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ly 30, 2008

몇 가지 잡담

갈수록 읽어야 할 물건이 쌓이고 있어서 특별히 중요하지 않은(???) 책들은 후다닥 훑어 보고 넘어가는 중 입니다.

오늘 읽은 책 중에서 Vejas Gabriel Liulevicius의 『War Land on the Eastern Front』는 1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러시아를 중심으로한 동유럽 점령정책을 다룬 흥미로운 물건입니다.
이 책을 샤샤샥 날림으로 훑어 보다 보니 독일군이 시행한 점령정책 중 문화정책이 눈에 띄더군요. 특히 현지 문화의 이해를 위해 독일군 수뇌부가 일선 장병들에게 점령지의 문화공연 관람을 적극적으로 권장한 부분은 꽤 흥미롭습니다. 20년 뒤에 같은 장소에서 벌였던 또 다른 전쟁과 비교하면 훨씬 온건한 점령정책을 실시한 것으로 보이는군요. 특히 선전 목적이라 할지라도 독일 점령군과 러시아 유태인 사회와의 문화교류가 있었다는 점은 뭔가 요상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읽고 나니 1941년에 독일군이 다시 쳐들어 왔을 때 20년전의 추억을 떠올리며 스탈린 보다는 낫겠지 하다가 뒤통수를 맞았을 소련 서부의 여러 민족들이 떠올랐습니다. 역시 이것 저것 주워들을 수록 흥미로운 것이 늘어나는군요.

그리고 다음으로는 최근 있었던 50년대 이승만 정권의 경제정책에 대한 토론과 관련된 이야기 입니다. 이 토론이 꽤 재미있게 진행돼서 저도 여기에 약간의 잡글을 달았는데 주제가 약간 맞지 않고 내용이 소략해서 누락시킨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무엇이냐?

1953년 11월 방한한 미국 하원 대표단이 이승만을 예방했을 때 이승만은 4차선 고속도로와 세계 최대의 라디오 송신탑을 건설할 비용을 요청해 미국인들을 기겁하게 했다는군요. 이박사는 간혹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황당한 발언으로 여러 사람을 놀라 자빠지게 했는데 이 일화는 그 중 하나가 되겠습니다.

Tuesday, July 29, 2008

전후 복구시기 북한에 대한 약간의 잡설

sonnet님이 쓰신 「잉여농산물원조와 삼백산업의 발달」을 읽다 보니 재미있는 구절이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인용해 온 글에 나타난 문제점은 당연히(?) 북조선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전후 복구과정에서 김일성은 중공업 우선발전을 주장합니다.

김일성은 1953년 8월 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 보고에서 우선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공업으로 제철, 기계, 조선, 광업, 전기, 화학, 건설자재 공업을 꼽았고 경공업에 대해서는 간략히 언급하는데 그쳤습니다. 중공업을 최우선시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 입니다. 서동만에 따르면 이 발표에서 김일성은 농업에 대해서도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넵. 수령님은 북조선이 처한 사정은 고려하지 않고 중공업화를 추진하기로 이미 결심한 것 입니다. 소련의 경우 내전 이후 신경제정책에 따라 어느 정도의 전후복구가 이뤄진 상태에서 중공업화가 이뤄졌는데 김일성은 아예 전후복구 자체를 중공업화로 밀어 붙이려 한 것 입니다. 소련의 경우 이 문제를 두고 흐루쇼프와 말렌코프간의 논쟁이 있었는데 소련이야 중공업 기반이 이미 있는 나라이니 북한과는 이야기가 다르죠. 물론 전후 복구의 물주는 소련이었기 때문에 김일성은 1953년 9월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 중공업 우선 노선을 잠시 보류합니다. 소련의 반대에 따라 1954년 3월의 개각에서는 경제 분야 간부의 임명이 경공업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남의 말은 절대 안들어 처먹는 수령님이니 만큼 물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코 중공업 우선노선의 뜻은 꺾지 않았습니다. 중공업 우선 노선의 반격은 예상보다 일찍 시작되었는데 1954년 11월 소련의 압력에 따라 임명된 재정상 최창익의 해임, 1955년 1월 경공업상 박의완의 해임에 따라 경제 간부들의 개편이 시작됐습니다. 그 결과 중공업화를 지지하는 이주연과 이종옥이 각각 재정상과 경공업상으로 임명됩니다. 중공업 노선을 추구하는 세력이 승리한 것입니다. 중공업 우선론자들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같은 해 12월 ‘1955년도 인민경제복구발전계획에 관한 내각결정’으로 중공업기업소의 확장과 경공업, 농촌경제를 동시에 복구 발전시킨다는 노선을 천명합니다. 이것은 표면상으로는 병행발전인데 실제로는 중공업우선 노선을 관철시키는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게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겠습니까. 이미 1955년부터 공업생산목표를 달성하기 어렵게 되자 당장 1956년도 공업생산목표에 대한 수정에 들어갑니다. 물론 완전무결한 수령님은 이 문제의 원인을 국가계획위원회의 탁상 행정으로 돌리는 파렴치함을 보입니다. 이에 따라 경공업 발전을 지지하던 국가계획위원장 박창옥은 집중적인 공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1955년 12월 20일에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0차 회의에서는 1956년도의 공업총생산액을 오히려 더 늘려 잡습니다. 전후 복구기간 인 1954~56년 사이에 북한은 인민경제에 대한 총 투자 중 49.6%를 공업에 투자했는데 이 중 81.1%가 중공업에 들어갔습니다. 전후 복구 기간 중 국가의 투자가 중공업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경공업은 지방공업의 몫이 되었는데 사실상 지방공업은 별다른 투자를 받지 못했습니다. 성과가 신통치 못했으리라는 점은 짐작하실 수 있겠지요. 물론 중공업에 가용 가능한 자원을 싹~ 쓸어넣었기 때문에 ‘공업생산’에서 엄청난 성과를 올린 것은 '사실'입니다.

'통계상'으로.

그렇다면 농업은?

전후 복구기간 중 중공업화와 동시에 농업집단화도 적극적으로 추진됩니다. 북한은 1945년 이후 농업집단화에 성공한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합니다.(여기에 대해서는 김성보의 단행본이 설명을 잘 해 놓고 있습니다.) 이미 북한의 농업집단화 비율은 1955년 봄에 전체 농가호수의 44%에 달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이 과정에서 개인농으로 남아있던 농민, 특히 중농층은 엄청난 동요를 보입니다. 집단화에 반발한 농민들은 이미 소련의 농민들이 했던 것 처럼 가축을 도살하거나 곡물수매에 비협조 하는 방식으로 저항합니다. 농민들의 가축 도살로 인해 한우와 돼지의 두수는 1954~55년 사이에 감소했다가 집단화가 진전되어가면서 점차 증가세로 들어섭니다. 또한 집단농장의 농민들은 소극적 저항의 표시로 태업을 일삼았는데 그 결과 벼의 생산은 1954에 감소했다가 1956년에야 1953년의 생산량을 겨우 넘어섭니다. 그리고 일부 농민들은 적극적인 저항의 표시로 협동조합의 탈퇴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특히 중농이 발달했던 황해도에서의 저항은 상당한 규모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농업이 엉망으로 돌아가니 당연히 식량사정은 엉망이 됩니다. 1955년 1월 북한에서는 식량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서 공업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달에 하루 치 식량을 아끼자는 운동을 벌입니다. 김일성은 그의 선배(?)들 처럼 농촌을 쥐어짜(?) 중공업 육성의 기반으로 삼으려 했는데 당장 공장 노동자들이 먹을 식량이 줄어드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당시 쌀 1kg의 공정가격은 5원이었는데 이미 1955년 2월 암시장에서는 400원에 거래되고 있었습니다. 일반 노동자들의 한달 임금은 1,000~1,500원 수준이었으니 고깃국은 고사하고 이밥도 못 먹을 지경이었습니다. 식량난은 매우 심각해서 함경남도의 경우 식량을 구하기 위해 주민들의 대규모 이동이 보고될 정도 였습니다. 그나마 식량 사정이 좋았던 황해도에서도 아사자가 발생할 정도였는데 헝가리 의료진이 파견된 사리원의 한 병원에는 1955년 4월~5월 사이에 20명 정도의 아사자 또는 아사직전의 환자가 실려올 정도였습니다. 수도인 평양의 사정도 좋지 않아서 소련 외교관들의 보고에 따르면 평양 일대의 야산에서는 새싹을 뜯는 여성과 어린이들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이 해 5월 춘궁기가 닥치자 식량 상황은 위기에 도달했고 북한은 소련과 중국으로 부터의 긴급 식량원조로 간신히 급한 불을 끄게 됩니다.

물론 이런 난감한 상황들은 결코 중공업화에 대한 수령님의 의지를 꺾지 못합니다. 비록 1957년 이후 소련과 동유럽의 경제원조도 줄어들었지만 북한은 천리마운동 같은 대중동원운동 등으로 60년대까지 통계상으로는 엄청난 성장을 이룩합니다.

'통계상'으로만.

대략 수박 겉핧기로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해 드렸는데 전후 복구기간 중 북한이 이룩한 인상적인 공업생산의 증가는 뒤로는 이렇게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업생산 자체도 성장률이라는 통계수치 이면에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북한은 60년대에 베트남, 쿠바 등에 공산품을 수출하려고 노력했지만 성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1963년 북한이 북베트남에 수출한 강철 4,000톤 중 3,300톤이 저질이라서 반송된 것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쿠바도 유사한 사례가 있는데 1962년 북한이 10만톤의 설탕을 기계류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수출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쿠바는 35,000톤의 설탕만을 보냅니다. 왜냐. 북한이 생산한 기계는 도저히 받아 쓸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90년대 이후 전후복구 과정에서 북한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한 많은 연구들이 나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80년대 운동권에서 돌던 ‘북한바로알기’류의 괴담(?)들이 여전히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 입니다.

최종보스 슨상님

공성진, 촛불시위 배후로 김대중 전 대통령 지목

그저 병신이란 생각 말곤... 차라리 노뽕이 삼단변신하는게 더 설득력 있겠습니다.

가만히 있자니 이명박 장로 때문에 다 말아먹을것 같아 불안한 마음은 이해하겠는데 그래도 창의력은 좀 발휘해야 다음번에 한번 더 해먹지 않겠습니까.

Sunday, July 27, 2008

1차대전 이후 미 육군 장교단의 인사적체 문제

1차대전이 종결된 뒤 미국은 고립주의 노선을 취하며 국제연맹에도 참여하지 않습니다. 이런 대외정책의 기조에 따라 군 병력도 급격히 감축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육군의 감축 규모가 해군 보다 더 컸습니다. 미국 전쟁부는 최소 현역 병력을 장교 17,717명과 사병 280,000 수준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었지만 의회에서 국방예산을 감축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이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감군을 해야 했습니다. 이에 따라 1923년 까지 미 육군은 장교 14,021명과 사병 119,222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이렇게 제한된 인원만 군대에 남다 보니 진급 적체현상은 굉장히 심했고 장교단의 노화 현상이 두드러 졌다고 합니다. 아이젠하워의 경우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하는데 16년이 걸릴 정도였다고 하지요. 어찌나 진급적체 현상이 심했는지 1930년의 경우 육군항공대 소속의 중위 계급의 장교 494명 중 400명이 1차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1931년의 통계를 보면 육군의 현역 중위 중 50세 이상이 46명이었는데 이 중 최고령자는 61세였고 현역 대위 중에서는 274명이 50세 이상에 최고령자는 62세였다고 합니다. 이때 최연소 대위가 32세였으니 진급적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초급 간부들이 이 정도였으니 위로 올라가면 더 심각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같은 해에 대령은 470명이었는데 이 중 109명이 60을 넘겼고 이 중 8명은 64세였습니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조사를 보면 현역 장교의 90%는 군대에 남길 희망했다고 합니다.

왜냐?

사회에 나가면 대공황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Saturday, July 26, 2008

仲間由紀恵


평소 연예인에 큰 관심은 없는 편인데 몇 년전 케이블 TV에서 방영하는 트릭을 보고 푹 빠진 배우.

아마 다이안 레인 다음으로 마음에 들었던 배우 같다. 사실 고쿠센 같은 것도 유키에가 나오기 때문에 참고 볼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제 이 아가씨도 20대 후반이라 얼굴에 연륜이 느껴지는게 왠지 우울하다. 역시 트릭을 찍던 무렵이 최고였는듯 싶다. 게다가 요즘은 찍는 드라마 마다 신통찮은 모양이라 조금 더 우울하다.

유키에가 멋진 배우로 남아 연예계에서 장수했으면 좋겠다.

이승만 시기 수출정책에 대한 잡상

지난번에 sonnet님이 올리신 「미국의 대한원조와 경제성장의 시작」이라는 포스팅에 반론이 하나 달렸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sonnet님이 「일본이 가진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달라, 그것도 내일 당장 달라」라는 포스팅으로 다시 반론을 제기해 주셨으니 저는 사족을 조금 더 달아볼까 합니다.

박정희 시기의 경제개발도 그렇지만 이승만시기 수출정책에 대해서도 당연히 평가가 상이합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의 하야까지 한국의 수출은 큰 증가 없이 정체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미 sonnet님의 글에서 지적되었지만 한국의 수출은 1958년까지 계속해서 내리막길에 있었고 1958년 이후 부터의 성장도 겨우 1953년 수준의 수출을 회복하는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이승만정부의 수출5개년계획의 목표는 1961년까지 1억달러 수출을 돌파하는 것 이었는데 실제로는 1961년의 수출액은 3864만6천달러로 목표의 3분의 1 수준에 그쳤고 겨우 1953년의 수출실적과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1959년의 실적과 1960년의 실적도 목표치를 한참 밑돌고 있었으니 사실상 이승만정부의 수출5개년계획은 대실패였습니다. 이걸 단순히 성장률로 평가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승만 정부하의 수출5개년계획에도 불구하고 수출 실적은 형편없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이대근의 지적이 귀담아 들을 만 합니다. 이대근은 『해방후ㆍ1950년대의 경제』라는 저서에서 이승만 정부하에서 이뤄졌던 수출 계획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정부의 수출5개년 계획은 농수산물 등 1차 산품을 위주로 한 것이었는데 수출의 핵심이었던 미국에 대한 텅스텐 수출이나 일본에 대한 수산물 수출은 정책적인 요인에 의해서 좌우되는 경향이 강해 정부의 수출 의지만으로는 목표를 기대하기 어려웠다는 것 입니다. 이대근은 경제적 요소에 대해서는 크게 고려하지 않고 수출 상대국의 정책적 요소에 좌우되었다는 점에서 수출5개년계획은 확고한 실현가능성이 크게 부족한 상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웠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이렇게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수출이 제자리 걸음을 했는가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경제사 연구자들이 직접적인 수출진흥책이 부족했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이승만 정부의 수출5개년계획이 1960년대 이후 수출에 필요한 잠재력을 축적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이상철 조차도 이승만 정부하에서는 적극적인 수출진흥책이 사실상 전무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또한 산업 육성에 필요한 자금은 거의 절대적으로 원조에 의존해야 했는데 원조자금은 수출산업이 아니라 수입대체산업을 중심으로 배분되었다는 점도 많은 경제사 연구자들이 지적하는 부분입니다.
이승만 정권기에 적극적인 수출 지원책이 부족했다는 근거로 연구자들에게 많이 이용되는 것이 바로 수출보조금입니다. 수출5개년계획이 진행 중이던 1958년~1960년까지 수출 보조금은 1달러당 1.2원에서 1.3원에 불과했는데 이것은 군사정권이 들어선 직후인 1962년에는 1달러당 21.5원으로 폭증합니다. 그리고 1963년을 제외하면 수출보조금은 계속 증가하는데 1964년에는 27.4원이던 것이 1966년에는 51.6원으로 가파르게 상승합니다. 군사정권과 제 3공화국 초기에 급격한 수출 증가가 있었던 원인으로는 이렇게 직접적인 수출지원정책이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게다가 수출5개년계획 기간인 1957년부터 1961년까지의 대외원조액이 2억7400만 달러였는데 적극적인 수출진흥책이 시행된 1962년부터 1966년까지의 대외원조액은 1억6800만 달러로 이승만 정권은 돈이 없어 적극적인 수출진흥책을 시행하지 못했다고는 보기 어려울 것 입니다.
물론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직접적인 수출보조금 지급의 부족을 외화예치제도를 통한 프리미엄으로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도 김낙년 같은 연구자들은 외화예치제도를 통한 프리미엄이 실제로는 수출해서 벌어들인 달러를 시세로 매도해서 얻는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은 과대평가된 공정환율에게 기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고 그 한계를 지적합니다.

이승만 정부가 전후 복구과정에서 어느 정도 경제를 안정시키고 향후 60년대 경제발전의 기초를 닦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의 대외 수출은 제자리 걸음이었으며 이렇다 할 적극적인 수출 정책이 시행된 것도 아닙니다. 1957년부터 시행된 수출5개년계획은 구체적인 수출 증대 방안도 없이 만들어 졌으며 결과적으로 목표액의 30% 수준을 달성하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시행된 수출 진흥책도 결과적으로는 과대평가된 공정환율에 기대는 것 이었는데 이런 방식이 계속되는한 원조 달러에 대한 의존을 끊기가 어려웠겠지요. sonnet님의 「미국의 대한원조와 경제성장의 시작」에 대해 반론하려면 이승만 시기의 수출정책이 과연 원조에 의존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나갔는가를 설명해야 할텐데 당시의 사례를 보면 그 점에 대해서는 부정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Wednesday, July 23, 2008

남한과 북한의 5개년 계획에 대한 몇 가지 잡상

지난 해에 북한 경제 관련 논문을 조금 읽다가 생각난 것들을 「북한의 50~60년대 경제성장에 대한 잡상」이라는 제목으로 끄적인 적이 있었는데 최근 sonnet님 등 여러 대인들께서 이 썰렁한 잡글을 인용해 주셔서 조회수가 대폭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이 인용된 것을 보니 박정희와 김일성의 공업화를 어떻게 볼 것이냐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더군요. 많은 분들의 견해를 접하게 되어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여러 대인들께서 이 어린양의 싱거운 글에 관심을 보여주셨으니 변변찮으나마 예전에 했던 이야기에 몇 가지 사족을 달아 볼까 합니다. 깔끔하게 정리가 안된 어수선한 글이라서 미리 읽으시는 분들께 양해를 구합니다.

먼저 남한과 북한의 5개년 계획의 성격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sonnet님이 「미국의 대한원조와 경제성장의 시작」이라는 글에서 양자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요상하게도 박정희를 싫어하는 분들은 간판이 똑같다는 이유로 박정희의 5개년 계획이 김일성의 그것을 그대로 베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근거는 전혀 없죠. 기본적으로 남한의 5개년 계획은 무역에 기반한 성장을 추구한 것인 반면 북한의 5개년 계획은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이라는 망상적 목표에 가용 자원을 싹 쓸어넣은 정신병적 도박이었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5개년 계획의 성격은 1958년 3월의 당 제1차 대표자 회의에서 채태된 결정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결정서에서는 “제 1차 5개년 계획 기간에 사회주의적 공업화의 토대를 확고히 축성함으로써 우리 공업의 식민지적 편파성과 기술적 락후성을 완전히 퇴치하고 민족경제의 자립적 토대를 더욱 공고히”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즉 5개년 계획의 목표가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에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 입니다. 해외 무역을 통한 성장을 추구한 남한의 5개년 계획과 근본적인 성격 부터가 다릅니다. 그리고 이 5개년 계획은 기본적으로 중공업에 의해 이끌어져 나갈 것 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이 회의에서 중공업이 없이는 경공업과 농업이 도저히 발전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1957년의 경제 성과를 예로 들어 중공업 우선노선을 반대한 세력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1957년의 경제적 성과는 소련과 동유럽의 막대한 경제 원조를 바탕으로 달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이 문제점에 대해서는 별로 고려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북한은 자체적으로 중공업 위주의 발전을 수행할 만한 자본이 아직 축적되어 있지 않았고 여전히 외부의 경제적 원조가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이 문제점은 김연철의 연구가 잘 지적하고 있는데 이미 전후 복구 3개년 계획이 종결된 시점에서 사회주의권의 원조는 감소추세에 있었고 북한은 축적된 자본의 부족과 기술수준의 저열함을 ‘정신력’으로 상쇄한다는 심히 일본제국주의 스러운 방식으로 나갑니다. 대표적인 것이 천리마 운동이지요. 외형적으로 보면 분명히 북한의 1차 5개년 계획은 생산량의 증대를 가져왔지만 실제로 그 내용을 분석하면 생산품의 질적 저하가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게다가 1950년대 후반기부터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에너지 공급이 감소하자 대외의존적인 북한의 중공업은 치명적 타격을 받습니다.

※ 1950년대 소련과 동유럽의 대북한 원조에 대해서는 「북한의 전후 복구에 대한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의 지원」에 조금 적은 것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시겠지만 한가지 더 이야기 하자면 1960년대 북한의 공업생산 성장률은 1950년대의 전후 복구기와 비교하면 급격히 저하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1954년부터 1960년까지의 공업 총생산액은 연평균 39%에 달했지만 1961년에 들어오면 이것은 14%로 낮아지고 1963년에는 8%로, 그리고 1964년에 17%로 증가했다가 다시 감소해 1966년에는 아예 마이너스 성장을 합니다. 북한경제는 벌써 1960년대부터 엉망이었던 것 입니다.

일단 정리하자면 김일성은 소련의 5개년 계획을 모방해 지속적인 중공업화를 추진했지만 이것은 북한 자체의 경제적 역량 미비로 실패하게 됩니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중공업화는 근본적으로 국가 자체의 자기완결적 경제체제를 만드는 것이 목표인데 이것은 제한된 자원을 중공업에 올인하는 도박이기 때문에 위험도가 높은 정책입니다. 스탈린 시절의 소련은 자체적인 경제적 자원 규모가 컸기 때문에 중공업화로 인한 후유증을 자체적으로 어느 정도 흡수할 수 있었지만 경제 규모가 작은데다 외국의 원조에 의존한 북한은 실패할 경우 그 충격을 흡수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실패하면서 북한 경제는 1960년대 내내 심한 부침을 거듭하며 침체에 빠졌는데 김일성은 끝까지 중공업화를 포기 하지 않기 위해서 1970년대에 서방의 자본을 통한 중공업화를 추진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 아시다시피 대 재앙이었습니다. 지난 글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1970년이 되면 이미 남한은 전체 수출의 50% 이상을 경공업 제품으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출 기반을 마련했지만 1970년대 초반 국제 경제체제에 발을 담근 북한은 여전히 1차산업 위주의 수출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일쇼크로 인한 원자재가 하락은 북한에게 결정타로 작용했지요.

그리고 다음으로는 「원조라는 관점을 약간 확장해 보면...」이라는 기린아 님의 글에 인용된 도표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저는 처음에 이 도표를 봤을 때 이 도표가 10년 단위의 수출 통계를 정리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진 책을 몇 권 뒤져보니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도표는 이대근의 『한국무역론』(2003)에 실린 도표와 비슷한데 이대근과 같은 자료를 참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대근의 한국 무역론에 실린 도표는 1961년과 1970년을 기준으로 한 수출상품의 구성 변화를 나타낸 것 입니다. 즉 기린아님의 블로그에 인용된 표의 “1960”은 아직 박정희가 집권하기 전인 1961년의 수출구조를 나타내는 것이고 “1970”은 글자 그대로 1970년의 수출구조를 보여주는 것 입니다.

이대근의 연구에 따르면 1961년도의 수출은 1위가 철광석(13.0%), 2위가 중석(12.6%), 3위가 생사(6.7%), 4위가 무연탄(5.8%), 5위가 오징어(5.5%), 6위가 활선어(4.5%), 7위가 흑연(4.2%), 8위가 합판(3.3%), 9위가 쌀(3.3%), 10위가 돼지털(3.0%)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1차 5개년 계획의 성공과 뒤 이은 2차 5개년 계획의 성공으로 이런 구조는 급격히 변화합니다. 1970년의 수출 구조를 보면 1위는 섬유류(40.8%), 2위는 합판(11.0%), 3위는 가발(10.8%), 4위는 광산물(5.9%), 5위는 전자제품(3.5%), 6위는 과자류(2.3%), 7위는 신발류(2.1%), 8위는 담배(1.6%), 9위는 철강제품(1.5%), 10위는 금속제품(1.5%)로 변화되어 있습니다. 즉 이미 1960년대 중반 이후 남한의 수출구조는 1차산업에서 2차산업으로 변화해 있었고 1970년의 수출구조 통계는 그 것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 입니다. 북한이 여전히 1차산업 생산품 위주의 수출을 구상하고 있을 때 남한은 이미 오래 전에 수출구조를 혁신하는데 성공한 것 입니다. 물론 김낙년이 지적한 것 처럼 1960년대 남한의 공업화는 부실한 재무구조를 가진 수출기업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지만 시작부터 제자리에서 부침을 거듭하다가 스스로의 모순에 짓눌려 자빠져 버린 1960년대의 북한의 공업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대성공이었습니다.

1949년 5월 영등포 미군장교클럽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것은?

1949년의 주한미군사고문단 문서들을 읽다 보니 중간에 아주 재미있는 문서 하나가 나왔습니다. 바로 1949년 5월 영등포 미군기지의 장교클럽에서 판매된 물품들의 목록입니다. 이 목록은 클럽의 지배인인 J. C. Harold 상사가 작성하고 클럽 담당 장교인 William R. Alderman 중위가 서명한 것인데 구체적인 내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Officers Club Yong Dung Po Installation Merchandise Inventory


저 내역에 따르면 1949년 5월 클럽에서 가장 많이 팔린 물품은 코카콜라였고 그 다음은 맥주였습니다. 이 두 품목의 판매량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다른 물건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이 당시 한국 근무는 극도로 인기가 없었고 한국으로 발령나는 장교나 사병들은 거의 대부분 한국 생활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많은 장교들은 한국 생활의 고달픔을 콜라나 맥주를 마시고 수다를 떨면서 달랜 모양입니다.

어쨌든 꽤 재미있는 자료입니다. 만약 다른 시기의 자료도 있었다면 더 재미있는 비교가 가능했겠지만 5월 한달치 밖에 못구한게 조금 아쉽군요.

그리고. 어쨌든 결론이 없으면 심심하니 한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승리의 코카콜라!

Sunday, July 20, 2008

수령님의 꿈도 가끔은 이뤄진다

지금은 미라가 되어 세계에서 가장 괴상한 관광상품이 되신 수령님께서는 살아 생전에 많은 꿈을 꾸셨습니다. 수령님은 북조선 인민들이 모두 기와집에 살면서 이밥에 고깃국을 먹을 날을 꿈 꾸셨으며 북조선 전체를 지상낙원으로 만들 것을 꿈꾸셨습니다.

물론 이건 꿈으로만 그쳤고 실현된건 없습니다.

그런데.

수령님이 꿈 꾼 것 중에서 이뤄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전에 한번 내용을 소개했었던 『Kim Il Sung in the Khrushchev Era』라는 책의 51쪽에는 수령님께서 기계공업을 육성해 미래에는 각국에 Made in DPRK 로고가 새겨진 기계를 수출한다는 포부를 밝히셨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 꿈은 실현되었으니...


정밀기계인 미사일은 북조선의 주요 수출품이 되었습니다.

Friday, July 18, 2008

대인배 워커 장군

1950년 11월, 슬금 슬금 중국 인민해방군의 한국전쟁 개입이 확실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미 제 1기병사단은 운산 전투에서 중국군에게 타격을 받았으며 최전선에서는 다수의 중국군 포로가 생포되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미군 지휘관들은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무렵 8군 사령관 워커 중장도 전선 시찰을 나가서 중국군 포로를 심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물론 워커 중장도 중국군의 본격적인 개입을 우려하고 있었지만 그는 불안감을 느끼는 부하들을 생각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 이 녀석은 중국인인것 같아. 하지만 LA에 멕시코인이 많다고 해서 LA를 멕시코 도시라고 하진 않잖아."

"Well, he might be Chinese, but remember they have a lot of Mexicans in Los Angeles but you don't call LA a Mexican city."


David Halberstam, 『The Coldest Winter : America and the Korean War』, Hyperion, 2007, p.383

Thursday, July 17, 2008

총통각하 생가방문 + 잘츠부르크, 린츠

바로 전날에는 아주 편하게 잘 잤습니다. 기분 좋게 잠을 잘 자서 그런지 평범한 아침 식사도 아주 근사하게 느껴지더군요.


아침식사도 즐겁게 마치고 호텔을 나섰습니다. 호텔을 나와서 호텔 앞에 붙은 설명을 보니 300년 정도 된 호텔이더군요.


그런데 브라우나우 암 인 같은 시골에는 왜 왔느냐?

바로 이분 때문에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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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안 백만볼트!!!

그렇습니다. 이 시골동네에는 이분의 생가가 있는 것이죠.

바로 이 집입니다.


총통의 생가이긴 하지만 총통각하는 그다지 착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기념비는 당연히 없습니다. 대신 집 앞에는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추모비가 대신 서 있습니다.




히틀러 생가의 바로 옆 건물은 엑스박스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게임가게가 들어 앉아 있었습니다. 이 가게는 덤으로 포르노도 취급하더군요.


히틀러 생가로 가는 길에 지나갔던 탑인데 돌아가면서 보니 1966년에 재건한 탑이더군요. 처음 봤을 때는 꽤 오래된 물건인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콘크리트로 만들었던 예전의 광화문을 생각하니 복원 하나는 잘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브라우나우 시내(라고 해봐야 얼마 안되는)를 잠시 구경했습니다.

브라우나우의 Rathaus. 이런 작은동네의 Rathaus는 뭐라고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간단히 시내 구경을 마친 뒤 잘즈부르크로 가기 위해서 기차역으로 돌아갔습니다.



린츠와 마찬가지로 잘즈부르크도 기차를 두 번 갈아타야 합니다.


독일도 그렇지만 시골의 철도 노선은 중간 중간 귀여운 간이역들이 많아서 여행객들을 즐겁게 합니다.


물론 지나가는 풍경들도 마음을 편하게 해 주지요. 여름철에 왔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그리고 잘즈부르크에 도착했습니다. 만약 전날 기차에서 졸지만 않았다면 오후 늦게 브라우나우 암 인에 도착해 히틀러 생가를 구경한 뒤 다시 밤 기차로 잘즈부르크로 돌아왔을 텐데 졸다가 린츠까지 가는 바람에 계획이 어긋나 버렸습니다.



역 앞에는 1차 대전당시 Kaiserschützen 연대들에 소속된 전몰용사들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예술의 도시 입구에서 전쟁의 흔적을 마주치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Kaiserschützen 연대 전몰자 추모비

※ Kaiserschützen에 대한 영문판 위키피디아 항목은 매우 소략합니다. 독일어판 위키피디아 항목이 훨씬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더군요.

시간이 넉넉하다면 역에서 구시가지 중심까지 걸어갔겠지만 이미 반나절은 날려먹은 터라 별수 없이 버스를 탔습니다. 일단 성당광장과 잘즈부르크 성을 우선적으로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성당 광장에는 커다란 체스판도 있더군요. 사진으로는 많이 봤는데 직접 보니 더 재미있어 보였습니다.




성당 내부는 매우 근사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사진을 모두 말아먹었습니다. 제대로 찍힌게 한 장도 없어서 못 올리게 됐습니다.;;;;;

그리고 다시 성당광장으로 나와 잘즈부르크 성으로 올라가는 전동차를 타러 갔습니다.

목표가 보인다!!!



전동차를 타고 올라가는게 예전에 한 번 가봤던 하이델베르크 성이 생각나더군요. 물론 반쯤 폐허가 된 하이델베르크 성과는 달리 잘즈부르크 성은 아주 상태가 양호해서 즐거웠습니다만.

산 꼭대기로 올라가니 전망이 정말 좋았습니다!



잠시 경치를 감상한 뒤 성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성 내부의 많은 구역을 관람할 수 없었습니다. 당장 기념품 가게 하나와 화장실을 제외하곤 다른 부대 시설들도 문을 닫았더군요. 비수기라 그런건지... 달리 설명문도 없어서 영문을 모르겠더군요. 여름에 다시 오라는 건지...(물론 여름에 또 간다면야 저는 정말 좋겠습니다만.)


그런데 성 안에서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설마 오스트리아에도 허 총재님이 공화당 지부를 만드셨나 싶었습니다!


성에서 내부를 관람할 수 있었던 장소는 몇 군데 되지 않았습니다.

한 방에는 잘즈부르크성이 건립된 당시 부터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기 까지의 변화과정을 모형으로 전시해 놓고 있었습니다. 꽤 재미있더군요.









이 방 말고 감옥으로 쓰이던 작은 방도 구경했는데 너무 어두워서 제 고물 똑딱이로는 사진이 잘 안나오더군요. 전망대 까지 올라가는데 중간에 아무 사진도 없으면 휑할것 같아 그냥 복도 사진을 한 장 올립니다.


성 위의 전망대로 올라가니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어서 눈을 뜨기가 조금 어려웠습니다. 다행히 금방 바람이 잦아 들더군요.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 보다 보니 꽤 멋진 집이 한 채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작은 지도에는 별 다른 설명이 없는걸 보니 유명한 건물은 아닌 것 같은데 경치 하난 좋더군요.


전망대 위에 서서 한참 경치를 구경하다 보니 갑자기 미나스 티리스의 성벽위에 올라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거 영화를 너무 열심히 봤나...



다음으로는 마리오네트를 전시해 놓은 방이 있었는데 이건 뭔가 잘즈부르크 성과 안 어울리는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군사시설이었던 건물에 인형을 전시해 놓으니 뭔가 괴이한 느낌이 들더군요.


잘즈부르크 성의 유명한 곳 몇 군데를 구경할 수 없어서 아쉽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냥 내려왔습니다. 다른 관광지들도 다 비슷하지만 왜 이렇게 겨울에는 구경하지 못하는 곳이 많은지 모르겠네요.

내려와서 간식으로 슈니첼을 넣은 샌드위치를 사 먹었습니다. 뜨끈뜨끈 했다면 좋았겠지만 원래 이 어린양은 느끼한 것을 좋아하는 지라 먹을만 하더군요.


그리고 구시가지 구경을 계속 했습니다. 중간에 모차르트 생가에도 들렀는데 사진은 찍지 않았습니다.

St.Blasius Kirche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니 역시 모차르트를 벗겨먹고 사는 동네라는걸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도플러의 생가도 잘츠부르크에 있다는건 이날 처음 알았습니다.


다음으로는 모차르트가 이사해서 살았던 집으로 가 봤습니다. 모차르트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관광객들의 유로를 빨아먹는 곳이죠.


기념관 내부의 전시물 구성이나 배치는 만족스러웠습니다. 중간에 모차르트가 여행했던 지역을 표시해 주는 대형 지도도 있었는데 이게 가장 멋지더군요.





모차르트 기념관을 구경한 뒤 잘츠부르크 중앙역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시간이 넉넉했다면 Leopoldskron을 구경하고 싶었는데 여긴 나중에 여름철에 오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쉽지만 이미 시간을 너무 많이 썼는지라...


그리고 다음 목적지인 린츠로 향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인스부르크→브라우나우 암 인→잘츠부르크→린츠 순서가 되어야 했는데 하필 전날 기차에서 졸다가 잘즈부르크를 지나쳐 버려서 인스부르크→린츠→브라우나우 암 인→잘츠부르크의 순서가 되다 보니 린츠 구경은 애시당초 물건너 갔습니다. 지도를 보면 아시겠지만 잘츠부르크에서 브라우나우로 가는 거리가 린츠에서 브라우나우로 가는 거리보다 훨씬 짧지요. 정말 이럴땐 시간이 너무 아깝습니다.


하지만 그냥 린츠를 지나치기도 아쉬워서 잠시 들러 저녁이나 먹고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시내 구경을 잠시 하다가 혹시 뭐 재미있는 책이 없을까 싶어 한 대형서점에 들어갔는데 2차대전사 서적은 개설서들 뿐이고 톰 크루즈 자서전 같은 것만 잔뜩 쌓여 있더군요. 역시 헌책방이 최고 입니다.


저녁은 터키 요리 비스무리한 음식을 파는 터키인 가게에서 먹었습니다. 터키 요리를 독일인들 입맛에 맞게 바꾼 음식들을 팔았는데 마치 한국의 중국집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한 뒤 마지막 목적지인 빈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렸습니다. 여행의 마지막이 보이기 시작하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즐겁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빈으로 가는 마지막 ICE를 기다리면서 맥주를 한 병 마셨습니다.

Wednesday, July 16, 2008

황당한 댓글

지난달에 올렸던 뉴라이트 대안 역사교과서...라는 포스팅에 '산마로'라는 양반이 괴상한 댓글을 달았습니다. 철지난 글에 댓글을 다는 건 둘째치고 댓글의 내용이 괴이하기 짝이 없더군요.


자 그렇다면 아래의 '기본적인' 문제들이 과연 합의가 필요한 것인지 방문객 여러분들께서 판단해 주십시오.

1. 1972년 미국과 중국은 국교를 수립했다.

2. 김대중은 1960년 처음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3. 박정희는 '관동군' 장교였다.

4. 1973년 남북 대화가 단절된 후 1992년 까지 남북간의 공식적인 접촉은 없었다.

제가 본문에서 지적한 내용은 뉴라이트 역사교과서가 위에서 언급한 것 같은 '이미 합의가 된' 기초적 사실 조차 오류를 내고 있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런데 글의 요점이 뭔지도 모르면서 봉창두드리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기가 차는군요.

아주 쿨~한 오마이뉴스


방금 전에 캡처한 오마이뉴스 화면입니다.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에 대한 기사가 어디쯤 있는지 한 번 찾아 보십시오.

Monday, July 14, 2008

착잡

예전에 어떤 일을 할 때 많은 도움을 주신 선생님이 대구에 계신데 오늘은 그 분께 안부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많이 쇠약해 지셔서 귀도 어두우시고 거동도 불편하시더군요. 3년전에 뵜을 때는 정정하시고 말씀도 잘 하셨는데 이제는 기억력 빼고는 다 안좋아 지셨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될수 있는대로 자주 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많이 아쉽더군요. 생각해 보면 3년 동안 나름대로 이런 저런 일을 한다고 정신없이 돌아다니기만 했는데 그러는 동안 고마운 분들을 너무 많이 잊고 살았습니다. 앞으로는 반성을 좀 해야 겠군요.

사람이 늙고 쇠약해 지는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래도 막상 아는 사람이 그렇게 되면 슬픈게 사실입니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협상에 대한 강인덕의 비판

sonnet님이 How Communists Negotiate라는 책을 언급하시면서 최근의 대북정책에 대한 보수층의 불안감에 대해서 언급을 하셨습니다. 물론 저나 이곳에 들러주시는 많은 젊은(?) 분들이 보시기에 60넘은 분들의 대북관은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많은 것이 사실인데 그렇다고 해도 이걸 그냥 ‘수구꼴통의 망상’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한심한 일이지요. sonnet님의 글을 읽고 생각난 내용이 하나 있어서 여기에 발췌해 봅니다.

2000년 6월 정상회담을 앞두고 우리 측에서는 이번에 북한이 경제 협력 문제를 들고 나올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당시 일본에 있던 나는 김정일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조국통일의 기본원칙 문제를 들고 나올 것이라고 짐작하였음. 만일 김 대통령이 북한의 통일 3대원칙 주장에 잘못 대처하면 주한미군 철수 주장의 명분을 주고 이용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나는 1999년 평양출판사가 조성박 이름으로 출판한 ‘김정일민족관’의 제10장 조국통일관을 반드시 숙지하고 회담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고위대화담당에게 이 책 2권을 사서 보냈음.
오랜 경험에 비추어 북한과 대화를 할 때는 우리의 논리대로 해야지, 북한의 논리대로 하면 안됨. 따라서 우리는 평화를 앞세우고, 민족자주라는 말을 쓰더라도 우리식의 해석이 담기는 작품이 나오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음. 만일 북한식 해석이 담긴 작품이 나오면 그것은 재앙이 됨. 바로 ‘6•15 남북공동선언’의 제2항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합의한 것이 거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음
‘6•15 남북공동선언’은 남북정상 간에 합의 한 역사적 문서이지만 이 선언에는 평화에 관한 조항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 남북대화의 기준이 될 수 없으므로 우리 정부는 북한과 평화에 관한 새로운 합의를 보아야 함. 그런 의미에서 남북한 총리 간에 1991년 12월 13일에 합의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가 남북대화의 기준이 될 수 있음.
‘6•15 남북공동선언’ 발표 후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 북한이 전략적으로 변화하여 김대중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는 분석이 있었는데, 정상회담 이후 ‘6•15 남북공동선언’의 각 조항에 대한 북한의 주장과 그 후의 북한태도를 보면 김정일이 김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응한 것은 전략적으로 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됨. 그 후 김대중 정부는 북한에 대한 희망적 기대를 지나치게 강조한 때문에 우리 사회의 대북관이 우려될 정도로 흔들리게되었음.
우리가 북한과 대화를 할 때 반드시 검토하고 확인해야 할 점은 북한이 광복 이후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민족해방혁명과 인민민주주의 혁명 노선이 변화되고 있는가? 남한 내의 어떤 계층과 어떤 명분으로 통일전선을 형성하려 하는 가를 면밀히 검토하면서 대처해가야 함.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우리가 겪은 것 이지만, 우리 정부가 앞장서서 북한이 주한미군 주둔을 요해했다고 본 것이나, 국가연합에 동의하고 연방제를 포기하였다고 해석하였던 어리석은 잘못은 다시 하지 않아야 할 것임. 우리에게 있어 북한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은 남북대화 준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음.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의 견해, 『박정희 시대와 한국현대사 : 연구자와 체험자의 대화』, 선인, 2007, 259~260쪽

강인덕 전 장관의 이야기는 보수들의 위기감이 어떤지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야기가 생각난 이유는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오늘 이런 기사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북한은 이명박이 ‘6.15와 10.4 선언에 대한 입장을 명백히 밝히지 않고 이를 과거의 남북 합의들과 뒤섞어 어물쩍 넘겨버렸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왜 북한은 다른 회담에 비해서 6.15에 무게를 둘까요? 어쩌면 위에서 언급한 강상욱 선생의 지적처럼 이전의 합의와 달리 북한의 의도가 상당 부분 관철되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수구꼴통으로 몰려서 욕을 바가지로 먹을수 있겠지만 꽤 흥미로운 상상이 가능한 부분입니다.

Sunday, July 13, 2008

러시아의 병력동원과 철도 문제

국민개병제와 이에 기반한 동원체제에 대해서는 이미 이 블로그에서 여러 차례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러시아의 동원체제와 철도망의 확충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대규모의 국민동원은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처음 그 위력을 떨친 이후 세 차례에 걸친 독일 통일전쟁에서 그 형태가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특히 독일 통일전쟁에서는 동원체제가 철도라는 현대적 기술과 결합해 그 잠재력을 세계에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미국과 영국을 제외한 세계의 주요 열강들은 모두 독일과 유사한 동원체제를 만들었으며 19세기가 저물 무렵에는 미래 전쟁에서 동원체제가 더욱 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는 점은 명백해 졌습니다.

러시아 또한 세계 유수의 육군국으로서 동원체제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러시아의 방대한 인적자원이 효율적 동원체제와 결합된다면 그 위력은 그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의 동원체제는 다른 국가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를 한 가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러시아의 광대한 국토였습니다.

러시아는 막대한 잠재력을 가진 대국이었지만 산업화에는 뒤쳐졌기 때문에 크림 전쟁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맙니다. 크림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러시아의 철도 총 연장은 1,000km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크림 전쟁이 발발하자 이것은 러시아의 결정적인 약점 중 하나로 작용합니다. 영국과 프랑스 군대는 증기선을 이용해 신속하게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었는데 철도가 부실한 러시아는 막대한 인적자원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크림 반도로 병력을 동원하는데 어려움을 겪은 것 입니다.
1863년 폴란드 봉기를 진압하는데 상트 페테르부르크-바르샤바 철도가 유용하게 활용되었지만 이때 까지도 러시아의 철도 총연장은 3,000km에 불과했습니다. 러시아의 국가 재정은 엉망이었기 때문에 철도 증설은 매우 더딜 수 밖에 없었습니다.

러시아의 철도 연장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적극적인 산업화를 추진한 알렉산드르 2세가 로이테른(Михаил Христофорович Рейтерн)을 재무장관에 임명한 이후 였습니다. 로이테른은 1878년 까지 장관직에 있었는데민간 자본 유치를 통한 철도 확대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러시아의 철도 연장은 20,000km 이상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군부는 민간 자본에 의해 전략적 자산인 철도가 만들어지는 것에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1864년에 참모대학의 교관이었던 오브루체프(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Обручев) 대령은 외국의 상업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는 철도는 러시아 군의 전략적 이동에는 도움이 안되는 노선이 많다고 비난했습니다. 오브루체프는 병력 동원을 위해 러시아의 깊숙한 내륙지역과 발칸 반도 방향으로의 철도 건설을 주장했습니다. 물론 이 지역들은 상업 자본에 의한 철도 건설이 부진한 지역이었습니다. 오브루체프는 신속한 병력 전개를 위해서 모스크바-쿠르스크-세바스토폴로 이어지는 노선과 바르샤바-키예프-오데사로 이어지는 구간을 대대적으로 확충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그리고 이 노선들은 모두 러시아 정부의 재정으로 건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북독일연방이 프랑스를 격파하자 러시아의 정부 재원에 의한 전략 철도 부설에 대한 논의는 한층 더 힘을 얻게 됩니다.

러시아는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독일이 승리를 거둔 이후 효율적 동원체제 구축을 위해 행정적, 기술적 개편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오브루체프는 독일 통일 전쟁 기간 동안의 철도 활용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고 꾸준히 국가 차원의 철도 건설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1873년 소장으로 진급한 오브루체프는 전쟁상 밀류틴(Дмитрий Алексеевич Милютин)에게 미래의 전쟁 계획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합니다. 오브루체프는 이 보고서에서 멀지 않은 장래에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동시에 상대해야 할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지적하고 러시아는 광대한 국토 때문에 신속한 병력 동원이 어려워 전쟁 초기에 병력에서 열세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오브루체프의 보고서는 러시아군은 동원을 완료하는데 최소 54일에서 58일이 소요되는 반면 독일은 그 절반도 안되는 20일 정도에 동원을 완료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특히 철도망이 부실한 오스트리아 방면으로의 동원은 최소 63일에서 70일은 소요될 것으로 전망했는데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심각한 전략적 결함이었습니다. 즉 전쟁 초기에 국경지대가 돌파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오브루체프의 보고서는 이런 전략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동원 시간을 벌 수 있도록 국경지대의 요새를 강화하는 한편 7,000km의 전략 철도를 추가로 증설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오브루체프가 철도 증설을 요구했던 1873년 시점에서 오스트리아의 철도는 12,000km, 독일의 철도는 22,000km 였는데 러시아의 철도는 14,000km가 완성된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국토의 크기를 비교하면 러시아가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처해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러시아에게는 불행하게도 오브루체프의 경고는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1877년 벌어진 러시아-터키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열악한 철도로 인해 작전에 많은 지장을 받았습니다. 주 전장이었던 발칸 반도 방향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러시아의 철도망이 가장 취약한 지역 중 하나였던 것 입니다. 게다가 루마니아를 통한 병력 이동은 러시아 이상으로 열악한 루마니아의 철도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또 봄철의 폭우로 인해 도로들이 진창으로 변한 덕분에 도로를 통한 병력 이동은 많은 지장이 있었습니다. 결국 병력 이동과 보급은 불과 1,000km에 불과한 루마니아의 철도망에 의존해야 했는데 루마니아의 철도는 짧은 거리 만큼이나 안전에 있어서도 문제가 많아 한 러시아 장군은 루마니아의 철도가 터키군 보다 더 위협적이라는 반농담 반진담의 논평을 할 정도였습니다.

밀류틴은 전략 철도 부설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밀류틴은 자신의재임 기간 중 철도 문제를 해결 하지 못 했습니다. 특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러시아 서부의 철도망은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도 동원계획을 작성하는 참모장교들의 걱정거리였습니다.
러시아의 총참모부는 러시아 서부를 북서, 서부, 남서, 남부 등 네 개의 구역으로 구분하고 있었는데 이 중 북서는 세 개의 복선노선이, 서부는 세 개의 복선노선과 일곱 개의 단선노선이, 남서는 한 개의 복선노선과 두 개의 단선노선이, 남부는 두 개의 복선노선과 세 개의 단선노선이 있었습니다. 1898년에 전쟁상이 된 쿠로파트킨(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Куропаткин )은 서부러시아의 철도망으로는 하루에 167대의 열차 밖에 이동하지 못하는데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812대의 열차를 동원에 활용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철도 증설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궁핍한데다 프랑스 등 서방의 자본에 의존하는 러시아는 대규모 철도 증설에 나서기가 어려웠습니다. 결국 궁여지책으로 나온 것이 서부러시아에 주둔하는 병력을 증강해서 동원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자는 방안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빌뉴스 군관구와 키예프 군관구, 바르샤바 군관구 등 세 개의 군관구에 병력이 대대적으로 증강되기 시작했습니다. 1883년 당시 이 세 군관구에 배치된 육군 병력은 227,000명이었는데 이것이 1893년에는 610,000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러시아 육군 총 병력의 45퍼센트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서부의 문제는 그럭 저럭 해결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동쪽의 문제는 전혀 해결 할 수 없었습니다! 만주 방면으로의 병력 이동은 여전히 단선에 불과한 시베리아 철도 하나에 의존해야 했고 다음 전쟁은 바로 일본과 만주에서 벌이게 된 것 입니다!
시베리아 철도는 단선이었다는 점 외에도 러일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도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러시아군 총참모부는 일본과의 전쟁이 발발할 경우 낮은 철도 수송능력 때문에 병력 이동을 3단계에 걸쳐 나눠서 실행하기로 계획을 세우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최우선 동원 순위는 프리아무르 군관구와 시베리아 군관구였고 다음 순위는 키예프 군관구와 모스크바 군관구에서 각각 1개 군단을, 마지막으로는 카잔 군관구의 예비사단이었습니다. 결국 만주 지역도 서부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사전에 충분한 병력과 물자가 집결돼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러일전쟁에서는 열강치고는 상대적으로 부실한 일본을 상대로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병력과 물자의 부족으로 고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뒤 러시아의 동원계획은 서쪽의 독일-오스트리아와 동쪽의 일본을 동시에 상대한다는 아주 골치 아픈 조건을 염두에 둬야 했습니다. 1910년에 승인된 19호 동원계획은 이런 환경을 반영해 두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한다는 가정하에 수립됐습니다. 하지만 일본과의 전쟁 가능성이 줄어들자 19호 동원계획은 1912년에 개정됩니다. 개정된 동원계획은 서부 전선에 집중하고 특히 전쟁 초기에 동프로이센을 공격해 달라는 프랑스의 요구를 반영했습니다. 1912년의 19호 동원계획 개정판은 А와 Г안으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독일이 서부전선에 주력을 동원할 경우를 상정한 것이었고 후자는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주력을 동원할 경우를 상정한 것이었습니다. Г안은 전쟁 초기에 독일의 주공을 맞아 싸워야 한다는 점 때문에 대규모 병력동원이 필요했습니다.
А안의 경우는 러시아가 선제공격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동원이 느리게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이 안에 따르면 동원 완료까지 1군과 2군은 각각 36일과 40일, 3군과 4군, 5군은 각각 40일, 41일, 38일이 걸리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만약 독일이 선제 공격에 나선다면 20일 정도의 병력 동원 기간만으로도 공격에 나설 수 있겠지만 독일이 서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할 경우에는 독일에 비해 느린 동원속도가 심각한 문제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러시아는 철도망의 부족을 고려해서 러일전쟁 이후에도 서부지역 군관구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1차대전 초기의 전역에서 철도 문제는 이전의 전쟁들 만큼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서부와 동부에서 동시에 전쟁이 발발했다면 7만km 수준의 철도망으로는 병력 동원에 어려움을 겪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 입니다.


참고서적
로스뚜노프 외, 『러일전쟁사』, 건국대학교 출판부, 2004
Stephen J. Cimbala, 「Steering Through Rapids : Russian Mobilization and World War I」,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9, No.2(June 1996)
Jacob W. Kipp, 「Strategic Railroads and the Dilemmas of Modernization」, 『Reforming the Tsar’s Arm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Indiana University Press, 1992/2000
Brian D. Taylor, 『Politics and the Russian Army : Civil-Military Relations, 1689-20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Saturday, July 12, 2008

스탈린의 10월 혁명 24주년 기념연설

1941년 11월 7일,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향해 대 공세를 시작한 직후 스탈린은 10월 혁명 24주년을 기념하는 열병식을 한 뒤 꽤 유명한 연설을 합니다. 이 연설문은 꽤 유명해서 인터넷에서도 영어로 번역된 내용을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지난 포스팅, '스탈린의 7월 3일 라디오 연설'과 마찬가지로 『쏘련의 위대한 조국전쟁에 대하여』(1947)라는 스탈린 연설문집에 실린 ‘조선어’ 번역문을 약간 고쳐서 인용하려 합니다.

붉은육군과 붉은해군 동무들, 지휘관, 정치일꾼, 남녀노동자, 남녀콜호즈원, 지식노동자, 우리 원수의 후방에 독일 강도집단에게 일시적으로 점령된 형제자매, 독일 강점집단의 후방을 파괴하는 우리의 영광스러운 남녀 빨치산(원문에는 무려 “의병”으로 되어 있습니다)들이여!
나는 소비에트 정부와 우리 볼셰비키당의 이름으로 위대한 사회주의 시월혁명 제 24주년을 맞아 여려분께 경하와 축수(祝壽)를 드립니다.

동무들! 오늘은 고통스러운 상황아래서 시월혁명 24주년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독일 강도집단의 배신적 침범이 우리에게 강요한 전쟁은 우리나라에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시적이지만 수많은 주를 잃어 버렸으며 원수들은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의 문 앞에 다다랐습니다. 원수들은 첫 타격 이후 우리 군대가 혼비백산하고 우리가 굴복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원수들은 크게 오산했습니다. 우리 육군과 해군은 일시적으로 실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 전선에 걸쳐 적군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적군에게 과중한 손실을 끼치었고 우리나라는 거국일치로 우리 육군과 우리 해군과 함께 독일 침략자들을 격멸하기 위해 단일한 전투 진영에 결속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보다 더 위태한 처지에 있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10월 혁명 1주년을 기념하던 1918년을 기억해 봅시다. 그 당시에 우리 강산의 4분의 3이 외국 군대 간섭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 카프카즈, 중앙아시아, 우랄, 시베리아, 극동을 일시 상실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동맹이 없었으며 우리에게는 붉은군대가 없었으며 단지 군대를 갓 만들기 시작했을 뿐이었고 식량이 부족하였고 무기가 부족하였으며 의복이 부족했습니다. 그때 14개국이 우리나라를 침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심하지 아니하였고 절망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때 전쟁의 불길 속에서 우리가 붉은군대를 또 우리나라를 거대한 군사기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때에 위대한 레닌의 기개가 우리를 군사 간섭자를 반대하는 진영으로 나서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군사 간섭자들을 때려 부수고 모든 잃어버린 강토를 찾았으며 승리를 이룩했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의 정세가 23년 전 보다 한껏 나아졌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23년 전과 비교하면 몇 배나 공업이나 식량이나 원료로나 할 것 없이 다 풍족합니다. 우리에게는 독일 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우리와 함께 단일한 전선을 이루고 있는 동맹국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히틀러의 폭정하에 들어있는 유럽의 모든 인민들의 동정과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조국의 자유독립을 사수하고 있는 훌륭한 육군과 해군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식량에 있어서나 무장에 있어서나 의복에 있어서나 다 심각한 부족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전체, 우리나라의 모든 인민이 우리 육군, 우리 해군을 받들면서 그들로 하여금 독일 파쇼 침략자들을 때려부수도록 돕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적 자원은 무궁무진합니다. 위대한 레닌의 기개와 그 승리의 기치가 23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를 조국을 위한 전쟁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원수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 몇몇 소인배들이 멋대로 상상하는 것 처럼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악마가 스스로를 묘사하는 것 처럼 그렇게 두렵지 않습니다. 붉은군대가 광대짓을 하는 독일군대를 여러 번 도망치게 했다는 사실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습니까? 독일 선동가들의 과장된 헛소리로 판단하지 말고 독일의 실제 정세로 판단하면 독일 파쇼 침략자들이 재앙에 직면했음을 이해하는건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 독일에는 기아와 궁핍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4개월에 걸친 전쟁에서 독일은 군인 4백 50만명을 잃었고 독일은 피를 흘려가며 그 인적 자원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분노의 심정은 비단 독일 침략자의 지배에 처해 있는 유럽 인민들 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전재의 끝을 보지 못하는 독일 인민들도 느끼고 있습니다. 독일이 장기간에 걸쳐 이런 상태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몇 달후, 반년이나 설혹 일년 정도가 지나면 히틀러의 독일은 그 범죄의 무게에 눌려 반드시 붕괴될 것 입니다.

붉은육군과 붉은해군 동무들, 지휘관과 정치일꾼, 남녀 빨치산들! 전 세계에서 독일 침략자의 약탈군을 쓸어버릴 역량인 여러분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독일 침략자의 지배하에 있는 유럽의 피 예속민족들이 여러분을 그들의 해방자로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위대한 해방적 사명이 여러분의 어깨에 달려 있습니다. 이 사명을 맡은 사람으로서 그 역할을 다 하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수행하는 전쟁은 해방 전쟁이며 정의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우리의 위대한 조상 – 알렉산더 네프스키, 드미트리 돈스코이, 쿠시마 미닌, 드미트리 포잘스키, 알렉산더 수보로프, 미하일 쿠투초프의 영용스러운 모습이 여러분을 떨쳐 나서게 하기를! 위대한 레닌의 승리의 깃발이 여러분을 이끌기를!

독일 강도 무리를 철저히 격파하기 위하여!

독일 침략자들을 진멸하라!

우리의 영광스러운 조국, 조국의 자유, 조국의 독립만세!

레닌의 깃발아래서 승리를 향해 앞으로!

스탈린,『쏘련의 위대한 조국전쟁에 대하여』, 1947, 43-46쪽

덤으로, 유투브에서 영어자막이 달린 당시 스탈린의 연설 모습과 모스크바 열병식 장면을 빌려왔습니다. 유투브 만세!



Thursday, July 10, 2008

인스부르크

벼락치기 이탈리아 구경을 마친 뒤 베네치아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다시 뮌헨으로 들어왔습니다. 원래 이날의 목적지는 인스부르크였는데 인스부르크에서 내리면 새벽이라 시간이 좀 애매하더군요. 밤기차에서 잠을 푹 자고 다시 뮌헨에서 첫 차를 타기로 했습니다.


뮌헨에 도착한 뒤 바로 조금 있다가 인스부르크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5년만에 다시 오스트리아로 들어가니 아주 즐거웠습니다. 인스부르크에 가까워 질 수록 경치가 좋아지더군요.


드디어 인스부르크에 도착했습니다. 기차에서 내리자 마자 멋진 산자락과 상쾌한 공기가 반겨주니 기운이 철철 넘쳤습니다.



역에서 내린 다음에 먼저 인터넷 카페를 찾았는데 Global IME를 설치하지 못하게 막아놨더군요. 인터넷 요금이 비싸서 한국의 인터넷 신문 몇 편만 보고 바로 나왔습니다.
첫 번째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무덤이 있는 Hofkirche로 향했습니다.

가는 길에 소림사 무승들의 공연(?) 포스터를 발견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밥벌이를 하겠다니 왠지 승려들이 목사보다 백억배는 나아 보이더군요.

돈 많이 버시오!

그리고 거리를 걸으면서 산이 병풍같이 둘러쌌다는 표현은 이럴때 쓴다는걸 느꼈습니다. 어느 곳에서건 산이 눈 안에 가득 차더군요.



Hofkirche로 가는 길에 잠깐 프라들 교회를 들렀습니다. 예전에 인스부르크에 관련된 정보를 찾다가 이 사이트에서 프라들 교회의 사진을 보고 아주 마음에 들어서 꼭 방문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교회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정문을 닫아 놨더군요.

여기다 스위스 1프랑 한개 던졌습니다


Hofkirche로 가는 길에 예수회교회도 하나 있더군요.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Hofkirche에 도착했습니다. 이 교회 건물에는 티롤 민속박물관도 함께 있지요. 박물관은 내부 공사중이라 구경하지 못하고 교회 내부만 구경했습니다.


Hofkirche는 위에서도 언급했듯 막시밀리안 1세의 관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사진으로만 보다가 실물을 보니 엄청나더군요. 특히 관의 각 면에 새겨진 부조들이 압권이었습니다. 막시밀리안 1세의 생전 업적들을 묘사하고 있었는데 주로 전쟁과 관련된 부조가 많더군요. 돈이 넉넉했다면 도록을 구입하고 싶었는데 돈이 없으니....


관의 주변에는 막시밀리안 1세의 조상들을 묘사한 청동상들이 서 있습니다.



청동상들은 모두 지체높은 양반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많은 수가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 재미있는 것을 몇 개 뽑아보면...

클로비스 1세

루돌프 1세

동고트왕 테오도릭

강철의 에른스트(Ernst der Eiserne), 막시밀리안 1세의 할아버지입니다

아더왕;;;;;

청동상들의 흥미로운 점이라면 먼저 청동상의 주인공들 중 일부는 막시밀리안 1세의 치세로 부터 거의 천년 전의 사람이다 보니 갑옷 등을 대충 그럴싸하게 묘사했다는 점 입니다. 대표적인게 동고트왕 테오도릭이죠. 그리고 아더왕 같이 전설의 인물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고대~중세의 통치자들이 자신의 가계를 뻥튀기 하는건 흔한 일이었는데 그래도 아더왕은 약간 뜬금 없었습니다.



※ Hofkirche의 청동상들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고하십시오.

Hofkirche 구경을 마친 다음에는 인스부르크 시내 구경을 했습니다. 먼저 관광객으로 왔으니 관광객 등골을 빼먹는 기념품 점에 들러주는 것은 기본 센스라 하겠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인스부르크의 명물인 황금지붕(Goldenes Dachl)을 구경했습니다. 인스부르크 시가지의 건물들은 알록달록하게 장식을 잘 해놓아서 예전에 갔던 바드 퇼츠와 비슷한 분위기였습니다.



황금지붕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한 방 찍은 뒤 근처의 카페에서 간식을 먹었습니다. 메뉴는 굴라쉬 수프.



그리고 비엔나커피(Wiener Melange)를 한 잔 마셨습니다. 도데체 비엔나커피가 없다는 헛소문은 누가 지어낸 겁니까?


시내 구경을 한 뒤 시계를 보니 대략 오후 세시가 됐습니다. 원래는 암브라스(Ambras)성에 가서 갑옷과 무기를 구경하려고 했는데 일정이 촉박하다 보니 도저히 시간이 안 되겠더군요. 이럴땐 언제나 그렇듯 나중에 또 오라는 하늘의 계시(???)로 받아 들이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익숙한 이름...

그래서 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점심을 빵 한개와 수프로 때워서인가 배가 고프더군요. 역에서 간단히 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브라우나우 암 인(Braunau am Inn)으로 가기 위해서 잘즈부르크행 기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기차에서 졸다 보니 잘즈부르크를 지나쳐 버렸습니다. 잠에서 깨니 린츠 근처에 와 있더군요. 황급히 린츠 역에서 내리니 브라우나우 암 인 방향으로 가는 마지막 기차가 있었습니다. 브라우나우 암 인은 한국으로 치면 면 소재지 정도의 작은 마을이어서 다시 한번 기차를 갈아 타야 했습니다.


기차를 갈아타고 한 시간 정도 더 가서 브라우나우 암 인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이 기차 종점이더군요.



브라우나우 암 인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저는 겨울비 맞는 것을 꽤 좋아하긴 합니다만 약간 피곤한데다 짐이 많으니 마냥 좋지만은 않더군요. 브라우나우 암 인은 아주 작은 동네인데다 야밤이니 모든 가게가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계속 걸어서 시내 중심에 도착하니 호텔 간판이 보이더군요.

잇힝~

호텔에 들어가니 마치 영화나 TV에 나올법한 품위 있는 노인 한분이 카운터에 앉아 있었습니다. 겨울이라 손님이 없어서 그런지 아주 반가워 하시더군요. 시골 호텔이라 방값이 매우 쌌습니다. 그리고 욕조가 있다는게 너무 반갑더군요.

Tuesday, July 8, 2008

음베키에겐 애시당초 기대를 말았어야지

Zimbabwe sanctions could lead to civil war, Mbeki warns leaders - The Guardian

짐바브웨가 여전히 막장을 달리고 있는 가운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빵 음베키는 서방 지도자들에게 무가베에 대한 강력한 압박은 짐바브웨를 내전으로 몰고갈 수 있다고 언급했다고 합니다. 물론 음베키의 주장은 타당성이 제법 있다고 생각되지만 평소 그의 행태로 볼 때 그냥 가재가 게편을 드는 것 같은 느낌이 계속 드는군요. 음베키와 무가베의 정책 몇 가지를 놓고 보면 둘 다 아프리카에 백인이 엉덩이를 깔고 있는 것 자체를 극도로 혐오하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사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평가를 내리는게 굉장히 곤란한 것 같습니다. 일단 제가 제 3국인에 특별히 관련 지식이 깊은것도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말이죠. 역시 식민통치를 경험한 조선사람의 입장에서는 백인을 경멸하는 현지인들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백인 중산층 없이 국가가 제대로 돌아가느냐면 그건 결코 아니거든요. 뭐, 시간이 흐르면 해답이 나오겠지요. 그때까지 신문이나 보고 있어야 겠습니다.

이전글 - 막장을 달리는 짐바브웨 사태

추가 - 가디언 기사의 아랫 부분에 황상폐하의 말씀이 실렸습니다. 역시 세계를 자유로서 교화하겠다는 황상폐하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경하할 일 입니다.

"I wish for a world free from tyranny : the tyranny of hunger, disease; and free from tyrannical governments. I wish for a world in which the universal desire for liberty is realised. I wish for the advance of new technologies that will improve the human condition and protect our environments."

2차대전 중 소련군의 민족별 포상내역

채승병님이 쓰신 '독소전쟁기 소련군 야전부대의 민족분포'라는 글을 읽고 나니 저도 재미있는 통계가 하나 생각났습니다. 아래의 표는 Народы Кавказа и Красная Армия : 1918-1945 Годы라는 책의 292쪽에서 293쪽에 걸쳐 실려있는 통계인데 1942년 3월 2일 시점에서 정리한 민족별 포상 내역입니다.

А. Ю. Безугольный, 『Народы Кавказа и Красная Армия : 1918-1945 Годы』, ВЕЧЕ, 2007, 292~293

역시 재미있는 점 이라면 유대인이 포상에서도 상대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전쟁 종결 시점의 통계도 궁금하긴 한데 여기서 인용한 책에는 달랑 1942년 3월의 통계만 실려있더군요.

추가 – 소련의 민족 분류는 약간 괴상하게 이뤄진 것이 사실입니다. 전에 제가 올렸던 “주머니안에 있는 거스름돈의 처리”라는 포스팅에도 나와 있지만 소련의 민족 구분은 인구조사가 실시 될 때 마다 여러 차례 바뀌었습니다. 즉 과학의 탈을 뒤집어쓴 정치였던 셈이지요.

Sunday, July 6, 2008

독일장교 비더만의 소련 포로수용소 생활

역시, "독일육군 제 5기갑대대에 대한 짧은 이야기"에서 파생된 글 입니다.

바보이반님이 재미있는 댓글을 달아주셨더군요. 바보이반님의 댓글을 읽고 나니 전에 한번 읽었던 비더만(Gottlob Herbert Bidermann)의 회고록이 생각났습니다. 비더만은 평범한(?) 보병사단의 평범한(?) 장교였지만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동부전선에서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인데다 결정적으로 포로생활을 아주 운좋게 마친 경우입니다. 비더만의 회고록에서 그의 포로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일부 발췌해 봤습니다.

1945년~1946년 겨울의 이야기는 다른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비참했던 것으로 묘사됩니다.

작업반은 눈 덮인 숲으로 보내져 그 곳에서 수작업으로 나무를 베어야 했다. 숲에서 하는 모든 작업은 기계의 도움 없이 행해졌다. 우리는 도끼로 나무를 베고 톱으로 나무를 켠 뒤 다시 그것을 해머와 쐐기로 쪼갰다. 이런 중노동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식량이 배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 안가 최초의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수용소 주위의 토지는 거의 콘크리트 만큼이나 단단하게 얼어 붙었기 때문에 사망자의 시체는 보다 부드러운 늪지대에 매장해야 했다. 우리는 늪지의 땅을 긁어서 파내어 죽은 사람들이 안식을 취할 곳을 만들었다. 나는 시체 매장반으로 작업을 나갔을 때 산딸기를 발견해서 그것을 비타민을 섭취할 수 있었다.
사망자 중에는 자로티(Sarotti)가 있었다. 물론 자로티는 그의 성은 아니었지만 그는 유명한 북해 지역 항구도시의 사업가 집안출신이었으며 북부 독일의 자로티 초콜렛 공장을 경영했었다. 그의 침상은 바로 나의 아래에 있었는데 어느날 아침 내가 잠에서 깼을 때 나는 그의 머리가 한 쪽으로 젖혀져 턱에 약간의 피가 말라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자로티의 시체를 밤 사이에 죽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늪으로 가져가 매장했다.
사망자의 숫자는 계속해서 급증했고 그 중에는 온스트메팅엔(Onstmettingen) 출신의 교사 헤르만과 엔드링엔(Endringen) 출신의 젊은 드레셔,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이 포함되었다. 1945년과 1946년 겨울 사이에 내가 있던 수용소에 있던 포로 중 3분의 1 이상은 그들의 긴 여정의 마지막을 임시 공동묘지에서 마치게 되었다.

Gottlob Herbert Bidermann , Translated by Derek S. Zumbro, 『In Deadly Combat : A German Soldier’s Memoir of the Eastern Front』,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0, pp.302-303

그리고 1946년 봄이 되고 보다 큰 수용소로 이송된 비더만은 대우가 약간 개선된 점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처음으로 장교 포로들에게 특별히 배급되는 물자를 받았는데 그것은 열 다섯 개피의 담배와 하루 5그램의 설탕이었다. 사병 포로들은 마호르카 담배를 받았다.

Ibid. p.306

우리는 수용소에서 계속해서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사망률은 작년의 사망률 보다는 낮았다.

Ibid. p.307

몇 주가 지나고 몇 달이 지나갔다. 우리는 포로가 된 지 2년만에 처음으로 고향에서 온 편지를 받게 되었다. 우리는 절박하게 쓰여진 이 편지들에 답장을 보냈고 이 답장들은 우리의 가족들에게 우리가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포로수용소에 여전히 살아 있음을 알려주었다. 마침내 오스트리아 출신의 전우들과 알자스 출신의 포로들은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빈의 현명한 정치인이 포로 문제에 영향을 끼친 것 이었다. 독일 출신의 포로들도 곧 석방된다는 소문이 파다해졌다. 비록 최소한의 건강을 유지할 수준은 못 되었지만 식량 배급도 개선되었다.

Ibid. p.308

그리고 모범수(?) 비더만은 1948년에 석방되어 고향 땅을 밟게 됩니다. 이점에서 1950년에 석방된 일반 포로나 1955년에야 석방된 무장친위대나 경찰 출신 포로에 비하면 아주 행운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추가. 비더만의 회고록에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발터 셰흐터를(walter Schaechterle) 대위는 쿠어란트 집단군에서 통신장교로 있었다. 어느날 아침 셰흐터를 대위는 스페인 의용군 장교들과 함께 형편없는 식사에 항의해 노동을 거부했다. 이들은 사병들도 자신들의 항의에 참여해 주길 기대하고 행동을 했으나 사병들은 수용소내의 반파시스트 집단의 강한 압력을 받고 있어서 그렇게 할 수 가 없었다.
곧 분노한 경비병들이 막사로 쳐들어와 총부리로 장교들을 막사 밖으로 끌어냈다. 발터 셰흐터를과 두 명의 스페인인 장교는 따로 분리되어 격리 수용되었다. 그들은 사보타지 혐의로 종신형–보통 25년 정도-을 선고 받았고 키르기스탄 동쪽의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나는 셰흐터를이 이송되기 직전 그와 이야기할 기회를 얻었고 그는 자신의 부모님에게 자신이 어떻게 됐는지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뒤에 그와의 약속을 지켰다. 발터의 아버지는 비티히하임(Bietigheim)에 있는 리놀륨 공장의 이사로 있었고 2년이 넘도록 스웨덴을 통해서 아들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발터의 아버지는 소련 고위 관료들에게 막대한 양의 미국 달러를 바친 뒤 마침내 아들을 석방시키는데 성공했다. 나는 1950년대에 펠바흐(Fellbach)에서 발터를 만나 와인을 마시며 재회를 축하했다.

Ibid. p. 309

과연 달러신의 권능은 무한합니다. 자본주의 만세!

Bernd Hartmann의 5기갑연대사/5기갑대대사에 있는 문제 하나

아래의 글에서 하르트만(Bernd Hartmann)의 『Geschichte des Panzerregiments 5 und der Panzerabeilung 5』가 1945년 1월 사단의 개편 이후 기갑대대의 장비 문제에서 다른 저작들과 상충된 기술을 하고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원래 아래의 글에서 좀 더 자세히 다뤘어야 하는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러면 또 글이 중구난방으로 나가지 않을까 싶어 간략히 언급만 했습니다. 그런데 저렇게 대충 언급하고 넘어가자니 뭔가 좀 그래서 별도로 짧은 글을 하나 씁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하르트만의 저작은 2002년에 출간된 구판입니다. 이미 독일에서는 대폭 보강된 개정판이 나온지 한참 됐습니다만 아직까지 저는 개정판을 입수하지 못해서 2002년에 나온 구판을 기준으로 이야기 하겠습니다. 아마 개정판에서는 제가 이 글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문제가 수정되었을 지도 모르겠군요.

※ 개정판이 있으신 분이 이 문제를 추가로 다뤄주셨으면 합니다.

일단 하르트만의 저작은 25기갑척탄병사단과 여기에 배속된 5기갑대대가 민스크 근교에서 포위 섬멸된 뒤 제 107기갑여단을 근간으로 다시 편성된 이후까지는 다른 저작들과 동일한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즉 107기갑여단의 장비를 그대로 이어받아 판터와 구축전차를 장비했다고 나오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이 1945년 1월에 갑자기 바뀝니다. 하르트만의 책 337쪽에는 1945년 1월 1일 25기갑척탄병사단전투단이 기갑척탄병사단으로 개편되면서 5기갑대대의 기갑장비가 “돌격포”로 교체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는 것 입니다. 하지만 아래의 글에서 지적했듯 다른 수많은 저작들은 전쟁이 종결될 때 까지 5기갑대대의 주력 기갑장비는 판터였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르트만의 저작에는 돌격포로 되어 있는 것인가?
제가 처음에 이 구절을 읽었을 때는 4호구축전차를 그냥 돌격포로 표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독일군 참전자들의 회고에는 종종 4호구축전차를 그냥 돌격포로 언급하는 경우가 자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역시 하르트만의 책 342쪽에 있는 도표를 보니 4호구축전차와 3호돌격포를 혼동해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1945년 1월에 장비가 3호돌격포로 교체되었다고 명시하고 있는 것 입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자면 아래에서 언급한 다른 저작들은 모두 전쟁이 끝날 때 까지 5기갑대대는 판터와 4호구축전차, 극소수의 4호전차만을 장비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저작들은 당시의 독일군 문헌을 참고로 이런 서술을 하고 있으며 하르트만의 저작을 제외하면 모두 동일한 서술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르트만의 저작(구판)이 오류라는 것은 거의 명백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오류가 발생했을까요?

일단 하르트만의 저작은 참전자들의 회고담과 2차저작을 주로 해서 서술된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문헌 목록에 특별한 1차사료는 보이지 않더군요. 그렇다면 원래 5기갑대대 출신의 참전자가 자신이 탑승한 4호구축전차를 평소의 관행대로 그냥 돌격포로 서술한 것을 하르트만이 3호돌격포로 오해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실제로 장비를 3호돌격포로 교체하라는 명령은 내려왔으나 중간에 취소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사실 제 수중에 1차사료라곤 없으니 이 문제를 검증할 방법은 거의 없습니다. 어쨌든 아래의 글을 쓰면서 최대한의 교차검증이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느꼈다는 점에서 만족해야 겠지요.

Tuesday, July 1, 2008

Premium Angus Be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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