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30일 수요일

어떤 호언장담.....

덩샤오핑이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 있었던 매우 유명한 일화지요.(이곳에 들러주시는 분들은 대부분 무슨 일인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덩샤오핑의 미국 방문은 그는 물론 카터에게도 큰 성과였다. 그런데 덩샤오핑은 중국으로 돌아가기 전 우리에게 큰 골치거리를 안겨주었다. 내가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덩샤오핑은 카터 대통령과의 개별적인 회견을 요청했으며 이 회견은 화요일 오후 5시에 열렸다. 우리측에서는 부통령(Walter Mondale)밴스(Cyrus R. Vance), 그리고 내가 참석했으며 덩샤오핑은 부총리(方毅), 외교부장(黃華)과 외교부 부부장(章文晉)을 동반하였다. 회견의 주제는 내가 예상한대로 베트남 문제였다.

우리는 지난 회담을 통해 중국은 소련이 동남아시아에서 활동할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서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사주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때문에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을 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음을 알았다. 중국 지도부는 미국 지도층과 여러차례의 대화를 통해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은 중국의 안보에 전략적인 위협을 가하고 있으며 장기적인 차원에서는 동남아시아의 안정을 위협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베트남이 전복한 캄보디아의 잔혹한 폴포트 정권은 중국의 가까운 동맹이었으므로 중국은 베트남에 대해 보복을 가하기로 했다.

참석자들이 오벌 오피스에 모였을 때,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으며 다른 미국측 참석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을 하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덩샤오핑이 중국의 입장을 차분하고 단호하게, 그리고 강경하게 설명하는 모습에서는 심각하고 매우 특별한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덩샤오핑은 중국이 소련의 전략적인 계획을 방해하고 “베트남의 야욕을 저지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교훈을 주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덩샤오핑은 이때 어떤 식으로 교훈을 줄것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그 범위와 시기가 제한적일 것이라고만 말했다. 그리고 덩샤오핑은 예상되는 소련의 대응과 중국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하여 차분하게 설명했다. 덩샤오핑은 소련의 대응 방식에는 “최악의 경우”도 포함될 것이라고 했으며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되더라도 중국은 그에 맞설 것이라고 덧붙였다. 덩샤오핑은 국제무대에서 미국이 “정신적인 지원”을 해주기만을 바란다고 말했다.

우리는 약간의 사전논의를 하긴 했으나 나는 대통령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나는 덩샤오핑이 미국에 오기전에 대통령에게 중국이 갈수록 캄보디아 문제에 신경을 쓰고 있으며 중국이 취할 것으로 예상되는 행동에 대해 미국이 과도한 경고를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설명했다. 나는 대통령이 밴스의 조언에 따라 중국에게 무력을 사용하지 말도록 강한 권고를 할 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할 경우 중국은 미국이 “종이호랑이”라는 생각을 더 확고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대통령이 사무적인 태도로 이 문제는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답을 하기 전에 참모들과 협의해야 할 사안이라고 대답해서 크게 안도했다.

덩샤오핑은 만약 베트남이 자제하지 않을 경우 중국은 행동을 더 확대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중국이 제한적인 행동을 한 뒤 병력을 신속히 철수하겠다는 것 이었다. 덩샤오핑은 1962년에 있었던 중국과 인도의 국경분쟁을 예로 들면서 베트남도 같은 방식으로 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덩샤오핑은 미국의 지지를 기대하지는 않았으며 때로는 어느 한쪽이 어떤 행동을 취할때 다른 한쪽은 그렇게 하는 것을 바라지 않을 수도 있다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중국측이 여러가지 대안을 고려한 뒤 설사 소련과의 대결을 초래하더라도 행동을 취하기로 결심한 것이 분명했다. 나는 덩샤오핑의 신중하면서도 단호한 어조에 감명을 받았다.

Zbigniew Brzenzinski, Power and Principle : Memoirs of the National Security Adviser 1977~1981, (Farrar Straus & Giroux, 1983),  pp.409~410

그리고 베트남이 중국에게 교훈을 줬다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죠.....

2012년 5월 28일 월요일

영어로 이야기하는 독일군이 주인공인 미국 영화;;;;;

정신이 어수선해서 기분 전환을 하려고 스티븐 킹의 『죽음의 무도』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니 영화의 감정이입을 다루는 부분에서 샘 페킨파 감독의 영화를 예로 드는 부분이 눈에 들어옵니다. 페킨파 감독의 「와일드 번치」는 (미국) 관객들이 감정이입을 하고 보게 되는데 독일군을 주인공으로 한 「철십자 훈장」은 “하품을 한다”는 지적입니다. 이 부분을 읽고 나니 몇년전 개봉했던 톰 크루즈 주연의 「발키리」도 생각보다 부진한 흥행성적을 기록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저자가 공포영화의 감정이입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예로 들은 사례이긴 합니다만 제법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한국에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가 극장개봉을 할 수조차 없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평균적인 미국인이 “영어로 이야기하는” 독일군이 고뇌하는 이야기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은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영어로 이야기하는 소련군이 주인공이었던 「에너미 앳 더 게이트」도 마찬가지로 다소 신통찮은 반응을 얻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때 같은편이었던 소련군이 이럴진데 독일군이라면 더욱 더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미국에서 제작한 영화 중 인간적인 독일군을 다루는 작품이 몇편 생각나긴 합니다만 그중에 블록버스터는 흔치 않았던 것 같네요.

2012년 5월 20일 일요일

후퇴전에서 기갑부대의 전차 손실에 대한 잡상 - 바그라티온 작전의 독일 제4, 5기갑사단의 경우

1944년 벨로루시에서 소련이 감행한 하계대공세,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독일군의 기갑부대 운용에 대한 글을 조금씩 쓰는 중입니다. 작전 위주로 간략하게 써보려 하는데 자료를 보면서 조금씩 쓰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독일군이 전략적인 기습을 당한 상황에서 혼란에 빠져 대응하는 양상이다 보니 기갑사단들의 투입도 축차적으로 이루어져 어수선하게 운용되는 양상이라서 정리하는 것이 꽤 재미있더군요.

그런데 글을 쓰다보니 눈에 띄는게 독일 기갑사단들의 장비 가동율입니다. 소련군의 맹렬한 반격에 독일군이 정신없이 난타당하는 와중에 그나마 전력이 양호한 기갑사단들이 지연전과 역습의 핵심이 될수 밖에 없는데 그 중에서도 전차 전력이 중요한 요소이니 말입니다. 사실 전반적인 양상은 2차대전사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쉽게 예측하실 수 있습니다. 전투에 돌입하면 가동율이 급속히 저하된다는 점입니다.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사실들이지만 구체적인 통계를 살펴보는것도 나름 재미있으니 짤막하게 이야기를 해 보죠. 이 글에서는 제4기갑사단과 제5기갑사단을 예로 들어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두 기갑사단은 바그라티온 작전이 개시될 당시 중부집단군 지구에 투입된 완전편성된 기갑사단이었기 때문에 완편되지 못한 기갑사단들에 비해 소모의 양상을 보여주는데 더 적합한 것 같습니다.

제4기갑사단과 제5기갑사단은 1944년 초의 격전에서 중부집단군의 최우익인 제2군 소속의 제56기갑군단 소속으로 싸웠습니다. 그런데 독일군이 1944년 하계공세가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에 가해질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5월 30일 제56기갑군단에 소속된 2개 기갑사단은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의 지휘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로 인해서 중부집단군은 전차전력의 82%를 잃어버렸습니다.1) 5월부터 6월 사이에 제4기갑사단과 제5기갑사단은 다가올 소련군의 하계공세를 앞두고 병력과 장비를 대대적으로 보충받았기 때문에 바그라티온 작전이 개시되기 직전에는 동부전선에서 가장 강력한 기갑사단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바그라티온 작전이 개시되기 직전 이 두 기갑사단의 기갑전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표1. 독일 제4기갑사단의 기갑전력(1944. 5.~1944. 6)
4호전차 총계
4호전차 가동
판터 총계
판터 가동
1944.5.31
70
68
0
0
1944.6.20
74(79)
51
76(81)
70
[표 : 1944년 5월 31일 통계는 Thomas L. Jentz, Panzer Truppen Vol.2 : The Complete Guide to the Creation & Combat employment of Germany’s Tank Force 1943~1945(Schiffer Publishing, 1996), p.205; 1944년 6월 20일 통계는 Joachim Neumann&Dietrich von Saucken, Die 4.Panzerdivision 1943-1945 : Bericht und Betrachtung zu den zwei letzten Kriegsjahren im Osten, (Selbstverlag, 1985), p.362 이 책에서는 이외에 4호와 판터 지휘전차 7대가 별도로 있었다고 기술; Kamen Nevenkin, Fire Brigades : The Panzer Divisions 1943-1945, (J.J.Fedorowicz, 2008), p.148에서는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제4기갑사단이 4호전차 81대와 판터 79대를 보유한 것으로 서술]

표2. 독일 제5기갑사단의 기갑전력(1944.5.~1944.6)
4호전차 총계
4호전차 가동
판터 총계
판터 가동
1944.5.31
59
57
0
0
1944.6.20
78
?
79
?
[표 : 1944년 5월 31일 통계는 Thomas L. Jentz, Panzer Truppen Vol.2 : The Complete Guide to the Creation & Combat employment of Germany’s Tank Force 1943~1945(Schiffer Publishing, 1996), p.205; 6월 22일 통계는 Kamen Nevenkin, Fire Brigades : The Panzer Divisions 1943-1945, (J.J.Fedorowicz, 2008), p.171]

또한 제4기갑사단과 제5기갑사단은 예하 대전차대대가 4호구축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제4기갑사단의 제49대전차대대와 제5기갑사단의 제53대전차대대는 1944년 6월까지 21대의 4호구축전차를 지급받은 상태였습니다.2)

소련군의 대공세가 개시되자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의 제4기갑군 소속 예비대로 있던 이 두 기갑사단은 중부집단군 지구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먼저 제5기갑사단이 6월 25일 이동명령을 받아서 6월 28일 부터 중부집단군 지구에 도착해 소련군을 상대로 한 지연전에 투입됩니다. 제5기갑사단은 완전편성된 상태였으며 여기에 제505중전차대대를 배속받아 사단급 전력으로는 매우 강한 편이었습니다.3) 제5기갑사단과 제505중전차대대를 핵심으로 한 자우켄 전투단은 민스크로 진격하는 소련 제5근위전차군을 상대로 보리소프에서 지연전을 전개했습니다.
제4기갑사단은 제5기갑사단 보다 조금 늦게 출동명령을 받았습니다. 제4기갑사단은 6월 26일 출동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고 6월 27일 부터 철도로 바라노비치를 향해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제4기갑사단은 7월 1일 부터 슬루츠크 일대에 전개해 지연전을 시작합니다. 제4기갑사단도 육군 직할부대들을 배속받아 전투력이 강화되었는데 먼저 7월 1일에는 제904돌격포여단을 배속받았고 7월 9일에는 제507중전차대대를 배속받습니다.4)

전반적인 작전 전개에 대해서는 따로 준비하는 글이 있으니 생략하고 일단 기갑전력이 소모되는 양상을 살펴보지요. 먼저 제5기갑사단의 1944년 7월 5일과 9일의 기갑차량 가동현황입니다.

표3. 제5기갑사단의 기갑차량 가동현황(1944년 7월5일)
4호전차
판터
4호구축전차
1944.7.5
25
25
?
1944.7.9
6
12
6?
[표 : Gerd Niepold, Mittlere Ostfront Juni ‘44, (Mittler&Sohn, 1985), p.207, 241]

다음은 제4기갑사단입니다. 제4기갑사단 역시 전선에 투입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동가능한 기갑차량이 심각한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1944년 7월 6일과 7월 7일의 통계를 보면 제4기갑사단의 가동가능한 기갑차량의 대수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표4. 제4기갑사단의 기갑차량 가동현황(1944년 7월6일~8일)
4호전차
판터
4호구축전차
1944.7.6
19
31
5
1944.7.7
17
35
5
1944.7.8
13
25
3
[표 : 1944년 7월 6일 통계는 Gerd Niepold, Mittlere Ostfront Juni ‘44, (Mittler&Sohn, 1985), p.218; 7월 7~8일 통계는 Joachim Neumann&Dietrich von Saucken, Die 4.Panzerdivision 1943-1945 : Bericht und Betrachtung zu den zwei letzten Kriegsjahren im Osten, (Selbstverlag, 1985), p.387, 390]

불과 일주일 남짓한 전투로 가동가능한 기갑차량이 격감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용한 통계에서는 제4기갑사단과 제5기갑사단의 수리중인 전차 숫자가 누락되어 정확한 손실을 알 수는 없지만 4기갑사단의 경우 7월 21일의 통계를 가지고 대략적인 양상을 유추해 볼 수 있을 듯 싶습니다.

표5. 제4기갑사단의 기갑차량 현황(1944년 7월 21일)
가동가능
단기 수리
장기 수리
4호전차
21
40
23
판터
13
27
27
[표 : Joachim Neumann&Dietrich von Saucken, Die 4.Panzerdivision 1943-1945 : Bericht und Betrachtung zu den zwei letzten Kriegsjahren im Osten, (Selbstverlag, 1985), p.415]

1944년 7월 21일의 통계를 보면 4호전차의 총 보유대수는 84대이고 판터는 67대입니다. 그런데 제4기갑사단의 제35기갑연대는 지연전이 한창이던 1944년 7월 15일에 17대의 4호전차를 보충받았습니다.5) 그러니 4호전차의 완전손실은 총 98대의 4호 전차중 14대이고, 판터는 총79대 중 12대 입니다. 판터의 손실이 아주 살짝 적지만 전체적으로는 비슷한 수준이라는 게 흥미롭습니다. 비슷한 시기의 5기갑사단은 비교할 만한 자료가 아직 없어서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꽤 흥미로운 경향이긴 합니다.

완벽한 통계는 아니지만 제4기갑사단과 제5기갑사단이 지연전을 마치고 도펠코프Doppelkopf 라는 이름의 새로운 공세작전을 시작한 8월 12일에서 16일의 통계를 한번 살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 두 기갑사단은 8월 10일 공세를 위해서 전선에서 이탈하여 15일까지 공세준비를 했으므로 이시기의 전차 보유대수는 큰 변동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표6. 제4기갑사단과 제5기갑사단의 기갑차량 현황(1944년 8월 12~16일)
4호(가동가능)
4호(수리중)
판터(가동가능)
판터(수리중)
제4기갑(8.15)
32
31/5
15
23/9
제4기갑(8.16)
32
31 / ?
15
23 / ?
제5기갑(8.12)
22
13
19
15
제5기갑(8.16)
24
10 / ?
14
14 / ?
[표 : 제4기갑과 제5기갑의 8월 12일, 8월 15일 통계는 Kamen Nevenkin, Fire Brigades : The Panzer Divisions 1943-1945, (J.J.Fedorowicz, 2008), p.149, 172 그리고 Joachim Neumann&Dietrich von Saucken, Die 4.Panzerdivision 1943-1945 : Bericht und Betrachtung zu den zwei letzten Kriegsjahren im Osten, (Selbstverlag, 1985), p.455; 8월 16일 통계는 Gerd Niepold, Panzeroperationen : >Doppelkppf< und >Cäsar< Sommer’ 44, (Mittler&Sohn, 1987), p.35

이 통계를 보면 4기갑사단은 총68대의 4호전차와 47대의 판터를, 제5기갑사단은 35대의 4호전차와 34대의 판터를 보유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제4기갑사단은 7월 15일에 17대의 4호전차를, 8월 1일부터 6일까지 16대의 판터를 보충받았고 제5기갑사단은 7월 18일에 17대의 4호전차를, 8월 1일부터 6일까지 24대의 판터를 보충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바탕으로 바그라티온 작전과 이어지는 지연전 도중 제4기갑사단과 제5기갑사단이 완전히 상실한 전차는 다음과 같이 추산해 볼 수 있습니다.

표7. 바그라티온 작전 기간 중 제4기갑사단과 제5기갑사단의 전차 손실
4호전차
판터
제4기갑(1944.7.1~8.10)
28
50
제5기갑(1944.6.28~8.10)
60
69

성능이 더 우수한 판터의 손실이 4호전차 보다 더 높게 나타나는 것이 의외입니다. 여기에는 몇가지 고려해 볼만한 요인이 있습니다. 판터가 연료소모가 크고 좀 더 회수하기 어렵다는 점이 있습니다. 실제로 제4기갑사단의 판터대대는 바그라티온 작전 기간 중 유류부족으로 운용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 Gerd Niepold, Mittlere Ostfront Juni ‘44, (Mittler&Sohn, 1985), p.21
2) Kamen Nevenkin, Fire Brigades : The Panzer Divisions 1943-1945, (J.J.Fedorowicz, 2008), p.148, 171
3) Rolf Hinze, Der Zusammenbruch der Heeresgruppe Mitte im Osten 1944, (Motorbuch Verlag, 1980), p.184
4) Joachim Neumann&Dietrich von Saucken, Die 4.Panzerdivision 1943-1945 : Bericht und Betrachtung zu den zwei letzten Kriegsjahren im Osten, (Selbstverlag, 1985), p.363~370, 391; Tiger in Combat 1권에는 7월 8일 제507중전차 대대가 4기갑사단에 배속되었다고 나오는데 이것은 배속명령을 받은 날자이고 실제 배속은 7월 9일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5) Kamen Nevenkin, ibid, p.149

2012년 5월 18일 금요일

'땅크節'

1946년, 소련은 2차대전에서 기갑병과가 세운 혁혁한 공훈을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9월 11일을 이른바 '전차병의 날(День танкиста)'로 정합니다. 병종도 아니라 육군의 특정 병과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일이 제정된 것은 꽤 이례적인 일 입니다. 물론 스탈린이 살아있을 때는 이 전차병의 날도 스탈린의 우상화를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전차병의 날이 오면 소련의 기갑장교들은 스탈린이 어떻게 기갑부대 발전을 위한 교시를 했으며 기갑전술을 발전시켰는가 하는 찬양을 지루하게 늘어놓았다고 하지요.

어쨌든 이 '전차병의 날'은 제법 중요한 행사였기 때문에 소련의 위성국이었던 북한은 이날이 올때마다 기사를 한꼭지 할애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북한에서 День танкиста의 번역어로 사용한 것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땅크節'


땅크절이라니! 뭔가 초월번역의 느낌을 팍팍 풍기지 않습니까! 입에 착착 달라붙는게 엄청난 중독성이 있습니다. 전통명절과 같은 느낌이 들지요.

2012년 5월 17일 목요일

국민동원에 특별히 유리한 정치사상은 존재하는 것일까?

지난번에 짤막한 소개글을 썼던 『패튼과 롬멜』은 패튼과 롬멜을 각각 미군과 독일군의 상징으로 하여 두 나라의 군대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쓰여졌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인 쇼월터는 미국의 장점으로 병사들의 자발성, 혹은 헌신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2차대전 기간 중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된 병사의 숫자를 비교하는 부분에서 잘 드러납니다. 쇼월터는 2차대전 중 군법에 의해 처형된 탈영병은 한명인 반면 독일군은 5만명에 달하는 병사를 처형했다고 지적합니다.1) 이러한 지적은 미국의 체제, 특히 정치문화가 독일의 파시즘에 비해 우월했다는 해석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쇼월터 또한 2차대전의 승리를 미국 자유주의의 우월성으로 받아들였던 지적풍조의 연장선상에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 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는 약간 회의적입니다. 일단 쇼월터는 1941년 12월 부터 1946년 3월까지 사형이 집행된 미군 병사가 146명에 달한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고 단지 탈영으로 처형된 병사 한명만을 언급함으로써 매우 극단적인 대비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게다가 독일군의 병사 처형에 대해서는 가장 높은 추정치인 5만명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전쟁 중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집행받고 처형된 독일군인의 숫자에 대해서는 연구자별로 큰 차이가 나는데 데이빗 키터만David Kitterman은 1만명에서 1만2천명 사이로 추산하고 있으며 관련 연구로서 많이 인용되는 메서슈미트Manfred Messerschmidt의 연구는 2만명 가량으로 추산합니다.2) 146명대 1만명으로 하더라도 독일군이 매우 많은 병사를 처형한 것은 틀림없습니다만 쇼월터의 서술방식은 약간 문제가 있다고 보여지는군요.

이데올로기적인 경직성이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이 군법을 가혹하게 적용하게 한 원인이 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례들을 보면 조금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1차대전을 예로 들면 독일군은 전쟁 기간 동안 150명에 사형을 선고하고 48명에 사형을 집행한 반면 프랑스의 경우는 2천여명에 사형을 선고하고 700여명에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미국과 비슷한 자유주의적 정치문화를 가진 영국군은 3,080명에 사형을 선고하고 346명을 실제로 처형했습니다.3)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정치문화를 가진 독일군에 비해 일곱배나 많은 병사를 처형한 것입니다. 정치문화도 중요한 요소이긴 합니다만 실제 전장의 환경이 어떠했는지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물론 절대적인 기준은 아닙니다만 병사에 대한 강압적인 처벌은 해당 군대가 그만큼 병사들을 통제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그리고 국민동원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는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국민 동원’의 신화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자발성이니 말입니다. 1차대전 당시 참혹한 서부전선에서 공화정 체제인 프랑스와 자유주의적인 정치문화를 가진 영국이 병사들에 대한 통제에 독일군 보다 더 어려움을 겪었음을 보여주는 징후가 나타나는 것은 꽤 흥미롭습니다.

물론 미국이 독일에 비해 훨씬 적은 병사를 처형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단순히 정치문화만 가지고 비교하기는 어려울 것 입니다. 독일군이 군법회의에서 사형집행을 크게 늘린 것은 1944년 하반기 이후부터였고 이것은 나치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경직성 외에도 다른 요소들의 영향도 작용한 것으로 볼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독일과 동일한 조건에서 전쟁을 수행한 것이 아닌 이상 쇼월터와 같은 방식의 서술은 약간 위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같은 경우는 군사사에 관심을 가졌던 초기에 “자발적인 참여에 의한 국민동원”에 대한 환상이 있어서 한국의 징병제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 그런 쪽은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보고 들은 것이 조금 늘어나면서 처음에 가졌던 이상적인 생각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쇼월터의 글을 읽으니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최근 몇년간은 우리에게 뭔가 새로운 동원방식이 필요한게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마땅한 대안이라 할 만한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게 고민입니다. 그런 점에서 쇼월터의 주장을 접하니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1) 데니스 쇼월터 지음/황규만 옮김, 『패튼과 롬멜 : 현대 기동전의 두 영웅』, (일조각, 2012), 280쪽
2) Norbert Hasse, “Wehrmachtangehörige vor dem Kriegsgericht”, Rolf-Dieter Müller&Hans-Erich Volkmann(hrsg.) Die Wehrmacht : Mythos und Realität, (Oldenbourg, 1999), pp.480~481
3) Stephen G. Fritz, Frontsoldaten : The German Soldier in World War II,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1995), p.90

2012년 5월 13일 일요일

어떤 예측

그 유명한 독일의 기갑사단이 야지에서 기동훈련을 하는 것을 목격한 이는 한명도 없습니다.

(중략)

요컨데, 독일은 우리 프랑스에서 하는 것 처럼 지난 전쟁에서 사용된 전차 전술에 따라 전차를 반격의 도구로서 보병과의 긴밀한 연계와 함께 운용할 것 입니다.

1936년 프랑스 국회 육군위원회에서 프랑스 국방장관 달라디에Édouard Daladier가 한 발언

Eugenia C. Kiesling, Arming against Hitler : France & The limits of military planning,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6),  pp.167~168

물론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독일군은 예측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2012년 5월 7일 월요일

2차대전 중 미국의 화학전 검토에 대한 잡상

John Ellis van Courtland Moon이 1989년에 Journal of Strategic Studies에 기고했던 “Project SPHINX: The Question of the Use of Gas in the Planned Invasion of Japan”라는 논문을 읽다보니 앞부분에 꽤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미국이 1945년 이전에는 일본을 상대로 화학무기 사용을 적극적으로 검토하지 못했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943년의 타라와 전투에서 미군이 상당한 인명손실을 입은 뒤 미국내에서 일본을 상대로 화학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조금씩 힘을 받기 시작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1944년 9월에 일본을 상대로 화학무기를 사용하는데 찬성하는 여론은 23% 남짓이었는데 1945년 6월에는 40%까지 늘어났다고 하지요. 타라와 전투 이후 일본군이 각 지역에서 보여준 극단적인 저항은 미국인들에게 상당한 문화적 충격을 주었던 모양입니다. 일본군의 저항으로 인명손실이 높아지면서 대중과 언론은 물론 미육군 내에서도 요새화된 섬에서 저항하는 일본군을 상대로 화학무기가 효과적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특히 미육군 화학전국Chemical Warfare Service의 국장 포터William N. Porter 소장은 일본을 상대로 화학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펼친 인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포터 소장의 제안은 육군참모본부 작전국에서 검토만 되었을 뿐 1945년 이전에는 그 이상의 단계로 나가질 못했습니다.

문은 그 이유를 몇가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루즈벨트 대통령이 화학무기 사용에 부정적이었다는 점 입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이 먼저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것에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제시하는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미국은 일본군을 상대로 화학무기를 사용할 경우 유럽전선에서 독일이 화학전을 전개할 가능성을 우려했다는 것 입니다. 일본군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강력한 화학전 능력을 갖춘 독일이 화학무기를 뿌려댄다면 제법 골치가 아팠을 것 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사망한 것과 함께 독일의 항복도 미국이 1945년 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을 상대로 한 화학전을 진지하게 검토한 이유라는 것 입니다.

이점을 보면 냉전기에 핵무기 사용을 둘러싼 논의가 연상됩니다. 특히 독일의 화학전 능력이 상대적으로 화학전에 대한 보복수단이 마땅치 않은 일본에 대한 억지력으로 작용했다는 설명은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마치 핵무장을 한 강대국이 하위 동맹에 대한 핵억지력을 제공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고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