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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1월 5일 일요일

김석원 준장 재임용 소문에 대한 미국 군사고문단의 반응

김석원이라는 군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평가가 많은데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의견이 많은 것 같다. 나는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 어떻게 판단을 내려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부정적인 평가가 많은걸로 봐선 당시에도 썩 좋은 평을 받지는 못 한 것 같다.

다음 문서는 미 대사관 문서군인 RG59에 들어있는 내용으로 미 군사고문단장이 신성모 장관에게 보낸 편지다. 꽤 유명한 문서고 한국전쟁과 관련된 저작들에 자주 언급되는 것 같다. 아마도 김석원에 대한 가장 신랄한 평가가 아닐까 싶다.

1950년 3월 18일

대한민국 국방부장관 각하

본관은 최근 김석원 전 육군 준장이 복직될 가능성이 있으며 그 경우 그가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될 것이라는 정보를 접했습니다.
각하(신성모) 께서도 기억하시겠지만 저는 지난해 7월과 8월 김석원이 공금횡령과 부정행위를 저질렀으며 부패하고 공직을 남용하는데다 장교에게 필요한 윤리와 도덕적 기준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음이 적발된 데 관한 저의 견해를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이미 지적한 문제점 외에도 제가 직업군인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평가하면 김석원의 군사 과학과 전술에 대한 지식은 매우 형편없습니다. 김석원은 그가 맡은 방어책임구역의 방어 준비를 하는데 기본적인 원칙조차 이해하지 못했으며 설사 말단 초급장교라 하더라도 용납 못할 정도로 전술원칙에 대해 근본적으로 무지합니다. 저는 김석원이 전술가로서의 능력이 형편없기 때문에 만약 그가 더 책임 있는 직위를 맡게 된다면 대한민국의 안보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김석원은 도덕적으로도 해이한 인물이기 때문에 행정이나 재정을 책임지는 직위에는 결코 임명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김석원의 무능함에 대해서 더 지적하자면 우리 미국측의 관점에서 봤을때 김석원 장군은 고문단을 활용할 줄도 모르고 그럴 의사도 없었습니다. 그는 미국인 고문관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한번도 솔직하게 의논한 적이 없고 고문관의 조언을 무시했습니다. 김석원은 한국 육군본부의 명령을 종종 무시했습니다. 제가 그의 직속상관이었을 때도 김석원은 명령을 따르지 않아 저는 몇 차례나 그를 군법회의에 회부하려 했습니다.

김석원을 채병덕 소장의 후임으로 임명하는 것이 국가에 해가 되는 일이기 때문에 각하께서 이 문제를 직접 다루셨으면 합니다. 각하께서 김석원 문제를 그냥 내버려 두신다면 김석원은 참모총창과 국방부를 무시하고 직접 이 대통령에게 음모를 꾸밀 것입니다. 김석원이 재임용 된다면 그의 입지가 더 커져 각하마저도 그에게 휘둘리게 될 것입니다.

김석원은 일본 장교집단이 가진 가장 추악한 특성은 모두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갖춘 직업군인적인 미덕은 하나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건데 김석원이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될 경우 한국군과 미국 군사고문단이 계속해서 효율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심이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김석원이 고위직에 임명된다면 한국에서의 임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김석원이 참모총장에 임명된다면 저는 본국에 저의 소환을 요청할 것이고 또 제 후임을 추천하는 것도 매우 난처할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각하께서 김석원을 복직시키실 경우 저의 반응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실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한민국 육군이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각하를 직접 뵙고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각하께 저의 존경을 표하는 바입니다.

미육군 준장 W. L. 로버츠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신성모 각하께 
‘Activities of Brig Gen. Kim Suk Won’(1950. 3. 25), Enclosure 1; RG 59, Records of State Department


당시 한국군 장성 중 김석원 이상으로 미국측이 혐오한 사람은 또 누가 있으려나?

2015년 11월 8일 일요일

진천 전투 당시 김석원 사단장의 지휘(?) 방식


예전에 김석원 장군에 비판적인 미국 문서를 조금 포스팅한 일이 있는데 지나치게 미국 주장에 경도된게 아니냐는 말을 들었습니다.

김석원 준장 재임용 소문에 대한 미국 군사고문단의 반응


한국군 참전자들의 증언을 보면 김석원의 지휘능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김석원에 비판적이고 미군사고문단의 문서를 뒷받침 할 만한 증언도 존재합니다. 한국전쟁 초반 포병단 부단장이었던 김계원의 증언을 보면 김석원이 군사적 지식이 부족해 사단을 운용하는데 문제가 있었다는 미군사고문단의 평가가 아주 허무맹랑한 중상모략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을듯 합니다.

처음 곡사포를 수령한 김성 대대장은 충분한 운용의 실습도 없이 곧바로 진천지구 전투에 투입이 된 것인데 긍지를 가지고 분투하였다. 소속의 대전차포 중대장 허현(許玄) 중위는 이 전투에서 장렬하게 목숨을 잃었다. 이곳에 확인차 진천지구 OP관측소에서 오르니 사단장 김석원 대령*은 일본도를 옆에 들고 카이젤 팔자수염을 연신 만지며 참모장 최경록 중령*에게 계속해서 돌격 앞으로만 외쳤다. OP가 무엇을 하달하는 곳인 줄 모르는 것인가. 옆에서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니 측지관측이 제대로 될 수 있겠는가 가관이었다. 직전 적의 이동경로에 정확히 아군의 포탄이 떨어져야 함에도 죄 없는 동네 민가에 떨어져 화염에 싸인 집에서 놀라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오는 불쌍한 주민들의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즉시 화력지원 통제소에 뛰어가 오차의 원인을 분석하고 미군 고문관에게는 포의 운용을 점검케하여 시정하였다. 
김계원, 『The Father: 하나님의 은혜』, (SNS미디어, 2012), 300쪽

*두 사람의 실제 계급은 각각 준장, 대령입니다. 저자가 말년에 회고를 하다 보니 기억에 오류가 있었던 듯 합니다.

한국전쟁 기간 중 김석원이 유능한 지휘능력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있는데 미국쪽 자료들과 일부 한국측 증언을 보면 그에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김석원의 지휘능력에 대한 비난은 그가 지휘한 사단에 배속됐거나 거쳐간 고문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데 제3사단 선임고문관 에머리치(Rollins S. Emmerich) 중령은 김석원의 지휘능력이 형편없고 공격성이 결여된데다 고문단이 사단을 지휘하는 동안 잠이나 자고 있었다고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이 에머리치 문서는 나중에 한번 번역해 보겠습니다.

김석원이라는 군인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자료들은 평가가 극과 극을 오가는지라 상당히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2008년 12월 29일 월요일

김석원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미군사고문단의 평가

원래는 어제 올렸던 한국전쟁 이전 국군의 사단편제에 대한 글을 좀 더 보강해서 올릴 생각이었는데 재미있는 자료가 조금 더 굴러 들어와서 이 글은 다음 번에 더 보강해서 쓰려고 합니다. 그 대신 땜빵 포스팅으로 김석원 이야기나 조금 해 볼까 합니다.

예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미군사고문단장이 평가한 한국군장성들에 대한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보통 일본군 출신 장교들의 군사적 능력을 중국군 출신 장교들에 비해 더 높게 평가했습니다. 그렇지만 몇몇 예외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1사단장을 지낸 김석원 준장이었습니다.

로버츠 준장은 1950년 3월 18일 신성모에게 보낸 서한에서 김석원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혹평했습니다.


각하(신성모) 께서도 기억하시겠지만 저는 지난해 7월과 8월 김석원이 공금횡령과 부정행위를 저질렀으며 부패한데다 공직을 남용하고 장교에게 필요한 윤리와 도덕적 기준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를 자행한 데 관한 저의 견해를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이미 지적한 문제점 외에도 제가 직업군인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평가하면 김석원의 군사 과학과 전술에 대한 지식은 매우 형편없습니다. 김석원은 그가 맡은 방어책임구역의 방어 준비를 하는데 기본적인 원칙조차 이해하지 못했으며 설사 말단 초급장교라 하더라도 용납 못할 정도로 전술원칙에 대해 근본적으로 무지합니다. 저는 김석원이 전술가로서의 능력이 형편없기 때문에 만약 그가 더 책임 있는 직위를 맡게 된다면 대한민국의 안보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As you will remember, I expressed myself unequivocally on the subject of this ex-officer last July and August when his peculations, dishonesty, corruption, misuse of public office and total disregard of the ethics and moral standards required of an officer were brought to light. In addition to the deficiencies I have just cited, it was my considered opinion at the time, as a professional soldier, that his knowledge of military science and tactics was extremely limited. He had failed to grasp the basic principles of the organization of his sector for defense and exhibited a fundamental ignorance of tactical principles which I would not tolerate even in a very junior officer. I feel that his deficiencies as a tactician would, if he were placed once more in a responsible position, seriously jeopardize the security pf the Republic.

March 25, 1950, ‘Activities of Brig Gen. Kim Suk Won’, Enclosure 1; RG 59, Records of State Department

굉장한 혹평입니다. 특히 전술적 능력이 초급장교 보다 못하다고 하는 부분은 왜 저렇게 심각한 비난을 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혹평은 김석원을 옹호하는 측에서 주장하듯 김석원과 군사고문단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이 주된 원인일까요?

김석원은 1949년의 38선 충돌에서 핵심적인 지역이었던 개성 방면의 1사단장으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전쟁 이전에 그의 전술적 능력을 평가할 만한 기회가 몇 차례 있었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1949년 여름에 미군사고문단이 1사단의 방어구역을 시찰하고 김석원의 부대 운용에 대해 분석한 내용입니다.

이번 조사의 결과 현재 1사단 구역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과 방어상의 위험한 취약점이 있음이 드러났다.

a. 경계 순찰이 전무한 상태이다.

b. 현재 38선상에서 돌파되어 침범당한 지역에 전초저항선이 구축되어 있지 않다.

c. 사단 정면에 주저항선이 구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사단 주력이 북한군으로부터 공격에 노출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붕괴될 가능성도 있다.

d. 11연대가 부적절하게 투입, 배치되어 있다. 이 부대는 연대지휘소와 대대가 개성에 위치해 있는데 현재 위치에서는 개성 회랑 동쪽으로 부터의 공격에 후방이 차단될 위험성이 매우 높다. 이 연대는 개성-문산 도로의 약간 남쪽에 배치되어 있으며 개성-문산 도로를 따라 종심 깊게 배치되는 대신 연대 전체가 북쪽을 향하고 있어 배치가 잘못 되어있다. 만약 임진리의 교량이 적의 신속한 진격에 탈취될 경우 1개 연대와 여기에 배속된 포병은 고립될 것이다. 제대로 된 군대가 적용하는 올바른 부대 배치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 진다. 각 대대와 중대는 소수의 병력만 전방에 배치하고 예비대를 확보한다.; 최소한 1개 연대에는 1개 대대가, 1개 사단에는 1개 연대가 예비로 있어야 한다. 그러나 1사단은 사단 예비는 물론 연대 예비대도 전무한 상태이다. 사단장은 예비대 없이는 보다 결정적인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

e. 나머지 2개 연대 -12연대와 13연대- 도 마찬가지로 종심이 깊지 못하고 예비대가 전무한 상태로 전술적으로 불안정하게 배치되어 있다.

This investigation revealed the following deficiencies and dangerous defensive weakness in the present zone of the 1st Division.

a. Total absence of security patrolling

b. No established outpost line of resistance to present penetration and violation of the 38th degree North Parallel.

c. Absence of a main line of resistance on the Division front, thus exposing the Division’s main element to an attack and possible demoralization by North Korean Forces.

d. Improper placement and disposition of the 11th Regiment. This unit, with the Command Post and battalion located at KAESONG is, in its present position, highly vulnerable to being cut off and destroyed by a force attacking east through the KAESONG corridor. This regiment is incorrectly disposed, inasmuch as it is slightly south of KAESONG-MUNSAN road and the entire regiment is facing directly north rather than being astride the above-mentioned road and disposed in depth. If the bridges over the Im-Jin-ni River are taken by a quick thrust of the enemy, over one regiment and artillery will be cut off. Correct dispositions, as applied by all real armies, are as follows : each Battalion and Company Keeps few troops in front and each has a Reserves; at least 1 Battalion of a Regiment must be in reserve; at least 1 Regiment of a Division must be in reserve. As it is, there are no Regimental reserves nor Division reserves. Not having these, the Division Commander is unable to accomplish much decisively.

e. The two remaining Regiments – the 12th and 13th – are similarly placed in tactically-unsound position in that they are not disposed in depth and no reserves have been established.

August 1, 1949, ‘Tactical Disposition of the 1st Division, Korean Army’; RG 338, KMAG, Box 8, Brig General W. L. Roberts(Personaal Correspondence, Memorandum) 1949

일단 위의 보고서에서 지적된 것 중 가장 심각한 문제는 김석원이 ‘예비대’라는 것을 전혀 확보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비대를 확보하는 것은 부대 지휘관이라면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인데 김석원은 사단장이 되어 제대로 된 예비대 없이 사단 전 병력을 전방에 배치해 놓은 것 입니다. 초급장교 만도 못하다는 혹평이 단순한 비난이 아닌 것이죠. 전면전도 아닌 상황에 사단의 전 병력이 전방에 배치되어 방어 종심도 얕아 제대로 된 공격을 받으면 한방에 붕괴될 수 있는 위태로운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예비대도 없으니 만약 이 상태로 전면전이 발발했다면 개성-문산 지구는 순식간에 붕괴됐을 것 입니다.

김석원의 후임으로 부임한 유승렬과 백선엽은 이런 비상식적인 부대운용을 하지 않았습니다. 개전 당시 1사단은 11연대를 예비대로 확보해 놓았고 기습 공격과 전력상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선전합니다. 김석원이 하던 대로 1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면 서부전선이 일거에 붕괴되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2010년 2월 5일 금요일

황군의 정신력은 세계 최강?!?!

쇼와(昭和) 15년(1940년), 지나 전선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우고 귀국한 김석원 중좌는 어떤 잡지에 이런 글을 기고하셨더랍니다.

나는 전지에 나갓슬때 황군의 아름다운 행동이며 부상병이 엉금엉금 기여가면서 돌격해 나가든그 눈물나는 정경을 생각하면 전쟁이란 반드시 무긔로만 익이는 것이 아니라 용사들의 아름답고, 놉고, 굿센 정신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와 갓흔 정신이 투철한 우리 황군이 세계에서 제일 강한것은 당연한 리치입니다. 명치 37, 8년 일로전쟁때 탄환대신으로 2만명의 황군이 적의 진지에 뛰여드러가 성공한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 황군이 얼마나 굿센 정신을 가젓는지 아실 것 입니다.

김석원, 「軍人의 立場에서 銃後에 附託함」,『家庭之友』(1940. 1) 28호, 4~5쪽

이 시절의 정신력 드립에 대해서는 예전에도 한번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군인 뿐 아니라 식민지 지식인들도 황군의 정신력을 찬양하던 시절이죠.

김중좌께서는 정말 황군의 정신력에 감화받으셔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해방되고 1사단장을 하실 때도 육탄 10용사 같은 황군의 전통을 잇는 공격을 좋아하셨다고 하죠. 김석원 외에도 채병덕 같은 양반들도 정신력 드립을 쳐대고 있었던 걸 보면 정말 이것이야 말로 최악의 식민지 잔재인듯;;;;


잡담 하나. 위에서 인용한 글은 요즘 국립중앙도서관에 전자문서로 열람 가능하게 되어 있더군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아주 깨끗하게 스캔을 잘 해 놓아서 제가 예전에 복사했던 상태 나쁜 것은 못 보겠더군요. 전자문서들이 잘 되어 있다보니 옛날에 구닥다리 복사기로 복사한 것들 중 통째로 복사해서 제본 뜬 것이 아니면 모두 이면지로 재활용 하고 있지요.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는 이상 국립중앙도서관이 문 닫지는 않을 테니.

잡담 둘. 위의 인용문에서 *표 표시한 것은 아무래도 203고지 전투를 이야기 하는 것 같지요?

2011년 12월 4일 일요일

국무총리 두 사람의 한국전쟁 회고, 그리고 잡담 하나

강영훈 전 국무총리의 회고록은 상당히 잘 쓰여진 회고록입니다.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서 그리 많지 않은 분량을 할애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교차 검증 가능한 부분을 살펴보면 제법 정확성과 객관성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한강교 폭파에 대한 서술은 미국 군사고문단의 기술과도 제법 맞아 떨어집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객관적으로 서술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밖에도 건군기, 한국전쟁 이전 옹진반도 교전과 같은 부분의 서술도 그렇습니다. 한국전쟁과 전후 재건기 한국군에 대한 서술을 읽으면 조금 더 자세하고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내용이 풍부하고 신뢰할 만 한 자료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강영훈 전 총리는 현리전투 당시 제3군단 부군단장으로 있었습니다. 회고록에서는 164쪽에서 166쪽 까지 세쪽을 할애하고 있는데 분량이 짧아서 아쉽지만 핵심적인 이야기는 잘 짚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유재흥의 책임 보다는 육군본부의 작전 책임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점에서 중립적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만 같은 책의 김석원에 대한 서술과 비교해 본다면 저자가 상당히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려고 노력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분량이 짧아서 아쉽기는 하지만 7사단이 붕괴된 후 주보급로를 차단당해 군단 전체가 붕괴되는 과정을 상당히 잘 서술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특히 철수 과정에서 병사들이 겪은 고난에 대해서 서술하는 부분은 매우 짧지만 인상적입니다.

사족을 하나 더 덧붙이자면 강영훈의 회고록은 또 다른 전직 국무총리의 회고록과 비교가 됩니다. 노신영 전 국무총리는 소위로 임관된 뒤 한국전쟁 당시 8사단 21연대에 소속되었는데 바로 첫번째 실전을 악명높은 횡성전투에서 경험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8사단은 괴멸에 가까운 참패를 겪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번째 전투를 횡성에서 겪었다면 기억 속에 깊게 각인이 되었을 것이며 쓰고 싶은 내용도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노신영의 회고록은 이 점에서 완전히 독자의 기대를 저버립니다. 횡성전투에 대한 서술은 달랑 다섯줄에 불과합니다. 이 책을 읽지 않으신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해당 부분을 인용하자면...

1951년 2월 12일로 기억된다. 그날은 진눈깨비가 내리는 음산한 날씨였고, 그날 밤 암호는 ‘겨울비’였다. 초저녁부터 시작된 전투가 자정이 넘어서 부터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의한 공세로 일대 격전이 전개되었다. 날이 밝았을 때에는 중공군의 손실도 컸지만 우리측 피해도 적지 않았다.

노신영, 『盧信永 回顧錄』, (고려서적, 2000), 32쪽

횡성의 참패에 대한 내용이 달랑 이것 뿐 입니다. 게다가 전투의 경과에 대해서도 매우 모호하게 서술을 해 놓았지요. 처음 이 책을 읽으면서 황당함을 느낀 부분이기도 합니다. 노신영은 당시 소위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 패전에 대한 책임도 없다고 할 수 있는데 왜 이런 서술을 한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내용이 충실한 듯 하면서도 핵심적인 부분은 살살 피해가고 있어서 읽는 사람을 간질간질하게 하는게 이 회고록의 특징이라면 특징이겠습니다.

2008년 10월 15일 수요일

한국군 장성들에 대한 주한미군사고문단장의 평가

며칠 전에 쓴 '김홍일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에서 김홍일 소장의 기계화부대 건설 구상을 다소 비판적으로 다뤘습니다. 그런데 이거 어째 김홍일 소장을 졸지에 몽상가로 만들어 버린 듯 해서 찝찝하더군요. 초기 한국군에 대해 관심을 가지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김홍일 소장은 중국군 출신에 대해 비판적이던 미군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미군측은 일본식 교육을 받은 장교들이 중국식으로 교육받은 장교들 보다 우수하다고 보았고 중국식 교육을 받은 장교들에 대해서는 극도로 비판적이었는데 예외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 김홍일 소장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서 한국전쟁 발발 직전 군사고문단장이었던 로버츠(W. L. Roberts) 준장의 한국군 장성들에 대한 평가를 인용해 보지요. 아래의 인용문은 로버츠 준장이 육군본부의 볼테(Charles L. Boltes) 소장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인용한 것 입니다.

일본식으로 교육받은 장교들은 예외가 있긴 하지만 중국식으로 교육받은 장교들에 비해 월등히 우수합니다. (그러나) 일본식으로 교육받은 장교들은 내버려 두면 일본식으로 지휘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중국식으로 교육받은 장교들은 높은 계급과 체면을 중시하며 그들이 중국군에서 가지고 있던 계급보다도 더 높은 계급을 원합니다.

(중략)

한국군의 고위장교단의 지도력은 매우 매우 부족합니다.

총참모장은 일본군 시절 소령으로 병기창에서 근무했던 인물입니다. 매우 열심히 노력하며 우리의 조언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물자를 횡령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현재 한국군 장성 중에서는 가장 총참모장에 적합한 인물일 것 입니다. 그는 비만이지만 호감을 주는 인물이며 또 소장으로 진급하길 원하지만 좋은 조언자인 자신의 고문관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참모차장은 한국군 지휘관중 가장 유능한 인물이며 훌륭한 전술가로 사단장으로도 적합한 인물입니다. 최근 그는 지리산 지구 전투사령관으로 남부 지역의 공비들을 섬멸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정(일권) 입니다.

행정참모부장(원용덕)은 준장으로 원래는 군의관이었으며 반미주의자이고 무능함 때문에 사단장(5사단)에서 해임되었습니다.

호국군무실장은 준장으로 시대에 뒤떨어진(fuddy-duddy) 일본식 교리만 아는 인물로서 주의 깊게 감시하지 않는다면 사고를 칠 것(put it over) 입니다. 그의 이름은 신(응균)입니다.

한국군 1사단장(김석원)은 정치적 배경으로 임명된 준장으로 한국군 총참모부와 국방부장관이 싫어하는 인물입니다. 그가 지휘하는 사단은 38도상의 개성을 방어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1사단장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만약 미국인 고문관이 제어하지 않는다면 그자는 군벌처럼 될 것 입니다. 그는 사단의 8개 대대 중 7개 대대와 1개 포대를 특별히 중요한 일도 없는데 전방에 배치해 놓고 있습니다. 고문단에서는 그를 보통 곤경에 빠진 장군들이 가는 남쪽(게릴라 토벌)으로 전출시키려 시도 중입니다. 우리측에서는 예비대가 부족한 상황을 원치 않기 때문에 1사단의 후방에 추가로 부대를 배치했습니다.

7사단장(이준식)은 준장이고 이범석의 정치적 친구입니다. 고문단은 이제 겨우 그를 제어할 수 있게 됐습니다. 7사단은 바로 서울 북쪽의 38도선상을 방어하고 있습니다.

6사단장(유재흥)은 괜찮은 인물입니다. 우리측에서 그를 추천했습니다. 그는 제주도를 평정했으며 고문단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한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합니다.

동북해안지구에 배치된 8사단장(이형근)은 베닝(Fort Benning)에 교육을 보낸 세 명 중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장군이 되더니 맛이 갔으며(burst his buttons) 더 이상은 안되겠습니다. 그는 통위부 시절이 전성기 였습니다. 그의 고문관인 중령도 당시에는 잘 나갔지만 너무나 쉽게 출세한 나머지 먼저 한 명이 나가 떨어지고 그리고 나머지가 그 뒤를 따르게 될 것 입니다.

수도경비사령부 지휘관(권준)은 대령으로 중국군 출신입니다. 즉 별 능력이 없으며 그는 그에 걸 맞게 행동합니다. 정치적 배경으로 임명되었으며 우리는 반드시 그를 해임시킬 것 입니다.

2사단장 송호성은 준장이며 한국군 최초의 장성입니다. 중국군 출신이며 원래 국방부장관이었던 이범석과 정치적 앙숙입니다. 정치적으로 곤경에 빠져있으며 이범석파는 그를 가을쯤에 외국(아마도 중국대사관 무관)으로 보내려고 합니다. 그는 작은 거래에는 서투른 편입니다. 사단장병들에게 훈시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전술적으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으며 특히 여순반란에서는 최악이었습니다. 비록 우리는 공식적으로는 그에게 온갖 칭찬을 다 했지만 실제로 일을 담당한 것은 풀러 대령(현재 25보병사단 참모장인) 이었습니다.

3사단장은 이응준 소장으로 그는 일본군 대령이었습니다. 한국군 장군 중에서는 매우 유능한 편이지만 예전에 그의 예하 대대장 두 명이 대대를 이끌고 월북해서 곤경에 처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응준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에 임명하길 원합니다. 이응준은 한국군 장성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습니다.

5사단장은 사단장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까지 육본 정보국장이었습니다. 이름은 백(선엽) 입니다. 우리는 그를 지지하며 저 또한 그가 좋은 지휘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젊은 대령 중에도 유능한 인물들이 많습니다.

중국군 출신 장군 중 가장 유능한 사람은 김홍일 소장이며 현재 그는 육군사관학교장으로 있습니다. 나이는 50이며 매우 명석하고 성실하며 학자풍인 인물이고 미국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모든 한국군 지휘관들이 전술적 지식에 대해 우려하고 있습니다. 만약 중요한 작전이 전개된다면 우리 고문관들이 전술적 실수를 막아줄 수 있겠지만 매번 그럴 수는 없을 것 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은 체면을 중요시하며 많은 경우 말 보다 행동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Roberts to Boltes'(1949. 8. 19), RG 338, KMAG, Box 8, Brig General W. L. Roberts(Personal Correspindence), 1949; Brig General W. L. Roberts(Memorandum), 1949

매우 주관적인 평가지만 흥미로운 내용입니다. 전반적으로 중국군 출신 장성들에 대해 혹평을 하고 있지만 김홍일 소장에 대해서는 평이 좋습니다. 물론 이런 후한 평가는 그가 Americanize 되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만;;;;

추가) 로버츠 준장은 한국군 고급장교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한국군 사병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역시 같은 보고서에서 한국군 병사에 대한 평가를 발췌해 봅니다.

사병들은 훌륭합니다. 개인적으로 한국군 사병들은 6개월 정도의 훈련이면 상당히 좋은 병사로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한국군 사병들의 주의 깊음, 극기정신, 훈련에 대한 욕구, 명령에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의지, 완고함은 미군 병사들이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Roberts to Boltes'(1949. 8. 19), RG 338, KMAG, Box 8, Brig General W. L. Roberts(Personal Correspindence), 1949; Brig General W. L. Roberts(Memorandum), 1949

2010년 2월 25일 목요일

식민통치의 폐해;;;;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지휘관들의 능력 부족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런 문제는 계급이 높아질 수록 더 심해졌는데 한국군 장교단이 한국전쟁 이전 부터 급속하게 증가해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일 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말이 많은데 게중에는 꽤 재미있는 의견이 하나 있습니다. 미 군사고문단장은 한국군 장교단의 자질 부족의 원인을 식민통치의 악영향에서 찾았습니다.

한국군은 지휘능력을 갖춘 인재가 부족하다. 주된 원인은 지휘관이 될 만한 잠재력을 가진 인력이 부족한 데 있다. 여러해 동안 한반도에서는 외국인들이 지도층을 구성했다. 한국인들 스스로가 지도층의 위치로 올라가는 것은 심하게 억제되었다.

The Korean Army does not have adequate leadership. The major factor to be considered here is the lack of potential leaders. Korea has had its position of leadershp filled by foreign elements for many years. Develpoment of indigenous leadership was forcefully discourged.

주한미군사고문단장이 미 제8군 부참모장에게(1951. 5. 25), James A. Van Fleet Papers, Box 86, Republic Korea Army

꽤 일리있는 말 같습니다. 식민지 시기에 일본에서 정규 육군사관학교 교육을 받은 조선인은 겨우 세자리 숫자를 넘기는 수준이었고 태평양 전쟁 말기에 대량으로 양산된 조선인 장교단도 기껏해야 위관급이었으니 말입니다. 조선인 중에서는 가장 군사적인 지식이 풍부했을 홍사익은 전범으로 처형당했으니;;;; 그 밖에 김석원 같이 제법 높은 지위로 올라간 장교들도 있었지만 실전 경험은 야전에서 대대를 지휘한 정도가 고작이죠.

어쩌면 국가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키우지 못했다는것이야 말로 식민통치의 가장 지독한 유산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