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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31일 수요일

★기적의☆ 인류학(?!)


제국주의 시대의 절정기에 있었던 이탈리아-이디오피아 전쟁과 러일전쟁은 백인의 인종적 우월성에 대한 믿음을 뒤흔드는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먼저 있었던 이탈리아-이디오피아 전쟁은 아프리카 전역이 식민지로 전락하던 무렵 유색인종이 처음으로 유럽의 '백인' 군대를 격파했다는 점에서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안겼습니다. 백인 군대가 '검둥이'들에게 박살났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는군요.

 아두와 전투의 소식이 미국 전역을 뒤흔들기 하루 전날, 애틀랜타 컨스티튜션(Atlanta Constitution)이라는 신문은 아프리카로의 귀환 운동을 전개하던 300명의 흑인이 3월 1일 조지아주의 사바나를 출발했다는 소식을 조롱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아프리카는 모두 유럽인에 의해 분할될 것이기에 아프리카인들은 주권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남부 백인들의 입장에서는) 3월 1일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주장을 전개하는게 이치에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3월 1일 이후로는 그러한 신념이 흔들리게 되었다. 
 애틀랜타 컨스티튜션의 논조는 짐 크로우(Jim Crow) 법안과 유럽의 제국주의를 옹호하던 당대의 기류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1896년의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에서 미국 대법원은 짐 크로우 법안의 기저에 깔린 "분리하되 평등하다"는 주장이 미국 헌법에 합치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애틀란타에서 발행되던 신문들은 이른바 '대서양을 아우르는 지배권'이라는 원대한 구상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즉 아프리카의 미래는 유럽의 통치에 따라 결정될 것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미국 또한 유럽계 미국인의 통치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라는 논리였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미국에 남건 아프리카로 돌아가건 간에 유럽인에 의해 지배받는 암울한 미래만 있을 뿐이라고 전망했다. 즉 짐 크로우 법안은 제국주의의 절정기에 팽배한 인종적 우월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제국주의는 짐 크로우 법안의 친척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두와 전투는 애틀랜타 컨스티튜션의 기사에서 아프리카인의 열등성을 주장할 수 있도록 했던 신념을 산산조각 내 버렸다. 최소한 전투의 소식이 알려진 직후에는 말이다. 3월 4일의 머릿기사는 이디오피아인들이 3천명의 이탈리아군을 죽였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이탈리아군 지휘관 오레스테 바라티에리(Oreste Baratieri)가 패배의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오보도 실렸다. 이후에 실린 기사들도 아프리카에 대한 엄청난 무지와 심리적인 충격 때문에 오류 투성이었다. "이탈리아의 불운"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는 이디오피아가 아프리카 남부에 있다고 썼으며, 이탈리아가 실패한 것이 이디오피아의 막강한 군사력 때문이라고 암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애틀랜타 컨스티튜션은 이디오피아인들이 검둥이가 맞냐는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아비시니아인에 대한 의문"이라는 기사에서는 아프리카인의 인종적 특성에 대해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독자들에게 이디오피아인들의 특성에 대해 면밀히 관찰하라는 제언을 했다. 이 기사는 이디오피아인에게서는 "호텐토트 인종에게서 나타나는 평발과 펑퍼짐한 코"를 찾아볼 수 없으므로 콩고에 사는 아프리카인들과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실 이디오피아인들은 완벽한 흑인이 아니라 "페니키아인을 조상으로 두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시각은 애틀랜타 컨스티튜션에 실린 삽화들에도 반영됐다. 이 신문에 처음 실린 메넬리크의 초상화는 그를 1895년에 즉위한 러시아의 짜르 니콜라이 2세와 놀라우리 만치 비슷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아도와 전투에서 이디오피아인들이 거둔 승리의 규모가 자세히 알려지면서 미국인들은 더 큰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남부의 언론들만 메넬리크가 백인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뉴욕 월드(New York World)지도 기사에서 비슷한 주장을 했으며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도 다음날 뉴욕 월드의 기사를 전제했다. 미국 남부와 중서부, 그리고 대서양 지역의 주요 언론들은 모두 이디오피아인이 백인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뉴욕 월드는 "아비시니아인의 대부분은 코카서스 인종이다"라고 쓰고 여기에 덧붙여 "이디오피아인들은 외모가 수려하고 멋지다"고 주장했다.
Raymond Jonas, The Battle of Adwa: African Victory in the Age of Empire, (2011, Harvard University Press), pp.268~269.

2014년 5월 25일 일요일

Robert M. Citino著, The Wehrmacht Retreats : Fighting a Lost War, 1943



로버트 시티노Robert M. Citino는 17세기 부터 20세기에 이르는 독일 군사사를 다루는 흥미로운 저작들을 잇따라 발표해 왔습니다. 시티노의 대표작인 The German Way of War : From the Thirty Years’ War to the Third ReichDeath of the Wehrmacht : The German Campaigns of 1942는 기동을 통한 단기 결전을 추구하는 프로이센-독일의 군사사상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어떠한 도전을 받고 한계에 부딛히게 되었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Death of the Wehrmacht에서는 작전 단위의 기동전을 통해 전략적인 열세를 상쇄하려 한 독일군의 시도가 처절하게 실패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시티노의 저작에서는 독일의 군사사상이 상대적으로 면적이 좁고, 잘 발달된 도시가 많은 서유럽과 중부유럽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합니다. 유럽의 한가운데에 있어 수많은 적국에 둘러 쌓여 있기 때문에 최대한 신속히 승리를 거두어야 하고 이때문에 단기간에 승부를 보기 위한 작전적 기동이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군사사상은 산업화의 시대를 맞아 본격적으로 도전을 받게 되었고 1차대전에서 독일은 패배하게 됩니다. 하지만 독일 군부는 1차대전의 경험을 통해 기동전에 대한 신념을 더 굳히게 됩니다. 소모전을 피하기 위해서 더욱 더 기동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독일의 전쟁 방식은 1940년 서부전역의 대승리를 통해 옳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1941년 소련을 침공하게 되면서 문제는 달라집니다. 소련의 광대한 국토와 막대한 인적자원, 산업동원력은 독일이 1941년 부터 1942년 까지 가한 일련의 전략적 공세를 분쇄해 버립니다. 북아프리카에서의 패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티노는 이 모든 것이 독일의 전쟁 방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 이었다고 지적합니다.


The Wehrmacht Retreats : Fighting a Lost War, 1943Death of the Wehrmacht의 후속편으로 1942년 전역에서 그 한계를 드러낸 독일군이 서서히 무너져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시티노는 이 시기의 독일군이 한계에 봉착한 전통적인 작전적 기동전으로 연합군의 반격에 맞서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 책에서는 튀니지, 1943년 초의 동부전선, 시칠리아, 쿠르스크 전투, 1943년의 이탈리아 전선, 1943년 하반기의 동부전선의 작전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각각의 전역을 분석하면서 독일의 전통적인 기동전 사상이 어떠한 한계를 드러냈는가를 지적합니다. 이를 통해 전통적인 프로이센-독일 장교단의 몰락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수백년에 걸쳐 발전해온 독일의 군사 사상이 한계에 봉착했을 때, 군사사상과 함께 유지된 프로이센-독일 장교단이라는 사회 계층도 함께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입니다. 이러한 틀에서 만슈타인, 클루게, 케셀링, 롬멜과 같은 독일 고급 장교단에 대해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1943년의 지중해 전역에 대한 서술에서는 막강한 보급 역량, 압도적인 항공력과 해군전력을 보유한 미영연합군 앞에서 독일군이 감행한 일련의 반격이 잇따라 분쇄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독일군은 우수한 군대였고 뛰어난 작전 수행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수많은 작전-전술 단위의 반격에서 그것을 입증했습니다. 또한 저자는 1942년~1943년에 걸친 롬멜의 퇴각 과정과 1943년 이탈리아군의 무장해제와 같은 군사적인 업적을 높게 평가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독일군은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그리고 살레르노에서 항상 신속하게 기동 전력을 집중하여 연합군의 취약한 지점을 타격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의 작전-전술적인 역량은 초기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미영 연합군의 막강한 항공력과 해군력, 그리고 방대한 보급에 의해 분쇄됩니다. 시티노는 연합군, 특히 미군이 독일군 보다 덜 공격적이고 작전 수행능력이 떨어졌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방대한 보급에 의해 뒷받침 되는 화력으로 충분히 상쇄할 수 있는 것 이었다고 지적합니다. 확실히, 저자가 지적하는 대로 압도적인 포병화력과 항공력을 가지고 있는데 굳이 보병의 희생을 무릅쓸 필요는 없는 것 입니다. 시티노는 독일군 장성들이 회고록 같은 사료를 활용해 시칠리아와 살레르노의 해안에서 독일군의 기갑전력이 연합군의 함포사격과 포병화력에 소모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독일군은 뛰어난 전투력으로 연합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강요할 수 있었지만 결국 소모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1943년의 동부전선에 대한 평가도 유사합니다. 소련은 방대한 전장이었고 소련군은 막대한 규모였습니다. 1943년 하계 전역에서 나타난 것 처럼 독일군이 한 지역에서 공세를 위해 역량을 집중할 때 소련군은 독일의 공격을 막아내면서도 동시에 여러 축선에 걸쳐 공세를 감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일 장교단은 우수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지만 1943년 시점에서는 소련 장교단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우수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또한 소련군은 1943년에 와서도 일련의 전술적 패배를 겪으며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있었지만 동시에 독일군을 소모시키며 서서히 붕괴시켜갔습니다. 그리고 쿠르스크에서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반격을 시작했을 때 독일군은 더 이상 이것을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오룔 돌출부 방어전 처럼 독일군 특유의 기동을 통해 소련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힐 수 있었지만 독일군 또한 함께 소모되었고 독일의 전통적인 전쟁 수행방식은 기울어진 추를 돌리는데 어떠한 역할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저자는 독일의 전통적인 전쟁 수행방식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독일 장교단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독일군 지휘관 중에서 최고로 꼽히는 만슈타인 조차도 단기전, 기동전의 전통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인물이었으며 산업화된 시대의 전쟁을 이해하고 해결책을 내놓을 수는 없는 인물이었다고 지적하는 것 입니다. 만슈타인이 거둔 최대의 승리인 1943년 초 우크라이나 전역 또한 이러한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건이었다고 평합니다. 소련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히고 전선을 안정시켰지만 결코 전략적인 균형을 되돌린 것은 아니었다고 그 한계를 지적합니다. 다른 독일 장군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평가를 합니다. 특히 범 지구적 단위의 전략적인 견해를 갖춘 인물이 거의 전무했다는 점을 혹독하게 비판합니다. 만슈타인 조차도 작전 이상의 범주를 바라보는 통찰력은 없었다고 보는 것 입니다. 저자가 독일 장성중에서 가장 크게 비판하는 것은 알베르트 케셀링입니다. 시티노는 알베르트 케셀링에 대한 전통적인 평가는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것이라고 봅니다. 케셀링의 이탈리아 방어전은 방어하기에 유리한 지형에서 점진적으로 철수하면서 소모전을 전개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만약 케셀링이 이탈리아에서 했던 것과 같은 방어전을 소련과 같은 환경에서 전개했다면 어떤 결과가 왔겠느냐며 반문합니다. 오히려 롬멜에 대한 평가가 좋은 편 입니다. 시티노는 롬멜이 엘알라메인 전투 이후 전개한 퇴각전에서 보여준 역량과 이탈리아 방어전략에서 보여준 통찰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독일군 지휘관들이 산업화된 시대의 전쟁에서 보여준 한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헤르만 발크의 회고록에서 인용한 다음의 구절은 20세기의 산업화된 총력전에서 독일의 전쟁 수행방식이 직면한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dem wir nichts entgegensetzen konnten.)


2013년 3월 14일 목요일

NARA 소장 독일노획문서에 대한 잡상 - 2. 독일기갑총감부문서 T78 R617

NARA 소장 독일노획문서에 대한 잡상 - 1. 독일기갑총감부문서 T78 R616


NARA에서 소장하고 있는
독일기갑총감부문서, R617은 총 세개의 폴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폴더는 1944년 11월 부터 12월까지 육군과 공군소속 기갑사단의 월간현황보고서를 정리한 문서입니다. 두 번째 폴더는 1943년 부터 1944년 까지 수집한 외국의 기갑장비에 대한 정보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폴더는 1945년 육군소속 기동부대에 대한 여러가지 보고서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폴더는 지난번에 소개한 R616과 동일한 구성입니다. 다루고 있는 시기만 다를 뿐 구성은 동일하니 별도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각 기갑사단의 판터대대가 육본에서 배속해 준 다른 사단소속의 판터대대일 경우 별도로 정리가 되어 있어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두 번째 폴더는 외국의 기갑장비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소련, 미국, 영국의 기갑장비에 대한 정보가 들어있는데 가장 풍부한 것은 노획해서 사용하던 이탈리아군의 기갑장비에 대한 정보입니다. 많은 사진과 함께 장비별로 분석해 평가한 보고서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소련군 기갑장비에 대한 내용은 거의 대부분 사진이지만 IS-2 전차와 T-34/85의 경우는 분석한 보고서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노획한 T-34/76을 시험하는 장면을 촬영한 사진이 몇 장 있습니다. 미국, 영국군의 장비는 사진만 들어있어서 그다지 활용도가 높지 않습니다.

세 번째 폴더는 1945년도의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이 폴더는 전쟁말기, 글자그대로 종전 직전인 1945년 4월 경의 몇몇 기갑부대의 편성과 현황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부대 편성과 이동 명령, 보급관계 문서에다 몇몇 보병사단에 대한 정보가 뒤섞여 있어 약간 두서가 없다는 느낌이 드는데 흥미로운 정보가 많습니다. 먼저 사단급 부대의 편제, 보충, 장비현황에 대한 자료 들입니다. 대략 다음과 같은 부대의 자료가 들어있습니다.

-제233예비기갑사단
-크람프니츠 기갑교육단Panzer-ausbildungsverband Krampnitz
-발트해 기갑교육단Panzer-ausbildungsverband Ostsee
-로도스 기갑척탄병여단
-총통척탄병사단
-총통경호사단
-제25기갑사단 전투단
-제10기갑척탄병사단
-제17기갑사단 전투단
-제21기갑사단
-제14기갑사단
-제25기갑척탄병사단
-펠트헤른할레 대전차여단Panzerjagd-brigade Feldherrnhalle
-1945년형 기갑사단  편제와 이에 맞춰 편성하도록 한 기갑사단(뮌헤베르크, 되베르리츠, 위터보크, 홀슈타인.) 이 중에서는 홀슈타인 기갑사단에 대한 정보가 상대적으로 많습니다.

특히 재미있는 자료로는 1945년 2월 10일에 작성된 제14기갑사단의 편제표가 있는데 1개 전차대대와 지원전력을 중점집단Schwerpunktgruppe으로 편성하고 차량화된 부대는 각각의 기갑척탄병연대의 단대호에 따라 2개 기갑여단으로 재편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1945년형 기갑사단 편제와도 유사해 보이는 면이 있어 재미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폴더에서 가장 눈에들어오는 자료는 1945년 3월과 4월의 각 집단군 예하 사단들의 편성을 도표로 정리한 것 입니다. 3월에는 G집단군과 E집단군, 4월에는 H집단군, G집단군, C집단군의 자료가 있습니다. 이 표에서는 각 사단별 대대급 전투력과 중화기 보유량을 정리해 놓았는데 C집단군의 경우에는 독일군에 소속된 이탈리아군 사단에 대한 정보도 들어있어 더욱 유용합니다. 또 C집단군 문서에는 예하사단들의 대전차대대 편성과 장비현황을 정리한 통계가 들어있습니다. 이밖에 각 야전군의 현황에 대한 한두장 정도의 짤막한 보고서가 중간 중간 어수선하게 들어가 있습니다.
약간 관련없다고 생각되는 자료도 들어있습니다. 이 폴더의 제일 앞부분에는 국방군총사령부의 B지휘참모부Führungsstab B의 구성와 국방군총사령부 경비대대Wachbattalion OKW의 편성명령에 대한 문서가 있습니다. 국방군총사령부 경비대대의 경우 차량화 보병대대인 만큼 기갑총감부도 관련이 있으니 이 폴더에 포함되었겠지요. 

그리고 기갑총감부 문서에 보병사단에 관한 정보가 많아서 좀 의외인데 1945년 4월 7일자로 된 제1604척탄병연대에 대한 평가를 담은 보고서가 그 중 하나입니다. 이 척탄병연대는 소련군 포로로 구성한 부대입니다. 그리고 보병사단 소속의 충원연대Auffrischungs-regiment에 대한 정보도 제법 됩니다.

아직 제대로 정리는 하지 못하고 한번 쭉 훑어 보기만 하는 중인데 중간 중간 섞여 있는 자잘한 보고서 중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습니다.

2013년 3월 10일 일요일

2차대전기 미영 연합군의 전차 손실에 대한 통계 :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

늘 그래왔듯 통계 몇 개로 때우는 땜빵 포스팅 한개 나갑니다.

2차대전 시기 셔먼으로 대표되는 미영연합군의 기갑차량들은 거의 대부분 야라레메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물건들이었습니다. 다들 아시다 시피 셔먼이 유별나게 문제가 많은 물건이라기 보다는 주적인 독일군의 대전차 화력이 워낙 강력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말입니다. 관련된 이야기는 워낙 잘 알려져 있고 제 블로그에서도 몇차례 이야기를 했으니 “또 저 이야기냐?” 하실 분도 많을 듯 싶습니다. 그래도 구체적인 양상을 살펴 보는 것은 꽤 재미있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포스팅에서 다룰 자료는 1951년 3월 31일 발행된 Technical Memorandum ORO-T-117,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입 니다. 이 보고서는 방대한 표본조사를 통해 작성되어 신뢰도가 상당히 높은 편으로 지금까지도 널리 인용되고 있습니다. 주된 내용은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좋아할 만한 기갑차량의 손실 원인에 대한 분석으로 손실원인, 화기의 종류, 승무원의 사상률 같은 통계를 많이 담고 있습니다. 이 짧은 포스팅에서 보고서의 내용을 다 다룰수는 없으니 몇가지 흥미로운 통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 보지요.(이 포스팅에서 다루지 못하는 내용은 앞으로 조금씩 다뤄보겠습니다.)


1. 연합군 전차의 손실 원인

제일 먼저 연합군 기갑차량의 전투 중 손실 원인에 대한 통계입니다. 유럽전선에서의 손실은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표의 출처는 모두 Technical Memorandum ORO-T-117,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1951. 3. 31), table 2]

표1.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미영연합군의 전차 손실(1941~1943)

표본
포격
지뢰
판처파우스트
/판처슈렉
박격포
기타
원인불명
미군
(1942~1943)
277
59
19
0
0
14
159
영국군
(1941~1943)
1,718
1,381
260
0
2
74
0
프랑스군
(1943)
39
30
9
0
0
0
0

표2.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전선에서 미영연합군의 전차 손실(1943~1945)

표본
포격
지뢰
판처파우스트
/판처슈렉
박격포
기타
원인불명
미군
(1943~1945)
743
234
139
37
3
42
134
영국군
(1943~1945)
926
449
189
59
13
25
167
캐나다군
(1943~1945)
739
176
102
12
4
16
152

표3. 서유럽 전선에서 미영연합군의 전차 손실(1944~1945)

표본
포격
지뢰
판처파우스트
/판처슈렉
박격포
기타
원인불명
미군
(1944~1945)
4,257
1,738
614
412
25
143
809
영국군
(1944~1945)
1,685
929
419
179
7
67
63
캐나다군
(1942~1945)
845
279
74
46
8
31
224

서유럽 전선에서는 판처파우스트와 판처슈렉에 의한 손실이 상당히 높게 나타납니다. 2011년에 올렸던 베를린 전투 당시 소련군의 전차 손실 원인에 대한 글에 서도 언급했지만 전쟁 후반기에는 독일군의 보병용 대전차 화력이 증대되면서 연합군 전차에 상당한 위협을 주게 됩니다. 참고로, 이 보고서에 따르면 연합군의 기록에서 판처파우스트에 의한 전차 손실이 보고된 것은 1944년 2월 이라고 하는군요. 훗날 주한미군사고문단장을 역임하는 로버츠 준장은 1945년 4월 21일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판처파우스트는 이번 전쟁에서 우리가 경험한 적의 대전차 무기 중 가장 지독한 물건이다. 이 무기는 아군의 모든 전차를 격파할 수 있는데다 경험이 부족한 사람도 쉽게 다룰 수 있다. 현재 아군의 전차를 위협하는 유일한 무기는 판처파우스트다.”라고 평했습니다. 실제로 연합군의 라인란트 전역에서 발생한 전차 손실의 25~35%가 판처파우스트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는군요.1)

다음으로는 태평양 전선의 기갑차량 손실입니다. 이 지역은 유럽과 달리 대규모의 기갑전력이 투입되지도 않았고 손실도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지만 나름 흥미로운 조사 결과를 보여줍니다.[마찬가지로 표의 출처는 모두 Technical Memorandum ORO-T-117,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1951. 3. 31), table 2]

표4. 인도-버마 전선에서 영연방군의 전차 손실

표본
포격
지뢰
HEAT
박격포
기타
원인불명
영연방군
(1945)
102
64
19
9
0
3
7

표5. 태평양 전선에서 미군의 기갑차량 손실

표본
포격
지뢰
HEAT
박격포
기타
원인불명
미육군
(1944~1945)
393
134
113
0
7
92
9
미해병대
(1942~1945)
416
121
101
0
8
53
28

표5를 보시면 태평양 전선에서 유독 “기타” 손실이 높게 나타납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태평양 전선의 “기타” 손실에는 일본군 보병의 육박공격이 상당수 포함되는 모양입니다.2)




2. 연합군 전차의 피격 부위

다음은 피격 부위에 대한 통계입니다. 이 보고서에서는 포격과 (판처파우스트 류의) 보병용 대전차화기가 전차의 어느 부분에 명중했는지를 분석한 통계도 실려있습니다. 그 내역은 아래와 같습니다.

표6. 포격에 의한 연합군 전차의 피격 부위

표본
포탑
차체
서스펜션
미군
(서유럽 1)
784
247
408
123
미군
(서유럽 2)
284
88
145
51
미군
(이탈리아)
23
7
9
7
영국군
(서유럽)
320
104
166
50
영국군
(이탈리아)
24
10
12
2
영국군
(북아프리카)
31
15
4
12
[출처 : Technical Memorandum ORO-T-117,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1951. 3. 31), table 10, p.21. 미군의 통계 중 서유럽 1은 제1군에서 집계한 통계이며 서유럽 2는 제3, 7, 9군의 통계를 합산한 것이다.]

표7. 보병용 대전차 화기에 의한 연합군 전차의 피격 부위

표본
포탑
차체
서스펜션
미군
(서유럽 1)
119
45
67
7
미군
(서유럽 2)
52
18
28
6
미군
(이탈리아)
1
0
1
0
영국군
(서유럽)
145
76
57
12
영국군
(이탈리아)
4
2
1
1
[출처 : Technical Memorandum ORO-T-117,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1951. 3. 31), table 12. p.22]

그리고 조금 더 상세하게 조사한 내용이 있습니다. 격파된 107대의 셔먼을 분석해서 피격 부위와 관통 유무를 정리한 것인데 아주 재미있습니다.

표8. 셔먼 전차의 피격 부위와 관통 유무

명중
관통
방어
차체후부 상면
2
2
0
포탑 측면
28
14
14
차체상부 측면
47
42
5
차체하부 측면
27
27
0
포탑 정면
13
10
3
차체 정면
30
22
8
[출처 : Technical Memorandum ORO-T-117,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1951. 3. 31), figure 12.]

방어력이 가장 강력한 포탑 정면과 차체 정면도 명중 당하면 관통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약간 의외인 것은 포탑 측면의 경우 상대적으로 관통이 안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인데 전체적인 평가에 영향을 끼칠 수준은 아니로군요. 다 아는 이야기지만 셔먼 전차는 일단 독일군한테 맞으면 뚫린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3. 연합군 전차를 격파한 추축군 화포의 구경

다음으로는 추축군 화포의 구경에 따른 손실입니다.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전선은 표본의 숫자가 상당히 적습니다. 서유럽 전선의 통계도 표본이 충분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일정한 경향은 보여주는 듯 합니다. 독일군이 노획 무기를 광범위하게 사용해서 그런지 서유럽전선에서 조사된 통계는 화포의 구경이 잡다합니다.

표9. 연합군 전차를 격파한 추축군 화포의 구경(북아프리카 전선)

미군
영국군
47mm
5

50mm
1
15
75mm
2
10
77mm
1

88mm

110
105mm

1
210mm

4
[출처 : Technical Memorandum ORO-T-117,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1951. 3. 31), Table 16, p.28]

표10. 연합군 전차를 격파한 추축군 화포의 구경(이탈리아 전선)

미군
영국군
캐나다군
50mm

2
2
57mm
1


75mm

20
13
88mm
1
16
5
105mm


1
150mm
1


155mm


1
[출처 : Technical Memorandum ORO-T-117,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1951. 3. 31), Table 15, p.28]

표11. 연합군 전차를 격파한 추축군 화포의 구경(서유럽 전선)

미군
영국군
캐나다군
20mm
3

2
37mm
2

16
40mm
3


47mm
3


50mm
1
3
1
57mm
6


75mm
290
34
9
76mm
12


77mm
1


88mm
224
81
95
105mm
24
1

150mm
13


155mm
5


170mm
2


178mm
7


210mm
1


240mm
2


[출처 : Technical Memorandum ORO-T-117,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1951. 3. 31), Table 14, p.27]


4. 유럽전선 전차 승무원의 피해

이 보고서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전차가 격파될 경우 사상자는 얼마나 발생하는지 조사를 했다는 것 입니다. 보고서 작성자들이 사용한 표본은 유럽전선에서 격파된 미군의 중형전차 274대(승무원 1370명)와 경전차 48대(승무원 192명) 입니다. 보고서 원문에는 손실 원인별 인명손실이 자세하게 분석되어 있는데 이것까지 다루면 구글문서도구에서 다루기 곤란할 정도로 표가 복잡해 지니 단순하게 정리한 통계를 올립니다.

표12. 미군의 중형전차 전차병 손실(괄호는 사상자에서 차지하는 비율)

전사
부상
행방불명
무사함
전차장
36(23.1%)
108(69.2%)
12(7.7%)
118
사수
38(27.1%)
90(64.3%)
12(8.6%)
134
장전수
30(21.4%)
95(67.9%)
15(10.7%)
134
조종수
31(24.2%)
86(67.2%)
11(8.6%)
146
전방기관총수
36(27.3%)
87(65.9%)
9(6.8%)
142
[출처 : Technical Memorandum ORO-T-117,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1951. 3. 31), Table 20, p.38]

표13. 미군의 경전차 전차병 손실(괄호는 사상자에서 차지하는 비율)

전사
부상
행방불명
무사함
전차장
13(43.3%)
17(56.7%)
0
18
사수
12(38.7%)
18(58.1%)
1(3.2%)
17
조종수
13(40.6%)
19(59.4%)
0
16
전방기관총수
14(43.8%)
18(56.2%)
0
16
[출처 : Technical Memorandum ORO-T-117,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1951. 3. 31), Table 21, p.39]

역시 전차의 손실 원인과 비교하면 포본이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한가지 재미있는 점이 보이는데 썩어도 준치라고, 중형전차인 셔먼의 승무원이 스튜어트 보다는 안전하다는 점 입니다. 스튜어트 전차의 승무원은 전차가 격파될 경우 전사하거나 부상당하는 비율이 65.1%에 달하지만 셔먼 승무원은  50.8%입니다.(;;;;;;;) 게다가 스튜어트는 전사하는 비율이 사상자의 41.6%지만 셔먼은 24.6%로 사망률이 월등히 낮습니다.(물론 판터와 판처파우스트에 시달리던 전차병 본인들에겐 별 위안이 안됐겠지만 말이죠.)




1) Technical Memorandum ORO-T-117,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1951. 3. 31), pp.9~10.
2) Ibid., p.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