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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4일 금요일

중소분쟁 당시 소련군의 T-62 회수/파괴작전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0-1에 실린  D.S. Riabushkin와 V.D. Pavliuk의 글 “Soviet Artillery in the Battles for Damanskii Island”를 읽다 보니 127쪽에서 130쪽 까지 중소분쟁 당시 중국측이 소련군의 T-62를 노획한 경위가 짤막하게 실려있었습니다. 회수작전 자체가 상당히 재미있게 전개되었는지라 간단히 소개를 해 볼까 합니다.

1969년 3월 15일, 이만 국경수비대의 지휘관 레오노프(Д. В. Леонов) 대령은 다만스키 섬의 중국군 방어진지 후방으로 침투하기 위해서 제135 차량화소총병 사단 전차대대에서 1개 전차소대를 차출합니다. 이 대대는 T-62를 장비하고 있었습니다. 레오노프 대령은 4대의 T-62 중 545호차를 타고 선두에서 서서 전진했습니다. 그런데 중국군도 아무 생각없이 후방을 비워놓은 것은 아니었고 레오노프 대령은 선두에서 전진하다가 중국군이 얼어붙은 우수리강의 빙판에 구축한 지뢰밭에 걸려서 전차를 잃게 됩니다. 그리고 탈출과정에서 레오노프 대령과 545호차의 장전수가 전사합니다. 지휘관인 레오노프 대령이 전사하자 나머지 세대의 T-62는 퇴각했습니다.

문제는 T-62가 신형전차로 중국군의 손에 넘어가서는 안되는 존재였다는 점 입니다. 소련군은 즉시 지뢰밭에 격파되어 방치된 545호차를 회수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합니다. 중국군이 545호차를 견인해가려는 것은 뻔한 것 이었기 때문에 작전은 최대한 빨리 진행되어야 했습니다. 원래 작전은 3월 16일에 실시되어야 했으나 놀랍게도 이날 지방선거가 열려서 투표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작전이 연기되었습니다!

소련군의 회수작전은 선거 다음날인 3월 17일 개시되었습니다. 중국군은 소련군의 기동을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의 작전 개시와 함께 포격을 시작했습니다. 소련군은 이에 대해 제13독립 로켓포대대의 BM-21 로켓포와 제378포병연대의 M-30 122mm포 24문과 D-1 152mm포 12문을 동원해 반격했습니다. 이중 제3대대 7, 8포대의 152mm 포는 중국군이 투입한 4대의 ISU-122를 제압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소련군의 포격은 효과적이어서 중국군의 ISU-122 한대가 완파되었고 다른 한대도 손상을 입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나머지 두대의 ISU-122는 근처의 숲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정작 견인작전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545호차에 견인 케이블을 연결하려는 과정에서 한명이 전사하고 한명이 부상당한 것 입니다.

견인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소련군은 그냥 T-62를 폭파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 폭파시도는 폭약이 너무 적어서 실패했고 두 번째 폭파시도는 폭약은 충분했으나 전차의 내부에 폭약을 설치하지 않고 전차의 바닥에 놓고 터뜨려서 실패했다고 합니다. 폭약으로 격파하는 것이 두 번 다 실패하자 이번에는 소련이 보유한 괴물 박격포, 240mm구경의 M-240 2문이 급거 투입되었습니다. 그러나 240mm 박격포도 별 효과가 없어서 좀 더 정확한 152mm 포를 투입하기로 합니다. 여기에는 제378포병연대 8포대 소속의 152mm포 2문이 투입되었습니다. 소련군은 처음에는 고폭탄으로 사격했으나 얼음을 깨뜨려 T-62를 가라앉히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게 됩니다. 이를 위해 3월 말 378포병연대 2대대의 122mm포 12문이 동원되어 얼음을 깨뜨려 버립니다. 545호차가 강바닥이 주저앉자 소련측은 작전이 성공이라고 판단하고 4월에 포병부대들을 철수시켜 버립니다. 다만 중국군이 어떻게든 회수하려는 시도를 할 것에 대비해 T-62가 가라앉은 지점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 기관총을 배치합니다.

그리고 중국군은 위력적인 소련군의 포병이 철수하자 T-62 회수작전을 재개합니다. 이번에는 가라앉은 전차를 회수하기 위해 해군 소속의 잠수부들을 차출해서 회수팀에 포함시켰습니다. 중국군은 4월 20일 경부터 먼저 잠수부들을 동원해 545호차의 포탑을 먼저 회수했습니다. 강 건너의 소련군은 기관총으로 중국군을 계속해서 공격했지만 중국군은 10일 내내 근성을 발휘해 매일 밤 기관총 사격을 무릅쓰고 잠수부들을 물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5월 1일~2일 야간에 걸처 강바닥에 가라앉은 545호차의 차체에 케이블을 연결하는데 성공해 전차를 회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중국인들은 근성을 발휘해 꽤 근사한 전리품을 손에 넣었고 우리는 오늘날 이것을 베이징에 가서 구경할 수 있습니다. 저도 2008년에 545호차를 보고 중국인들의 근성에 경의를 표한바 있지요.

2011년 7월 3일 일요일

제국의 유지비용

  20세기 영국의 몰락은 국제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명색은 제국이라 2차대전 이후에도 식민지들에 대한 영향력을 최대한 보존하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이런 발버둥의 일환으로 영국은 경제가 엉망으로 망가져가던 1960년대 까지도 세계 각지의 해외주둔군을 유지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했다지요.

  영국 군부는 2차대전이 끝나고 냉전을 맞이한 뒤에도 해외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매우 중요시 했습니다. 특히 중동지역은 유전이 존재했을 뿐 아니라 폭격기의 작전 기지로서도 중요하게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 지역은 영국이 ‘전통적’으로 이해관계를 가진 지역이었던 만큼 전략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당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2차대전으로 사실상 패권국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해 1952년 영국 군부는 국제전략보고서Global Strategy Paper에서 중동지역에 고정적으로 배치할 영국군을 육군 1개 사단에 항공기 160대 정도로 감축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1)
  이미 2차대전 이전에도 식민지 유지에 땀을 빼던 대영제국이었지만 2차대전 이후에는 그게 더 어려워졌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지요. 영국은 2차대전을 미국의 원조에 의해 겨우 치러냈고 2차대전 이후에는 더욱 더 미국의 원조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 연구자가 시니컬하게 지적하고 있듯 2차대전 이후의 영국은 자체적인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강대국의 기능을 미국의 원조로 해나가는 형편이었던 것 입니다.2) 이런 상황에서 영국의 국제활동은 미국의 지원에 좌지우지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영국이 그리스 내전에서 손을 뗀 것도 유명하지만 수에즈 사태당시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것은 이런 현실을 전세계에 명백히 보여준 사례이지요.

  그리고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경제가 슬슬 엉망이 되어가자 얼마 되지않는 영국의 해외주둔군 마저 풍전등화의 상태가 됩니다. 영국은 2차대전 직후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제국’의 역할을 하기 위해 국방력에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55 회계연도만 하더라도 영국 GDP의 9.0%에 달하는 비용이 국방비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였다지요. 하지만 이것은 영국경제에 상당한 부담을 주고 있었고 이미 1959/60 회계연도에 6.9%로 6%대로 떨어진 뒤 1969/70 회계연도에는 5.3%로 추락합니다.3)  영국의 경제가 계속해서 악화되면서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군사력은 점차 부담스러운 짐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영국 수상 맥밀런이 1959년 7월 26일 일기에 썼던 것 처럼 영국내에서는 “왜 영국이 큰 무대에 남아있으려 발버둥 쳐야 하는가?(Why should the UK try to stay in the big game)”하는 회의감이 오래전 부터 일고 있었던 것입니다.4)
  영국 재무성의 경우 이미 1960년 부터 중동과 아시아에 배치된 영국군의 철수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재무성의 관료였던 리처드 클라크Sir Richard Clarke는 국방비를 GNP 성장률의 테두리 내에서 억제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극동지역에서 병력을 감축하는 것이 상황을 호전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클라크는 1960년 7월 극동지역에 주둔한 영국군을 감축하자는 의견을 공개적으로 제시했습니다. 그는 싱가폴에 영국군을 주둔시킨다고 해서 영국의 경제와 무역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미군이 있으니) 또한 인도를 포함한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영국이 얻는 경제적 이익이 연간 6천만에서 6천5백만 파운드 사이인데 비해 아시아 지역에 주둔한 영국군에 소요되는 비용이 연간 6천만 파운드에 달해 전혀 ‘남는 장사’가 아니라는 점도 지적되었습니다. 그리고 1963년에는 중동지역에 주둔한 영국군도 마찬가지라는 논리를 폈습니다. 중동지역의 영국 석유기업들이 연간 1억 파운드를 벌어들이는데 이 지역에 주둔한 영국군은 1억2천만에서 1억2500만 파운드를 까먹고 있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습니다.5)

  물론 영국 정부는 단순히 재무성의 주장에만 휘둘리지 않았고 냉전이라는 국제정치적 상황과 군사적인 요인을 함께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영국이 정말 돈이 없다는데 있었습니다. 결국 해외주둔군을 줄일 수 밖에 없었는데 서독주둔군의 경우 미국 및 NATO회원국들과 협의가 필요했기 때문에 결국은 만만한 중동과 아시아 주둔군이 목표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6) 결국 노동당 정부가 들어선 뒤 1965년에는 아덴Aden을 포함한 페르시아만 지역에서 철군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이어서 아시아 지역의 영국군 감축이 잇따르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영국이 몰락할 무렵에는 미국이라는 훨씬 쓸만한 대체재가 존재하고 있었기에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영국군이 철군한 뒤에도 미국의 존재는 중동과 아시아지역에서 공산권의 세력확대를 저지하는 역할을 했지요. 다행히 미국은 여전히 강력한 패권국이고 우리는 그 패권국이 제공해주는 안보에 기대어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여전히 패권국으로서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나쁘지 않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한국이 미국에 있어서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점 입니다. 냉전이후 한미관계를 다시 돌아보자는 목소리가 자주 나오고있고 그럴때 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문제를 생각합니다. 한국은 미국이라는 제국에게 있어 수지타산이 맞는 곳인가?



1) John Baylis·Alan Macmillan, “The British global strategy paper of 1952”,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16: 2, p.218
2) Dan Keohane, Labour Party Defence Policy since 1945(Leicester University Press, 1993), p.20
3) G. C. Peden, Arms, Economics and British Strategy : From Dreadnoughts to Hydrogen Bomb(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p.308
4) Curtis Keeble, Briatin, the Soviet Union and Russia(MacMillan Press, 2000), p.259
5) G. C. Peden, ibid., p.332
6) G. C. Peden, ibid., p.333

2011년 6월 21일 화요일

아데나워, 그리고 동맹에 대한 잡담

요즘 읽고 있는 책 중에 Steven J. Brady의 Eisenhower and Adenauer : Alliance maintenance under pressure, 1953-1960이 있습니다. 이제 막 읽기 시작해서 진도가 별로 나가지 않았는데 앞 부분 부터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부분은 1953년 미국을 방문한 아데나워가 아이젠하워에게 한국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독일 의료인력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한 부분입니다. 명목상으로는 의료인력 지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간접적으로나마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군사적 기여를 하겠다는 의사 표명인 셈이지요. 사실 이때는 독일의 재무장 논의가 급물살을 타던 시점이라 이건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무렵  기민당은 10만명 수준의 군대 창설을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지원이 절실했고 쓸모있는 동맹이라는 점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이후 소련의 엉성한(???) 평화공세에도 불구하고 친미-친서방노선을 고수해 나갔습니다. 이것은 독일이 통일 된 뒤 돌아보니 결과적으로 매우 현명한 선택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결과를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겠지만. 2차대전 이후의 소련은 독일을 위험한 잠재 적국으로 보았기 때문에 독일을 중립화 해 실질적으로 무력화하려고 기도했습니다. 물론 아데나워같은 보수진영의 선수들은 이런 엉성한 속임수를 간단히 꿰뚫어 보았기 때문에 친미노선을 고수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요즘 중국이 한미동맹을 약화시키고 한국을 중립적으로 만들려고 기도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역시나 흐루쇼프 이래의 엉성한 속임수인게 한눈에 보이는데 문제는 이런 조잡한 수작이 의외로 민족주의적인 진영에서 잘 먹히는 것 처럼 보이는 겁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긴 합니다만 한미동맹이 존속하려면 한국 쪽에서 동맹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줘야 합니다. 그런데 민족주의적인 진영은 이런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요. 한국전쟁 직후와 같이 대립구도가 명확한 상황에서는 동맹이 비교적 잘 기능했습니다만 냉전이 끝나고 표면적으로 평화가 정착된 지금 시점에서는 안보적 동맹이 제대로 돌아가기가 어렵습니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점은 흐루쇼프가 엉성한(?!?!) 평화공세를 시작했을 때 한국 내의 일부 민족주의적 지식인들은 이것을 새로운 변화의 전조로 받아들였다는 점 입니다. 그리고 1960년대에는 제3세계의 부상을 바라보면서 미국에 종속(?!?!)된 상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현재의 한미동맹 구도에 비판적인 집단 중 일부는 바로 1960년대에 뿌리를 둔 지식인들이지요. 물론 저도 미래를 내다보는 재주가 없으니 예언은 할 수 없습니다만 과거 이러한 민족주의적 지식인들의 전망이 계속해서 빗나간 것을 생각한다면 이들의 주장이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2011년 6월 17일 금요일

국무부장관 두 사람의 발언

2차대전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계속해서 승리를 거둬왔습니다. ... 자유 세계의 사람들은 성공 사례를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Communists have won victory after victory in the post-war years. …  success for the free peoples is badly needed.”

미국무부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954년 5월 8일 백악관 솔리리엄룸 회의석상에서.
Robert R. Bowsie and Richard H. Immerman, Waging Peace : How Eisenhower shaped an enduring Cold War Strategy,(Oxford University Press, 1998), p.124


그리고 32년 뒤


“반면, 우리는 승리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훨씬 앞서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는 패배했습니다.”

“On the contrary, we are winning. In fact, we are miles ahead. Their ideology is a loser.”

미국무부장관 조지 슐츠(George P. Shultz), 1986년 5월 14일 레이건에게,
David E. Hoffman, The Dead Hand : The untold story of the Cold War arms race and its dangerous legacy, (Anchor Books, 209), p.253

2011년 4월 15일 금요일

늙은 사자의 몸부림

2차대전 직후 영국의 안보정책은 매우 재미있는 주제입니다. 1차대전 이후 영국의 안보정책이 몰락해가는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고심의 흔적이라면 2차대전 이후 영국의 안보정책은 영국의 몰락을 인정하고 그 바탕위에서 B급 강대국의 지위를 고수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특히 핵무기의 등장은 다른 강대국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에게 있어서도 꽤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요즘 읽은 논문중에서 처칠이 재집권에 성공한 뒤 총참모부가 작성한 1952년 Global Strategy Paper를 다루고 있는 것이 있는데 여기서 핵무기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냉전에 있어 주된 억제력(main deterrent)이며 전쟁 발발시 연합국의 유일한 공세 수단으로 간주되는 것(즉, 핵무기)을 가지지 못한다면 영국이 미국의 정책과 냉전 계획, 그리고 전시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은 심각하게 약화될 것이며 이것은 영국이 정책 수립이나 공세 계획에 참여할 수 없게 되는 것을 뜻한다.

(중략)

핵무기를 완전히 미국에 의존하고 (영국이) 자체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원자폭탄을 보유하지 않는 심각한 정치적 불이익을 받아들이는 것은 영국에게 가장 현명하지 못한 일로 보아야 한다.

John Baylis·Alan Macmillan, “The British global strategy paper of 1952”,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16: 2, pp.209~210

강대국으로 명함을 내밀기 위해서는 실력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핵무기는 그럴수 있는 상징이라는 이야기죠. 2차대전 이전의 전함처럼. 하지만 이후 영국의 핵정책을 보면 안습입니다. 본격적인 핵경쟁에 나서기에는 국력이 모자라고 결국 상징적인 수준의 핵전력을 보유하는 데 그치게 되니 말입니다.(물론 유사시 물귀신작전을 펼 정도는 되겠습니다만)

물론 이때 영국이 확보한 국제적인 지위가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안습이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역사를 보면 강대국 경쟁에서 탈락한 비참한 패배자들이 산적해 있으니 말입니다. 영국의 몰락정도는 양호한 편이죠.

2010년 11월 20일 토요일

고객의 목소리

우리가 막 M-60 전차를 수령했을 무렵 에일즈(Stephen Ailes) (육군부) 장관이 유럽을 방문했던 일은 항상  기억하고 있네. 에일즈 장관은 천막 덮개 아래에 앉아 병사들과 점심식사를 했지. 그리고 에일즈 장관은 그 중 장관의 건너편 자리에 있던 한 병사, 그 친구는 대략 25년간 복무한 병장으로 경험많은 전차병이었는데, 그 병사에게 M-60 전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지. 그런데 그 친구는 그냥 자기 식판에서 햄을 한 조각 집어 들고는 흔들었네. 그 친구는 장관과 겨우 2-3피트 정도 떨어져 있었네. 그 친구가 이렇게 말했지.

장관님. 저는 여지껏 탱크만 탔습니다. 그런데 기술자들이 이 빌어먹을 물건을 설계하면서 전차병들의 말을 들어 먹은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물론, 자네들도 알겠지만 이 정도의 호평을 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 장비를 다루는 사람들에게서 최고의 찬사를 받기란 매우 어렵네. 내 생각엔 적들도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을걸.

말이 나온 김에 더 이야기 하자면 59식 전차가 노획되어 후에(Hue)로 이송중인건 알고 있나? 베트남측은 59식이 매우 조종하기 어려운 전차라고 하더군. 그건 베트남군이 미제 전차를 조종하는데 익숙하기 때문일세. (59식은) 파워스티어링도 없고 동기물림식 변속기(synchromesh transmission)도 없고 없는 것 투성이지. 그래서 변속이 어렵고 방향 전환도 어렵네. 한번 그걸 조종해 보라구.

에이브럼스 대장, 1972 5 27, 주간 정보 동향(Weekly Intelligence Estimate Updates)을 보고 받는 자리에서. Lewis Sorley(ed), Vietnam Chronicles : The Abrams Tapes 1968-1972(Texas Tech University Press, 2004), p.859

2010년 10월 3일 일요일

Thomas E. Hanson저, Combat Ready? : The Eighth U.S. Army on the Eve of the Korean War

몇달 전에 네비아찌님과 트위터로 한국전쟁에 대한 책 이야기를 하다가 올해에 출간된 토마스 핸슨(Thomas E. Hanson)의 Combat Ready? : The Eighth U.S. Army on the Eve of the Korean War에 대한 소감문을 하나 써 보겠다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제가 늘 그래왔듯 공수표를 발행한 뒤 깜빡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더군요. 서평이라고 할 정도는 아닌 간단한 감상문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핸슨은 현역 미육군 장교입니다. 저자의 신분이 육군장교라는 점은 이 책의 문제의식에 꽤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이 점은 뒷 부분에서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자는 한국전쟁 초기 미육군이 연전연패를 거듭한 책임이 어디에 있느냐는 해묵은 문제를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한국전쟁 직후부터 제기되었고 오늘날 우리는 그 책임이 바로 “2차대전 직후 평화분위기에서 무리하게 육군을 감축한 트루먼 행정부와 5년간의 일본 점령기간 동안 전투준비를 소홀히 한 극동군사령부 및 8군 사령부”에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답안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근본적인 책임은 육군을 감축하고 준비태세를 위험할 정도로 떨어트린 트루먼 행정부와 군수뇌부에 있으며 일본 현지의 8군 사령부는 이런 열악한 상황속에서 전투준비태세를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의 상당부분을 미8군 예하부대들의 훈련 및 전투준비태세 확립을 분석하는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핸슨이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바로 오늘날과 같은 인식을 확립한 페렌바흐(T. R. Fehrenbach)의 저서 This Kind of War와 애플만(Roy E. Appleman)이 저술한 미육군의 공간사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입 니다. 저자는 페렌바흐가 한국전쟁 초기 연전연패의 책임은 미군 수뇌부와 일선의 부대 모두에 있다는 입장을 정립했으며 이것이 이후 수십년간 한국전쟁 초기 미육군에 대한 일반적인 서술이 되었다고 지적합니다.(약간 재미있는 점은 페렌바흐가 미해병대를 높이 평가하고 미육군을 평가절하했다고 지적하는 것 입니다. 저자가 현역 미육군 장교라 그런가?) 또한 이런 논리를 비판해야 할 미육군도 공간사를 통해 이런 시각을 확산시키는데 기여했다고 비판합니다.

책의 내용은 어찌보면 꽤 단순합니다. 먼저 2차대전 이후 트루먼 행정부와 군 최고 수뇌부의 안이한 안보정책이 육군을 약화시키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사실 잘 알려진 것 입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해외에 대규모 육군을 주둔시킨 경험이 적었으며 트루먼 행정부는 2차대전으로 변화한 국제정세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미육군이 방대한 점령지 유지를 위해 대규모 지상군을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후 국방예산의 감축과 대규모 육군의 필요성에 대한 회의적인 여론 때문에 미육군은 급속히 감소했습니다. 근본적으로 초대 국방부장관 포레스탈과 2대 국방부장관 존슨 모두 미국의 안보를 해군이나 공군에 의존하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육군은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때문에 육군에 대한 예산도 크게 삭감되어 일본에 주둔한 미8군의 예하 사단들은 1950년이 되면 인력과 장비면에서 심각한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여기에 육군 감축으로 인한 장교단의 감축 또한 경험많은 장교와 부사관의 부족을 불러왔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부분은 주일미군의 훈련 및 전투준비태세를 분석한 4~7장 입니다. 분석의 대상은 25보병사단의 27보병연대, 7보병사단의 31보병연대, 24보병사단의 19보병연대, 1기병사단의 8기병연대입니다. 저자는 이 4개연대에 대한 분석을 통해 미8군이 점령기간 중 부대의 전투력 유지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는지 상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험많은 장교와 부사관의 부족, 예산 삭감으로 인한 장비와 훈련장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미8군의 예하부대들은 훈련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보여줍니다. 저자는 이를 통해 한국전쟁 직후 널리 유포된 “게이샤들과 놀아나느라 기강이 해이해진 육군” 이라는 인식을 깨고자 합니다. 비록 미육군이 개전 초기에 연전연패 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일선 부대의 장교나 사병들의 책임이라기 보다는 육군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 미국의 거시적인 안보정책에 있다는 것 입니다.

위에서 이야기 했듯 저자인 핸슨은 현역 미육군 장교입니다. 저자는 단순히 한국전쟁 당시 미육군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 책을 쓴 것이 아닙니다. 저자는 군사사를 연구하는 군인답게 한국전쟁의 교훈을 통해 오늘날 미국 안보정책의 문제점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저자는 미국이 여전히 충분한 육군을 유지하는데 적극적이지 않다고 지적하고 특히 부시 행정부 초기를 비판합니다. 저자는 정부의 잘못된 안보정책의 댓가를 전장에 투입된 장병들이 치뤄야 했던 한국전쟁으로 부터 배울 것을 강조합니다.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드러났듯 미국은 강력한 해군과 공군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상군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자가 현역 미육군 장교라는 점 때문에 육군에 대한 변호로 읽힐 소지도 다분하지만 저자가 제기한 문제들은 충분히 경청할 가치가 있습니다.

잡담 하나. 공수표 하나를 처리했으니 공수표 하나를 또 발행해야 겠군요. 그래도 올해가 한국전쟁 60주년이라고 관련저서들이 꽤 나왔는데 그 중에서 브루스 커밍스가 올해에 낸 한국전쟁에 대한 소개글도 써볼까 합니다.

2010년 5월 19일 수요일

트루먼 - 꽤 재미있는 미국 대통령

요즘 읽는 책 중에는 마이클 펄만(Michael D. Pearlman)의 Truman and MacArhur : Policy, Politics, and the Hunger for Honor and Renown이 꽤 재미있습니다. 작년에 조금 읽다가 책장에 꽂아두고 1년이 지나서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맥아더를 해임하는 부분을 읽고 있습니다.

트루먼 재임기는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입장에서 매우 재미있는 시기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트루먼 행정부 시기는 꽤 매력적입니다. 트루먼은 2차대전이 종결되고 냉전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미국 대통령이라는 막중한 지위에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다 시피 트루먼은 약간 난감한 상황에서 대통령의 직위에 앉았습니다. 루즈벨트가 급사해서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는데 트루먼에게 남겨진 임무는 전후 세계질서의 재편이라는 엄청난 것 이었지요. 상대해야 할 인간들도 스탈린이나 처칠 같은 희대의 대인배들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관점을 군대로 돌려보더라도 트루먼이 처한 상황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재임하는 기간 동안 미군은 전시동원체제에서 평화시의 급격한 병력 감축을 경험했으며 동시에 냉전의 시작과 함께 소련이라는 새로운 적을 상대하기 위해 체제 개편을 단행합니다. 그리고 트루먼 행정부에서는 각 군을 총괄하는 국방부가 조직되지요. 물론 초기 구상과는 매우 다른 형태의 국방부가 만들어졌습니다만.(자유주의자 놈들의 딴지란!) 그리고 이런 혼란의 와중에 초대 국방부장관인 포레스탈이 자살하고 이른바 제독의 반란이라는 민군관계에 파란을 몰고오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런 와중에 한국에서는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지지요. 어수선한 사건들을 그럭 저럭 잘 수습하면서 대통령직을 수행한 것 만 보더라도 트루먼에게는 개인적으로 후한 평가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민군관계에 있어서 2차대전을 통해 등장한 수많은 전쟁영웅들은 골치 아픈 존재였습니다. 별일이 없었어도 거만했을 맥아더 같은 인물이 전쟁 영웅이라는 간판까지 달게 되었으니 군 통수권자로서 이들을 적절히 제어하는 것은 골치 아팠을 것 입니다. 전쟁영웅이란 민주주의 체제에서 필요로 하는 대중적 인기를 가진 존재들이니 말입니다. 이런 문제는 바로 제독의 반란에서 잘 드러났습니다. 문민통제에 반기를 든 제독들 상당수가 전역과 같은 처분을 받았지만 몇몇 유명한 제독들은 그렇게 되지 않았지요. 아마 맥아더도 중국군의 개입으로 참패를 하지 않았다면 쉽게 축출하기가 어려웠을 것 입니다.(뭐, 마샬과 그 계열의 인물들은 맥아더를 싫어했다고 하니 좀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맥아더는 한국전쟁 기간 중 행정부와 군수뇌부의 아시아 정책을 공공연히 비판했는데 이것은 문민통제의 관점에서 보면 그다지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할 때 마다 트루먼은 단호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트루먼은 초대 국방부 장관에 임명한 포레스탈이 자신을 기만했다고 판단하자 가차없이 교체했으며 한국전쟁에 개입하는 과정에서도 단호한 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의회에 대해서도 자신의 영역에 쓸데없이 간섭한다고 툴툴댔다죠. 물론 포레스탈의 후임으로 앉힌 존슨은 별로 좋지 않은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만;;;; 대중적으로 인기가 상당했던 맥아더를 교체할 때에도 맥아더가 일정한 선을 넘었다고 판단하자 해임시키지요. 문제가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습니다만 그래도 민군관계의 측면에서 꽤 모범적인 군통수권자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2010년 5월 5일 수요일

대답없는 메아리

다들 잘 아시겠지만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은 2차대전 당시 선전방송으로 출발한 이후 냉전을 맞으면서 서방측 선전공세의 선봉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소리는 냉전 초기 부터 급진적 민족주의가 확산되고 있던 아시아를 향한 방송을 시작합니다. 특히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족주의 집단이 프랑스를 엿먹이고 있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골치 아픈 화약고 였습니다. 이때문에 베트남어 방송은 194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한가지 있었습니다.

1949년에 아시아지역을 순방한 미국 하원의원단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순방 보고서를 보냅니다. 이 보고서에서는 미국의 소리 베트남어 방송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인도차이나에서는 미국의 소리 방송이 무용지물입니다. 인도차이나 전역에 걸쳐 라디오가 겨우 1만대 정도에 불과한데다 이중 대부분은 프랑스인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The Voice of America program in Indo-China are ineffective. There are only some 10,000 radios in the entire conuntry and large percentage of these are French owned.)

"Notes on Recent Observations of Conditions in the Far East"(1949. 11. 19), p.20, RG330 Secretary of Defense, Office, Administrative Secretary Correspondence Control Section Decimal File 1951, CD092 Far East to Greece Box. 229

아아. 대답없는 메아리여~

2010년 3월 29일 월요일

미육군 제7군에 대한 1950년대의 전시 증원계획

넵. 땜빵 포스팅입니다.

1950년대 미육군의 전시동원계획 중 독일 방어를 담당한 제7군에 대한 증원계획을 표로 만들어 봤습니다.


1953년 12월계획
1954년 12월계획
D-Day
350RCT(오스트리아)
351RCT(오스트리아)
350RCT(오스트리아)
D+30
44보병사단(미국)
1기갑사단(미국)
82공수사단(미국)
2보병사단(미국)
1기갑사단(미국)
82공수사단(미국)
D+31
보병사단×3(미국)
보병사단×(극동)
공수사단×1(미국)
보병연대전투단×1(카리브해)
공수연대전투단×1(미국)
기갑기병연대×2(미국)
D+60
3기갑기병연대(미국)
D+91
보병사단×3(미국)
보병사단×1(태평양)
기갑사단×1(미국)
공수사단×1(미국)
기갑집단×1(미국)
기갑기병연대×1(미국)
D+120
D+150
D+180

1955년 12월계획
1956년 12월계획
D-Day
D+30
1보병사단(미국)
3보병사단(미국)
1기갑사단(미국)
1보병사단(미국)
4보병사단(미국)
1기갑사단(미국)
D+31
D+60
2기갑기병연대(미국)
25보병사단(태평양)
기갑기병연대×2(미국)
D+91
기갑집단×1(미국)
기갑기병연대×1(미국)
D+120
82공수사단(미국)
82공수사단(미국)
4기갑사단(미국)
D+150
4기갑사단(미국)
25보병사단(태평양)
3보병사단(미국)
D+180
보병사단×5(미국)
기갑사단×1(미국)
주방위군 보병사단×4(미국)
주방위군 기갑사단×1(미국)

1957년 12월계획
1959년 1월계획
D-Day
D+30
1보병사단(미국)
4보병사단(미국)
101공수사단(미국)
4보병사단(미국)
82공수사단(미국)
101공수사단(미국)
3기갑기병연대(미국)
D+31
D+60
2기갑기병연대(미국)
D+90
82공수사단(미국)
D+120
2기갑사단(미국)
1보병사단(미국)
D+150
3보병사단(미국)
2보병사단(미국)
2기갑사단(미국)
주방위군 보병사단×2(미국)
D+180
주방위군 보병사단×5(미국)
주방위군 기갑사단×1(미국)
주방위군 보병사단×3(미국)
주방위군 기갑사단×1(미국)

이 표는 Ingo Trauschweizer, The Cold War U.S. Army : Building Deterrence for Limited War(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8), pp.245~248의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 입니다.

표 에서 재미있는 점은 미군의 증원 속도가 갈수록 늦어진 다는 것 입니다. 1953년 계획만 하더라도 D+30~31일에 대부분의 증원병력이 도착하도록 되어 있는데 1954년 부터는 D+30일에 3개 사단이 증원된 뒤 한참 뒤에 증원병력이 도착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물론 독일을 미 제7군 혼자서 방어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다른 NATO군이 존재하고 있었고 독일의 재무장으로 독일군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늘어날 예정이긴 했으니 말입니다.

2009년 8월 19일 수요일

독일 영토 내에서의 전술핵 사용문제

sonnet님께서 아데나워 총리의 핵무기에 대한 시각에 대해서 소개해 주셨습니다.

저도 독일과 핵무기 문제에 대해서 읽은 것이 조금 있어서 댓글을 하나 달았는데 생각해 보니 기억에 의존해 쓴 것이라 원래 읽은 내용과 약간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댓글로 단 내용을 올려봅니다.

1964년 11월에 있었던 미국 국방부장관 맥나마라와 독일연방공화국 국방부장관 하셀(Kai-Uwe von Hassel)간의 회담에서는 소련의 침공시 대응방안이 논의되었습니다. 관련 문서는 1998년에 기밀해제 되었습니다. 이 회담의 요약본에 따르면 독일측은 전술핵 사용을 독일 영토내로만 한정한다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프라이탁(로링호벤, Bernd von Freytag-Loringhoven) 장군은 설명을 계속하면서 만약 초기에 ADM(Atomic Demolition Munitions)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침략군의 공격 작전을 중단시키지 못 한다면 서방측은 방어 지대에서 재래식 전투를 계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침략군의 숫적 우세를 감안한다면 서방측은 막대한 손실을 입을 것이 분명하다.

만약 방어군이 격파될 위험에 처한다면 전술핵무기(nuclear battlefield weapons)를 지체없이 선별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만약 핵무기의 선별적인 사용으로도 침략을 저지할 수 없다면 확대(escalation)가 불가피해질 것이다.

(중략)


(독일) 국방부장관은 독일측의 개념은 지연지대(Delaying Zone) 내에서는 오직 ADM만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독일측은 ADM의 사용은 서독의 영토내로 한정할 것이기 때문에 확대를 가져오지는 않을 것으로 믿고 있다. 또한 ADM을 사용한다면 침략군에게 공격을 계속할 경우 더 높은 단계의 대응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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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inuing with the briefing, Gen von Freytag pointed out that if early firing of ADMs did not force the aggressor to cease his offensive operations the West would have to continue the conventional battle in the defense area. In view of the numercial superiority of aggressor forces, the West must expect heavy losses.

If the defending forces are in danger of destruction, nuclear battlefield weapons must be selectively employed immediately. If selected employment of nuclear weapons does not stop the aggression, it will no longer be possible to avoid escalation.

(중략)


The Defense Minster summarized the German Concept, stating that in the Delaying Zone the Germans would use only ADMs. The FRG believes this will not lead to escalation because these would be employed on West German Soil. This would also be a clear demonstration to the aggressor that continuation of the attack would result in a Higher Level of Response.

'Memorandum of Conversation : Secretary McNamara's Meeting with FRG MOD von Hassel, 12-13, November', RG 200, Box 133, pp.5-6

독일측의 입장이 안습인 것은 핵무기를 함부로 쓰면 핵보복으로 독일이 쑥대밭이 되겠지만 쓰지 않으면 빨갱이들에게 밀려버린다는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충안으로 '독일 영토에서만' 전술핵을 선별적으로 사용하는 방안을 내 놓고 있습니다. 독일측은 초기에 전술핵을 사용한다면 바르사뱌 조약기구의 공세 의지를 꺾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 프라이탁 로링호벤 장군의 언급에서 알 수 있듯 만약 그게 먹히지 않는다면 전면 핵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나 저러나 박살나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자국 내에서 핵무기를 쓰자고 제안해야 하니 안습입니다.

2009년 7월 28일 화요일

몇 가지 궁금한 점

지난번에 땜빵 포스팅으로 올렸던 'M60에 대한 슈트라우스의 평'에 달린 답글에 우마왕님이 피드백을 해 주셨습니다.

먼저 제가 쓴 댓글의 경우는 현재 시점에서 평가한 것이지 냉전 전 기간의 경쟁을 두고 이야기 한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역사왜곡'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제가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궁금한 점 몇가지만 질문 드리려고 합니다.

우마왕님의 지적 중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에 띄더군요.

그래서 해당 포스팅의 배경이 된 1960-61년에는 서방에서 자신들이 우위를 가졌다고 착각할 수 있었지만 소비에트는 다음해에 115mm 활강포와 BM-3/6 APFSDS탄을 장착한 T62를 등장시켜 잠시나마 우위를 가졌다는 서방의 착각을 떡실신시킵니다. 1970년대 이색렬의 IMI가 105mm APFSDS탄 M111의 개발에 성공하면서 독일을 시작으로 서방 각국이 라이센스를 받아 생산에 나섰다는 사실이야말로 당시 서방 각국이 소비에트 전차포에 대한 열세임을 느끼고 있었다는 반증이지요. 그랬기에 당시 서독도 레오1에 만족하지 못하고 MBT/KPz70 계획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지요.

우마왕님은 T-62의 115mm포를 언급하시면서 1970년대에 신형 APFSDS탄이 도입된 이유가 서방 각국이 소련 전차포에 대한 열세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시는데 미국 쪽에서는 1970년대 초반에 말씀하신 115mm 탑재 T-62가 M60 보다 특별히 나을게 없다는 평가를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M111이 개발된 것은 1978년으로 알고있는데 이미 1974년에 Dupuy장군이 T-62에 대해 M60과 fair match라고 평가한 걸 보면 우마왕님이 쓰신 떡실신이라는 표현은 오히려 과장된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MBT 70의 개발도 소련 기갑의 '숫적우위'를 상쇄할 수 있는 '기술적우위'를 추구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요?

'떡실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미국이나 서방이 T-62에 열세를 느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설명해 주는 자료는 어떤게 있을까요? 우마왕님이 쓰신 글을 보면 실제 미국측의 판단 보다는 정황증거로 설명하시는 것으로 보이는데 좀 더 직접적인 자료는 없을까요? 제가 기술적인 문제는 잘 모르니 우마왕님께서 관련된 자료에 대해서 소개를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로는

만일 저 댓글들의 주장대로 레오2 이전의 서방 전차가 전차전에서 우위를 보일 수 있었다면 대 WTO 방어전술은 아마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전차의 전투력에 분명한 우위를 갖지 못했기에 1980년대까지도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지상군을 막기 위해 공격 헬리콥터와 전술핵을 조합한 방어대책이 거론되었던 게고 80년대 중후반, 아니 사실상 90년대 초반까지도 서방 각국, 특히 미국이 T72의 존재에 부담을 느끼던 이유가 단순히 프로파간다 때문이었을까는 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지요.

이 부분도 좀 의문인데 NATO가 전술핵과 공격 헬리콥터를 조합한 방어대책을 거론한 것은 바르샤바 조약기구 기갑 전력의 '숫적 우세'를 '기술적'으로 상쇄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마왕님께서는 나토의 방어전술에 영향을 끼친 결정적인 요인으로 전차 자체의 성능 문제를 꼽고 계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읽었던 냉전기 서유럽 방어 계획에 대한 몇 편의 글을 보면 전차 자체의 성능 문제는 숫적 열세에 비해 부차적 문제였던 것으로 이해가 되어서 말입니다. 작전계획에서도 개별 전차의 성능적 열세를 언급하는 것 보다는 압도적 숫적 열세를 언급하는 경우가 많아 보이더군요.

번거롭지 않으시다면 '미국과 서방이 실제로 어떤 판단을 했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를 추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