사단을 독일 제1군단 예비대로 지정하기 전 까지는 이렇다 할 예비대가 없었으니 더욱 난감한 계획이었습니다. 기본적인 방어계획은 각 사단이 1개 여단과 사단 기갑수색대대로 지연부대를 편성해 최전방에서 지연전을 펼치는 동안 나머지 2개 여단이 주방어선에서 방어를 준비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지연부대가 주방어선까지 밀려오면 이것을 후방으로 돌려 사단예비대로 운용하도록 했습니다. 굉장히 협소한 방어구역과 제한된 전력이 결합되어 지휘관이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범위가 지독하게 적었던 것 입니다.


이런 제약을 상쇄하기 위해 사용된 수단은 잘 알려진 대로 핵병기였습니다. 독일 제1군단 포병의 경우 연합군 유럽최고사령관SACEUR, Supreme Allied Commander Europe의 허가를 받아 10킬로톤까지의 핵포탄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저자인 하머리히는 자세한 사격계획이 명시된 사료를 찾지 못해 개략적인 내용만 서술하고 있습니다. 핵 포격과 함께 사용되는 수단은 핵지뢰였습니다. 핵지뢰는 4~5km 간격으로 설치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베저강 서쪽에 설정된 핵지뢰 사용 지대가 120km 가량이었다는 증언을 토대로 독일 제1군단에 할당된 핵지뢰는 30개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여기에 항공지원을 담당한 제2연합전술공군ATAF, Allied Tactical Air Force도 핵폭격을 하도록 되어 있었으니 전쟁이 터졌다면 전쟁 초반부터 독일은 핵으로 쑥대밭이 될 판이었습니다. 나토측이 전진방어를 채택하면서 핵무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계획을 수립했다는 것은 바르샤바조약기구 측에서도 비교적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주)


사실 독일 본토에서 핵을 사용한다는 것은 독일측으로서도 썩 달가운 방안이 아니었습니다. 박살나는건 독일이니 말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1960년대 중반까지 나토 북부집단군 방어구역에서 핵 타격 목표를 선정하는 것은 영국군에 의해 좌우됐고 1966년 이후에야 독일측이 핵무기 사용을 제약하는 방향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독일로서도 뾰족한 대안이 없는 것은 문제였습니다. 당시 독일 제1군단 포병사령관은 작전상 개전 초반부터 핵무기를 사용할 수 밖에 없으며 독일군의 전력이 획기적으로 증강되지 않는 이상 재래식 화력전은 어렵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독일군의 비판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개전 초기에 대량의 핵무기를 사용하는 계획이 계속 수립되었습니다. 1966년 부터 독일공군 참모총장을 맡았던 슈타인호프Johannes Steinhoff는 이런 계획으로는 작전적인 기동이 불가능하다고 비난하고 독일을 파괴하는 전술핵의 대량 사용을 재래식 방어에 포함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최대한 많은 영토를 방어하면서도 핵무기 사용은 피해야 한다는 딜레마는 결국 독일이 재래식 전력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만듭니다. 사실상 이것이 독일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기 때문입니다.



주) “Document No.28 : Warsaw Pact Intelligence on NATO’s Strategy and Combat Readiness, 1965”, Vojtech mastny and Malcolm Byrne(ed.), A Cardboard Castle? : An Inside History of the Warsaw Pact 1955~1991, (CEU Press, 2005) pp.172~173.

2013년 4월 8일 월요일

우크라이나인 무장친위대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 한 편

무장친위대는 2차대전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매우 인기있는 소재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화려한 전과를 자랑하는 정예 사단에서 전쟁 말기에 급조한 빈약한 사단이 함께 존재하며, 인원 구성을 보면 독일인 은 물론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까지 참여하는 등 다채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호기심을 자극할 수 밖에 없지요. 무장친위대 출신 참전자들이 주축이 되어 펴낸 무장친위대에 관한 수많은 서적들이 상업적으로도 좋은 성과를 거둔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 보니 LAH나 다스 라이히 같은 정예 사단은 물론 뭔가 좀 부실해 보이는 사단의 부대사까지 출간되는 실정입니다.


우크라이나인으로 구성된 무장친위대 제14척탄병 사단은 후자 중 하나입니다. 재미있게도 이 별볼일 없어 보이는 사단은 상업적으로 출간된 사단사만 두 권이 있습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인 Richard Landwehr가 펴낸 Fighting for Freedom: The Ukrainian Volunteer Division of the Waffen-SS와 Michael O. Logusz가 펴낸 Galicia Division: The Waffen-SS 14th grenadier Division 1943-1945입 니다. 이게 가능한 배경에는 캐나다와 미국에 존재하는 꽤 큰 규모의 우크라이나 이민자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중 많은 수는 우크라이나인 무장친위대 출신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도 계시겠고 이쯤에서 눈치채신 분들도 많으실텐데, 우크라이나인 무장친위대는 꽤 말이 많은 집단입니다.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5호에 실린 Per Anders Rudling의 “‘They Defended Ukraine’ : The 14. Waffen-Grenadier-Division der SS(Galizische Nr.1) Revisited”는 이 복잡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필자는 우크라이나의 우경화와 맞물린 무장친위대 복권 문제를 화두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이 사단의 간략한 역사와 전후 행적을 고찰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에서 전개되고 있는 우경화에 맞물린 무장친위대의 복권에 깔린 위험한 정치적 의도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유셴코가 우크라이나 대통령으로 있던 시기에 우크라이나의 민족운동 지도자 스테판 반데라Степан Андрійович Бандера를 건국의 영웅으로 추앙하는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우크라이나인 무장친위대를 복권시키려는 움직임까지 힘을 받은 바 있습니다. 필자는 유셴코는 무장친위대에 대한 복권까지 나가지는 않았지만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여러 정당과 단체에 대한 복권도 시사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정부가 우익 운동에 편승했다는 점에서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겠지요. 유셴코의 후임인 야누코비치 대통령 시기에는 반데라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에 거리를 두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우크라이나 서부를 중심으로 한 극우들은 오히려 무장친위대 복권에 더 열을 올립니다. 마치 독립을 전후한 시기 인도에서 찬드라 보스와 인도국민군에 대한 반응과도 비슷하지요. 필자는 우크라이나인 무장친위대를 복권하려는 움직임에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이 함께하는 점을 경계합니다. 실제로 독일에 협력한 우크라이나인 무장단체와 무장친위대는 민간인 학살에 참여한 혐의가 있지만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지요.


필자가 주목하고 있는 또 하나는 캐나다 등 북미에 존재하는 대규모의 우크라이나 이민자 공동체 입니다. 잘 아시다 시피 이중에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이민 온 무장친위대와 무장단체 출신자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북미에서 자리를 잡은 뒤 우크라이나 이민자 공동체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위치까지 올라갔습니다. 필자는 그러한 사례 중 하나로 2011년에 앨버타 대학에 우크라이나 무장친위대 출신인 세명의 우크라이나계 이민자가 기부를 한 점을 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캐나다 사회에서 우크라이나인 무장친위대의 활동을 찬양하고 정당화 하는데 힘써 왔습니다.


우크라이나 무장친위대에 대한 옹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무장친위대 옹호와 맥을 함께 합니다. 무장친위대를 일반친위대와 분리하여 ‘순수한 군인’의 위치에 놓고자 하는 것이지요. 무장친위대의 입장을 반영한 상업 출판물에서는 전쟁범죄와 무장친위대를 분리하려는 움직임을 볼 수 있습니다.(※간혹 오토 바이딩어처럼 적극적으로 무장친위대의 입장을 옹호하고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경우도 있지요. 잘 알려져 있는 것 처럼 오토 바이딩어는 다스 라이히 사단사에서 오라두르-쉬르-글랑 학살에 무장친위대가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는 논지를 펼쳤고 뒤에는 아예 단행본을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이 점은 우크라이나인 무장친위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이들은 전쟁범죄를 부정하면서 여기에 ‘민족주의’를 추가해 비판을 봉쇄하는 무기로 삼습니다. 이 점은 한국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이 반공이라는 방패를 통해 비판을 면하려는 것과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필자의 비판은 꽤 흥미롭습니다. 필자는 우크라이나 무장친위대가 창설될 당시 부터 나치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았으며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면할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필자는 여기에 냉전 이후 러시아와 폴란드, 우크라이나에서 진행된 홀로코스트 연구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지적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후타 페냐치카Гута Пеняцька학살을 포함해 우크라이나인 친위대원이 참여한 전쟁범죄 사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후타 페냐치카 학살에 대해서는 폴란드,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연구 결과가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고 학살 당시 지휘계통에 무장친위대 제14척탄병사단이 들어가는가의 여부도 여전히 논의의 대상입니다.)
다음으로는 우크라이나인 무장친위대를 옹호하는 측에서 전쟁 말기에 부대의 명칭이 무장친위대에서 우크라이나 국군으로 개칭된 것을 구실로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나치즘과의 단절을 꾀하는 시도를 비판합니다. 필자는 1945년 4월 28일에 발행된 사단의 신문이 반유대주의 선전으로 가득차 있다는 점을 들어 전쟁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크라이나 무장친위대가 나치즘에 충실했다고 주장합니다.


필자의 지적대로 우크라이나인 무장친위대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는 아직 시작단계에 있습니다. 이 사단의 ‘군사 작전’에 집중한 상업적인 출판물은 오래전 부터 존재했지만 이들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고찰은 이제 시작단계라는 것 이지요.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도 몇 가지 생각할 점을 제시하는 것 같습니다.

2012년 8월 15일 수요일

냉전기 "독일편향적" 독소전쟁 서술을 비판하는 경향에 대한 잡상

습기찬 여름철 눅눅해지는 헌책들을 정리하다가 빼든 Stalingrad to Berlin 때문에 뻘글 하나 써봅니다.

유명한 군사사가 데이빗 글랜츠David Glantz가 1987년에 발표한 「2차대전기 동부전선에서 전개된 작전에 대한 미국의 시각American Perspectives on Eastern Front Operations in World War II이라는 글은 발표 당시 냉전으로 인한 사료적 한계, 반공적 시각이 결합된 영어권의 2차대전 인식을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이 글이 발표된 시점은 마침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정책이 진행되던 시기와 맞물리기도 합니다. 발표된 시점 때문인지 몰라도 이 글은 몇년 뒤 폭발적으로 발전하게 될 독소전쟁사 연구의 신경향을 알리는 나팔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세부적으로 따지자면 글랜츠의 글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영어권 국가를 중심으로 비판하는 것이기에 이 글이 냉전기 서방의 독소전쟁사 연구를 총괄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체적인 틀에서 25년전 글랜츠가 비판한 내용은 핵심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습니다. 존 에릭슨John Erickson과 같은 걸출한 연구자가 소련의 목소리를 담은 몇 권의 대작을 내기도 했습니다만 냉전기 영어권의 독자들이 접할 수 있던 독소전쟁 관계 서적은 독일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 다수였고 소련의 시각을 반영한 것은 소련의 공식출판물을 영어로 번역한 것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따져보면 미국의 독일 편향을 비판한 글랜츠도 몇몇 저작에서 지나친 러시아 편향이라는 문제를 드러냈지요. 더 들어가면 냉전기 소련의 시각을 반영한 저작들도 정치적인 이유로 왜곡이 극심하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냉전기 영어권에서는 오히려 소련 편향으로 인한 역사인식의 왜곡도 제법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유명한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해석이지요. 오늘날에는 매우 잘 알려진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만 냉전시기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서술은 존 에릭슨의 The Road to Berlin나 쥬크스Geoffrey JukesKursk는 거의 전적으로 소련의 공식서술에 따라 쿠르스크 전투를 재구성했으며 1990년대 까지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의 틀을 만들었지요.

재미있는 점은 냉전기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서술은 독일자료를 활용한 쪽이 더 정확하다는 점 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Stalingrad to Berlin은 글랜츠가 1987년에 쓴 글에서 상당히 높게 평가한 역작입니다. 이 책은 1966년에 출간됐는데 제한적으로 소련 자료들을 활용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료는 미국이 노획한 독일 문서들이죠. 작전단위에서 서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서술이 세밀하지는 않지만 출간된 시점을 고려하면 걸작이라 칭할만 합니다. Stalingrad to Berlin에서는 쿠르스크 전투의 클라이맥스(???)라 할만한 프로호로프가 방면의 전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한편 남부집단군의 상황은 호전되고 있었다. 7월 11일 친위대 제2기갑군단은 쁘숄Псёл강 북안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소련군은 아직 독일 제48기갑군단의 작전지역에서는 프숄강 남쪽에서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 제4기갑군은 프숄강 남안의 소련군이 버틸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호트Herman Hoth는 프숄강 북쪽으로 진출하는 것은 쉬울 것 같다고 보고했다.바투틴Никола́й Фёдорович Вату́ти은 가용가능한 예비대가 고갈되기 직전이었다. 반면 만슈타인은 아직 쓸수 있는 패가 남아있었다. 만슈타인은 쿠르스크로 향하는 최후의 일격에 무게를 실을 때가 됐다고 판단하고 제24기갑군단(제23기갑사단과 친위대 비킹사단으로 편성)을 제1기갑군 후방의 예비대에서 빼내 벨고로드 지구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켐프 분견군Armee-abteilung Kempf은 도네츠강 동안에서 공세를 시작한 뒤 6일 동안 진격에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7월 11일에 필사적으로 공세를 가해 제3기갑군단이 북쪽으로 돌파할 수 있었다. 다음날 바투틴은 스텝전선군에 소속되어 있던 제5근위군과 예비대로 있던 제5근위전차군을 반격에 투입했다. 그러나 제3전차군단은 진격을 계속했으며 13일 밤에는 상당한 규모의 소련군을 제3기갑군단의 측익과 친위대 제2기갑군단의 우익으로 포위할 수 있었다.
Earl A. Ziemke, Stalingrad to Berlin : The German Defeat in the East, (USGPO, 1966), p.137.

1996년에 출간되어 화제가 되었던 나이페George NipeDecision in the Ukraine를 읽으신 분들이라면 바로 아시겠지만 사실상 나이페의 저작은 친위대 제2기갑군단에 중점을 두고 전술단위로 자세한 분석을 했라는 점을 제외하면 짐케가 30년 전에 했던 서술의 틀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냉전기 소련의 공식서술 보다는 객관적인 서술이었던 셈 입니다.

짐케는 그 뒤에 쓴 Moscow to Stalingrad : Decision in the East에서도 마찬가지로 독일측 사료를 중심으로 독소전쟁의 작전사를 서술했는데 여기서도 냉전기 소련의 연구가 외면하거나 놓친 부분들을 독일 사료를 활용해 잘 잡아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주코프가 1942년 겨울 중부집단군을 상대로 감행한 “마르스” 작전에 대해 서술한 것 입니다. 서방측 문헌에서 이 작전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대부분 독일자료에 의존한 짐케가 처음이었던 것 입니다. 이렇게 냉전기의 “독일편향”적인 저술들은 소련측이 외면하거나 왜곡한 사실들에 균형을 맞춰주는 기능을 어느정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냉전기 독소전쟁 서술에서 “독일편향”을 비판하는 것이 때로는 너무 야박한건 아닐까 하는 잡생각도 들곤 합니다.

2012년 5월 30일 수요일

어떤 호언장담.....

덩샤오핑이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 있었던 매우 유명한 일화지요.(이곳에 들러주시는 분들은 대부분 무슨 일인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덩샤오핑의 미국 방문은 그는 물론 카터에게도 큰 성과였다. 그런데 덩샤오핑은 중국으로 돌아가기 전 우리에게 큰 골치거리를 안겨주었다. 내가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덩샤오핑은 카터 대통령과의 개별적인 회견을 요청했으며 이 회견은 화요일 오후 5시에 열렸다. 우리측에서는 부통령(Walter Mondale)밴스(Cyrus R. Vance), 그리고 내가 참석했으며 덩샤오핑은 부총리(方毅), 외교부장(黃華)과 외교부 부부장(章文晉)을 동반하였다. 회견의 주제는 내가 예상한대로 베트남 문제였다.

우리는 지난 회담을 통해 중국은 소련이 동남아시아에서 활동할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서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사주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때문에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을 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음을 알았다. 중국 지도부는 미국 지도층과 여러차례의 대화를 통해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은 중국의 안보에 전략적인 위협을 가하고 있으며 장기적인 차원에서는 동남아시아의 안정을 위협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베트남이 전복한 캄보디아의 잔혹한 폴포트 정권은 중국의 가까운 동맹이었으므로 중국은 베트남에 대해 보복을 가하기로 했다.

참석자들이 오벌 오피스에 모였을 때,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으며 다른 미국측 참석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을 하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덩샤오핑이 중국의 입장을 차분하고 단호하게, 그리고 강경하게 설명하는 모습에서는 심각하고 매우 특별한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덩샤오핑은 중국이 소련의 전략적인 계획을 방해하고 “베트남의 야욕을 저지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교훈을 주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덩샤오핑은 이때 어떤 식으로 교훈을 줄것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그 범위와 시기가 제한적일 것이라고만 말했다. 그리고 덩샤오핑은 예상되는 소련의 대응과 중국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하여 차분하게 설명했다. 덩샤오핑은 소련의 대응 방식에는 “최악의 경우”도 포함될 것이라고 했으며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되더라도 중국은 그에 맞설 것이라고 덧붙였다. 덩샤오핑은 국제무대에서 미국이 “정신적인 지원”을 해주기만을 바란다고 말했다.

우리는 약간의 사전논의를 하긴 했으나 나는 대통령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나는 덩샤오핑이 미국에 오기전에 대통령에게 중국이 갈수록 캄보디아 문제에 신경을 쓰고 있으며 중국이 취할 것으로 예상되는 행동에 대해 미국이 과도한 경고를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설명했다. 나는 대통령이 밴스의 조언에 따라 중국에게 무력을 사용하지 말도록 강한 권고를 할 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할 경우 중국은 미국이 “종이호랑이”라는 생각을 더 확고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대통령이 사무적인 태도로 이 문제는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답을 하기 전에 참모들과 협의해야 할 사안이라고 대답해서 크게 안도했다.

덩샤오핑은 만약 베트남이 자제하지 않을 경우 중국은 행동을 더 확대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중국이 제한적인 행동을 한 뒤 병력을 신속히 철수하겠다는 것 이었다. 덩샤오핑은 1962년에 있었던 중국과 인도의 국경분쟁을 예로 들면서 베트남도 같은 방식으로 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덩샤오핑은 미국의 지지를 기대하지는 않았으며 때로는 어느 한쪽이 어떤 행동을 취할때 다른 한쪽은 그렇게 하는 것을 바라지 않을 수도 있다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중국측이 여러가지 대안을 고려한 뒤 설사 소련과의 대결을 초래하더라도 행동을 취하기로 결심한 것이 분명했다. 나는 덩샤오핑의 신중하면서도 단호한 어조에 감명을 받았다.

Zbigniew Brzenzinski, Power and Principle : Memoirs of the National Security Adviser 1977~1981, (Farrar Straus & Giroux, 1983),  pp.409~410

그리고 베트남이 중국에게 교훈을 줬다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죠.....

2012년 4월 30일 월요일

塞翁之馬!?

"우리는 방사능오염지대를 돌파하는 부대가 어느 정도의 손실을 입을 것인지 예측을 해 본 뒤로는 방사능오염지대를 통과할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했습니다. 1956년이나 1957년쯤에 중앙아시아에서 진격을 위해 핵무기를 사용하는 실험을 하려고 군사훈련을 실시한 일이 있습니다. 실험장소에 소형 핵무기를 터뜨린 뒤 부대가 핵구름을 통과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비극으로 끝났으며 겨우 최근에 와서야 이것을 다루는 글들이 몇편 간행되었습니다. 나는 이 훈련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 조종사는 핵구름을 통과하는 것을 거부해서 경질당했습니다. 명령에 따랐던 그 조종사의 동료들은 몇 달 안돼서 모두 죽어버렸습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때 소련에서 이런 실험을 하기 위해서 사람을 사용했다는 것 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범죄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은 진짜 문제였으며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어떤일이 벌어질것인지 알 수 있었다면 우리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겠지요. 우리의 무지와 부족한 생각으로 인한 댓가는 너무나 큰 것 이었습니다."

비탈리 츼기츠코Виталий Н. Цыгичко 박사,  2006년 4월 24~25일에 걸쳐 진행된 냉전기 유럽전역의 전쟁계획을 주제로 한 좌담회에서.

Jan Hoffenaar and Christopher Findlay (eds.), Military Planning for European Theatre Conflict during the Cold War : An Oral History Roundtable Stockholm, 24–25 April 2006, (Center for Security Studies, ETH Zurich, 2007), pp.139~140

2012년 4월 15일 일요일

부어헤스(Voorhees) 위원회 보고서와 한국전쟁 직전 미육군의 대전차무기에 대한 평가

며칠전에 올렸던 “리델하트는 어떤 맥락에서 한국전쟁기 북한군의 기갑부대 운용을 비판했는가?”와 이어지는 이야기 입니다.

리델하트의 전차무용론 비판은 전제가 잘못되긴 했지만 결론 자체는 제법 타당합니다. 전차는 발전을 거듭하면서 아직까지도 지상전력의 큰 축을 차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리델하트는 전차무용론에 대한 가장 최근의 사례로 한국전쟁 이전 미육군부장관 페이스Frank Pace, Jr.의 발언을 인용했습니다. 저는 리델하트의 글을 읽으면서 그가 비판한 미육군의 전문가들이 누구였을까 조금 생각을 해 봤는데 혹시 부어헤스 위원회의 보고서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어헤스 위원회는 페이스의 전임 육군부장관이었던 그레이Gordon Gray가 당시 미육군의 전반적인 전략-전술적 상황을 평가하기 위하여 육군부 차관이었던 부어헤스Tracy S. Voorhees를 위원장으로 조직한 것 입니다. 이 위원회는 육군부 차관 부어헤스, 육군부 차관보 알렉산더Archibald S. Alexander, 부시Vannevar Bush, 육군 중장 에디M. S. Eddy, 육군 중장 라킨T. B. Larkin, 육군 중장 그룬터Alfred M. Gruenther, 육군 소장 매컬리프A. C. McAuliffe, 육군 준장 비슬리Rex Beasley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부어헤스 위원회의 보고서는 1950년 4월 19일에 육군부장관에게 보고되었습니다. 부어헤스 위원회 보고서는 트루먼 행정부에서 공군, 특히 전략공군이 미국의 국방력에서 지나치게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을 비판하고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해 육군을 어떻게 증강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보고서는 한국전쟁 직전 미육군이 자체적으로 어떠한 평가를 내리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좋은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대전차 무기와 전차에 대한 평가입니다. 보고서에서 대전차무기의 발전에 대해 평가하고 있는 부분은 1950년 4월에 그레이의 후임으로 육군부장관에 임명된 페이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부어헤스 위원회 보고서에서 대전차무기의 발전에 대해 내리고 있는 결론은 아래와 같습니다.

대전차전 : 기갑차량을 파괴하는 분야에서는 가장 놀라운 발전이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행해진 시험을 통해 중전차를 구식 무기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포와 탄약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확실하게 드러났다. 소련이 수천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엄청난 잠재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소련의 전차가 더이상 강력한 무기로 존재할 수 없다면 전반적인 정세가 바뀔 것이다.

지난번 전쟁(2차대전)에서 바주카포에 사용되어 전차의 장갑을 관통하는데 매우 효과적이었던 성형작약탄이 개발되었다. 또한 가볍고 운반이 매우 쉬운 무반동포도 개발되었다. 이제 두가지 무기가 결합되었다. 이미 두터운 장갑을 관통할 수 있는 90mm 무반동포용 성형작약탄이 만들어져있다. 분대화기로 운용하거나 지프에 탑재하여 어떠한 전차라도 단 한발에, 그리고 충분한 거리에서 격파할 수 있는 무반동포를 생산하는 것은 분명히 가능하다. 경장갑 차량이 어떠한 전차라도 상대할 수 있게 되고 어떠한 수준의 장갑을 가진 전차라도 관통할 수 있는 포를 탑재할 수 있게 되면 중전차의 시대는 종언을 고할 것이다.

Antitank : The most striking advance has to do with the defeat of armor. It now appears from tests already made that it is clearly possible to build at relatively small expense guns and ammunition which can render the heavy tank an obsolete weapon. This is of enormous potential significance, since Russia has some forth thousand tanks. If they cease to be an overpowering weapon, the entire outlook is changed.

During the past war there was developed a shaped charge projectile, used in the bazooka and remarkably efficient in penetrating armor. There was also developed a recoilless gun, giving a light and highly portable weapon. These can now be joined. Already projectiles have been made for 90mm. guns which can penetrate thick armor. It is entirely possible to make a gun which could be handled as a squad weapon or carried by a jeep which can destroy at a single shot - and at useful ranges - any tank whatever. When a lightly armored vehicle is a match for any tank and carries a gun that can penetrate any armor a tank can carry, the days of the heavy tank are at an end.

“CS334 Voorhees Bd.”, Memorandum for Brigadier General D. P. Booth Office D/CS for Plans.(1950. 6. 21), RG319,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Assistant Chief of Staff for Intelligence, Top Secret Correspondence, 1914~62, Entry 4, 1950, Box 13, p.2~3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대전차 무기의 위력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보고서의 결론에서는 전차개발과 증산에도 박차를 가할 것을 함께 주장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대전차 무기의 가치는 방어적인 측면에서 강조한 것 같으며 공격용 무기로서 전차의 필요성 까지 부정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문제는 육군부 장관 페이스가 부어헤스 위원회 보고서의 어떤 부분을 받아들이고 어떤 부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하는 것 입니다. 한국전쟁 이전 페이스의 발언은 여러 방면에서 고찰해 봐야 겠지만 아마도 예산문제 때문에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전차 개발계획 보다는 상대적으로 비용이 절약되는 대전차무기를 선호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2012년 1월 18일 수요일

한국전쟁 이전 미육군의 기갑전력 증강계획

2차대전이 끝난 뒤 미군은 대규모의 동원해제에 들어갑니다. 국무부와 군부는 동원해제가 미국의 대외정책 수행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데 의견이 일치했으며 특히 국무부장관 번즈James F. Byrnes는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는 것을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 말기에 수립된 동원해제계획은 예정에 맞춰 시행되었습니다. 1946년 초가 되면 동원해제가 당초 예측했던 것 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전쟁 말기에 수립한 계획에서는 동원해제를 실시하더라도 월간 50,000명의 신병을 보충해서 필요한 병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월간 37,000명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반면 동원해제는 계획대로 시행되어 병력은 급속히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각 군은 전후처리와 소련이라는 새로운 위협에 대비해 동원해제를 최대한 늦춰보려 했으나 미국 국내의 경제적인 이유와 함께 신속한 귀국을 희망하는 병사들의 격렬한 요구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당시 소련이 새로운 위협이란 것은 정치 지도층과 군부에서나 인식할 수 있었을 뿐 일선에서 연합군으로 싸운 병사들이 깨닫기는 어려운 것 이었으니 말입니다. 여론이 나빠지자 1946년 1월 8일 성명을 발표해 동원해제가 신속히 이루어 질 것을 천명하게 됩니다.1) 미 육군의 동원해제는 모든 징집병을 전역시킨 1947년 6월 30일 완료됩니다.2) 1945년에서 1947년 까지 미국 각 군의 병력이 감소한 추이는 아래와 같습니다.3)

표1. 미군의 병력변화(1945~1947)
1945. 6. 30
1946. 6. 30
1947. 6. 30
육 군
5,984,114
1,434,175
683,837
육군항공대
2,282,259
455,515
305,827
해 군
3,377,840
951,930
477,384
해병대
476,709
155,592
92,222
총 계
12,120,922
2,997,212
1,559,270


육군의 대대적 감축은 기갑부대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2차대전 당시 미국의 기갑은 제도상 정식 병과도 아니어서 그 위치가 매우 애매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전쟁부는 2차대전 중 경험을 쌓은 기갑장교들이 원래 병과로 복귀해 그 경험을 잃어버리는 것을 우려하여 1947년 부로 기병병과로 전환하였고 기병병과는 1949년 기갑기병Armored Cavalry로 개칭됩니다. 결국 1950년 육군조직법Army Organization Act에 따라 기갑병과가 정식 병과로 격상되긴 합니다만 이러한 사례는 전후 미육군에서 기갑병과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입니다.
또한 동원해제에 따라 대부분의 기갑사단이 해체되어 1948년 중순에는 제2기갑사단만이 현역 사단으로 남게되었고 기존의 전차대대 중 상당수가 1946년 7월 1일자로 경비연대Constabulary Regiments에 배속된 경비기병중대Constabulary Squadrons으 로 개편되어 명맥만을 유지하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M-26, M-24와 같은 신형장비의 도입으로 기갑병과는 유지하는데 더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1944년에 M-4를 장비한 기갑사단을 편성하는데 3천만 달러가 소요되었는데 1950년에 M-26을 장비한 기갑사단을 편성하는 데는 2억 달러가 소요되는 실정이었습니다.4)

그렇지만 소련과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미국은 다시 재래식 전력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기갑전력이 다시 강화되게 됩니다. 유일한 현역기갑사단인 제2기갑사단의 강화와 함께 제3기갑기병연대가 신규로 편성되었습니다. 또한 유럽에 주둔하고 있던 3개의 경비여단을 기갑기병연대로 개편했습니다.5) 전차대대의 숫자는 다시 회복세로 돌아서 1946년에 12개 대대까지 줄어들었던 것이 1950년에는 64개 대대까지 확대되었습니다.6)

하지만 예산 증액이 어려웠기 때문에 대대적인 병력 증강이나 신규장비 도입은 한국전쟁 이전까지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군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1948회계연도에 총병력을 1,641,000명으로 증강하기 위해 96억4700만 달러의 국방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했지만 의회는 이를 기각하고 87억5100만 달러만을 승인했습니다. 결국 1948년 회계연도의 병력 증강은 당초 목표치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1948년 2월 18일 합동참모본부의 합동참모국장 그런터Alfred M. Gruenther장군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군병력 부족에 대해 보고했습니다. 이 보고에서 그런터 장군은 육군의 병력 부족이 심각한 상태이며 추세가 유지되면 1948년 말 까지 165,000명의 병력이 부족해 질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7) 트루먼 대통령은 1949년 회계연도에 총병력을 1,734,000명으로 증강할 것을 결정하고 30억 달러의 추가예산을 신청하기로 결심합니다. 이 계획안은 육군을 대대적으로 증강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습니다.8) 국방부장관 포레스탈은 1948년 3월 25일에 이 추가예산안을 상하원에 제출했는데 이에 따르면 각 군의 증강 내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9)

표2. 미국방부가 1948년 3월 25일 상하원에 제출한 병력 증강계획
1948. 3. 1 병력
증강 이후 병력
증강 규모
육 군
542,000
782,000
240,000
해 군
397,000
460,000
63,000
해병대
81,000
92,000
11,000
공 군
364,500
400,000
35,500
총 계
1,384,500
1,734,000
349,500


그런데 잘 아시다 시피 육해공군은 예산 증액의 기회가 오자 당초 합동참모본부가 구상한 것 이상의 병력과 장비 증가를 요구합니다. 특히 공군이 이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70개 비행단 계획과 해군의 주요 전투함 384척 계획은 끝내 나중에는 제독의 반란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지게 되지요. 육군도 당초 국방부가 제시한 782,000명 보다 더 많은 837,000명의 병력과 12개 현역사단, 13개의 완편 주방위군사단, 25개의 예비사단을 요구합니다. 각 군의 요구를 모두 반영한 예산은 당초 계획안 보다 90억 달러 늘어난 것으로 이것은 트루먼 대통령이 승인한30억 달러를 세배 초과한 것 이었습니다. 이것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 이었고 결국 합참이 포레스탈 장관에게 35억달러로 약간 늘어난 예산안을 제시하여 간신히 균형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4월 21일 이 방안을 승인합니다. 그러나 재무부가 국방예산의 급격한 증가를 경고하면서 추가예산 신청은 31억5900만 달러로 결정됩니다. 이에 따라 트루먼 행정부가 1949년도 국방예산으로 신청한 금액은 129억6200만 달러가 됩니다. 그러나 상하원은 이보다 더 많은 국방예산을 배정해 최종적으로 승인된 1949년 회계연도 국방예산은 139억4100달러가 됩니다. 이 중 육군에 배정된 액수는 42억 1700만 달러였습니다.10)

새 예산안은 800대의 전차를 신규로 도입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11) 새 예산안에 따라 1949년 6월에 전차생산 5개년 계획이 작성됩니다. 전차 생산 5개년 계획은 76mm포 탑재전차 T-41(M-41)과 90mm포 탑재전차 T-42, 그리고 120mm포 탑재전차 T-43(M-103) 등 세 종류의 신형전차를 생산하여 소련의 전차개발에 대응하고자 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작성된 전차생산 5개년 계획은 다음과 같았습니다.12)(도표에는 6개년도로 되어 있는데 원문에서 5개년 계획으로 적고 있으므로 그에 따릅니다.)

표3-1. 전차생산 5개년 계획의 생산대수(1949년 6월 작성)
회계연도
T-41
T-42
T-43
총 계
1950
109
109
1951
200
200
1952
31
340
100
471
1953
240
240
480
1954
240
240
480
1955
240
240
480
총 계
340
1060
820
2,220


표3-2. 전차생산 5개년 계획의 소요비용(1949년 6월 작성, 단위 백만달러)
회계연도
T-41
T-42
T-43
총 계
1950
40.3
40.3
1951
45.0
7.5
12.1
64.6
1952
7.0
85.1
35.0
127.0
1953
48.0
84.0
132.0
1954
48.0
72.0
120.0
1955
48.0
72.0
120.0
총 계
92.3
236.6
275.1
604.0


1949 년도의 계획은 예산상의 제약으로 단지 전차 생산 기술을 유지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아무리 평시라지만 2차대전 직후의 미국이 1년에 전차를 고작 백대 단위로 만든다니!!!) 실제로 미 육군에서는 이 정도의 생산계획으로는 전시동원에 필요한 소요는 물론 현재 유지하고 있는 전력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다고 평가하고 있었습니다.13) 이 시기 미육군 기갑사단의 전차 대수는 373대였습니다.14) 1년에 중형전차를 240대 생산하는 것으로는 기갑사단 하나도 장비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는 것 입니다.

또한 미국의 대소작전 계획이 방어적인 성격에서 적극적인 반격에 초점을 맞추면서 육군, 특히 기갑전력의 중요성도 강조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49년 12월 8일 승인된 작전계획 오프태클Offtackle은 반격작전에 미군 41개 사단을 투입하도록 하고 있었는데 프랑스를 해방한 이후의 전과확대 단계에서는 기계화부대와 공수부대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15) 새로운 전쟁계획과 NATO의 결성은 미육군에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부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소련과의 전면전을 상정한 이상 기갑전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이었습니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1950년 회계연도 국방예산을 작성하면서 정책과 전쟁계획을 반영하여 1949년 회계연도 보다 병력 규모를 더 증강했습니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1950년 회계연도 내로 육군의 경우 현역 12개사단, 주방위군 34개 사단, 예비군 25개 사단을, 해군은 현역함 993척과 예비함 1,657척, 해병대 2개 사단과 해병항공단 2개, 공군은 70개 항공단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예산을 작성했습니다. 이 예산안에 따른 병력 규모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 계획에 따른 예산은 3백억 달러에 달했습니다.16)

표4.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1950년 회계연도 예산에 따른 병력규모
현 역
예비군 및 주방위군
육 군
947,000
1,137,000
해 군
519,196
1,555,000
해병대
104,075
165,838
공 군
502,000
140,500
총 계
2,072,271
2,998,338


3백억 달러는 1949년 회계연도에 의회가 승인한 국방예산의 두배를 훨씬 넘는 금액이었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었습니다. 결국 포레스탈 장관의 지시에 따라 144억 달러로 제한되었고 최종적으로 트루먼 대통령이 승인한 액수는 3군에 133억9900만 달러, 총 142억4000만 달러였습니다. 이 예산안은 1949년 1월 10일 의회에 제출됩니다. 의회는 3군에 배정된 예산은 139억1200만 달러로 증액했으나 육군과 해군의 예산을 삭감하는 대신 공군만 8억 달러 가까이 증액해 버립니다. 육군 예산은 트루먼 대통령이 제출한 안에서 44억9800만 달러였으나 의회에 의해 승인된 액수는 44억2000만 달러였습니다.17)

1950 년에 이르면 미국 기갑부대는 부대의 숫자는 증가했지만 예산 부족으로 인해 신형 전차 도입의 지연과 기존 전차의 유지정비의 미비로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직전 미육군이 보유한 전차를 보면 M-24의 경우 가동가능한 차량이 900대인 반면 가동불능 상태인 차량이 2,557대에 달했고 M4A3E8은 가동 가능한 차량이 1,826대, 가동불능의 차량이 1,376대에 달했습니다.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신형전차 M-46은 319대에 불과했고 여기에 M-26 800여대와 1950년 회계연도 예산으로 M-46으로 개량될 M-26이 1,215대 있었습니다.18) 1948년 이후 국방예산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2차대전 직후의 급격한 감축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던 것 입니다.

한편 미육군은 새로운 안보정책기조와 전쟁계획에 맞춰 전차생산계획을 재검토 합니다. 미육군 기갑위원회Army Armored Panel은 1950년 5월 31일 제출한 보고서에서 육군동원계획 I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연간 2,072대의 전차를 생산해야 하며 편제되어 있는 부대의 수요만을 고려하더라도 연간 1,680대를 생산해야 한다고 결론내렸습니다. 이에 따른 전차 생산계획은 다음과 같았습니다.19)

표5-1. 육군 기갑위원회가 작성한 전차생산계획(1950. 5. 31)
회계연도
T-41
T-42
T-43
총 계
1950
109
109
1951
200
200
1952
240
100
125
465
1953
240
960
240
1,440
1954
240
1,200
240
1,680
1955
240
1,200
240
1,680
1956
240
1,200
240
1,680
1957
240
1,200
240
1,680
1958
240
1,200
240
1,680
1959
240
1,200
240
1,680
총 계
2,229
8,260
1,805
12,294


표5-2. 육군 기갑위원회가 작성한 전차생산계획 소요예산(1950. 5. 31 단위 백만달러)
회계연도
T-41
T-42
T-43
총 계
1950
40.3
40.3
1951
45.0
7.5
12.1
64.6
1952
48.0
27.5
43.8
119.3
1953
42.0
187.2
84.0
313.2
1954
36.0
194.4
72.0
302.4
1955
36.0
194.4
72.0
302.4
1956
36.0
194.4
60.0
290.4
1957
36.0
194.4
60.0
290.4
1958
36.0
194.4
60.0
290.4
1959
36.0
194.4
60.0
290.4
총 계
391.3
1388.6
523.9
2303.8


이 보고서는 육군이 추진한 12개 현역 사단 기반의 육군에 포함될 기갑전력을 최소한 기갑사단 2개, (경)기갑기병연대 1개, 기갑기병집단 1개, 수륙양용전차대대 1개로 유지하고 보병과 공수사단에도 기갑전력을 편제할 것을 제안하고 있었습니다.20)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됩니다. 신형 전차의 확보가 시급해 지자 1952년 부터 양산에 들어갈 T-42는 취소되고 M-46에 T-42의 포탑을 결합한 M-47이 급거 양산에 들어가게 됩니다. M-47은 1951년 6월 부터 1953년 11월 까지 총 8,576대가 생산됩니다.21)  이것은 1950년 미육군 기갑위원회가 제시한 전차생산 10개년 계획의 T-42 생산계획을 압도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계속된 냉전기간의 재래식 전력 증강은 미육군 기갑전력의 양적 수준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키기 됩니다.



1) James F. Schnabel, History of the Joint Chiefs of Staff : The Joint Chiefs of Staff and National Policy 1945~1947, (USGPO, 1996), pp.101~102
2) James F. Schnabel, Ibid., p.104
3) James F. Schnabel, Ibid., p.109
4) James A. Sawicki, Tank Battalions of the U.S.Army, (Wyvern Publications, 1983), p.34
5) Philip L. Bolte, “Post-World War II and Korea : Paying for Unpreparedness”,  George F. Hofmann and Donn A. Starry(ed), Camp Colt to Desert Storm : The History of U.S. Armored Forces, (1999,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p.218
6) James A. Sawicki, Ibid., p.34
7) Kenneth W. Condit, History of the Joint Chiefs of Staff : The Joint Chiefs of Staff and National Policy 1947~1949, (USGPO, 1996), pp.99~100
8) Kenneth W. Condit, Ibid., pp.101~102
9) Kenneth W. Condit, Ibid., p.102
10) Kenneth W. Condit, Ibid., pp.107~111
11) Philip L. Bolte, Ibid., p.220
12) “Preliminary Report of the Armored Panel”(1950. 5. 31), RG319,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Assistant Chief of Staff for Intelligence, Top Secret Correspondence, 1914~62, Entry 4, 1950, Box 13, p.2
13) “Preliminary Report of the Armored Panel”(1950. 5. 31), p.2
14) James A. Sawicki, Ibid., p.34
15) Steven T. Ross, American War Plans 1945~1950, (Frank Cass, 1996), pp.118~119; Kenneth W. Condit, Ibid., pp.159~163
16) Kenneth W. Condit, Ibid., pp.123~124
17) Kenneth W. Condit, Ibid., pp.136~137
18) Philip L. Bolte, Ibid., p.224
19) “Preliminary Report of the Armored Panel”(1950. 5. 31), p.4
20) “Preliminary Report of the Armored Panel”(1950. 5. 31), p.7
21) R. P. Hunnicutt, Patton : A History of the American Main Battle Tank. Vol.1, (Presidio, 1984), pp.55~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