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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26일 일요일

국공내전에 대한 국내 언론들의 보도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진명행님의 “북한군 국공내전 참전...국내, 해외 신문자료”라는 글에 진명행님이 다신 댓글입니다.


결정적 단서를 잡았다고 기뻐하시는 진명행님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그렇지만 진명행님이 예측하셨듯 저는 신문기사는 오보가 많으니 당연히 신뢰도를 검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진명행님이 인용하신 언론보도들의 내용을 입증해 줄 직접적인 자료는 없습니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진명행님이 퍼오신 신문보도의 신뢰도는 급강하합니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는 심심하니 관련보도들의 신뢰성을 가지고 논지를 전개하는 방법도 써봐야겠지요. 진명행님이 북한군의 중국내전 참전을 입증하기 위해서 인용한 신문기사의 신뢰도를 평가해 보지요.

저도 할 일이 많으니 진명행님이 퍼온 자료 중 웹에서 간단히 퍼올 수 있는 동아일보 기사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http://www.koreanhistory.or.kr)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검색창에 임표를 넣고 검색하면 자료의 종류별로 분류가 됩니다. 연속간행물에는 173건의 정보가 있군요. 이제 연속간행물을 클릭해 보지요.


몇 번 클릭하면 진명행님이 퍼 온 동아일보 기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신문기사를 확대해 보지요. 아하. 진명행님이 퍼온 기사로군요.


자. 그러면 진명행님이 퍼온 동아일보의 기사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요? 같은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겠지요. 마침 진명행님이 퍼온 기사의 바로 밑에도 임표 관련 기사가 있군요. 이 기사를 한 번 보시겠습니다.


으앗! 정말 충격적입니다.

林彪將軍被殺!!!



확대해도 몇몇 글자가 잘 안보이긴 합니다만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한편, 중공 측 임표(林彪) 장군이 하얼빈(哈爾濱)에서 반전적(反戰的) 부하에게 사살(射殺)되였다는 보●는 사실이다.”

아앗! 국민당군의 정보부 발표를 인용한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임표는 벌써 1946년에 사망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1971년에 사망한 임표는 가짜란 말입니까?????

자. 이렇게 당시의 중국정부의 공식발표를 인용하던 동아일보의 기사는 신뢰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쉽게 입증할 수 있습니다. 동아일보는 물론이고 정보력이 취약해 국민당 정부측의 선전에 의존하던 당시 한국 신문들의 국공내전 기사의 신뢰도는 매우 취약했습니다. 심지어 한국의 신문들은 회해전역 초반에는 국민당군이 승리하고 있다는 기사까지 내 보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뢰도가 떨어지는 단편적인 신문기사들이 역시 신뢰성에 문제가 있는 ISNK의 정보를 입증해 줄 수 있겠습니까?

진명행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2008년 10월 25일 토요일

세기와 더불어에 실린 김일성의 증언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아래의 글과 관련해서 내용 보충을 하지요.

우선 진명행님이 토론중에 하신 주장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진명행님께서는 이종석이『세기와 더불어』에 수록된 북한의 중국 지원관련 내용을 아무 근거 없이 김일성의 허풍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세기와 더불어』에 실린 관련 내용을 살펴보시겠습니다. 북한식 표현 그대로 입력했습니다.

해방 후 나는 주보중을 몇 번 만났습니다. 두 번은 우리 나라에서 만났고 마지막 번은 베이징에서 만났습니다.

주보중이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온 것은 1946년 초봄이였습니다. 그를 남양에서 만나보았습니다. 그때 주보중은 동북민주련군 부총사령원 겸 길료군구 사령원으로 있으면서 국민당반동들과의 싸움을 하였습니다.
장개석이 반공을 하면서 국민당군대를 총동원하여 해방지구에 달려드는 바람에 중국대륙은 또다시 국내전쟁의 소용돌이속에 휘말려 들어갔습니다. 주보중은 동북지방의 형세가 매우 위험하다고 하면서 적아의 력량대비와 군사정치정세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쫓겨간 다음 만주땅은 얼마 동안 정치적 공백지대로 있었습니다. 이 지역을 어느 편이 장악하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장개석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은 첨예한 싸움을 벌렸습니다. 국민당도 공산당도 만주를 중국전토장악을 위한 주요한 대결장으로 보았습니다.
국민당이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함선과 비행기로 그리고 륙로로 수십만의 군대를 들이미는 통에 갓 조직된 동북지구의 민주련군은 우세한 적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주보중이 나를 만나려고 한 것은 이런 정세에 대처하기 위한 긴급지원을 요청하려는데 있었습니다. 모택동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한때 조직부장을 하다가 중공중앙 동북국의 부서기로 임명된 진운을 평양에 보내여 우리의 지원을 청한 것도 그 무렵 이였습니다.
나는 주보중에게 중국의 전우들이 장차 동북에서 진행하게 될 작전과 관련하여 제기하는 문제들을 죄다 해결해주고 최대한의 지원을 줄데 대해 쾌히 약속하였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우리나라의 형편은 남을 도와줄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조건 같은 것은 아예 념두에도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 혁명의 견지에서 볼 때에도 동북땅이 장개석의 세상으로 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그 당시 동북땅에서는 항일유격대출신의 우수한 군정간부들인 강건, 박락권, 최광을 비롯하여 약 25만여명에 달하는 조선청년들이 동북해방전투에 직접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김일성동지회고록 – 세기와 더불어 8』, 조선로동당출판사, 1998, 261~262쪽

이 뒤에는 왕일지가 북한을 방문해 부상병의 피난과 전략물자의 소개 문제 등을 요청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물론 신발을 보내줬다는 내용도 있지요.

진명행님은 이종석이 아무 근거도 없이 김일성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인용한 부분에 나와 있듯 1946년에 이미 25만에 달하는 조선계가 국공내전에서 싸우고 있다는 김일성의 주장은 오히려 신뢰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만약 김일성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진명행님이 주장하신 것 처럼 1947년부터 1948년까지 10만의 북한군이 참전했을 경우 국공내전에서 싸운 조선계 군인은 총 35만 명에 달하게 됩니다.

※ 참고로 국공내전에 참전한 조선계 군인의 규모에 대한 학계의 통설은 63,000명 수준입니다.

이런 황당한 결론이 나오니 『세기와 더불어』를 읽은 사람이라면 여기에 실린 내용을 신뢰하기 어려운 것 입니다.

다음으로, 역시 북한이 국공내전에 병력을 파견했다는 근거로 자주 인용되는 「북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 대표들과 한 담화」(1947년 9월 3일)의 내용을 보시겠습니다.

지금 중국의 정치정세는 좋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중국공산당의 령도 밑에 중국인민해방군과 중국인민은 장개석 국민당군대와 반혁명세력의 책동을 분쇄하는 투쟁에서 성과를 확대해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중국인민들의 혁명투쟁이 조만간에 승리하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중국인민의 혁명투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해방 후 수차에 걸쳐 조선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들을 중국 동북지방에 파견하였으며 무기를 비롯하여 필요한 전략물자도 보내주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중국인민의 혁명투쟁을 방조하기 위하여 헌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기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중국인민의 혁명투쟁에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낼 것 입니다.

「북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 대표들과 한 담화」(1947년 9월 3일) , 261쪽, 『김일성전집 6』, 조선로동당출판사, 1993

보시면 아시겠지만 “조선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들을 중국 동북지방에 파견”한 구체적인 시기도 모호하고 몇 명이나 보냈는지도 모호합니다. 그리고 이게 전투병력을 보낸 것인지 아니면 지원이라는 표현 그대로 의료인력 등 전투지원을 위한 인력을 보냈는지도 모호합니다. 이런 몇 줄의 문장으로 수 만명 규모의 전투병력이 파병됐다는 ISNK의 정보를 뒷받침 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제 다시 진명행님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진명행님께서는 이종석이 아무 근거 없이 『세기와 더불어』에 실린 김일성의 증언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진명행님께서는 어떤 점에 근거하여 김일성의 증언을 신뢰하십니까?

국공내전에 "조선의 아들딸"들을 지원했다는 김일성의 발언

아래의 글에 이어지는 추가 글 입니다.

진명행님께서 그만 하기를 원하시지만 진명행님께서 ISNK의 북한인민군 파병의 근거로 김일성의 발언을 인용하셨으니 여기에 대해서도 보충 설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1992년에 간행된 김일성 전집 8권에 실려있는 관련 내용을 올려 보겠습니다. 이것은 김일성이 북한인민군을 지원했다는 근거로 많이 인용되는 글 입니다.

국제주의 위업에 충실한 조선의 우수한 아들 딸들은 중국 동북해방전투에서 무비의 영웅성과 희생성을 남김없이 발휘하고 있습니다.
중국 동북지방을 해방하는 데서 결정적 전환을 가져오게 한 장춘, 길림, 금주, 사평 해방전투들에서 조선의 아들 딸들이 피를 흘리며 숭고한 국제주의적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습니다.

장춘 해방전투에서 박락권 동무가 지휘하는 부대가 커다란 공훈을 세운데 대하여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박락권 동무는 장춘을 해방하기 위한 전투에서 자기의 고귀한 생명을 바쳤습니다.

얼마 전에 나와 만난 주보중 동무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조선인 부대들은 동북민주련군의 주력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 부대의 전투업적은 중국인민들 속에서 훌륭한 모범으로 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지금 중국인민해방군 부대 내에 있는 조선동지들이 전투에서 돌격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중국인민은 중국혁명을 피로써 도와주고 있는 조선인민에 대하여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중국인민의 혁명투쟁을 도와주는 것은 우리의 국제주의적 임무이다. – 림춘추와 한 담화 1948년 10월 23일」, 『김일성전집』 8권, 조선로동당출판사, 1994, 385쪽

여기서 장춘 해방전투에서 전사한 박락권(朴洛權)이 국제주의 위업에 충실한 조선의 우수한 아들 딸의 대표 사례로 인용됩니다. 그런데 박락권의 부대는 어떤 부대인가?

박락권은 장춘 전투에서 길동 경비 1려의 제1단 단장이었습니다. 즉 연대장이었습니다. 길동 경비 1려는 연변조선족으로 편성된 부대로 북한 인민군과는 관련이 없는 부대인 것 입니다. 그런데 김일성은 마치 박락권의 부대가 북한에서 만들어진 부대인 것 처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길동 경비 1려는 뒤에 동북군구의 독립 1사 1단으로 개편되었다가 다시 1947년 8월에는 30사 89단으로 개편됩니다. 이 연변조선족 부대는 마지막으로 47군 141사로 통합됩니다. 47군 141사는 임표가 지휘하는 제4야전군 소속 부대였습니다.

예. 진명행님이 북한군 참전설의 근거로서 언급한 임표 지휘하의 조선인 부대가 바로 이 부대입니다.

북한공산군이 아닌 연변조선족부대…

하지만 김일성 전집의 김일성 발언은 모호하게 말끝을 흐린다는 점에서 좀 나은 편입니다.

김일성의 공식 발언이 나오고 나니 북한 당국에 의한 역사 왜곡이 시작됩니다.;;;; 다음의 글을 보시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의도를 높이 받들고 동북해방작전에 참가한 조선인 부대 장병들은 중국 동북지방을 해방하는데 결정적 전환을 가져오게 한 장춘, 길림, 사평, 금주, 심양 해방전투들에서 무비의 영웅성과 희생성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주체35(1946)년 4월에 있은 1차 장춘해방전투에서 박락권이 인솔한 2만여명의 조선인 사단은 적의 대부대를 견제하고 있던 최광 부대의 후원 하에 장춘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5일만에 장개석의 아들 장경국 도당이 위수사령으로 틀고 앉아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던 도시를 점령하고 1만 수천명의 적을 살상포로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박락권 련대장은 적의 흉탄에 맞아 쓰러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대오의 앞장에서 부대의 공격을 지휘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불멸의 혁명업적 19 – 세계혁명의 새로운 길 개척』, 조선로동당출판사, 2000, 155

박락권이 지휘한 부대가 졸지에 2만명의 사단으로 둔갑했습니다.;;;;;

김일성이 국공내전을 지원하기 위해 조선의 아들딸들을 보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연구자들이 의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김일성은 박락권 부대와 같이 조선족으로 편성된 부대를 마치 북한에서 만들어 보낸 것 처럼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공식역사서는 1개 단으로 정규편제의 연대에도 미치지 못하는 조선족 부대를 『김일성 동지의 의도를 높이 받드는 2만명의 사단』으로 뻥튀기를 하고 있는 것 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ISNK의 신뢰성도 문제인데 진명행 님께서는 신뢰성이 의심되는 ISNK를 뒷받침 하기 위해서 역시나 과장과 왜곡으로 가득 찬 북한의 주장을 근거로 세우신 겁니다.

진심으로 유감스럽지만 역시 아래의 글과 마찬가지의 결론을 낼 수 밖에 없습니다.

1. 진명행님은 김일성 전집 등을 읽지 않고 다른 연구자의 논문에 부분 인용된 것을 근거로 들었다.

2. 진명행님은 김일성 전집 등을 읽었지만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 하기 위해 김일성의 발언 중 극히 일부만을 발췌했다.

둘 중 어떤 것이던 진명행님은 블로그의 방문자들을 속이신 겁니다.

2008년 10월 24일 금요일

북한인민군의 만주 파병에 대한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의 정보문제

요 며칠간 아주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진명행이라는 분의 블로그에서 북한인민군의 국공내전 참전 주장을 하고 있어서 뭔가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었나 했더니 역시나 거의 20년은 된 쉰 떡밥이더군요.

처음에는 간단히 상식적인 수준에서 반론하면 이해를 하시려나 했는데 결국 이야기가 산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관련 자료라고 글을 하나 올려 주셨는데 당시의 동아일보 같은 신문기사더군요;;;; 군사정보의 내용을 당대의 카더라 통신 수준의 신문기사로 검증하겠다는 사람은 정말로 처음 봤습니다. 정말 진담입니다. 학술대회에 진명행님 같은 자료를 들고 나간다면 개그콘서트가 된다에 500원 걸겠습니다.

물론, 중국측이 북한인민군의 참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 당연히 제 견해가 틀렸다는 점을 인정할 것 입니다. 이 글에서는 현재까지 공개된 제한적 자료의 문제에 대해서나 이야기 해 보지요.

잡설이 길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 보지요.

결국 배가 산으로 가고 말았으니 원점에서부터 정리를 해야 겠군요.

진명행이라는 분이 처음에 북한인민군의 국공내전 참전의 근거로 제시하신 것은 주한미군정보참모부에서 발간한 북한정보요약(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이하 ISNK)의 내용이었습니다. 진명행이라는 분 께서는 북한정보요약에 실린 북한군 관련 내용이 옳다는 전제하에서 논지를 전개하셨습니다.

그러니 먼저 ISNK에 실린 북한의 군사력 관련 정보가 얼마나 정확한지 해당 정보 보고서에 실린 북한군 병력현황을 살펴보면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진명행님께서는 ISNK가 추산한 북한군의 참전 병력규모를 신뢰하고 계시니 ISNK의 북한군 병력관련 통계가 높은 신뢰도를 보인다면 그만큼 진명행님의 주장도 신뢰도가 높아지겠지요.

ISNK는 주한미군의 정보참모부가 작성했기 때문에 군사문제에 매우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군사력 항목은 소련군과 북한군, 중국인민해방군으로 나뉘며 북한군은 다시 정규군(Peoples Army), 철도경비대(Chol To Kyung Bi Dai) 등 세부 항목으로 나뉩니다. 각 항목에 해당되는 정보는 엄격히 분류되어 정리되어 있습니다.

진명행님의 주장에 나타나듯 북한군의 대규모 만주 파병이 시작되었다는 1947년의 북한군 병력 통계에 대한 정보를 이야기 하기에 앞서, 당시 미군이 수집하던 병력 관련 정보가 얼마나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사례 하나를 먼저 들지요.

Information received during the period has tended more than ever to fall into two types, that from comparatively reliable source indentifying those individuals groups which are definitely CCP, and the more alarmist type of statement concerning huge concentrations of Communist Troops. An example of this latter type was the report that an army of 86,000 men had been concentrated on the 38th parallel alone and of this number, 50,000 wore named as CCP troops.

본 보고서의 분석 기간 중 접수된 정보들은 양 극단의 성향을 보이고 있는데 상대적으로 믿을 만한 정보에서는 중국공산당임이 분명한 개별 집단이 나타나며 보다 기우에 가까운 정보는 대규모의 공산군이 집결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후자에 속하는 정보 중에는 86,000명에 달하는 공산군이 38선 인근에 집결했으며 이 중 50,000명이 중국공산군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28 For Period of 01 January 1947 to 15 January 1947, p.4

1947년 1월에 중국공산군 5만 명이 38선 인근에 집결했다는 것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은 다들 아시겠지요. 이렇게 극과 극의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관련 정보분석은 최대한 신중히 행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SNK의 북한군 병력 현황 분석은 황당한 수준입니다. 이제 구체적 사례를 들어 보도록 하지요.

c. Conscription : The initial conscription program called for the drafting of a force to be taken from various sections of the population as follows : city dwellers – 800,000; farmers – 500,000; students – 400,000; labor unions – 300,000

징병 : 다양한 계층을 징집하는 최초의 징병 계획이 선포되었으며 내역은 다음과 같다. 도시 거주자 800,000명, 농부 500,000명, 학생 400,000명, 노동조합 300,000명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30 For Period of 1 February 1947 to 15 February 1947, p.13

1947년 2월에 북조선 정부가 200만명의 징병계획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하군요!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경천동지할 일 입니다!

다음은 조선인민군(!) 이야기입니다.

General Comment on Peoples Army

(중략)

This Army, consisting of three major commands each containing from three to seven subordinate “Divisional” level units, has a strength which in conservatively estimated at 125,000

인민군에 대한 총평

인민군은 각각 3개에서 7개의 사단 급 부대가 소속된 세 개의 주요 사령부로 구성되어있으며 병력은 신중히 평가하더라도 125,000명으로 추정된다.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35 For Period of 15 April 1947 – 30 April 1947

1947년 4월 시점에서 “인민군”만 125,000명이라고 신중한(conservatively) 분석결과를 내 놓고 있습니다. 참고로 1947년 5월 경 인민군의 전신인 인민집단군은 제1 경보병사단, 제2 경보병사단, 제3 독립혼성여단의 세 개 부대 뿐이었습니다. 의문이 나시거든 장준익 등 인민군에 대한 국내 연구를 참고 하십시오.

그리고 다음 보고서를 보시죠.

e. Strength of North Korean “Army”

(중략)

There is no doubt that a total of 125,000 trained man has been reached and possibly far surpassed, however the present location of these trained men is admittedly obscure

4-e. 북한군의 병력

훈련받은 병력이 125,000에 달하는 것은 틀림없으며(no doubt) 아마 이보다 훨씬 많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현재 이들 병력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다.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36 For Period of 1 May – 15 May 1947

아! 그리고 이 보고서에는 중국인민해방군에 소속된 북한인(North Koreans)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Percentage of North Koreans in CCP units

As of 1 April, all columns, ie, 22d, 23, and 24th, of the CCF in Manchuria had in their ranks 15~25% Soviet trained North Koreans.

4월 1일 기준으로 만주에 주둔한 인민해방군의 22종대(纵队), 23종대, 24종대를 포함한 모든 종대는 각 부대별로 소련이 훈련시킨 북한인 15~25%가 포함되어 있다.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36 For Period of 1 May – 15 May 1947, p.12

이야. 드디어 나왔군요!

그런데 22종대, 23종대, 24종대는 인민해방군의 전투서열에는 없는 “유령 부대”입니다.

아하! 북한 인민군은 존재한 적도 없는 인민해방군 부대에 소속되어 싸운 것이로군요. 그래서 10만 명이나 참전했는데 그 존재를 아무도 몰랐던 모양입니다!

어쨌든. 이제 다음 보고서로 넘어가지요.

미국의 분석에 따르면 1947년 5월까지 인민군은 총 125,000명 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 뒤의 보고서는 충격적인 정보분석을 내 놓습니다.

3. The Total Strength of the Forces of the Department of Internal Affairs
: These figure were also furnished by Source PUKTO

Bo An Dai (including the Chol To Bo An Dai) : 30,000
Chol To Kyung Bi Dai(Railway Constabulary) : 20,000
Soo Sang Kyung Bi Dai (Coast Guard) : 12,000
Total : 62,000

Note : PUKTO did not have figure available on the Fire Brigade, but estimated that they did not exceed 5,000
Total : 67,000 Dept. Int. Affairs.

Total Force Available to the Peoples Committee of North Korea

Bo An Kan Boo Hul Yun So : 306,000
Force of the Department of Internal Affairs : 67,000
Total : 373,000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36 For Period of 15 June 1947 – 30 June 1947, Incl #1, The Evolution of the Armed Forces of the North Korean Peoples Committee August 1945 – June 1947 p.16

이거 정말 충격적입니다. PUKTO라는 암호명의 정보원에 따르면 북한의 무장력은 내무성 산하 부대를 제외하고도 무려 306,000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병력이 18만 명이나 늘어났습니다!

자. 다음에는 다시 북한 인민군의 만주 파병 건입니다.

1. CCF-North Korean People’s Committee Mutual Assistance Pact

(중략)

(d) 60,000 North Korean troops to be shipped to Manchuria by the end of July

1. 중국인민해방군-북조선인민위원회간 상호조약

(중략)

(d) 60,000만 명의 북한군을 7월 말 까지 만주로 파병한다.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44 For Period of 1 September 1947 – 15 September 1947, p.18

보시다시피 60,000만명의 북한군이 7월까지 만주로 파병될 계획이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된 북한군의 병력이 약 30만명이니 이후의 보고서에는 북한 인민군의 병력이 24만명은 되어야 정상입니다.

북한군 병력에 대한 다음 번 보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4) Strength of the People’s Army

(중략)

It is not believed possible at this time to alter the estimate of 125,000 People’s Army troops under the control of or available to the People’s Committee of North Korea.

현재로서는 북조선 인민위원회의 통제하에 있는, 또는 동원가능한 인민군의 숫자가 125,000명이 아니라고 판단할 근거가 없다.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45 For Period of 15 September – 30 September 1947, p.13

네. 결국 6월의 보고서에 나온 인민군 30만명은 틀렸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만주로 파병된 병력에다가 7월에 파병되었다는 6만 명을 빼면 북조선에는 도데체 어느 정도의 인민군이 있는 걸까요?

자. 이제 다음달의 보고서를 보지요.

3. People;s Army Fiscal Matters

(중략)

First Center (Division) – 65,000
Second Center(Division) – 55,000
Third Center(Independent Mixed Brigade of Division) – 45,000
Pyongyang Academy – 3,000
Staff School – 3,000
Central Guard Unit – 2,000
Battalion Department – 2,000
Total – 175,000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46 For Period of 1 October – 15 October 1947, p.10

네. 전투서열은 정확하게 1사단과 2사단, 3독립여단이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병력은 1사단이 65,000명, 2사단이 55,000명, 3여단이 45,000명이고 총 병력은 175,000명입니다. 한 달만에 인민군의 총 병력이 5만명이나 늘어났군요.

지금까지 제가 간단히 정리해 놓은 북한인민군 병력 통계에 대한 ISNK의 분석을 보셨다면 제가 왜 여기 나온 정보들에 대해 극도로 의심하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병력 통계가 한 달만에 5만, 많으면 15만씩 바뀌는데 이걸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북한군이 포함되었다는 중국군 부대는 실재하지도 않는 보고서 상의 부대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 점을 검증할 중국 자료가 필요하다고 그렇게 주구장창 외친 것 입니다.

마지막으로, 첫 번째 글에 대한 토론에서 제가 진명행님께 북한군 총 병력이 17만이 넘는다는 주장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진명행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지요.


자. 그런데 진명행님의 답 글을 주목하십시오. 이 답 글은 진명행님이 ISNK를 직접 읽고 분석한 것이 아니라 백학순의 논문 「중국내전시 북한의 중국공산당을 위한 군사원조 – 북한군의 파병 및 후방기지 제공」에 달린 각주 38번을 그대로 올린 것 입니다. 백학순의 논문에 달린 각주 38번을 한번 보실까요?

북조선 인민위원회 재정국 소속으로서 1947년 6월까지 북한군 주요 부대의 월별 지출표 작성을 담당하였던 한 미군 정보원에 의하면, 지출표에 의한 북한군의 숫자는 1947년 2월부터 6월까지 173,000명이었다고 한다.(ISNK, no.46. p.10) 이 숫자가 사실이라면, 그때까지 만주에서 중공군과 함께 북한으로 퇴각한 조선 의용군 병사들의 숫자(약 50,000 내지 70,000명, ISNK, no.30 p.6)와 북한에서 같은 해 4월부터 만주로 파병하기 시작했던 북한 병사들의 숫자까지 모두 포함한 숫자로 보인다. 커밍스는 만주 파병 북한 병사의 숫자를 100,000 내지 150,000명으로 잡고 있다.

이 각주 38번에서 언급하고 있는 ISNK, no.46. p.10의 통계는 제가 마지막으로 인용한 보고서에 나와 있는걸 아실 수 있습니다. 제가 인용한 보고서의 통계 변화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백학순은 아무 근거도 없이 자신의 상상으로 저 통계를 해석한 것 입니다. 백학순의 연구가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죠. 그리고 진명행님께서는 ISNK의 통계는 전혀 보지 않고 백학순의 각주에 달린 해석을 그대로 베낀 것이죠.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1. 진명행님은 실제로는 ISNK는 읽지도 않았고 그냥 백학순의 글만 베꼈다.

2. 진명행님은 ISNK의 통계를 모두 검토했으나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백학순의 해석만 인용했다.

두 가지가 되겠습니다.

어떻게 하든 진명행님께서는 대놓고 거짓말을 하신 것 입니다.

제가 왜 진명행 님께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했는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2008년 10월 19일 일요일

당대의 정보문서는 얼마나 정확한가?

이글루에서 재미있는 글을 하나 봤습니다. 미국측의 정보문서를 토대로 북한 인민군 10만이 국공내전에 참전했다는 주장이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그 글의 토대가 된 미국측 정보는 전혀 신빙성이 없습니다.

당대의 단편적인 정보문서들은 정확한 것도 많지만 가치가 없는 쓰레기 정보도 역시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1급기밀문서인 NSC 8에는 1948년 4월 당시 북한 인민군이 125,000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인민군은 불과 2개 보병사단과 1개 보병여단에 불과했지요;;;

당대의 정보문서를 읽을 때는 다른 자료들과의 교차검증이 필요한데 미국측 정보문서를 제외하면 북한 인민군 10만이 국공내전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근거는 없습니다. 당장 국공내전 전 기간 중 인민해방군에 참여한 조선계는 모두 합쳐봐야 63,000명 수준입니다.;;;; 그리고 10만이나 되는 인민군이 참전했다면 당연히 국공내전에 대한 중국쪽 자료에서도 관련 내용이 나와야 하는데 조선족 참전이 아닌, 북한 국적의 인민군이 대규모로 참전했다는 중국측 기록은 없습니다. 10만명이 참전했다면 당연히 부대단위로 참전했을 텐데 당장 동북지역에 투입된 인민해방군 전투서열을 분석하더라도 북한에서 유입된 인민군 부대를 찾아볼 수 가 없습니다. 그런데 당대의 부정확한 정보문서만 가지고 어떻게 북한군이 국공내전에 대규모로 개입한 것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낼 수 있겠습니까?

2008년 10월 11일 토요일

김홍일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

‘이청천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에 이어지는 속편 되겠습니다.

1949년에 출간된 『국방개론(國防槪論)』을 읽다 보니 책의 후반부에 통일 이후의 군사력 증강에 대한 김홍일 소장의 구상이 나와 있었습니다. 기갑사단과 차량화사단의 편성 등 흥미로운 내용이 있어서 해당 부분을 한번 발췌해 봅니다.

오래된 책이다 보니 맞춤법을 요즘 사용하는 언어에 가깝게 고쳤습니다.

먼저 우리나라는 육군국 일까, 해군국 일까, 아니라면 육해군병진국 일까.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나라는 해안선이 면적에 비하여 과장(過長)함으로 해군국이 될 소질을 가졌다. 그러나 우리는 해외식민지를 가지지 못하였을 뿐더러 장래에도 가질 희망이 박약하다. 인국(隣國)인 소련, 중국이 모두 육군국 이요, 강대한 해군국 이던 일본도 패전으로 다시 해군재건이 불능케 되었다. 이것으로 보면 우리에게 가장 위협이 많은 것은 육군이매 우리는 육군을 주로, 해군은 보조로 국방군을 건설해야 할 것이다.

육군은 공세적 작전을 취하야 적을 국내로 들이지 않고 전장을 국외로 정해야 하겠음으로 중급장비사단의 1만2천명을 1개 사단으로 하고 최소 상비군 15개 사단은 있어야 한다. 그 중에서 만주와 시베리아의 대평원작전에 최소로써 3개 장갑사단과 3개 모터화사단이 필요하고 국경 산악지대작전에 2개 산악사단이 요구된다.
국력에 비하여 강대한 육군은 짧은 시일 안에 편성키 곤란함으로 통일 전에 남한에서 우선 강고한 기초를 세우고 통일 후에는 3, 4년 예산으로 수보(遂步) 건설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얼마만한 물자와 경제가 필요한가, 그 개념으로 보통 1개 장갑사단의 장비를 열거해 본다.

차량
輕탱크 287량
中탱크 110량
정찰차 276량
運兵트럭 28량
이륜 모터싸이클 408량
삼륜 모터싸이클 201량
화물트럭 1000량

무기
0.30 重기관총 44정
0.30 경기관총 412정
0.50 기관포 113정
37mm 대전차포 36문
60mm 박격포 21문
75mm 평사포 8문
75mm 유탄포 24문
81mm 박격포 16문
105mm 유탄포 12문
※탱크 車上의 기관총과 화포는 計入치 않았다.

이 외에도 병원차, 수리차, 보급차 등 다수 차량이 있다.

金弘一, 『國防槪論』, 高麗書籍株式會社, 1949, 82~85쪽

이 글을 읽은 느낌은 지난번에 썼던 ‘이청천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과도 비슷합니다. 김홍일 소장도 이청천과 비슷하게 한국의 주적은 ‘북괴’가 아니라 소련과 중국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래에 건설될 통일 한국군 15개 사단 중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6개 사단을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작전할 기계화 부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김홍일 소장이 이 글을 쓰던 1948년~1949년 초만 하더라도 남한에서는 북한 인민군은 별볼일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괴뢰들은 제껴 두고 이들의 상전인 중국과 소련을 상대할 구상을 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이것은 이청천의 구상과도 동일한 배경에서 나온 것 입니다.

다음으로 흥미로운 점은 기갑사단의 장비 문제입니다. 먼저 과도하게 기계화장비에 대한 의존이 높고 보병의 비율은 기형적일 정도로 작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2차대전 당시의 기동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나온 구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비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경전차와 중전차의 비율이 2:1라는 것 입니다. ‘이청천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에서 이청천은 ‘차량화연대’의 경전차와 중전차 비율을 5:1로 잡고 있었는데 이것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여전히 경전차의 비중이 극도로 높습니다. 그리고 정찰용 장갑차까지 경전차에 포함시킬 경우에는 이 비율이 5:1 정도가 되는데 왜 이렇게 남한의 군사지도자들은 경전차에 집착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가 없습니다. 보병의 비중이 기형적으로 작다 보니 보병 수송용 차량은 28대에 불과한 반면 기갑장비가 많다 보니 보급용 트럭은 무려 1,000대에 달합니다. 보급에 대한 개념은 가지고 있으니 그나마 낫다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사단의 편제는 둘째치고 소련을 가상적으로 시베리아 작전까지 상정하고 있는데 고작 6개의 기갑사단과 차량화사단으로 공세작전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구상하고 있다는 것이 좀 난감합니다. 아무래도 현대전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나온 구상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런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해방이후~대한민국 초기 한국의 군사지도자들은 거의 대부분 이런 비현실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신생국가의 군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희망찬 구상이란 점에서는 좋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군의 최고 수뇌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점은 유감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2008년 9월 19일 금요일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군에 대한 약간의 잡설

그냥 잡담입니다. ^^

첫 번째 잡설. 국민당군의 장개석 직할 사단의 무장 상태에 대한 것 입니다. 원래 sonnet님의 글, “회해전투 당시 사단 무장”을 읽은 뒤 관련 자료를 찾아서 트랙백 해야 겠다 하다가 건망증으로 잊어 버리고 이제서야 올리게 되는 군요.

1947년 중순 3각 편제로 편성된 일반적인 “장개석 직할 사단”의 무장 상태는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비교 대상으로 비슷한 시기 인민해방군의 군단급 부대인 종대(纵队)의 장비현황도 같이 올려 봅니다.


이 표에서 재미있는 것은 전체적으로 인민해방군의 한 등급 높은 부대 조차 장비와 화력에서 국민당군 사단에 비해 열세인 것은 사실인데 50mm박격포와 경기관총에서는 격차가 그나마 적다는 점 입니다. 국민당군에 비해서 중화기는 부족하지만 경장비는 그럭저럭 충실한 수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국민당군 보다 장비가 열세인 것은 어쩔 수 없지요. 인민해방군은 차량 같은 경우는 아예 보유하고 있질 못 합니다.

두 번째 잡설. 회해전역(淮海战役) 당시 국민당군의 전투서열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회해전역 당시 국민당군의 사단급 전투서열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제2병단 : 사령 구청천(邱淸泉)
-제5군 : 45사, 46사, 200사
-제70군 : 32사, 96사, 139사
-제74군 : 51사, 57사, 58사
-제12군 : 112사, 238사
-제72군 : 34사, 233사, 122사
-제116군 : 287사, 288사
기병 제1여
독립여

제6병단 : 사령 이연년(李延年)
-제99군 : 92사, 99사, 268사
-제39군 : 103사, 147사
-제54군 : 8사, 198사, 291사
-제96군 : 141사, 212사

제7병단 : 사령 황백도(黃百韜)
-제25군 : 40사, 108사, 148사
-제63군 : 152사, 186사
-제64군 : 156사, 159사
-제100군: 44사, 63사
-제44군 : 150사, 162사

제13병단 : 사령 이미(李彌)
-제8군 : 42사, 107사, 237사
-제9군 : 3사, 166사, 253사
-제115군 : 39사, 180사
-제64군 : 156사, 159사

제16병단 : 사령 손원량(孫元良)
-제41군 : 122사, 124사
-제47군 : 125사, 127사

제12병단 :사령 황유(黃維)
-제10군 : 18사, 75사, 114사
-제14군 : 10사, 85사, 83사
-제18군 : 11사, 49사, 118사
-제85군 : 23사, 110사, 216사

제4수정구(绥靖区) : 사령 류여명(劉汝明)
-제55군 : 29사, 74사, 181사
-제68군 : 81사, 119사, 143사

제3수정구 : 사령 풍치안(馮治安)
-제59군 : 38사, 180사
-제77군 : 37사, 132사

독립 제107군 : 260사, 261사
독립 제20군 : 133사, 134사

이상의 전투서열은 중국 국민당군의 구조에 대해 꽤 재미있는 점을 보여줍니다. 장개석 직계부대와 군벌 계통 부대가 뒤섞여 있는 잡탕이란 점이죠.
회해전역에 투입된 국민당 군의 총 77개 사단 중 장개석 직계, 즉 중앙군 직계 사단은 46개 사단입니다. 원래 동북군계에서 장개석 쪽으로 넘어온 112사와 광동계에서 넘어온 152사를 중앙군 계열로 분류하면 48개 사단이군요. 여기에 기병 1여가 중앙군 직계이니 장개석 직계의 부대는 총 48개 사단과 1개 여단이 됩니다. 나머지 32개 사단은 국민당이 아니라 다른 군벌 소속 부대로 장개석 쪽에 붙은 사단이 되겠습니다.
다시 각 병단 별로 중앙군 직계 사단의 비율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2병단 : 총 16개 사단, 2개 여단 / 중앙군 직계 13개 사단, 1개 여단
제6병단 : 총 10개 사단 / 중앙군 직계 9개 사단
제7병단 : 총 11개 사단 / 중앙군 직계 5개 사단
제13병단 : 총 10개 사단 / 중앙군 직계 7개 사단
제16병단 : 총 4개 사단
제12병단 : 총 12개 사단 / 중앙군 직계 11개 사단
제4수정구 : 총 6개 사단
제3수정구 : 총 4개 사단
독립 제107군 : 총 2개 사단 사단 / 중앙군 직계 2개 사단
독립 제20군 : 총 2개

중앙군 직할 사단의 숫자로 보면 구청천의 제2병단과 황유의 제12병단이 실질적인 주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7병단은 중앙군에 광동계(粤)와 사천계(川) 사단이 뒤섞여 있었고 16병단은 4개 사단 전체가 사천계, 그리고 제3수정구와 제4수정구는 모두 서북계, 독립 제20군은 모두 사천계 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장개석의 북벌 자체도 국민당 직계에 잡다한 군벌 부대를 긁어모아 완성한 것이었고 이런 난감한 구조는 중일전쟁을 거치면서도 결코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제롬 첸(陳志讓)이 재미있게 지적한 것 처럼 중국의 상황은 일본의 전국시대와 비슷했는데 장개석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니었던 것 이죠.

다시 회해전역 이야기로 돌아가면, 인민해방군의 제 1단계 공격으로 괴멸당한 황백도의 제7병단은 서북군벌인 풍치안의 제3수정구가 반란을 일으켜 인민해방군에 가담하면서 퇴로가 차단되어 포위됩니다. 제3수정구의 반란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던 것 입니다. 상대적으로 기동성에서 우위에 있었던 제7병단은 어이없게 퇴로가 차단되면서 도보로 추격해온 인민해방군에게 따라잡히게 됩니다. 만약 제3수구의 반란이 없었다면 제7병단은 예정대로 철수를 마쳤을 수도 있을 것 입니다. 이렇게 해서 퇴로가 차단된 제7병단은 서주방면으로 돌파하려 노력합니다만 서주에서 증원 나온 제2병단과 제13병단의 지원공격도 반란을 일으킨 제3수구에 인민해방군 산동병단 소속의 3개 종대가 증원되면서 막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니 제7병단은 그대로 전멸해 버리고 맙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군벌부대가 다수 섞여 있어 전투력이 떨어졌던 것이 제7병단이 돌파에 성공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데 이 점은 나중에 더 공부를 해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인민해방군의 회해전역 2단계 작전에서 국민당군의 정예부대인 황유의 제12병단이 섬멸된 문제입니다. 1948년 11월 24일, 장개석은 숙현(宿懸)을 탈환해 진포철도를 개통한 뒤 주력부대를 회남으로 철수시켜 방어에 임한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런데 원래 숙현지역을 방어하던 것은 제4수정구 였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제4수정구도 제3수정구와 같은 서북계 부대였습니다. 제4수정구는 11월 15일 인민해방군 주력의 1단계 공격에 그대로 밀려나면서 숙현을 넘겨줬습니다. 인민해방군은 숙현 탈환을 위해 북상하는 황유 병단을 유인해서 섬멸할 계획을 짰는데 숙현이 제대로 방어됐더라면 이런 덫이 놓이진 않았겠지요. 황유의 제12병단이 예정대로 숙현 탈환을 위해 공격을 개시하자 인민해방군은 유인하기 위해서 일부러 철수했고 이를 추격한 황유 병단은 그대로 포위되어 섬멸됩니다.

그리고 회해전역에서 가장 결정적인 패배는 두율명이 지휘하는 제 2, 제 13병단이 포위되어 섬멸된 것이었습니다. 두율명 집단이 포위된 것은 황유 병단을 구원하기 위해 남하하다가 인민해방군에게 포착되었기 때문이니 결국은 제3, 제4수정구가 문제였던 셈 입니다. 서북군벌계의 이 두 수정구는 장개석의 이탈리아군(?)이 된 셈 입니다.

국공내전시기의 다른 전역에 대해서도 장개석의 중앙군과 군벌계 사단의 전투 양상을 분석해 보면 아주 재미있을 듯 싶습니다.

참고문헌
中国人民革命军博物馆 编,『中国人民解放军战史图集』,中国地图出版社, 1990
曹剑浪,『国民党军简史』下, 解放军出版社,2004
国防大学 “战史简编” 编写组,『中国人民解放军战史简编』, 解放军出版社,1983/2003
국방군사연구소, 『중공군의 전략전술 변천사』, 1996
陳志讓, 박준수 옮김, 『軍紳政權 : 근대중국 군벌의 실상』, 고려원, 1993

2008년 7월 18일 금요일

대인배 워커 장군

1950년 11월, 슬금 슬금 중국 인민해방군의 한국전쟁 개입이 확실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미 제 1기병사단은 운산 전투에서 중국군에게 타격을 받았으며 최전선에서는 다수의 중국군 포로가 생포되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미군 지휘관들은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무렵 8군 사령관 워커 중장도 전선 시찰을 나가서 중국군 포로를 심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물론 워커 중장도 중국군의 본격적인 개입을 우려하고 있었지만 그는 불안감을 느끼는 부하들을 생각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 이 녀석은 중국인인것 같아. 하지만 LA에 멕시코인이 많다고 해서 LA를 멕시코 도시라고 하진 않잖아."

"Well, he might be Chinese, but remember they have a lot of Mexicans in Los Angeles but you don't call LA a Mexican city."


David Halberstam, 『The Coldest Winter : America and the Korean War』, Hyperion, 2007, p.383

2008년 3월 12일 수요일

국공내전 후기 중국인민해방군의 전투서열

얼마전 페리스코프에 올라온 집결호와 관련된 글을 읽고 나니 갑자기 관심의 저편으로 멀리 사라졌던 국공내전에 대한 생각이 다시 났습니다. 그래서 책장 구석에 박혀있던 中国人民寄放军 历史上的 70个军이란 책을 꺼내 훑어 봤습니다.

이 책에는 국공내전후기인 1949년 2월의 중국인민해방군의 전투서열이 실려 있습니다.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분 치고 전투서열에 관심없는 분은 없을 것 입니다. 전쟁이란 좀 조직화된 패싸움이니 그 조직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전쟁을 이해하기가 조금 어렵지요. 그러나 국공내전 같이 규모가 큰 전쟁은 사단급 제대만 해도 세기 귀찮을 정도로 많습니다. 아마 당시의 중국인들도 부대가 너무 많으니 부대 이름 붙이는 걸 귀찮아 하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그런데. 1949년 2월의 전투서열을 보니 중화의 위대함에 새삼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중국군의 경우 군단급 제대인 1개 군(军) 예하에 사단급 제대인 3개 사(师)가 배속되는데 1949년 2월 인민해방군의 전투서열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1군 : 1사, 2사, 3사
2군 : 4사, 5사, 6사
3군 : 7사, 8사, 9사
4군 : 10사, 11사, 12사
5군 : 13사, 14사, 15사
6군 : 16사, 17사 18사
7군 : 19사, 20사, 21사
8군 : 22사, 23사, 24사
9군 : 25사, 26사, 27사
10군 : 28사, 29사, 30사

(중 략)

67군 : 199사, 200사, 201사, 독립53사
68군 : 202사, 203사, 204사, 독립25사
69군 : 205사, 206사, 207사
70군 : 209사, 210사

이거 너무나 간단하지 않습니까! 물론 가끔 독립사단을 배속받는 군이나 변경 군구의 2개 사단으로 편성된 독립군 등 변칙적인 편제가 있긴 합니다만.

2007년 8월 8일 수요일

국공내전 기간 중 양군의 인명피해

이번 중국행에서 사온 책 중에는 중국 국방대학교가 출간한 중국인민해방군전사간편(中国人民解放军战史简编)이 있습니다. 중국인민해방군의 창군부터 국공내전 종결 까지 인민해방군의 주요 작전을 간략하게 정리한 책인데 1983년에 제 1판이 나왔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이 책에 대해 잘 아실 것 같습니다. 제가 이번에 산 것은 2003년에 출간된 제4판입니다. 지도와 통계가 잘 정리되어 있어 마음에 들기는 하는데 종이가 너무 얇아 신경이 쓰이는군요.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인민해방전쟁, 즉 우리가 말하는 국공내전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는 지도와 함께 인민해방전쟁시기 양군의 인명손실에 대해서 정리해 놓고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구 분
1946.7 ~ 1947.6
1947.7 ~ 1948. 6
1948. 7 ~ 1949. 6
1949. 7 ~ 1950. 6
합 계
인민해방군 사상자
336,000
407,600
490,000
79,100
1,312,700
국민당군 사상자
426,000
540,200
571,610
173,300
1,711,110
인민해방군 포로
2,500
5,300
2,600
3,300
13,700
국민당군 포로
677,000
953,000
1,834,010
1,122,740
4,586,750
국민당군 귀순
?
?
242,780
390,730
633,510
국민당군 집단전향
17,000
28,200
130,600
671,150
846,950
국민당군 재개편
?
?
271,000
22,030
293,030
인민해방군 실종
19,500
40,000
129,400
7,200
196,100
(표 출처 : 国防大学<战史简编>编写组, 『中国人民解放军战史简编』, (解放军出版社, 2003), p.641)

가장 흥미로운 점은 사상자 자체는 양군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 입니다. 물론 양군의 전력차를 감안해 보면 인민해방군이 상당히 선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만. 비록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국민당군의 손실 대부분이 포로, 또는 귀순에 의한 것이라는 점은 꽤 재미있는 점입니다. 이것을 직접 통계로 보니 느낌이 색다르군요. 내전 초기 단계부터 60만이 넘는 포로가 발생했다는 점도 특기할 만 합니다. 1946년 7월부터 1947년 6월까지는 국민당군이 공산군을 압박하면서 전략적으로 유리한 상황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포로만 60만이 넘었다는 점은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포로의 숫자는 전쟁 후기로 갈수록 급증하며 여기에 더해 자발적인 투항, 즉 귀순하는 비율도 월등히 높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개인 귀순이나 집단 귀순만 150만 가까이 된다는 점은 국민당군이 내부적으로 결속력이 떨어지는 집단이었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잘 정리된 통계를 보는 것은 또 색다른 느낌입니다. 통계 작성과정의 신뢰성은 둘째 치고라도 상당히 재미있는 자료입니다.

2007년 8월 7일 화요일

베이징 군사박물관

저는 관심사가 관심사이다 보니 어디를 여행하건 전쟁과 관련된 박물관, 기념관이 있으면 최대한 관람을 하는 편 입니다. 게다가 올해는 인민해방군 창군 80주년이니 군사박물관에 뭔가 더 재미있는게 있지 않을까 싶더군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 보다 사람이 많아 돌아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해방군 창군 80주년이라고 무료관람 행사를 하는 통에 가뜩이나 사람 많은 중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짜 박물관에 몰려든 것이었습니다. 돈을 내지 않는 것은 멋진 일 이었지만 박물관 입구에서부터 사람들에게 떠밀려 들어가는 것은 아주 고역이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금속탐지기로 소지품 검사 같은 것은 일일이 다 하더군요. 그 덕분에 사람도 많은데 대기하는 줄은 더욱 길었습니다.


들어서니 위대하신 마오 주석께서 맞이하시는 군요.


사람이 매우 많아서 제대로 구경은 못 했지만 마음에 드는 전시물이 매우 많았습니다.


일본의 97식 전차도 이렇게 보니 그럭 저럭 봐 줄만 하더군요. 역시 배경화면의 힘이 큰 것 같습니다.


고대 중국의 전차는 아무리 봐도 뭔가 모자란 느낌입니다. 도데체 뭘까요?


이건 당나라 기병이랍니다.


중국군함 중에서는 가장 유명할 듯한 정원(定遠)의 모형입니다. 사진이 잘 안 나왔지만 모형은 꽤 괜찮게 만들었더군요.


신해혁명때 봉기군이 사용한 대포와 같은 모델이랍니다. 관람객들이 열심히 만지고 가동되는 부분은 움직여 대서 불쌍하더군요.


항일전쟁 전시관의 이 조형물은 꽤 흥미로웠습니다. 중국 드라마에 나오는 망나니칼(???) 휘두르는 홍군이 전혀 뻥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긴 1차대전 때는 철퇴도 만들어 썼으니 현대전에서 망나니칼(???) 휘두르지 말라는 법은 없겠네요.


이건 그 북새통에도 사람이 거의 없어 한가했던 해방군 장군 서화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별로 볼만하지는 않더군요. 여기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한동안 쉬었습니다. 사람이 득시글 대는 건물은 정말 고역이더군요.


야외에는 80주년 특별 전시인지 99식 전차 같은 현용 장비들이 대거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99식을 실제로 보니 사진 보다는 포탑이 조금 더 길어 보이더군요. 물론 그래도 포탑이 너무 작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사진으로만 보다가 실물을 처음 보니 뭔가 느낌(?)이 오는 것 같더군요. 참고로 같이 전시된 장비중에서 99식이 가장 인기가 있었습니다. 의외로 전차팬이 많은가 봅니다.


이건 해방군 창군 80주년 특별 전시실에 있던 물건인데 미육군 31보병연대의 연대기라고 합니다.

사람이 지독하게 많아서 구경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점을 제외하면 만족스러웠습니다. 한가할 때 천천히 관람해 보면 좋겠더군요.

2007년 8월 5일 일요일

중국군사서점과 일반 서점의 군사관련 코너

중국에 도착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베이징에 있다는 인민해방군 직영서점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말은 안 통하고 중국어를 할 줄 아는 한국인들은 이게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무작정 찾아보기로 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횡재인지 나가서 베이징 시내를 세시간 정도 걸어 다니다가 해방군 직영서점을 발견했습니다!


서점은 핑안리(平安里)라는 곳에 있는데 인민해방군 문예출판사와 같은 건물에 있었습니다.


서점의 첫 인상은 조금 별로였습니다. 일단 짧은 중국어로 훑어보니 군사 이론과 관련된 서적과 외국 저작의 번역물이 많이 보이더군요. 제법 유명한 저작들은 번역되어 있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어디선가 많이 보신 것들이지요?

1층은 군사서적을 전문적으로 취급하고 2층에는 좀 요상한(?) 책들이 같이 섞여 있었습니다.


이건 1층입니다.


조금 썰렁한 여기가 2층입니다.

하지만 그 후로 세 번 더 가 보니 상당히 흥미로운 책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어 학습에 대한 의욕을 불태우게 하더군요.

해방군 직영서점이 좋은 점은 모든 서적을 10% 할인해 준다는 점 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영수증을 출력해주는 도트 프린터의 출력음도 정겹더군요.

그 외에 베이징 시내의 대형 서점들은 모두 규모가 제법 있는 군사서적 코너를 갖추고 있어서 군사관련 서적을 구하기는 매우 쉽습니다. 몇몇 서점은 회원카드가 있으면 책에 따라 20% 까지 할인을 해 주더군요.


그리고 중국은 일반 대학에서도 군사사 연구가 활발하기 때문에 해방군 서점에서는 못 구하고 일반 서점에서만 구할 수 있는 군사서적도 제법 있었습니다.

일반 대학 출판부에서도 군사사 서적을 많이 출간할 정도로 연구가 활발하다는 점은 굉장히 부러웠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이 아닐까 싶군요. 앞으로는 중국어를 더 공부해서 기회가 되는 대로 책을 사러 중국에 갈 계획입니다.

2007년 1월 15일 월요일

묵공 - 밋밋한 부대찌개 같은 영화

지난 주말에는 ‘묵공’을 봤습니다.

‘완벽한 공성전’ 어쩌고 하는 광고 문구 보다는 안성기 아저씨가 나오고 또 원작 만화 자체도 꽤 재미있게 봤기 때문에 개봉 전부터 굉장히 호기심을 끌던 영화였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니 아쉬운 부분이 많이 남습니다. 물론 열심히 만들었고 볼거리도 그럭 저럭 많긴 합니다만… 전체적인 느낌은 마치 밋밋한 부대찌개 같았습니다. 먹을건 많이 들어가 있는데 맛은 밋밋한. 그냥 그럭 저럭 볼만한 영화더군요.

가장 큰 문제는 감독이나 편집자의 역량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영화 내내 긴장감이라곤 끌어내지 못하니 재미가 없을 수 밖에요. 조나라의 10만 대군이 조그만 성 하나를 공격하러 온다는데 그다지 긴박한 느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이건 거의 감독의 자질 문제가 아닌 듯 싶더군요. 비슷한 예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반지의 제왕 두번째 편의 헬름 협곡 전투는 압도적인 적에게 포위당한 긴박감을 잘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묵공에서는 함락당하면 주민들이 모두 몰살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긴박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냥 적이 오니 싸우고 그래서 이겼다는 것 말고는 모르겠더군요.
그리고 영화 중간에 혁리가 조나라 진영을 염탐하러 갔다가 추격 당하는 부분에서도 갑자기 어두운 밤에서 환한 대낮으로 건너 뛰는 등 편집자의 재능을 의심케 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등장 인물들은 많고 조연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해대는데 이걸 제대로 이어 붙이지 못하니 영화는 산만하고 엉덩이는 아파왔습니다.

두번째 문제는 주인공의 압도적인 지략입니다. 그의 라이벌(?)이 되야 할 조나라의 ‘명장’이라는 항엄중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 때문에 굉장히 맥빠지는 대결이 이어집니다. 첫번째 공격은 나름대로 재미있었으나 그 뒤로는 밋밋한 전개가 계속되더군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도 혁리는 완전히 절망적인 상황을 어처구니 없이 뒤집어 버립니다. 도데체 언제 지하에 갱도를 다 파 놓았다는 것인지.
적을 가지고 놀 정도로 압도적인 능력을 가진 주인공은 잘 묘사하기가 힘듭니다. 잘못하면 너무 일방적인 이야기가 이어지기 때문에 재미가 없지요. 묵공은 바로 이런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더군요. 주인공이 너무 뛰어나 적장 항엄중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에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에서는 위기의 완급조절이 필요한데 그런게 전혀 없이 일사 천리로 이야기가 진행되니 뭐…

여기에 더해 시나리오를 쓴 사람의 자질도 약간 의심스럽더군요. 주연 배우들 외에도 조연들도 비중이 제법 큰데 비중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이 때문에 이야기가 산만하고 엉덩이가 쑤시는데 일조를 했습니다.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갑자기 조연들이 튀어나와 극의 흐름을 끊더군요. 조연들에 대한 불필요한 묘사 보다도 혁리와 항엄중의 대결에 집중했다면 훨씬 볼만한 영화가 됐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야기 진행의 밋밋함을 제외하면 그럭 저럭 영화였습니다. 초반의 전투장면은 인민해방군을 엑스트라로 동원해서 규모가 크고 제법 전쟁하는 분위기를 느끼게 해 줍니다. 쓸데 없이 날아다니는 액션이 없다는 점도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전체적으로 매우 밋밋한 영화였습니다. 또 보고 싶진 않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