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29일 토요일

클린턴 국무장관의 재미있는 글 한편

이런 저런 할일이 많다 보니 블로그에 별로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재미있는 글도 꽤 많이 접해서 그중 몇개는 번역을 해볼까 하기도 했지만 이것 저것 하다 보니 시간이 지나가서 건드리지도 못하게 됐군요.

얼마전에 읽은 힐러리 클린턴 미국무부장관의 글, America's Pacific Century도 마찬가지입니다. 꽤 재미있어서 번역을 해볼까 했는데 영 시간이 나지 않는군요. 이 글은 제가 9월에 번역해서 소개했던 America's Coming Retrenchment : How Budget Cuts Will Limit the United States’ Global Role(번역문)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이 향후 전략적인 중심을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둬야한다는 주장은 이제 새로울 것도 없습니다만 국무부장관이 공식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조금 재미있군요. 대학생 시절 윌리엄 페리의 Defense in an Age of Hope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입니다. 이 글에 대한 논평들도 흥미롭습니다. 함께 읽어보시면 더 좋을 것 같군요. Debating the Pacific Century

지금은 번역할 시간이 되지 않아 링크만 걸어뒀지만 시간이 된다면 뒷북으로라도 번역을 해 볼까 생각중입니다.

2011년 10월 24일 월요일

언제나 일요일

김상현金相賢 의원이 민중당의 초선 의원이었던 시절의 일화라는 군요.

한번은 강기천姜起千 해병대 사령관과 술을 먹게 되었다. 해병대 준장 하나를 대동하고 나온 강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생도처럼 단정한 자세로 앉아 맥주잔에 조니워커를 가득 따르더니 단숨에 마셔버렸다. 그리고 내게로 잔을 넘겼다.

“김 의원, 내일은 일요일 입니다.”

“강 장군, 내일은 일요일이 아니라 목요일 입니다.”

“우리가 오늘 밤 뻗어서 내일 아침 출근을 하지 못하면 그게 바로 일요일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두 번을 만났는데 두 번 다 내가 졌다.

김성동, 『한국 정치 아리랑 : 한 정치인이 살아온 대한민국 현대사』, (동녘, 2011), 170쪽
솔직히 50%정도 존경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왠지 이것이야 말로 한국인이다 싶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ㅋㅋㅋ. 인용한 책에 따르면 결국은 김상현 의원이 세번째에는 복수(!?)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이것 또한 한국인 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소소한 일화는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묘하게 사람을 잡아 끄는 맛이 있어서 좋습니다. 자서전류가 매력적인 이유이기도 하지요.

2011년 10월 22일 토요일

카다피의 좋았던 시절...

Foreign Policy는 웹사이트에 매우 좋은 화보를 자주 게재하기 때문에 꽤 마음에 듭니다. 카다피가 세상을 뜨자 발빠르게 카다피의 좋았던 시절 사진들을 올려놓는군요. 사진의 대부분이 카다피가 쿠데타를 일으킨지 얼마 안된 시점의 사진들입니다.

사진 출처 : Young Qaddafi and King Idris(Foreign Policy)


카다피가 처참하게 사살되었다는 보도를 접하다가 쿠데타 직후의 위세등등한 사진들을 보니 기분이 묘합니다.

2011년 10월 17일 월요일

어떤 역사소설...


한국 역사소설 코너에 있는 Z건담, 역습의 샤아, 건담UC... 음. 그리프스 전역은 한반도에서 전개되었던 듯.

2011년 10월 16일 교보문고 광화문점

2011년 10월 12일 수요일

이승만 시기 민군관계에 대한 신익희의 통찰

부산정치파동은 대한민국 정치사에 있어 중요한 사건일 뿐만 아니라 민군관계에 있어서도 중요한 사건입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군부 일각에서 이승만의 헌정유린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기도한 것 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육군참모총장 이종찬(李鐘贊) 중장은 미국에 쿠데타 가능성을 타진한 바 있습니다. 라이트너(E. Allan Lightner, Jr.) 미국 대리대사의 증언에 따르면 이종찬 중장은 약간의 육군과 해병대 병력을 동원하면 이승만 대통령과 이범석 내무부장관, 원용덕 계엄사령관을 쉽게 체포하여 상황을 정상화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은 권력에 관심이 없으며 새 대통령을 선출하면 일주일 내에 군대를 복귀시킬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종찬 중장은 한국군이 유엔군의 지휘계통에 있는 만큼 미국의 지지만 있다면 쿠데타를 결행할 생각이었다고 합니다.1) 이종찬 중장은 정치 정상화를 미국이 지원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종찬 장군은 미국이 국회정상화를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을 무렵 제2병참사령부 예하의 병력을 동원해 이를 지원할 수 있다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2)

이렇게 이종찬 중장이 쿠데타 또는 미국의 이승만 제거에 협력하려 했던 것은 생각 이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익희의 측근이었던 신창현(申昌鉉)의 기록에 따르면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난 직후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3) 꽤 재미있는 내용이니 조금 인용을 해 보겠습니다.

(전략)

이날 저녁 무렵 서상렬(徐相烈)이 문병차 내방하였다. 서상렬은 일본 유학 중 학도병으로 끌려 나가 북지(北支) 전선에서 전투에 가담하여 중국군을 토벌하다가 일본 진중을 탈출하여 중경 임시정부의 경호대장을 지낸 사람이다. 경호대는 내무부에 예속되어 있었던 관계로 해공에게 가깝게 수종하던 터수였다.
이날 이 사람이 와서 뵙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박사의 폭거를 통렬하게 비난하였다. 그런 뒤 분을 참을 수 없다면서 “대구에 있는 육군 참모총장과는 지기(志氣)가 상통(相通)하는 처지이니 군을 동원해서 이 폭정을 응징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 하였다.

이 말을 듣고 해공께서 “그거 아주 위험한 발상이야. 우리가 공산당과 싸우느라 병력을 자꾸 증강시킨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지. 하지만 전체 국민에 대한 수치 비례로 보아 너무나 방대하여 앞으로 어떤 사람이 대통령에 될지 모르겠으나 이 군부를 다루는 일이 아주 중요한 문제로 남을 것이오.
아직은 이박사의 과거 독립운동 역사로나 국제적 성망 등 카리스마적 위력으로 지탱해 나가고 있는데, 지금 그분이 국헌을 뒤엎고 주권을 짓밟는다고 하여 군대의 힘을 빌어 확청(廓淸)하였다고 칩시다. 당장은 분풀이도 되고 속시원하겠지만, 그 군권 밑에 매달려 있는 정부가 무슨 민주 정부가 되겠으며, 어떻게 정부 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이오? 군부가 정치에 깊숙이 간여하면 그 나라는 망하는 것 이라오. 그것은 군부가 자기들 끼리 또 찢고 당기고 할 테니 결국 군부 쿠데타라는 악순환의 씨를 뿌려 준 결과가 된다는 말이라오.
정치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준조 절충(樽俎折衝)하고 토론ㆍ협상해 가며 차츰차츰 시정하고 광정(匡正)해 나가는 것이 민주주의라오. 나라와 민족의 일에 감정은 절대 금물이지. 우리가 길의 중요한 요지를 목이라고 하는데, 정치는 긴 목 잡고 한다는 것이라오. 감정도 금물이려니와 조급하게 굴어서도 안 되지요. 여기에 정치력이 아닌 무력으로 해결해 보겠다는 발상은 위험 천만한 일이야. 양호유환(養虎遺患) 되고 말아요. 아예 그런 생각일랑 하지 말아요.”

(후략)

신익희의 통찰력은 주목할 만 합니다. 물론 이종찬 중장은 신태영 국방부장관이 계엄군을 증원하기 위해 2개 대대를 차출하라고 했을 때 군의 정치개입에 반대하며 거절한 바 있고 권력에는 뜻을 두지 않은 태도로 존경받는 군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미국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면 마무리가 잘 되었으리라는 보장도 없지요. 군부가 쿠데타를 생각할 정도로 강력해진 시점에서 그것이 일어나지 않은 주된 원인은 신익희가 높이 평가한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군부통제와 통치능력에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민군관계에 주목하는 연구자들은 군부내 파벌을 이용한 이승만의 군부통제가 효율적이었음을 지적하고 있지요.4) 미국이 이승만 제거계획을 구상하다가 대안을 찾을 수 없어 포기한 사실에서 잘 드러나듯 이승만은 개인의 정치력으로 강력한 군부를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이라는 강력한 통제자가 사라지자 군부를 견제할 존재는 국내정치무대에 존재하지 않는 난감한 상황이 조성되지요. 5ㆍ16 쿠데타를 이야기 할 때 부산정치파동을 다루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입니다.

신익희가 예상했던 것 처럼 5ㆍ16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민주당에 실망한 상당수의 국민들은 군부가 ‘구악’을 일소하고 혁신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군부는 그대로 권좌에 눌러앉아 이후 노태우에 이르기까지 세명의 대통령을 배출하면서 장기집권을 하게되지요. 1961년은 군대가 양적으로 팽창한 상태에서 그나마 군부와 균형을 맞출만한 집단은 ‘썩어빠진’ 기성 정치집단인 민주당 정도였고 기성 정치권이 무력화된 상황에서 군부는 견제세력 없이 독주하게 됩니다. 공짜란 존재하지 않았고 군부를 통해 손안대고 코를 풀어보려던 세력은 제대로 한 방 얻어맞게 됩니다.



1) ‘Oral History Interview with E. Allan Lightner, Jr.’(1973. 10. 26), Truman Library, p.114
2) ‘Memorandum by the Director of the Office of Northeast Asian Affairs(Young) to the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Far Eastern Affairs(Allison)’(1952. 6. 13),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2~1954 Vol. XV Korea, Part 1, (USGPO, 1984), p.333
3) 申昌鉉, 『내가 모신 海公 申翼熙 先生』, (海公申翼熙先生紀念會, 1989) , 505~506쪽
4) 도진순ㆍ노영기,「군부엘리트의 등장과 지배양식의 변화」,  『1960년대 한국의 근대화와 지식인』, (선인, 2004), 67~68쪽

약간의 지름질

1. 오늘은 잠시 시간을 내서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소소한 지름질을 했습니다. 먼저 종로2가에 있는 알라딘 중고매장을 들렀는데 생각보다 쓸만한 책이 많더군요. 월간조선사에서 나온 『제임스 릴리의 아시아 비망록』,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나온『80년대 경제개혁과 김재익 수석』, 생각의 나무에서 나온 『러시아 사상가』, 그리고 자잘한 소설책을 몇 권 샀습니다. 특히 『러시아 사상가』는 교보문고 강남점에서 할인 행사를 할 때 사려다가 깜빡하고 사지 않았는데 아라딘 중고매장에서 훨씬 더 싼 9,000원에 팔고 있더군요. 나름 횡재했습니다. 생각이상으로 좋았습니다. 중간에 역사비평사에서 나온 『세 천황 이야기』가 여러권 들어와 있는걸 보고 조금 놀라기도 했습니다. 나온지 2년 쯤 된 책인데 벌써 떨이로 나오는 걸 보면 잘 안팔리는 모양입니다. 꽤 괜찮은 교양서적이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사보시는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2. 헌책방을 몇 군데 돌아다닌 다음에는 네이버하비에 들러서 모형을 조금 샀습니다.


즐겨만드는 야라레메카(;;;;) M4A1도 하나 사고 브롱코에서도 1/48 AFV를 만든다길래 1번타자인 스태그하운드를 하나 샀습니다.

별로 인기 없는 1/48만 만지작 거리다 보니 브롱코에서 만든 모형은 처음 사봤는데 런너상태만 보면 아주 마음에 듭니다. 에칭도 하나 넣어주고 사출상태도 깔끔해 보이네요. 뭐, 직접 만들어보기 전에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지금 만지작 거리고 있는 타미야의 왕호랑이를 생각해보면 에칭을 넣어주는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타미야의 왕호랑이는 뭔가 좀 허전해 보여 보이저의 에칭도 조금 붙여주는 중 입니다. 브롱코는 하비보스 처럼 에칭을 넣어주니 좋군요.

그리고 하비보스의 1/48은 앞으로 수입이 잘 안될것 같다는 유감스러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하기사 못생긴 M4 셔먼시리즈와 공산당 땅크만 별로 인기없는 스케일로 찍어냈으니 잘 팔릴것 같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별 인기없는 스케일을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유감이군요.

2011년 10월 6일 목요일

이탈리아의 국력에 대한 아주 탁월한 평가

이탈리아의 국력, 특히 군사력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자주 인용되는 평가가 하나 있습니다.

“이탈리아인들은 아주 왕성한 식욕을 가졌지요. 그런데 이빨이 영 시원찮습디다.”
(Diese Italiener, sie haben zwar großen Appetit, aber schlechte Zähne.)

비스마르크가 프랑스 대사에게, 1881년.

Hendrik L. Wesseling, Teile und herrsche: die Aufteilung Afrikas 1880-1914, (Franz Steiner Verlag, 1999), p.25

재치도 있거니와 아주 정확한 평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이탈리아인들에겐 좀 안됐지만. 그런더 더 안습인건 2차대전이 발발할 때 까지도 이탈리아의 군대가 시원찮아서 2차대전에 대한 저작에서도 이미 2차대전으로 부터 60년 전에 있었던 저 이야기를 끄집어 낸다는 겁니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이다 보니 외교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은 한번쯤 이 일화를 접해 보셨을 겁니다;;;;;

이런 일화를 보면 비스마르크는 만담가의 자질도 탁월했던 것 같습니다.

2011년 10월 1일 토요일

리박사의 외교기조

리승만 박사의 외교 기조를 가장 잘 보여주는 한마디.

Specifically, we need more divisions, more air and more sea forces.

‘Hagerty diariy, July 27, 1954’,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2~1954, Vol. XV Korea, part2, (USGPO, 1985), p.1845

단순 명쾌합니다. 더 많은 육군사단, 더 많은 공군, 더 많은 해군. ㅋㅋㅋ

아 물론, 이것이 대한민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요구인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읽으면 읽을수록 입가에 미소가...

아아. 이거 정말 중독될 것 같은 문구입니다. 꿈에 나올것 같아요.


More! More! More!

2011년 9월 23일 금요일

I support PETA!!!

채식 파시스트들에 반대하는 PETA(People Eating Tasty Animals) 운동을 기억하십니까?

이 역사적인(!?!?) 운동을 지지하시는 이글루스의 메-쟈 블로거 漁夫님께서 육식에 대한 정치적 신념을 과시할 멋진 자리를 제안하셨습니다.

입안을 적시는 고기의 육즙을 즐기시는 분들이라면 대환영입니다. 채식 파시스트들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드높일 절호의 기회입니다!

일시 : 2011년 9월 23일 금요일 오후 7시
장소 : 강남역 새마을 식당
회비 : 2만원



2011년 9월 21일 수요일

안드로이드용 킨들을 써보니

아무래도 글로 먹고사는 입장이다 보니 전자책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종이의 냄새와 감촉을 즐기는 구닥다리 감성의 소유자이다 보니 액정과 글자만 있는 새로운 매체에 적응하는게 잘 되지 않습니다만.

출판사 관계자 분들을 만나다 보면 결국에는 전자책으로 이야기가 빠질 수 밖에 없기도 합니다. 전자책은 수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경제적인 측면이 더 두드러지지 말입니다. 특히 개정을 거듭해야 하는 서적, 예를 들어 대학 교재같은 경우 전자책의 장점은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종이책이라면 개정판을 내는 즉시 구판 서적은 쓸모가 없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들은 출판사에게 처치 곤란한 부담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전자책은 그럴 일이 없으니 출판사의 입장에서도 좋은 대안입니다. 여기에 초기 부터 전자책을 애용하신 분들의 전자책에 대한 호평을 접하다 보니 관심이 갈 수밖에 없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기술의 발전에 둔감한 구닥다리 인간이라 전자책과는 별 인연이 없었는데 휴대폰을 변경한 뒤 안드로이드용 킨들을 설치하고 나서는 사정이 좀 달라졌습니다. 당장 아마존에서 샘플로 제공하는 분량만 해도 상당해서 읽을거리가 넘쳐나니 말입니다. 스마트폰 용으로 잘 편집된 전자책을 접하고 나니 전자책을 찬양하는 분들이 아주 잘 이해가 됐습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가독성도 좋고 다양한 부가기능이 있어서 읽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책 한권의 용량도 별로 크지 않아 놀랍더군요. 안드로이드용 조선일보 앱같이 쓸데없이 저장공간만 차지하는 애플리케이션들과 비교하니 더욱더 그랬습니다.

하지만 몇몇 서적의 경우 종이책과 비교해서 가격이 그다지 낮지 않은 점은 문제인 것 같습니다. 구닥다리 감성의 소유자로서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 대가로 종이를 넘기는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은 크나큰 손실이니 말입니다. 특히 Routledge같이 쓸데없이 책값이 비싼 출판사의 책들이 그렇습니다. 물론 종이책은 공간을 엄청나게 차지한다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자책은 그런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했고요.

그러니 앞으로 제가 전자책을 구매할 때는 그 범위가 소설책이나 교양서적류에 한정될 것 같습니다. 출판사들이 종이책을 계속해서 내는 한, 그리고 가격적인 차이가 크지 않은 한 중요한 책들은 계속해서 종이책 형태로 사게 되겠지요.

2011년 9월 19일 월요일

전통의 재발견

전통이란 때마다 재발견되고 재해석 되는 것이라지요.

제군, 우리들이 대동아전쟁의 진두에 섬은 물론 일본국민의 충의성忠義性에 투철하기 위해서지만 다시 우리 조선사람의 입장으로서 본다면 또 하나의 간절한 기대가 여기 숨어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이 잃어버린 '마음의 고향'을 발견하는 것이요, 잠자는 혼을 깨우쳐 우리들 본연의 자태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나약안일에 더럽힌 남루를 벗어던지고 '의'에 살고 '의'에 죽고 '용'에 일어서고 '용'에 넘어짐을 제일의로 한 우리들의 그전 모습을 찾아내는 길이다. 가마쿠라무사들과 함께 세계역사상에 무사도의 쌍벽이라고 일컬어 온 바 고구려 무사, 신라 무사의 무용성武勇性을 찾아내어 그 씩씩한 전통을 우리들의 생활원리로 하고 우리들의 정신적 부활을 꾀하는 것이 오랫동안 우리들에게 요망되어 오던 바 그 절호한 기회가 대동아의 전장에 그 특별지원병으로서의 용맹한 출진에 의하여 발견되는 것을 나는 통감하는 바이다.

崔南善, 「나가자 靑年學徒야 : 젊은 피와 情熱을 聖戰에 바치라」, 『每日新報』(1943. 11. 20), 정운현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없어지지않는이야기, 1997), 228쪽에서 재인용

생각해 보면 나치들도 노르웨이에서는 바이킹을, 벨기에에서는 중세 플랑드르 기사들을 팔면서 지원병을 모집했으니 일본군 모집에 고구려 무사를 팔아먹는 것도 나름 그럴싸 합니다?

2011년 9월 17일 토요일

동맹국들의 조병창이 될 수 없었던 독일

2차대전 당시 외교라는 요소는 독일의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는 것 보다는 문제를 많이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당장 첫 번째 동맹국으로 전쟁에 뛰어든 이탈리아 부터가 시작부터 독일의 지원에 기대는 형국이었으니 말입니다. 이탈리아가 가진 전력 중 독일에게 가장 도움이 되었을 해군력 조차 독일의 부족한 석유자원을 소모하는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는 1941년 2월 독일에게 자국 해군이 최소한 25만톤의 연료를 공급받지 못하면 작전을 지속하기가 어렵다고 통보했습니다. 1940년 기준으로 독일이 주로 루마니아에서 수입하던 석유의 양이 150만톤, 독일이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인조석유가 400만톤 정도였으니 이탈리아 해군만 단독으로 25만톤을 요구한다는 것은 상당한 양이었습니다.1)

부족한 전략 물자를 동맹국과 공유해야 하는 것은 매우 골치아픈 문제였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이탈리아를 필두로 한 독일의 동맹국들이 세계 일류급 병기를 제작할 능력을 결여하고 있었다는 점 입니다.(이탈리아 해군은 제외하고) 특히 육군과 공군 장비에 있어서 그런 문제가 두드러 졌지요. 그랬기 때문에 전쟁 초기부터 동맹국들은 독일에 근대적인 장비를 공여해 줄 것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잘 아시다 시피 독일의 공업 생산능력은 자국군대의 수요를 충족하는데도 버거운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동맹국들을 근대적인 장비로 무장시키는데 처음부터 실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쟁 초기의 대표적인 사례라면 이탈리아 공군에 대한 급강하 폭격기 지원을 들 수 있을 것 입니다. 이탈리아 공군도 급강하 폭격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쓸만한 기종을 개발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공군의 기대를 모은 SM.85는 급강하 폭격기로서 실패작이었고 결국 독일의 Ju 87을 도입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됩니다. 이탈리아 공군은 1940년 6월 독일 정부에 50대의 Ju 87을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했습니다. 이에 대해 국방군총사령부OKW는 독일 공군에 우선적으로 공급되어야 할 기종을 수출하는데 반대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그러나 괴링이 수출을 승인함으로써 이탈리아 공군은 Ju 87을 장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독일측은 먼저 7월에 15대, 8월에 15대, 9월에 나머지 분량을 공급하기로 약속했습니다.2) 그러나 이탈리아 공군 제 96 독립 급강하폭격기 중대96º Gruppo Autonomo Bobardieri a Tuffo에 인도된 첫 번째 Ju 87은 공장에서 생산된 신품이 아니라 독일 공군이 사용하던 중고품 이었습니다.3) 인도 자체도 당초 약속 보다 느리게 이루어져 이탈리아 공군의 두 번째 급강하폭격기 부대인 97 급강하폭격기 중대는 11월 11일에 편성되었습니다.4) 외교적인 면에서 보면 괴링의 판단은 크게 나쁜 것이 아니었지만 독일 공군에 주어져야 할 장비가 다른 곳으로 새나가는 것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940년 여름에는 영국본토항공전이 한창이었고 독일공군, 특히 중형폭격기와 급강하폭격기의 손실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독일 공군은 1940년 5월 부터 9월 까지 총 210대의 Ju 87을 잃었는데 이것은 1940년 5월 4일을 기준 으로 한  급강하폭격기 대수의 50%에 달하는 것 이었습니다.5)
독일이 불과 50대의 급강하 폭격기를 지원하는 것 조차 버거워 했던 것에 비해 비슷한 시기 미국은 전시 동원체제에 돌입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별 어려움 없이 수백대의 항공기를 생산해서 해외에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공군은 1940년 5월 1일 기준으로 커티스 호크75 306대를 포함해 440대의 미국제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불과 한 달 뒤에는 이것이 544대에 달하게 됩니다.6)

전쟁이 확대되어 가면서 이탈리아의 원조 요청은 점차 늘어났습니다.  이탈리아는 1940년 11월 20일 독일 국방군총사령부에 3,000대(!)의 트럭을 알바니아에 주둔한 이탈리아군에 원조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7) 그 무렵 바르바로사 작전을 앞두고 프랑스와 영국제 노획차량 까지 긁어모아 배치하고 있던 독일군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이 요구는 말 그대로 벼룩의 간을 빼먹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독일군은 당연히 이 엄청난 요청을 거부합니다. 독일측은 트럭을 원조하지 못하는 대신(그리고 그 당시까지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그리스를 고려하여) 이탈리아군의 수송 지원을 위해 Ju 52를 장비한 제1 특수임무 폭격비행단 3대대III./Kampfgeschwader z.b.V.를 파견합니다. 이 대대는 1940년 12월 10일 부터 1941년 2월 5일 까지 이탈리아군 29,000명과 물자 2,700톤을 알바니아로 수송했고 부상병 7,500명과 그 밖의 병력 2,900명을 알바니아에서 이탈리아로 후송했습니다.8) 물론 이러한 지원이 이탈리아군에게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탈리아군 자체의 능력을 높여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군의 장비가 개선되지 않는 이상 전투력의 향상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것은 이후 북아프리카 전선과 동부전선에서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1940년 프랑스의 패배 이후 독일 진영으로 합류한 루마니아는 이탈리아 보다 더 상황이 안좋은 곳이었습니다. 얼마안가 닥치게 될 바르바로사 작전은 기계화 부대가 중심이 된 대규모 지상전 위주였는데 루마니아는 그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루마니아는 1935년 까지도 1919년에 구입한 르노FT-17을 주력전차로 사용하고 있었고 이것들이 완전히 구식화 되고 제대로 가동도 되지 않게 된 1935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현대적인 전차를 생산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루마니아는 기갑전력의 확충을 위해 체코슬로바키아에 126대의 LT-35 전차와 417대의 CKD AH IV 소형전차Tankette, 프랑스에는 200대의 르노 R-35 전차를 주문했습니다. 이 중에서 루마니아가 주문한 대로 양도된 것은 LT-35 뿐이었고 CKD AH IV소형전차는 35대, 르노 R-35는 40대만이 인도되었을 뿐 입니다.9)
루마니아는 프랑스가 패배한 뒤 독일의 편으로 갈아타면서 독일이 자국의 부실한 기갑전력을 보충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루마니아의 요청에 의해 파견된 루마니아 주재 독일육군사절단Deutsches Heeresmission in Rümanien, 약칭 DHM은 루마니아군에 대한 훈련과 군사원조 요청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루마니아군에 대한 훈련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앞두고 루마니아에 독일군이 대규모로 증파되면서 훈련에 투입할 인력을 비교적 쉽게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루마니아군의 제5, 6, 13, 18, 20 보병사단에 독일식의 소부대 전술 교육을 위한 훈련소가 설치되었고 별도로 독일육군사절단 본부에 의해 독일식의 전쟁대학Kriegsakademie과 유사한 고급장교 교육과정이 설치되었습니다.10) 하지만 장비 지원은 거의 성과가 없었습니다. 루마니아군은 독일의 3호전차와 같은 현대적인 전차를 원했지만 독일군도 전차가 부족한 실정이어서 결국 프랑스와 폴란드에서 노획한 30여대 정도의 R-35전차가 양도되는데 그칩니다. 이탈리아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한 괴링과 달리 육군참모총장 할더Franz Halder는 루마니아 정부의 독일제 전차 수출 요청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11) 히틀러는 대 프랑스전이 종결된 직후인 1940년 7월 9일 월간 전차생산량을 380대로 높일 것을 지시했지만 독일의 공업력으로는 단시일 내에 이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결국 히틀러는 1940년 9월 28일 명령에서 전차생산량 목표치를 하향 조정하게 됩니다. 이에 따르면 1940년 9월 부터 1941년 4월 까지 전차 1,490대, 즉 월간 213대를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12) 이런 상황에서 동맹국에게 까지 최신형 전차를 지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루마니아 공군도 비슷한 실정이었습니다. 독일은 루마니아에 소수의 Bf109와  He111을 판매하긴 했으나 독일제 항공기의 면허생산은 거부했습니다. 현대적인 항공기를 대량으로 보유하지 못하고 간헐적으로 수입한 항공기들로 공군이 구성되었기 때문에 루마니아 공군은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폴란드, 루마니아제 등 잡다한 항공기를 운용해야 했습니다.13)

1941년에는 독일의 동맹군들이 제한적인 작전에만 참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적인 장비의 부족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루마니아군의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 용감히 싸우긴 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고 오데사를 둘러싼 전투에서는 소련군이 자발적으로 철수할 때 까지  도시를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오데사 공격을 담당한 루마니아 제4군은 오데사가 함락 될 때 까지 장교 4,161명을 포함해 11만명에 달하는 인명손실을 입었습니다.14) 특히 루마니아의 유일한 기계화부대인 제1기갑사단은 오데사 전투에서 사실상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LT-35를 장비한 1기갑사단의 1전차연대는 오데사의 요새화된 방어선에 대한 공격에서 글자 그대로 소모되었습니다. 손실을 보충해 줄 수 있는 것은 독일 뿐이었는데 독일의 전차 생산능력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습니다.15)
헝가리가 파병한 부대 중 유일하게 이렇다 할 기갑전력을 갖춘 쾌속군단(1, 2차량화여단과 2기병여단으로 편성)은 루마니아군의 1기갑사단 보다도 전투력이 더 떨어지는 수준이었습니다. 헝가리의 쾌속군단은 이탈리아제 CV35 65대와 스웨덴의 L60 전차를 면허생산한 톨디 전차 95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것들은 루마니아가 보유한 LT-35나 R-35와 마찬가지로 동부전선에 투입하기에는 심각하게 부족한 장비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헝가리 쾌속군단은 루마니아군과 달리 독일군을 따라 우크라이나 깊숙히 진격, 1941년 10월 말에는 이쥼Ізюм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을 따라 진격하면서 우마니Умань 전투 등 일련의 격전을 치러야 했고 이 과정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됩니다. 헝가리 쾌속군단은 1941년 11월 재편성을 위해 전선에서 이탈할 때 까지 전차의 90%를 상실했고 차량 1200여대와 병력 26,000명 중 8,000명을 잃었습니다.16)
 이탈리아가 파견한 소규모 원정군, “이탈리아 러시아 원정군단Corpo di Spedizione Italiano in Russia, 약자 CSIR” 은 1941~1942년 전역을 그런대로 잘 견뎌냈다고 평가받습니다. 이 군단은 북아프리카 전선에 파견한 기갑사단을 제외한다면 이탈리아군에서 가장 잘 장비된 사단들로 편성되었지만 루마니아나 헝가리군과 마찬가지로 소련군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한 전력이었습니다. 이 군단에 배속된 3개 사단 중 차량화사단Divisioni autotrasportabile이었던 파수비오Pasubio사단과 토리노Torino사단은 완전한 차량화 사단이 아니었습니다. 이때문에 군단장 메세Giovanni Messe는 작전 중 종종 두 사단 중 한 사단에 차량을 집중시켜 차량화시키고 나머지 사단은 일반 보병사단으로 운용하기도 했습니다.17) 그리고 쾌속사단Divisione celere이라는 명칭으로 불린 PADA(Principe Amedeo d’Aosta)사단은 2개 기병연대로 편성된 기병사단으로 역시 기계화와는 거리가 먼 부대였습니다. 이탈리아 원정군단은 기동수단으로 5,500대의 차량과 1,550대의 오토바이, 4,600마리의 말/노새를 보유했는데 이러한 장비 내역은 반쪽짜리 기계화의 실체를 보여줍니다. 기갑전력은 PADA사단에 배속된 60대의 L3/33(CV33)이 고작이었습니다.18)

독일의 1942년 전역은 이렇게 누적된 문제가 재앙으로 전이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동맹국들은 1942년 전역에 더욱 더 대규모로 참전합니다. 헝가리와 이탈리아는 원정군의 규모를 1개 야전군으로 증강했고 루마니아군은 1941년과 달리 독일군을 따라 남부 러시아 깊숙히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루마니아, 헝가리, 이탈리아 정부는 독일에게 75mm Pak 40과 같은 일선급 대전차포를 요청했습니다. 또한 루마니아와 헝가리는 1941년 전역에서 크게 소모된 기갑전력을 복구하는데도 독일의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 역시 1941년 전역의 피해를 채 복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세를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맹국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독일은 동부전선의 동맹국들에게 Pak 40 대신 노획한 프랑스제 75mm포를 개조한 Pak 97/38이나 50mm  Pak 38, 37mm Pak 36을 제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가장 강력한 75mm  Pak 97/38은 수량이 충분치 못해 이탈리아 제8군의 경우 1942년 5월 1일 기준으로 54문을 보유하는데 그쳤습니다. 이탈리아군 대전차 전력의 주력은 구식인 47mm 대전차포 297문이었고 이것은 T-34에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여기에 포병연대에서 야포로 사용하는 75mm포(Cannone da 75/32 Modello 37) 201문이 유사시 대전차전을 수행하는 정도였습니다.19) 루마니아군의 사정도 그다지 나을 것은 없어 1942년 전역이 시작될 무렵에는 37mm Pak 36이나 47mm 대전차포가 주력이었습니다.20) 그리고 이탈리아군 보다도 더 늦은 1942년 10월이 되어서야 Pak 97/38이 소량 보급되는데 그쳤습니다.
Pak 97/38은 1942년 11월 소련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을 때 독일의 동맹군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대전차포 였습니다. 루마니아군은 소련군의 동계반격 당시 보병사단 당 6문 정도의 Pak 97/38를 보유하고 있었고 여전히 대부분의 대전차 전력을 37mm나 47mm 대전차포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독일은 대전차 지뢰조차 제대로 보급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더 나빴습니다.21)  루마니아군 기병사단의 경우는 상황이 더 나빠서 5기병사단이 75mm 대전차포 4문을 보유하는데 그쳤고, 루마니아군 8기병사단은 단 한문도 보유하고 있지 못했습니다.22) 이탈리아 제8군도 그다지 나을 것은 없어서 사단 당 4문에서 16문 정도의 Pak 97/38을 보유하는데 그치고 있었습니다.23) 그리고 Pak 97/38 조차도 T-34에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태가 속출하자 루마니아군과 이탈리아군은 급격히 붕되었습니다.24) 독일은 동맹국들에게 겨우 겨우 소량의 75mm 대전차포를 지원했지만 충분한 대전차용 탄약을 공급하지 못했고 이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기갑전력에 있어서도 별로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독일은 1942년 초 부터 루마니아군과 헝가리군에 구식화된 35(t) 전차나 38(t) 전차를 소량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3호전차나 4호전차와 같은 일선급 전차의 지원은 매우 소규모로 이루어졌습니다. 헝가리군은 1942년 하계공세가 시작되기 직전인 1942년 5월 까지 불과 22대의 4호전차만을 지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헝가리는 독일의 지원이 너무 소규모 였기 때문에 독일이 루마니아군에 신형 장비를 우선적으로 지원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만까지 가질 정도였습니다.25) 하지만 전차 지원은 헝가리군이 루마니아군 보다 나았습니다. 루마니아군은 보충용으로 LT-35의 독일판인 35(t) 전차를 지원받다가 1942년 9월이 되어서야 겨우 75mm포 탑재 3호전차와 4호전차(50mm 장포신형 3호전차로 기술한 자료도 있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소련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을 때 루마니아군 제1기갑사단의 주력은 87대의 LT-35, 35(t) 전차였고 3호전차(와 4호전차)는 21대에 불과했습니다.26)

공군에 대한 지원도 그다지 나을것이 없었습니다. 독일이 1942년 초 부터 루마니아 공군에 인도한 항공기는 글자그대로 한줌에 불과한 수준으로 Bf 109 E-7 15대(1월~3월), He 111 H-6 10대(1~3월), Do 17M 10대(4~5월), Ju 52/3m 18대, He 114 10대(4월), Fi 156 14대(4월) 정도였습니다.27)
헝가리의 경우는 경우가 조금 다릅니다. 헝가리 또한 산업기반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1938년 부터 항공산업에 대한 투자를 증대시켰고 1941년 6월 6일에는 독일과 항공기 공동생산을 위한 협약에 조인해 Bf 109, Me 210 그리고 DB 605엔진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헝가리의 항공산업은 독일의 부족한 항공기 생산능력을 보완해 주는 존재였던 것 입니다. 이 협약은 독일이 부품과 기술을 제공하는 대신 헝가리가 생산하는 항공기와 엔진을 일정 비율로 독일공군에 납품하도록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즉 Bf 109는 독일과 헝가리의 비율이 2:1, Me 210은 1:1, DB 605엔진은 2:1였습니다.28) 물론 헝가리의 부족한 산업력으로 현대적인 공군을 단시간 내에 육성하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긴 했습니다만 헝가리의 노동력이 독일의 부족한 산업력을 보완하는데 사용된 셈입니다.

1943년 이후 독일의 군수물자 생산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동맹국에 대한 장비 지원도 다소 증가하게 됩니다. 루마니아는 1943년에 50대의 38(t) 전차외에 4호전차 31대와 돌격포 4대를 인도받았는데 1944년에는 4호전차 100대와  돌격포 114대를 인도받았습니다. 헝가리는 1944년에 4호전차 62대, 돌격포 40대, 헤처 75대, 판터 5대, 티거 3대를 인도받았습니다. 이밖에 다른 동맹국들도 예전 보다는 많은 전차를 지원받았습니다. 핀란드는 1943년 부터 1944년까지 4호전차 15대와 돌격포 59대를 받았고, 불가리아는 1943년에 38(t) 전차 10대와 3호전차 10대, 4호전차 46대, 돌격포 25대를 받았습니다. 슬로바키아는 1943년에 2호전차 16대, 38(t) 전차 37대, 3호전차 7대, 마더II 자주포 18대를 받았습니다.
항공기 지원도 비슷하게 증가해서 독일은1943년 부터 루마니아 공군의 현대화를 위해 Bf 109G, Ju 88, Ju 87, Hs 129등을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1942년과 비교하면 1943년 이후의 항공기 지원은 다소 증가했습니다. Bf 109의 경우 1944년 7월에 60대, 8월에 40대가 루마니아 공군에 인도되었고 9월 이후로는 월간 20~25대를 인도할 예정이었습니다.29) 또한 뒤늦게나마 루마니아의 Bf 109 면허생산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 공군의 지속적인 손실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 구식화된 He 111이나 Ju 86도 함께 지원되는 등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헝가리의 경우 1942년 부터 1944년까지 Me 210 270(272)대와 Bf 109 471(488)대를 생산했습니다.30) 하지만 루마니아는 비슷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하게 동원하지 못했습니다. 루마니아는 1943년에 Fi 156 3대, 1944년에 Fi 156 7대와 Bf 109 6대를 생산하는데 그쳤습니다.31)

독일의 지원은 꾸준히 증가했지만 미국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입니다. 미국은 1942년 이후 동맹국들이 여러개의 기갑사단을 편성해서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장비를 원조했습니다. 독일이 동맹국들에게 수십대의 전차를 인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1942년만 하더라도 미국은 수백대의 전차를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에게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항공기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독일이 불과 수십대의 Ju 87을 인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1940년만 하더라도 미국은 수백대의 항공기를 외국 군대에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차량을 예로 들면 그 차이가 더 잘 드러납니다. 미국은 동맹국들에게 수십만대의 차량을 지원했습니다. 반면 독일은 자국의 차량 수요도 채울 수 없었으며 독일의 동맹국들은 그보다 더 심각한 기동력 부족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미국이 자국의 최신 장비들을 대량으로 공여할 수 있었던 반면 독일은 그럴 수가 없어 노획장비나 구식화된 장비들을 소규모로 제공하는데 그쳤습니다.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의 조병창”이었던 반면 독일은 동맹국들의 자원까지 쥐어짜야 하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얼마 되지 않는 동맹국들의 산업력조차 적절하게 동원하지 못했습니다.



1) Adam Tooze, The Wages of Destruction : The Making and Breaking of the Nazi Economy, (Viking Penguin, 2007),  p.411
2) Hans Werner Neulen, Am Himmel Europas : Luftstreitkräfte an deutscher Seite 1939~1945, (Universitas Verlag, 1998),  pp.37~38
3) John Weal, Junkers Ju 87 Stukageschwader of North Africa and the Mediterranean, (Osprey Publishing, 1998), p.16
4) Richard L. DiNardo, Germany and the Axis Powers : From Coalition to Collaps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p.44
5) Williamson Murray, The Luftwaffe 1933~45 : Strategy for Defeat, (Brassey’s, 1996), p.45
6) Karl-Heinz Frieser, Blitzkrieg-Legende : Der Westfeldzug 1940, (Oldenbourg Verlag, 1995), p.55
7) Richard L. DiNardo, ibid., p.77
8) Karl-Heinz Golla, Der Fall Griechenlands 1941, (Mittler&Sohn, 2007), p.65
9) Alexander Statiev, “The Ugly Duckling of the Armed Forces : Romanian Armour 1919~41”,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12, No.2(1999. 6), pp.220~224
10) Richard L. DiNardo, ibid., p.99
11) Alexander Statiev, ibid., p.225
12) Hartmut Schustereit, Vabanque : Hitlers Angriff auf die Sowjetunion 1941 als Versuch, durch den Sieg im Osten den Westen zu bezwingen, (Mittler&Sohn, 1988), pp.21~22
13) Richard L. DiNardo, ibid., p.98, 111
14) Peter Gosztony, Hitlers Fremde Heere : Das Schicksal der nichtdeutschen Armeen im Ostfeldzug, (Econ Verlag, 1976), p.152
15) Alexander Statiev, ibid., pp.237~239
16) Peter Gosztony, ibid., pp.154~156, 161
17) Richard L. DiNardo, ibid., p.128
18) Gerhard Schreiber, “Italiens Teilnahme am Krieg gegen die Sowjetunion : Motive, Fakten und Folgen”, Jürgen Förster(hrsg), Stalingrad : EreignisㆍWirkungㆍSymbol, (Piper, 1992), p.259; Thomas Schlemmer, Die Italiener an der Ostfront 1942/43 : Dokumente zu Mussolinis Krieg gegen die Sowjetunion, (Oldenbourg Verlag, 2005), pp.14~15
19) Thomas Schlemmer, ibid., p.29; Richard L. DiNardo, ibid., p.141
20) Richard L. DiNardo, ibid., p.141
21) Manfred Kehrig, Stalingrad : Analyse und Dokumentation einer Schlacht, (Deutsche Verlags-Anstalt, 1974), p.66; Richard L. DiNardo, ibid., p.150
22) Manfred Kehrig, ibid., p.667
23) Peter Gosztony, ibid., pp.501~507
24) Richard L. DiNardo, ibid., p.154
25) Richard L. DiNardo, ibid., pp.140~141
26) Manfred Kehrig, ibid., p.668
27) Hans Werner Neulen,  ibid., p.103
28) Miklos Szabo, “The Development of the Hungarian Aircraft Industry, 1938~1944”,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Vol.65(2001. 1), p.64
29) Hans Werner Neulen,  ibid., p.108, 114
30) Hans Werner Neulen,  ibid., p.329; 괄호 안의 수치는 Miklos Szabo, ibid., p.76
31)  Hans Werner Neulen,  ibid., p.328

2011년 9월 9일 금요일

America's Coming Retrenchment

개인적으로 재미있어서 번역을 해볼까 하는 글이 몇 편 있었는데 어영부영 하다가 시간이 확 지나갔군요. 오늘 소개할 글은 한달전인 8월9 일 Foreign Affairs 인터넷 판에 실린 마이클 만델바움Michael Mandelbaum 교수의 “America's Coming Retrenchment : How Budget Cuts Will Limit the United States’ Global Role”이란 글 입니다. 이미 한달이나 지난 글이긴 한데 저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신 분 중에서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아 늦게나마 번역해서 올립니다.

다가오는 미국의 긴축 : 예산 삭감이 미국의 국제적인 역할을 어떻게 제약할 것인가
-마이클 만델바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8월 2일에 서명한, 연방예산 적자를 줄이는 동시에 미국의 부채 한도를 상향한 법안을 이끌어낸 치열한 협상은 적자를 통제하려는 전투의 전초전에 불과하다. 이 전투는 시간을 질질 끌게 될 것이며, 어렵고, 그리고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이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될 것 중 하나는 이미 수년전 부터 줄어들기 시작한 대외 정책 및 안보정책과 관련된 예산들이다. 이것은 미국의 힘을 세계 전역에 투사하는데 새로운 제약을 부과하게 될 것이다.  

일 년만에 얼마만큼이나 변화가 일어난 것인가. 바로 지난해의 포린 어페어즈 5/6월호에 나는 책 세 권에 대한 서평을 실었는데 이 세 권의 책들은 공통적으로 미국이 그 한계를 넘어 지나치게 멀리 나갔다는 주제를 담고 있었다. 세 명의 저자들은 미국의 이익과 다른 국가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미국이 보다 신중한 대외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제안했다. 내가 그 서평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측한 것 처럼 미국의 재정 상태는 그러한 제안을 어쩔 수 없이 이행할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 책들의 저자들이 가진 공통적인 생각처럼) 더 좋든 혹은 (내 자신의 견해 처럼) 더 나쁘건 간에.

8월 2일의 법안은 향후 10년간 1조 달러의 예산 삭감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 중 3500억 달러가 국방 예산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법안은 그 다음 10년간 1조5천억 달러의 삭감을 요구하고 있다. 만약 의회 특별 위원회가 이러한 삭감 목표치에 대해 합의를 보지 못한다면 자동적으로 일괄적인 예산 감축이 강요될 것이며 이렇게 된다면 국방부의 예산은 6천억 달러 수준으로 낮아질 것이다.

설사 자동적인 예산 감축을 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국방 예산과 그 밖에 미국의 다른 대외 정책과 관련된 예산들은 다음 10여년간 감소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재정을 굳건한 기반위에 올려놓기 위해 필요한 적자 감축의 규모는 엄청나기 때문에 민주당 측에서 사회의 안보와 의료보험은 손대길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들도 감축하게 될 것이며 공화당 측에서 증세를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형태로든 증세가 이루어 지게 될 것이다. 만약 미국인들이 정부에 더 많은 돈을 내면서도 받는 것은 더 적어진다면 지난 수십년간 그랬던 것 처럼 미국이 국제 사회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지지하는데 관대함을 보이지는 못할 것이다.

국방예산이 감축되는 데에는 이유가 두 가지 더 있다. 첫 번째는 냉전 기간과 9/11 테러 이후 미국이 느꼈던 외부의 위협에 대한 인식이 감소했다는 점이다. 국방 지출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지지는 그들이 위협을 얼마나 느끼느냐에 좌우된다. 최소한 얼마동안은 세계가 특별히 위협을 받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연방 예산을 둘러싼 정치가 국방부에 유리하지 않다는 점이다. 국방부는 공화당과 민주당 어느 쪽에도 의지할 수 없으며 연방 예산에서 자신들의 몫을 지켜낼 수도 없는 상태이다. 민주당 내에서 외교와 안보 정책에 높은 우선순위를 둔 세력은 없다. 공화당 측에는 국가 안보정책에 있어 대규모 군사력과 강경한 대외정책에 헌신하는 매파에 속하는 인물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공화당 내에는 두개의 다른 집단이 있다. 사회 보수주의자Social conservatives들은 외교안보문제에 있어 무관심하며 작은 정부와 낮은 세금을 지지한다. 이제 티 파티 운동의 입장을 표명하는 공화당에서 가장 영향령 있는 집단은 그들의 주요 목적을 위하여 국방 예산을 희생시킬 의사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앞으로는 국제적으로 과거에 해왔던 것 보다는 훨씬 적은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대외 정책에서 어떤 부분이 중단 될 것이며 또 중단 해야 할 것인가? 내가 2010년에 낸 책, The Frugal Superpower에서 논했던 것 처럼 21세기의 외교 정책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며, 또한 미국이 가장 쉽게 그만 둘 수 있는 일은 냉전 이후의 첫 20년 동안 소말리아, 아이티, 보스니아,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라크에서 해왔던 것과 같은 군사 개입이다. 이러한 작전들은 각자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모두 다 원치 않는, 장기적이고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국가 건설이라는 심각한 과업을 미국에게 안겨 주었다. 이것들은 정부 체제가 붕괴한 곳에 그것을 재건해 주거나 그러한 것이 아예 존재 하지 않는 곳에 정부 체제를 세워주는 일이었다. 국가 건설이라는 정책은 세 가지의 큰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는 이러한 정책이 자신을 방어하는 데는 기꺼이 대가를 치르려 하지만 다른 이들을 통치하거나 다른 이들이 스스로를 통치하도록 도와주는데는 관심이 없는 미국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미국은 물론 다른 어떤 나라들도 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유능하고, 또한  민주적인 기구를 신속하고 경제적으로 건설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이러한 정책은 잘 봐줘야 보잘 것 없는 성과를 거뒀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냉전 이후 미국이 성공을 거둔 국가 건설이 미국의 안위나 안보에는 기여를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미군이 철군하고 난 뒤 아프가니스탄이 미군이 오기 이전 보다 훨씬 더 평화롭고 번영하게 된다면 이것은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에게 엄청난 이익이 될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렇게 된다 하더라도 미국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국가 건설이란 대외 정책을 보다 경제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미국의 대외정책 목록에서 제1순위로 퇴출되어야 할 대상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추진되고 있던 군사개입과 국가 건설이라는 문제를 이어받았고 이것들을 단계적으로 축소해 나갔다. 비록 미국이 2011년 3월에는 리비아에서 비슷한 군사개입을 하기는 했지만 미국의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고 나토의 역할을 강조한 작전 수행 방식은 미국이 개입에 따른 비용을 최소화 하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국가 건설에 개입하는 것을 그만둔다 해도 미국에게는 국제적으로 주된 역할이 남아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은 중요한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미국은 다른 국가들에게 그 국가가 그들의 사회에 제공해야 하는 서비스를, 비록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상당한 규모로 제공하고 있다. 즉 미국은 실질적인 세계 정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The United States functions, that is, as the world’s de facto government.

미국은 세계의 기축 통화, 달러를 제공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풍요롭고 개방된 시장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해군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의 무역로를 지키고 있다. 바로 대서양과 태평양이다. 미국의 군사력은 세계 경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페르시아만의 석유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동아시아와 유럽에 주둔한 미국의 군사력은 비록 공식적인 적대관계에 있지는 않지만 서로간에 신뢰하지 못하는 이 지역의 국가들에게 평화를 위협하는 모든 심각한 위협을 미국이 나서서 직접 해결해 줄 것임을 보증하고 있다.

미국의 국방예산은 대부분 이렇게 이익이 되는 임무를 지원하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국가가 국방 예산을 적게 쓴다면 국가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코앞에 닥친 경제적 제약의 시기에 세계 정부로서의 미국의 역할에 어떤 위협이 닥칠지는 그와 관련된 예산이 얼마나 많이 감축될 것인가에 달려있다. 즉 그것은 미국의 정치 체제가 특히 복지 비용을 통제하거나 세금을 인상하는 것과 같은 방식을 통해 재원을 조달하여 어느 정도 재정 적자를 감축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미국의 대외정책은 전 세계에 있어 너무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미국 정부의 불가피한 예산 감축이 미국을 넘어서 반향을 일으킬 것은 확실하다.

저는 이 글이 평소 제가 생각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필자는 미국이 세계적인 강대국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국력을 아껴야 할 시점이 다가왔고 역량을 집중해야 할 지역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그 지역으로는 유럽과 동아시아를 꼽고 있지요. 또한 미국의 군사력은 이익이 되는 임무beneficial missions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난번에 블로그에 썼던 「제국의 유지비용」에서 이야기 한 것 처럼 군사력을 유지하는데 한계를 느끼게 되면 결국 이런 과정에 도달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익이 되는 범주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꽤 골치아픈 상황에 처하게 되겠지요.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미국의 대외 정책 입안가들이 이 글에 나타난 기조를 따르게 된다면 최소한 동아시아에서는 안보적으로 평온한 시기가 좀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그건 제가 바라는 바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