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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12일 월요일

미서전쟁과 미국의 전시동원

미서전쟁은 짧은 기간 동안 전개되었고 규모도 유럽의 기준에서 본다면 그리 큰 전쟁이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몇 년 뒤 벌어진 러일전쟁이 1차대전을 예고하는 듯한  산업화된 근대전쟁의 양상을 뚜렷이 보여준 것과 대비가 됩니다. 대규모 함대결전, 그리고 기동전과 근대적 요새에 대한 포위전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전쟁 양상이 나타난 러일전쟁에 비하면 미서전쟁은 소박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서전쟁은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입장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점을 몇가지 보여줍니다. 이미 산업적으로 대국으로 성장해 있던 미국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전쟁 준비는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이 상태로 태평양과 대서양이라는 두개의 대양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은 엄청난 과업이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전쟁 준비는 이런 준비부족을 극복하는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물론 국력이 받쳐 주기 때문에 부실한 전쟁 준비가 어떻게든 극복이 되는 것이긴 합니다만.

이 글에서는 기본적인 병력, 수송, 장비 및 보급 문제만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행정과 인사문제까지 들어가면 정리하는 것도 좀 더 어렵고 글이 더 길어질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전시동원이라고 하면 일단 첫번째로 병력 동원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사람이 있어야 싸우죠. 미국이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할 당시 미육군은 겨우 28,000명 밖에 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미국과 스페인의 관계는 이미 1897년 초 부터 악화되고 있었지만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매킨리William McKinley가 본격적으로 전시동원을 고려하기로 한 것은 선전포고가 이루어지기 한달 전에 불과했습니다.1) 전쟁준비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었습니다. 다행인 점이라면 상대가 스페인이었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육군이 3만명도 되지 않는 상황인데다 선전포고가 전쟁 준비도 갖추기 전에 일어났기 때문에 미국은 각 주의 “주방위군”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시기 미국의 “주방위군”은 오늘날과 같은  “주방위군”으로 체계가 잡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의 병력동원은 엉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실제로 당시의 미국은 물론이고 현재의 역사가들도 미서전쟁 당시 미국의 민병대 동원은 실패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매킨리 대통령은 초기에 원정을 위해 125,000명의 동원을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동원규모가 수정되어 연방정부는 182,687명의 병력을 동원하기로 하고 각 주지사들에게 민병대의 동원할 것을 통보했습니다.2) 대규모의 대외원정이 연방군이 아닌 주의 민병대를 주축으로 실행해야 했던 것 입니다.
주 방위군은 사실상 미군의 주력을 담당할 수 밖에 없었는데 정규 육군이 3만명도 채 안되었던 반면 각 주의 민병대는 1897년 기준으로 총 114,000명이었습니다. 실질적인 전투력은 둘째 치고라도 일단 숫자는 어느 정도 채우고 있었던 셈입니다. 여기에는 기병 4,800명과 포병 5,900명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편제는 제각각이어서 사단급 편제를 갖춘 주는 5개 밖에 되지 않았고 그외에 25개의 여단이 있었습니다.3) 나머지 주방위군 부대들은 연대 이상의 편제가 없었으니 일단 사단 부터 만든 뒤 훈련을 시켜야 쓸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 입니다.
각 주의 병력동원은 상당히 엉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일단 이 당시는 오늘날과 같은 주방위군 체제가 잡혀 있지 않았고 여전히 각 주 민병대의 자율성이 강했습니다. 이 때의 경험으로 미서전쟁 이후 주방위군 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는 했습니다만 이 시점에서는 아직 미래의 일이지요. 몇가지 사례를 들어보지요. 미네소타 주에서는 존스 팜Jones Palm이라는 사람이 친구들과 사설 군사조직을 만든 뒤 주지사와 연방정부 민병대국에 정식 주방위군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가 거부를 당하고 그냥 기존의 주방위군 연대에 입대했습니다. 반면 캔자스 주에서는 주지사 존 리디John Leedy가 기존의 주방위군을 불신하여 새로 지원병을 모집하여 연방정부로 부터 할당받은 4개 연대를 편성했습니다.4) 평시 주방위군의 훈련과 감독을 성실히 했던 주들은 부대편성과 병력 동원이 순조롭게 이루어졌습니다. 매사추세츠, 펜실베니아, 오하이오, 위스콘신 등이 그런 모범적인 사례였습니다. 반면 플로리다, 미주리, 루이지애나, 텍사스와 같은 주들은 상대적으로 주방위군 편성과 동원에서 혼란을 겪었습니다. 평시 훈련과 관리를 소홀히한 주들은 주방위군 대원들의 상당수가 연방군의 체력 검정도 통과 못하는 굴욕을 겪을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5)
게다가 아직 주방위군을 전시에 해외파병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법적, 행정적인 철차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주방위군 대원 중 일부는 소집에 응하지 않았지만 법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어쨌든 병력 동원은 그럭저럭 이루어 졌으며 약 20만명의 주방위군이 미서전쟁 기간 중 동원되었습니다.
실제로 주방위군은 전쟁 기간 중 미군의 중추를 이루었습니다. 비록 유럽의 기준과 비교하면 서투르고 부족한 면이 많았지만 스페인과의 전쟁에 대한 미국인들의 자발적인 참여 열기는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각 사회단체는 물론이고 갑부들 중에서는 자비를 부담하여 1개 연대를 무장시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오하이오주의 한 공무원은 오하이오에서만 10만명의 자원병은 모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을 정도라니 굉장하지요.6) 스페인과의 전쟁을 앞두고 하원의원 헐A. T. Hull이 입안한 이른바 “헐 법안Hull-Bill”은 정규군 만을 원정에 투입하고 주방위군은 국내 방위에만 투입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는데 의회는 물론 각 주의 주지사와 주방위군 단체들의 반발로 폐기되고 주방위군은 대외 원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7)

미국이 전쟁경험의 부족 때문에 준비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은 그 외에도 여러 부문에서 나타납니다. 국내 자원의 동원에서 그런 점이 잘 드러나는데 막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은 다소 부족한 점이 엿보입니다.
철도이동에 관한 규정들은 선전포고가 있고 거의 2주가 지난 5월 8일이 되어서아 육군 군수국장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전까지 군부대의 철도를 이용한 이동은 아무런 규정도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 지고 있었습니다. 육군 군수국은 민간철도회사와의 계약을 통해 철도를 활용했는데 철도부대를 운용하던 독일과는 달리 대규모 군병력의 철도 이동 경험이 없었던 미군은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군수국이 필요한 시기에 민간 철도회사의 차량을 투입하지 못해 부대이동에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미숙한 운용은 침공군의 주요 집결지였던 플로리다 탬파Tampa에는 1천여대의 열차편이 몰려 극심한 정체를 이루었으며 심한 경우에는 탬파행 열차가 직선거리로 대략 700km 떨어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컬럼비아에 묶여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8) 그야말로 대륙적인 규모의 교통정체였습니다.

컬럼비아에서 탬파까지는 직선거리만 해도 어마어마하지요;;;;대륙 규모의 교통정체란;;;

철도와 달리 해상교통은 훨씬 준비가 잘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군수국은 3월 24일 전쟁을 대비해 선박 확보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4월 1일부터 8월 31일 까지 대서양 방면의 작전을 위해서 44척의 선박을 임대했고 추가로 14척을 구입했으며 태평양 방면의 작전에는 17척을 임대하고 2척을 구입했습니다. 이와 별도로 병원선으로 사용하기 위해 존 잉글리스John Englis라는 기선이 구입되어 개조된 뒤 릴리프Relief로 개칭되었습니다.9)
그 다음으로 중요한, 특히 작전 단위의 이동에서 중요한 이동수단은 말과 노새와 같은 축력이었습니다. 당시 편제상 미육군의 기병중대는 말 126마리, 보병중대는 12마리, 경포병 포대는 126마리의 말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10) 그렇기 때문에 수송용 동물의 조달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미국의 방대한 생산력 덕분에 마필의 조달은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미국은 미서전쟁 기간 중 기병용 말 10,000마리, 포병용 말 2,500마리, 견인용 노새 17,000마리, 등짐용 노새 2,600마리를 조달했습니다. 반면 견인용 수레는 약간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노새 6마리가 끄는 미육군의 표준형 수레는 민간시장에서 생산하지 않는 것이라 결국 육군의 기준에는 미달하는 민수용인 4마리가 끄는 수레를 3,600대 구입해야 했다고 합니다.11) 미육군의 표준형 노새 6마리 수레는 4천파운드의 수송량을 가졌는데 민수용인 노새 4마리 수레는 3천파운드 이하로 적재하도록 권장되었다고 합니다.12)

장비와 물자의 조달은 매킨리 대통령이 병력동원을 결심한 3월 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미육군은 위에서 언급한 헐 법안에 따라 주방위군은 본토 방위에 투입하고 원정군은 정규군을 중심으로 한 7만5천명에서 많아봐야 10만명 정도면 충분하다는 계획하에 물자 조달을 시작했기 때문에 헐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고, 또한 전쟁의 규모가 커져 수십만명의 주방위군을 무장시켜 원정군에 합류시켜야 하는 상황이 되자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없었습니다.13) 당장 쿠바 침공 부터 미육군이 당초 예상한 규모를 훨씬 넘어서는 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주방위군 및 지원병을 동원해야 했으며 이것은 장비와 물자조달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게 됩니다.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면 켄터키 주방위군 소속의 한 연대는 집결지로 지정된 치카마우가에 도착했을때 위스키는 잔뜩 챙겨왔지만 소총은 단 한정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1개사단의 절반에 해당되는 2개연대가 무장이라곤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당장 연방군이 가진 물자를 모조리 털어서 지원병들을 장비시켜야 했고 이것은 정부가 계약한 업체들이 쉽게 공급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14) 군수국Quartermaster Department과 병기국Ordnance Department은 4월 20일이 넘어서야 본격적으로 군수물자를 발주하였습니다. 병기국은 4월 30일까지 5만3천정의 크랙-요르겐슨Krag-Jörgensen소총과 1만5천정의 카빈을 구할 수 있었는데 20만에 육박하는 주방위군이 소집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이게 턱없이 모자란 수준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15) 이런 상황에서 급하게 장비를 조달하다 보니 문제가 속출했습니다. 병기국이 윈체스터사에 1만정의 소총을 먼저 주문했다가 이것들이 육군이 요구한 성능기준에 미달해 20만달러를 허공에 날린 일도 있었습니다.16) 스프링필드 조병창은 근로자를 6백명에서 10시간 2교대 1,800명으로 늘렸고 소총 생산은 3월 중순 하루 120정에서 8월 중순에는 하루 363정으로 늘어납니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총은 부족했기 때문에 주방위군과 지원병으로 구성된 부대는 초기에 흑색화약을 사용하는 구식 스프링필드 소총을 장비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전쟁 발발 당시 26만정 가까운 재고가 있었다고 하는군요.18)
다 른 모든 병과와 마찬가지로 포병도 준비가 매우 부실했습니다. 1896년 당시 미육군은 야전포병의 표준장비인 3.2인치 야포를 150문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1898년 전쟁이 발발하자 14개의 정규군 포병 포대는 포대당 6문의 편제를 갖출 수 있었으나 지원병으로 새로 편성된 포대는 포대당 4문의 편제를 갖춰야 했습니다.19)
또한 무연화약의 생산도 문제였습니다. 이것 또한 평시 상비군의 규모가 적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습니다. 민간기업들은 민수용으로 주로 흑색화약을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닥치고서 군대의 발주에 의해 황급히 시설을 전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시동원이 시작될 당시 민간 기업중 무연화약 생산능력을 갖춘 곳은 세곳 뿐이었습니다. 이때문에 무연화약의 배분은 해군의 함포와 육군의 크랙-요르겐슨 소총 탄환에 최우선적으로 할당되었고 해안포와 야전포병에는 임시변통으로 흑색화약이 보급되었습니다. 야전포병에 대한 무연화약 구입은 5월이 되어서야 시작되었고 전쟁 내내 무연화약 보급은 부족했습니다.20)
그 밖의 군장류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족한 재고량을 민간기업의 생산능력으로 보충하려 했으나 위에서 언급한 무연화약과 마찬가지로 민간기업들은 생산해 본 경험이 없는 군수물자를 생산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실제 생산된 것들도 조악한 품질이 많았던 모양입니다.21) 탄입대 같은 것은 지금 우리의 기준으로 본다면 꽤 단순한 물건인데 이런 것 조차도 당시 미육군의 품질 기준을 통과하는데 꽤 어려움을 겪었던 모양이더군요.

미서전쟁 기간 중 미국의 전시동원을 보면 아무리 방대한 산업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이 바로 군수물자 생산능력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차대전 당시 미국은 방대한 동원력을 보여주었지만 거기에는 미서전쟁과 1차대전을 거치면서 축적된 경험과 전간기 동원을 위한 많은 연구가 바탕에 깔려있었습니다. 남북전쟁 이후 30년이 지난뒤 갑자기 전쟁에 뛰어든 미서전쟁기의 미국은 그와는 동떨어진 존재였습니다. 군대를 어떻게 유지하고 조직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개념도 부족했고 민간부문의 경제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하는 능력도 부족했습니다. 위에서 열거한 몇가지 극단적인 사례처럼 경험부족으로 인한 심각한 비효율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저런 시행착오를 극복하면서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고 이런 경험이 조금씩 쌓여가면서 마침내 2차대전 시기에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방대한 전시동원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1) Jerry Cooper, The Rise of the National Guard : The Evolution of the American Militia, 1865-1920,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97), p.97
2) Michael D. Doubler, Civilian in Peace, Soldier in War : The Army National Guard, 1636-2000,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3), p.129
3) Graham A. Cosmas, An Army for Empire : The United States Army in the Spanish-American War, (Texas A&M University Press, 1998), pp.6~7
4) Jerry Cooper, Ibid., pp.99~100
5) Jerry Cooper, Ibid., pp.102~103
6) Graham A. Cosmas, Ibid., p.86
7) Jerry Cooper, Ibid., pp.97~98; Graham A. Cosmas, Ibid.,  pp.82~89
8) “The Dodge Commission Assesses the Work of the Quartermaster Department in the War with Spain”, United States Army Logistics 1775~1992. Vol.2, (CMH, US Army, 1997), p.336
9) “The Dodge Commission Assesses the Work of the Quartermaster Department in the War with Spain”, United States Army Logistics 1775~1992. Vol.2, (CMH, US Army, 1997), pp.337~338
10) “Official Allowances for Supplies, Equipment, and Transprot, 1898”,  United States Army Logistics 1775~1992. Vol.2, (CMH, US Army, 1997), p.346
11) Graham A. Cosmas, Ibid.,  p.151
12) “Official Allowances for Supplies, Equipment, and Transprot, 1898”,  United States Army Logistics 1775~1992. Vol.2, (CMH, US Army, 1997), p.346
13) Graham A. Cosmas, Ibid.,  pp.82~84
14) Graham A. Cosmas, Ibid.,  p.124
15) Graham A. Cosmas, Ibid.,  p.148
16) Graham A. Cosmas, Ibid.,  p.137
17) Graham A. Cosmas, Ibid.,  p.149
18) Graham A. Cosmas, Ibid.,  p.154
19) Janice E. McKenny, The Organizational History of Field Artillery, 1775~2003, (CMH, US Army, 2007), pp.85~88;  Graham A. Cosmas, Ibid.,  p.152
20) Graham A. Cosmas, Ibid.,  pp.152~153
21) Graham A. Cosmas, Ibid.,  pp.156~157

2011년 8월 20일 토요일

징병제에 대한 잡상 하나

근대적인 대규모 국민동원을 처음으로 시도한 것은 혁명기의 프랑스 였지만 이것을 더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은 프로이센이었습니다. Albrecht von Roon의 군제개혁은 프로이센식의 동원체제를 확립했고 보불전쟁 이후로는 세계 각국의 모델이 되기도 했지요. 그런데 론의 군제개혁은 병력동원의 효율성에 초점을 맞춘 것 이었습니다. 징병제를 옹호하는 측에서 지지하는 "무장한 시민"의 개념과는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론의 군제개혁은 독일 자유주의자들이 1813년 독일 민족 정신의 발현으로, 그리고 "무장한 시민"의 상징으로 생각한 향토방위군Landwehr를 축소하고 그 대신 국가가 "통제"하는 현역 자원을 늘리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징병제를 옹호해야 하는 입장에서 이런 사실들은 골치아픈 진실입니다. "무장한 시민"으로서의 징병제를 옹호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채택한 징병제는 "무장한 시민"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단지 병력자원 확보에 초점을 맞춘 프로이센 방식에 가까우니 말입니다. 그리고 사실 한국의 징병제는 프로이센 지배층의 구상과 비슷한 바탕에서 움직이고 있지요;;;; 생각하면 할수록 답답한 문제인데 좀 더 정리된 글을 하나 쓰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2011년 4월 30일 토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1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2. 테렌스 주버VS로버트 폴리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2

S. 번외편 및 기타 사항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S-1


지난번 글에 서는 로버트 폴리의 주장에 대한 테렌스 주버의 반론을 다루었습니다. 로버트 폴리의 첫 번째 글과 여기에 대한 테렌스 주버의 반론은 전초전적인 성격으로 분량도 매우 소략했습니다. 하지만 로버트 폴리는 테렌스 주버의 반론을 접한 뒤 본격적인 반박에 들어갑니다. 이번에 다룰 글은 로버트 폴리가 2006년 War in History 13권 1호에 기고한 “The Real Schlieffen Plan”이라는 제목의 반박문으로 상당히 재미있는 글입니다. 로버트 폴리는 테렌스 주버의 사료 이용 등 근본적인 부분에서 의문을 제기하며 전통적인 학설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로버트 폴리의 이 글은 슐리펜 계획을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재미있는 글이고 1차대전 직전 독일육군 총참모부를 이해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3
로버트 폴리의 재반론


1. 테렌스 주버의 사료 해석에 대한 비판

로버트 폴리는 이 글에서 가장 먼저 테렌스 주버의 사료 이용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테렌스 주버가 사용한 주사료였던 빌헬름 디크만(Wilhelm Dieckmann)의 연구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폴리가 보기에 디크만의 연구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지만 치명적인 결함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인 1904~1905년에 대한 내용이 누락되어 있다는 점 입니다. 이것이 완성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이 문서가 1945년 소련군에 노획된 이후 1989년 독일에 반환될 때 까지의 시기에 사라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가장 중요한 시기가 누락되어 있는 것은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빌헬름 디크만이 연구를 하던 무렵 가용 가능했던 사료가 제한적이었다는 점 입니다. 테렌스 주버는 지난번 글에서 슐리펜계획이 실제 전쟁계획이었다는 역사왜곡을 한 독일군 참모부출신들이 빌헬름 디크만의 일급기밀자료 접근을 의도적으로 방해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로버트 폴리는 1918~1945년 사이 독일육군의 문서고가 1차대전 시기 독일군의 모든 문서를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우선 1918~1919년의 혼란기에 많은 사료가 파기된 것이 첫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로는 1914년 이전의 문서들 중 상당수가 정보 누출을 우려해 독일군 스스로의 손에 의해 파기되었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폴리는 이어서 가용한 사료가 부족했기 대문에 독일육군은 전간기 사이에 사료 수집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이 과정에서 슐리펜 집안이 소장하고 있던 비망록이 입수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테렌스 주버는 슐리펜계획이 실제 작전계획이 아니라는 증거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이 슐리펜 가문이 개별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문서라는 점을 지적했는데 폴리의 설명을 따르게 되면 이 점이야 말로 전통적인 학설을 뒷받침 하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는 주버가 디크만의 연구를 해석하는 방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디크만의 연구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가 1890년대 중반까지의 계획, 그리고 두 번째가 1890년대 중반에서 1903년 까지의 계획,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1904년에서 1905년까지의 계획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은 누락되어 있지만 목차에는 제목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로버트 폴리에 따르면 세 번째 부분의 제목은 바로 “포위 계획(Der Umfassungsplan)”이었습니다. 본문은 누락되어 있지만 제목만 보더라도 빌헬름 디크만은 슐리펜이 1904년 이후 대규모 우회 포위기동을 구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 입니다. 목차의 구성이야 말로 디크만의 연구는 슐리펜이 수많은 계획 변경을 통해 궁극적으로 프랑스군 좌익을 돌파하는 대규모 포위기동을 구상하는 방향으로 나갔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라는 것이지요. 주버는 디크만이 전통적인 학설을 따른 이유가 모든 음모를 꾸민 참모부 출신들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결과라는 해석을 하고 있지만 폴리는 이런 결론을 내리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라고 비판합니다.

두 번째로는 테렌스 주버가 디크만의 연구에서 누락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사용한 사료인 참모부연습 문서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주버의 기본적인 주장은 슐리펜이 1904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과 1905년에 실시한 마지막 워게임(Kriegsspiel), 그리고 소(小)몰트케가 1906년과 1908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에서 슐리펜계획과 유사한 요소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은 실제 전쟁계획이 아니며 슐리펜계획은 허구라는 것 입니다. 폴리는 이 주장이 일부 타당하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폴리는 먼저 논쟁을 시작한 테렌스 홈즈의 주장을 옹호하면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은 매우 융통성이 강하기 때문에 다양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어서 주버와 같은 방식으로 독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폴리는 주버가 독일군의 참모부연습의 성격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합니다. 주버는 참모부연습이 실제 전쟁계획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폴리는 참모부연습의 주목적은 전쟁계획을 시험하는 것 보다는 참모부 장교들의 교육훈련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폴리는 슐리펜계획에 대한 초기 연구중 하나인 헤르만 폰 쿨(Hermann von Kuhl)의 “1차대전기 독일 총참모부의 전쟁준비와 전쟁수행(Der deutsche Generalstab in Vorbereitung und Durchführung des Weltkrieges)”을 인용하여 슐리펜이 참모부연습을 특정한 작전의 연습이 아니라 다양한 환경에서 작전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 자유롭게 시험하려 했음을 강조합니다. 또한 참모부연습이 실제 전쟁계획을 시험하는 것 이었다면 기밀등급이 최고등급인 절대기밀(Streng Geheim)로 분류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일반 기밀(Geheim)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게다가 기밀등급이 낮을 뿐 아니라 참모부연습 결과를 25개 군단사령부 및 각급 기관에 배포한 점도 지적합니다. 실제 전쟁계획이라면 적국에 유출될 위험을 무릅쓰면서 평시에 잔뜩 뿌려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독일 육군은 기밀누출을 우려해 유효기간이 지난 기밀문서의 파기에 주의를 기울였는데 참모부연습은 파기 대상에도 속하지 않는 문서였다고 합니다.

세 번째로는 부대전개계획(Aufmarschpläne)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폴리는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하기 이전에 수립한 1905/06년도 부대전개계획만 살펴보더라도 슐리펜계획의 기본적인 요소가 나타난다고 강조합니다. 1905/06년 부대전개계획 I에서는 26개 군단과 20개 예비사단을 총 8개의 야전군으로 편성하고 주력을 메츠 북쪽에 집결시켜 저지대국가들을 통해 진격시키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대전개계획 II는 동부전선에 병력을 일부 보강하고 있지만 여전히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23개 군단과 16개 예비사단을 7개 야전군으로 편성해 부대전개계획 I과 마찬가지로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침공하여 프랑스 북부로 진입하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슐리펜은 1905/06년 부대전개계획에서 벨기에의 철도망을 장악하는것을 중요시해 5개의 기병사단이 신속히 마스강의 철교를 점령하도록 하였습니다.

폴리는 주버의 가장 큰 문제가 주사료인 디크만의 연구를 잘못 해석한데 있다고 봅니다. 이 때문에 참모부연습과 부대전개계획 같은 다른 사료들도 오독하는 연쇄작용이 일어났다는 것 입니다.


2.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 문제

폴리는 사료해석의 문제 다음으로 주버의 당시 상황에 대한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전쟁 계획은 국제정세와 군사적 상황을 반영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해 없이는 독일의 전쟁 계획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첫 번째로는 러일전쟁의 결과와 이것이 끼친 영향입니다. 테렌스 주버는 러시아가 러일전쟁의 피해로 부터 재빠르게 회복되었기 때문에 슐리펜은 결국 양면전쟁의 위협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폴리는 이에 대해 앞선 논쟁에서 테렌스 홈즈가 인용한 바 있는 1905년 6월 10일에 슐리펜이 독일 수상 베른하르트 폰 뷜로우(Bernhard von Bülow)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여 비판하고 있습니다. 슐리펜은 뷜로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러시아군이 예상 이상으로 약하며 전쟁 결과 더 약해졌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또한 러시아의 군개혁이 성과를 거둘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표했습니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이 너무 취약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도 러시아군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슐리펜의 생각에 큰 영향을 끼친것은 러시아군에 파견된 관전무관들의 보고서였습니다. 폴리는 오토 폰 라우엔슈타인(Otto von Lauenstein)이 1905년 12월에 작성한 마지막 보고서를 인용했는데 이 보고서에서 러시아인들이 나태하고 어렵고 힘든 것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인종적 편견에 가득찬 결론을 내렸습니다. 또한 러시아 장교단은 위아래를 막론하고 형편없는 지휘능력을 가졌다고 혹평했습니다. 라우엔슈타인은 러시아군이 이런 문제들을 단기간에 해결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폴리는 다음으로 외교적 상황의 변화를 강조합니다. 1905년의 독일은 러시아를 다시 독일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외교적 노력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슐리펜이 프랑스에 전력을 집중하는 전쟁 계획을 수립한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폴리는 1906년 모로코 위기 당시 독일 정부내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된 프랑스를 상대로 예방전쟁을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슐리펜도 예방전쟁을 강력히 지지했다고 지적합니다. 프랑스에 대한 예방전쟁이 실행되지 못한 것은 프랑스와의 포병전력 격차를 우려한 전쟁부 장관 아이넴(Karl von Einem)이 황제와 수상을 설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슐리펜이 프랑스군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폴리에 따르면 슐리펜은 러일전쟁의 결과 프랑스가 러시아군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고 독일과 단독으로 승부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수세를 취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러일전쟁이 끝난 뒤 요새 강화에 막대한 예산을 배정했는데 이것은 프랑스가 수세를 취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는 것 입니다. 프랑스가 요새를 강화하는데 맞춰 독일군도 대구경 야포의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1905년 시점에서는 아직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 없었습니다. 결국 독일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프랑스군의 좌익을 노리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벨기에를 침공하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었습니다.

이렇게 러일전쟁 이후의 정세를 고려한다면 슐리펜 계획이 작성된 맥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폴리의 주장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타당한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3. 소(小) 몰트케의 전쟁 계획

세번째로는 소 몰트케가 총참모장에 취임한 이후의 계획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되는 것이 1905년 이후의 정세 변동입니다.

소 몰트케 취임 초기 독일군의 정보당국은 러시아가 러일전쟁과 혁명의 혼란을 수습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몰트케 초기의 부대전개계획은 슐리펜 말기의 계획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폴리의 설명에 따르면 1906/07년 부대전개계획은 주력을 서부전선에 집결하여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침공한 뒤 프랑스군의 좌익으로 돌파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소몰트케는 1906/07년 계획에서 우익의 주력에 23개 현역군단과 11½개 예비군단을 배정하고 이를 7개 야전군으로 편성했습니다. 이 계획에서 각 야전군의 임무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제1군(5개  예비군단)은 안트베르펜으로 진격하여 우익을 엄호, 제2군(4개 군단)은 브뤼셀 방향으로 진격, 제3군(4개 군단+1개 예비군단)은 제4군(4개 군단+3개 예비사단)과 함께 리에쥬와 나무르의 벨기에군 요새를 공격, 제5군은 지베(Givet)-스당을 잇는 선으로 진격하여 우익의 주력과 제6군과 접촉을 유지, 제6군(5개 군단)은 이 대규모 우회기동의 중심축으로 카리냥(Carignan)-롱귀용(Longuyon)을 잇는 선으로 진격, 제8군(1개 군단+4개 예비군단)은 6군을 후속하여 진격하면서 베르덩 방면에서 예상되는 프랑스군의 역습을 견제, 좌익의 제7군(3개 군단+2개 예비군단)은 프랑스군을 정면에서 견제.

하지만 이러한 계획은 정세변동과 함께 수정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먼저 러시아가 러일전쟁의 영향에서 빨리 회복된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1910년 경에는 독일군 정보당국도 러시아군의 회복을 확실하게 인식하였고 몰트케는 같은해 8월 수상이었던 베트만 홀벡(Theobald von Bethmann Hollweg)에게 쓴 편지에서 러시아군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독일 정보당국은 러시아군이 신형 야포의 도입을 서두르면서 장교단을 교체하고 훈련을 강화하고 있는 점을 포착했습니다. 또한 러시아군은 동원체제를 개편하여 부대동원을 보다 신속히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소 몰트케는 러시아가 추진하고 있는 철도계획이 완성된다면 동원개시 13일차에 유럽전선에 투입할 병력의 2/3을, 18일차에 전 병력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폴리는 이러한 상황이 소 몰트케의 전쟁계획에서 서부전선의 중요성을 더욱 더 높아지게 했다고 설명합니다. 러시아군은 단기간에 격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지만 독일은 양면전쟁을 치루기 어렵기에 프랑스와의 승부를 더 빨리 내야 했다는 것 입니다. 소 몰트케는 프랑스는 가용한 인적자원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한차례의 결전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다면 서부전선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한다면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다시 돌리는 것이 가능해 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계속해서 국경지대의 요새를 강화하고 있었고 독일군의 야포 개발과 배치는 이것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취약점은 여전히 좌익에 있었고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지대의 요새들은 1912년이 되어서야 겨우 제한적인 보강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소 몰트케가 이 지역에 더욱 더 관심을 기울 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반면 프랑스군은 보다 강화되었고 러시아가 다시 공격 능력을 갖추게 됨으로써 독일측은 프랑스가 수세만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남부 독일을 방어하기 위해서 좌익을 보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는 동맹국이었으나 점차 외교적인 태도가 변화하고 있었고 소 몰트케는 이탈리아군으로 프랑스군 일부를 견제하는 것이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폴리는 결국 이러한 변화가 소 몰트케의 계획을 더욱 더 신속한 공격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합니다.  소 몰트케의 1908년 계획에서 좌익의 병력은 8개 군단으로 증강되는 한편 우익의 약화와 함께 장기전에 대비해 네덜란드를 독일의 대외 창구로 삼기 위해서 네덜란드 침공은 계획에서 누락되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철로를 이용할 수 없게 된 만큼 벨기에의 철로, 특히 철교들을 안전하게 탈취하는 것은 더욱 중요해 졌습니다. 주력인 제1군과 제2군을 합친 60만의 대군이 불과 12마일에 불과한 정면으로 진격해야 했으니 이 제한된 정면에 있는 철도망이 파괴된다면 그 뒷감당은 꽤 골치아픈 일이었을 것 입니다. 벨기에의 철도망을 신속하게 탈취하기 위해서 1908년 계획에서는 동원 11일차에 공격을 개시하도록 명시했는데 1913년 벨기에가 새 육군법을 제정해 육군 규모를 크게 늘리자 동원 5일차에 공격을 시작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소 몰트케 시기의 전쟁 계획에 대한 폴리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소 몰트케는 취임 초기만 하더라도 러시아군을 낮게 평가해 서부전선, 특히 우익에 주력을 집중하는 슐리펜의 계획을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가 점차 러일전쟁의 충격에서 회복되면서 계획을 변경해야만 하는 압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양면전쟁의 가능성이 높아진 가운데 소 몰트케는 독일이 장기전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 전장을 신속히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 결과 프랑스를 더 신속히 무너뜨려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고 이것은 병력동원과 공격일정을 더 앞당기는 것으로 반영되었습니다.

폴리는 주버가 지나치게 작전 단위의 분석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슐리펜 계획이라는 대전략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글에서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주버의 사료 인용은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2009년 1월 24일 토요일

적백내전기 볼셰비키 정부의 징병제 실시와 그 문제점

군사사, 또는 소련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대부분 잘 아시겠지만 소련을 세운 볼셰비키들은 군사력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으며 군대를 조직하는데 자신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합니다.

볼셰비키들은 붉은군대의 창설 초기 계급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노동자’ 계층의 지원을 통해 군대를 확장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상당수의 볼셰비키들은 계급으로서의 농민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민을 군대에 받아들일 생각이 애초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적백내전 초기 단계에서는 농민들이 볼셰비키를 지지하는데 소극적인 경향을 보였다고 하지요. 그러나 러시아 전역에서 혁명에 반대하는 세력이 들고 일어났기 때문에 순수하게 자원한 노동자만으로 이루어진 군대로 대응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전쟁이 격화되는 마당에 한 줌 밖에 되지 않는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군대를 증강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막상 모병을 실시해 보니 노동자들은 총을 잡는데 큰 관심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1918년 2월에 모스크바에서 모병을 실시했을 때 30만명의 노동자가 자원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실제로 지원한 것은 2만 명에 불과했으며 게다가 이 중 70%는 원래 군인이었습니다. 군인 출신이 아닌 자원자들도 도시 실업자나 범죄자가 상당수여서 혁명군대라고 하기에는 뭔가 민망한 상태였습니다.[Figes, 1990, p.175]

1918년 5월과 6월에 겪은 여러 차례의 군사적 패배는 대규모 병력 동원의 필요성을 증대시켰습니다. 볼셰비키 정부는 급박한 전황에 대처하기 위해 1918년 4월 8일에 실질적으로 국민개병제를 실시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에 따라 5월부터 대규모의 병력 동원이 시작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형식적으로는 지원병 모집이었지만 징병 연령대의 남성들에게 입대를 강요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5월 29일, 트로츠키는 공식적으로 징병을 선포합니다.[Ziemke, 2004, pp.42~43] 그러나 볼셰비키 정부는 여전히 도시 노동자들을 동원하려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실제로 1918년 6월에서 8월 사이에 있었던 총 15회의 모병 캠페인 중 11회는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이뤄졌다고 합니다.[von Hagen, 1999, p.36] 이러한 대규모의 병력 동원으로 1918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만 20만명의 노동자가 군대로 편입되었습니다. 농민 또한 동원 대상에 포함되었지만 초기에는 농민의 참가가 매우 저조했습니다. 볼셰비키 정부는 1893~1897년 출생의 농민 275,000명을 동원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1918년 6월과 7월의 동원을 통해 4만명을 충원하는데 불과했습니다. 물론 1918년 8월 이후 80만명이 넘는 농민을 동원하는 성과를 거두긴 했습니다만 초기의 저조한 성과는 충분히 실망스러운 것 이었습니다.[Figes, 1990, p.177]

게다가 1918년 8월 6일 카잔이 함락되자 볼셰비키 정부의 위기감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제극렬 좌파조차도 승리를 위해서는 그들이 혐오하는 중앙 통제적인 지휘체계와 대규모 군대가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레닌은 1918년 10월 3일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VTsIK, Всероссийский Центральный Исполнительный Комитет)에서 당장 3백만의 군대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Figes, 1990, p.181] 이런 대규모 군대를 편성하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농민을 대상으로 대규모 ‘징병’을 실시하는 것 이었습니다. 이미 트로츠키는 짜르 통치하의 장교와 부사관들을 ‘군사전문가’로서 혁명 군대에 대거 편입시킨 경험이 있었습니다. 혁명의 승리가 절실한 마당에 농민을 징집하는 실용노선을 택한다 한 들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1919년 3월 18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8차 전당대회는 농민 문제에 대한 일대 전환점이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볼셰비키들은 혁명이 완수된 이후에도 중농 계급은 오랜 기간 존속할 것이기 때문에 혁명 승리를 위해 계급으로서의 중농층과 연합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즉 ‘빈농 및 중농과 연합하여 부농을 치자’는 논리 였습니다.[von Hagen, 1999, p.60] 8차 전당대회 이후 농민에 대한 대규모의 징집이 추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1919년부터 붉은군대는 폭증하기 시작했습니다. 1919년 1월 약 80만명 수준이던 붉은군대는 불과 1년 뒤인 1920년 1월에는 3백만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징병이 절정에 달한 1919년 3월에는 한 달 동안 345,000명이 징집되었습니다.[Figes, 1990, p.183] 부하린은 붉은군대에 농민이 대거 유입됨으로서 프롤레타리아들이 농민화 되어 혁명의 전위로서의 의식을 사라지게 만든다고 툴툴댔습니다.[Lincoln, 1999, p.374] 또한 군대 내의 당원들도 붉은군대의 계급적 순수성이 더럽혀 지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어쩌겠습니까. 전쟁 중인데…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징병은 겉으로는 꽤 인상적인 것이었지만 실제 내용면에서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이 부족해 징집한 훈련병들을 신속히 훈련시켜 전선으로 투입할 수 가 없었습니다. 내전 기간 중 붉은군대가 최대 규모에 달했던 1920년 10월의 경우 총 550만명의 병력 중 225만명이 훈련병이었습니다. 그리고 1차대전이 끝난 직후에 바로 내전이 발발했기 때문에 징병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던 것도 문제였습니다. 특히 1차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남성들은 군대에 징집되는 것을 회피했습니다.
게다가 기본적인 장비의 부족으로 실제 전투 병력은 더 적었습니다. 1920년 10월 기준으로 총 병력 550만명 중 전투 병력은 70만 명이고 이 중 제대로 무장을 갖춘 숫자는 50만명 내외로 추정됩니다.[Figes, 1990, p.184] 붉은군대의 장비 부족 문제는 특히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러시아는 이미 1차대전 당시에도 군수물자 부족으로 고생했습니다만 모든 것이 혼란에 빠진 내전 상황에서는 문제가 더 심각했습니다. 볼셰비키 정부가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마구 잡이로 증강시켰기 때문에 보급 문제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붉은군대의 병사 1인당 식량 지급량은 1919년 2월 기준으로 하루 400그람의 빵이었으나 실제로 일선 부대는 이 수준의 급식을 받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일부 부대는 식량 보급이 되지 않아 병사들이 굶어죽는 경우도 발생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먹을 식량도 보급이 안되는 마당이었으니 군마에게 먹일 사료의 보급도 딱히 나을 게 없었습니다. 물론 전선에서의 혹사나 질병으로 인한 손실도 많았으나 상당수의 군마는 사료가 없어 죽었습니다. 질병으로 인한 폐사도 사료의 부족이 원인인 경우가 많았다고 하지요.[Figes, 1990, pp.191~192] 식량 사정이 이 지경이었으니 다른 보급품의 상태가 더 좋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선 부대들의 경우 군복을 지급받지 못한 병사가 60~90% 사이를 오가는 것은 기본이었고 아예 군복 자체를 받지 못한 부대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겨울에 특히 심각한 문제였는데 동복을 지급받지 못하면 바로 얼어 죽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군대가 갑자기 팽창한 1919~1920년의 겨울에는 동복 부족으로 인해 수많은 병사들이 얼어 죽었습니다. 군화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가죽 신발보다는 현지에서 쉽게 조달할 수 있는 천으로 만든 신발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각 부대들은 전선 근처에서 직접 물자를 조달했는데 이것은 사실상 수백년 전의 약탈 보급으로 되돌아 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족한 식량, 피복, 위생 도구는 바로 질병을 불러왔고 적백내전 기간 중 붉은군대 사망자의 대부분은 전사가 아닌 질병 및 부상의 악화로 인한 사망이었습니다. 내전 기간 동안 붉은군대의 전사자는 259,213명이었는데 질병과 부상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는 616,605명이었습니다.[Krivosheev, 1997, p.35] 대부분의 부대들은 부대원의 10~15% 정도가 항상 질병으로 앓아 누워 있었고 심지어는 환자가 전 병력의 80%인 부대가 전선에서 작전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티푸스, 콜레라, 천연두, 독감, 성병이 만연했고 많은 희생자를 가져왔습니다.[Figes, 1990, pp.193] 붉은 군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병원균 군락이 되다 보니 피부병 같은 것은 질병 축에도 못 낄 정도였다지요.

상황이 이 모양이다 보니 군기의 문란이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특히 병사들이 작전 중에도 술을 마셔대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미 트로츠키는 1918년 11월 일선 지휘관들에게 군기 확립을 위해 사병에 대한 즉결처분권을 부여한 바 있었습니다.[von Hagen, 1999, p.65] 음주 문제가 대두되면서 즉결처분의 대상이 근무 중 술을 마시는 병사로 확대되었습니다. 물론 병사들의 사정을 잘 아는 지휘관들은 명령을 받아도 이것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런 짓을 했다가는 뒤통수에 총을 맞을 거라는 것을 잘 알았겠지요. 실제로 분노한 병사들이 장교나 공산당원을 살해하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그리고 간혹 부대내의 유태인을 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군요.(;;;;)
탈영은 군기문란이 가져온 가장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전선에서의 탈영은 물론 징집과정에서의 탈주도 빈번했다고 합니다. 징병되어 전선으로 향하는 도중 탈영하는 경우가 많았고 때로는 징집병들이 집단으로 도망가기도 했다는 군요. 1919년에는 징병 도중 도망치는 경우가 전체 탈영병의 18~20%였다고 합니다.[von Hagen, 1999, p.69] 게다가 혼란기이다 보니 징집 대상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과 관리가 되지 않아서 한 번 탈영한 병사가 다른 부대에 들어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내전기의 국민당 군대나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군대를 연상시키는 이야기 입니다.(;;;;) 탈영으로 인한 병력 손실은 꽤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1920년 2월과 4월 사이에 붉은군대는 294,000명의 병력을 잃었는데 이 중 전사자와 부상자는 2만명에 불과했습니다. 실제로 탈영병의 규모는 엄청났는데 1919년 6월부터 1920년 6월의 1년간 탈영한 병사의 숫자는 2,638,000명이었다고 합니다. 수백만명을 징집하면 수백만명이 탈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중 탈영 뒤 자수한 1,531,000명을 제외하더라도 1년에 백만이 넘는 탈영병이 발생했다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였습니다.[Figes, 1990, pp.198~328]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실제 전투 부대에서는 탈영율이 낮았다는 것 입니다. 전투부대의 탈영병은 전체 탈영병의 5~7% 수준이었다고 하는군요.[von Hagen, 1999, p.69] 그러나 위에서 살펴봤듯 붉은군대의 총 병력 중 전투 병력이 얼마 되지 않으니 딱히 좋다고 하기도 그렇습니다. 특히 강제적으로 징병된 병사들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예를 들어 23사단 202포병여단의 경우 자원한 노동자가 주축을 이뤘던 시기에는 큰 문제없이 싸웠으나 1919년 8월에 손실보충을 위해 농민 징집병들을 배치받은 뒤로는 문제가 심각해 졌습니다. 이후의 전투에서 200명 정도의 농민 징집병들이 여단 정치위원을 사살한 뒤 도망가 버려 결국에는 이 여단이 해체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Figes, 1990, pp.203] 심지어 연대단위로 반란을 일으킨 뒤 도망가는 경우도 발생했습니다.[Lincoln, 1999, p.252] 전선의 상황에 분노한 트로츠키는 탈영병들을 모두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역시 일선의 상황을 잘 아는 지휘관이나 모병 담당자들은 본보기로 몇 명을 처형하는 정도로 그쳤습니다.[von Hagen, 1999, p.72] 어차피 상당수의 탈영병들은 알아서 돌아올 테고 또 아무리 총살을 해 봤자 병사들을 탈영하게 만드는 군대의 문제점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적백내전기 볼셰비키 정부의 병력 동원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부가 유지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군대가 늘어났기 때문에 일선 부대들은 만성적인 보급 부족에 시달렸으며 수백만의 군대를 만들었지만 정작 전투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보급의 부족으로 인해 발생한 막대한 비전투손실은 근대국가의 군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징병제를 통해 증강된 붉은군대는 결국 볼셰비키를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됩니다. 아마 좌파 볼셰비키들의 주장대로 혁명적 순수성을 위해 노동자 지원병만으로 내전을 치렀다면 현대사는 조금 다르게 돌아갔을 가능성이 높을 것 입니다.


참고문헌
John Erickson,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Third Edition), Frank Cass, 1962/2001
Orlando Figes, ‘The Red Army and Mass Mobilization during The Russian Civil War 1918~1920’, Past and Present 129, 1990
Mark von Hagen, Soldiers in the Proletarian Dictatorship : The Red Army and the Soviet Socialist State, 1917~1930, Cornell University Press, 1999
G. F. Krivosheev(ed), Soviet Casuali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 Greenhill, 1993/1997
W. Bruce Lincoln, Red Victory : A History of the Russian Civil War 1918~1921, Da Capo, 1989/1999
Roger R. Reese, Red Commanders : A Social History of the Soviet Army Officer Corps 1918~1941,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Earl F. Ziemke, The Red Army 1918~1941: From Vanguard of World Revolution to US Ally, Frank Cass, 2004

※ 잡담 1. 그러고 보면 러시아/소련군은 항상 신발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것 같습니다.

※ 2. '역사학도'님이 용어의 사용, 개념 문제에 대해서 지적을 하셨습니다. 표현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본문의 일부를 수정했습니다.

2008년 11월 18일 화요일

2차대전 당시 소련여성의 전투 참여에 대한 John Barber의 글

A World at Total War를 읽다 보니 독소전 당시 소련의 여성문제를 다룬 바버(John Barber)의 글이 있더군요. 짤막하지만 핵심적인 부분들을 잘 짚은 것 같은데 이 글에서 소련 여군에 대한 부분만 발췌해서 올려봅니다.(좀 날림번역 입니다;;;)

전선의 병사로서(Фронтовики)

2차대전 당시 소련군에 입대한 여성들은 기존에 있던 여성과 전쟁간의 전례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약 80만명의 소련 여성이 2차대전 기간 중 군대에 입대했다. 빨치산을 포함시키면 그 숫자는 100만을 넘어설 수도 있다. 연합군과 비교했을 때 소련의 전쟁은 발틱해에서 흑해까지, 그리고 카프카즈와 그 너머에 걸친 수백 킬로미터의 전선에 걸쳐 전개된 총력전이었기 때문에 현역 복무는 종종 전선에 직접 투입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상당수의 여성은 전통적인 업무 – 군의관, 간호사, 취사병, 제빵병, 세탁 및 목욕탕의 당번병으로 활동했다. 전선에 파견된 의사 중 41퍼센트, 그리고 군의관 중 43퍼센트가 여성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기존에는 남성들만의 영역이었던 전투공병, 야전공병, 전화교환수, 무전병, 운전병, 정비병, 교통헌병, 통역병, 정보병, 그리고 정치장교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열거한 임무들은 전쟁에서 필수적인 임무들이었으며 전선에서 직접 전투에 휘말리거나 사상자를 내곤 했다.

그러나 수 천명의 여성들은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 전쟁이 시작된 초기의 몇 개월 동안은 여성 스스로의 자원이나 조종사 등의 특수한 임무에 필요한 경우가 아닐 경우 여성의 전투 참여는 배제되었다. 붉은군대가 수백만명의 전사자와 포로를 내고 이들의 빈자리를 메꿀 인력이 절실히 필요해 진 1942년 초에 가서야 공산당중앙위원회는 전투에 직접 참여할 여성 지원병을 모집한다는 공식 결정을 내렸다. 봄부터 시작된 콤소몰 주도의 대규모 모병 활동으로 방공군 10만을 포함해 수많은 여성이 모집되었다. 1944년까지 네 차례의 여성 모병운동이 더 있었다. 1943년에 이르러 여성은 소련 군대 병력의 8퍼센트에 달했다. 1945년에는 여군 병력이 246,000명에 달했다. 소련 여군들은 보병사단에 소속되어 백병전을 치르고 포병과 대공포 부대에서 활동했다. 또한 여군들은 저격병과 기관총사수, 공수부대원, 빨치산으로 활동했다. 여군 중에는 전차장과 보병 소대장도 있었다. 전투기 연대 한 개와 폭격기 연대 세개는 조종사부터 정비병까지 모두 여성으로만 편성되었다. 독소전에 대한 영국의 권위있는 역사학자는 2차대전 중 소련 여성의 전쟁 참여 기록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다.

“인류 역사상 용기와 인내, 그리고 수난의 이야기로서 이것과 비교할 만한 것은 드물 것이다. 붉은군대의 우수한 병사들 중 상당수는 여성이었으며 이들은 소련 최고의 영예인 소연방영웅이 되거나 사후에 추서되었다.” [Erickson 1993, 59~60]

여성들이 전투에 참여한 동기는 다양했다. 많은 여성들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고취한 요소는 애국심과 전쟁수행에 기여하고자 하는 욕구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구는 어떤 볼고그라드 출신의 여성의 표현을 빌리자면 “스탈린 동지에 대한 사랑”으로서 표출되었다. 그러나 여성 참전용사들의 회고에 따르면 이들의 참전 결정은 보다 개인적인 의도에서 이뤄지곤 했던 것 같다. 전사한 남편, 남자 형제, 아버지, 아들, 애인의 복수나 또는 전선에서 이들을 찾기 위해서 등의 이유였다. 그리고 이들은 여러 고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표를 이루곤 했다.

최근 독소전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에 따르면 여성의 전투 참여에 대한 남성들의 반응은 경외감, 이질감, 그리고 죄책감이 혼재된 상태로 나타났다. 전통적인 여성상과 전쟁의 현실간의 괴리는 다양한 감정을 만들었다. 한 참전군인은 이렇게 회고했다. “남자군인들이 전선에서 여성을 목격하면 그들의 표정이 완전히 바뀌었다. 여군 한 명의 목소리로도 남자들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다른 참전군인의 회고는 이렇다. “여성이 전투에 참여하면 남자들은 보다 명예롭게 행동하고 용감해졌다.” 반면 저격병으로 활동했던 한 참전군인은 살인이 가지는 “비여성적” 성격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두 명의 여자가 저격용 소총을 들고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무인지대로 침투한다. 이것은 인간 ‘사냥’이다. … 비록 나 자신도 저격수였지만 … 어쨌든 나는 남자였다. … 나는 수색정찰을 나간다면 이런 여자들과 함께 가겠지만 아내로서 함께 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전선의 여성들은 남성 전우들과 마찬가지로 끔찍한 위험과 잔인함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여기에 그들이 적의 손에 사로잡힐 경우 처하게 될 운명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또 여성들은 그와 반대로 폭력적인 가해자가 될 수도 있었다.

“전투 중 적의 전차 두 대로부터 공격 받았을 때 두 명의 남성 군인이 비겁한 행동을 했다. … 방어선이 유린되고 모두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 파시스트들은 우리의 부상병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 다음 아침에 대대원 전체가 정렬한 자리에서 비겁한 행동을 한 병사들을 끌어냈다. 이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선고가 내려졌다. : 총살대에 의한 처형 … 세 명이 앞으로 나오고 나머지는 제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기관단총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내가 먼저 앞으로 나서자 다른 사람들도 나를 따랐다. … 어떠한 자비도 없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전선의 남성과 여성간의 작용은 전우 이상의 관계로 발전했다. 야전의 아내(Подно-полевая Жена)라는 단어가 널리 쓰였다. 그리고 이것은 붉은 군대의 여성에 대한 태도 뿐 만 아니라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는 단어였다. 한 참전 군인은 이렇게 회고했다. “보통 전선에 있는 여군은 장교들의 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어땠겠습니까? 만약 한 여군이 남자가 생기면 이제 다른 남자들도 끊임없이 치근덕 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격렬하고 한편으로는 허무한 전선의 생활은 개인간의 사적인 관계를 촉진시켰다. 일반 사회와 구별되는 것은 이러한 관계의 법적 지위였다. 군대에서의 결혼은 허가 없이는 불가능했고 공인된 관계를 가지는 남자와 여자의 숫자는 극소수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복잡한 남녀관계가 묵인될 수 밖에 없었다.

John Barber, ‘Women in the Soviet War Effort, 1941~1945’, A World at Total War : Global conflict and the politics of destruction 1937-1945,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pp.239~241

2008년 7월 13일 일요일

러시아의 병력동원과 철도 문제

국민개병제와 이에 기반한 동원체제에 대해서는 이미 이 블로그에서 여러 차례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러시아의 동원체제와 철도망의 확충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대규모의 국민동원은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처음 그 위력을 떨친 이후 세 차례에 걸친 독일 통일전쟁에서 그 형태가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특히 독일 통일전쟁에서는 동원체제가 철도라는 현대적 기술과 결합해 그 잠재력을 세계에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미국과 영국을 제외한 세계의 주요 열강들은 모두 독일과 유사한 동원체제를 만들었으며 19세기가 저물 무렵에는 미래 전쟁에서 동원체제가 더욱 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는 점은 명백해 졌습니다.

러시아 또한 세계 유수의 육군국으로서 동원체제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러시아의 방대한 인적자원이 효율적 동원체제와 결합된다면 그 위력은 그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의 동원체제는 다른 국가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를 한 가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러시아의 광대한 국토였습니다.

러시아는 막대한 잠재력을 가진 대국이었지만 산업화에는 뒤쳐졌기 때문에 크림 전쟁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맙니다. 크림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러시아의 철도 총 연장은 1,000km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크림 전쟁이 발발하자 이것은 러시아의 결정적인 약점 중 하나로 작용합니다. 영국과 프랑스 군대는 증기선을 이용해 신속하게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었는데 철도가 부실한 러시아는 막대한 인적자원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크림 반도로 병력을 동원하는데 어려움을 겪은 것 입니다.
1863년 폴란드 봉기를 진압하는데 상트 페테르부르크-바르샤바 철도가 유용하게 활용되었지만 이때 까지도 러시아의 철도 총연장은 3,000km에 불과했습니다. 러시아의 국가 재정은 엉망이었기 때문에 철도 증설은 매우 더딜 수 밖에 없었습니다.

러시아의 철도 연장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적극적인 산업화를 추진한 알렉산드르 2세가 로이테른(Михаил Христофорович Рейтерн)을 재무장관에 임명한 이후 였습니다. 로이테른은 1878년 까지 장관직에 있었는데민간 자본 유치를 통한 철도 확대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러시아의 철도 연장은 20,000km 이상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군부는 민간 자본에 의해 전략적 자산인 철도가 만들어지는 것에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1864년에 참모대학의 교관이었던 오브루체프(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Обручев) 대령은 외국의 상업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는 철도는 러시아 군의 전략적 이동에는 도움이 안되는 노선이 많다고 비난했습니다. 오브루체프는 병력 동원을 위해 러시아의 깊숙한 내륙지역과 발칸 반도 방향으로의 철도 건설을 주장했습니다. 물론 이 지역들은 상업 자본에 의한 철도 건설이 부진한 지역이었습니다. 오브루체프는 신속한 병력 전개를 위해서 모스크바-쿠르스크-세바스토폴로 이어지는 노선과 바르샤바-키예프-오데사로 이어지는 구간을 대대적으로 확충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그리고 이 노선들은 모두 러시아 정부의 재정으로 건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북독일연방이 프랑스를 격파하자 러시아의 정부 재원에 의한 전략 철도 부설에 대한 논의는 한층 더 힘을 얻게 됩니다.

러시아는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독일이 승리를 거둔 이후 효율적 동원체제 구축을 위해 행정적, 기술적 개편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오브루체프는 독일 통일 전쟁 기간 동안의 철도 활용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고 꾸준히 국가 차원의 철도 건설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1873년 소장으로 진급한 오브루체프는 전쟁상 밀류틴(Дмитрий Алексеевич Милютин)에게 미래의 전쟁 계획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합니다. 오브루체프는 이 보고서에서 멀지 않은 장래에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동시에 상대해야 할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지적하고 러시아는 광대한 국토 때문에 신속한 병력 동원이 어려워 전쟁 초기에 병력에서 열세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오브루체프의 보고서는 러시아군은 동원을 완료하는데 최소 54일에서 58일이 소요되는 반면 독일은 그 절반도 안되는 20일 정도에 동원을 완료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특히 철도망이 부실한 오스트리아 방면으로의 동원은 최소 63일에서 70일은 소요될 것으로 전망했는데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심각한 전략적 결함이었습니다. 즉 전쟁 초기에 국경지대가 돌파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오브루체프의 보고서는 이런 전략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동원 시간을 벌 수 있도록 국경지대의 요새를 강화하는 한편 7,000km의 전략 철도를 추가로 증설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오브루체프가 철도 증설을 요구했던 1873년 시점에서 오스트리아의 철도는 12,000km, 독일의 철도는 22,000km 였는데 러시아의 철도는 14,000km가 완성된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국토의 크기를 비교하면 러시아가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처해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러시아에게는 불행하게도 오브루체프의 경고는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1877년 벌어진 러시아-터키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열악한 철도로 인해 작전에 많은 지장을 받았습니다. 주 전장이었던 발칸 반도 방향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러시아의 철도망이 가장 취약한 지역 중 하나였던 것 입니다. 게다가 루마니아를 통한 병력 이동은 러시아 이상으로 열악한 루마니아의 철도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또 봄철의 폭우로 인해 도로들이 진창으로 변한 덕분에 도로를 통한 병력 이동은 많은 지장이 있었습니다. 결국 병력 이동과 보급은 불과 1,000km에 불과한 루마니아의 철도망에 의존해야 했는데 루마니아의 철도는 짧은 거리 만큼이나 안전에 있어서도 문제가 많아 한 러시아 장군은 루마니아의 철도가 터키군 보다 더 위협적이라는 반농담 반진담의 논평을 할 정도였습니다.

밀류틴은 전략 철도 부설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밀류틴은 자신의재임 기간 중 철도 문제를 해결 하지 못 했습니다. 특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러시아 서부의 철도망은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도 동원계획을 작성하는 참모장교들의 걱정거리였습니다.
러시아의 총참모부는 러시아 서부를 북서, 서부, 남서, 남부 등 네 개의 구역으로 구분하고 있었는데 이 중 북서는 세 개의 복선노선이, 서부는 세 개의 복선노선과 일곱 개의 단선노선이, 남서는 한 개의 복선노선과 두 개의 단선노선이, 남부는 두 개의 복선노선과 세 개의 단선노선이 있었습니다. 1898년에 전쟁상이 된 쿠로파트킨(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Куропаткин )은 서부러시아의 철도망으로는 하루에 167대의 열차 밖에 이동하지 못하는데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812대의 열차를 동원에 활용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철도 증설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궁핍한데다 프랑스 등 서방의 자본에 의존하는 러시아는 대규모 철도 증설에 나서기가 어려웠습니다. 결국 궁여지책으로 나온 것이 서부러시아에 주둔하는 병력을 증강해서 동원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자는 방안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빌뉴스 군관구와 키예프 군관구, 바르샤바 군관구 등 세 개의 군관구에 병력이 대대적으로 증강되기 시작했습니다. 1883년 당시 이 세 군관구에 배치된 육군 병력은 227,000명이었는데 이것이 1893년에는 610,000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러시아 육군 총 병력의 45퍼센트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서부의 문제는 그럭 저럭 해결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동쪽의 문제는 전혀 해결 할 수 없었습니다! 만주 방면으로의 병력 이동은 여전히 단선에 불과한 시베리아 철도 하나에 의존해야 했고 다음 전쟁은 바로 일본과 만주에서 벌이게 된 것 입니다!
시베리아 철도는 단선이었다는 점 외에도 러일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도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러시아군 총참모부는 일본과의 전쟁이 발발할 경우 낮은 철도 수송능력 때문에 병력 이동을 3단계에 걸쳐 나눠서 실행하기로 계획을 세우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최우선 동원 순위는 프리아무르 군관구와 시베리아 군관구였고 다음 순위는 키예프 군관구와 모스크바 군관구에서 각각 1개 군단을, 마지막으로는 카잔 군관구의 예비사단이었습니다. 결국 만주 지역도 서부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사전에 충분한 병력과 물자가 집결돼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러일전쟁에서는 열강치고는 상대적으로 부실한 일본을 상대로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병력과 물자의 부족으로 고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뒤 러시아의 동원계획은 서쪽의 독일-오스트리아와 동쪽의 일본을 동시에 상대한다는 아주 골치 아픈 조건을 염두에 둬야 했습니다. 1910년에 승인된 19호 동원계획은 이런 환경을 반영해 두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한다는 가정하에 수립됐습니다. 하지만 일본과의 전쟁 가능성이 줄어들자 19호 동원계획은 1912년에 개정됩니다. 개정된 동원계획은 서부 전선에 집중하고 특히 전쟁 초기에 동프로이센을 공격해 달라는 프랑스의 요구를 반영했습니다. 1912년의 19호 동원계획 개정판은 А와 Г안으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독일이 서부전선에 주력을 동원할 경우를 상정한 것이었고 후자는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주력을 동원할 경우를 상정한 것이었습니다. Г안은 전쟁 초기에 독일의 주공을 맞아 싸워야 한다는 점 때문에 대규모 병력동원이 필요했습니다.
А안의 경우는 러시아가 선제공격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동원이 느리게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이 안에 따르면 동원 완료까지 1군과 2군은 각각 36일과 40일, 3군과 4군, 5군은 각각 40일, 41일, 38일이 걸리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만약 독일이 선제 공격에 나선다면 20일 정도의 병력 동원 기간만으로도 공격에 나설 수 있겠지만 독일이 서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할 경우에는 독일에 비해 느린 동원속도가 심각한 문제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러시아는 철도망의 부족을 고려해서 러일전쟁 이후에도 서부지역 군관구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1차대전 초기의 전역에서 철도 문제는 이전의 전쟁들 만큼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서부와 동부에서 동시에 전쟁이 발발했다면 7만km 수준의 철도망으로는 병력 동원에 어려움을 겪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 입니다.


참고서적
로스뚜노프 외, 『러일전쟁사』, 건국대학교 출판부, 2004
Stephen J. Cimbala, "Steering Through Rapids : Russian Mobilization and World War I",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9, No.2(June 1996)
Jacob W. Kipp, "Strategic Railroads and the Dilemmas of Modernization", Reforming the Tsar’s Arm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Indiana University Press, 1992/2000)
Brian D. Taylor, Politics and the Russian Army : Civil-Military Relations, 1689-20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2007년 11월 16일 금요일

1939년 폴란드 침공과 소련의 동원 문제

오늘의 이야기는 독일육군의 흑역사 -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시의 사례에 이은 속편입니다. 이번의 주인공은 천하의 대인배 스탈린 동지의 지도를 받는 붉은군대입니다.
사실 전편의 독일군은 총통의 갑작스러운 명령으로 만슈타인이 불과 몇 시간 만에 뚝딱 만든 계획으로 움직이다 보니 엉망이 되었는데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의 소련군은 오래전부터 계획이 세워지고 준비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엉망이었다는 점에서 더 안습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과거 소련의 공식적인 문헌들은 1939년 폴란드 침공에 대해 대략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서술하고 있었다는군요.

소련군대에 폴란드 국경을 넘어 서부 벨로루시와 서부 우크라이나의 근로인민들을 폴란드 의 압제와 파시스트의 노예화로부터 해방하고 보호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마자 벨로루시 전선군과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모든 병사와 지휘관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영광된 인민해방의 임무를 달성하겠노라고 맹세했다. 전선군 군사평의회의 명령서는 소련 병사들은 서부 벨로루시와 서부 우크라이나로 «정복자가 아니라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의 형제들을 지주와 자본가들의 모든 압제와 착취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진격하는 것이라고 언명했다. 소련 병사들은 특히 인민들을 위협자들로부터 보호하고 민족에 상관없이 인민들의 재산을 보호하며 폴란드군과 폴란드 정부 관료들이라도 소련군에게 저항하지 않을 경우 정중하게 다루도록 명령받았다. 또한 공세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도시와 마을에 대한 포격 및 폭격은 금지되었으며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헝가리의 국경을 침범하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했다.
소련군대는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군작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과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소련군은 해방 전역을 수행하기 때문에 엄격한 군기와 조직력을 유지해야 했으며 또한 적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태세를 갖추어야 했다. 이 작전은 단지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 서부의 근로인민들을 해방시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독일 파시스트들의 노예화와 빈곤화, 그리고 완전한 물리적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고 수백년 동안 그들의 원래 조국과 민족으로 다시 통합되기를 갈망해온 인민들의 염원을 민주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Excerpts on Soviet 1938-40 operations from The History of Wafare, Military Art, and Military Science, a 1977 textbook of the Military Academy of the General Staff of the USSR Armed Forces」,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6 No.1, March 1997, pp.110-111

그런데 실제로 이 임무는 그다지 영광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 같고 특히 그 준비 과정은 영광과는 지구에서 안드로메다 까지의 거리 만큼이나 멀었던 것 같습니다.

영광과는 거리가 아주 먼 이 이야기는 대충 이렇게 시작됩니다.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스탈린은 폴란드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즉시 침공준비를 시작합니다. 9월 3일에는 키예프 특별군관구, 벨로루시 특별군관구, 하리코프 군관구, 오룔 군관고, 칼리닌 군관구, 레닌그라드 군관구, 모스크바 군관구에 다음과 같은 지시가 하달됩니다. 1) 전역까지 1년 남은 병사들은 1개월간 복무 연장 2) 각급 부대 지휘관 및 정치장교들의 휴가 취소 3) 모든 부대는 전투 태세를 갖추고 무기, 장비 및 물자를 점검할 것. 그리고 9월 6일에는 22호 동원계획에 따라 위에서 언급한 군관구의 예비역들은 전역 12년차 까지 소집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보로실로프는 동원 부대들에게 집결지들을 지정하고 이에 따라 폴란드와 인접한 벨로루시 특별군관구와 키예프 특별군관구는 소속 부대들에 대한 재배치를 시작했습니다. 다들 잘 아시다시피 이무렵 독일군대는 폴란드군의 저항을 차근 차근 분쇄하면서 바르샤바로 쇄도하고 있었지요.

마침내 9월 11일에는 벨로루시 특별군관구가 벨로루시 전선군으로, 우크라이나 특별군관구가 우크라이나 전선군으로 개칭되어 침공준비에 박차가 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전에 동원된 붉은군대의 전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벨로루시 전선군 : М. П. 코발레프 2급 야전군지휘관
- 제 3군 : В. И. 쿠즈네초프 군단지휘관
- 제 11군 : Н. П. 메드베데프 사단지휘관
- 제 10군 : И. Г. 자하르킨 군단지휘관
- 제 4군 : В. И. 추이코프 사단지휘관
- 볼딘 기병-기계화집단(Конно-механизированная Группа) : В. И. 볼딘 군단지휘관. 제 3, 6기병군단, 제 15전차군단
- 제 23 독립소총병군단
- 제 22 항공연대

우크라이나 전선군 : С. К. 티모셴코 1급 야전군지휘관
- 제 5군 : И. Г. 소베트니코프 사단지휘관 : 제 8, 27소총병군단, 제 14, 36전차여단
- 제 6군 : Ф. И. 골리코프 군단지휘관 : 제 13, 17, 49, 36소총병군단, 제 2기병군단, 제 24, 10, 38전차여단
- 제 12군 : И. В. 튤레네프 2급 야전군지휘관 : 제 6, 37소총병군단, 제 23, 26전차여단
- 제 13군 : 제 35소총병군단
- 기병-기계화집단 : 제 4, 5기병군단, 제 25전차군단
- 제 15 독립소총병군단
- 제 13 항공여단

이렇게 출동할 부대가 정해지고 집결지도 지정되었으니 해당 부대들이 기동을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미 소련은 1938년부터 22호 동원계획에 따른 준비를 해 왔다는 것을 위에서 언급했지요.

그런데 황당하게도 1년 동안 준비를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준비가 첫 단계부터 엉망으로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동원령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병력 동원이 느리게 이뤄져서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경우 이 작전을 위해 신규 편성하는 야전군들은 9월 17일이 돼서야 “대충” 동원을 완료할 수 있었고 폴란드 침공이 개시되었을 때는 계획과는 달리 이미 편성이 완료된 부대들만 진격을 해야 했습니다. 최종적으로 동원이 완료된 것은 9월 27일의 일이었는데 이 때는 상황이 거의 종료됐을 무렵이죠;;;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핵심 기동전력인 제 25전차군단은 동원 3일차 까지 편제의 30%도 채우지 못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병력 뿐 아니라 장비 동원도 문제였습니다. 사람이야 억지로 머릿수를 채울수는 있을텐데 없는 물건은 땅에서 솟는게 아니니까요. 예를 들어 제 36전차여단의 경우 완전편제시 트랙터 127대가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 동원된 것은 42대에 불과했으며 ZIS-6 트럭은 187대가 필요했는데 실제로는 15대에 불과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제 25전차군단은 편제상 각종 차량 1,142대가 있어야 했는데 9월 11일 까지 451대를 확보하는 데 그쳤습니다. 제 13소총병군단은 편제상 2,500대의 트럭이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 9월 7일까지 확보한 것은 1200대에 그쳤고 게다가 이 중에서 20%는 예비부품이나 타이어가 없어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이 사단은 1,400통의 연료를 확보하고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는 160통만 가지고 있었으니 차량이 있어도 모두 굴리기는 어려웠습니다. 벨로루시 전선군의 제 6전차여단은 장갑차가 단 1대도 없었습니다.
차량 같은 것은 대형 장비니 그렇다 치더라도 동원된 예비군에 지급할 개인 장비까지 부족했습니다. 제 27소총군단은 철모 16,379개가 모자랐으며 제 15소총군단은 군화 2,000족이 없었고 제 36소총군단은 허리띠 2,000개가 부족했습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동원된 부대들을 폴란드 국경까지 이동시킬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는 것 입니다.
철도 수송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는데 유감스럽게도 소련의 철도는 이탈리아의 철도와 비슷하게 돌아갔던 모양입니다. 예를 들어 제 96소총병사단의 선발대인 41소총병연대는 두 시간 늦게 열차에 탑승했는데 제 44소총병사단의 경우 포병연대와 직할대는 침공이 개시될 때 까지 기차를 타지 못했다고 합니다. 기차 시간이 늦는 것은 그렇다 치고 집결지에서 기차역으로 이동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특히 전차부대의 경우는 심각했다고 합니다. 침공에 투입된 부대들 중에는 T-26을 장비한부대가 많았는데 T-26은 기계적 신뢰성이 낮아 기차역으로 행군하는 동안 자주 도로에 주저앉아 버렸다지요. 간신히 기차역에 도착한 몇몇 부대는 전차들의 엔진 및 동력계통의 수명이 행군도중(!!!!) 초과되어 기차를 탈 수 없었다는 어이없는 사태도 발생했습니다. 머리가 세개 달린 T-28을 장비한 제 10전차여단은 12일에 기차에 탑승해 이동해야 했으나 실제로는 제때 화차가 준비되지 못 해서 16일에야 장비 적재를 완료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부대가 국경에 전개를 완료한 것은 19일 이었고 결국 폴란드 침공이 시작됐을 때는 일부 부대는 아직 화차에서 내리지도 못 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철도는 물론이고 도로 이동도 엉망이었습니다. 이런 대규모 부대의 기동을 위해서는 사전에 도로를 잘 배분해 놔야 하는데 그걸 제대로 하지 못 해 한 도로에 여러 부대가 뒤섞이는 문제가 곳곳에서 발생했습니다.

한편, 소련군대가 사전에 준비된 동원조차 완료하지 못해 쩔쩔매는 동안 독일군은 폴란드를휩쓸고는 독소불가침조약에서 합의된 소련 영역까지 넘어오고 있었습니다. 결국 소련은 동원이 완료되지 못한 상태에서 당장 준비된 병력만 가지고 침공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국경을 넘은 부대들도 상당수는 편성이 완료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360독립통신대대의 경우 침공 당시 편제의 60%에 불과했고 제 362독립무전대대는 편제의 82% 수준이었습니다.

결국 1939년 9월 17일 오전 5시 40분, 폴란드 침공은 동원이 대충 완료된 상황에서 시작됐고 선발대가 국경을 넘는 동안 원래 침공에 같이 투입될 나머지 부대들은 계속 편성 중 이었습니다.
제 60소총병사단은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 편제의 67%까지만 동원이 된 상태였습니다. 특히 특수병과의 동원률은 매우 낮았습니다. 제 81소총병사단의 경우 기술병과는 45%, 행정 및 보급병과는 69%, 의무병과는 47%, 수의병과는 79%만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단을 수송할 자동차 대대의 정비중대는 편제의 20%만 채운 상태였습니다. 제 99소총병사단은 침공 직전인 16일 까지도 포병연대가 편성되지 않아 보병만 달랑 있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한편, 먼저 나간 침공부대들은 폴란드군의 저항이 신통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병력 및 장비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특히 비전투 부대는 편제율이 낮았는데 이것은 작전 수행에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경우 제빵부대들의 편제미달이 심각해 사단당 하루 12톤의 빵만 배급되고 있었습니다.(실제 배급 소요량은 17톤) 대부분의 침공 부대들은 배고픔에 시달리며 진격했고 폴란드군의 식료품을 탈취하지 못한 부대들은 작전이 종료될 때 까지 배를 곯았다고 전해집니다.

폴란드 침공에서 드러난 소련군의 문제라면 크게 두 개를 들 수 있을 것 입니다. 첫째, 사전에 계획과 준비가 꾸준히 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동원은 엉망이었다는 점. 둘째, 자국 영토 내에서 이동하는 것 조차 엉망이었다는 점. 이런 문제점은 핀란드 전에서도 거듭되었고 결국 1941년의 대재앙의 기원이 되고 말지요.

2007년 10월 30일 화요일

독일육군의 흑역사 -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시의 사례

1938~1939년 시기에 실시된 육군의 대규모 기동은 어느 나라나 엉망이었던 것 같습니다. 소련이 폴란드 침공을 앞두고 실시한 동원에서 벌인 삽질은 특히 전설의 경지에 다다른 것 이지요. 그런데 그럭저럭 정예로 간주되는 독일군도 평시의 기동에서 삽질을 한 사례가 있으니 그것은 그 유명한 오스트리아 합병 당시의 기동입니다.

뭐, 사실 3월 10일 이전까지 독일육군은 제대로 된 오스트리아 진주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일이 제대로 풀리는게 더 이상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건 총통의 명령을 받은 당시 육군참모총장 베크(Ludwig Beck)는 다시 자신의 똘마니(?)인 작전의 천재 만슈타인에게 총통의 명령을 하달합니다. 그러나 역시 천재는 천재인지 이 황당한 명령을 받은 만슈타인은 3월 10일 오후에 동원 및 기동계획을 거의 완성하는 재주를 부립니다. 그리고 베크는 만슈타인의 계획에 따라 이날 늦게 보크(Fedor von Bock)를 오스트리아로 진격할 제8군 사령관에 임명합니다.

이렇게 해서 보크가 지휘할 제 8군은 예하에 다음과 같은 병력을 배속 받았습니다.

제7군단 : 제7보병사단, 제27보병사단, 제25기갑연대 1대대, 제1산악사단
제13군단 : 제10보병사단, 제17보병사단
제16차량화군단 : 제2기갑사단, SS-VT
군직할 : 헤르만괴링연대, 제97향토사단(Landwehr-division)

그리고 제8군은 이틀 뒤인 12일에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게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이 시기의 독일군은 팽창기에 있는지라 인력, 특히 장교와 부사관이 부족했습니다.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로 진격할 부대들을 편성하는 것이 상당한 문제였습니다.
먼제 제8군의 예하 부대들을 통제할 통신부대인 제507통신연대는 히틀러가 동원령을 내린 지 6일 뒤에야 편성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또 제16차량화군단의 직할 의무부대는 동원 5일차에야 집결지에 도착할 수 있었으며 소집명령을 받고 집결지에 도착한 예비역들은 소속부대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제97향토사단의 한 연대의 경우 동원 1일차에 부대에 제대로 도착한 장교는 단 한명 뿐이었다고 합니다. 동원계획 이라는게 만슈타인이 반나절 만에 뚝딱 완성한 것이었으니 혼란이 없었다면 거짓말 이었겠지요. 오스트리아로 진주할 부대들을 편성하고 있던 제13군관구(Wehrkreis)의 경우 60먹은 노인들에게 소집영장을 발부하는 황당한 착오도 범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제빵병들이 포병부대로 배치되거나 보병사단의 수색대에 배치된 병사가 말을 탈 줄 모르는 등 동원소집은 시작부터 엉망이었습니다. 제1산악사단의 경우 4개 대대는 전혀 투입할 수 없는 상태였으며 이 사단의 사단장은 최소한 14일은 걸려야 동원된 예비역들을 쓸만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인력 뿐 아니라 장비 상태도 엉망이었습니다. 제2기갑사단이 동원명령을 받고 사단 소속의 전차들을 점검했을 때 무려 30% 이상이 가동불능 이거나 수리를 요하는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제8군 전체를 통틀어 2,800대의 차량이 부족했습니다. 주력인 육군의 상태가 개판이었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2선급으로 취급받던 SS-VT나 헤르만괴링연대는 구할 수 있는 운송수단을 닥치는대로 긁어 모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엉망진창으로 동원이 계속되고 있던 3월 12일 오전 08시, 그런대로 동원이 완료된 부대들이 국경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행군은 개판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로 진입하는 몇 안되는 도로에 여러 사단 소속의 부대들이 뒤죽박죽으로 굴러들어가니 행군은 시작부터 엉망이었습니다. 제10보병사단과 제2기갑사단은 사단 예하 지원부대 없이 전투부대만 먼저 출발했고 제7보병사단은 행군 도중 사단 전체가 대대 단위로 분해되어 버렸습니다. 심한 경우 같은 사단 소속의 부대들이 10km 이상 씩 떨어져 버려 행군 도중 사단들이 뒤섞이는 사례가 다반사였습니다.

그렇지만 독일군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2기갑사단은 국경의 집결지까지 이동할 연료는 있었는데 그 이후의 연료는 준비하지 않은 상태로 국경을 넘었습니다. 제8군 사령부는 4일 뒤에야 제2기갑사단에 충분한 연료를 보급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사단이 보유한 전차 중 39대가 빈으로 진격하는 도중 고장나서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보병사단들은 황급히 징발한 늙은 말들이 보급품 수레나 야포를 견인하지 못해 골탕을 먹었습니다. 많은 군사사가들이 지적하듯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조금이라도 저항을 했다면 독일군은 심각한 곤란에 직면했을 것 입니다.

행군이 엉망으로 꼬여버렸기 때문에 헌병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됐습니다. 독일군 내에서는 이 난감한 상황을 교통의 무질서(Verkehrsanarchie)라고 불렀다지요. 3월 14일이 되면 이 혼란은 극에 달합니다. 제10보병사단의 경우 각 보병연대간의 간격이 60km(!!!!)에 달했고 포병이나 기타 직할대는 마지막 보병연대의 훨씬 후방에서 따라오는 지경이었습니다. 제10보병사단은 하루 평균 43km를 행군했지만 이 속도는 사단이 전투부대로서 대형을 유지했을 때나 의미가 있는 것 이었습니다. 이 사단의 직할대들은 160km 후방에서 도로 정체에 시달리며 어떻게든 전진하려 했지만 이미 혼란한 상황을 통제할 능력을 잃은 사단사령부는 뒤에 처진 사단직할대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이 참상을 목도한 제13군단 사령부가 제10사단의 직할대들을 철도로 수송해 볼까 했지만 철도는 제27보병사단을 수송하는 것 때문에 만원이었습니다. 결국 제10보병사단의 직할대들은 오스트리아 병합이 끝날 때 까지 본대와 합류하지 못 했다고 합니다.(;;;;;)
제7보병사단은 하루당 최저 15km의 속도로 전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 전체가 분해되어 선두의 대대는 제10보병사단의 사이에 끼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참다 못한 사단장은 군사령부에게 하루 동안 행군을 정지하고 부대를 수습하겠다고 요청했습니다.
예비역들을 대규모로 보충받은 제1산악사단은 나이먹은 예비역들이 행군도중 줄줄이 뻗어나가는 통에 행군이 엉망으로 변했습니다. 제100산악연대의 경우 오스트리아로 진입한 첫날에만 40%에 달하는 예비역들이 행군으로 나가떨어지는 참극(?!?!)을 연출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진주는 엉망진창으로 진행됐고 군사적으로는 재앙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독일군을 환영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독일군은 더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릅니다. 빈 주재 이탈리아 무관이 독일군의 행군을 관찰한 뒤 “행군군기가 결여돼 있다”라고 평가한 것은 독일군에게는 망신살이 뻗치는 일 이었을 겁니다.

2007년 10월 21일 일요일

독일 국방군의 연령별 징집현황

2차대전과 관련된 글을 하나 쓰다가 통째로 날려 먹었습니다. 마우스가 고장나서 왼쪽 버튼이 잘 안먹히고 오작동을 가끔씩 하는데 이것 때문에 본문 전체 드랙 + Del + Ctrl S 콤보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이쿠.

별로 긴 글이 아니긴 합니다만 같은걸 또 쓰자니 지겨워서 재미있는 통계자료로 때워볼까 합니다.

아래의 표 두개는 Rüdiger Overmans의 Deutsche militärische Verluste im Zweiten Weltkrieg에서 발췌한 것 입니다. 첫 번째 표는 222쪽에서 발췌 한 것으로 전쟁 시기에 따른 징집 연령대를 보여주고 있으며 두 번째 표는 226쪽에서 발췌 한 것으로 각 군별 징집 연령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표 1. 시기별 징집 연령대

첫 번째 표가 흥미로운 점은 이미 전쟁 초기부터 나이 40이 넘은 노땅들이 대규모로 징집되고 있다는 것 입니다. 이 표를 보시면 1900년생 이상의 남성의 대부분은 1941년 독소전쟁 발발이전에 징집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통념은 전쟁 후기로 가면서 병력 부족을 메꾸기 위해 나이 많은 사람도 징집했다는 것인데 최소한 Overmans의 통계에 따르면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전쟁 초에 징집된 나이 많은 병력들은 후방 부대나 예비부대에 배속되어 있다가 인력 부족이 심화되면서 일선부대의 전투병력으로 빠졌다고 보는게 타당할 것 같습니다.

표 2. 각 군별 징집연령대

두 번째 표는 각 군별 징집연령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원 수 옆의 백분율은 각 군의 전체 징집 인원에서 해당 연령대가 어느 정도의 비율인가를 나타냅니다.
이 표가 재미있는 것은 해군의 경우 육군과 공군에 비해 1900년 이전 출생자와 1921년 이후 출생자의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 입니다. 공군은 연령 비율이 어중간한 편이며 육군은 해군과 공군에 비해 1906~1920년 출생자가 상대적으로 많습니다. 아무래도 순수 전투병력이 가장 많이 필요했던 것이 육군인지라 인력배치가 육군 중심으로 된 것 같습니다.

2007년 1월 21일 일요일

싱거운 위기(?) - 1887년 독일의 러시아 선제 공격계획

독일은 비스마르크의 뛰어난 외교력에 힘입어 1890년까지 러시아와 동맹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881년에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한 이후부터는 그 동맹이 다소 불안하게 유지됐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알렉산드르 2세는 독일과의 동맹을 중시한 반면 대슬라브주의자였던 알렉산드르 3세는 황태자 시절부터 공공연히 프랑스에 우호적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 3세의 즉위는 특히 독일 육군내에 러시아라는 새로운 가상 적국에 대해 경계를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알렉산드르 3세는 황태자 시절 터키와의 전쟁에서 직접 야전군을 지휘한 바 있었고 베를린회의에서 비스마르크에게 농락당했다는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 3세 즉위 이후 러시아는 터키와의 전쟁에서 드러난 육군의 문제점을 개혁하기 위해서 동원체제 개편, 신형 장비 도입에 박차를 가하는데 이것은 그대로 독일측에 불안감을 조성했습니다.

[이 시기 러시아의 육군 개혁에 대해서는 러시아 육군의 개혁 1880-1914을 참고 하시고.]

그리고 1887년 하반기부터 발칸반도, 특히 불가리아 문제 때문에 러시아에서는 반독, 반오스트리아 감정이 고조됐습니다.

일이 터진 것은 1887년 11월이었습니다. 독일 육군참모본부는 러시아가 비밀리에 병력동원을 시작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것은 발칸반도 문제 때문에 독일을 선제공격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을 내립니다. 몰트케는 러시아군의 공격 시기는 1888년 봄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비스마르크에게 참모본부의 정세분석을 보고합니다.

독일은 러시아군의 총 병력이 824,000명이고 동원체제의 개편으로 전쟁이 개시되면 2,424,800명의 예비군이 동원 가능할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었습니다. 몰트케는 러시아가 독일 전선에 투입 가능한 최대 병력을 약 250만 명 내외로 추산하고 있었는데 이것만 하더라도 제대로 동원만 되면 독일로서는 부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특히 훈련이 개선된 점과 보병화기와 포병이 개선된 점, 그리고 폴란드와 러시아 내륙간의 철도망이 확대된 점은 독일측이 가장 큰 불안요인으로 꼽고 있었습니다. 독일 육군참모본부는 1882년에 러시아의 서부 철도망에 대해 비밀리에 조사를 실시해 폴란드의 철도 수송능력이 크게 향상됐다는 것을 파악했습니다. 러시아의 철도망 확충으로 병력 동원 시간이 어느 정도가 걸릴지 모른다는 점은 러시아와의 전쟁계획의 문제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가장 큰 동맹인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군사적으로 약체라는 점도 동부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몰트케는 러시아도 오스트리아 육군, 특히 보병 전력이 형편없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전쟁을 도발한다면 가능한 이른 시기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몰트케는 비스마르크에게 당장 병력 동원을 실시해 12월에서 1888년 1월 중으로 오스트리아와 연합해 러시아를 선제 공격하는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몰트케는 1884년에 이미 독일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선제 공격한다면 러시아의 동원 체제가 갖춰지기 전에 병력 우세를 점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독일의 1885년 대 러시아 전쟁 계획은 제 4군(3개 군단, 4개 예비사단)과 제 3군(6개 군단, 5개 예비사단)으로 동원 개시 10일차에 국경을 돌파해 제 4군은 Kovno에 집결하고 있는 러시아군에 파쇄공격을 감행하고 제 3군은 Pulutsk 방면으로 공격하는 것 이었습니다. 이렇게 폴란드에 배치된 러시아군을 격파해 전선을 단축한 뒤 서부전선에서 프랑스를 무너뜨릴 때 까지 전략적으로 방어를 취하는 것이 1885년 계획의 기본적인 골격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몰트케의 주장에 대해 1887년 체결된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조약은 러시아가 오스트리아를 선제 공격할 경우에 효력을 발휘하도록 되어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즉 독일이 러시아를 선제공격 할 경우 오스트리아는 동맹의 의무가 없었다는 점이고 독일 단독으로 러시아와 전쟁을 치루는 위험을 떠안게 된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와 전쟁을 하게 된다면 프랑스와도 전쟁을 하게 되는데 이렇게 양면 전쟁을 치루는 경우 프랑스 우선 전략에 따라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결시켜야 하고 당연히 러시아에 대한 선제 공격은 근본적으로 불가능 하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무엇보다 비스마르크는 러시아가 독일을 공격하는 일은 프랑스와 독일간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에만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맹기간이 유효한 마당에 성급하게 러시아를 도발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러시아에 대한 선제 공격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실행이 어려웠기 때문에 1887년 겨울의 전쟁 위기는 얼렁뚱땅 넘어가고 얼마 있지 않아 러시아가 비밀리에 병력을 동원하고 있다는 것도 잘못된 정보로 밝혀집니다.

1887년의 선제공격 계획은 이렇게 용두사미로 끝나 버렸습니다. 독일은 알렉산드르 3세의 즉위 이후 러시아와의 전쟁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고 판단합니다만 다행히도 알렉산드르 3세가 살아있을 때는 약간의 신경전을 제외하면 별다른 충돌이 없었습니다.

결국 1914년에 전쟁이 발발해 독일과 러시아 두 제국은 간판을 내리게 되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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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ric D. Brose, The Kaiser’s Army –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ndiana University Press
Konrad Kanis, Miliärführung und Grundfragen der Außenpolitik, Das Miliär und der Aufbruch in die Moerne 1860-1890, Oldenbourg
Terence Zuber,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 : German War Planning 1871-1914, Oxford University Press

2006년 5월 21일 일요일

러시아 육군의 개혁 1880-1914 (재탕!)

내가 생각해도 징허다.. 재탕 삼탕 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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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이후 러시아 육군은 신무기 도입과 체제 개편에 박차를 가했다.

먼저 보병화기의 교체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1880년대로 들어오자 끄렝끄식 소총은 물론 단발 노리쇠 장전식인 베르던 소총역시 구식화 되었고 유럽 각국이 채용하기 시작한 무연 화약을 사용한 탄창식 노리쇠 장전 소총은 러시아가 보유한 어떠한 보병 화기 보다도 우수했다. 러시아 육군은 1884년 까지 구식인 끄렝끄식 소총을 모두 베르던 노리쇠 장전식 소총으로 교체했지만 이때는 이미 이 소총 조차 구식화 된 상태였다.

이 때문에 러시아 육군은 1889년부터 무연 화약을 사용하는 탄창식 노리쇠 장전 소총의 도입을 추진했으며 여기에 벨기에의 레옹 나강이 설계한 소총과 러시아 육군 장교인 모신이 설계한 소총이 경합을 벌인 끝에 모신의 소총에 나강 소총의 탄창 구조를 결합한 소총이 제식 명칭 M1891으로 채택되었다. 러시아 육군은 1897년까지 200만 정을 생산해서 일선 보병 사단의 장비를 완전히 교체했으며 1903년까지 추가로 170만 정을 생산해서 예비 여단까지 장비 시켰다. 이렇게 해서 러-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 러시아 육군은 1877년의 전쟁과는 달리 소화기 면에서 상대방을 압도할 수 있었다.

또한 기병의 부무장도 1895년에 나강의 리볼버로 교채했다. 나강 리볼버는 1898년부터 뚤라 육군 조병창에서 생산에 들어갔다.

포병은 강철제 강선식 야포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1880년대까지도 러시아 육군은 시대에 뒤떨어진 청동제 활강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포병의 낙후성은 러시아 육군의 가장 큰 고민 거리였다. 터키와의 전쟁에서 터키군의 야포에 호되게 당하고 나서야 철제 대포의 도입이 급히 추진 되었는데 러시아 내에는 생산 설비가 없어서 1877년에서 1878년 사이에 1,500문을 독일의 크룹 사로부터 수입했다. 자체 생산은 외국에서 도입한 설비로 오부호프 조병창에서1878년부터 시작되었다. 오부 호프 외에 뻬름 조병창도 생산 설비를 교체해서 500문의 철제 대포를 생산했다. 1881년 까지 러시아 육군은 4,884문의 철제 화포를 도입했는데 이중 러시아에서 생산한 것은 2,652문 이었고 독일에서 수입한 것이 2,232문 이었다. 독일에서 수입한 것 중 1,500문은 전시에 긴급히 도입한 것이므로 실제 수입량은 732문이며 이것은 전체 생산량의 4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것 이었다. 러시아는 야포의 국산화에 그런대로 성공을 거둔 셈 이었다.

1897년에 독일 육군이 신형 77 mm포를 채택하자 러시아는 이에 큰 자극을 받아 76mm급 야포의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신형 76mm 포는 1900년에 정식 채용되어 생산에 들어갔고 1902년에 개량형이 채택되었다. 76.2mm M1902는 1차 대전 기간 동안 러시아 육군 보병 사단과 기병 사단의 표준 화포였으며 1930년대까지 개량을 거쳐 계속 사용되었다.

한편, 19세기 말 보병 전투를 뒤바꿀 혁신적인 무기가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기관총 이었다. 러시아 육군은 일찍이 1870년에 수동식 개틀링을 도입해서 사용해 보았으나 수동식 개틀링은 이를 조작하는 사수가 피로해 지면 발사 속도가 급격히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어서 크게 호평 받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인 맥심이 1885년에 개발한 기관총은 이런 수동식 개틀링의 단점을 완전히 극복한 것 이었으며 1889년에 영국 육군에 정식 채용된 것을 필두로 유럽 각국의 군대에 급속히 보급 되었다. 당시 맥심 기관총은 “일반 소총병 1개 중대에 필적하는 화력”을 가졌다고 평가 되었으며 러시아 육군 역시 이 새로운 무기를 시험해 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러시아 육군은 1896년에 2정의 맥심 기관총을 도입하여 시험 평가를 했으며 그 결과 맥심 기관총을 도입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1899년에 58정의 맥심 기관총이 영국으로부터 170,051 루블에 도입 되었으며 1902년부터는 뚤라 조병창에서 면허 생산이 시작되었다.

병력의 증강도 계속 되었다. 1871년에 프로이센의 징병제 군대가 프랑스의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완파 하자 유럽대륙의 여러 나라들은 앞 다투어 징병제를 도입했다. 징병제로 인해 벨기에 같은 소국도 수십 개 사단을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독일식의 예비군 체제는 유사시에 현역의 수배가 넘는 대군을 동원 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에 프랑스 등 주변국들도 예비군을 증강 시킴과 동시에 현역 사단도 증강 시켰다.

러시아 육군은 1881년 근위 사단 3개, 척탄병 사단 4개, 보병 사단 41개를 포함해 총 48개 사단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1903년까지 보병 4개 사단이 추가되어 52개 사단으로 증강 되었으며 육군 병력은 1881년에 장교 30,768명, 부사관과 사병 844,396명에서 1904년에는 장교 41,079명, 부사관과 사병 1.066,894명으로 증가했다. 포병은 1881년에 107,601명에서 1903년 154,925명으로 증가했으며 현역 사단들은 청동제 포를 신형 M1902로 교체했다. 기병은 1881년에 근위 기병 2개 사단과 일반 기병 18개 사단이던 것이 1903년에는 근위기병 2개 사단, 일반 기병 17개 사단, 까자끄 기병 6개 사단으로 증가했다. 한편, 예비군은 1899년에 1,969,000명에 달했는데 총 21개 예비 여단이 전시 동원에 들어가면 35개 보병 사단으로 개편 되도록 계획 되었다.

그러나 세계 어느 나라 보다도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시에 이들을 동원하여 이동 시키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러시아의 철도망은 아직 부실했으며 독일이나 오스트리아가 가설한 철도의 총 연장 보다도 못할 정도였다. 넓은 영토에 비해 교통망이 발달하지 못 했기 때문에 전시 동원에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보다 느릴 것은 뻔히 예상되는 일 이었다. 그나마 철도의 도입으로 1867년에는 동원 완료에 25일 이나 걸리던 끼예프 군관구가 1872년에는 9일로 줄어 들었으며 역시 1867년에 동원 완료 까지 111일이 걸리던 까프까즈 군관구가 39일로 줄어 들었다. 1877년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도 1876년 11월과 1877년 4월에 부분 동원을 미리 시행 했기 때문에 전쟁 발발시 비교적 신속한 병력 동원이 가능 했던 것 이었다. 전시 동원 속도가 매우 느렸기 때문에 위기 상황이 닥칠 때의 대응 능력은 매우 떨어 졌으며 이것은 군 수뇌부의 큰 고민거리였다. 이 고민 거리는 곧 현실화 되었는데 바로 일본과의 전쟁이었다.

1904년에 벌어진 러-일 전쟁은 일본이 신속히 황해의 재해권을 장악 함으로서 초반부터 일본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일본군은 여순항을 손쉽게 고립 시켰으며 비록 러시아가 1902년부터 만주 일대의 군사력을 증강 시키고 있었다고는 하나 일본군에게 순식간에 압도 당했다. 러시아는 매우 멀리 떨어진 만주까지 병력을 동원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 때문에 여순이 고립될 동안 방어만을 취하고 있었다. 러시아군 포병은 일본군이 투입한 대구경 공성포에 대항할 수단이 없어 속수 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 만주 야전군은 제 1 시베리아 군단과 제 3 시베리아 군단으로 편성 되었는데 이 전력으로 일본군의 3개 야전군(1, 2, 4군)을 상대해야 했다. 시베리아 군관구에서 제 2,4,6 시베리아 군단과 10, 17 군단이 증원 된 후에야 일본군과의 병력 격차가 줄어들었다. 양군은 꾸준히 병력을 증강 시켜서 1905년 1월이 되면 일본군은 만주에 5개 야전군을 투입했으며 러시아도 비슷한 규모의 병력을 투입했다. 하지만 병력 규모는 비슷했으나 러시아군은 상당수가 예비군에서 동원한 시베리아 군단이 주축이었으며 화력은 일본의 정규 사단에 비해 열세했다. 1905년 2월에 벌어진 목단 전투에서 양군의 병력 차는 나지 않았으나 일본군이 254정의 기관총을 보유한 반면 러시아군은 54 정에 불과했다. 또한 러시아 군이 1,200문의 화포를 보유해서 일본군의 1,000문에 비해 우세했지만 역시 러시아군은 중포를 거의 보유하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총 병력 276,000명중 90,000명을 잃었으며 일본군은 270,000명중 70,000명을 잃었다. 목단 전투는 러-일 전쟁의 지상전에서 여순 전투와 함께 가장 결정적인 전투가 되었다.

러-일 전쟁은 또 다른 개혁의 시작이 되었다. 러-일 전쟁의 참패는 터키와의 전쟁 처럼 새로운 문제를 던져 주었다. 방대한 러시아의 영토는 유사시 신속한 병력의 전개에 큰 장애 요인이 되었으며 일본군은 러시아 육군 보다도 우세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훈련상태가 부실한 예비군이 주축이 된 러시아 육군은 불필요하게 많은 희생을 냈으며(비록 일본군 역시 나을 것은 별로 없었으나) 지휘관들의 자질 부족도 심각했다.

1909년에 새로 전쟁상이 된 수호믈리노프는 러시아 육군의 취약점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06년부터 러시아의 경제가 높은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에 군 개혁을 위한 재정 확보는 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개혁을 실행할 군인들의 사상이었다.

러-일 전쟁의 경험으로 전투시 양 측방을 보호하고 정찰 및 원거리 타격을 수행할 대규모 기병 집단의 필요성이 강조 되었으나 기병은 보병과 달리 유지 비용이 비싼 것은 물론 훈련에도 시간이 걸려서 예비군으로 만들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세계 최고의 기병 보유국 임에도 불구하고 기병 부족에 시달렸다. 러-일 전쟁 직후인 1905년에 74,300명이던 기병은 1908년 까지 83,517명으로 증가했지만 군 수뇌부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불충분 했다. 동원 문제 때문에 기병 사단과 연대들은 최대한 국경 근처에 배치되었다.

포병도 마찬가지로 별로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러시아 육군의 고위 장성들은 중포의 도입을 추진하기는 했지만 야전 부대가 아닌 요새에 배치하기를 원했으며 운용상의 편의를 위해 1개 포대를 야포 6문으로 줄이자는 안은 1개 포대 8문을 고집하는 고참 포병 장교들로 인해 난항을 겪고 있었다. 요새포를 확보하려는 고위 장교들의 고집은 1911년부터 1914년 까지 유럽의 군비 경쟁이 절정에 달한 시기에 엉뚱한 곳에 수백만 루블의 예산을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쟁상 수호믈리노프는 요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장성들과 타협을 해서 낡은 요새 몇 개를 해체하고 요새 주둔 부대를 예비 연대로 개편할 수 있었지만 이 절충안은 실질적인 전력 증강에는 도움이 되지 못 했다. 각 군단 포병에 122mm 유탄포와 152mm 유탄포를 배치해서 독일의 군단 포병과 비슷한 전력을 확보 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이 발발 했을 때 러시아 육군의 1개 군단은 평균 122mm 유탄포 12문을 보유한 것에 그쳤다.

러-일 전쟁에서 큰 위력을 보인 기관총은 더 대량으로 장비 되었다. 각 보병 1개 연대마다 기관총 8정이 배속 되었다. 1914년 까지 러시아 육군은 4,157정의 기관총을 보유 하게 되었다.

기병은 여전히 중요시 되었다.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기병 병과는 전통적인 귀족의 아성이었으며 군사 귀족들의 자부심의 상징이기도 했다. 기병의 역할은 보병 사단의 측면을 방어하고 정찰을 실시하며 유사시 적 기병을 격파하는 것 이었다. 또한 정규 기병의 경우 말에서 내러 보병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 받았다. 까자끄 기병의 경우는 근접전을 위해 기병도를 사용했다. 한편 1912년부터 모든 기병 부대는 기병창을 필수 장비로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전투에서 “충격 효과”를 내기 위해서 였다.

내연 기관을 사용하는 자동차의 도입은 군의 큰 관심을 끌었다. 1898년 12월에 끼예프 군관구 사령관이던 드라고미로프대장이 차량을 군사 수송에 사용하는 방안에 대해 전쟁성에 건의를 했다. 당시 전쟁상 이었던 꾸로빠낀은 이 제안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공병에 시험 부대를 편성해서 차량 운용을 시험해 보도록 지시했다. 이를 위해서 영국에서 자동차가수입 되었으며 1902년에 끼예프와 꾸르스끄 지구의 기동훈련에 처음으로 자동차가 사용 되었다. 자동차 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자동차의 도입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1906~8년 까지 트럭과 프랑스에서 수입한 장갑차의 시험이 진행 되었다. 그러나 시험은 소규모로 이루어져 군 상층부에 큰 인상을 주지는 못 했다. 최초의 자동차 부대는 공병에 편성되었는데 1910년에 5개 중대가 편성되어 철도 공병에 배속 되었다. 1914년 까지 러시아 육군은 트럭 418대, 승용차 259대, 구급차 2대, 기타 챠랑 32대, 오토바이 101대를 보유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러시아 전역에는 약 9,000대의 차량이 있었는데 이중 트럭 475대와 승용차 3,562대가 육군에 징발 되었다.

대부분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군 항공역시 육군 항공대의 일부로 출발했다. 러시아의 육군 항공대는 1909년에 정식으로 창설 되었는데 1909년부터 1911년 까지 육군 공병국 예하에 있었다. 1911년 까지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항공기 30대로 성장했는데 항공기는 모두 프랑스에서 수입한 기종이었다. 이 무렵 러시아는 러일전쟁의 참패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서 다시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1911년에는 항공기가 육군의 기동 훈련에 참가하여 군사적인 잠재력을 인정 받았다. 이 성공에 힘입어1912년에는 육군 항공대가 총 참모부 중앙 관리국(GUGSh) 예하로 배속 변경 되었으며 각 군단에 직할대로 비행기 6대로 편성된 1개 비행대를 배속시킨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급속히 성장해서 1913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 제국을 추월하여 동유럽에서는 독일에 맞설 수 있는 항공력을 갖추게 되었다. 1913년 4월 1일에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13대의 비행선과 150대의 항공기로 증강되었으며 전쟁 직전인 1914년 8월 초에는 비행선 22대와 항공기 250대, 그리고 항공대 39개로 증강되었다. 또한 1913년에는 러시아 해군도 항공대를 편성했다. 1912년부터 1913년까지 벌어진 발칸 전쟁에서 항공기가 정찰과 연락에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자 러시아 육군과 해군은 항공기의 추가 획득에 박차를 가했다.

개전 직전에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양적으로 큰 성장을 이루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매우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러시아 전쟁성은 육군 항공대를 수입한 항공기로 성장시키고 있었으며 명확한 항공 산업 육성 정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24 종류의 항공기와 12 종류의 항공기 엔진을 사용했으며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주로 독일제 엔진을 사용하던 항공기 16종류는 예비 부품 이 바닥나서 운용 불능이 되었다. 러시아의 항공 산업은 항공기 조립 생산에 불과한 수준이었으며 항공기 공장은 그저 단순한 “작업장”수준 이었다.

지휘 통신 체계는 병력의 증가를 따라 가지 못 했다. 1914년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삼소노프의 제 2 군은 군 전체에 겨우 25대의 유선 전화를 보유했을 뿐 이었으며 대부분의 통신을 모르스 전신기에 의존했다. 그리고 실전에서 제한된 전화선으로는 예하 군단들 조차 제대로 통제하기가 어려워 전령을 사용하는 실정이었다.

한편, 1912년에 들어오면서 안보 환경에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먼저 러-일 전쟁 이래 숙적이던 일본과의 전쟁 가능성이 희박해 진 대신 동맹국 프랑스와의 밀착으로 독일에 대한 선제 공격의 필요성이 증대했다. 프랑스는 동원 개시후 12일 안에 독일에 대한 공세에 나설 것 이기 때문에 러시아 역시 여기에 맞춰 공격을 개시해야 한다고 압력을 넣었다. 이 때문에 기존에 있던 제 19호 동원 계획을 수정할 필요성이 제기 되었다. 수정 안은 두개가 만들어 졌는데 첫번째 수정안은 А 로서 독일이 프랑스 전역에 주력을 집중할 경우를 상정한 것 이었다. 수정안 А에서는 북서 전선군 예하에 레넨깜프 대장이 지휘하는 제 1 군과 삼소노프 대장이 지휘하는 제 2 군이 동 프로이센에 대한 공격을 맡았으며 이 두개 야전군에 17개 보병 사단, 1개 보병여단과 8개 기병사단, 1개 기병여단 그리고 야포 1,104문과 병력 250,000명으로 편성 되었다. 이 계획에서 주공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두어 졌으며 이 때문에 남서 전선군 예하에 3, 4, 5, 8 야전군이 배속 되었고 이 경우 남서 전선군은 34개 보병사단, 1개 보병여단 12개 기병사단, 1개 기병여단에 총 병력 600,000을 가지게 되었다. 이 계획안에 따를 경우 공세를 위해서 동원을 완료하는 시점은 20일에서 41일 사이였다.

독일이 주력을 러시아 전선에 집중해서 선제 공격에 나올 경우를 대비한 것이 Г 계획 이었다. 이 경우 1, 2, 4 군이 독일에 대항해 투입 되고 3군과 5군은 오스트리아의 공격을 막도록 했다. 이 경우 러시아는 시베리아 등지에서 충분한 예비 병력이 동원 될 때 까지 완전히 방어로만 전환할 계획 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 시베리아 철도가 아직 충분히 정비 되지 못 해서 실제 동원 시 병력 동원 속도가 계획한 대로 나올 수가 없었다. 실제로 실제 동원 속도는 계획한 수준의 75%에 불과 했다. 여기에 동원한 병력을 지원할 보급 수송체계도 문제가 많았는데 독일 군의 경우 전시에 250,000대의 철도 차량을 동원 할 수 있었는데 러시아는 불과 214,000대에 불과했다.

한편 1912, 1913년의 독일 육군 법 제정과 발칸 전쟁으로 인한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가능성 증대로 러시아 황제는 육군 예산을 더 증가 시켰다. 우선 1917년 까지 현역을 400,000명 더 늘리는 한편 군단 당 108문인 야포를 132문으로 늘리기로 결정했다. 또한 위에서도 언급 했듯이 프랑스 식으로 1개 포대를 야포 4문으로 개편하는 안도 추진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두마는 1914년 7월 까지도 이에 필요한 예산안을 통과 시키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전쟁이 벌어졌을 때 러시아 육군은 몇 년 전과 비슷한 상태에서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글을 쓰면서 베낀 자료들...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Indiana University Press, 1999)
Daivd G. Herrmann, The Arming of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First World War(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7)
Jonathan Grant, "Tsarist Armament Strategies 1870~1914",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ume 4, Issue 1(1991. 3)
Nikolai K. Struk, "Motor Vehicle Transport in the Russian Army, 1906~14",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ume 12, Issue 3(1999. 9)
Stephen J. Cimbala, "Steering through Rapid : Russian mobilization and World War I",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ume 9, Issue 2(199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