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pril 30, 2008

장군님의 감자혁명!

북조선의 력사과학 2003년 1호에는 ‘감자농사혁명을 승리에로 이끄시는 위대한 령도’라는 글이 하나 실렸습니다. 이 글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90년대부터 감자 생산량 증대를 위해 노력한 결과 큰 성과를 거뒀다는 내용인데… 그 감자혁명의 시발점은 1998년이라고 합니다.

오늘 강성대국건설의 새로운 비약이 나래치고 있는 내 나라, 내 조국땅우에 감자농사혁명의 새 력사가 펼쳐졌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지펴 주신 감자농사혁명의 불길은 온 나라 협동벌의 이르는 곳 마다에서 더욱 세차게 타 번지고 있다.
우리 인민의 식량문제해결에서 커다란 전환을 안아 오고 있는 감자농사혁명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원대한 구상과 선견지명, 빛나는 예지와 현명한 령도속에 펼쳐 지게되었다.
1990년대 후반기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감자농사를 잘 하는 것을 강성대국을 건설하기 위한 중요한 과업의 하나로 보시고 감자농사혁명의 새로운 구상을 펼치시였으며 대흥단군을 현지지도하시면서 감자농사혁명의 장엄한 포성을 울리시였다.
주체 87(1998)년 10월 1일 선군혁명령도의 바쁘신 속에서도 머나먼 북방의 대흥단벌에까지 찾아 오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감자농사에서 혁명을 일으킬데 대하여>라는 력사적인 담화를 하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감자농사에서 혁명을 일으켜 먹는 문제를 풀려고 하는 것은 우리 당이 내놓은 중요한 방침입니다. 우리 당은 농업생산을 추켜 세우기 위하여 감자농사에서부터 혁명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후략)

림영환, 「감자농사혁명을 승리에로 이끄시는 위대한 령도」, 『력사과학』, 2003년 1호

장군님의 력사적인 담화의 결과 북한의 감자 생산량은 1998년 헥타르 당 10.58톤에서 1999년 헥타르 당 7.88톤으로 감소했다고 합니다.

Tuesday, April 29, 2008

돈독한 신앙심

노뽕굴에 아주~ 아주~ 알흠다운 글이 올라왔습니다.

이명박은 일본인인가?

정말 대단한 신앙고백이더군요. 압권은 이 부분 입니다.


네. 농민들 등골을 빼먹던 탐관오리의 후손이건 천황폐하를 위해 불철주야 인간사냥을 하던 사람의 후손이건 노무현 당에만 들어오면 죄사함을 받는군요. 노무현만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모두 노통믿고 구원받으세요~

Sunday, April 27, 2008

아른헴, Hartenstein 공수박물관

코블렌츠 구경을 마친 다음 네덜란드로 가기 위해 다시 쾰른으로 왔습니다.

쾰른 중앙역

쾰른에서 ICE를 타니 아른헴까지는 금방이더군요. 잠깐 눈좀 붙였다가 일어나니 아른헴에 도착했습니다.

아른헴 도착!

아른헴 역에 도착해서 호텔을 찿아 보니 싼 방은 모두 나가고 70유로대의 방만 남아 있었습니다. 뭐, 이럴땐 밤 바람을 쐬면서 해 뜨길 기다려야죠;;;;;;


다시 아른헴 역으로 돌아와서 배낭을 집어넣으려고 물품 보관함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아른헴 역의 물품보관함은 독일과 달리 매표소에서 카드를 사서 집어넣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새벽 2시가 되어 역무원들은 퇴근한지 오래됐으니.... 결국 배낭을 매고 밤을 새야 했습니다!

북유럽에서 가장 개념없는 네덜란드의 물품보관소. 매표소에서 카드를 사서 쓰라면 새벽에 도착하는 사람은 어쩌라는 거냐!

어쨌건 배낭을 매고 프로스트 다리(John Frost Bridge)로 가기로 했습니다. 역사적인 장소에서 해뜨는걸 구경하는 것도 좋겠더군요.

프로스트 다리 가는 길에 발견한 아른헴 시가도. 알아보기 좋고 깔끔해서 좋더군요

중간 중간 내리는 비를 피하며 어슬렁 어슬렁 걷다 보니 공수부대광장(Airborne Plein)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프로스트 다리도 멀지 않았네요.



그리고 드디어 프로스트 다리에 도착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 시피 프로스트 다리는 마켓가든 작전 당시 독일군에 맞서 이 다리를 방어한 프로스트 중령(John Dutton Frost)을 기리기 위해 1978년에 아른헴 대교의 이름을 바꾼 것 입니다.

새벽인데도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더군요

다리를 건너고 나니 겨우 네시를 넘기고 있었습니다. 다리 건너편에서 해가 뜨는걸 구경한 뒤 아른헴 역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AM 04:30

AM 05:50

AM 07:40

AM 08:20

해가 뜨는걸 기다리는데 날씨가 흐려서 아무리 기다려도 해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해를 기다리던 이 어린양은 다리 건너편에서 30군단의 전차들을 기다리던 프로스트 중령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해 뜨길 기다리다간 네덜란드에 눌러 살아야 될 것 같아서 날이 대충 밝자 다시 다리를 건너 아른헴 역 쪽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독일군의 공격 방향쪽에서 바라본 아른헴

밤에 보지 못했던 표지판


다시 공수부대광장을 지나서...

아른헴 역에 도착했습니다

아른헴 역에 도착해서 간단히 아침식사를 한 뒤 오스터벡(Oosterbeek)에 있는 공수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기차를 기다리자니 기다리는 시간이 더 걸려서 버스를 탔는데 버스요금이 생각보다 싸더군요!(2유로)

오스터벡 도착!

박물관 가는 길

밤 사이에 비가 산발적으로 내려 땅이 조금 질더군요. 걷기에 불편했습니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서 박물관까지 가는데 인적이 너무 드물어서 썰렁했습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사람들이 밖으로 잘 안나오는 것 같더군요.

박물관 도착!

오스터벡의 공수박물관은 규모에 비해 매우 유명한 박물관이죠. 마켓가든 작전이 "머나먼 다리"로 유명해 진 덕분인지 이 박물관은 꽤 친숙한 느낌입니다. 이 박물관은 원래 호텔로 마켓가든 작전 당시에는 영국 제 1공수사단의 어콰트(Roy Urquhart) 소장의 지휘소로 사용되었습니다. 박물관 앞에는 셔먼과 17파운드 대전차포를 전시해 놓았더군요.

마켓가든 작전 당시 영국 제 1공수사단장 어콰트 소장

승리의 셔먼! 승리의 셔먼!

17파운드 대전차포. 사진으로 볼 때 보다는 작게 느껴집니다

박물관 정문

박물관은 규모에 비해 전시물이 매우 충실했습니다. 작은 건물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관람객들의 이동 동선을 잘 짜 놓았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저는 실수로 관람순서를 거꾸로 구경했습니다.

어콰트 소장과 참모들


영국군을 환영하는 네덜란드 아가씨~


가장 인상 깊었던 전시물은 야전병원을 재현해 놓은 전시물이었습니다. 비록 모형이지만 피로와 허탈감에 빠진 위생병이나 종군목사의 모습에서 절망적인 분위기를 잘 표현했더군요.



지하에서 관람을 마친 뒤 위로 올라갔습니다. 위층의 전시물은 박물관의 규모 때문에 소화기나 개인 장비, 제복 위주였습니다. 작은 디오라마도 있었는데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않더군요. 폴란드 망명정부의 시코르스키 중장의 제복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꽤 흥미로웠습니다.

시코르스키 중장의 제복

미 82공수사단의 강하병

네덜란드 망명군 조종사

독일군 마네킹도 흥미로웠습니다. 마켓가든 작전 당시 반격을 위해 투입된 잡다한 종류의 독일군 부대들을 잘 묘사해 놓았더군요. 무장친위대와 일반 육군은 물론이고 공군 지상부대와 해군보병들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박물관 구경을 마친 뒤 다시 박물관 건물을 찍었습니다.

Friday, April 25, 2008

김구 = 테러리스트??? - (2)

만약 저에게 한국 현대사에서 과대평가된 인물을 몇 명 꼽으라면 저는 김구를 반드시 포함시킬 것 입니다. 김구는 1948년의 남북협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긴 하지만 임시정부 시절에는 반대파에 대해 살상을 일삼았고 해방 이후에는 요란하게 반탁투쟁을 벌여 이승만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주었죠. 어쨌건 김구는 한국내에서 매우 큰 존경을 받는 인물입니다. 사실 그가 1948년에 남북협상에 참여한 것은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봤을 때 매우 큰 공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제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높은 평가를 하기 어렵습니다만… 김구는 종종 신성시되기도 하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부정적인 발언을 하기란 참 힘듭니다. 얼마전에는 어떤 외국인이 김구를 ‘테러리스트’라고 불렀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었지요.

지금도 이러니 과거에는 김구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 하는게 더욱 힘들었을 것 입니다. 오늘 The Origin of the Korean War를 읽다가 한국어 판과 뉘앙스가 미묘하게 다른 부분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이 부분 입니다.

김구는 테러리스트와 암살문제에 정통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므로 국내의 치안을 맡는 내무부장에 선임된 것도 논리적 타당성을 지닌다.

Bruce Cummings, 김주환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上』, 靑史, 161쪽

원문은 이렇습니다.

Kim Ku’s reputation as a terrorist and assassin no doubt commended him for duty concerning domestic law and order

Bruce Cummings, 『The Origin of the Korean War. Vol 1 :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 역사비평사, 1981, 2002, p.87

제가 번역했다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김구는 테러와 암살로 명성을 날렸기 때문에 국내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데 적임자라고 천거되었을 것이다.

“김구는 테러리스트와 암살문제에 정통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므로”는 풍기는 느낌이 뭔가 묘합니다. 김구가 테러나 암살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 처럼 읽히거든요. 일부러 불필요한 의역을 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냥 직설적으로 '김구는 테러리스트...' 라고 옮기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요? 다른 분들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김구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고???

김구 = 테러리스트???

Wednesday, April 23, 2008

국개론과 그리스 찬미주의자들

채승병님과 Sonnet님이 ‘국개론’에 대한 글을 써 주셔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두 분의 글을 읽으니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후광효과(halo effect)와 국개론의 망상 – 채승병

깨진 유리창 - Sonnet

이명박 정부의 출범 이후 한나라당을 반대하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게 국개론은 상당히 널리 퍼진 것 같습니다. 표준적인 국개론은 ‘한나라당을 찍은 국민들은 다 개XX다’이고 좀 더 과격하게 발전된 국개론은 아예 제 2의 외환위기를 맞아 이명박을 찍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지요. 아마도 제 2의 외환위기 사태가 벌어지면 국개론을 외치는 자들만 탈수 있는 방주라도 있는 모양입니다? 물론 저도 정치적으로는 한나라당을 반대하는 입장이라 답답하긴 마찬가지이고 한나라당을 찍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안타깝긴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경멸하는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주변에도 국개론자들이 일부 있는데 이들은 늘 진보와 민주주의를 이야기 하면서 다수의 힘을 찬미하곤 했지요. 이들이 자신감에 차 있을 때 하던 이야기는 낯간지러우니 생략하도록 하고... 어쨌든 2002년에는 세상을 바꿀 것 처럼 들떠 있던 사람들이 지금은 지독한 염세론자들이 되어 한때 그토록 찬양하던 다수를 향해 저주를 퍼붓고 있으니 이걸 뭐라 말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국개론자들은 대부분 정치적 의식이 뚜렷한 편이고 자신의 지식이나 판단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수가 가방끈도 긴 편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자신과 정치적으로 반대되는 사람들에 대해 기괴하기 짝이 없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 가끔씩은 아찔하기 짝이 없더군요. 이런 사람들은 대중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것을 답답해 하다가 결국에는 ‘국개론자’로 발전하게 되더군요.
이런 ‘국개론자’들을 보면 과거 역사 속의 어떤 집단을 떠올리게 됩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그리스 찬미주의자(philhellene)는 터키의 지배에 맞서 싸우던 그리스의 클레프트(Klepht)를 지지했다. 대부분 나폴레옹 전쟁의 장교 출신이었던 이들은 1821년의 그리스 독립전쟁이 발발했을 때 밀집 대형으로 훈련을 하려고 애썼지만, 그들의 노력 또한 비웃음과 조롱만 불러일으켰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경멸에서가 아니라,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중략)
그리스 찬미주의자들은 그리스인들이 대오를 지어 터키 인들을 공격하지 않는다면 결코 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리스 인들은 만약 그들이 유럽식으로 대오를 지은 채 터키 인들의 소총 앞에 맨 가슴을 내어 놓는다면, 순식간에 전멸을 당하고 결국 전쟁에도 패배할 것이라고 반대했다.
가장 유명한 그리스 찬미주의자인 바이런은 ‘그리스 인을 위해서 부끄러움을/그리스를 위해서 눈물을’이라고 노래하며 다른 자유수호자들과 더불어 그리스의 편에서 서서 또 하나의 새로운 테르모필라이 전쟁을 희망했다. 그러나 바이런 역시 합리적인 전술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무지는 결코 극복될 수 없음을 발견하고 다른 모든 유럽의 이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환멸과 절망을 느껴야 했다.(중략)
그러나 그리스인들과 함께 전투를 치렀던 그리스 찬미주의자들은 고대 그리스인과 근대 그리스인이 같다는 믿음을 재빨리 내던져버렸을 뿐만 아니라, 살아서 유럽으로 되돌아온 자들은, 그리스 찬미주의의 역사가 윌리엄 세인트 클레어가 쓴 대로 “거의 예외 없이 그리스인들을 구역질을 내며 증오했고, 기만 당했던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스스로 저주했다.” 근대 그리스 인들의 용기를 찬미한 셸리의 순진한 시들은 특히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스 찬미주의자들은 고대 그리스의 중무장 보병들이 페르시아인들과 맞붙었던 전쟁에서 그랬던 것 처럼, 근대 그리스인들이 밀집 대형으로 “도보로 죽음과 맞서는 전장”에서 불굴의 용기를 보여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런 저런 경로를 돌아서 서유럽의 전쟁에서도 그들만의 특징적인 전쟁 방식이 되었다. 그리스 찬미주의자들은 최소한 근대 그리스인들이 밀집 대형 전술을 기꺼이 다시 배우려는 태도만이라도 보여주기를 원했다. 그것만이 터키로부터 그들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결코 그럴 의지조차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자, 그리스 찬미주의자들은 고대 그리스인들과 근대 그리스인들 사이의 혈통상의 단절만이 이러한 영웅적 문명의 몰락을 설명해 줄 수 있을 뿐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존 키건, 유병진 옮김, 『세계전쟁사(A History of Warfare)』, 까치, 1996, 28~30쪽

대충 글자 몇 개만 바꾸면 국개론자와 그들이 혐오하는 일반 국민들의 이야기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어쨌든 저는 사회가 조금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기를 바란다면 ‘국개론’ 따위의 염세적인 생각을 떨쳐버렸으면 합니다. 변화는 점진적인 것이고 어느날 갑자기 정치인 하나 잘 뽑았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대통령이 마음에 안드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만 어차피 5년 뒤면 말 안해도 물러납니다. 우리가 5년만 살고 세상 등질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입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것이 자리를 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고 또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현실 정치를 보면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 일 것 입니다. 하지만 정말 변화를 갈망한다면 겨우 몇 번의 선거 결과에 실망해서는 안 될 것 입니다. 그보다는 꾸준한 정치 참여를 통해 작은 변화라도 계속해서 이뤄 나가는 게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Sunday, April 20, 2008

코블렌츠 - 독일연방군 국방기술연구박물관 & Buchhandlung Collectiana

브레멘에서 하루 묵은 뒤 코블렌츠로 출발했습니다. 늦잠을 잔 덕에 원래 예정 보다 두 시간 늦게 브레멘에서 출발하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바로 네덜란드로 들어갈까 했는데 코블렌츠를 구경하고 가는게 좀 좋지 않을까 싶더군요. 기차안이 썰렁해서 여유가 있고 좋았습니다.

썰렁~

창 밖 경치를 감상하다보니 시간이 아주 잘 흘러갔습니다. 비록 겨울이지만 라인강변의 경치는 정말 좋더군요.


코블렌츠 역

코블렌츠에는 제목에도 달아 놓았듯 국방기술연구박물관(Wehrtechnische Studiensammlung)을 구경하러 왔습니다. 애초에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박물관이 아니어서 건물의 외양은 아주 밋밋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밋밋하여라...

이 박물관이 좋은 점은 입장료가 1유로 50센트 밖에 하지 않는다는 점 입니다. 전시물이 제법 충실한 편이라 본전뽑기가 쉽습니다.

1층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화포들을 전시한 작은 전시실이 하나 있습니다.

독일군의 75mm 보병포

그리고 이 작은 전시실을 지나면 대형장비들을 전시한 큰 전시실이 나타납니다.


HS-30 자주박격포형


냉전 종식의 최대 피해자?

그리고 MBT-70의 실물을 처음 봤는데 커다란 머리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머리가 커서 슬픈 짐승이여


VTS-1

그리고 꽤 재미있었던게 분해해 놓은 소련제 전차들이었습니다. 특히 T-72는 완전히 표본실의 청개구리 더군요.

표본실의 T-72

레오파르트 2 시제차량

Radkampfwagen 90

대형장비 전시실은 전시가 조금 두서없이 되어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현용장비와 2차대전 장비, 1차대전 장비가 무작위적으로 전시되어 있더군요.



이 외에도 항공기 종류도 전시되어 있더군요. 메모리카드 용량 때문에 다 찍지 못해 아쉽습니다.



다음 전시실에는 차량과 대형 화포 위주로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박물관에서 가장 작은 차량(?)



2층 부터는 소구경화포와 소화기, 개인 군장류 등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시간이 부족해서 2층 부터는 좀 심하게 날림관람을 했습니다.



독일육군 원수 정복

그런데 원래 이 박물관을 방문한 가장 큰 목적인 가동상태에 있는 판터 G형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박물관 직원들에게 문의를 했더니만....

어린양 : 판터 어디 있나요?

이 놈 말입니다

직원 1 : 저 안에 있잖아요.

어린양 : 아뇨, 야크트판터 말고 그냥 판터요.

직원 1, 2 : (직원 3을 부르며) 이 친구한테 물어봐요

어린양 : 판터는 어디 있나요?

직원 3 : 엔진이 고장나서 트리어(Trier)로 수리하러 보냈어요.

어린양 : ;;;;;;;

그래서 아쉽지만 다음기회에 다시 방문하기로 하고 나왔습니다.

박물관을 나와 박물관 옆의 군사서점, Buchhandlung Collectiana에 들어가 봤습니다. 오오. 꽤 멋진 서점이었습니다. 서적을 25,000권 정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Buchhandlung Collectiana




이 서점은 모형점도 겸하고 있었습니다. 이 서점의 쥔장인 Christine Wirtz 누님에게 인터넷 사이트는 없냐 물어보니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는 오프라인 서점으로만 운영한다는군요. 이 서점의 No.2(?) 인 Margit Witt 누님은 아예 컴퓨터를 쓰지 않는답니다. 쥔장 누님들께 블로그에 대해 설명하려다가 독일어가 딸려서 포기했습니다. 블로그에 소개좀 하려고 Wirtz 누님께 사진 한장 부탁했더니 자신은 풍채가 좋다고(상상에 맡깁니다) 사양하고 대신 Witt 누님이 포즈를 취해주셨습니다.

포즈까지 취해주신 Margit Witt 누님

Wirtz 누님께서는 다음에 올때는 독일어를 제대로 공부해서 오라고 하시더군요. 넵.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책을 한 권 산 뒤 주인을 기다리는 수만권의 다른 책들을 두고 비통한(?) 심정으로 물러났습니다.

Saturday, April 19, 2008

[美利堅史] 八公山城戰鬪

오랫만의 美利堅史 입니다. 바보이반님이 근혜공주님 이야기를 써 보는게 어떠냐는 의견을 주셔서 썼는데 아무래도 이명박 각하의 반격하는 모양을 봐서 7월 달에 속편도 써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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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조지 부시 주니어 8년 4월에 벌어진 팔공산성 전투는 한쿡 고대사에 한 획을 그은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천하 제패를 꿈꾸던 명박왕의 세력은 경기 일대로 축소되었으며 근혜공주는 천하 제일 명장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팔공산성 전투는 이렇게 역사적으로 중대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한쿡 내에는 역사적 사실을 충분히 재구성할 자료가 부족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모두 우리의 고대 역사서 20만권을 동대문에 엿바꿔 먹은 일본의 만행 탓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쿡사편찬위원회는 최근 美利堅史의 한국관련 기사에 팔공산 전투와 관계된 내용이 많이 실려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쿡사 편찬위원회는 미리견사에 실린 한쿡 관계 기사 중에서 팔공산성 전투에 관련 부분을 발췌 편집하여 팔공산성 전투 자료집을 편찬하는 바 입니다.

쿡사편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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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8년(조지 부시 주니어 8년) 2월, 국왕이 여의도에 나아가 교서를 반포하기를

“삼가 생각컨데 태조(이승만) 께서 홍업(洪業)을 초창하시고 태종(박정희)께서 큰 사업을 이어 받으시어 삼가고 조심하여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충성은 천자에게 이르고 효하고 공경함이 신명을 통하여 나라의 안팎이 다스려 평안하였다. (중략) 그런데 근자에 친북좌파 10년에 민생이 파탄에 이르고 노란 도적들이 나라를 어지럽혀 백성을 구제할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 다행히도 문무의 신료들이 추대해서 나에게 즉위하기를 권하므로 사양하여도 되지 않아 여의도에 대위에 나아갔노라. (중략) 이제 나라 안으로는 운하를 파고 나라 밖으로는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여 선진화의 원년으로 삼겠노라”

이에 모든 신료가 만세를 부르니 환성이 우레같이 끓어 올랐다.

美利堅史 卷三百 李明博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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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8년 3월, 이재오, 이방호 등이 거병하여 박근혜를 삼성동에 유폐하였다. 강재섭이 나서 박근혜를 유폐함이 부당하다 하였으나 이재오가 듣지 아니하였다. 이에 서청원이 親朴의 기치를 들고 거병하니 영남의 뜻있는 장사들이 팔뚝을 걷고 동참하였다. 또한 홍사덕도 군사를 일으키니 여러 군현에서 무소속의 깃발을 들고 거병하는 자가 수십이었다. 이에 국왕이 이방호를 平嶺南都元帥에 임명하고 군사 수십만을 징발하여 서청원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때 도성에는 아동들 사이에 괴이한 노래가 퍼졌다.

축지법~♪ 축지법~♪ 공주님 쓰신다~♪

동에번쩍 서에번쩍 선거판을 쥐락펴락
총선정국 주름잡아 공주님 가신다
각하가 쓰시던 축지법~♪
오늘은 공주님 쓰신다~♪
팔공의 전법 신묘한 전법 공주님 쓰신다~♪

국왕이 크게 노하여 노래를 금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노래가 널리 퍼졌다.

美利堅史 卷三百 李明博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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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8년 3월, 노회찬이 스스로 진보대장군(進步大將軍)을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노원으로 나왔다. 강재섭이 홍정욱에게 군사를 주어 노회찬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홍정욱이 군사를 이끌고 노원에 당도하니 노회찬은 이미 진을 치고 관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회찬이 홍정욱을 보고 손가락질 하였다.

“네놈의 아비는 雷鷹 이라는 극을 찍으며 아동들이나 홀리던 광대가 아니더냐? 광대가 말을 타고 갑주를 걸쳤다고 장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에 홍정욱이 분개하여 양손에 뉴타운과 자사고를 뽑아들고 크게 외쳤다.

“오늘 반드시 서민배우의 아들이 노동귀족을 무찌르리라!”

노회찬과 홍정욱이 수십합을 겨루니 홍정욱이 조금도 밀리지 아니하였다. 마침내 홍정욱이 틈을 엿봐 뉴타운과 자사고로 노회찬을 맞추니 노회찬이 낙마하였다. 이에 관군이 환성을 울리며 공격하여 진보군이 크게 패하였다.

美利堅史 卷二十九萬四百二 洪政旭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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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8년 3월, 손학규가 군사를 일으켰다. 손학규는 자유 7년(조지 부시 주니어 7년)에 황건적 수십만을 거두어 군세가 성대하였다. 손학규의 휘하에는 장군이라 칭하는 자만 140여인에 달하였고 황건적의 두령 지공장군(地公將軍) 정동영도 있었다. 정동영은 지난 싸움에서 국왕 이명박에게 패한 바 있어 항상 복수할 뜻을 품고 있었다.
손학규는 군사를 일으켜 종로구로 향하고 정동영은 동작으로 향했다. 손학규가 군사들을 독려하며 종로성을 맹렬히 공격했으나 박진이 힘을 다해 맞서 싸우니 손학규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군사를 물렸다. 박진이 성문을 열고 추격하여 손학규의 군사를 크게 파하였다.
한편, 울산공 정몽준도 정동영이 동작을 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황선홍, 안정환, 허재, 김흥국 등 여러 장수와 가병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정동영이 진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동작성을 치려 할 때 정몽준의 기병이 당도하여 정동영을 치니 정동영군이 크게 참패하여 수십리를 패주하였다.

美利堅史 卷十二萬七千七百二十五 孫鶴圭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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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국현이 군사를 이끌고 은평에 진을 치니 국왕이 이재오를 平恩平大元帥로 삼아 문국현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문국현은 겨울에 국왕 명박과의 전투에서 패해 군세가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이재오가 말을 달려 은평에 도착하여 문국현이 진 친 것을 보고 크게 비웃었다.

“지금 국현이 남은 잔당을 모아 진을 친 모습이 마치 堆土機 앞의 철거민 같도다. 단숨에 쓸어버리고 남은 잔당은 운하 공사에 노역을 시키겠노라”

이 말을 들은 국현의 군사들이 죽을 힘을 다해 싸우니 관군이 크게 불리하였다. 이 말을 들은 국왕이 크게 놀라 재오를 격려하였다. 국왕이 재오를 격려하니 국현이 여러 군사들에게 말하였다.

“지금 형세를 관망하니 우리가 여기에서 패한다면 우리 가솔들은 살아남더라도 꼼짝없이 노비가 되어 운하 공사장에서 평생 사역하는 치욕을 당할 것이다. 여기서 힘껏 싸워 치욕을 면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군사들이 이 말을 듣고 감격하여 마침내 관군을 무찌르고 수십리를 추격하였다. 이재오는 당황하여 말을 타고 도망치다 낙마하였다.

美利堅史 卷十二萬七千七百二十五 孫鶴圭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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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희는 일찍이 수십의 기자에 단기필마로 돌진하여 그 중 여기자의 슴가를 취하여 명성을 떨쳤다. 이후 최연희의 명성이 천하에 널리 퍼지니 전국의 부녀자들은 최연희의 이름 석자만 들어도 두려워 하여 집밖을 나서지 못하였다.
자유 8년 3월, 최연희가 무소속의 기치를 내걸고 군사를 일으켜 동해 삼척을 평정하고 정인억이 이끄는 관군을 대파하니 국왕이 크게 놀라 전여옥과 나경원에게 군사를 주어 최연희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전여옥이 군사를 이끌고 진을 치니 최연희가 단기필마로 호탕하게 웃으며 나왔다.

“성을 세 개 가진 잡년아! 슴가를 내놓아라!”

전여옥이 단 일합도 견디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니 나경원이 나와 구원하려 하였으나 나경원도 최연희를 당하지 못하였다. 두 장수가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니 최연희가 뒤쫓으며 관군을 크게 무찔렀다.

美利堅史 卷 六十九 萬六千九百六十九 崔鉛熙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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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청원과 홍사덕은 군사를 이끌고 팔공산성에 도착하여 진을쳤다. 홍사덕이 감격하여 말하였다.

“팔공산성은 일찍이 홍건적의 난 때 도적을 크게 무찔러 중흥의 기틀을 닦은 곳입니다. 이후 선왕들은 여러 싸움에서 항상 팔공산성에 의지하여 이겼는데 오늘 우리가 이곳에 진을 친 것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징조입니다.”

마침내 이방호가 이끄는 군사가 팔공산성 아래에 도착하여 진을 쳤다. 그 군세가 심히 성대하여 푸른 비단에 李자를 넣은 깃발이 수십리에 나부꼈다. 이방호가 부장 정종복, 박형준 등을 이끌고 팔공산성 아래 도착하여 외쳤다.

“서청원과 홍사덕은 당장 성문을 열고 항복하라! 지금 병장기를 버리고 항복하면 운하 공사장에 한 자리 마련해 주겠노라!”

서청원이 비웃으며 외쳤다.

“방호야! 나는 운하보다 윤하를 좋아하느니라!”

방호가 분노하여 삼일 밤낮으로 堆土機와 穵掘機를 이용해 성을 공격했으나 아무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관군의 군세가 성대하여 청원과 사덕도 함부로 성밖을 나서지 못하였다. 청원과 사덕이 관군을 파할 계책을 논의하였으나 뾰족한 수가 없어 시름만 깊어갈 뿐이었다.
이때 근혜 공주가 청원에게 밀지를 보내니 편지의 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편지에 쓰인대로 하면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청원은 편지를 읽은 뒤 크게 기뻐하며 장수들에게 출전을 명하였다.

다음날 청원과 사덕이 성문을 열고 팔공산성 아래 진을 치니 방호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방호가 말을 달려 친박군의 진 친 것을 보니 처음 보는 기이한 진이었다. 부장들도 청원이 진 친 것을 보고 기이하고 두렵게 생각하여 함부로 나서지 못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머뭇거리자 방호가 크게 노하여 공격을 명하였다. 그러나 관군의 숫자가 많음에도 청원이 친 진을 무너뜨리지 못하였다. 오히려 정종복, 박형준 등 부장들만 무수히 낙마하니 관군의 사기가 꺾여 크게 패하였다. 청원과 사덕이 군사를 이끌고 치니 관군은 수백리를 패주하여 사천으로 달아났다.

방호가 사천까지 달아나 겨우 군사를 수습하였는데 그래도 그 수효가 수만이었다. 이때 사천의 산중에 강기갑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강기갑이 방호가 사천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민병을 조직하여 싸우러 나서니 방호가 크게 비웃었다.

“저자는 친북좌파가 아니냐? 내가 서청원과 홍사덕에게 원한을 갚기 전에 저자를 먼저 잡아야 겠다!”

이방호가 말을 달려 싸움을 돋우니 강기갑도 말을 달려 나왔다.

“방호야! 나의 박사모(朴蛇矛)를 받아라!”

방호가 강기갑을 맞서 싸웠으나 방호의 창이 박사모를 능히 당해내지 못하였다. 몇 합에 방호의 창이 부러지고 낙마하니 부장들이 방호를 호위하여 겨우 사지를 벗어났다. 이때 사천을 벗어난 것이 불과 수십기였다.

근혜 공주가 고안한 진법을 후대에 측은지진(惻隱之陣)이라 하였는데 오늘날은 전하지 아니한다.

美利堅史 卷 十一萬九 徐淸源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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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군이 수백리를 패주하여 추풍령에 이르렀을 때 돌연 방호가 크게 웃었다.

한 장수가 물었다.

“장군. 싸움에 패하여 남은 군사도 없는데 어찌 그리 즐거우십니까?”

방호가 말하였다.

“내 일찍이 근혜 공주의 지략이 신묘하다 들었는데 지금 보니 어리석기 짝이 없도다. 내가 용병을 한다면 미리 추풍령에 군사를 매복하였을 것이다.”

이때 한 장수가 대군을 이끌고 길을 막으며 벽력같이 소리쳤다.

“나는 예산 땅의 이회창이다. 근혜 공주님의 명을 받들어 너를 기다린 지 오래다!”

회창의 군사들이 방호를 에워싸니 방호가 마침내 부장들과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었다.

“이회창공! 예전의 인연을 생각하시여 목숨만은 부지하게 해 주소서.”

이회창이 말에서 굽어보니 방호와 그를 따르는 장졸들이 행색이 초라한지라 차마 벨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구나”

이회창은 한 마디 긴 탄식을 하고 말머리를 돌려 자유선진당사로 돌아갔다.

美利堅史 卷 三十一萬七千六百四十 李方鎬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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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April 18, 2008

2차 대전중 독일 공군 전투기사단의 지휘통제 문제

아래 글에서 윤민혁님이 der grosse Schlag 작전이 계획대로 실행될 경우 심각한 공역통제 문제에 직면할 것이라고 지적해 주셨습니다. 제가 기술적인 부분에 좀 많은 지식이 있다면 여기에 대해서 좀 재미있는 글을 하나 써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쉽네요.
전투기 부대의 통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아돌프 갈란트가 전쟁 후에 지적한 전투기부대의 지휘통제 문제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독일본토 방공전 당시 전투기부대의 전술통제는 전투기사단(Jagddivision)이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전투기사단은 대전 초기의 전투기지휘부(Jagdfliegerführer)를 개칭한 것으로 1943년 무렵에는 각 전투기 사단 별로 5~10개 전투비행대대(Gruppe)를 예하에 두고 있었습니다.

각 전투기사단은 6,000~7,000명 정도의 인력으로 구성되며 사령부에는 전투기 통제와 관련된 인력이 150명 정도 배치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전투기통제장교(J.L.O, Jagerleitoffizier) 들이 포함됩니다. 전투기통제장교는 비행대대, 경우에 따라서 비행단에 대한 통제를 담당하는데 일반적으로 사단장이 선임통제장교를 겸합니다. 선임통제장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데 선임통제장교는 상황을 종합해 적 폭격기 부대의 예상 목표와 진로를 판단하고 그에 맞춰 사단 지휘하에 있는 모든 전투기 부대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즉 방공전투에서 전투기사단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셈 입니다.

그런데 전쟁 중에는 이 전투기 사단의 지휘 통제능력에 문제가 조금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돌프 갈란트는 전쟁이 끝난 뒤에 독일 본토 방공전에서의 전투기 지휘통제 문제, 특히 전투기 사단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고 하네요.(D. Caldwell & R. Muller, The Luftwaffe over Germany : Defense of the Reich, p.148)

1. 전투기사단의 지휘 방식은 명백히 지역적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각 사단은 사단 예하 부대가 다른 사단의 전투 지경선으로 넘어가더라도 계속 통제했지만 무전과 레이더 관제 범위를 벗어나면 지휘를 (인접 사단으로) 넘겼다. 하지만 이것은 원만하지 않았다.
2. 전투기사단 사단장들은 1차대전의 베테랑들이었고 그들의 참모장은 공군 장군참모 출신이었다. 이들은 유능하긴 했으나 전투기 조종사가 아니었다.
3. 전투기사단에는 부사단장이 없었다. 부사단장 보직을 만들어 거기에 전투기 조종사 출신을 임명해야 했지만 문제는 적당한 인물이 드물었다.
4. 전투기들은 전투기통제장교의 통제를 받았으며 각 통제장교는 1개의 비행대대를 통제했다. 전투기통제장교들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전투기 조종사 출신이거나 매우 우수한 통신 장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보드 게임을 하듯 통제했지 (공중전의) 입체적 환경을 이해하지 못해 그들이 통제하는 부대에 전술적 이점을 주지 못했다.
5. 무전감청은 공군 통신감인 마르티니(Wolfgang Martini) 장군의 담당이고 공군 총사령부 단위에서나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 전투기사단의 전투기통제장교들은 무전감청을 이용해서 (영국공군처럼) 속임수를 쓰는게 불가능했다.
6. 전투기군단, 전투기사단, 제국항공군, 괴링, 전투기부대총감(갈란트)는 모두 한 전화회선을 이용하고 있었으며 전투기부대총감을 제외하면 모두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괴링은 종종 멍청한 명령을 내렸다.
7. 1944년 초부터 적 호위전투기 때문에 폭격기 집단과 접촉을 유지하며 정보를 보내는 항공기(Fühlungshalter)를 더 이상 임무에 투입할 수 없었다. 이것 때문에 전투기통제장교들은 기상, 구름상태, 적의 고도, 호위기 여부 등을 전혀 알 수 없었다.
8. 각 편대장들에게 행동의 자유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이 외에도 갈란트는 괴링에 의해서 전투기사단장의 교체가 빈번히 일어난 점도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단장 교체가 잦으니 예하 전투기 부대들에 대한 통제가 어려웠다는 것이죠. 하기사, 괴링은 툭하면 조종사들에게 동부전선에 소총수로 보내겠다는 망발이나 날리던 종자이니 사단장교체가 빈번한 것도 이해가 가긴 합니다. 어쩌면 괴링은 정말 영국공군이 심은 스파이가 아니었을는지.

“대타격(der grosse Schlag)” 작전은 얼마나 현실성이 있었을까?

아래의 글, "대공포는 의외로 효율적이다"에 라피에사쥬님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아주셨습니다.

종종 갈란트가 제안한 연합군 폭격비행대에 대한 '대규모 요격작전' 역시 44년 후반기부터는 효율성이 크게 의심되는 것 같습니다. 분명 소수의 요격부대만을 내보내 지속적으로 소모시키는 것보단 나았겠지만 당시의 상황은 '독일공군이 게릴라전을 펼쳐야' 할 정도로 압도적인 열세였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씁니다.

아돌프 갈란트가 구상했다는 “대타격(der grosse Schlag)” 작전은 만약 실행 됐더라면 단일 공중전으로는 역사상 최대 규모가 됐을 작전입니다. 갈란트는 1943년 10월의 제 2차 슈바인푸르트(Schweinfurt) 공습 이후 이 작전을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많은 분들이 아시다 시피 이 작전은 영국본토 방공전의 경험이 바탕이 된 것 입니다. 즉 가용 가능한 전투기 부대를 총 출격시켜 단 한번에 미 육군항공대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힌다는 것이죠. 갈란트가 구상한 계획은 대략 이랬다고 합니다. 먼저 제 1파로 2,000대의 전투기를 출격시켜 폭격기 부대를 공격합니다. 2,000대는 미군의 호위전투기 부대를 수적으로 압도할 수 있으니 나머지가 폭격기를 집중공격하면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100대 정도의 야간 전투기들이 대기하다가 스웨덴이나 스위스로 도주하는 손상을 입은 폭격기들을 처리하는 임무를 맡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비대인 400~500대의 전투기를 발진시켜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는 구상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400~500대 정도의 폭격기를 한번에 격추시킨다면 미군은 슈바인푸르트에서 그랬던 것 처럼 뭔가 뾰족한 수가 있을 때 까지 폭격을 연기할 테고 이 정도 규모의 손실이라면 독일측이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갈란트의 구상대로 이 작전이 실행되어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면 지금쯤 영화 두 세편은 나왔다에 천원 을 걸겠습니다.

그런데 당시 독일의 현실을 고려했을 때 이 작전은 실행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2,500대가 넘는 전투기를 단 한번의 작전에 투입하기 위해서 전투기와 조종사를 모은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 이었을 것 입니다. 갈란트가 처음 대타격 작전을 구상하던 무렵인 1943년 12월, 독일 공군이 보유한 전투기를 모두 긁어 모아야 1,500대를 조금 상회하는 규모에 실제 가동 기수로만 따지면 1,000대를 조금 넘는 수준이었으니 제국항공군(Luftflotte Reich) 예하에만 가동가능 한 전투기 2,500대를 모은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 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미 1944년 여름이면 독일공군의 전투기 부대들은 서부전선 동부전선 할 것 없이 이곳 저곳 구멍을 막으러 다니는 실정이니 조종사와 전투기가 꾸준히 소모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독일의 항공기 생산량은 기록적으로 증가하고는 있었는데 피해도 기록적으로 증가하는 실정이었으니 별 뾰족한 수가 없었던 것이죠. 예를 들어 1944년 6월 1일에 제국항공군은 총 788대의 단발전투기(이 중 472대 가동 가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바그라치온 작전으로 전투기 부대들을 차출당해 1944년 7월 1일에는 388대의 단발전투기(이 중 242대 가동가능)만을 보유하는데 그쳤습니다. 여기에 본토 방공전으로 인한 손실도 계속해서 누적되고 있었으니 반격을 위해 2,500대의 전투기를 집결시킨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육군항공대가 1944년에 영국 본토에 대규모의 전력을 집결시키고 있었던 점도 문제입니다. 1944년 1월 영국에 주둔한 미 제8공군은 폭격기 1,082대, 전투기 909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6월에는 폭격기 2,547대, 전투기 1,112대로 늘어납니다. 당장 미 제8공군이 보유한 전투기 숫자만 가지고도 독일제국항공군이 보유한 전투기 숫자를 가볍게 뛰어 넘고 있지요. 게다가 더 무시무시한 것은 미군도 손실이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였다는 점 입니다. 미 제8공군은 1944년 1월에 211대, 2월에 299대, 3월에 349대, 4월에 409대의 폭격기를 잃습니다. 그렇지만 전체 폭격기 대수는 계속 늘어나지요.;;;;; 정말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습니다. 당장 1944년 하반기로 접어들면 대규모 작전이 있을 때 미 제8공군은 한번에 중폭격기만 1,300~1,400대씩 출동시킵니다. 여기에 호위 전투기가 600~700대씩 딸려오지요. 이건 뭐 답이 없는 상황입니다.;;;;;;

1944년 12월 말이면 제국항공군과 제3항공군을 합쳐서 대략 1,000대 정도의 가동 가능한 전투기가 있었는데 이것들을 한번에 출격시키더라도 폭격기들을 공격할 수 있는 전투기는 300~400대 수준이니 좀 후하게 쳐서 미군 전투기들과 1대 1 비율로 교전하더라도 나머지 전투기들은 네 배가 넘는 중폭격기(강력한 방어화력을 갖춘) 들을 상대로 고전할 수 밖에 없었을 것 입니다. 특히 1944년에 급격히 저하된 독일공군 조종사들의 실력을 본다면.;;;;; 1944년 하반기에 들어가면 독일공군도 한달에 3,000대 가까운 Bf 109와 Fw 190을 보충받는데 그래 봐야 전체 전투기 전력이 크게 늘어나지 않는걸 보면 이 시기에 얼마나 손실이 격심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형편이니 2,500대의 전투기를 모아 일격을 먹여주겠다는 갈란트의 구상이 현실화 되기는 정말 어려웠을 겁니다.

Thursday, April 17, 2008

수령님의 혜안

언어는 민족을 특징짓는 공통성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입니다. 핏줄이 같고 한 영토 안에서 살아도 언어가 다르면 하나의 민족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철학사전』, 1970, 256쪽

어쩐지... 북한 방송을 볼 때 마다 이질감을 느낀것이 아무 이유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령님 만세!

Tuesday, April 15, 2008

거창에 다녀왔습니다

거창에 다녀왔습니다


오늘 거창 학살 57주기 추모식이 있었거든요.

다행히(?) 거창 학살 추모식은 군단위에서 조용하게 치러져서 얼마전에 다녀온 4.3 추모식 보다는 훨씬 조용했습니다. 딱히 높은 자리에 계신 분들이 없다 보니 행사는 자유로운 분위기였고 편했습니다. 유족분들은 행사가 진행 되는 동안 알아서 식사하러 가시니 빈 자리가 많아 좋더군요. 사실 봄볕이 강한지라 대부분 60을 넘기신 유족분들이 오래 앉아 계시긴 어려웠을 겁니다.
생각해 보니 4.3 기념식에 참석한 한승수 국무총리는 추도사 보다는 제주도에 대한 여러가지 공약을 설명하면서 사전 선거운동만 하고 갔는지라 추모식 분위기를 망쳤습니다. 참석하신 분들 상당수가 뒷담화를 했다지요. 거창에는 다행히도 화환만 보내는 선에서 그쳤습니다. 높은 분들이 참석해 주는게 행사에 무게도 실리고 좋다는 분들도 많은데... 저는 그냥 이렇게 지역적으로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로 진행되는게 정말 좋더군요.

이 어린양은 점심식사 준비를 하는 데서 자원봉사(???)를 했는데 그 덕에 도시락 외에도 사이다 한 병을 덤으로 얻었습니다. 나쁘지 않더군요.

반찬 종류는 많았으나...

자원봉사의 대가

Friday, April 11, 2008

[妄想歌謠館] 공주님 축지법 쓰신다

축지법~♪ 축지법~♪ 공주님 쓰신다

동에번쩍 서에번쩍 선거판을 쥐락펴락
총선정국 주름잡아 공주님 가신다
각하가 쓰시던 축지법
오늘은 공주님 쓰신다
팔공의 전법 신묘한 전법 공주님 쓰신다~♪

동에번쩍 서에번쩍 국회를 쥐락펴락
환호받고 오르신다 유세장 연단위에
각하가 쓰시던 축지법
오늘은 공주님 쓰신다
팔공의 전법 신묘한 전법 공주님 쓰신다~♪

친북좌파 비켜선다 친박도 뒤따른다
공주님의 지략으로 승전고 울린다
각하가 쓰시던 축지법
오늘은 공주님 쓰신다
팔공의 전법 신묘한 전법 공주님 쓰신다~♪

축지법~♪ 축지법~♪ 공주님 쓰신다

이번 선거에 대한 총체적 감상이 되겠습니다.

추가 - 3절을 조금 고쳤습니다.

재오방호 엿먹인다 친박은 당선된다
공주님의 지략으로 승전고 울린다
각하가 쓰시던 축지법
오늘은 공주님 쓰신다
팔공의 전법 신묘한 전법 공주님 쓰신다~♪

선거 후기 + 인증

이번 선거에서는 처음으로 제가 찍은 후보가 지역구에서 당선되었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는 지역구로 출마한 후보가 통합민주당, 한나라당, 친박연대, 평화통일가정당 네 명 뿐이다 보니 정말 난감하더군요. 공약도 모두 도토리 키재기 인지라 그냥 민주당을 찍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저는 '진보'인 척을 하는 사람인지라 민주당을 찍을 일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어쨌건 민주당 후보를 찍었는데 이 양반이 당선되더군요. 이미 몇 차례 이야기한 친박연대 아저씨는 동네에서의 평판은 좋은 편이었으나 미역국을 먹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인증샷 입니다. 같이 찍은 책은 꽤 재미있습니다. 투표를 하고 읽으니 색다른 재미가 있더군요.

Tuesday, April 8, 2008

투표합시다

내일은 국회의원 뽑는 날 입니다. 많은 분 들이 뽑을 사람 없다고 불만에 가득차 계신데 영 뽑을 사람이 없으면 그 중에 가장 꼴 보기 싫은 사람을 엿 먹일 만한 사람을 찍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게 싫으면 제일 불쌍한 사람에게 한 표를 줘도 좋지요. 뭐, 이놈도 싫다 저놈도 싫다 다 싫으니 잠이나 자자... 는 분들도 계실텐데 그래도 찍어 놓고 욕을 하는게 좀 더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4년에 한 번 몇 만분의 1짜리 권력을 쥐는 날이니 권력을 행사해야죠. 뭐, 절대권력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예 행사하지 못 하는 것 보다는 좀 낫지않습니까.

오전에는 투표하고 저녁에는 친구들과 모여 정치판을 안주로 맥주한잔 하면 딱 좋을 날 입니다.

브레멘, 브레머하펜, 올덴부르크

함부르크와 킬에서 겨울비를 맞은 다음날 이 어린양은 브레멘으로 향했습니다. 이날은 날씨가 참 좋더군요. 기분이 더 좋아졌습니다.

중앙역에도 브레멘 음악대의 그림이 그려져 있더군요

약간 심심하게 생긴 브레멘 중앙역

브레멘에 대한 정보를 보니 브레멘의 관광명소는 거의 대부분 브레멘 구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고 하더군요. 바로 구시가지 중앙으로 향했습니다.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길에 좀 유명하다는 동상이 하나 있더군요. 돼지사육사 동상이라고 부른다더군요... 흠. 돼지떼와 돼지치기라... 어쨌건 보는건 즐겁습니다.


여행 가이드를 보면 '브레멘은 한자동맹을 대표하는 도시로서 어쩌고... 시청 광장이 좋다..'라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네. 시청과 시청광장에 들어서니 좋긴 좋더군요.

브레멘 시청

역시 관광명소라는 페트리(St. Petri Dom)성당

역시 관광명소라는 시청앞의 롤란트(Roland) 상

그러나 역시 브레멘의 상징이라면 브레멘 음악대 되시겠습니다.

시청 광장근처에 있는 브레멘 음악대

시청 광장근처의 어떤 서점 앞에 있는...

이 낙서(?)는 길가다가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시 중심지를 대략 구경한 뒤 서점을 찾아 볼까하고 시내를 돌아다녔습니다.

괴테 플라츠 근처의 극장

어느 도시에나 다 있는 공원이지만 날씨가 맑아서 더 멋지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길을 가다 보면 보게 되는 표지판. 독일 역사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다 아실법한 인물들입니다. 뭐, 듣보잡 인물의 이름을 거리 이름에 붙이진 않겠지요.



한참을 돌아다녀도 쓸만한 서점을 건지지 못 했습니다. 아주 실망~ 그래서 브레멘 시내 구경을 얼렁뚱땅 마치고 브레머하펜으로 향했습니다.

브레머하펜 역

브레머하펜엔 왜 왔느냐?

또 항구 보러 온 건...

아니고 이걸 보러 왔습니다.

U-2540

네. 그렇습니다. 현존하는 유일한 XXI급 U-보트인 U-2540을 보러 브레머하펜에 온 것이죠.





그런데...






봄에 다시 오라는군요;;;;;

아. 아쉬운데 어쩌겠습니까. 독일의 많은 박물관들이 겨울엔 닫는데 여기도 그렇군요.

그래도 잠수함이니 바깥에서 구경하는 것도 아주 나쁘진 않습니다.


아쉽긴 한데 이 잠수함은 온라인으로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잠수함 구경을 대강 마치고 항구를 둘러봤습니다. 날씨가 맑으니 기분이 좋더군요. 바람도 상쾌했습니다.

?

브레머하펜 구경을 마치니 벌써 해가 지기 시작했습니다. 음. 역시 위도가 높으니 겨울에는....

다음에는 올덴부르크로 갔습니다. 원래는 올덴부르크에 일찍 가서 서점을 찾아 보려했는데 물 건너 갔지요. 올덴부르크에서는 저녁만 먹었습니다. 그래도 시내에 사람이 북적이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여행한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대공포는 의외로 효율적이다

오늘 오전에 방문객 여러분들을 심란하게 해 드렸으니 뭔가 만회(?)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날림 번역을 하나 했습니다.(굽신)

2차대전 중 독일 본토방공전에서 독일군 대공포의 형편없는 명중률은 무기의 효율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소재입니다. 미 제 8공군은 유럽전역에서 약 3,000대의 B-17과 약 1,000대의 B-24를 상실했는데 이 중 대략 30% 정도가 대공포에 의한 것 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 엄청난 양의 포탄이 사용되었고 그 덕분에 다들 잘 아시는 대공포의 낮은 명중률에 대한 이런 농담도 생겼다지요.

사형수를 교회 첨탑에 묶어 놓고 대공포를 쏘아댔다. 그리고 일주일 뒤 사형수는 굶어 죽었다.

대공포가 쏘아대는 포탄에 비해 떨어뜨리는 비행기가 얼마나 적었으면 저런 농담도 나왔겠습니까만 모든 것을 단순히 계량화된 수치로 환산할 수는 없는 것이죠. 단순한 숫자의 나열만으로는 그 뒤에 숨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법 입니다. 당연히 이런 대공포 폄하론(?)에 대한 반박이 없을 수가 없지요. 웨스터맨(Edward B. Westermann)은 독일군 대공포의 효율에 대해서 좀 색다르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전쟁 이후의 문헌들은 대개 대공포 부대를 유지하는데 소요된 경제적, 물질적 비용에 대해 대공포는 엄청난 자원을 소모한 반면 그 성과는 상대적으로 보잘 것 없었다고 주장한다. 대공포의 비효율성에 대한 주장 중 가장 많이 이야기 되는 사례는 1944년에 88mm FLAK 36/37이 평균 포탄 16,000발을 발사해서 비행기 한대를 격추시켰다는 것이다. 포탄 한발이 80마르크였기 대문에 이것은 비행기 한 대를 격추시키는데 1,280,000마르크, 또는 512,000달러가 들었다는 이야기다. 기술적으로 정확하다는 조건하에 대공포의 효율성을 1920년대의 주식시장의 성과와 비교한다면 1944년의 수치는 악명 높은 주가폭락이 일어난 다음날인 1920년 10월 25일의 다우존스 지수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요소들을 상세하게 분석해 보면 1944년에 비행기 한 대를 격추시키기 위해서 16,000발의 88mm 포탄을 사용했다는 통계는 여러 점에서 통계적으로 간과된 부분이 있다.
1944년도에 비행기 한 대를 격추시키기 위해서 16,000발의 88mm 포탄을 소모한 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요소를 살펴봐야 한다. 가장 먼저 독일군의 대공포 중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한 것은 88mm FLAK 36/37 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 포는 유효 고도가 26,000피트로 B-24의 평균 폭격 고도는 넘지만 평균 24,000피트에서 27,000피트의 폭격 고도를 가지는 B-17의 경우에는 폭격고도의 하한선을 살짝 초과하는 수준이다. 그렇기 대문에 1944년도에 제 8공군이 독일의 목표를 타격하는데 압도적으로 많은 B-17을 사용한 것은 대부분의 독일공군 대공포대는 그들의 유효 교전거리의 최대 한계 또는 그 이상의 적을 상대해야 했다는 것을 뜻한다. 두 번째로 많은 포대는 평균 포신 수명 이상으로 포를 사용해 효율성이 꾸준히 떨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포신의 마모로 인한 명중률 저하와 포신 폭발로 인한 포 사수의 손실을 가져올 수 있었다. 1944년 전 기간 동안 대공포대는 한달 평균 380문의 88mm포를 과도한 사용으로 인한 포신 마모로 상실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1943년의 두 배, 1942년의 아홉 배에 달하는 수치였다. 유효 교전거리의 미달과 과도한 포신 마모라는 문제점에 더해서 1944년도에 독일 본토에 262개의 중대공포대가 있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 부대들은 정교한 사격 통제 장비 없이 88mm FLAK 36/37 이나 개조한 75mm 대공포를 사용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이런 포대들은 대량으로 탄막을 치는 방식을 써야만 했다. 대공포대의 숫자가 많았다는 점은 이들 부대가 장비한 대공포가 구식이었다는 점과 함께 왜 1944년에 그토록 많은 포탄이 사용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특수한 살포 장비를 장착한 폭격기로 채프를 살포해 독일군이 레이더로 목표를 추적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과 같이 연합군의 전자전 수단이 개선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늘어나는 구식 대공포와 장비에 더해 1943년과 1944년에 대공포 부대에 많은 수의 보조원이 투입된 것도 88mm 포대의 성과를 저하시키고 이로 인해 비행기 한대 격추에 필요한 포탄이 크게 늘어나게 한 요인이다.
아마도 128mm 대공포와 88mm 포의 성과를 비교하는 것은 대공포의 효율성 문제를 가장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1944년 전 기간 동안 128mm 대공포는 포탄 3,000발 당 비행기 한대를 격추시켰는데 이것은 88mm 포가 소모하는 포탄양의 5분의 1에 불과한 것 이었다. 이 두 종류의 대공포의 성과가 이토록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두가지 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128mm 포는 연합군의 모든 폭격기의 작전 고도보다 높은 35,000 피트의 유효 교전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두 번째로 가장 중요한 요인은 128mm 포대는 모두 독일공군 대공포 부대의 정예라 할 수 있는 독일 공군의 정규 대공포병이 배치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128mm 포의 우수한 성과는 잘 훈련된 포병과 우수한 장비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독일공군은 불행히도 1944년에 전체 중대공포의 5%에 불과한 128mm 2연장 대공포 31문과 525문의 128mm 대공포를 보유했을 뿐이었다.
1944년의 비행기 한대 격추당 소비한 포탄량과는 달리 개전 이후 첫 20개월 동안 비행기 한대 격추당 소비한 포탄의 양은 중대공포의 경우 2,805발, 경대공포의 경우 5,354발 이었다. 연합군의 전자전 시도와 악천후가 이어진 1943년 11월과 12월 사이에 대공포부대는 적 비행기 한대를 격추시키는데 중대공포는 4,000발, 경대공포는 6,500발의 포탄을 소비했다. 한 자료에 따르면 전쟁 전 기간 동안 대공포 부대는 적 항공기 한 대를 격추시키는데 경대공포의 경우 4,940발, 중대공포의 경우 3,343발의 포탄을 소비한 것으로 나타난다. 통계 중 후자의 통계를 사용하면 적 항공기 한대를 격추시키는데 들어간 비용은 중대공포의 경우 267,440마르크/106,976달러, 경대공포의 경우 37,050마르크/14,820달러다. 명백히 비행기 한대를 격추하는데 사용된 대공포 탄약의 양은 (대공포가) 항공기 격추에서 기여한 몫에 대한 대략적인 추정에 불과하다. 이런 추정은 무기와 그에 관련된 장비를 생산하는데 소요된 자원의 가치와 대공포 사수를 훈련시키는데 들어간 비용을 간과한 것이다. 그렇기 대문에 전투기에 의한 적기 격추와 대공포에 의한 적기 격추를 직접 비교하는 것은 전투기의 설계, 생산, 운용하는데 들어가는 숨겨진 비용 때문에 성립되기 어렵다. 전투기의 경우 비행장의 건설과 유지에 들어가는 비용, 전투기의 유지와 정비, 연료비용, 여러 특수한 훈련과 수백시간의 비행 등 전투기 조종사의 교육에 들어가는 비용 등 여러 기반 비용을 포함해서 평가해야 한다.
대공포 부대가 상대한 적 항공기의 생산가격을 살펴보는 방법도 대공포 1문의 경제적 효용을 계산하는데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42년도에 장비를 완전히 갖춘 B-17 한대의 가격은 292,000달러였고 역시 같은 조건의 B-24는 327,000달러였다. 중폭격기와 더불어 노스 아메리칸 B-25의 1942년도 가격은 대당 153,396달러, 마틴 B-26은 대당 239,655달러였다. 중형폭격기의 대당 가격에는 유지, 정비, 연료, 그리고 폭격기 조종사의 교육에 들어간 비용은 제외한 것이다. 어떤 경우에서든 중대공포가 적 항공기 한 대를 격추시키는데 107,000달러를 소비하고 경대공포가 15,000달러를 소비하는 것은 폭격기의 생산 비용을 생각할 때 결코 낭비가 심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방대한 경제적 자원과 대규모의 생산 잠재력을 가진 미국이 참전한 것은 연합군이 추축국에 대해 재정적 소모전을 강요할 수 있게 한 요인이었고 독일 공군은 이에 대해 전혀 대응할 수 없었다.

Edward B. Westermann , FLAK : German Anti-Aircraft Defenses, 1914~1945,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1, pp.292~294

위의 글에서는 비용을 가지고 이야기 했는데 전투기 부대의 격추율도 1944년에 들어오면 비참할 정도로 떨어집니다. 1944년 하반기에 가면 폭격기 1대당 전투기 4~5대가 격추되는 전투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지요. 대공포의 전과는 감소 추세를 보이긴 하더라도 비교적 완만합니다. 즉 대공포가 아주 낭비적인 무기는 아니었던 셈 입니다. 그리고 위의 글 에서도 언급했지만 전쟁 중반까지는 대공포의 명중률이 꽤 양호했습니다. 미국 육군항공대의 폭격기 조종사들의 회고를 보더라도 1943년까지는 독일군 대공포 사격이 꽤 정확했다는 언급이 더러 있습니다. 단순히 숫자만 놓고 볼 때는 알기 어렵지만 실제 참전자들은 대공포의 위력에 대해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Brian D. O’neil의 Half a Wing Three Engines and a Prayer를 읽었을 때 개인적으로 꽤 인상 깊었던게 독일군의 대공포 탄막의 위력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1944년도에 독일공군 전투기 조종사의 소모율이 얼마나 높았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대공포의 경제적 가치는 꽤 높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하더라도 전투기 조종사 한 명을 훈련시키는 것 보다는 대공포 사수 한 명을 교육시키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싸겠지요. 게다가 포탄 장전 같은 비교적 단순한 임무는 훈련이 덜 된 인력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1944년에 독일공군 대공포 부대의 인력 중 40% 가량이 잡다한 보조 인력이었다고 하지요. 반면 전투기는 아무리 급해도 최소한의 조종 교육은 시켜야 하니 격추 대비 효율로 치면 별로 경제적이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Monday, April 7, 2008

내가 밀리터리 매니아였구나

지난달에 제 블로그의 조회수가 어느 정도 나왔나 궁금해서 Statcounter에 로그인을 했는데 서프라이즈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뭔 일인가 궁금해서 링크를 눌러 보니 이런 글이 나왔습니다.

서프!! 중심 좀 잡자!!


글 쓰신 양반을 보니 지난달에 이 어린양의 혈압을 올려 주신 그 분 입니다.

어쨌건 제 이야길 하는 것 같아 호기심이 당기더군요. 읽어 보니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노빠들의 댓글들이 가관이더군요.

그런데 본문을 읽다 보니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게 됐습니다.

이 어린양이 '밀리터리 매니아'라는 군요. 오. 처음 알게 됐습니다. 저는 밀리터리 매니아라는 개념도 별로 좋아 하지 않고 여태껏 제가 밀리터리 매니아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음. 책 몇권 읽었다고 졸지에 밀리터리 매니아가 되다니. 흥미롭습니다.

졸지에 밀리터리 매니아가 된 김에 몇가지 생각을 해 봤습니다.

취미삼아 역사책 몇 권을 읽으면 역사 매니아인가?

취미삼아 소설책 몇 권을 읽으면 소설 매니아인가?

취미삼아 과학책 몇 권을 읽으면 과학 매니아인가?

에.. 뭐 이것 저것 많군요. 매니아가 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매니아 되는게 정말 쉽군요.

Saturday, April 5, 2008

총선잡상

1. 지난 대선때 '쥐 한마리'라는 글을 썼었는데... 이 글의 주인공 되시는 분이 이번 총선에 나오셨습니다. 어느 당으로 나오셨냐 하면.... 무려


친ㆍ박ㆍ연ㆍ대


이 분의 선거 현수막에는 '꼭 살아서 한나라당으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씌여 있습니다. 덜덜덜...

2. 선거에 나온 정당들에 대한 '雜想'

한나라당 : 하늘이 두 쪽 나도 찍을 일 없음

민주당 : 아무리 봐도 도로 열린우리당. 최악의 순간에나 찍을까 말까...

민주노동당 : 소극적 지지에서 혐오로.

진보신당 : 엄청나게 불쌍함. 동정표를 주긴 주겠으나 정책이라고 내세운 것들을 보면 안습. 누구 말 마따나 안보에 대한 제대로 된 공약없는 진보정당은 미래가 없을 것으로 보임.

자유선진당 : 회창옹의 노익장에 경의를. 그냥 여기까지.

친박연대 : 정당정치의 퇴행적 산물.

평화통일가정당 : 이뭐병.

Friday, April 4, 2008

耽羅國紀行


요 며칠간 耽羅國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Tuesday, April 1, 2008

Nation Building in South Korea : Koreans, Americans, and the Making of a Demcracy - Gregg Brazinsky

서기장 동지께서 이라크 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공통점을 비교한 글을 써 주셔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제 아무리 천하의 미국이라도 할 수 없는 일은 언제나 있는 법 이지요.

미국은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새로운 세계질서를 만들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자신이 만든 세계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번의 이라크 전쟁은 2차대전 이후 미국이 겪은 수 많은 실패 사례 중 하나로 끝날 것 입니다. 결국 상황이 이 지경에 되고 나니 많은 미국인들은 과거에 대해 좀 더 진지한 접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이 시도한 수많은 국가 건설 시도 중에서 성공한 사례는 과연 몇 건이나 있는가? 맙소사! 미국이 성공한 사례는 ‘정말로’ 한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지 않은가! 결국 미국인들은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이 그토록 많은 지원을 했건만 왜 이리 성적표는 시원치 않은 것인가?

저자가 말하고 싶은 바를 그대로 드러내 주는 표지

브래진스키(Gregg Brazinsky)의 Nation Building in South Korea라는 책은 이 물음에 답을 구하기 위해 미국이 사실상 ‘유일하게’ 성공을 거둔 한국의 사례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브래진스키는 미국이 2차 대전 이후 수많은 나라들에게 풍요로운 경제와 민주주의를 이식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퍼부었건만 왜 이렇게 쪽박만 줄줄이 차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미국이 이식하고자 하는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도데체 뭐가 문제인 것인가? 브래진스키는 미국은 후진국들에게 바람직한 발전의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결국 그 방향으로 갈 것인가는 각 국가들의 선택이며 미국이 실패하는 이유는 이 점을 간과하고 무조건 미국의 방식을 들이밀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브래진스키는 한국이 성공을 거둔 원인으로 한국의 내재적인 요인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즉 한국은 미국이 실패한 다른 나라들과 배경부터 달랐다는 것 입니다.

브래진스키는 먼저 한국이 유럽 국가가 아닌 일본에 의해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백인이 아니라 같은 아시아인에 의해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미국이 한반도에 들어왔을 때 일본 같은 제국주의자로 본 것이 아니라 ‘해방자’로 보았고 그 때문에 미국이 큰 부담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는 것 입니다. 베트남과 중동은 백인에 의해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게 보였다는 것이지요. 반면 한국은 미국의 헤게모니가 한국의 전통적 가치를 파괴하지 않을 것으로 인식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지적합니다.
다음으로는 적절한(?) 독재를 꼽고 있습니다. 즉 이승만은 폭압적이었고 지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컸지만 1948년의 시점에서 땜빵으로 써먹기에는 그럭 저럭 적절한 선택이었고 박정희도 결국 지독한 독재자가 되지만 1960년의 과도기에 미국이 지지했던 온건한 장면 보다 나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특히 브래진스키는 장면 정부가 미국이 기대하는 수준의 경제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는가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브래진스키는 박정희가 미국식의 완전한 자유시장 노선을 취하지 않고 국가가 통제하는 경제 정책을 펼친 것에 대해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한국의 특수성이 부각됩니다. 즉 식민지 시기에 일본식으로 교육받은 엘리트 집단이 존재했던 것을 한국의 성공 요인 중 하나로 꼽는 것입니다. 브래진스키는 일본식의 권위주의적 교육을 받은 남한의 군사 엘리트들이 미국이 이식하고자 한 것들을 한국(+일본)식으로 한국 실정에 맞게 소화해서 받아들인 것이 성공의 열쇠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박정희 체제까지는 미국의 지지가 긍정적 영향을 끼쳤지만 박정희 암살 이후의 위기 상황에서 전두환을 지지한 것은 ‘치명적인 실수’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미 박정희 정권에서 경제적 성공을 거둔 상황에서 권위주의적 독재는 효용을 다한 상태였고 전두환을 지지 함으로서 미국의 위신을 실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어쨌건 브래진스키는 전두환을 제외한 독재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점은 한국에서 불편하게 받아들여지겠지요.

다음으로 저자는 한국이 경제 성장 이후 민주화에 성공한 요인은 무엇인가에 주목합니다. 후진국이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중산층이 필요하지만 안정적인 중산층이 절대적 요소는 아닙니다. 브래진스키는 이 점에 대해 싱가포르는 안정적인 중산층을 갖췄지만 정치적인 면에서 후진적이라는 점을 지적 합니다. 그렇다면 한국을 민주화 시킨 동력은 무엇인가? 브래진스키는 민주화에 있어서도 한국의 내재적인 요소가 결정적이었다고 봅니다. 물론 여기서도 미국의 역할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저자는 미국이 해방 이후 지속적으로 한국의 교육과 사회발전에 투자한 점을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교육에 대한 원조를 통해 한국의 지식인, 정치인들이 미국이 중요시하는 가치, 자유민주주의를 수용하는데 도움을 줬다는 것 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미국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한국인들의 민주화에 대한 갈망이 결정적인 요인이었음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설사 미국의 교육에 대한 지원이 없었더라도 한국의 청년과 지식인들은 유신 독재에 저항하는 길을 택했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브래진스키는 경제발전과 민주화에서 한국의 내재적 요소가 기여한 바를 높게 평가하고 미국이 여기서 제 3세계의 국가건설에 대한 교훈을 얻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자는 미국이 후진국의 국가건설을 지원할 때 미국의 방식을 일방적으로 들이밀 것이 아니라 해당 국가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 더 나은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라크의 경우는 이러기에는 너무 늦었으니 다음 국가를 찾아 봐야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