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18일 수요일

한국전쟁 이전 미육군의 기갑전력 증강계획

2차대전이 끝난 뒤 미군은 대규모의 동원해제에 들어갑니다. 국무부와 군부는 동원해제가 미국의 대외정책 수행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데 의견이 일치했으며 특히 국무부장관 번즈James F. Byrnes는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는 것을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 말기에 수립된 동원해제계획은 예정에 맞춰 시행되었습니다. 1946년 초가 되면 동원해제가 당초 예측했던 것 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전쟁 말기에 수립한 계획에서는 동원해제를 실시하더라도 월간 50,000명의 신병을 보충해서 필요한 병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월간 37,000명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반면 동원해제는 계획대로 시행되어 병력은 급속히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각 군은 전후처리와 소련이라는 새로운 위협에 대비해 동원해제를 최대한 늦춰보려 했으나 미국 국내의 경제적인 이유와 함께 신속한 귀국을 희망하는 병사들의 격렬한 요구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당시 소련이 새로운 위협이란 것은 정치 지도층과 군부에서나 인식할 수 있었을 뿐 일선에서 연합군으로 싸운 병사들이 깨닫기는 어려운 것 이었으니 말입니다. 여론이 나빠지자 1946년 1월 8일 성명을 발표해 동원해제가 신속히 이루어 질 것을 천명하게 됩니다.1) 미 육군의 동원해제는 모든 징집병을 전역시킨 1947년 6월 30일 완료됩니다.2) 1945년에서 1947년 까지 미국 각 군의 병력이 감소한 추이는 아래와 같습니다.3)

표1. 미군의 병력변화(1945~1947)
1945. 6. 30
1946. 6. 30
1947. 6. 30
육 군
5,984,114
1,434,175
683,837
육군항공대
2,282,259
455,515
305,827
해 군
3,377,840
951,930
477,384
해병대
476,709
155,592
92,222
총 계
12,120,922
2,997,212
1,559,270


육군의 대대적 감축은 기갑부대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2차대전 당시 미국의 기갑은 제도상 정식 병과도 아니어서 그 위치가 매우 애매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전쟁부는 2차대전 중 경험을 쌓은 기갑장교들이 원래 병과로 복귀해 그 경험을 잃어버리는 것을 우려하여 1947년 부로 기병병과로 전환하였고 기병병과는 1949년 기갑기병Armored Cavalry로 개칭됩니다. 결국 1950년 육군조직법Army Organization Act에 따라 기갑병과가 정식 병과로 격상되긴 합니다만 이러한 사례는 전후 미육군에서 기갑병과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입니다.
또한 동원해제에 따라 대부분의 기갑사단이 해체되어 1948년 중순에는 제2기갑사단만이 현역 사단으로 남게되었고 기존의 전차대대 중 상당수가 1946년 7월 1일자로 경비연대Constabulary Regiments에 배속된 경비기병중대Constabulary Squadrons으 로 개편되어 명맥만을 유지하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M-26, M-24와 같은 신형장비의 도입으로 기갑병과는 유지하는데 더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1944년에 M-4를 장비한 기갑사단을 편성하는데 3천만 달러가 소요되었는데 1950년에 M-26을 장비한 기갑사단을 편성하는 데는 2억 달러가 소요되는 실정이었습니다.4)

그렇지만 소련과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미국은 다시 재래식 전력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기갑전력이 다시 강화되게 됩니다. 유일한 현역기갑사단인 제2기갑사단의 강화와 함께 제3기갑기병연대가 신규로 편성되었습니다. 또한 유럽에 주둔하고 있던 3개의 경비여단을 기갑기병연대로 개편했습니다.5) 전차대대의 숫자는 다시 회복세로 돌아서 1946년에 12개 대대까지 줄어들었던 것이 1950년에는 64개 대대까지 확대되었습니다.6)

하지만 예산 증액이 어려웠기 때문에 대대적인 병력 증강이나 신규장비 도입은 한국전쟁 이전까지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군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1948회계연도에 총병력을 1,641,000명으로 증강하기 위해 96억4700만 달러의 국방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했지만 의회는 이를 기각하고 87억5100만 달러만을 승인했습니다. 결국 1948년 회계연도의 병력 증강은 당초 목표치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1948년 2월 18일 합동참모본부의 합동참모국장 그런터Alfred M. Gruenther장군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군병력 부족에 대해 보고했습니다. 이 보고에서 그런터 장군은 육군의 병력 부족이 심각한 상태이며 추세가 유지되면 1948년 말 까지 165,000명의 병력이 부족해 질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7) 트루먼 대통령은 1949년 회계연도에 총병력을 1,734,000명으로 증강할 것을 결정하고 30억 달러의 추가예산을 신청하기로 결심합니다. 이 계획안은 육군을 대대적으로 증강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습니다.8) 국방부장관 포레스탈은 1948년 3월 25일에 이 추가예산안을 상하원에 제출했는데 이에 따르면 각 군의 증강 내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9)

표2. 미국방부가 1948년 3월 25일 상하원에 제출한 병력 증강계획
1948. 3. 1 병력
증강 이후 병력
증강 규모
육 군
542,000
782,000
240,000
해 군
397,000
460,000
63,000
해병대
81,000
92,000
11,000
공 군
364,500
400,000
35,500
총 계
1,384,500
1,734,000
349,500


그런데 잘 아시다 시피 육해공군은 예산 증액의 기회가 오자 당초 합동참모본부가 구상한 것 이상의 병력과 장비 증가를 요구합니다. 특히 공군이 이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70개 비행단 계획과 해군의 주요 전투함 384척 계획은 끝내 나중에는 제독의 반란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지게 되지요. 육군도 당초 국방부가 제시한 782,000명 보다 더 많은 837,000명의 병력과 12개 현역사단, 13개의 완편 주방위군사단, 25개의 예비사단을 요구합니다. 각 군의 요구를 모두 반영한 예산은 당초 계획안 보다 90억 달러 늘어난 것으로 이것은 트루먼 대통령이 승인한30억 달러를 세배 초과한 것 이었습니다. 이것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 이었고 결국 합참이 포레스탈 장관에게 35억달러로 약간 늘어난 예산안을 제시하여 간신히 균형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4월 21일 이 방안을 승인합니다. 그러나 재무부가 국방예산의 급격한 증가를 경고하면서 추가예산 신청은 31억5900만 달러로 결정됩니다. 이에 따라 트루먼 행정부가 1949년도 국방예산으로 신청한 금액은 129억6200만 달러가 됩니다. 그러나 상하원은 이보다 더 많은 국방예산을 배정해 최종적으로 승인된 1949년 회계연도 국방예산은 139억4100달러가 됩니다. 이 중 육군에 배정된 액수는 42억 1700만 달러였습니다.10)

새 예산안은 800대의 전차를 신규로 도입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11) 새 예산안에 따라 1949년 6월에 전차생산 5개년 계획이 작성됩니다. 전차 생산 5개년 계획은 76mm포 탑재전차 T-41(M-41)과 90mm포 탑재전차 T-42, 그리고 120mm포 탑재전차 T-43(M-103) 등 세 종류의 신형전차를 생산하여 소련의 전차개발에 대응하고자 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작성된 전차생산 5개년 계획은 다음과 같았습니다.12)(도표에는 6개년도로 되어 있는데 원문에서 5개년 계획으로 적고 있으므로 그에 따릅니다.)

표3-1. 전차생산 5개년 계획의 생산대수(1949년 6월 작성)
회계연도
T-41
T-42
T-43
총 계
1950
109
109
1951
200
200
1952
31
340
100
471
1953
240
240
480
1954
240
240
480
1955
240
240
480
총 계
340
1060
820
2,220


표3-2. 전차생산 5개년 계획의 소요비용(1949년 6월 작성, 단위 백만달러)
회계연도
T-41
T-42
T-43
총 계
1950
40.3
40.3
1951
45.0
7.5
12.1
64.6
1952
7.0
85.1
35.0
127.0
1953
48.0
84.0
132.0
1954
48.0
72.0
120.0
1955
48.0
72.0
120.0
총 계
92.3
236.6
275.1
604.0


1949 년도의 계획은 예산상의 제약으로 단지 전차 생산 기술을 유지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아무리 평시라지만 2차대전 직후의 미국이 1년에 전차를 고작 백대 단위로 만든다니!!!) 실제로 미 육군에서는 이 정도의 생산계획으로는 전시동원에 필요한 소요는 물론 현재 유지하고 있는 전력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다고 평가하고 있었습니다.13) 이 시기 미육군 기갑사단의 전차 대수는 373대였습니다.14) 1년에 중형전차를 240대 생산하는 것으로는 기갑사단 하나도 장비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는 것 입니다.

또한 미국의 대소작전 계획이 방어적인 성격에서 적극적인 반격에 초점을 맞추면서 육군, 특히 기갑전력의 중요성도 강조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49년 12월 8일 승인된 작전계획 오프태클Offtackle은 반격작전에 미군 41개 사단을 투입하도록 하고 있었는데 프랑스를 해방한 이후의 전과확대 단계에서는 기계화부대와 공수부대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15) 새로운 전쟁계획과 NATO의 결성은 미육군에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부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소련과의 전면전을 상정한 이상 기갑전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이었습니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1950년 회계연도 국방예산을 작성하면서 정책과 전쟁계획을 반영하여 1949년 회계연도 보다 병력 규모를 더 증강했습니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1950년 회계연도 내로 육군의 경우 현역 12개사단, 주방위군 34개 사단, 예비군 25개 사단을, 해군은 현역함 993척과 예비함 1,657척, 해병대 2개 사단과 해병항공단 2개, 공군은 70개 항공단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예산을 작성했습니다. 이 예산안에 따른 병력 규모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 계획에 따른 예산은 3백억 달러에 달했습니다.16)

표4.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1950년 회계연도 예산에 따른 병력규모
현 역
예비군 및 주방위군
육 군
947,000
1,137,000
해 군
519,196
1,555,000
해병대
104,075
165,838
공 군
502,000
140,500
총 계
2,072,271
2,998,338


3백억 달러는 1949년 회계연도에 의회가 승인한 국방예산의 두배를 훨씬 넘는 금액이었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었습니다. 결국 포레스탈 장관의 지시에 따라 144억 달러로 제한되었고 최종적으로 트루먼 대통령이 승인한 액수는 3군에 133억9900만 달러, 총 142억4000만 달러였습니다. 이 예산안은 1949년 1월 10일 의회에 제출됩니다. 의회는 3군에 배정된 예산은 139억1200만 달러로 증액했으나 육군과 해군의 예산을 삭감하는 대신 공군만 8억 달러 가까이 증액해 버립니다. 육군 예산은 트루먼 대통령이 제출한 안에서 44억9800만 달러였으나 의회에 의해 승인된 액수는 44억2000만 달러였습니다.17)

1950 년에 이르면 미국 기갑부대는 부대의 숫자는 증가했지만 예산 부족으로 인해 신형 전차 도입의 지연과 기존 전차의 유지정비의 미비로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직전 미육군이 보유한 전차를 보면 M-24의 경우 가동가능한 차량이 900대인 반면 가동불능 상태인 차량이 2,557대에 달했고 M4A3E8은 가동 가능한 차량이 1,826대, 가동불능의 차량이 1,376대에 달했습니다.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신형전차 M-46은 319대에 불과했고 여기에 M-26 800여대와 1950년 회계연도 예산으로 M-46으로 개량될 M-26이 1,215대 있었습니다.18) 1948년 이후 국방예산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2차대전 직후의 급격한 감축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던 것 입니다.

한편 미육군은 새로운 안보정책기조와 전쟁계획에 맞춰 전차생산계획을 재검토 합니다. 미육군 기갑위원회Army Armored Panel은 1950년 5월 31일 제출한 보고서에서 육군동원계획 I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연간 2,072대의 전차를 생산해야 하며 편제되어 있는 부대의 수요만을 고려하더라도 연간 1,680대를 생산해야 한다고 결론내렸습니다. 이에 따른 전차 생산계획은 다음과 같았습니다.19)

표5-1. 육군 기갑위원회가 작성한 전차생산계획(1950. 5. 31)
회계연도
T-41
T-42
T-43
총 계
1950
109
109
1951
200
200
1952
240
100
125
465
1953
240
960
240
1,440
1954
240
1,200
240
1,680
1955
240
1,200
240
1,680
1956
240
1,200
240
1,680
1957
240
1,200
240
1,680
1958
240
1,200
240
1,680
1959
240
1,200
240
1,680
총 계
2,229
8,260
1,805
12,294


표5-2. 육군 기갑위원회가 작성한 전차생산계획 소요예산(1950. 5. 31 단위 백만달러)
회계연도
T-41
T-42
T-43
총 계
1950
40.3
40.3
1951
45.0
7.5
12.1
64.6
1952
48.0
27.5
43.8
119.3
1953
42.0
187.2
84.0
313.2
1954
36.0
194.4
72.0
302.4
1955
36.0
194.4
72.0
302.4
1956
36.0
194.4
60.0
290.4
1957
36.0
194.4
60.0
290.4
1958
36.0
194.4
60.0
290.4
1959
36.0
194.4
60.0
290.4
총 계
391.3
1388.6
523.9
2303.8


이 보고서는 육군이 추진한 12개 현역 사단 기반의 육군에 포함될 기갑전력을 최소한 기갑사단 2개, (경)기갑기병연대 1개, 기갑기병집단 1개, 수륙양용전차대대 1개로 유지하고 보병과 공수사단에도 기갑전력을 편제할 것을 제안하고 있었습니다.20)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됩니다. 신형 전차의 확보가 시급해 지자 1952년 부터 양산에 들어갈 T-42는 취소되고 M-46에 T-42의 포탑을 결합한 M-47이 급거 양산에 들어가게 됩니다. M-47은 1951년 6월 부터 1953년 11월 까지 총 8,576대가 생산됩니다.21)  이것은 1950년 미육군 기갑위원회가 제시한 전차생산 10개년 계획의 T-42 생산계획을 압도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계속된 냉전기간의 재래식 전력 증강은 미육군 기갑전력의 양적 수준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키기 됩니다.



1) James F. Schnabel, History of the Joint Chiefs of Staff : The Joint Chiefs of Staff and National Policy 1945~1947, (USGPO, 1996), pp.101~102
2) James F. Schnabel, Ibid., p.104
3) James F. Schnabel, Ibid., p.109
4) James A. Sawicki, Tank Battalions of the U.S.Army, (Wyvern Publications, 1983), p.34
5) Philip L. Bolte, “Post-World War II and Korea : Paying for Unpreparedness”,  George F. Hofmann and Donn A. Starry(ed), Camp Colt to Desert Storm : The History of U.S. Armored Forces, (1999,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p.218
6) James A. Sawicki, Ibid., p.34
7) Kenneth W. Condit, History of the Joint Chiefs of Staff : The Joint Chiefs of Staff and National Policy 1947~1949, (USGPO, 1996), pp.99~100
8) Kenneth W. Condit, Ibid., pp.101~102
9) Kenneth W. Condit, Ibid., p.102
10) Kenneth W. Condit, Ibid., pp.107~111
11) Philip L. Bolte, Ibid., p.220
12) “Preliminary Report of the Armored Panel”(1950. 5. 31), RG319,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Assistant Chief of Staff for Intelligence, Top Secret Correspondence, 1914~62, Entry 4, 1950, Box 13, p.2
13) “Preliminary Report of the Armored Panel”(1950. 5. 31), p.2
14) James A. Sawicki, Ibid., p.34
15) Steven T. Ross, American War Plans 1945~1950, (Frank Cass, 1996), pp.118~119; Kenneth W. Condit, Ibid., pp.159~163
16) Kenneth W. Condit, Ibid., pp.123~124
17) Kenneth W. Condit, Ibid., pp.136~137
18) Philip L. Bolte, Ibid., p.224
19) “Preliminary Report of the Armored Panel”(1950. 5. 31), p.4
20) “Preliminary Report of the Armored Panel”(1950. 5. 31), p.7
21) R. P. Hunnicutt, Patton : A History of the American Main Battle Tank. Vol.1, (Presidio, 1984), pp.55~59

3대장

이승만의 군부통치 방식 중 하나는 군 엘리트들을 서로 경쟁시켜 충성을 이끌어 내는 것 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백선엽, 이형근, 정일권 세명을 대립하도록 만드는 것 이었습니다. 특히 1954년 2월 17일 이형근과 정일권이 육군대장으로 진급하면서 이른바 ‘3대장’ 파벌이 정립되게 됩니다. 소위 3대장 체제는 1957년 5월 이형근과 정일권이 밀려날 때 까지 계속되면서 이승만이 군부를 통제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3대장 이야기를 후배들 있는데서 꺼내니 다들 키득키득 웃는 겁니다. 원피스에 나오는 해군 3대장이 생각난다나요;;;; 3대장이라 할때 백선엽, 이형근, 정일권을 이야기하느냐 아니면 원피스를 이야기 하느냐를 가지고 세대구분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2012년 1월 17일 화요일

문화적 충격?

빈센트 브란트Vincent Selden Randolph Brandt라는 미국 인류학자는 1965년 부터 1966년 사이에 충청남도 서산군 석포리에서 현지조사를 수행했습니다. 이 사람의 회고록이 얼마전에 번역되었는데 1960년대 한국 농어촌 사회에 대한 제3자의 시각이 꽤 재미있습니다. 이 회고록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축첩제도에 관련된 이야기 인데 폐쇄적인 공동체가 외부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보여주는 부분 같습니다. 브란트 박사는 밀가루를 얻으러 한 미군기지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낮선 마을에 들러 그곳 주민들의 환대를 받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미국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한국인 아내에 대한 여성들의 질문은 답하기가 힘들었다.

“예. 제 부인은 한국 사람이고 서울에 살고 있습니다.”

“당신의 미국 부인은 어디에 있나요.”

“내 한국 아내가 내 미국 아내입니다.”

“그건 이상한데요. 왜 그렇게 대답하시는 거죠? 뭐 때문에 화가 나셨나요? 우리는 외교관을 제외한 모든 외국인들이 여기에 있을 때 한국 아내를 데리고 산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아내가 한명입니다. 그녀는 한국 사람이고, 지금은 서울에 있습니다.”

“당신의 미국 아내는 어쩌고요?”

나는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내 아내는 한국에서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미국에 유학을 갔습니다. 지금은 친정 가족과 함께 서울에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할머니가 그림자가 드리운 구석에서 권위있게 말했다.

“저 사람은 자기도 첩을 두고 있다고 말하려고 하는 게다. 하지만 서투른 한국어 실력 때문에 첩이 한국 사람인지 미국 사람인지는 모르겠구나.”

그녀는 나에게 확실히 하라고 격려했다.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서울의 높은 사람들이 부도덕하다고 말하지만 여기에도 첩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문제없다고 여기는 한 괜찮습니다.”

빈센트 S. R. 브란트 저, 『한국에서 보낸 나날들 : 인류학자 빈센트 브란트 박사의 마을현지조사 회고록』, (국사편찬위원회, 2011), 61~62쪽

이 이야기의 뒷 부분에서는 미국인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 다는 것에 마을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는 일화도 실려 있습니다. 외부와의 교류가 제한되었던 사회에서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을 넘어서는 것들을 쉽게 받아들이기란 힘들 일이지요.

2012년 1월 11일 수요일

과대광고, 혹은 어떤 결전병기(???) - 2


과대광고, 혹은 어떤 결전병기(???) - 1



과대광고, 혹은 어떤 결전병기(???)에 대한 잡담 하나.

항공전력은 하늘의 전장을 지배했다.(Airpower dominated its own element.)

항공전력은 바다의 전장을 지배했다.(Airpower dominated naval warfare.)

항공전력은 지상의 전장을 지배했다.(Airpower dominated ground warfare.)

항공전력은 강력하고 독립적인 군수능력을 소유했다.(Airpower possessed powerful and independent logistical capabilities.)

항공전력은 목표로 한 지역에서 공중을 장악하여 효과적인 지역 차단을 할 수 있었다.(Airpower established effective area interdiction by occupation of the air space over an objective area.)

항공전력은 지상전을 치르지 않고도 적국이 항복을 하도록 강요할 수 있었다.(Airpower was capable of forcing the capitulation of an enemy nation without surface invasion.)

Military Analysis Division, The United States Strategic Bombing Survey : Air Campaigns of the Pacific War, (USGPO, 1947),  p.69
위의 인용문은 미군이 2차대전 종전 직후 일본에 대한 전략 폭격 성과를 조사한 뒤 발간한 보고서에서 발췌한 것 입니다. 인용문에서는 Airpower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전략폭격기를 지칭하는 것 이지요. 미국에서는 전쟁 직후 군사력 감축으로 인한 효율적인 안보정책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2차대전 당시 미국 육군항공대가 전략폭격을 통해 거둔 성과는 미국의 정치권은 물론 대중여론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저렴한 비용으로 큰 피해 없이 국가안보에 기여하고 미래의 전쟁에 승리할 수 있다는 전망은 정말 달콤한 유혹이지요. 이것은 독립된 공군을 창설해야 한다는 육군항공대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공군이 창설되었을 때 전략폭격기 부대는 그 중핵이 됩니다. 이렇게 항공력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여론이 강해지면서 결과적으로 제독의 반란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안가 일어난 한국전쟁은 이런 낙관적인 전망에 찬물을 끼얹게 되지요.

2012년 상반기에 출간될 캔자스대학 출판부의 책 중에서

간만에 캔자스 주립대 출판부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2012년 상반기에 출간될 서적 몇권에 대한 정보가 올라왔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신간이 두 권 있더군요.

첫 번째는 로버트 시티노Robert M. CitinoThe Wehrmacht Retreats : Fighting a Lost War, 1943입니다. 이 책은 Death of the Wehrmacht : The German Campaigns of 1942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티노는 Death of the Wehrmacht에서 군사적인 전통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작전술 차원의 승리로 전략적인 승리를 거두려 했던 독일 국방군이 결국 산업화된 현대전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과정을 잘 그려냈습니다. 이 후속작에서는 전세가 반전되는 과정에서 독일 국방군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시티노의 이론 틀을 통해 보여줄 것으로 보이는데 매우 기대가 되는 군요.

두 번째는 글렌 토리Glenn E. TorreyThe Romanian Battlefront in World War I입니다. 영어권에서는 서부전선에 비해 잘 다루어지지 않은 1차대전기 동부전선에 관한 내용이라 기대가 됩니다. 같은 대학 출판부에서 낸 Blood on the Snow : The Carpathian Winter War of 1915도 개설서에서 간략하게 다루어지는 전역을 심도 깊게 서술해서 개인적으로 매우 만족스러웠기에 더욱 더 읽어보고 싶습니다.

읽지 못한 책이 자꾸 쌓이고 있어서 요즘은 책 사는 것을 줄여보려고 하는데 신간 목록을 볼 때 마다 질러야 겠다는 의지가 다시 불타오르니 영 고역입니다.

2012년 1월 10일 화요일

Why Panetta's Pentagon Cuts Are Easier Than You Think

지난 1월 4일, 포린 어페어즈 인터넷 판에 재미있는 글이 한편 실렸습니다. 「어째서 파네타의 국방부가 예산을 삭감하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가?(Why Panetta's Pentagon Cuts Are Easier Than You Think)」라는 글인데 미국의 국방예산 삭감이 군사력 약화를 초래하기 보다는 비효율을 정리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전망하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작년 9월에 블로그에 소개했던 「다가오는 미국의 긴축(America's Coming Retrenchment )」과 같이 미국의 국방예산 감축이 가져올 부작용을 우려하는 견해가 많다는 점에서 꽤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읽어보고 바로 블로그에 올려볼까 했는데 주말에 친구 결혼식에 참석한다고 경상도에 다녀온데다 MJ님이 출연하시는 원더풀라디오를 보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좀 늦어졌습니다. 좀 날림번역인데 봐주십시오^^;;;;;


어째서 파네타의 국방부가 예산을 삭감하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가?
로렌스 콥(Lawrence J. Korb)

이번주에 레온 파네타Leon Panetta국 방부장관이 국방예산을 수천억 달러 감축하는 계획을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민간부문과 군부의 지도자들은 이와같은 예산 감축이 재앙과도 같은 충격을 줄 것이라고 비난하는 등 예언같은 경고를 하고 있다. 이들은 적절한 재원이 없다면 미국이 세계 각처에 가지고 있는 이익을 보호할 수 없을 것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국방부는 재원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국방부의 입장을 가장 강력히 지원하는 사람들 조차도 국방부의 문제는 관리에 있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군장교협회Military Officers Association의 회장인 노버트 라이언Norbert Ryan은 최근 워싱턴타임즈에 기고한 논평에서 이 문제를 잘 정리했다.: “거의 매주 많은 비용이 투입된 계획들이 총체적인 관리 부실과 예산 초과에 시달리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있는데 이 중에서 현재 우리 군대가 싸우고 있는 전쟁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라이언은 이렇게 적었다. “관리부실이 매우 심각해서 국방부의 회계장부는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보일 지경이며 국방부의 고위층은 2017년 이전에는 시험을 통과할 수 없을 것 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해군 장교로 장기간 복무한 전쟁영웅 출신의 존 매케인John McCain 상원의원(공화당, 애리조나)은 이보다 더하다. 2011년 12월 15일 상원 의석에서 매케인 의원은 사실상 현재 개발 중인 거의 모든 무기체계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매케인 의원은 F-35 계획이 수습 불능의 상태이며, 해병대의 신형상륙장갑차Expeditionary Fighting Vehicle가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탄식했고, 육군의 미래 전투 체계는 “요란하고, 부끄러운 실패작” 이상이라고 비판했으며, F-22는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잡아먹은 채로 격납고에서 좀만 슬어가는 여왕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방부가 항상 이렇게 엉망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행정부가 강력한 부장관을 두어 운영을 총괄해서 담당하게 했을 때는 관리 문제가 미미했다.(국방부장관은 국방부의 운영을 신경쓰기에는 너무나 바쁘다.) 예를 들자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제너럴 모터스에서 찰스 윌슨Charles Wilson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휴렛 패커드에서 데이빗 패커드David Packard를, 지미 카터 대통령은 코카콜라에서 찰스 던칸Charles Duncan을,  그리고 조지H.W. 부시 대통령은 제너럴 모터스의 도날드 앳우드Donald Atwood를 데려다 썼다.

이들 행정부에서 국방 예산은 크게 감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보는 부장관의 관리상의 결정에 힘입어 개선되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공군은 소련의 핵 위협에 맞서기 위해 값비싼 폭격기를 사용하는 대신 훨씬 저렴한 지상 발사 미사일을 사용하게 되었다. 닉슨 행정부에서 국방부는 일부 기능을 예비군으로 이관하면서 현역 병력의 규모를 감축할 수 있었다. 게다가 국방부는 전투기를 조달할 때 고성능기와 저성능기를 함께 사용하도록 하여 값싼 F-16과 F/A-18로 값비싼 소수의 F-14와 F-15를 보조하는 방식으로 예산을 크게 감축할 수 있었다. 카터 행정부에서 국방부는 공군의 B-1 폭격기를 취소하여 그보다 저렴한 B-2 스텔스 폭격기를 도입하도록 했다. 조지 부시 행정부에서는 (F-22에 대한 해군의 대응인) A-12가 개발사에서 예산 한도를 지키지 못하게 되자 이를 취소시켜버렸다.

그러나 지난 10년간의 국방부 부장관들은 대부분 직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관리 기술이나 명성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도널드 럼즈펠드Donald Rumsfeld의 부장관 폴 월포위츠Paul Wolfowitz, 로버트 게이츠Robert Gates의 부장관 빌 린Bill Lynn, 그리고 파네타의 부장관 애쉬튼 카터Ashton Carter는 큰 조직을 운영해 본 일이 없으며 심지어 군복무 경험조차 없다. 요지는 국방부가 핵심적인 국방 예산을 실질적으로 1998년 회계연도에서 2011년 회계연도까지 13년 연속으로 증액하는 유례없는 일을 했다는데 있다. 레이건 시대의 방대한 군사력 건설조차 1981년에서 1985년까지 불과 4년간 계속되었을 뿐이며 이 다음에는 13년간 실질적인 감축이 이루어졌다. 현 재 파네타 장관이 다음 10년 동안 연간 1천억 달러의 핵심 국방 예산을 감축한다고 발표하더라도 2013년도의 예산은 4,720억 달러에 달할 것이다. 이것은 2007회계연도의 예산과 같은 규모이다. 이 액수는 미국이 냉전 기간 중 사용한 연간 평균 예산을 상회하는 것이며 미국 다음의 하위 17개국의 국방예산을 모두 합한 것 보다도 더 많은 것이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이 계속되면서 국방부의 고위층은 지출 기준치를 감추었다. 지난 10년간 국방부의 수뇌부는 추가 전쟁 비용으로 부터 진행중인 전투와는 전혀 관계없는 F-22 랩터와 미사일 방어 체계와 같은 핵심 품목에 필요한 비용을 조달해왔다. 국방부는 이렇게 함으로써 여러 무기 체계의 비용 상승을 감춰왔으며 국방예산에서 투자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증가하지 않은 것 처름 보이도록 해왔다. 강력한 부장관이 있었다면 F-22와 같은 고성능 무기체계를 이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F-35와 교환하도록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국방부의 수뇌부는 방위산업체들이 비용을 초과한 것에 대해 댓가를 치르도록 하는데 거듭해서 실패해왔다. 국방부는 그렇게 할 수단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1980년대에 의회는 행정부가 국가 안보의 기준에서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한 무기 개발계획이 예상 비용을 15~50% 초과하게 될 경우 무효화 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1997년 이래 거의 절반 이상의 무기 체계 개발계획이 이 법안을 위반했지만 거의 대부분이 양산에 돌입하도록 허가받았다.

그 다음에는, 2000년만 하더라도  개발 중이거나 생산에 들어간 계획에 소요된 비용이 4,300억 달러로 증가했다. F-35의 개발을 예로 들어보자. 원래는 2,866대에 2,330억 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지금은 겨우 2,400대에 최소한 3,850억 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한대당 가격은 이 기종이 대체할 예정인 F-16의 다섯배에 이르고 있다. 강력한 부장관이 있었다면 계획을 취소해 버리거나 회사가 초과비용을 책임지도록 했을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미국의 무기 체계가 노후화 되어 가고 있으며 교체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에서 국방부가 이렇게 전례 없는 비용 지출을 유지하는 것이 옳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 스팀슨 센터Stimson Center의 러셀 럼바우는 각 군의 조달 비용이 21세기의 첫 10년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2001 회계연도에 630억 달러에서 2010회계연도에는 1,360억 달러로 늘어났음을 입증했다. 그러나 국방부는 낡은 장비를 교체한 것이 아니라 500억 달러를 신형 무기체계 획득에 사용했으며 여기에는 유례없이 신속하고 유연한 전장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된 유인차량과 무인차량으로 편성된 여단으로 편성되는 3,400억 달러짜리 미래전투체계Future Combat Systems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 체계에 200억 달러를 지출하고 난 뒤 정부는 이것을 취소해 버렸다

국방부의 관리 부실은 작전 및 유지 분야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데 이것은 2012년 회계연도에 2,000억 달러 이상에 달할 것이다. 방산업체의 경영진들은 비록 새로운 세대의 전투기들이 전선에 배치된 기존의 것들에 비해 비싸기는 하지만 작전 비용은 감소할 것이라고 거듭해서 주장해 왔다. 그렇지 않다. F-35의 작전비용은 최소한 F-16 C/D형 보다 15퍼센트 이상 높아질 것으로 기획되어 있다. 그리고 해병대의 V-22 오스프리의 작전 및 유지비용은 지난 3년간 460억 달러, 62%나 증가했다. 매케인 의원에 따르면 F-22는 대체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구형기종(F-15와 F-16)과 비교했을 때 운용하기에 너무나도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실제로 국방부는 갈수록 비효율적이 되어가고 있다. 2010년에 게이츠 국방장관은 국방 예산 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각 군에 낭비적인 요소를 파악하도록 했다. 몇 주만에 2,000억 달러 규모의 과잉 지출이 확인되었다. 예를 들면 장군과 제독의 숫자는 군대가 오늘날 보다 두배나 더 컸던 1971년 당시 보다 훨씬 많으며 사령부들, 예를 들어 통합전력사령부Joint Forces Command와 같은 곳들은 다른 사령부와 업무가 중복되고 있다. 그러나 게이츠 장관은 획득한 비용으로 초과된 부분을 메우는 대신 국방부가 획득한 비용의 대부분을 신규 무기 계획에 쏟아넣도록 방치했다.

국방부가 현재와 같이 운영된다면 어려운 결정들을 계속해서 회피하려 할 것이 명백하다. 그리고 또한 의회도 각 지역구에 지속적으로 경제적 활력을 넣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국방부는 군부-산업체-의회 복합체를 다루는데 충분한 경험을 가진 강력하고 단호한 성격의 부장관이 필요한 것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첫 번째 임기를 마쳐갈 무렵 국방예산은 오늘날의 액수로 환산했을 때 3,800억 달러에 달했다. 닉슨 대통령은 같은 시기에 3,980억달러였다. 그리고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같은 시기에 4,350억 달러였다. 조지 W. 부시 에 와서는 4,780억 달러가 되었으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첫 번째 임기 말에는 기준예산이 최소한 4,750억 달러 이상으로 아마도 5,250억 달러에 근접해 있을 것이다. 만약 오바마의 군부 및 민간 관료들이 소련과 같은 실질적인 위협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만큼의 비용으로도 국가를 지켜낼 수 없다면 오바마는 다른 사람들을 알아봐야 할 것이며 특히 새로운 국방부 부장관이 필요할 것이다. 패커드가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968년 위스콘신의 공화당 하원의원 멜빈 레어드Melvin Laird가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었을  때 그는 유능한 관리자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했다. 레어드가 자신의 참모들에게 미국에서 가장 유능한 인물을 추천해 달라고 했을 때 이들은 패커드를 추천했다. 레어드는 즉시 비행기를 타고 캘리포니아로 가서 패커드가 국방부 부장관 직을 맡아달라고 설득했다. 파네타나 그의 뒤를 잇게 될 사람들이라면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예산의 규모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을 책임지는 조직과 제도의 문제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본문에서 레이건 행정부 시기의 방만한 예산 운영과 그 뒤를 이은 조지 부시 시기의 조정을 언급한 점이 필자의 의도를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제가 2007년에 간단하게 소개했던 것 처럼 레이건 행정부 시기는 오늘날 국방예산이 무절제하고 비효율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비판받고 있습니다. 단순히 신무기만 잔뜩 들여놓는다고 국방력이 개선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입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국방 정책은 명확한 목표가 먼저 설정되어야 하며 신무기 도입은 그에 따르는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합니다. 필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 처럼 ‘소련과 같은 적’이 없는 상황에서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무기를 잔뜩 들여놓고 이 때문에 당장 필요한 분야에 사용할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은 정상적이라고 할 수가 없지요.

이 글은 오바마 행정부의 국방예산 감축을 바라보는 시각 중 긍정적인 편에 속합니다. 비효율을 제거하게 된다면 적은 예산으로 미국의 국방력이 개선될 여지가 있을테니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끌리는 설명이기도 합니다.

2012년 1월 4일 수요일

잠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12월 말 부터 잠시 동해안 지역으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원래는 더 일찍 출발할 생각이었지만 조그만 사고를 하나 당하는 바람에 늦게 출발하게 됐습니다. 작년과 대략 비슷한 경로로 움직였는데 이번에는 내륙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해안 지역으로만 다녔습니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것들을 몇개 보았는데 대략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원자력 발전소

이번 여행에서 가장 흥미롭게 본 것은 원자력발전소를 대하는 지역의 입장이었습니다. 강원도 삼척의 경우 원전유치에 성공한 것을 환영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는데 경상북도 영덕의 경우는반대였습니다. 영덕에서 만난 분들은 반대여론이 상당한 규모였다고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그 원인이 궁금하더군요.

삼척의 환영 분위기는 수많은 환영 현수막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촬영한 현수막 사진이 40장을 넘는데 반대 현수막은 다섯장 남짓 보이더군요.












약간 의외였던 것은 삼척과 비슷한 경제적 낙후지역인 영덕의 분위기는 달랐다는 것 입니다. 일단 찬성 현수막의 숫자 부터 차이가 나더군요. 영해면과 영덕읍을 들렀는데 현수막이 별로 많지 않아서 의아했습니다. 다른 곳에서 영덕으로 이주한 할머니와 이야기를 30분쯤 나눠봤는데 이 분은 원전에 대한 반대견해가 우세한 것을 영덕 주민들의 전통적인(?) 보수성에서 찾더군요. 하여튼 원자력 발전소를 대하는 삼척과 영덕의 차이가 어디서온 것 인지 궁금합니다.



2. 바다구경은 언제 해도 즐겁습니다. 특히 저는 겨울바다가 더 좋더군요.

삼척 호산항

울진 망양정 앞바다

울진 망양정 앞바다 2

울진 봉평신라비 전시관 앞바다

울진 월송정 앞바다

해운대


3. 성곽

시간이 부족해서 들렀던 곳에 있는 성곽들을 모두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가볼수 있는 곳은 최대한 가봤습니다. 역시 가장 인상깊었던 곳은 울산에 있는 두 곳의 왜성이었습니다.

포항 장기읍성

울산 울산왜성

울산 경상좌병영성. 정비공사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울산 서생포왜성. 남해안 지역의 왜성 중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 입니다.


4. 구제역의 흔적

작년 겨울에는 구제역의 한 가운데 여행을 했었는데 이번 여행에서도 약간의 흔적을 찾아볼수 있었습니다.


상당히 재미있는 여행이었고 나름대로 생각할 것도 많았는데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관련된 주제가 있을 때 더 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