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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6일 수요일

브레스트 요새 전투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

최근에 나온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7권 3호를 훑어보니 제2차세계대전에 대한 글이 많이 실려있어서 즐거웠습니다. 흥미를 끄는 글 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라이프치히 대학의 크리스티안 간처Christian Ganzer가 쓴 “German and Soviet Losses as an Indicator of the Length and Intensity of the Battle for the Brest Fortress (1941)”라는 글이 돋보입니다. 이 글은 간처가 2010년 Osteuropa라는 매체에 기고했던 연구를 보완한 것 인데, 독소전쟁 초기의 유명한 전투인 브레스트 전투의 양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양군의 인명피해 통계를 가지고 분석하는 흥미로운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필자인 간처는 브레스트 요새의 영웅적인 항전을 부각하는 소련의 역사서술에 의문을 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랬을까? 소련의 역사서술에 따르면 브레스트 요새에 포위된 붉은군대 장병들은 한달이 넘도록 독일군의 포위 공격에 맞서 결사적인 항전을 펼쳤고 독일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고 합니다. 브레스트 요새 공격을 담당한 독일 제45보병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전사한 독일군은 453명, 부상자는 668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련 역사가들은 이것이 조작된 것이며 독일군의 전사자는 보고서에 기록된 것의 2~3배에 달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독일군의 보고서에는 7,223명의 포로가 잡힌 것으로 되어 있는데 소련 역사가들은 이것 또한 조작이며 숫자를 과장하거나 브레스트 근처에 거주하던 민간인들을 체포한 것 까지 포함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필자는 이러한 소련측의 서술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습니다. 위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필자는 전투의 양상을 재구성하기 위해서 독일군의 인명피해와 소련군의 피해 양상을 분석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먼저 독일군의 인명손실을 파악하기 위해서 독일군의 공식 기록 외에 린츠에 있는 상(上)오스트리아 민속박물관Oberösterreichisches Landesmuseum에서 소장하고 있는 전후에 작성된 제45보병사단 전사자 명부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 전사자 명부는 사단 소속 장병들의 개별 전사통지서를 정리하여 작성한 것으로 사망자의 출생일, 성명, 소속부대, 사망한 날자와 전사한 장소, 매장지, 사망원인, 인식표의 군번과 가까운 친인척의 소재지 등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필자는 제45보병사단의 기록과 당시 지역신문의 사망자 관련 정보를 교차검증하여 이 명부가 신뢰할 만 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사망자의 숫자입니다. 이 명부에는 브레스트 전투에서 475명이 전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로 8명은 전투 이전에 사망했거나 다른 지역에서 사망한 경우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투 첫날인 6월 22일에는 314명이 사망했는데 이중에서 제130보병연대의 사망자 30명은 브레스트 요새가 아닌 브레스트 시가지의 전투에서 사망했으며, 10명 정도는 독일군의 포격에 휘말려 사망했다고 합니다. 즉 브레스트 요새 전투의 첫날에 사망한 독일군은 280명 가량이라고 보는 것 입니다. 전투 이틀차 부터는 사망자 숫자가 격감합니다. 23일에는 35명이 사망했으며 이중 14명은 후송된 야전병원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24일에는 전투가 격렬하게 전개되어 56명이 사망했습니다. 25일에는 21명이 사망했고, 요새내의 거점 대부분이 제압당한 26일에는 13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6월 27일에는 브레스트 요새 전투에서 마지막 사망자가 발생합니다. 필자는 사망 일자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사망자 1명을 포함해 총 사망자는 428명이고 이중 86.5%에 해당하는 370명이 전투 초기의 3일간에 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부상자 통계를 내는 것은 전사자 통계 보다 어렵지만 전사자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 것으로 파악합니다. 제45보병사단 의무대장의 보고에 따르면 6월 22일 저녁 기준으로 야전병원에 수용된 부상자가 총 312명, 25일에는 총  610명, 28일에는 714명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단장의 보고서와는 차이가 있는 수치인데 필자는 의무대장이 병원에서 사망한 장병의 숫자를 빼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필자는 사단장의 전투보고서에 기록된 부상자 숫자를 기준으로 전체 부상자의 86.2%가 전투 초기 4일동안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편 소련군의 피해를 정확히 집계하는 것은 어렵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독일측 기록에 따르면 1941년 6월 28일까지 약 2천구 가량의 시신을 브레스트 요새에서 확인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필자는 정확한 전사자 집계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소련군 포로 통계만을 활용하기로 합니다. 포로 통계는 제45보병사단이 상급부대에 보고한 내용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제45보병사단은 브레스트 요새 공격당시 상급부대가 몇차례 바뀌었습니다.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6월 24일 부터 27일, 그리고 다시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제45사단을 지휘한 제53군단의 기록에서 포로 통계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6월 24일 부터 27일까지는 3,062명이 포로로 잡혔고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는 940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합니다. 필자는 다른 기록들을 활용하여 일자별 포로 통계를 산출했는데 여기에 따르면 6월 22일 부터 7월 1일까지 최소 6,713명, 최대 7,779명의 소련군이 포로로 잡혔을 것이라고 추산합니다. 최저치와 최대치 통계가 큰 차이를 보이는 시기는 6월 22일과 23일인데 전투 초기의 혼란 때문에 정확한 집계가 어렵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브레스트 요새와 브레스트 시가지에서 잡힌 포로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어렵긴 해도 브레스트 요새가 단기간내에 고립됐고 브레스트 시가지에서 전투를 벌인 제130보병연대의 경우 22일 이후로는 이렇다 할 전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6월 22일 브레스트 시가지에서 잡힌 400여명의 포로를 제외한 포로는 브레스트 요새 내에서 잡힌 것으로 보는게 타당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대한 보수적으로 계산한다 해도 브레스트 요새의 병력 9,000여명 중 대부분은 항복했고 포로의 55.90%는 6월 22일 부터 6월 24일 사이에 투항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필자는 이와같은 결과를 토대로 브레스트 요새 전투를 1개월간에 걸친 처절한 항전으로 설명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대부분의 전투는 6월 24일까지 마무리 되었으며 29일에는 사실상 전투가 종결되었다는 것 입니다. 실제로 제45보병사단은 7월 2일에 제130보병연대 2대대와 제45야전보충대대만 브레스트에 남겨두고 동진했으며 남은 2개대대도 3일 뒤인 7월 5일에는 1개 중대 규모 남짓한 다른 후방 부대에 브레스트 요새를 인계하고 떠났다는 점을 볼때 6월 29일에 전투가 종결됐다는 독일측의 주장은 타당한 것 같습니다. 소련측의 주장대로 한달 동안 격렬하게 저항했다면 제45보병사단의 주력이 그렇게 일찍 브레스트를 떠났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독일측의 기록에 따르면 6월 29일 이후 이렇다 할 교전은 없었고 다만 7월 23일에 한명의 소련군 중위가 독일병사 다섯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생포된 것이 유일한 저항이었다고 합니다.
필자는 소련측 생존자들의 회고에서 최후까지 결사적으로 저항하다가 ‘가까이서 터진 포탄의 충격에 의식을 잃고’ 포로가 되었다는 설명이 많은 이유는 독일군에 생포되었다는 점 때문에 배신자로 몰릴 것을 우려해 자기 변명을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소련측의 서술을 받아들인다면 요새 수비병력의 3분의 2 이상이 포로가 됐고 그중 상당수가 전투 초기의 3일동안 항복한 것을 설명하기가 힘들긴 합니다.

2014년 6월 13일 금요일

Jason D. Mark著, Into Oblivion-Kharkov to Stalingrad : The Story of Pionier Bataillon 305

얼마전 페리스코프에서 활동하셨던 Das Reich님이 책 몇권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감사하게도 책값 문제로 구매를 미루고 있었던 Into Oblivion과 같은 재미있는 책을 구해주셔서 기쁜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Das Reich님께 책을 선물받은 뒤 전체적으로 한번 훑어보고 다시 조금씩 정독하는 중인데 꽤 근사한 물건입니다!

Into Oblivion은 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관련된 저작을 집필해온 Jason D. Mark가 작년에 출간한 책입니다. 이 책은 흥미롭게도 제305보병사단 소속의 제305공병대대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제2차대전 당시 참전한 독일군의 부대사는 셀수없이 많이 출간되었지만 상당수는 정예부대인 무장친위대나 육군의 기갑사단등을 다루는 것 이었습니다. 독일에서는 자국의 역사이다 보니 일반 보병부대의 부대사도 꽤 많이 출간됐지만 영어권 국가에서 출간되는 부대사는 거의 대부분 인기있는 엘리트 부대의 부대사였습니다. 이 점에서 보병사단도 아니고 그 예하의 공병대대를 다룬 연구는 그 자체로 흥미롭습니다.

저자가 주로 사용한 사료는 1940년 12월 제305보병사단이 창설될 때부터 1942년 11월 까지 제305공병대대에서 복무한 리하르트 그림(Richard Grimm)중위가 전쟁 후 정리한 기록들입니다. 그림 중위는 운좋게도 1942년 11월 중순 독일로 후송되어 포위망에 같히는 것을 모면했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 그가 소속되어 있었던 부대의 기록을 모았고 이것을 정리한 글을 썼습니다. 저자는 그림의 기록에 힘입어 제305보병대대의 전투사를 상당히 자세하게 그려냈습니다. 그리고 다른 전투부대에 배속되는 공병부대의 특성상 제305사단의 작전도 전반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저자는 공병대대의 작전을 그리면서도 이것을 제6군의 전체 작전의 범주안에서 유기적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이러한 장점은 이미 저자의 전작인 Death of the Leaping Horseman에서 잘 나타난 바 있습니다.

공병부대의 작전을 다루고 있다보니 꽤 흥미로운 내용이 많습니다. 야전에서 교량을 건설하고 통제하는 임무는 어떻게 수행하는가? 대전차전이나 시가전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공병은 어떻게 운용되는가? 매우 중요하지만 의외로 쉽게 접하지 못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전투외에도 장교와 사병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서술도 흥미롭습니다. 주목을 받지 못했던 평범한 부대의 평범한 장교와 사병들의 이야기라는 점이 이 책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제305공병대대가 스탈린그라드에서 전멸한 뒤 생존한 인원을 중심으로 다시 편성되는 과정과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끝으로 책을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생존자들 운명과 전사자의 유가족들의 후일담에 대한 덤덤한 서술은 읽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여러모로 의미있는 훌륭한 저작입니다. 2차대전사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분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2014년 4월 13일 일요일

러시안 소설

데이빗 글랜츠David Glantz의 역작인 스탈린그라드 3부작의 마지막 3부의 출간 소식을 접한 뒤 제2권을 한번 더 훑어봤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나온 글랜츠의 저작 중에서 러시아와 독일 자료의 교차검증이 가장 잘 이루어진 저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꽤 흥미로운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교차 검증을 통해 소련이 독일군의 전력이나 피해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을 여러 차례 지적하고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실소를 자아낼 정도로 그 정도가 심각합니다. 물론 유동적인 전장 상황에서 적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니 이것만 가지고 소련 자료들을 엉터리라고 폄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 꽤 흥미로운 지적들이니 몇가지 예를 인용해 보지요.(원서의 주석은 일단 생략합니다.)



대부분의 소련과 러시아 문헌은 제62군의 병력 54,000명과 제64군의 병력 36,000명을 합쳐 총 90,000명의 소련군이 독일군 170,000명을 상대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수치에는 제14기갑군단을 포함해 독일군이 시가전에 투입하지 않은 부대를 포함하고 있다. 스탈린그라드 시가지를 공격한 바익스Maximilian Freiherr von Weichs의 충격 집단의 병력은 80,000명으로 전차와 돌격포 100여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중략)

러시아 문헌들은 대부분 독일 제6군이 소련 제62군에 맞서 스탈린그라드 지구에 500대의 전차를 투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9월 13일 기준으로 스탈린그라드를 공격한 독일군 부대는 제24기갑사단과 제14기갑사단을 합쳐 전차 30~40대, 제29차량화 사단의 전차 20대를 포함해 100대 남짓한 기갑차량을 보유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David M. Glantz, Armageddon in Stalingrad : September-November 1942,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9), pp.1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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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의 추산에 따르면 파울루스의 독일 제6군은 증원병력을 받아 제62군을 공격하는 충격집단의 규모를 병력 90,000명으로 늘리고 여기에 2,300문의 야포와 박격포, 전차와 돌격포 300대, 제4항공군에 소속된 항공기 1,000대의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소련군이 추산한 통계는 신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제29차량화보병사단과 제60차량화보병사단, 제16기갑사단을 집계에 포함하고 있는데 이때 이 부대들의 병력 대부분은 스탈린그라드 시가지가 아니라 스탈린그라드 북쪽과 북서쪽의 돈강과 볼가강 사이의 지역, 그리고 스탈린그라드 남쪽의 호수 지역에서 소련군을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제14기갑사단은 일일 평균 50대 정도의 전차만 가동 가능한 상태였으며 제24기갑사단은 30대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장 지구에서 소련군을 상대한 독일 제6군의 충격집단에 소속된 기갑전력은 제244돌격포 대대와 제245돌격포대대의 돌격포를 합쳐도 100대가 채 안되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소련과 러시아 문헌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시가지에 투입된 독일군에  제76보병사단, 제29차량화보병사단, 제60차량화보병사단, 제16기갑사단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들 사단에 배속된 부대 중에서 스탈린그라드 공장지구에 대한 최후의 공격에 투입된 부대는 사실상 없다. 그리고 독일 제6군의 보병사단과 기갑사단에 소속된 보병과 기갑척탄병은 심각하게 소모되어 제6군의 일선 전투 병력은 80,000명 미만으로 소련 제62군의 55,000명과 비슷하거나 이것 보다 더 적은 수준으로 추산된다. 이것을 뒷받침 하는 근거로, 독일 제6군은 10월 17일 기준으로 총 병력을 334,000명으로 보고하고 있는데 이중에서 일선의 전투 병력은 고작 66,549명으로 이중 상당수는 스탈린그라드 북쪽과 남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Glantz, ibid., pp. 355~356


사실 이시기 소련군의 야전부대는 정보 수집과 판단 능력이 매우 떨어지는 편이었고 전투가 계속되면서 정보 수집과 판단 능력이 조금씩 향상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문제는 추이코프라는 인물의 회고록 입니다. 제2권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시가전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보니 제62군 사령관 추이코프의 회고록이 집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소련군의 공식 기록 보다도 과장이 심하고 몇몇 부분에서는 노골적인 왜곡으로 보이는 부분까지 있습니다. 전쟁 당시 소련군 야전부대의 정보 분석은 실전 상황에서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잘못된 분석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이해해 줄 수가 있는데 추이코프 회고록은 그런 식으로 변호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9월 말에 있었던 노동자 주택단지를 둘러싼 전투에 대한 추이코프의 회고에 대해 글랜츠는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9월 27일 부터 28일까지) 제24기갑사단의 에델샤임 전투단과 빈터펠트 전투단은 진격하면서 포로 280명을 잡고 전차 5대, 대전차포 9문, 대전차소총 32정, 박격포 7문, 화염방사기 2개, 자폭견 4마리를 격파, 사살하거나 노획했으며 전사자 25명과 부상자 164명의 손실을 입었다. 제24기갑사단이 획득한 전리품이 얼마 되지 않았던 이유는 이 지역을 방어하는 소련 제62군이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제24기갑사단은 9월 28일의 전투에서 총 28명의 전사자와 94명의 부상자를 냈다. 
(중략)

9월 28일의 전투는 매우 격렬했는데, 제100경보병사단은 전사자 70명, 부상자276명, 행방불명 10명이 발생했으며 제295보병사단은 전사자 10명과 부상자 44명이 발생했다. 


(중략) 

추이코프는 9월 28일의 전투에서 독일군이 “최소한 1,500명의 전사자”와 “30대 이상의 전차를 완전손실”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마예프 쿠르간의 비탈에만 독일군의 시체 500구가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추이코프는 제62군의 손실이 심각했음을 인정하고 있는데 포포프의 제23전차군단은 전사자와 부상자를 626명이나 냈으며, 바튜크의 제284소총병사단은 300명의 인명 손실을 당했다. 고리쉬늬의 제95소총병사단은 “한줌의 병력만 남은” 상태에 불과했다. 

Glantz, ibid., pp. 262~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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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7일 오전 늦게 제389보병사단은 제24기갑사단의 1개 전차중대와 제245돌격포 대대의 돌격포 10대의 지원을 받으며 북쪽으로 공격을 시작해 제37근위소총병사단의 방어선 중앙과 우익을 공격했다. 제389보병사단의 2개연대에 소속된 여러개의 대대급 전투단들이 베르후네우딘스카야 거리에서 부터 슈넬헤프터 블록의 북서쪽의 철도 지선을 따라 공격을 감행했고, 3분의 1 정도의 병력은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의 서쪽을 직접 공격했다. 독일군은 이 공격에 전차 20여대의 지원을 받는 2개 연대 병력만 투입했지만 추이코프는 독일군의 전력을 다음과 같이 과장했다. 

“이 공격은 전면적인 것이었다. 적은 베르후네우딘스카야 거리에서 2개 사단과 500대 이상의 전차를 투입해 공격해왔다. 첫번째 공격은 격퇴했다. 졸루데프가 지휘하는 사단은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독일군은 예비대를 동원해 여러차례에 걸쳐 공격을 계속했다. 적은 치열한 전투 끝에 이날 저녁 아군의 방어선을 돌파했고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의 한 블럭을 점령했으며 경기장 근처까지 밀고들어왔다. 스타호노브체프와 스쿨프투르늬 공원은 아군이 아직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제62군의 일지는 추이코프의 회고록 보다는 정확한 편으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디젤나야, 바리카디 마을, 107.5고지 일대에 집결한 적은 대규모의 병력(2개 사단과 전차 80~90대)를 동원하여 오전 11시 30분경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 방향으로 총공격을 해왔다.제37근위소총병사단과 제84전차여단은 전차 45~50대의 지원을 받는 적 2개연대와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적은 베르흐네-우딘스크와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 그리고 베르흐네-우딘스크와 지토미르스크 등 다른 축선에서도 공격해왔다. 적은 첫번째 공격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고 격퇴되었다.” 


(중략) 

붉은 군대 총참모부의 일일작전요약에서는 추이코프가 보고한 10월 7일의 전투 상황을 반영하고 있지만 독일군의 기갑전력에 대해 추이코프가 주장한 내용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62군은 3개 보병사단과 1개 차량화 사단으로 구성된 적을 상대로 격렬한 방어전을 전개했다. 적은 오전 11시 30분경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로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제37근위소총병사단, 제84전차여단, 그리고 제112소총병사단의 잔여 병력은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와 지토미르스크를 공격하는 적에 맞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10월 7일이 끝나갈 무렵 적은 수르코프 거리와 우스튜즈스카야 거리의 끝, 지토미르스크와 스쿨프투르늬 공원 외곽에 도달했다. 이날 4개 대대 규모의 적 병력과 전차 16대를 섬멸했다. 적은 더이상의 진격하지 못했다. 제42소총병여단은 스쿨프투르늬 공원 북쪽의 두개의 건물과 스쿨프투르늬 공원 북부를 잇는 선에 도달했다. 제62군에 소속된 다른 부대의 위치는 동일하다.” 

추이코프가 과장한 독일군의 규모가 어떻던 간에, 예네케가 지휘하는 제389보병사단은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 남쪽의 소련군 방어선을 뒤로 밀어냈다. 하지만 제51군단의 전선을 균일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10월 7일에 전개된 짧지만 격렬한 전투로 제24기갑사단은 장교와 병사 51명이 부상당했고, 제389보병사단은 전사 20명, 부상 45명의 피해를 냈다. 

Glantz, ibid., pp. 338~340


추이코프는 10월 중순의 트랙터 공장 전투의 결과에 관해서도 비슷하게 과장을 하고 있습니다.



추이코프는 독일 제51군단이 3,000명 이상의 전사자를 냈다고 추산했지만 실제로 독일군이 10월 14일에 입은 손실은 전사자와 부상자, 실종자를 합쳐 538명이었다.  

Glantz, ibid.,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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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은 10월 17일의 전투 결과를 평가했는데 독일군이 우세했던 것이 확실하다. 독일군은 바리카디 공장의 서쪽과 북쪽에서 소련 제62군의 방어선을 돌파했으며, 구르티예프의 제308소총병사단을 섬멸하고 류드니코프의 제138소총병사단이 지리멸렬하여 바리카디 공장으로 패주하게 만들었다. 제51군단의 보고에 따르면 투항자 103명을 포함해 860명의 소련군이 포로로 잡혔으며 막대한 양의 무기와 장비가 노획되었다. 추이코프는 제51군단의 전차 40대를 격파하고 독일군 2,000명을 사살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독일군의 손실은 576명에 불과했다. 손실 내역은 전사 91명, 부상 469명, 행방불명 16명이었다. 하지만 추이코프가 주장한 독일군의 전차 손실은 실제와 비슷하다. 10월 17일이 끝날 무렵 제24기갑사단은 전투 시작 당시 가동가능했던  전차 33대 중 4대만 남아 있었으며, 제14기갑사단은 33대 중 19대만 남아 있었다. 

Glantz, ibid., pp. 418~419.


인용한 것 이외에도 추이코프가 전과를 과장하고 전황을 왜곡하는 사례가 몇건 더 실려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책을 직접 읽어 보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러시아 역사가인 발레리 자물린은 “프로호로브카 : 신화의 기원과 전개과정”이라는 글에서 소련군 지휘관들이 자신들의 졸렬한 지휘를 변명하기 위해서 독일군의 전력을 과장하고 승리하는 경우에는 전과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독일군의 피해를 과장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비판하는데 추이코프도 예외는 아닌 것 입니다.

2013년 3월 14일 목요일

NARA 소장 독일노획문서에 대한 잡상 - 2. 독일기갑총감부문서 T78 R617

NARA 소장 독일노획문서에 대한 잡상 - 1. 독일기갑총감부문서 T78 R616


NARA에서 소장하고 있는
독일기갑총감부문서, R617은 총 세개의 폴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폴더는 1944년 11월 부터 12월까지 육군과 공군소속 기갑사단의 월간현황보고서를 정리한 문서입니다. 두 번째 폴더는 1943년 부터 1944년 까지 수집한 외국의 기갑장비에 대한 정보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폴더는 1945년 육군소속 기동부대에 대한 여러가지 보고서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폴더는 지난번에 소개한 R616과 동일한 구성입니다. 다루고 있는 시기만 다를 뿐 구성은 동일하니 별도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각 기갑사단의 판터대대가 육본에서 배속해 준 다른 사단소속의 판터대대일 경우 별도로 정리가 되어 있어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두 번째 폴더는 외국의 기갑장비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소련, 미국, 영국의 기갑장비에 대한 정보가 들어있는데 가장 풍부한 것은 노획해서 사용하던 이탈리아군의 기갑장비에 대한 정보입니다. 많은 사진과 함께 장비별로 분석해 평가한 보고서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소련군 기갑장비에 대한 내용은 거의 대부분 사진이지만 IS-2 전차와 T-34/85의 경우는 분석한 보고서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노획한 T-34/76을 시험하는 장면을 촬영한 사진이 몇 장 있습니다. 미국, 영국군의 장비는 사진만 들어있어서 그다지 활용도가 높지 않습니다.

세 번째 폴더는 1945년도의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이 폴더는 전쟁말기, 글자그대로 종전 직전인 1945년 4월 경의 몇몇 기갑부대의 편성과 현황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부대 편성과 이동 명령, 보급관계 문서에다 몇몇 보병사단에 대한 정보가 뒤섞여 있어 약간 두서가 없다는 느낌이 드는데 흥미로운 정보가 많습니다. 먼저 사단급 부대의 편제, 보충, 장비현황에 대한 자료 들입니다. 대략 다음과 같은 부대의 자료가 들어있습니다.

-제233예비기갑사단
-크람프니츠 기갑교육단Panzer-ausbildungsverband Krampnitz
-발트해 기갑교육단Panzer-ausbildungsverband Ostsee
-로도스 기갑척탄병여단
-총통척탄병사단
-총통경호사단
-제25기갑사단 전투단
-제10기갑척탄병사단
-제17기갑사단 전투단
-제21기갑사단
-제14기갑사단
-제25기갑척탄병사단
-펠트헤른할레 대전차여단Panzerjagd-brigade Feldherrnhalle
-1945년형 기갑사단  편제와 이에 맞춰 편성하도록 한 기갑사단(뮌헤베르크, 되베르리츠, 위터보크, 홀슈타인.) 이 중에서는 홀슈타인 기갑사단에 대한 정보가 상대적으로 많습니다.

특히 재미있는 자료로는 1945년 2월 10일에 작성된 제14기갑사단의 편제표가 있는데 1개 전차대대와 지원전력을 중점집단Schwerpunktgruppe으로 편성하고 차량화된 부대는 각각의 기갑척탄병연대의 단대호에 따라 2개 기갑여단으로 재편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1945년형 기갑사단 편제와도 유사해 보이는 면이 있어 재미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폴더에서 가장 눈에들어오는 자료는 1945년 3월과 4월의 각 집단군 예하 사단들의 편성을 도표로 정리한 것 입니다. 3월에는 G집단군과 E집단군, 4월에는 H집단군, G집단군, C집단군의 자료가 있습니다. 이 표에서는 각 사단별 대대급 전투력과 중화기 보유량을 정리해 놓았는데 C집단군의 경우에는 독일군에 소속된 이탈리아군 사단에 대한 정보도 들어있어 더욱 유용합니다. 또 C집단군 문서에는 예하사단들의 대전차대대 편성과 장비현황을 정리한 통계가 들어있습니다. 이밖에 각 야전군의 현황에 대한 한두장 정도의 짤막한 보고서가 중간 중간 어수선하게 들어가 있습니다.
약간 관련없다고 생각되는 자료도 들어있습니다. 이 폴더의 제일 앞부분에는 국방군총사령부의 B지휘참모부Führungsstab B의 구성와 국방군총사령부 경비대대Wachbattalion OKW의 편성명령에 대한 문서가 있습니다. 국방군총사령부 경비대대의 경우 차량화 보병대대인 만큼 기갑총감부도 관련이 있으니 이 폴더에 포함되었겠지요. 

그리고 기갑총감부 문서에 보병사단에 관한 정보가 많아서 좀 의외인데 1945년 4월 7일자로 된 제1604척탄병연대에 대한 평가를 담은 보고서가 그 중 하나입니다. 이 척탄병연대는 소련군 포로로 구성한 부대입니다. 그리고 보병사단 소속의 충원연대Auffrischungs-regiment에 대한 정보도 제법 됩니다.

아직 제대로 정리는 하지 못하고 한번 쭉 훑어 보기만 하는 중인데 중간 중간 섞여 있는 자잘한 보고서 중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습니다.

2013년 1월 4일 금요일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독일 제4군의 보병용 대전차화기 보유현황

독일 제4군의 문서를 읽다가 재미있는 통계를 발견했습니다.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인 1944년 6월 10일에 집계한 독일 제4군 예하 사단의 장비 보유량에 대한 통계입니다. 가장 흥미로웠던 내용은 각 사단의 보병용 대전차화기 보유량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사단이 인가량을 훨씬 초과한 보병용 대전차화기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이 시기 독일군의 보병사단들을 살펴보면 사단 직할 대전차대대에 1개의 돌격포대가 배치되는 등 대전차전력이 크게 향상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보병용 대전차화기의 대량 배치도 그 일환이라고 하겠습니다.

※당시 중부집단군 소속 사단들의 중화기 현황은 이 글을 참고하십시오.

재미있는 통계입니다. 한번 보시죠.

표. 독일 제4군의 보병용 대전차화기 보유량(1944. 6. 10)

사단
판처슈렉
판처파우스트
대전차소총
인가량
30
1,000
-
18기갑척탄병사단
71
1,500
-
267보병사단
88
1,430
-
57보병사단
72
983
-
기갑척탄병사단FHH
88
1,550
-
12보병사단
80
1,179
5
31보병사단
119
1,147
-
337보병사단
86
1,182
4
110보병사단
66
1,236
-
260보병사단
141
1,366
6
25기갑척탄병사단
55
1,313
-
78돌격사단
58
1,248
3
[표출처 : “Armeeoberkomando 4, O.Qu./WuG(T), Az 72g, Nr.3794/44geh, Waffenlage”(1944.6.11), RG242 T312 R239]

2012년 7월 15일 일요일

푸펜도르프(Puffendorf) 전투에 대한 개괄

지난번에 쓴 “Rurfront 1944/45 - Hans Kramp”에 서 푸펜도르프 전투 이야기를 꺼낸 김에 이 전투에 대해 간략하게 썰을 풀어보겠습니다. 독일 자료를 보강해서 독일쪽의 시각도 반영한 글을 쓰고 싶은게 욕심이지만 필요한 자료를 언제 구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 일단은 미국의 시각에서 간략하게 소개를 해 보지요. 차후에 만족할 만한 독일측 자료를 구할 수 있으면 새로 한편 더 쓰도록 하겠습니다.

푸펜도르프Puffendorf 전투는 1944년 11월 17일 미군의 공세에 맞서 반격에 나선 독일 제47기갑군단 소속의 제9기갑사단과 제506중전차대대가 미군 제2기갑사단과 격돌한 기갑전이었습니다. 특히 이 전투는 미 제2기갑사단이 처음으로 독일군의 쾨니히스 티거를 전장에서 맞딱드리고 충격을 받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푸펜도르프 전투는 미군의 11월 공세의 일부였으므로 전반적인 상황을 먼저 설명하고 푸펜도르프 전투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공세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은 미육군 공간사 The Siegfried Line Campaign에 잘 되어 있으므로 배경 설명은 이 저작을 기준으로 하겠습니다.

작전명 퀸Queen으로 명명된 11월 공세에서 미 제2기갑사단은 제9군 예하 제19군단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미 제9군의 목표는 윌리히Jülich를 포함하여 뢰어Roer강에 도하점을 확보하는 것 이었습니다. 미 제9군은 윌리히 방면으로의 공세에 제19군단과 제13군단을 투입했는데 맥레인Raymond S. McLain중장이 지휘하는 제19군단은 제2기갑사단, 제29보병사단, 제30보병사단으로 편성되었으며 질렘Alvan Cullom Gillem, Jr.소장이 지휘하는 제13군단은 제84보병사단과 제102보병사단, 제113기병단으로 편성되었으며 제9군의 예비대로 제7기갑사단이 있었습니다. 이중 제19군단은 제9군의 주공으로서 윌리히를 점령하고 뢰어강을 도하하는 확보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제13군단은 제19군단의 좌익에서 공세를 시작해 리니히Linnich를 점령하고 뢰어강을 도하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미 제9군은 윌리히와 리니히를 확보하고 뢰어강을 도하하면 뒤셀도르프 방면으로 공세를 계속할 예정이었습니다.1) 이 지역의 지형은 라인강 유역의 전형적인 평야로 많은 도시와 마을이 산재해 있는게 특징입니다.(독일 서부의 라인강 유역을 가 보신 분들이라면 바로 머리에 떠오르실 겁니다.)

이 공세의 문제라면 공세 초기에 좁은 지구에 병력이 집중적으로 투입되어 공간 확보가 용이하지 않다는 것 이었는데 이때문에 주공인 제19군단이 진격하면서 제13군단이 전개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또한 가을비와 10월 말 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으로 인해 평야지대가 진창으로 돌변했습니다. 아직 10월이어서 지면이 얼어붙을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2)  때문에 전차를 포함한 기동장비의 정비에 많은 노력이 기울여 졌습니다. 특히 공세를 앞두고 전차의 궤도에 장착하는 “덕 빌Duck Bills”을 집중적으로 장착해서 제2기갑사단과 각 보병사단에 배속된 독립전차대대들은 공세 직전까지 셔먼의 4분의 3에 덕빌을 장착했다고 합니다.3)

미 제9군의 정면에는 독일 제15군 소속의 제12SS군단(제176보병사단, 제183국민척탄병사단)과 제81군단(제246국민척탄병사단, 제3기갑척탄병사단)이 배치되어 있었고 예비대로는 뤼트비츠Heinrich Diepold Georg Freiherr von Lüttwitz 기갑대장이 지휘하는 제47기갑군단(제9기갑사단, 제15기갑척탄병사단)이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미군의 의도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윌리히 방면으로 진출하는 주공을 상대하기 위해 예비대인 제47기갑군단을 투입할 계획이었습니다.

퀸 작전은 악천후로 인해 연기된 끝에 1944년 11월 16일 개시되었습니다. 기상 문제로 인해 항공지원이 약간 축소된 규모로 실행됐고 이어서 공격준비포격이 실행되었습니다. 포격이 끝나자 주공인 미 제19군단의 제29보병사단과 제2기갑사단이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공격정면이 매우 좁았기 때문에 제2기갑사단은 B전투단CCB, Combat Command B만을 투입했습니다. B전투단은 공격 첫날 독일 제183국민척탄병사단 제330척탄병연대의 방어를 격파하고 푸펜도르프와 플로버리히Floverich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푸펜도르프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제2기갑사단 B전투단이 입은 손실은 4대의 전차가 진창에 기동불능이 되고 6대의 전차가 지뢰로 파손된 것 이었습니다. B전투단은 푸펜도르프와 플로버리히를 점령한 뒤 푸펜도르프 북쪽의 압바일러Apweiler 방 향으로 공격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매복한 독일군의 대전차포에 전차 7대(3대 완파, 4대 기동불능)와 다수의 보병을 상실했습니다.4) 첫날의 공격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미 제2기갑사단은 독일 제183국민척탄병사단 제330척탄병연대에 괴멸적인 타격을 가했습니다. 미국측 기록에 따르면 B전투단이 독일 제330척탄병연대로 부터 잡은 포로만 570명에 달했습니다. 미 제2기갑사단은 첫날 공격에서 전사 21명, 실종 18명을 포함해 196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전차 35대를 잃었습니다.5)
반면 미 제2기갑사단의 우익, 즉 남쪽에서 공격을 개시한 제29보병사단은 상당한 손실을 입으면서 진격도 부진했습니다. 평야지대였기 때문에 보병들은 포격에 노출될 경우 공격을 제대로 할 수 가 없었으며 배속된 제747독립전차대대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보병을 지원하는 전차들은 보병 때문에 신속하게 돌진하지 못했고 전차에 포격이 집중하면서 전차의 엄호를 바라던 보병의 피해만 속출한 것 입니다. 제29보병사단이 공격에 투입한 제115보병연대와 제175보병연대는 1km도 전진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제115보병연대 C중대는 심각한 타격을 입어서 공격 첫날 중대원이 20명으로 줄어들었을 정도였습니다.6)

이렇게 미 제19군단의 공세 첫번째 날이 지나갔습니다. 독일군은 이 공격에 매우 신속히 반응했는데 11월 16일 오후 예비대인 제47기갑군단에 출동명령이 내려진 것 이었습니다. 특히 가장 강력한 부대인 엘버스펠트Harald Freiherr von Elverfeldt 소장이 지휘하는 제9기갑사단에게는 미 제2기갑사단의 돌파를 저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미 제2기갑사단은 독일군이 기동예비를 투입한 사실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11월 17일 다음 목표인 게레온스바일러Gereonsweiler를 공격하기로 했고 양측의 기갑부대는 이렇게 격돌하게 됩니다.

1944년 11월 17일, 독일 제9기갑사단은 푸펜도르프와 이멘스도르프Imensdorf 방면으로 반격을 개시했습니다. 푸펜도르프 방면은 제11기갑척탄병연대가, 이멘스도르프 방면으로는 제10기갑척탄병연대가 공격을 담당했으며 여기에 제33전차연대와 제506중전차대대가 배속되었습니다.
이멘스도르프 방면으로 공격한 제10기갑척탄병연대는 이곳을 방어하던 미 제406보병연대와 제771대전차대대에 의해 비교적 간단히 격퇴되었습니다.7) 그러나 푸펜도르프 방면의 전투는 좀 격렬하게 전개됐습니다.
독일군 제33전차연대와 제11기갑척탄병연대의 푸펜도르프 공격은 이곳에서 공격을 위해 전개중이던 미 제2기갑사단 B전투단 제1임무부대에게는 기습이었습니다. 독일군이 먼저 미군을 향해 포격을 시작했고 이어 미군도 대응포격을 시작했기 때문에 양측의 보병들은 기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8) 결국 전투는 글자 그대로 순수한 기갑전투로 진행되었습니다. 미군 전차들은 공격을 위해 전개하던 중에 기습을 받은데다 진창으로 인해 기동력이 저하되어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미국측의 표현에 따르면 독일 전차(판터)의 폭 넓은 궤도는 “얕은 자국만을 남기는데 미군의 전차 궤도는 참호를 만들지경”이었던 것 입니다. 게다가 독일군 전차의 강력한 방어력은 미군을 경악시켰습니다. 특히 제2기갑사단은 처음으로 쾨니히스티거와 교전을 했기 때문에 그 충격은 엄청났습니다. 한 전차장은 자신의 전차가 쾨니히스티거에 14발을 명중시켰음에도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한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B전투단은 18대의 셔먼과 7대의 스튜어트 경전차가 완파되었고 16대의 셔먼과 12대의 스튜어트 경전차가 격파되었습니다. 여기에 A전투단이 4대의 셔먼을 잃었습니다.9)  B전투단은 11대의 독일 전차를 격파했다고 추산했는데 미 제2기갑사단이 공세기간 중 격파한 판터가 5대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과장된 보고라고 생각이 됩니다. Tiger in Combat에 따르면 쾨니히스티거는 이날 전투에서 네대가 격파되었는데 3대는 제67포병연대의 야포 사격으로 파괴된 것 입니다.

푸펜도르프 전투는 미 제2기갑사단의 전차병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1945년 3월 20일 미 제2기갑사단장이 아이젠하워에게 제출한 “독일군과 미군의 기갑장비 비교평가에 관한 제2기갑사단의 장교 및 사병들의 의견(Personal Convictions of Individual Officers and Enlisted Men of 2nd Amrored Division as to Comparison of German and Aerican Armor and Equipment)”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 실린 많은 증언들이 푸펜도르프 전투의 경험을 이야기 하고 있을 정도이기 때문입니다.10) 그리고 이 전투의 충격이 엄청났기 때문인지 미국 공간사에서도 이 전투를 다루는 저작이 두권이나 있을 정도입니다.



1) Charles B. MacDonald, The Siegfried Line Campaign, (USGPO, 1993), pp.516~517.
2) Donald E. Houston, Hell on Wheels : The 2nd Armored Divison, (Presidio, 1977), p.302.
3) Charles B. MacDonald, ibid., p.518.
4) Donald E. Houston, ibid., pp.307~309; Charles B. MacDonald, ibid., pp.526~527.
5) Charles B. MacDonald, ibid., p.530.
6) Harry Yeide, Steel Victory : The Heroic Story of America’s Independent Tank Battalions at War in Europe, (Presidio, 2003), p.161; Charles B. MacDonald, ibid., p.528.
7) Charles B. MacDonald, ibid., p.531.
8) Hans Kramp, Rurfront 1944/45 : Zweite Schlacht am Hubertuskreuz zwischen Wurm, Rur und inde, (Verlag Fred Gatzen Geilenkirchen, 1981), p.247; Charles B. MacDonald, ibid., pp.531~532.
9) Lida Mayo, The Ordnance Department : On Beachhead and Battlefront, (USGPO, 1991), pp.325~326; Donald E. Houston, ibid., pp.310~313.
10) Thomas L. Jentz의 Germany’s Panther Tank : The Quest for Combat Supremacy, pp.154~156에는 이 보고서에서 인용한 증언들이 많이 실려있습니다.

2012년 6월 7일 목요일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독일중부집단군 소속 사단급 부대들의 기갑 및 대전차전력

지난번에 썼던 글, 후퇴전에서 기갑부대의 전차 손실에 대한 잡상 - 바그라티온 작전의 독일 제4, 5기갑사단의 경우에서 말씀드린 대로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독일군의 기동부대 운용에 대한 글을 조금씩 쓰는 중 입니다. 쓰다보니 자료가 없어서 막히는 부분이 많아서 진도가 더딥니다. 그런데 자료를 다 모을때 까지 기다리다간 언제 다 쓸지 모르겠군요. 부족한 것 투성이이니 말입니다.

이 글에서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대략 정리가 된 사단급 부대들의 통계만 올려봅니다.  중전차대대와 돌격포여단, 독립 대전차대대Panzerjäger-Abteilung의 통계는 아직 집계가 완료되지 않아서 일단 제외했습니다. 아마 돌격포여단과 독립 대전차대대의 전력에 대한 집계가 끝나면 원래 계획했던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독일군의 기동부대 운용에 대한 글을 본격적으로 쓸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바그라티온 작전당시 독일군의 사단급 부대들의 전력을 집계하는 것은 독립부대들에 비하면 월등히 수월한 일입니다. 그래서 일단은 현재 정리된 사단급 부대의 전력을 올려보려 합니다. 원래는 기갑차량만 집계를 하려 했는데 마더와 같은 자주대전차포를 집계에 넣자니 견인 대전차포들을 넣지 않는게 애매해서 모두 집계를 하기로 했습니다.

참고한 자료들이 집계한 날자가 일치하지 않아서 애매하기는 하지만 1944년 6월 20일에서 22일 사이에 독일 중부집단군 소속 사단들의 기갑 및 대전차 전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사실상 바그라티온 작전에 크게 참여하지 않은 독일 제2군은 제외했습니다. 아래의 표에서 자주대전차포로 표기한 것은 대부분 마더이고 中대전차포는 대부분 50mm Pak38, 重대전차포는 대부분 75mm Pak40 입니다.


1. 육군본부 및 중부집단군 직할 예비대
3호전차
4호전차
돌격포
자주
대전차포
대전차포
대전차포
20기갑사단
7
83
28?
5?
기갑척탄병사단 FHH
11
26
4
12
14보병사단
8
31
707경비사단
1
6
[Gerd Niepold, Mittlere Ostfront Juni ‘44, (Mittler&Sohn, 1985), p.35;  Rolf Hinze, Der Zusammenbruch der Heeresgruppe Mitte im Osten 1944, (Motorbuch Verlag, 1980), p.282; Kamen Nevenkin, Fire Brigades : The Panzer Divisions 1943-1945, (J.J.Fedorowicz, 2008), p.464]

1번 표에서 20기갑사단의 대전차포 보유현황은 1944년 6월 1일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 바그라티온 작전개시당시의 현황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 합니다. 기갑척탄병사단 펠트헤른할레와 제14보병사단의 기갑차량 보유대수는 1944년 6월 20일 기준으로 작전개시 당시의 숫자와 큰 차이는 없을 것 입니다. 자주대전차포와 견인식대전차포의 통계는 위에 적은 힌체의 저작에서 인용한 것 입니다.


2. 제3기갑군 소속사단
3호전차
4호전차
돌격포
자주
대전차포
대전차포
대전차포
군직할대 및 기타
95보병사단
8
21
201경비사단
?
?
9군단
252보병사단
7
14
21
D분견군단
12
21
53군단
246보병사단
14
21
4공군야전사단
17
19
6공군야전사단
19
21
206보병사단
17
21
6군단
197보병사단
11
20
299보병사단
9
22
256보병사단
10
9
15
[Rolf Hinze, Der Zusammenbruch der Heeresgruppe Mitte im Osten 1944, (Motorbuch Verlag, 1980), pp.278~280]

2번표는 모두 힌체의 저작에서 인용한 것 입니다. 이 표에는 제3기갑군 소속 보병사단들에 돌격포가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고 되어 있는데 한번더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D분견군단Korps-abteilung D의 대전차포는 모두 95보병사단에서 지원된 전력이라고 합니다.

3. 제4군 소속사단
3호전차
4호전차
돌격포
자주
대전차포
대전차포
대전차포
군직할대 및 기타
286경비사단
27군단
78돌격사단
31
18
?
?
25기갑척탄병사단
3
45
16(10)
8
26
260보병사단
5
25
39기갑군단
110보병사단
6
4
22
337보병사단
10
8
22
12보병사단
10
7
22
31보병사단
10
?
?
12군단
18기갑척탄병사단
2
32
267보병사단
9
2
22
57보병사단
6
18
[Gerd Niepold, Mittlere Ostfront Juni ‘44, (Mittler&Sohn, 1985), p.35; Rolf Hinze, Der Zusammenbruch der Heeresgruppe Mitte im Osten 1944, (Motorbuch Verlag, 1980), pp.281~283, Bernd Hartmann, Geschichte des Panzerregiments 5 1935~1943 und der Panzerabteilung 5 1943~1945, (2002)]

제4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이 개시될 당시 중부집단군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중부집단군이 보유하고 있던 480대의 돌격포 중에서 246대가 제4군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하지요. 돌격포여단 외에도 보병사단들 상당수가 돌격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제25기갑척탄병사단의 전력에 대한 서술에서 인용한 니폴트는 6월 20일에 자주대전차포 10대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힌체는 16대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5기갑척탄병사단은 제5전차대대에 돌격포 45대외에 3호 지휘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바그라티온 작전이 개시될 당시 정확한 보유대수를 아직 확인하지 못했는데 완편된 상태에서는 3대의 3호 지휘전차를 보유하는 것이 정상이므로 일단 그렇게 정리했습니다.


4. 제9군 소속사단
3호전차
4호전차
돌격포
자주
대전차포
대전차포
대전차포
35군단
134보병사단
9
2
22
296보병사단
4
22
6보병사단
10
4
21
383보병사단
4
21
45보병사단
10
18
41기갑군단
36보병사단
7
6
21
35보병사단
9
12
4
129보병사단
7
9
17
55군단
292보병사단
7
25
102보병사단
14
12
26
[Rolf Hinze, Der Zusammenbruch der Heeresgruppe Mitte im Osten 1944, (Motorbuch Verlag, 1980), pp.283~286]

바그라티온 작전이 개시될 즈음 제102보병사단은 보유하고 있던 돌격포들을 상급부대인 제55군단의 직할로 차출당했습니다.

이 표도 완전히 정리된 것이 아니라서 다른 자료를 구하는대로 수정을 할 예정입니다. 다음에는 작전 기간 중 증원된 기갑전력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혹시나 통계를 정리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으면 중전차대대와 돌격포여단, 중대전차대대 선에서 정리를 마무리하고 본격적인 글을 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