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21일 수요일

Ballistic Research Laboratories Memorandum Report 798에 실린 벌지전투 당시 미 3, 4기갑사단의 전투 데이터



며칠전에 올린 스티븐 잘로가의 저작에 관한 글을 보충하는 차원에서 표 두 개를 올립니다. Ballistic Research Laboratories Memorandum Report 798에서 분석에 활용한 벌지전투 시기의 교전데이터 입니다. 지난번 글들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이 보고서는 오직 미군의 전투 보고서만을 바탕으로 만들어져서 교차검증이라곤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아래에서 조금 더 이야기 하지요.


BRL798에 실린 벌지전투 당시 미 3기갑사단의 교전 기록은 사례 32부터 54까지 입니다. 제가 참고한 Merriam press에서 발행한 판본에는 34, 36, 38, 45, 50등 총 5건의 사례가 누락돼 있습니다. 추후 원본을 확인할 기회가 있으면 누락된 부분을 보충하겠습니다. 아래의 표는 해당 교전사례를 일련번호 순으로 정리한 것 입니다. 미군이 교전상대를 판터로 파악한 사례는 노란색으로 표시합니다.


표1. BRL798에 사용된 벌지전투 당시 미 3기갑사단의 교전 데이터

미군 장비 숫자
미군 장비 손실
독일군 장비 숫자
독일군 장비 손실
공격 진영
격파거리
(야드)
미군 장비 형식
독일군 장비 형식
32a
6
2
4
0
독일
2000
M4
TD
판터
32b
5
5
4
0
?
1400
M4
판터
33
?
4
2
0
미국
300
M4
대전차포
35
3
2
1
1
독일
600
M4
판터
37
3
2
2
2
독일
75~400
M4
M5
바주카
판터
39
7
4
2
1
미국
650
M4
M5
대전차포
지뢰
40
16
2
2
0
미국
650
M5
대전차포
(88)
41
14
0
3
3
미국
40?
M5
바주카
4호×1
대전차포×1
42
14
4
1
0
미국
1000
M4
M5
?
43
12
6
7
0
미국
300~1800
M4
M5
전차
대전차포
박격포
44
10
10
7
0
미국
300~1200
M4
M5
판터
대전차포
46
?
0
?
2
미국
500
M4
M5
TD
바주카
자주포×1
4호×1
47
11
2
3
0
미국
800
M4×7
TD×4
대전차포
48
11
3
3+
0
미국
1300~2500
M4×7
TD×4
대전차포
49
?
3
?
0
미국
1500~1700
?
대전차포
51
16
2
2
2
미국
400
M4
M5
자주포(88)
52
8
1
2
2
독일
200
M4
TD
판터
지뢰
53a
6
4
?
0
미국
1000
M4
대전차포
53b
9
9
3
0
미국
200
M5
판터
53c
1
1
3
0
미국
200
M4
판터
53d
1
1
?
0
미국
1200
M4
대전차포
53e
4
3
?
0
미국
1700~2000
M4
판터
54
32
9
3
1
미국
1200
M4
대전차포
[표 출처: “Ballistic Research Laboratories Memorandum Report 798”(1954. 6), Appendix; Data on World War II tank Engagements: Involving the U.S. Third and Fourth Armored Divisions, (Merriam press, 2012), pp.33~37.]
※ 37번 사례에서 격파된 미군 차종은 M4 1대, M5 1대로 모두 75야드 거리에서 판터에게 격파됐다. 격파된 판터 중 1대는 바주카포에 의해 75야드 거리에서 격파됐으며, 다른 한대는 400야드 거리에서 M4에게 격파됐다.
※ 43번 사례에서 두 대는 300야드에서, 두 대는 1000야드에서, 두 대는 1800야드에서 격파됐다.




다음은 벌지전투 당시 미 4기갑사단의 전투 데이터입니다. 전반적으로 3기갑사단 보다 양호한 전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좀 수상한 사례가 섞여 있습니다. 4기갑사단의 교전 사례는 89~98까지입니다.

표2. BRL798에 사용된 벌지전투 당시 미 4기갑사단의 교전 데이터

미군 장비 숫자
미군 장비 손실
독일군 장비 숫자
독일군 장비 손실
공격 진영
격파거리
(야드)
미군 장비 형식
독일군 장비 형식
89
10
1
?
1
미국
200
M4
M5
판터
90
5
4
2
0
미국
200
M5
자주포
91
16
4
21
0
미국
200
M4
판터
92
15
4
3
3
미국
400미만
M4
판터×2
자주포×1
바주카포
93
5
1
0
0
미국
?
M4
?
94
14
3
1
1
미국
1400
M4
대전차포
95
5
1
1
0
미국
1500
M4
대전차포
96
30
3
1
1
미국
900
M4
자주포
97
4
0
1
1
미국
1300
M4
판터
98a
6
0
5
5
독일
1000
M4
판터
98b
6
0
6
6
독일
100
M4
판터
[표 출처: “Ballistic Research Laboratories Memorandum Report 798”(1954. 6), Appendix; Data on World War II tank Engagements: Involving the U.S. Third and Fourth Armored Divisions, (Merriam press, 2012), pp.33~37.]
※ 91번 사례에서 원래 손실은 11대이나 이 중 7대는 뒤에 회수했기 때문에 손실을 4대로 계산한 것임. 실제 독일군 장비는 판터가 아니라 1개 중대의 돌격포였음.
※ 92번 사례의 비고란에는 최소 5대 이상의 셔먼이 격파됐다고 적혀있음.(1소대 3대, 2소대 1대, 3소대 숫자 미상)
※ 96번 사례에서는 P-47의 공습도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 자주포의 격파 원인을 명확히 알 수 없음.


91, 92번 사례와 같이 이 보고서에는 미군 손실을 축소해서 집계한 흔적이 있습니다. 보고서 작성자가 왜 그런 방식을 택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게다가 91번 사례(Chaumont전투)는 독일군의 전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습니다. 전후 독일군 포로 심문과 노획 문서를 바탕으로 편찬된 미육군 공간사에서는 Chaumont 방어에 투입된 독일군이 제5공수사단 14공수연대의 1개 중대와 11돌격포여단에서 파견된 돌격포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미군의 손실은 보병 65명 사상, 셔먼 11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주)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잘로가가 독일군의 손실 집계 방식을 비판할 때 '완전 손실만 집계해 실제 손실보다 축소되어 있다'는 주장을 한다는 것 입니다. 어째서 잘로가는 미국 기록에 그런 사례가 있을때는 같은 비판을 하지 않는 것인지 궁금해 집니다.  


주) Hugh M. Cole, THE ARDENNES:  BATTLE OF THE BULGE, (1965, Center of Military History) pp.528~529.

2016년 9월 19일 월요일

A World At Arms의 한국어판이 나온다고 합니다




드디어 A World At Arms의 한국어판이 나온다고 합니다.

굳이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는 최고의 2차대전사 개설서라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영어로 씌여진 개설서 중에서는 여전히 가장 뛰어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강력히 추천합니다.



2016년 9월 16일 금요일

스티븐 잘로가의 2차대전 기갑전 저작에 관한 잡담

아마 스티븐 잘로가는 기갑전과 관련해 가장 유명한 저술가일 것 입니다. 기갑전에 대한 저술을 오랫동안 해 왔고 다루는 범위도 매우 광범위합니다. 최근 몇년간은 제2차대전 시기 유럽전선의 기갑전에 대한 저작을  집중적으로 간행하면서 ‘독일 기갑부대의 신화’를 깨트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잘로가의 주장은 큰 틀에서 매우 합리적입니다. 그는 기갑전에서 개별 전차의 성능 문제를 무시할 수 는 없으나 타 병과와의 협동, 전차 승무원의 숙련도 같은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잘로가가 제시하는 대전제는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례를 분석하는데 있어서는 꽤 많은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미군 기갑부대의 작전을 설명하는데 있어 그렇습니다.


먼저 사료의 활용이 부적절합니다. 잘로가가 자주 사용하는 자료 중 하나는 ‘Ballistic Research Laboratories Memorandum Report 798’입니다. 잘로가는 Panther vs Sherman (Duel)의 결론 부분에서 이 자료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미육군의 탄도학연구소는 전차전에서 승리하는데 어떤 요소가 중요한지 파악하기 위해서 전차전에 대한 작전연구를 수행했다. 전쟁 중에는 어느 진영도 통계자료를 규칙적으로 취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탄도학연구소의 분석팀은 미 3기갑사단과 4기갑사단의 기록을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이 두 기갑사단은 미군의 다른 기갑사단들과 비교했을때 평균, 혹은 그 이상의 전차전을 경험했다. 총 98건의 교전을 골라내 계량화 했으며 시기는 1944년 8월 부터 12월 말 까지였다. 이 중 33건이 아르덴느 전투 시기의 교전이었다.”1)


이 서술만 보면 98건 모두가 전차 대 전차의 교전을 분석한 것이라는 인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98건에는 전차 대 대전차포, 전차 대 보병 교전까지 포함되어 있어 순수한 전차전에 해당하는 사례는 훨씬 적습니다. 게다가 잘로가가 비판하고 싶어하는 셔먼 대 판터의 교전 결과로 한정하면 그 사례는 더 줄어들고 그것도 대부분 로렌 전역 시기의 사례로 한정됩니다. BRL798에 실려있는 아르덴느 전투 시기 셔먼 대 판터의 교전 사례는 제3기갑사단이 9건, 제4기갑사단이 6건에 불과합니다.


잘로가는 이 부족한 사례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해 냅니다.


“셔먼과 판터가 격돌한 29건의 전투를 보면 평균적으로 셔먼이 판터보다 1.2배 많았다. 이 자료를 보면 판터는 방어 전투시 셔먼에 비해 1.1배 효율적이었으나, 셔먼이 방어 전투시에는 판터에 비해 8.4배 효율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셔먼은 전체적으로 판터에 비해 3.6배 효율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 보고서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 전쟁 기간 중 있었던 전형적인 셔먼 대 판터의 교전 양상을 보여주지는 못할 것이며, 그 원인은 데이터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셔먼과 판터의 교환비율이 5대 1이라는 대중적으로 널리 퍼져있는 소문은 역사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  전차전의 결과는 기술적인 측면 보다는 전술적인 상황에 더 큰 영향을 받았다. 기술적으로 우수하더라도 전술적인 상황이 더 큰 영향을 끼쳤다. 경험이 풍부한 전차장이 적을 먼저 발견할 가능성이 높았고, 훈련이 잘 된 승무원들이 잘 협력해서 선제 공격을 가할 가능성이 높았고, 우수한 사수가 먼저 적을 명중 시킬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전차전에서는 전차병의 훈련 수준은 중요한 요인이었다. 하지만 우수한 승무원이 우수한 전차를 타고 전진해올 때 그저 그런 수준의 승무원이 그저 그런 수준의 전차에 타고 매복을 하고 있었다면 매복을 하고 있는 쪽이 우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2)


여기서 잘로가가 말한 29건 중 다수는 벌지 전투 이전, 특히 로렌 전역의 제4기갑사단의 교전 사례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BRL798에서 벌지전투 당시 제3기갑사단의 셔먼과 판터의 교전 결과만 놓고 분석하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순수하게 셔먼과 판터가 교전한 전투에서는 판터 1대가 격파될 때 셔먼 13대가 격파되는 결과가 나옵니다.(셔먼 총 13대 파괴, 판터 총 1대 파괴). 제 3기갑사단의 교전결과에 M5까지 포함했을 때는 좀 낫습니다. 판터 1대가 격파될 때 미국 전차 11.3대가 격파된다는 결과가 나옵니다.(미국 전차 총 34대 파괴, 판터 3대 파괴) 그리고 구축전차까지 포함하면 판터 1대가 격파될 때 미국 기갑차량 7대가 격파되는 걸로 나옵니다.(미국 기갑차량 총 35대 파괴, 판터 5대 파괴) 이것이 교차검증은 전혀 거치지 않은, 미군 기록에만 의존한 결과임을 고려한다면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잘로가가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려고 노력하는 로렌 전역당시 4기갑사단의 경우, 전투 보고서가 심각하게 전과를 과장하고 있으며 이 점은 잘로가의 다른 저작인 Armored Champion: The Top Tanks of World War II에서도 인정하고 있습니다.3) 그러니 전투보고서들을 교차검증 없이 그대로 인용한 BRL798의 결론도 좀 회의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잘로가는 같은 해에 나온 Armored Thunderbolt: The U.S. Army Sherman in World War II에서도 동일한 자료를 동일한 방식으로 인용해 동일한 주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4)


잘로가는 이상할 정도로 로렌 전역에 집착하고 있는데 얼마전에는 로렌 전역을 다룬 단행본을 한권 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지그프리트 방어선 전역에서 있었던 기갑전들은 소규모 전투에 불과하다며 언급을 회피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미군이 고전한 사례로 꼽히는 푸펜도르프 전투 같은 것은 잘로가의 저작에서 거의 언급이 안된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참고로, 푸펜도르프 전투는 미육군의 제2차세계대전 공간사에서 퍼싱 전차의 개발사를 서술하기 전에 미군과 독일군의 기갑 장비의 성능 격차를 논하면서  중요하게 언급하는 전투입니다.5)  


※ BRL798의 로렌전역 데이터 분석에 관해서는 "미 제4기갑사단이 아라쿠르 전투에서 거둔 전과에 대한 잡설"에서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물론 잘로가는 BRL798에 있는 사례 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로가의 다른 저작들을 보면 그가 의도적으로 미군에게 유리한 사례만을 뽑아내려고 한다는 의심을 거둘 수 없습니다. 그는 Armored Champion: The Top Tanks of World War II에서 벌지 전투 당시의 기갑전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2주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아르덴느에 투입된 독일 전차연대들은 완전히 격파됐다. 최강의 부대였던 8개의 판터 대대들은 전투가 시작될 당시 415대의 판터를 가지고 있었으나 전투가 끝날 무렵에는 가동 가능한 숫자가 105대로 줄어들었다. 전체 손실 중 180대는 완전 손실이었고 나머지는 파손, 혹은 기계적 고장에 의한 손실이었다. 이 전투에서도 또다시 판터의 기계적 신뢰성 문제가 드러났는데 특히 최종 구동축이 심각했다. 부하가 많이 걸리는 판터의 변속기는 경험이 많은 조종수나 다룰수 있었지만, 아르덴느 전투에 투입된 신참 승무원들은 새로 생산된 전차를 늦게 수령했거나 훈련에 필요한 연료를 조달하기 힘들어서 제대로 훈련을 받을 수 없었다. 독일측 기록에 따르면 아르덴느 공세 당시 상실한 전차의 절반 이상은 기계 고장으로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미군은 아르덴느 전투에서 독일군 보다 더 많은 전차를 잃었지만 그 이유는 단지 미군이 더 많은 전차를 보유했기 때문이었다.(U.S. tank losses in the Ardennes were numerically greater than German losses simply because the U.S. Army had so many more tanks.) 아르덴느 전투의 대부분을 담당한 미 제1군은 12월 말 까지 약 320대의 셔먼을 잃었고 그 중 90대는 M4A1/ A3(76mm)였다. 이 손실은 미 제1군의 12월 중 일일 평균 전차보유대수의 1/4에 해당하는 것 이었다. 미 제1군은 지속적으로 장비를 보충받아서 1944년 12월 말에는 1,085대의 셔먼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중 980대가 가동가능한 상태였고 기계적 불량이나 전투 중 손상으로 수리 중인 것은 9퍼센트에 불과했다.”6)


전차가 많아서 미군의 손실이 더 많았다는 서술은 읽는 이를 벙찌게 만듭니다. 태평양 전선의 미군이 일본군 보다 더 많은 비행기를 보유했다고 더 많은 비행기를 잃은 건 아니잖습니까. 벌지전투 기갑전에 대한 잘로가의 서술은 꽤 일관적인데 미군에게 불리한 결과가 나온 전투는 일절 언급을 회피한다는 점 입니다. 잘로가는 벌지 전투 초기에 투입된 미 1군 예하 기갑사단들이 막대한 손실을 입은 점은 언급을 하지 않고 다만 “아르덴느 공세 초기에는 전차전이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서술로 대충 넘어갑니다.7) 비슷한 서술은 노르트빈트 작전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나타납니다. 노르트빈트 작전에서도 미 12기갑사단이 큰 손실을 입고 많은 전차를 노획당했지만 잘로가는 그런 점은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작전에 투입된 독일군의 손실이 컸다는 점만 언급하고 있을 뿐 입니다.8)


그리고 자료의 취사선택 만큼이나 납득하기 어려운 점은 논쟁이 될 만한 부분에서 근거를 밝히지 않고 대충 넘어가는 경향입니다. 잘로가는 독일 군수산업계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면서 티거의 생산 가격에 대해서 이런 주장을 합니다.


“독일의 전차 생산 가격을 추산하는데 있어 또 한가지 문제점은 1943년의 ‘아돌프 히틀러 전차 생산계획’의 성과가 정치적으로 활용됐으며, 알베르트 슈페어의 군수생산부가 판터와 같은 신형 전차가 비용적으로 크게 효율적이라는 점을 선전하고, 전차 생산에 필요한 자본 투자의 규모를 감추거나 조작하려 했기 때문이다. 독일군에게 납품된 티거 I 한대의 가격은 300,000 마르크였으나 일본에 판매된 티거 I은 645,000천 마르크였다는 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이것이 기반 시설에 투자한 비용까지 반영한 실제 비용에 가까울 것이다.(It’s worth noting that the price for a Tiger I tank for the German army was about 300,000 RM, but the example sold to Japan was priced at 645,000 RM, an amount more likely to reflect the actual cost including industrial infrastructure investment.)9)


티거의 실제 가격이 알려진 것 보다 두 배는 축소됐다는 굉장한 주장인데 근거는 없습니다. 일본에 판매된 티거의 가격이 645,000마르크였던 이유는 전차 외에 각종 소모품, 설계 도면, 운송 비용 등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토마스 젠츠 같은 연구자들이 이미 언급한 바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로가는 특별히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과격한 주장을 합니다. 잘로가의 저작들을 보다 보면 이렇게 주장의 근거가 필요한 부분에서 이렇다 할 출처를 제시하지 않는 경우를 간혹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잘로가는 독일군의 전차 손실 기록은 완전 손실만 기록하고 격파되어 본국으로 수송되는 차량 등을 집계에서 누락하고 있어 신뢰할 수 없다는 주장을 반복합니다.10) 물론 이것은 어느 정도 타당합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실제 완전 손실은 어느 정도 이고 완파되어 본국으로 수송된 전차는 어느 정도 인지 입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잘로가는 몇가지 정황 증거는 제시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독일측 기록의 문제점은 비판하지만 미군 기록의 문제점은 지적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는 경향이 계속되는 한 잘로가의 저작은 앞으로도 의구심을 가지고 볼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주석
1) Steven J. Zaloga, Panther vs Sherman (Duel), (2008, Osprey Publishing. Kindle Edition) Kindle Locations 1067-1071.
2) Panther vs Sherman (Duel), Kindle Locations 1086-1095.
3) 1944년 9월 독일군이 로렌 전역에서 상실한 기갑차량은 총 341대이며, 미국측은 같은기간 총 1,214대의 독일 기갑차량을 격파한 것으로 집계했다고 합니다. 미국이 주장한 독일 기갑차량 격파대수는 독일군이 공세 시작전 보유한 기갑차량의 2배에 달합니다.  Steven J. Zaloga, Armored Champion: The Top Tanks of World War II, (2015, Stackpole Books. Kindle Edition)
4) Steven J. Zaloga, Armored Thunderbolt: The U.S. Army Sherman in World War II, (2008, Stackpole Books), p.231.
5) Lida Mayo, The Ordnance Department : On Beachhead and Battlefront, (1991, USGPO), pp.325~326; 참고로 David E. Johnson, Fast Tanks and Heavy Bombers: Innovation in the U.S. Army, (1998, Cornell University Press), p.195에서는 푸펜도르프 전투에서 미 2기갑사단이 57대의 전차를 상실한 반면 전차전에서 독일군의 손실은 판터 2대, 티거 II 2대에 불과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독일쪽 기록과는 조금 차이를 보이는데 독일측 기록에 따르면 전차전에서 격파된 티거 II는 1대이고 세대가 미군의 중곡사포 포격에 격파됐다고 합니다. 판터 손실은 정확히 평가하지 못하겠습니다.
6) Armored Champion: The Top Tanks of World War II, Kindle Locations 3841-3851.
7) Armored Champion: The Top Tanks of World War II, Kindle Locations 3807-3811. Armored Thunderbolt: The U.S. Army Sherman in World War II에서는 그나마 좀 더 자세히 서술하고 있지만 미군 기갑사단들의 고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8) Armored Champion: The Top Tanks of World War II, Kindle Locations 3852-3858.
9) Armored Champion: The Top Tanks of World War II, Kindle Locations 651-655.
10) Armored Champion: The Top Tanks of World War II, Kindle Locations 3572-3577.


2016년 9월 5일 월요일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영문판 소식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영문판이 출간됐습니다. 그동안 이 책의 전자책 버전이 없어서 구매를 망설이셨던 분이라면 영문판을 구매하셔도 좋겠습니다.

출판사 링크

아마존 링크

흥미롭게도 영문판의 서문을 같은 분야의 연구자인 로버트 시티노(Robert Citino)가 담당했습니다. 두 사람의 연구는 대략 비슷한 시기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시티노의 연구가 좀 더 군사사에 집중하고 있다면 그로스는 정치, 사상적인 측면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미묘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티노가 외국의 동료 연구자의 시각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군요.

저도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영문판을 한번 사서 한국어판, 독일어판과 비교해 읽어보고 싶습니다.

2016년 9월 3일 토요일

[개드립] 병역자원문제 해결 방안


 요 근래에 인구감소로 인한 병역자원문제가 국방 분야의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병역자원이 부족하니 현재와 같은 대규모 육군을 상시 유지하는게 어려워 질 것이라는 점은 명약관화합니다.

 모병제를 실시한다면 군대, 특히 육군의 규모가 줄어들 테니 이것도 고민입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인구구조상 폭증하고 있는 노인 인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저는 과거 독일의 예를 본받아 [가칭] '조선돌격대' 창설을 제안하는 바 입니다! 다만 민방위가 존재하는 한국 실정에 맞춰 대상은 만 60세 이상 노인으로 하는 것이죠.

 탑골공원대대, 종묘대대, 용두산대대 등 이름만 들어도 간지나지 않습니까. 가스통 할배들을 통해 조선 노인의 전투력은 충분히 검증된 바 조선돌격대를 창설한다면 김정은도 충분히 두려워하리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노인 인구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으니 병역자원 문제도 당분간 걱정이 없을 것 입니다.

 ps) 조선돌격대의 무장으로는 역시 어르신들 손에 익은 M1 카빈이 좋겠습니다.

2016년 8월 31일 수요일

★기적의☆ 인류학(?!)


제국주의 시대의 절정기에 있었던 이탈리아-이디오피아 전쟁과 러일전쟁은 백인의 인종적 우월성에 대한 믿음을 뒤흔드는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먼저 있었던 이탈리아-이디오피아 전쟁은 아프리카 전역이 식민지로 전락하던 무렵 유색인종이 처음으로 유럽의 '백인' 군대를 격파했다는 점에서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안겼습니다. 백인 군대가 '검둥이'들에게 박살났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는군요.

 아두와 전투의 소식이 미국 전역을 뒤흔들기 하루 전날, 애틀랜타 컨스티튜션(Atlanta Constitution)이라는 신문은 아프리카로의 귀환 운동을 전개하던 300명의 흑인이 3월 1일 조지아주의 사바나를 출발했다는 소식을 조롱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아프리카는 모두 유럽인에 의해 분할될 것이기에 아프리카인들은 주권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남부 백인들의 입장에서는) 3월 1일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주장을 전개하는게 이치에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3월 1일 이후로는 그러한 신념이 흔들리게 되었다. 
 애틀랜타 컨스티튜션의 논조는 짐 크로우(Jim Crow) 법안과 유럽의 제국주의를 옹호하던 당대의 기류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1896년의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에서 미국 대법원은 짐 크로우 법안의 기저에 깔린 "분리하되 평등하다"는 주장이 미국 헌법에 합치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애틀란타에서 발행되던 신문들은 이른바 '대서양을 아우르는 지배권'이라는 원대한 구상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즉 아프리카의 미래는 유럽의 통치에 따라 결정될 것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미국 또한 유럽계 미국인의 통치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라는 논리였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미국에 남건 아프리카로 돌아가건 간에 유럽인에 의해 지배받는 암울한 미래만 있을 뿐이라고 전망했다. 즉 짐 크로우 법안은 제국주의의 절정기에 팽배한 인종적 우월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제국주의는 짐 크로우 법안의 친척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두와 전투는 애틀랜타 컨스티튜션의 기사에서 아프리카인의 열등성을 주장할 수 있도록 했던 신념을 산산조각 내 버렸다. 최소한 전투의 소식이 알려진 직후에는 말이다. 3월 4일의 머릿기사는 이디오피아인들이 3천명의 이탈리아군을 죽였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이탈리아군 지휘관 오레스테 바라티에리(Oreste Baratieri)가 패배의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오보도 실렸다. 이후에 실린 기사들도 아프리카에 대한 엄청난 무지와 심리적인 충격 때문에 오류 투성이었다. "이탈리아의 불운"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는 이디오피아가 아프리카 남부에 있다고 썼으며, 이탈리아가 실패한 것이 이디오피아의 막강한 군사력 때문이라고 암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애틀랜타 컨스티튜션은 이디오피아인들이 검둥이가 맞냐는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아비시니아인에 대한 의문"이라는 기사에서는 아프리카인의 인종적 특성에 대해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독자들에게 이디오피아인들의 특성에 대해 면밀히 관찰하라는 제언을 했다. 이 기사는 이디오피아인에게서는 "호텐토트 인종에게서 나타나는 평발과 펑퍼짐한 코"를 찾아볼 수 없으므로 콩고에 사는 아프리카인들과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실 이디오피아인들은 완벽한 흑인이 아니라 "페니키아인을 조상으로 두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시각은 애틀랜타 컨스티튜션에 실린 삽화들에도 반영됐다. 이 신문에 처음 실린 메넬리크의 초상화는 그를 1895년에 즉위한 러시아의 짜르 니콜라이 2세와 놀라우리 만치 비슷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아도와 전투에서 이디오피아인들이 거둔 승리의 규모가 자세히 알려지면서 미국인들은 더 큰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남부의 언론들만 메넬리크가 백인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뉴욕 월드(New York World)지도 기사에서 비슷한 주장을 했으며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도 다음날 뉴욕 월드의 기사를 전제했다. 미국 남부와 중서부, 그리고 대서양 지역의 주요 언론들은 모두 이디오피아인이 백인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뉴욕 월드는 "아비시니아인의 대부분은 코카서스 인종이다"라고 쓰고 여기에 덧붙여 "이디오피아인들은 외모가 수려하고 멋지다"고 주장했다.
Raymond Jonas, The Battle of Adwa: African Victory in the Age of Empire, (2011, Harvard University Press), pp.268~269.

2016년 8월 9일 화요일

[번역글] 리마 기관차 공장과 최초의 셔먼 전차

번역글 하나 나갑니다.


오늘은 The Armor Journal 3호(2015년 여름호)에 실린 마이크 헤인스Mike Haines의 “The Lima Locomotive Works: First Sherman Tanks”를 번역해 봤습니다. 리마 기관차 공장의 셔먼 생산 역사와 이곳에서 생산한 차량의 특징을 간략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글 때문에 이 잡지를 샀는데 생각보다 내용이 짤막하고 특별한 내용이 없어서 실망했습니다. 돈이 아까우니 번역이라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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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 기관차 공장과 최초의 셔먼 전차


마이크 헤인스


1940년 프랑스 전역에서 전차를 대량으로 상실한 영국은 상실한 차량을 보충하는 것은 물론 독일의 본토 침공 위협에 맞서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최대한 빨리 3,650대의 전차를 조달해야 했지만 영국은 충분한 생산 능력이 없었다. 결국 영국 정부는 미국에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전차 조달 사절단’을 보냈다. 미국 또한 유럽의 위기 때문에 전차를 필요로 했다. 또한 영국의 전차 원조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기존의 전차 보다 더 무거운 전차를 생산할 수 있는 설비를 증설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은 기관차와 철도 화차 생산 공장들이 전차와 같은 중장비 생산으로 쉽게 전환할 수 있는 생산경험이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 때문에 영국의 전차 조달 사절단은 오하이오 리마Lima의 리마 기관차 공장과 접촉해 전차 생산 가능 여부를 타진했다.


리마 기관차 공장Lima Locomotive Works, 이하 LLW는 1859년 소규모 농기구 수리공장으로 시작했으며 이때의 사명은 리마 농업사Lima Agricultural Works였다. 1869년 제재업자 에프라임 셰이Ephraim Shay가 리마 농업사에 자신이 설계한 목재 수송용 기관차를 생산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의 설계안은 기어식 구동장치를 가지고 있어 기존의 피스톤식 구동계를 가진 기관차 보다 견인력이 강했다. 리마 농업사는 셰이가 설계한 기관차를 생산하기로 하고 면허생산을 시작했다. 2년 뒤 리마 농업사의 주력 상품은 기관차가 되었다. 리마 농업사는 1870년 조직 개편을 거친 뒤 사명을 변경했다. 새 사명은 리마 기계 회사Lima Machine Company가 되었고 1892년 새로 설립된 리마 기관차 공장에 매각됐다. 합병 이후에도 이 회사는 한동안 판매량이 떨어진 셰이 기관차를 생산했다. 1920년대에 리마 기관차 공장은 훨씬 강력한 증기기관차를 개발했으며 이 기관차는 수퍼파워라는 별명이 붙었다. 신형 기관차는 증기기관 업계에 혁명을 일으켰고 리마 기관차 공장은 다시 한번 중요한 기업으로 발돋움 했다.


영국 전차 조달 사절단은 LLW 경영진과의 협상에서 LLW측이 100대의 M3 전차를 생산해 영국에 공급한다면 전차 생산을 위해 20만 평방피트 규모의 공장을 건설하도록 비용을 대겠다고 제안했다. LLW는 영국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전차 생산 공장 건설이 거의 마무리 되어 M3 생산 준비가 갖춰질 무렵 신형 T6 중형전차의 설계와 시험이 거의 완료됐다. 1941년 12월 T6 전차는 정식 채용됐으며 용접식 차체는 M4, 주조식 차체는 M4A1으로 명명됐다. 이 때문에 공장이 완공도 되기 전에 100대의 M3을 생산하기로 한 계약이 M4A1을 생산하는 것으로 변경됐다.


T6 중형전차의 설계는 M3 전차의 개발과 시험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됐다. M3 전차는 영국군이 프랑스 전선에서 상대한 75mm 단포신 4호전차와 대등한 화력을 지닌 전차를 급히 조달하기 위해 임시 변통으로 채용한 차량이었다. 미국의 중형전차 개발계획 초기에는 75mm포를 탑재할 수 있는 포탑을 생산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M3은 주포를 차체 오른쪽에 장착하고 포탑에는 37mm포를 탑재했다. 하지만 M3이 생산에 들어가기 직전에 75mm M2 주포를 장착할 수 있는 포탑이 개발되어 T6의 개발이 시작됐다. 전차 개발을 앞당기기 위해 M3와 M4는 모두 기존의 M2 중형전차의 차체 하부를 개량해서 사용했다. T6의 시제품은 주조로 만든 일체형 차체 상부에 차체 양 측으로 승무원 해치가 달려 있었다. 그러나 T6의 시험이 완료될 무렵 차체 측면의 승무원 해치가 차체 측면 방어력을 떨어트리고 탄약 탑재량을 제한한다는 점 때문에 이를 제거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LLW는 아직 M3 생산을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회사들 처럼 M4 생산을 위해 라인을 전환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LLW는 M4 셔먼 탱크를 최초로 생산하는 공장이 되었다. 영국 정부는 생산 대수를 400대로 늘리도록 계약을 변경했으며 1942년 2월 LLW에서 첫 번째 셔먼이 생산됐다. 첫 번째 생산차량은 1942년 3월 메릴랜드의 에버딘 시험장으로 보내졌다. 두 번째 생산차량은 영국 전차 조달 사절단장 마이클 디워Michael Dewar를 기리기 위해 ‘마이클’로 명명됐다. ‘마이클’은 오늘날 까지 남아있으며 현재 영국 보빙턴 전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LLW는 1942년에 820대의 M4A1을 생산했으며 1943년에는 835대를 생산했다. LLW에서 초기에 생산한 셔먼은 M3에 장착된 것과 비슷한 여닫이식 커버가 달린 포수 조준경이 장착되어 있었다. 이것은 얼마뒤에 일반적인 페리스코프식 포수 조준경으로 대체되었다. 커버가 달린 포수 조준경이 장착된 셔먼의 생산 대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20대 남짓으로 추정된다. 초기 생산분 셔먼의 또다른 특징은 차체에 장착되어 조종수가 발사하는 2정의 고정식 0.30 구경 기관총이었다. 이것 또한 조기에 폐지되었다. 또한 초기 생산분 중에는 조종수와 무전수용 직안식 관측창이 달린 차량도 있었는데 이 또한 정확한 생산대수를 파악할 수 없다. 직안식 관측창 또한 조기에 폐지됐다.


LLW에서 생산한 셔먼들은 다른 공장에서 생산한 차량들과 동일한 개량이 이루어졌다. 그 중 하나는 변속기 커버가 3단에서 주조식 일체형으로 변경된 것이다. 또한 초기에는 폭이 좁은 M34 포방패를 달고 있었으나 개량형들은 폭이 넓은 M34A1 포방패를 장착했다. 초기에 생산된 커버 달린 조준경이 장착된 D50878형 포탑은 나중에 우측면 장갑이 강화되고 피스톨 포트가 제거된 D50878형으로 개량됐다.


LLW에서 생산한 후기의 셔먼들은 LLW공장 생산형 만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차체를 들어올릴때 케이블을 연결하는 돌기이다. 이 돌기는 일반적으로 차체 양 측면에 대칭으로 장착된다. 하지만 1943년 늦여름 LLW에서 생산한 차량들은 차체를 주조할때 돌기까지 일체형으로 만들었으며 측면으로 45도 기울어져있다. 두 번째 특징은 ‘그리즐리형 홈Grizzly groove’이다. 이 홈은 폭 5~6인치로 차체 후부 윗 부분에 파여있다. 이 홈은 캐나다에서 생산한 그리즐리와 램 전차에도 있는데 엔진 점검창 주변에 고인 물을 빼내기 위한 용도로 추정된다. 또한 프레스드 스틸 카Pressed Steel Car에서 생산한 M4A1 중 일부도 이런 홈이 파여있지만 여기서 생산한 셔먼들은 앞서 말한 차체 돌기가 일체형이 아니다.


1943년 9월 LLW의 셔먼 생산 계약이 만료됐다. 이때까지 생산된 셔먼은 1,655대였다. LLW는 1943년에 전차 외에도 110대의 M12 훈련용 포탑을 만들었다. 이것은 셔먼 포탑에서 장갑을 제거한 장비였다. 또한 LLW는 M32 전차구난차량의 개발에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LLW는 M4를 기반으로 시험용 차량 T5를 제작했다. T5E1은 M4A1 차체 기반이었고 T5E2는 M4A2 차체 반이었다. LLW는 1943년과 1944년에 26대의 M32B2(T5E2)를 생산했으며, 1945년에는 20대의 M32B3(T5E3)을 생산했다. 또한 LLW가 생산한 기관차와 크레인도 전쟁 수행에 큰 기여를 했다.


전쟁이 끝난 뒤 LLW는 전차 생산 공장을 크레인과 굴착기 생산으로 전환했다. 기관차 공장에서는 계속 기관차를 생산했다. 하지만 디젤 기관차가 주류가 되면서 LLW는 시류를 따라잡지 못했고 결국 1947년에는 디젤엔진을 생산하는 오하이오 해밀턴Hamilton에 위치한 General Machinery Corporation과 합병했다. 합병한 회사의 명칭은 리마 해밀턴이었다. 하지만 이 조치는 너무 늦었다. 합병 이후 회사는 147대의 디젤 기관차를 생산했지만 이 제품들은 경쟁력이 없었다. 리마 해밀턴은 기관차 부분을 살리기 위한 마지막 조치로 1950년 볼드윈 기관차 공장Baldwin Locomotive Works과 합병했다. 새로운 법인의 명칭은 볼드윈 리마 해밀턴이었다. 하지만 1951년에는 기관차 생산을 전면 중단했다. 다만 중장비 생산은 계속했다. 1971년 볼드윈 리마 해밀턴은 클라크 이큅먼트Clark Equipment에 매각됐으며 1981년 마침내 문을 닫았다.


볼드윈 리마 해밀턴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군수물자 생산을 계속했다. 그 중 하나는 M48 차체를 생산해 포드에 공급하는 것 이었고 다른 하나는 2½톤 트럭과 5톤 트럭을 레커차로 개조하는 것 이었다.


오하이오 리마의 LLW는 1943년 부터 1944년 까지 불과 1,655대의 셔먼을 생산하는데 그쳤지만 이 도시는 오늘날에도 전차 생산으로 유명하다. LLW가 있던 곳에서 남서쪽으로 2마일 떨어진 곳에는 M1, M1A1, M1A2 에이브럼스 전차의 생산과 창정비를 담당하는 통합체계생산센터Joint Systems Manufacturing Center가 있다. 이곳은 스트라이커 계열 장갑차의 부품도 생산하고 있다. 이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리마를 자유 세계의 전차 수도라고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