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y 31, 2008

미 해군의 굴욕

천하의 미 해군도 이런 굴욕을 겪은 때가 있었다지요.

미해군의 전반적인 상황은 1880년대가 될 때 까지도 나아지지 않았다.

1879년 칠레는 페루와 볼리비아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고 해상에서 잇달아 승리를 거두었다. 미국은 페루에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페루의 패전이 확실해졌기 때문에 칠레 정부에 휴전을 요청하기 위해서 발파라이소(Valparaiso)에 해군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러나 미 해군 태평양전대가 수 척의 구식 목조전함만을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칠레 해군은 영국에서 건조한 12인치 장갑과 후미장전식 포를 갖춘 두 척의 전함을 포함해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군함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칠레는 미국의 개입이 뜬금없고 주제 넘는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뒤에 한 (미국)하원의원에 따르면 “(사절단을 이끈) 제독에게 미국이 쓸데없이 참견한다면 미국 함대를 바닷속에 처 넣겠다”고 말했다 한다. 한 함장은 이 말에 크게 분노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칠레가 옆 동네와의 싱거운 싸움에서 승리한 것 가지고 미국의 강력한 힘에 맞설 수 있을것이라 기고만장해 하다니!”
물론 이 함장이 자부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미국과 칠레가 전쟁에 돌입하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보잘 것 없는 미국 함대는 끝장이 났을 것이고 그럴 경우 지상전의 결과는 별 의미가 없게 될 것이었다.

Stephen Howarth, 『To shining Sea : A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Navy 1775~1998』,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1999, p.223

과연, 시정잡배의 가랑이 밑을 기었다는 한신의 고사를 떠오르게 하는 훈훈한 옛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Friday, May 30, 2008

베른

바로 전날 암스테르담에서 쾰른을 거쳐 슈투트가르트로 오는 동안 맥이 빠졌는지 늦잠을 잤습니다. 늦잠덕에 이날의 계획도 엉망이 됐습니다. 일어나서 시계를 보는 순간 맥이 쭈욱~ 빠지더군요.

왼쪽이 전날 묵었던 곳입니다

슈투트가르트역은 좀 답답하게 생긴것 같습니다. 크긴 큰데 너무 밋밋해서 별다른 감흥이 없더군요. 유럽의 기차역들은 나름대로 개성이 있는데 슈투트가르트 역은 밋밋한게 개성인 것 같습니다.



취리히행 ICE

어차피 일정대로 움직이기는 글렀으니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스위스로 들어가면서 느긋하게 경치를 감상했습니다. 스위스 국경으로 가는 길에 Singen이란 역이 있던데 참 멋진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일에서 노래를 가장 잘하는 동네???

스위스로 접어드니 지형이 확 달라졌다는 느낌이 옵니다.


원래는 취리히에 도착해서 한 서너시간 정도 시내 구경을 하고 베른으로 가려고 했는데 시간관계상 포기했습니다. 크. 역시 여행을 가도 부지런해야...


아무래도 이번 여행은 썰렁한 열차만 탈 팔자였나봅니다

취리히에서 베른으로 가는 길도 경치가 일품이었습니다. 쓸만한 사진을 거의 건지지 못한게 아쉽더군요.


베른역 도착

베른에 도착한 뒤에는 그냥 걸어다녔습니다. 원래는 베른에 도착해서 뭘 구경할지 생각을 했었는데 맥이 빠지니 그냥 걷고 싶더군요.







구토하는 독수리



대충 시내를 둘러보고나니 해가 떨어졌습니다.

저녁식사를 한 뒤 스위스로 놀러온 사람들의 필수코스(???)인 인터라켄으로 갔습니다. 한국인이 너무 많아서 강원도 평창쯤에 놀러간 기분이더군요.

오월의 밤 – 고골의 중단편 모음집

괴담은 怪力亂神인지라 진지하게 생각하면 정신건강에 해롭지만 재미는 있다는 점에서 술과 같습니다.

이 어린양은 대략 고등학교 초반까지 괴담에 심취해 있었는데 그 계기가 된 것이 고골의 단편 “비이(Вий)”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있고 워낙 유명하다 보니 많은 분들이 잘 아실 것 입니다. 20년전에 읽은 책이었지만 주인공의 최후가 워낙 인상에 깊었고 책에 딸린 삽화도 제법 으스스 했던지라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었지요.

그러다가 얼마 전에 생각의 나무에서 고골의 중편과 단편을 엮은 “오월의 밤”이 출간되어 있고 여기에 “비이”가 실려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다시 읽게 됐는데 역시 재미있더군요. 주인공이 최후를 맞게 되는 이유는 다른 많은 괴담들에서 나타나듯 절대 보면 안 될 것을 보았기 때문인데 이런 뻔한 이야기도 좋은 글 솜씨와 결합하면 결코 질리지 않는 떡밥이 됩니다. 번역을 담당하신 분은 조준래라는 분인데 번역이 꽤 재미있게 잘되어 있습니다.

“오월의 밤”에는 “비이”외에도 “무서운 복수” “성 요한제 전야” 등 다섯편의 작품이 더 실려 있는데 “비이” “무서운 복수” “성 요한제 전야”는 공포적 분위기가 강한 반면 나머지 세 작품은 개그가 적절히 섞여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실려있는 “오월의 밤 또는 물에 빠져 죽은 처녀”는 물귀신이 나오는 이야기지만 전체적으로 개그더군요.

특히 이 책에서 마음에 드는 것은 작품의 배경이 우크라이나이다 보니 먹을 것에 대한 묘사가 많다는 것 입니다. 소설에 묘사된 여러 가지의 우크라이나 요리에 대한 묘사는 읽는 것 만으로도 즐거워 지더군요. “이반 표도로비치 스폰카와 그의 이모”는 특히 요리에 대한 묘사가 많아서 좋았습니다. 풍부한 요리에 대한 묘사를 보다 보니 히틀러가 drang nach Osten을 줄구장창 외친 이유가 우크라이나 요리가 아닐까 하는 망상도 덤으로 들더군요.

전체적인 감상은 20년전의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있던 이야기를 다시 읽게 되어 아주 즐거웠다는 것 입니다. 앞으로도 기억의 한 구석에 흔적만 남은 다른 책들을 다시 읽을 기회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기억을 되살리면서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제 기억력이 아주 엉망은 아니라는 긍정적인 사실을 발견했거든요.

Tuesday, May 27, 2008

위대한 기업가 정신

굿펠로우(Preston Goodfellow)와 스태거(John Stagger)는 1949년 10월 남한에 (자신들의 사업을 위한) “전진기지”를 세우기 위해서 이승만과 의논했으며 두 달 뒤 2차대전 이후 남한을 방문한 최초의 미국 무역 사절단을 조직했다. 1950년 2월에 그는 조선은행 총재인 최순주(崔淳周)의 미국 방문을 계획했으며 그 후 몇 달간 최순주에게 자신이 구상한 한-미 상호교역에 대한 계획을 설명했다. 얼마 뒤(1950년 4월) 최순주는 대한민국의 재무부장관이 되었다. 1950년 4월 굿펠로우는 통신부문 사업 계약의 일환으로 RCA 소속의 기술자 한 명을 서울로 불러들였다. 1950년 12월 굿펠로우는 잿더미로 변한 서울에서 그의 비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고철을 대량으로 매입하겠다는 고철상을 찾아 보도록 해, (중략) 한국에는 고철이 넘쳐나잖아.”

Bruce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II : The Roaring of the Cataract 1947-1950』,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0, p.136

미국인들의 냉철함은 종종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데 위에서 인용한 글도 그런 경우라 하겠습니다. 과연, 정말로 위대한 기업가 정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굿펠로우는 미군정 당시 육군대령의 계급으로 하지 중장의 고문이었으며 동시에 이승만의 개인 고문이기도 했습니다.

Saturday, May 24, 2008

2MB를 탄핵할 수 있는 방법

많은 분들이 현재의 청와대 주인을 쫓아내고 싶어하지만 마땅한 방도가 없어 고민하고 계시는 바를 잘 알고 있습니다. 네. 확실히 현재는 법적으로 대통령을 탄핵할 만한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어린양이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어떤 경우에 탄핵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 봤는데...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대통령은 개신교 장로입니다. 그리고 이미 서울 시장때 서울시를 주님께 봉헌한 바가 있지요.

네 그렇습니다.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봉헌하는 것 입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천국의 통치자인 여호와와 내통한 죄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국가반역죄가 되는 것이니 탄핵을 백만번은 하고도 남지요.

자. 장로님 부탁합니다.

Friday, May 23, 2008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에 대한 감상

이 구절로 대체할까 합니다.

우리는 흔히 대중을 정치적으로 교육하는 일이 이따금씩 대중에게 기다란 정치적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지도자나 그의 참모가 거만한 어조로 하루의 주요 사건들을 설명하는 것으로 대중의 정치 교육이라는 필수적인 의무를 완수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 교육은 대중의 마음을 열고, 일깨우고, 지성이 생겨나도록 하는 것, 세제르의 표현을 빌리면 ‘영혼을 창조하는 것’이다. 대중을 정치적으로 교육하는 일은 정치 연설을 한다는 뜻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프란츠 파농/남경태 역,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그린비, 2004, 223쪽

과연, 이명박은 전형적인 제3세계 지도자인 것 같습니다. 우리에겐 그다지 필요가 없어 보이는군요.

프랑스군의 사단편제 : 1763~1804

며칠 전에 썼던 보병사단 편제의 변화 : 1909~1916라는 글에 대해 배군님이 혁명군에서 대육군으로라는 아주 근사한 답 글을 써 주셨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내용이더군요. 그러고 보니 삼각편제와 사각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18세기 후반 사단편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먼저 하는게 나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18세기 후반 프랑스 육군의 보병사단 편제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해보려 합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다 시피 18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전쟁은 기껏해야 5~6만 수준의 야전군들에 의해 수행됐습니다. 연대 이상으로는 상설 편제된 부대 단위가 없다 보니 전쟁이 터지면 급히 만들어지는 군사령부에 의해 지휘가 이뤄졌고 이런 비효율적인 지휘에 의한 전투는 ‘결정적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양측 모두 사상자만 줄줄이 내는 비효율적인 전쟁이었던 셈입니다.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으니 전쟁은 장기전이었습니다. 에스파냐 계승전쟁은 1701년부터 1713년까지 계속되었고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은 1740년부터 1748년 까지, 7년전쟁은 1756년부터 1763년까지 계속됐지요.
당연히 당대의 군사 사상가들에게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전쟁이 장기전으로 나가니국가재정은 거덜이 나고 승리를 거둬도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것은 간당간당하니 해결책을 모색하는건 당연한 순서였습니다. 공통적인 관심사는 이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효율적인 지휘통제를 가능하게 해서 ‘대박’을 터뜨릴 수 있을까?

처음으로 연대 이상의 부대단위를 생각한 인물은 삭스(Maurice de Saxe) 원수였다고 합니다. 삭스 원수가 구상한 부대 단위는 4개 연대로 편성되며 각 연대는 기병과 포병부대를 배속받는 legion이었습니다. 기본적인 구성은 뒤에 만들어지는 사각편제 사단과 얼추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을 뜻하는 Division이라는 용어는 오스트리아 계승전쟁 당시에 처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는 야전군 주력과 별도로 움직이는 부대를 일컬을 때 Division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군요.

그렇다면 본격적인 사단은 언제 만들어졌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크게 루이 16세 시기에 만들어진 Division과 혁명 이후 확립된 Division을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슬프게도 이 어린양은 프랑스어를 모르는지라 영미권의 군사학계에서 이뤄진 논의를 중심으로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먼저 이미 구체제하에서 사단편제가 자리를 잡았다는 주장은 윌킨슨(Spencer Wilkinson, 1915)과 큄비(Robert. S. Quimby, 1957)가 대표적입니다. 윌킨슨의 저작은 읽어보질 못 했으니 넘어가고요.;;;;; 큄비는 1957년에 출간한 The Background of Napoleonic Wafare라는 저작에서 1763년 Broglie 원수가 편성한 보병사단과 기병사단 편제가 최초의 근대적 사단편제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큄비의 설명에 따르면 이때 편성된 사단은 2개 연대가 1개 여단을 구성하며 2개 여단이 사단을 구성하는 편제로서 각 여단 예하로 포병이 편제된 구조였습니다.

반면 프랑스혁명 이후에야 사단편제가 본격적으로 자리잡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로스(Steven T. Ross)는 1965년에 발표한 The Development of the Combat Division in eighteenth-century French Armies라는 논문에서 프랑스혁명 이후에야 사단편제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로스는 큄비 등이 주장하는 것 과는 달리 7년 전쟁 당시의 사단도 상설 편제가 아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작전에 돌입해서 각 야전군의 지휘관이 임시로 편성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고있는 것 입니다.
로스에 따르면 프랑스가 7년 전쟁 이후 군제개편을 하면서 1776년에 전국을 16개의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에 Division이라는 명칭을 붙였는데 이것이 처음으로 Division이 상설편제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 만들어진 Division은 전투 부대가 아니라 행정을 담당하는 군관구에 가까운 편제였습니다. 로스에 따르면 각 Division의 기능은 병력의 모집, 보급, 훈련 및 주둔지의 치안 담당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788년에는 Division이 18개로 늘어납니다. 이때 처음으로 연대들이 여단본부 예하로 편성되었으며 이들 여단은 전투사단으로 개편되었습니다. 즉 루이 16세 말기에는 행정적 단위의 ‘사단’과 전투 부대로서의 ‘사단’이 병존했다는 주장입니다. 루이 16세 당시의 사단은 포병과 기병 등 지원 병과는 결여한 편성이었습니다.
로스에 따르면 구체제하에서는 사단편제가 확립되지 못했습니다. 로스의 주장에 따르면 사단편제가 확립되는 것은 혁명이후인데 그 과정은 대략 이렇습니다.
먼저 1792년에 2개여단으로 구성되는 보병사단 편제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때 만들어진 사단은 보병만 가지고 있었으며 포병과 공병 등의 지원부대가 없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혁명으로 장교들이 대량으로 망명한 이유로 사단 단위에서는 보병과 포병을 조율할 수 있는 장교가 부족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의 부족은 연대 이하의 편제도 변화시켰습니다. 이미 1793년 무렵부터 숙련된 병력의 부족으로 여단의 편성을 2개연대-4개 대대에서 2개연대-6개대대로 바꾸는 경우가 늘어났습니다. 즉 1개연대에 전투경험을 가진 1개대대와 전투경험이 없는 2개대대를 혼성 편성하는 편제였습니다. 결국 이것이 1794년에는 공식적인 편제가 됩니다. 즉 4개대대의 여단 대신 3개대대로 편성된 연대를 반여단(demi-brigade)로 하고 2개의 반여단이 다시 여단을 이루며 2개의 여단은 상급제대로 ‘사단’을 두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식편제’이고 실제로는 전쟁이 진행중인 와중이라 일선부대의 편성은 중구난방이었습니다. 공식편제가 만들어지긴 했지만 일선의 상황은 엉망이라 대개는 사단의 바로 아래로 여단본부 없이 3개의 반여단을 두는 경우가 가장 흔했습니다. 1개 사단에 배속되는 반여단의 숫자가 들쑥날쑥 이다 보니 사단의 병력은 7,000명에서 13,000명 수준까지 다양했다고 합니다. 결국 공식편제가 있긴 했으나 이때 까지도 기본적으로는 구체제하의 임시적 성격이 남아 있었던 것 입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단이 포병을 배속받은 점은 특기할 만 했으며 1796년 이후로는 사단에 배속된 지원 부대의 규모도 체계화되고 충실화되어 갑니다.

이후의 발전과정은 연구자들의 견해가 거의 일치합니다.
1796년 이후 프랑스군의 사단은 일시적으로 여단 본부 없이 사단 예하로 3개 반여단이 배속되는 편제를 취하게 됩니다. 하지만 1799년에 다시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1794년 처럼 사단 편제가 야전군 별로 들쑥날쑥한 형태를 취했다고 합니다. 결국 통령정부 하에서 비로서 사각편제의 사단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참고로 실험적으로 운용되던 군단(corps d’armee) 편제도 1800년에 확립되고 1802~1804년을 거치면서 야전군-군단-사단(사각편제)가 완성됩니다. 또한 1790년대에 광범위하게 시도했던 모든 병종을 단일 사단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버리고 기병도 사단 단위로 편제하게 됩니다. 이렇게 효율적 지휘통제 체제를 확립한 프랑스군은 1805~1806년에 걸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러시아를 차례대로 풍비박산 내면서 전 유럽을 벌벌떨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지요.

Thursday, May 22, 2008

독일공군의 조종사 부족사태

슈피겔 온라인판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습니다. 독일연방군이 조종사들의 퇴역 증가로 심각한 조종사 부족을 겪고 있다는 군요. 클린턴 시절에 미군도 군 조종사들이 의무복무기한만 채운 뒤 민간항공사로 대거 이적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독일군도 유사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네요. 특히 독일공군의 수송기 부대와 독일해군항공대의 경우 조종사의 30%가 부족한 실정이랍니다. 이거 굉장히 심각하군요.

Pilotenmangel bei der deutschen Luftwaffe - Spiegel Online

Luftwaffe laufen Piloten in Scharen davon - Hannoversche Allgemeine Zeitung

그러고 보니 얼마전에 한국 공군 조종사들이 단체로 조기전역을 신청한 일이 있었다는데 이건 전세계적인 현상같습니다. 과연. 시장의 힘은 위대하군요!

'육방부'에 절망해 떠나는 조종사들

Tuesday, May 20, 2008

금주의 신앙생활

오늘 책이 한 상자 도착했습니다.



러시아 책의 좋은점은 루블화의 낮은 환율입니다. 독일책이 이정도 가격이라면 더 바랄게 없겠는데...

도착한 책 들을 훑어보니 예상대로 만족스러운 것과 약간 실망스러운 것이 섞여 있습니다. 이번에 도착한 것 중에서 마음에 들었던 것을 몇 권 꼽아보면


Ржев 42. Позиционная бойня - Светлана Герасимова : 1942년에 르제프를 둘러싸고 벌어진 공방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제가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42년 늦여름-가을의 전투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Сталинград. За Волгой для нас земли нет - Алексей Исаев :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해 나온 최근의 연구서적입니다. 독일측의 기록도 많이 활용해 신뢰도가 높아 보이며 42년 가을 내내 스탈린그라드 포위망의 외곽에서 독일군과 소련군이 벌인 격전에 대해서도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좀 재미있었던 녀석은...


1972년에 나온 코네프 동지의 회고록입니다. 1943~44년의 우크라이나 전역의 경험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1972년에 나온 이 책이 2007~2008년에 나온 위의 책 들 보다 종이의 질과 인쇄상태가 훨씬 좋다는 점 입니다.

채승병님의 블로그에서 종종 지적 되듯 러시아 책들은 너무 빨리 품절이 됩니다. 그 때문에 이번에도 좋은 책을 몇 권 놓쳐서 아쉽습니다. 특히 브야즈마 전투를 다룬 연구서가 한 권 있었는데 그걸 놓친건 정말 유감이네요.

Monday, May 19, 2008

쾰른 - 최악(???)의 날

아르덴느 구경을 마치고 다시 독일로 가기 위해서 리에쥬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리에쥬역의 매표소로 가니 프랑스에서 들어오는 쾰른행 국제선을 간발의 차이로 놓쳤습니다.

리에쥬역 국제선 매표소

결국 리에쥬에서 아헨으로 가는 단거리 열차를 타기 위해서 두 시간을 썰렁한 플랫폼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헨으로 가는 열차가 오지 않았습니다. 퇴근시간이 다 돼서 매표소는 모두 퇴근했고 야간 근무서는 역무원에게 물어보니 영어를 못 하더군요.;;;;;
다행히 영어를 할 줄 아는 Mons에서 왔다는 벨기에 친구가 자신도 아헨으로 친구만나러 간다면서 역무원에게 통역을 해 줬는데...

아헨행 열차가 없어졌답니다!

한동안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다가 리에쥬역에서 밤 새는 것도 그다지 내키지 않아서 암스테르담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암스테르담 밤거리를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더군요.

벨기에에서 네덜란드로 넘어간 뒤 다시 국경에서 아인트호벤으로 갔습니다.



아인트호벤에서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마지막 열차를 탔습니다. 대부분의 막차가 그렇듯 사람이 없어 조용하고 좋았습니다. 열차에서 잠을 보충했습니다.

막차는 언제나 썰렁

암스테르담에 도착했지만 야밤이라 문 연 곳은 맥도날드 하나 뿐이었습니다. 밤거리를 싸돌아다니는 것도 기운이 빠져서인지 별로 재미가 없더군요. 한 두어시간 돌아다니다가 역으로 돌아왔습니다.

썰렁한 암스테르담역


다시 암스테르담 역으로 돌아와서 첫차를 기다렸습니다.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고 정말 지겹더군요. 암스테르담에서 ICE를 타고 쾰른으로 들어왔습니다.


쾰른 중앙역

쾰른에 도착해서 아침식사로 소시지를 먹었습니다. 음. 언제나 그렇지만 이 어린양은 육식을 즐깁니다. Heil Currywurst!


아침을 먹은 뒤 쾰른 지도를 사서 시내로 나갔습니다. 쓸만한 서점을 찾아 몇 시간 돌아다녔는데 허탕만 쳤습니다.


결국 시간도 부족한지라 쾰른대성당 구경이나 하고 슈투트가르트로 가기로 했습니다.

크다!






성당내부에는 다른 많은 성당들이 그렇듯 예수의 생애를 형상화한 조각들이 있었습니다. 로마군인을 중세기사처럼 묘사한게 아주 재미있어 보이더군요.


하지만 성당에서 가장 압권이었던 것은 성당의 거대한 크기가 아니라 수많은 스테인드글라스들이었습니다. 유럽여행하면서 많이 구경하지만 스테인드글라스는 볼 때 마다 그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할 수 가 없습니다. 어린양 같은 무신론자의 마음에도 감동을 주는 것을 보면 예술에 있어서는 독실한 신앙심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쾰른대성당 구경을 마친 뒤 슈투트가르트로 직행하려던 계획을 바꿔 먼저 코블렌츠를 들러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어차피 쾰른에서 책 살 돈을 쓰지 못 했으니 코블렌츠에 가서 책을 산 다음에 슈투트가르트로 가는게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약간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줄이야...

다시 코블렌츠로!


코블렌츠 시내버스 노선도

전에 갔던 서점에 가서 아주 쓸만한 책을 건질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아주 좋았는데...

이때 까지는 좋았습니다

책 사고 역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졸았습니다.;;;;; 그리고 버스 종점까지 그대로 가 버렸지요. 결국 코블렌츠에서 슈투트가르트로 가는 기차를 놓쳤습니다.;;;;;; 여기서 하루의 계획이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일단 낭패감을 안고서 코블렌츠 역에서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어쨌건 슈투트가르트로 가려먼 다시 쾰른으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쾰른역에 도착해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쾰른역 구내서점 구경을 했는데 역시 이곳 또한 군사서적을 많이 비치해 놓고 있었습니다.

德國人들의 훈훈한 尙武精神

쾰른에서 슈투트가르트로 가는 직행노선은 끊겨서 먼저 프랑크푸르트 공항역으로 갔습니다. 프랑크푸르트는 5년 전에 한달 정도 머무른 적이 있어서 이번 여행에서도 한번 쯤 들러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촉박해서 그냥 스쳐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많이 아쉽더군요.

프랑크푸르트 공항역

다시 이 역에서 슈투트가르트로 가는 막차를 탈 수 있었습니다. 원래는 한참 전에 도착해서 슈투트가르트에서 여유있게 저녁을 먹고 시내구경을 했었어야 하는데... 에휴~

슈투트가르트 도착....

슈투트가르트에 막차로 도착한 다음에는 피곤하다 보니 아무 여관이나 들어가서 자기로 했습니다. 다행히도 적당한 가격에 아침식사를 주는 곳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샤워를 하고 TV를 틀어보니 낯익은 얼굴이 나오더군요. 윈터스 소령님이 독일어로 말씀하시는 것이 너무 신기했습니다.

윈터스 소령님의 유창한 독일어실력에 놀랐습니다.

보병사단 편제의 변화 : 1909~1916

군사사에 있어서 사단 편제는 ‘근대적’ 군사제도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단계입니다. 사실상 18세기 말에 등장한 사단편제는 21세기인 오늘날 까지도 전 세계 육군의 기본적인 부대편제로 유지되고 있지요.
Division은 단어에서도 대략 느낄 수 있듯 프랑스인들이 만들어 낸 조직이었습니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유럽의 패권을 노리던 프랑스는 당연히 군사 문제에 있어서 많은 업적을 이뤘으며 사단 편제의 등장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 입니다. 프랑스의 군사사상가들은 18세기 중반부터 당시까지의 전쟁에서 각 국의 군대가 처한 구조적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고민을 했으며 그 결과 4개 연대로 편성된 독립된 작전단위를 구상하게 됩니다. 1788년에는 2개 연대를 여단의 지휘하에 두고 이 여단은 사단의 지휘를 받는 편제가 만들어지고 마침내 1794년에는 혁명정부에 의해 정식으로 2개 여단으로 구성되며 포병과 기병등의 지원부대를 갖춘 사단 편제가 확립됩니다. 사단편제는 전투에서 지휘관에게 보다 많은 융통성을 부여해 줬으며 연대 이상의 전술 단위가 없던 다른 국가의 군대들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결정적으로 나타난 것이 1805년의 아우스테를리츠 전역과 1806년의 예나 전역이었습니다. 특히 1806년의 프로이센군은 철저히 박살이 나서 뼈를 깎는 개혁에 들어가게 되지요.

이러한 4개연대-2개여단의 사단편제는 1차대전 까지 계속 유지됩니다만 19세기 후반부터 발전한 군사기술과 이에 따른 전장의 변화는 4각 편제를 개편해야 할 필요성을 이끌어냅니다. 가장 큰 원인은 화력의 급속한 증대로 방어가 공격에 비해 조금씩 유리해 지고 있었다는 점 입니다. 이미 미국의 남북전쟁과 유럽의 보불전쟁에서 이런 조짐이 나타났으며 1877년의 러시아-터키 전쟁에서는 이것이 더욱 명백히 나타납니다. 플레브나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참호로 강화된 터키군의 방어선에 여러 차례 대규모 공세를 퍼부었지만 매번 수만의 희생자를 내고 좌절을 겪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는 유럽의 각국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독일군은 중포의 개발에 더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대부분 국가의 보병사단들이 채택하고 있는 3각편제는 어느 국가가 처음 도입했을까요?

정답 : 오스만 투르크


네. 그렇습니다. 오늘날의 3각편제를 처음 도입한 국가는 터키였습니다. 터키는 1877년 전쟁 이후 방어적인 군사전략을 채택하고 있었는데 독일 군사고문단은 방어에서는 4각 편제가 병력 운용면에서 비효율 적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보통 3개 연대를 방어선에 배치하고 1개 연대를 사단 예비로 두는 방어구조는 1개 여단이 아주 애매하게 병력을 운용해야 하는 데다가 예비대의 운용 문제도 불편했습니다. 만약 예비대가 A여단의 예하 연대인데 정작 투입해야 할 지역이 B여단의 방어선이라면?
1883년 오스만 투르크의 독일 군사고문단장에 임명된 골츠(Colmar von der Goltz)는 1887년 전쟁에서 방어의 효율이 높았던 결과에 크게 주목했습니다. 그는 1904년의 러일전쟁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거듭된 점에서 현대전에서 방어의 우위가 높아진 것을 거듭 확신했습니다. 중장으로 진급한 골츠는 계속해서 터키군의 훈련과 개혁을 지도하며 이러한 현대전 양상에 맞는 편제와 전술을 연구했습니다. 골츠는 1909년의 터키군 기동훈련에서 1개보병여단과 1개기병여단으로 편성된 보병사단 편제를 시험합니다. 골츠는 1909년 겨울에 실험적인 보병사단 편제를 거듭 실험했고 그 결과 1910년 터키군 총참모부는 보병사단의 편제를 4개연대-2개여단-보병사단에서 3개연대-보병사단으로 개편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터키군의 새로운 보병사단 편제는 사단에 포병연대가 배속되어 기존에 포병 없이 보병연대만 네개가 있던 보병사단에 비해 화력이 증강되고 방어에 더 적합한 구조가 되었습니다. 터키군은 1910년 10월 3각 편제로 새로이 개편된 1, 2 보병사단을 기동훈련에 투입해 새 편제를 시험했습니다. 이 기동훈련은 2개 군단(6개 보병사단, 2개 기병여단)이 동원된 야전군급 기동훈련으로 대규모 훈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3각편제는 혁신적인 것 이었음에도 당시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 1912년 발발한 발칸 전쟁에서 신편제를 도입한 터키군은 세르비아-그리스-불가리아 연합군에게 참패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프랑스 혁명전쟁 당시 사단편제를 도입한 프랑스군이 신통찮은 성과를 거둔 까닭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사단편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차대전에 발발할 당시 주요 열강들은 여전히 4각편제의 보병사단들을 가지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렇지만 얼마안가서 보병사단 편제는 급격히 3각편제로 바뀌게 됩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전쟁이 참호전 위주로 나가자 보병사단들은 공격보다 방어에 적합한 형태로 개편되게 되었던 것 입니다. 먼저 독일과 프랑스가 1916년 까지 모든 보병사단들을 3각 편제로 개편합니다. 독일의 경우는 조금 특이하게 보병여단 사령부가 3개 보병연대를 거느리는 식으로 3각 편제가 만들어집니다. 3각편제는 여러 모로 4각편제에 비해 우월했습니다. 먼저 여단사령부가 폐지되거나 1개로 줄어들었고 보병연대도 1개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사단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인력이 감소했습니다. 다음으로 2개여단-2개포병연대 체제(특히 러시아육군)에서 3개연대-1개포병연대 체제로 전환되면서 1개사단에 필요한 포병도 그만큼 줄어들었습니다.

이렇게 3각편제는 방어위주의 전쟁이 가져온 변화라고 할 수 있는데 기동이 강조된 2차대전 이후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그 기본골격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참고서적
Hermann Cron, 『Imperial German Army 1914-18 : Organisation, Structure, Orders of Battle』, Helion, 1937/2002
Eric D. Brose, 『The Kaiser's Army: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Edward J. Erickson, 『Defeat in Detail : The Ottoman Army in Balkans, 1912-13』, Praeger, 2003
Jonathan M. House, 『Combined Arms Warfare in the Twentieth Century』,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1
Steven T. Ross, 「The Development of the Combat Division in eighteenth-century French Armies」, 『French Historical Studies』, Vol. 4, No. 1, (Spring, 1965)
David Stevenson, 『Armaments and the coming of War : Europe 1900-1914』,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Saturday, May 17, 2008

상상속의 베트남인

지난 3월에 sonnet 대인께서 베트남전이 전하는 이라크의 교훈이라는 재미있는 글을 써 주셨습니다. 좀 뒷북이긴 한데 이 어린양은 특히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불행하고 그들에게도 불행한 일이지만 그것은 진짜 이라크가 아니었다. … 잘못된 이라크 속에 뛰어든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서도, 미국인들은 진짜 이라크인들은 우리 꿈 속의 이라크인들처럼 행동해야 하며 반드시 그럴 것이라고 고집스럽게 우겨댔다. 그 결과는 좌절과 낙담, 그리고 이라크인들의 '광기'에 대한 분노였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태도는 지난 60년간 별로 변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공산주의 위협에 대한 대응력 : 바오 다이(Bao Dai)의 지지세력들 중 상당수는 어떠한 형태의 제국주의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정부는 공산주의에 저항하고 있으며 미국의 군사 및 경제원조를 환영할 것으로 예상된다.
베트남 국민의 대부분은 현재 외부의 위협(중국)에 대항하는 것 보다는 프랑스의 간섭을 제거하는데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베트남 국민의 대부분이 공산주의의 진정한 실체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만족할 만한 정치적 해결이 이루어 진다면 대부분의 베트남인들이 가지고 있는 중국에 대한 혐오감은 베트남 인들이 중국(공산당)의 압력에 대해 대항하도록 만들 것으로 예상된다.

1950년 3월 8일, 미국무부 Office of Intelligence Research Report No.5178-2

결과는 다들 잘 아시죠?

Wednesday, May 14, 2008

환빠소설 사바카

이준님이 사바카라는 구제불능의 쓰레기 소설에 대한 글을 쓰셔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무슨 정신으로 이런 쓰레기를 썼나 싶을 정도로 형편없는 물건이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도데체 어떻게 돼먹은 인간이기에 이런 쓰레기 소설을 쓴 것인가하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사바카의 표지 날개에 있는 저자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장환은 신문 잡지등에 사회현상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으며, 우리 고대사에 관심이 있어 고대사 연구에 주력하기도 했다.

여기서 핵심은 "고대사"에 있습니다. 눈치가 있는 분이라면 여기서 말하는 "고대사"가 정상적인 "고대사"가 아니란 것을 아셨겠지요. 네. 그렇습니다. 사바카의 저자 주장환은 "환빠"입니다. 사바카에는 중간 중간 주인공의 입을 빌려 우리 고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 놓는데 그 내용이 하나 같이 환단고기에 대한 것 들 입니다.;;;;;
환단고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자칭 "재야사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재야사학의 걸물인 박창암(朴蒼巖, 예비역 육군 준장)을 모델로 삼은 듯한 인물도 나오지요. 아주 웃깁니다.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1990년 5월

서울에서 처음 '단재연구회'에 들어갔을 때 나는 어느날 비교적 온건한 이론의 소유자로 알려진 목태중이라는 선배의 소개로 밝선비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조금 이색적인 경력의 소유자였다. 젊었을 때 경찰에 몸을 담고 있다가 뜻한 바 있어 군에 자원입대, 말단 하사로 시작하여 6.25때는 일선 소대장으로 문자 그대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후 잉어가 물살을 헤쳐 오르듯 승승장구, 일선 부대 연대장을 지냈으며 70년대 중반, 소장으로 제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남북한의 통일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통일론을 연구하다가 고대사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민족의 뿌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는 통일론을 올바르게 전개하기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본은 물론 중국까지 돌아다니며 고대사 연구에 몰두해 왔다. 그의 이름은 원래 밀양 박씨성에 진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고대사에 심취하고 부터는 '밝선비'로 불려지길 고집했다. 밝이란 밝음, 즉 광명을 뜻하는데 그 어원은 박달나무(檀木)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으나 그때까지 정확한 정설은 없는 형편이었다.

주장환, 『사바카』, 자유문학사, 1994, 217~218쪽

과연, 초록은 동색이라더니 쓰레기는 쓰레기 끼리 통하는군요. 크하핳.

Saturday, May 10, 2008

7ㆍ4ㆍ7 정책

친구를 만났는데 올해 정부가 7ㆍ4ㆍ7 정책에 성공할 것 같다고 전망했습니다.

물가상승률 7%
경제성장률 4%
대통령지지율 7%

여러분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妄想大百科事典] 카더라통신(KP)

[妄想大百科事典] 카더라통신(KP)

한국 최고의 민간 통신사.

그 기원과 구체적 조직에 대해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각종 의혹사건에 대한 심층 보도로 명성을 떨치고 있으며 각종 음모의 흑막을 밝혀내는 점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가공할 정보력 때문에 종종 주요 강대국 정보기관과의 연계설이 제기되고 있으나 현재로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종종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사실들을 보도하고 있어 외계인 개입설도 제기되고 있다.

카더라통신은 황우석 파동 당시 한국이 세계적인 생명공학 강국으로 거듭나 연간 33조의 경제적 효과를 누리게 될 것을 우려한 프리메이슨을 주축으로 하는 유태 자본이 황우석 박사 죽이기 프로젝트를 가동했다는 특종을 터트려 제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또한 카더라통신은 독도, 인터넷종량제, 광우병, 외국인범죄 등 국내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대한 충격적인 사실들을 발굴 보도해 귀가 얇은 계층의 신뢰를 얻고 있다.

Thursday, May 8, 2008

난감한 경우

상대방이 악의는 없는 것 같은데 계속해서 속을 뒤집어 놓을 때. 차라리 대놓고 시비를 걸면 좋겠는데 이런 경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정말 난감합니다.

Tuesday, May 6, 2008

아르덴느 - 바스토뉴, 만헤이, 우팔리즈

아른헴 일대를 벼락치기로 구경한 뒤 암스테르담으로 향했습니다.


저녁 까지 리에쥬로 가기 위해서 암스테르담도 역 근처(.....) 벼락치기로 구경하고 간단히 늦은 점심을 먹었습니다. 실수로 카메라를 배낭과 함께 사물함에 집어 넣어서 이날 암스테르담 사진을 찍지 못 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뒤 다시 기차를 타고 브뤼셀로 향했습니다.


브뤼셀 역

리에쥬로 가려면 그냥 암스테르담에서 마스트리히트를 거쳐 들어가는게 더 빠른데 왜 시간을 더 들여 브뤼셀로 돌아갔냐고요? 동네 하나라도 더 구경하려고 욕심을 부렸거든요. 물론 브뤼셀에 도착하자 마자 다시 리에쥬행 열차가 도착해 브뤼셀은 역만 구경했습니다.;;;;;

비교적 여유있었던 리에쥬행 열차

리에쥬에 도착하자 마자 여관에 들어가 바로 잤습니다. 그런데 벨기에 사람들의 프랑스어 억양의 영어는 정말 알아듣기 어렵더군요. 여관 아저씨가 여권좀 보여달라고 하는데 t발음은 거의 들리지 않게 '빠스뽀~트'라고 하니 처음에는 여권 달라는 이야기인지 몰랐습니다. 버스는 '뷰~스'라고 하더군요.;;;;;;;

빠스뽀~트!

제가 묵은 방의 구조는 아주 기묘했습니다. 폭이 좁고 2층으로 된 구조였는데 텔레비젼은 1층과 2층 어디서도 보기 어려운 애매한 위치에 달린데다가 리모컨이 안보이더군요.;;;;

이걸 어떻게 보란 말입니까!

어쨌건 피곤해서 샤워만 하고 바로 잤습니다.(실은 리모컨이 없으니 TV를 볼수가 없었지요^^)

자고 일어나 아침을 먹었습니다. 이것 저것 푸짐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와 달리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벨기에는 아침식사도 프랑스 식이더군요. 갓 구워낸 바게뜨에 치즈 정도. 그래도 너무 맛있었습니다. 커피 맛도 아주 좋더군요.


그런데 바게뜨를 다 먹고 식당(호텔에서 식당도 겸하고 있었습니다) 아줌마에게 이게 다냐고 손짓으로 물어보니 이 아주머니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바게뜨를 한바구니 더 주십니다. 땡잡았습니다!

전날 묵은 여관

식사를 마친 뒤 버스정류장으로 갔습니다. 바스토뉴는 기차가 들어가지 않거든요. 정류장은 기차역 바로 옆에 있어서 찾기가 쉬웠습니다.

버스정류장에서 바라본 리에쥬역

리에쥬를 출발해 바스토뉴로 가는 길은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아르덴느 지역의 도로들은 하나같이 구불구불한게 마치 한국의 경상북도 어느 시골같은 느낌이더군요.


바스토뉴로 향하던 버스는 중간에 우팔리즈(Houffalize)에서 잠시 멈췄습니다. 버스기사 아저씨가 화장실을 가는 모양이더군요. 그런데 버스 밖을 내다보니 아주 낮익은 물건이 하나 있는게 아닙니까.

우팔리즈의 판터

잽싸게 내려 사진 한장을 찍었습니다.

버스는 다시 바스토뉴를 향했습니다.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니 책에서 설명한 아르덴느 지역의 지형이 이해가 되더군요. 역시 百聞不如一見이라더니!


그리고 드디어 바스토뉴에 도착했습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나오니 바로 앞에 매컬리프 장군을 기리는 광장이 있더군요. 매컬리프 장군의 동상 옆에는 셔먼 한대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장군님의 존안

승리의 셔먼! 인줄 알았는데....

아니군요;;;;;

바스토뉴 시내는 꽤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시간 여유만 있으면 하루 정도 묵으면서 근처 구경을 하고 싶더군요. 바스토뉴 시가지를 벗어나서 바스토뉴 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2차대전 당시 전사한 벨기에 군인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었습니다.


이 기념비를 지나 언덕을 올라가니 드디어 바스토뉴 박물관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문 닫았습니다;;;;;

박물관 구경은 못 해도 야외 전시물은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M10이 아닌 아킬레스를 가져다 놓은 건지?

당신은 번지수가 틀렸어요!

심심해서 올라가 봤습니다.


야외 전시물 구경을 마친 뒤 박물관 옆에 있는 미군참전을 기리는 구조물을 구경했습니다.


각 기둥에는 벌지전투에 참전한 미군 부대들의 부대명을 기록해 놓았더군요.











이 구조물 위로 올라가 보니...


각 방향별로 당시 전투가 어떻게 전개됐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박물관(건물) 구경을 마친 뒤 다시 바스토뉴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아까 보지 못한 셔먼 전차의 잔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바스토뉴 시내로 돌아와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습니다. 특히 와플이 맛있었습니다. 벨기에 만세!


식사를 마친 뒤 다음에는 만헤이로 향했습니다.


만헤이로 가는 길은 날씨가 좋다 보니 아주 즐거웠습니다.

만헤이로 간 이유는 1944년 12월에 만헤이에서 벌어진 아주 흥미로운 전투 때문입니다.

Das Reich 기갑연대 4중대의 만헤이(Manhay) 전투

에른스트 바르크만의 만헤이 활극 - 채승병님의 글

바르크만이 진입한 방향에서 바라본 만헤이

만헤이에 도착해 보니 한국의 작은 면소재지 정도의 마을이었습니다. 한가하고 조용하더군요. 아마 바르크만이 쳐들어갔을 때와 비교해도 크게 변한것은 없을것 같았습니다.


바르크만은 저 멀리 보이는 숲 어딘가에 숨었었습니다.

익숙한 지명이 많이 보입니다.

만헤이는 생각 보다 훨씬 작은 동네더군요. 바로 그랑므닐로 갔습니다. 그랑므닐은 만헤이에서 대략 500미터정도 떨어진 더 작은 동네입니다. 그랑므닐은 폴 대위의 주력 부대가 향한 방향입니다.

만헤이에서 바라본 그랑므닐

그랑므닐로 가다가 주위를 살펴보니 길이 주변 초지들 보다 높더군요. 크노케의 전차가 왜 도로에서 벗어나다가 처박혔는지 이해가 갔습니다.


어슬렁 어슬렁 걸어서 그랑므닐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동네에 들어서자 마자 또 익숙한 무엇인가가 눈에 띄었습니다.

나무 사이를 잘 보세요

바로 만헤이 전투당시 지뢰를 밟고 격파된 2소대 소속의 판터였습니다.



그랑므닐을 구경한 뒤 다시 만헤이로 돌아왔습니다. 에레제 까지 갈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시간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더군요. 만헤이의 어느 카페에서 맥주 한잔을 마시며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생각해 보니 리에쥬까지 가도 독일로 가는 기차를 탈 시간이 남을 것 같아 다시 우팔리즈로 돌아갔습니다. 아침에 잠깐 본 판터를 구경하려고요.


이 전술기호는 대충 그려넣은건지 아니면 원래 있던대로 그려넣은건지 궁금하더군요


우팔리즈에서 버스를 타고 다시 리에쥬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가는 길 보다 더 빠르더군요. 벨기에 버스 기사들도 해 떨어지면 속도를 높이는 건지 궁금했습니다.

총통각하의 지휘 방식

1942년 12월 11일, 소련군은 제 6군을 구출하기 위한 만슈타인의 진격을 막아내는 동안 돈 강을 따라 방어선을 형성한 이탈리아 제 8군을 목표로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날 소련군은 이탈리아군의 방어선에 대해 위력수색을 실시해 이탈리아군의 전방 진지들을 탈취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소련군의 위력수색이 개시된 다음날, 총통께서 자이츨러와 기타 똘마니들을 데리고 동부전선의 현황에 대해 회의를 가지셨는데 우리와 같은 후대의 호사가들에게는 다행히도 이 회의의 녹취록이 남아있습니다. 이 회의록은 총통각하의 꼼꼼한(???) 지휘 스타일이 나타나서 꽤 재미있는데 분량이 많으니 몇몇 부분만 발췌해 볼까 합니다.


(전략)

자이츨러(Kurt Zeitzler, 육군 참모총장) : 만슈타인은 계획안을 손으로 써서 보냈습니다. 아마 총통 각하께서도 읽으실 수 있을 것 입니다.(만슈타인은 좀 악필이었나 봅니다???) 16(차량화)사단(채승병님의 지적을 참고해 고쳣습니다.)에 대해서는 논의할 상태가 아닙니다. 만약 16(차량화)사단을 빼 낸다면 루마니아군의 전선 전체가 무너질 것 이고 다시는 (루마니아군을) 안정시키지 못 할 것 입니다. 아마도 만슈타인은 (소련군의 방어선) 어디엔가 허술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 곳으로 기갑군의 공세를 돌리려는 것 같습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만슈타인이 왜 이런 제안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히틀러 : 만슈타인이 어떻게 할 것인지는 지켜봐야겠지. 어쨌건 만슈타인은 강력한 기갑사단 두 개를 가지고 있어. 하나는 전차 95대를 가지고 있고 하나는 전차 138대를 가지고 있지않은가.

자이츨러 : 만약 그 두 기갑사단을 빼낸다면 위험이 닥칠 수 있습니다.

히틀러 : 그 점에 대해서는 나 또한 이견 없이 동의하네. 하지만 만슈타인은 공군부대를 가지고 있고 또 추가로 도착할 부대도 있지 않은가? 다음 보병사단이 증원되는 건 언제인가?

자이츨러 : 시간이 조금 걸립니다. 전선에 배치하는데 8일이 소요됩니다. 11기갑사단을 그 지역에 투입할 수 있는 것이 다소 위안입니다. 이 정도(11기갑사단의 이동)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만약 11기갑사단을 차출(해 공격을 지원할) 수 없다면 두 기갑사단의 진격은 정체될 것 입니다. 23기갑사단은 측면에서 꾸준히 진격하고 있으며 계속 이 상태를 유지할 것 입니다. 다음은 6기갑사단 입니다. 이 사단은 적의 반격을 받고 있으며 또 인접부대와 접촉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상황이 어렵습니다. 만약 17기갑사단을 이 지역에서 빼 낸다면 역시 위험해 질 것 입니다. 하지만 두 기갑사단(23, 6)의 공격을 중단하고 17기갑사단을 투입할 수 있을 때 까지 기다린다면 그 동안 이틀이 소요될 것이고 하루의 시간을 추가로 더 잃을 수 있습니다.

히틀러 : 만슈타인은 17기갑사단을 이 지역에 투입하려는 모양인데.

자이츨러 : 만슈타인은 17기갑사단을 이 지역에서 빼내 이 곳에 투입하고 싶어합니다.

히틀러 : 하지만 17기갑사단은 전투력이 거의 없는거나 마찬가지야.

자이츨러 : 그렇다면 11기갑사단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히틀러 : 이 사단은 전차가 달랑 45대 뿐이지 않은가.

자이츨러 : 현재 49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장난 전차는 소수입니다. 11기갑사단의 1개 대대는 여기에 위치해 있고 급한대로 306보병사단 소속의 1개 연대를 증원할 수 있습니다.

히틀러 : 그런데 11기갑사단이 어느새 이렇게 많은 전차를 잃은 건가? 지금쯤 70~80대 정도를 보유하고 있어야 하지 않는가?

자이츨러 : 제가 알기로는 49대 입니다.

히틀러 : 고장난 전차가 있는 모양이군.

자이츨러 : 물론 언제나 하루 정도의 수리를 요하는 잔고장이 발생합니다. 지금과 같은 날씨라면 내일쯤 가동 가능한 전차가 더 늘어날 것 입니다.

호이징어(Adolf Heusinger, 육군본부 작전국장) : 11기갑사단은 이쯤에서 내려올 때 57 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히틀러 : 여기서 출발할 때는 73대에서 75대 정도였는데.

자이츨러 : 총통각하. 다시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솔직히 저는 정확한 숫자를 모릅니다. 이런 날씨에서는 보통 (보고할 때) 10대에서 20대 정도가 차이 납니다.

히틀러 : 일단은 전선의 상황을 계속 보고하게. 11기갑사단의 현황은 마지막에 다시 이야기 하지.

(중략)

히틀러 : 17기갑사단이 보유한 전차는 몇 대인가?

자이츨러 : 별로 많지 않습니다. 58대의 단포신형 전차뿐입니다.

히틀러 : 전혀 쓸모가 없어 보이는구만. 최소한 이 전차들은 대전차고폭탄(Hohlladungsgranaten)을 사용해야 그나마 쓸 데가 있겠군.

자이츨러 : 11기갑사단은 장포신 (3호)전차를 30대 보유하고 있습니다.

히틀러 : 이 전차들은 보병 뿐 아니라 대전차고폭탄을 사용하면 T-34도 상대하겠어. 단포신형 전차는 전부 몇 대나 있는가?

자이츨러 : 4호전차가 19대, 3호전차가 29대 입니다.

히틀러 : 단포신형 전차들이 대전차고폭탄을 사용할 수 있더라도 공격작전에서는 11기갑사단만이 쓸모가 있겠군.

Walter Warlimont, 『Im Hauptquartier der deutschen Wehrmacht 1939 bis 1945』 Band II, Weltbild Verlag, 1990, s.304~306

왠지 총통각하 답습니다.;;;;;;;

루즈벨트가 마샬을 불러 놓고 노르망디의 미군 기갑사단에 셔먼은 몇대가 있고 이게 판터를 때려 잡을 수 있는지 묻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왠지 총통각하는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Monday, May 5, 2008

16-17세기 스페인의 군사비 지출에 대한 잡담

지난 3월에 ‘국가에 의한 무장력의 독점 - 미국의 방식’이란 글을 쓰면서 글의 마지막 부분에 르네상스 시기에 살았던 이탈리아인 트리불치오(Gian Giacomo Trivulzio)의 명언(?) 한마디를 인용했었습니다.

“(전쟁에는) 다음의 세가지가 필수적이다. 돈, 더 많은 돈, 그리고 더 더욱 많은 돈 이다.”

트리불치오가 지적한 것 처럼 전쟁에서 돈 문제는 백만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중요한문제입니다.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여러 국왕들은 늘어나는 전쟁 비용으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고 종종 돈이 없어 피박을 보기도 했습니다. 폴 케네디는 강대국의 흥망에서 몰락한 강대국의 첫 번째 사례로 스페인을 들고 있는데 그가 지적하는 스페인의 몰락 요인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재정적 측면입니다.

합스부르크체제의 실질적인 약점을 드러나게 한 것은 치솟는 전비였다. 1500년에서 1630년 사이에 식량가격은 3배, 제품가격은 5배로 오른 전반적 인플레이션은 정부재정에 큰 타격을 주었다. 여기에 육해군이 2배, 4배로 늘어남에 따라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합스부르크는 계속해서 부채의 변제에 안간힘을 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520년대 알제리, 프랑스 그리고 독일 프로티스턴트와 맞서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른 카를 5세는 자신의 경상수입이나 특별수입으로는 도저히 지출을 감당할 수 없게 되고 자신의 수입은 이미 몇 년 앞서 은행가에 담보되어 있었다. 오직 인도에서 오는 재화에 대한 결사적인 몰수 조치와 스페인에 있는 모든 금의 압수를 통해서만 프로티스턴트 군주에 대한 전쟁을 지원할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1552년의 메츠(Metz) 전투에 소요된 전비만 해도 250만 두카도로서 당시 황제가 아메리카에서 얻던 경상수입의 거의 10배에 해당하였다. 어절 수 없이 그는 계속해서 새로운 대부자금을 물색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때마다 조건이 점점 불리해져 갔음은 당연하였다. 왕가의 신용이 무너지면서 은행의 금리는 천정부지로 치솟아 경상수입의 대부분이 몽땅 지난 부채에 대한 이자지불에만 충당되었다. 카를 5세가 퇴위하면서 펠리페 2세에게 상속한 스페인의 공식 부채는 약 2,000만 두카도였다.

폴 케네디/이일수, 전남석, 황건 공역, 강대국의 흥망, 한국경제신문사, 1987, 67쪽

스페인의 군사비 지출은 같은 시기의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도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단순히 비용뿐 만 아니라 국가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다 스페인은 단연 최고였습니다. 예를 들어 16세기 유럽국가들은 국가총생산의 2% 정도를 군사비에 사용한 반면 스페인은 4~5% 수준으로 추정됩니다.

카를 5세는 사방에서 전쟁을 벌여댄 탓에 유럽 최고의 채무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1520년부터 1532년 사이 카를 5세의 연 평균 채무액은 41만3,000 두카도였는데 이것은 1552~56년 사이에는 192만9,000두카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심각한 상황은 그의 뒤를 이은 펠리페 2세 때도 딱히 나아지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펠리페 2세는 카를 5세로부터 물려받은 부실한 재정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펠리페 2세는 돈이 나올 만한 곳은 모조리 쥐어 짜냈고 아메리카로 부터의 수입은 카를 5세 치세기에 연 평균 20~30만 두카도 수준에서 200만 두카도로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수입이 늘면 뭘 하겠습니까. 지출은 더 늘어나는데.;;;;; 먼저 펠리페 2세가 심혈을 기울인 영국원정은 군사적 재앙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치명적인 재앙이었습니다. 펠리페 2세가 아르마다의 건설에 투자한 비용은 엄청났는데 배를 건조하는 비용만으로 4백만 두카도가 날아갔다고 합니다. 여기에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에 주둔한 육군에 소요되는 비용도 엄청난 것이어서 1574년 한 해에만 570만 두카도가 해외 주둔군을 유지하는데 소비되었습니다. 펠리페 2세 시기의 연 평균 군사비는 무려 840만 두카도 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쨌건 스페인은 강대국이라 펠리페 2세 이후로도 계속해서 군사비에 엄청난 투자를 해댔습니다. 스페인의 군사비 지출을 연구한 톰슨(I. A. A. Thompson)에 의하면 16세기 초부터 17세기 중엽까지 스페인의 국가 예산 지출은 무려 20배가 넘게 증가했는데 이것은 같은 시기 물가 상승률의 네 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중 상당수는 군사비가 차지하고 있었다지요. 톰슨의 연구에 따르면 스페인은 1621년부터 1640년 까지 4억 두카도의 예산을 사용했는데 이 중 47%가 군사비였다고 합니다. 이 시기 스페인은 30년 전쟁에 참전해 가뜩이나 시원찮은 재정에 압박을 가했습니다. 이 무렵 스페인의 연 평균 군사비 지출은 1700만 두카도 였습니다.

스페인의 군사비 지출이 증가한 원인은 방대한 지배영역과 이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커져버린 군대에 있었습니다.
먼저 지배영역이 늘어나면서 그 만큼 성곽 건설과 개량, 유지에 들어가는 비용이 늘어났습니다. 오랑의 경우 펠리페 2세의 재위 시기에 30년에 걸쳐 축성에 300만 두카도가 사용되었고 1590년에는 영국의 대서양 연안지역을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100만 두카도가 성곽의 건설과 유지 보수에 소비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보통 성곽 하나를 개량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7만~15만 두카도 정도였다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늘어난 영역을 방어하기 위해 병력이 증가한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15세기 후반에 기껏해야 2만 정도이던 육군은 세기가 바뀌기 전에 6만으로 불어났고 불과 100년 뒤인 1590년에는 네덜란드 주둔군만 85,000~86,000명에 달했습니다. 물론 15~17세기 동안 유지비용이 비싼 기병의 비중이 줄어든 것도 사실이지만 그 대신 보병이 엄청나게 불어났기 때문에 기병의 감소로 인한 경제적 효과는 전혀 없었습니다. 수만의 대군에게 월급을 지급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 이었고 월급이 체불될 경우에는 난감한 결과가 따라왔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라면 네덜란드 주둔군 병사들이 월급 체불에 항의해 안트베르펜을 약탈한 것이 있지요. 펠리페 2세는 대륙에서 비싼 돈을 들여 이단들을 응징하는 동안 지중해에서도 역시 비싼돈을 들여 이교도들을 응징하고 있었습니다. 1570년대에 지중해의 갤리선 함대를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한해에 67만 두카도 정도였다고 합니다. 17세기로 접어들어 스페인의 해양 전략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하자 갤리선 함대에 들어가는 비용은 점차 줄어들었지만 대신 대서양에서 함대를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늘어났습니다. 대서양 함대의 유지 비용은 한해에 보통 50만 두카도에서 많은 경우 100만 두카도 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육군 병력의 증가로 화약무기를 획득하는데 많은 비용이 소모되었습니다. 화약 무기 자체는 기존의 냉병기 종류와 비교하면 비싸지는 않았지만 대신 대량으로 장비하는 특성상 전체적인 비용은 오히려 늘어났습니다. 스페인은 1588년 단 한 해에만 대포와 화약을 구매하는데 622,758 두카도를 사용했습니다. 이 중 30만 두카도 가량이 대포를 구매하는데 쓰여졌다고 합니다. 단, 일단 대포를 구입해 놓으면 포탄이나 심지, 화약 등의 소모품의 가격이 쌌던 탓에 유지비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어쨌건 화약무기의 도입은 스페인에 있어 경제적인 부담이었습니다. 스페인은 군사강국이었지만 경제와 산업기반은 난감할 정도로 형편없었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국왕의 주 수입원은 아메리카의 은이었고 병기창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였다죠. 스페인의 연간 병기 생산량은 1590년대 초반에 아퀘부스 2만정, 머스킷 3천정 수준이었는데 군 병력은 십만 단위이니 전쟁을 하려면 군대에 필요한 총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밖에서 가져온 돈을 총 사느라 다시 밖으로 내 보내는 구조이고 이 상태에서 전쟁질을 해대니 국왕의 지갑이 항상 텅 비어있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이었습니다.

참고서적
피에르 빌라르/김현일 옮김, 『금과 화폐의 역사 1450-1920』, 까치, 2000
존 H. 엘리엇/김원중 옮김,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까치, 2000
폴 케네디/이일수, 전남석, 황건 공역, 『강대국의 흥망』, 한국경제신문사, 1987
J. R. Hale, 『War and Society in Renaissance Europe 1450-1620』,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5
I. A. A. Thompson, 「“Money, Money, and Yet More Money!” – Finance, the Fiscal-State, and the Military Revolution : Spain 1500-1600」, 『The Military Revolution Debate』, Westview, 1995

Saturday, May 3, 2008

한국인에 대한 불쾌하지만 날카로운 평가...

I hope that it can be impressed upon the Department that here we are not dealing with wealthy U.S. educated Koreans, but with early [sic], poorly trained, and poorly educated Orientals strongly affected by 40 years of Jap control, who stubbornly and fanatically hold to what they like and dislike, who are definitely influenced by direct propaganda and with whom it is almost impossible to reason. - Lt. Gen. John R. Hodge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46 Vol.8,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74, p.630

하지의 이런 평가는 그의 한국인에 대한 인종적 우월감이 작용한 것도 사실이지만 어떤때는 정말 두려우리 만큼 날카롭다는 생각도 듭니다. 특히나 요즘 같은 시기에는...


저도 지금 대통령이 아주 마음에 안들긴 한데 벌써 탄핵은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