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국의 대북영향력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북한 핵문제가 장기화 되면서 중국이 북한에 대해 제한적인 영향력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명백해 졌는데 이것은 꽤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최명해의 저작인 『중국∙북한 동맹관계』는 이 문제를 재미있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저자는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하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북한과 중국이 서로 상이한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점 입니다. 이것은 대외관계에서 흔히 나타나는 일이지요. 두 번째는 중국이 북한을 관리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다는 점 입니다. 이 두번째 문제는 중국에게 꽤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특히 북한과 중국이 서로 상이한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대립할 때 중국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문제점이 처음으로 드러난 것은 흐루쇼프의 집권 이후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입니다. 중국은 소련을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해 북한과 제휴해 소련에 맞서려 시도합니다. 그러나 북한은 자국에게 핵우산을 포함한 안전보장을 해 줄 수 있는 소련과 공개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회피하려 합니다. 중국은 북한에게 그런 것들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실력이 되지 않았지요. 중국은 북한을 회유하기 위해 다양한 당근을 제시하지만 북한은 호락호락하게 걸려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중국과 미국이 관계개선을 하면서 이런 구조는 더 요상하게 꼬여갑니다. 북한은 중국과 미국이 국교를 수립한 이후 한반도 문제를 공동관리하는 방향으로 나가자 중국의 하위체제에 포섭되지 않기 위해서 80년대에는 소련쪽에 밀착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소련이 갑자기 망해버리죠;;;; 결국 북한에게 충분한 안전보장을 해 줄수 있는 소련이 망해버리니 북한에게 남은 선택은 두 가지가 됩니다. 중국의 하위 체제로 포섭되느냐 아니면 북한의 자율성을 인정해 줄 수 있는 쓸만한 물주를 찾느냐.
네. 결국 답은 우리 모두가 잘 알 듯 ‘미국밖에 없다’가 됩니다. 누가 보더라도 미국은 안전보장 측면에서 중국보다 우월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국력 차이부터가 엄청나지요. 이후의 이야기야 우리 모두 잘 알 듯 미국은 중국에게 최대한 많은 역할을 부여하고 싶어하지만 북한이 말을 듣질 않고 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이 중국보다 매력적인 상대인 것을. 문제라면 미국이 북한에게 신경쓰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겠습니다만.
저자는 중국이 북한과 동맹을 형식적이나마 유지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근본적으로는 북한을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주 내에 묶어 둘 수 있는 수단이 동맹외에는 없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마치 1950년대에 소련이 그랬던 것 처럼 현재의 미국은 북한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 중국 보다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적인 동맹마저 폐기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미국에게 들러붙고 싶어 안달 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의 위상은 추락할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중국 지도부가 결코 원하지 않는 시나리오 일 것입니다.
Ps 1. 저자는 북한과 중국의 관계에서는 기괴하게도 북한보다 더 강대국인 중국이 ‘방기(abandonment)’의 위협을 느끼는 경우가 가끔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꽤 재미있는 해석이지요. 수십년 동안 소련과 미국에게 치어 2인자에 머무르는 것이 중국의 현실인 만큼 그럴듯한 이야기 입니다.
PS 2. 이종석도 북한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서 책을 한 권 썼습니다. 이종석의 책과 비교하며 읽으시면 훨씬 재미있습니다. 최명해가 미국과 중국의 협력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이종석은 미국과 중국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요. 아마도 동북아균형자론이라는 발상이 나온 것도 이종석이 미국과 중국의 갈등을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종석 보다는 최명해의 저작이 더 재미있고 읽을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2009년 7월 8일 수요일
2009년 7월 5일 일요일
프랑스혁명-나폴레옹전쟁기의 보병창
배군님이 쓰신 17세기 스웨덴군 병종과 전술에 대한 글을 읽고 곁다리로 씁니다. 배군님의 글에 보병창에 대한 언급이 있기에 프랑스혁명-나폴레옹전쟁 시기의 보병창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 보겠습니다.
프랑스군은 17-18세기에 군사기술에서 많은 혁신을 이룩하면서 다른 유럽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총검(Bayonet)’의 도입이었습니다. 총검의 도입으로 보병들은 소총만을 장비하고도 충격력과 화력을 동시에 이용해 전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군사사가는 수발총과 총검의 도입으로 유럽 군대가 오스만투르크로 대표되는 비유럽 군대에게 확고한 전술적 우위를 차지하게 됐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Black, 1995, p.101] 총검이 차지하는 지위가 높아진 결과 보병창이 차지하는 지위는 점차 낮아져 17세기 말에는 사실상 프랑스군에서 퇴출되게 됩니다.
프랑스군이 처음으로 총검을 사용한 것은 1642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프랑스-네덜란드 전쟁(1672-1678)에서는 프랑스군이 처음으로 대규모 총검돌격을 실시해 총검의 전술적 위력을 과시합니다.[Lynn, 1999, p.60] 프랑스군의 대대전술대형을 보면 총검의 도입에 따라 보병창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낮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0년전쟁기 프랑스군의 보병대대는 소총병과 창병의 비율이 1:1이었습니다. 그러나 1650년경에는 그 비율이 2:1로 역전되고 프랑스-네덜란드전쟁에서 대규모의 총검이 사용된 직후인 1680년에는 3:1로, 그리고 9년전쟁 기간 중인 1695년에는 4:1이 되다가 1705년에는 창병이 완전히 사라집니다.[Lynn, 1997, p.476] 이미 9년전쟁(1688-1697) 기간 중 일부 보병대대는 전체가 소총병으로 편성된 경우도 있었으며 루이 14세는 9년전쟁 종결 뒤 모든 보병의 기본 장비를 화승총에서 수발총으로 바꾸고 총검을 장비하도록 명령했습니다.[Lynn, 1997, p.472]
이렇게 해서 18세기로 들어오면 프랑스군에서 보병창은 완전히 퇴출됩니다. 기병을 상대로 유용하다는 점 때문에 일각에서 보병창을 부활시키자는 의견도 나오긴 했습니다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실제로 보병창이 다시 사용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까지는 말이죠.
마침내 프랑스혁명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을 상대로 전쟁이 발발하자 혁명정부는 대규모 모병을 시작합니다. 1792년까지는 혁명의 정신에 입각해 자원병 모집이 주를 이루었으나 전쟁이 임박하자 사정이 달라집니다. 정부가 목표로 한 30만명의 육군을 자원병으로만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혁명 이념 같은 추상적 문제에 목숨을 내거는 사람이 많을 리는 없으니 말입니다. 혁명정부는 1793년 봄부터 강제 모병으로 전환했는데 어찌나 성과가 좋았는지 여름이 오기 전에 30만명을 모으는데 성공합니다. 비록 혁명정부가 목표로 한 75만명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프랑스군은 60만 대군으로 불어납니다.[Forrest, 2003, p.12] 사실 당시의 기준이건 현대의 기준이건 60만은 엄청난 대군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적들 중에서 이 정도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던 국가는 당시에는 전무했습니다.
그런데 대군을 만든 것 까지는 좋았는데 중요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소총이 부족했던 것 입니다.
당시 프랑스의 대표적 조병창인 파리 조병창의 연간 소총 생산량은 9천정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군대는 갑자기 60만명으로 불어나 버렸으니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혁명정부는 땜빵용 무기를 찾았고 그것은 의외로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보병용 무기로 다시 창을 지급하는 것 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1792년 보병창을 다시 보병의 정식 장비로 부활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전쟁부 장관 세르방(Joseph Servan)은 보병에게 창을 지급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명령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삽입했다고 합니다.
립서비스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총이 없어 창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혁명정부의 일각에서는 창을 다시 쓰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18세기 내내 프랑스의 많은 군사이론가들은 프랑스군이 사격에서 프로이센과 영국을 앞서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신 총검에 의존하는 충격 전술은 프랑스군에게 잘 맞는 방식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습니다. 삭스(Maurice de Saxe) 원수가 대표적인 인물이지요. 삭스 원수는 보병창을 다시 사용할 것을 주장하기 까지 했습니다. 삭스 원수 외에도 많은 군사이론가들이 충격전술을 중심으로 하는 보병전술을 옹호했습니다.[Lynn, 1977, p.2]
혁명정부도 이러한 주장의 영향을 받았고 1791년의 전술교범도 충격전술을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혁명전쟁시기 근거리 일제 사격 후의 총검돌격은 일반적인 전술이 되었습니다. 전쟁 발발 직전 소총 부족에 직면한 혁명정부의 입장에서 보병창을 다시 사용하는 것은 꽤 매력적인 대안으로 보였습니다. 총검전술에 의한 충격을 강조하는 전술을 사용하는 입장이니 보병대대를 소총병과 창병의 혼성 편제로 만드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던 것 입니다. 총검 자체가 소총을 보병창의 대용으로 만들기 위해 나온 물건이니 말입니다. 국민의회 의원이었던 카르노(Lazare Carnot)는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7월 25일 의회에 출석해 보병창이 근접전에 있어 매우 유용한 무기라는 연설을 했습니다. 의회는 카르노의 주장을 받아들여 군사위원회에 보병대대 편제를 소총병과 창병의 혼성편제로 하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합니다.[Lynn, 1977, p.3]
군사위원회는 소총병과 창병을 한 개 대대로 편성하는 방안이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회의 방안에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대규모 모병 계획이 시작되면서 보병창의 도입은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코뱅과 같은 과격파들은 대규모 ‘정규군’은 민주적 정부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시민의 자발적 참여에 기반한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창은 그 군대에 적합한 무기였습니다. 일단 군대로 끌고 왔으면 손에 뭔가를 쥐어주긴 해야지요. 혁명정부는 1792년 8월 1일, 50만 자루의 창을 생산하는 결정을 내립니다.[Lynn, 1996, p. 190]
이미 혁명정부가 보병창의 사용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부터 지방에서는 의용군 모집과 함께 자발적으로 창 생산이 시작됐습니다. 전선으로 나가는 의용군 대대들은 대부분 창으로 무장하고 나갔다고 하지요. 전선에서 다시 소총을 받기는 했지만. 매우 드물긴 하지만 후방 사단의 경우 1개 사단 전체가 창으로 무장한 경우도 있긴 했다고 합니다.[Lynn, 1996, p. 190] 그러나 혁명정부가 전시 생산을 독려하면서 소총생산이 급증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파리 조병창의 경우 연간 생산량이 9천정 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시동원이 시작되자 1793년 9월부터 1794년 10월까지 14만5천정의 소총을 생산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이 조병창은 생산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하루에 600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Forrest, 2003, p.18]
보병창의 옹호론자들은 프랑스군의 소총부족이 해소된 1794년 이후에도 기병전에 유용하다는 이유로 창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시계를 거꾸로 돌리지는 못 했습니다.
한편, 나폴레옹 전쟁이 진행되던 와중에 프로이센도 보병창을 다시 사용하게 됩니다. 역시 소총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프로이센은 1806년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완패 당한 뒤 병력을 4만2천명으로 제한당하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샤른호르스트(Gerhard von Scharnhorst)의 주도 하에 재무장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프로이센의 공업생산력은 프로이센군의 요구 사항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1803년에 채택된 신형 노타드 소총(Nothard Gewehr)은 1806년 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 겨우 7개대대만이 장비하는데 그쳤고 이 소총을 생산하는 쉬클러(Schikler) 조병창(슈판다우와 포츠담 두 곳에 공장을 둔)의 생산능력으로는 4만2천명의 프로이센군에게 노타드 소총을 보급하는데 최소 6년에서 8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Showalter, 1972, p.367] 결국 프로이센군의 대부분은 계속 1782년형 보병총(Infanterie-gewehr M1782)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의 감시 때문에 기존의 조병창에서 조약이 규정한 한도 이상의 소총을 생산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대안으로 프랑스의 감시가 느슨한 실레지엔(Schlesien)에 새로운 조병창을 건설하는 방안이 추진되었습니다. 프랑스군이 1809년 이후 점령지에서 철수하면서 프로이센의 소총 생산은 탄력을 받아 1809년 1월부터 1810년 3월 까지 44,329정의 소총이 생산됩니다. 여기에는 1809년에 채택된 M1809가 포함되었습니다.[Showalter, 1972, p.371-372]
프로이센군은 1811년 까지 95,180정의 소총을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 수량으로는 전시 동원으로 소집될 병력을 완전히 무장 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영국에게서 소총 6만정의 원조를 약속 받고 별도로 오스트리아로부터 5만정의 소총을 구매합니다. 동시에 실레지엔에 건설한 조병창의 확대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쪽박을 차면서 문제가 심각해 졌습니다.
프로이센은 즉시 전쟁에 참전하긴 했는데 1792년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동원 능력에 비해 확보한 소총이 부족했습니다. 프로이센은 전쟁에 참전할 당시 65,675명의 예비군만을 확보한 상태여서 추가로 12만명의 향토방위군(Landwehr)을 더 소집하려 했습니다.[Rothenberg, 1980, pp.192-194] 그런데 소총은 여전히 부족한 상태여서 1813년 4월에 새로 편성한 7개 예비군 연대는 병력 5,000명 중 소총을 가진 병사가 912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예비군도 이 지경이라 긴급히 소집된 향토방위군 대대는 소총병과 창병을 혼합 편성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결국 프로이센의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은 영국 등 외국의 원조였습니다. 동프로이센의 향토방위군은 러시아로부터 1만5천정의 프랑스 소총을 지원받아 무장을 할 수 있었으며 폼메른의 경우는 영국, 스웨덴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외국의 원조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영국이었는데 영국 정부는 프로이센이 전쟁에 참전하자 5월부터 10월까지 총 10만 정의 소총을 원조합니다. 결과적으로 프로이센군은 1813년 9월까지 잡다한 소총을 긁어 모아 27만5천정의 소총을 확보하는데 성공합니다.[Showalter, 1972, p.377-378]
표준화는 물 건너 갔지만 나폴레옹의 군대를 상대로 창질을 하는 것 보다는 백 배 나았을 겁니다.
참고문헌
Jeremy Black, ‘A Military Revolution? A 1660-1792 Perspective’, The Military Revolution Debate, Westview, 1995
Alan Forrest, ‘La patrie en danger : The French Revolution and the First Levée en masse’, The People in Arms : military Myth and National Mobilization since the French Revolu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John A. Lynn, ‘French Opinion and the Military Resurrection of the Pike, 1792-1794’, “Military Affairs” Vol.41 No.1(Feb, 1977)
John A. Lynn, The Bayonets of the Republic : Motivation and Tactics in the Army of Revolutionary France 1791-94, Westview, 1996
John A. Lynn, Giant of the Grand Siécle : The French Army 1610-1715,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John A. Lynn, The Wars of Louis XIV 1667-1714, Longman, 1999
Denis E. Showalter, ‘Menifestation of Reform : The Rearmament of Prussian Infantry, 1806-13’, “The Journal of Modern History” Vol.44 No.3(Sep, 1972)
프랑스군은 17-18세기에 군사기술에서 많은 혁신을 이룩하면서 다른 유럽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총검(Bayonet)’의 도입이었습니다. 총검의 도입으로 보병들은 소총만을 장비하고도 충격력과 화력을 동시에 이용해 전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군사사가는 수발총과 총검의 도입으로 유럽 군대가 오스만투르크로 대표되는 비유럽 군대에게 확고한 전술적 우위를 차지하게 됐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Black, 1995, p.101] 총검이 차지하는 지위가 높아진 결과 보병창이 차지하는 지위는 점차 낮아져 17세기 말에는 사실상 프랑스군에서 퇴출되게 됩니다.
프랑스군이 처음으로 총검을 사용한 것은 1642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프랑스-네덜란드 전쟁(1672-1678)에서는 프랑스군이 처음으로 대규모 총검돌격을 실시해 총검의 전술적 위력을 과시합니다.[Lynn, 1999, p.60] 프랑스군의 대대전술대형을 보면 총검의 도입에 따라 보병창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낮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0년전쟁기 프랑스군의 보병대대는 소총병과 창병의 비율이 1:1이었습니다. 그러나 1650년경에는 그 비율이 2:1로 역전되고 프랑스-네덜란드전쟁에서 대규모의 총검이 사용된 직후인 1680년에는 3:1로, 그리고 9년전쟁 기간 중인 1695년에는 4:1이 되다가 1705년에는 창병이 완전히 사라집니다.[Lynn, 1997, p.476] 이미 9년전쟁(1688-1697) 기간 중 일부 보병대대는 전체가 소총병으로 편성된 경우도 있었으며 루이 14세는 9년전쟁 종결 뒤 모든 보병의 기본 장비를 화승총에서 수발총으로 바꾸고 총검을 장비하도록 명령했습니다.[Lynn, 1997, p.472]
이렇게 해서 18세기로 들어오면 프랑스군에서 보병창은 완전히 퇴출됩니다. 기병을 상대로 유용하다는 점 때문에 일각에서 보병창을 부활시키자는 의견도 나오긴 했습니다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실제로 보병창이 다시 사용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까지는 말이죠.
마침내 프랑스혁명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을 상대로 전쟁이 발발하자 혁명정부는 대규모 모병을 시작합니다. 1792년까지는 혁명의 정신에 입각해 자원병 모집이 주를 이루었으나 전쟁이 임박하자 사정이 달라집니다. 정부가 목표로 한 30만명의 육군을 자원병으로만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혁명 이념 같은 추상적 문제에 목숨을 내거는 사람이 많을 리는 없으니 말입니다. 혁명정부는 1793년 봄부터 강제 모병으로 전환했는데 어찌나 성과가 좋았는지 여름이 오기 전에 30만명을 모으는데 성공합니다. 비록 혁명정부가 목표로 한 75만명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프랑스군은 60만 대군으로 불어납니다.[Forrest, 2003, p.12] 사실 당시의 기준이건 현대의 기준이건 60만은 엄청난 대군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적들 중에서 이 정도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던 국가는 당시에는 전무했습니다.
그런데 대군을 만든 것 까지는 좋았는데 중요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소총이 부족했던 것 입니다.
당시 프랑스의 대표적 조병창인 파리 조병창의 연간 소총 생산량은 9천정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군대는 갑자기 60만명으로 불어나 버렸으니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혁명정부는 땜빵용 무기를 찾았고 그것은 의외로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보병용 무기로 다시 창을 지급하는 것 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1792년 보병창을 다시 보병의 정식 장비로 부활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전쟁부 장관 세르방(Joseph Servan)은 보병에게 창을 지급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명령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삽입했다고 합니다.
“마침내 자유로운 인민들이 이 무기를 다시 사용할 때가 왔다. (창은) 이미 혁명의 무기로 영광을 얻었으며 이제는 승리의 무기가 될 때이다!”
John A. Lynn, ‘French Opinion and the Military Resurrection of the Pike, 1792-1794’, “Military Affairs” Vol.41 No.1(Feb, 1977), p.1
립서비스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총이 없어 창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혁명정부의 일각에서는 창을 다시 쓰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18세기 내내 프랑스의 많은 군사이론가들은 프랑스군이 사격에서 프로이센과 영국을 앞서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신 총검에 의존하는 충격 전술은 프랑스군에게 잘 맞는 방식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습니다. 삭스(Maurice de Saxe) 원수가 대표적인 인물이지요. 삭스 원수는 보병창을 다시 사용할 것을 주장하기 까지 했습니다. 삭스 원수 외에도 많은 군사이론가들이 충격전술을 중심으로 하는 보병전술을 옹호했습니다.[Lynn, 1977, p.2]
혁명정부도 이러한 주장의 영향을 받았고 1791년의 전술교범도 충격전술을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혁명전쟁시기 근거리 일제 사격 후의 총검돌격은 일반적인 전술이 되었습니다. 전쟁 발발 직전 소총 부족에 직면한 혁명정부의 입장에서 보병창을 다시 사용하는 것은 꽤 매력적인 대안으로 보였습니다. 총검전술에 의한 충격을 강조하는 전술을 사용하는 입장이니 보병대대를 소총병과 창병의 혼성 편제로 만드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던 것 입니다. 총검 자체가 소총을 보병창의 대용으로 만들기 위해 나온 물건이니 말입니다. 국민의회 의원이었던 카르노(Lazare Carnot)는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7월 25일 의회에 출석해 보병창이 근접전에 있어 매우 유용한 무기라는 연설을 했습니다. 의회는 카르노의 주장을 받아들여 군사위원회에 보병대대 편제를 소총병과 창병의 혼성편제로 하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합니다.[Lynn, 1977, p.3]
군사위원회는 소총병과 창병을 한 개 대대로 편성하는 방안이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회의 방안에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대규모 모병 계획이 시작되면서 보병창의 도입은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코뱅과 같은 과격파들은 대규모 ‘정규군’은 민주적 정부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시민의 자발적 참여에 기반한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창은 그 군대에 적합한 무기였습니다. 일단 군대로 끌고 왔으면 손에 뭔가를 쥐어주긴 해야지요. 혁명정부는 1792년 8월 1일, 50만 자루의 창을 생산하는 결정을 내립니다.[Lynn, 1996, p. 190]
이미 혁명정부가 보병창의 사용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부터 지방에서는 의용군 모집과 함께 자발적으로 창 생산이 시작됐습니다. 전선으로 나가는 의용군 대대들은 대부분 창으로 무장하고 나갔다고 하지요. 전선에서 다시 소총을 받기는 했지만. 매우 드물긴 하지만 후방 사단의 경우 1개 사단 전체가 창으로 무장한 경우도 있긴 했다고 합니다.[Lynn, 1996, p. 190] 그러나 혁명정부가 전시 생산을 독려하면서 소총생산이 급증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파리 조병창의 경우 연간 생산량이 9천정 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시동원이 시작되자 1793년 9월부터 1794년 10월까지 14만5천정의 소총을 생산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이 조병창은 생산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하루에 600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Forrest, 2003, p.18]
보병창의 옹호론자들은 프랑스군의 소총부족이 해소된 1794년 이후에도 기병전에 유용하다는 이유로 창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시계를 거꾸로 돌리지는 못 했습니다.
한편, 나폴레옹 전쟁이 진행되던 와중에 프로이센도 보병창을 다시 사용하게 됩니다. 역시 소총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프로이센은 1806년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완패 당한 뒤 병력을 4만2천명으로 제한당하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샤른호르스트(Gerhard von Scharnhorst)의 주도 하에 재무장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프로이센의 공업생산력은 프로이센군의 요구 사항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1803년에 채택된 신형 노타드 소총(Nothard Gewehr)은 1806년 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 겨우 7개대대만이 장비하는데 그쳤고 이 소총을 생산하는 쉬클러(Schikler) 조병창(슈판다우와 포츠담 두 곳에 공장을 둔)의 생산능력으로는 4만2천명의 프로이센군에게 노타드 소총을 보급하는데 최소 6년에서 8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Showalter, 1972, p.367] 결국 프로이센군의 대부분은 계속 1782년형 보병총(Infanterie-gewehr M1782)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의 감시 때문에 기존의 조병창에서 조약이 규정한 한도 이상의 소총을 생산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대안으로 프랑스의 감시가 느슨한 실레지엔(Schlesien)에 새로운 조병창을 건설하는 방안이 추진되었습니다. 프랑스군이 1809년 이후 점령지에서 철수하면서 프로이센의 소총 생산은 탄력을 받아 1809년 1월부터 1810년 3월 까지 44,329정의 소총이 생산됩니다. 여기에는 1809년에 채택된 M1809가 포함되었습니다.[Showalter, 1972, p.371-372]
프로이센군은 1811년 까지 95,180정의 소총을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 수량으로는 전시 동원으로 소집될 병력을 완전히 무장 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영국에게서 소총 6만정의 원조를 약속 받고 별도로 오스트리아로부터 5만정의 소총을 구매합니다. 동시에 실레지엔에 건설한 조병창의 확대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쪽박을 차면서 문제가 심각해 졌습니다.
프로이센은 즉시 전쟁에 참전하긴 했는데 1792년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동원 능력에 비해 확보한 소총이 부족했습니다. 프로이센은 전쟁에 참전할 당시 65,675명의 예비군만을 확보한 상태여서 추가로 12만명의 향토방위군(Landwehr)을 더 소집하려 했습니다.[Rothenberg, 1980, pp.192-194] 그런데 소총은 여전히 부족한 상태여서 1813년 4월에 새로 편성한 7개 예비군 연대는 병력 5,000명 중 소총을 가진 병사가 912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예비군도 이 지경이라 긴급히 소집된 향토방위군 대대는 소총병과 창병을 혼합 편성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결국 프로이센의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은 영국 등 외국의 원조였습니다. 동프로이센의 향토방위군은 러시아로부터 1만5천정의 프랑스 소총을 지원받아 무장을 할 수 있었으며 폼메른의 경우는 영국, 스웨덴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외국의 원조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영국이었는데 영국 정부는 프로이센이 전쟁에 참전하자 5월부터 10월까지 총 10만 정의 소총을 원조합니다. 결과적으로 프로이센군은 1813년 9월까지 잡다한 소총을 긁어 모아 27만5천정의 소총을 확보하는데 성공합니다.[Showalter, 1972, p.377-378]
표준화는 물 건너 갔지만 나폴레옹의 군대를 상대로 창질을 하는 것 보다는 백 배 나았을 겁니다.
참고문헌
Jeremy Black, ‘A Military Revolution? A 1660-1792 Perspective’, The Military Revolution Debate, Westview, 1995
Alan Forrest, ‘La patrie en danger : The French Revolution and the First Levée en masse’, The People in Arms : military Myth and National Mobilization since the French Revolu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John A. Lynn, ‘French Opinion and the Military Resurrection of the Pike, 1792-1794’, “Military Affairs” Vol.41 No.1(Feb, 1977)
John A. Lynn, The Bayonets of the Republic : Motivation and Tactics in the Army of Revolutionary France 1791-94, Westview, 1996
John A. Lynn, Giant of the Grand Siécle : The French Army 1610-1715,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John A. Lynn, The Wars of Louis XIV 1667-1714, Longman, 1999
Denis E. Showalter, ‘Menifestation of Reform : The Rearmament of Prussian Infantry, 1806-13’, “The Journal of Modern History” Vol.44 No.3(Sep, 1972)
국회도서관
인터넷에서 구하기 어려운 책들이 많은데 특히 돈이 있다고 해도 물량이 없는 경우는 꽤 난감합니다.
그런 경우 국회도서관이 의외로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가끔 인터넷에서 구하지 못하는 물건들을 국회도서관 검색창에 입력하면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으니 말입니다.
Jan Glete의 Navies and nations도 괴이할 정도로 인터넷에서 재고를 찿기 힘든 물건인데 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어 도움을 받은 경우입니다. Glete의 다른 저작들은 가격이 황당한 경우는 있어도 인터넷에서 못구하는 수준은 아닌데 요상하게도 Navies and nations는 헌책도 찾기가 어렵더군요.
아마 국회도서관 만큼 납세자를 즐겁게 해 주는 정부기관도 드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경우 국회도서관이 의외로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가끔 인터넷에서 구하지 못하는 물건들을 국회도서관 검색창에 입력하면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으니 말입니다.
Jan Glete의 Navies and nations도 괴이할 정도로 인터넷에서 재고를 찿기 힘든 물건인데 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어 도움을 받은 경우입니다. Glete의 다른 저작들은 가격이 황당한 경우는 있어도 인터넷에서 못구하는 수준은 아닌데 요상하게도 Navies and nations는 헌책도 찾기가 어렵더군요.
아마 국회도서관 만큼 납세자를 즐겁게 해 주는 정부기관도 드물 것이라 생각합니다.
2009년 7월 3일 금요일
나를 분노(?!?!)하게 한 것들...
분노(?!?!)할 일이 두 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조조로 본 트랜스포머.
쓸데없이 많은 시간을 인간들에게 할애해서 거지같은 영화가 되었습니다. 아무 쓸모 없는 주인공의 부모는 뭐하러 출연시킨 것인지.
그리고 악당 두목인 폴른이 부활한 프라임에게 순식간에 썰리는 것도 황당하더군요. 아 이거 너무 허무하잖습니까. 한 5분 이상은 치고 받고 싸워야지.
스트레스 풀려다 스트레스를 몇 배로 더 받았습니다.
누구 말마따나 터미네이터가 이것 보다 훨 나은듯....
화가 치솟아 영화 끝나자 마자 바로 나왔습니다. 엔딩크레딧이 나오면서 중간 중간 에필로그를 보여주긴 하던데 전혀 당기지 않더군요.
두 번째는 점심에 먹은 버거킹 스태커.
전형적인 사진빨에 속은 경우가 되겠습니다. 사진에는 매우 큼지막하고 푸짐하게 나와 있는데다 가격도 다른 것 들 보다 비싸서 기대를 하고 주문했는데...
스태커 더블이라고 나온게 롯데리아의 천원짜리 버거들 크기더군요.
게다가 세트로 먹는데 감자가 없습니다!!!!!
아니. 햄버거 세트에 감자가 없다니! 가격은 와퍼세트보다 더 비싼데!
이미 트랜스포머를 보고 짜증이 날 대로 난 상태였는데 버거킹에게 마무리 일격을 받았습니다.
이놈의 버거킹은 늘 속으면서도 새로운 낚시가 나오면 걸리고야 마니 악순환도 이런 악순환이 따로 없습니다;;;;;
짜증이 나니 일도 잘 안되더군요.
첫 번째는 조조로 본 트랜스포머.
쓸데없이 많은 시간을 인간들에게 할애해서 거지같은 영화가 되었습니다. 아무 쓸모 없는 주인공의 부모는 뭐하러 출연시킨 것인지.
그리고 악당 두목인 폴른이 부활한 프라임에게 순식간에 썰리는 것도 황당하더군요. 아 이거 너무 허무하잖습니까. 한 5분 이상은 치고 받고 싸워야지.
스트레스 풀려다 스트레스를 몇 배로 더 받았습니다.
누구 말마따나 터미네이터가 이것 보다 훨 나은듯....
화가 치솟아 영화 끝나자 마자 바로 나왔습니다. 엔딩크레딧이 나오면서 중간 중간 에필로그를 보여주긴 하던데 전혀 당기지 않더군요.
두 번째는 점심에 먹은 버거킹 스태커.
전형적인 사진빨에 속은 경우가 되겠습니다. 사진에는 매우 큼지막하고 푸짐하게 나와 있는데다 가격도 다른 것 들 보다 비싸서 기대를 하고 주문했는데...
스태커 더블이라고 나온게 롯데리아의 천원짜리 버거들 크기더군요.
게다가 세트로 먹는데 감자가 없습니다!!!!!
아니. 햄버거 세트에 감자가 없다니! 가격은 와퍼세트보다 더 비싼데!
이미 트랜스포머를 보고 짜증이 날 대로 난 상태였는데 버거킹에게 마무리 일격을 받았습니다.
이놈의 버거킹은 늘 속으면서도 새로운 낚시가 나오면 걸리고야 마니 악순환도 이런 악순환이 따로 없습니다;;;;;
짜증이 나니 일도 잘 안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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