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13일 목요일

[번역글] 영국 해군은 전간기에 쇠퇴했던 것인가?

몇달 전에 The RUSI Journal 159권 4호에 실린 Joseph A. Maiolo의 Did the Royal Navy Decline between the Two World Wars?를 읽고 흥미로운 관점이라고 생각해서 번역을 하겠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제서야 번역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해군에 대해서는 아는게 많지 않아 특별히 덧붙일 이야기는 없습니다만 전간기 영국의 가상 적국에 대한 서술이 부족한 점만 제외하면 괜찮은 글 같습니다.




영국 해군은 전간기에 쇠퇴했던 것인가?

Joseph A. Maiolo


비교적 최근까지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전간기에 영국 해군이 쇠퇴한 것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단호하게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1)  영국 해군은 제1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하여 독일의 대양함대와 잠수함대를 무찔렀다. 그리고 전투력과 명성에 대해 말하자면, 세계의 어떤 해군도 영국 해군에 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영국 해군의 좋은 시절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영국 정부는 전쟁이 끝난 뒤 국방비 보다 사회 복지에 더 많은 지출을 하려고 했다. 즉 영국 해군의 쇠퇴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1919년의 파리 평화회담과 국제연맹의 등장으로 평화가 지속될 것이고 군축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한 영국 정부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영국 해군의 규모를 영국의 안보 상황에 맞추지 않고 군축 회의의 합의 결과에 맞추었다. 전후 영국 정부가 영국 해군의 우위를 지켜내지 못한 것은 영국 해군 수뇌부의 실책과 맞물려 더욱 악화되었다. 게다가 영국 해군 수뇌부는 새로운 사상과 신기술을 싫어했고 위협에 대처하는 태도도 안이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쇠퇴를 주목한 역사학계의 경향은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생겨났는데, 이러한 학설은 영국의 전 세계에 대한 영향력 감퇴와 전후 영국 경제의 상대적인 쇠퇴의 원인을 설명하고자 했다. 영국 해군은 국력의 주요한 척도였기 때문에 영국의 쇠퇴를 연구하는 학파가 여기에 주목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2) 영국 해군의 쇠퇴했다거나 정체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는 흥미롭긴 하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3) 존 페리스John Ferris, 크리스토퍼 벨Christopher Bell, 데이빗 이거튼David Edgerton, 그리고 본 필자의 최신 연구는 영국 해군이 그 훌륭한 전통을 이어가며 탁월한 기술로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도 그 위용을 유지했음을 증명하였다. 영국 해군은 영국의 안보를 위해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군비 통제를 활용했으며 기만을 통해 경쟁국들의 건함 계획에 영향을 끼쳤다. 

영국 해군의 쇠퇴를 주장하는 학설에서는 1914년 이전의 10년간을 ‘팍스 브래타니카’의 종언으로 서술한다. 영국 해군은 1906년 세계 최초의 단일 구경 주포 전함인 HMS 드레드노트를 건조하여 독일 해군이 촉발한 건함 경쟁에서 승기를 잡았다. 12인치 주포와 강력한 터빈엔진을 장비한 22,000톤의 드레드노트와 그 후속 전함들은 기존의 전함들을 시대에 뒤떨어진 퇴물로 만들어 버렸다. 이후 계속된 건함 경쟁에서도 영국 해군은 질과 양 모두 상대를 압도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때 영국 해군은 21척의 드레드노트형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독일은 같은 종류의 전함을 13척만 보유한데 그쳤다. 이같은 격차는 독일 해군이 기지에 묶여 있는 동안 영국 해군은 독일의 해운을 봉쇄하고, 독일의 전시 경제를 옭죄어 독일 국민의 사기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1916년의 유틀란트 전투에서는 세계 1위와 2위의 함대가 격돌했지만 승패를 가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독일 해군은 결전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해 독일이 절실히 필요로 했던 영국의 해상 봉쇄 분쇄와 독일 수상함대 및 잠수함대를 통한 영국 봉쇄에 실패했기 때문에 이 전투는 영국의 전략적 승리로 끝났다.4)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 해군이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영국, 미국, 일본의 군비 경쟁이었다. 1916년 미 의회는 영국의 해상 봉쇄 가능성과 독일의 잠수함대가 미국의 이해관계를 침해할 것을 우려하여 66척의 군함을 건조하는 것을 승인했는데 여기에는 4척의 전함, 4척의 순양전함, 4척의 순양함, 20척의 구축함, 30척의 잠수함이 포함되었다. 이 전례없는 건함 계획은 다시 1917년에는 전함 10척, 순양전함 6척과 기타 지원함정을 건조하여 1925년 까지 세계 최대의 해군을 건설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5)  미해군의 팽창은 단지 영국 해군을 위축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이미 세계 3위의 해군국이었던 일본의 해군 증강을 촉발했다. 1919년 파리 평화회담에서 있었던 미국과 영국간의 해군력 균형에 관한 회담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듬해에 영국은 미국의 해군력 증강에 맞서기 위해 18인치 주포를 장비한 5만톤급의 전함과 순양전함 8척을 건조하기로 했다. 1922년에는 영국과 미국, 일본 모두가 기존의 전함을 훨씬 뛰어넘는 화력과 방어력을 갖춘 16인치에서 18인치 주포를 장비한 4~5만톤 급의 전함 건조를 추진하고 있었다.6) 

하지만 영국은 미국이 전력을 다해 함대를 건설할 경우 건함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재정적, 공업적 기반이 없었다. 1920~21년에 열린 워싱턴 회의에서 영국측은 현명하게도 미국에게 조약상의 평등한 지위라는 상징성을 양보하는 대신 미국이 건함 경쟁에 나서지 못하도록 유도했다. 워싱턴 해군조약에서는 영국, 미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해군의 전함 및 항공모함의 총톤수를 5:5:3:1.75:1로 정했다. 하지만 한 미해군 제독이 씁슬하게 토로했듯이 문서상의 동등함이 실전에서의 동등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과 일본은 조약을 이행하기 위해서 새로 건조하는 전함을 폐기 처분하거나 취소해야 했지만 영국은 기존의 구형 전함을 폐기하는 것으로 그쳤다. 영국 해군은 1920년대에 전함 배수량에서 미해군 보다 54,000톤의 우위를 가지고 있었고 가장 유력한 가상적인 일본 해군에 대해서는 279,130톤의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워싱턴 조약에서는 미해군과 일본 해군의 16인치급 전함에 대응할 수 있도록 영국 해군이 두 척의 16인치급 전함을 건조할 수 있게 했는데, 이렇게 해서 건조된 넬슨과 로드니는 세계대전을 통해 얻은 전훈을 반영한 함포, 기뢰, 어뢰 방어 기술을 적용한 전함이었다. 그리고 조약에서는 각 함선의 성능에 제약을 걸었는데, 전함의 경우 16인치 주포에 35,000톤, 순양함은 8인치 주포에 10,000톤이었다. 이렇게 해서 영국 해군성은 재무성에 더 큰 전함에 필요한 설비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과 같이 힘든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영국측에서 미국이 순양함의 총톤수를 늘리려 한 것을 저지함으로써 영국 해군은 큰 이득을 얻었다. 영국 해군은 세계 최대의 순양함대를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 있는 해군 기지를 확보했고, 보조 순양함으로 개장할 수 있는 상선을 충분히 확보함으로써 전 세계에 걸쳐 해상 봉쇄를 수행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확보했다.7) 

영국 해군이 협상을 통해 전함 배수량에서 우위를 달성하고자 노력했다는 사실을 낡은 무기 체계에 대한 집착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 말고 다른 국가들도 전함의 숫자에 해군력과 국제적인 위신이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전투 함대의 숫적 우위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적인 흥정은 영국 해군성의 주특기였다.8) 그리고 영국 해군은 전함이 항공기와 잠수함의 위협에 맞서 발전할수 있는 무기 체계라고 생각했다. 워싱턴해군군축조약에서 주요 열강들은 10년간 전함의 신규 건조를 중단하기로 했기 때문에 영국 해군은 평화로운 긴축 재정의 시기에 막대한 예산을 들여 전함을 교체하는 것을 늦출 수 있었고 동시에 새로운 설계와 건조 기술을 시험해 볼 수 있었다. 동시에 낡은 전함들의 엔진과 방어력, 사격 통제장치를 개량할 수 있었다. 영국 해군성은 새롭게 전함을 건조할 수 있는 1930년대 초반이 될 때 까지 건함 예산을 잠수함, 구축함, 항공모함, 순양함을 현대화 하는데 사용하고자 했다.

1922년 부터 1926년 사이에 영국 정부는 해군에게 같은 기간 동안 미국과 일본 해군이 건조한 군함의 총 톤수에 필적하는 규모의 신규 건조를 승인했다. 영국 해군은 순양함 전력을 성공적으로 확충했고 이로 인해 영미관계에 위기를 초래했다.9) 일본과의 전쟁을 고려해서 배수량 1만톤에 8인치 주포를 탑재한 순양함을 선호했던 미해군은 순양함 전력에 있어서도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미국 의회는 순양함 증강을 계속해서 거부했다. 영국 해군은 해상 교역로 보호를 위해서 중순양함과 6인치 주포를 탑재한 경순양함을 골고루 건조하기를 원했는데 이를 위해 미해군 보다 더 많은 순양함을 필요로 했다. 1927년에 있었던 제네바 회담에서 영국과 미국 협상단은 절충점을 찾지 못하면서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했고 영국과 미국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미의회는 영국과의 협상이 실패하자 순양함을 추가로 건조하는 것을 승인했다. 일각에서는 순양함 건조를 둘러싼 영국과 미국의 경쟁이 해양 패권을 둘러싼 양국간의 전쟁 신호라고 보기도 했지만 이것은 다소 과장된 견해였다.10) 어찌되었건 영국과 미국은 자유주의 국가로서 당시의 국제 질서로 부터 서로 이득을 얻고 있었고 국제적인 문제를 대화로 해결하는 것을 선호했다. 순양함을 둘러싼 논쟁에서 중요한 점은 영국 해군이 워싱턴 조약에 의거해 주요 경쟁 상대에 대해 유리한 점을 최대한 끌어냈다는 점과 영국 해군성이 영국 해군의 우위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에 확신을 가지게 됐다는 점이다. 

전간기의 영국 해군은 일본 해군이 적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봤는데 그 이유는 일본이 정치적인 이유, 예산상의 이유, 그리고 조직의 목표라는 측면에서 너무나도 유용했기 때문이다. 일본과의 전쟁을 상정한 계획은 영국 정부가 대규모 함대는 물론 연료와 탄약을 비축하기 위해 싱가포르의 해군 기지를 증강하도록 설득하기에 적합했다.11) 해군성은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된다면 주력함대를 싱가포르에 파견해 일본 해군이 전투에 임하도록 끌어낼 것이었다. 일본 해군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전함, 항공모함, 순양함과 기타 지원함정이 균형을 이룬 함대가 필요했다. 달리 말하자면 해군성에서 대영제국의 방위를 위해 필요한 가장 경제적인 전력 구조라 할 수 있었다. 전간기 영국 해군 전략에서 기본적으로 전제한 것은 주력 함대를 가상적의 주력 함대에 대응하기에 적절한 지점에 배치하여 영국의 대외 무역을 보호하고 적국을 해상 봉쇄하는 것 이었다. 그러므로 영국 해군은 장차 벌어질 일본과의 전쟁에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독일을 상대했던 방식으로 대영 제국을 방어할 것이었다. 

하지만 항공모함 관련 기술을 놓고 보자면 영국 해군은 캐터펄트와 어레스팅 와이어 부문에서 미해군이나 일본 해군 보다 뒤떨어진 것이 사실이었다. 그 원인은 해군본부가 새로운 장비들을 시험하도록 결정을 내리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과 영국 공군과 해군항공대의 역할에 대해 논쟁이 있었던데 있다. 하지만 영국 해군이 기술적인 진보에 거부감을 가진 보수적인 집단이었다고 서술하는 쇠퇴 신화와는 달리 영국 해군은 1918년에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인 아르거스Argus를 건조했으며 해군 본부의 입안가들은 미래의 전쟁에서 항공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에 전간기에도 항공모함 건조에 많은 예산을 투자했다. 해군항공대는 적 함대를 포착하고, 적의 항공기를 격추시키고, 적의 전함을 어뢰와 폭탄으로 타격한 뒤 아군 전함에게 끌어들여 최후의 승리를 가져올 것이었다.12) 미래의 함대전에서 최종 단계를 전함의 포격으로 마무리 한다는 영국 해군의 구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은 매우 드물었다.(예외라고 할 수 있는 사례는 두 건이 있다. 1941년 3월 영국 해군이 이탈리아 해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마타판 곶 해전과 1941년 5월의 비스마르크 격침 이었다.)13)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항공모함에서 발진하는 폭격기는 전함의 주포를 해전의 주역에서 밀어냈다. 하지만 전간기에는 미해군과 일본 해군 역시 마찬가지로 작전 교리에서 항공모함을 부차적인 위치에 놓고 있었고, 항공모함이 해전에 변화를 가져오기는 하겠지만 혁명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14) 

영국 해군이 전간기에 잠수함의 위협을 과소평가했다는 쇠퇴론자들의 주장 또한 잘못된 것이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에 영국 해군본부의 전쟁 계획과 작전 연구는 미래의 전쟁에서 적국이 영국의 해상 교통로를 차단하거나 교란시킬 가능성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있었다. 해군본부의 참모장교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적국이 영국의 해상 교통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식은 오늘날의 말하는 ‘비대칭’ 전략이라는 점을 알았다. 바로 영국 주력 함대를 피해서 영국의 민간 상선단을 격침시킬 수 있는 함정을 건조하는 것 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이 독일 해군은 영국이 해상 교통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 잠수함을 사용했고 일정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1917년에서 1918년 사이에 영국과 연합국은 호송선단 방식을 도입해 잠수함의 위협에 대처했다. 해군본부의 참모 장교들은 다음번 전쟁에서도 적국이 동일한 방식을 택하겠지만 그때에는 훨씬 더 큰 잠수함과 중순양함, 항공모함을 함게 운용하여 호송선단을 타격할 것이라고 보았다.15)  영국 외무성과 해군본부는 다른 국가들이 잠수함을 발전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외교적 수단과 기만책을 사용했다. 영국은 외교 분야에서 잠수함을 없앨 것을 제안했고 보다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다른 국가들의 잠수함 보유량에 제한을 걸려고 했다.16) 예를 들어, 프랑스 해군이 1920년대에 개발한 새로운 대형 잠수함은 영국과 프랑스의 외교 회담에서 자주 논의된 주제였다. 영국 해군 또한 미래의 전쟁에서는 적국이 대규모의 잠수함대를 준비해 놓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영국의 대잠외교에 있어서 핵심은 어떠한 적이라도 대규모의 잠수함 공세로 전쟁을 시작하는 것을 방지하는데 있었다. 전쟁이 유럽이나 극동에서 일어날 경우 영국 해군은 상선단을 호위 하기 위한 대잠용 함선을 신속히 증강시켜 적의 잠수함 위협을 무력화 시킬 대비가 되어 있었다. 

영국 해군은 대잠외교를 뒷받침 하기 위해서 영국이 소나를 발전시켜 잠수함의 위협을 완전히 해소했다는 선전을 해서 외국의 해군을 기만하려고 했다. 수중의 물체를 음향으로 탐지할 수 있는 기술을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은 1917~18년 무렵으로 이때는 해상 작전에 영향을 끼치기에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영국 해군은 전간기에 소나 개발에 대한 정보를 일급 비밀로 하면서 동시에 치밀하게 소나의 성능을 부풀린 정보를 퍼뜨렸다. 1930년대 초반 정보당국으로 부터 독일 해군이 조약을 위반하고 잠수함을 다시 건조하기 위한 실험을 시작할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자 영국 해군은 언론과 정치권을 통해 가짜 정보를 더욱 더 많이 흘렸다. 해군 본부는 1937년에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 군을 지원하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잠수함을 소나를 활용해 격침시켜 소나의 성능을 과시하는 방안을 고려하기도 했다. 기만 공작의 효과를 평가하는 것은 언제나 어렵고 평화시에 오랫동안 지속된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1939년, 2차대전 중 독일의 잠수함 공세를 총지휘한 칼 되니츠 제독은 히틀러에게 영국이 소나의 성능을 과장한 기만 전술을 구사하는 가장 큰 원인은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때 독일이 충분한 잠수함을 확보해 전면적인 잠수함 공세에 나서는 것을 저지하는데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17) 물론 영국 해군도 독일 잠수함의 위협을 잘못 평가한 측면이 있다. 영국 해군은 독일 해군이 1918년 이래로 잠수함 기술에서 어떠한 결정적인 발전도 없었다는 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되니츠가 새로운 기술 대신에 야간에 부상하여 상선단을 공격하는 것과 같은 새로운 전술을 개발해 소나를 장비한 호위 함대를 회피할 것이라고 잘못 받아들였다.18) 그렇기는 해도 영국 해군의 대잠외교와 기만책은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1939년 이후 5년간의 전쟁을 치르면서 독일군의 잠수함 공세는 천천히 강화되었고 영국 해군은 이에 맞설 대비책을 충분히 강구할 수 있었다.19)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영국 해군에 대한 도전은 급격히 증대되었다. 전세계적인 경제 및 정치 위기에 독일이 1차대전의 설욕을 꿈꾸면서 군비 경쟁을 시작함으로써 영국의 해군 정책의 근간이 크게 흔들렸다. 예를 들어 해군은 일본을 제1의 가상적으로 삼고 막대한 예산을 필요로 했는데 해군의 몫이 크게 줄어들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자 독일 공군의 폭격기는 매우 큰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1933년에서 1936년 사이에 독일의 군사력 증강이 유럽의 질서에 가한 전략적, 외교적 도전이 일본 해군 내부의 과격파와 상호작용을 일으켰다. 일본 해군 내에서는 1936년 워싱턴 조약이 만료되자 일본 해군 내에서는 총톤수를 영국 및 미국과 맞추지 못하는 이상 군비 통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20) 1934년 이후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소련은  군함 건조에 더 많은 투자를 시작했는데 이때 영국 해군은  구식 전함들을 개장하고 전체 함대의 규모를 일본 해군과 유럽 제2위의 해군을 합한 것 과 대등한 규모로 증강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 해군이 새롭게 시작된 군비 경쟁에 대처하는데 가장 큰 문제는 1930년대 초반 영국 조선업계를 강타한 위기였다.21) 

이러한 위기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사태가 맞물리면서 생긴 결과였다. 1930년 주요 해군국들은 런던에서 회담을 열고 순양함의 비율을 등을 포함한 몇가지 사안을 결정했다. 런던해군군축조약에서 영국, 미국, 일본은 1936년까지 전함의 신규 건조를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경제 상황이 정상적이었다면 1936년까지 전함 건조를 연기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 터였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해군성에서 민간 조선소와 국영 조선소에 꾸준히 계약을 발주하고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선박 건조 능력을 유지하여 낡은 전함들을 대체했을 뿐 아니라 가상적국의 공격적인 함대 건설에 맞설 대규모의 함대 증강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1930년 런던해군조약이 조인되고 얼마 있지 않아 대공황의 파도가 영국 조선업계를 휩쓸었다. 1929년에서 1935년 사이에 해군성의 신규 발주 감소와 전반적인 공업계의 침체 여파로 군함과 민간 선박 발주는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22) 비록 갑작스럽게 산박 건조량이 감소하기는 했어도 영국은 1930년대  내내 세계 최대의 조선국으로 남아 있었지만 1940년대 이전까지는 함대를 증강하기에는 부족하고 현존하는 함대를 현대화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그쳤다. 이렇게 위태로운 상황에서 군비 경쟁은 시기상조였다. 만약 일본,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소련이 1941년 이전에 총력을 다해 함대를 증강했다면 영국의 조선 능력으로는 이를 압도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해군성과 외무성은 이런 취약한 시기를 넘기기 위해서 1934~35년 사이에 영국 해군이 세계 최대의 해군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세계 각국의 해군력 증강을 제약할 새로운 국제해군조약을 추진했다. 

1936년의 새로운 해군조약의 협상 과정은 복잡했다. 해군성은 영국이 군비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기 전에 경쟁이 시작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새로운 해군조약에서 함대의 총 톤수를 제약할 것이 아니라 함종별로 주포의 구경과 톤수를 제약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얻었다. 함대의 총톤수 제약을 철폐함으로써 군비 경쟁을 억제한다는 발상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영국 해군성과 외무성은 총톤수의 비율에 국가별로 위계질서를 부여한 것이야 말로 각국 해군의 불만 요인이라는데 합의를 보았다.23)  함대의 총톤수 비율에서 국가의 명예와 위신이라는 요인을 제외하면, 해군력의 규모에는 각 국가의 전략적 필요성과 자원의 수준에 따른 전략적 이해관계가 반영되는 것이며 여기에서 영국을 최우선 순위로 놓고 미국, 일본, 그리고 다른 국가들은 그 뒤에 놓아야 한다는 점을 인식한 것이다. 영국의 군함 건조능력이 구식 전함을 신형 전함으로 교체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하다면 영국의 입장에서는 전함의 성능이 급격히 향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군함의 함종 별로 성능의 한계를 통일하는 국제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야 말로 합리적인 것 이 아닐 수 없었다. 1930년대에 제1해군경을 지냈으며 해군 정책의 큰 틀을 만든 어니 채트필드Ernie M. Chatfield경은 해군 군비통제를 통해 “어느 한 국가가 전함의 크기와 성능에서 우위에 서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24) 

이와 같은 관점에서 1935년 6월에 히틀러가 독일의 해군력을 영국의 35% 수준으로 맞춰달라고 제안한 것을 영국 정부가 신속히 승락한 것은 합리적인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25) 영국해군의 관점에서 영독해군협정은 독일의 해군력 증강을 덜 위협적이고 지리멸렬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한 외교적 미끼였다고 할 수 있다. 독일 정부가 해군조약을 준수하여 독일 해군을 작지만 균형을 맞춘 전력으로 만든다면 영국으로서는 이것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독일 해군이 영국이 두려워 하던 비대칭 전략을 채택하는 것도 막을 수 있었다. 독일의 해군력 건설이 베르사이유조약의 제약을 받고 있었던 1920년대 후반에 독일 해군은 배수량 1만톤에 11인치 주포를 장비해 전함 보다는 빠르면서 순양함 보다는 중무장을 갖춰 영국의 해상 교통을 교란하는데 적합한 혁명적인 전함을 개발했다.26) 영독해군협정의 조항들은 포켓전함과 신형 순양함의 개발을 제약할 것 이었다. 

1936년 3월 영국, 미국, 프랑스는 제2차 런던해군군축조약에 서명하였고 이 조약은 영국 해군성이 원하던 규정들을 대부분 담고 있었다.  독일과 소련도 1937년 7월 조약에 서명함으로서 해군군비통제에 따랐다. 이탈리아는 1938년 조약에 서명했다. 영국 해군은 영국이 세계 제일의 해군국으로 남아있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기 위하여 1937년 대규모의 전함 건조계획을 발표하고 다섯척의 킹조지5세급 전함의 기공을 시작했다. 1930년대 초반 영국의 조선업계는 위축되어 있었지만 이제 영국 해군은 새롭게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고 노동력도 증가했다. 1928년 부터 1941년 까지 신규 건조한 물량으로 영국은 미국과 일본을 포함한 다른 열강의 해군력을 상회할 수 있었다. 영국 해군은 전반적으로 1백만톤의 새 군함을 획득했지만 미국은 70만톤, 일본은 60만톤에 그쳤다.27)  즉, 가상적과 우방국의 해군력을 능가하는 군함을 건조하고 자국의 전략적 목적에 맞춰 해군군비통제를 유도한 국가를 쇠퇴했다고 서술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겠다. 

영국 해군의 계획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5년간의 평화가 필요했다. 이때문에 제1해군경이자 참모총장위원회Chiefs of Staff committee 위원장이었던 채트필드 제독은 네빌 체임벌린 수상의 대독유화정책을 지지했던 것이었다.28)  해군성은 너무 이른 시기에 독일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대형 군함을 건조할 예산이 호송선단을 호위할 군함을 건조하는데 전용되거나 제1차 세계대전때 처럼 육군과 공군으로 돌려질 수 있으며 미국과 일본의 군함 건조를 촉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해군성은 영국과 미국, 일본이 보조를 맞추는 한 일본은 군축협상을 준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29) 영국 해군과 미해군은 일본을 건함 경쟁에서 압도할 수 있으며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1938년 3월, 일본 정부가 새로운 군함 건설 계획에 대한 자료를 공개하지 않겠다고 하자 제2차 런던해군군축조약 조인국들은 전함의 성능 기준을 배수량 35,000톤에서 40,000톤으로, 주포 구경은 15인치에서 16인치로 상향하기로 했다. 영국과 미국 정보당국은 일본이 새로 건조하는 전함이 이정도 수준일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측은 배수량 70,000톤에 18인치 주포를 갖춘 첫번째 전함을 기공한 상태였다.30) 영국 해군성은 영국 조선소의 건조 능력의 한계 때문에 40,000톤급의 전함을 건조하기로 결정했다.31) 
 
영국 해군이 배수량 40,000톤에 16인치 주포를 장비한 라이온급 전함의 건조를 시작할 무렵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해군성의 예상대로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해군의 우선순위는 장기적인 함대 건설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에서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당장 필요한 것을 갖추는데 돌아갔다. 전쟁 초기에 영국 해군은 소중한 전함을 독일의 잠수함과 일본군의 폭격기에 잃어버리는 등 많은 패배와 재앙을 겪었다. 하지만 싸우는 군대의 질적인 요소는 그 군대가 고난을 이겨내는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 이 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해군의 성과는 특히 독일이 프랑스와 노르웨이를 정복해 영국 해군이 전쟁 이전에 구상한 해상전 수행 계획을 뒤틀어 놓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놀라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영국 해군은 1939~40년에 독일과 이탈리아의 수상함대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으며 비시 프랑스의 해군을 무력화 했고 독일의 잠수함 공세를 막아내는 동시에 히틀러가 영국 침공 계획을 단념하게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다. 영국 해군이 대서양과 지중해를 장악함으로써 추축국에 맞설 연합이 결성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1945년 이후의 세대의 역사가들은 제2차세계대전 중 영국 해군의 업적에 대해서는 칭송했지만 전간기의 영국 해군에 대해서는 혹독하게 비판했는데 그 이유는 전쟁 초기 패배의 원인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간기 영국 해군의 역사를 단지 불운한 막간극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전간기의 영국 해군을 당시의 환경을 고려해 바라본다면 전간기의 역사가 불가피한 쇠퇴의 시기가 아니라 수많은 난제에 직면해 탁월한 기량과 대담한 용기를 발휘한 시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석

1) 이에 관한 고전적인 연구로는 Paul Kennedy, The Rise And Fall of British Naval Mastery (London: Macmillan, 1984), pp. 267–98과  Stephen Roskill, Naval Policy Between the Wars, 2 vols. (London: Collins, 1968/76)가 있다. 
2) Gordon Martel, ‘The Meaning of Power: Rethinking the Decline and Fall of Great Britain’, International History Review (Vol. 13, No. 4, November 1991), pp. 662–94. 
3) 영국의 쇠퇴를 주장하는 학설에 대한 가장 최근의 반론으로는 David Edgerton, Warfare State: Britain, 1919–197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가 있다. 
4) Matthew S Seligmann, The Royal Navy and the German Threat 1901–1914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Paul G Halpern, A Naval History of World War I (London: UCL Press, 1994). 
5) William J Williams, ‘Josephus Daniels and the US Navy’s Shipbuilding Program during World War I’, Journal of Military History (Vol. 60, No. 1, 1996), pp. 7–38. 
6) John Jordan, Warships After Washington: The Development of the Five Major Fleets 1922–1930 (Barnsley: Seaforth Publishing, 2011), pp. 1–24. 
7) John Ferris, ‘“It Is Our Business in the Navy to Command the Seas”: The Last Decade of British Maritime Supremacy, 1919–1929’, in Keith Neilson and Gregory C Kennedy (eds),Far Flung Lines: Studies in Imperial Defence in Honour of Donald Mackenzie Schurman (London: Frank Cass, 1997), pp. 129–34. 
8) Colin S Gray, The Leverage of Sea Power: Strategic Advantage of Navies in Major Wars (New York, NY: The Free Press, 1992). 
9) Ferris, ‘“It Is Our Business in the Navy to Command the Seas”’, pp. 129–34. 
10) Christopher M Bell, ‘Thinking the Unthinkable: British and American Naval Strategies for an Anglo–American War, 1918–1931’, International History Review (Vol. 19, No. 4, 1997), pp. 789–808. 
11) Christopher M Bell, The Royal Navy, Seapower and Strategy between the Wars (Basingstoke: Macmillan, 2000), pp. 59–98. 
12) Geoffrey Till, Air Power and the Royal Navy, 1914–1945 (London: Jane’s, 1979). 
13) Duncan Redford, A History of the Royal Navy: World War II (London: I. B. Tauris, 2014), pp. 102–08,133–54. 
14) Geoffrey Till, ‘Adopting the Aircraft Carrier: The British, American and Japanese Case Studies’, in Alan R Millett and Williamson Murray (eds), Military Innovation in the Interwar Period(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pp. 191–226. 
15) Joseph A Maiolo, The Royal Navy and Nazi Germany, 1933–1939 (Basingstoke: Macmillan, 1998), pp. 63–86. 
16) David Henry, ‘British Submarine Policy, 1918–39’, in Brian Ranft (ed.), Technological Change and British Naval Policy, 1860–1939 (London: Hodder & Stoughton, 1977), pp. 81–163. 
17) Joseph A Maiolo, ‘Deception and Intelligence Failure: Anglo–German Preparations for U-Boat Warfare’, Intelligence and National Security (Vol. 11, No. 1, 1996), pp. 32–58. 
18) Joseph A Maiolo, ‘“I Believe the Hun is Cheating”: British Admiralty Technical Intelligence and the German Navy, 1936–39’, Intelligence and National Security (Vol. 11, No.1, 1996), pp.32–58. 
19) Marc Milner, ‘The Battle of the Atlantic’,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Vol. 13, No. 1, 1990), pp. 45–66. 
20) Sadao Asada, From Mahan to Pearl Harbor: The Imperial Japanese Navy and the United States (Annapolis, MD: Naval Institute Press, 2006), pp. 99–157. 
21) Maiolo, The Royal Navy and Nazi Germany, 1933–1939, pp. 133–38. 
22) Ferris, ‘“It Is Our Business in the Navy to Command the Seas’”, pp. 76–95; Jon T Sumida, ‘British Naval Procurement and Technological Change, 1919–39’, in Phillips P O’Brien (ed.), Technology and Naval Combat in the Twentieth Century and Beyond (London: Frank Cass, 2001), pp. 128–47. 
23) Maiolo, The Royal Navy and Nazi Germany, 1933–1939, pp. 15–19. 
24) Ibid., pp. 1–19. 
25) Ibid., pp. 19–62. 
26) Jost Dülffer, Weimar, Hitler, und die Marine: Reichspolitik und Flottenbau, 1920 bis 1939 (Düsseldorf: Droste Verlag, 1973), pp. 109–30. 
27) Edgerton, Warfare State, pp. 26–33. 
28) Maiolo, The Royal Navy and Nazi Germany, 1933–1939, pp. 138–58. 
29) Stephen E Pelz, Race to Pearl Harbor: The Failure of the Second London Naval Conference and the Onset of World War II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74), pp. 149–64. 
30) Malcolm Muir, ‘Rearming in a Vacuum: United States Navy Intelligence and the Japanese Capital Ship Threat, 1936–45’, Journal of Military History (Vol. 54, No. 4, 1990), pp. 473–85; Maiolo, The Royal Navy and Nazi Germany, 1933–1939, pp. 133–58. 
31) David K Brown, Nelson to Vanguard: Warship Design and Development, 1923–1935 (London: Chatham Publishing, 2000), pp. 35–37.

2014년 10월 19일 일요일

1963년 9월 20일 김종필이 Farleigh Dickinson 대학에서 한 연설

지난번에 이야기 했었던 김종필의 연설문 한개를 번역했습니다. 읽어보시면 박정희의 『국가와 혁명과 나』의 축약본 같다는 느낌도 받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미국 쪽 반응이 어땠는지는 아직 확인할 길이 없는데 나중에 확인할 기회가 생긴다면 재미있을 것 같군요.


사마티노Peter Sammartino 총장님, 존경하는 여러 교수님, 그리고 학생 여러분.

이곳과 같은 명문 대학에서 “신생 민주국가의 리더쉽Leadership in the Newly Developing Democratic Countries”에 관한 저의 짧은 생각을 말씀드릴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크나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학자가 아니며 더구나 정치인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짧은 시간에 이같이 중요한 문제를 충분히 말씀드릴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미국은 20세기 중반 이래로 자유세계 전체를 지도하는 국가가 됐습니다. 오늘날 자유세계의 운명은 미국에 달려있기 때문에, 자유세계의 미래는 바로 여러분, 미국 학생들의 리더쉽에 달려있다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저 뿐만 아니라 자유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경험했던 과거의 역사와 현재 처해있는 상황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미국 청년 학생들의 성향과 포부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여러분이 세계에 더 나은 미래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저와 같이 보잘것 없는 학생이 이곳에 모이신 훌륭한 분 들 앞에 서게 된 것 입니다.

지구상에 인류가 출현한 것은 대략 50만년 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이 긴 역사를 거치면서 인류는 성쇠를 거듭하면서 자연선택과 적자생존, 그리고 진화라는 불변의 법칙에 따라 현재의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렇지만 인류의 역사는 민족 집단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실제 인류 역사에서는 한 종족이 다른 종족에게 적개심을 품은 것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Nevertheless, the history of humanity is the history of national races, and it is a reality of world history that antagonism of one race to another has played a principal part.)

오늘날 우리는 민족 집단의 상대적인 가치가 개발-저개발, 문명-야만, 풍요-빈곤과 같은 단어에 의해 명확하게 구분되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이같은 현상적인 차이는 50만년에 걸친 인류 역사에 작용한 진화의 법칙에 따른 결과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차이가 지난 수 세기 동안 있었던 진보적인 종족과 보수적인 종족 사이에 있었던 불가피한 차이로 부터 발생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사의 발전은 어떠한 형태도 없는 불안정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특정한 경향을 가진 규칙적인 법칙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리고 역사적인 현상의 필수적인 요인들은 절대로 우연적인 지위가 아니라 항상 필연적인 지위에 있다.” 19세기를 유럽 국가들이 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 반식민지로 만든 제국주의 시대라고 칭한다면,  20세기는 아시아 국가들이 식민 지배자들의 압제를 떨쳐내고 자주독립을 향해 나아가는 민족주의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 입니다. 오랫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으며 착취당하는 운명에 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후진국들이 설사 민족주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수용하는데 그친다 하더라도, 이들 국가들이 민족주의 체제로 전환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할 것 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원인과 그 영향의 연쇄작용입니다. 지금 시작된 원인은 수십년 뒤, 또는 수백년 뒤에 반드시 영향을 끼치게 될 것 입니다. 그리고 어떤 원인의 상대적인 평가는 후손 세대의 행운 혹은 불운에 따라 매겨질 것 입니다. 현재의 후진성의 씨앗이 수세기 전에 뿌려진 것이라고 한다면, 민족주의와 자주에 대한 자각이 후진국에서 유독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본질적으로 역사적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1945년에 제2차세계대전은 자유세계와 공산진영간의 냉전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정세는 오늘날 까지도 이렇게 지속되고 있습니다. 국제 공산당은 후진국의 민족주의로 인한 이점을 능숙하게 활용하고 있으며, 특히 후진국을 반미적인 배타주의로 이끌어 이들 국가의 앞날에 혼란을 야기하고,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합리적인 민족주의 마저도 위험하고 사악한 것으로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점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자유세계 국가간의 국제적인 협조 체계를 더욱 교란할 수 있습니다.

학생 여러분.

역사는 한 민족의 생존은 궁극적으로 그 민족의 책임이며 이와 같은 특성은 어떠한 환경에서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올바르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민족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각으로 강화된 민족의 자주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을 가지고 진보하는, 그리고 “어느 한 민족”이 가지고 있는 날카로운 자의식, 즉 배타적이거나 봉쇄적이지 않으며 유아론에 매몰되지 않고 굴종적이지 않으면서 국제 협력이라는 추세에 따르는  합리적인 민족주의  없이 후진국이 존속하고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미래에 자유 세계를 이끌어 나갈 학생 여러분에게 구하고자 합니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국가가 직면하는 문제는 상대적으로 특별한 문제가 없습니다. 후진국의 경우에는 그 국가가 낙후되어 있을 수록 불만이 많고 요구 사항이 많아집니다. 정치적, 경제적인 불안정으로 인한 불만이 커져서 폭발하기 직전에 이르고, 종종 상충되기도 하는 사안을 동시에 해결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요구사항은 복잡하고 대처하기 어려울 정도가 됩니다. 후진적인 민주국가의 세기말적인 비극은 이들 국가가 수많은 요구사항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 것일까요?

오늘날의 또 다른 특징은 대부분의 후진국가는 사실상 그 주권이 강대국에 의해 제약받고 있다는 것 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어느 정도는 피치 못할 과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개별 민족의 민족주의는 강대국의 성장에 따라 사그라 들었지만 본질적으로는 강대국들도 자국민들을 자국의 이해관계와 융성을 기반으로 하는 민족주의라는 국가적 규범으로 결속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을 통해 강대국들은 국가 단위에 기반한 지역 내 공영권을 만들어 확대해 나간 것 입니다.

학생 여러분.

비참한 상황에 처해있는 민주주의 국가가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저의 조국 대한민국입니다. 한민족은 4세기에서 5세기에는 만주의 대부분을 영역으로 할 정도로 강성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병합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어떤 민족이라도 흥망성쇠의 과정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째서 용맹하고 진취적이었던 한민족이 퇴보하여 5천년 역사동안 지켜온 영토를 일본의 식민지로 내주게 된 것일까요? 우리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14세기 말 부터 20세기 초 까지 한반도를 5백년 동안 통치한 왕조는 이씨 왕조였습니다.

유럽에서는 14세기 말 부터 15세기 사이에 르네상스가 일어났습니다. 이 시대는 봉건사회가 쇠퇴하고 귀족과 교회의 권위가 떨어지면서 도시와 시민계급이 발흥하면서 절대주의 국민 국가가 건설되거나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이때는 자유롭고 인본주의적인 문화를 갈망하던 때였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이씨왕조는 사대와 퇴보의 원인이었던 유교를 국교로 삼았습니다. 유교를 국가적인 이상으로 삼으면서 봉건적인 사회 제도에 기반한 유교적 관료제를 구축하여 오늘날의 후진성을 낳은 씨앗을 뿌린 것 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5백년 동안 유교를 유일한 이상으로 숭상했습니다. 유교는 비과학적인 관념론으로 안일한 삶을 살면서 무의미한 허세, 목청만 높을 뿐 아무런 성과도 없는 분노로 긴 시간을 낭비했을 뿐 이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해서 후손들에게 도덕적인 나약함 뿐만 아니라 문치주의와 국민을 분열시키는 무자비한 당파싸움이라는 비극의 씨앗을 뿌렸고, 이같은 사악한 근원은 오늘날 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는 서글픈 유산이 된 것 입니다.(Thus they planted for their posterity not only the root of moral weakness, but also the calamity of the literarit and the ruthless factional strife that divided the people, with the result that these evil roots have been handed down to this date as a sad national legacy.)

학생 여러분.

저는 앞서 선진국과 후진국의 결정적인 차이는 지난 수 세기 동안 발생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유럽인들은 르네상스 이래로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을 흘려가며, 그리고 혼란과 혁명의 소용돌이와 전쟁, 무참한 비극에 직면하여 시행착오를 거쳐 문제를 하나 하나 해결하면서 오늘날의 민주주의적인 제도, 번영과 자유를 이룩한 것 입니다.

열강이 세계를 식민지로 분할하고 있던 시점에서 공허한 담론과, 고식, 지배층의 당파싸움, 퇴행적인 사대과 쇄국에 빠져있던 한국이 민족주의를 자각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새롭게 발흥한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We may see clearly here that it was by no means accidental that Korea, immersed in empty arguments, temporizing, aristocratic factional strife, retrogressive subservience and isolation, finally fell, without even being conscious of nationalism, as the colony of then emerging Japan in the era which the Powers were dividing the world into colonies.)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36년간 받은 뒤 연합군이 일본을 무찌른 1945년에서야 일본의 압제로 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불행은 해방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은 인위적인 분단으로 인해서 더욱 더 마비되고 말았습니다. 1910년 이래 한민족의 염원은 일본으로 부터의 독립이었습니다. 하지만 1945년 부터는 한가지 절실한 염원이 추가되었습니다. 바로 민족의 통일 입니다. 하지만 신께서는 한민족에게 한가지 시련을 더 안겨 주셨습니다. 1950년 북한 괴뢰정권과 중국 공산당의 붉은군대가 무방비 상태의 대한민국을 기습적으로 침략했습니다. 한국인이 한국인을 죽이는 동족상잔으로 한국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공산당의 침략으로 2백만명에 달하는 한국인 뿐만 아니라 10만명에 달하는 UN군도 희생되었습니다. 수만명에 달하는 여러분의 선배, 친구, 일가친척이 한국이라는 외국 땅에 자유의 수호자로서 잠들어 있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미국이 자유세계를 수호하겠다는  엄숙하고 단호한 선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먼 미래에 이르기까지 미국민이 한국민과 변치않는 우정과 상호신뢰 속에 살아갈 것이라는 생생한 증언입니다.

학생여러분.

저는 지금까지 민족주의가 후진국의 발전을 위한 정신적인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후진성의 원인이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한 국가의 생존은 궁극적으로 그 국가의 책임이라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후진국이 후진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국가의 국민들이 “나의 조국”이라는 확고한 인식을 가지고 미래를 내다보고 정신적인 기반을 만들어줄 합리적인 민족주의를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구에서 수입된 일반적인 정치적 관념에서는 이와 같은 민족주의는 성공할 수 없으며 대개는 혼란만을 낳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1945년 부터 16년 동안 한국에서는 자유민주주의가 시련을 겪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에 잘 맞지 않는 서구에서 받아들인 그대로의 자유민주주의를 시행하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정치는 정당간의 투쟁의 장이 되었고, 경제는 파탄이 났으며, 사회는 무법천지가 되었고, 자유는 방종과 혼란으로 대체되었습니다.(Namely, we put it into practice as it is practiced in the West, which did not really suit Korea. The consequence is that politics became partisan strife, the economy went bankrupt, society turned lawless, freedom was replaced by license and disorder.) 이 때문에 1960년과 1961년에 두 차례의 혁명이 일어났던 것 입니다. 되돌아보면 이같은 역사는 한국에 민족주의적인 자각과 전통적인 이데올로기가 부족하고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 대한민국 전체가 불굴의 의지, 인내심과 희망, 그리고 과거 우리 조상들의 과오를 진정으로 바로잡고자 하는 마음으로, 합리적이고 올바른 민족주의의 기초위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굳건히 재건하고자 분투하고 있습니다. 선진국에서 밟아왔던 과정을 따르기만 한다면 올바른 민주주의가 언제 어디에서건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생각은 모든 필수조건, 특히 경제적인 뒷받침을 먼저 마련할 수 없다면 민주주의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바꿔야 할 것 입니다.(The concept that a sane democracy will suceed anywhere and under any circumstances if the process followed in the developed countries is repeated should be replaced by the logic that a democracy will forfeit its universality unless all the prerequisities, particularly the economic underpinning, can be met beforhand.)

저는 황금률을 교조적으로 따르거나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이데올로기와 학설은 버려야 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현실에 적합한 양립적이고 유연한 민주주의를 독립적으로 개별 국가의 상황에 맞춰 실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진국의 다양한 민주체제가 수세기에 걸친 시행착오를 거쳐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충분한 경제적 토대를 갖춤으로써 완성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혀 다른 경로를 밟고 있는 국가들이 선진국과 동일한 민주주의를 그저 받아들이거나 흉내내는 방식으로 실현할 수 없다는 점은 명확한 것 입니다.

한 국가가 오랜 경험과 실험을 거쳐 민주주의를 국가에 맞추고, 이를 적절히 소화해서 받아들여 자국의 고유한 것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잘못된 것 입니까? 모든 곳에서 기적과 횡재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건설된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후진국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후진국들은 역사적인 배경과 오늘날의 현실간의 차이, 경제적인 궁핍함과 국제 정세에서 기인하는 보이는 압력과 보이지 않는 압력을 극복하면서 신념과 지혜를 가지고 국가를 높은 목표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강력한 “지도력”을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At any rate, they are in acute need of a strong “leadership” which can surmount the contradiction between historical background and present reality, their nation’s economic destitution and visible and invisible pressure of an international nature, and yet can guide their nations towards a lofty objective with conviction and wisdom.)

저는 20세기 정치 환경의 특징적 현상으로서 강력한 정부와 지도자의 출현, 그리고 그에 따르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제시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국가가 여러가지 방식으로 자국을 보호 하고 자국의 위상을 드높이는 것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또한 개인의 자유와 정부의 권위는 국가의 국내외적인 활동을 통해 나타낼 수 있는 것 입니다.

선진 민주국가들은 자국의 “지도력”을 현저히 강화시켰으며, 의회정치로 인해 발생하는 원심효과를 상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화무쌍한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강력한 지도력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민주주의 국가가 후진성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강력한 지도력을 강조해야 한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 입니다.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선진 민주주의 국가와 국민의 문화적 수준이 높은 곳 에서는 여론에 따르는 통치가 가능할 수 도 있을 것 입니다. 하지만 민주국가의 지도자는 스스로의 신념과 이상을 바탕으로 대중 여론을 이끌어가고 국민의 가슴속에 희망과 의욕, 용기를 불어넣어야 합니다. 후진국에서는 국민이 일상의 궁핍함 때문에 민주주의를 “골칫거리”로 여깁니다. 그래서 후진 민주국가의 지도자는 국민이 민주주의 참된 가치에 감사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후진 민주국가의 지도자는 민족정신을 북돋고 진보적인 국가로 나가는 길로 국민을 이끌어서 정치에 신물이 난 국민을 부흥 시켜야 합니다. 후진 민주국가의 지도자는 후진성의 모순에서 기인하는 국민의 불만을 합리적이고 올바른 방향으로 해소하여 국력을 신장시켜야 합니다. 저는 뚜렷한 목표를 제시하고 국민이 이에 따르는 것이야 말로 후진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력의 본질이라고 봅니다. 후진 민주주의 국가의 발전에 있어서 올바른 행정 기구의 수립은 시급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것의 성패 여부 또한 대부분 지도자와 그의 지도력에 달려있음은 자명한 것 입니다. “국가”의 운명이 개인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행운을 바라지 않고  근면하게 노력하고, 미래를 바라보면서 현재의 상황을 견디고, 과거를 딛고서 긍정적인 미래로 나가려 노력하는 진정한 “지도력”이 후진국에 필요하다는 점을 거듭해서 이야기 할 필요가 없을 것 입니다.

이제 제 두서없는 이야기를 마칠 때가 되었습니다.

미래가 없는 국가는 그저 비극적이라 하겠습니다. 세계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인류의 행복은 단지 강대국들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개발도상국들 스스로의 발전과 노력이 기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현실이 될 수 없을 것 입니다.

미래의 열쇠를 쥐고 있는 존경하는 학생 여러분. 수억명의 자유인이 여러분에게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있으며 하루하루의 비극과 빈곤을 견디며 밝은 미래를 고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제 이야기를 마치면서, 이 기회를 빌어 대한민국과 한국민의 독립과 통일, 자유를 위해 항상 아낌없이 헤아릴수 없는 신실한 도움을 주신 미국민들께 한국 속담을 인용하여 진심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그 한국 속담은 이렇습니다. “덕을 베푼 사람은 떠나도 덕은 남는다.”

감사합니다.

“Address of Ambassador Chong Pil Kim, of the Republic of Korea at Farleigh Dickinson University, Rutherford, New Jersey, September 20, 1963”, James A. Van Fleet Papers Box 70/Folder 9 1961-1962, 마샬재단


2014년 9월 29일 월요일

[번역글] 쿠르스크 전투: 새로운 발견들

날림번역 하나 나갑니다. 이 글은 러시아의 유명한 군사사가 발레리 자물린이 2012년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5-3호에 기고한 “The Battle of Kursk: New Findings”이라는 글입니다. 쿠르스크 돌출부 남쪽의 방어를 담당한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관 바투틴에 대해 높게 평가하는 글 인데 쿠르스크 전투 당시 소련군 전술제대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번역했던 같은 필자의 “프로호롭카: 신화의 기원과 전개과정”도 함께 읽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쿠르스크 전투: 새로운 발견들

필자: 발레리 자물린
영문번역: 개리 딕슨Gary Dickson 

쿠르스크 전투의 초기 5일간은 소련에 있어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정확히 말해 이 시점 부터 전세가 소련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러시아 역사학계는 이 시기의 중요성에 상응하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특히 소련군 최고사령부의 실수로 인해 가장 극적이고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던 보로네지 전선군의 방어선에 전개된 사건에 대해서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독일군의 주공이 오룔 방면에서 쿠르스크 축선으로 가해 질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실제로 독일군의 주공은 보로네지 전선군이 방어하고 있던 벨고로드 방면에서 왔다. 많은 병력이 쿠르스크 돌출부 북쪽을 방어하는데 배치되었기 때문에 보로네지 전선군은 충분한 예비대를 확보할 수 없었다. 예비대의 부족으로 보로네지 전선군은 비극적인 결과를 불러온 전술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수많은 인명 피해와 특히 전차와 같은 장비를 대량으로 상실하여 전투의 결과에 까지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연구자들은 비록 일부 타당한 면이 없지는 않으나, 전선군 사령관인 바투틴이 조급하게, 그리고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는 비판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러한 비판 중 가장 많은 것이 1943년 7월 6에서 8일 사이에 프로호롭카와 오보얀 축선으로 돌파해 온 적을 고립시키기 위해 일련의 반격을 결정한 일이다. 최근 러시아연방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ЦЕНТРАЛЬНЫЙ АРХИВ МИНИСТЕРСТВА ОБОРОНЫ에서는 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한 소련군 부대의 작전통신내용과 전투보고서를 대량으로 공개하였다. 이러한 사료에 힘입어 연구자들은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관의 리더쉽을 새로운 방식으로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바투틴과 그 예하의 야전군 사령관들이 주고 받은 전문을 읽어본다면 바투틴이 초기의 수일간 작전의 전개 과정과 적군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를 매우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바투틴과 그의 참모진은 세심하게 계획을 세우고, 정확한 예측을 하고, 상황의 전개에 맞춘 결정을 내렸다. 바투틴 장군은 대규모의 전략 제대를 지휘하는데 필요한 기술에 통달했으며, 적군이 어떻게 움직일지 이해하여 적의 행동을 정확히 예측하였다.  

바투틴은 7월 5일이 끝나갈 무렵에는 독일 남부집단군 사령관의 목표를 파악하여 그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하였다. 바투틴은 주로 동부전선의 남부지역의 상황을 파악한 것과 그의 직관력, 전선군의 작전을 매일 분석한 것에 기반하여 평가를 내렸다. 독일 남부집단군의 주공 축선에 배치된 제6근위군과 제1전차군의 방어 구역의 전황, 그리고 가용한 전선군 예비대의 규모는 바투틴의 계획과 결단에 특별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 보로네지 전선군은 적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예측하기는 했으나 불행히도 적의 움직임을 매번 저지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바투틴에게 돌리는 것은 불공정한 처사이다. 왜냐하면 전투의 결과는 바투틴 뿐만 아니라 다른 요소에 의해서도 지대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독일군을 격퇴하기 위한 계획은 수개월에 걸쳐 수립되었지만 쿠르스크 전투 초기의 이틀간은 계획대로 작전이 전개되지 못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가 지휘하는 남부집단군의 기갑부대들은 치스챠코프 중장이 지휘하는 제6근위군이 수많은 장애물과 야전축성을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구축한 두개의 방어선을 돌파해 버렸다.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부는 독일군의 신속한 돌파에 비상이 걸렸다. 독일군은 고작 18시간 만에 제1방어선을 돌파했고 제2방어선은 더 빨리 뚫어버린 것이었다. 전투는 바투틴이 예측한 대로 전개되었지만 바투틴은 자신의 판단력을 확신할 수가 없었고 복잡한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 한차례의 강력한 반격으로 상황을 회복하고자 했다. 독일군은 주도권을 쥐었고 바투틴은 침착할 수가 없었다. 바투틴은 상황을 호전시키고 적의 의지를 꺾기 위해 필사적으로 대책을 강구했다. 7월 6일 부터 8일까지 몇 개의 반격 계획을 세웠다가 취소했다. 바투틴이 이렇게 침착함을 잃어버린 까닭은 전선의 상황이 심각했다는 점 외에도 바투틴 개인의 성격과 일처리 방식에도 있었다. 그리고 바투틴은 몇몇 야전군 사령관을 포함한 예하 지휘관들의 교육 수준이 낮은데다 현대의 전장에서 대규모 부대를 운용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을 믿을 수 가 없었다.1) 

기밀해제된 문서들을 살펴보면 보로네지 전선군은 방어작전 초기 단계에서 반격을 실시할 때 마다 준비가 부실했으며,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서두르는 경향이 있었고, 예하 부대들의 능력, 특히 전차부대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반격계획 수립은 각 야전군 사령부가 담당했다. 전선군 사령부는 일반명령과 임무만을 하달한 뒤 나머지 계획 수립 과정은 야전군 사령부에 일임하였다. 하지만 야전군 단위의 지휘관과 참모진의 훈련수준은 다양한 병과를 조율해야 하는 높은 수준의 계획을 수립하는데 충분하지가 못했다. 

다양한 병과를 조율하는 것은 전쟁 기간 내내 붉은군대의 심각한 문제점이었다. (제일선의 모든 야전군을 포함한) 야전군 단위에서는 특히 전차를 어떻게 운용해야 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야전군 단위의 장교들은 기갑 전술에 대한 지식이 일천했고, 전차라는 무기의 능력에 대해 잘 몰랐으며, 전차 부대의 훈련 수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야전군 사령부의 기갑참모진2)은 규모가 작고, 훈련이 부실한데다 책임질 수 있는 권한이 부족했기 때문에 야전군 사령관의 결심에 이렇다 할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야전군 사령부에 배속된 핵심 간부들은 전차부대를 지휘하는데 필요한 경험을 쌓지 못했기 때문에 전차 부대를 운용하는 계획을 마치 보병 부대를 운용하는 것 처럼 수립했다. 야전군 사령부의 참모들은 기갑 작전에 적합한 지형이라던가 항공 지원을 제공하는 것과 같은 중요한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으며 독일 전차의 성능적인 우세라던가 아군 전차 부대의 능력 같은 것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1943년에 소련군의 독립중전차연대(전차 21대)의 화력은 독일군의 전차 중대 정도에 불과했으며, 전차여단의 화력은 독일군의 전차대도 보다 못한 수준이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장교단의 훈련 수준 문제에 더하여 반격에 참여할 야전군간의 조율이 전선군 사령부를 통해 이루어 졌다는 점도 있다. 이같은 방식은 특히 지상군에 항공지원을 제공하거나 공격부대의 전면에 있는 적의 거점을 파괴하는데 시간이 걸리게 했다. 

보로네지 전선군의 기갑참모처3)는 이런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전선군 기갑참모처는 반격 명령을 내릴때 기갑 작전에 대해 전문적인 조언을 하달해야 했다. 하지만 보로네지 전선군 기갑참모인 슈테브뇨프Андрей Дмитриевич Штевнёв  중장은 쿠르스크 전투가 일어나기 겨우 일주일 전에 임명되어 그의 업무에 적응할 시간이 없었다. 이유가 어쨌건 간에 슈테브뇨프와 그의 참모진은 반격시 전차군단과 전차군을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전문적인 조언을 해 주지 못했다. 그대신 이들은 기술적인 조언과 명령 이행 사항만을 담당하고 작전적인 문제는 전선군 작전참모처에 일임하고 전차군단과 야전군의 협동작전 문제는 개별 군단장이 알아서하도록 방기하였다. 기갑참모들은 전투 초기 부터 기갑부대의 작전과 적의 전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분석한 뒤 그 결과를 직속 상관에게 보고해야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공개된 문헌들을 살펴보면 보로네지 전선군의 기갑참모처는 나태하고 안일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심지어 바투틴 본인 조차도 기갑 작전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다. 이러한 사실은 7월 6일로 예정하고 계획되었다가 그 전날 밤 스탈린에 의해 취소된 제1전차군의 반격을 입안하는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그리고 문제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바투틴은 자제력을 잃고 당황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7월 6일 오전에 제40군과 제6근위군을 투입하는 새로운 반격 계획을 입안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투틴은 소련군이 아직 강력한 전력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방어전을 치르며 소모하기 보다는 두개의 강력한 집단을 편성해 독일 남부집단군의 주력부대인 제4기갑군의 양 측익에 공격을 가해 독일군이 공격을 멈추고 방어로 전환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7월 6일 시점에서 이렇게 복잡한 작전을 실시한다는 것은 비현실 적이었다.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제40군은 독일군의 공격에 직접 맞서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반격을 계획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제6근위군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제6근위군 사령부와 예하 부대들은 우세한 적에 맞서 전선을 유지하는데 전력을 쏟고 있었다. 많은 수의 참모장교들과 장성들은 예하부대를 이끌고 직접 방어전투를 지휘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방어전을 수행하는 와중에 반격까지 하라는 것은 부담만 지우고 이들의 주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만드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반격을 계획하는데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행위였다. 

7월 6일의 전투 경과를 보면 소총병군단의 사령부들, 특히 제6근위군 예하 군단의 사령부들이  맡은 책임을 이행할 능력이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실제로 군단사령부들은 단지 야전군사령부와 사단본부 사이에서 명령문과 보고를 전달하는 역할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연락 업무 마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군단사령부의 고위 간부들은 이렇다 할 결단력이나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그중에서 핵심은 군단사령부들이 예하 부대들과 보조를 맞출 시간이 부족했다는데 있다. 제69군 예하의 소총병군단 군단장들은 7월 2일에야 전선에 도착해 7월 4일 부터 군단을 지휘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제7근위군과 제40군 예하의 소총병군단 사령부의 편성 명령은 독일군이 공세를 개시한 직후에 내려졌다는 것이었다. 이론적으로는 자신의 임무를 잘 파악하고 있는 장교라 할 지라도 역동적이고 격렬한 실제 전투 상황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군단 사령부의 장교들은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대응하고, 예하 부대에 대한 통제를 신속히 회복하고, 상급 부대 및 인접 부대들과 접촉을 유지하고, 심지어 미리 준비된 방어선에서 조차 충분한 방어 태세를 갖추는 임무 등을 하지 못했다. 

1943년 초에 붉은군대가 소총병군단을 대규모로 편성하면서 군단 수준에 걸맞는 참모 업무에 숙달된 고위 장교와 장성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런 부족 현상은 붉은 군대 전반에 만연해 있었으며 보로네지 전선군도 마찬가지였다. 제40군 참모장 바튜냐Александр Григорьевич батюня 소장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군단사령부의 참모진은 국방인민위원회 예비로 있는 지휘관들로 채워져 있다. 이들 지휘관의 대다수는 실전 경험이 크게 부족하다. 이들은 군사 교육을 받기는 했으나 군단사령부 참모로서의 실제 업무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다. 이들이 실전을 통해 이론적인 지식을 바로 잡는데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전투 초기에 군단사령부는 예하 부대를 너무 졸렬하게 지휘했기 때문에 야전군사령부가 강제로 군단사령부의 임무를 모두 대신해야 했다.4) 

이로인해 방어 작전의 첫 며칠동안은 각 부대들이 필요한 수준의 상호 협력과 효율성을 발휘하기가 힘들었다. 

야전군사령부에서는 군단의 임무 상당수를 직접 맡아서 군단사령부의 부담을 완화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자 또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이제는 야전군사령부 참모진의 업무가 과도해지고 통신망에는 과부하가 걸렸다. 그래서 야전군사령부가 명령을 내리는데 걸리는 시간이 길어지고 명령을 이행하는데 까지 걸리는 시간도 늘어났으며 그나마 명령이 충분히 이행되지도 못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문들은 야전군사령부들이 명령과 지시사항이 이행되고 있는지 바르게 파악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또 다른 문제점은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직위에 있는 고급 장교들의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치스챠코프는 물론 바투틴 까지도 제6근위군의 상황에 대해 계속 우려했다. 7월 7일 보로네지전선군 군사위원회는 제23소총병군단장 바흐로메프Павел Прокопьевич Вахрамеев 소장이 맡은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직위해임하였다. 바흐로메프가 해임된 이유 중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군율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과 지나치게 음주를 했다는 것 이었다. 제22근위소총병군단 참모장 나카트긴 대령은 군단사령부의 업무를 효과적으로 조율하려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하급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8월 25일에 제6근위군 사령관 명의로 내려진 명령 제0125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제22근위소총병군단이 전투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근위 대령 나가트킨은 참모장으로서의 임무를 전혀 수행하지 못했으며, 예하 사단 본부와의 연락도 취하지 못하여 전방 부대의 배치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군단 참모진은 전투에서 군단장을 보좌할 수가 없었다.”5) 

이것은 제6근위군의 지휘를 복잡하게 만든 여러 요인 중 하나였다.  이 중에서 가장 문제였던 것은 7월 6일 무장친위대 기갑군단이 프로호롭카 방면으로 진격하면서 전선의 상황이 복잡해 진 것이었다. 전 지역이 개별적인 부대 단위로 분열되어 통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졌다. 제1전차군과 함께 오보얀 축선을 방어하고 있던 몇개의 소총병사단은 치스챠코프가 코체토브카 마을에 주지휘소를 세우고 직접 지휘했다. 리포븨이 도네츠Липовый Донец 강변에서 방어를 하고 있던 몇개 사단은 부사령관 라구틴П. Ф. Лагутин 소장이 사즈노에Сажное 마을에 보조지휘소를 세우고 지휘했다. 이 두 집단은 제1전차군과 제69군의 예하 부대로 인해 단절되어 사실상 독립적으로 작전을 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두 집단을 조율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니 통신과 보급을 유지하는 문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일부 소총병사단, 예를 들어 제51근위소총병사단은 30km에 이르는 전선에 걸쳐 흩어져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제6근위군과 제1전차군이 긴밀하게 협력하여 작전을 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것은 불가능했다. 제6근위군과 제1전차군은 같은 지구에서 작전을 전개하면서 때로는 같은 참호를 쓰면서도 사단과 군단 사이는 물론 두 군사령부 간에도 효과적으로 작전을 조율하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제6근위군에 파견된 총참모부 소속의 한 장교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제1전차군은 제6근위군의 전투 구역에서 작전을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 두 야전군은 지속적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보병부대와 전차부대의 협동작전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군사령부 작전참모처에 있는 지도에는 제1전차군 예하부대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이때문에 인접 부대의 측익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있고 심지어는 무의미한 손실마저 발생하는 지경이다.”6) 

바투틴은 이러한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이에 대한 평가는 전투가 끝난 뒤에 했다. 바투틴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매우 비판적으로 평가했는데 이것은 제5근위전차군 사령관을 맡았었던 로트미스트로프의 회고록에 실려있다. “우리 사령부, 무엇보다도 나는 반격을 구상하지 말고 적의 우월한 기갑 부대를 격퇴하는 것만을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러시아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지요. “일곱번 재 본 다음 한번에 잘라라” 하지만 우리의 문제는 판단을 할 만큼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는데 있었습니다.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전개되어 정신을 가다듬을 수 조차 없었습니다. 적군은 제2방어선을 위협하고 있었고 멈추지 않고 방어선을 뚫어 버릴 것 처럼 보였습니다.”7) 

대규모의 전역이나 전투에 대해 평가할 때는 인적 요소를 고려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바투틴의 입장이 어땠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한쪽에서는 적의 강력한 기갑부대가 보로네지 전선군의 방어선을 두들기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최고사령부는 물론 스탈린이 직접 바투틴에게 그가 전선군 사령관으로서 적을 저지할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적을 저지하지 못하고 있다며 질책하고 있었다. 사실 바투틴은 이상적인 장군상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현명하고 탁월한 식견을 갖추었으며 강철과 같은 의지를 가졌다는 인상은 전쟁이 끝난 뒤 소련의 대중매체에 의해 만들어진 것 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바투틴은 매우 산만한 사람이었다. 바투틴은 언제나 그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예상하고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실수를 저지르고 미래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하며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불행히도 전선군 사령관이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다른 장군들이 실수를 저지르는 것과 비교할 수가 없었다. 수만명의 목숨과 운명이 달려있었다. 바투틴이 수년간 참모업무를 통해 얻은 경험은 그의 성격과 지휘 방식에 영향을 끼쳤다. 바투틴은 가끔 그의 참모들이 해야 할 업무 중 상당량을 직접 처리하기도 했으며 일선 부대를 직접 지휘하는 것을 무시하는 일도 있었다. 

“로코소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간혹 바투틴의 업무 방식에 놀라곤 했다. 바투틴은 지시사항이나 명령문의 문구를 직접 수정했으며 직접 전화를 걸거나 전문을 보내 야전군이나 사령부와 대화했다. 참모장은 어디에 뒀단 말인가? 나는 마을 한 구석에서 보골류고프 장군을 찾아내 그에게 어째서 전선군 사령관이 참모 업무를 직접 담당하고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보골류고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대답했다. 바투틴은 모든 업무를 직접 담당한다는 것이었다.”8) 

바투틴은 쿠르스크 전투 당시에도 거의 이렇게 업무를 처리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상황이 달랐고 바투틴을 도와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쿠르스크 전투에서 바투틴은 사실상 그를 보좌할 사람이 없었다. 전선군 군사위원회 위원 흐루쇼프나 부사령관 아파나셴코Иосиф Родионович Афанасенко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아파나셴코는 대장 계급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업무에 숙달되지 않은 상태였다. 참모장 이바노프 중장은 경험이 매우 많았지만 7월 6일에 스탈린의 명령으로 제69군 사령관을 돕기 위해 전출되었다. 물론 총참모부에 있을 당시 바투틴과 가깝게 지냈던 바실레프스키 소련방 원수는 독일군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보로네지 전선군에 필요한 예비대를 확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었겠지만 바투틴이 담당하고 있는 방대한 업무까지는 어떻게 해 줄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문제점들은 중요한 것이긴 했지만 전투 초기의 수일간 보로네지 전선군에 독일군의 공격을 어떻게 막아낼 것인지 결정하는 데에 전선군 사령관의 리더쉽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새로 발굴된 문서들은 7월 6일 바투틴이 남부집단군의 공격부대들을 격퇴하기 위해 반격을 실시하기로 결심한 것은 상황을 합리적으로 판단한 결과가 아니라 감정적으로 과잉반응한 것이었지만 그 다음인 7월 7일과 8일에 계획한 반격 준비는 바투틴에게 강요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바투틴은 보로네지 전선군의 역량이 가진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지만 최고사령부의 실수로 인해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없었다. 한편 중부전선군 사령관 로코소프스키는 바투틴과 같은 행동을 취했다. 로코소프스키는 7월 6일에 제13군과 그 우익에 인접한 제70군의 방어선에 뚫린 돌파구를 최소화 하려고 노력했다. 로코소프스키는 이것이 실패하자 즉시 전술을 바꿨다. 쿠르스크 전투를 다룬 연구에서는 이것을 로코소프스키가 군사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인용하고는 한다. 하지만 이런 편향적인 분석은 보로네지전선군과 중부전선군의 전력차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 

중부전선군의 상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자. 치타텔레 작전의 첫째날 독일 중부집단군의 돌격집단인 제9군 소속의 기갑군단들은 제13군과 제70군의 제1방어선을 돌파하여 8~12km를 진격하였다. 제13군의 제17근위소총병군단과 제2전차군(16, 19전차군단, 제11근위전차여단)은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반격을 감행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제16전차군단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며 예하의 제107전차여단만 하더라도 전차 50대 중 46대를 잃었다. 제16전차군단장 그리고레프Василий Ефимович Григорьев 소장은 공격을 중지하고 전선군 사령부에  보고했다. 전차 지원이 없어져서 본다레프Андрей Леонтьевич бондарев 중장의 제17근위소총병군단은 방어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상황을 분석한 뒤 다음과 같은 명령이 하달되었다. “전차를 전차호에 넣고 보병을 지원하기 위해 화력지원을 하라. 전차부대는 적의 보병과 경전차가 상대일 때 이들이 포격에 와해된 이후 반격을 허용한다.”9) 

로코소프스키가 이 상황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렸던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중부전선군이 보로네지 전선군에 비해 야포와 박격포와 같은 필요한 수단이 더 많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앞서 언급한 것 처럼 총참모부는 독일군의 주공이 중부전선군에 가해질 것이라고 잘못 판단했기 때문에 로코소프스키는 1,000문의 야포와 방사포를 보유한 3개 포병사단으로 편성된 제4포병군단과 같은 강력한 증원을 받은 반면 바투틴은 250대의 전차를 지원받는데 그쳤다. 이것은 불공평한 것이었다. 그결과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되기 전 보로네지 전선군은 대공포를 제외하고 4,012문의 야포와 4,539문의 박격포(82mm와 120mm)를 보유한 데 비해10) 중부전선군은 5,213문의 야포와 5,512문의 박격포를 보유하고 있었다.11) 총사령부가 잘못 판단한 것이 확실해 졌을 때 쿠르스크 돌출부 남쪽 전선에는 포병군단 대신 포병전력이 부족한 제2, 10전차군단의 2개 기동 군단이 증원됐다. 이 때문에 바투틴과 로코소프스키는 충분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들이 가진 수단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제13군 사령관은 전차를 동반한 반격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제17근위소총병군단에 제1근위포병사단, 제378대전차포연대, 제237전차연대를 지원했다. 본다레프 장군은 이같은 강력한 지원에 힘입어 전차를 반격에 투입하지 않고도 방어선을 지킬 수 있었다. 

역사책들을 보면 쿠르스크 전투의 둘째날에 총사령부의 예비대가 보로네지전선군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된 반면 중부전선군은 아무런 도움 없이 방어전을 치렀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바투틴은 중부전선군 보다 더 강력한 적의 공격에 맞서 7월 8일 오후까지 3일간에 걸쳐 보로네지전선군의 병력만 가지고 싸웠다. 남서전선군에 있던 제2전차군단이 보로네지전선군에 도착한 것은 7월 8일 오후 2시였으며, 제10전차군단은 7월 9일 오후에야 투입되었다. 제5근위군은 7월 11일 오전에야 전투에 돌입했으며, 제5근위전차군은 하루 늦은 7월 12일 오전에 투입되었다. 

적이 새로운 부대로 공격을 개시한 가장 힘든 시점에 니콜라이 페도로비치 바투틴은 그가 보유한 병력만으로 상황을 통제할 수 있었으며 방어선의 이점을 활용하여 예하 부대의 기동을 훌륭히 해냈다. 바투틴은 제한적인 전력만을 가지고 다른 어떤 상대도 아닌 유럽 최강의 군대를 상대로 싸운 것이었다.


주석 
1) 원문: низкое уровне профессиональной подготовки и оперативного кругозора... 
2) Отдел бронетанковых и механизированных войск (БТ и ТВ) 
3) управление БТ и ТВ фронта  
4) САМО РФ, ф.203, оп.2843, д.520, л.20 
5) САМО РФ, ф.1207, оп.1, д.138, л.150 
6) САМО РФ, ф.355, оп.5113, д.235, л.53 
7) Ротмистров П.А. Стальная гвардиия. М., Воениздат. 1984. С. 204 
8) К. К. Рокоссовский. Солдатский долг. М., Воениздат. 1997. с. 304–306 
9) Г. А. Колтунов, В. Г. Соловьёв. Курская битва. М., Воениздат. 1970. с. 118 
10) Ibid., p.53. 
11) Ibid., p.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