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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12일 토요일

스탈린의 10월 혁명 24주년 기념연설

1941년 11월 7일,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향해 대 공세를 시작한 직후 스탈린은 10월 혁명 24주년을 기념하는 열병식을 한 뒤 꽤 유명한 연설을 합니다. 이 연설문은 꽤 유명해서 인터넷에서도 영어로 번역된 내용을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지난 포스팅, '스탈린의 7월 3일 라디오 연설'과 마찬가지로 『쏘련의 위대한 조국전쟁에 대하여』(1947)라는 스탈린 연설문집에 실린 ‘조선어’ 번역문을 약간 고쳐서 인용하려 합니다.

붉은육군과 붉은해군 동무들, 지휘관, 정치일꾼, 남녀노동자, 남녀콜호즈원, 지식노동자, 우리 원수의 후방에 독일 강도집단에게 일시적으로 점령된 형제자매, 독일 강점집단의 후방을 파괴하는 우리의 영광스러운 남녀 빨치산(원문에는 무려 “의병”으로 되어 있습니다)들이여!
나는 소비에트 정부와 우리 볼셰비키당의 이름으로 위대한 사회주의 시월혁명 제 24주년을 맞아 여려분께 경하와 축수(祝壽)를 드립니다.

동무들! 오늘은 고통스러운 상황아래서 시월혁명 24주년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독일 강도집단의 배신적 침범이 우리에게 강요한 전쟁은 우리나라에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시적이지만 수많은 주를 잃어 버렸으며 원수들은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의 문 앞에 다다랐습니다. 원수들은 첫 타격 이후 우리 군대가 혼비백산하고 우리가 굴복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원수들은 크게 오산했습니다. 우리 육군과 해군은 일시적으로 실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 전선에 걸쳐 적군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적군에게 과중한 손실을 끼치었고 우리나라는 거국일치로 우리 육군과 우리 해군과 함께 독일 침략자들을 격멸하기 위해 단일한 전투 진영에 결속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보다 더 위태한 처지에 있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10월 혁명 1주년을 기념하던 1918년을 기억해 봅시다. 그 당시에 우리 강산의 4분의 3이 외국 군대 간섭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 카프카즈, 중앙아시아, 우랄, 시베리아, 극동을 일시 상실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동맹이 없었으며 우리에게는 붉은군대가 없었으며 단지 군대를 갓 만들기 시작했을 뿐이었고 식량이 부족하였고 무기가 부족하였으며 의복이 부족했습니다. 그때 14개국이 우리나라를 침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심하지 아니하였고 절망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때 전쟁의 불길 속에서 우리가 붉은군대를 또 우리나라를 거대한 군사기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때에 위대한 레닌의 기개가 우리를 군사 간섭자를 반대하는 진영으로 나서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군사 간섭자들을 때려 부수고 모든 잃어버린 강토를 찾았으며 승리를 이룩했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의 정세가 23년 전 보다 한껏 나아졌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23년 전과 비교하면 몇 배나 공업이나 식량이나 원료로나 할 것 없이 다 풍족합니다. 우리에게는 독일 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우리와 함께 단일한 전선을 이루고 있는 동맹국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히틀러의 폭정하에 들어있는 유럽의 모든 인민들의 동정과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조국의 자유독립을 사수하고 있는 훌륭한 육군과 해군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식량에 있어서나 무장에 있어서나 의복에 있어서나 다 심각한 부족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전체, 우리나라의 모든 인민이 우리 육군, 우리 해군을 받들면서 그들로 하여금 독일 파쇼 침략자들을 때려부수도록 돕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적 자원은 무궁무진합니다. 위대한 레닌의 기개와 그 승리의 기치가 23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를 조국을 위한 전쟁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원수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 몇몇 소인배들이 멋대로 상상하는 것 처럼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악마가 스스로를 묘사하는 것 처럼 그렇게 두렵지 않습니다. 붉은군대가 광대짓을 하는 독일군대를 여러 번 도망치게 했다는 사실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습니까? 독일 선동가들의 과장된 헛소리로 판단하지 말고 독일의 실제 정세로 판단하면 독일 파쇼 침략자들이 재앙에 직면했음을 이해하는건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 독일에는 기아와 궁핍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4개월에 걸친 전쟁에서 독일은 군인 4백 50만명을 잃었고 독일은 피를 흘려가며 그 인적 자원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분노의 심정은 비단 독일 침략자의 지배에 처해 있는 유럽 인민들 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끝을 보지 못하는 독일 인민들도 느끼고 있습니다. 독일이 장기간에 걸쳐 이런 상태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몇 달후, 반년이나 설혹 일년 정도가 지나면 히틀러의 독일은 그 범죄의 무게에 눌려 반드시 붕괴될 것 입니다.

붉은육군과 붉은해군 동무들, 지휘관과 정치일꾼, 남녀 빨치산들! 전 세계에서 독일 침략자의 약탈군을 쓸어버릴 역량인 여러분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독일 침략자의 지배하에 있는 유럽의 피 예속민족들이 여러분을 그들의 해방자로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위대한 해방적 사명이 여러분의 어깨에 달려 있습니다. 이 사명을 맡은 사람으로서 그 역할을 다 하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수행하는 전쟁은 해방 전쟁이며 정의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우리의 위대한 조상 – 알렉산더 네프스키, 드미트리 돈스코이, 쿠시마 미닌, 드미트리 포잘스키, 알렉산더 수보로프, 미하일 쿠투초프의 영용스러운 모습이 여러분을 떨쳐 나서게 하기를! 위대한 레닌의 승리의 깃발이 여러분을 이끌기를!

독일 강도 무리를 철저히 격파하기 위하여!

독일 침략자들을 진멸하라!

우리의 영광스러운 조국, 조국의 자유, 조국의 독립만세!

레닌의 깃발아래서 승리를 향해 앞으로!

스탈린,『쏘련의 위대한 조국전쟁에 대하여』, 1947, 43-46쪽

덤으로, 유투브에서 영어자막이 달린 당시 스탈린의 연설 모습과 모스크바 열병식 장면을 빌려왔습니다. 유튜브 만세!


2007년 8월 12일 일요일

렌드-리스(Lend-Lease)가 소련의 교통-운수 체계에서 차지하는 역할

참으로 오래된 퀴퀴하고 눅눅하고 식상하기 짝이 없는 낡은 떡밥입니다. 읽으시는 분들의 양해를 구하는 바 입니다.

독소전쟁에서 소련의 역할이 어느정도 였는가 하는 해묵은 떡밥은 여전히 인터넷에서 인기있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가 나오면 대개 소빠(?)와 소까(?)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전개되는데 소까(?)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렌드-리스(Lend-Lease)의 역할이 과소 평가된다고 이야기 하지요. 그렇다면 렌드-리스는 실제로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을까요?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에는 소련 체제를 혐오하고 친서방적인 경향을 보이는 연구자들이 등장했습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보리스 소콜로프(Борис Соколов)도 그런 경향의 사람인데 이 양반이 썼던 렌드-리스에 대한 글 중 하나가 1994년에 Lend-Lease in Soviet Military Effort, 1941~1945 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에 실렸습니다. 여기에는 렌드-리스로 받은 품목에 대한 통계가 잘 정리되어 있어서 매우 활용하기가 편리합니다. 저자가 소련 혐오자이기는 하지만 통계 자체는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군요. 여기에 차량 지원에 초점을 맞춘 그리바노프(Станислав Грибанов)와 던(Walter S. Dunn)의 글도 약간 덧붙이려고 합니다.

렌드-리스 품목은 매우 종류가 방대하니 여기서는 간단히 교통-수송과 관련된 부분만 짤막하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1. 연료

1-1. 항공연료

소련은 1941년 전쟁 발발 당시까지 Б-78 항공유 소요량의 4%만 재고로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소련의 정유산업이 매우 수준이 뒤떨어져 있어서 항공유 생산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독일 공군이 노획한 소련군의 항공유가 너무 저질이어서 난방용 기름으로나 써야 한다고 평가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1940년부터 1941년까지 소련이 생산한 항공유의 양은 다음과 같습니다.(단위 미터톤)

1940년 : 889,000톤
1941년 : 1,269,000톤
1942년 : 912,000톤
1943년 : 1,007,000톤
1944년 : 1,334,000톤
1945년 : 1,017,000톤

렌드-리스로 지원된 항공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 : 628,000톤
영국 : 14,700톤
캐나다 : 573,000톤

여기에 렌드-리스로 light fraction gasoline(이 용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하나요?)도 지원됐습니다. light fraction gasoline은 거의 대부분 소련이 항공유를 제조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미국 : 732,300톤
영국 : 902,100톤

소콜로프는 항공유 제조에 사용된 light fraction gasoline을 포함하면 렌드-리스로 원조된 항공유는 1941~1945년 기간 동안 소련이 사용한 항공유의 51.5%에 상당하는 양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2. 차량용 연료

소련이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생산한 차량용 연료는 10,923,000톤이고 렌드-리스로 원조된 차량용 연료는 242,300톤입니다.

2. 운송수단

2-1. 차량

제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렌드-리스에서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미국제 트럭이 아닐까 합니다. 미국의 차량 지원이 없었다면 소련이 1944~45년 전역에서 독일군을 결코 기동력으로 압도할 수 없었을 것 입니다.

소련의 차량 생산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940년 : 145,390대
1941년 : 124,176대(이 중 1941년 7~12월의 생산량은 46,100대)
1942년 : 34,976대
1943년 : 49,266대
1944년 : 60,549대
1945년 : 74,657대

즉 전쟁 기간 중에 소련이 생산한 차량은 265,548대입니다. 그리고 미국이 렌드-리스로 지원한 차량은 409,500대로 압도적입니다. 특히 이 중 상당수가 1943~44년의 결정적인 시기에 지원되었다는 점은 미국의 차량 지원이 없었을 경우 소련 육군이 1944년의 대규모 기동전을 펼치기 어려웠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던은 미국의 차량 원조로 인해 소련군이 대규모 기동전에서 보급 지원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일반적인 마차 수송의 경우 하루 최대 30km가 한계고 운송량도 제한적이지만 트럭의 경우 일반적으로 하루 100km 정도의 거리를 충분히 담당할 수 있다는 점 입니다. 특히 포장도로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미제 트럭이 부여한 기동력은 엄청난 것 이었습니다.


1942~1943년 소련의 차량 생산량이 격감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소련은 막대한 전차의 소모를 보충하기 위해서 차량 생산을 희생하면서 까지 전차 생산에 역량을 집중시켰습니다. 미국의 차량 지원이 없었다면 소련의 전차 생산은 격감했을 것 입니다.

여기에 미국이 원조한 견인용 트랙터 8,701대와 오토바이 35,170대도 기동수단으로 포함되어야 할 것 입니다.

또한 미국은 소련 원조를 위해서 이란에 세 곳의 차량 조립공장을 세웠는데 이것도 꽤 대단한 투자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바노프에 따르면 이 세 곳의 조립공장에서 생산되어 소련에 원조된 차량은 184,112대에 달합니다.

렌드-리스 중 자동차에 대한 부분은 그리바노프의 글이 꽤 자세하고 통계가 잘 정리되어 있는데 이것은 기회가 되면 따로 소개를 할까 합니다.

2-2. 철도

철도 부문에 있어서도 렌드-리스는 결정적 입니다.

소련의 철도용 레일 생산은 다음과 같았습니다.(단위 미터톤)

1940년 : 1,360,000톤
1941년 : 874,000톤
1942년 : 112,000톤
1943년 : 115,000톤
1944년 : 129,000톤
1945년 : 308,000톤

미국과 영국이 렌드-리스로 원조한 철도용 레일은 총 685,700 미국톤(short ton)으로 미터톤으로 환산하면 622,100톤이 됩니다. 이것은 소련이 전쟁 기간 중 생산한 철도용 레일의 거의 60%에 육박하는 막대한 양 입니다. 게다가 소련이 생산한 철도 레일의 많은 수는 협궤용 레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이 원조한 양은 소련의 생산량의 80%를 가뿐히 능가합니다.

기관차에 있어서는 더욱 더 압도적입니다.

소련의 기관차 생산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소형 기관차 제외)

1940년 : 914대 + 디젤 5대
1941년 : 706대 + 디젤 1대
1942년 : 9대
1943년 : 43대
1944년 : 32대
1945년 : 8대

전쟁 기간 중 렌드-리스로 원조된 기관차는 증기 기관차 1,900대, 디젤 기관차 66대로 소련이 1941~1945년 기간에 생산한 기관차의 2.5배를 넘으며 특히 전쟁이 벌어진 이후 소련이 생산한 양과 비교하면 압도적 입니다.
철도 화차와 비교하면 더욱 더 결정적입니다. 소련이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생산한 철도 화차는 총 1,087대인데 같은 기간 렌드-리스로 원조된 화차는 무려 11,075대에 달하고 있습니다.

즉 미국의 원조가 없었다면 소련의 철도 교통은 전쟁 기간 중 파탄이 났을 것이며 후방 지원은 거의 불가능 했을 것 입니다.

교통수단과 관련해서 결론을 내리자면 렌드-리스의 역할은 너무나 결정적이었으며 렌드-리스가 없었다면 소련의 교통-운수 체계가 조기에 파탄나거나(1916~17년의 러시아처럼) 또 전차와 야포 같은 전투용 장비의 생산을 크게 감소시켰을 것 입니다.

2007년 6월 29일 금요일

붉은군대는 추수전투에도 강하다!

오늘의 이야기는 대인배의 본산지 노서아 천지에 "소잡는 소리와 돼지 멱따는 소리가 진동하던 때"의 이야기랍니다.

1930년, 대기근으로 인해 일선부대에 대한 배급량이 30% 감축되자 혁명군사평의회(RVS, Революционными Военный Совет)는 각 부대들에게 식량을 보충할 보조농장(подсобное Хозяиство, 직역하면 보조생산시설이지만 대부분 농장이므로 보조농장으로 옮겼음)을 만들도록 했다. 이때부터 붉은군대에 있어 “자급자족”은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됐다. 그렇지만 부대농장은 1930년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제정러시아 시기에도 육군은 예산 부족 때문에 부대 농장을 운영해야 했다. 산업계도 마찬가지였다. 각 공장들은 공장 농장을 만들어 공장노동자들이 농사를 지었다.
붉은군대는 사병들의 급식과 장교들의 부식을 충당하는데 있어서 부대농장을 군협동조합 (이하 ZVK, Закрытый Военный Кооперативный)과 경쟁하는 체제로 만들려고 했다. 장교들은 식료품을 자신의 급여를 가지고 부대농장에서 구매하도록 하자는 것 이었다. 연대 보급장교는 사병 식당용 식재료를 부대 농장이나 ZVK에서 구매하게 됐는데 이렇게 해서 부대농장은 ZVK와 직접 경쟁하는 관계가 돼 버렸다. 그러나 부대농장의 운영 책임자는 종종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부대농장에서 경작한 농산물을 해당 부대에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시장에 판매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부 부대들은 혁명군사평의회의 지시가 내려오기도 전에 부대농장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부대농장 설치 명령이 내려오자 농장이 없는 부대들도 재빨리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1932년에 한 연대는 이미 200마리의 돼지와 60마리의 소, 토끼 100마리와 벌통 40개를 가지고 있었다. 혁명군사평의회는 1개 사단 당 소 400마리, 돼지 3,200마리, 토끼 20,000마리, 그리고 1,000헥타르의 농지(귀리, 밀, 또는 과일)를 운영하도록 방침을 정했다.
대부분의 부대 농장은 병사들이 농사를 지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일부 연대는 민간인을 고용해 농사를 짓고 농장에서 재배한 작물이나 우유를 팔아 얻은 수입으로 임금을 지급했다. 한 포병대대에서는 부대가 하계 훈련을 위해 주둔지를 떠나면 장교의 부인들이 농사를 지었다. 또 다른 연대에서는 아예 장교의 부인들이 봄 파종기에 밭을 갈았다. 어떤 경우에는 제대한 병사들이 자신들이 원래 근무하던 연대의 농장에 고용돼 농사를 지었다.
많은 경우 연대 농장은 매우 효율성이 높았으며 ZVK의 수입을 줄이는데 일조했다. 제 87소총병연대의 농장은 1kg의 감자를 5코페이카에 팔았는데 해당 지역의 ZVK의 감자가격은 1kg에 10코페이카였다. 일부 농장들의 성과는 엄청났다. 예를 들어 한 연대는 농장을 처음 만들 때 3,500루블을 투자했는데 그 해 연말에는 20만루블에 해당하는 농작물을 생산했다. 니콜라이 보로노프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복무한 포병연대는 1932년에 버려진 국영농장 하나를 인수했는데 운영이 매우 잘 돼서 연대 소속 장교와 병사들에게 우유를 시장 가격보다 더 싼 1리터당 30코페이카에 팔 수 있었다고 한다. 1930년대에 소련은 너무 가난해 병사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충분히 공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대농장 외에도 ZVK가 존재했던 것은 다행이었다. 모든 부대농장이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제때에 추수를 하지 못 하거나 아니면 농사에 시간을 많이 들이지 못 해서 농사를 망치기는 일이 많았다.
1932~33년의 대기근 기간에 식량은 군사훈련 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였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훈련 대신 농사를 짓는데 쓰였는지는 불확실하다. 제87소총병연대의 부연대장은 연대농장의 책임자였는데 이 사람의 경우는 매우 재미있는 사례이다. 이 장교는 부대농장 운영에 열성적이어서 연대 농장에 있는 소 38마리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부대농장과 ZVK 체제는 특히 대기근 동안에 붉은군대는 그 자체를 먹여살리는데 집중해야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군 보급체계나 ZVK 체제 모두 부대가 요구하는 최저한도의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대농장은 엄청난 공헌을 했다. 부대농장은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많은 부대들은 붉은군대가 확장기에 들어가 훈련이 가장 중요해 진 1930년대 후반에서 40년대까지도 훈련보다는 농사에 시간을 더 배분했다. 결국 부대농장은 소련군에 있어 일반적인 부대 활동으로서 제도적으로 자리잡게 됐고 최근까지도 유지되었다.

Roger R. Reese, Stalin’s Reluctant Soldiers : A social history of the Red Army, 1925~1941,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6, pp.49~51

붉은군대는 추수전투에도 강합니다!

2007년 4월 26일 목요일

소련의 대독 선제공격론에 대한 반론 : 1941년 5월 계획안을 중심으로

오늘도 역시 불법 날림 번역글 입니다.

마지막으로, 스탈린과 소련 고위 장성들이 남부 지구에 병력을 집중 시킨 이유가 독일을 선제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즉 남부 폴란드의 평원은 동 프로이센의 강과 호수, 습지와 숲으로 둘러쌓인 지형 보다 공세 작전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소련이 독일을 선제공격하려 했다는 이론의 주요 근거는 1941년 5월에 작성된 전쟁 계획안이다. 러시아에 많은 논쟁을 불러온 이 문서가 어느 정도의 자료적 가치가 있는지는 평가하기 어렵다. 이것은 당시 작전국 부국장으로 있던 바실렙프스키가 필기로 작성한 문서이며 주코프와 티모센코의 서명란이 있기는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서명은 없다. 그리고 스탈린이 이 문서를 검토했거나 여기에 대해 언급했는가도 확실치 않다.
1941년 5월에 작성된 이 문서는 이전의 전쟁 계획들과 비교하면 개괄적이며 대략적인 개요정도에 불과하다. 로버츠(Cynthia A. Roberts)는 1941년 5월 계획안은 “실제 계획안이라기 보다는 구상 초기단계의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독일과 그 동맹국(핀란드, 헝가리, 루마니아)는 총 240개 사단을 투입하고 이중 주력인 독일군 100개 사단은 코벨, 로브노, 키예프 축선에 집중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리고 독일군은 동원 단계에 있으며 아마도 “아군 보다 먼저 배치를 완료해 언제든지 기습을 감행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독일군의 기습을 방지하고 (또 독일군의 전력을 분쇄하기 위해서) 어떤 상황에서든 독일군에게 주도권을 줘서는 안되며 그러기 위해서는 독일 보다 먼저 동원을 완료한 뒤 독일군이 아직 병력 전개를 완료하지 못하고 각 집단군 및 병종간 협동이 원활하지 못한 상태일 때 선제 공격을 실시해야 한다. 붉은군대의 주요 전략 목표는 데블린 남쪽에 전개한 적 주력을 섬멸하는 것이다. (중략) 주력인 남서전선군은 크라쿠프-카토비체 지구의 독일군을 공격해 독일군을 남부의 동맹군과 절단시킨다. 그리고 서부전선군 좌익은 조공으로 세들레츠-데블린 방면으로 공격, 바르샤바 지구의 적을 포위해 남서전선군이 루블린 지구에 전개한 독일군을 섬멸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핀란드, 동 프로이센, 헝가리, 루마니아 지구에서는 능동방어를 실시하고 우세한 환경이 조성되면 루마니아에 대한 공세로 전환할 준비를 갖춘다.]

이 문서는 마지막으로 스탈린이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해 사전에 준비된 계획에 따라 병력 배치를 실시하고 총 사령부 직할 예비전선군들의 동원을 비밀리에 실시하도록 허가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이전에 작성된 전쟁 계획안의 연장선 상에서 1941년 5월 문서를 읽는다면 그다지 놀랄 만한 내용은 아니다. 붉은 군대가 남부 지구에 전개할 독일군 주공을 타격해야 한다는 내용은 기존 계획안의 연장선 상에서 자연히 도출될 수 밖에 없는 결론이었다. 이 문서에서 주장하고 있듯 전개 완료 단계에 있는 독일군에 대해 선제 공격을 실시하자는 주장은 1941년 초 독일군의 대규모 이동이 감지되어 전쟁을 결코 피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 진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폴란드 남부에 대한 선제 공격의 형태로 (적의 공격에 대한) 반격을 실시하자는 것은 기존의 계획안들과 같은 것 이었고 예비 야전군의 비밀 동원역시 기존에 실시하고 있던 병력 증강의 연장선에 있는 것 이었으며 비밀 동원은 이미 진행 중이었다.

이 문서의 문제는 두 가지이다. 가장 먼저 이 문서에는 선제 공격 시점이 모호하게 표시되어 있다. 독일군의 주력을 격파하는 것이 목표라면 가장 좋은 공격 시점은 독일군이 동원과 전개를 완료하지 못하고 집중과 부대간 조율이 원활하지 못한 때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두 번째 문제는 스탈린은 독일이 침공하면 소련이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이 없다고 믿고 있어 여전히 평화적인 방법에 의한 문제 해결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계획은 실천될 가능성이 없다는 점 이었다. 그리고 당시 소련 군부내에서 선제 공격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근거도 없다. 1941년 6월 22일 전쟁이 개시된 뒤 다시 전쟁이 종결되고 또 스탈린이 숨을 거둔 이후에야 소련의 고위 군장성들은 방어 준비에 좀더 심혈을 기울여 독일의 기습에 대응할 준비를 갖춰야 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Geoffrey Roberts, Stalin’s Wars : from World War to Cold War 1939~1953, (Yale University Press, 2006), pp.76~77


요즘도 가끔씩 스탈린이 독일을 선제 공격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가설들은 위에서 Roberts가 지적 했듯 핵심적인 근거로 내세우는 것들이 오히려 그 가설이 잘못 됐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941년 5월 계획안과 함께 자주 언급되는 사관학교 연설 역시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지요. 스탈린이 독일과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증거는 현재로서는 없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 인 것 같습니다.

2007년 3월 20일 화요일

2차 대전 중 소련장교에 대한 농담

2차대전 당시 소련군 병사들 사이에서 돌던 우스개라고 하는군요.

어느날 저녁, 한 장교가 자신의 부하들을 모아놓고 농담을 했다. 병사들은 농담을 듣고 모두 웃었는데 유독 한명의 병사는 무뚝뚝하게 있는 것이었다. 장교는 정치위원을 불러서 가만히 있는 병사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물어보라고 했다.
정치위원이 병사에게 물었다.

“동무, 혹시 집에서 무슨 나쁜 소식이라도 들었소?”

그 병사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자신의 전우들은 모두 무사하고 또 자기 자신도 별 다른 문제가 없다는 것 이었다. 정치위원이 다시 물었다.

“아니? 그런데 왜 웃지 않은거요?”

그 병사가 대답했다.

“저는 다른 연대 소속입니다. 저 분은 제 연대장이 아닙니다.” (웃는 것도 장교의 명령에 따라야 할 정도로 장교의 권위가 높았다는 이야기)

Catherine Merridale, Ivan’s War : Life and Death in the Red Army 1939-1945, Metropolitan Books, 2006, p.199


이 이야기가 웃기십니까?

2007년 3월 13일 화요일

문화적 충격 - 세뇌 교육의 부작용?

(병사들이) 전쟁이전에 조국에 대해 가지고 있던 관념은 전쟁이 쉽게 끝날 것이라는 희망과 마찬가지로 빨리 사라졌다. 고르돈은 학교에 다닐 때 까지만 해도 매우 순진한 "국제공산주의자"였다. 그가 처음 만난 독일군은 포로가 된 장교 한 명과 병사 두명이었다. 병사 중 한명은 "노동자"였다. 고르돈은 그때를 회상했다.

"처음 통역병이 독일군 포로에게 어떻게 당신 같은 노동자가 전세계 무산계급의 첫 번째 조국인 소련을 향해 무기를 들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 독일 포로는 처음에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못 했습니다. 그 포로는 자신의 부대의 동료들 대부분이 노동자나 농민이라고 했지요. 그러나 자신들의 조국은 소련이 아니라 독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그 포로의 대답을 듣고 나서 그 동안 우리가 믿었던 '전 세계 무산계급의 조국인 소련'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Catherine Merridale, Ivan’s War : Life and Death in the Red Army 1939-1945, (Metropolitan Books, 2006), p.129

폐쇄적인 국가에서 폐쇄적인 교육을 받으면 이렇게 된다고 하지요.

2007년 2월 18일 일요일

아무리 다급해도 크리스마스 트리는 만드는 독일인들

아래의 이야기는 1944년 겨울 부다페스트에 포위된 독일군이 부다페스트 근교의 한 독일계 마을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부다페스트가 포위된 뒤 독일군이 Solymar에 주둔하게 됐다. 하지만 독일군은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전쟁으로 남성들이 징집됐던 터라 독일 병사들은 마을 주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독일 병사들은 장작을 패거나 추수를 도왔고 마을 사람들은 독일 병사들을 매우 좋아했다. – 물론 이들은 아기가 아니라서 같은 침대에서 재우지는 않았다. 그리고 독일군들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마을 사람들을 위해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어줬다. 병사들 중 한명은 Erzsebet에게 자신의 가족 사진을 보여주고 이름을 적어줬다고 한다. 그 병사가 적은 것은 아돌프 헤르만 라인플루스라고 돼 있는데 Erzsebet은 라인플루스가 병사의 이름인지 아니면 그 병사의 고향 마을 이름인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다른 병사 한명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가했는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난 크리스마스만 되면 포위망 안에 갇히네요.”

소련군은 Solymar를 점령하자 독일 부상병들을 학살했다. 소련군은 마을 광장에 카츄샤를 배치하고 Varhegy(부다에 있는 성채언덕, 독일군의 마지막 거점 중 하나)를 포격했다. 나중에 포위된 독일 무장친위대 병력이 포위망을 탈출하려 했을 때 이들 중 일부가 Solymar로 들어왔고 소련군은 일시적으로 후퇴했다. 마을사람들은 독일군들에게 식량을 주고 도망치는데 도움이 되도록 옷을 빌려줬다. 하지만 도망치던 독일군 대부분은 소련군에게 잡혀 그 자리에서 사살됐다. 그리고 소련군이 Solymar를 다시 점령한 뒤 남은 패잔병들도 사로잡혀 죽었다. 마을사람들은 독일군을 좋아했기 때문에 학살된 독일군들을 마을 묘지에 매장했다. Erzsebet도 일년에 한번 라인플루스의 무덤에 꽃을 가져다 준다고 한다.

Cecil D. Eby, Hungary at War : Civilian and Soldiers in World War II, The Pennsylvan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8, p201

포위망에 갇혀 오늘 내일 하는 중에도 크리스마스는 잘 챙기는 걸 보면 역시 독일인들은 크리스마스를 아주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2007년 2월 15일 목요일

데자뷰?

볼스키 소장은 낮은 직급의 장교들에게 비판적이었다. 그는 기계화군단장, 전차사단장, 전차연대장, 그리고 각 제대의 참모장교들이 “기동전”을 수행할 만한 “작전적-전술적 식견”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소련군 기계화부대의) 장교들은 전투에서 주도권을 쥐려고 하지도 않았고 부대가 보유한 기동수단을 제대로 동원하지 못했으며, 전투에서는 부대의 기동력을 잘 살리지 못했다. 게다가 많은 장교들은 정면공격만 거듭했으며 모든 제대에 걸쳐 정찰이라고는 할 줄 몰랐다. 위로는 군단장부터 아래로는 중대장에 이르기 까지 소련 장교들의 지휘 통제 능력은 한심한 수준이었다. 많은 장교들이 지도를 가지고 있지 않아 전투가 한창인 와중에 부대 전체가 길을 잃는 것이 다반사였다. 볼스키 소장은 기계화군단의 장교들이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 하고 있으며 부대를 어떻게 지휘할 것인가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다”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1941년 8월 1일, 전선시찰을 나간 붉은군대 총참모부 볼스키 소장의 이야기
Roger. R. Reese, Stalin’s Reluctant Soldiers : A Social History of the Red Army, 1925-1941,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6, p.201

그리고 4년 후.

“젊은 장교들은 실전 경험이 부족한데다 자신의 부대를 어떻게 통솔해야 할 지 전혀 모르는 상태다. 사단급 부대들은 전반적으로 훈련이 부족해 통합된 부대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야전 부대들의 경우 연대급의 제병협동 전투나 보전협동 전투를 제대로 수행할 능력이 없다. 운전병들은 야지 주행이나 야간 주행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전차병들도 마찬가지 수준이다. (중략) 전차, 보병수송장갑차, 차량은 거의 대부분 신품이어서 이것을 조종하는 병사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상태이다.

1945년 3월 7일, 독일 제 9군 사령관의 보고서 중에서.
Andreas Kunz, Wehrmacht und Niederlage : Die bewaffnete Macht in der Endphase der nationalalsozialistischen Herrschaft 1944 bis 1945, Oldenbourg, 2005, s.213에서 재인용.

흔히 싸우면서 닮아 간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가 봅니다. 그나마 독일쪽은 전쟁 전에 준비한게 있다보니 전쟁 말기까지도 쓸만한 지휘관들이 꽤 많긴 했습니다만 하위 전술제대로 내려가면 내려갈 수록 난감한 상황이었다고 하지요.

2007년 1월 23일 화요일

주코프의 굴욕 : 1941년 6월 29일의 일화

주코프는 스탈린에게 직언을 하고도 스탈린 보다 오래 산 매우 드문 사람 중 한명입니다. 그러나 주코프가 스탈린에게 직언을 잘 했다고는 해도 최소한의 대가는 치뤄야 했습니다. 다음은 독소전 개전 초기에 두 사람간에 있었다는 일화입니다.

모스크바에서 민스크에 포위된 부대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확실하게 확인한 것은 6월 29일 아침이었다. 스탈린은 이 소식을 듣자 격노했다. 민스크는 전략적으로는 별로 가치가 없었지만 연방의 슬라브 민족 공화국, 벨로루시아의 수도라는 점 때문에 국제적 대도시로 육성할 도시였다.(스탈린은 그루지야인 이었지만 짜르들이 그러했듯 슬라브 민족을 제국의 중핵으로 삼았다.) 스탈린은 시니컬한 인물이었지만 그 자신이 만들어낸 선전구호들을 그대로 믿어버리는 독재자적인 위험한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스탈린은 민스크의 함락 소식에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Kaunas)나 우크라이나의 리보프(L’vov)가 함락당했을 때 처럼 슬퍼하지도 않았고 드네프르 강의 방어준비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스탈린은 그 대신 민스크의 함락이 매우 중대한 전략적 패배라고 간주하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티모센코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스크에 도데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스탈린이 질문했다.

“아직 충분한 답변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스탈린 동지.”

티모센코는 불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티모센코가 대답을 주저한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아직 파블로프가 항복했는지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동지는….”

스탈린은 무엇인가를 말하려다 그만뒀다. 그 자리에 동석한 몰로토프, 말렌코프, 미코얀, 베리야는 뭔가 말할 것을 찾느라 고민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스탈린이 말꼬를 텄다.

“나는 이 애매모호한 보고가 마음에 들지 않소. 즉시 참모부에 가서 각 전선군 사령부의 보고를 확인해 봐야 겠소.”

몇 분 뒤 소련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다섯 사람이 총참모부의 황동으로 된 문을 열고 들어섰다. 경비를 서던 병사는 너무 놀라 말도 못한 채 얼어 붙었다. 다섯 사람은 아무말 없이 경비병을 지나쳐서 티모센코의 집무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들이 방에 들어섰을 때 티모센코는 주코프와 다른 여러명의 장군들과 함께 테이블 위에 상황도를 펴 놓고 토의를 하고 있었다.
스탈린이 나타나자 방안에 있던 모든 장군들이 부동자세를 취했다. 티모센코는 하얗게 질렸지만 어쨌건 스탈린에게 다가가 보고했다.

“스탈린동지. 국방인민위원회와 총참모부는 현재 전선의 상황을 분석 중이며 지시를 따르고 있습니다.”

스탈린은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테이블로 가서 서부전선군 지구의 상황도를 찾았다. 스탈린은 서부전선군의 상황도를 찾은 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동안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침내 스탈린이 장군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좋소. 보고하시오. 우리는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듣고 싶소.”

“스탈린동지. 시간이 부족해 아직 전선의 상황을 충분히 분석하지 못 했습니다. 많은 정보들이 아직 확인 못 한 상태입니다. 현재까지 종합된 것들은 매우 모호합니다. 보고를 드리기엔 정보가 부족합니다.”

스탈린은 격분했다.

“동지는 지금 내게 사실을 말하는 게 무서운 거 아니오! 동지는 벨로루시아를 잃었소. 이제 또 뭘 가지고 날 실망시킬 작정이오? 우크라이나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소? 발트 3국은! 동지는 지금 지휘를 하는거요 아니면 그냥 몇 명 죽었나 숫자만 세고 있는거요?”

주코프가 끼어들었다.

“우리가 상황 분석을 마치도록 내버려 두시지요.”

베리야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물어봤다.

“우리가 방해가 됩니까?”

“각 전선군의 상황은 매우 심각하고 우리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코프가 맞받아쳤다.

“베리야 동지. 명령을 내릴게 있다면 좀 도와주시지요?”

베리야는 불쾌한 어투로 대답했다.

“당의 지시가 있다면 그렇게 하겠소.”

주코프는 다시 대답했다.

“네. 그렇다면 당의 지시가 내려올 때 까지는 참모부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코프는 그의 “보스”에게 말을 꺼냈다.

“스탈린 동지. 총참모부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임무는 전선군 지휘관들을 돕는 것 입니다. 보고는 그 뒤에 하겠습니다.”

스탈린은 다시 분노를 터트렸다.

“먼저! 동지가 지금 우리를 대하는 태도는 큰 실수라는 걸 아시오! 두 번째로, 전선군 지휘관들을 어떻게 도울 건지는 지금부터 우리가 생각하겠소!”

스탈린은 독설을 쏟아 낸 뒤 다시 조용해 졌다. 장군들에게 발언할 것이 있으면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잠시 뒤, 주코프가 벨로루시아의 야전군 지휘관들과 통신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고 대답하자 스탈린은 또다시 격분했다. 스탈린은 주코프가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고 패배자라고 소리쳤다.
주코프는 눈물을 글썽이며 티모센코의 집무실에서 나갔다. 몰로토프가 주코프를 따라 나갔다. 잠시 뒤 주코프가 다시 티모센코의 집무실로 들어왔을 때 그의 눈가는 새빨갛게 돼 있었다.

스탈린은 그를 따라온 사람들에게 말했다.

“동지들, 돌아갑시다. 좋지 않은 상황에 여길 온 것 같소.”

스탈린은 총참모부 건물을 나서면서 침울하게 말했다.

“레닌은 우리에게 위대한 유산을 남겨줬소. 그런데 우리가 이걸 다 말아먹어 버렸구만.”

Constantine Pleshakov, Stalin’s Folly : The Tragic First Ten Days of World War II on the Eastern Front, (Houghton Mifflin), p.212-214

스탈린 동지의 일갈에 눈물을 글썽이는 우리의 불패의 장군. 정말 안구에 습기가 찹니다.

2007년 1월 12일 금요일

뭔가 구린 보고서 - "히틀러 보고서"의 쿠르스크 전투 부분

스탈린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스탈린에게 올라가는 보고서는 베리야, 또는 그 아래 단계에서 상당히 손을 많이 본다는 것 입니다. 왜냐? 다 아시겠지만 우리의 강철의 지도자 동무의 심보가 뒤틀리면 피보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1949년에 작성돼 스탈린에게 제출된 “히틀러 보고서”의 영어판을 읽어 보게 됐습니다. 이것 역시 스탈린 동무에게 올라 가는 것이라 그런지 뭔가 구린 냄새가 곳곳에서 나더군요.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부분입니다.

1943년 6월, 히틀러는 쿠르스크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서 오버살츠베르크에서 동 프로이센의 “늑대굴”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무렵 터키군 총참모부의 사절단이 방문했다. 터키 사절단은 독일 국방군 총사령부의 초청을 받아 독일을 방문했다. 독일측은 동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터키 사절단에게 쿠르스크 공세를 위해 하리코프-벨고로드 지구에 집결한 독일 기갑부대의 기동훈련을 참관하도록 했다. 터키 사절단은 이 기동훈련을 참관한 뒤 늑대굴로 돌아와 히틀러를 접견했다. 터키 사절단은 히틀러와 다과를 하기에 앞서 카이텔, 요들과 함께 많은 대화를 나눴다. 터키 사절단은 히틀러를 접견한 뒤 독일 국방군 총사령부의 초대를 받아 프랑스를 방문했다. 히틀러는 터키 사절단과 대화를 나눈 뒤 매우 즐거워했다.

“터키인들은 믿을 수 있을 거야. 하리코프에서 우리 기갑사단의 기동을 참관한게 저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 같아.”

터키 사절단은 프랑스에 도착해 서부전구 총사령관 룬트슈테트 원수의 환대를 받았다. 히틀러는 룬트슈테트에게 터키 사절단이 동부 전선의 기갑사단들로부터 받은 깊은 인상을 활용할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대서양 방벽에서 가장 방어 준비가 잘 갖춰진 지역만 보여주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터키 사절단은 Cap Gris Nez에 있는 해안포대 “프리츠 토트”를 방문했다. 터키 사절단은 노획한 야포로 만든 해안 포대는 볼 수 없었다.

1943년 7월 5일, 벨고로드-쿠르스크-오룔 지구에서 공세가 개시됐다. 공세 첫날 히틀러는 그의 부관들에게 자이츨러로부터 전황 보고가 안 들어왔는지 확인하도록 닥달했다. 그날 오후 12시 30분, 자이츨러는 직접 보고를 하기 위해 히틀러를 찿았다. 히틀러는 자이츨러에게 흥분된 어조로 물었다.

“자이츨러. 쿠르스크의 전황은 어떤가?”

자이츨러는 전황에 대해서 모호한 어투로 얼버무렸다. 자이츨러는 현재 전황이 단편적으로 들어와 있다고 대답했다. 러시아군이 매우 완강히 저항하고 있다는 것 이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덧 붙였다.

“기습의 효과는 전혀 없었습니다.”

히틀러는 자제력을 잃었다.

“페르디난트! 페르디난트 부대를 당장 투입하란 말이다!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전선을 돌파해야 한다!”

7월 6일, 자이츨러는 보병과 공병들이 러시아군의 방어선을 여전히 돌파하지 못했으며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그 뒤 기갑부대가 투입됐다. 히틀러는 격분했다. 히틀러는 기갑사단들을 예비대로 두고 피해가 어떻든 간에 보병과 공병 부대가 소련군의 방어선을 완전히 뚫기 전 까지는 투입하지 말 것을 명령했었다. 예비대 투입은 돌파구가 열린 다음에 할 계획이었다. 히틀러는 거듭해서 집중적인 타격을 입혀야 한다고 말했다. 이때 히틀러는 마치 열병을 앓는 사람 처럼 보였다. 히틀러는 매 시간 마다 자이츨러에게 러시아군의 방어선이 얼마나 뚫렸는지, 그리고 그의 히틀러 사단이 얼마나 진격했는지 등을 물어봤다.

그리고 며칠 되지 않아 자이츨러는 공세가 완전히 돈좌됐다고 보고했다. 독일군은 방어로 돌아섰고 일부 지구에서는 소련군이 공세를 시작했다. 페르디난트와 티거 전차는 방어진지에 배치된 대전차포와 T-34에 연달아 격파됐다. 히틀러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을 거부했다. 히틀러는 주먹으로 탁자를 치며 소리쳤다.

“이건 다 내 명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야!”

귄세는 히틀러의 명령을 받고 아돌프 히틀러 사단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출발했다. 귄세는 벨고로드에서 히틀러 사단 지휘관인 제프 디트리히를 만났다. 귄세는 착륙하기 전에 하늘에서 소련군의 강력한 방어선과 곳곳에 널려있는 독일 전차와 자주포의 잔해를 볼 수 있었다. 디트리히는 귄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진격 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10km였네. 하지만 피해가 너무 엄청났어. 작전을 시작할 때 내 사단은 150대의 전차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전투에 투입 가능한 게 20대도 되지 않네. 보병의 손실도 매우 큰 상태야. 다른 사단들의 상황도 이보다 나을게 없어. 러시아군의 방어선이 얼마나 종심 깊게 구축됐는지 아는가? 동 프로이센에 돌아가서 말로 보고하는건 쉽겠지. 그러나 여기서는 다르다네. 우리는 돌파를 하지 못했어.”

다음날 저녁 귄세는 동 프로이센으로 돌아갔다. 귄세가 보고를 위해 히틀러를 방문하자 히틀러는 피곤하다는 제스쳐를 취하며 말했다.

“잊어 버리게. 나도 알아. 디트리히 조차 실패했군. 나는 이번 공세로 전세를 완전히 뒤집으려고 했어. 러시아군이 이렇게 강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군.”

Ed. Henrik Eberle and Matthias Uhl, The Hitler Book, p.117~119

이미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연구를 많이 접하신 분들은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 잘 아실 것 입니다.

먼저 디트리히의 이야기를 보시죠.

“내가 진격 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10km였네. 하지만 피해가 너무 엄청났어. 작전을 시작할 때 내 사단은 150대의 전차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전투에 투입 가능한 게 20대도 되지 않네. 보병의 손실도 매우 큰 상태야. 다른 사단들의 상황도 이보다 나을게 없어. 러시아군의 방어선이 얼마나 종심 깊게 구축됐는지 아는가? 동 프로이센에 돌아가서 말로 보고하는건 쉽겠지. 그러나 여기서는 다르다네. 우리는 돌파를 하지 못했어.”


이제는 잘 알려져 있지만 SS 2기갑군단은 그다지 큰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쿠르스크 전투 기간 중이나 그 이후에도 전투 투입 가능한 전차가 20대 이하로 떨어진 사단은 없었지요.

그리고 그 다음. 히틀러의 이야기를 보시죠.

“잊어 버리게. 나도 알아. 디트리히 조차 실패했군. 나는 이번 공세로 전세를 완전히 뒤집으려고 했어. 러시아군이 이렇게 강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군.”


독일측이 쿠르스크 전투를 통해 일거에 전세의 역전을 노렸다는 것은 전형적인 소련의 해석입니다. 소련은 1970년대 까지도 독일군은 쿠르스크의 돌출부를 분쇄한 뒤 모스크바로 총 공세를 가할 계획이었다고 제멋대로 역사를 서술했습니다. 독일측의 의도는 쿠르스크 돌출부를 분쇄해 소련군의 주력 기동부대를 섬멸하고 전선을 단축해 방어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 이었지 더 큰 도박판에 올인 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보고서는 주로 귄세 등 히틀러의 측근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 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증언 자체의 신뢰도는 둘째 치고 내용 자체에 구린 구석이 많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스탈린의 입맛에 맞춰 주기 위해 많은 부분에 손을 댄 것 같습니다. 신뢰도가 매우 떨어지는 구술 자료집이라고 판단되는군요.

2007년 1월 5일 금요일

R. Reese의 소련 장교 집단 구분

제가 자주 울궈먹는 러시아 군사사 연구자인 Reese는 건국 초기 소련의 장교집단을 크게 세 그룹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보리스 샤포쉬니코프”로 대표되는 “순수한 전문 군인 집단”입니다. 리즈는 이 집단에 바실레프스키와 충격군 이론의 제창자인 트리안다필로프, 스베친 등을 포함 시키고 있습니다. 이 집단의 특징은 주로 짜르 체제에서 영관급 정도의 계급에 고급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정치적 성향을 가지지 않아 군대는 당의 도구라는 관점에 충실하고 당의 의사결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이 중 스베친은 공산당에 가입은 하지만 당 내에서 어떤 요직도 노리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미하일 투하체프스키”로 대표되는 “준 전문 군인 집단”입니다.
리즈는 이 준 전문 군인 집단은 공산당에 가입한 비중이 높으며 당의 정치 활동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투하체프스키는 당과 국가 정책에 영향력을 끼치려는 시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 덕에 레닌그라드 군관구로 좌천(?) 당하기도 하고 끝내는 골로 가지요.
이 집단에는 야키르, 초창기 전차 개발에 공헌한 칼렙스키, 아이데만, 우보레비치 등이 포함됩니다. 이들 집단의 특징은 1차 대전 당시 주로 부사관, 위관급 장교로 참전했으며 정치와 신기술에 관심이 많았다는 점 입니다. 혁명 직후 공산당에 가입한 경우가 많으며 투하체프스키와 우보레비치, 야키르는 당 중앙위원까지 올라가지요. 칼렙스키는 나중에 통신위원장으로 정부 요직을 차지합니다.

세 번째 집단은 보로실로프로 대표되는 “비 전문 군인 집단”입니다.
이 집단은 주로 스탈린이라는 든든한 정치적 “빽”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경우이고 대부분 농민출신에 고등 군사교육이 부족했던 편 입니다. 여기에는 독소전 초기 키예프 피박의 주인공인 부존늬 같이 능력이 의문시되는 인사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스탈린이 전문 군인 집단을 매우 불신했기 때문에 보로실로프 집단은 스탈린의 비호 하에 상당한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점 하나는 21세기의 미국인 리즈의 분석은 혁명 당시 보로쉴로프의 구분과 비슷하다는 것 입니다. 보로쉴로프는 1920년대 초 붉은 군대의 장교 집단을 1. 노동계급 출신의 "혁명적 지휘관"과 2. 짜르 체제에서 하급 간부였던 혁명적 농민 출신의 지휘관, 3. 짜르 체제의 엘리트 군 간부 출신 지휘관으로 구분했습니다.
약간 억지스럽긴 해도 리즈의 구분과 보로쉴로프의 구분이 얼추 비슷하게 맞아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또 Reese의 연구가 흥미로운 점은 John Erickson이 The Soviet High Command에서 장교집단을 “전문 군인 집단”과 “비 전문 군인 집단”으로 구분한 것에서 좀 더 세분화를 시도했다는 점 입니다. 즉 전문 직업군인 집단을 다시 “순수한” 직업군인 집단과 “정치 지향적” 직업군인 집단으로 구분 함으로서 1937년의 군 숙청에서 왜 투하체프스키 집단이 집중적으로 거덜이 났는가를 좀 더 잘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샤포쉬니코프와 바실레프스키는 정치 불개입과 당의 명령에 대한 복종에 충실했기 때문에 스탈린과 충돌할 일이 거의 없었고 자신들의 업무 범위 내에서 일정한 자율성을 인정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반면 투하체프스키 집단은 당의 중공업화에 찬성하면서도 군대가 차지하는 비중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당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려고 했고 스탈린 세력의 불쾌감을 자극합니다.

그 후의 결론은 다들 잘 아시지요?

2006년 11월 19일 일요일

1930년대 소련군 장교의 생활 수준(번역글)

저는 서방에서 소련, 러시아군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 Roger R. Reese의 글을 가장 좋아합니다. 사회사적인 접근방법도 좋거니와 문장이 매우 쉽고 읽기 편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용도 매우 좋지요. 이 글은 Roger R. Reese, Stalin;s Reluctant Soldiers : A Social History of the Red Army, 1925-1941, p125-p127에서 발췌 번역한 글 입니다.

소련군 장교의 주거는 매우 형편없어서 붉은군대의 이미지를 실추시켰고 또 장교 모집에도 장애요인 이었다. 1차 5개년 계획이전부터 주택 문제는 군대 뿐 아니라 소련 사회의 전체적인 문제였다. 예를 들어 1931년에는 붉은군대의 장교 5만 명이 숙소를 제공 받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그나마 있는 주택이라는 것도 그 상태가 형편없었다. 심지어 고급 장교들의 관사 조차 일반 시민들의 아파트처럼 낡고 비좁았다. 20년대, 30년대, 그리고 심지어 40년대 까지도 장교들은 수준 이하의 복지에 대해 불만이었다. 일반적으로 장교들의 생활수준은 사회의 비슷한 계층의 민간인들에 비해 낮았기 때문에 소련 인민들은 기본적인 혜택도 주지 않는 조국을 지키는데 대해 관심이 낮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혁명 이전 제정 러시아의 상황이 그대로 이어지게 됐다. 알렉산드르 3세가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 부근에 주둔한 부대들을 대대적으로 서부 국경지대로 재배치 하자 번듯한 주택에서 거주하던 장교들은 서부 폴란드나 우크라이나의 가난한 농촌 촌락에 적응해야 했다. 이렇게 되자 엄청난 숫자의 장교들이 전역해 버렸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다시 반복돼 1930년대에 소련 육군이 우크라이나에 새 부대들을 편성하고 장교들을 전출 시키자 장교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주택을 지어야 했다. 그리고 더 멀고 사정이 열악한 극동 지역에서 근무할 장교를 확보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장교들은 종종 도시민들이 그랬듯 공동 주택에 거주했다. 예를 들어 1932년 “붉은별”지는 한 항공여단의 장교용 아파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장교용 아파트는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건물벽의 회반죽은 갈라져 떨어지고 있었고 문과 창문은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그리고 한 블록에 있는 세 개 동은 세면장이 없었다.” 이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한 장교는 군 소식지에 보낸 편지에서 비가 오면 아파트는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물로 엉망이 된다고 하소연할 정도였다. 그는 비가 오면 꼭대기 층에서 가장 아래층 까지 빗물이 흘러내린다고 적었다. 그리고 창문이 엉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창유리가 떨어지고 없었다. 문은 싸구려 합판으로 만들어져 찬바람이 들어왔다. 수도도 공급되지 않는 지경이었다. 1년전 겨울에 이 장교의 가족들은 그나마 관사조차 배정 받지 못해 병사들의 내무반에서 병사들과 지내야 했다. 숙소가 너무 부족해 학교의 교실까지 사용해야 할 정도였다. 장교용 주택이 난방이 안되거나 아예 안되는 것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겨울에는 건강에 직접적으로 악영향을 끼쳤다.

가족을 가진 장교들은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이 겪는 고통 때문에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우크라이나 군관구의 기혼 장교들은 두 세대가 방 두 세칸 짜리 아파트 하나를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장교들은 또 자녀들을 위한 탁아소, 유치원, 놀이터도 매우 부족하다고 하소연했다. 1930년대 초반에 레닌그라드 군관구의 많은 장교들은 관사가 부족한데다 일반 주택도 얻기가 힘들어 부대에서 퇴근하지 않고 지내는 지경이었다. 비슷한 사례를 들면 1931년에 모스크바 경비부대의 장교 1,730명은 관사를 지급 받지 못했고 또 다른 529명은 “매우 나쁜” 주택에 거주했다. 장교와 그 부인들이 불평을 많이 한 것은 애초에 생활수준에 대한 기대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군인 가족들은 일반 시민의 생활수준도 엉망이라는 점에 대해 거의 위안을 받지 못했다.

장교의 주거 수준은 장교 집단의 구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치는 요인이었다. 제 1차 5개 년 계획 실시 이전에 고학력의 젊은이들에게는 기회가 풍부했다. 많은 장교들이 군대를 제대해 다른 직장과 더 나은 생활 수준을 찾았고 아이러니 하게도 장교에 지원하는 교육수준이 낮은 집단 조차도 군대에서 교육을 받게 되면 더 나은 생활 환경을 찾기 시작했다. 사례를 하나 들면 세르게이 슈테멘코는 그가 1933년 모스크바의 차량화 및 기계화학교의 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 했다.

“나는 학교 근처인 레포르토보에 살았다. 나는 첫 해에 호스텔에서 거주했고 2년차가 되자 9제곱미터 짜리 방 한 칸을 배정해 준 뒤 키예프에 있는 내 가족들을 모스크바로 불러들였다. 내 어머니는 침대에서 주무시고 나와 아내는 바닥에서 자야 했으며 나의 어린 딸은 바로 옆의 욕조에서 재웠다. 1년 뒤 우리는 학교 부지 일부에 새 건물을 짓는데 참여했고 그곳으로 이사하자 엄청난 호사를 누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슈테멘코와 다른 장교들이 이런 생활 수준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난한 농부 출신에 낮은 교육수준을 가졌고 10대 후반이 되면 입을 하나 덜기 위해 가족에서 내몰리는 사회 계층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슈테멘코는 농업학교에 지원했다가 탈락하자 고향 친구와 함께 군에 지원했고 교육수준이 형편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교 교육 과정으로 차출됐다. 그 결과 슈테멘코는 1926년에 19세의 나이로 모스크바 포병 학교에 입교했다. 아무리 군대의 복지 수준이 낮더라도 슈테멘코가 고향에 있는 것 보다는 훨씬 나았다. 만약 그가 고향에 남았더라면 공사장의 잡부나 짐꾼, 나뭇꾼으로 지내며 공용 건물의 다락이나 국영 전당포의 구석진 방에서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 슈테멘코가 군대에 계속 남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게 슈테멘코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군대와 당은 주로 가난한 농민이나 노동자 층에서 장교를 선발했기 때문에 이런 사례는 매우 흔했다.

그러나 붉은군대만이 2차 대전 이전에 장교의 생활 수준과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육군도 역시 우수한 자질을 가진 장교를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소련과 사정이 비슷했다. 1930년대에 정부가 장교 봉급 인상과 복지 향상을 거부하자 많은 프랑스 군 장교들이 전역해 버렸다. 영국육군은 진급 적체 때문에 장교를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영국군 장교는 대위까지 진급하는데 평균 14년이 걸렸으며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하는데 6년, 소령에서 다시 중령으로 진급하는데 9년이 걸렸고 이때쯤 되면 전역을 고려해야 했다. 소련과 마찬가지로 영국도 군대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본드(Brian Bond)와 머레이(Williamson Murray)는 일반적인 영국인들은 장교의 복지수준이 2급 수준의 인력이나 바보들에게나 적당한 수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국군이 장교 충원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보고 있다. 영국, 프랑스, 소련에서 성공하는 길은 사회나 정치 방면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반면 독일군의 장교는 1차 대전 이전의 사회적 지위와 소득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크나페(Siegfried Knappe)의 연구에 따르면 1937년 기준으로 독일군의 중위는 월급만 가지고도 자동차 한대와 승마용 말 한 마리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생활 수준도 좋은 편이었다. 그 결과 독일군은 2차 대전 이전 장교를 확보하는데 하등의 어려움이 없었다.

2006년 4월 25일 화요일

두개의 군대, 두개의 혁명(재탕+약간 수정)

정치는 현실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래서 그런지 혁명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들도 정권을 잡으면 그들이 뒤엎은 세력들 보다 더 정치적이 된다. 하기사. 대한민국의 얼치기 혁명가들은 이상도 없는 주제에 현실 감각도 없지...
이상주의자들이 가장 현실과 타협을 잘 하게 되는 것이 정치고 정치 중에서도 군사문제가 최고인 듯 싶다.
그 사례를 가장 잘 보여주는건 아마도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오늘날 책을 통해서 접하는 절대 왕정시기 일반 사병의 군대 생활은 안락하고 좋다고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던 것 같다. 기본적인 의식주 자체가 형편 없었고 당시의 보병 전술 상 엄한 군기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군대내에서 구타도 공식적으로 장려 되었다고 하니까. 1764년에 베를린을 방문했던 보스웰(James Boswell)이란 영국인은 한 프로이센 보병연대의 훈련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유럽 최고의 군대라는 프로이센 군대의 훈련을 참관한 보스웰의 소감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공원에서 한 프로이센군 연대가 훈련하는 것을 구경했다. 병사들은 매우 겁에 질려있는 것 같았다. 병사들은 훈련 중 조금만 실수하더라도 개처럼 두들겨 맞았다.”

평상시의 생활이 이렇게 가혹하니 전쟁 때는 오죽 했을까. 7년 전쟁 다시 프로이센군의 병력 손실 중에서 약 8만 명이 탈영으로 인한 손실이었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프로이센군대의 탈영에 대해 연구한 단행본도 한 권 있는 모양이다.

이러던 와중에 프랑스 혁명이 터졌다. 혁명으로 멋진 신세계로 변한 프랑스에서는 군대까지 멋진 신세계가 돼 버렸다. 평소 군생활이 비참했으니 이참에 한번 갈아보자!! 하는 게 정상이긴 하겠지만 그게 좀 정도가 지나쳤던 것 같다. 혁명 덕택에 대부분 귀족 출신인 장교들의 권위는 땅바닥에 처 박히게 됐다.
혁명으로 귀족들의 권위를 지탱해주던 사회 구조가 통째로 붕괴되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1788년 당시 9,478명이던 장교 중 약 6,000명 정도가 1791년에서 1792년 사이에 군대를 그만 두고 외국으로 도망치거나 숨어 버렸다고 한다.

그 덕택에 프랑스 군대는 매우~ 매우~ 자율적인 군대가 되어 버렸다. 이제 장교를 병사들의 투표로 선출하고 갈아 치워 버렸으니 군대꼴이 제대로 돌아갈리가 없었다. 빠 드 깔레 연대 1 대대는 고다르(Godart)라는 부사관을 대대장으로 선출했는데 고다르가 훈련을 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당장 들고 일어나서 고다르를 교수형에 처하려 했다고 한다. 정말 멋지지 않은가! 다행히도 고다르는 목숨을 건져서 나폴레옹이 황제가 됐을 때는 장군의 반열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자율적으로 험악하게 나가니 차라리 탈영을 하는 병사는 양반축에 들어갔다. 물론 탈영도 너무 많이 하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혁명 직전에 182,000명이었던 정규군은 1792년에는 11만 명으로 격감했다. 많은 병사들은 귀찮게 자율적으로 부대를 운영하는 것 보다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쪽을 더 선호했던 모양이다. 아마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어쨌든 자유를 외치던 혁명가들도 혁명 전쟁을 치루기 위해서는 군대의 규율을 바로 잡아야 했다. 결국 자유를 외치던 혁명가들은 체제 유지를 위해서 군사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고 그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잘 잡힌 규율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1799년에 나폴레옹이 시작한 군대 개혁이란 솔직히 말해서 구체제하의 엄격한 규율을 다시 도입하는 것 이었다. 나중에 나폴레옹은 헌병이야 말로 군대의 규율을 유지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 했다고 한다. 결국 혁명으로 인한 자유의 열기는 최소한 군대에서는 완전히 사그러 들었다.

사회는 자유로울 수 있어도 군대는 결코 그럴 수가 없는 조직이니.

그리고 대략 130년 뒤에 역사는 비슷하게 반복 됐다.

1917년, 이번에는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러시아 군대도 구타라면 유럽에서 손꼽히는 국가였다. 요즘도 러시아 군대의 구타는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하는걸 보면 러시아 군대는 별로 진보한 것 같진 않지만. 군인에 대한 처우도 좋지 않아서 하급 장교들은 기차의 2등 칸을 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예산 절감을 위해서 하급 장교들에게는 3등칸 요금만 지급했다나?

러시아는 표면상으로는 19세기 중반의 농노 해방 등의 개혁을 취해서 18세기 말의 프랑스 같은 체제는 아니었다. 실제로 장교 집단의 계급 구성을 보면 대령급 이하 장교의 40%는 과거의 농노 계급 출신이었다고 한다. 특히 보병 병과는 과거 농노였던 계층 출신의 장교들이 많았다고 한다.(상대적으로 기병 병과는 귀족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근위사단 같은 핵심 보직은 귀족 출신 장교들이 차지했다. 농노 계층 출신 장교들의 교육 수준과 자질이 낮았기 때문에 귀족 출신 장교들의 엘리트 의식은 대단했다고 한다. 그래봐야 서유럽,특히 독일 장교단과 비교하면 러시아 장교들의 수준은 도토리 키재기 였지만.

러시아도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혁명이 터지자 군대의 규율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이미 2월 혁명당시 군대는 충분히 엉망이 된 상태였다. 전쟁에 염증을 느낀 병사들은 제멋대로 탈영해서 귀향해 버리거나 부대에 남아 있더라도 장교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레닌이 10월 혁명을 일으킬 무렵에는 러시아 군대의 상태가 충분히 엉망이었다. 볼셰비키들의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서 출동한 정부군은 오히려 사병들이 볼셰비키를 지지해 버리면서 그대로 붕괴되었고 총사령관 두호닌은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모길료프역 앞에서 총살당했다고 한다. 오오 혁명 만세! 혁명 직후 볼셰비키는 장교 계급을 폐지하고 호칭을 사단지휘관, 연대지휘관 같은 식으로 바꿔 버렸다. 그리고 역시 프랑스 처럼 지휘관을 투표로 선출했다. 대개는 인기 많은 부사관들이 중대장이나 포대장으로 많이 선출 되었다고 한다. 35 보병사단의 경우 혁명 전에는 상병이었던 병사가 투표에 의해 사단 참모장으로 선출 됐다고 한다.

귀족 출신 장교들을 불신했던 자코뱅들처럼 볼셰비키들도 짜르 체제에서 양성된 장교들을 혐오했다. 혁명 직후에 약 8,000명의 장교가 볼셰비키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지만 많은 볼셰비키들은 노동자 계급으로 새로운 장교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교들에게는 다행히도 내전이라는 불씨가 볼셰비키들의 발등에 떨어졌다. 막상 전쟁이 터지자 투표로 선출된 지휘관들 상당수는 지휘 능력이 없다는게 드러났고 지나치게 “민주화된” 군대는 제대로 전투를 하지 못 했다.
트로츠키는 내전 초반에 30개 사단을 조직할 계획이었지만 전황이 악화되자 1918년 5월에는 추가로 58개 사단을 더 편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신규 부대 편성은 한시가 급한 문제였기 때문에 짜르 시절의 장교들은 거의 대부분 지원만 하면 받아 들여졌다. 결국 구 체제의 장교들은 슬금 슬쩍 새로운 체제에 편입될 수 있었다. 내전이 끝난 뒤에 공산당은 다시 장교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도 30년대에 들어가면서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중단되고 장교의 권위는 상승했다. 그리고 2차 대전을 거친 뒤 등장한 “소련군(소련 군대가 정식으로 “소련군”이라고 불린 것은 2차 대전 이후라고 한다.)”은 장교의 권위가 절대적이 된 강압적인 군대가 돼 버렸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이 잘 보여주듯이 혁명은 정치 논리만 가지고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전쟁은 정치 논리만 가지고는 절대 수행할 수 없는 일 이다.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과 러시아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구 체제의 군사 엘리트들을 불신했지만 결국에는 자신들이 만든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구체제 하에서 육성된 군사 엘리트들에 의존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했다. 정말 세상은 재미있는 곳이다. 뭐, 이런 몇 개의 사례를 보면 역사라는 건 돌고 도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 글을 쓰면서 참고한 자료는 대략 아래와 같다.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Gunther E. Rothenberg, The Art of Warfate in the Age of Napoleon
John Erickson,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
Mark von Hagen, Soldiers in the Proletarian Dictatorship : The Red Army and the Soviet Socialist State, 1917-1930
M. S. Anderson, War and Society in Europe of the old regime 1618-1789
Roger R. Reese, Red Commanders
Victor Serge, 러시아 혁명의 진실(한국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