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6일 월요일

한국전쟁기 미육군 전차대대의 전차포탄 보유 비율에 관한 잡담


한국전쟁 당시 전차전은 주로 1950년 7~10월 사이에 일어났고, 전차는 대부분의 기간에 보병 지원 임무에 투입되었습니다. 그리고 7~10월 사이의 전차전도 대부분 소대 이하의 규모로 전개됐습니다. 그래서 당시 미군 전차들은 화력지원을 위해 고폭탄 중심으로 탄을 탑재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낙동강 전선에서 격전이 벌어지던 8월 말, 미 8군 소속 전차대대들의 전차 포탄 보유 현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표. 1950년 8월 31일 미 8군 소속 전차대대의 전차포탄 보유현황

73대대
70대대
6대대
89대대
72대대
76mm
76mm HE
-
4,753
-
5,618
4,033
76mm APCT
-
-
-
933
671
76mm HVAP
-
790
-
136
98
76mm 백린연막탄
-
667
-
786
566
90mm
90mm HE/ MT신관
1,372
386
1,286
353
600
90mm HE/ PD신관
3,070
863
1,075
767
1,343
90mm HE
1,960
563
1,875
500
875
90mm APCT
946
266
887
236
444
90mm HVAP
99
28
93
22
43
90mm 백린연막탄
209
59
196
45
91
“Ordnance Daily Activity Report”(1950. 8. 31), War Diary: Headquarters Eighth United States Army Korea(1950. 8. 31), RG407 Records of the Adjutant General's Office U.S. Army: Command Reports, 1949 - 1954(Entry NM3 429), Eighth Army(EUSAK).

철갑탄 대비 고폭탄의 비중이 매우 높은 것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실제 포탄 소모량에 대한 기록이 있으면 더 명확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겠지만, 보유량만 가지고도 당시 미군 전차 부대의 운용 양상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2016년 5월 28일 토요일

어떤 기록


전쟁 시기 군부대의 기록들을 보면 산더미 같은 정보의 양에 압도되곤 합니다.(특히 정보참모처의 기록들이 단연 압권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단촐한 기록만 생산하는 부서가 간혹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군종참모입니다. 예를들어 한국전쟁 당시 미육군 제8군 군종참모처에서 남긴 8월 10일자 일지를 보면 다음과 같이 달랑 한 줄로 보고를 마치고 있습니다.



뭐랄까, 아비규환의 전쟁에서도 평온한 일상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게 괴이한 느낌을 주는군요.

2016년 5월 24일 화요일

전차병의 의지(!?)


전차는 값비싼 장비이기 때문에 중요한 취급을 받고, 특히 전차를 생산할 능력이 없는 국가의 경우는 더욱 더 귀중하게 다루어 집니다. 그래서 군사사를 보다 보면 전차를 함부로 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전차병에게 좀 엄격한 규율이 가해지는 경우도 있지요. 여기서 소개할 일화는 1972년 북베트남의 공세 때 있었던 일이라고 하는데 꽤 흥미롭습니다.

안 록(An Loc)의 주민들은 북베트남군의 전차가 도착하기 며칠 전 부터 적의 전차가 오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전투가 끝난 뒤 격파되거나 노획된 적 전차들을 검사했을때 탄약이 충분히 적재되어 있는것을 확인했는데, 적 전차들은 안 록에 진입할 때 사격을 하지 않았다. 적 전차병 중 다수가 전차에 사슬로 매여 있는 것이 관측되었다. 포로의 심문에 따르면 쇠사슬을 차는 것은 일종의 의식이었으며, 적 전차병들은 자신이 뛰어나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사슬을 차라는 부추김을 받았다고 한다.(Many of the tank crews were observed to be chained in their tanks. POW's said the chaining was done ceremonially and individuals had been prompted to volunteer for the chaining ceremony as a mark of distinction) 적 전차병 중 다수는 팔에 '맹렬히 돌진하라!' '종심 깊게 공격하라!'와 같은 구호를 문신으로 새기고 있었다. 
Pacification Studies Group, Debriefing 'An Loc Siege Experiences' (1972. 6. 27), p.2. Library of the U.S. Army Heritage and Education Center

이 보고서를 작성한 것은 미군의 Pacification Studies Group에 소속되어 있던 두 명의 베트남인 연구자들인데, 이들은 안 록 전투 당시 2개월간 포위망에 갇혀 있으면서 전투를 목격했다고 합니다. 교차검증할 만한 다른 자료가 있으면 좋겠는데, 어쨌든 꽤 흥미로운 증언입니다. 병사들이 용기를 과시하도록 교묘한 선동을 한 셈인데, 사실이라면 좀 끔찍하군요. 꽤 어리석은 짓 이지만, 집단적으로 부추기는 분위기에서는 선동되는 사람이 나올 수 있었을 겁니다. 뭐, 전차에 불이 붙고 나서는 후회했겠지만 말이죠.

2016년 5월 14일 토요일

책 이야기 조금


음.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읽지도 못하는 책을 자꾸 지르기만 하는게 일상이 됐습니다만, 그래도 새 책이 나온다고 하면 땡기는게 어쩔 수 없군요.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책 몇권의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1. David M. Glantz, The Battle for Belorussia The Red Army's Forgotten Campaign of October 1943 - April 1944

올해 말에 출간될 데이빗 글랜츠 선생의 차기작입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1943년 겨울 부터 1944년 봄 까지 벨로루시아에서 전개된 붉은군대의 일련의 공세작전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종결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글랜츠가 이 책의 집필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은 대략 4년 정도 된 듯 한데, 그 사이에 스탈린그라드 3부작과 독소전쟁사 개정판 집필이 있어 연기된 듯 합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글랜츠가 개인출간을 했던 Forgotten Battles on the German-Soviet War 시리즈의 해당 편을 보강한 것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또한 연구사적으로 볼 때 이 책은 Zhukov's Greatest Defeat: The Red Army's Epic Disaster in Operation Mars, 1942와 Red Storm Over the Balkans: The Failed Soviet Invasion of Romania, Spring 1944의 후속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요즘은 글랜츠 선생께서 만수무강 하셔서 더 많은 연구를 발표해 주시길 바랄 뿐 입니다.


2. Leaping Horseman Books의 차기작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동부전선 관련 서적을 전문적으로 간행하는 Leaping Horseman Books에서는 흥미로운 신작을 예고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제244돌격포여단을 다룬 Iron Cross Brigade입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Werner Gösel의 회고록+부대사를 겸하는 Ohne Schutzengel geht es nicht: Im Sturmgeschütz an den Brennpunkten der Ostfront의 영어번역본인데, 영어판은 대대적으로 증보되어 부대일지 등 흥미로운 자료를 보강했다고 합니다. 지금 출판사 홈페이지에서 예약 주문을 받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제목만 공개된 Stalingrad: Graveyard of the Panzers라는 책 입니다. 출판사 페이스북에서 제목과 함께 책에 실릴 사진을 조금 공개했는데, 일단 제목만 봐서는 스탈린그라드 일대에서 전개된 독일 기갑부대의 작전을 다루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 출판사의 책들은 한번도 실망을 준 적이 없어서 제목만으로 기대가 되네요.


3. Der Panzer und die Mechanisierung des Krieges: Eine deutsche Geschichte 1890 bis 1945

음. 이 책은 출간 예정일이 자꾸 지연되고 있습니다. 원래는 2012년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이 독일에서 출간됐을 당시 후속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작년 말로 밀렸다가 지금은 2016년 7월에 나온다고 변경됐습니다. 독일 기갑부대의 역사를 학술적으로 다루는 단행본이니 만큼 기대가 큽니다.

어떤 문화적 다양성(?)


라종일의 『장성택의 길: 신정神政의 불온한 경계인』을 읽는 중 입니다. 저자가 다양한 정보 출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이 많아 즐겁게 읽힙니다. 북한의 자원 낭비에 관한 저자의 해석이 상당히 재미있고 통찰력을 보여주는 것 같아 인용을 해 보겠습니다.

이탈리아산 대리석, 북유럽산 고급 가구, 고급 샹들리에 등이 연이어 평양으로 들어왔다. 외부 사람들에게 이런 사업이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외화 부족에 시달리는 나라에서 어째서 이런 사치가 필요한가?'
'상식적으로 이런 일은 오히려 최상위 권력층에서 막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북한 내부의 논리에서 보면 개인적 사치 차원 이상의 문제였다. 이것은 일반인은 물론 권력의 핵심에 있는 인사에게 수령과 최고 지도자의 절대적인, 반신적인 권위를 각인시키기 위한 도구였다. 이 권위를 위한 소도구가 롤렉스 시계나 메르세데스-벤츠 자동차 등이라면 거창한 건축물이나 동상 등은 무대이고 치장이며 그 장치였던 것이다.
필자는 런던 근무 시절 여러 사업으로 북한 인사들을 초청해 영국과 교류하도록 도운 일이 있었다. 그때 북한 방문객들을 안내하던 영국 정부 인사가 놀랐다는 말을 했다. 방문객들에게 버킹엄궁전을 보여주었는데 그들이 코웃음을 치더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겨우 대영제국의 여왕이 사는 곳인가?" "(북한에 와서) 우리의 주석궁을 한번 보라"등의 반응을 했다고 한다. 영국인 안내원은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 
"어떻게 외부에 식량 원조를 청하는 나라의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는 물론 신정적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무대 장치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이를 설명해줘도 끝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것 같았다. 
한편은 필자가 어렵사리 북한 젊은이들을 위해 해외 유학의 기회를 마련한 적이 있었다. 당시 그들에게 선호하는 전공 분야를 물으면 '건축'이라는 답이 돌아와서 신기하게 여겼다. 흔히 낙후된 북한의 경제 상황을 생각하면, 농업 아니면 경영, 혹은 금융이나 이공계의 답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의 답은 그렇게 어려운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집트 룩소르의 유물, 혹은 베이징의 자금성을 보면 쉽게 연상할 수 있는 답이 있다. 권력과 장엄한 건축물들은 역사상 불가분의 관계였다. 
"건축은 정치의 물리적인 현현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벽돌과 모르타르로 이루어진 권력이다." 
특히 신정은 교리만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는 신전이 필요하다. 북한의 신정이 세속적인 만큼 속세의 일반이에게 외경의 느낌을 줄 수 있는 신전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상상하기 어려운 시설물들을 보면서 새삼 권력의 생생한 권위를 느끼는 것이다. 말하자면 장성택의 임무는 새로 떠오르는 권력을 떠받들어 줄 치장을 마련하는 것 이었다.
라종일, 『장성택의 길: 신정神政의 불온한 경계인』 (알마, 2016), 120~122쪽.

2016년 5월 7일 토요일

Robert Forczyk의 Tank Warfare on the Eastern Front 1941-1942: Schwerpunkt가 단돈 2000원에 팔리고 있습니다!


구글 플레이스토어에서 책을 검색하다가 Robert Forczyk의 Tank Warfare on the Eastern Front 1941-1942: Schwerpunkt가 단돈 2000원에 팔리는걸 확인했습니다!

정말 좋은 책이니 가격 올라가기 전에 꼭 사세요. 킨들버전 보다 편집도 더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 이 책에 대해 간략한 소개글을 쓰기도 했으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아마존에서도 킨들버전을 1.99달러에 팔고 있더군요. 할인판매하는 기간인가 봅니다.

2016년 4월 21일 목요일

어머니는 강하다!!!


자식들이 어머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이것은 소련방 원수 주코프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양반의 어머니는 좀 비범한 면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나의 어머니 우스티냐 아르템예브나Устинья Артемьевна는 체르나야 그랴즈Черная Грязь 옆 동네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셨다. 부모님이 결혼하셨을 때 어머니는 35세였고 아버지는 50세였다. 두 분 모두 재혼이었다. 두 분 모두 처음 결혼하고 얼마 안되어 첫 배우자를 잃으셨다. 

어머니는 신체적으로 매우 강인한 분이셨다. 어머니는 200파운드*는 되는 곡식 자루를 가뿐히 짊어지고 옮기실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 이렇게 힘이 셌던건 할아버지를 닮아서라고 했다. 내 외할아버지 아르템은 말의 배를 등으로 받치고는 허리의 힘으로 말을 들어올릴 수 있었고, 말의 꼬리를 잡고 한번 힘만 줘서 말을 주저 앉힐 수도 있었다고 한다. 

Georgy Zhukov, Marshal of Victory: The Autobiography of General Georgy Zhukov (Pen and Sword, 2013) Kindle Locations 857-862

*200러시아 푼트는 대략 81kg 정도고 200영국 파운드는 90kg 입니다.


러시아의 어머니는 강합니다!

2016년 4월 17일 일요일

[신간소개]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게하르트 그로스 저, 진중근 역(길찾기 2016)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게하르트 그로스 저, 진중근 역(길찾기 2016)


독일 장교단과 그들의 군사사상은 수많은 군사사 연구자들을 사로잡는 주제입니다. 2차대전 이래로 수많은 연구자들이 전쟁 초기 독일이 승승장구한 원인은 무엇이며, 독일이 우수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패배한 원인은 무엇인가를 탐구해 왔습니다. 냉전시기에는 전쟁 초기의 승리에 초점을 맞추고 독일군의 장점에 주목하는 연구가 많았다면 1990년대 이후로는 독일군과 그 군사사상의 한계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라고 보여집니다. 특히 이런 경향은 미군의 주도하에 작전사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된 미국 학계에서 두드러졌습니다. 그러나 언어적 장벽 때문에 독일어권의 연구는 활발하게 소개되지 못했습니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실패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최근 길찾기 출판사에 발행한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총참모부 작전적 사고의 역사』는 이러한 90년대 이후의 경향을 반영한 독일 학계의 최신 연구성과입니다. 저자인 게하르트 그로스는 2000년대 초중반 국제 군사사학계의 주목을 끌었던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에 참여해 이름을 알린 연구자로 독일의 전통 군사사상에 대한 독일 학계의 권위자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책의 눈에 띄는 장점을 이야기 하는게 좋겠습니다. 영어권의 독일 작전사 연구는 대개 군사적인 측면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여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독일군사상의 기원과 한계에 천착한 미국의 로버트 시티노(Robert Citino), 전간기 독일군 교리의 발전을 연구한 제임스 코럼(James Corum) 등이 당장 떠오르는 군요. 그런데 그로스는 군사적 측면에 더해 사회적, 정치적 측면도 중요하게 고려합니다. 군사사상의 형성을 군사적 측면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집단인 독일 장교단의 세계관, 정치적 이해관계라는 측면에서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독일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중요한 원인인 장교단의 전략적 식견 부족을 설명하는데 유용합니다. 1차 대전에서는 실패할 경우 마땅한 대안이 없는 양면전쟁을 단지 작전적인 차원에서 실행하고, 2차 대전에서도 작전적 수준의 우위만을 믿고 소련과의 전쟁에 돌입한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겠군요. 이 점은 저자가 독일인이라는 데서 기인하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국제 정치에서 독일이 우위에 서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열망, 러시아와 동유럽에 대한 인종적 멸시 등이 전쟁계획에 영향을 끼치고 결국 독일 민족국가의 파멸로 치닫게 했다는 설명은 여러 모로 설득력이 높고 교훈적입니다.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독일의 지정학적인 위치가 군사사상의 형성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는 미국의 시티노도 한 바 있는데, 시티노가 그 시기를 17세기 프로이센의 형성과정으로 까지 올려잡는데 비해 그로스는 독일 제국의 형성과 19세기 산업혁명으로 인한 군사기술의 발전에서 기원을 찾는 점이 차이점 입니다. 저자는 독일 제2제국이 유럽의 정 중앙에 위치해 전략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고 국가가 형성될 무렵에는 잇따른 군사적 혁신으로 군대의 규모가 증가했기 때문에 독일 군사사상가들은 독일의 지리적 위치를 활용한 공세 중심의 군사사상을 가지게 됐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위에서 언급한 정치적인 비판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근본적으로 독일 군부가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을 피할 수 없었고 그 결과는 1차대전으로 귀결되는 양면전쟁이었다는 겁니다.


이 저작은 군사학계의 최신 연구성과를 집약한 서적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 처럼 게하르트 그로스는 ‘슐리펜 계획 논쟁’에 참여하면서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19세기 후반~1차대전 시기를 논한 5장과 6장이 가장 훌륭했다고 생각됩니다. 이 책에서는 10여년에 걸친 슐리펜 계획 논쟁의 결과를 반영하여 슐리펜 계획과 소(小)몰트케의 전쟁계획을 구분하는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면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영어권을 중심으로 한 외국학계에서 진행된 논쟁이 국내에 지속적으로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의 학설에 익숙한 분들이시라면 조금 어색함을 느끼실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이 책에서도 ‘슐리펜 계획 논쟁’에 대해 어느정도 설명하고 있긴 합니다만 조금 아쉽습니다.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전간기 바이마르 공화국의 독일군과 2차대전 시기 독일 국방군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관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미권과 이스라엘 학계에서 독일 국방군의 전쟁 수행을 높이 평가하는 연구자가 많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꽤 흥미롭습니다. 이 시기의 독일군에 대한 비판은 사실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독일 군부의 전략적 식견 부족, 오직 작전이라는 군사적 수준으로 전쟁을 수행해 나간 점은 영미권 군사학계에서도 지속적으로 비판해 온 바 있습니다. 또한 히틀러와 독일 군부의 관계에 대한 평가도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 는 없을 것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3제국 시기 민군관계에 대한 서술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저자는 독일 군부가 히틀러에 대해 맹목적으로 충성을 하다가 전황의 악화에 따라 장교단의 충성에 균열이 가는 모습을 매우 잘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 직후 패전의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쟁 지도의 실패를 히틀러 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렸던 독일 군부를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히틀러가 군사적인 측면에서, 특히 전략적으로 일정한  통찰력을 보유했지만 본질적으로 아마추어적인 전략가에 불과했다는 저자의 결론은 공정한 평가라고 생각이 듭니다. 독일 군부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데, 최소한 1차대전 말기의 독일 군부는 새로운 작전-전술 단위의 해결책을 마련하는 등 제한적 혁신이 있었지만 2차대전 말기에는 군사적 해결책 보다는 국가사회주의에 기반한 사상 무장에 의존하는 등 퇴행적인 면을 보였다는 것 입니다. 저자는 이점이 고질적인 전략적 시야의 부족과 결합해 독일의 철저한 패배로 이어졌다고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냉전 시기 독일군부의 작전적 사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생소한 분야라고 생각되며 그 때문에 이 책의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봅니다. 독일이 패권을 다투는 강대국으로서 국가전략을  수행하던 시기에 형성된 군사사상이 독일의 몰락 이후에는 냉전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생명력을 유지하는 과정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다만 냉전 시기를 다룬 부분은 상대적으로 내용이 소략해 에필로그 같은 느낌을 주는게 아쉽습니다.

전체적으로 평을 하자면, 국제정치와 군사문제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에게는 필독서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국내에 드물게 소개된, 독일인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본 독일 군사사라는 점에서 더욱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최근 군사서적을 활발히 간행하고 있는 길찾기 출판사가 처음으로 발행한 학술서적인 만큼 큰 호응을 얻었으면 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2016년 3월 23일 수요일

독일군 일선부대의 장비 표기 방식을 보여주는 사례 하나

아래 자료는 독일 제4군 작전참모처의 1944년 7월 15일자 보고의 일부입니다.

보고의 1번 항목을 보시면 중부집단군 사령부가 742대전차대대에 구두명령으로 장비를 38(t) 전차로 교체하라고 지시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38(t)는 '헤처'입니다. Panzerjäger도 아니고 그냥 전차라고 지칭하는게 재미있지요. 아래의 2번 항목에서 언급하고 있는 마더, 즉 Sf 38(t)와 구분하기 위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독일군의 일선부대 보고서에서는 장비를 칭하는 방식이 중구난방인 경우가 많은데 이 자료도 그런 사례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Stopa AOK4 A.H.Qu., den 15.7.1944", AOK 64231/8, 4 Ia Anlagen A zum KTB(1944.7.14~7.19), RG242 T312 R246

2016년 3월 11일 금요일

[번역글] 군사적 공유경제: 독일-네덜란드 통합군

날림 번역 한 편 나갑니다.

며칠전 포린 어페어즈 인터넷 판에 재미있는 글이 한편 올라왔는데 오늘 이걸 보고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꽤 재미있는 글이어서 읽자 마자 번역을 했습니다.


군사적 공유경제: 독일-네덜란드 통합군


엘리자베스 브로Elisabeth Braw 

네덜란드 제43기계화보병여단의 장병들은 새로운 직속상관의 지휘에 적응하고 있다. 사실 그들은 다른 나라 군대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바로 독일군이다. 이번달 중으로 네덜란드 제43기계화보병여단은 독일군 제1기갑사단의 예하 부대로 상설 편제될 예정이다. 독일군과 네덜란드군은 병력 뿐만 아니라 전차, 군함, 기타 장비들을 공유할 것이다. 두 나라는 급진적인 개념을 도입하고자 한다. 바로 ‘군사력의 공유’ 이다. 

이 이야기는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네덜란드는 국방예산 감축으로 전차 운용을 완전히 포기했다.(소수의 전차가 비축물자로 보관되어 있기는 하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재단(SIPRI)의 추산에 따르면 네덜란드의 국방예산은 1990년 GDP의 2.5퍼센트에서 2014년 1.2퍼센트로 급락했다. 전차를 비롯한 주요 군사장비는 어느 나라의 군대이건 간에 핵심적인 요소이지만, 네덜란드의 국방예산으로는 전차를 새로 도입하기는 커녕 가지고 있는 것 조차 유지할 수 없었다. 네덜란드 제43기계화보병여단의 여단장 안토니 뢰베링Anthony Leuvering 대령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우리 국방부장관은 ‘네덜란드 군은 전차 운용능력이 필요한데 이제 더 이상 전차를 보유하고 있지 않소. 그러니 독일에 부탁을 합시다.’ 라고 말했습니다.”  

유럽의 군사통합을 옹호해왔던 독일 정부는 이를 지원했고, 독일연방군은 네덜란드 국경으로 부터 40마일 떨어진 지점에 주둔하면서 독일 서부 국경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제1기갑사단의 전차를 네덜란드군도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독일 제1기갑사단은 이라크군 교육을 비롯해 수많은 대외 임무를 수행한 독일군의 정예 부대였다.  

2015년 12월, 새로운 통합사단은 독일과 폴란드 국경의 삼림지대인 오버라우시츠Oberlausitz에서 실험적인 훈련을 실시했다. 이 작전은 두 나라의 군인들이 서로에게 익숙해 지도록하고, 네덜란드 군인들은 전차 운용에 숙달될 수 있도록 복합적인 전투 훈련을 실시하는 것 이었다. 이 훈련에서 양국 군인들은 대부분 독일 연방군 소유의 장비를 운용하면서 주로 독일어로 의사소통을 했다. 올해 2월 독일의 국방장관 우르슐라 폰 데어 라이옌과 네덜란드 국방장관 Jeanine Hennis-Plasschaert는 공식적으로 통합사단 창설에 합의했다. 3월 17일 통합 기갑사단이 편성되면 독일 병사들과 네덜란드 병사들이 네덜란드군 대대장의 지휘를 받게 되며, 네덜란드군 대대장은 독일군 사단장의 지휘를 받게 될 것이다. 통합 기갑사단 사단장으로는 현 제1기갑사단장 요한 랑엔에거Johann Langenegger 소장이 유임될 예정이다.  

현재 계획은 통합 기갑사단이 임무 수행능력을 갖출 예정인 2019년 까지 이 사단이 새로운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기갑사단에 더하여, 2월 부터는 양국 해군이 네덜란드 해군의 5,000톤급 수송능력을 갖춘 보급함을 공동 운용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해상 작전에 풍부한 경험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맞춰서 독일의 항만과 수로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엘리트 잠수사들이 포함된 독일 해군 지상병력 800명이 네덜란드 해병대에 통합될 예정이다. 

두 나라의 군대는 언어 통합도 계획하고 있다. 독일군 대대와 여기에 소속된 네덜란드군 중대에서는 독일어가 공용어로 사용될 예정이다. 여단급과 사단급에서는 장교와 병사 모두 영어를 사용할 예정이다. 하지만 뢰베링 대령도 인정하듯, 두 나라의 문화와 정체성을 융합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뢰베링 대령은 독일인들은 형식에 구애받는 경향이 강하지만, 네덜란드인들은 그런 경향이 덜하다고 덧붙였다. 네덜란드와 독일 국경 근처의 흐로닝언Groningen 대학에서 통합 부대의 문화적 통합 계획과 그 성공 여부를 연구할 연구팀이 꾸려질 것이다.

 
협력 안보 

물론 군사적 협력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예를들어 독일과 프랑스는 1989년 이래로 양국에 주둔지를 두고 있는 4,800명 규모의 통합여단을 운용 중이다. 독불통합여단의 일부는 현재 말리에 파병되어 말리군의 훈련과 지원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독일과 네덜란드는 1995년 부터 독일-네덜란드 연합군단을 위한 통합사령부를 운용하고 있었다. 이 통합사령부는 나토의 후원하에 13개 회원국이 공동으로 작전하는 완벽히 통합된 신속 대응부대였다. 하지만 이런 과거의 통합 부대들은 실전 부대라기 보다는 유럽의 통합과 유럽 국가들간의 분쟁 방지라는 정치적 상징을 위해 조직된 것 이었다.  

최근 수년간 유럽 각지에서 통합된 전투 조직의 편성이 이루어졌다. 유럽 연합 가맹국들은 신속대응군으로 활용하기 위해 회원국의 군대들로 여러개의 전투단을 편성했다. 그리고 작년에 독일과 폴란드는 자국의 1개 대대, 약 500명의 병력을 상대국 군대의 지휘하에 넣는 것에 합의했다. 이와 유사하게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및 리투아니아와 통합 여단을 편성하기 위해 손을 잡았다. 지난 1월 스테판 폴토락 우크라이나 국방장관은 폴란드 통신사 PAP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정부는 이 통합여단이 우크라이나군의 전투력을 향상시킬 동력이 되리라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통합여단은 폴란드 루블린에 본부를 두고 2016년 공식 편성될 예정이다. 통합여단은 우크라이나군을 지원하는 것 외에도 유엔의 평화유지군으로 활동할 것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편제의 부대들은 유럽연합과 나토의 신규 가맹국들이 기존의 서유럽 국가들과 통합될 수 있도록 촉진하는 한편, 자원을 공유함으로서 참여국들의 국방 예산 절감에도 기여하고 있다.  

하지만 두 나라가 양국 군대를 완전히 합쳐서 사단을 통합 편성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마치 마트료시카 같은 제1기갑사단의 편제는 독특하다. 독일-네덜란드 통합기갑사단은 독립된 국제 연합군이 아니라 독일 연방군 소속이다.  뢰베링 대령은 독일 연방군의 이메일 주소까지 가지고 있다. 게다가 독일 연방의회의 동의 없이는 네덜란드 정부가 제43기계화여단을 운용할 수 없을 정도로 이 편제의 통합성은 완벽하다. 

뮌헨의 독일연방군대학 국제정치학 교수인 카를로 마살라Carlo Masala는  기자에게 이와 같은 실험은 “유럽의 군사적 통합을 진전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국가들은 군대를 독자적으로 유지하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독일과 네덜란드의 군사적 공생관계는 그 자체로 성공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동일한 경제, 정치적 연합에 속한, 우호 관계에 있는 국가들이 군사적 자원을 공유하려는 것은 합리적이다. 폰 데어 라이옌 장관은 네덜란드-독일의 군사 통합에 적극적이며, 이에 대해 “유럽 방위 연합”의 모범 사례라고 평하면서 더욱 확대하고자 한다. 

군사 연합을 만드는 것은 유럽인들의 오랜 꿈이었다. 1948년 브뤼셀 조약은 프랑스, 영국, 베네룩스 3국이 통합적인 유럽 방위 체제를 만들려는 시도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4년 뒤에는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이 범유럽 방위군을 조직한다는 조약을 체결했으나 프랑스 의회의 거부로 실패했다. 정치인들은 노력을 계속했다. 유럽연합을 출범시킨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개정안인 2009년의 리스본 조약에서는 잠정적으로 방위 협력을 명시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은 진행되지 않았다. 최근의 4년 동안 유럽 각국의 국방장관들은 유럽 연합 회원국 별로 차별화된 임무를 담당하여 자원을 공유하고 국방비를 절감하는 방안을 협의해 왔으나 실패했다. 

예산과 병력을 가진 유럽 차원의 통합군은 존재하지 않지만, 개별 국가들은 독일과 네덜란드 처럼 군사 협력을 추진하여 예산을 절감하면서도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는 여력이 있다. 뢰베링 대령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성공하게 된다면 다른 나라들도 뒤를 따르겠지요.” 뢰베링 대령과 그의 동료들은 그 때문에 다른 유럽 국가들이 독일-네덜란드 통합기갑사단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 같은 유럽의 강국들이 통합 사단을 편성한다면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두개의 군대가 합쳐지게 되는 셈이므로 그야말로 강력한 존재가 될 것이다. 하지만 두 나라는 상대국의 하위 파트너가 될 생각이 없으므로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리고  잔데이Zandee가 지적하는 것 처럼, 프랑스제 장비들은 독일 연방군의 독일제 무기와 통합해 운용하기에는 부적절하다. 네덜란드는 독일제 장비 뿐 아니라 스웨덴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생산한 장비도 갖추고 있다. 마살라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독일과 네덜란드의 군사 관계는 독일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네덜란드는 보조적인 역할을 맡았기에 가능합니다.” 그리고 “네덜란드 측에서는 경제적 이유 때문에 이것이 합리적이죠.” 

독일과 네덜란드의 군사적 공유경제는 국력 차이가 큰 다른 나라들에서 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살라는 현재로서는 계획이 없으나 프랑스와 벨기에가 유사한 통합 부대를 조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국력이 강한 국가가 첨단 장비만 가지고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약소국을 끌어들일 수는 없다. 잔데이는 “엄청난 신뢰가 없다면 군부가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 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독일에 비하면 약한 나라이지만, 독일측은 우리가 가진 것들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강한 나라가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하위 파트너는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겠죠”라고 지적했다. 독일은 자국을 방위하는데 네덜란드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네덜란드는 항만 및 수로 방어와 같은 중요한 분야에서 특장점을 가지고 있다. 

다시 네덜란드 제43기계화보병여단 이야기를 해 보자. 이 여단의 간부와 병사들은 요즘 독일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다. 독일어와 네덜란드어는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에 이것이 큰 부담은 아니다. 그리고 이제 두 나라의 군인들은 훨씬 어려운 임무에 도전하고 있다. 상대방의 짬밥에 익숙해 지는 것이다.

2016년 3월 7일 월요일

2016년 2월 1일 월요일

대륙의 박스오피스


유리 오제로프의 8시간에 달하는 5부작 장편영화 '해방освобожде́ние'(제작기간 1968~1971, 개봉 1970~1972)은 대조국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전쟁과 평화'로서 전쟁 승리 25주년을 기념해 개봉하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졌다. 모스필름은 이탈리아의 제작자 디노 드 로렌티스, 동독의 DEFA, 폴란드의 PSFZF와 합작하여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했다. '해방'의 1편과 2편은 1970년에 561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여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이중 상당수는 당조직의 '권유'에 의해 관람한 인원이었다. 엄청난 관객을 동원했지만 이 영화는 1970년 소비에트 스크린이 실시한 인기투표에서 4위에 머물렀으며 최고 평점을 준 사람은 15%에 불과했다. 1편과 2편 이후 관객수는 급격히 추락했다. 1971년에 개봉한 3편은 3580만명, 1972년에 개봉한 4편과 5편은 2800만명이 관람했다. 하지만 소비에트 스크린의 1971년도 인기투표에서 3편이 최고의 영화로 꼽혔다. 
Denise J. Youngblood, Russian War Filmes: On the Cinema Front, 1914~2005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7), p.158.

이 책의 저자인 영블러드도 "해방은 나쁜 영화라기 보다는 지루한 영화"라는 평을 합니다만, 소련 인민 중에서도 저 처럼 이 영화를 지루하고 멍청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꽤 됐을 듯 싶네요.

독일군 제128대전차대대의 T-34 운용 보고서

며칠 전에 올린 [번역글] T-34에 대한 재론(再論)을 보충하기 위해 글을 하나 올립니다. T-34를 대량으로 노획해 사용한 독일군의 평가입니다.


이 보고서는 예전에 소개했던 “NARA 소장 독일노획문서에 대한 잡상 - 4. 독일기갑총감부문서 T78 R620”에 실린 보고서입니다. 독일군 제128대전차대대 2중대2./Panzerjäger-Abteilung 128가 T-34와 SU-85를 운용한 결과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지난 번 글의 내용에 나온 것 처럼 엔진을 비롯한 구동계통에 대해서는 혹평하고 있지만 주포 등 무장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를 하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특히 900m 이상의 원거리에서도 명중탄을 기록했다는 기록이 눈에 띕니다. 이미 알고 계시는 분도 많겠습니다만, 이 보고서에 이야기 하는 T-43은 T-34를 말하는 겁니다. 독일군 일선 부대의 보고서에서 말하는 T-43은 크게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전차장 큐폴라가 달린 T-34/76이고 또 다른 하나는 T-34/85를 지칭하는 경우입니다. 오늘 올리는 보고서에서 말하는 T-43은 전자입니다.


참고로 이 보고서는 꽤 유명해서 토마스 젠츠의 Panzer Tracts 19-2에도 이 보고서의 영어 번역본이 실려 있습니다. 다만 젠츠가 내는 책이 다 그렇듯 정확한 출처 명기는 안되어 있습니다.



보고서: 소련제 전차 T-43과 SU-85의 정비유지 및 운용.주) 

소련제 전차의 견인과 유지정비는 아군의 훈련을 잘 받은 전차병이라 할지라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전차의 엔진과 조종방법을 충분히 숙달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독일 전차병에게 소련제 전차를 지급할 때는 전환교육 기간이 많이 필요하다. 

본 중대는 처음에 9대의 소련제 전차를 보급받았는데 이 중 8대의 변속장치가 고장난 상태였다. 이 차량들이 바른 방식으로 운용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일부 차량은 클러치도 고장이 났다. 

소련제 전차의 고장난 부품은 수리하거나 교체해야 했는데, 차량 내부의 부품 중에는 신품이 없어서 처음에는 그 중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부품 조달을 이곳 저곳에서 노획한 전차에서 의존하고 있어서 교체할 부품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같은 형식의 차량을 대량으로 획득할 수 있어야 노획한 전차를 장기간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고 본다. 

아군의 정비 도구는 소련제 전차의 구동계통과 무장의 일부를 정비하는데 적합하지 못하다. 소련제 전차의 정비에 필요한 공구를 설계하고 제작하는데는  상당한 기술이 필요했다. 이런 방식을 모든 부대에 동일하게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노획한 소련제 전차를 운용한 시간은 길지 않지만, 소련제 전차는 항속거리가 길고 최고 속도도 빠르다는 것은 섣부른 일반화이다. 중대가 운용한 소련제 전차의 최고 속도는 시속 10~12km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30분간 기동을 하면 최소한 15분에서 20분 정도는 엔진 냉각을 위해 정지해야 했다.
적의 신형 전차를 운용하는데 있어 가장 문제가 되었고 고장을 자주 일으킨 것은 조향클러치였다. 거친 지형에서 행군하거나 공격기동을 할 때는 자주 방향 전환을 해야 하는데 이럴때 조향클러치가 자주 과열되고 오일이 새어나오곤 했다. 그 결과 더 이상 클러치를 조작할 수 없어서 전차가 기동 불능이 되곤했다. 그 경우에는 클러치를 즉시 식혀준 뒤 디젤유를 발라줘야 했다. 

소련제 전차의 무장을 운용 경험에 의거해 평가하자면, 7.62cm 전차포의 사격성능은 훌륭하다. 정밀하게 조작하여 사격을 하면 장거리에서도 명중율이 높았다. 차재 기관총도 비슷하다. 차재 기관총은 천천히 사격을 하면 명중율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고장도 잘 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본 중대가 운용한 돌격포(SU-85)의 8.5cm 주포도 훌륭했다. 이 포의 실제 관통력을 7.62cm 전차포와 비교했을 때는 아직 정확하게 평가할 수 없다. 고폭탄을 사용했을때는 7.62cm 전차포에 비해 훨씬 먼 거리에서도 정확한 사격이 가능했다.
소련제 전차에 탑재되는 광학장비는 독일제 광학장비에 비해 뒤떨어졌다. 독일군 전차포수는 소련제 조준기에 숙달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소련제 조준경으로 명중탄이나 유효탄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어려웠다. 소련제 T-43 전차의 포수는 조준경 외에 그 왼쪽 앞에 있는 파노라마식 관측경도 사용할 수 있다. 본 중대는 포수용 파노라마식 관측경에 더해 장전수 위치에도 파노라마식 관측경 하나를 추가하여 명중 여부를 보다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소련제 전차의 또 다른 문제점은 단차, 혹은 부대를 지휘하면서 사격을 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이다. 때문에 중대단위의 사격 지휘에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해 부대 단위의 성과에도 제한이 있었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T-43은 전차장 큐폴라가 있어서 지휘를 하면서 동시에 사격 명령을 내리는게 용이한 편이다. 다만 이 전차장 큐폴라에는 외부 관측용으로 매우 작은 관측창이 다섯개 달려 있는데 이것으론 불충분하다. 

소련제 돌격포 SU-85는 이와 달라서 지휘관용 큐폴라가 따로 없다. 소련측은 돌격포의 승무원을 네명으로 정했는데 이 중에서 전차장이 사수를 겸하고 있다.
본 중대는 소련제 돌격포의 승무원 배치를 조금 변경했다. 조종수 1명, 무전수 1명(무전수가 필요에 따라 파노라마식 관측경으로 관측을 보조하도록 했다.) 사수 1명(사수는 포 조준경만 사용하도록 했다.) 다음으로 장전수 1명과 전차장이었다.  전차장은 해치를 열고, 해치의 문 한쪽을 방탄판으로 삼아 차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외부를 관측하면서 단차를 지휘하고 포격 지시도 내리도록 했다. 

T-43과 SU-85는 해치를 모두 닫은 상태에서는 안전한 주행과 지휘를 할 수 없었다. 이것을 보여주는 예로서 본 중대가 이아시Iaşi 교두보 전투의 이틀 동안 경험한 일을 들 수 있다. 하루는  적의 전차 네 대가 참호에 빠졌는데 자력으로는 벗어날 수 없었기에 견인을 시도했지만 아군의 사격으로 이것을 분쇄했다. 둘째 날도 마찬가지 였다.
전투 마지막 날에는 아군 보병의 공격을 지원하던 도중 숲에 있는 적의 사격을 받아 중대의 노획 전차 전차장들이 일시적으로 해치를 닫아야만 했다. 이 때문에 전차를 안정적으로 지휘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아군이 사용하던 노획전차 중 두대가 적의 참호에 빠져버렸다. 이 중 한대는 많은 시간을 들여 자력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다른 한 대는 전투가 끝나고 숲을 완전히 점령한 뒤에야 다른 차량의 견인을 받아 끌어낼 수 있었다. 

노획 전차를 운용하는데 있어 또 다른 어려운 점은 탄약 보급이다. 본 중대는 적 전차를 노획하여 탄약을 확보하고 있다. 탄약을 지속적으로 공급받기 위해서는 격파된 적 전차에서 탄약을 긁어모으는 등의 방식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다. 본 중대는 거의 매일 전선에 부대 일부를 보내서 탄약과 고장난 부품을 교체하는데 필요한 부품을 조달하고 있다. 

지금까지 설명한 바에 의거해 본 중대는 노획한 적 전차를 전차로서 운용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다고 본다. 이아시 교두보 전투의 마지막 날 거둔 성과를 고려하면 노획한 적 전차는 대전차 자주포로 운용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본다. 노획 전차는 적의 대전차소총과 중구경의 대전차포에 거의 타격을 받지 않았다. 포격 또한 승무원에게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다. 공격시 전차장은 전차장 큐폴라의 해치를 열면 관측을 자세하고 충분하게 할 수 있었다. 

본 중대는 5월 30일 제14기갑사단 소속의 한 기갑척탄병연대가 프루트Prut 강변의 골러에슈티Golăiești 근교의 숲을 공격하는 것을 지원하여 적의 주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도록 했다. 5월 31일에는 제23기갑사단의 한 기갑척탄병연대가 프루트 강변의 스탄차Stanca남서쪽의 한 고지를 공격하는 것을 지원해 1개 대대가 적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도록 했다. 전투 과정에서 수많은 벙커를 고폭탄 사격으로 격파했으며 수많은 대전차총과 경대전차포 1문을 파괴했다. 6월 1일에는 제79보병사단 소속의 1개 전투단이 스탄차의 지점197  남서쪽의 분지를 방어하는 것을 지원했다. 낮 12:00경 본 중대의 전차 4대는 적 전차부대가 스탄차 남쪽의 지점197과 198 방면의 고지를 공격해 왔을 때 적 전차 1대를 격파하고 다른 두 대를 기동불능으로 만들었다. 교전 거리는 900~1100m였다. 6월 2일에는 대대 전체가 지점189와 그 서쪽에 대한 적 공격을 방어하는데 투입되었다. 낮 12:00경 적 전차부대가 전날과 같은 방면에서 스탄차 남쪽의 고지군을 공격해 왔다. 본 중대는 그중 네대의 전차를 격파해 불길에 휩싸이게 만들었으며 두대는 기동 불능으로 만들었다. 

6월 1일에 격파한 적 전차 세대는 T-34였다. 6월 2일에 격파한 적 전차 중 3대는 셔먼이었고 3대는 T-34였다.

본 중대는 5월 30일 전투에 투입되었을 때 2대의 SU-85 돌격포와 5대의 T-43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손실: 
T-43 1대: 지뢰를 밟아 완전히 파괴되었다. 
T-43 1대: 지뢰를 밟아 궤도, 보기륜, 유동륜이 파괴됨(중대 정비반에서 수리에 들어감) 
T-43 1대: 변속기 고장(중대 정비반에서 수리에 들어감) 

5월 31일에 본 중대는 2대의 SU-85 돌격포와 2대의 T-43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손실: 
돌격포 1대: 조향 클러치 고장(중대 정비반에서 수리에 들어감) 
T-43 1대: 배터리 손상(현장에서 곧바로 새 배터리로 교체해 수리함) 
T-43 1대: 메인 클러치 손상(중대 정비반에서 수리에 들어감) 

6월 1일 본 중대는 1대의 SU-85 돌격포와  3대의 T-43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날은 손실이 없었다. 

6월 2일 본 중대는 1대의 SU-85 돌격포와 4대의 T-43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날 오후 1대의 SU-85 돌격포가 정비를 마치고 복귀했다. 손실은 없었다.

주) “Erfahrungsbericht: über die Instandsetzung und Einsatz russischer Panzerkampfwagen vom Typ T43 und SU85”(1944. 6. 2), H16/201, RG242 T78 R620






2016년 1월 31일 일요일

미국 NARA 소장 독일군 노획문서 이용에 관한 잡담

재탕(!)인것 같다는 느낌이 들긴 합니다만, 이쪽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 많으니 짤막하게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칼리지 파크에 있는 NARA에서 가장 자료 이용이 개방적인 곳이 바로 마이크로 필름실입니다. 원본 문서들은 그 중요성 때문에 신청서를 따로 작성해야 하지만 마이크로 필름은 그런 절차가 하나도 필요 없습니다. 단지 마이크로 필름실에 들어갈때 NARA 이용증(Research Card)를 제시하면 모든 절차가 끝 입니다. 그리고 마이크로 필름실에 있는 캐비넷에서 자유롭게 필요한 마이크로 필름을 꺼내서 보면 됩니다.

이쪽 벽면이 독일 노획문서의 마이크로 필름 사본입니다.

캐비닛을 열어서 필요한 필름을 꺼내 보면 됩니다. 참 쉽죠.

다만 제가 있을때는 예산 문제가 있었는지 마이크로 필름 리더기가 좀 노후화 된 감이 있었고 출력이 가능한 최신형 기계는 부족해서 이용자가 많으면 사용시간이 제한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비교적 한가한 겨울 시즌에 가면 문제는 없는데 겨울에는 악천후로 NARA 간혹 폐관하는 경우가 있어서 그것도 좀 별로입니다. 그리고 관료조직이라 그런지 파손된 마이크로 필름을 잘 교체하지 않습니다. 인기 많은 무장친위대나 기갑부대 관련 마이크로 필름들은 자잘한 스크래치가 많은데도 그냥 놔두고 있더군요.

인기 많은 기갑총감부 문서 중 하나. 케이스가 너덜너덜하죠.

2016년 1월 27일 수요일

밀리터리 밸런스 2015년 판이 무료로 공개됐습니다.


IISS와 Routledge가 밀리터리 밸런스 2016년판 발행 기념으로 2015년판을 무료로 공개했습니다.

http://explore.tandfonline.com/page/pgas/milbal-free-content-16

무기한 공개하는건 아닌 듯 하니 무료로 열려 있을때 받아 두는게 좋겠습니다.

무료공개라 접속이 폭주하는 건지 다소 느린 감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