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주문한 책을 받았습니다. 여전히 유로화가 비싸서 독일 책은 많이 사지 못하는 터라 책 상자를 받아 드니 즐겁더군요.
그런데 한가지 문제라면 포장이 부실했다는 겁니다. 아마존에 책을 주문했을 때 완충제 대신 종이를 구겨넣은 것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이것도 제대로 집어 넣은 게 아니라서 상자 아랫 부분은 모두 젖어 있었습니다. 책들은 비닐로 밀봉포장 해 놓아 전혀 상하지 않았지만 영수증이 젖어서 너덜너덜해 졌더군요.
그런데 영수증이 걸레가된 와중에도 포도주 광고가 실린 전단지는 아주 멀쩡했습니다. 신기하여라...
이번에 받은 책 중 군사사와 관계된 것들은 대략 아래와 같습니다.
첫 번째의 두 녀석 중 오른쪽에 있는 Österreich-Ungarns Kraftfahrformationen im Weltkrieg 1914-1918은 예상했던 것 보다 더 마음에 드는 책이었습니다. 제목 그대로 1차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차량부대의 편성과 장비, 운용을 다루고 있는데 방대한 1차사료를 바탕으로 충실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책의 뒷부분에서 장갑차 부대에 대해 짤막하게 다루고 있는데 단순히 오스트리아군의 장갑차 부대만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적국이었던 이탈리아군과 동맹군이었던 독일군의 장갑차 운용에 대해서도 비교해서 서술해 놓고 있습니다.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 중 하나가 산업화 시대의 전쟁, 특히 1차대전 시기의 기계화이다 보니 아주 좋은 물건을 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왼쪽에 있는 Österreicher in der Deutschen Wehrmacht: Soldatenalltag im Zweiten Weltkrieg는 2차대전 중 독일군에 복무한 오스트리아 인들의 군사 경험에 대한 내용인데 예상했던 것 보다는 살짝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스트리아 출신 독일군들의 군사경험, 전쟁범죄, 나치 체제에 대한 순응 문제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긴 한데 서술하고 있는 범위가 광범위해서 그런지 서술의 밀도는 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한번 통독을 해 보면 평가가 바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다음으로 오른쪽에 있는 Pflicht zum Untergang: Die deutsche Kriegsführung im Westen des Reiches 1944/45은 Schönigh 출판사가 내고 있는 Zeitalter der Weltkriege 시리즈의 네번째 책 입니다. 2차대전 말기 독일군의 서부전선에서의 전쟁수행을 분석하고 있는데 특히 전쟁 말기 부대편성과 병력수급, 장비문제를 다룬 3장 1절과 전쟁 말기 서부전선의 경험이 전후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되었는지를 다루고 있는 마지막 부분이 흥미로워 보입니다.
왼쪽에 있는 Der Schlieffenplan: Analysen und Dokumente은 역시 Zeitalter der Weltkriege 시리즈의 두 번째 책입니다.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겠지만 작년에 '테렌스 주버(Terence Zuber)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이란 글에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서구 군사학계의 논쟁에 대해쓴 일이 있지요. 제가 글재주가 없어서 다소 산만한 글이 되었는지라 독일쪽 견해도 참고해서 다시 쓰겠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바로 이책을 그 이유에서 사게 됐습니다. 이책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문과 슐리펜 계획에 대한 사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테렌스 주버의 슐리펜 계획 논쟁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논문은 주버의 논문과 주버를 반박하는 논문을 합쳐 네편이 실려있고 나머지 논문들은 슐리펜 계획에 관련된 다른 주제의 논문들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는 꽤 근사한 부록이 더 있었습니다.
바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서 언급된 작전안의 지도입니다. 슐리펜 계획 논쟁에 대한 글을 쓰려면 자주 봐야 할 테니 같은 크기로 복사를 할 생각입니다.
2010년 3월 18일 목요일
2010년 3월 13일 토요일
강대국 정치의 일면
다들 잘 아시는 내용이겠습니다만.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독일 통일 문제가 다시 떠오르면서 전략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있던 소련은 판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해보자는 계산에서 독일 통일 문제에 소련과 미국은 물론 영국과 프랑스도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과 소련,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을 분할 점령하고 분단체제를 형성한 당사국이니 명분은 꽤 그럴싸 했던 셈입니다. 물론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 통일에 부담을 가질 것이고 이 두나라가 문제를 제기한다면 소련으로서는 그만큼 좋은 일이 없었을 것 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독일을 분할 점령했던 4개국이 주도적으로 독일 통일 문제를 다루는 것이 서독에게는 굴욕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내놓은 절충안은 독일 문제 해결을 위해 당사자인 서독과 동독, 그리고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가 참여한 이른바 "2+4" 방식이었습니다. 물론 4대강국이 독일의 자주적 통일 문제에 끼어드는 모양이긴 했습니다만 소련이 제안한 4대강국 중심의 협의체 보다는 서독에게 훨씬 나은 방안이었을 겁니다.
한편, "2+4"를 통해 독일 통일문제를 협의한다는 방안은 1990년 2월 캐나다의 오타와에서 열린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다른 국가들에게도 알려집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다른 유럽 나라들도 판에 끼워달라고 들고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국무부장관이었던 제임스 베이커(James A. Baker III)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겐셔는 외교적으로 매우 무례한 발언을 했는데 사실 이건 강대국이 중심이 되는 국제정치의 찝찝한 일면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독일이 보기엔 한 수 아래의 나라들인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통일문제에 끼어드는 것 만으로도 불쾌한데 그 보다 국력이 더 떨어지는 작은 나라들이 끼어들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짜증이 안 날 수 없었겠지요. 근대이후의 국제관계에서는 형식상 모든 나라가 동등한 위치에서 참여합니다만 실제로는 국력이 그대로 반영되지요.
그리고 유럽의 작은 나라들이 아웅다웅 거리는 것은 더 큰 나라들이 보기에 가소롭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베이커가 미국의 "2+4" 방안을 제안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을 때 고르바초프는 미국과 소련, 그리고 유럽 각국의 입장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독일의 통일 과정은 국제 관계에서 강대국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면 모두가 관심을 가지지만 그 문제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대상은 실력이 뒷받침 되는 소수일 수 밖에 없지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반도 주변에는 강대국 밖에 없어서 독일 통일 과정에서 처럼 딴지를 걸고 나설 자격미달(???)의 나라는 없습니다. 한반도 통일이 본격적으로 논의 될 때 몽골이나 베트남이 한 자리 요구할 리는 없겠지요^^;;;;
*위에서 인용한 겐셔의 발언은 꽤 유명해서 독일 통일과 관련된 많은 저작들에 실려있습니다. 젤리코와 라이스의 책에도 그 이야기가 있는데 미국 외교문서를 참고했기 때문에 베이커의 구술을 참고한 플라토의 서술과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이 발언은 직역하면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아 의역을 했습니다. 원문은 "We are big countries and have our own weight." 입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독일 통일 문제가 다시 떠오르면서 전략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있던 소련은 판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해보자는 계산에서 독일 통일 문제에 소련과 미국은 물론 영국과 프랑스도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과 소련,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을 분할 점령하고 분단체제를 형성한 당사국이니 명분은 꽤 그럴싸 했던 셈입니다. 물론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 통일에 부담을 가질 것이고 이 두나라가 문제를 제기한다면 소련으로서는 그만큼 좋은 일이 없었을 것 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독일을 분할 점령했던 4개국이 주도적으로 독일 통일 문제를 다루는 것이 서독에게는 굴욕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내놓은 절충안은 독일 문제 해결을 위해 당사자인 서독과 동독, 그리고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가 참여한 이른바 "2+4" 방식이었습니다. 물론 4대강국이 독일의 자주적 통일 문제에 끼어드는 모양이긴 했습니다만 소련이 제안한 4대강국 중심의 협의체 보다는 서독에게 훨씬 나은 방안이었을 겁니다.
한편, "2+4"를 통해 독일 통일문제를 협의한다는 방안은 1990년 2월 캐나다의 오타와에서 열린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다른 국가들에게도 알려집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다른 유럽 나라들도 판에 끼워달라고 들고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국무부장관이었던 제임스 베이커(James A. Baker III)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우리가 오타와 회의에서 당시 추진 중이던 "2+4" 방식의 협상에 대해 발표하기 전 까지는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이 문제를 나토 회의에서 다룰 생각이었다. 그러자 사태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그리고 다른 나라들도 독일 문제에 끼고 싶었기 때문에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만약 발언권을 가진 15개, 또는 16개국 대표가 발언을 신청해 독일이 재통일 될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면 상황을 어찌 해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오타와에서 열린 나토 회의에서 미국측이 "독일의 재통일에 대한 우리의 계획안을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발표하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이탈리아 외무장관이었던 지아니 데 미첼리스(Gianni de Michelis)가 발언을 신청했다.
"독일 재통일 문제는 중요합니다. 그 문제는 이탈리아와 관계가 있는 문제이고 유럽의 미래와도 관계된 문제입니다. 우리도 협상에 참가해야 겠습니다."
그러자 겐셔(Hans-Dietrich Genscher)가 일어서서 말했다. "저도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겐셔는 거칠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이 게임에 끼어들 수 없어!(Sie sind nicht mit im Spiel)"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위축되지 않았다. 나는 그의 태도에 꽤 놀랐다. 서독과 동독이 협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유럽국가들도 같은 요구를 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종결지을 방법이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두 독일과 서유럽의 15개국... 아니 14개국, 그리고 소련과 미국, 여기에 캐나다 까지 끼어들었다면 의사 소통도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Alexander von Plato, Die Vereinigung Deutschlands - ein weltpolitisches Machtspiel(2. Aflg)(Bundeszentrale für politische Bildung, 2003), ss.283~284
겐셔는 외교적으로 매우 무례한 발언을 했는데 사실 이건 강대국이 중심이 되는 국제정치의 찝찝한 일면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독일이 보기엔 한 수 아래의 나라들인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통일문제에 끼어드는 것 만으로도 불쾌한데 그 보다 국력이 더 떨어지는 작은 나라들이 끼어들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짜증이 안 날 수 없었겠지요. 근대이후의 국제관계에서는 형식상 모든 나라가 동등한 위치에서 참여합니다만 실제로는 국력이 그대로 반영되지요.
그리고 유럽의 작은 나라들이 아웅다웅 거리는 것은 더 큰 나라들이 보기에 가소롭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베이커가 미국의 "2+4" 방안을 제안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을 때 고르바초프는 미국과 소련, 그리고 유럽 각국의 입장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고르바초프가 세바르드나제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베이커가 놀랄만한 일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역사적으로 위험한 문제였던 독일의 군국주의가 나타날 조짐은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말했다. "본인도 기본적으로 미국측의 제안에 동의하는 바 이오." 소련은 새로운 현실에 맞춰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통일 독일의 장래를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오." 고르바초프는 프랑스나 영국 같은 나라는 유럽 내부의 주도권을 어느 나라가 쥐게 될 것인지 신경쓴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것은 소련이나 미국이 신경쓸 문제는 아니었다.
"소련과 미국은 대국입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세력 균형을 좌우할 능력이 있지요."**
Philip Zelikow and Condoleezza Rice, Germany Unified and Europe Transformed : A Study in Statecraft(Harvard University Press, 2002), p.182.
독일의 통일 과정은 국제 관계에서 강대국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면 모두가 관심을 가지지만 그 문제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대상은 실력이 뒷받침 되는 소수일 수 밖에 없지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반도 주변에는 강대국 밖에 없어서 독일 통일 과정에서 처럼 딴지를 걸고 나설 자격미달(???)의 나라는 없습니다. 한반도 통일이 본격적으로 논의 될 때 몽골이나 베트남이 한 자리 요구할 리는 없겠지요^^;;;;
*위에서 인용한 겐셔의 발언은 꽤 유명해서 독일 통일과 관련된 많은 저작들에 실려있습니다. 젤리코와 라이스의 책에도 그 이야기가 있는데 미국 외교문서를 참고했기 때문에 베이커의 구술을 참고한 플라토의 서술과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이 발언은 직역하면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아 의역을 했습니다. 원문은 "We are big countries and have our own weight." 입니다.
나름 공정한 서술....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신천과 안악지방에서 일어난 학살은 당시 38선 이북지역에서 일어난 학살 중에서도 유명합니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이 학살은 단일 지역에서 일어난 학살로는 한국전쟁 당시 가장 규모가 큰 것입니다. 물론 정확한 피학살자가 몇 명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요. 어쨌든 북한 정부는 한국전쟁 당시 부터 이 지역에서 일어난 학살을 '미국의 전쟁범죄'로 요란하게 선전했습니다. 이때문에 한국 측에서도 북한의 선전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신천 봉기에 참여한 월남민들은 1957년에 『抗共의 불꽃 : 黃海 10.13.反公學牲義擧鬪爭史』라는 책을 발간합니다. 이 책은 당시 우익측 시각을 반영한 저작이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신천 지방에 서술의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안악 등 학살이 벌어진 인접 지역의 정보는 소략하지만 주된 서술대상인 신천 지방의 사건에 대해서는 우익의 입장에서 매우 충실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민군과의 교전에서 신뢰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도한 전과를 자랑하는 등 의심스러운 면이 많긴 합니다만 봉기에 가담한 우익 인사들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어 유용합니다.
이 저작이 재미있는 점은 우익측의 보복 학살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7년에 나온 저작에서 우익의 보복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 꽤 흥미로웠는데 시간이 지난 뒤에 생각해 보니 오히려 전쟁 직후라서 사람을 죽인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을 수도 있을것 같더군요. 물론 북한 측의 학살에 대한 서술은 자세한 반면 우익의 보복학살에 대한 서술은 매우 소략합니다. 황해도 인민위원장을 조리돌림한 뒤 총살한 내용과 교전 중 인민군이나 당원을 사살한 이야기를 제외하면 좌익에 대한 보복학살을 다룬 부분은 세 쪽 정도에 불과합니다. 내용도 얼마 되지 않으니 해당 부분을 인용해 보겠습니다.(원문 그대로 인용해서 맞춤법은 엉망입니다)
학살을 저지른 것은 모두 미국의 소행이라는 북한의 주장에 비하면 아주 솔직한 기록인 셈인데 그래도 뭐랄까, 사람 죽인 것을 아주 당연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꽤나 으스스합니다. 보복학살 외에 위에서 언급한 봉기 과정에서의 살인에 대한 묘사도 좀 깹니다. 자신들도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죽였다고 쓰고 있으니 말입니다.
잡담하나. 『抗共의 불꽃 : 黃海 10.13.反公學牲義擧鬪爭史』은 국회도서관에서 전자문서로 전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한번 읽어보십시오. 이박사 치세하의 반공정서를 듬뿍(???) 느끼실 수 있습니다.
잡담둘. 2008년에 북한이 신천학살의 주범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미군 장교에 대해 잡담을 한 일이 있습니다. 물론 결론이 바뀔일은 없겠지만 미국 자료를 추가로 확보하면 보강해서 한번 더 써볼까 합니다.
2008년에 썼던 글은☞ 신천학살에 대한 약간의 이야기
이 저작이 재미있는 점은 우익측의 보복 학살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7년에 나온 저작에서 우익의 보복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 꽤 흥미로웠는데 시간이 지난 뒤에 생각해 보니 오히려 전쟁 직후라서 사람을 죽인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을 수도 있을것 같더군요. 물론 북한 측의 학살에 대한 서술은 자세한 반면 우익의 보복학살에 대한 서술은 매우 소략합니다. 황해도 인민위원장을 조리돌림한 뒤 총살한 내용과 교전 중 인민군이나 당원을 사살한 이야기를 제외하면 좌익에 대한 보복학살을 다룬 부분은 세 쪽 정도에 불과합니다. 내용도 얼마 되지 않으니 해당 부분을 인용해 보겠습니다.(원문 그대로 인용해서 맞춤법은 엉망입니다)
끝없이 맑게 개인 가을하늘에 높이 계양된 태극기 밑에서 남녀노소 할것없이 총동원되여 구국대업에 나섰다. 의거대가 확보해 놓은 지구마다 유능한 지방유지를 선출하고 또 선출된 그들은 남한의 기관조직기구를 따라 미약하나마 손색없는 자치위원회와 치안대를 조직하였다.
봉기군과 아군 -국군들과 유엔군-의 진격으로 퇴각의 혈로를 차단당하게 된 괴뢰들은 수많은 애국지사를 학살하며 구월산으로 대거 입산하였다. 신천에서 八百여명에 달하는 애국자의 시체를 내무서 방공호와 유치장 참호 정치보위부의 지하실 -양민을 학살하기 위하여 가설한 곳- 및 유치장 군당의 방공호 및 토굴-양민을 학살하기 위하여 가설한 곳- 각처 방공호 창고 하수도 등에서 발굴해 내였고 해주형무소에서 一千여명 안악중학교 강당 및 지하실에서 五ㆍ六백명의 시체를 발굴하였다. 또한 재령과 안악 서하면 장련면 붕암리에서 의거하였으나 실패한 관계로 무참하게도 수많은 애국청년들이 학살당하였다.
이러한 참변을 목격한 이 지구 주민들은 놈들 소행에 대하여 무조건 복수할것을 맹서하고 이를 갈며 때를 기달렸다. 한편 치안대들은 부역자 숙청과 공비 소탕이 그 중요한 임무였다. 이와같이 이 지구에서는 매일같이 피의 복수가 계속되였다. 이러한 피의 복수는 공산정치가 지난 五년동안에 저질러 놓은 죄악 -가혹한 착취와 억압 그리고 학살- 에 대한 어디까지나 당연한 것이었으며 또한 치안대원들이 놈들을 잔인하게 처단하는 것은 놈들이 가르치고 간 그대로 이른바 복습(?) 이라는 것 뿐이었다. 심지어는 예수교인들도 놈들이 베풀어준 은혜(?)에 대하여 곱게 보답해 주었다. 사실상 인과응보라는 결과밖에 아무것도 아닌 아주 단순한 일이었다.
한편 어떻한 부역자의 아네는 남편이 도망한 뒤라 정의의 심판을 받게됨이 두려워 치안대를 찾아와서는 "저는 친정의 가정 성분으로 보아 절대로 공산당이 될수 없읍니다. 그저 남편하나 잘못맞난 탓이라 생각하고 남편의 대를 받은 자식을 내손으로 처단했으니 저만은 살려주시요" 하고 손이 발이 되도록 애원하였다.
이토록 전율할 피의 복수는 전 북한을 휩쓸었으나 특히 반공의 전위인 구월산지구 일대가 제일 심하였다. 그러나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이러한 피의 복수는 무고하고 졸렬한 방법이었음을 각 책임자들이 선무 만류하고 패잔 공산괴뢰들의 역습을 방어하며 동족상쟁의 해를 피하였다.
趙東煥,『抗共의 불꽃 : 黃海 10.13.反公學牲義擧鬪爭史』(서울, 1957), 474~476쪽
학살을 저지른 것은 모두 미국의 소행이라는 북한의 주장에 비하면 아주 솔직한 기록인 셈인데 그래도 뭐랄까, 사람 죽인 것을 아주 당연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꽤나 으스스합니다. 보복학살 외에 위에서 언급한 봉기 과정에서의 살인에 대한 묘사도 좀 깹니다. 자신들도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죽였다고 쓰고 있으니 말입니다.
잡담하나. 『抗共의 불꽃 : 黃海 10.13.反公學牲義擧鬪爭史』은 국회도서관에서 전자문서로 전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한번 읽어보십시오. 이박사 치세하의 반공정서를 듬뿍(???) 느끼실 수 있습니다.
잡담둘. 2008년에 북한이 신천학살의 주범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미군 장교에 대해 잡담을 한 일이 있습니다. 물론 결론이 바뀔일은 없겠지만 미국 자료를 추가로 확보하면 보강해서 한번 더 써볼까 합니다.
2008년에 썼던 글은☞ 신천학살에 대한 약간의 이야기
2010년 3월 8일 월요일
서부전선으로의 차출에 반대한 동부전선의 독일 병사들
동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 병사들은 서부전선으로의 이동 명령이 떨어지면 매우 두려워 했다고 합니다.
어떤 병사들은 서부전선으로 차출되지 않기 위해서 폭동까지 일으켰다는군요.
농담이 아닙니다.
1차 대전 때는 그랬다는군요.
2차대전때는 이야기가 살짝 달라져서 동부전선이 딱히 인기가 없었다죠.
어떤 병사들은 서부전선으로 차출되지 않기 위해서 폭동까지 일으켰다는군요.
농담이 아닙니다.
1차 대전 때는 그랬다는군요.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을 서부전선으로 이동시키려 하자 이들은 반항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많은 병사들은 서부전선으로의 이동명령을 자신들의 부대에 대한 처벌행위로 받아들였다. 병사들은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는 기차의 바깥에 "플랑드르에서 도축할 소떼"나 "동부에서 온 죄수들" 같은 낙서를 했다. 약삭빠른 병사들은 서부전선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탈영해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잡으려 했다. 이미 1917년 중반 부터 독일군 사령부는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는 도중 병력의 10% 가량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양한 조치가 취해졌다. 소규모 수송부대를 보다 직접적으로 감독하는 것, 수상한 병사들을 체포하는 것, 병사들을 무장해제해서 기차가 이동하는 동안 기차안에서 총을 쏘지 못하게 하는 것, 소란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는 열차편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는 것 등이었다.
이런 강제적인 조치는 병사들의 사기만 떨어트렸다. 1918년, 드빈스크에서는 5천명의 병사가 (서부전선으로의) 이동 명령을 거부해 처벌 받았고 같은해 10월에는 하리코프에서 (서부전선으로의) 이동 명령을 받은 2천명의 병사가 폭동을 일으켰다. 예비병력을 필요로 하던 최고사령부는 러시아의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병사들이 한참 뒤에 신뢰하기 어려운데다 수용소에 있는 동안 볼셰비즘에 우호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기 전 까지는 이들을 다시 서부전선으로 보내기도 했다. 이제 동부전선에는 나이 많은 예비역이나 향토방위대, 그리고 (충성심이 의심되는) 알자스 출신이나 폴란드계 병사들이 배치되었다.
Vejas Gabriel Liulevicius, War Land on the Eastern Front : Culture, National Identity and German Occupation in World War I(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p.213
2차대전때는 이야기가 살짝 달라져서 동부전선이 딱히 인기가 없었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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