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25일 일요일

짤하나 만들어 봤습니다.


 "'있잖아 그거 해봐' 생성기"가 있다길래 짤방을 하나 만들어 봤습니다.






 여기에 대한 해설은 아래의 글 두개를 참고하세요.


 스티븐 잘로가의 2차대전 기갑전 저작에 관한 잡담

중국의 UN가입 요구를 조롱하는 LA타임즈 만평

이 만평은 1950년 8월 LA타임즈의 브루스 러셀(Bruce Russell)이 그린 것인데 게재된 신문의 동의를 얻어 오클랜드 트리뷴에 다시 실린 것 입니다. 윌리엄 놀랜드(William F. Knowland) 상원의원이 스크랩해서 1950년 8월 10일 당시 국무부장관 특별보좌관이었던 존 포스터 덜레스에게 보낸 서신에 첨부한 것 입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뒤 UN에서 중화민국을 축출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상임이사국 지위를 가지겠다고 주장했을때 미국내의 비난 여론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죠. 중국을 소련의 괴뢰로 단순하게 묘사하는 점은 문제가 있으나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미묘한 권력관계는 부분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016년 12월 23일 금요일

월드오브탱크 블리츠를 하다가 M60을 봤습니다


월드오브탱크 블리츠를 하는데 갑자기 양쪽팀에서 M60이 튀어나오는게 아니겠습니까. 데이터상으로 구현해 두고 아직 내놓지 않은 전차가 많다더니 M60도 있었네요. 으으. 빨리 구매할 수 있도록 상점에 추가하면 좋겠습니다.



2016년 12월 17일 토요일

어떤 기묘한 인도주의



나는 네이팜 폭격이 정말 싫소. (이 무기는) 일반적인 화재가 아니라 인화성 물질로 공포에 질린 민간인들을 태워버리기 때문이오. 
(중략) 
지상군이 근접 전투를 하는 경우라던가 공군의 지상군 지원을 위해서 네이팜탄을 사용하는 것은 괜찮소. 하지만 수많은 비무장 상태의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기위해 네이팜을 사용하는건 이와 다른 문제요. 
1952년 8월 21일 윈스턴 처칠이 영국 국방부장관에게 보낸 비밀서신. Edwin A. Martini, 'World on fire: the politics of napalm in the Global Cold War' Cold War History 16-4(2016), p.468에서 재인용.


처칠이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북한 폭격을 비판하면서 한 소리라고 하는군요. 네이팜이 잔인한 무기라는게 틀린말은 아닌데 이 소리를 처칠이 했다니까 정말 기분이 묘하군요. 다들 잘 아시다시피, 윈스턴 처칠은 2차대전 당시 독일 민간인에게 독가스를 사용하자고 주장한 일이 있습니다. 영국쪽의 요구 때문에 실제로 독가스탄을 투하하는 계획까지 수립된 바 있지요.

2016년 12월 14일 수요일

주취폭력-2



주취폭력


 우리 제3사단 제23연대는 포항을 지나 동해안을 따라 계속 북진하기 시작하여 영덕시를 점령하였다. 당시에는 확실히 몰랐는데 아마도 그때가 UN군에 의한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한 그 무렵이 아니었나 짐작된다. 아무튼 인민군은 패주하기 시작하였고 그를 추격하는 최전방의 아군부대는 중대 대대 등 전투병력과 연대본부가 거의 동시에 움직였으므로 연대장과 미고문관 Morris 대위와 함께 영덕시에 들어갔을 때에는 바로 몇 백 m 전방에서 교전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영덕시 중심가에는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쓴 플래카드가 걸린 높은 탑이 그냥 서 있었으며 그 꼭대기에는 인민공화국의 국기가 걸려 있었다. 연대장은 도끼를 가져오게 하여 그 탑을 직접 찍어 넘어뜨렸다.
 그때, 도시 뒷산으로 개미떼처럼 도망쳐 올라가는 인민군들을 육안으로 볼 수 있었으며 우리 연대 장병들은 도망가는 인민군을 향하여 총을 쏘아 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인민군들은 줄줄이 붙잡혀 와서 양손을 박박 깎은 머리 위에 얹고 길가에 꿇어앉아 있었는데, 대부분이 16세에서 20세까지의 어린 나이로 보였다.
 그때 미고문관은 나를 통하여 연대장에게 "장교는 장교임과 동시에 신사여야 한다"고 하면서 잡힌 포로들에 대한 신사적인 대우를 강조하였다. 뒤에 그 말이 "전시 포로에 대한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였지만 당시 내 마음에는 죽고 죽이는 살벌한 전쟁터에서 신사가 되라는 미고문관의 비현실성을 이해할 수가 없었으며 어딘지 위선적인 면이 있는 것 처럼 느꼈다.

 그로부터 약 4개월 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우리 제3사단이 후퇴하여 중동부 전선에 배치되었을 때의 일이 생삭난다. 연대장이 한 미고문관에게 술 한잔 하자고 권하여 일선 산속에서 간단한 술상을 차려놓고 잔을 주고받는 자리에 통역으로 동석하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연대장이 미고문관에게 "아주 질이 나쁜 적의 첩자를 두 놈 잡았는데 그놈 중 한명은 내가 직접 쏴 죽이겠다"고 하자 같이 얼큰하게 취한 미고문관이 "나도 한 놈을 쏴 죽이겠다"고 하지 않는가. 연대장과 고문관을 따라 계곡에 가 보니 거지같이 너덜너덜한 평복을 입은 두 명이 묶인 채 악을 쓰고 있었다. 연대장이 M1 소총으로 그 중 한 명을 쏘아 죽이자 잇따라 미고문관이 45구경 권총으로 다른 한 명을 쏴 죽였다.
 그중 한 명은 끝내 "인민공화국 만세!"를 울부짖으며 쓰러졌다. 평복을 입었으나 인민군이 틀림없었고 아마도 첩보수집을 하는 정보대 요원이었던 것 같았다.


조광제, 『한 직업외교관의 회상록: 나라를 생각하고 나를 돌아보다』 (나남, 2016) 50~51쪽

2016년 12월 7일 수요일

스탈린그라드 삼부작 번역 기획안을 넣었을 때 제출했던 번역문의 일부


예전에 추진했다가 실패한 일이 떠오른 김에, 6년전 출판사 몇곳에 보냈던 원고의 일부분을 올려봅니다. 스탈린그라드 삼부작의 프롤로그입니다.


********


프롤로그

수하야 베레이카 강 일대, 1942 7 23

독일군은 리쥬코프(A. I. Liziukov) 소장을 세 방향에서 조여가고 있었다. 리쥬코프의 지휘를 받는 제2 전차군단의 절반은 포위망에 갇혀 있었고 그는 이들을 구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독일군을 저지하고 있었다.

리쥬코프는 3주전 까지만 하더라도 제5전차군의 지휘관이었다. 소련군은 독일군의 기갑군단에 준하는 대규모 기계화 부대를 만들기 위한 첫 번째 시도로 제5전차군을 편성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Stavka)는 제5전차군을 전차 641대로 증강했다. 그리고 그 무렵 러시아 남부의 도시 보로네지를 막 점령한 독일 48기갑군단의 후방을 차단하기 위해 제5전차군에게 남진하여 새로운 공세를 시작한 독일군의 측면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돈 강에 인접한 주요 도시였던 보로네지는 독일군이 동쪽의 스탈린그라드와 남쪽의 카프카즈로 진격하는데 아주 적절한 북쪽의 거점이 되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전투의 중점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리쥬코프가 상대하고 있는 것은 겨우 독일군의 기갑사단 한 개 뿐이라고 믿었으며, 5전차군은 독일군 기갑부대가 강행군 중인 보병사단들의 증원을 받기 전에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어진 독일군의 선봉 기갑부대를 분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시작부터 엉망으로 꼬였다. 소련군 지휘관과 참모 장교 중에는 대규모 기계화 부대를 전투에서 운용하는데 필요한 경험을 갖춘 사람이 소수에 불과했다. 리쥬코프의 전차군 사령부는 편성된 지 겨우 6주 밖에 되지 않았고 전차군 예하의 기갑사단급 부대였던 3개 전차군단은 4월에 막 편성된 상태였다. 소련군은 한 번의 작전에서 3개 전차군단은 커녕 3개 전차여단을 연계시켜 운용할 능력조차 없었다. 세 개의 전차군단은 강력하게 공격을 집중하는 대신 7 6일부터 10일 사이에 따로 따로 전투지역에 도착해 축차적으로 투입되었다. 게다가 소련군은 300대의 전차를 보유한 2개 기갑사단과 맞닥뜨렸으며 곧 수개의 보병사단이 여기에 증원되었다. 독일군의 압도적인 제공권은 리쥬코프의 임무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리쥬코프의 상급자들은 그를 도울 방도가 없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늘 하던대로 전투를 미시적인 부분 까지 통제하려 했으며 소련군 기갑국장을 포함한 고급 장교들과 함께 구체적인 지침을 연달아 내려 리쥬코프의 행동을 직접 감독하게 했다. 그동안 제5전차군을 지휘하는 전선군 사령부(집단군에 해당하는 소련군 부대단위)는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명령을 바꾸고 있었다.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은 연달아 세명이 교체됐다. 리쥬코프와 그의 예하 지휘관들이 이 와중에 교체된 지휘관이 내렸던 지시를 따르려고 조치를 취하면 소련군 최고사령부가 비판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리쥬코프는 독일군의 주의를 끄는데 성공했고 독일군은 북쪽 측면을 방어하기 위해서 대규모의 병력과 항공기를 집결시켜야 했다. 스탈린은 이러한 성공을 전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7 15일에 전차군 사령부를 해체하고 리쥬코프를 전차군단 사령관으로 좌천시켰다.

하지만 이것은 고난의 끝이 아니었다. 브랸스크 전선군은 모스크바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림을 받으면서도 독일군에 대한 반격을 계속했는데 독일군은 북쪽 측면을 방어하기 위해서 7 20일이 되자 제9기갑사단의 지원을 받는 보병사단들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소련군은 여러 차례의 반격 끝에 7 21일에서 22일에 걸쳐 소규모의 돌파구를 열 수 있었으나 한 개의 소총병사단과 선봉을 맡은 리쥬코프의 제2전차군단에 소속된 두 개 전차여단으로 편성된 공격 부대는 곧 독일군의 보병 및 기갑 부대에게서 세 방향으로 포위당했다.

알렉산드르 일리치 리쥬코프는 유능하고 용감한 지휘관으로 1941년 모스크바 전투 당시 서부전선군의 제20군 사령관 블라소프(A. A. Vlasov) 중장의 부사령관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것을 통해 처음으로 소연방영웅의 칭호를 받은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7 23, 리쥬코프는 1942년 한여름에 3주 동안 실패만 거듭한 끝에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말았다. 브랸스크 전선군이 반격을 위해 편성한 특수작전집단 지휘관인 치비소프(N. E. Chibisov) 중장은 리쥬코프에게 독일군의 후방 깊숙히 고립된 제2전차군단의 두 전차여단을 찾아내 후방으로 안전하게 이끌고 나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리쥬코프는 7 23일 오전 9시에 군단 정치위원과 함께 KV 중전차에 올라탔다. 그는 볼샤야 베레이카에 있는 군단사령부에서 직접 전차를 지휘해 남쪽으로 향했고 수하야 베레이카 강을 건너 그의 두 전차여단을 구출하기 위해서 독일군의 보병과 기갑부대를 돌파하려 했다. 리쥬코프의 전차는 독일군 방어선에서 조금 못 미친, 188.5 고지에서 서쪽으로 몇 백미터 떨어져 있는 레뱌즈예 마을 남쪽의 숲에서 대전차포에 맞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옴싹달싹 못하게 된 전차는 독일군의 집중 포화를 맞게 되었고 리쥬코프는 전차 승무원들에게 탈출하라고 명령했다. 해치를 열고 탈출하던 도중 조종수는 기관총에 부상을 입었고 무전수는 전사했다. 리쥬코프는 전차에서 탈출하다가 포화에 휩쓸려 전사했다.

독일군은 제5전차군과 그 예하의 군단과 여단이 지리멸렬한 상태로 제각각 공격을 감행한 것을 보고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련군의 참모 역량과 지휘관들의 능력에 대한 경멸감을 더 굳혔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군이 이런 식으로 반격을 거듭했기 때문에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에 도착하기도 전에 진격의 기세가 둔화되고 약화되었다. 그리고 리쥬코프가 자살적인 돌격을 감행한 지 불과 네 달도 지나지 않아 살아남은 소련군 기갑부대 지휘관들은 그들이 독일의 적수들과 충분히 맞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었다.

데이빗 글랜츠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축약판이 나온다고 합니다


데이빗 글랜츠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삼부작은 자료집까지 포함해 다섯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했습니다. 군사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저작이긴 했습니다만 그 엄청난 볼륨은 읽는이에게 부담을 주는 면이 있었죠.

그런데 이 대작을 한권의 분량으로 압축한 단행본이 내년 봄에 나온다고 합니다.




 기존의 삼부작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연구서 중 최고수준의 내용을 담고 있는 만큼 여기에 부담을 가지고 계시던 분들은 축약본을 구매하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이 축약본도 640쪽의 두툼한 단행본이라고 합니다만 그래도 훨씬 부담이 덜 가는 분량으로 줄어들었군요.

 예전에 스탈린그라드 삼부작의 번역출간을 추진하다가 그 방대한 분량때문에 좌절한 경험이 있는데 축약본으로 재도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2016년 12월 6일 화요일

독일어 군사용어에 관한 잡담 -2


독일어 군사용어에 관한 잡담


번역을 할 때 마다 문장의 전체적 의미 뿐만 아니라 개념어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제가 번역을 할 때 취약한 점도 바로 개념어를 옮기는 데 있지요. 부분적으로 한국어 어휘의 부족을 탓할 수는 있겠지만, 어쨌거나 최종적으로는 번역자인 제 문제인 것 입니다.

독일어 Gegenstoß와 Gegenangriff가 개념적으로 명확히 구분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 입니다. 2012년에 로버트 폴리가 쓴 논문 "A Case Study in Horizontal Military Innovation The German Army, 1916–1918"를 읽고서야 독일어 용어에서 이 두 단어가 구분되는 개념이라는걸 알게 됐습니다. 폴리의 설명에 따르면 전자는 1차대전 당시 전장 상황에 맞춰 즉각적으로 실시하는 임기응변적인 역습을 지칭할때 사용하는 단어였고, 후자는 사전 계획하에 실시하는 반격에 사용하는 단어였다 하는군요.

다음에 번역할 책을 두 권 선정했는데 그 중 하나는 독일쪽 저작입니다. 역시나 몇가지 독일어 용어가 신경이 쓰입니다. 일차적으로 독한사전의 빈약한 어휘에 불평을 늘어놓다가도 결국에는 제 어휘력과 상상력의 부족이 가장 큰 문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비록 시간이 많이 걸리고 효율이 떨어지긴 하지만 번역은 여러 모로 좋은 공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016년 12월 4일 일요일

[번역글] 전차는 1918년에 영국군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을까?



불법날림번역 한 편 나갑니다. 원래 전차 등장 100주년을 맞아 기념 포스팅(?)을 하나 하려다가 정신이 없어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그냥 넘어가기는 찝찝해서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었던 논문 한편을 번역해 봅니다. 이 논문은 좀 오래된 논문인데, 1992년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27-3에 실린 팀 트래버스Tim Travers의 “Could the Tanks of 1918 Have Been War-Winners for the British Expeditionary Force?”입니다. 이 글은 1차대전 당시 전차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하는 전통적인 시각의 연구입니다. 전차 등장 100주년에 알맞은 글이 아닐까 싶네요. 이 글에서는 영국원정군 사령부가 전차 운용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상반되는 견해도 존재합니다. 관련된 글도 나중에 소개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 영국쪽 직제의 번역어는 마땅한게 생각나지 않아서 임시로 붙인게 많습니다. 적합한 번역어가 있으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번역어에 대한 조언 환영합니다.



전차는 1918년에 영국군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을까?

팀 트래버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차에 관해서는 다양한 평가와 주장이 있다. 가장 먼저 윌리엄스-엘리스Clough Williams-Ellis 소령, 풀러J. F. C. Fuller 소장, 리델 하트B. H. Liddell-Hart소령 등의 전차 옹호자들이 집필한 영국원정군 전차군단Tank Corps의 공간사에서는 전차를 제병협동전투의 한 요소였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전차야 말로 1918년의 승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혁명적인 무기체계였다는 주장을 견지했다. 하지만 그 뒤 영국 기갑병과에서는 1918년 당시의 전차에 약점이 많았고, 기계적인 신뢰성도 낮았으며, 손실율이 높았다는 점을 들어 비판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러한 비판적인 평가 중 하나로는 군사사가 존 터레인John Terraine의 주장이 있다. 그는  “1918년 당시의 전차는 기계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그것을 운용했던 인간의 관점에서 볼때 결코 승리를 가져다 준 무기가 아니었다.”라고 잘라말했다. 비드웰Bidwell과 그레이엄Graham은 터레인 보다는 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들은 전차를 보병과의 적절한 협동을 통해 운용했을때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당시 전차의 신뢰성이 부족했다는 점이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1)
 만약 전차를 올바르게 운용했고, 대량으로 투입할 수 있었다면 전차가 ‘승리의 무기’는 못 됐더라도 최소한 1918년 전역에서 보다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 하려면 밀접하게 연관된 두 가지의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첫 번째는, 1918년 당시 일련의 연속적인 공세작전을 펼칠 수 있을 만큼 많은 수의 전차를 확보해서 기계화 전략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핵심 무기체계로 사용할 수 있었는가 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1918년 전역에서 전차를 보다 효율적인 방식으로 운용했다면 더 큰 성과를 거두고 실제 역사와는 달리 막대한 손실도 없었을 것인가 이다. 만약 그렇다면 충분한 준비와 병과간 협동이 이루어진 주요 공세작전에서 전차를 보다 많이 운용했을 것이며, 공세에 투입할 수 있는 전차의 숫자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투입가능한 전차의 숫자에 대한 첫번째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기 전에, 1917년 말 부터 1918년 중반까지 영국 육군과 육군최고회의Army Council, 영국 전시 내각에서 ‘기계화 전쟁’이라고 불리게 될 전쟁 방식을 지지하는 집단과 전통적인 전쟁 방식을 지지하는 집단 간에 중요한 논쟁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 논쟁은 인력 부족 문제로 인해 시작되었는데, 캉브레Cambrai, 아멜Hamel, 아미앵Amiens 등의 성공적인 제병협동 공세로 인해 기계화 전쟁의 지지자들이 논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2)
기계화 전쟁의 지지자들은 기계화된 수단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며, 전차ㆍ항공기ㆍ기관총ㆍ박격포ㆍ화학무기와 포병에 중점을 두고 보병은  공격이나 방어시 이를 지원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전통적인 전쟁 방식의 지지자들은 보병(인력)을 중점에 두고 포병, 그리고 전차와 항공기 같은 기계들은 보병의 전진을 지원하는 보조적인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 육군은 이 두가지 주장으로 양분되지는 않았다. 많은 장교들이 두 주장 사이의 중간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 논쟁은 전쟁에 대한 태도와 관점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주장은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영국원정군 사령관 더글라스 헤이그Douglas Haig 장군은 전통적인 관점을 지지하고 있었다. 반면 군수장관 윈스턴 처칠, 전차 및 기관총 병과의 장교 대부분, 병기감Master General of the Ordnance 윌리엄 퍼즈Sir William Furse 장군, 총참모장CIGS 헨리 윌슨Henry Wilson 장군, 부참모장DCIGS 팀 해링턴Tim Harington 장군을 비롯한 집단은 기계화 전쟁을 지지했는데 기계화의 수준에 대한 입장은 상이했다.3)
기계화의 수준이 다양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중 하나는 퍼즈 장군의 입장이다. 퍼즈 장군은 공세시 보병을 대규모로 집중하는 것에 반대하고 그 대신 전차와 연막탄, 포병 활용을 늘리고 보병은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국 제1군 사령관 혼Lord Horne 장군은 1918년 6월에 다음과 같이 썼다.

“병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기계화 장비를 늘려 대응해야만 한다. 나는 이것을 기계력machine-power이라고 정의한다. 기계력이란 포병, 기관총, 자동소총, 전차를 비롯해  보병을 지원하여 적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포함한다.”

영국 제1군의 기관총 참모Machine Gun Advisor 린제이Lindsay 중령도 기계화를 지지하는 인물이었는데 그는 1918년 7월에 다음과 같이 썼다.

“미래의 공격 작전에서는 항공기, 전차와 같은 기계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며 자동화기와 박격포를 주무장으로 한 병력과 함께 작전을 펼칠 것이다.”4)

이 글에서는 해당 논쟁을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논쟁이 특히 헤이그 장군과 영국원정군사령부 단위에서 전차를 평가하고 운용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제 전차의 숫자라는 첫번째 질문으로 돌아가자. 1918년 8월 8일 부터 12일에 걸쳐 진행된 아미앵의 보전포 협동 공세 이후 비슷한 규모의 공세를 계속할 만큼의 전차가 부족했다는 통념이 있다. 이러한 통념은 아미앵 공세 당시의 전차 손실 통계로 인해 생겨났는데, 통계를 오독한 결과였다. 여러 역사가 중, 존 터레인은 그의 저서 To Win a War에서 아미앵 공세가 끝난 1918년 8월 12일 당시 가동 가능한 전차는 단 여섯대만 남아있었으며, “독일 제국을 전차 여섯대로 무너트릴  수는 없은 것 이었다.”고 평했다. 마찬가지로 비드웰과 그레이엄도 아미앵 공세당시 414대의 전차가 투입됐으나 “공세 이틀째에는 185대로 줄어들었고, 사흘째에는 85대, 나흘째에는 38대,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6대로 줄어들었다.”고 서술했다. 이 통계는 영국육군 공간사Official History에서 인용한 것이기 때문에 정확할 것이다.5)
아미앵 공세에서 전차 손실이 많았다는 점은 확실하다. 당시에 작성된 영국육군 전차군단의 기록에도 유사한 통계가 나타난다. 영국육군 전차군단이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8월 8일 공세 시작당시에는 425대의 전차가 있었으나 8월 9일에는 145대로 줄어들었고, 8월 10일에는 74대, 8월 11일에는 39대만이 남아있었다. 이것은 8월 11일까지 386대의 전차가 손실처리되었다는 의미이다.(425대 중 39대 만이 남았으므로) 하지만 이 기록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수치는 해당 날자가 시작했을때 투입할 수 있었던 전차의 숫자를 집계한 것이지, 가동가능한 전차를 모두 집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풀러에 따르면 8월 8일 저녁 당시 전차 승무원들의 상태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장거리를 진격한 끝에, 그리고 하루 종일 격렬한 전투를 치른 탓에 극도로 피로한 상태였다.(가장 많이 진격한 곳에서는 7.5마일을 진격했다.) 이때문에 다음날의 작전을 위해 혼성중대를 편성하기 위해서라도 휴식이 필요했다. 예비 전차는 몇대 없는 상태였다….”

이 글에 따르면 문제는 실제 전차 손실 보다는 예비 전차가 부족했던데 있었다. 아미앵 공세의 마지막 날이었던 8월 12일에 전차군단 본부가 작전을 중단한 이유는 전차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령관GOC, General Officer Commanding 휴 엘리스Hugh Elles 소장이 전장의 지형을 공세에 부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아미앵 공세의 마지막날 영국군은 과거 솜 전투가 있었던 지역에 도착했다.) 그래서 제10전차대대만 제3군단을 지원해 계속 작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1918년 8월 17일 전쟁성War Office이 군수산업부Ministry of Munitions에 보낸 서신을 보면 “아미앵 방면의 작전에서 포병 사격에 의해 상실된 전차는 120대에 달한다.”는 내용이 있다. 즉 실제로 여러가지 원인으로 가동불능이 된 전차가 많기는 해도 독일군에 의해 격파된 전차는 425대 중 120대 정도에 불과했다는 뜻이다.6)
이 통계는 실제로 전투 손실 처리된 전차가 통념에 비해 훨씬 적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 통계를 뒷받침 해 줄 자료가 더 있다. 이 자료들에 따르면 아미앵 공세가 끝나고 5일이 지난 뒤인 1918년 8월 17일 당시의 전차 통계를 알 수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의 영국원정군이 1918년 8월 17일 당시 보유한 가동 가능한 전차의 숫자는 다음과 같았다. 마크V(병력 수송형) 122대, 마크V 중전차 242대, 마크IV 중전차 250대, 중형전차A 휘펫 124대, 야포 견인용 전차 29대, 수송용 전차Tank Tender 175대, 르노 경전차 10대, 장갑차 16대 등 총 968대의 기갑차량이 있었다.
이 통계에는 전장에서 회수해 수리중인 것은 빠져있다. 당시 마크V 중전차 153대가 수리중이었다. 그런데 이 문서에서는 별도로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영국군이 보유한 968대의 기갑차량 중에는 당시 프랑스의 훈련소에 배치되어 훈련용으로 사용되던 차량도 포함되어 있다.7) 그렇다면 5일간의 아미앵 공세에서 가동 가능한 전차 중 많은 수가 상실되었다는 주장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실제로는 격파됐다고 간주된 전차 중 많은 수가 경미한 수준의 손상, 일시적인 전열 이탈, 혹은 기계적 고장, 연료 부족, 또는 정비를 위해 후방으로 이동 했거나 승무원의 피로로 인해 작전 수행이 불가능해 진 것을 포함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승무원의 피로가 누적되어 작전 수행이 어려워 진 것이 가장 큰 문제였을 것이다. 전차 승무원들은 보통 하루 평균 여덟시간 이상의 작전을 버틸 수 없었다. 기계적 고장이나 전차 승무원의 피로와 같은 문제들은 대부분 단기간 내에 극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8)
즉 아미앵 전투 당시 다수의 전차와 전차 승무원은 일시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며, 단기간 내에 전열에 복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완전히 전투 불능이 되어 후방의 대규모 정비소에서 수리를 받아야 했던 차량은 386대가 아니라 200대 정도였을 것이다. 아미앵 공세 당시 전차군단이 대규모의 전차로 공세를 계속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원인은 예비 전차와 예비 승무원의 부족이었다. 전차 숫자를 추정할 수 있는 다른 요소는 심각한 손상을 입은 전차를 수리하는 속도이다. 영국군의 전차 정비 기간을 알 수 있는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1918년에는 정비에 소요되는 시간이 단축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8년 8월 하순에는 일주일에 수리되는 전차가 18대 정도였고 9월 초에는 20~30대 수준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10월 하순에는 일주일에 정비되는 마크V 중전차의 숫자가 33~35대 수준으로 늘어났다.9) 아미앵 공세와 그 직후에 전차군단의 가용 전력이 회복된 데는 전차 정비의 효율이 높아진 것이 부분적으로는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지만 큰 손상을 입은 전차를 수리한 것이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에 큰 영향을 끼칠 수준은 아니었다. 아미앵 공세 이후 가용 가능한 전차의 숫자가 전차 생산량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18년 6월까지 400대의 마크V 중전차가 생산될 예정이었고, 동시에 마크IV 전차의 생산이 중단되면서 마크VIII 전차와 중형C 전차의 생산이 개시될 계획이었다. 하지만 군수산업부의 통계에 따르면 1918년 7월까지 생산된 전차는 129대에 불과했으며, 8월에는 81대가 생산되는데 그쳤다. 프랑스의 전장에 보급된 전차의 숫자는 1918년 9월 첫째주에 총 34대에 불과했으며, 10월에 배치된 숫자도 평균적으로 이 수준에 머물렀다.10)  다양한 생산차종과 영국의 노동력 및 생산 문제로 인한 전차 생산 부족은 전선에 배치된 전차의 숫자를 늘리는데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대규모 전투 직후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전차를 회수하는 것 때문에 일시적으로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전차의 높은 내구성과 전차 승무원들의 빠른 회복, 그리고 경미한 손상을 입은 전차를 신속하게 수리해 투입할 수 있는 능력 덕분에 전선에 배치된 전차의 숫자는 비교적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전차의 내구성은 전차를 완전히 파괴하고 승무원을 살상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는 점과 연관되어 있다.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된 전차는 극소수였다. 1918년 8월 8일에서 11월의 종전시까지 전투에 투입된 1,993대의 전차와 장갑차 중에서 손상을 입거나 참호에 빠져 회수된 것은 총 887대였다. 그러나 윌리엄스-엘리스와 풀러의 저작에 따르면 이중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을 입은 것은 15대에 불과했으며 완전 손실로 처리된 비율은 0.75%라는 극히 낮은 수준이었다. 비록 기록으로 남지는 않았으나, 전차군단 사령관이었던 엘리스 소장에 따르면 실제로는 이보다 약간 높은 손실율을 예측했다고 한다. 1918년 9월 5일, 엘리스는 8월 8일 부터 투입한 1,173대의 전차와 장갑차 중에서 30~40대 가량의 완전 손실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이것은 완전손실율이 2.5~3.4%라는 뜻이었다. 1918년 10월 말 엘리스는 실제로 완전 손실로 처리된 전차가 50대 정도로 완전손실율이 2.5%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어떤 통계를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더라도 손상을 입거나 참호에 빠진 전차와 장갑차는 대부분 수리를 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미한 손상은 승무원들이 직접 수리할 수 있었고 그렇지 않다면 회수하여 수리할 수 있었다. 영국군은 계속해서 진격했기 때문에 전장에 남은 전차들을 대부분 회수하는 것이 가능했다. 회수된 전차 중에서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된 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또한 1918년 10월 12일 전차군단의 기록을 보면 8월 8일 부터 전투에 투입되어 손상을 입거나 참호에 빠진 전차들은 사실상 모두 회수되었다.11)
전차와 전차 승무원들이 쉴새 없이 전투에 투입됐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배치된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는 높은 수준을 꾸준히 유지했다. 일반적으로 전쟁 말기에는 영국원정군에 가용가능한 전차가 격감했을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마크IV, 마크V, 마크V*와 중형A 전차를 모두 합쳐서, 10일간의 격전에도 불구하고 8월 30일에는 261대(마크V 127대 포함), 9월 7일에는 177대(마크V 85대 포함), 10월 15일에는 357대(마크V 125대 포함), 10월 19일에는 317대(마크V 134대 포함), 11월 9일에는 235대(마크V 98대 포함)의 전차가 가용가능한 상태였다.  이것은 훈련소에 배치된 전차와 수리중인 전차는 제외한 통계다.12) 또한 이 통계로는 고질적으로 부족했던 예비부품 문제를 파악할 수 없다. 더 많은 예비부품이 있었다면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는 더 많아졌을 것이다. 부품부족이 초래된 것은 기계화전투 보급국MWSD, Mechanical Warfare Supply Department의 앨버트 스턴Albert Stern대령의 책임이었는데, 그는 예비부품을 충분하게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차의 숫자만 늘리려 했다. 새로 생산된 전차 한대와 이에 필요한 완전한 예비 부품의 비율은 1대 3이 되는 것이 이상적이었다. 하지만 1918년 10월까지도 이 비율을 맞추지 못했다. 1917년에 추산한 바에 따르면 마크IV 전차 한대가 하루에 3마일씩 이동할 경우 14일간의 작전에 필요한 예비 부품은 20톤에 달했고, 한달간 작전할 경우에는 50톤이 필요했다. 그 결과 1916년 말 부터 1918년 말 까지 프랑스의 영국 전차군단과 기계화전투 보급국 간에는 ‘예비 부품을 확보하기 위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차군단의 전차 수리 능력은 실제로 필요한 수준에 미치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는 많은 편이었다.13)
전차의 내구성과 관련해서, 전차 자체가 생산되어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완전손실로 처리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전차 승무원은 어땠는가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전차 승무원도 대부분의 피격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918년 8월 23일의 전투에서, 한 지역에 투입된 전차 중 8대가 피격됐으나 인명 손실은 경상 1명에 그쳤다. 물론 피격된 전차가 ‘단기간 가동 불능’ 상태에 빠지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전차군단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부대였으며 이때문에 전차 승무원들은 쉴새없이 전투에 투입될 수 밖에 없었다. 이때문에 1918년 8월에는 장교의 사상율이 27.5%, 부사관과 사병의 사상율이 20.56%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것을 실제 사상자 숫자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아미앵 공세당시 전차군단의 사상자 숫자는 700여명에 불과했다. 사상율을 계산하는데는 부상, 전사, 포로가 된 인원 뿐만 아니라 일시적인 탈진, 그리고 전차의 부실한 환기로 인한 일산화탄소 중독 및 체온 상승으로 인한 손실까지 집계했다. 마찬가지로 마크V* 전차에 탑승한 보병들도 전차 내부의 과열로 인해 피해를 입었는데, 당시 전차 내부의 온도는 습구온도계 기준으로 화씨 86도에 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것은 인간이 체온 조절 능력을 상실하는 것 보다 겨우 3도 낮은 수준이었다.14)  아미앵 공세당시 전차 승무원의 사상율은 낮은 편이었지만, 만약 8월 8일 이후의 공세에서 더 많은 포병 지원을 받으면서 충분한 예비대와 함께 대규모로 작전을 펼칠수 있었다면 훨씬 더 낮아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의 서두에서 제기한 두 번째 문제로 넘어가도록 하자. 과연 1918년 당시 전차를 보다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을까?

영국원정군이 전차를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랬더라면 1918년의 전역에서 전차는 더욱 더 결정적인 병기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이유가 몇가지 있다. 전차가 보다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 첫 번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헤이그 장군과 영국원정군 사령부의 부정적인 태도에 있었다. 풀러가 지적한 것 처럼 비판의 대상은 전차 자체가 아니라 전차군단이 전차를 다루는 태도였다. 이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기계화 전쟁 방식과 전통적인 전쟁 방식을 두고 전개된 논쟁에서 헤이그 장군과 영국원정군 사령부가 취한 입장과는 별개로,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다. 전차군단은 자체적인 장성급 사령관과 참모부 조직을 갖추고 전차군단의 작전, 훈련, 정보 및 행정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전차 운용 교리와 개념을 독자적으로 개발하고 있었다. 1918년 6월, 전차군단 감찰감Director-General of the Tank Corps 캐퍼John. E. Capper 소장은 이 구조적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다른 모든 특수한 조직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상황은 전차에 관해 이렇다 할 경험이 없는 고급 지휘관들과 총참모부가 전차와 전차의 운용에 대해 제대로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 총참모부가 다른 병종과 동일하게 전차의 운용과 한계에 대해 연구하지 않는한 전차의 대규모 운용을 통해 실질적인 성공을 거두기란 어렵다.”

캐퍼 소장은 영국원정군 사령부 참모부가 전차를 병기로서 연구하고 이해하려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으며, 육군본부 참모부와 다른 고위 장성들도 전차에 대해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차군단 사령관도 포병과 마찬가지로 영국원정군 사령부에 병과 참모로 참여해야 하며, 육군본부 내에도 포병과 마찬가지로 전차병단Tank Group을 두고 고급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기갑전술학교를 세울 것을 제안했다. 엘리스 소장도 이 견해야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그동안의 가장 큰 과오는 총참모부가 전차에 관해서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으며, 이것이 육군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이때문에 각 야전군은 위로 부터 어떠한 지침도 받을 수 없었으며 받은 것은 기껏해야 제안 수준에 불과했다.”15)
이러한 조직 구조는 최종적으로 전차군단이 전장에서 필요로 한 것들이 대부분 묵살되도록 만들었다. 한 소령은 아미앵 공세와 같은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기 전에 예비 차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충분한 전차를 보급받아, 전차와 승무원을 교체해 가면서 효율성을 잃지 않고 공세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할 수 없었던 점을 지적했다. 1918년 10월, 풀러는 100%의 예비 차량이 없으면 ‘전차 부대의 전투 효율성은 전투 개시 72시간 내에 격감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풀러의 주장은 아미앵 고에 당시 가용 가능한 전차의 숫자가 격감했던 사실에서 도출한 것이었다. 비록 손실 원인의 대다수는 적의 공격 이외의 것이었지만, 리델 하트는 전차의 손실로 인해 투입 가능한 전차의 숫자가 감소했음을 지적했다. 그러므로 100%의 예비 차량을 갖추고 전차가 대규모로 공격에 투입된다면 다른 모든 요인들이 동일할 경우 전차가 큰 우위를 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충분한 예비 차량을 확보할 수 없었던 원인 중 하나는 전차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데 있었고, 또 하나는 영국원정군 사령부의 무관심 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전차의 숫자가 부족했던데 있었다. 영국육군의 공간사 저자 중 한명이었던 제임스 에드몬즈James Edmonds 준장은 전차의 부족을 초래한 원인이 전차를 소규모로 무분별하고 비효율적으로 분산 운용한데 있었다고 서술했다. 그는 이렇게 지적했다. “(아미앵 공세 이후) 공세작전에 전차를 집중적으로 투입하지 못하고, 심지어 그러한 계획조차 수립하지 못한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만약 공세 마다 충분한 숫자의 전차를 확보하고 충분한 예비 차량을 마련하는 한편, 초기 돌파를 달성한 뒤인 공세 2~3일 차에는 전차 부대를 후방으로 돌리는 등의 적절한 전술을 사용했다면 전차는 1918년의 전역에서 훨씬 큰 활약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16)

전술은 전차군단에 있어서 또 하나의 큰 문제였다. 전차는 아군 포병의 지원이 없을 경우 독일군의 포병 사격에 취약했으며, 보병의 근접지원, 연막이나 안개, 또는 여명의 보호 아래 움직여야 했으며, 기습적인 운용도 필요했다. 전차를 지원하기 위한 연막 및 포병 사격 훈련, 보병과의 사전 훈련(특히 오스트레일리아 군단이 전차와의 협동 작전에 탁월했다.) 강화, 항공기 정찰 및 적의 대전차 화점에 대한 공습 등이 실시됐다. 그러나 영국원정군 사령부와 고급 참모들은 전차를 단지 지원 수단으로 간주하고, 보병과 포병을 중시했기 때문에 전차군단의 요구 사항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이로인해 전차 부대는 필요이상으로 손실을 입었다. 예를들어 아미앵 전투 당시 제5전차여단은 공세 이틀째인 8월 9일에는 포병이 적절한 지원 사격을 해 주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제5전차여단의 보고에 따르면 이날 여명에 맞춰 연막의 보호를 받으며 공격을 시작했지만 해가 뜬 뒤에는 ‘포탄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 포병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고 공격에 나서야 했다. 이때문에 아미앵 공세가 진행되면서 전차에 대한 지원 체계는 무너지고 양적으로도 감소했다. 8월 11일 한 캐나다 여단 지휘관은 파르빌리에Parvillers 외곽에서 15대의 전차가(실제로는 16대 중 12대였다.) 단 1문, 혹은 1개 대전차포대에 의해 격파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보고를 했다. “이것은 극히 곤란한 상황에서 전차가 연달아 격파됐으며 보병의 지원을 받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엄청난 일 이지만 이걸 전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즉 전차 부대는 아무런 지원도 없이 소모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8월 21일 이후 독일군의 대전차 방어는 강화되었고, 전차 부대는 소규모의 취약한 집단으로 운용되기 시작하면서 역량 이상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러한 사례 중 하나는 전차군단의 고위 참모 장교 한명의 회고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8월 25일에 있었던 제9전차대대의 작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날 야간에 10대의 전차가 이동을 시작했다. 이 부대는 다음날 여명에 캐나다 제2보병사단과 함께 작전을 수행할 예정이었다. 전차병들은 피로한 상태였으며 정찰을 실시할 시간도 부족했고 보병과의 연락 체계도 없었기 때문에 만약 다음날 그대로 투입할 경우 성공을 거둘 수 없을 것이었다.”17)
전쟁이 끝나고 한참 지난 뒤 전차군단의 참모 장교였던 마텔le Q. Martel 장군은 일부 사단장들은 전차 부대가 할 수 있는 이상의 역할을 요구했다고 올바르게 지적했다. 하지만 전차부대 지휘관들이 이러한 요구에 반대할 경우 영국원정군 사령부와 그 예하 사령부의 지휘관들은 군기가 빠졌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사례 중 하나가 1918년 9월 27일에 캐나다 군단에서 있었다. 한 캐나다 여단장은 그의 여단에 배속된 전차가 세 대 밖에 되지 않았는데, 부를롱Bourlon 숲 외곽 까지 진출했을 때 배속된 전차 부대 지휘괸이 전차들을 후방으로 돌려 연료를 보급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전차들의 기계적 상태가 좋지 않고(마크IV로 추정) 승무원들의 상태도 좋지 않다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캐나다 여단장은 전차부대가 이렇다 할 지원을 해 주지 못했으며 전차 부대 지휘관과 그의 전차들 때문에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기는 싫었다고 비난했다.  이 여단장은 고작 세대 밖에 되지 않는 배속된 전차부대에 대해 잘 알지 못했으며, 이들의 처지를 이해할 생각도 없었다. 또 다른 사례가 있다. 제4전차여단은 1918년 9월 말에서 10월에 걸친 기동작전이 전차에 심각한 영향을 초래했다고 보고했다. 보병 지휘관들은 전차가 매일 기동하면서 받는 기계적 피로에 대해 이해하질 못했으며, 계속해서 기동을 하는 상황에서는 전차를 이틀 연속으로 운용할 수는 없다는 점도 이해하지 못했고, 네대의 전차만 투입해도 충분한 상황에서 세배나 되는 전차를 투입했으며, 단지 전차를 배속받았다는 이유 만으로 불필요하게 전차를 투입했다. 이 보고서에는 1918년 10월 5일 보르부아르Beaurevoir 마을에 대한 공격 사례를 기록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제25사단의 보병은 두 차례나 전차를 따라잡지 못했지만, 전차들은 독일군의 기관총 진지를 성공적으로 제압했다. 아마도 보병부대 지휘관들이 전차가 배속된다는 사실을 사전에 통보받지 못했기 때문에, 전차를 어떻게 운용해야 할 지 미처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 수 있다. 어쨌거나 이로 인해서 “보병과 전차 부대의 협동 작전이 이루어지지 못했다.”18)
이때문에 1918년 8월 말 부터 전쟁이 끝날 때 까지 두가지 방식의 완전히 상이한 전술이 사용됐다. 하나는 전차를 중심으로 한 기계화 전술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전통적인 방식의 전술이었다. 만약 전차가 화력 지원을 받고, 정찰 및 타 병과와의 연락을 취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보병이 전차와의 협동작전을 위해 사전에 훈련을 받은 상태였다면 전차 부대는 보병의 피해를 줄이고 동시에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공식 문건인 ‘전차부대 주간 활동 요약Weekly Tank Notes’에는 아미앵 전투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군단이 전차와의 협동 작전에 탁월했으며, “전차를 일렬 종대로 운용했으며, 전차가 돌파를 하면 그것을 곧바로 활용하여” 보병의 손실이 적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안개가 낀 상태에서 보병의 근접지원을 받을 경우 전차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으며 보병의 손실도 적었다. 이를 입증해 주는 통계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군단은 아미앵 전투 당시 전차와의 협동 작전에 탁월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캐나다 군단은 전차와의 협동에서 나쁜 평가를 받았다. 캐나다 군단의 사상자는 3,500명이었는데 오스트레일리아 군단의 사상자는 3,000명 미만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 군단은 독일군 장교 183명, 사병 7,742명을 포로로 잡고 야포 173문을 노획했는데, 캐나다 군단은 장교 114명과 사병 4,919명을 포로로 잡고 야포 161문을 노획했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 군단과 여기에 배속된 전차 부대는 인접 부대인 제3군단이 Chippily 능선을 점령하는데 실패해 이 능선의 독일군의 포격과 기관총 사격에 측면을 공격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손실이 적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19)

미시적인 단위에서 전차의 효율성을 평가할 수 있는 유용한 방법으로는 각 전차장(전차장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을 경우는 그 다음 계급)이 전투가 끝난뒤 2~3일 내에 작성하는 전투보고서Tank Battle Sheet를 분석하는 것이 있다. 전투보고서는 단차 단위의 전투에 대해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여기에는 각각의 전차가 지원한 부대, 작전 시작 및 종료 시간, 전차와 승무원의 상태, 승무원의 피해 상황, 6파운드 포탄과 기관총탄의 소모, 작전 시간, 전차와 전술 개선에 유용한 지적, 그리고 작전 진행 상황에 대한 서술 등이 실려있다. 기존의 연구들은 개별 전차의 전투 보고서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문서는 전차가 실제로 운용된 방법을 분석하는데 극도로 유용하다. 예를들어 아미앵 전투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제4보병사단과 함께 작전을 했으며, 위에서 언급한 Chippily 능선으로 부터 측면을 공격받았던 제8전차대대의 전투 보고서들을 살펴보면, 전차 승무원들은 일반적으로 아래에서 언급할 세 가지 상황 중 한가지를 겪었다. 첫 번째는 기계적 문제나 승무원의 상태 때문에 전차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한 경우이다. 예를 들자면 작전 중 전차의 기계적 문제로 인해 보병에 대한 지원에 실패했거나 아예 지원에 나서지 못한 경우라던가, 전차병들은 보병을 지원하려 했으나 차내의 연기와 열기 때문에 작전을 중단해야 했던 경우 등이다. 두 번째는 전차가 피격되거나 참호에 빠지기 전 까지 보병과 함께 좋은 결과를 얻은 경우이다. 세 번째는 전차가 피격되거나 참호에 빠지지 않고 보병과 함께 좋은 결과를 얻은 경우이다. 제8전차대대의 작전 결과를 모두 살펴본 결과 작전에 투입된 36대의 전차 중에서 8대가 첫번째 사례(기계적 문제)에 해당했으며, 16대가 두번째 사례(유용했지만 피격되거나 방기됨)에 해당되었으며, 12대가 세번째 사례(유용했으며 피해가 없었음)에 해당되었다.(1개 전차대대는 36대의 전차로 구성되었으며, 제8전차대대의 경우 마크V 전차와 6대의 훈련용 전차로 편성되었다.) 피격되거나 참호에 빠진 전차들은 거의 대부분 수리해서 다시 투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번째 사례와 세번째 사례를 합치면 제8전차대대는 잘 조직된 보전합동 작전으로 77%의 전차가 성공을 거뒀음을 알 수 있다.20)
 
그러나 전차를 평가하는데 있어 보다 위험한 방법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아미앵 공세에 참여한 전차장들이 그들의 작전을 서술한 글에서 당시의 상황과 분위기를 포착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세번째 사례에 해당되는 마크V 전차 9363호의 전차장이었던 브라운 중사의 기록을 살펴보자.(브라운 전차의 전차는 수컷형식으로 2문의 6파운드포와 4정의 기관총을 장비했다. 암컷형은 이와 달리 6정의 기관총을 장비했다.)

“오전 5시 집결지를 출발해 오전 7시 30분 공격개시선인 그린 라인에 도달했다. 오스트레일리아군 제13보병대대가 합류해 전차들을 그린 라인까지 인도했다. 작전 시작후 4시간 뒤 우리는 제13보병대대와 함께 그린 라인을 출발했다. 보병은 1/100야드의 속도로 따라왔다. 전진하는 도중 전차들이 급경사 지대를 통과할 때를 제외하면 보병들은 대형을 유지하며 잘 따라왔다. 우리는 적의 기관총과 보병들, 그리고 3문의 야포를 호치키스 기관총과 6파운드 포로 공격했다. 가까이 접근하자 적은 야포들을 버리고 달아났다. 작전을 마칠 무렵 우리는 참호가 구축된 가파른 능선에 도착했다. 나는 참호 중 하나로 들어가 약 50명의 적군을 포로로 잡았다. 보병이 도착한 뒤 총 300여명을 생포한 것으로 기억한다. 사수 한명, 홰틀링(부 조종수), 버처트(사수)가 피로와 차내의 열기로 약간 탈진했다. 작전 시작후 6시간 뒤 우리는 목표인 레드라인에 도착했다. 여기서 한시간 동안 보병이 재집결 하는 동안 우리는 전차 집결지인 던전 숲에서 반장의 지휘하에 집결했다.”21)

브라운 중사의 전차는 큰 문제 없이 작전에 성공했다. 하지만 머레이 중위의 9152호차는 이보다 운이 없었다. 이 차량의 사례는 위에서 언급한 두번째 사례에 해당된다.

“나의 전차는 오전 8시 20분 그린라인을 출발해 공격개시선 800야드 전방에서 적 보병과 조우했다. 여기서 부터 2km를 전진하는 동안 적의 기관총 진지와 보병들을 6파운드 포와 기관총으로 공격했다. 남북방향의 배수로에 도착했을때 … 은폐된 기관총 진지에서 완강하게 저항하는 적을 마주쳤다. 하지만 아군은 아무 손실 없이 보병을 적 기관총 진지로 돌입시켰다. 작전 지역의 지형 문제와 함께 내가 전차의 바깥에서 차량을 지휘해야 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이무렵 승무원 중 네명이 차내의 열기와 배기가스 때문에 탈진했고 주포를 조작할 수 없었다. 결국 내가 직접 6파운드 포를 조작해야 했다. 이때 전투가 가능한 승무원은 조종수, 사수 한명과 나 뿐이었다. 레드 라인으로 진격하면서 수많은 적을 쓰러트렸으며 레드 라인도 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나는 보병의 최종 목표로 전진했으며, 200야드 앞에서 50명 정도의 적을 포로로 잡았다. 이때 나는 좌익의 보병이 원래 목표에서 다소 못미친 지점에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나는 보병들에게 가서 지원을 부탁했으며 보병들은 전진했다. 나는 다시 전과확대선인 블루 라인으로 전진해 몇개의 적 참호를 마주쳤다. 조준 사격을 하자 참호에서 무장한 적 몇명이 나타났으며 내 조종수와 나는 15야드 거리에서 권총 사격으로 9명을 사살했다. 나머지 적 30여명은 항복했으며 나는 포로들을 아군 보병에게 인계했다. 그리고 나는 다른 마크V 전차들과 함께 계속 전진하다가 직격을 맞아 승무원 한명이 전사하고 네명이 부상당했다. 또 다른 명중탄으로 한쪽 궤도가 끊어졌다. 결국 나는 아군의 집결지로 돌아갔다.”22)

머레이 중위의 전차는 직격을 당할때 까지 먼 거리를 진격했는데, 이것은 두번째 사례에 속하는 다른 전차들도 비슷했다. 하지만 첫번째 사례에 속하는 전차의 전차장들은 기계적 고장으로 인해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조종수와 부조종수가 열기로 인해 탈진해 전차를 후퇴시켰다고 보고한 암컷형식인 9385호차의 전차장 셔우드Sherwood 중사와 같은 보고 사례도 있었다. 실제로 많은 전차장들이 차내의 열기와 탈진에 대해 보고했다. 하지만 제8전차대대의 전투보고서들을 분석해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점은 전차가 아미앵 공세가 성공하는데 있어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특히 독일군의 기관총 진지를 격파해 오스트레일리아군 보병의 손실을 줄이는데 기여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성공을 거둘수 있었던 원인은 오스트레일리아 제4보병사단의 작전 구역에서는 전차와 보병의 상호 지원이 잘 이루어졌으며, 전투보고서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했을때 전차가 보병을 선도하고 보병은 전차의 150~200야드 후방에서 근접하여 전진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Chippily 능선의 독일군이 측면에서 큰 피해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기습효과와 안개, 그리고 연막으로 제8전차대대의 작전은 성공적이었다.23)

마지막으로, 전차를 중심으로 한 전쟁 수행방식의 효율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사상자 통계를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아미앵 공세당시 영국원정군의 인명손실은 22,000명이었는 데, 전차의 지원 없이 작전한 프랑스 제1군의 사상자는 24,000명이었다. 8월 21일에서 9월 17일 사이에 영국원정군의 보병과 기병 사상자는 105,943명이었는데, 8월 1일 부터 31일 시기에 가용가능했던 전차의 숫자는 1,184대였다. 그리고 9월 18일에서 11월 11일까지 영국원정군의 보병 및 기병 사상자는 158,440명이었는데 9월 1일에서 10월 20일 사이에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는 706대로 줄어들었다. 비록 기간이 완전히 같지는 않고 다른 변수도 고려해야 하지만 이와같이 대조되는 통계로 미루어 볼때 잘 준비된 대규모의 보전포 협동 작전이 적은 숫자의 전차의 지원을 받는 보병 공격보다 적은 수의 사상자를 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차군단이 아미앵 공세에서 입은 사상자는 앞서 언급한대로 대략 700명 정도였으며, 8월 8일에서 10월 10일 까지의 사상자는 총 3,188명이었다.24)
그리고 군수참모부의 자료Munutions files에 있는 일련의 통계자료들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를들어 1918년 7월 아멜Hamel에서 실시된 보전포 협동 작전에서 전차 2개대대의 지원을 받는 보병사단 한개는 전차의 지원이 없는 3개 보병사단에 필적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풀러도 1918년 7월에 낸 전차의 효율성에 대한 연구에서 전차를 중심으로 한 전투 수행 방식이 사상자를 크게 줄인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1918년 9월에 기계화 장비 보급 부부장ACMS, Assistant Controller of Mechanical Supply 데이비슨G. F. Davidson은 1,000야드의 공격정면에서 공격을 감행하려면 1야드 당 여러명의 소총병과 함께 1,000,000발의 소총탄이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10대의 전차만 배속시킨다면 전차 한대당 10명의 보병만 배속시키고 탄약 소모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했다.25)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 두 가지의 질문을 제기하려고 한다. 과연 1918년 전역에 기존에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많은 전차를 투입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1918년 전역에서 전차를 보다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을까?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아미앵 공세 직후 968대의 가용 가능한 전차와 장갑차가 있었으며, 아미앵 전투 부터 종전시 까지 가용가능한 ‘전차의 숫자가 많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전차의 숫자가 많았다’는 표현은 가용가능한 전차의 수가 충분했다는 것을 뜻하며, 아무런 계획 없이 마구잡이로 전차를 투입하는 대신 전차를 아껴서 사용하고 충분한 숫자를 모을 수 있었다면 1918년 말에도 대규모의 보전포 협동 작전을 펼칠 수 있을 만큼 많은 수의 전차를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적절한 운용이 무엇이냐는 두 번째 질문을 제기한다. 이에 대한 답은 충분한 예비 전차를 확보하고 전차에 대한 지원을 충분히 하는 상태에서 공세 시작 2~3일차 까지만 전차를 투입했다면 전차는 아미앵 전투 당시처럼 1918년 말에 있었던 일련의 대규모 공세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영국원정군 총사령부와 고위 지휘관들의 태도가 바뀌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1918년 8월 말 생포된 한 독일군 장교가 진술한 것 처럼, 영국군이 보전포 협동 공격을 해 올 경우에는 독일군의 방어선이 대부분 붕괴됐다. 하지만 이 포로는 다른 방식은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다고 평가했다.26) 이 주장을 입증하는 자료는 많다. 하지만 전차군단을 다른 방식으로 운용하고 지원을 했다면 어떤 결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완벽한 답을 할 수 는 없다. 그렇지만 전차만 가지고 전쟁을 승리할 수 는 없었지만 전차 덕분에 보병의 희생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는 주장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자료는 많다. 그리고 캉브레, 아멜, 아미앵에서 실시한 기습적인 보전포 협동 공격이 거둔 성공을 가지고 평가한다면, 전차는 적합한 지형이라면 어디에서건 돌파에 성공하여 기동전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1918년 당시의 전차는 기계적 신뢰성이 낮았고 전차 및 예비 부품 생산도 문제가 있었으며, 1939~40년 시기의 전차가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에 비교하기도 어렵다. 또한 1918년에 전차를 통해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영국의 동맹군들도 비슷한 수준으로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물론 1917~1918년 시기 전차의 문제가 기계적인 요소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요소에도 기인했으며, 정신적인 문제가 영국원정군 사령부와 전차의 중요성에 반대해 전차군단의 인력과 물자를 감축하려 한 고위 지휘관들에 기인하는 것이냐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만약 전차를 낭비하지 않고 적적하레 운용하는 한편 최고사령부 단위에서 전차 부대에 충분한 지원을 해 줬다면 전차는 훨씬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며 1918년에 연합군의 승리를 훨씬 더 적은 희생으로 앞당길 가능성도 있었다. 전차만 가지고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한 것은 아니며, 전차군단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주장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좀 더 공정하게 평가 한다면, 철학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전차는 반드시 필요한 무기였지만 1918년에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 꼽기에는 충분치 못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석
1. Major Clough Williams-Ellis and A. Williams-Ellis, The Tank Corps (London 1919); Brevet Colonel J.F.C. Fuller, Tanks in the Great War, 1914-1918 (London and New York 1920); Captain B.H. Liddell Hart, The Tanks. The History of the Royal Tank Regiment and its Predecessors, Vol. 1, 1914-1939 (London 1959); John Terraine, To Win A War. 1918. The Year of Victory (London 1978, Papermac edition, 1986), 117; the same idea is noted in Terraine, White Heat. The New Warfare, 1914-1918 (London 1982), 224, and in Daniel Dancocks, Spearhead to Victory: Canada and the Great War (Edmonton 1987), 556; Shelford Bidwell and Dominick Graham, Fire-
Power, British Army Weapons and Theories of War, 1904-1945 (London 1982, 1985), 137. A recent book, which emphasizes the problems of tank production is A. J. Smithers, A New Excalibur: The Development of the Tank, 1909-1939 (London 1986). 또한 David Fletcher, Landships: British Tanks in the First World War (HMSO:403 London 1984), 와 Fletcher in J.M. Winter, The Experience of World War I(London 1988), 100도 참고하라. 플레처는 “전차로 인해 전쟁에 승리했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하지만 전차는 참호전이라는 교착 상태에 해답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2. 이 논쟁은 Tim Travers, 'The Evolution of British Strategy and Tactics on the Western Front in 1918: GHQ, Manpower and Technology'.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54, 2 (April 1990), 179 ff.에서 다루고 있다.
3. ibid.
4. W.T. Furse, MGO, 'Notes on the Report of a Conference', 17 December 1917, J.F.C. Fuller papers, 1/299, Liddell Hart Centre for Military Archives, King's College, London University (hereafter KCL). General Lord Home, GOC First Army, to GHQ, 16 June 1918; and Lindsay to HQ, First Army, 2 July 1918; in 'Pr6cis of Lectures' by Lindsay on the Machine-Gun Corps, December 1918, Lindsay Papers, Royal Armoured Corps Tank Museum, Bovington, Dorset.
5. Terraine, To Win a War, 116; Bidwell and Graham, Fire-Power, 137; Brigadier-General Sir James Edmonds, Military Operations France and Belgium, 1918 (London 1947), vol. 4, 517, and vol. 5, 95.
6. 아미앵 공세 시작 당시 공식적인 전차 숫자에 대해서는 Tank Note #7, in MUN 4/4979/2, Public Record Office, Kew Gardens (hereafter PRO). J.F.C. Fuller, Tanks in the Great War. 224. For Elles on 12 August 1918, Minutes of Tank Corps Conferences, 12 August 1918, WO 158/840, PRO. For numbers lost to artillery fire, see Cubitt (War Office) to Ministry of Munitions, 17 August 1918, MUN 4/2799, PRO.등을 참고하라.
7. 'Return of tanks, week ending 17th August 1918', signed by J. Keane, Assistant Director of Artillery, MUN 4/348, PRO.  An exactly similar return for the week ending 19 August 1918 occurs in MUN 4/4979, PRO에는 1918년 8월 19일을 종결일로 하는 한 주간의 보고 내용이 실려있는데 거의 동일하다.
8. 5th Tank Brigade, 'Report of Operations with Australian Corps from 8 August to 15 August, 1918, Supplementary Report', vol. 4, 1/259, J.F.C. Fuller Papers, KCL.
9. Tank Note #4, concerning 21-25 August 1918, MUN 4/4979/2; Tank Board Committee, 5 September 1918, and 24 October 1918, MUN 4/4949/4; PRO.
10. Official M.W.D. '[Mechanical Warfare Department] Programme, 1st April 1918 to 30th March 1919'. MUN 4/348; 'Comparative Tables Showing Estimates of Tank Production 27 February 1918 and September 1918'. MUN 4/2801. On tank delivery, Tank Board Committee, 12 September 1918, and 10 October 1918, MUN 4/4979/4; PRO.
11. 전차 손실 통계는 Williams-Ellis, The Tank Corps, 271; Fuller, Tanks in the Great War, 286-7; and Major-General Elles, speaking at the Tank Board Committee, 5 September 1918, MUN 4/4979/4, PRO를 참고하라. 풀러는 같은 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8월 8일 부터 21일 까지의 전차 통계를 정리했다. 회수한 장비의 통계는 Tank Note #10, 12 October 1918, MUN 4979/2, PRO를 참고하라.
12. 전차 숫자는 'Weekly Tank State' figures in MUN 4/6400, PRO, except for the 15 October figures which come from History of the Ministry of Munitions (HMSO: London 1922), 12 volumes, vol. 12, part 3, 69에 실린 자세한 통계에서 인용한 것이다.
13. 스턴에 대한 불평은 Liddell Hart, Talk with Sir John Keane (Assistant Director of the Artillery in 1918), 9 November 1947, 11/1947/20, Liddell Hart Papers, KCL을 참고하라.; 필요한 예비 부품 통계는 Lt.-Col Searle (Technical Advisor to Heavy Branch, Machine-Gun Corps [forerunner of the Tank Corps]). 'Report on Tanks', 24 March 1917, WO 158/838, PRO를 참고하라.; 예비 부품의 부족에 대한 불평은 Elles to Capper (Director-General Tank Corps), 26 April 1918; Capper to Elles, 29 April 1918; and Elles to Capper, 15 June 1918; WO 158/816, PRO을 참고하라.; 그리고 2년 뒤 예비부품 문제를 해결한 것은 Fuller to Tank Board, no date, in Tank Board Committee, 10 October 1918, MUN 4/4979/4, PRO를 참고하라.
14. Weekly Tank Note #4, Concerning Operations 21-25 August, 1918; 사상자의 백분율통계는, Weekly Tank Note #10, 12 October 1918; MUN 4/4979/2를 참고하라.; 마크V전차의 차내 과열 문제에 대해서는 Tank Corps HQ Report, 21 September 1918, MUN 4/4979/4를 참고하라.; 아미앵 전투 당시 전차군단의 사상자에 대해서는 Major-General Elles to GHQ, 20 October 1918, WO 95/94; PRO를 참고하라.
15. Fuller, Tanks in the Great War, xviii. Major-General Sir J.E. Capper to Elles, 'Proposed reorganization of the Tank Corps to bring it more into the Army', 18 June 1918; and Elles to Capper, 23 June 1918; WO 158/816, PRO.
16. J.F.C. Fuller to Tank Board, no date, in Tank Board Committee, 10 October 1918, MUN 4/4979/4, PRO; Edmonds, Military Operations France and Belgium. 1918, vol. 4, 156; Liddell Hart, The Tanks, 184.
17. 5th Tank Brigade. 'Report of Operations with the Australian Corps from 8 August to 15 August 1918', Appendix G; and 'Report on Operations with the Australian Corps, 23 August 1918', 4; vol. 4, Tank Corps Operations, 4th and 5th Brigade, J.F.C. Fuller Papers, 1/259, KCL. Brigadier-General Griesbach to 1 Canadian Division, 'Lessons from the recent fighting', 24 August 1918, 5, vol. 5, Griesbach Papers, MG30 El5, Public Archives, Canada. Major Hotblack (GSO 1,
Tank Corps HQ), '3rd Tank Brigade State [includes 9th Tank Battalion] 8pm 25 August 1918', 25 August 1918, WO 95/94, PRO.
18. Liddell Hart, Talk with General Martel, 29 March 1948, 11/1948/7/, Liddell Hart Papers, KCL. Brigadier-General Victor Odlum, GOC I th Canadian Brigade, 'Narrative of Operations . .. from September 27th to October 2nd, 1918', 4 December 1918, 2, vol. 22, Odlum Papers, MG30 E300, Public Archives, Canada. 4th Tank Brigade, 'Report on Operations, September 27 to October 17, 1918', 11, vol. 4, Tank Corps Operations, 4th and 5th Tank Brigades, J.F.C. Fuller Papers, 1/259, KCL.
19. Weekly Tank Notes #2 and #3, referring to Amiens, 8 August to 12 August 1918, MUN 4/4979/2, PRO. Terraine, To Win A War, 111.
20. 8th Tank Battalion Battle Sheets, Tank Museum, Bovington.
21. Ibid.
22. Ibid.
23. Ibid. Liddell Hart, The Tanks, 180-1.
24. Liddell Hart, The Tanks, 185, for French and BEF Amiens figures. The other statistics come from Edmonds, Military Operations France and Belgium, 1918, vol. 5, 562; 'Operations on the Western Front', Green File, 2, 'Total Estimated Casualties', Lawrence Papers, National Library of Scotland; Major-General Elles to GHQ, 29 October 1918, WO 95/94, PRO.
25. Tank Statistics, MUN 4/6400; J.F.C. Fuller, 'Notes on Tank Economics', 25 July 1918, MUN 4/4979/27; G.F. Davidson, ACMS, 'Comparison of Utility of Armament, CMS', 18 September 1918, MUN 4/6400; PRO.
26. General Sir John Coleridge to Edmonds, 12 March 1938, recalling the statement of the German officer captured on 21 August 1918, CAB 45/184, PRO.

2016년 11월 23일 수요일

영국 공군의 불필요한 활약


독일 군사사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토로하는 고통은 1945년 영국 공군의 포츠담 폭격으로 독일 육군문서보관소가 파괴되어 수많은 사료가 소실되었다는 점 입니다. 이것은 현재 연대급 단위의 미시적인 부대기록까지 충실하게 남아있는 미국이나 영국, 러시아와 대비됩니다.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2차대전 시기만 하더라도 사단급 기록조차 1944년 이후로 넘어가면 양이 급감하는 경향이 나타나니까요.

아래의 문서들은 미국 NARA소장 독일 노획문서 RG242 T315 R111의 독일 제3기갑사단 작전참모처 문서(원 소장번호 W1029a~W1029-5)의 일부입니다. 불 붙은 사단일지를 간신히 살려놓은 것을 알수 있는데 이것과 함께 수집했던 4기갑사단 일지의 경우는 상태가 더 좋지 않습니다.




2016년 11월 8일 화요일

판터 관련 서적에 관한 잡담


 판터에 관심이 많아서 관련된 책을 꾸준히 모으는 중인데 올해 출간된 Abteilung502 출판사의 Panther: External Appearance & Design Changes(로디 맥두걸, 마틴 블록 공저)은 흥미로운 정보가 많지만 제 관심사인 생산 및 제작공정에 관해서는 살짝 비껴가는 애매한 물건이었습니다. 각 형식의 공장별, 생산 시기별 외형 변화를 분석하는데 초점을 맞춘 책이어서 그런지 외형에 대한 연구를 제외하면 눈에 띄는 새로운 정보가 없습니다. 물론 외형의 변화에 대한 연구 측면에서는 지금까지 나온 판터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최신의, 가장 훌륭한 저작입니다만 이런 정보는 디테일을 추구하는 모델러들에게 적합한 내용이지요. 물론 저도 재미로 모형을 즐겨만들고 특히 판터 조립을 좋아합니다만, 이 책에 소개된 수준으로 디테일한 조립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그럴 실력도 시간도 없지요^^

 개인적으로는 2년 전에 Schneider Armor Research에서 나온 프랑크 쾰러의 Panther: Meilenstein der Panzertechnik에 좀 더 좋은 평가를 하고 싶습니다. 프랑크 쾰러는 판터 복원 및 정비에 직접 참여한 경력자 답게 기술적인 측면에서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형식별로 서술하는 기존의 판터 관련 저작들과 달리 엔진, 변속기, 유압계통 등 전차의 구성품 별로 설명하는 개성있는 구성을 가지고 있지요. 특히 엔진, 변속기 등 주요 구성품의 기계적 수명을 정리한 부분이 꽤 유용합니다. 무기 체계의 신뢰성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만 그 체계를 이루는 각 구성품의 기계적 특성에 대한 이해 없이 두리뭉실하게 '신뢰성이 높다' '신뢰성이 낮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걸 생각하면 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프랑크 쾰러는 페터 뮐러와 에디 에버를 두 사람이 함께 집필해 출간 예정인 두 권짜리 저작 Panzerkampfwagen Panther, Von allen Gegnern gefürchtet에도 참여했는데 이 책은 어떤 구성일지 궁금합니다. 아마 페터 뮐러와 볼프강 치머만 공저 Sturmgeschütz III. Rückgrat der Infanterie와 유사한 구성이리라 추측합니다. (Sturmgeschütz III. Rückgrat der Infanterie는 영어판도 있죠.) 프랑크 쾰러나 페터 뮐러는 선배격 연구자들과 비교하면 주석을 충실하게 달아 다른 사람들이 독자적으로 연구를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물론 종합적인 측면에서는 토마스 젠츠의 Germanys Panther Tank: The Quest for Combat Supremacy, 발터 슈필베르거의 Panzer V Panther und seine Abarten가 여전히 유용합니다.  판터의 각 형식별로 기술적 특성, 생산 및 배치를 종합적으로 설명하는 구성은 매우 모범적입니다. 물론 이 두사람은 주석을 제대로 달지 않는다는 결점이 있긴 합니다만. 어쨌거나 슈필베르거와 젠츠 두 사람이 독일 전차에 대한 기본적인 연구를 충실하게 해 놓은 덕분에 개설서로서 이 두 권의 책을 뛰어넘을 만한 책은 앞으로도 나오기 어려울 듯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외형의 변화를 자세하게 파고든 로디 맥두걸의 저작은 꽤 개성있는 저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게는 좀 애매한 존재입니다만^^




2016년 10월 28일 금요일

이번에 번역한 『전쟁론 읽기』에 대한 지적


감사하게도 얼마전 번역한  『전쟁론 읽기』에 대한 전문가 분들의 지적을 받았습니다. 부끄럽게도 번역자인 저의 『전쟁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데서 기인한 것들입니다. 지적받은 문제들을 충분히 검토하고 수정이 필요한 것들은 추후 2쇄 발행 등 정정할 기회가 있으면  반영하여 보완하도록 하겠습니다. 2쇄를 발행할 만큼 판매가 되면 좋겠군요.

확실히 '이론'을 다루는 책은 번역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2016년 10월 27일 목요일

이 블로그도 10년이 됐군요

구글 블로거로 옮긴지 10년이 됐습니다. 네이버 블로그까지 포함하면 블로그를 굴린게 13년 정도 되네요. 처음 네이버에서 블로그를 하다가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아 이글루스로 옮겼다가 10년전에 구글 블로거로 옮겨서 오늘에 이르게 됐습니다. 요 몇년새 먹고사는 일 때문에 포스팅이 뚝 떨어지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그동안 굴려온 관성으로 굴러가긴 하는군요. 재미있는 자료와 책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으니 블로그에 올릴 소재가 떨어질 일은 없을 겁니다. 제 시간이 문제죠. 으흐흐. 한 1년 책이나 읽으면서 블로그질이나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원래는 10주년을 맞아 블로그 오시는 분들께 책도 돌리고 맥주도 한잔 하는 자리를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먹고사니즘의 압박에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최소한 책 나눠드리는 자리는 숨통 트이는대로 마련해 보고 싶네요. 어쨌거나 10년동안 굴리다보니 꽤 애착이 가는 블로그라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계속 굴려가고 싶습니다. 이 별볼일 없는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16년 10월 21일 금요일

역사서술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관점을 보여주는 언론기사 하나

오늘 흥미로운 언론기사를 하나 읽었습니다. 중국 법원이 설사 '학문적 목적'이 있다 하더라도 '역사적 영웅'들을 모독하는 행위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는 소식입니다. '국가적 신화'에 의문을 제기하는 행위 자체를 뿌리뽑으려는 아주 졸렬한 태도인데,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군요.




특히 이 기사에서 다음 부분이 의미심장합니다.


청신원(程新文) 최고인민법원 민사1부 재판장은 "학술연구, 상업적 판촉 등을 명분으로, 인터넷 매체들을 주수단으로 삼아 영웅적 인물을 비방, 모욕하거나 그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명예를 훼손하고 타인의 정신적 가치를 약화하는 데서 나아가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을 해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각 법원이 판결을 통해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의 정신을 명백히 밝혀 사회의 영웅 숭상, 수호, 학습, 관심을 이끌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중국공산당의 집권을 합리화하는 신화 중 다수가 심각한 수준의 역사왜곡에 기반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발언이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경직된 분위기가 외국에서 활동하는 중국인 학자들이나, 중국 학자들이 외국에 발표하는 저술에도 악영향을 끼칠 것이 걱정이 됩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리샤오빙(李小兵)의 China's Battle for Korea: The 1951 Spring Offensive를 읽고 인민해방군 출신의 연구자도 해외에서는 자국 군대의 한계를 비판하는 등 꽤 자유롭게 발언을 한다는 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었는데, 이런 연구자들이 중국 본토의 이런 퇴행적 기류에 휩쓸리진 않았으면 좋겠네요.


사족 하나- 위에서 언급한 리샤오빙의 China's Battle for Korea: The 1951 Spring Offensive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내용이 많습니다. 중국인민지원군의 1951년 5차 공세 패배 당시 인민해방군 내의 심각한 군기이완(장교 살해, 집단 탈영 등), 미군이나 영국군과의 교전에서 발생한 심각한 손실을 지적하는 점 등 솔직한 서술이 인상적입니다.



독일어 군사용어에 관한 잡담


 외국어의 개념을 한국어로 옮긴다는건 꽤 골치아픈 문제입니다. 외국어 단어는 그 단어가 사용되는 사회의 역사적-문화적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다른 언어로 옮길때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꽤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아는 분과 독일어 군사용어에 관해 이야기를 하다가 이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예를들어 저는 Landwehr를 그대로 직역해서 '향토방위대'라는 단어로 옮겼는데 진중근 중령님은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에서 이것을 '지방군'으로 옮기셨습니다. '지방군'으로 옮기는 쪽이 영미권의 민병대로 부터 영향을 받은 Landwehr의 성격을 보여주는데 적합합니다. 문제는 Landwehr를 '지방군'으로 옮길경우 Landsturm을 어떻게 옮겨야 할 지 마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는 겁니다. 잘 아시겠지만 프로이센의 병역법에서는 현역을 보조할 예비군으로서 Landwehr와 Landsturm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Landsturm은 2차대전 시기의 '국민돌격대'와도 이어지게 되지요. 그래서 저는 일단 Landwehr는 '향토방위대'로, Landsturm은 '향토돌격대'로 옮겼습니다. 아마도 당분간 저는 계속해서 이 용어를 사용할 것 같습니다.

 현재 독일 연방군이 사용하는 용어는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에서 한국어로 옮긴 것이 있습니다만, 2차대전과 그 이전의 과거에 사용되던 역사적인 군사용어 중에는 우리말 번역이 까다로운 것 들이 많습니다. 독일어 사전에서 제대로 다루고 있지도 못하고요. 군사번역을 하는 다른 분들과 번역자들이 공유해서 사용할 수 있는 용어집을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를 가끔 하긴 합니다만 아직까지 제대로 추진하고 있질 못 합니다. 뭐, 저도 번역이 본업은 아니니까요. 군사용어 위키를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하신 분도 계신데, 만약 실행할 수만 있다면 이게 가장 좋은 방안이 될 것 같습니다.

2016년 9월 29일 목요일

한국전쟁 시기 공산군의 F-86 운용?


정보문서들을 읽다 보면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이런 이야기 중에는 나중에 사실로 드러난 것도 많고, 단순한 착오나 역정보로 드러나는 경우도 많지요. 아래에서 인용하는 미공군 정보보고의 진위는 제가 아직 확인하지 못했는데, 그래도 꽤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생각되어 소개를 해 봅니다.


적군이 F-86 기종을 운용할 가능성

(1952년) 9월 26일 15시 30분경 정주(定州) 남서쪽 5마일 지점 상공 22,000피트에서 두 대의 F-86이 적대적인 F-86 한대로 부터 사격을 받았다. 피해는 없었다. 
이 두대의 F-86은 같은 날 15시 35분경 순천(順川) 서쪽 5마일 지점 상공 28,000피트에서 다시 적대적인 F-86 한대로 부터 공격을 받았다. 아군을 공격한 항공기에는 뚜렷한 표식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조직에 속한 것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아군의 F-86한대가 오른쪽 주익에 경미한 손상을 입었다. 두 차례의 공격 모두 같은 F-86이 한 것으로 추정된다. 

9월 29일 13시 45분경 신의주 동쪽 30마일 지점에서 본대와 떨어져 비행 중이던 한 대의 F-86은 후방에서 접근 중이던 두 대의 F-86과 합류하려다가 선두에 있던 F-86이 기종을 알 수 없는 항공기에 사격을 가하는 것을 목격했다. 같은 시각 아군의 F-86한대는 두 대의 F-86으로 부터 공격받고 있다는 보고를 했다. 아군의 손실은 없었다. 

극동공군사령부 정보참모부는 과거에도 적대적인 F-86으로 부터 공격받았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최초의 보고는 1952년 2월 3일에 있었다. 

공군본부 정보참모부의 평가: 9월 18일에 전투 지역에 있던 한대의 T-6과, 같은 지역에 있던 네 대의 F-80은 공격을 가하지 않는 한 대의 F-84와 조우했다. 직후 검증을 거친 결과 그 시각 해당 장소에는 아군의 F-84가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같은날 아군의 F-86 한대가 구성(龜城) 상공에서 두 대의 F-80을 목격했다. 직후 제5공군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그 시각 해당 장소에는 아군의 F-80이 없었다. 그러므로 확실한 증거를 확보해 입증하거나 이 정보가 잘못됐다는 점을 밝힐 수 없는 이상, 공산군 측이 소수의 F-80, F-84, F-86을 재생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난 2년간의 전쟁으로 적군의 점령지역에 많은 수의 해당 기종이 추락했기 때문에, 아군의 기종을 재생하는데 충분한 부품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Directorate of Intelligence USAF, Daily Korean Resume”(1952. 10. 1), Record Group 341: Records of Headquarters U.S. Air Force (Air Staff), 1934 - 2004,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Director of Intelligence, Office of the Deputy Chief of Staff, Operations 1942~56. p.2,


2016년 9월 23일 금요일

제가 번역한 책이 한 권 나왔습니다.


그동안 블로그에는 제가 번역한 책 이야기를 거의 안했던 것 같습니다만, 이번에는 책 광고를 좀 해야 겠습니다^^



이번에 번역한 책은 유명하지만 읽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그 『전쟁론』의 해설서입니다. 저자인 베아트리체 호이저 박사는 영어권에서 활동하는 독일인 연구자입니다. 책은 영어판이 먼저 나왔고 독일어 증보개정판은 몇년 뒤에 나왔습니다. 한국어판은 독일어 증보개정판을 옮긴 것 입니다.

번역 자체는 꽤 일찍 시작했는데 개론서라 그런지 다루는 범위가 넓어서 번역하는 동안 애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영어로 된 책은 몇권 번역했습니다만 독일어 책은 처음이라 시행착오가 많았습니다. 오히려 이 책 보다 늦게 시작한 책이 먼저 나오는 참사(?) 까지 있었지요. 제가 지금 연구하고 있는 총력전, 국민동원을 다룬 부분은 비교적 쉽게 번역한 편이지만 뒤로 가면서 냉전기 핵전략 등 평소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내용이 나오고는 꽤 애를먹었습니다. 역시 개설서를 쓰거나 번역하려면 많은 공부가 뒷받침 돼야 한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번역을 하면서 『전격전의 전설』로 유명한 진중근 중령님 등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또한 일조각의 편집자 분께서도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영어판과 독일어판의 몇몇 오류를 한국어판에서 바로잡을 수 있었는데 이것은 거의 대부분 일조각 편집부의 꼼꼼한 교정 덕분이었습니다.

다만 번역을 꾸준히 하면서도 실력은 제자리 걸음인 번역자가 문제겠습니다(;;;;;) 꽤 신경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직역투의 문장이 여전히 보이고, 명사를 옮기는데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꽤 많은 개념, 용어가 등장하는데 몇가지는 일본식 용어가 그대로 사용됐습니다. 감수자 분들의 지적이 있었습니다만 역자의 역량 부족으로 한계가 있었습니다. 감수자분들이 지적해 주신 사항이 많은데 역자주와 같은 부분은 모두 반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지면의 제한, 역자의 역량 부족 등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원서 자체는 매우 재미있는 좋은 개설서 입니다. 이제 심판의 날이 왔으니 독자분들의 심판을 달게 받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