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22일 목요일

1960년대 독일연방군 제1군단의 방어계획

Blueprint for Battle : Planning for War in Central Europe, 1948~1968을 읽는 중 입니다. 진도가 더뎌서 이제야 겨우 헬무트 하머리히Helmut Hammerlich가 쓴 제10장 “Fighting for the Heart of Germany”를 읽고 있습니다. 제10장은 1960년대 초반 북독일의 방어를 담당한 독일연방군 제1군단의 전시 방어계획을 다루고 있습니다.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해 방어종심이 짧은 독일의 전략적 고민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더군요.


제10장에서는 1963년 9월에 나온 연합군중부유럽사령부CINCENT, Commander in Chief, Allied Forces Central Europe의 긴급방어계획EDP, Emergence Defense Plan 1-63호 이후의 방어 계획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긴급방어계획 1-63호는 주방어선을 베저Weser-레흐Lech 강을 잇는 선으로 설정해 독일연방공화국 영토의 90%를 방어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전까지의 방어계획이 주방어선을 엠스Ems-네카Neckar강으로 설정해서 독일연방공화국 영토의 50%를 포기하는 것에 비하면 방어구역을 크게 늘린 것이고 독일이 정치적으로도 용납할 수 있는 범위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경우 가장 큰 문제는 최대한 전방에서 바르샤바조약군의 주력을 맞아 싸우기 위해서 지연전을 펼쳐야 하기 때문에 작전적 융통성이 제한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영토를 최대한 사수해야 하니 선택의 폭은 좁아지는 것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제1군단, 영국 제1군단, 벨기에 제1군단과 함께 독일 북부의 방어를 담당한 독일연방군 제1군단은 예하에 제3기갑사단, 제1기갑척탄병사단, 제11기갑척탄병사단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제11기갑척탄병사단은 예하의 제33기갑척탄병여단을 나토 북부집단군NORTHAG, NATO’s Northern Army Group 예비대인 제7기갑척탄병사단에 배속하게 되어 있어서 실제 전력은 2개 기갑척탄병여단으로 제한되었습니다. 이 3개사단의 기갑전력은 전차 600대와 장갑차 700대였습니다. 그런데 독일 제1군단이 1차로 상대하게 될 소련 제3충격군은 4개 전차사단과 1개 차량화소총병사단, 전차 1,600대와 장갑차 1,400대를 보유한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고 제2파 제대로는 제2근위전차군, 또는 제20근위군 소속의 11개 사단이 투입될 것이라고 보고 있었습니다. 전쟁 초반에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를 감당하면서 최대한 좁은 지역에서 적을 저지해야 하는 것 이었습니다. 1965년에 계획을 개정해서 제7기갑척탄병사단을 독일 제1군단 예비대로 지정하기 전 까지는 이렇다 할 예비대가 없었으니 더욱 난감한 계획이었습니다. 기본적인 방어계획은 각 사단이 1개 여단과 사단 기갑수색대대로 지연부대를 편성해 최전방에서 지연전을 펼치는 동안 나머지 2개 여단이 주방어선에서 방어를 준비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지연부대가 주방어선까지 밀려오면 이것을 후방으로 돌려 사단예비대로 운용하도록 했습니다. 굉장히 협소한 방어구역과 제한된 전력이 결합되어 지휘관이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범위가 지독하게 적었던 것 입니다.


이런 제약을 상쇄하기 위해 사용된 수단은 잘 알려진 대로 핵병기였습니다. 독일 제1군단 포병의 경우 연합군 유럽최고사령관SACEUR, Supreme Allied Commander Europe의 허가를 받아 10킬로톤까지의 핵포탄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저자인 하머리히는 자세한 사격계획이 명시된 사료를 찾지 못해 개략적인 내용만 서술하고 있습니다. 핵 포격과 함께 사용되는 수단은 핵지뢰였습니다. 핵지뢰는 4~5km 간격으로 설치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베저강 서쪽에 설정된 핵지뢰 사용 지대가 120km 가량이었다는 증언을 토대로 독일 제1군단에 할당된 핵지뢰는 30개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여기에 항공지원을 담당한 제2연합전술공군ATAF, Allied Tactical Air Force도 핵폭격을 하도록 되어 있었으니 전쟁이 터졌다면 전쟁 초반부터 독일은 핵으로 쑥대밭이 될 판이었습니다. 나토측이 전진방어를 채택하면서 핵무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계획을 수립했다는 것은 바르샤바조약기구 측에서도 비교적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주)


사실 독일 본토에서 핵을 사용한다는 것은 독일측으로서도 썩 달가운 방안이 아니었습니다. 박살나는건 독일이니 말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1960년대 중반까지 나토 북부집단군 방어구역에서 핵 타격 목표를 선정하는 것은 영국군에 의해 좌우됐고 1966년 이후에야 독일측이 핵무기 사용을 제약하는 방향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독일로서도 뾰족한 대안이 없는 것은 문제였습니다. 당시 독일 제1군단 포병사령관은 작전상 개전 초반부터 핵무기를 사용할 수 밖에 없으며 독일군의 전력이 획기적으로 증강되지 않는 이상 재래식 화력전은 어렵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독일군의 비판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개전 초기에 대량의 핵무기를 사용하는 계획이 계속 수립되었습니다. 1966년 부터 독일공군 참모총장을 맡았던 슈타인호프Johannes Steinhoff는 이런 계획으로는 작전적인 기동이 불가능하다고 비난하고 독일을 파괴하는 전술핵의 대량 사용을 재래식 방어에 포함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최대한 많은 영토를 방어하면서도 핵무기 사용은 피해야 한다는 딜레마는 결국 독일이 재래식 전력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만듭니다. 사실상 이것이 독일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기 때문입니다.



주) “Document No.28 : Warsaw Pact Intelligence on NATO’s Strategy and Combat Readiness, 1965”, Vojtech mastny and Malcolm Byrne(ed.), A Cardboard Castle? : An Inside History of the Warsaw Pact 1955~1991, (CEU Press, 2005) pp.172~173.

2013년 8월 19일 월요일

재미있는 책이 한권 나왔군요

코넬 대학 출판부에서 Fortifying China : The Struggle to Build a Modern Defense Economy 라는 책이 나왔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일본 보다 중국이 더 위협적인 강대국이라고 생각해서 중국의 군사력 증강문제를 다루는 연구에 대해서도 관심은 많은데 정작 읽은 책은 많지가 않습니다.

일단 이 책의 목차를 살펴보니 마오쩌둥 시기 부터 현재 까지 중국의 국방경제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통사 같습니다. 마오쩌둥 시기의 핵개발과 미사일개발에 대해서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서 서술하는 걸로 보입니다. 목차상으로는 이 문제에 한 절을 할당했군요. 그리고 덩샤오핑 시기를 바라보는 시각이 흥미롭게 보입니다. 마오쩌둥 시기의 국방공업 건설과 비교했을 때 어떤 평가를 할지 궁금하군요.(마오쩌둥 시기의 국방공업 건설은 꽤 악명높은 이야기가 많지요.) 통사이면서 현안에 대한 분석도 제법 충실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물론 읽어봐야 알 수 있는 것이겠지만 말입니다.

일단 아마존의 위시리스트에 넣어 놓긴 했는데 아마 다음달이나 돼야 주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 '감기'에 대한 어떤 평

영화 '감기'를 시사회로 봤다가 분노한게 일주일 넘게 가는군요.

네이버에 댓글알바가 활동한다기에 분노의 별 한개를 주러 네이버에 로그인 했다가 이렇게 멋진 영화평을 봤습니다.




제가 분노해서 길게 쓴 영화평이 이 분의 140자평만 못한게 부끄럽더군요. 그래서 제 평은 지웠습니다. ㅎㅎ. 쓸데없이 전작권이 어떻고 검역이 어떻고 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2013년 8월 13일 화요일

타임라이프 2차세계대전사를 받아가기로 하신 parkindani님께

트위터를 날려버리니 연락 드리기가 불편하게 됐군요.

처음에 우편으로 보내드린다고 했다가 분량이 부담돼서 직접 가져가시라고 부탁드려 죄송합니다. 타임라이프 2차세계대전사는 새 주인을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으니 언제라도 시간되시는 대로 연락주고 가져가시면 됩니다.

2013년 8월 6일 화요일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보낸 어떤 전문

1990년대 이후 공개된 한국전쟁에 대한 소련 문서들은 그동안 우리가 정황으로만 추정하거나 다소 부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실들을 입증해 주었을 뿐 아니라 전혀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도 알려주었습니다. 그런 문서들 중 하나가 1952년 7월 16일 김일성이 주북 소련대사 라주바예프(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Разуваев)를 통해 스탈린에게 보낸 서한입니다. 이 서한은 미국의 폭격에 견딜수 없게 된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신속한 휴전 체결을 간청하는 내용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편지의 핵심적인 내용 외에도 김일성의 몇가지 요구사항이 눈에 띄는데 남한에 보복 폭격을 할 수 있도록 공군력을 증강시켜 달라는 요구 등이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윌슨센터의 디지털 아카이브에 올라와 있는 영어 번역본을 중역해서 올려 봅니다.


긴급

바실레프스키 동지께.

비신스키 동지께.

1952년 7월 16일 김일성이 스탈린 동지께 보낸 편지에 대해 보고합니다.

라주바예프


배부 : 스탈린(2부), 몰로토프, 말렌코프, 베리야, 미코얀, 카가노비치, 불가닌, 흐루쇼프, 비신스키, 소콜로프스키



“친애하는 대사동지, 이 전문의 내용을 스탈린 동지께서 검토해 주시도록 전달해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친애하는 스탈린 동지

이시오프 비사리오노비치, 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해 드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반도의 전반적인 정세를 고려해 볼 때 휴전협상이 무기한 늘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지난 1년여간의 협상 결과 우리는 사실상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고 수동적인 방어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적은 사실상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막대한 인명과 물자의 손실을 입히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아주 최근에 적은 조선 전역의 발전소에 대한 군사작전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공군의 작전으로는 상황을 호전 시킬 가능성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 경제에 엄청난 피해가 초래되어 누적되고 있습니다.

평양이라는 단 한개 도시에 대해 (7월 11일과 7월 12일 밤의) 단 한번의 24시간 동안의 야만적인 공습으로 6천여명의 비무장 민간인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습니다.

적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협상에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중국 동지들은 당연히 이러한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우리도 이 문제에 대한 마오쩌둥 동지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조선 인민을 고통과 부당하고 무의미한 피해에서 구해내기 위해서는 중요한 지역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능동적인 군사작전으로 전환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치가 필요합니다.

1. 방공망을 강화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10개의 대공포 연대(3개 연대는 중구경, 7개 연대는 소구경)를 편성할 장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스탈린 동지께서 중국 동지들에게 5개 연대, 우리에게 5개 연대 분의 장비를 제공해 주셨으면 합니다.

2.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공군이 능동적인 작전을 전개해야 합니다. 조선, 적어도 평양까지는 주간에 전투기로 방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선인민군 공군은 언제라도 능동적인 군사 작전을 개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와 함께 얼마 뒤에는 조선인민군 조종사 40명이 소련에서 Tu-2기 훈련을 마칠 예정입니다. 우리는 이 조종사들이 Tu-2기와 함께 귀국해서 즉시 능동적인 군사작전에 참여하고 중요한 적의 거점에 피해를 주기를 원합니다.

3. 적이 주목할 만한 일련의 지상 작전을 전개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적 공군이 우리 후방을 타격하는 것을 그만두도록 하고 개성에서 진행되는 협상에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이 모든 것과 함께, 조선인민군의 전투력을 증강하기 위해서 1952년 1월 10일과 1952년 7월 9일의 각서에 따라,  그리고 1951년 10월 6일의 각서 내용을 1952년에도 적용하여 동지께서 제공해 주실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까운 시일내에 기술 장비와 물자를 주실 필요가 간절합니다.

4. 동시에 개성에서는 조속한 휴전 체결과 교전 중지, 그리고 제네바 협약에 따른 모든 포로의 송환을 추진해야 합니다. 이러한 요구사항은 평화를 사랑하는 인민들의 지지를 받을 것이며 우리가 수동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해 줄 것 입니다.

지상과 공중에서 군사 작전의 성격이 변화한다면 적에게 이에 상응하는, 우리에게 유리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 입니다.

이 전문과 비슷한 내용을 마오쩌둥 동지에게도 보냈습니다.

조선 인민은 동지께서 조선인민공화국에 베풀어 주신 헌신적인 막대한 원조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문제에 대한 동지의 지시와 조언을 기다리겠습니다.

진보적인 인민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동지의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

존경의 마음을 담아.

김일성.


평양, 1952년 7월 16일.”



이 전문에서는 북한이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기 때문에 신속히 휴전을 체결해야 할 필요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현 상태에서의 휴전이 북한에게 불리해 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유리한 조건에서 휴전을 체결할 수 있도록 공세작전을 펼칠 수 있는 군사원조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김일성 스스로가 언급한 무의미한 희생의 원인이 김일성 자신이라는 점에 아주 입맛이 씁니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김일성 같이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놀라울 정도로 많습니다. 이런 멍청한 일은 잊을만 하면 되풀이 되지요.

2013년 8월 4일 일요일

한국전쟁 시기 미군의 보급에 대한 밴 플리트의 평


한국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을 역임한 밴 플리트의 인터뷰 녹취록을 조금씩 읽는 중 입니다. 오늘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보급에 대한 밴 플리트의 평을 소개해 보지요. 꽤 재미있습니다. 특히 보급에 대한 밴 플리트의 관점을 잘 보여주는 부분 같군요.

윌리엄스 중령 : 장군님. 우리 미군에 대해서는... 우리 미군이 한국전쟁, 아니 전쟁을 치를 때 마다 지나치게 많은 장비를 갖추고 보급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밴 플리트 : 아니오. 전혀. 전투에 임하는 군인은 불가피한 경우라면 기본적인 필수품 조차 없는 상황에서 싸울 수 있어야 하지. 하지만 우리 군인들에게 더 잘 해줄 수 있다면 최고로 해 줘야 하는 법이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하지. 우리는 미국 본토, 유럽, 그리고 한국의 산악지대 등 어디에서건 가장 훌륭한 급식을 했소. 아군은 매일 보급을 받았고 아이스크림 같은 특식도 자주 받았소. 통조림 아이스크림을 사용하는 아이스크림 만드는 기계를 모든 사단이 가지고 있었소. 통조림 아이스크림은 걸쭉한 액체나 분말 형태였는데 물을 섞어서 얼리기만 하면 아이스크림을 만들 수 있었소. 그리고 차량 종점이나 철도 종점, 보급소에서 보급품을 추진하기 위해서 한국인으로 구성된 보급부대를 두었소. 한국인 보급부대는 지게(A frame)를 갖추고 있었는데 지게로 무거운 물품을 운반할 수 있었소. 한국인 보급부대는 식량, 탄약, 그밖의 보급품을 등에 짊어지고 전투부대에 전달했소. 그래서 아군이 보급을 잘 받을 수 있었던 것이오. 한국군은 별도의 급식을 받았는데 정말 부실하기 짝이 없었소. 한국인들은 그렇게 먹는 것에 익숙했지만. 급식은 대부분 밥이었고 일주일에 한 두번 정도 생선이나 고기를 먹는 수준이었고. 밥에 간장(soybean sauce)과 김치를 곁들여 먹는 것이었소. 김치는 절인 배추인데 자우어크라우트Sauerkraut 같은 음식이오. 김치는 밥을 먹을 때 맛도 내고 비타민도 보충해 주는 음식이었소. 한국군인은 하루에 11센트로 급식을 할 수 있었는데 우리 미군은, 내가 생각하기에 하루에 급식비로 5달러는 소요됐던것 같소. 요리를 할 줄 아는 취사병들은 꽤 맛있는 급식을 했소. 하지만 몇몇 실력없는 취사병들은 근사한 스테이크도 망쳐버리곤 했지. 급식을 제대로 준비하는건 정말 문제였소. 이 문제를 돕기 위해 많은 강사와 감독관이 파견됐소. 그 중에서도 특히 조지 머디키언George Mardikian씨가 기억에 남는구려. 머디키언씨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오마르 카얌Omar Khayyam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이었소. 그는 1차대전이 끝난 뒤 유럽에서 후버 전 대통령과 함께 식량구호활동을 한 바 있소. 그리고 미국을 매우 사랑하는 사람이었지. 머디키언씨는 아르메니아 출신으로 요리 전문가가 되었소. 그는 한국을 방문했을 때 모든 취사장을 시찰한 뒤 급양담당 부사관들과 취사병, 그 외의 취사관련 인원들을 가르쳤소. 머디키언씨는 육군부의 지시로 한국을 방문한 것이었소. 그래. 우리 군의 급식은 최고였지.
“Interview with General James A. Van Fleet by Lieutenant Colonel Bruce Williams, Tape 4”(1973. 3. 3), Senior Officers Debriefing Program, US Army Military History Institute, pp.47~48.

모든 군대가 병사들을 잘 먹이려 하지만 실제로 그게 가능한 군대는 흔치 않지요. 후방에서 물자를 준비하고 이것을 전방으로 추진해서 배급하는 과정이 딱딱 맞아떨어져야만 가능한 일이니 말입니다.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전방의 군인들은 그야말로 개고생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미국은 풍부한 생산력과 이것을 전장으로 수송할 수 있는 수단, 그리고 뛰어난 행정 조직 등 필요한 것을 제대로 갖춘 유일한 나라가 아닐까 싶습니다.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고기를 수송하기 위해 냉동선을 선구적으로 운영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잠수함 까지 아이스크림 제조 기계를 갖출 정도로 보급에 신경을 쓴 것을 보면 그저 부럽다는 생각 말고는 드는게 없을 정도입니다. 밴 플리트가 이 인터뷰에서 미군의 급식이 최고라고 자부한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 싶군요.


2013년 7월 29일 월요일

트위터 계정을 삭제했습니다.

조금 전에 트위터 계정을 삭제했습니다.

저 처럼 충동적이고 흥분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쥐약 같은 서비스더군요.

가끔씩 욱할때마다 트위터에 험한 말을 하는데 이게 별로 좋은 태도 같지도 않고요.

그래서 앞으로는 트위터를 하지 않으려 합니다.

2013년 7월 24일 수요일

2차대전기 미영 연합군의 전차 손실에 대한 통계 :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 - (2)-1

통계로 때우는 땜빵 포스팅 하나 나갑니다.




이번에 올리는 내용은 2차대전기 미영 연합군의 전차 손실에 대한 통계 :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 - (2)에서 빼먹고 넘어간 통계입니다. 내용은 1944년 8월 28일부터 9월 7일까지 프랑스 전선에서 영국군이 추격전을 펼칠 때 발생한 전차 손실에 대한 것 입니다. 전투가 격렬하게 전개되는 상황이 아닌 추격전 상황하에서 발생한 손실에 대한 내용이어서 흥미가 반감되지만 기계적 요인이 손실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연합군의 전차 손실에 관한 전체적인 경향은 위에 링크한 지난 글들을 참고하십시오.


이 통계에 실려있는 6개의 부대 중 크롬웰을 장비한 영국군 제7기갑사단을 제외한 나머지 부대는 셔먼을 주력으로 장비하고 있었습니다.(폴란드 제1기갑사단은 셔먼과 크롬웰의 혼성편제이지만 셔먼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1)


표. 프랑스전선에서 영국군 기갑부대의 전차 손실(1944. 8. 28~9. 7)

기계고장
(대수)
기계고장
(%)
전투손실
(대수)
총 손실
(대수)
영국 근위기갑사단
59
92.2
5
64
영국 제8기갑여단
57
74.0
20
77
영국 제11기갑사단
44
88.0
6
50
영국 제7기갑사단
38
76.0
12
50
폴란드 제1기갑사단
50
62.5
30
80
캐나다 제4기갑사단
57
91.9
5
62
총 계
305
-
78
383
일일평균손실
5.4
79.4
1.4
6.8
100마일당 평균손실
16
79.6
4.1
20.1
[출처 : Technical Memorandum ORO-T-117,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1951. 3. 31), table 3, p.12]


이  통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100마일당 평균손실을 계산한 내용입니다. 100마일은 160km가 되니 10km를 달릴때 마다 셔먼이나 크롬웰 한대가 고장으로 낙오되었다는 이야기이죠.


다음으로 흥미로운 것은 영국 제7기갑사단의 손실에 관한 내용입니다. 크롬웰을 장비한 영국 제7기갑사단은 셔먼을 장비한 부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손실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7기갑사단장 버니Gerald L. Verney 소장이 벨기에 방면으로 추격전을 펼치는 동안 크롬웰은 기계적 고장으로 인한 손실이 사실상 거의 없었다고 보고한 것과는 조금 상충되는 내용입니다.2) 제7기갑사단이 노르망디 전선에 투입될 당시 다른 영국군 기갑사단들과 마찬가지로 343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으니 전투손실을 고려하면 8월 말에는 그보다 적은 숫자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 확실합니다. 10일 동안 38대를 기계적 고장으로 잃었다는 것은 그리 작은 손실이 아니지요.  크롬웰은 영국이 제2차 대전중에 생산한 전차 중에서는 기계적 신뢰성이 가장 뛰어난 차종으로 꼽히기에 더욱 궁금합니다. ORO-T-117에 좀 더 상세한 내역이 없는게 아쉽군요.


이 보고서에는 추격전 기간 중에 기계고장으로 인한 손실이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원인으로 유동적인 전장 상황으로 인해 정비부대가 차량을 회수해 정비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3) 이 점은 퇴각하는 독일군의 경우도 마찬가지 였지만 그래도 후방에 남는 전차는 어떻게든 아군이 확보할 수 있으니 완전손실은 아니지요.



1) Brian A. Reid, No Holding Back : Opertaion Totalize, Normandy, August 1944, (Robin Brass Studio, 2005), p.443에 실린 내용을 보면 폴란드 제1기갑사단은 1944년 8월 7일에 129대의 셔먼V(M4A4), 25대의 셔먼VC(파이어플라이), 33대의 스튜어트, 59대의 크롬웰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하는군요.
2) John Buckley, British Armour in the Normandy Campaign 1944, (Frank Cass, 2004), p.112.
3) Technical Memorandum ORO-T-117,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1951. 3. 31), p.12.

2013년 7월 10일 수요일

백선엽 회고록의 숙군 당시 박정희 구명에 관한 서술

백선엽의 회고록은 여러 차례 출간된 바 있습니다. 백선엽 회고록의 사료적인 가치는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창군 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 백선엽의 회고는 내용이 풍부한데다 백선엽의 지위 때문에 흥미로운 내용이 많습니다. 그런데 회고록이 여러 차례 나오다 보니 어떤 부분에서는 서술에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숙군당시 체포된 박정희가 구제되는 과정입니다.

여기서는 2009년 시대정신에서 간행한 『군과 나』와 2012년 책밭에서 간행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에 실린 내용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한편 숙군 과정에서 중형이 선고된 군인 중 유일하게 구제된 경우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박정희 소령이었다. 방첩대 수사반은 남로당 군사책 이재복李在福이 육군사관학교에 조직을 침투시켜 일부 중대장을 통해 생도들까지 좌익 활동에 가담시킨 사실을 포착했다. 이 수사에서 용의자의 한 사람으로 체포된 사람이 육사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했었고, 당시 육본 작전교육국 과장이던 박 소령이었다.

숙군 1단계 작업이 완결될 즈음인 1949년 초 어느 날, 방첩대 김안일 소령(준장 예편ㆍ육사)이 나에게 “박 소령이 국장님을 뵙고 꼭 할말이 있다고 간청하고 있으니 면담을 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박 소령이 조사 과정에서 군내 침투 좌익 조직을 수사하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점도 강조했다. 사실 사관학교 등 군내 좌익 조직 수사는 최초 단서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었다.

나는 면담을 승낙했다. 당시 내 사무실은 국방부와 방첩대 두 곳에 있었다. 내가 박 소령을 만난 곳은 명동 구 증권거래소 건물 3층 정보국장실이었다. 박 소령은 한참을 묵묵히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를 한번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작업복 차림의 그는 초췌해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태도는 전혀 비굴하지 않고 시종 의연한 자세였다. 평소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들어 알고 있었으나 어려운 처지에서도 침착한 그의 태도가 일순 나를 감동시켰다. 그래서였을까.

“도와드리지요.”

참으로 무심결에 내 입에서 이런 대답이 흘러나왔다.

약 20분간 면담을 마치고 그를 돌려보냈다. 나는 일단 내 입으로 한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당시 숙군 작업은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로버츠 미 군사고문단장도 간여하고 있었다. 나는 정보국 고문관 리드 대위로 하여금 참모총장 고문관 하우스만 대위와 로버츠 준장에게 박 소령 구명에 관해 양해를 구했다. 동시에 육군본부에 재심사를 요청했다. 육본은 참모회의를 거쳐 형집행정지를 내렸고, 박 소령을 불명예 제대시키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백선엽, 『군과 나』(시대정신, 2010), 416~417쪽.

2012년에 나온 회고록에서 서술하는 내용은 약간 미묘하게 다릅니다.

박정희 소장, 그는 내가 군대 생활을 하면서 자주 머리에 떠올렸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 또한 나와는 함께 근무한 적이 없어 개인적인 관계만을 따지면 특히 걸릴게 없는 사이였다. 그러나 그는 어느 한순간 숙명처럼 내 앞에 다가온 적이 있다. 아주 결정적인 장면이었으나, 나는 그가 나중에 5ㆍ16을 일으키고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 그를 떠올릴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만큼 그는 내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군인은 아니었다.

그는 1948년 좌익 남로당의 군사책이라는 혐의를 받아 숙군 작업에 걸려들었다. 단심인 군사재판에서 결국 무거운 혐의를 벗지 못해 사형을 판결 받고 말았다. 나는 당시 숙군작업을 모두 지휘하는 입장이었고, 그는 밧줄에 묶인 사형수로서 지금의 명동에 있던 증권거래소 지하 감방에 갇혀 있었다.

나는 이전에 내가 펴낸 회고록에서 이를 자세히 서술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1949년 1월 어느 날 그는 내 앞에 나타났다. 군 생활을 하면서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어 그의 얼굴을 나는 기억했다. 그는 수갑을 찬 상태였다. 그의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인 정보국 방첩과 김안일 과장이 그 만남을 주선했다.

나는 숙군을 지휘하는 정보국장이어서 김안일 과장이 마지막으로 그의 동기생인 박정희의 구명 가능성을 타진해보기 위해 만든 자리였다. 퇴근 무렵 내 사무실에 들어선 박정희 당시 소령은 구명을 위해 내 앞에 섰으나, 분위기는 매우 침착해 보였다. 그는 내가 먼저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권유에도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다소 긴 침묵이 흐른 뒤 그는 “한 번 살려 주십시요...” 라면서 말끝을 흐리다가 눈물을 비치고 말았다. 나는 그 모습이 어딘가 아주 애처로워 보였다. 당시 그의 혐의 자체는 무거웠으나 실제 남로당 군사책으로 활동한 흔적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숙군작업의 진행을 위해 솔직하게 남로당 군사 조직을 조사팀에게 제공해 개전의 여지를 보였다.

나는 그런 내력을 감안해 그의 구명 요청을 들은 뒤 “그럽시다. 한 번 그렇게 해 봅시다”라고 말했다. 이어 나는 육군 최고 지도부에 그의 감형을 요청했고, 결국 그는 풀려나 목숨을 구했다. 나는 또 군복을 벗게 된 그의 생계를 염려해 정보국 안에 민간인 신분으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그 후 나는 정보국에 김종필을 비롯한 나중의 5ㆍ16 핵심 멤버를 이룬 육사 8기생 31명을 선발해 정보국에 배치했다. 역사의 우연이라면 큰 우연이다. 나는 꺼져가는 박정희의 생명을 붙잡았고, 결국 육사 8기생까지 선발해 그와 만나게 한 셈이었다.

백선엽,『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책밭, 2012), 124~125쪽.

뭔가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서술입니다. 2012년에 나온 회고록에 실린 내용은 진영에 따라서 아주 재미있게 다룰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군요.

2013년 7월 8일 월요일

[번역글] 프로호롭카 : 신화의 기원과 전개과정

날림번역글 하나 나갑니다.


오늘 소개할 글은 러시아의 유명한 군사사가 발레리 자물린이 작년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5-4호에 기고한 “프로호롭카 : 신화의 기원과 전개과정Prokhorovka: The Origins and Evolution of a Myth”이라는 글 입니다. 쿠르스크 전투에서 가장 유명한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한 과장된 신화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고 널리 퍼져나갔는가를 추적한 꽤 흥미로운 글 입니다. 냉전시기 소련 역사서술의 문제점을 잘 보여주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냉전시기 독소전쟁에 대한 인식이 지나치게 독일 편향적이라는 비판이 많았지만 냉전기 소련의 역사서술도 만만치 않게 문제가 많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또한 2차대전 중 소련 야전부대의 정보 수집과 처리 과정의 문제에 대해서도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프로호롭카 : 신화의 기원과 전개과정



발레리 자물린(쿠르스크 주립대학)


1943년 쿠르스크 일대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대조국전쟁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 이 잊을 수 없는 날들이 있은지 70여년이 되어가지만 러시아는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쿠르스크 전투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다. 쿠르스크 전투는 전쟁의 전환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러한 신화 중 가장 오랫동안 계속된 것은 바로 ‘프로호롭카에서 일어난 역사상 최대의 전차전’일 것이다.


러시아 연구자들이 2000년 이래로 프로호롭카역 일대에서 전개된 전투에 대해 수많은 중요한 연구를 발표하여 이 전투의 규모와 중요성에 대하여 명확하고 정확하게 규명해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호롭카 전투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전투였다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유포되고 있다. 이 ‘신화’를 유포시킨 원동력은 소련과 러시아의 정부 기관이 편찬한 수많은 문헌들이다. 이러한 관찬 서적에서 제5근위전차군 소속의 4개 군단과 무장친위대 소속의 2개 기갑척탄병사단이 격돌한 이 전투는 ‘대조국전쟁의 결정적인 전투’라고 불리웠다.1)  동시에 이러한 책의 저자들은 그들의 “저작은 근거가 빈약하지 않으며.... 앞서 출간된 저작들이 밝혀낸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다”고 주장했다.2)


사실 프로호롭카의 전설은 1943년 여름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수십년간에 걸쳐 만들어졌다. 최근 러시아연방 국방문서보관소의 문서들이 기밀해제되고 나서야 이 신화의 형성을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신화에서 전투의 규모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소련 시기 역사서술에서는 1943년 7월 12일 양군을 합쳐 총 1,200대에서 1,500대에 달하는 전차와 자주포가 정면으로 격돌했다는 시각이 주를 이루었다. 대부분의 역사상의 신화들이 그렇듯 프로호롭카의 신화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바로 이 전투에 참전한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제5전차군 사령관 로트미스트로프Павел Алексеевич Ротмистров 중장과 그의 참모진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


프로호롭카에서 제5전차군(제5전차군은 두 지역에서 작전을 했다)과 격돌한 독일 기갑부대의 전력에 관한 첫번째 공식 문헌은 보로네지 전선군 정보참모부의 보고서로서 1943년 7월 12일에 작성된 것이다. 이날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정보장교들과 전방의 정찰대는 정보 보고서에 들어갈 정보들을 꼼꼼하게 수집했다. 이 보고서에서는 “적군은 프렐레스트노예Прелестное-얌키Ямки  방면에는 아돌프히틀러 전차사단, 다스 라이히 전차사단, 토텐코프 전차사단3)의 전차 250여대의 지원을 받는 3개의 차량화보병연대를 투입했으며,  크리브초보Кривцово-카자츠예Казачье 방면에는 100대의 전차의 지원을 받는 2개의 차량화보병연대를 투입하여 제69군을 포위 섬멸하기 위해 프로호롭카 방면으로 총공격에 나섰다”고 기록했다.4)


전투가 급박하게 전개된데다 상대적으로 좁은 지역에 엄청난 전력이 집결했다는 점을 감안해서 이 보고서에 실린 숫자를 (프로호롭카 남서쪽의 )프렐레스트노예-얌키 방면에서 작전을 펼친 3개의 무장친위대사단(모두 제2SS 기갑군단 소속이었다.)과 (기차역 남쪽의) 크리브초보-카자츠예 방면에서 공격해온 제3기갑군단이 실제로 보유한 전차 숫자와 비교하면 보로네지 전선군의 정보장교들은 매우 훌륭한 분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7월 11일 오후 7시 45분 경 제2SS기갑군단은 가동가능한 전차와 돌격포 273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제3기갑군단은 100대를 보유하고 있었다.5)  하지만 필자가 연방국방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자료를 근거로 했을때 제2SS기갑군단 지휘부는 아돌프 히틀러사단의 모든 기갑차량(77대)와 다스라이히 사단의 모든 기갑차량(95대)을 제5근위전차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투입한 반면 토텐코프 기갑척탄병사단이 보유한 기갑차량 122대 중에서는 오직 34대만 투입했다. 토텐코프 사단은 나머지 기갑전력을 제5근위전차군의 인접 부대를 상대하기 위해 투입했다.


1943년 7월 24일, 쿠르스크 전투가 종결된 뒤 보로네지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이었던 흐루쇼프 중장은 직접 작성한 ‘1943년 7월 12일 쿠르스크주 프로호롭카 지구에서 전개된 전차전에 대하여’라는 보고서에 전선군 정보참모부가 추산한 통계를 첨부했는데 이 보고서는 스탈린에게 직접 제출된 것이다.6) 즉 흐루쇼프가 스탈린에게 제출하는 보고서에 전선군 정보참모부가 추산한 통계를 넣은 것은 이 통계를 신뢰한다는 뜻이었다.


전투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제5근위전차군은 7월 12일에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프로호롭카역 남서쪽에서 전개된 전투에 다음과 같은 전력을 투입했다. 제18전차군단(전차 149대), 제29전차군단(전차 199대 및 자주포 20대), 제2전차군단(전차 52대), 그리고 제2근위전차군단의 전력 대부분(전차 94대). 로트미스트로프는 독일 제3기갑군단을 저지하기 위해 전개된 남쪽의 전투에는 제5근위전차군의 선견대인 제2근위전차군단과 제5근위기계화군단(합쳐서 총 148대의 전차와 10대의 자주포)을 투입했다.7) 즉 프로호롭카 남서쪽의 그 유명한 전차전이 전개된 이곳에서, 7월 12일에 소련군의 전차와 자주포 514대가 독일군의 전차와 돌격포 206대를 상대했으며 남쪽에서는 소련군의 기갑차량 158대가 독일군의 기갑차량 100대와 격돌한 것이다. 즉 7월 12일에 양군이 보유하고 있었던 1,200대의 기갑차량 중 실제로 전투에서 격돌한 것은 978대였다는 것이다.(프로호롭카 남서쪽에서 720대, 프로호롭카역 남쪽에서 258대)


하지만 역사서에 실리게 된 것은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에서 로트미스트로프가 추정한 추정치와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한 통계였다. 제5근위전차군 사령관 로트미스트로프가 서명한 “1943년 7월 7일에서 24일까지 제5근위전차군의 전투 작전 개요”라는 보고서는 프로호롭카 남서쪽의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전차전은 전례없는 규모로 전개되어 양쪽을 합쳐 1,500대 이상의 전차와 다양한 종류의 수많은 야포와 박격포, 항공기가  전선의 협소한 지역에 투입되었다.”8) 이 보고서에 따르면 독일군은 프로호롭카 방면의 공격에 남서쪽에서는 7개 기갑사단과 4개 보병사단을, 남쪽에서는 2개 기갑사단과 1개 차량화사단을 투입하였으며 기갑차량은 1,000대에 달했다. 그리고 대략 700~800대의 전차를 보유한 6개 기갑사단으로 추정되는 전력이 제5근위전차군과 직접 교전했다는 것이다.9)


이 보고서에서 프로호롭카 지구의 전투에 독일군이 투입한 것으로 추정한 사단의 내역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프로호롭카 방면의 공격에 투입된” 독일군에 제48기갑군단의 모든 예하부대를 포함시켰는데 정작 이 부대는 오보얀Обоянь과 오보얀 서쪽으로 공격중이었으며 프로호롭카 근처로는 간 적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5근위전차군을 상대로 투입된 집단”에는 제16차량화보병사단과 제17기갑사단, 무장친위대 비킹 사단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부대들은 예비대로 있었으며 치타델레 작전에는 투입된 적도 없었다.(제5근위전차군 사령부는 이 3개 사단이 프로호롭카를 남쪽에서 공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야전군 참모부의 정보업무에 대해서는 항상 많은 비판이 있었고 특히 1943년 동계 전역에서 두드러졌다. 1943년 4월 19일 스탈린이 모든 단위의 제대에 정찰 및 정보 조직을 강화하고 효율성을 높이라는 특별명령에 서명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943년 여름 전역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보로네지 전선군은 전선군 사령부의 정보참모처를 포함한 각급제대의 정보업무에 대해 많은 비판을 했다. 주된 문제점은 정보장교들의 자질이 부족했으며 정보를 분석하는데 문제가 많았으며 적의 병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강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전선군 단위의 정보 부서는 야전군 단위의 정보 부서와 비교했을때 훨씬 효율적이었다.


제5근위전차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를 한가지 들어보겠다. 7월 12일 밤에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가 작성한 정보보고서는 “적의 제9기갑사단과 제17기갑사단, 그리고 새로 증원된 제6기갑사단은 남부지구(필자 주 : 프로호롭카 남부)에 400~600대의 전차를 투입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10) 이 수치는 7월 14일 오후 3시 35분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부에 보고한 내용에도 실려있다.11) 하지만 실제로 프로호롭카 남쪽 축선에서 공격해 오던 켐프 분견군은 7월 14일 06시 기준으로 제503중전차대대를 제외하고 82대의 기갑차량을 보유하고 있었을 뿐이다. 제503중전차대대의 가동가능한 티거는 6대에서 10대 사이였다.12) 게다가 가동가능한 전차 40대를 보유해 가장 양호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던 제7기갑사단은 프로호롭카 방면으로 공격하지도 않았다. 제7기갑사단은 프로호롭카역 남쪽에서 코로차 Короча방향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반면 남쪽에서 프로호롭카 방면으로 공격하던 제19기갑사단이 보유하고 있었던 가동가능한 기갑차량은 28대에 불과했다.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관 바투틴은 7월 13일 오후 로트미스트로프와 회의를 하면서 의심을 드러냈다. “정말 동지가 보고한 것 처럼 적군이 이렇게 많은 수의 전차를 동원할 수 있는 것이오?”13) 로트미스트로프도 숫자가 과장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전선군 사령관 바투틴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다른 사람의 탓을 하기 시작했다. 로트미스트로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본인은 남부방면의 적 전차가 300대에서 400대를 넘지는 못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적 기갑집단의 규모에 대해 보고를 한 것은 항공 정찰을 한 부대입니다. 그래서 적의 기갑전력을 과대평가하게 된 것 입니다.”14)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장교들은 필자에게 특정 축선의 적 기갑전력을 추정하기 위해서 두가지의 기초적인 방법을 사용했다고 증언해 주었다. 먼저 확인된 독일군 기갑사단의 숫자에 독일군 편제표의 전차 숫자(200대)를 곱해서 총 전력을 추정한 뒤 전투에 투입된 기갑사단은 전투를 하루 치를 때 마다 10~15대씩 전차 숫자를 줄여나가는 방식을 사용했다. 하지만 1943년 여름에는 독일군 기갑사단의 편제가 3개 전차대대(200대)에서 2개 전차대대(166대)로 줄어들었다. 두 번째 방법으로, 지상군 사령부는 적 기갑전력의 추정치를 얻기 위해 항공정찰을 사용했다. 항공정찰 결과가 나오면 이것을 사령부에서 추정한 추정치와 비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찰기 조종사들은 실제로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지상군 지휘관의 추정치에 맞춰줘야 한다는 압박도 있었지만 독일군 역시 위장과 기만에 능란했다. 예를 들어, 프로호롭카의 전투가 끝난 뒤인 7월 15일 제69군의 공병 정찰부대는 독일군이 기만에 사용한 것들을 발견했다. 독일군은 더미를 이용해서 프로호롭카 남쪽에 가짜 전차부대를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15) 그러므로 로트미스트로프에게 프로호롭카 남쪽에 독일군이 600대의 전차를 투입했다고 보고한 항공정찰부대는 독일군의 기갑전력을 추산하면서 가짜 전차까지 포함시켰던 것이다.


게다가 보로네지 전선군 예하 야전군들의 정보부서는 서로 정보를 교환하지 않았다. 만약 야전군 단위의 정보부서들이 제 역할을 수행했다면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는 (위에서 언급한 보고서의 내용 처럼) 독일 제6기갑사단이 난데없이 등장한 것을 믿지 않고 대신 이 사단이 1943년 7월 6일 이래로 제7근위군과 제69군을 상대로 작전을 펼치고 있었으며 7월 14일 오전에는 겨우 14대의 가동가능한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음을 알았을 것이다.16) 다른 한편으로 적군을 과대 평가하는 것은 아군 지휘관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소련군 지휘관들은 전투를 엉망으로 지휘하거나 예하 부대들이 전선을 고수하지 못하는 경우는 물론 사소한 실수 까지도 독일군의 전력이 우세한 것이 원인이라고 주장했으며 특히 기갑전력을 과장했다.


지금까지 언급한 이유 때문에 제5근위전차군의 문서에는 로트미스트로프가 바투틴과의 회의에서 추정했던 것 처럼 프로호롭카 남쪽의 독일군 집단이 보유한 기갑차량을 300대로 추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보로네지 전선군의 정보참모처가 추정한 것에 따르면 이것 조차 세배 이상 과장된 수치였다. 어째서 독일군의 기갑전력을 300대로 추정한 것인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제5근위전차군의 보고서에서 제16차량화보병사단과 제17기갑사단, 무장친위대 비킹 사단을 언급한 것은 이 추정치에 신뢰도를 부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소련군의 야전군 단위 사령부는 확고하게 정해진 업무 절차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포로를 잡거나 문서를 노획하지 못할 경우 인접 부대의 정면에 한두개의 적군 사단이 출현했다는 정보는 그냥 추정하여 짐작할 뿐이었다.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는 물론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부나 다른 어떤 부대도 쿠르스크에서 방어전을 전개하는 동안 독일군이 투입했다고 추정된 위에서 언급한 부대들의 존재를 객관적인 방법을 통해 검증하려 하지 않았다. 보로네지 전선군의 무전 감청 부대는 제16차량화보병사단의 통신소가 전선군의 담당구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을 한번 포착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이 정보는 확실하게 입증되지 못했다. 사실 제16차량화보병사단의 지휘부가 7월 12일 이후 보로네지 전선군의 담당구역에 사단의 투입을 준비하기 위해 이 지역을 실제로 방문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면서 적군의 계획은 변경되었다. 그래서 위에서 언급한 독일군 3개 사단의 출현은 그저 추정으로 짐작할 뿐이었다.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도 이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프로호롭카 전투의 규모를 과장하기 위해서 보고서에는 그대로 포함시켰다. 이 사실은 로트미스트로프가 제5근위전차군이 상대한 부대에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과 제11기갑사단도 있다고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로트미스트로프가 의도적으로 신화를 만들려고 한 것이 원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제5근위전차군의 “전투작전 개요”라는 보고서로 돌아가서 이 보고서에서 제5근위전차군이 보유하고 있었던 전차를 몇대라고 기록했는지 살펴보자.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는 “700~800대의 기갑차량을 가지고” 독일 기갑부대에 맞섰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이 보고서에서는 “제5근위전차군과 배속받은 전차군단(제2전차군단과 제2근위전차군단)은 793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17)  하지만 예하 부대의 보고서에 있는 내용을 정리해 보면 수치가 조금 달라진다. 가동 가능한 전차만 808대가 있었던 것이다.18)  하지만 보고서 작성자를 비판할 필요는 없다. 이 정도의 오류는 사소한 것이며 수리를 받고 전열에 복귀한 차량의 숫자를 포함하지 못한 것이 원인으로 생각된다.


이에 따라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가 ‘포착한’ 800여대의 독일 전차에 이와 거의 동일한 규모의 소련 전차(793대)를 합한 다음, 다시 여기에서 7월 12일 오전 남쪽에서 진격해오는 독일 제3기갑군단을 저지하기 위해 차출된 전차 100대를 제외하면 이 보고서에서 언급한 1,500대라는 수치를 얻을 수 있다. 동시에 중요한 문제를 하나 지적할 필요가 있다. 만약  흐루쇼프가 보고서에 포함시킨,  보로네지 전선군 정보참모처가 집계한 통계를 따른다면 18~20km 떨어진 프로호롭카 일대의 두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거의 1,000대의 전차가 격돌한 것이 된다. 그런데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가 집계한 통계에서는 총 1,500대에 달하는 전차가 훗날 프로호롭카의 전차전장으로 불리게 되는 프로호롭카 열차역 남서쪽의, 전차가 기동하기 힘든 골짜기로 분리된 좁은 지역(5×12km)에서 격돌했다고 되어있다.


이렇게 해서 프호로브카 전투에 투입된 기갑차량의 숫자를 다르게 추산하는 두 가지의 이야기가 만들어 진 것이다. 이것을 각각 “전선군의 주장”과 “전차군의 주장”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전선군의 주장”이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서술되었고 비교적 현실에 가까운 반면 “전차군의 주장”이 만들어진 이유는 명확하지가 않다. 어째서 제5전차군 사령부는 전투가 벌어진 뒤 한달에 걸쳐서 전투의 규모를 과장하고 그 좁은 장소에 그토록 황당한 숫자의 전차가 투입되었다고 한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프로호롭카 전투가 벌어지고 난 직후의 상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로네지 전선군 예하의 부대들은 1943년 7월 12일 반격을 가했지만 명령 받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게다가 ‘충격부대’인 로트미스트로프의 제5근위전차군은 대략 10~11시간의 전투만으로 전투이 투입한 차량의 50%를 잃어버렸다. 1943년 7월 16일 방어전투가 종결될 무렵 제5근위전차군은 실질적으로 모든 전투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태였다. 보유하고 있었던 전차와 자주포 중에서 334대가 완전히 격파되어 전장에 널려있었고 200여대는 여전히 수리 중이었다.19) 당중앙위원회 비서인 말렌코프가Гео́ргий Максимилиа́нович Маленко́в 이끄는 조사단이 이 엄청난 피해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파견되었다. 조사단의 조사는 2주간에 걸쳐 진행되었고 그 결과는 스탈린에게 보고되었다. 그리고 제5근위전차군 사령관을 직위해제해서 군법회의에 회부해야 하느냐를 두고 문제가 제기되었다. 7월 말까지 로트미스트로프의 운명은 풍전등화였으나 총참모장 바실레프스키 원수의 노력으로 스탈린의 분노는 가라앉았으며 1943년 8월 말 로트미스트로프는 쿠르스크 전투에서의 공적으로 1급 쿠투조프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로서 프로호롭카에서 발생한 사건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전투는 승리한 것이 되어야 했으며 피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말아야 했던 것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야 제5근위전차군의 ‘전투작전의 개요’라는 보고서가 쓰여졌다. 이 보고서는 두 개의 판본이 있다. 1943년 8월에 먼저 붉은군대 전차 및 기계화부대 총국Управление командующего бронетанковыми и механизированными войсками 에 제출된 선행보고서가 있다. 그리고 1943년 9월 30일에 최종본이 승인받았다. 여기서 살펴봐야 할 문제는 두 개의 판본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느냐는 것이다. 선행보고서는 분량이 짧다. 이 보고서는 일정 기간의 전투를 종료한 뒤 작성하는 전형적인 야전군 단위 제대의 보고서이다. 이러한 보고서의 목적은 전투 경험을 공유하고 상급사령부에 부대의 전투 능력을 향상시기키 위한 제안을 하는데 있다. 동시에 이러한 보고서는 해당 사령부가 그들이 지휘하는 부대(그리고 사령부 그 자체)를 상급사령부의 눈에 들도록 만들고 결과가 어쨌든 간에 전투 중에 범한 오류와 실패에 ‘연막을 치는’ 기회를 만들었다.(이미 끝난 전투는 현재 진행되는 전투에는 영향을 끼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제5근위전차군이 작성한 ‘전투작전의 개요’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았다. 로트미스트로프도 다른 지휘관들과 마찬가지로 전투 보고서를 통해 프로호롭카에서 행한 엄청난 손실을 낸 역습으로 생긴 부정적인 인상을 덮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로트미스트로프는 다른 소련 장군들처럼 수백대의 독일 전차를 격파하고 수많은 독일군을 죽였다는 내용을 강조하는 대신 전투가 엄청난 규모였다고 조작해서 제5근위전차군이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규모의 독일 기갑부대를 격파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 보고서에서 전차 1,500대라는 숫자를 두 번이나 강조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첫 번째 언급은 이 글의 윗부분에서 인용했으며 두 번째 언급은 완전히 뜬금없게도 이 보고서의 결론 부분에 실려있다. 이렇게 해서 제5근위전차군의 참모진은 일어났던 전투의 규모를 강조하기 위해 군에서 일반적으로 쓰는 간결한 문체를 사용하는 대신 선전선동을 하는데나 쓸법한 문장과 표현을 사용했다.


“7월 12일 대조국전쟁의 역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차전이 전개되었다. 이 전투에는 양군을 합쳐 1,500대의 전차가 투입되었다. 전차군의 예하 부대는 적에게 막대한 인력과 물자의 손실을 입히고 적이 더 진격하지 못하도록 저지했으나 일정 기간 동안 방어전투를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 ”20)


하지만 (이 점을 제외하면-역자) 이 보고서는 전반적으로 당시의 다른 보고서들과 비슷하며 노골적인 왜곡이나 자화자찬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점은 이해할 만하다. 보고서를 작성한 참모장교들에게는 이 보고서를 읽을 사람이 이 보고서에 강조하고자 하는 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전차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이것은 지휘부의 실책이 아니었다. 전투는 전무후무한 규모로 전개되었으며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전투가 전무후무한 규모였다는-역자) 개념이 (보고서의-역자) 수많은 자료에 파묻혀서는 안됐던 것이며 이러한 개념은 보고서의 시작 부터 끝까지 이어져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 소련의 역사가들은 “전선군의 주장”이 아니라  “전차군의 주장”을 바탕으로 서술하게 된 것일까? 군대의 기록관리체제는 기록 관리에 필요한 기밀성과 특별한 요구사항을 가지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한다. 보로네지 전선군 정보참모처의 보고서와 흐루쇼프의 보고서는 작전문서로서 앞서 예로 든 “증언” 또는 “요약” 보고서와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즉시 봉인되어 수십년간 군 문서보관소에 보관된다. 정보참모처의 보고서를 포함한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부의 기록은 1993년까지 기밀로 분류되어 연방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었으며 흐루쇼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서한은 2007년에야 공개되었다. 반면 제5근위전차군이 전차 및 기계화부대 총국에 제출한 “전투작전개요”는 이미 1943년 8월에 “대조국전쟁 경험 연구 및 활용부”에서 사용하고 있었다.


이 조직은 1943년에 전쟁 경험을 공유하고 연구하여 전투 수행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도록 적용하고 부대를 운용하기 위하여 야전군급 이상의 사령부에 만들어졌다. 이 조직에는 부대와 고급 사령부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각 병과의 정기간행물이나 총참모부의 전쟁경험 연구 총서, 각급 군사학교의 강의와 세미나 등에 실리는 글을 집필하는데 필요한 분석 자료를 준비하는 것을 담당하는 장교를 둘 것을 명시하고 있었다.


1943년 여름 전역의 전투는 8월 말경 마무리 되었고 전차 및 기계화부대 총국은 기갑부대들의 전투 작전을 분석한 문헌을 간행할 임무가 있었다. 그리하여 1943년 9월 10일 전차 및 기계화부대 총국 예하의 대조국전쟁 경험 연구 및 활용부 부장인 사포지코프Г. Сапожков 대령은 총참모부의 대조국전쟁 경험 연구 및 활용국 국장인 베치늬П. П. Вечный 소장에게 두 편의 글을 제출했다. 그 중 한편의 제목은 “벨고로드 축선에서 제5근위전차군이 7월에 수행한 작전”이었다. 이 글은 제5근위전차군이 주장한 내용을 기반으로 1,500대의 전차가 투입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얼마 뒤인 10월 31일에 베치늬 소장은 사포지코프 대령이 작성한 글과 (마찬가지로 제5근위전차군이 작성한 “전투작전개요”를 바탕으로) 곤차로프 대령이 작성한 “오늘날의 방어 작전에서의 전차부대”21)라는 글의 초고를 상급 사령부의 간부들을 교육하는 전차 및 기계화부대 군사 대학의 부교장에게 제출해 상급부대가 이 글을 활용하도록 했다.22)


위에서 언급한 글들은 모두 1943년 말에서 1944년 사이에 간행되었다. 비록 총참모부의 전쟁경험연구 총서는 널리 읽히는 글이 아니었고 일반 도서관에 비치되지도 않았지만 고급 사령부의 참모진을 대상으로 정리된 정보는 사실상 거의 모든 고급 간부와 장군들이 읽게 되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1,500대의 전차가 투입되었다는 정보는 기밀 정보의 제약을 넘어섰으며 이로써 신화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 신화는 소련인들을 수십년간 뿌듯하게 해 주었고 장교들을 교육하는 군사학교에서도 널리 읽히게 되었다.


총참모부나 전차 및 기계화부대 총국의 간부들이 제5근위전차군이 만든 정보를 교차 검증해서 이것이 널리 확산되는 것을 막을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럴 수가 없었다. 1943년 8월 초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의 참모 장교 중 한명이었던 체르닉 소령이 작성한 1943년 7월 7일에서 24일 까지 제5근위전차군이 수행한 작전에 대한 글 한편이 총참모부에 제출되었다. 이 글 또한 제5근위전차군의 작전을 극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고 1943년 7월 12일의 전투에 대해서도 매우 높은 평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글은 1,500대라는 황당한 숫자의 전차가 투입된 장대한 규모의 전투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았다.23)  체르닉 소령이 작성한 글은 총참모부의 대조국전쟁 경험 연구 및 활용국의 간부들을 포함한 총참모부의 간부들은 모두 열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포지코프 대령의 전차 및 기계화부대 총국 예하 대조국전쟁 경험 연구 및 활용부도 이 글의 열람을 요청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조국전쟁 경험 연구 및 활용 부서는 야전군과 전선군이 제출한 문건에 실린 통계를 교차 검증할 의무가 없었다. 각 부대가 제출하는 보고서에 있는 정보는 그냥 정확한 것으로 간주해서 글을 집필하는데 그냥 사용되었다. 하지만 일선 부대들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총참모부의 다른 부서들은 보고서를 교차 검증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사포지코프 대령과 베치늬 장군이 담당한 부서에 황당한 허풍을 걸러낼 방법이 없었던 것이 학문적 영역(기갑 및 기계화부대 학교와 같은)과 대중적인 매체를 통해 1,500대라는 전차가 투입됐다는 신화가 퍼져나간 주된 원인이었다.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는 1,500대라는 전차의 숫자가 널리 알려지고 여기 저기서 인용될 것을 예측하고 있었을까? 필자는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 이 일은 철저히 실용적인 관점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렇게 만들어낸 이야기가 유용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몇년이 지난 뒤 이 전설을 만드는데 일조한 장군들은 이 이야기를 그들이 쓴 책과 글, 그리고 각종 연설을 통해 강력하게 밀고 나가기 시작했다.


이 신화가 대중에게 퍼져나간 과정은 덜 흥미롭다. 여러편의 저작에서 소련의 대중이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1953년에 출간된 마르킨 대령의 “쿠르스크 전투Курская битва”라고 주장하고 있다.24)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대중에게 알려진 쿠르스크 전투와 프로호롭카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담은 첫번째 책은 총참모부 군사실에서 편찬한 쿠르스크전투Битва под Курск로서 이 충실한 단행본은 1945년에 출간되었다.25)  이 책은  1943년 총참모부에 제출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집필되었다. 그래서 프로호롭카 전투를 1,500대의 전차가 투입된 “전례없는 규모”였다고 평가하고 있다.26)


하지만 이 신화가 훨씬 더 많은 대중에게 퍼지도록 한 것은 마르킨 대령의 연구였다. 총참모부에서 출간한 책은 다시 출간되지 않았지만 마르킨의 책은 대규모로 두 차례나 간행되었다. 게다가 제2쇄가 출간된 1958년은 소련에서 민간 연구자들도 참여한 제2차세계대전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점이었다. 이때 소련 지도부는 처음으로 대조국전쟁에 대한 공간사를 여섯권의 단행본으로 간행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마르킨의 저작이 간행될 당시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저작은 매우 드물었고 문서보관소는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르킨의 책에 들어있는 정보는 다른 문헌과 대중매체를 통해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이 당시는 해외에서도 제2차세계대전사와 소련의 연구성과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흐루쇼프 집권기의 소련은 상대적으로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소련에서 간행된 저작들이 서방으로 소개되는데 도움이 되었으며 이 중 마르킨의 저작은 이 시점에서 1943년 여름에 전개된 사건을 상세하게 다룬 유일한 저작으로 널리 읽혔다. 서방의 독자들이 7월 12일의 전투에서 1,500대의 전차가 격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마르킨의 저작을 통해서였다.


이 전설이 더욱 더 퍼져나가는데 일조한 것은 로트미스트로프였다. 로트미스트로프는 1960년 프로호롭카 전투에서 그의 역할에 대한 회고록을 발표했다. 로트미스트로프의 책에 제5근위전차군의 “전투작전개요”가 주로 활용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트미스트로프 본인의  명성이 높았던 데다가 그는 (1960년 당시 소련의 지도자였던) 흐루쇼프 중장이 쿠르스크 전투 동안 했던 행동을 크게 칭찬하기 까지 했다. 그래서 로트미스트로프의 책은 얇은 소책자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호롭카의 신화가 더 확산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했고 로트미스트로프의 책에서 프로호롭카 전투를 다룬 부분은 다른 저작에 널리 인용되었다. 그러므로 ‘대조국전쟁사история великой отечественной войны’에서 1943년 7월 12일의 전투에 대해 자세히 서술해야 했을 때 편찬책임자가 로트미스트로프의 회고록을 인용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리고 대조국전쟁사의 집필진 중 한명이었던 콜투노프는 필자에게 로트미스트로프의 회고록이 1940년대 말과 1950년대에 간행된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총참모부의 자료에 있는 내용을 반영하고 있었으며 1,500대의 전차라는 동일한 수치를 담고 있는 점이 당시 집필진에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점은 로트미스트로프의 회고록이 정확하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1964년, 20여년간 소련의 대중 매체를 통해 널리 퍼져나간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가 만들어낸 신화는 약간 수정된 형태로 대조국전쟁사 제3권에 수록되었다. 그리하여 제5근위전차군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공인받은 자료로 취급되게 되었다. 대조국전쟁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수정된 내용은 미미했다. 7월 12일의 전투는 “대조국전쟁의 역사에서 가장 큰 규모”에서 “대조국전쟁에서 가장 처참했던 전차전”이라는 약간 겸손한 간판을 달게되었다. 하지만 1,500대의 전차가 투입되었다는 잘못된 수치는 그대로 실렸다.27)


두번째는 로트미스트로프가 전투에 대한 평가와 규모를 과장하는 등의 미심쩍은 방법으로 스스로를 드높이는 것을 싫어했던 고위 장성들이 1960년대 부터 목소리를 함께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군부는 물론 사회에서도 존경받는 인물 들이었으며 이들의 의견은 무시하기 힘들었다. 예를들어 소연방 원수 주코프는 프로호롭카 전투는 그 규모에도 불구하고 부차적인 것이었으며 로트미스트로프의 노력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므로 로트미스트로프는 좀 더 겸손해 질 필요가 있다고 썼다.28)


로트미스트로프는 그의 동료들이 불만을 품고 있다는 점과 이들의 비판이 받아들여지는 점을 알아채고는 1963년 부터 프로호롭카 전투에 투입된 전차의 숫자를 1,500대에서 1,200대로 줄이는 방식으로 비난을 완화해 보려 했다. 로트미스트로프는 군사사저널военно-исторический журнал 편집장과의 면담에서 프로호롭카 남서쪽에서 전개된 전투에 제5근위전차군이 투입했던 전차의 숫자를 800대에서 500대로 줄였다. 하지만 로트미스트로프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독일군이 700대의 전차를 투입했으며 이를 직접 상대한 제5근위전차군의 제1제대는 500대를 조금 넘는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29)  그리하여 프로호롭카 남서쪽에서는 1,500대가 아니라 1,200대의 전차가 격돌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제5근위전차군이 1943년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양측이 1,600대의 전차를 투입했으며 제5근위전차군은 이 중 100대를 좌익인 프로호롭카 남쪽에 투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머지 300대의 전차는 어떻게 된 것인가?


로트미스트로프는 이미 널리 퍼진 이야기와 상충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새로운 전설을 만들어냈다. 이에 따르면 “제5근위전차군의 제2제대와 예비대는 양 측면에 가해지는 적의 위협을 소멸하기 위하여 동원되었다.” 즉 로트미스트로프는 300대의 전차를 제5근위전차군의 우익(프로호롭카 역 북쪽의 프숄강 너머)으로 보내버렸다. 실제로 7월 12일에 234대의 전차가 양익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 번째, 이러한 이동은 제5근위전차군의 “전투작전개요”에 서술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00대의 전차가 프로호롭카 남서쪽의 전투에서 그대로 격돌했다고 서술하는 점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두 번째, 로트미스트로프가 이 인터뷰에서 한 설명에 동의한다면 300대의 전차가 우익에 투입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전투작전개요”에서 7월 12일 저녁 이 지구에 투입된 2개 여단은 92대의 전차만 보유하고 있었다는 서술과 상충된다.30)  그렇다면 나머지 200대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프로호롭카 전투의 규모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자료들은 비밀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로트미스트로프는 복잡한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로트미스트로프는 체면을 구기지 않고도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갔고 다른 사람이 그의 주장에 반박할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이 때문에 ‘대조국전쟁사’ 3권이 출간된 1964년 이후 복잡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각종 문헌과 매체에서 로트미스트로프가 군사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말한 1,200대라는 수치를 인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공식 역사서인 대조국전쟁사에서는 1,500대의 전차가 격돌했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무시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1966년 설립된 군사사연구소의 수뇌부는 프로호롭카의 신화를 ‘업데이트’ 하는 것을 추천했다. 달리 말하면 두개의 수치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군사사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던 콜투노프가 이 골치아픈 문제를 해결하는 임무를 맡았다.


콜투노프는  군사사연구소장 솔로브예프와 함께 집필해서 1970년에 출간한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새로운 책에서 두개의 이야기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고자 했다. 콜투노프는 ‘전투작전개요’에서 명시하고 있는 700대의 전차로 구성된 독일군의 기갑집단을 두 지역으로 나눠서 배치했다. 이것은 남서쪽에서 500대의 전차를 가지고 공격해온 독일 제2SS기갑군단과 200대의 전차를 가지고 남쪽에서 진격해 온 제3기갑군단의 전차를 합한 숫자였다. 또한 콜투노프는 제48기갑군단도 프로호롭카 전투에 투입되었다는 주장은 무시했다. 또한 제5근위전차군의 우익에 수백대의 전차가 투입되었다는 이야기도 제외했다. 이렇게 해서 로트미스트로프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분노를 식힐 수 있었다. 그리고 콜투노프는 제5근위전차군이 보유했던 가동가능한 전차의 숫자(793대)는 고치지 않았다. 대신 700대의 전차가 프로호롭카역 남서쪽의 ‘전차 전장’에 투입되었으며 100대의 전차가 프로호롭카역 남쪽에서 제3기갑군단을 상대했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콜투노프의 방식은 로트미스트로프가 불만을 가지게 했지만 콜투노프가 책의 마지막 부분에 넣은 구절은 그런 불편한 심기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프로호롭카 남서쪽에서는 양측의  전차와 자주포 1,200대가 격돌했으며 프로호롭카 남쪽에서는 300대가 격돌했다. 그러므로 두 전장에 투입된 숫자를 합하면 총 1,500여대의 기갑차량이 프로호롭카 남서쪽과 남쪽의 전투에서 격돌한 것이다.”31)


소련의 “고위층”은 이 책을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이 책이 출간되면서 1,500대와 1,200대라는 숫자는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진실로 여겨져 온’ 신화가 완성되고 오늘날 까지도 러시아의 여려 연구와 출판물에 일부 반영되는 ‘수정된’ 이야기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주)
1) 예를들어 N.F. Naidenov, U neznakomogo poselka [At an unknown village], p. 69 (Belgorod:
State Military-Historical Museum ‘Prokhorovskoe pole’, 2006)를 참고하라.
2) Ibid., p. 7.
3) 이 부대들은 기갑사단으로 편제되고 장비되었지만 공식적으로 기갑척탄병, 또는 차량화사단으로 불렸다.
4) TsAMO RF, F.203, Op.2843, D.452, L.95.
5) N. Zetterling and A. Frankson, Kursk 1943: A Statistical Analysis, London, Portland, Frank Gass, 2000, Tables A6.4 – A6.10.
6) 흐루쇼프의 보고서는 Voenno-istoricheskii zhurnal [Vizh], 9 (2007), p. 27.에 실려있다.
7) V.N. Zamulin, Zasekrechennaia Kurskaia bitva [The Classified Kursk battle], Moscow, Iauza -
EKSMO, 2008, p. 770.
8) TsAMO RF, F. 5 gv. TA, Op. 4948, D.19, L.7
9) TsAMO RF, F. 5 gv. TA, Op. 4948, D. 19, L. 5.
10) TsAMO RF, F.203, Op.2843, D.461, L.65.
11) Ibid.
12) Zetterling and Frankson, Kursk 1943, Tables A6.7–A6.9.
13) TsAMO RF, F.203, Op.2843, D.461, L.62
14) Ibid., L.63.
15) TsAMO RF, F.426, Op. 10765, D.13, L.10.
16) Zetterling and Frankson, Kursk 1943, A6.7.
17) TsAMO RF, F.5 gv. TA, Op.4948, D.19, L.6
18) V. Zamulin, Demolishing the Myth. The Tank Battle at Prokhorovka, Kursk 1943: An Operational Narrative, Solihull, UK, Helion & Company, 2011, Table 21.
19) Ibid., Table 28.
20) TsAMO RF, F.5 gv. TA, Op.4948, D.19, L.20.
21) TsAMO RF, F.3416, Op.1, D.16, L.36
22) TsAMO RF, F.3416, Op.1, D.16, L.1.
23) TsAMO RF, F.5 gv. TA, Op. 4948, D.51, L.1-27.
24) I.I. Markin, Kurskaia bitva [Kursk battle], Moscow, Voenizdat, 1953.
25) N.M. Zamiatin, P.S. Boldyrev, F.D. Vorob’ev, N.F. Artem’ev, and I.V. Parot’kin, Bitva pod Kurskom: Kratkii ocherk [The Battle of Kursk: A Concise Study], Moscow, Voenizdat, 1945.
26) Ibid., p. 20.
27) Istoriia Velikoi Otechestvennoi voiny [History of the Great Patriotic War], Volume 3, Moscow,
Voenizdat, 1964, p. 271.
28) G.K. Zhukov, Vospominaniia i razmyshleniia [Recollections and reflections], Vol. 3, Moscow,
Voenizdat, 1964, p. 271.
29) ‘Rasskazyvaiut komandarmy’ [‘Army commanders speak’] Voenno-istoricheskii zhurnal, 7 (1963),
p. 77.
30) TsAMO RF, F.5 gv. TA, Op.4948, D.19, L.9.
31) G.A. Koltunov and B.G. Sokolov, Kurskaia bitva [Kursk battle], Moscow, Voenizdat, 1970, p. 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