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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5일 월요일

맥아더 기념관 - 1

지난달 초에는 버지니아주 노퍽(Norfolk)에 있는 맥아더 아카이브와 기념관을 다녀왔습니다.  이곳은 인터넷이 느려서 사진을 많이 올리면 브라우저가 상당히 버벅거리더군요. 그래서 내용은 별로 없지만 좀 나눠서 올립니다.



맥아더 아카이브의 소장 자료를 개략적으로 조사하러 갔는데 예상대로 특별히 NARA와 차별되는 자료는 없더군요. 대신 그곳에 간 김에 바로 옆에 있는 기념관도 함께 구경을 했습니다.

맥아더 기념관 구관. 바로 옆에 신관이 들어섰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묘사한 꽤 유명한 부조

그런데 마침 제가 방문했을때는 맥아더 기념관 신관이 개관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정확히 제가 방문하고 일주일 뒤에 개관했다고 하더군요.

맥아더 기념관 신관
곧 신관이 개관할 예정이었지만 구관도 아직 볼만한 전시물이 조금은 남아 있더군요. 일단 구관에 들어서면 먼저 맥아더와 그의 부인이 안치된 두개의 관이 관람객을 맞이 합니다. 주변은 맥아더가 참가한 전역과 그가 지휘했던 부대들의 부대기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꽤 인상적인 배치였습니다.

상당히 인상적인 배치였습니다

맥아더와 부인의 관

전시관의 전시물은 비교적 평이한 편이었습니다. 맥아더의 이력과 당시 국제정세를 간략히 설명해주는 전시판과 관련된 전시물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주로 복식, 군장, 소화기 등이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특별한 설명은 필요가 없을 듯 싶으니 사진만 올리겠습니다.

맥아더의 초기 군경력을 보여주는 전시판

1903년 경의 미육사 생도 제복
1차대전 시기를 다룬 전시실
맥아더의 초기 군생활을 다룬 전시실 다음에는 1차대전기 맥아더의 활동을 다룬 전시실이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군장, 소화기류 중심으로 전시가 되어 있는데 그래도 눈에 확 들어오는 전시물이 하나 있더군요. 1차대전 당시 서부전선의 참호를 1:1로 재현한 디오라마였습니다.

은근히 그럴싸 합니다.
상당히 괴로워 보입니다(?)
대부분의 전시물은 이런 군장류 입니다
가장 위에 있는 훈장이 맥아더가 1차대전 당시 수여받은 공로기장이랍니다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전간기를 다룬 전시물은 대부분 설명문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내용은 상당히 알찬 편이지만 책에서도 알수 있는 내용들이라서 사진은 생략.

태평양전쟁 초기를 다룬 전시실도 특별히 다를 것은 없지만 재미있는 전시물이 아예 없지는 않았습니다. 맥아더가 코레히도르 시절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권총이 그 중 하나입니다.

맥아더가 코레히도르에 포위되어 있을 당시 소지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권총이랍니다
맥아더가 코레히도를 탈출할때 탑승한 PT-41의 모형



2012년 10월 5일 금요일

한국공군 조종사의 출신별 통계(1949년)

땜빵 포스팅 하나 나갑니다.

이 포스팅에서 인용할 통계는 주한미대사관과 주한미군사고문단이 한국공군에 전투기를 원조하는 계획을 마련할때 실시한 한국공군 조종사의 출신에 대한 조사입니다. 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일본군 출신이 압도적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북한이 일본군 출신 조종사들에 의존한 것과 비슷한데 전문적인 훈련이 필요한 분야일수록 기존 지배체제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표. 한국공군 조종사의 출신별 통계(1949. 12. 7)
조종사
총 비행시간
(1946년까지)
전투기 조종사
출신
폭격기 조종사
출신
수송기 조종사
출신
1
9,800


1(일본군)
1
6,000

1(중국군)

4
2,500
2(일본군)
1(일본군)
1(일본군)
5
1,500
1(일본군)
2(일본군)
2(일본군)
5
700
1(일본군)
1(일본군)
3(일본군)
13
500
1(미군)
8(일본군)
4(일본군)
10
400
4(일본군)
3(일본군)
3(일본군)
13
300
8(일본군)
1(일본군)
4(일본군)
11
200
8(일본군)

3(일본군)
(표출처 : Despatch No.777, “Enclosure No.1, Present Personnel Experience Factors”(1949. 12. 7), RG330 Entry 18 Box68  Assistant Secretary of Defense((International Security Affairs), Office of Military Assistance Project  Decimal File, Apr 1949~May 1953)

2012년 7월 11일 수요일

면도를 해야 하는 이유

김용식 전 외무부장관이 1949년 1월 필리핀에 파견된 변영태 대통령특사를 수행했을 때의 일이랍니다.

변(영태) 특사는 20여년 동안 계속 아침 저녁으로 아령 운동을 한다고 했다. 마닐라 시절에도 아령을 구하여 어김없이 그 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래서인지 당시 57세인 그는 30대인 나보다 건강하고 단단했다.

“김 변호사, 기운이 있으면 내 배를 한 번 힘껏 쳐 보시오.”

나는 몇 차례 망설이다 힘껏 그의 배를 쳐 보았다. 과연 변 특사의 배는 시멘트 벽과 같았다.

그런데 그의 배 못지않게 그가 자랑하는 것이 그의 콧수염이다. 그러나 그 수염 때문에 봉변을 당한 일이 있었다. 그 사건은 백화점 앞에서 벌어졌다. 몇 가지 물건을 사 가지고 내가 막 백화점 문을 나서는데, 먼저 나간 변 특사가 사람들에게 포위당해 있었다. 형세가 험악해 보였다. 변 특사는 나에게 “이들이 나를 일본 장교로 아는 모양이야”라고 말했다. 필리핀 사람들은 변 특사를 콧수염 때문에 일본인으로 오인하고 있었다.
사람의 수가 불어나면서 분위기는 자꾸만 험악해지는 것 이었다. 나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내가 가지고 있던 마닐라 신문이 생각났다. 그 신문에는 우리의 기사와 함께 사진이 실려 있었다. 나는 모여드는 필리핀 사람들에게 그 신문을 보이면서, “보시오, 우리가 바로 여기 실린 한국 대표요”하고 말했다.
그제야 팔을 휘두르며 욕설을 하던 그들은 물러서고, 그중 한 사람이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필리핀 사람들은 2차대전 당시에 겪은 일본군에 대한 증오심을 몇 해가 지나도록 잊지 않고 있었다.

김용식, 『새벽의 약속 : 김용식 외교 33년』, (김영사, 1993), 40~41쪽

이래서 깔끔하게 면도를 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응?

2012년 5월 7일 월요일

2차대전 중 미국의 화학전 검토에 대한 잡상

John Ellis van Courtland Moon이 1989년에 Journal of Strategic Studies에 기고했던 “Project SPHINX: The Question of the Use of Gas in the Planned Invasion of Japan”라는 논문을 읽다보니 앞부분에 꽤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미국이 1945년 이전에는 일본을 상대로 화학무기 사용을 적극적으로 검토하지 못했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943년의 타라와 전투에서 미군이 상당한 인명손실을 입은 뒤 미국내에서 일본을 상대로 화학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조금씩 힘을 받기 시작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1944년 9월에 일본을 상대로 화학무기를 사용하는데 찬성하는 여론은 23% 남짓이었는데 1945년 6월에는 40%까지 늘어났다고 하지요. 타라와 전투 이후 일본군이 각 지역에서 보여준 극단적인 저항은 미국인들에게 상당한 문화적 충격을 주었던 모양입니다. 일본군의 저항으로 인명손실이 높아지면서 대중과 언론은 물론 미육군 내에서도 요새화된 섬에서 저항하는 일본군을 상대로 화학무기가 효과적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특히 미육군 화학전국Chemical Warfare Service의 국장 포터William N. Porter 소장은 일본을 상대로 화학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펼친 인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포터 소장의 제안은 육군참모본부 작전국에서 검토만 되었을 뿐 1945년 이전에는 그 이상의 단계로 나가질 못했습니다.

문은 그 이유를 몇가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루즈벨트 대통령이 화학무기 사용에 부정적이었다는 점 입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이 먼저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것에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제시하는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미국은 일본군을 상대로 화학무기를 사용할 경우 유럽전선에서 독일이 화학전을 전개할 가능성을 우려했다는 것 입니다. 일본군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강력한 화학전 능력을 갖춘 독일이 화학무기를 뿌려댄다면 제법 골치가 아팠을 것 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사망한 것과 함께 독일의 항복도 미국이 1945년 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을 상대로 한 화학전을 진지하게 검토한 이유라는 것 입니다.

이점을 보면 냉전기에 핵무기 사용을 둘러싼 논의가 연상됩니다. 특히 독일의 화학전 능력이 상대적으로 화학전에 대한 보복수단이 마땅치 않은 일본에 대한 억지력으로 작용했다는 설명은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마치 핵무장을 한 강대국이 하위 동맹에 대한 핵억지력을 제공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고 할까요.

2011년 12월 25일 일요일

마이웨이를 봤습니다

마이웨이를  봤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꽤 볼만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지적하시는 것 처럼 연출상의 문제가 심각하고 사소한 고증 문제가 있기는 한데 참으면서 볼 정도는 됐습니다. 7광구 같은 졸작을 이미 경험했다 치더라도 예상외로 나쁘지 않은 영화였습니다. 좋은 영화라고 할 수 는 없겠지만 괜찮은 영화라고는 할 수 있겠습니다.

일단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요소부터 이야기 하겠습니다.

1. 주인공 김준식이 너무 평면적이고 매력이 없습니다. 그렇게 심한 고생을 하고 학대를 당한것 치고는 감정의 기복이 없어 보입니다. 캐릭터 자체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지만 묘사하는 방식이 영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사실 일본군 병영이건 소련 포로수용소건 노르망디 해안이건 어디서나 줄구장창 마라톤 연습을 하는게 어색할 정도로 작위적이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소련 수용소라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중노동에 시달렸을 텐데 달리기 할 기운이 남아있다니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미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연출이 아쉬웠습니다.

2. 판빙빙이 연기한 쉬라이라는 캐릭터는 너무 엉뚱해서 짜증이 났습니다. 쉬라이라는 인물을 삭제하고 대신 독일군 포로수용소나 이야기의 개연성을 강화시켜 줄 다른 부분을 넣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 같습니다. 중국 시장을 염두에 둔 것인지 억지로 ‘항일애국지사’를 집어 넣은게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주인공을 두 사람으로 만든 지점에서 이미 해야 할 이야기가 산더미 같은데 뜬금없는 등장인물이 하나 더 튀어나오니 이야기의 흐름을 끊는 것 같아 불편했습니다.

3. 이야기의 진행이 매끄럽지 못합니다. 해야 할 이야기에 비해 시간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습니다. 16부작 정도 되는 TV용 드라마로 만들었다면 훨씬 괜찮은 이야기가 되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Das Boot처럼 TV용으로 따로 편집을 한다면 훨씬 좋을 것 같은데 그럴 가능성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노몬한에서 독소전쟁 까지는 어쨌거나 이야기가 그런대로 이어지는데 주인공 두 사람이 헤어진 뒤 갑자기 화면이 전환되면서 1944년의 프랑스로 이동하는게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4. 전투 장면의 연출이 매우 아쉽습니다. 처음의 1차 노몬한 전투는 상당히 스펙터클한 느낌도 들었고 매우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음의 2차 전투가 영 아쉽더군요. 압도적인 소련군의 전력과 일본군의 비인간적이고 무모한 전술을 비교하려는 시도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전차와 인간의 대결에 집중한 것 같습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합성한 전차들만 스크린을 가득 덮고 있으니 뭔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습니다. 중간 중간 소련 보병이라도 튀어나와 주었으면 덜 밋밋했을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독소전쟁은 너무 애너미 앳 더 게이트의 느낌이 나는게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노르망디는 극적인 흐름을 위해서 다소 무리한 연출을 한 느낌이 듭니다. 상륙부대가 해안을 휩쓴 뒤 공수부대가 낙하하는 건 극적인 연출을 위해서 무리하게 집어넣은 장면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이 외에도 황당한 요소가 많은데 영화이니 그냥 넘어가지요;;;;

5. 마라톤이라는 요소가 사건의 발단 외에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영화 도입부의 마라톤 장면도 일본의 폭압적인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서 단순하게 묘사되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김준식이 계속해서 달리기 연습을 하는 것 말고는 마라톤이 이 영화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요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육상선수 출신의 주인공을 다룬 영화 ‘갈리폴리’에서는 달리기라는 요소가 영화의 막바지에 비극을 강조하는 요소로 잘 녹아들었는데 마이웨이에서는 그 점이 참 아쉽군요.

이런 부분들이 개선되었다면 더 볼만한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래도 대작 답게 볼만한 부분도 많았습니다. 나름 돈 값은 했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이 영화에서 마음에 들었던 부분을 조금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1. 공동주연 중 한명인 오다기리 조가 연기한 하세가와 타츠오는 영화를 통해 큰 변화를 겪는 인물이어서 ‘마라토너 김준식’에 비해 훨씬 좋은 캐릭터였습니다. 지나치게 과장된 면이 있기는 하지만 군인인 할아버지에 대한 동경과 조선인에 대한 증오로 뭉쳐 전쟁을 열망하게 된 청년이 고통스러운 현실에 직면해 내면의 변화를 일으키면서 인간적으로 성장해 가는 설정은 뻔하지만 나름대로 좋았습니다. 특히 소련 포로수용소가 묘사된 부분은 이 배우의 매력을 잘 살려준 것 같습니다. 주인공 다운 인물이었습니다.

2. 조연으로 나온 배우들이 괜찮습니다. 김인권이 연기한 안똔은 이 영화에서 가장 현실적으로 보이는 인물입니다. 김준식과 이 인물을 합쳤다면 영화가 훨씬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영화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무너진 인물인데 이 인물 덕분에 소련 포로수용소 장면이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볼만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김인권이 조연으로 나온 영화를 보면서 그다지 주목한 일이 없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상당히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타츠오의 부관으로 나온 소좌도 분량은 짧지만 인상 깊은 인물입니다. 가족을 그리워 하며 나무인형을 다듬는 소박한 모습이나 비극적으로 사망하는 장면은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영화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인간성’ 때문에 집어넣은 것 같지만 충실히 제 역할을 해 준 것 같습니다. 타츠오를 인간적으로 성장하게 하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는 점에서 후하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어떤 배우인지 궁금해서 네이버나 다음의 영화 정보를 뒤져봤는데 정보가 없더군요.
그리고 천호진은 짧게 등장했지만 정말 좋습니다. 짧게나마 이 배우를 보여준 감독께 감사. 이 배우는 무슨 역을 해도 잘 어울리는것 같습니다. 별로 중요한 역할은 아니지만 천호진의 연기를 본 것 만으로도 9천원 중 천원 이상의 가치는 되었습니다.

3. 자잘한 디테일이 마음에 듭니다. 저는 홍보에서 강조한 노몬한이나 노르망디 전투 보다는 영화 초반에 묘사한 1930년대 경성이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강제규 감독은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1950년대의 서울을 묘사한 바 있는데 그 당시 보다 이 도시를 훨씬 더 잘 다룬 것 같습니다. 중간 중간 스쳐지나가는 사소한 배경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삭제된 장면 중에는 베를린을 다룬 부분도 있는 듯 한데 그것도 아쉽군요. 공간적으로 풍부한 느낌이 들어 좋았습니다. 주인공 중 한 명인 오다기리 죠는 끝내 런던까지 가는군요.

4. 영화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인간성의 회복 문제는 지겹도록 반복되지만 그럼에도 전쟁영화에 가장 잘 맞는 주제 같습니다. 엉성하게 민족의 비극 타령이나 하는 영화들에 비하면 훨씬 낫지요. 연출이 부실해서 안타깝지만 영화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주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다 알지만 속아주고 싶은 그런 느낌입니다.


이 영화는 현재 기대에 못 미치는 흥행성적을 거두고 있습니다. 사실 저도 다른 분들에게 적극적으로 권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어딘가 엉성한 부분도 있고 영화적인 완성도가 썩 높다고 할 수도 없지요. 하지만 지나치게 저평가되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최소한 별 한개짜리 영화는 아닙니다) 저는 영화를 볼 때 열심히 만들었다는 느낌이 들면 좀 더 후하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마이웨이도 그런 영화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시간이 허락한다면 한 번 더 극장에서 볼 생각이 있습니다. 감독판으로 재개봉 할 수 있다면 좋겠군요.

2011년 9월 19일 월요일

전통의 재발견

전통이란 때마다 재발견되고 재해석 되는 것이라지요.

제군, 우리들이 대동아전쟁의 진두에 섬은 물론 일본국민의 충의성忠義性에 투철하기 위해서지만 다시 우리 조선사람의 입장으로서 본다면 또 하나의 간절한 기대가 여기 숨어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이 잃어버린 '마음의 고향'을 발견하는 것이요, 잠자는 혼을 깨우쳐 우리들 본연의 자태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나약안일에 더럽힌 남루를 벗어던지고 '의'에 살고 '의'에 죽고 '용'에 일어서고 '용'에 넘어짐을 제일의로 한 우리들의 그전 모습을 찾아내는 길이다. 가마쿠라무사들과 함께 세계역사상에 무사도의 쌍벽이라고 일컬어 온 바 고구려 무사, 신라 무사의 무용성武勇性을 찾아내어 그 씩씩한 전통을 우리들의 생활원리로 하고 우리들의 정신적 부활을 꾀하는 것이 오랫동안 우리들에게 요망되어 오던 바 그 절호한 기회가 대동아의 전장에 그 특별지원병으로서의 용맹한 출진에 의하여 발견되는 것을 나는 통감하는 바이다.

崔南善, 「나가자 靑年學徒야 : 젊은 피와 情熱을 聖戰에 바치라」, 『每日新報』(1943. 11. 20), 정운현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없어지지않는이야기, 1997), 228쪽에서 재인용

생각해 보면 나치들도 노르웨이에서는 바이킹을, 벨기에에서는 중세 플랑드르 기사들을 팔면서 지원병을 모집했으니 일본군 모집에 고구려 무사를 팔아먹는 것도 나름 그럴싸 합니다?

2011년 8월 30일 화요일

전쟁 말기 일본육군의 차량 부족에 대한 잡담

아래의 글에서 일본군의 궁색한 대전차 전투 사례를 하나 다루긴 했습니다만 2차대전기 일본 육군의 장비상태를 보면 이게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열강이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물론 태평양 전쟁이 해전 위주였고 일본해군이라면 세계 일류급 해군이긴 합니다만 육군과 육해군 항공대의 질적 수준은 삼류라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니 말입니다. 게다가 질적수준은 물론이고 양적 수준도 형편없지요.

태평양 전쟁 종전 직후 미군이 일본군을 무장 해제한 기록을 보면 본토결전을 위해 일본 육군이 준비한 전력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장기간의 소모전을 겪은 이후라 하더라도 1944년 말 부터 본토결전 준비를 한 것 치고는 준비가 영 부실한게 눈에 띄입니다. 조금 극단적인 사례일 수 있는데 규슈에 배치된 제16방면군 예하 40군의 경우 군 전체에 트럭 186대, 기타 차량 64대, 장갑차 46대 등 총 296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장갑차를 제외한다면 250대의 차량이 있는 셈이지요.1) 일본 제40군은 1945년 1월 8일 편성에 들어갔고 여기에 총 4개 사단과 1개 혼성여단이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제303, 206, 146, 77사단과 독립혼성 125여단이지요. 그냥 단순하게 계산해서 제40군에 배속된 각종 지원부대를 제외하면 총 15연대(303사단 3개연대, 206사단 3개연대, 146사단 4개연대, 77사단 3개연대, 제125여단은 5개대대 편성이니 대략 2개연대로 계산)에 차량 250대, 1개 연대에 차량 16~17대 정도가 돌아가는 셈입니다;;;; 여기에 군 직할대를 포함시켜서 나눈다면 그 숫자가 더 줄어들겠지요. 사실상 미군이 직접 공격해 왔다면 신속한 기동은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40군은 303, 206, 146사단과 독립혼성125여단 등 총 3개사단과 1개 여단을 해안 방어에 투입하고 있었습니다.2) 제40군의 유일한 예비대로는 77사단만이 남는 셈인데 뭐 신속한 기동이 어려우니 미군이 상륙해 왔을 경우 어떻게 되었을지는 상상만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다른 곳과 비교해 본다면 어떨까요? 제 개인적으로 일본군의 본토 결전준비와 비교할 만한 대상으로는 독일군의 북부 프랑스 방어준비가 적합할 듯 싶습니다. 동부전선에서 장기간의 소모전을 거친 뒤 방어를 위해 수개월간 전력을 급히 축적한 사례이니 비교대상으로 적절하지 않을까 싶군요. 먼저, 위에서 언급한 일본군 보병사단들과 비슷하게 차량화 우선순위에서 뒤떨어지는 제6강하엽병연대의 경우 연합군의 상륙 직전 70대의 트럭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3) 장비 상태가 나쁜 축에 속했던 272보병사단의 경우는 오토바이를 제외하고 105대의 자동차, 136대의 트럭, 71대의 견인용 트랙터를 보유하고 있었고 비교적 양호한 수준으로 볼 수 있는 353보병사단은 오토바이를 제외하고 573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4) 매우 거친 비교이긴 합니다만 일본군에 비교하면 차량화 수준이 상당히 양호한 편입니다.

물론 1945년 봄 본토방어를 위해 준비한 독일군과 비교하는게 타당하다고 보시는 분들도 계실 것 입니다. 1945년 봄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는 독일군 보병사단도 상당히 엉망입니다. 약간의 예를들면 제167국민척탄병 사단은 1945년 3월 중순 편제의 13%의 차량만 갖추고 있었고 제326국민척탄병 사단의 경우는 아예 말과 마차만 갖추고 있었습니다.5) 하지만 그 당시의 독일군은 껍데기만 남긴 했어도 어느 정도의 기동부대들을 유지하고는 있었지요. 그 점에서 1945년 봄의 독일육군 조차도 일본 육군 보다는 조금 나은 수준이라고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사실 국민돌격대에 판쩌파우스트라도 쥐어준 것을 보면 아무래도 독일이 일본 보다는 좀 낫지 않습니까.




1) John Ray Skates, The Invasion of Japan : Alternative to the Bomb,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Press), p.190
2) John Ray Skates, ibid., p.120
3) Hans-Martin Stimpel, Die deutsche Fallschirmtruppe 1942~1945 : Einsätze auf Kriegsschauplätzen im Osten und Westen, (Mittler&Sohn, 2001), p.156
4) Niklas Zetterling, Normandy 1944 : German Military Organization, Combat Power and Organizational Effectiveness, (J.J.Fedorowicz, 2000) p.252, 282
5) John Zimmermann, Pflicht zum Untergang :  Die deutsche Kriegführung im Westen des Reiches 1944/45, (Schöningh, 2009), p.229

2011년 8월 27일 토요일

읽는이를 답답하게 하는 일본 육군의 대전차전 사례 하나

2차대전 당시 일본군 보병의 빈약한 대전차전 능력은 아주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래서 유럽전선이었다면 전차들이 보병의 손쉬운 사냥감이 되었을 상황이라도 일본군은 별 볼일 없는 성과만 거뒀던 것 같습니다. 아래의 사례는 레이터 전투 당시의 일화입니다. 보시면 아시기겠지만 보병이 제대로 된 대전차 화기를 갖췄다면 그야말로 전차가 큰 피해를 봤을 상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차를 공격한 쪽이 일본군이었다는 것이죠;;;;

제763전차대대는 96보병사단에 배속되었다. 이 대대는 상륙 당일 산 호세San Jose인근에 상륙했다. 763전차대대는 보병을 지원하면서 내륙으로 수천 야드를 진격했지만 해안가 뒤로 펼쳐진 습지대에 가로 막혀 옴싹달싹 못하게 되었다. 보병들만 계속해서 전진했다.

10월 22일, C중대와 D중대의 3소대는 무르고 질척거리는 지형에 가로막혀 다시 해안으로 되돌아가 가야 했다. 이들은 해안에 도착하자 (북서쪽으로 4마일 떨어진) 피카스Pikas로 가는 길을 찾은 뒤 그곳에서 어려움에 처해 있는 383보병연대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찰스 파이페Charles G. Fyfe중위가 지휘하는 C중대의 1개 소대에 래퍼티David M. Rafferty가 지휘하는 D중대의 경전차 소대가 배속되어 이 임무를 맡게 됐다. 보병들은 이 전차 부대들이 지나가야 할 지역을 거쳐서 진격했지만 일본군을 정글에서 완전히 소탕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전차들이 지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의 오른쪽 측면의 카트몬Catmon산에는 우회하고 넘어간 일본군의 대규모 거점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차를 보호할 보병이 전혀 배속되지 않았다.

피카스로 가는 길은 상태가 나쁜데다 구불구불했고 교량은 통과 가능한 하중이 낮았다. 대열을 선도하는 중형전차가 교량을 망가트렸기 때문에 후속하던 경전차들은 전차가 건널 수 있는 얕은 여울목을 찾아야 했다. 이 때문에 경전차 소대는 다소 뒤쳐지게 되었다.

보병이 배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전차와 중형전차 모두 지나가는 길에 있는 여울, 커브길, 오르막길 마다 주의를 하며 지나갈 필요가 있었다. 경전차들이 막 한 고비를 넘기려 했을 때 도로 왼편의 덤불 속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며 갑자기 막대기에 달린 폭약을 가진 일본군 한명이 덤불속에서 튀어 나와 선두 전차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일본군 병사는 후속하던 전차의 사격에 의해 중간에 쓰러졌다. 길을 따라 수백 야드 더 전진하자 도로의 오른편에 있는 무성한 덩쿨속에서 또 다른 일본 병사가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선두 전차가 당해서 오른쪽 궤도가 파괴되었다. 전차장 래퍼티 중위는 자신의 전차를 수리하는 동안 소대의 다른 전차들에게 자신의 전차를 둘러싸고 경계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차들이 경계 대형을 취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적군이 공격해 왔다. 군도를 휘두르는 장교가 이끄는 약 30명의 일본군이 덤불 속에서 튀어나왔다. 일본군들은 고함을 지르고 사격을 퍼부으면서 전차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일본군 장교는 뭔가를 잘못 알고 있었는지 자신만만하여 마지막 전차로 달려들었고 차체의 기관총을 군도로 힘껏 내리쳐 반쪽을 내려고 했다. 그 장교는 곧바로 다른 전차의 기관총에 벌집이 되었다. 짧지만 요란한 교전이 끝나자 일본군은 후퇴했지만 계속해서 가까운 거리에서 경전차 소대를 소화기로 공격했다.

그때 중형전차 소대는 상당히 앞서가고 있었다. 래퍼티 중위는 파이페 중위에게 무전을 날려 그의 소대가 어려움에 처했다고 알렸다. 일본군의 사격 때문에 노출된 상태에서 이동하는 것이 어려웠고 경전차는 공간이 좁아서 기동불능이 된 전차의 승무원들 까지 태울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전차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파이페 중위는 경전차 소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으나 전차 한대 만을 좁은 길을 따라 돌려보낼 수 있었다. 이 전차는 불운에 처한 경전차 소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래퍼티 중위와 그의 부하들은 자신들의 전차의 탈출용 해치로 빠져나와 도랑을 따라 기어서 구출하러 온 중형 전차의 탈출용 해치로 들어갔다. 그리고 경전차 소대는 후퇴를 하려 했다.

일본군의 강력한 사격 때문에 이 기동은 매우 어려웠다. 다른 전차 한대가 막대기 폭약에 맞았다. 이동하는 것 보다는 정지해 있는 것이 덜 위험한 것으로 보였다. 파이페 중위에게 교신이 취해졌고 파이페 중위는 다시 중대장에게 알렸다. 그리고 경전차 소대는 그 위치에 남아 일본군이 모습을 드러내면 사격을 산발적으로 가했다.

마침내 C중대에서 다른 중형전차 소대가 도착했다. 일본군은 격퇴되었고 부대 전체가 중대 지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루가 꼬박 지나갔다. 조금도 진격을 할 수 없었다. 전차 한대를 상실했다. 전차들은 383보병연대에 도착하지 못했다.

Committee 16, Officers Advanced Course  The Armored School, Armor in Leyte : Sixth Army Operations, 17 Oct-26 Dec 44, (1949). pp.94~97

전차에게 불리한 정글에서, 게다가 좁은 도로를 중심으로 지원하는 보병조차 없이 고립된 경전차 1개 소대를 격파하지 못한 것 입니다. 일본군의 대전차 전력이 얼마나 빈약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같은 시기의 독일군 이었다면 763전차대대 D중대의 경전차 소대는 물론이고 구원하러 달려온 C중대의 중형전차 소대도 상당한 손실을 각오해야 했을 것 입니다. 실제로 독소전 초기 다소 빈약한 대전차 화력을 갖췄던 독일 보병들이 위에서 제시한 사례와 같은 지형에서 T-34나 KV 등의 강력한 전차를 상대로 보여준 실력을 보면 일본군은 장비만이 문제였던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전차의 성능이 보잘것 없었던 1935년의 이탈리아-이디오피아 전쟁만 하더라도 보병들이 변변한 대전차 화기 없이 경전차를 때려잡을 수 있었습니다만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 전차는 기술적으로 무서운 발전을 이뤘지요. 사실 셔먼은 그렇다 하더라도 1944년 기준으로 별볼일 없는 성능이었던 스튜어트 경전차들 조차 격파하기 어려운 상대였다니 일본 육군은 장비면에서 정말 답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2011년 1월 11일 화요일

抗日奇侠

중일전쟁에 대해 검색하던 중 왠지 재미있어 보이는 동영상이 하나 걸렸습니다;;;;;

대충 보아하니 무공으로 일본군을 파리잡듯 때려잡는 이야기인데 깔깔대며 보기에 좋을 듯 싶습니다.

2010년 6월 30일 수요일

일본의 군사혁명

어쩌다 서점에 간 김에 책을 조금 샀는데 그 중의 한 권이 『일본의 군사혁명』 입니다. 올해 2월에 발행되었으니 제법 신간에 속하는 군요.

꽤 흥미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 주저하지 않고 샀는데 사실 제가 일본사, 특히 20세기 이전의 일본사나 그 연구경향에 대해서는 완전히 깡통인지라 이 책에 대해서 뭐라고 평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저자인 구보타 마사시(久保田正志)는 일단 책에 소개된 약력에서 도쿄대에서 법학을 연구했고 현재 일본에서 성새사적(城塞史跡) 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인물이라고 되어 있고 또 저자 후기에는 1984년 이래 군사사 연구를 계속해 오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일본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 연구자인지 궁금합니다.

책 자체는 아주 재미있게 읽힙니다. 아직 앞부분과 결론 부분만 살펴 본 정도이지만 일본사에 문외한인 입장에서 꽤 흥미로운 서술이 많군요. 일단 저자가 '군사혁명(Military Revolution)'이라는 개념으로 일본의 전쟁양상 변화를 설명하려 하고 있어서 같은시기 유럽과 비교해서 서술하고 있는데 덕분에 이해가 잘 가는 편입니다. 앞부분을 조금 읽다가 꽤 재미가 있어서 결론을 먼저 읽어보게 됐는데 저자는 이시기 일본의 전쟁양상이 가진 특징을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1. 일본 또한 동시기 유럽과 마찬가지로 14세기 이후 창을 사용하는 보병중심의 전술로 움직였다. 그러나 유럽과 달리 모든 창병이 밀집대형을 취하지는 않았는데 주된 이유는 일본의 기병은 유럽의 기병보다 덜 위력적이기 때문이었다.

2. 기병의 위협이 적었기 때문에 총포가 도입된 뒤에도 유럽과는 다른 발전양상을 보였다. 즉 유럽과 달리 탄막사격 대신 저격을 중심으로 하는 발전이 이루어졌다. 또한 유럽에서는 총병의 등장과 상비군의 발생이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데 일본은 그렇지 않다.

3. 일본 말의 열등한 체격은 대포를 사람이 견인하는 소형포 위주로 발전하게 했으며 이때문에 축성 양식도 총포사용을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이 때문에 유럽 처럼 성곽의 높이가 낮아지지 않았다.

4. 총포의 도입은 유럽과 마찬가지로 사상률을 높였다. 그러나 일본의 독특한 군사문화가 유럽과 다른 방향으로 나가게 했다. 일본의 군사문화는 수급 획득을 중시했다. 총포의 도입으로 인한 사상률 증가는 수급 획득의 기회를 늘렸으며 군사문화의 특성으로 적의 지휘관, 사령부에 대한 공격 지향이 강했다. 이것은 전역을 조기에 종결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유럽과 달리 전쟁이 장기전으로 가지 않게 되는데 영향을 끼쳤다.

5. 유럽은 군사혁명의 과정으로 들어가면서 병농일치를 통한 병력 확대가 이루어졌는데 일본에서는 전란이 조기에 종결되면서 잉여 병력이 늘어나면서 병농분리와 상비군화가 진행되었다.

6. 죠프리 파커 등은 일본에서는 군사혁명이 '중단' 되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이것은 일본사의 특성을 무시한 것이다. 유럽의 군사혁명은 전쟁의 장기화의 결과였으나 일본은 통일을 이루면서 유럽과 같은 군사혁명의 과정을 밟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즉 군사혁명이 중단된 것이 아니라 필요한 범위 내에서 군사혁명을 완료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유럽군사사와의 비교분석이 꽤 흥미롭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나중에 渤海之狼님 같이 일본전통군사사를 공부하시는 분들을 뵐 때 한번 고견을 들어봤으면 합니다.

일단 국내에도 일본 전통군사사에 대한 책이 나왔다는 사실이 꽤 반갑습니다.

2010년 2월 5일 금요일

황군의 정신력은 세계 최강?!?!

쇼와(昭和) 15년(1940년), 지나 전선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우고 귀국한 김석원 중좌는 어떤 잡지에 이런 글을 기고하셨더랍니다.

나는 전지에 나갓슬때 황군의 아름다운 행동이며 부상병이 엉금엉금 기여가면서 돌격해 나가든그 눈물나는 정경을 생각하면 전쟁이란 반드시 무긔로만 익이는 것이 아니라 용사들의 아름답고, 놉고, 굿센 정신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와 갓흔 정신이 투철한 우리 황군이 세계에서 제일 강한것은 당연한 리치입니다. 명치 37, 8년 일로전쟁때 탄환대신으로 2만명의 황군이 적의 진지에 뛰여드러가 성공한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 황군이 얼마나 굿센 정신을 가젓는지 아실 것 입니다.

김석원, 「軍人의 立場에서 銃後에 附託함」,『家庭之友』(1940. 1) 28호, 4~5쪽

이 시절의 정신력 드립에 대해서는 예전에도 한번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군인 뿐 아니라 식민지 지식인들도 황군의 정신력을 찬양하던 시절이죠.

김중좌께서는 정말 황군의 정신력에 감화받으셔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해방되고 1사단장을 하실 때도 육탄 10용사 같은 황군의 전통을 잇는 공격을 좋아하셨다고 하죠. 김석원 외에도 채병덕 같은 양반들도 정신력 드립을 쳐대고 있었던 걸 보면 정말 이것이야 말로 최악의 식민지 잔재인듯;;;;


잡담 하나. 위에서 인용한 글은 요즘 국립중앙도서관에 전자문서로 열람 가능하게 되어 있더군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아주 깨끗하게 스캔을 잘 해 놓아서 제가 예전에 복사했던 상태 나쁜 것은 못 보겠더군요. 전자문서들이 잘 되어 있다보니 옛날에 구닥다리 복사기로 복사한 것들 중 통째로 복사해서 제본 뜬 것이 아니면 모두 이면지로 재활용 하고 있지요.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는 이상 국립중앙도서관이 문 닫지는 않을 테니.

잡담 둘. 위의 인용문에서 *표 표시한 것은 아무래도 203고지 전투를 이야기 하는 것 같지요?

2010년 1월 17일 일요일

우리 여자들을 지킵시다! - 안방전선 방어작전???

「또 하나의 전선 : 2차대전 중 독일과 영국의 안방전선」과 엮은 글 입니다.

즉 날로 먹자는 포스팅이지요;;;; 언제나 그렇듯 땜빵용 불법날림번역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전쟁에서 안방전선의 중요성이 어떤 방식으로 강조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입니다.

"우리" 여자들을 지킵시다(Defending "our" women)

성 (性)은 민족주의에서도 이용된다. 민족은 여성화하고 국가는 남성화 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여성은 의미에 따라 민족으로 상징되며 백여년 전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기세를 떨치면서 여성과 (민주화 된)남성 대중은 정치적 맥락으로 포섭되었다. 여성의 모습은 19세기 벵갈 민족주의의 밑바탕에 깔린 상징적인 의미와 같이 혼란스러운 집단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어떤 집단을 통합하거나 또는 축출하기 위해 영토의 경계를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육체를 민족의 상징, 집단 내부의 표식, 또는 남성에 의해 지켜지고 보호받아야 할 국가적 '자산'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 여자들이 강간당하는 것은 적국의 남자들이 민족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한 은유 방식이 되기도 했다. 한 인종 집단이 "민족의 영역이 위협받거나 위태롭다고" 느꼈을 때 이것은 노래나 전설을 통해 적들이 어린 여자를 납치하거나 유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는 "영웅이 될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미국 남북전쟁과 전후 남부의 복구 시기에 남부 백인 여성이 흑인과 섹스를 한다는 상징은 남부 백인 남성들을 동원하는 기제가 되었다. 2차대전 초기 독일의 폴란드나 폴란드 침공, 또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과 같은 군사적 침략은 "강간"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양차 세계대전 시기의 전시선전은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강간이라는 주제를 활용했다. 1차대전 당시 영국 정부는 독일군의 강간에 대해 선전하면서 "당시 (독일에) 점령당한 나라의 여성들이 강간당하고 성적으로 학대당하는 것을 통해 전쟁을 상기시키고 묘사했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군 병사들에게 그들이 전선에서 싸우는 동안 러시아군이 그들의 고향을 점령하고 그들의 여자를 강간할 것이라는 전단을 살포했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은 오스트레일리아군 병사들에게 미군이 그들의 여자와 놀아나고 미국으로 데려갈 것이라는 선전을 했다. 독일에서는 프랑스 여자들이 프랑스 식민지군대의 흑인들과 섹스를 하고 영국 여자들이 미군의 흑인 병사들과 섹스를 한다는 선전을 했다. 과거 유고슬라비아에서는 각 민족 상호간의 강간이 "민족의 표식"이 되었으며 다른 민족집단을 위협적인 강간마들로 묘사하는 선전을 통해 각 민족집단 내부의 단합을 강화했다.

민족을 여성화 하는 방식은 (강간 피해자 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의 성적 유동성을 제약하면서 전통적인 성차별을 강화했다. 1990년대에 크로아티아 정부는 여성들이 출산을 기피하는 행위, 그중에서도 특히 낙태를 비난했다.(크로아티아의 집권당은 '태아도 크로아티아 민족의 일원이다'라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세르비아의 정교회 총대주교는 전쟁에서 하나 뿐인 자녀를 잃은 여성들에게 더 많은 아이를 낳으라고 권했다. 여성들은 사회적 재상산이라는 역할 외에도 "고장의 전통을 보존하고 .... (그렇게 함으로써) 민족의 미덕을 발휘" 하기 위해 집단의 문화를 수호하는 역할도 맡아야 했다.

"우리" 여자들에 대한 적들의 위협이라는 상징은 아주 기괴한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1997년에 팔레스타인 내에서 판매되는 이스라엘의 껌에는 아랍 여성들을 성적으로 흥분시키고 동시에 아랍인의 출산률을 낮추기 위해서 소녀와 소년들을 불임으로 만드는 프로게스테론(progesterone) 성분이 첨가되어 있다는 주장을 했다.(이런 소문 중에는 이슬람 도덕을 약화시키고 여성들을 성적으로 속박해 정보원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도 있었다) 이 괴소문은 널리 확산되었는데 사실 그 껌들의 원산지는 스페인이었으며 독립된 기관에서 분석한 결과 프로게스테론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프로게스테론은 여성의 성욕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성욕을 다소 감소시키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그렇다고 이 성분이 피임에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다)

Joshua S. Goldstein, War and Gender : How Gender shapes the War System and Vice Versa,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pp.369-371

언제나 그렇듯 잘사는 양키의 존재는 잘 살지 못하는 남자들을 두렵게 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여자들을 애낳는 기계로 여기는 것은 남의 일도 아닌 것이 남조선의 보수반동집단(?!)도 비슷한 접근법을 취하고 있지요. 물론 한국은 전쟁 상황은 아닙니다만 사회적으로 위기를 느낄 정도로 전반적인 상황이 좋지 않고 희한하게도 이런 상황에 맞춰 여자들을 갈궈대고 있습니다. 여기에 맞춰 보수적인 남성들은 여자들의 성적 방종과 영어 강사하러 온 양키나 공장일 하러 온 파키스탄인이 한국여자와 자는 것을 맹렬히 비난하지요. 어떻게 보면 영어 강사하러 온 양키는 돈 많은 GI에, 공장일 하러 온 파키스탄인은 식민지군대의 흑인이나 강간마 러시아군과 유사한 이미지 같기도 합니다. 여기에 요상한 소문이 뒤섞여 야릇한 괴담으로 진화하기도 하지요.

한국의 가부장적인 민족주의가 사회경제적 어려움과 맞물리면서 전쟁에서나 나타날 법한 요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이야 말로 진짜 전쟁인지도;;;;

2009년 5월 18일 월요일

러일전쟁이 슐리펜의 전쟁 구상에 끼친 영향

배군님이 봉천회전에 대한 글을 연재하셔서 매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러시아쪽의 시각에서 러일전쟁을 바라본 서적은 조금 읽었지만 일본의 시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던 차에 많은 점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완수할 수 없었던 육군의 결전에 의한 결착, 봉천회전 vol.1 (B군)

완수할 수 없었던 육군의 결전에 의한 결착, 봉천회전 vol.2 (B군)

완수할 수 없었던 육군의 결전에 의한 결착, 봉천회전 vol.3(完) (B군)

그리고 봉천회전 마지막 편을 읽다 보니 러일전쟁에 대한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의 견해가 나와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 시피 러일전쟁의 결과는 슐리펜의 군사적 계획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전략적인 면에서 러일전쟁이 슐리펜의 전쟁 계획에 가져온 영향은 결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1904년과 1905년의 사건들은 슐리펜에게 독일이 처한 딜레마에 대한 전략적 해결방법이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1904년 러시아와 일본은 조선에서 전쟁에 돌입했다.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러시아군이 동부로 이동하기만 하면 단기간에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실제 결과는 러시아군의 완패(Fiasco)가 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양군은 서로 엎치락 뒤치락 했지만 점차 러시아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러시아군은 점차 만주 내륙으로 밀려났으며 뤼순이 함락되고 발틱함대가 쓰시마 해전에서 섬멸 당하고 국내에서는 혁명에 직면하면서 러시아는 일본과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군은 봉천회전 에서만 10만의 병력을 상실했다.

전쟁의 진행과정은 슐리펜이 러시아군의 능력과 독일의 전략적 상황을 판단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1905년 6월, 슐리펜은 독일 수상에게 러시아군의 한심한 상황을 묘사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오랫동안 러시아군에는 유능한 지휘관이 없으며 러시아 장교단의 대다수는 극도로 부족한 능력만을 가지고 있고 부대는 부족한 훈련을 받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슐리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결점은 러시아군의 끈기와 충성심에 의해 어느 정도 상쇄되는 것으로 믿는다고 적었다. 아시아에서의 전쟁은 이러한 믿음이 잘못 되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소식에 따르면 러시아군 병사들은 장교에 예우를 갖추지도 않았으며 명령에 따르지도 않았다. 더욱이 전쟁의 결과 러시아군의 훈련 수준은 기존에 생각하고 있던 것 보다 더 형편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의 가치는 극히 미미하며 가까운 미래에 러시아군이 효율적인 전투 부대가 될 전망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동아시아의 전쟁은 러시아군이 알려진 정보에 따라 기존에 추정되었던 것 보다 우수하지 못하며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군은 효율적으로 바뀌기는커녕 더 악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러시아군은 모든 결연함(Freudigkeit), 모든 신뢰감(Vertrauen), 모든 복종심을 잃었습니다.
러시아군이 개선될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는 무척 의문스럽습니다. 러시아군은 개혁을 실행할 정도의 자각(Selbsterkenntnis)이 없습니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패배의 원인을 군대 자체의 부족함(Unvollkommenheiten)에서 찾지 않고 적의 숫적인 우세나 특정한 지휘관들의 무능함에서 찾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에는 필요한 개혁을 실행하고 사기를 굳건하게 할 만한 능력을 갖춘 인재가 없습니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의 허약함에 대한 믿음으로 그때 까지 실행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전략적 대안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기회의 창이 열렸다. 슐리펜은 이제 독일육군의 대부분을 서부전선으로 돌리고 크게 약화되고 문제점 투성이인 러시아군으로부터 동부를 방어하는 데는 소수의 부대만을 남겨도 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Robert T. Foley,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 Erich von Falkenhayn and the Development of Attrition, 1870-1916,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pp.67~68

이렇게 러일전쟁의 결과는 독일의 양면전쟁 계획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러일전쟁의 결과는 전술적인 차원에서는 슐리펜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견해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슐리펜은 1905년 11월과 12월에 실시한 대규모 워게임(Kriegsspiel) 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슐리펜은 그 다음(훈련이 끝난 뒤)에 훈련에 참가한 장교들에게 미래 전쟁의 성격에 대한 자신의 마지막 생각을 이야기 했다. 그는 미래에는 작전을 전개할 때 진지전의 수렁에 더 쉽게 빠져들 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만주에서 벌어진 전쟁은 그 점을 잘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기동 전투를 통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도록 노력해야 하며 전쟁을 ‘1년 혹은 2년’간의 결정적이지 못한 소모전으로 끌고 가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장기전은 전쟁 당사국 모두의 소모와 경제적 혼란만을 가져오게 될 뿐이다. 그러나 설사 진지전의 상황이 오더라도 긴 방어선의 어느 한 곳에는 공격자가 돌파를 달성할 수 있는 취약점이 존재할 것이다. 독일군은 전체적으로 기동 작전을 통해 적의 측면을 포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슐리펜은 단순한 우회 기동을 실시해서는 안되며 한편으로는 적의 정면을 공격해 방어선에 고착시키는 동시에 강력한 부대로 적의 측면으로 포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Terence Zuber,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 : German War Planning 1871-1914,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p.210

슐리펜으로 대표되는 독일의 전통적 군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동을 통한 승리를 추구했으며 전장의 상황이 급변하더라도 반드시 기동전으로 끌고 나가야 한다는 점을 굳게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군사사가들이 지적 하듯 기동전은 작전 단위의 문제점까지는 해결 해 줄 수는 있어도 결코 전략적 차원의 문제에 대한 대안은 아니라는 점 입니다. 슐리펜은 러일전쟁 이전 까지 양면전쟁 상황에서 소모전을 피할 방안을 강구했습니다. 슐리펜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전하자 사실상 서부전선만의 전쟁을 할 수 있게 됐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슐리펜이 기대한 상황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고 독일은 새로운 전쟁에서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소모전으로 말려들게 됩니다. 독일은 특히 동부전선을 중심으로 몇 차례의 기동작전을 통해 많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이러한 승리들이 독일의 전략적 승리를 가져다 주지는 못 했습니다.

2008년 12월 29일 월요일

김석원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미군사고문단의 평가

원래는 어제 올렸던 한국전쟁 이전 국군의 사단편제에 대한 글을 좀 더 보강해서 올릴 생각이었는데 재미있는 자료가 조금 더 굴러 들어와서 이 글은 다음 번에 더 보강해서 쓰려고 합니다. 그 대신 땜빵 포스팅으로 김석원 이야기나 조금 해 볼까 합니다.

예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미군사고문단장이 평가한 한국군장성들에 대한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보통 일본군 출신 장교들의 군사적 능력을 중국군 출신 장교들에 비해 더 높게 평가했습니다. 그렇지만 몇몇 예외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1사단장을 지낸 김석원 준장이었습니다.

로버츠 준장은 1950년 3월 18일 신성모에게 보낸 서한에서 김석원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혹평했습니다.


각하(신성모) 께서도 기억하시겠지만 저는 지난해 7월과 8월 김석원이 공금횡령과 부정행위를 저질렀으며 부패한데다 공직을 남용하고 장교에게 필요한 윤리와 도덕적 기준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를 자행한 데 관한 저의 견해를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이미 지적한 문제점 외에도 제가 직업군인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평가하면 김석원의 군사 과학과 전술에 대한 지식은 매우 형편없습니다. 김석원은 그가 맡은 방어책임구역의 방어 준비를 하는데 기본적인 원칙조차 이해하지 못했으며 설사 말단 초급장교라 하더라도 용납 못할 정도로 전술원칙에 대해 근본적으로 무지합니다. 저는 김석원이 전술가로서의 능력이 형편없기 때문에 만약 그가 더 책임 있는 직위를 맡게 된다면 대한민국의 안보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As you will remember, I expressed myself unequivocally on the subject of this ex-officer last July and August when his peculations, dishonesty, corruption, misuse of public office and total disregard of the ethics and moral standards required of an officer were brought to light. In addition to the deficiencies I have just cited, it was my considered opinion at the time, as a professional soldier, that his knowledge of military science and tactics was extremely limited. He had failed to grasp the basic principles of the organization of his sector for defense and exhibited a fundamental ignorance of tactical principles which I would not tolerate even in a very junior officer. I feel that his deficiencies as a tactician would, if he were placed once more in a responsible position, seriously jeopardize the security pf the Republic.

March 25, 1950, ‘Activities of Brig Gen. Kim Suk Won’, Enclosure 1; RG 59, Records of State Department

굉장한 혹평입니다. 특히 전술적 능력이 초급장교 보다 못하다고 하는 부분은 왜 저렇게 심각한 비난을 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혹평은 김석원을 옹호하는 측에서 주장하듯 김석원과 군사고문단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이 주된 원인일까요?

김석원은 1949년의 38선 충돌에서 핵심적인 지역이었던 개성 방면의 1사단장으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전쟁 이전에 그의 전술적 능력을 평가할 만한 기회가 몇 차례 있었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1949년 여름에 미군사고문단이 1사단의 방어구역을 시찰하고 김석원의 부대 운용에 대해 분석한 내용입니다.

이번 조사의 결과 현재 1사단 구역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과 방어상의 위험한 취약점이 있음이 드러났다.

a. 경계 순찰이 전무한 상태이다.

b. 현재 38선상에서 돌파되어 침범당한 지역에 전초저항선이 구축되어 있지 않다.

c. 사단 정면에 주저항선이 구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사단 주력이 북한군으로부터 공격에 노출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붕괴될 가능성도 있다.

d. 11연대가 부적절하게 투입, 배치되어 있다. 이 부대는 연대지휘소와 대대가 개성에 위치해 있는데 현재 위치에서는 개성 회랑 동쪽으로 부터의 공격에 후방이 차단될 위험성이 매우 높다. 이 연대는 개성-문산 도로의 약간 남쪽에 배치되어 있으며 개성-문산 도로를 따라 종심 깊게 배치되는 대신 연대 전체가 북쪽을 향하고 있어 배치가 잘못 되어있다. 만약 임진리의 교량이 적의 신속한 진격에 탈취될 경우 1개 연대와 여기에 배속된 포병은 고립될 것이다. 제대로 된 군대가 적용하는 올바른 부대 배치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 진다. 각 대대와 중대는 소수의 병력만 전방에 배치하고 예비대를 확보한다.; 최소한 1개 연대에는 1개 대대가, 1개 사단에는 1개 연대가 예비로 있어야 한다. 그러나 1사단은 사단 예비는 물론 연대 예비대도 전무한 상태이다. 사단장은 예비대 없이는 보다 결정적인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

e. 나머지 2개 연대 -12연대와 13연대- 도 마찬가지로 종심이 깊지 못하고 예비대가 전무한 상태로 전술적으로 불안정하게 배치되어 있다.

This investigation revealed the following deficiencies and dangerous defensive weakness in the present zone of the 1st Division.

a. Total absence of security patrolling

b. No established outpost line of resistance to present penetration and violation of the 38th degree North Parallel.

c. Absence of a main line of resistance on the Division front, thus exposing the Division’s main element to an attack and possible demoralization by North Korean Forces.

d. Improper placement and disposition of the 11th Regiment. This unit, with the Command Post and battalion located at KAESONG is, in its present position, highly vulnerable to being cut off and destroyed by a force attacking east through the KAESONG corridor. This regiment is incorrectly disposed, inasmuch as it is slightly south of KAESONG-MUNSAN road and the entire regiment is facing directly north rather than being astride the above-mentioned road and disposed in depth. If the bridges over the Im-Jin-ni River are taken by a quick thrust of the enemy, over one regiment and artillery will be cut off. Correct dispositions, as applied by all real armies, are as follows : each Battalion and Company Keeps few troops in front and each has a Reserves; at least 1 Battalion of a Regiment must be in reserve; at least 1 Regiment of a Division must be in reserve. As it is, there are no Regimental reserves nor Division reserves. Not having these, the Division Commander is unable to accomplish much decisively.

e. The two remaining Regiments – the 12th and 13th – are similarly placed in tactically-unsound position in that they are not disposed in depth and no reserves have been established.

August 1, 1949, ‘Tactical Disposition of the 1st Division, Korean Army’; RG 338, KMAG, Box 8, Brig General W. L. Roberts(Personaal Correspondence, Memorandum) 1949

일단 위의 보고서에서 지적된 것 중 가장 심각한 문제는 김석원이 ‘예비대’라는 것을 전혀 확보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비대를 확보하는 것은 부대 지휘관이라면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인데 김석원은 사단장이 되어 제대로 된 예비대 없이 사단 전 병력을 전방에 배치해 놓은 것 입니다. 초급장교 만도 못하다는 혹평이 단순한 비난이 아닌 것이죠. 전면전도 아닌 상황에 사단의 전 병력이 전방에 배치되어 방어 종심도 얕아 제대로 된 공격을 받으면 한방에 붕괴될 수 있는 위태로운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예비대도 없으니 만약 이 상태로 전면전이 발발했다면 개성-문산 지구는 순식간에 붕괴됐을 것 입니다.

김석원의 후임으로 부임한 유승렬과 백선엽은 이런 비상식적인 부대운용을 하지 않았습니다. 개전 당시 1사단은 11연대를 예비대로 확보해 놓았고 기습 공격과 전력상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선전합니다. 김석원이 하던 대로 1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면 서부전선이 일거에 붕괴되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