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5일 목요일

나토의 전진방어전략에 대한 체코슬로바키아군의 평가

지난번에 올렸던 “1960년대 독일연방군 제1군단의 방어계획”과 관련해서 포스팅을 하나 합니다. 잠깐 언급했던 1965년에 작성된 체코슬로바키아군 참모부의 정보평가입니다. 1960년대 초반 나토군의 전략 변화에 대해 평가한 내용인데 인용한 책의 해제에 따르면 소련에서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보고서라고 하는군요. 소련이 붕괴되고 동구권의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냉전기 바르샤바조약기구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는 사료가 많아졌지만 러시아의 자료 공개는 여전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과거 바르샤바조약기구에 속했던 소련 위성국들의 자료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점은 꽤 아쉬운 점입니다. 아무래도 소련 자료가 부족한 상태에서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하위 동맹이었던 국가들의 부분적인 자료를 통해 전체를 재구성 해야 하니 말입니다.


이 보고서에서 눈에 띄는 것은 나토군의 전략 변화를 공세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즉 독일 영내에서의 방어전 뿐만 아니라 전략적인 공세로 이행하기 위한 준비로서 “전진방어”를 채택했다고 보는 것 이지요. 그리고 2차세계대전의 경험을 반영해서 독일군에 대한 평가가 높은 편입니다.


영어 중역인 점을 감안하고 읽어 주십시오. 영어로 번역하면서 편집자가 생략한 부분이 많은게 유감입니다.


[...전략] 나토 사령부는 현재 사회주의 국가들과 자본주의 국가들의 군사력을 비교하는데 있어 전면적인 핵전쟁은 물론 제한적인 전쟁도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이에따라 제한전에 대한 이론을 정교하게 가다듬었는데 이 이론은 중부유럽전역의 연합군의 작전 준비태세, 특히 최근 수년간의 준비태세를 반영하고 있다.
[...중략] 제한전쟁은 두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한가지는 부여된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서 충분한 병력을 신속하게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한가지 문제는 군사력을 운용하면서  제한전쟁이 전면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최대한 막아야 한다는 점이다. 서방은 유럽에 충분한 재래식 전력을 배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서 제한적인 핵무기 사용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중략] 제한전 개념은 특히 미국이 선도하고 있는데 이 개념에서는 군사적인 목적과 정치적인 목적을 점진적으로 달성하는 동시에 전면적인 핵전쟁이 발생할 위험을 최소화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 수뇌부는 전면핵전쟁의 파괴력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나토에서는 국제적인 긴장이 단기간, 혹은 장기간 이어진 이후 전면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유리한 군사적, 정치적 정세가 조성될 경우 갑작스럽게 발생할 수도 있다고 본다. 전면 핵전쟁이 발생할 수 있는 유리한 정세로는 정치적 갈등이 격화되거나 어느 한 진영의 지도국가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군사력을 감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경우로는 단계적으로 특정한 제한조건을 넘어서면서 제한전쟁이 전면 핵전쟁으로 발전하는 경우를 꼽을 수 있을 것인데 이 경우는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어느 한 참전국이 사용하는 수단에 전혀 다르게 대응하거나, 어떤 징후를 잘못 해석하거나, 사람의 실수나 장비의 오류 때문에 제한전쟁이 전면 핵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 (현재) 나토군 수뇌부는 기습적인 전면 핵전쟁을 감행하는 계획에 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 
[...중략]  국가안보에 대한 직간접적인 위협에 직면해서 필요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이 전쟁 말고는 없을 경우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 이 모호한 개념은 여전히 나토군 수뇌부, 특히 미국이 전면 핵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으며 나토가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재의 전략개념인 이른바 “유연 대응flexible response”은 제한전, 그리고 유리한 상황이나 어쩔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서 전면전을 수행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 개념은 군사적인 관점과 정치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공격적이고, 해로우며 결과적으로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제한전 이론은 이론적인 측면, 특히 전쟁의 정치적, 군사적 목표, 병력과 군사적 수단의 활용, 그리고 목표의 선정이라는 관점에서 봤을때 명확하지 않은 요소로 가득차 있어서 일관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나토군 수뇌부는 평화시에도 양 진영의 강력한 군사력이 대치하고 있는 유럽 전역에서 제한전이 적절하게 수행될 수 있을지에 대해 확산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제한전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는 문제는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나토군 수뇌부는 나토군이 심각한 손실을 입거나 요충지를 상실하게 될 경우, 혹은 재래식 전쟁으로 의도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경우에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다. 이러한 원칙은 제한전 이론이 특히 중부유럽전역의 정세하에서 적용하기에는 문제가 많다는 점을 보여준다. [중략…]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과 전쟁 그 자체에 대한 생각이 점진적으로 변화하게 되면서 1963년에는 독일연방공화국과 다른 유럽내 나토 가맹국들의 주도로 ‘전진 방어Forward Defense’라는 새로운 개념이 채택되었다. 이 개념에서 다루고 있는 영역은 단지 독일연방공화국의 영토 뿐이다. 본질적으로 전진 방어 개념에는 유럽전역의 환경에 새로운 원칙을 정교하게 가다듬어 적용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 개념은  독일연방공화국의 영토를 지켜내는 한편 공세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하여 단기간 내에 전장을 독일민주공화국과 체코슬로바키아로 옮기기 위해서 독일연방공화국의 동부 국경에서 능동적인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다. 

[...중략] 나토군의 작전 준비태세에 대한 전략 개념의 영향력. 
연합군의 작전적 준비태세를 보면 전면핵전쟁과 함께 나토군이 재래식 무기와 핵무기를 함께 사용하는 제한전쟁을 감행하는 것을 고려하는 전략 개념을 채택했음을 알 수 있다. [중략…] 
1960년 경까지 실시되었던 대규모의 훈련들은 동서양진영이 무장 충돌을 하게 된다면 어떠한 경우건 모든 종류의 핵무기를 대량으로 사용하는 것에 입각한 “대량보복” 개념에 따라 실시되었으며 병력 동원과 예비 전력의 집결에 필요한 시간을 벌고 반격으로 이행할 준비를 갖추기 위해 유연한 방어를 전개하였다. 핵공격을 가하는 수단은 공군이 유일했다.[중략…] 
이 무렵 실시된 훈련들은 모두 방어 작전을 위해 실시되었다. 이것은 그 당시에 존재하던 개념과 나토 지상군의 임무를 반영한 것이었다. 나토군의 전쟁 시나리오는 전쟁의 위협이 장기간 지속되는 상황을 가정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는 군부대의 전투 대비태세를 완료할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며, 동원에 필요한 일부 조치를 이행할 수 있을 것이고 사전에 준비된 작전 조치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핵공격이라는 전략적 수단 중에서 공군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전쟁에서 완벽한 기습을 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되었다.[중략…]
[...중략] 훈련 시나리오에서 “대량보복” 개념에 입각한 중요한 변화들은 “전진방어” 개념의 채택으로 폐기되었다. 이러한 훈련들은 유럽전역에서  최소한 일시적으로라도 제한적인 전쟁을 수행한다는 나토의 개념을 따른 것이었다. 교전은 방어작전으로서 짧은 기간 동안 수행되었다. 방어작전 단계에서는 재래식무기만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에서는 작전-전술단위, 전술단위의 핵무기가 동원되었고 그 시기는 작전이 개시되고 수시간에서 수일이 지난 뒤였다. 나토군은 보통 적군이 선제 핵공격을 실시할 경우 핵무기를 사용했다.
이 시점에서 전쟁의 위협이 증대되는 기간이 훨씬 짧아졌다. 이때문에 전투 준비태세를 갖춰야 할 시간도 훨씬 짧아졌다. 전투 태세를 준비하고 완료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적이 아군의 준비 태세를 감지하는 것과 대응 수단을 마련하는 것을 회피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작전적 기습을 가능하게 했다.
“전진방어”를 채택함으로써 군의 작전 편성은 1960년 이전의 군사 훈련에서 적용되었던 것과 비교하여 근본적으로 변화했으며 특히 중부 집단의 경우가 그러하다. [중략...] 적의 일선 제대는 두개의 야전군(미 제7군과 프랑스 제1군)으로 구성되었고 일선제대와는 별도로 1~2개 집단의 제2선 예비 제대가 편성되었다.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상대하는 제1선 제대에 프랑스군 집단(제3기계화사단, 제1기갑사단)이 배치된 것, 또는 독일군 제2군단이 프랑스 제1군의 작전 통제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로 필센Plzeň-뉘른베르크Nürnberg와 린츠Linz-뮌헨München 축선의 중부 집단 우익이 크게 강화되었다.
이러한 개념상의 변화는 초기 전투 기간에 작전을 수행하는데도 반영되었다. 지금까지의 군사훈련을 보면 나토 연합군이 초기에는 기동 방어를 실시하고 있지만 갈수록 능동적으로 작전하고 있으며 전체 전투 주기가 (2~3일 정도로 ) 짧아졌다. 또한 후퇴 종심도 (최대 120km 정도로) 현저히 짧아졌다. 비록 반격으로 전환하는 것은 훈련하지 않았지만 이전 보다 더 빨리 반격을 하기 위해서 방어 단계를 강력한 역습으로 마무리 하고 있다.
[...중략] 1962년 이래로 중부유럽전구에서는 제한전 개념에 따라 훈련을 실시했다. 초기에는 1개 집단군 단위의 훈련(그랜드슬램1Grand Slam 1과 그랜드슬램2)에 적용되었으나 1963년 부터는 중부유럽전구 전체를 대상으로 한 훈련(Lion Ver)에, 1964년에는 유럽 전체를 대상으로 한 훈련(Fallex-64)에 적용되었다. 
나토군은 1964년 이전에는 적군이 먼저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에만 핵무기를 사용했다. 1964년 훈련에서는 나토군 방어선의 돌파구를 분쇄하거나 공세를 성공적으로 실시하기 위해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했다. 이에 대한 적군의 대응, 즉 보복을 위해 핵무기를 무제한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전면 핵전쟁으로 이어졌다.
[...중략] 1962년의 훈련에서는 전투 작전이 시작된 지 3일차(46시간)에 적을 저지하기 위해 국경에서 50~150km 떨어진 지역에서 사용되었다. 1963년에는 전투 작전이 시작되고 불과 10시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전력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 핵무기를 사용했다. 적군의 진격은 30~100km 정도에서 돈좌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 나토군의 성과는 무시해도 될 정도였다. 1964년 가을의 기동훈련에서 핵무기는 전쟁이 시작된 지 34시간차에 사용되었으며 이 시점에서 전방의 방어선이 돌파당해 적군은 국경에서 30~80km를 돌파해온 상태였다.
[...중략] 이같은 훈련을 보면 연합군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전투를 오랫동안 효과적으로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원인은 전력 격차가 크기 때문이며, 이점은 재래식 전쟁이 시작된 초기에 더욱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나토군 수뇌부는 전력격차가 크다는 점 때문에 제한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 조건으로 전면 핵전쟁을 감행할 수 있도록 군의 준비태세를 갖추려 하고 있다. 

[...중략] 요약, 결론.
[...중략] 각 국의 참모진 중에서 이것을 가장 잘 준비하고 있는 것은 독일에 주둔한 미군 참모부다. 독일주둔 미군은 지난 한해 동안 심혈을 기울여 준비를 했다. 미군은 연합 훈련에 참가하는 것 외에도 자체적으로 대규모의 훈련을 실시했다. 
서독군 참모부는 작전적 준비태세를 갖춘다는 목표를 달성했다. 서독군은 연합훈련을 진행하면서 연합군의 범주 내에서 임무를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서독군 참모부의 고급 장교들은 대부분 과거 히틀러 군대에서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은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은 나이가 많기 때문에 얼마 안가 이것이 문제가 될 것이다. 독일군의 작전적 준비태세는 미육군과 거의 맞먹는다. 
프랑스군에서 가장 준비가 잘 된 참모진은 제1군의 참모진이다. 프랑스 본토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의 참모진은 준비태세는 최근에 와서야 강화되었다. 프랑스군은 오랫 동안의 식민지 전쟁으로 생긴 문제점을 없애고 미군과 동등한 수준으로 준비태세를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프랑스군 참모진은 특정한 상황하에서의 전투 행동에 필요한 조직과 운영에 있어서는 많은 경험을 갖추고 있다. 

영문번역 : Marian J. Kratochvil.
“Document No.28 : Warsaw Pact Intelligence on NATO’s Strategy and Combat Readiness, 1965”, Vojtech mastny and Malcolm Byrne(ed.), A Cardboard Castle? : An Inside History of the Warsaw Pact 1955~1991, (CEU Press, 2005) pp.170~173.

2013년 8월 22일 목요일

1960년대 독일연방군 제1군단의 방어계획

Blueprint for Battle : Planning for War in Central Europe, 1948~1968을 읽는 중 입니다. 진도가 더뎌서 이제야 겨우 헬무트 하머리히Helmut Hammerlich가 쓴 제10장 “Fighting for the Heart of Germany”를 읽고 있습니다. 제10장은 1960년대 초반 북독일의 방어를 담당한 독일연방군 제1군단의 전시 방어계획을 다루고 있습니다.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해 방어종심이 짧은 독일의 전략적 고민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더군요.


제10장에서는 1963년 9월에 나온 연합군중부유럽사령부CINCENT, Commander in Chief, Allied Forces Central Europe의 긴급방어계획EDP, Emergence Defense Plan 1-63호 이후의 방어 계획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긴급방어계획 1-63호는 주방어선을 베저Weser-레흐Lech 강을 잇는 선으로 설정해 독일연방공화국 영토의 90%를 방어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전까지의 방어계획이 주방어선을 엠스Ems-네카Neckar강으로 설정해서 독일연방공화국 영토의 50%를 포기하는 것에 비하면 방어구역을 크게 늘린 것이고 독일이 정치적으로도 용납할 수 있는 범위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경우 가장 큰 문제는 최대한 전방에서 바르샤바조약군의 주력을 맞아 싸우기 위해서 지연전을 펼쳐야 하기 때문에 작전적 융통성이 제한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영토를 최대한 사수해야 하니 선택의 폭은 좁아지는 것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제1군단, 영국 제1군단, 벨기에 제1군단과 함께 독일 북부의 방어를 담당한 독일연방군 제1군단은 예하에 제3기갑사단, 제1기갑척탄병사단, 제11기갑척탄병사단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제11기갑척탄병사단은 예하의 제33기갑척탄병여단을 나토 북부집단군NORTHAG, NATO’s Northern Army Group 예비대인 제7기갑척탄병사단에 배속하게 되어 있어서 실제 전력은 2개 기갑척탄병여단으로 제한되었습니다. 이 3개사단의 기갑전력은 전차 600대와 장갑차 700대였습니다. 그런데 독일 제1군단이 1차로 상대하게 될 소련 제3충격군은 4개 전차사단과 1개 차량화소총병사단, 전차 1,600대와 장갑차 1,400대를 보유한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고 제2파 제대로는 제2근위전차군, 또는 제20근위군 소속의 11개 사단이 투입될 것이라고 보고 있었습니다. 전쟁 초반에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를 감당하면서 최대한 좁은 지역에서 적을 저지해야 하는 것 이었습니다. 1965년에 계획을 개정해서 제7기갑척탄병사단을 독일 제1군단 예비대로 지정하기 전 까지는 이렇다 할 예비대가 없었으니 더욱 난감한 계획이었습니다. 기본적인 방어계획은 각 사단이 1개 여단과 사단 기갑수색대대로 지연부대를 편성해 최전방에서 지연전을 펼치는 동안 나머지 2개 여단이 주방어선에서 방어를 준비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지연부대가 주방어선까지 밀려오면 이것을 후방으로 돌려 사단예비대로 운용하도록 했습니다. 굉장히 협소한 방어구역과 제한된 전력이 결합되어 지휘관이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범위가 지독하게 적었던 것 입니다.


이런 제약을 상쇄하기 위해 사용된 수단은 잘 알려진 대로 핵병기였습니다. 독일 제1군단 포병의 경우 연합군 유럽최고사령관SACEUR, Supreme Allied Commander Europe의 허가를 받아 10킬로톤까지의 핵포탄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저자인 하머리히는 자세한 사격계획이 명시된 사료를 찾지 못해 개략적인 내용만 서술하고 있습니다. 핵 포격과 함께 사용되는 수단은 핵지뢰였습니다. 핵지뢰는 4~5km 간격으로 설치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베저강 서쪽에 설정된 핵지뢰 사용 지대가 120km 가량이었다는 증언을 토대로 독일 제1군단에 할당된 핵지뢰는 30개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여기에 항공지원을 담당한 제2연합전술공군ATAF, Allied Tactical Air Force도 핵폭격을 하도록 되어 있었으니 전쟁이 터졌다면 전쟁 초반부터 독일은 핵으로 쑥대밭이 될 판이었습니다. 나토측이 전진방어를 채택하면서 핵무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계획을 수립했다는 것은 바르샤바조약기구 측에서도 비교적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주)


사실 독일 본토에서 핵을 사용한다는 것은 독일측으로서도 썩 달가운 방안이 아니었습니다. 박살나는건 독일이니 말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1960년대 중반까지 나토 북부집단군 방어구역에서 핵 타격 목표를 선정하는 것은 영국군에 의해 좌우됐고 1966년 이후에야 독일측이 핵무기 사용을 제약하는 방향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독일로서도 뾰족한 대안이 없는 것은 문제였습니다. 당시 독일 제1군단 포병사령관은 작전상 개전 초반부터 핵무기를 사용할 수 밖에 없으며 독일군의 전력이 획기적으로 증강되지 않는 이상 재래식 화력전은 어렵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독일군의 비판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개전 초기에 대량의 핵무기를 사용하는 계획이 계속 수립되었습니다. 1966년 부터 독일공군 참모총장을 맡았던 슈타인호프Johannes Steinhoff는 이런 계획으로는 작전적인 기동이 불가능하다고 비난하고 독일을 파괴하는 전술핵의 대량 사용을 재래식 방어에 포함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최대한 많은 영토를 방어하면서도 핵무기 사용은 피해야 한다는 딜레마는 결국 독일이 재래식 전력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만듭니다. 사실상 이것이 독일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기 때문입니다.



주) “Document No.28 : Warsaw Pact Intelligence on NATO’s Strategy and Combat Readiness, 1965”, Vojtech mastny and Malcolm Byrne(ed.), A Cardboard Castle? : An Inside History of the Warsaw Pact 1955~1991, (CEU Press, 2005) pp.172~173.

2013년 8월 19일 월요일

재미있는 책이 한권 나왔군요

코넬 대학 출판부에서 Fortifying China : The Struggle to Build a Modern Defense Economy 라는 책이 나왔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일본 보다 중국이 더 위협적인 강대국이라고 생각해서 중국의 군사력 증강문제를 다루는 연구에 대해서도 관심은 많은데 정작 읽은 책은 많지가 않습니다.

일단 이 책의 목차를 살펴보니 마오쩌둥 시기 부터 현재 까지 중국의 국방경제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통사 같습니다. 마오쩌둥 시기의 핵개발과 미사일개발에 대해서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서 서술하는 걸로 보입니다. 목차상으로는 이 문제에 한 절을 할당했군요. 그리고 덩샤오핑 시기를 바라보는 시각이 흥미롭게 보입니다. 마오쩌둥 시기의 국방공업 건설과 비교했을 때 어떤 평가를 할지 궁금하군요.(마오쩌둥 시기의 국방공업 건설은 꽤 악명높은 이야기가 많지요.) 통사이면서 현안에 대한 분석도 제법 충실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물론 읽어봐야 알 수 있는 것이겠지만 말입니다.

일단 아마존의 위시리스트에 넣어 놓긴 했는데 아마 다음달이나 돼야 주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 '감기'에 대한 어떤 평

영화 '감기'를 시사회로 봤다가 분노한게 일주일 넘게 가는군요.

네이버에 댓글알바가 활동한다기에 분노의 별 한개를 주러 네이버에 로그인 했다가 이렇게 멋진 영화평을 봤습니다.




제가 분노해서 길게 쓴 영화평이 이 분의 140자평만 못한게 부끄럽더군요. 그래서 제 평은 지웠습니다. ㅎㅎ. 쓸데없이 전작권이 어떻고 검역이 어떻고 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2013년 8월 13일 화요일

타임라이프 2차세계대전사를 받아가기로 하신 parkindani님께

트위터를 날려버리니 연락 드리기가 불편하게 됐군요.

처음에 우편으로 보내드린다고 했다가 분량이 부담돼서 직접 가져가시라고 부탁드려 죄송합니다. 타임라이프 2차세계대전사는 새 주인을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으니 언제라도 시간되시는 대로 연락주고 가져가시면 됩니다.

2013년 8월 6일 화요일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보낸 어떤 전문

1990년대 이후 공개된 한국전쟁에 대한 소련 문서들은 그동안 우리가 정황으로만 추정하거나 다소 부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실들을 입증해 주었을 뿐 아니라 전혀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도 알려주었습니다. 그런 문서들 중 하나가 1952년 7월 16일 김일성이 주북 소련대사 라주바예프(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Разуваев)를 통해 스탈린에게 보낸 서한입니다. 이 서한은 미국의 폭격에 견딜수 없게 된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신속한 휴전 체결을 간청하는 내용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편지의 핵심적인 내용 외에도 김일성의 몇가지 요구사항이 눈에 띄는데 남한에 보복 폭격을 할 수 있도록 공군력을 증강시켜 달라는 요구 등이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윌슨센터의 디지털 아카이브에 올라와 있는 영어 번역본을 중역해서 올려 봅니다.


긴급

바실레프스키 동지께.

비신스키 동지께.

1952년 7월 16일 김일성이 스탈린 동지께 보낸 편지에 대해 보고합니다.

라주바예프


배부 : 스탈린(2부), 몰로토프, 말렌코프, 베리야, 미코얀, 카가노비치, 불가닌, 흐루쇼프, 비신스키, 소콜로프스키



“친애하는 대사동지, 이 전문의 내용을 스탈린 동지께서 검토해 주시도록 전달해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친애하는 스탈린 동지

이시오프 비사리오노비치, 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해 드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반도의 전반적인 정세를 고려해 볼 때 휴전협상이 무기한 늘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지난 1년여간의 협상 결과 우리는 사실상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고 수동적인 방어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적은 사실상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막대한 인명과 물자의 손실을 입히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아주 최근에 적은 조선 전역의 발전소에 대한 군사작전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공군의 작전으로는 상황을 호전 시킬 가능성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 경제에 엄청난 피해가 초래되어 누적되고 있습니다.

평양이라는 단 한개 도시에 대해 (7월 11일과 7월 12일 밤의) 단 한번의 24시간 동안의 야만적인 공습으로 6천여명의 비무장 민간인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습니다.

적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협상에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중국 동지들은 당연히 이러한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우리도 이 문제에 대한 마오쩌둥 동지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조선 인민을 고통과 부당하고 무의미한 피해에서 구해내기 위해서는 중요한 지역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능동적인 군사작전으로 전환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치가 필요합니다.

1. 방공망을 강화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10개의 대공포 연대(3개 연대는 중구경, 7개 연대는 소구경)를 편성할 장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스탈린 동지께서 중국 동지들에게 5개 연대, 우리에게 5개 연대 분의 장비를 제공해 주셨으면 합니다.

2.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공군이 능동적인 작전을 전개해야 합니다. 조선, 적어도 평양까지는 주간에 전투기로 방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선인민군 공군은 언제라도 능동적인 군사 작전을 개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와 함께 얼마 뒤에는 조선인민군 조종사 40명이 소련에서 Tu-2기 훈련을 마칠 예정입니다. 우리는 이 조종사들이 Tu-2기와 함께 귀국해서 즉시 능동적인 군사작전에 참여하고 중요한 적의 거점에 피해를 주기를 원합니다.

3. 적이 주목할 만한 일련의 지상 작전을 전개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적 공군이 우리 후방을 타격하는 것을 그만두도록 하고 개성에서 진행되는 협상에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이 모든 것과 함께, 조선인민군의 전투력을 증강하기 위해서 1952년 1월 10일과 1952년 7월 9일의 각서에 따라,  그리고 1951년 10월 6일의 각서 내용을 1952년에도 적용하여 동지께서 제공해 주실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까운 시일내에 기술 장비와 물자를 주실 필요가 간절합니다.

4. 동시에 개성에서는 조속한 휴전 체결과 교전 중지, 그리고 제네바 협약에 따른 모든 포로의 송환을 추진해야 합니다. 이러한 요구사항은 평화를 사랑하는 인민들의 지지를 받을 것이며 우리가 수동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해 줄 것 입니다.

지상과 공중에서 군사 작전의 성격이 변화한다면 적에게 이에 상응하는, 우리에게 유리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 입니다.

이 전문과 비슷한 내용을 마오쩌둥 동지에게도 보냈습니다.

조선 인민은 동지께서 조선인민공화국에 베풀어 주신 헌신적인 막대한 원조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문제에 대한 동지의 지시와 조언을 기다리겠습니다.

진보적인 인민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동지의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

존경의 마음을 담아.

김일성.


평양, 1952년 7월 16일.”



이 전문에서는 북한이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기 때문에 신속히 휴전을 체결해야 할 필요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현 상태에서의 휴전이 북한에게 불리해 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유리한 조건에서 휴전을 체결할 수 있도록 공세작전을 펼칠 수 있는 군사원조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김일성 스스로가 언급한 무의미한 희생의 원인이 김일성 자신이라는 점에 아주 입맛이 씁니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김일성 같이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놀라울 정도로 많습니다. 이런 멍청한 일은 잊을만 하면 되풀이 되지요.

2013년 8월 4일 일요일

한국전쟁 시기 미군의 보급에 대한 밴 플리트의 평


한국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을 역임한 밴 플리트의 인터뷰 녹취록을 조금씩 읽는 중 입니다. 오늘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보급에 대한 밴 플리트의 평을 소개해 보지요. 꽤 재미있습니다. 특히 보급에 대한 밴 플리트의 관점을 잘 보여주는 부분 같군요.

윌리엄스 중령 : 장군님. 우리 미군에 대해서는... 우리 미군이 한국전쟁, 아니 전쟁을 치를 때 마다 지나치게 많은 장비를 갖추고 보급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밴 플리트 : 아니오. 전혀. 전투에 임하는 군인은 불가피한 경우라면 기본적인 필수품 조차 없는 상황에서 싸울 수 있어야 하지. 하지만 우리 군인들에게 더 잘 해줄 수 있다면 최고로 해 줘야 하는 법이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하지. 우리는 미국 본토, 유럽, 그리고 한국의 산악지대 등 어디에서건 가장 훌륭한 급식을 했소. 아군은 매일 보급을 받았고 아이스크림 같은 특식도 자주 받았소. 통조림 아이스크림을 사용하는 아이스크림 만드는 기계를 모든 사단이 가지고 있었소. 통조림 아이스크림은 걸쭉한 액체나 분말 형태였는데 물을 섞어서 얼리기만 하면 아이스크림을 만들 수 있었소. 그리고 차량 종점이나 철도 종점, 보급소에서 보급품을 추진하기 위해서 한국인으로 구성된 보급부대를 두었소. 한국인 보급부대는 지게(A frame)를 갖추고 있었는데 지게로 무거운 물품을 운반할 수 있었소. 한국인 보급부대는 식량, 탄약, 그밖의 보급품을 등에 짊어지고 전투부대에 전달했소. 그래서 아군이 보급을 잘 받을 수 있었던 것이오. 한국군은 별도의 급식을 받았는데 정말 부실하기 짝이 없었소. 한국인들은 그렇게 먹는 것에 익숙했지만. 급식은 대부분 밥이었고 일주일에 한 두번 정도 생선이나 고기를 먹는 수준이었고. 밥에 간장(soybean sauce)과 김치를 곁들여 먹는 것이었소. 김치는 절인 배추인데 자우어크라우트Sauerkraut 같은 음식이오. 김치는 밥을 먹을 때 맛도 내고 비타민도 보충해 주는 음식이었소. 한국군인은 하루에 11센트로 급식을 할 수 있었는데 우리 미군은, 내가 생각하기에 하루에 급식비로 5달러는 소요됐던것 같소. 요리를 할 줄 아는 취사병들은 꽤 맛있는 급식을 했소. 하지만 몇몇 실력없는 취사병들은 근사한 스테이크도 망쳐버리곤 했지. 급식을 제대로 준비하는건 정말 문제였소. 이 문제를 돕기 위해 많은 강사와 감독관이 파견됐소. 그 중에서도 특히 조지 머디키언George Mardikian씨가 기억에 남는구려. 머디키언씨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오마르 카얌Omar Khayyam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이었소. 그는 1차대전이 끝난 뒤 유럽에서 후버 전 대통령과 함께 식량구호활동을 한 바 있소. 그리고 미국을 매우 사랑하는 사람이었지. 머디키언씨는 아르메니아 출신으로 요리 전문가가 되었소. 그는 한국을 방문했을 때 모든 취사장을 시찰한 뒤 급양담당 부사관들과 취사병, 그 외의 취사관련 인원들을 가르쳤소. 머디키언씨는 육군부의 지시로 한국을 방문한 것이었소. 그래. 우리 군의 급식은 최고였지.
“Interview with General James A. Van Fleet by Lieutenant Colonel Bruce Williams, Tape 4”(1973. 3. 3), Senior Officers Debriefing Program, US Army Military History Institute, pp.47~48.

모든 군대가 병사들을 잘 먹이려 하지만 실제로 그게 가능한 군대는 흔치 않지요. 후방에서 물자를 준비하고 이것을 전방으로 추진해서 배급하는 과정이 딱딱 맞아떨어져야만 가능한 일이니 말입니다.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전방의 군인들은 그야말로 개고생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미국은 풍부한 생산력과 이것을 전장으로 수송할 수 있는 수단, 그리고 뛰어난 행정 조직 등 필요한 것을 제대로 갖춘 유일한 나라가 아닐까 싶습니다.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고기를 수송하기 위해 냉동선을 선구적으로 운영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잠수함 까지 아이스크림 제조 기계를 갖출 정도로 보급에 신경을 쓴 것을 보면 그저 부럽다는 생각 말고는 드는게 없을 정도입니다. 밴 플리트가 이 인터뷰에서 미군의 급식이 최고라고 자부한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 싶군요.


2013년 7월 29일 월요일

트위터 계정을 삭제했습니다.

조금 전에 트위터 계정을 삭제했습니다.

저 처럼 충동적이고 흥분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쥐약 같은 서비스더군요.

가끔씩 욱할때마다 트위터에 험한 말을 하는데 이게 별로 좋은 태도 같지도 않고요.

그래서 앞으로는 트위터를 하지 않으려 합니다.

2013년 7월 24일 수요일

2차대전기 미영 연합군의 전차 손실에 대한 통계 :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 - (2)-1

통계로 때우는 땜빵 포스팅 하나 나갑니다.




이번에 올리는 내용은 2차대전기 미영 연합군의 전차 손실에 대한 통계 :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 - (2)에서 빼먹고 넘어간 통계입니다. 내용은 1944년 8월 28일부터 9월 7일까지 프랑스 전선에서 영국군이 추격전을 펼칠 때 발생한 전차 손실에 대한 것 입니다. 전투가 격렬하게 전개되는 상황이 아닌 추격전 상황하에서 발생한 손실에 대한 내용이어서 흥미가 반감되지만 기계적 요인이 손실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연합군의 전차 손실에 관한 전체적인 경향은 위에 링크한 지난 글들을 참고하십시오.


이 통계에 실려있는 6개의 부대 중 크롬웰을 장비한 영국군 제7기갑사단을 제외한 나머지 부대는 셔먼을 주력으로 장비하고 있었습니다.(폴란드 제1기갑사단은 셔먼과 크롬웰의 혼성편제이지만 셔먼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1)


표. 프랑스전선에서 영국군 기갑부대의 전차 손실(1944. 8. 28~9. 7)

기계고장
(대수)
기계고장
(%)
전투손실
(대수)
총 손실
(대수)
영국 근위기갑사단
59
92.2
5
64
영국 제8기갑여단
57
74.0
20
77
영국 제11기갑사단
44
88.0
6
50
영국 제7기갑사단
38
76.0
12
50
폴란드 제1기갑사단
50
62.5
30
80
캐나다 제4기갑사단
57
91.9
5
62
총 계
305
-
78
383
일일평균손실
5.4
79.4
1.4
6.8
100마일당 평균손실
16
79.6
4.1
20.1
[출처 : Technical Memorandum ORO-T-117,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1951. 3. 31), table 3, p.12]


이  통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100마일당 평균손실을 계산한 내용입니다. 100마일은 160km가 되니 10km를 달릴때 마다 셔먼이나 크롬웰 한대가 고장으로 낙오되었다는 이야기이죠.


다음으로 흥미로운 것은 영국 제7기갑사단의 손실에 관한 내용입니다. 크롬웰을 장비한 영국 제7기갑사단은 셔먼을 장비한 부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손실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7기갑사단장 버니Gerald L. Verney 소장이 벨기에 방면으로 추격전을 펼치는 동안 크롬웰은 기계적 고장으로 인한 손실이 사실상 거의 없었다고 보고한 것과는 조금 상충되는 내용입니다.2) 제7기갑사단이 노르망디 전선에 투입될 당시 다른 영국군 기갑사단들과 마찬가지로 343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으니 전투손실을 고려하면 8월 말에는 그보다 적은 숫자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 확실합니다. 10일 동안 38대를 기계적 고장으로 잃었다는 것은 그리 작은 손실이 아니지요.  크롬웰은 영국이 제2차 대전중에 생산한 전차 중에서는 기계적 신뢰성이 가장 뛰어난 차종으로 꼽히기에 더욱 궁금합니다. ORO-T-117에 좀 더 상세한 내역이 없는게 아쉽군요.


이 보고서에는 추격전 기간 중에 기계고장으로 인한 손실이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원인으로 유동적인 전장 상황으로 인해 정비부대가 차량을 회수해 정비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3) 이 점은 퇴각하는 독일군의 경우도 마찬가지 였지만 그래도 후방에 남는 전차는 어떻게든 아군이 확보할 수 있으니 완전손실은 아니지요.



1) Brian A. Reid, No Holding Back : Opertaion Totalize, Normandy, August 1944, (Robin Brass Studio, 2005), p.443에 실린 내용을 보면 폴란드 제1기갑사단은 1944년 8월 7일에 129대의 셔먼V(M4A4), 25대의 셔먼VC(파이어플라이), 33대의 스튜어트, 59대의 크롬웰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하는군요.
2) John Buckley, British Armour in the Normandy Campaign 1944, (Frank Cass, 2004), p.112.
3) Technical Memorandum ORO-T-117,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1951. 3. 31), p.12.

2013년 7월 10일 수요일

백선엽 회고록의 숙군 당시 박정희 구명에 관한 서술

백선엽의 회고록은 여러 차례 출간된 바 있습니다. 백선엽 회고록의 사료적인 가치는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창군 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 백선엽의 회고는 내용이 풍부한데다 백선엽의 지위 때문에 흥미로운 내용이 많습니다. 그런데 회고록이 여러 차례 나오다 보니 어떤 부분에서는 서술에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숙군당시 체포된 박정희가 구제되는 과정입니다.

여기서는 2009년 시대정신에서 간행한 『군과 나』와 2012년 책밭에서 간행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에 실린 내용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한편 숙군 과정에서 중형이 선고된 군인 중 유일하게 구제된 경우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박정희 소령이었다. 방첩대 수사반은 남로당 군사책 이재복李在福이 육군사관학교에 조직을 침투시켜 일부 중대장을 통해 생도들까지 좌익 활동에 가담시킨 사실을 포착했다. 이 수사에서 용의자의 한 사람으로 체포된 사람이 육사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했었고, 당시 육본 작전교육국 과장이던 박 소령이었다.

숙군 1단계 작업이 완결될 즈음인 1949년 초 어느 날, 방첩대 김안일 소령(준장 예편ㆍ육사)이 나에게 “박 소령이 국장님을 뵙고 꼭 할말이 있다고 간청하고 있으니 면담을 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박 소령이 조사 과정에서 군내 침투 좌익 조직을 수사하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점도 강조했다. 사실 사관학교 등 군내 좌익 조직 수사는 최초 단서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었다.

나는 면담을 승낙했다. 당시 내 사무실은 국방부와 방첩대 두 곳에 있었다. 내가 박 소령을 만난 곳은 명동 구 증권거래소 건물 3층 정보국장실이었다. 박 소령은 한참을 묵묵히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를 한번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작업복 차림의 그는 초췌해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태도는 전혀 비굴하지 않고 시종 의연한 자세였다. 평소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들어 알고 있었으나 어려운 처지에서도 침착한 그의 태도가 일순 나를 감동시켰다. 그래서였을까.

“도와드리지요.”

참으로 무심결에 내 입에서 이런 대답이 흘러나왔다.

약 20분간 면담을 마치고 그를 돌려보냈다. 나는 일단 내 입으로 한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당시 숙군 작업은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로버츠 미 군사고문단장도 간여하고 있었다. 나는 정보국 고문관 리드 대위로 하여금 참모총장 고문관 하우스만 대위와 로버츠 준장에게 박 소령 구명에 관해 양해를 구했다. 동시에 육군본부에 재심사를 요청했다. 육본은 참모회의를 거쳐 형집행정지를 내렸고, 박 소령을 불명예 제대시키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백선엽, 『군과 나』(시대정신, 2010), 416~417쪽.

2012년에 나온 회고록에서 서술하는 내용은 약간 미묘하게 다릅니다.

박정희 소장, 그는 내가 군대 생활을 하면서 자주 머리에 떠올렸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 또한 나와는 함께 근무한 적이 없어 개인적인 관계만을 따지면 특히 걸릴게 없는 사이였다. 그러나 그는 어느 한순간 숙명처럼 내 앞에 다가온 적이 있다. 아주 결정적인 장면이었으나, 나는 그가 나중에 5ㆍ16을 일으키고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 그를 떠올릴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만큼 그는 내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군인은 아니었다.

그는 1948년 좌익 남로당의 군사책이라는 혐의를 받아 숙군 작업에 걸려들었다. 단심인 군사재판에서 결국 무거운 혐의를 벗지 못해 사형을 판결 받고 말았다. 나는 당시 숙군작업을 모두 지휘하는 입장이었고, 그는 밧줄에 묶인 사형수로서 지금의 명동에 있던 증권거래소 지하 감방에 갇혀 있었다.

나는 이전에 내가 펴낸 회고록에서 이를 자세히 서술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1949년 1월 어느 날 그는 내 앞에 나타났다. 군 생활을 하면서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어 그의 얼굴을 나는 기억했다. 그는 수갑을 찬 상태였다. 그의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인 정보국 방첩과 김안일 과장이 그 만남을 주선했다.

나는 숙군을 지휘하는 정보국장이어서 김안일 과장이 마지막으로 그의 동기생인 박정희의 구명 가능성을 타진해보기 위해 만든 자리였다. 퇴근 무렵 내 사무실에 들어선 박정희 당시 소령은 구명을 위해 내 앞에 섰으나, 분위기는 매우 침착해 보였다. 그는 내가 먼저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권유에도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다소 긴 침묵이 흐른 뒤 그는 “한 번 살려 주십시요...” 라면서 말끝을 흐리다가 눈물을 비치고 말았다. 나는 그 모습이 어딘가 아주 애처로워 보였다. 당시 그의 혐의 자체는 무거웠으나 실제 남로당 군사책으로 활동한 흔적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숙군작업의 진행을 위해 솔직하게 남로당 군사 조직을 조사팀에게 제공해 개전의 여지를 보였다.

나는 그런 내력을 감안해 그의 구명 요청을 들은 뒤 “그럽시다. 한 번 그렇게 해 봅시다”라고 말했다. 이어 나는 육군 최고 지도부에 그의 감형을 요청했고, 결국 그는 풀려나 목숨을 구했다. 나는 또 군복을 벗게 된 그의 생계를 염려해 정보국 안에 민간인 신분으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그 후 나는 정보국에 김종필을 비롯한 나중의 5ㆍ16 핵심 멤버를 이룬 육사 8기생 31명을 선발해 정보국에 배치했다. 역사의 우연이라면 큰 우연이다. 나는 꺼져가는 박정희의 생명을 붙잡았고, 결국 육사 8기생까지 선발해 그와 만나게 한 셈이었다.

백선엽,『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책밭, 2012), 124~125쪽.

뭔가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서술입니다. 2012년에 나온 회고록에 실린 내용은 진영에 따라서 아주 재미있게 다룰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