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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8일 수요일

회색지대?

잘 아시다 시피 독소전쟁 초기 소련은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었습니다.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 외에도 수백만명이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독일측의 주장에 따르면 1941년 전역에서 생포된 포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표1. 1941년 전역에서 생포된 소련군 포로
기간
사병
장교
사병(누계)
장교(누계)
6.22-6.30
112,784
645
112,784
645
7.1-7.10
253,588
1,324
366,372
1,969
7.11-7.20
234,566
405
600,738
2,374
7.21-7.31
213,092
648
813,830
3,022
8.1-8.10
271,714
1,625
1,085,544
4,647
8.11-8.20
211,225
647
1,296,769
5,294
8.21-8.31
215,641
522
1,512,410
5,846
9.1-9.10
203,668
749
1,716,078
6,595
9.11-9.20
234,574
605
1,950,652
7,200
9.21-9.30
550,961
1,553
2,501,613
8,753
10.1-10.10
288,485
861
2,790,098
9,614
10.11-10.20
499,476
3,392
3,289,574
13,006
10.21-10.31
249,817
931
3,539,391
13,937
11.1-11.10
152,296
742
3,691,687
14,679
11.11-11.20
85,786
312
3,777,473
14,991
11.21-11.30
53,852
64
3,831,325
15,055
12.1-12.10
39,596
74
3,870,921
15,129
12.11-12.20
19,277
3,890,198
15,129
12.21-12.31
16,567
67
3,906,765
15,196
[표출처 : Hartmut Schustereit, Vabanque : Hitlers Angriff auf die Sowjetunion 1941 als Versuch, durch den Sieg im Osten den Westen zu bezwingen, (Mittler&Sohn, 1988), p.73]

러시아에서는 독일측 주장이 과장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1941년의 인명손실 중 포로 및 행방불명을 합치면 2,335,482명 이라고 주장합니다.1) 독일과 러시아의 통계간에 편차가 매우 커서 150만명이 넘을 정도입니다. 어쨌든 1941년 전역에서는 민스크, 스몰렌스크, 우마니, 키예프 전투와 같은 대규모 포위 섬멸전이 이어졌고 전투마다 수십만명의 포로가 발생했습니다. 민스크 포위망에서 30만명, 우마니에서10만3천명, 비텝스크에서 45만명, 스몰렌스크에서 18만명, 키예프에서 66만5천명, 체르니고프에서 10만명, 마리우폴에서 10만명, 브야즈마에서 66만3천명의 포로가 발생했다고 하지요.2)

그러나 1941년의 대규모 포위전은 큰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완벽하게 수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수십만명이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었고 그중 일부는 소련군 전선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싸울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러지 못하고 후방에 남게된 인원들은 나름대로 빨치산을 조직하여 독일군을 후방에서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는 꽤 잘 알려진 ‘미담’이지요.

소련이 붕괴된 이후의 연구들은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서 다양한 분야로 관심을 돌리고 있습니다. 냉전기 소련에서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존재들이 위에서 언급한 포위망을 벗어나 전열에 합류한 용사나 빨치산들이었다면 냉전 이후에는 이전까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회색분자들에게도 연구자들의 관심이 주어진 것 입니다.
얼마 전 읽은 한 연구에서는 전쟁 초기 독일군의 포위망을 벗어났지만 다시 전열에 복귀하거나 빨치산에 합류하지 않은 군인들에 대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적극적으로 싸운 것은 아니지만 독일의 부역자가 된 것도 아닌 일종의 회색지대 같은 존재들인 것 입니다. 이런 존재들이 얼마나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943년에 NKVD가 해방된 지역에서 582,515명에 달하는 전직 군인들을 적발한 것을 보면 그 규모가 엄청났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1944년 1월 1일에서 10월 1일까지 해방된 지역에서 354,592명(이중 장교는 50,441명)의 전직 군인들을 적발해 냈다고 합니다. 대략 전쟁 기간 중 이런 식으로 적발해서 다시 군대에 편입시킨 인원이 939,700명에 달한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지요.3) 이들은 독일군의 포위망을 벗어난 뒤 그냥 민간인으로서 후방에 숨어서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1941년에서 1942년 사이에 이렇게 숨어든 사람들은 전세가 역전되어 NKVD와 SMERSh가 자신들을 잡으러 올 것이라는 사실은 결코 생각하지 못했겠지요. 이런 식으로 다시 징집된 이들은 당연하게도 매우 사기가 낮아서 전투가 치열해 지면 뒤로 돌격하는 경우가 꽤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해방된 지역에서 탈영병으로 의심받아 체포된 이들은 더 심한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후방에 남게 되었음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고 합니다. 보통 군인 출신으로 드러난 경우 의도적으로 탈영했거나 독일군에게 협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세명의 증인을 출두시켜야 했다고 합니다. 물론 결백함을 입증해봐야 다시 군대에 징집되는 것 이었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죄수부대나 정치범수용소 특급을 탔다고 하지요.4)

‘애국자’ 들이나 블라소프와 같은 ‘반역자’들의 이야기는 오래전 부터 잘 알려져 있었지만 이렇게 어중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냉전이 종결되고 나서야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뭐랄까요. 정치적 환경의 변화로 기존에는 조명을 받지 못했던 이야기들에 관심이 주어졌다고 해야 할까요. 냉전이 종식된 뒤 러시아와 서방 모두 소련 시기의 역사에 대해 이전 보다는 조금 더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렇게 회색지대라 할 수 있는 부분에도 주목하게 된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1) G. F. Krivosheev, Soviet Casual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 (Greenhill Books, 1997), p.96
2) G. F. Krivosheev, ibid., p.235
3) Roger R. Reese, Why Stalin’s Soldiers Fought : The Red Army’s Military Effectiveness in World War II,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11), p.235
4) Catherine Merridale, Ivan’s War : Life and Death in the Red Army, 1939~1945, (Metropolitan Books, 2006), pp.251~252


잡담하나. 왠지 도표를 넣으면 알맹이 없는 글에 뭔가가 생긴다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요즘 들어 쓸데없이 도표를 집어넣는 원인이 된 듯 하군요;;;;;

2008년 6월 27일 금요일

벼락치기 이탈리아 구경 - 밀라노, 베네치아

툰 기갑박물관 구경을 마친 뒤 다시 베른 중앙역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이제 다음 행선지인 이탈리아로 넘어갈 차례가 됐으니까요.


일단 밀라노로 들어가기 전에 간단하게 저녁을 먹었습니다. 생긴것도 별로에 맛도 별로더군요.


맛없는 피자를 뱃속에 집어 넣은 뒤 밀라노로 가는 CIS를 탔습니다. 그런데 멋진 ICE에 익숙해 져서 그런지 CIS는 뭔가 좀 모자라 보이더군요.


밀라노에 도착하고 바로 제일 싼 호텔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형편없는 시설에도 불구하고 방값은 비쌌는데 과연 관광객의 등골을 빼먹는 이탈리아다 싶었습니다.


대충 씻은 뒤 김윤진이 이탈리아말로 떠드는 로스트 시즌 2를 보고 잤습니다.

이놈이 지난 밤에 잤던 호텔입니다.

다음날 일어나자 마자 두오모 성당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중간에 중앙역을 다시 보게 됐는데 맑은 날씨에 보니 꽤 멋진 건물이더군요. 시설이 허접한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두오모 성당으로 가는 길은 꽤 흥미로웠습니다. 걸으면서 계속해서 독일과 비교를 하게 되더군요. 일단 알아보기 어렵게 붙여 놓은 도로표지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호텔에서 대충 한 시간 정도 걸으니 두오모 성당이 나왔습니다.

1차 목적지 도착!

그리고 두오모 광장 근처에서 늦은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크. 역시 먹는것 하나는 만족스러웠습니다. 이탈리아 만세!


승리의 이탈리아! 승리의 이탈리아!

식사를 하고 광장 주변을 어슬렁 거렸습니다. 비둘기 모이를 강매하는 파키스탄인(?)만 제외하면 즐거웠습니다.




다음으로는 San Lorenzo 성당으로 갔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보수 공사중이어서 그 멋지다는 교회의 모자이크를 구경하지 못 했습니다. 책자의 설명으로는 370년 경에 처음 건립되었고 16세기에 대대적인 보수공사와 함께 모자이크도 만들어 졌다는데 이거 구경을 할 수 없으니 정말 아쉽더군요.



아래 사진은 교회 쪽에서 밖을 보고 찍은 것인데 앞에 있는 돌 기둥들이 제가 밀라노에서 본 유일한 로마시대 유적이었습니다. 이 돌기둥 들도 제법 유명한 모양이더군요.


San Lorenzo 성당 다음에는 Sant'Eustorgio 성당으로 갔습니다. 이 성당은 군사사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바르바로사가 밀라노를 털때 성당의 성물인 동방박사의 유골을 탈취당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뭐, 실제고 그게 동방박사의 유골일 리는 없었겠지만 종교란게 다 그렇죠...


Sant'Eustorgio 성당을 구경한 뒤 이곳을 기점으로 다시 밀라노 중앙역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원래 계획에서는 밀라노와 파비아에서 하루를 보낸 뒤 다음날 베네치아를 구경하려 했는데 중간에 아르덴느 구경을 한 번 한 덕분에 멋진 이탈리아는 그야말로 단 하룻동안 '발가락'만 담그는데 그쳐야 했습니다. 귀국 한 뒤 이탈리아만 3개월 여행했다는 분을 만나서 아주 부러워 하기도 했지요.

왠지 반가운 화교 상점

중간에 어떤 중고차 가게에서는 재미있는 아이템을 하나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성 마리아(Santa Maria Delle Grazie) 성당으로 갔습니다. 음. 역시 비수기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아줌마들로 득시글 거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한참 앉아서 쉰 다음에 구경했습니다. 크... 그런데 이 어린양은 미적 감각이 제로여서 그런지 막상 유명한 물건을 구경 했음에도 불구하고 별 감흥이 없더군요;;;




마지막으로는 Sforzesco성으로 갔습니다. 시간이 없다 보니 이 멋진 건물은 정말 "밖에서 살짝" 구경하는 걸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갑자기 아르덴느를 구경하기 위해서 이탈리아 구경을 하루 줄인게 '살짝' 후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그리고 시간이 부족해서 지하철을 탔습니다. 생각해 보니 애초 대중교통을 이용하는게 걸어다니는 것 보다 낫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물론 뒤늦은 후회였습니다.;;;;;


밀라노 중앙역에 도착해서 전에 예약해 놓은 야간열차를 확인한 뒤 바로 베네치아행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기차에 타니 자리가 없어서 베네치아 까지 꼼짝없이 서서 가나 싶었는데 어떤 친절한 승무원이 빈 좌석이 많은 객차를 알려줬습니다. 아아. 이탈리아 만세!


자리를 잡고 책을 읽다 보니 어느새 베네치아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시내 구경은 포기하고 저녁이나 먹고 가기로 했습니다.


베네치아역의 물품 보관소는 그야말로 날강도 들이더군요. 시간 단위로 돈을 받아 먹는건 둘째 치고 그야 말로 살인적은 요금이었습니다. 1~2유로면 하루를 맡길수 있는 독일의 무인보관함이 한없이 그리워 졌습니다.


물품보관소에서 삥을 뜯긴뒤(?) 두시간 정도 시내 구경을 했습니다. 물론 밤이라 어디가 어딘지 알수 없었으니 시내 구경이라 하기도 민망했습니다만...



그리고 다시 역으로 돌아오는 길에 적당한 식당 한 곳을 찾아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음식이 나오자 마자 물품보관소의 불친절과 바가지에 대한 반감은 싹 사라지고 이탈리아 만세를 부르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Viva Italia!

Viva Italia!

Viva Italia!

Viva Italia!

2007년 7월 4일 수요일

[번역글][재탕] 기술적 충격과 전쟁 초기의 상황 : 1941년 T-34 전차의 사례

이 글은 예전에 페리스코프 포럼에 올렸던 불법 날림번역물입니다. 하드를 정리하다가 발견한김에 다시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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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6-4(1993년 12월)에 실린 러시아 군사 전문가 "스티븐 잘로가"가 쓴 Technological Surprise and the Initial Period of War : The Case of the T-34 Tank in 1941을 우리말로 옮긴 것 입니다. 12년이나 된 오래된 글 이긴 한데 짧고 재미도 있습니다. 각주도 생략한 불법 번역이라서 읽으시는 분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기술적 충격과 전쟁 초기의 상황 : 1941년 T-34 전차의 사례 
현대 무기는 전쟁 초반의 기습적인 투입으로 전투에서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그 존재를 비밀에 부치는 경우가 많다. 기술적으로 최신일수록 그 존재를 은폐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최근의 사례를 들자면 1991년 페르시아만 전쟁에서 미 공군의F-117 스텔스 전투기의 사용이 있다. 그렇지만 첨단무기를 기습적으로 투입한다고 해서 항상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과거의 사례를 들자면 T-34전차의 사례가 있다. T-34는 흔히 전차 기술에 있어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하지만 1941년 바바로사 작전 기간동안에는 별다른 신통한 성과를 거두지 못 했다. 기술적 요소는 실전에서 중요한 다른 두가지 요소의 뒷 받침이 없이 성과를 발휘할 수 없다. 그것은 운용할 전술과 승무원의 훈련도이다. 
T-34의 개발은 1937년에 BT기병전차를 대체하기 위한 계획으로 시작되었다. 붉은군대 기갑국은 A-20의 혁신적인 디자인에 대해 높이 평가했지만 이것은 BT기병전차에 비해 방어력이 아주 약간 향상된 것에 불과했다. A-20의 주 무장과 엔진은 BT-7M과 동일한 것 이었다. A-20의 설계팀은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부대로 부터 올라온 BT전차의 보고서를 검토한 뒤 붉은 군대 기갑국이 요구하는 사양 이상으로 장갑과 무장을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한편, 설계국에서 대안으로 내놓은 A-32는 기갑국에서 승인하지 않았지만 스딸린의 승인을 받아서 개발을 계속 진행할 수 있었다. A-20과 A-32의 시제품은 1939년 여름에 모스끄바 근교의 꾸빈까 시험장에서 시험 평가를 받았다. 그 결과 A-32가 A-20을 누르고 선정되었다. 1939년 12월 19일에 A-32는 T-34라는 명칭을 부여 받고 붉은군대의 신형 기병 전차로 채택되었다. 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항은 오늘날 T-34의 혁신적인 장점으로 평가 되는 76mm 주포와 강력한 장갑은 당시 붉은 군대 기갑국에서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 붉은 군대는 세 종류의 신형 전차를 개발하고 있었다. T-50은 T-26보병전차를 대체할 것 이었고 T-34는BT계열의 기병전차를, KV 중전차는 T-28 중형전차와 T-35중전차를 대체할 예정이었다. 이중 T-50은 기술적 결함과 기타 지연 요인으로 1941년 8월에야 비로서 부대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결국 1941년 여름에 독일군을 충격에 빠뜨린 것은 KV와T-34 두 종류의 전차가 되었다. 
비교적 최근까지는 독일군이 1941년에 전투에서 마주치기 전 까지는 T-34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 들여졌다. 그러나 최근 발굴된 사료에 따르면 비록 일선 부대는 몰랐다 하더라도 독일 국방군의 정보기관은 T-34의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9년에서 1941년 사이에 독일과 소련간에 있었던 군사 기술 교류는 현재까지 그 실체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독일은 소련측에 기술 교류의 일환으로 3호 전차를 수 대 제공했는데 여기에 대해 소련은 무엇을 답례로 보냈는지 알 수 없다. 미국의 기자인 마가렛 버크-화이트(Margaret Bourke-White)가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부대에 배치된 T-34의 사진을 촬영했다는 소문이 있긴 하지만 본 필자는 아직 확인해 보지 못 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T-34를 설계한 기술자들이 독일에서 제공받은 전차를 우습게 봤다는 것인데 3호전차를 예쁜 장난감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T-34의 출현에 대한 정보는 독일측에서 특별히 경계할 만한 사실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1940년 5월~6월간의 프랑스 전역에서 독일 기갑부대는 Char-1bis 와 S-35를 상대했다. 독일측은 프랑스 전역에서 우수한 기량으로 기술적 열세를 만회했으며 소련의 전차 기술에 대해서는 그저 그런 수준으로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소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자기 만족에 빠져 무사안일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비록 50mm Pak 38의 채용등 대전차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독일 국방군은 프랑스 전역당시 보병들이 프랑스군의 Char-1bis전차와 마주친 뒤 전차 공황에 빠졌던 경험을 무시했다. 독일 국방군은 전차의 주무장을 강화하거나 보병 중대의 대전차 화력을 증대 시키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프랑스군의 강력한 전차와 교전한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소전 개전당시 독일 육군이 보유한 전차들은 프랑스 전역에 투입된 것들에 비해 기술적 진보가 별로 없었다. 
사실 독일측이 소련의 전차 기술에 대해 보인 태도는 그다지 놀랄만한 것은 아니다. 독일은 소련이 초기의 전차 개발 과정에서 서방측의 기술에 과도하게 의존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T-26은 영국의 경전차 기술을 바탕으로 개발됐으며 BT-7은 미국의 크리스티 전차의 개량형에 불과했다. 독일은 스페인 내전당시 소련 전차와 교전한 사례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비록 소련전차들이 영국과 미국의 기술에 의존한 복제품 수준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이것들은 명백히 독일의 콘도르 군단이 사용한 1호 전차 보다 우수했다. 1939년 폴란드 전역에서 소련 기계화 부대와 접촉한 경험은 소련의 수준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만 더 키웠으며 핀란드 전역에서 소련군 기계화 부대가 보인 전과는 그런 시각을 더 굳게 만들었다. 

1941년 소련군의 전차 배치

전쟁 직전 붉은군대는 1861대의 KV와 T-34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막 공장에서 출고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때문에 508대의 KV와 967대의 T-34만이 전쟁 개시당시 서부 지역의 군관구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엄청난 전력이었다. 당시 독일 육군은 불과 1449대의 3호 전차와 517대의 4호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것이 그나마 T-34와 비교할 수 있을 만한 것 이었다. 
최근(1993년)까지 실제 소련군이 어떻게 전차를 배치하고 있었는지는 세부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비교적 근래의 연구에서도 T-34는 독일의 공격이 있을 경우 반격을 위해서 후방의 예비 부대 위주로 배치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많은 러시아 사료의 공개로 전쟁 발발 당시 소련군이 어떻게 전차를 배치하고 있었는지, 특히 T-34와 KV의 배치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여태까지는 신형전차들이 29개의 기계화군단에 골고루 배치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신형전차들은 전방에 배치된 군단에 중점적으로 배치 되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신형전차를 일정 수량 이상 보유한 군단은 5개 군단에 불과했다. 끼예프 특별 군관구 예하 제 4 기계화 군단과 서부 특별 군관구 예하 제 6 기계화 군단이 신형 전차의 거의 절반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 3, 8, 15 기계화 군단이 각각 100대 이상의 신형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 부대는 기존의 통념과는 달리 대량의 신형 전차를 보유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들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가장 잘 장비된 부대는 제 4 기계화 군단 예하 32 전차 사단으로 리보프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다.
제 32 전차 사단은 1941년 4월에 30 경전차 여단을 개편하여 편성되었으며 사단장은 42세의 예핌 뿌쉬낀 대령, 사단 정치위원은 체삐가였다. 뿌쉬낀 대령은 적백 내전에도 참전한 고참군인으로 1932년부터 기갑병과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30 경전차 여단은 사단급 부대에 못 미치는 규모여서 32 전차사단으로 개편될 당시 고급 지휘관(영관급)은 편제의 50%, 초급지휘관(위관급)은 편제의 43%를 채우고 있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사병의 대다수가 1941년 봄에 징집되어 4월과 5월에 걸쳐 사단에 배속된 신병들 이었다. 사단의 최초의 임무는 이들 신병에게 전차를 어떻게 조종하는지 가르치는 것 이었고 이런 기초적인 훈련조차 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 마치지 못 한 상황이었다. 사단이 최초로 T-34를 지급 받은 것은 4월 25일이었고 마지막 차량이 5월 25일에 수령 되었다. 사단은 총 173대의 T-34와 49대의 KV를 보유해서 전쟁 발발 당시 사단급 부대로는 가장 잘 장비된 부대였다. 편제상 1941년의 소련 전차 사단은 210대의 T-34 와 63대의 KV를 장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사단은 다른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전차용 무전기는 편제수량의 30%에 불과했으며 사단 공병과 교량 부설 장비는 28%, 사단의 차량은 22%, 전차 수리용 장비는 13%, 전차의 예비 부품은 2%에 불과했다. 사단의 전차병들 중 많은 숫자가 5시간 미만의 조종 시간을 가지고 있었으며 포수들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 까지 실탄 사격을 해 보지도 못 했다. 전차병들은 신형 전차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 했으며 사단의 정비병들도 어떻게 신형 전차를 정비해야 할지 제대로 알지 못 했다. 
32 전차사단만 이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라 다른 부대들도 비슷하거나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은 1940년에 불과 115대의 T-34를 생산해서 부대로 보냈으며 1941년 1월 까지 T-34를 일정 수량 이상 보유한 부대는 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붉은 군대에서 가장 잘 준비가 된 부대도 겨우 6개월 정도의 훈련 기간을 가졌다는 것 이다. 1941년 5월 1일까지 생산된 T-34는 655대에 불과했으며 아무리 높게 추정치를 잡더라도 부대에 배치되어 훈련과정에 들어간 것은 500대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즉 전쟁 발발 당시 T-34 승무원의 절반 가량은 기껏해야 한 달에서 두 달 정도의 훈련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점은 KV 전차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T-34와 KV 전차포에서 사용할 대전차 철갑탄의 생산이 크게 지연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전차용 탄약은 규정량의 12%정도만 겨우 채우고 있는 상황이었고 게다가 이중 대다수가 고폭탄이어서 대전차 능력이 거의 없었다. 예비 부품은 크게 부족했다. 신형 전차들은 특히 클러치와 기어박스등 동력 계통에서 심각한 기계적 결함이 있었는데 이것은 경험이 부족한 전차병들과 맞물려 도로 행군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KV전차를 위해 새로 생산된 신형 보로쉴로베츠 전차 회수차는 배치량이 크게 부족했다. 만약 전차가 도로 행군 중 고장이 나 버리면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이렇게 소련군대의 내부적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1941년의 대 재앙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것 이었다. 부대단위 훈련은커녕 전차병의 기초 훈련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으니 소련 군대의 기갑전술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소련 기계화 군단의 실전 사례

북부전선에서 꾸르낀 장군이 지휘하는 제 3 기계화군단은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 인근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모두 109대의 T-34와 KV를 보유하고 있었다. 군단 예하 제 5 전차 사단은 6월 22일에 니멘강의 일리투스 다리를 건너려는 독일 제 7 기갑사단을 요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T-34는 확실히 체코에서 개발한 38(t)보다 압도적으로 우수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독일 공군의 지원으로 제 5 전차 사단은 격퇴되었다. 사단의 T-34 일부는 니멘강 동안에 참호를 파고 들어앉아 토치카로 이용되었다. 1941년 6월에 상실된 38(t)는 총 33대였으니 독일측은 매우 적은 손실을 입은 셈 이었다. 다음날 라쎄냐이에서 개시하기로한 소련측의 반격은 독일군의 신속한 진격으로 시도되지도 못 했다. 6월 24일에 제 2 전차사단 의 잔존 병력은 제 6 기갑사단의 100 차량화 소총연대를 공격해서 독일측의 진격에 약간의 차질을 입혔다. 그러나 연료와 탄약이 부족해서 그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 했다. 그뒤 이틀간 전차전이 계속됐지만 제 3 기계화군단 소속의 T-34는 소수만이 남게 되었다. 
한편, 벨로루시아에 배치된 소련군 기계화 부대중 가장 강력한 부대인 하츠낄례비치 장군의 제 6 기계화 군단은 총 238대의 T-34와 114대의 KV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군단은 6월 24일까지 전선에 투입되지 못 했다. 24일에 투입된 제 6 군단은 그로드노 서부에서 기갑집단을 후속하던 제 20 군단의 보병 사단들과 격돌했다. 독일측은 순식간에 탄약을 소모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6월 25일에 급강하 폭격기의 지원을 받아서 소련군의 반격을 격퇴했으며 하츠낄례비치 자신도 전사했다. 헤르만 호트의 제 3 기갑집단은 6월 26일에 벨로루시아의 수도인 민스끄에 도착했으며 그동안 소련 제 6 기계화 군단의 저항은 미미했다. 제 6 기계화군단은 제 10군 예하의 부대들과 함께 그로드노 남서쪽에 포위되어 섬멸되었고 군단소속의 전차 중 소수만이 포위망이 좁혀지기 전에 간신히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서부 전선군에서 가장 강력한 기갑 전력이었으며 전선에 배치된 T-34의 4분의 1을 보유하고 있던 제 6 기계화 군단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 한채 전멸 당했다. 
T-34가 가장 집중적으로 배치된 부대는 우끄라이나에 배치된 3개 기계화 군단이었다. 리보프에 배치된 블라소프 장군의 4 기계화 군단, 두브노에 배치된 랴비체프 장군의 8 기계화 군단, 지토미르 근교에 배치된 까르뻬조 장군의 15 기계화 군단이 바로 그 것이었다. 이중에서 블라소프가 지휘하는 제 4 기계화 군단이 가장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군단은 총 414대의 T-34와 KV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군단 예하 제 8 전차 사단은 가장 잘 훈련된 부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속히 전진하는 독일군은 블라소프의 군단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고 전진을 계속했다. 까르페조의 제 15 기계화군단은 135대의 T-34와 KV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전차가 기동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지형에 투입되었고 군단이 보유한 많은 전차를 도하점과 습지대에서 사고로 상실했다. 
독일군은 6월 22일에 우끄라이나 전선에서 최초로 T-34와 격돌했다. 독일 제 11 기갑사단 예하 제 11 기갑연대는 이날 리보프 전차 훈련 연대 소속의 T-34 30대의 공격을 받았다. 이 교전에서 세대의 4호 전차와 두대의 3호 전차가 격파 당했다. 이보다 좀 더 큰 규모의 교전은 라제쿠프 근교에서 6월 23일에 벌어졌다. 3호 전차를 장비한 11 기갑사단의 2개 기갑 대대는 제 10 전차 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독일측은 46대의 BT-7 전차를 격파했지만 소련 32 전차사단 소속의 T-34들의 공격을 받아 많은 전차를 잃었다. 6월 26일에 소련군은 끼예프로 진격하는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서 기갑부대를 대규모로 집결시켜 반격을 시도했다. 1941년에 벌어진 최대규모의 기갑전에서 랴비셰프의 제 8 기계화 군단과 까르페조의 15 기계화 군단의 잔존 전력, 블라소프의 제 4기계화 군단의 일부 전력, 그리고 꼰드루셰프의 22 기계화군단은 브로디와 두브노일대에서 독일 11 기갑사단과 16 기갑사단의 측면을 공격했다. 한편 전력이 약한 로꼬소프스끼의 제 9 기계화 군단과 페끌렌꼬의 19 기계화군단, 치스챠꼬프의 24 기계화 군단은 대부분 주무장으로 “새총”을 달고 있는 구식 T-26과 BT를 장비하고 있었으며 독일 기갑부대의 측방을 엄호하는 독일 보병사단들을 상대했다. 이 전투에 참가한 독일군 부대의 사단사는 이날의 전투가 매우 치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력한 소련군의 전차는 독일군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T-34와KV는 특히 37mm 대전차포로 무장한 독일 보병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독일군의 37mm 포는 표준 교전 거리에서 소련군의 신형 전차에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 했으며 신통치 못한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 전차 부대의 공격에 대해 독일군은 사단 포병의 대구경 유탄포와 88mm 고사포로 대응했다. 독일 기갑부대역시 보병부대와 유사한 곤란을 겪었다. 이때문에 독일 전차병들은 최대한 근접하여 공격했다. 3호전차의 주포는 T-34를 측면에서 300~400m정도 거리에서 격파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소련군은 우수한 전차를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반격에 실패했다. 독일측은 16 기갑사단만 단독으로 293대의 소련 전차를 격파했다. 전투가 끝난뒤 소련군 기계화 군단은 전투 시작당시의 20% 정도의 전력만 남아 있었다. 우끄라이나의 붉은 군대 기갑국 감독관인 모르구노프 소장은 이 브로디 전투가 끝난지 얼마 뒤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전차 회수차량과 예비부품의 부족에 T-34와 KV의 기계적 결함, 승무원의 훈련 부족이 결합합해서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적의 대전차 방어선에 대한 정찰은 효과적이지 않았습니다. 각 부대는 행군중에도, 전투중에도 끊임 없이 적 공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전선을 향해 800~900km 씩 이동하면서 우리 공군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포병과의 합동 작전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 했습니다. 게다가 작전 지역이 숲과 습지로 전차의 기동에 불리했습니다. 적의 공격은 매우 강력했습니다. T-34와 KV전차는 대전차 철갑탄이 부족했습니다. 이때문에 기계화군단의 손실이 매우 높았으며 막대한 장비 손실을 입게 됐습니다.” 
1941년 당시의 기술 수준은 오늘날과 비교해서 낮은 수준이었다. 소련의 신형 전차들의 부품 수명은 매우 낮았다. 소련의 전차 엔진은 평균 100시간 정도 사용하면 교체해야 했다. T-34전차는 800km정도 도로주행을 하면 기계적 한계에 도달했다. 1941년 당시 대부분의 기계화군단은 이 이상의 거리를 주행해야 했다. 이런 기계적 결함은 정비 인력의 부족으로 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신형 전차를 제대로 다루는 인원은 대대장 정도에 불과했다. 소련측 기록에 따르면 1941년 6월의 전투에서는 경험 많은 장교가 많이 전사했다. 소련 전차 승무원들은 전차가 고장나면 그냥 버리고 달아났다. 그때문에 장교들이 전차를 회수하기 위해 전투 지역으로 들어가야 했으며 많은 수가 전사했다.
다시 제 32 전차 사단의 사례를 보면 그들이 전투 중에 겪은 문제는 새로 편성된 부대들이 흔히 겪는 어려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이 사단은 두브노-브로디 전투 이전에는 이렇다 할 전투를 거의 겪지 않았지만 매우 빨리 진격하는 독일군 기갑 사단을 요격하기 위해서 강행군을 해야 했다. 전쟁 첫번째 달에 32 전차 사단은 49대의 KV전차중 32대를 잃었고 173대의 T-34 전차중 146대를 잃었으며 전차병중 103명이 전사하고 259명이 부상당했다. 전차 손실중 거의 절반이 기계적 결함이나 부품 부족, 전차 회수 차량의 부족으로 인한 것 이었으며 손실된 전차중 10% 미만이 회수되어 수리를 위해 보내졌다. 전체 손실중 불과 30% 만이 전투로 인한 손실이었으며 10%는 수렁에 처박혀서 상실되었다. 사단은 총 113대의 독일 전차와 96문의 대전차포를 격파했다고 보고했지만 독일군의 전투 보고와 대조해 볼때 이건 터무니 없는 과장이다. 이 사단의 전력과 이 사단이 거둔 성과를 비교해 보면 당황스럽다. 이사단은 매우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전에서 거둔 성과는 형편 없었다. 소련 기갑부대의 전반적인 문제점은 바바로사 작전 기간중 T-34를 날이 무딘 칼로 만들어 버렸다. 

미숙한 기술

1941년에 T-34가 보인 많은 문제점은 확실히 이 시기 소련군의 전차 사단과 기계화 군단 전체어 만연해 있던 문제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술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T-34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비해 문제가 많았다. 독일측이 Char B-1과 T-34, KV에 대해 우세했던 이유는 독일 전차의 포탑 배치였다. 3호나 4호 전차 같은 독일 전차는 3인용 포탑이었다. 각 전차는 전차장과 포수, 장전수가 타고 있었다. 프랑스군의 Char B-1은 1인용 포탑이어서 전차장이 1인 3역을 해야 했다. 소련군의 전차는 둘다 2인용 포탑이어서 전차장이 포수를 겸해야 했다. T-34의 2인용 포탑은 실전에서, 특히 전차끼리의 격돌에서 많은 문제점을 일으켰다. 프랑스나 소련은 소형 포탑이 무게를 줄이면서도 방어력을 높일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포탑이 크다면 방어해야할 면적이 많이지기는 한다. 이런 소형 포탑은 순전히 기술자들의 관점에서 만들어 진 것이었으며 일선 부대의 현실을 무시한 것 이었다. 그렇지만 2차 대전 이전에는 사실상 대규모 전차전이 없었으므로 그다지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소련 전차의 전차장들은 포탑내의 전투 배치와 형편없는 시야, 포수의 역할을 겸해야 하는 것때문에 상황 판단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실전에서 전차장들은 사격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모했으며 이때문에 전차장이 해야할 목표 탐색, 다른 전차와의 합동등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이것이 소대, 나가서 중대급 작전이 된다면 해당 지휘관 전차의 전차장에게는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 졌다. T-34의 광학 장비는 독일군의 그것에 비해 형편없이 뒤떨어 졌다. T-34의 전차장은 독일 전차에 있는 우수한 큐폴라가 없어서 차내에서 좋은 시야를 확보할 수 가 없었다. 그리고 독일 전차와 달리 포탑 해치가 너무 커서 관측을 위해 차체 밖으로 머리를 내미는 것도 위험했다. T-34의 해치는 앞으로 열게 되어 있어서 전차장은 몸 전체를 차 밖으로 내밀고 포탑에 걸쳐 앉아야 했다. 
그리고 1941년 여름에는 소수의 소련 전차만이 무전기를 장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은 모든 중형 전차가 무전기를 장비하고 있었다. 1941년 여름에 소련군은 중대장 전차 까지만 무전기를 지급했는데 그 이유는 소련은 신뢰성 높은 무전기를 대량으로 생산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소련군 전차 중대장은 전투가 벌어질 경우 사실상 그의 중대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규정상으론느 깃발을 이용해서 신호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이건 거의 공상적인 생각이었다. T-34는 시야가 불량한데다가 전차장들은 포를 사격하는데 정신을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중대장이 깃발을 흔드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포탑이 2인용이었기 때문에 무전기는 차체에 탑재해야 했으며 전차장이 무전기를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독일 전차병들은 실전에서 소련 전차와 교전해 본 뒤 이 문제점을 지적했다. 독일 전차병들이 보기에 소련 전차 부대는 무질서하게 흩어져서 전투를 하거나 엄마닭과 병아리 처럼 옹기 종기 몰려 다녔다. 소련 전차 소대는 소대장의 지휘하에 단일 목표를 집중 공격할 수가 없었다. 그결과 소련 전차 소대는 화력의 집중을 달성할 수 없었다. 독일 전차병들은 T-34가 전투시 반응이 매우 느리다는 것을 종종 지적했다. 1941년 여름의 전차전에서 독일 전차병들은 T-34가 한발 발사할때 세발 이상을 쏠 수 있었다. 소련이 이때의 문제점을 수정하는데는 거의 2년이 넘게 걸렸다. 
바바로사 작전 기간 동안 T-34가 보인 실망스러운 전과는 2차 대전당시 다른 신무기들과 비교해 특별히 구별 되는 것은 아니다. 충분한 훈련과 우수한 지휘관, 뛰어난 전술이 없다면 신기술을 충분히 활용할 수 없다.

2006년 4월 23일 일요일

소련군 포로들의 생 고생(재탕+약간 수정)

다들 잘 아는 이야기지만 독일군은 독소전쟁 첫 해인 1941년에 기록적인 대 승리를 연달아 거두면서 엄청난 숫자의 포로를 사로 잡았다. 전쟁 첫해의 붉은군대 수뇌부가 삽질을 많이 하다 보니 박살나지 않아도 될 부대들까지 무더기로 박살나 버렸고 그 덕에 독일군은 좀 지나치게 포로를 많이 잡았다. 독일군이 첫 6개월간 잡은 소련군 포로는 1차 대전 전 기간동안 잡은 러시아군 포로의 숫자보다도 훨씬 많았으니.

독일측의 기록(독일연방문서보관소 III W 805/5-7, 재인용)을 보면 1941년 6월부터 1941년 12월 말 까지 사로잡힌 소련군 포로의 숫자는 다음과 같다.

1941년 6월 22일~ 6월 30일 : 112,784명
1941년 7월 1일 ~ 7월 31일 : 701,246명
1941년 8월 1일 ~ 8월 31일 : 698,580명
1941년 9월 1일 ~ 9월 30일 : 989,203명
1941년 10월 1일 ~ 10월 31일 : 1,037,778명
1941년 11월 1일 ~ 11월 30일 : 291,934명
1941년 12월 1일 ~ 12월 31일 : 75,440명


확실히 좀 많이 잡혔다…

소련/러시아 측에서 주장하는 수치는 독일쪽 기록 보다는 다소 적은 편인데 그렇다 치더라도 기록적인(!) 수치인 것은 틀림 없다.

물론 독일측도 전쟁 이전부터 포로를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계획이 있었던 모양이다. 소련 침공 직전인 1941년 6월 16일에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동부전선에 투입될 집단군과 야전군 사령부에 포로 대우에 대한 지침을 하달했다고 한다. 이 지령에서는 비록 소련은 제네바 조약 가입국이 아니지만 소련군 포로에 대해서 제네바 조약이 금지하는 행위를 하지 말 것을 명시하고 있다. 물론 별도의 예외 조항을 첨가 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지고 위에 적힌 것과 같이 엄청난 숫자의 포로가 계속 잡히자 독일군은 포로를 처리하는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당장 포로에게 먹일 만한 식량이 충분히 공급된 것도 아니고(진격하는 독일군 부대들도 보급 추진이 안 돼서 애를 먹었으니 포로를 고려하는건 애당초 어려운 문제였다.) 일반 독일인들이 러시아인들을 인종적으로 깔보는 경향도 있다보니 포로들에 대한 대우는 좋다고 하기엔 문제가 많았다. 독일측의 많은 지휘관들도 소련과의 전쟁은 “독일 문명”의 수호를 위한 전쟁으로 영국-프랑스 같은 “문명국가”와의 전쟁과는 다르다고 인식하고 있었으니 전쟁의 성격이 좀 별날 수 밖에 없었다.

일반 독일 지휘관들의 소련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다음은 전쟁 발발 직전인 1941년 5월 2일에 제 4기갑집단 사령관 회프너 상급대장이 예하 지휘관들에게 하달한 문서의 내용 중 일부다.

소련과의 전쟁은 독일 민족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싸움이다. 이 전쟁은 과거부터 이어져온 게르만 민족 대 슬라브족의 투쟁이며 유럽의 문명을 모스크바와 아시아적인 것들로부터 수호하기 위한 투쟁이고 유대-볼셰비즘을 막기 위한 투쟁이다.
이 싸움의 목적은 지금의 러시아 그 자체를 격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귀관들은) 이전보다 더욱 더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후략)


다들 잘 아시다 시피 개전 초반부터 소련군 포로들에 대한 대우는 좋지 않았다. 그리고 전투가 격화된 9-10월에 사로 잡힌 포로들은 그야말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태에 처하게 됐다. 7월에 독일 중부집단군 지구에서 생포된 소련 포로들이 후방으로 이송되는 동안 지급 받은 식사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날자 불명 : 수수 20 그램, 빵 100 그램
날자 불명 : 수수 100 그램
날자 불명 : 수수 50 그램, 빵 200 그램


이렇게 부실한 식사를 제공 받고 후방의 수용소로 강행군을 해야 했기 때문에 포로의 사망률은 지독하게 높았다. 1941년 10월 말에 가면 중부 집단군 지구의 포로 사망률은 하루 평균 2%에 달했다고 한다. 1941년 10월에 후방으로 이송 되지 못하고 벨로루시아 지역에 있던 포로 361,000명 중 99,000명 가량이 사망했다고 하니 소련군 포로들이 얼마나 혹독한 대우를 받았는지는 잘 아실 수 있을 게다.

소련 포로들에 대한 기본적인 식량 배급도 엉망이었으니 그 외의 다른 것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특히 더 고통 받은 것은 부상 당한 포로들 이었다. 독일측은 포로들에게 식량을 보급하는 것 조차 벅찼기 때문에 의료 지원은 더더욱 어려웠다. 1941년 8월에 우만에 세워진 소련군 포로 임시 수용소의 예를 한번 들어보자. 이곳에 수용된 약 15,000명에서 20,000명 정도의 부상당한 포로들은 의료 도구와 약품이 없어 치료를 못 한 채 방치되어 사망자가 많았다고 한다. 군의관이 있으면 뭐하나 치료할 의약품과 의료기구가 없는데…

부상당한 포로들은 노동도 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쓸모없는 식충이(nutzlose Esser)로 취급 받았다. 포로 부상자들은 비 노동인력으로 분류되어 하루 평균 1,500칼로리의 식사만 지급 받도록 규정 되었기 때문에 사망률이 높았다. 끔찍하다.
소련 포로들과는 반대로 미국이나 영국군 포로의 대우는 그런대로 좋은 편 이었다고 한다. 독일은 1941년 9월에 부상이 심한 영국군 포로 1,500명을 중립국을 통해 이송했다고 한다. 거참. 하지만 중상을 입은 소련 포로들은 이런 대우를 받기는커녕 치료조차 못 받고 죽는 경우가 많았다. 심한 경우 부상당한 포로들을 의학 실험에 쓰기도 했다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망할 녀석들.

그리고 덤으로 소련 포로들을 괴롭힌 것은 악명 높은 행동대(Einsatzgruppen)였다. 이미 행동대는 폴란드 전역에서 포로 및 민간인 학살을 훌륭히(?) 수행한 전력이 있었기에 대 소련전에서는 그 실력을 한층 더 발휘해서 소름끼치는 활약을 했다. 1941년 7월 17일에 독일 국방군 사령부 전쟁포로국(Abteilung Kriegsgefangene)은 소련군 포로들 중 “정치적으로 불온한자들(politisch untragbaren)”을 선별해서 행동대에게 이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정치적으로 불온한자들에는 인텔리 계층, 광신적인 공산당원, 그리고 모든 유태인이 포함 되어 있었다.
1941년 가을 보리소프 수용소에 투입된 Sonderkommado 4a가 학살한 유대인 포로 1,109명 중 78명은 부상을 입은 포로들이었다고 한다. 망할 놈들 같으니. 한 독일인 연구자는 행동대의 무자비한 학살에 희생된 소련 전쟁 포로의 숫자를 약 50만 명 정도로 추산 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없진 않다.

독일측의 가혹한 포로 대우는 독일내에서 조차 말이 많았다. 1941년 9월에 카나리스 제독은 소련군 포로 처우에 대한 보고를 받고 국방군 총사령부에 소련군 포로의 처우 개선을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청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비참한 대우를 받으며 폴란드와 독일 동부의 수용소에 도착한 포로들에겐 아직 고생이 끝난 게 아니었다. 독일의 전쟁 포로 수용에 대한 준비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에 고생은 계속 됐다.
사실 독일 국방군 사령부는 1941년 초에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해서 수용인원 3만에서 5만 명 정도의 인원을 수용할 포로 수용소 단지들을 건설한다는 계획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진 다음에 포로들이 쏟아져 들어올 때 까지 독일측이 해 놓은 것은 포로수용소 부지에 철조망 울타리를 쳐 놓는게 고작이었다고 한다. 포로들은 도착하자 마자 부실한 도구와 자재로 자신들이 지낼 막사를 만들어야 했다. 게다가 생포된 포로가 예상외로 너무 많았던 것이 결정적인 문제였다. 폴란드 지역에서는 교도소와 텅 빈 공장 단지를 수용소로 전용해야 할 정도로 시설이 부족했다.

대략 1941년 겨울 이 되자 독일측도 그럭저럭 독소전 초반의 어수선한 포로 관리를 정리하고 소련 포로에 대한 처우도 약간은 개선 되었다. 1941년 12월에 독일 국방군 사령부가 하달한 소련 포로에 대한 식량 배급 규정은 다음과 같았다.

소련 포로에 대한 일일 식량 배급 규정(단위 : 그램)

빵 214
고기 29
지방 19(주로 마가린)
치즈 9
설탕 32
마멀레이드 25
오트밀, 시리얼 21
감자 1214
야채 161
절인 양배추 39
분말 음료 4
소금 25

※참고로 소련 정부의 육체 노동자에 대한 1944년도 식량 배급 규정은 다음과 같았다.

소련 정부의 육체노동자 공식 배급량(단위 그램)

빵, 또는 밀가루 700(매일)
설탕 800(한달 치 배급)
곡물 1,500(한달 치 배급)
지방 600(한달 치 배급)
고기, 생선 2200(한달 치 배급)

하지만 소련 포로들이 규정된 식량을 받는 대가는 가혹한 중노동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좋은 처우라고 하기도 그랬다. 소련 포로들에게 지급된 빵은 러시아빵(Russenbrot)라고 불렸는데 그 재료는 호밀 기울 50%, 사탕무 20%, 가루 20%, 셀러리가루 20%, 밀짚 가루 10%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재료만 봐서는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중노동과 충분치 못한 식량 때문에 포로 수용소에서도 사망자가 많았다. 1944년 12월 독일측 기록에 따르면 독일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소련 포로 숫자는 다음과 같았다.

장교 47,980
군의관 1,265
부사관 22,595
사병 845,272
민간인 3,587

위의 통계를 보면 전쟁 기간 동안 잡힌 500만이 넘는 소련 포로 중 독일군에 자원한 150만 명을 빼더라도 수백만의 소련 포로가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쟁이 끝난 뒤 에는 거꾸로 수백만의 독일 포로가 소련에서 고생을 해야 했는데 독일 포로들은 짧게는 4년에서 길게는 10년까지 포로 생활을 해야 했다. 아마도 많은 독일 포로들은 수용소에서 소련을 건드린 건 큰 실수였다는 후회를 했을거다. 하여튼 전쟁은 남는장사가 되긴 어려운 비즈니스다.


이 글이 베낀 자료들.

John Barber and Mark Harrison, The Soviet Home Front 1941-1945
Joachim Hoffmann, Die Ostlegionen 1941-1943
Hartmut Schustereit, Vabanque : Hitlers Angriff auf die Sowjetunion 1941 als Versuch, durch den Sieg im Osten den Westen zu bezwingen
Christian Streit, Die Behandlung der sowjetischen Kriegsgefangenen und völkerrechtliche Probleme des Krieg gegen Sowjetunion
Christian Streit, Das Schicksal der verwundeten sowjetischen Kriegsgefangen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