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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1월 19일 일요일

1930년대 소련군 장교의 생활 수준(번역글)

저는 서방에서 소련, 러시아군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 Roger R. Reese의 글을 가장 좋아합니다. 사회사적인 접근방법도 좋거니와 문장이 매우 쉽고 읽기 편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용도 매우 좋지요. 이 글은 Roger R. Reese, Stalin;s Reluctant Soldiers : A Social History of the Red Army, 1925-1941, p125-p127에서 발췌 번역한 글 입니다.

소련군 장교의 주거는 매우 형편없어서 붉은군대의 이미지를 실추시켰고 또 장교 모집에도 장애요인 이었다. 1차 5개년 계획이전부터 주택 문제는 군대 뿐 아니라 소련 사회의 전체적인 문제였다. 예를 들어 1931년에는 붉은군대의 장교 5만 명이 숙소를 제공 받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그나마 있는 주택이라는 것도 그 상태가 형편없었다. 심지어 고급 장교들의 관사 조차 일반 시민들의 아파트처럼 낡고 비좁았다. 20년대, 30년대, 그리고 심지어 40년대 까지도 장교들은 수준 이하의 복지에 대해 불만이었다. 일반적으로 장교들의 생활수준은 사회의 비슷한 계층의 민간인들에 비해 낮았기 때문에 소련 인민들은 기본적인 혜택도 주지 않는 조국을 지키는데 대해 관심이 낮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혁명 이전 제정 러시아의 상황이 그대로 이어지게 됐다. 알렉산드르 3세가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 부근에 주둔한 부대들을 대대적으로 서부 국경지대로 재배치 하자 번듯한 주택에서 거주하던 장교들은 서부 폴란드나 우크라이나의 가난한 농촌 촌락에 적응해야 했다. 이렇게 되자 엄청난 숫자의 장교들이 전역해 버렸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다시 반복돼 1930년대에 소련 육군이 우크라이나에 새 부대들을 편성하고 장교들을 전출 시키자 장교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주택을 지어야 했다. 그리고 더 멀고 사정이 열악한 극동 지역에서 근무할 장교를 확보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장교들은 종종 도시민들이 그랬듯 공동 주택에 거주했다. 예를 들어 1932년 “붉은별”지는 한 항공여단의 장교용 아파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장교용 아파트는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건물벽의 회반죽은 갈라져 떨어지고 있었고 문과 창문은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그리고 한 블록에 있는 세 개 동은 세면장이 없었다.” 이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한 장교는 군 소식지에 보낸 편지에서 비가 오면 아파트는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물로 엉망이 된다고 하소연할 정도였다. 그는 비가 오면 꼭대기 층에서 가장 아래층 까지 빗물이 흘러내린다고 적었다. 그리고 창문이 엉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창유리가 떨어지고 없었다. 문은 싸구려 합판으로 만들어져 찬바람이 들어왔다. 수도도 공급되지 않는 지경이었다. 1년전 겨울에 이 장교의 가족들은 그나마 관사조차 배정 받지 못해 병사들의 내무반에서 병사들과 지내야 했다. 숙소가 너무 부족해 학교의 교실까지 사용해야 할 정도였다. 장교용 주택이 난방이 안되거나 아예 안되는 것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겨울에는 건강에 직접적으로 악영향을 끼쳤다.

가족을 가진 장교들은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이 겪는 고통 때문에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우크라이나 군관구의 기혼 장교들은 두 세대가 방 두 세칸 짜리 아파트 하나를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장교들은 또 자녀들을 위한 탁아소, 유치원, 놀이터도 매우 부족하다고 하소연했다. 1930년대 초반에 레닌그라드 군관구의 많은 장교들은 관사가 부족한데다 일반 주택도 얻기가 힘들어 부대에서 퇴근하지 않고 지내는 지경이었다. 비슷한 사례를 들면 1931년에 모스크바 경비부대의 장교 1,730명은 관사를 지급 받지 못했고 또 다른 529명은 “매우 나쁜” 주택에 거주했다. 장교와 그 부인들이 불평을 많이 한 것은 애초에 생활수준에 대한 기대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군인 가족들은 일반 시민의 생활수준도 엉망이라는 점에 대해 거의 위안을 받지 못했다.

장교의 주거 수준은 장교 집단의 구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치는 요인이었다. 제 1차 5개 년 계획 실시 이전에 고학력의 젊은이들에게는 기회가 풍부했다. 많은 장교들이 군대를 제대해 다른 직장과 더 나은 생활 수준을 찾았고 아이러니 하게도 장교에 지원하는 교육수준이 낮은 집단 조차도 군대에서 교육을 받게 되면 더 나은 생활 환경을 찾기 시작했다. 사례를 하나 들면 세르게이 슈테멘코는 그가 1933년 모스크바의 차량화 및 기계화학교의 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 했다.

“나는 학교 근처인 레포르토보에 살았다. 나는 첫 해에 호스텔에서 거주했고 2년차가 되자 9제곱미터 짜리 방 한 칸을 배정해 준 뒤 키예프에 있는 내 가족들을 모스크바로 불러들였다. 내 어머니는 침대에서 주무시고 나와 아내는 바닥에서 자야 했으며 나의 어린 딸은 바로 옆의 욕조에서 재웠다. 1년 뒤 우리는 학교 부지 일부에 새 건물을 짓는데 참여했고 그곳으로 이사하자 엄청난 호사를 누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슈테멘코와 다른 장교들이 이런 생활 수준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난한 농부 출신에 낮은 교육수준을 가졌고 10대 후반이 되면 입을 하나 덜기 위해 가족에서 내몰리는 사회 계층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슈테멘코는 농업학교에 지원했다가 탈락하자 고향 친구와 함께 군에 지원했고 교육수준이 형편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교 교육 과정으로 차출됐다. 그 결과 슈테멘코는 1926년에 19세의 나이로 모스크바 포병 학교에 입교했다. 아무리 군대의 복지 수준이 낮더라도 슈테멘코가 고향에 있는 것 보다는 훨씬 나았다. 만약 그가 고향에 남았더라면 공사장의 잡부나 짐꾼, 나뭇꾼으로 지내며 공용 건물의 다락이나 국영 전당포의 구석진 방에서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 슈테멘코가 군대에 계속 남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게 슈테멘코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군대와 당은 주로 가난한 농민이나 노동자 층에서 장교를 선발했기 때문에 이런 사례는 매우 흔했다.

그러나 붉은군대만이 2차 대전 이전에 장교의 생활 수준과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육군도 역시 우수한 자질을 가진 장교를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소련과 사정이 비슷했다. 1930년대에 정부가 장교 봉급 인상과 복지 향상을 거부하자 많은 프랑스 군 장교들이 전역해 버렸다. 영국육군은 진급 적체 때문에 장교를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영국군 장교는 대위까지 진급하는데 평균 14년이 걸렸으며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하는데 6년, 소령에서 다시 중령으로 진급하는데 9년이 걸렸고 이때쯤 되면 전역을 고려해야 했다. 소련과 마찬가지로 영국도 군대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본드(Brian Bond)와 머레이(Williamson Murray)는 일반적인 영국인들은 장교의 복지수준이 2급 수준의 인력이나 바보들에게나 적당한 수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국군이 장교 충원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보고 있다. 영국, 프랑스, 소련에서 성공하는 길은 사회나 정치 방면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반면 독일군의 장교는 1차 대전 이전의 사회적 지위와 소득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크나페(Siegfried Knappe)의 연구에 따르면 1937년 기준으로 독일군의 중위는 월급만 가지고도 자동차 한대와 승마용 말 한 마리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생활 수준도 좋은 편이었다. 그 결과 독일군은 2차 대전 이전 장교를 확보하는데 하등의 어려움이 없었다.

2006년 11월 4일 토요일

Die Italiener an der Ostfront 1942/43 - Thomas Schlemmer

독일에서 쓸만한 군사사, 특히 현대 군사사 부문의 연구를 많이 내놓는 곳은 역시 연방군 산하의 MGFA 지만 그에 못지 않은 곳으로는 뮌헨의 현대사 연구소(Institu fuer Zeitgeschichte)가 있다. 물론 이외에도 다른 대학이나 일반 연구자들도 흥미있는 연구를 많이 내놓고 있으며 굳이 학술적인 연구가 아니더라도 좋은 책이 많긴 하지만 왠지 앞의 두 곳에 비하면 뭔가 하나씩은 빠졌다는 허전한 느낌이 든다.

Die Italiener an der Ostfront 1942/43는 현대사 연구소에서 지난해 10월에 출간한 책으로 제목이 바로 말해주듯 동부전선에 참전한 이탈리아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동부전선의 독일 동맹군들은 매우 흥미가 당기면서도 쓸만한 책이 가뭄에 콩나듯 소개되는 지라 돈 좀 생기는 대로 사야지 하며 벼르다가 다른 책에 우선 순위가 밀려 지난달에야 구입할 수 있었는데...

재미있는게 본문은 매우 짧고 부록이 엄청나다. 처음에 이 책을 주문할 때 이탈리아군의 작전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그렇지는 않다.

그런데 이 책의 진가가 발휘되는 부분은 바로 부록이 아니던가!

부록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독일이 이탈리아군에 파견한 연락장교의 보고서와 번역된 이탈리아측의 문헌자료로 돼 있다. 특히 이탈리아 쪽 자료는 이탈리아어라고는 하나도 모르다 보니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친절하게도 번역을 해서 실어 주고 있다. 독일군 연락장교의 보고서에는 소련군의 동계공세 당시 몇몇 사단의 작전 상황에 대해서 유익한 정보들(특히 그동안 궁금했던 동부전선의 이탈리군의 전차 운용 같은)이 많이 실려 있다.

그러나 지도가 부실한 점은 매우 유감이다. 지도는 책의 가장 끝에 작은 지도 두개가 붙어 있는데 기존의 다른 저작들에 실린 지도 보다 깔끔하게 편집은 돼 있지만 내용은 그저 그렇다. 좋은 지도가 여러장 뒷받침 됐다면 훨씬 더 멋진 책이 될 수 있었을텐데 아쉽다.

2006년 10월 21일 토요일

露西亞 國王 흐루쇼프의 兵車 無用論

케네디 4년에 노서아 국왕 흐루쇼프가 여러 신료들에게 군사를 줄여 백성의 삶을 편하게 하라 하교했다. 그리고 특히 병거가 너무 많다 하니 그 말이 다음과 같았다.

지난 전쟁에서 전차는 공격의 중핵으로, 그리고 방어의 지주로서 활약했습니다. 전차는 소화기에 대해서 무적이었고 단지 명중율이 낮은 대포만이 전차를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말기에 모든 상황이 돌변했습니다. 적은 판쩌 파우스트로 아군의 전차들을 손쉽게 격파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우리의 숫적 우세가 너무나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오늘날 대전차 로켓은 전차의 최대 사정거리인 수 킬로미터 밖에서도 전차를 격파할 수 있습니다. 전차와 자주포, 병력수송장갑차는 이제 병사들에게 덫이 될 뿐입니다. 왜 이런 상황에서 쓸데없이 전차와 장갑차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합니까? 수십억 루블이 낭비되고 있습니다.

Roger R. Reese, Red Commanders : A social history of the soviet army officer corps, 1919~1991, p190~191


결론.

병거의 왕국 노서아에 병거 무용론을 일으킨 판쩌 파우스트는 역시 위대한 병기다???

2006년 10월 16일 월요일

Die Gefangenen - Guido Knopp

귀도 크놉(Guido Knopp)의 저작들은 대부분 방송용 다큐멘터리와 함께 기획됐고 독일 제 3제국 시기를 다루고 있다. 이중 일부는 국내에도 번역된 바 있다.

Die Gefangenen은 2003년 ZDF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로 편성표를 보니 책 또한 다큐멘터리와 같은 구성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하긴, 그러고 보니 이건 크놉의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다. 어쨌건 2003년에 한 이 다큐멘터리는 아직 보지 못했으니 뭐라고 말 할건 없고 간단히 이 책을 훑어본 느낌만 적어볼까 한다.

첫 장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생포된 포로들부터 시작해 바그라티온 작전까지 동부전선에서 생포된 포로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주제는 잘 알려져 있고 다른 저작들에서도 많이 다루는지라 특별히 흥미가 당기진 않는다.
두 번째 장은 영국에 잡힌 포로들의 이야기이고 세 번째 장은 소련에 강제 이송된 민간인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강제 이송된 민간인들의 이야기는 이전에는 단편적으로 접했는데 이 책에서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네 번째 장은 포로생활치고는 팔자가 늘어졌다는 미국의 포로수용소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이 장에는 재미있는 사진이 많다.(대표적인 것이라면 역시 콜라를 마시면서 즐거워하는 독일 포로들. 코카콜라 광고에 이 사진을 써먹으면 어떨가?)
다섯번째 장은 전쟁 종결 직후 독일내의 임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들의 생고생을 다루고 있다. 이 주제는 우익 작가들이 “아이젠하워의 학살” 같은 선정적인 제목으로 즐겨 써먹는 소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프랑스에 끌려간 포로들의 이야기도 있는데 원래 유태인의 추방지로 고려됐던 마다가스카르에 독일 포로수용소가 설치됐다는 것은 꽤 아이러니하다.
마지막 장은 포로들, 특히 소련에 수용됐던 포로들의 귀환 과정을 다루고 있다. 어떻게 보면 2차 대전은 사실상 이 때 끝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전쟁으로 완전히 붕괴된 한 세대의 이야기가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장이다.

간혹 2차 대전당시 독일인들이 겪은 고난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독일은 전범국이네” 어쩌구 하는 이야기들을 신물나게 듣게 된다. 글쎄? 하지만 역사적인 고통이 어떤 한 집단의 전유물 인 것 처럼 떠드는 것 보다 더한 위선이 어디 있겠는가. 어차피 전쟁은 모든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 뿐이다. 가끔씩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여 보는 것도 정신건강엔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를 딱딱하지 않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이책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다. 오늘부터 조금씩 번역을 해 볼 생각이다.

2006년 10월 6일 금요일

공산당 서기장 = 짜르

우리의 스탈린 전하께서 1935년 대비마마를 알현했을 때의 일화

"어머니, 왜 이렇게 세게 때리시는 건가요?”

스탈린이 어머니에게 묻자 케케(스탈린 어머니의 애칭)은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너무 장해서 그런단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이쇼프, 지금 네가 하는 일이 도데체 뭐냐?”

스탈린의 초상은 전국 각지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스탈린이 어떤 사람인가는 누구라도 다 알고 있었다. 케케는 그저 자기 아들의 자랑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스탈린은 이렇게 대답했다.

“어머니. 짜르를 기억하시죠? 저는 지금 짜르와 같은 위치에 있답니다.”

케케의 소박한 대답은 너무나 웃기는 것이었다.

“그래? 성직자를 하지 않은게 천만 다행이구나!”

Edvard Radzinsky, Stalin, Anchor Books, 1996, 24p


공산당 서기장과 짜르가 같은 것이라는 것은 이미 스탈린 동지께서 교시하셨던 것이다...

2006년 8월 17일 목요일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 by John Erickson

어쩌다 보니 사정상 오랫만에 이 책을 더 읽게 됐다. 벌써부터 두꺼운 책 읽은 것이 귀찮아져 압박을 느끼던 차에 이 물건을 읽게 돼 압박이 더 심해지는 중이다.

하여튼, 이 책을 읽으면서 역시 에릭슨은 대단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냉전시기에 이 정도로 자료 조사를 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일 아닌가. 책장을 넘길 때 마다 출간된 지 40년이 넘은 책에 위압감 마저 느낀다.

당시에는 상당한 수작으로 평가 받았던 매킨토시의 저작도 세월의 압박을 견디진 못 했는데 에릭슨의 저작들은 수많은 일차 사료가 공개된 90년대 이후에도 호평을 받는 것을 보면 역시 에릭슨은 '本座'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책 뒷부분에 달린 부록들은 모르는 사람에게 유식한 척 하고 싶을 때 베껴 쓰기 딱 좋게 정리도 잘 돼 있어 나같이 게으른자에게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세월의 압박으로 중간 중간 저자가 확실치 않다고 인정한 부분도 있지만 당분간 영어권에서 2차대전 이전의 소련 군사사에 관해 이정도의 저작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물론 나의 어설픈 짐작이 맞지 않는다면 더 좋겠지만) 비교적 최근에 나온 짐케의 저작이 비싼 가격에 비해 다소 실망을 안겨 준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두꺼운 책이 모두 멋진 책은 아니지만 멋진 책 중에는 두꺼운 책이 많은 것 같다.

2006년 5월 31일 수요일

Ivan's War - Catherine Merridale

개인적으로 “러시아”라고 하면 풍기는 이미지는 뭔가 있어 보이는 나라, 문학과 예술의나라, 또는 이젠 망해버린 사회주의의 심장 등 무거운 것들이다.(사람에 따라 “헐값에 건드릴 수 있는 러시아 여자를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전반적으로 볼 때 국내에서는 아직 러시아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은 것 같다. 아무래도 냉전기간 동안 북한을 지원한 “악의 제국”이란 이미지가 강해서 일 듯 싶다.
또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보다 러시아어를 하는 사람의 숫자가 너무 적다 보니 러시아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가 미국에 비해 극히 적었다.
그 결과 2차 세계대전에서도 소련, 러시아의 희생과 기여는 평가 절하 돼 왔는데 수년 전부터 영국과 미국에서 출간된 훌륭한 독소전 관련 서적들이 출간되기 시작해 이런 인식들이 조금씩 바뀌어 가는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러시아 인’의 이야기를 알 수 있는 책들은 국내에 제대로 출간되지 않은 것 같다.

사실 내 개인적으로도 2차 대전사에 관심이 많다고 생각은 해 왔지만 정작 소련에 대해 읽은 책들은 거의 대부분 거시적인 정책, 사회구조, 혹은 특정 전투를 다룬 딱딱한 것 들 뿐 이었고 그 전쟁을 치룬 ‘인간’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해가 없었다.

Catherine Merridale의 Ivan’s War는 이런 점에서 매우 반가운 서적이다.
Ivan’s War는 책의 제목인 이반(동성애자가 아니다!!!)으로 대표되는 소련인들이 전쟁에서 겪은 이야기들을 시간의 경과에 따라 풀어 쓰고 있다.
Merridale은 수많은 참전자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 하고 기밀 해제된 문서 보관소의 일차사료들을 뒤지면서 쉽고 재미있지만 결코 가볍지는 않은 책을 써 냈다.

그리 긴 책은 아니지만 이 책은 전투, 부상, 죽음, 전장의 일상, 귀환 그리고 사랑 등 인간이 전쟁에서 겪을 수 있을 법한 이야기들을 거의 다루고 있다.

책에 나오는 소련인들(대부분 러시아인들 이지만 간혹 소수민족의 이야기도 있다)의 이야기는 전쟁 이후 공식화된 소련식의 ‘영웅’ 또는 독일이나 미국이 그리는 ‘잔혹한 야만인’과는 거리가 멀다.
소련인들 역시 다른 나라의 인간들 처럼 전투마다 공포를 느끼며 살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전쟁과 군대라는 거대한 바퀴에 깔려 으스러질 뿐이다.
소련이 붕괴되기 까지는 결코 공식적으로 언급할 수도 없었던 죄수부대 이야기나 소련 정부에 반항하는 우크라이나와 리투아니아의 농민들, 조국을 위해 희생했지만 반역자로 낙인 찍힌 전쟁포로들, 승리한 조국에서 한몫 챙겨보고자 갑자기 애국자로 돌변하는 1943년의 빨치산 등 ‘정말로 인간적인’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흔히 “러시아인의 야만성”이 원인으로 설명되는 1945년 독일의 대학살에 대한 러시아 인들의 입장도 흥미롭다.
많은 병사들이 독일에 대한 적개심과 함께 무의식적으로 경외하던 독일에 대한 승리감,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감정들은 러시아, 소련인들이 민족주의와 소련 정부의 선전과 함께 확대 재생산 됐는데 독일문화를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퇴폐적인 문화로, 소련은 사회주의로 건강한 정신을 가지게 된 사회라는 인식을 가진 병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영국이나 벨기에가 아프리카에서 학살을 자행할 때 학살대상에 대해 문화적 우월감을 가졌기 때문에 학살이 가능했던 것 처럼 소련인들도 승리를 거듭하면서 가지게 된 독일에 대한 우월감이 학살의 동인 중 하나로 작용했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전쟁이 끝난 다음의 삶을 한 장을 할애해 다루고 있다.
1945년에 귀국한 병사들은 승리한 영웅들로 환영을 받았지만 그 이후에 귀국한 병사들은 아무런 환영 없이 전쟁으로 피폐해진 조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적을 무찌르고 승리했지만 고향에 돌아와 남은 것이 집조차 없어 구덩이를 파고 생활하는 아내와 자식들 이라면, ‘조국’을 위해 희생한 상이 군인임에도 불구하고 사회 안전을 해친다는 이유로 강제로 도시에서 추방된 사람이라면 과연 그 누가 승리한 나라의 국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까?
전쟁이 끝난 뒤 우크라이나를 덮친 1946년의 대기근이 수많은 아사자를 냈다는 대목에서는 제 3자의 입장에서도 뭐라 말 할 수 없는 비참함이 느껴질 뿐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러시아인들에 대해 단순한 감정(혐오감, 경외감 등등)을 느끼기 보다는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술자리에서 거창한 ‘국가 전략’을 논하는 멍청이들이나 주석궁으로 탱크를 몰고 가자는 정신병자들을 볼 때 마다 이런 책들이 많이 번역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저자는 책 마지막 부분을 치열한 격전에 펼쳐진 프로호로브카의 박물관을 방문했던 이야기로 마무리 하고 있다.
매우 감동적이어서 그대로 인용해 본다.

나는 러시아의 격전지였던 프로호로브카 박물관의 큐레이터에게 이렇게 물어봤다. 
“참전용사들이 박물관을 찿으면 어떤 이야기를 하나요?”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분들은 말씀을 많이 하지 않으신답니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어떨 땐 그냥 서 있기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지요.”

2006년 5월 8일 월요일

샤먼의 코트(재탕)

예전에 아마존에 실린 독자들의 서평을 보고 한번 사 봐야지 하다가 귀차니즘 발동과 지름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통에 사보질 못 했는데 2주 전쯤 지하철역에서 번역판을 5,000원에 사게 됐다. 이것과 함께 만화 한국전쟁도 있었는데 탄약이 부족해 지르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다.

책의 번역은 재미있게 잘 된 것 같다. 물론 원판을 아예 못 읽어 봤으니 단정하긴 그렇지만.

이 책의 주제와 저자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A History of Pagan Europe 과 유사하다. A History of Pagan Europe이 기독교가 동진하면서 붕괴된 유럽의 전통 문화를 차례대로 보여줬다면 "샤먼의 코트"는 전통 문화를 상실하고 기독교화된 유럽이 동진하면서 붕괴된 시베리아의 전통문화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시베리아에 살던 수많은 민족들의 전통 문화는 기독교, 불교 등 많은 외래 문화의 공격을 받았다.

시베리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16세기 부터 적극적으로 동진을 시작한 러시아 세력이다.
러시아인들은 동진하면서 요새도시를 세워 주변지역을 러시아화 하고 원주민들을 복속시키면서 전통 사회를 파괴하고 덤으로 환경도 파괴했다.
원주민들도 저항했으나 대포와 총, 그리고 각종 전염병으로 무장한 러시아인들 앞에 처절하게 붕괴되어 갔다.

그러나 여러가지 공격중에 최악의 공격은 "사회주의"에 의한 것 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시베리아에 사는 사람들에게 "과학"이라는 종교를 강요했고 스탈린 체제는 사상의 강요 보다 학살을 택했다. 스탈린 보다 온건한 편 이었던 이후의 통치자들역시 전통사회를 붕괴시킨건 마찬가지였고 소련이 붕괴될 무렵에는 더이상 말살할 만한 전통 문화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 됐다.
스탈린 시기의 전통문화 말살은 중세 유럽에서 행해진 강제 기독교화와 비교하더라도 그 야만성에서 뒤떨어지지 않는 것 이었다. 사회주의를 위해 인민의 적들을 박멸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비행기에서 샤먼을 집어 던지고 총살하고 강제 노역으로 혹사시켜 죽이고...

결국 현재 남은 것은 얼마 남지 않은 박제화된 과거의 흔적 뿐이다.

책의 저자가 영국인이기 때문에 러시아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시베리아 전통문화에 대한 애정어린 시각은 독자들이 책의 내용에 빠져들게 해 준다.

전반적으로 슬픈 이야기로 일관된 슬픈 책이다. 우울할 때 읽으면 쥐약이고 기분이 들떠 있을때 읽으면 좋을 듯...

아주 멋진 책이다.

그리고 덤으로..

1. 이책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용맹한 추크치족이 중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의아해하는 중국이 추크치족에게 사절단을 보냈다.

"추크치족 이십니까?"

"그렇다."

"우리와 싸우기를 원하십니까?"

"물론 그렇다."

"중국의 인구가 10억명 이라는걸 아십니까?"

"그래?"

다시 말을 잇는 추크치족이 가로되

"그럼 너희들 모두를 어디에 묻어 주랴?"

2. 그 다음으로 재미있는(?) 이야기

"비드야 단다론"이라는 부랴트족 불교 승려는 스탈린 시절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는데 수용소에서도 다른 라마교 승려들과 수도하면서 포교도 했다고 한다. 그의 추종자 중에는 포로가 된 독일군 장교도 있었다고 한다.
장 자크 아노가 이 독일군 장교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제법 재미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