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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16일 토요일

대조국전쟁사 서술에 관한 흥미로운 학위논문

2016년 애리조나 주립대학에서 나온 Yan Mann의 박사학위 논문 Writing the Great Patriotic War's Official History During Khrushchev's Thaw를 읽었습니다. 현재까지 대조국전쟁사 서술을 둘러싸고 계속되는 논쟁의 시발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한 글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논문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주장은 소련 체제의 프로파간다에 의해 만들어진 집단 기억이 소련 국민 개개인의 전쟁 체험에 스며들고 심지어는 개인의 기억과 문헌 기록 자체에 영향을 끼치는 단계까지 나갔다는 겁니다. 소련 체제의 특성상 공산당이 정보 유통 수단을 장악하고 집단 기억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정권이 대조국 전쟁의 신화화를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얻으려 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점도 주목할 만 합니다. 저자는 오늘날 푸틴 정권 치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관변 역사학의 준동이 소련 시절, 특히 브레즈네프 집권기의 흐름과 유사하다고 봅니다.

이 논문은 크게 여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장은 스탈린 정권기 대조국 전쟁사의 기본적인 맥락이 형성되는 과정을 다룹니다. 저자는 스탈린 시기에 주로 프로파간다를 통해 형성된 집단 기억이 스탈린 사망 이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제2장은 스탈린 사후에서 흐루쇼프 집권 초기까지의 대조국전쟁사 서술을 다룹니다. 흐루쇼프가 정권을 잡은 뒤 스탈린을 공격하고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위해 정부 차원의 공식 대조국전쟁사 서술을 필요로 했다는게 골자입니다. 제3장 부터는 이 논문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3장과 제4장은 흐루쇼프 정권이 대조국전쟁의 공식 역사서의 1권과 2권을 편찬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3장은 소련 공산당이 대중을 대상으로 한 공식대조국전쟁사 집필을 결정하고 저작의 골격을 잡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오늘날까지 통용되는 대조국전쟁을 3기로 구분하는 시대구분이 바로 흐루쇼프 시기에 완성되었습니다. 4장은 대조국전쟁사의 초기 집필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전쟁 초기의 패배에 대한 공식 해석이 만들어지는 과정, 전쟁 초기의 주요 군사작전에 대한 서술, 전쟁 시기 프로파간다를 통해 날조된 영웅담들이 공식 역사의 일부로 포함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제5장은 소련 정부의 공식 대조국전쟁사의 첫 번째 권이 집필된 직후 소련 사회의 반응을 다룹니다. 정치적, 군사이론적, 군사작전에 관한 비평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6장은 대조국전쟁사 집필 과정에서 스탈린의 역할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 그리고 소련 정치인들의 책임 회피와 대조국전쟁사 편찬이 완결되기 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이 글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지속적으로 반복된 소련 정권의 프로파간다가 역사 서술에 영향을 끼친 점을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제5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키예프 전투에 대한 서술을 예로 들어 소련군의 인명손실을 서술할때 상대적으로 정확한 독일측의 주장을 비난하고 소련군의 피해를 축소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지적합니다. 또한 개전 초반 소련군의 장비 대다수가 성능적으로 구식이었다는 서술에 참전자들 상당수가 불쾌감을 드러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참전자들은 소련군의 무기가 성능적으로 뒤떨어졌다는 서술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발을 했는데 이런 경향은 오늘날의 러시아에서도 나타나고 있지요. 이 밖에도 이 논문에서는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정치인과 군인들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 군사작전과 소련 군사학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 등 대조국전쟁사 집필 과정에서 있었던 수많은 요인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한번 읽어보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2019년 2월 9일 토요일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2-1호에 실린 논문 몇 편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2-1호를 훑어보았습니다. 이번호는 흥미로운 제2차대전 논문이 3편이나 실려있어 매우 즐겁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글은 데이비드 서튼(David Sutton)의 "1941 and the National-Patriotic Revival in Russia"입니다. 이 글은 제목 그대로 푸틴 치하에서 강화되고 있는 국수주의적 환경이 제2차세계대전사, 특히 1941년 전역에 대한 서술에 끼치는 영향을 다루고 있습니다. 필자는 고르바초프-옐친 이래 기세가 꺾여 있던 러시아의 우익-국수주의적 역사관이 푸틴 치하에서 부활했으며 본질적으로는 소련 시기의 역사관과 동일한 맥락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런 국수주의적 논자들은 고르바초프-옐친 시기에 활발하게 일어난 '수정주의적' 역사관을 배격하고 영웅적인 과거사를 구축하고자 합니다. 대표적인 저작은 2011년에 간행된 12권짜리 '대조국전쟁사'입니다. 대조국전쟁사의 간행 책임자였던 졸로타레프는 '수정주의적' 역사가들은 러시아의 국제적인 입지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주장한 인물입니다. 그는 '판필로프 사단의 28용사' 등 소련 시절의 날조된 프로파간다에 대한 공격을 되려 '수정주의자'들의 날조라고 주장합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소련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비판도 거부한다는 점 입니다. 서튼의 글은 이렇게 퇴행적인 푸틴 집권기의 역사서술을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꽤 재미있는 글이라 번역을 해보고 싶군요.

다음으로는 니콜라이 로스토프, 이고르 예레민, 세르게이 쿠즈네초프의 공동연구인 "The Particularities of Military Mobilization Campaigns in Siberia in the Summers of 1914 and 1941"가 있습니다. 이 논문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초반 시베리아 지역의 전쟁 동원에 관한 글 입니다. 1941년의 경우 공산당이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바르게 적용하지 못해 한계가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인력 및 마필 동원과 달리 차량 및 트랙터 등의 장비 동원에 문제가 많았다고 평가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쿠르스크 전투를 주로 연구하는 발레리 자물린의 "Soviet Troop Losses in the Battle of Prokhorovka, 10~16 July 1943"이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 프로호로브카 전투에서 소련군이 입은 인명 및 장비 손실을 정리한 글 입니다. 흥미롭기는 합니다만 그의 기존 연구와 비교했을때 특별히 주목할 만한 내용은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논문은 아니지만 흥미로운 글도 있습니다. 리브 파르네모(Liv Karin Parnemo)의 "Russia's Naval Development - Grand Ambitions and Tactical Pragmatism"는 최근 러시아의 해군력 건설은 러시아의 경제적 역량을 고려해 연근해 작전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아직까지는 소련 시절에 건설한 대형 함정과 잠수함 전력으로 제한적인 원양 작전을 전개하고 있으나 신규 함정 건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역량이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2018년 10월 7일 일요일

러시아의 국가 범죄 은폐 의혹?


Dig Near Stalin-Era Mass Grave Looks To Some Like Kremlin Dirty Work

Russian digs accused of covering up Stalinist crimes

9월에 있었던 AFP 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에서 제2차세계대전 당시 소련군 유해 발굴작업을 명분으로 소련의 학살 범죄를 은폐하는 공작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혹이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 정부에서는 제2차대전 중 핀란드군이 학살한 소련군 포로 유해를 발굴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전쟁 중 핀란드군이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소련군 포로들을 대량 학살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발굴을 주도하고 있는 군사사학회(РОССИЙСКОЕ ВОЕННО-ИСТОРИЧЕСКОЕ ОБЩЕСТВО [РВИО])는 문화부장관 블라디미르 레딘스키와 우익 정치인 드미트리 로고진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어용단체'입니다. 실제로 이 단체의 활동에 대해서는 러시아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있지요.

러시아 인권운동단체들은 이 발굴이 스탈린 시절 소련 정부가 자행한 정치범 학살을 은폐하려는 공작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푸틴 집권 이후 퇴행적이고 쇼비니즘 적인 분위기에서 소련 시기를 미화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정부의 주도 하에 적극적으로 역사 왜곡에 나서는 분위기는 매우 우려스럽군요. 카틴 학살 같이 소련의 전쟁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다른 국가의 범죄라고 날조공작을 한 사례도 있습니다. 그러니 만큼 러시아 정부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찝찝함이 느껴지는군요.


2017년 7월 22일 토요일

[번역글] 러시아의 전쟁이 잊혀져 간다





얼마전 재미있는 칼럼을 한편 읽어서 번역해 봅니다. 카네기재단 모스크바 센터의 안드레이 콜레니코프Андрей Колеников가 쓴  Misremembering Russia’s War라는 제목의 글 입니다. 지난번에 소개했던 글들 처럼 푸틴 집권 이후 퇴행하는 러시아의 역사 인식을 비판하는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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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전쟁이 잊혀져 간다

안드레이 콜레니코프


러시아는 제2차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잠시나마 동맹국과 함께 나치 독일에 맞서고 있다는 인식을 가졌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금방 사라졌다. 그리고 오늘날 러시아의 지배자들은  현재는 물론 과거에도 러시아가 홀로 적과 맞섰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차르 알렉산드르 3세가 했다는 “러시아의 동맹은 두개다. 육군과 해군이다.”말에 동의하면서 인용하곤 했다.(최근 아사드 부자가 푸틴의 새로운 동맹에 추가된 것 같다.)


러시아의 지배층은 아직도 독일에 맞선 대조국전쟁을 정치적 신화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 러시아 대통령궁이 1941년 히틀러의 소련 침공일인 6월 22일에 내놓은 기념사는 이런 태도를 아주 잘 보여준다.


최근 수년간 6월 22일은 1945년 소련의 승리를 기념하는 5월 9일에 반대되는 의미를 가지게 됐다. 이 날은 스탈린의 정치적 실책으로 개전 초기 수개월간 일어난 재앙적인 참패와 공황을 되새기는 날이되었다. 스탈린이 군 고위층을 탄압하고 대규모로 숙청했기 때문에 소련군의 전쟁 대비태세는 형편없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올해 6월 22일에 “나치 침략자들과의 전쟁에서 산화한 모국의 수호자들의 추도식”을 거행했다. 이들이 희생된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아직 연구가 충분하지 못한것인가? 푸틴 대통령은 6월 22일을 5월 9일 처럼 또다른 변명의 구실로 삼았다. 대통령은 비서실장 안톤 바이노Антон Эдуардович Вайно와 대법원장 뱌체슬라브 레베데프Вячеслав Михайлович Лебедев를 필두로 도열한 수많은 장군 및 고위 관료들과 흥겹게 악수를 나누었다. 공식 행사는 6월 22일의 비극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1941~1945년의 대조국전쟁에 대한 공식 서술은 다시 스탈린 시절처럼 동맹국들의 존재를 지우는 방향으로 퇴보하고 있다. 2017년 5월 레바다 센터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의 65%는 동맹국 없이도 소련이 승리했을 것으로 믿는다.


‘동맹’을 만든다는 개념은 소련의 정치담론에서 일찍부터 삭제됐으며 1946년 시점에서는 대중의 인식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영국과 미국이 ‘동지’였던 때가 잠깐 있긴 했다. 소련의 종군기자 일야 에렌부르그Илья́ Григо́рьевич Эренбу́рг와 콘스탄틴 시모노프Константи́н Миха́йлович Си́монов는 미국을 방문했으며, 러시아 재즈 가수 레오니드 우툐소프Леони́д О́сипович Утёсов와 그의 딸 에디트는 러시아어로 번안한 ‘Comin’ in on a Wing and a Prayer’를 불렀다.


하지만 레바다 센터의 여론조사에는 또 다른 의미심장한 내용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인명손실이 엄청나게 컸던 원인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했을때 20년 전에는 34%의 응답자가 소련 정부가 인명 손실에 무감각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2017년 5월의 여론조사에서는 최근 러시아를 휩쓸고 있는 시대에 뒤떨어진 군국적-애국적 히스테리가 합리적이고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인식을 대체하고 있다. 소련의 막대한 인명손실과 패전의 원인이 “나치의 기습 공격 때문”이라는 응답은 20년 전에는 27%였으나 2017년에는 36%로 늘어났다.


레바다 센터는 나치의 기습공격 때문이라는 선택지에 부가 사항을 추가했다. “나치 독일의 기습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주장은 스탈린의 정치적 실책을 덮기 위해 날조한 것인가?” 푸틴이 집권한 2001년만 해도 58%에 달하는 응답자의 다수가 여기에 동의했다. 하지만 2016년에는 그 숫자가 38%로 줄어들었다.


레바다 센터는 설문조사에 대조국전쟁 기간 중 소련이 입은 수백만에 달하는 인명손실에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이냐는 사항을 꾸준히 포함해 왔다. 2010년에는 “적”이라는 응답이 28%에 불과했다. 하지만 크림 반도 병합 이후인 2016년의 여론조사에서는 47%로 높아졌다. 이런 추세에서 스탈린이 책임져야 한다는 응답이 점차 낮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2010년에는 30%의 응답자가 스탈린의 책임이라고 대답했지만 2016년에는 21%로 줄어들었다.


물론 이 여론조사 결과를 가지고 러시아 국민이 역사적 팩트를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졌다고 주장하면 안된다. 환경이 변한 것이다. 퍼레이드 행렬의 수많은 군중에 섞여 자동차, 가방, 유모차에 애국심을 상징하는 성 게오르기우스의 리본을 달아 모든 죄를 망각하고 약간의 퇴보를 하는 것이다. 사실 하고자 할 의지만 있다면 역사적 진실을 아는 것은 수 년 전에 비해 훨씬 쉬워졌다.


군사적 행사와 퍼레이드가 잦아지면서 과거를 되새길 필요성은 줄어들었다. 요즘은 공격적인 감성을 북돋고 있다. 1년전 러시아의 공식 여론조사 기관인 러시아여론조사센터Всероссийский центр изучения общественного мнения는 6월 22일에 맞춰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 설문조사에는 충격적인 조항이 들어가 있었다. “만약 내일 인접국가와 전쟁이 난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참전하는 것을 지지하겠습니까?” 65%의 응답자가 그럴 것이라고 답했다. 어떻게 “이웃 국가”가 적대행위를 할 것이라는 전제를 하고 질문 문항을 작성한 것일까?


50여년 전인 1966년 12월 5일, 흐루쇼프 시대의 저명 인사였던 시인 겸 편집자 알렉산드르 트바르도프스키Алекса́ндр Три́фонович Твардо́вский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 세상의 어떤 군대도, 그리고 어떤 전쟁에서도 대조국전쟁 직전과 전쟁 중의 소련군 처럼 많은 지휘관을 잃지는 않았다. 이런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 최전선이 아니라 미치광이 정권의 감옥과 수용소, 고문실에서 전쟁 이전과 전쟁 중에 희생된 사람들도 전선에서 희생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요즘도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하는게 유감스러울 따름이다.


국민이 역사를 잊는 것은 진정한 비극이다. 지배층은 역사를 망각함으로서 절대적인 도덕적 가치와 정신적 유대를 만들려고 한다. 러시아의 통치자들은 역사학과 사회학에서 사용하는 “추모” 개념 조차 정권의 정당성의 수단으로 이용해 국수주의의 도구로 변질시키고 있다. 정권을 비판하면 대조국전쟁에 대한 성스러운 ‘기억’을 비판한다고 몰아간다.


전쟁을 실제로 겪은 세대는 전쟁을 다르게 기억한다. 내 부모님이 전쟁 시절 영국과 미국의 가요를 러시아어로 번안한 것을 친구들과 함께 부르던 것을 기억한다. 부모님 세대는 1945년에 그랬었고 당시에는 붉은군대 합창단도 번안곡을 불렀었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이제 거의 사라져간다. 그리고 우리가 동맹국과 함께 싸워 승리했으며, 스탈린 덕분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있었음에도 승리한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줄 사람들도 사라져간다. 스탈린은 1945년 5월의 유명한 기념사에서 승리의 영광을 ‘소련 인민’에게 돌렸다. 하지만 오늘날 스탈린 숭배자들은 이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2017년 1월 6일 금요일

[번역글] 문서보관소의 전투- 러시아의 감춰진 과거를 밝히다

이 글은 작년(2016) 3월 24일 모스크바 타임즈에 실린 피터 홉슨Peter HobsonBattle in the Archives - Uncovering Russia's Secret Past 를 번역한 것 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글이 있었다는걸 너무 늦게 알아서 아쉽습니다. 러시아인들에게 만연한 스탈린 시대에 대한 향수에 대한 비판은 한국 사회에도 어느 정도 시사점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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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보관소의 전투- 러시아의 감춰진 과거를 밝히다

피터 홉슨

1941년, 나치의 기갑사단들은 독일에서 수백마일 떨어진 곳에서 갓 얼어붙은 땅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 육박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공세는 일련의 격렬한 전투 끝에 돈좌됐다. 붉은군대 제316소총병사단의 장병 28명은 독일군의 전차 18대를 격파해 나치의 진격을 좌절시키는데 공헌했지만 모두 산화했고 이 소식은 널리 퍼져나갔다. ‘판필로프의 28인의 근위병’ 이야기는 소련의 상징이 됐다. 소련 전역에서 이들을 기리기 위해 거리의 이름을 바꾸고, 기념물을 세웠다. 이들의 이야기는 모스크바시의 시가市歌에도 실렸다. 학교에서는 아동들에게 근위병 28인의 이름을 가르쳤다.

그런데 작년(2015)에 판필로프의 28인의 근위병 이야기가 논쟁의 대상이 됐다.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장을 오랫동안 지낸 세르게이 미로넨코는 이 이야기가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근거가 되는 문서를 공개했다. 공개된 문서는 28인의 영웅담이 종군기자에 의해 조작된 것임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소련 정부는 사실을 은폐하고 증거를 감추었다. 이 사실이 공개되자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으며 러시아 문화부장관 블라디미르 메딘스키는 미로넨코를 비난했다. 그는 미로넨코가 문서를 주의해서 다뤘어야 하며, 해석은 다른 사람들의 몫이라고 주장했다. 3월 중순에 미로넨코는 좌천됐다. 올해 65세의 미로넨코는 모스크바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직위 변경을 원한 것은 본인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로넨코의 동료들은 분개했다. 이들은 미로넨코가 정부의 새로운 역사관의 희생양이며, 문화부장관 메딘스키는 정부의 역사관을 옹호한다고 주장한다.

진실이 무엇이건간에 미로넨코의 사임은 한 시대의 끝을 상징한다. 그가 국립문서보관소에서 근무한 24년은 러시아 현대사를 관통한다. 그가 근무하기 시작했을때는 소련 전역에서 개방의 물결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은퇴하는 현재는 국수적이고 권위적인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와 소련 역사에 있어 불편한 진실을 은폐하려한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자유화

미로넨코는 모스크바의 소련 과학아카데미의 역사학자로 있으면서 소련의 붕괴를 목격했다. 그는 낡은 이상에 교조적으로 얽매인 맑시스트 동료들이 얼마나 지루한 사람들이었는지 회고했다. 미로넨코는 이 낡은 사상이 붕괴되는 것을 목격했다. 반체제 성향의 인사들은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이용해 사회의 움직임을 주도하려 했으며 공산당 관료들이 숨기고 있는 비밀들을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 미로넨코는 정권의 검열 체계가 점진적으로 와해되는 것을 목격했다. 수십년간 검열의 대상이었던 책들이 출간되었으며 국민들은 스탈린의 탄압과 수용소의 실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1991년 8월 공산주의 강경파의 쿠데타가 실패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움직였다. 보리스 옐친이 집권하자 완전한 투명성이 러시아의 새로운 시대정신이 되었다. KGB와 공산당이 권력을 잃고 소련의 모든 체제가 총체적으로 무너져내리면서 방대한 양의 문헌을 남겼다. 동시에 정부는 과도한 기밀 유지를 폐지하고 문헌을 열람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했다. 대중들은 지식을 원했고 미로넨코는 그것을 제공하는 일을 맡았다. 미로넨코는 1992년 새로운 러시아의 국립문서보관소장이 됐다. 그는 최대한 많은 정보를 대중에게 제공하려고 노력했으며, 언론과 긴밀히 협력하는 한편 수많은 전시회를 기획하고 새롭게 공개되는 문서 목록을 작성했다. 또한 사료에 기반한 수백편의 짧은 TV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핵심은 러시아인들이 ‘팩트’를 직접 대면하도록 하는 것 이었다. “해설보다는 더 많은 문서를 제공하는 것 이었습니다.” 미로넨코는 이렇게 회고했다. “사료가 직접 이야기하도록 하자는 것이죠.” 그는 대대적인 문헌 공개를 감독했다. 1992년 당시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는 자료의 40%가 기밀로 분류되어 있었다. 1993년 한해에만 30여만건의 문서가 기밀해제됐다. 미로넨코는 그것을 ‘문서보관소의 혁명’이라고 불렀다.


제약

그러나 기밀을 해제한다는것은 말이 쉬웠지 실행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한가지 문제는 기밀해제가 정부 고위층에 의해 시작됐다는 점이었다. 1990년대 초에 생산된지 30년이 넘은 문서는 모두 기밀해제하라는 법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절차는 자동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역사가 니키타 페트로프는 이렇게 회고했다. “문헌을 공개하기 전에 수백만건에 달하는 문서들에 전문가 검토와 의견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그 문서를 생산한 부서나 소장하고 있는 부서의 의견을 반영해야 했다. 해당 부서들은 기밀을 유지하는 쪽을 선호했는데, 기밀 정보를 다룰 경우 보너스를 받았기 때문이다. 페트로프는 “정부의 의견을 반영하는 전문가들과 계속해서 싸워야 했습니다. 이들은 전반적으로 문서 공개에 소극적이었으니까요.”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문서 공개 규정이 까다로워지기 시작했다. 1993년에 더 까다로운 기밀해제 절차가 도입되었다. 기존에는 문서보관소의 직권으로 기밀해제를 결정할 수 있었다. 1996년에 ‘국가기밀 수호를 위한 위원회’가 기밀해제를 담당하게 됐다. 이 기구의 명칭은 국가의 방침이 변화했음을 보여주었다. 페트로프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 위원회는 현재 기밀로 분류된 것들을 책임졌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기밀들은 공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위원회는 기밀해제를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한편, 일부 국가 기관들은 기밀해제를 거부했다. 옐친은 러시아의 모든 문서보관소를 국립문서보관소의 미로넨코가 관할하도록 했지만 러시아 외무부와 국방부, 그리고 KGB의 후신인 연방보안국은 예외가 되었다. 이들 기관들은 1990년대 초반에 약간의 자료만 이관한 뒤 1990년대 중반이 되자 문서 공개를 중단했다. 기밀해제에 대한 저항이 강해지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적인 기반이 등장했다. 관계자들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알아야 할 역사는 어떠한 것인가? 영웅적인 이야기인가 아니면 범죄로 가득한 이야기들인가?


이데올로기

옐친 행정부는 이런 문제제기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페트로프에 따르면 1990년대에 권력을 잡았던 자유주의자들은 이 논쟁의 승자가 자신들이라고 생각했다. 러시아의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와 개방의 가치에 대해 스스로 내린 결론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은 틀렸다. 옐친 시대의 혼란과 경제적 궁핍은 민주주의와 러시아 정부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 역사가 알렉세이 마카로프는 러시아인들이 이미 1990년대 초반에 역사적 진실에 대해 진절머리를 냈다고 회고했다. 역사가와 대중을 연결하는 언론인들은 점차 과거사 문제에 대해 침묵하기 시작했다. 공산당 시대의 범죄에 대한 면죄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소련의 과거에 대한 진실이 사라진 자리를 신화와 소련에 대한 향수가 채우려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2000년에 집권하자마자 변화된 분위기를 이용하려 했다. 페트로프는 “러시아 정부는 돌연 러시아와 소련은 역사의 밝은면과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으니 굳이 어두운 면을 부각할 필요는 없다고 선언했습니다.”고 말했다. 역사의 밝은면에 대한 답은 빨리 나왔다. 러시아의 상징으로서, 그리고 소련에 대한 정당화의 일환으로 나치에 맞선 영웅적인 투쟁의 이야기가 다시 힘을 얻었다. 판필로프의 근위대원 이야기 같은 것들이 다시 힘을 얻었다. 스탈린이 나치의 기습 공격을 예측하는데 실패한 것이나, 소련이 히틀러와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것, 그리고 붉은군대가 동유럽에서 저지른 폭력 같은 것은 은폐되었다.

정치인이자 대중 역사서적 저술가였던 블라디미르 메딘스키가 2012년 문화부장관에 임명됐다. 페트로프는 메딘스키의 문화부장관 임명은 반계몽주의의 정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역사가 아스콜드 이반칙은 메딘스키의 역사관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메딘스키는 민간단체인 ‘개방된 러시아’가 주최한 좌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적 진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조국전쟁 당시의 영웅적 행위들을 교회에서 성인들의 삶을 가르치는 것 처럼 대해야 합니다.”

메딘스키는 예산 지원과 발언의 수위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러시아의 예술과 문화, 역사학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메딘스키 휘하의 문화부는 영웅들을 다룬 영화와 전시회가 꾸준히 나오도록 예산을 지원하고 여러가지 후원을 했다. 이러한 것들은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루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지난해에 개봉할 예정이었던 판필로프의 28인의 근위병 이야기였다. 마카로프는 정부의 전략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정부당국이 영광된 역사에 매달리는 이유는 이것 말고는 의존할게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수호하기

역사에 대한 무관심은 비밀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완벽한 환경이다. 대중이 실질적으로 압력을 가하지 않는한 정부 당국은 앞으로도 자료 공개를 막을 것이다.
현재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의 소장 자료중 ‘비밀’로 분류된 것은 5퍼센트에 불과하다. 미로넨코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에서 4~5퍼센트라고 한다. 하지만 국방 및 안보 관계 기관이 소장하고 있는 기밀문서들은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문서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수조자 없다.

30년이 지난 문서를 자동적으로 기밀해제하는 법령은 밥먹듯이 무시된다. 자료 공개를 위한 싸움은 법정으로 옮겨갔지만 관계 기관들은 자료 공개를 거부하기가 일수다. 페트로프는 1940년대 후반에 생산된 문서중 국가 기밀이 아니거나 자료명이 없는 것들을 공개하라는 소송을 냈으나 2010년에 패소했다. 페트로프는 정부 당국이 그들의 정보 통제를 제약하는 선례를 남기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한다.
정보 기구들은 역사적인 문서들이 보복 공격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여지껏 없었다. 마카로프에 따르면 이들 기관들은 과거의 문서에도 현재 사용되는 방식이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이것은 참으로 괴상한 주장이다. 그렇다면 현재 러시아의 보안조직들이 여전히 스탈린의 비밀경찰 NKVD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운영된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소련의 역사는 부분적으로 모호한 부분이 많다. 공산정권 시기의 대외정책의 전모는 여전히 국가 기밀이다. 소련의 정보 조직을 연구하는 페트로프에 따르면 특히 20세기 초~중반에 서구 제국주의 질서를 타도하기 위해 이루어진 사보타지와 체제 전복 공작에 관한 정보가 특히 비공개라고 한다. 러시아 정부는 검열을 통해 공산당이 중동과 라틴 아메리카의 테러 조직을 지원한 사실과, 붉은군대가 나치를 물리치면서 동유럽을 장악한 과정에 관한 정보를 차단하고 있다.
역사가들은 아직도 1940년 카틴에서 2만명의 폴란드 장교들을 학살한 사건의 개요 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1990년에 수행한 카틴 학살에 대한 조사 자료를 2004년에 다시 기밀로 분류했고, 학살 피해자들의 개인 정보 공개도 중지했다. 러시아 정부가 이러는 이유가 프로파간다 목적 때문인지, 아니면 책임 소재를 밝히지 않으려는 것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가 정보를 완전히 공개할 생각이 없는 것은 확실하다.

결국 판필로프의 28인의 근위병 이야기로 돌아가게 된다. 페트로프는 “러시아도 변해가고 지배 엘리트들의 시각도 변해갑니다. 하지만 미로넨코만은 변하지 않았지요”라고 말했다. 현재 미로넨코는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의 연구과장이다. 역사적인 기록물을 널리 공개하려는 그의 열정은 여전하다. 사실 미로넨코는 여전히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더 많은 문서들을 공개하고 있다. 최근 미로넨코는 스탈린에 관한 단행본과 나치에 협력한 부역자들에 대한 단행본을 내놓았다. 미로넨코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사람들의 관점은 다양합니다. 이 다양한 관점들을 모두 침울한 색깔로 물들일 수는 없지요. ”

하지만 여전히 러시아 사회의 일각에서는 자국의 역사를 외면하려는 경향이 있다. 미로넨코는 이 문제점을 이렇게 분석한다. “예를들어 스탈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핵심은 사람들이 스탈린에 대해 모르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 당시를 잊으려 한다는 것이죠. 스탈린을 옹호하는 것은 항의하는 목소리입니다. 부정부패와 공정하지 못한 사법부, 관료제에 항의하는 것이죠. 사람들은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만약 스탈린이 지금 살아있다면 너희 썅놈의 새끼들에게 본때를 보여줄텐데!”

그는 잘못된 세계관을 비판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코메르산트의 기자 한명은 미로넨코를 인터뷰하면서 자신은 판필로프의 근위대원들을 영웅으로 생각하면서 자라왔으며 지금에 와서 견해를 바꾸기는 싫다고 말했다. 미로넨코는 딱 잘라 이야기 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여기 사료가 뒷받침 하는 역사적 진실이 있습니다. 나머지는 심리학자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죠.”

2014년 6월 23일 월요일

Russia’s Struggle for Military Reform: A Breakdown in Conversion Capabilities

지난번에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7호 1권의 러시아 국방개혁특집을 간략히 소개한 일이 있습니다. 27호 1권의 특집에는 전반적으로 러시아의 사회경제적 한계 때문에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글이 많이 실렸습니다. 27호 1권은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이 있기 전에 기획되었기 때문에 최근의 사태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할 것인지가 궁금했는데 바로 27호 2권에 최근의 사태를 반영한 글이 한편 실렸습니다. 필자는 조지타운 대학교의 제임스 마샬James A. Marshall이고 제목은 “Russia’s Struggle for Military Reform: A Breakdown in Conversion Capabilities”입니다. 전반적인 내용은 27호 1권의 특집과 논조가 유사합니다. 러시아의 사회경제적 토대가 허약하기 때문에 러시아군의 국방개혁의 전망은 밝지가 못하다는 것 입니다.

필자가 첫번째로 지적하는 것은 인구와 예산과 같은 전략적 자원 문제입니다. 러시아군은 아직까지도 모병제로 전환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징집병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데 러시아의 인구가 줄어드는 동시에 병역기간이 단축되어 징집병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2002년에는 335,000명의 징집병이 필요했는데 2009년에는 병역기간의 단축 때문에 필요한 징집병의 숫자가 625,0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문제는 같은 기간 동안 러시아의 인구가 1억4520만명에서 1억4200만명으로 격감했다는 것 입니다. 병력자원이 부족해서 징집병의 숫자만 채워넣는 형편인데 한해 징집되는 병력 중에서 실제로 군복무에 적합한 건강상태를 가진 인원은 전체의 40~45%수준이라고 합니다. 체력은 물론 다른 질도 크게 떨어지는데 징집병 중 상당수의 문맹자, 알콜중독자, 범죄자가 있다고 합니다. 징집자원의 낮은 질과 함께 여전이 열악한 군인에 대한 처우도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필자가 적용한 이론적 틀은 쉴즈Shils와 재너위츠Janowitz가 2차대전기 독일군을 연구할 때 사용한 좀 오래된 기준이긴 합니다만 ‘군생활에 대해 느끼는 자부심’, ‘상관과의 관계’와 같은 기준은 현대 러시아군에 적용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공식통계를 인용한다 하더라도 러시아군의 탈영율은 평화시라는 것을 감안했을때 꽤 높은 편이며(공식통계에 따르면 2,265명) 필자는 한발 더 나가 실제 탈영율이 공식통계를 상회할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러시아 사회에서 극우주의적인 경향이 두드러지곤 있다 해도 소련 붕괴이후로 지속된 민족주의의 약화도 군의 사기를 유지하는데 있어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봅니다.
국방예산의 경우 푸틴의 집권이후 급증해서 현재는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로 많은 예산을 지출하고 있습니다. 2007년부터 2011년까지의 통계를 기준으로 하면 국가총생산의 3.9%를 국방예산에 투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부정부패 때문에 증액된 예산의 상당수가 횡령되고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 군검찰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국방예산의 20%가 횡령되고 있고 비공식 통계로는 30% 가까이 횡령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또한 국방예산의 40%가 핵전력을 유지하는데 소모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 때문에 재래식전력의 현대화에 돌아갈 수 있는 기회비용이 줄어들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다음으로는 러시아의 군수공업이 비효율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 연구개발 기반이 붕괴되어 이것을 회복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데다가 러시아의 군수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전체 제조업 종사자의 20%에 달해 정치권에 대한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점이 주된 요인이라고 합니다. 러시아 군수기업들이 보유한 설비의 70%는 사용한지 20년이 넘은 것이기 때문에 노후화가 심해서 생산 효율을 떨어트리는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두번째로는 러시아의 안보환경과 이에 대한 대응 능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러시아 내부의 비대칭 위협, 중국의 군사적 부상, 그리고 숙적(!)인 NATO의 존재 등 세가지 요인을 지적합니다. 러시아 내부의 비대칭 위협으로는 체첸 민족주의자들의 테러활동을 꼽고 있습니다. 필자는 다양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러시아의 경제수준으로 유지가 가능한 소규모의 정예 직업군인 위주의 군대로 변화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규모 군대가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위협은 러시아 내부의 비대칭 위협 정도일 것이라고 봅니다. 반면 숫적으로 우세한 중국군이나 기술적으로 우세한 NATO에 대한 대응은 핵전력이 중심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문제는 러시아가 추구하는 군사력 감축과 정예화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점 입니다. 푸틴은 2000년대 초에 국방개혁의 일환으로 부사관의 정예화를 추진했지만 이것은 푸틴이 다시 대통령을 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세르듀코프가 국방부장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 추진한 장교단 감축이 완료되지 못한 이유도 러시아군 부사관단의 수준이 여전히 낮기 때문에 서방국가에서는 부사관의 담당하는 임무를 담당하기 위해 장교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러시아 군부가 여전히 전면전에 대비한 대규모의 병력동원을 염두에 두고 있는 점도 장교단 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봅니다. 필자는 세르듀코프 시기에 강하게 추진된 병력감축과 군구조 개편에 대해서도 미심쩍은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군구조 개편에 대응하는 교리상의 혁신이 있었느냐 하는 것 입니다. 얼마전에 있었던 크림 반도 병합에 대해서도 러시아군의 개혁이 성공한 증거로 보기에는 어렵다는 견해를 보여줍니다. 먼저 우크라이나군은 조지아군 보다도 전투의지가 약해 싸움 자체를 회피했으며, 크림 반도에 투입된 부대는 러시아군의 최정예인 특수부대와 공수부대였다는 점 때문입니다. 군구조 개편의 대상이었던 지상군의 대부분이 아직 전투를 통해 능력을 검증받지 못했다는 필자의 지적은 타당합니다. 필자는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군의 전투 능력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크림반도 합병 이후 우크라이나 사태에 개입을 주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번째로는 러시아가 국가적인 역량을 국방개혁으로 전환할 수 있는 역량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먼저 러시아의 취약한 민군관계를 지적합니다. 그가 주목하는 부분은 세르듀코프의 해임입니다. 그 원인이 푸틴이 장교단 감축과 같은 급격한 국방개혁에 저항하는 군부 보수파의 손을 들어준 것에 있다는 것 입니다. 필자는 군부가 강력하게 저항할 수 있는 원인을 스탈린 사후 문민통제가 약화되면서 군사적 전문성을 가진 군부가 강력해진 것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군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고르바초프 집권기에는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이 더욱 강화됐고 소련 붕괴 이후의 러시아에서는 이것이 더욱 고착화 되었다는 것 입니다. 필자는 헌팅턴의 민군관계 모델로 이것을 설명하는데 러시아군의 문민통제 유형을 주체적 문민통제Subjective Civilian Control가 아니라 전문성을 가진 군부가 강력한 독립성을 가지는 객체적 문민통제Objective Civilian Control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군은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해 군부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고 있으며 군부의 이해관계는 대규모 전면전을 대비해 방대한 군조직을 유지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군장교단은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징집병에 의존하는 현재 체제를 유지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의 징집병들이 군지휘관들의 사적인 사업에 노동력으로 활용된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지요. 반면 자원병은 지휘관이 사적으로 착취하기 곤란한 대상입니다. 실제로 최근 러시아군에서는 징집병의 비율이 오히려 높아졌다고 합니다.
또한 러시아가 여전히 NATO의 위협에 대응하는 것에 비중을 두는 점도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NATO에 대응하기 위해 핵전력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붙다 보니 재래식 전력을 개선하는데 투자할 기회비용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 입니다. 필자는 러시아의 잘못된 위협 인식이 국방개혁의 걸림돌이라고 비판합니다.
마지막으로는 러시아의 군사교리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최근 전쟁의 중요한 특성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기는 하지만 보수적인 군부가 여전히 대규모 전면전을 선호하고 있어서 군사교리의 전환이 어렵다는 것 입니다. 필자는 최근(2010년) 러시아의 군사교리가 신속전개능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전시동원을 위한 대규모의 예비군 확보를 명시하면서도 두가지 상충되는 목표에 우선순위를 부여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르듀코프 시기의 군병력 감축과 군구조 개혁에 관련된 내용도 거의 반영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민간 관료들이 원하는 목표와 군부의 요구가 어정쩡하게 반영된 타협물이라는 것 입니다.

러시아군의 개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미국과 유럽의 관찰자들이 바라보는 시각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의 주장을 전부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위험합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더욱 악화되어 러시아군이 실전을 치르게 된다면 어느 쪽의 주장이 맞는 것인지 확인할 수 있겠지요. 관찰자인 제3자의 관점에서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관망하는게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2014년 3월 21일 금요일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7권 1호 특집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의 최신호인 제27권 1호를 훑어보는 중 입니다. 최근 러시아가 추진하고 있는 국방개혁에 대한 특집호로 구성되어 제2차 세계대전사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는게 유감입니다. 3월에 출간되다 보니 최근 전개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문제는 다루지 못했지만 이것은 아마 여름에 나올 제2호에서 다루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27권 1호에는 다음과 같은 일곱편의 논문이 실려 있습니다.


Roger N. McDermott, “The Brain of the Russian Army: Futuristic Visions Tethered by the Past”

Jacob W. Kipp, “‘Smart’ Defense From New Threats: Future War From a Russian Perspective: Back to the Future After the War on Terror”

Daniel Goure, “Moscow’s Visions of Future War: So Many Conflict Scenarios So Little Time, Money and Forces”

Timothy Thomas, “Russia’s Information Warfare Strategy: Can the Nation Cope in Future Conflicts?”

Alexander Golts, “Reform: The End of the First Phase—Will There Be a Second?”

Keir Giles, “A New Phase in Russian Military Transformation”

Dmitry (Dima) Adamsky, “If War Comes Tomorrow: Russian Thinking About ‘Regional Nuclear Deterrence’”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논문을 조금 소개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논문인 로저 맥더못Roger N. McDermott의 “The Brain of the Russian Army: Futuristic Visions Tethered by the Past”는 러시아의 국방개혁이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개혁의 몇가지 측면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비판적인 경향이 강한 글 입니다.
 필자는 근본적으로 러시아 국방부의 기획 수립 능력 자체에 부족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특히 소련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러시아군의 폐쇄성과 형편없는 통계 조사 능력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사례의 하나로 러시아 국방부가 군 연금 대상자 통계조차 똑바로 내지 못하고 있는 점을 지적합니다. 2006년에 러시아군이 작성한 통계에서는 2011년까지 연금 지원 대상자가 24,000명 감소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2011년이 되자 연금 지원 대상자는 45,000명이 더 늘어났다고 합니다.1) 필자는 빈약한 통계 조사 능력과 같은 부실한 기반에 의거해 수립하는 계획이 제대로 추진 될 수 있을지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통계 자료를 획득할 수 없으니 연구조사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타당한 결론입니다.
 러시아군의 행정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례로 드는 것 중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황당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러시아의 국방개혁의 목표 중 하나는 장교단을 축소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2010년까지도 감축 목표에 전역자로 인한 자연 감소를 반영하지 않고 있었다고 합니다.2) 이쯤 되면 주먹구구식이라고 비난을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필자는 국방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기획 능력을 결여한 러시아 국방부가 러시아군 총참모부에 부담을 떠넘기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그러한 사례 중 하나로 병력 운용의 문제를 들고 있습니다. 러시아 육군이 사단체제에서 여단체제로 개편되면서 전투 준비태세가 강화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 12개월 징집병과 지원병으로 구성된 러시아군의 전투 준비태세는 의심스러운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필자는 러시아 국방부가 기획능력의 난맥상을 감추기 위해서 새로운 여단체제의 효율성을 과대선전하고 있다는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3)
 이같은 문제점은 장교에 대한 인사 정책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필자는 러시아군이 2008년에 장교의 숫자를 35만5명에서 15만명으로 감축하기로 한 결정이 체계적인 기획의 결과물이 아니라 단지 “외국 군대의 장교 비율을 참고해서” 장교의 숫자를 총 병력의 15%로 한다는 목표에 따라 설정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15만명으로의 감축을 시작한 2008년 부터 장교 감축의 목표를 22만명으로 재조정한 2011년 까지 장교를 감축하면서 일어난 주먹구구식의 행정 사례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읽다보니 너무 황당한 내용이라서 제가 오독을 한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장교 숫자를 감축해야 한다는 이유로 2년 동안 간부후보생을 받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애교일 정도입니다.4) 그리고 육군을 여단 체제로 개편하면서 이에 걸맞는 장교 교육 체계는 도입되지 않았다는 점을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실제로 2009년도에는 러시아군 총참모장이 여단장 보직에 대령을 임용하기 위해 여러명의 대령을 면접한 결과 후보자로 올라온 대령의 대부분이 여단을 지휘할 능력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5) 제가 조지아 전쟁 시기에 썼던 “소련-러시아 장교단의 붕괴와 그 후유증, 1987~”이라는 글에서 이야기 했던 것 처럼 여전히 장교단 붕괴의 여파를 회복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다음으로는 러시아군의 여단 편제 개편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는데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문제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지상군의 여단 대부분이 편제 미달이다.
2. 지원병과 징집병에 혼재되어 있어 전투 준비태세가 부족하다.
3. 대부분의 여단이 여전히 구식장비로 무장하고 있으며 신형장비의 도입이 지지부진하다.
4. 장교단은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다.
5. 지휘부의 능력이 부족하며 특히 대대급으로 내려가면 문제가 심각하다.
6. 유능한 부사관이 부족하다.6)

 2011년에 편성된 우주-방공군Воздушно-космическая оборона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판을 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제가 정말 모르는 부분이니 생략하겠습니다.(;;;;)


 두번째 논문으로 실린 제이콥 킵Jacob W. Kipp“Smart’ Defense From New Threats: Future War From a Russian Perspective: Back to the Future After the War on Terror”는 소련 붕괴이후 러시아 군부의 미래전에 대한 전망을 소개하는 글입니다. 비록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 이전에 쓰여진 글이기는 하지만 우크라이나 사태를 접하고 보니 이해가 잘 가는 글 입니다. 냉전 이후 러시아를 둘러싼 안보정세의 변화를 러시아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잘 설명해 주는 글 입니다. 이 글은 별도로 소개하는게 좋을 것 같은데 언제 번역할 시간이 나면 좋겠군요.


세번째 논문인 다니엘 고어Daniel Goure의  “Moscow’s Visions of Future War: So Many Conflict Scenarios So Little Time, Money and Forces”도 꽤 재미있습니다. 사실 이 글을 읽다 보면 러시아라는 나라는 석유를 가진 북한 같다는 인상을 받게됩니다(.....) 이 글에서는 러시아의 안보 위협에 대한 인식과 이에 대한 대응, 그 한계에 대해 평가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소련이 붕괴한 이후 경제적, 군사적인 몰락에 따른 트라우마로 러시아 지도층이 안보문제에 대해 매우 비관적이며 때로는 피해망상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진단합니다. 이때문에 20년이 지난 지금도 기존의 세력권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고 보는 것 입니다.7) 이러한 설명을 받아들이면 현재 러시아 지도층의 생각은 1차대전 직후의 독일 지도층과 유사해 보이기도 합니다. 필자는 러시아 지도층은 나토의 동진을 러시아에 대한 최대의 안보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과거 소련의 세력권에 있던 지역들이 러시아와 거리를 두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게다가 미국과 비교했을때 상대적으로 러시아의 국력은 열세하고 경제력과 인구 같은 치명적인 문제들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러시아 내부에서는 미국의 궁극적인 목표가 러시아를 미국 경제에 종속된 자원 수출국으로 전락시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상당하다고 지적합니다. 푸틴 집권 이후 러시아 지도층이 보여주고 있는 강경한 태도는 러시아가 처한 전략적인 열세를 정치-군사적으로 만회하려는 움직임이라는 것 입니다.8)
 그리고 이와 같은 맥락에서 러시아의 핵전력이 중요하게 다루어 집니다. 전략핵무기는 러시아가 서방, 특히 미국과 전략적으로 경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9) 이것은 전략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전술적인 측면에서도 그렇습니다. 1980년대 이래로 미국에게 큰 격차로 뒤지고 있는 재래식 정밀유도무기의 열세를 메울 대안이 바로 전술핵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러시아군은 여전히 전술핵 사용을 상정한 훈련을 활발히 실시하고 있다고 합니다.10) 또한 핵무기는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에 대항할 경제적인 수단이기도 합니다. 푸틴이 밝힌 것 처럼 러시아가 자체적으로 미사일방어체계를 구축하지 않고 미국과의 핵경쟁을 하려면 더 많은 핵투발 수단을 보유하는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11)
 재래식 전쟁에 있어서는 러시아가 “세력권”으로 인식하는 지역에 대한 미국-나토의 제한적인 침공을 저지하는 양상의 분쟁을 예상하는 모양입니다. 동시에 서방과의 재래식 전력 격차를 줄이기 위해 네트워크 중심전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테러전과 사이버전에 관한 내용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분야가 아니어서 생략합니다.


 네번째 글인 티모시 토마스Timothy Thomas“Russia’s Information Warfare Strategy: Can the Nation Cope in Future Conflicts?”는 러시아의 정보전, 사이버전 능력에 대해 다루는 부분인데 아직 읽지 않았습니다.


 다섯번째 글은 알렉산더 골츠Alexander Golts의 “Reform: The End of the First Phase—Will There Be a Second?”입니다. 이글은 메르베데프가 집권하던 시기에 진행된 군사개혁을 평가하고 현재 푸틴 정권하에서 진행되는 군사개혁을 전망하는 내용인데 첫번째 글과 비슷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 글에서 지적하고 있는 러시아군의 문제점은 첫번째 글에서 지적했던 내용들과 겹치는게 많습니다.
 먼저  현재 러시아의 징병제에 대한 비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러시아는 지속적인 인구 감소로 징집 가능한 인적자원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만18세의 남성은 2011년에 648,000명이었지만 2015년에는 592,000명으로 줄어들게 된다고 합니다. 인구 구조상 유지하기가 곤란하다는 이야기지요. 게다가 징집 기간이 12개월 밖에 안되는 것도 문제로 꼽고 있습니다. 6개월 단위로 신병들이 교체되는데 이런 상태로는 임무를 수행하는데 지장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지적입니다. 게다가 러시아 정부와 군부에서는 징집병과 지원병의 비율을 조정하는 문제에 있어 상당한 혼란을 보여왔습니다. 장기적으로 지원병의 비율을 늘릴 계획이라곤 하지만 세르듀코프가 국방부 장관으로 있던 시기에 보여준 난맥상을 볼 때 계속해서 징집병 위주의 군대로 갈 수 도 있다는 지적입니다.12) 그리고 러시아의 경제력에 대한 우려도 있습니다. 필자는 현재 러시아의 경제 수준으로는 쇼이구가 국방부장관에 임명된 뒤 제시한 71만명 수준의 병력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가 현재 GDP의 3~4%를 국방비에 투입할 경우 적정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는 병력을 50~60만명 수준으로 평가합니다.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이 경제력에 비해 과도한 병력 규모를 유지하려 하는 이유는 고위 장교단의 관료주의적 발상에 기인한다고 봅니다.14)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군요. 그리고 지원병에 대한 처우도 썩 좋지 않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425,000명의 지원병을 확보하는 계획도 실패할 것으로 봅니다. 실제로 2003~2008년 기간 동안 추진된140,000명의 지원병을 확보한다는 계획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러시아의 지원병 중에서 3년간의 복무기간을 마친 뒤 복무기간 연장에 동의하는 인원은 전체의 3분의 1남짓에 불과하다고 합니다.15) 장교와 부사관의 자질 향상 및 충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민군관계에 대한 지적도 있는데 이건 이야기가 더 길어질 것 같으니 생략하겠습니다.
 

 여섯번째 글인 케어 자일스Keir Giles “A New Phase in Russian Military Transformation”는 맥더못이나 골츠와 달리 러시아의 국방개혁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2008년 부터 2010년까지 상당한 혼란이 있었지만 2011년 부터 안정적인 궤도에 들어갔다고 보고 있으며 현재의 푸틴 정권도 국방개혁에 힘을 실어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러시아의 방위산업과 무기 획득 체계의 개선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다만 러시아군의 병력 구조 문제나 군 간부단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언급이 없다는 점이 조금 의문입니다.


 마지막 글인 드미트리 아담스키Dmitry (Dima) Adamsky“If War Comes Tomorrow: Russian Thinking About ‘Regional Nuclear Deterrence’”는 아직 읽지를 않았습니다.


 꽤 흥미로운 특집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현재의 우크라이나 사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글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올 여름에 나오게 될 27권 2호에서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크게 다루지 않을까 싶으니 목을 빼고 기다려 봐야 겠습니다.


1) Roger N. McDermott, “The Brain of the Russian Army: Futuristic Visions Tethered by the Past”,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7-1(2014), p.16.
2) ibid., p.18.
3) ibid., p.19.
4) ibid., p.25.
5) ibid., p.27.
6) ibid., pp.29~30.
7) Daniel Goure, “Moscow’s Visions of Future War: So Many Conflict Scenarios So Little Time, Money and Forces”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7-1(2014), p.69.
8) ibid., pp.71~72.
9) ibid., p.75.
10) ibid., p.81~82.
11) ibid., p.85~86.
12) Alexander Golts, “Reform: The End of the First Phase—Will There Be a Second?”,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7-1(2014), pp.134~135.
13) ibid., p.135.
14) ibid., p.136.
15) ibid., p137.

2014년 3월 12일 수요일

Obama’s Not Carter, He’s Eisenhower

러시아의 크림 반도 침공으로 국제정세가 뒤숭숭합니다. 뭐, 제가 이쪽에 대해 아는건 별로 없지만 워낙 중요한 사태다 보니 시간이 나는대로 외신 보도들을 챙겨보고 있습니다. 물론 정보량이 방대하고 현안에 대해 아는게 적다 보니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많긴 합니다만. 개인적으로 현재 미국의 태도에 다소 불안감을 느끼는 편인데 제 시각과는 방향이 다른 글을 한편 읽게 되어서 번역을 해 봅니다. 포린 폴리시에 제임스 트라웁James Traub이 기고한 Obama’s Not Carter, He’s Eisenhower라는 글인데 “푸틴이 우크라이나에서 이기는 게 뭐 대수냐!”는 담대한 견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뭐, 시각에 따라서는 정신승리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미국의 입장에서 느긋하게 대응하자는 이야기라서 우리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편하게 읽히긴 합니다만 이런 시각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오바마는 카터가 아니다, 그는 아이젠하워다.

그리고 오바마는 서방이 전쟁에 승리할 것을 알기 때문에 푸틴이 전투는 승리하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


제임스 트라웁

헝가리 정부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한 직후인 1956년 11월 4일, 소련군의 전차들이 부다페스트로 진격했다. 헝가리의 봉기 군중이 마지막으로 보낸 절망적인 내용의 전문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져 있었다. “그들이 지금 막 미군이 한두시간 내에 부다페스트로 올 것이라는 소문을 전해왔다. … 우리의 상황은 나쁘지 않고 싸우고 있는 중이다.” 미군은 부다페스트로 가지 않았다. 아이젠하워는 소련을 동유럽에서 몰아내겠다고 호언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헝가리의 봉기는 분쇄되었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지도부는 아이젠하워가 소련에게 굴종한다고 비난했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인 애들레이 스티븐슨Adlai Stevenson은 아이젠하워가 “자유국가들의 동맹이 존립에 위협을 받을 정도로 몰고 가고 있다”는 주장을 하기까지 했다.

러시아가 또 다시  인접국가를 침공하자 미국 대통령도 또 다시 우유부단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버락 오바마는 아이젠하워와 같은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오바마는 쉽게 재선된 아이젠하워가 받았던 비난 보다 더 심한 강도의 비난을 받고 있다. 푸틴이 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를 침공한데 대해 오바마가 신중한 태도를 취하자 그가 나약한 의지를 가진 인물이며, 전 세계의 악당들은 오바마의 불안정한 리더쉽을 보면서  미국의 보복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평이 더욱 더 퍼지고 있다. 공화당의 상원의원 린지 그레이엄Lindsey Graham은 얼마전 트위터에 2012년 미국 외교관 크리스 스티븐스Chris Stevens가 리비아에서 살해됐을때 리비아를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공격적인 행동”이 초래됐다고 썼다. 그레이엄은 당파적인 입장에서 불평을 늘어놓은 것이지만, 많은 전문가들이 오바마를 비판하는데 동참하고 있다. 수많은 비난에 시달리고 있는 나의 동료 데이빗 로트코프David Rothkopf는 오바마와 지미 카터를 비교하는 글을 쓰면서 허약한 대통령의 기준으로 “카터를 꼽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했다.

여기에 인간 관계와 유사한 점이 있다. 악당들이 말을 알아듣게 하려면 위협을 가하는 수 밖에 없다. 악당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보복을 받을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면 행동을 멈출 것이다. 내 동생을 때리면 나를 상대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국제관계의 영역에서 럼즈펠드의 그 유명한 “나약함이 도발을 불러온다.(Weakness is provocative.)”는 격언의 바탕이 되었다. 럼즈펠드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 중동의 다른 모든 악당들에게 경고가 될 것이며 이런 악당들이 미국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을 재고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럼즈펠드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이라크 침공의 경험을 통해 호전적인 태도가 나약함 보다도 더 도발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개인의 생활이나 국제 관계를 막론하고 힘을 과시하고자 하는 충동은 참기가 힘들다. 악당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것은 멋지게 보이며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악당은 거들먹 거리며 걸어다니고 약한 사람들은 움추려든다. 우리는 잔인한 짓만 빼고 악당들 처럼 자유롭기를 갈망한다. 월터 미티Walter Mitty처럼 말이다. 하지만 당신이 미국처럼 놀이터에서 가장 잘나가는 골목대장이라면 악당들의 이런 행동을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정의의 이름으로 주먹을 휘두르는 빅 브라더에 짜릿함을 느낀다. 미국인들이 “고르바초프! 베를린 장벽을 없애버려요!”라고 절규하도록 만든 로날드 레이건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을 평화적으로 해체하게 만든 그의 후임자 조지 부시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세계는 부시에게 더 많이 감사해야 한다.

아이젠하워는 악당들의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모두의 파멸을 불러올 수 도 있을 정도의 위협을 가해야 할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적국이 우리가 신경쓰는 것 이상으로 희생양에게 신경을 쓰고 있을 경우가 그러했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헝가리를 잃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푸틴이 친서방적인 우크라이나 정부에게 크림 반도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믿는것과 같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크림 반도는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영역이었으며 로시아 흑해함대의 기지였으며, 오랫동안 부동항을 갈망해온 러시아를 만족시키는 지역이다. 푸틴 같은 깡패(thug)는 현재와 같은 수준으로 위협을 받는다면 그가 할 줄 아는 유일한 방식으로 대응할 것이다. 야만적인 폭력말이다. 오바마가 보다 단호한 태도를 취한다면 푸틴이 손을 뗄 것이라는 생각은 공상에 불과하다. 이건 마치 “누구 때문에 중국에서 패배한 것이냐?”와 같은, 미국의 지도자들이 나약해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승리를 안겨줬다는 비난과 같은 것이다. 요즘에는 이런 식이다. “누구 때문에 벵가지에서 패배한 것이냐?” 아니면 시리아 라던가.

아이젠하워는 결국에는 소련이 서방의 무덤 위에서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일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오바마 또한 푸틴에 대해서 아이젠하워가 소련에 대해 가졌던 것과 같은 생각을 하는게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 오바마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푸틴이 탁월한 전략가라고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다. 포린 폴리시의 편집위원인 윌 인보든Will Inboden은 오바마의 행동은 어린아이들이 보드게임을 하는 수준인데 푸틴은 위험을 무릅쓰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푸틴은 러시아를 핵무기를 가지지 못한 사우디 아라비아로 만들었을 뿐이다. 러시아는 땅에서 캐내는 것 말고는 수출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는 산유국에 불과하다. 푸틴이 잭나이프를 가지고 장난질을 하는 수준이라면, 나머지 세계는 레이저를 사용하는 법을 익히고 있는 수준이다.

오바마의 대외정책 수행을 카터와 같다고 이야기 하지만 아이젠하워와도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오바마처럼 전임자로 부터 물려받은 방대한 국방 예산이 국가 경제에 심각한 부담을 준다고 생각했다. 항상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아이젠하워는 적은 수단으로 더 많은, 혹은 사용하는 수단 만큼의 결과를 얻어내려고 노력했다.(스티븐 세스타노비치Stephen Sestanovich는 맥시멀리스트Maximalist에서 아이젠하워와 오바마를 “긴축” 대통령으로 묘사했다.)  내가 지난주에 기고한 글에서 쓴 것 처럼, 오바마가 대외 정책에서 추구하고 있는 가장 큰 목표는 국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테러와의 전쟁을 포함한 지난 정권에서 이어진 분쟁들을 단계적으로 중단하는 것이다.

오바마가 대외정책을 수행하는데 있어 계속되는 문제는 오바마의 정책에 결단성이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갈수록 외골수로, 상상력이 결여된 축소지향적인 방향을 추구하는데 있다. 오바마는 임기를 시작할 때 핵무기 비확산과 기후 변화와 같은 국제적인 문제에 관한 국제 질서를 재편하겠다는 원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오바마는 전임 대통령때 부터 시작된 통제할 수 없는 분쟁을 중단할 수 없으며, 미국 국민들은 그의 개혁안에 별 관심이 없다는 점을 알게됐다. 결국 오바마의 열정은 사그러들었고 그의 (사고:역자) 지평은 줄어들었다. 그대신 오바마는 미국이 세계 각지의 분쟁에서 확실하게 거리를 두는 것을 선택했다. 무엇보다도 시리아가 그런 경우였다. 오바마는 시리아에서 자행되는 최악의 만행에 대해 단호해 보이는 제스쳐를 취하는 정도에 만족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행동은 나쁜 일이다. 한때 오바마가 제창했던 희망과 그가 안주하기로 선택한 편안한 장소와의 거리는 아이젠하워의 말뿐인 반공주의와 그의 실용적인 타협안 사이의 거리보다 더 멀다. 백악관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진보센터Center for American Progress의 브라이언 카툴리스Brian Katulis는 최근 오바마가 더이상 미국 국민들에게 국제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아마도 오바마는 국제 문제에 대한 논의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듯 싶다.

나는 오바마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오바마가 하는 일이 훌륭하다는 것을 모른다고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바마의 실패는 그의 불안함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려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오바마가 초기 부터 러시아에 대해 보다 대결적인 정책을 취했어야 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오바마가 그렇게 했다면 그는 군비통제나 아프가니스탄, 이란 문제에서 그랬던 것 처럼 동맹국들의 협력을 이끌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푸틴이 꿈꾸는 것 처럼 미국과 러시아가 동등한 입장에서 대결하는 것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상황이 초래되었다면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유럽에 통합되는 것 같은 용납할 수 없는 위협에 직면하여  러시아에서 민족주의적인 여론이 거세지도록 선동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오바마가 2년 전에 시리아의 반군을 훈련시키고, 군자금을 지원하며, 장비를 제공하는 것을 승인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오바마가 시리아 문제에 개입하지 못한 것이 그의 임기 내내 오점으로 남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나는 오바마가 푸틴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리아인들을 압제로 부터 구출하기 위해 개입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오바마는 몇가지 제제조치와 올 6월에 소치에서 개최될 예정인 G-8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취소하는 등의 조치를 결합하여 러시아를 고립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이 계속해서 푸틴 개인에 대한 숭배에 붙들려 있는 이상 오바마가 취하게 될 조치들은 별다른 효과가 없을 것이다. 러시아가 고립된다면 푸틴의 입지만 강화될 것이다. 동구와 서구가 대립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듯 보인다. 그러나 러시아가 동맹국이나 적절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대결은 한쪽에 일방적일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냉전 당시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 하더라도 서구는 꾸준한 인내심을 가지고, 미래는 자유민주주의의 편에 있다는 신념을 확고히 하여 대결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 한 것 처럼 저는 이런 시각을 썩 달갑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장기적으로 미국이 유리할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단기적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게 될 국가가 우크라이나 하나로 끝난다는 보장은 없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했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벌어진 전쟁에서 무너진 작은 국가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아마 올 여름쯤에 나올 국제관계나 군사전략 관련 저널들이 이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룰테니 그때쯤 잘 정리된 재미있어 보이는 글들을 더 번역해 볼까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Journal of Strategic Studies나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에서 특집을 내줬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