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14일 목요일

뮌헨

뮌헨에 도착한 첫날 밤은 유일하게 미리 예약해 둔 방에서 잤습니다. 물론 이 이후의 여행은 마음 내키는 대로 일정을 바꾸다 보니 예약이란 걸 할 필요가 없었지요. 예약한 호텔은 Hotel Dolomit라는 호텔로 역에서 가깝고 가격도 그럭 저럭 나쁘지 않은 편 인 것 같아서 예약했습니다. 물론 한인 민박이 호텔보다는 압도적으로 싼게 사실인데 어차피 당분간 돌아다니게 되면 호텔에서 잘 일도 별로 없을 것 같아 일반 호텔로 정했습니다.

첫 날 묵은 방은 대략 이렇게 생겼습니다.

그리고 방 안에 뭔가 하나 있더군요. 성냥인가? 싶었는데...

열어 보니 바느질 도구입니다. 아이구 이런 알뜰한 독일인들을 보았나...

다음날 아침 시내로 나가는 길에 잠깐 뮌헨역을 지나갔습니다. 참 밋밋하게 생긴게 멋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역 입니다.


시 중심가의 관광지는 낮에 보기로 하고 일단은 펠드헤른할레(Feldherrnhalle)로 직행했습니다.

가는 길에 뮌헨 오페라하우스가 있더군요.


드디어 펠드헤른할레에 도착했습니다.


펠드헤른할레는 바이에른의 국왕이었던 거대 건축물狂 루드비히 제 1세(Ludwig I. 1786-1868)가 뮌헨을 공사판으로 만들던 무렵 건설한 건축물로 바이에른 육군이 배출한 걸출한 용장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곳은 청년 히틀러가 1차대전 선전포고 소식을 들으며 환호하던 바로 그 곳 입니다.

참 유명한 사진이지요. 펠드헤른할레 앞에서 환호하는 청년 히틀러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히틀러가 뮌헨 폭동을 일으켰을 때 경찰의 저지를 받고 풍비박산난 곳이기도 합니다. 총통에게는 꽤 의미있는 장소이지요.

펠드헤른할레에 있는 틸리 원수의 동상입니다.


펠드헤른할레를 지나 역시 루드비히 1세가 만든 개선문으로 향했습니다. 개선문으로 가는 길에 친숙한 이름의 표지판이 하나 있더군요.


드디어 바이에른 육군의 개선문 입니다.



개선문을 구경한 뒤에는 쓸만한 서점을 찾아 다녔습니다. 걸어다닌 거리에 비하면 성과는 아주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중간 중간 이런 재미있는게 나타나서 심심하지는 않았습니다.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었던 물건... 재미있게 생기긴 했습니다.

결국 서점 수색도 허탕을 친데다 약간의 빗발도 날려서 시내 구경을 위해 부리나케 시청광장으로 향했습니다.

구시가지의 축소모형이 광장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꽤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은 뮌헨의 명소 Frauenkirche로 들어갔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야 교회에 가면 지겹게 보는 물건이지만 멋은 있더군요. 교회는 참 볼만했는데 사진을 거의다 말아먹어서 올릴 만한게 별로 없습니다;;;;

이건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루드비히의 관이라는군요.


교회 구경을 마치고 마리엔플라츠로 나왔습니다.

역시 마리엔플라츠에서는 마리아의 동상(Mariensaule)이 가장 먼저 눈에 띕니다. 동상의 네 귀퉁이에 조각된 아기천사들의 동상도 인상적이더군요.

정말 역동적(!!!) 입니다.

에. 그리고 역시 관광명소인 뮌헨의 시청건물...


멋지긴 한데 뭔가 번잡해 보이는 건물입니다.




마리엔플라츠를 구경한 뒤 일반적인 관광객의 패턴에 따라 시장으로 가서 소세지를 사먹었습니다. 먹고나니 뭔가 허무한 느낌이 밀려오더군요. 시차적응이 안된 탓인가...


잠시 시내를 더 돌아다닌 뒤 뮌헨역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이날 뮌헨의 박물관 같은 곳은 귀국하는 길에 구경하기로 정했습니다. 물론 여행 후반기에 오스트리아에서 죽치느라 결국은 못 갔습니다만.

2008년 2월 13일 수요일

출발

오늘부터 여러가지 일을 한번에 해 보려다 죽도 밥도 안된 재미없는 여행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출발

이번에는 왕복 모두 인천(부산)과 뮌헨을 왕복하는 루프트한자를 이용했습니다. 제 블로그에 구글광고를 달아놓았는데 거기에 계속해서 루프트한자의 겨울철 특가 광고가 뜨더군요. 제 블로그의 광고에 제가 낚인 겁니다.;;;;;;

모든 여행의 출발이 그렇듯 비행기가 이륙하니 기분이 아주 상쾌했습니다. 원래는 비행기에서 책을 읽기 위해서 읽을 책도 한 권 챙겨 갔는데 창 밖의 경치도 좋다보니 그럴 마음이 싹~ 달아나더군요. 에 그리고 기내식도 꼬박 꼬박 챙겨 먹어야 하고...

먼저 식사에 앞서 맥주 한병을 마셨습니다.


다음으로 점심이 나왔는데 하나는 비빔밥 하나는 생선이더군요. 비행기에 타서도 비빔밥을 먹을 의사는 없어서 생선을 골랐습니다. 의외로 먹을만 하더군요.


밥도 먹었으니 책을 읽자... 가 아니라 다시 창밖 구경을...


그리고 다시 간식이 나옵니다. 라면이군요.


간식을 먹었으니 책을 읽자... 가 또 아니라 또 다시 창밖 구경을. 슬슬 어둠이 깔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식사가 나왔습니다. 돈가스로군요. 이히~


배부르게 먹고 나니 독일 영공에 접어들었습니다. 아이 좋아라~

2008년 2월 10일 일요일

동맹군에 대한 에이브럼스 대장의 평가

이제 연휴도 다 끝났으니 내일 부터는 정상적인 일정이 시작되겠군요. 이곳에 들러주시는 모든 분들이 지난 5일간 별 탈 없이 잘 들 쉬셨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베트남전과 관련된 글을 하나 올립니다.

앞으로 한참 동안 여행기로 때우자니 그래도 이곳을 방문해 주시는 분들에 대해 무성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떡밥 중 하나인 외국인이 본 ‘국군’에 대한 글을 하나 (날림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냥 외국인이 아닌 상국의 대장군 에이브럼스 공의 평가인데 상당히 후한 편이더군요.

에이브럼스 : 호주군과 뉴질랜드군은 정말 최고입니다.(The Australians and the New Zealanders are really first-class people.) 우리는 미군 부대를 호주군의 지휘하에 넣기도 합니다. 호주군이 어디에 배치되어 있건 어떤 일을 하건 큰 걱정 할 필요 없이 그냥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군은 전투에 있어서 뛰어난 프로들입니다.(The Koreans, of course, are very professional in the fighting that they do) 그렇지만 그들은 계획을 세우는데 지나치게 몰두하는 성향이 있어 작전을 한 번 하려면 몇 달은 계획을 세우는데 허비합니다. 한국군은 모든 작전을 이곳 사이공의 사령부에서 세부적인 사안까지 승인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은 요구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굉장히 낭비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군은 운용하는데 있어서 융통성이 크게 떨어집니다. 하지만 이런 점이 한국군의 가치를 떨어뜨리지는 않습니다. 한국군이 작전 수립을 완료하고 작전 준비까지 마친 다음에는 모든 것이 멋지게 진행됩니다. 한국군은 최고의 전사들입니다.(They’re excellent fighters.) 한국군 부대는 최상의 상태입니다. 일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군은 매우 잘 지휘 받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군의 중대 단위 장교들과 부사관은 매우 뛰어납니다. 육사출신들이 중대 단위 부대를 지휘하는데 배치되고 있습니다. 한국군은 동기 부여가 잘 되어 있으며 다른 모든 점도 뛰어납니다. 하지만 어떤 지역에 병력이 필요할 때 – 대사님 께서도 아시겠지만 상황은 유동적입니다 – 한국군을 제때 활용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다음으로, 태국군은 베트남에 투입되었을 때 한동안은 이들이 문제가 있으며 전투에 부적합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태국군은 매우 훌륭한 전투부대 입니다. 즉, 제 말은 방어전투에 있어서 매우 훌륭하다는 것 입니다. 태국군은 방어전투에서 매우 훌륭한 성과를 보여줬습니다. 태국군의 전투 능력에 대해서 저는 매우 뛰어나다고 평가합니다. 특히 태국군의 포병은 일반적인 화력지원에 있어 다른 나라의 포병들 만큼이나 훌륭합니다. 수 주전에 저는 근처에 있는 태국군의 화력지원거점(fire support base)을 방문했었는데 저는 그곳에서 그 기지는 여태까지 제가 방문한 남베트남에 있는 화력지원거점 중 가장 우수한 곳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가들리(George M. Godley : 주 라오스 미국대사) : 그곳이 우리 미군의 화력지원거점 보다도 나았다는 말씀입니까?

에이브럼스 : 예, 그렇습니다. 그 곳의 수준은 매우 높았습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 사격 연습을 참관했는데 정말 엄청났습니다(god)! 만약 태국군이 제가 방문하기 이틀 전에 사격 연습을 했다면 저는 태국군에 대한 편견 때문에 그들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을 것 입니다. 하지만 제가 참관하지 않았더라 하더라도 태국군의 사격 시범은 정말 엄청났을 것 입니다. 태국군의 포격은 매우 정확하고 신속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여러 시설들 – 위생시설, 야전병원, 기타 다른 시설과 방화설비 등은 부족한 점을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성(聖) 바바라의 이름에 걸고 대사님께 말씀드리는데 태국군은 흔히 알려진 것 이상으로 포병 교리에 통달해 있습니다.

1969년 8월 5일, 에이브럼스 대장이 주 라오스 미국 대사 가들리(George M. Godley : 1969~1973)에게 한 브리핑의 녹취록 중에서

Lewis Sorley(transcribed), Vietnam Chronicles : The Abrams Tapes, Texas Tech University Press, 2004, pp.241-242

2008년 2월 9일 토요일

2008년 유럽여행 경과 보고

이번 유럽여행은 19일 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관광 + 답사 + 지름 이라는 3대 과제를 모두 수행해 보자는 과한 욕심을 부린 탓에 좀 어정쩡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여행 방식은 대략적인 계획만 세우고 그때 그때의 상황에 맞춰 여행 일정을 탄력적으로 조정하는 편이어서 약간의 돌발 변수도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답사와 서적구매에만 초점을 맞추고 여행을 했다면 훨씬 알찬 여행이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아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제가 구상한 원래의 일정과 실제 여행의 경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2008년 2월 7일 목요일

이번 여행에서 구입한 서적들

이번 여행에서 구한 책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익히 잘 아시는 유명한 저작도 있고 약간 오래된 흥미로운 책도 조금 있습니다. 책 소개는 구매한 지역별로 소개 드리겠습니다. 구매한 서점들은 각 서점의 명함이 다른 짐 속에 들어 있어서 아직 꺼내지 못 한 관계로 생략하겠습니다.

뮌헨

뮌헨은 처음 도착한 곳 이지만 책을 사러 돌아다닌 시간에 비해서 성과가 매우 형편없었습니다. 그 덕에 뮌헨 관광도 좀 시시하게 끝난 편 입니다. 뮌헨에서 건진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Erwin Pitsch, Italiens griff über die Alpen Die Fliegerangriffe auf Wien und Tirol im 1. Weltkrieg, Karolinger, 1995
: 이 책은 1차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의 오스트리아에 본토 공격과 이에 맞선 오스트리아군의 방공전을 분석한 책 입니다. 이 주제만 다룬 단행본으로는 제가 처음 본 것 입니다.

Arthur Rosenberg, Geschichte der Weimarer Republik, Europäische Verlagsanstalt, 1961
: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통사로 같은 종류의 서적 중 꽤 고참(?)에 속하는 놈 입니다. 위의 책과 같은 헌책방에서 팔고 있었는데 값이 1유로라 상식도 넓힐 겸 샀습니다.


Kurt Finker, Der 20. Juli 1944 : Militärputsch oder Revolution?, Dietz Verlag, 1994
: 이건 뮌헨 시청건물 근처의 헌책방에서 샀습니다.

잉골슈타트

잉골슈타트는 시간이 부족해서 잠시 바이에른 육군 박물관 위치나 파악할 겸 새벽에 다녀왔는데 잉골슈타트역 구내서점이 놀랍게도 새벽 5시에 문을 열었습니다! 역 구내서점의 현대사 코너에 군사서적이 몇 권 있었는데 그 중 특가에 파는 놈을 한 권 질렀습니다.


Andre Uzulis, Die Bundeswehr : Eine politische Geschichte von 1955 bis heute, Mittler&Sohn, 2005
: 바로 이놈입니다. 저는 2차대전 이후의 군사안보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무지한 편이라 기초 지식을 습득할 겸 샀습니다. 게다가 특가 판매이기도 하고...

뉘른베르크

뉘른베르크는 관광지인 구 시가지를 중심으로 돌아다니느라 도시의 규모에 비해 건진 게 매우 형편없습니다.


Wolfram Wette(Hrsg), Schule der Gewalt : Militarismus in Deutschland 1871 bis 1945, Aufbau Taschenbuch Verlag, 2005
: 구시가 안에 있는 어떤 서점에서 샀습니다. 일반 서점인데 군사사 코너가 책장 두 칸 이더군요. 책이 많다 보니 뭘 사야 할지 혼란스러워 달랑 이것만 샀습니다. 책은 많은데 여행 초반이라 마구 질러대기도 뭐하고 하니 난감하더군요.

베를린

베를린은 주말에 도착했기 때문에 벼룩 시장 좌판 말고는 책 살 곳이 없었습니다. 베를린에서 건진 책은 아래와 같습니다.


Rudolf Lehmann, Die Leibstandarte Band II, Nation Europa, 1995
: 너무나 유명한 책이지요. 저는 돈이 궁해서 이걸 낱권으로 샀는데 그 덕에 빠진 부분이 있었습니다.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 옆에 있는 좌판 중에는 군사서적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양반이 있는데 이날 그 양반 한테서 2권을 사서 보충했습니다. 표지가 없긴 하지만 책 자체는 거의 새책 수준이더군요. 역시나 책이 널려 있는데 여행 초반이라는 점이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물론 여행이 끝난 다음 이날의 소심함에 대해 통렬히 반성했지요.


Wilhelm Adam, Der schwere Entschluß, Verlag der Nation, 1965
: 역시 유명한 책 입니다. 원래 2003년에 구입했던 녀석인데 2년 전에 방을 옮기다 이놈만잃어 버렸습니다. 아주 웃기게도 2003년과 2008년 모두 베를린의 똑같은 좌판에서 구입한 놈 입니다. 참 재미있지요. 이 책은 독일 제6군 작전처에서 제 1 작전장교로 있던 아담 대령의 회고록 입니다. 동독에서 나왔는지라 시각이 조금 묘하긴 합니다만 너무 많이 찍어냈는지라 매물이 풍부합니다. 1유로에 샀습니다.

함부르크

함부르크에는 제가 아는 군사 서적 전문점이 두 곳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책이 많아도 문제더군요. 산더미 같은 책 속에서 뭘 사야 할지 고민하다가 겨우 세 권 건졌습니다.


Klaus Michaelis, 1938 : Krieg gegen die Tschechoslowakei - Der Fall Grün, Michaelis Verlag, 2004
: 주로 무장친위대 서적(자료집에 가까운)을 찍어내는 Michaelis 출판사에서 다소 색다른 책을 찍은 일이 있습니다. 바로 1938년~1939년의 체코 사태를 군사적인 관점에서 조명한 책인데 독일군의 녹색 계획과 이에 대응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군사적 대응책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앞으로 써먹을 곳이 많을 것 같습니다.


Bernd Hartmann, Geschichte des Panzerregiment 5 1935-1943 und der Panzerabteilung 5 1943-1945, Bernd Hartmann, 2003
: 이 책은 좀 난감합니다. 5년전에 못 사서 이번엔 사야지 하고 벼르던 놈인데 이놈을 사고 난 뒤에 증보개정판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아이고.


Friedrich Stahl(Hrsg), Heereseinteilung 1939, Podzun, 1954
: 상당히 괜찮은 자료집 입니다. 1939년 전쟁 발발 직전 독일 육군 각 부대의 주둔지와 지휘관 내역이 대대급 부대까지 기재된 자료집 입니다. 앞으로 활용도가 매우 높을 것 같습니다.



킬에는 군항 구경을 하러 간 것인데 돌아오는 길에 꽤 쓸만한 헌책방 두 곳을 발견했습니다.


Jagd in Flanderns Himmel, Knorr Hirth, 1935
: 나치 독일 당시 발행된 놈으로 1차대전 당시 JG 1의 부대사 입니다. 상태는 좋은데 오래되서 그런지 제본이 약간 불안합니다.


Leonid Reschin, Feldmarschall Friedrich Paulus im Kreuzverhör 1943-1953, Bechtermünz Verlag, 1996
: 만슈타인의 능수 능란한 책임전가와 6군의 지휘관이었던 이유로 필요 이상의 욕을 얻어 먹는 파울루스의 항복 이후 행적에 대해 다룬 책 입니다. 매우 상태가 좋은 책인데 4유로에 팔더군요.

Peter Reichel, Der schöne Schein des Dritten Reiches : Faszination und Gewalt des Faschismus, Fischer, 1994
: 나치독일의 문화 정책에 대해 다룬 책 입니다. 제가 군사 안보문제에만 관심이 있다 보니 전반적인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깡통인데 책도 산 김에 잘 공부해 볼까 합니다.

Eugen Kogon, Der SS Staat : Das System der deutschen Konzentrationslager, Wilhelm Heyne Verlag, 1974, 1998
: 이젠 나치 독일의 수용소 문제에 대해 거의 고전이 된 저작입니다. 책의 이름만 듣다가 이번에야 비로소 구입했습니다.

브레멘

브레멘 역의 구내서점 역시 군사서적을 많이 팔고 있더군요.


Karl-Heinz Golla, Der Fall Griechenlands 1941, E. S. Mittler & Sohn, 2007
: 예전에 채승병님이 소개해 주신 독일 공수부대 통사의 저자 중 한 명인 Golla가 쓴 그리스 전역에 대한 작전사 입니다.

코블렌츠

코블렌츠에는 제가 여태까지 독일에 본 것 중 가장 막강한 군사서적 전문점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소심하게 달랑 두 권만 샀습니다. 역시 수많은 책을 대하니 뭘 살지 혼란스럽더군요. 지금 그날의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하는 중 입니다.


Johann Ritter von Heilmann, Das Kriegwesen der Kaiserlichen und Schweden zur Zeit des dreißigjährigen Krieges, Verlag Heere der Vorgangheit, 1850, 1977
: 이건 진짜 고전이지요. 그동안 다른 서적들의 참고문헌 목록에서만 보다가 이번에 1977년 발행한 판본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글자체가 고딕체이긴 하지만 그럭 저럭 읽을만은 합니다.


Werner Kortenhaus, 21. Panzerdivision 1943-1945, Schneider Armor Research, 2007
: 독일군의 기갑부대사를 열심히 찍어내는 Schneider Armor Research에서 작년 12월에 나온 따끈 따끈한 신작입니다.



빈에서 건진 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빈에는 3일간 체류했는데 비참하게도 좋은 헌책방들을 일요일에 발견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Roland Kaltenegger, Schicksalsweg und Kampf der Bergschuh Division Die Kriegschronik der 7. Gebirgsdivision vormals 99.leichte Infanteriedivision, Leopold Stocker Verlag, 1985
: 산악전에 대한 책을 열심히 찍어내는 Leopold Stocker 출판사에서 80년대에 야심차게 쏟아낸 2차대전 중 독일군 산악부대사 시리즈 중 한 놈 입니다. 저는 이 시리즈 중에서 1, 4 산악사단사 등 두 권을 가지고 있는데 이번에 한 놈 더 늘었습니다.

Horst Adalbert Koch, Die Geschichte der Deutschen Flakartillerie 1935 1945, Podzun
: 이건 같은 출판사가 1954년에 출간한 FLAK의 축약본 입니다. 자료집으로 꽤 쓸만할 듯 싶습니다.


Thomas Chorherr(Hrsg) : 1938 – Anatomie eines Jahres, Ueberreuter, 1987
: 이놈은 토요일에 벼룩시장에서 구했습니다. 오스트리아 병합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Heiy Schön, Ostsee 45 Menschen, Schiffe, Schicksale, Motorbuch Verlag, 1998
: 역시 같은 좌판에서 샀습니다.


Militärwissenschaftlichen Istitute Wien, Die Streitkräfte der Republik Österreich 1918 1968, Militärwissenschaftlichen Istitute Wien, 1968
: 이건 오스트리아 육군박물관이 창군 50주년 기념으로 주최한 전시회와 함께 나온 책 입니다. 독일과의 합병 직전의 오스트리아 육군에 대한 내용이 쓸만한데 좋은 참고가 될 듯 합니다.

원래 이번 여행에는 책을 담을 가방을 따로 가져가려 했는데 정신 없는 와중에 출발하다 보니 그 가방을 집에 두고 갔습니다. 여행 내내 책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 골치아픈 문제였는데 그 가방만 있었어도 열 권 정도 더 사올 수 있지 않았을까 싶군요.
그리고 독일을 여행 초반 일정으로 잡아 놓은 것은 치명적 실수였습니다. 여행 후반기에 돈이 부족하지나 않을까 걱정하다 보니 지르는데 신중해 지더군요. 다음에 유럽을 돌아다닐 일이 생기면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제일 뒤로 미룰 생각입니다.

2008년 2월 5일 화요일

귀국했습니다.

오늘 유럽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출발하는 당일 까지도 일을 하느라 여행 준비를 제대로 못 했지만 꽤 재미있는 여행이었습니다. 준비를 조금 더 충실히 하고 나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충분히 즐거웠습니다.

이제 귀국했으니 당분간 여행이야기로 때워볼 생각입니다.

2008년 1월 14일 월요일

독일에 갔다 오겠습니다

내일부터 3주 정도 유럽에 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이 중 2주 정도는 독일에 있을 계획입니다.

원래는 2008년의 서두를 기분 좋게 장식할 대규모(???) 지름 원정으로 계획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실탄 확보가 목표량에 미달해 단순 관광 여행으로 목표를 하향 조정했습니다. 그래도 쓸만해 보이는 책을 최대한 건져올 생각이긴 합니다.

어쨌건 3주 정도 글이 올라 오지 않게 됐는데 제 재미없는 블로그에 자주 들러주시는 분들께 양해의 말씀을 구합니다. 다녀와서 좀 더 재미있는 글을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08년 1월 13일 일요일

산업화된 전쟁의 비산업적 요소 : 독일육군의 마필 사용 1939~1942

2차 대전당시의 독일 육군이 마필에 수송수단을 크게 의존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유명하니 좀 식상한 이야기 입니다. 그렇지만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마필 사용은 그 규모의 방대함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산업화된 전쟁에서 산업화와는 거리가 먼 말 이라는 동물 조차도 전쟁의 규모에 걸맞게 대량으로 사용되고 소모된다는 점이 꽤 재미있더군요.

독일이 2차대전에 돌입한 1939년 9월에 독일 육군이 보유한 마필은 약 59만 마리였습니다. 비록 오스트리아 병합과 체코슬로바키아 합병으로 대규모의 마필이 입수되긴 했지만 전쟁 발발과 함께 신규부대 편성이 대규모로 이뤄지면서 마필의 입수는 상당히 골치아픈 일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 독일 육군의 1개 보병사단은 약 4,800필 정도의 말을 필요로 하고 있었는데 당시 독일군의 1개월 보충량으로는 3개 사단 정도의 소요량을 맞추는 정도에 그쳤다고 합니다. 다행히 폴란드 전은 단시일 내에 종결되었고 독일군은 아주 쓸만한 말 공급처를 확보하게 됐습니다. 1940년 초부터 폴란드는 독일군에 1주일 평균 4,000마리의 말을 공급하기 시작했습니다.
1940년의 서부전역은 비교적 단기일에 끝났지만 이 짧은 기간 동안 많은 기동이 이뤄진 까닭에 마필의 소모가 컸습니다. 제 4군의 경우 1940년 5월 10일 말 52,700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프랑스 전역이 종결될 무렵에는 44,000마리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부 전역이 순식간에 종결되면서 독일군은 폴란드에 이어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라는 새로운 말 공급처를 얻게 됩니다.

독일의 다음 목표는 소련이었는데 소련은 독일군의 기계화 부대는 물론 말들에게도 매우 어려운 도전이 되었습니다.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위해 625,000마리의 말을 동원했으며 이 중 13만 마리는 중부집단군의 주력 야전군인 제 4군에 소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련 전장은 독일군의 말들에게는 아주 지독한 곳이 되었습니다. 넓은 땅 만큼이나 신속한 진격이 거듭되다 보니 보급로는 길어지고 이것은 말 사료의 전방 추진을 어렵게 했습니다. 폴란드와 서유럽산의 덩치 큰 말들은 독일군의 철제 달구지와 보병사단의 주력인 105mm 포를 견인할 만큼 튼튼했지만 동시에 먹어대는 사료의 양도 엄청났습니다. 사료 추진이 제때 되지 않으니 픽픽쓰러지는 말들이 매우 많았고 그 숫자는 소련 깊숙이 진격할수록 늘어났습니다. 독일군의 마필 손실 중 폐사는 1941년 7월 1일부터 7월 10일까지는 2,839마리였는데 8월 1일부터 8월 10일에는 9,847마리로 급증했습니다. 마필의 보충은 인력과 장비의 보충 만큼이나 더뎠는데 7월 1일~10일 기간 동안 폐사 2,839마리, 부상 및 질병 9,442마리 등 총 12,281마리를 상실하는 동안 보충된 것은 1,500마리에 불과했습니다.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어 11월 1일부터 10일 사이에는 폐사 11,605마리, 부상 및 질병 7,991마리에 보충은 1,700마리로 마필의 상황은 크게 악화되어 보병사단들이 제대로 보급추진을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됐습니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말의 손실은 더욱 높아졌고 독일군의 수의 부대는 질병에 걸리거나 쇠약해진 말들이 급증해 기능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보통 야전군급 수의부대는 최대 550마리의 말을 치료할 수 있었는데 41년 겨울이 되면 2,000마리에서 많게는 3,000마리 이상을 치료해야 했다고 합니다.
물론 소련군으로 부터도 많은 말을 노획했고 현지 징발로도 보충이 가능하긴 했지만 문제는 러시아산 말은 튼튼하기는 했으나 폴란드와 서유럽산 말들에 비해 덩치가 작고 체력이 떨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산 말들은 독일군의 표준형 철제 달구지를 끌 수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 농촌에서 사용하는 전통적인 목재 달구지를 사용해야 했는데 이것은 보통 독일군용 달구지보다 수송량이 적었다고 합니다. 러시아산 말로 105mm포를 견인하려면 포 1문당 더 많은 말이 필요했습니다.

독일군은 1942년 공세를 준비하면서 동부전선으로 보낼 약 21만 마리의 보충용 말을 징발했고 이 중 109,000 마리가 1942년 5월 1일까지 전선에 도착했습니다. 마필의 보충은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는 사단들로부터 인계받는 방식으로도 이뤄졌는데 전차와 같은 중장비처럼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는 부대들은 보유한 마필을 전선에 있는 부대에 넘겨주고 이동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2년 하계전역 개시당시 평균적인 보병사단들의 마필 보유량은 3,000마리 선에 그쳤다고 합니다. 다른 장비와 물자처럼 말 또한 동부전선의 지독한 소모전 앞에서는 배겨낼 재주가 없었고 일선 부대의 말 보유량은 계속 줄어듭니다. 1944년 봄에 가면 보병사단 1개의 평균 마필 보유량은 2,000마리 선으로 떨어진다고 하지요.

2008년 1월 9일 수요일

채병덕과 여운형에 관한 일화

아래 글에 Cato님이 다신 댓글을 읽고 나니 갑자기 생각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채병덕이 공산주의자는 아니더라도 해방 전후에는 좌익과 약간의 관계는 있었음을 시사해주는 내용입니다. 만주군 출신으로 해방 이후에는 국군준비대 부사령이었고 해방 전에는 건국동맹에서 군사문제를 담당했던 박승환의 부인 김순자(金順子)의 증언에 따르면 해방 전에 여운형과 채병덕 간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몽양의 얘기로는 채병덕을 만나서 담판을 했다고 해요. 자기가 유사시에 요구할 때는 무기를 공급해 주기로까지 했다는 얘기를 몽양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몽양 얘기는 채병덕 뿐만 아니라 그 공장에 중요한 간부들 중에 건국동맹의 중요맹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유사시에는 무기를 탈취해 공급하기로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후에 개성신문사 부사장을 지낸 인물을 만났습니다. 편집이 아닌 공무계통 기술자로 가주 유능한 선반기술자였지요. 이 사람 얘기로는 자기가 주안 조병창의 선반직장 이었는데 건국동맹 맹원이었다는 겁니다. 이래서 자기가 몽양도 몇 번 만나고 몽양이 요구할 때 무장, 수류탄, 보총 심지어 경기관총까지도 공급할 수 있도록 다 짜놓고 있었다고 장황하게 설명했습니다. 이때 몽양이 조병창 공장 간부 중에 건국동맹 맹원이 있었다는 얘기가 바로 이 사람을 두고 한 말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몽양은 주안 조병창에서 채병덕 하고만 관계를 가진 것이 아니라 직장장으로 있던 조선인도 포섭해 무장봉기 준비에 골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한울, 1995, 103~104쪽

이런 일도 있었으니 채병덕에 대한 의심이 생겨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채병덕도 상당히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2008년 1월 7일 월요일

자주국방을 위한 우리의 정신 자세 - 채병덕 장군의 말씀

자주국방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 주는 sonnet님의 글을 읽고 나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주국방을 하자면 세금이 많이 들어갑니다. 아 그러나 요즘은 경제도 어려우니 돈으로 때우는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일본으로 부터 조금 많은 영향을 받은 우리 민족의 60년 전통인 정신력으로 승부를 해야 할 것 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자주국방을 위해서는 어떠한 정신 자세가 필요할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채병덕 장군께서 60여년 전에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구가 적다. 따라서 다른 나라의 군인 10명 쯤은 우리 국군 1인 으로서 막아낼 만한 1인당 10의 기개와 용맹이 절대 필요한 것이다.

채병덕, 『國民精神의 確立과 國民皆兵의 意義』, (正民文化社, 1949), 61쪽

과연, 북괴가 종종 떠들듯 일당백 따위의 허황된 구호가 아니라 1:10이라는 소박하기 그지 없는 목표치이니 달성하는데 부담도 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군도 상륙작전을 할 줄 안다! : 1917년 10월의 알비온 작전

2008-01-07 / PM 10:50 본문 조금 추가하고 지도도 넣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감행된 대규모 상륙작전인 갈리폴리 전투는 연합군에게 대재앙으로 기록됐습니다. 하지만 신통하게도 이 전쟁에서 물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독일군이 당당하게(?) 상륙작전에 성공한 일이 있었으니 그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틀란트 전투 이후 독일 해군은 사실상 항구에 틀어 박혀 노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서양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손가락만 빨고 놀 수는 없는 법. 다행히도 독일 해군이 놀 곳이 있긴 있었으니 바로 발틱해 였습니다. 1917년 10월, 독일은 할일 없는 해군을 동원해 리가만의 세 섬, 사레마(Saaremaa, 독일/스웨덴어로는 Ösel)와 히우마(Hiiumaa, 독일/스웨덴어로는 Dagö), 무우(Muhu, 독일/스웨덴어로는 Moon, Mohn)에 상륙작전을 감행합니다. 이 작전은 꽤 멋진 이름을 달게 됐는데 그 이름은 바로 알비온(Albion) 이었습니다.



1. 알비온 작전의 준비

알비온 작전의 필요성이 처음 제기된 것은 해군에 의해서 였습니다. 독일군은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하기 위해서 리가를 제압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리가만의 입구를 막고 있는 사레마와 히우마를 먼저 떨어트려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해군은 1915년 하반기부터 이 지역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육군에 리가 지역에 대한 공세의 필요성을 제기합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독일 육군은 서부전선에서 먼저 결판을 낸다는 전략을 고수하고 있었고 육군참모총장인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은 그의 무덤이 될 베르덩에 대한 공세 준비에 몰두하느라 해군의 제안에 대해서는 약간의 관심만 보였습니다. 해군은 다시 1916년 3월에 보다 구체적인 작전안을 내놓지만 여전히 팔켄하인의 관심은 베르덩에 있었습니다.

베르덩 공세가 결국 피박으로 끝나자 독일육군은 동부전선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육군은 1916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리가에 대한 공세를 계획하기 시작했습니다. 12월에 나온 첫번째 계획안은 후티어(Oskar von Hutier)의 제 8군이 드비나 강 까지 진출하는 비교적 소박(?)한 것 이었지만 팔켄하인의 후임인 루덴도르프는 이 계획을 좀 더 확대시키길 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17년 8월에 최종 승인된 계획안은 제 8군이 리가 전체를 장악하고 그 후속으로 상륙부대가 사레마, 히우마, 무우에 상륙하는 것 이었습니다.
리가를 장악한 다음 단계인 상륙작전은 카텐(Hugo von Kathen) 보병대장이 지휘하는 제 23예비군단이 수행할 계획이었고 상륙부대는 에스토르프(Ludwig von Estorff) 중장의 제 42보병사단 이었습니다. 제 42보병사단은 제 65보병여단 사령부와 함께 상륙작전을 위해서 사단 예하의 17, 131, 138 보병연대 외에 추가적으로 255 보병연대와 제 2자전거 보병여단, 그리고 독립 돌격중대들을 배속 받았습니다.
루덴도르프는 해군과 작전을 조율하기 위해서 1917년 8월 13일 해군작전국장인 카이저링크(Walther von Keyserlingk) 해군중장과 회의를 가집니다. 이날 회의에서 육군은 9월 초 까지 리가를 함락시키고 그 이후 1개 사단을 투입해 세 섬을 제압한다는 계획을 알렸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독일 해군의 사정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유틀란트 전투 이후 항구에 틀어박혀 별다른 일없이 빈둥거리다 보니 사기는 떨어지고 별다른 활동이 없다 보니 식량 배급도 줄어드는 악재가 겹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1917년에 8월 2일에는 식량 사정의 악화에 불만을 품은 전함 프린츠레겐트 루이트폴드(Prinzregent Luitpold),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Fridrich der Große), 카이저(Kaiser), 카이저린(Kaiserin), 베스트팔(Westphal)의 수병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이 폭동은 진압되고 주동자 두 명이 군사재판에 의해 처형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렇게 알비온 작전 직전 독일 해군의 상황은 매우 어수선했습니다.
또 대해함대(Hochseeflotte) 사령관인 셰어 제독은 발틱해 작전에 자신의 함대를 동원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셰어는 대해함대의 주 전장은 어디까지나 북해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육군을 지원하기 위해 발틱해로 병력을 쪼개는 것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했습니다. 셰어 제독은 1917년 9월 11일에 열린 회의에 자신의 대리인인 우슬라(Ludolf von Usslar) 대령을 보내 알비온 작전에 대한 반대의견을 명확히 했습니다. 여기에 발틱해 사령관(Oberbefehlshaber der Ostsee)인 하인리히공(Albert Wilhelm Heinrich von Preußen, 빌헬름 2세의 동생입니다)도 셰어의 의견에 찬성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황제인 빌헬름 2세가 개입해 알비온 작전을 개시하도록 결정합니다. 빌헬름 2세의 작전 개시 명령은 9월 19일에 떨어졌고 이 명령을 하달 받은 제 8군 사령부는 9월 24일에 육군의 작전 계획을 완성하고 이것을 제 23예비군단에 하달합니다.

해군은 알비온 작전을 위해 제 3, 4전대(Geschwader)와 제 2초계집단(Aufklärungsgruppe), 제 2, 9어뢰전단(Torpedoboots Flottille) 을 중심으로 총 10척의 전함을 포함 300척의 군함을 동원했습니다. 이 중 병력 수송선은 19척 이었습니다. 함대의 지휘는 슈미트(Erhard Schmidt) 제독이 맡았으며 기함은 순양전함 몰트케 였습니다. 그리고 상륙부대는 위에서 언급한 증강된 42보병사단으로 총 전력은 병력 24,596명, 말 8473마리, 야포 40문과 차량 2,490대였고 여기에 30일 치의 보급품이 함께 수송되었습니다. 여기에 비행기 65대와 비행선 5대가 투입되는 말 그대로 입체전이 수행될 계획이었습니다.

한편, 러시아는 독일군의 주력이 상륙할 사레마에 6인치 에서 12인치에 달하는 해안포를 배치하고 있었으며 해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대량의 기뢰를 부설해 놓고 있었습니다. 이점은 독일 해군이 크게 우려하는 바였습니다. 또한 독일은 러시아가 세 섬에 2개 보병사단을 배치해 놓고 있는 것으로 보았고 여기에 더해 러시아 해군이 상륙 저지를 위해 투입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독일 해군은 러시아군의 방어가 상대적으로 약한 사레마 섬의 북쪽, 타가만 일대를 상륙 지점으로 정했습니다. 타가만 일대는 6인치 해안포대가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러시아군이 타가만에 대한 상륙을 눈치채지 못 하도록 리가 만으로 통하는 Sõrve 반도에 기만 공격을 실시하도록 했습니다. 이 기만 공격에는 제 4전대의 전함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와 쾨니히 알베르트 두 척이 투입되어 러시아군의 12인치 포대를 공격할 예정이었습니다. 두 척의 전함이 러시아군의 주의를 끄는 동안 제 1진인 4,500명은 타가만에 상륙해 상륙 지점의 6인치 해안포대를 제압하고 그 뒤로 제 2진 3,000명이 상륙해 나머지 사단 부대가 상륙할 교두보를 확보해야 했습니다.



2. 알비온작전의 개시

알비온 작전의 준비 단계인 지상 작전은 순조로웠습니다. 후티어의 제 8군은 러시아 제 12군에 사상자 25,000명과 야포 262문을 상실하는 피해를 입히고 9월 3일에는 리가 전체를 장악했습니다. 이에 비해 독일 제 8군의 손실은 4,200명에 그쳤습니다.

상륙은 9월 30일로 예정되었지만 기상이 악화되어 취소되었습니다. 상륙 작전을 총괄하는 제 8군 사령관 후티어는 기상 악화로 상륙이 연기되는 것을 우려해 마침내 10월 8일에 작전을 개시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상륙 부대와 물자의 적재는 9일 시작되어 10일에 완료됐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11일 상륙 부대가 출발합니다.

상륙부대는 12일 오전 3시에 타가만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상륙 부대는 타가만 북쪽 12km 지점에서 정지한 뒤 기뢰 제거작업과 상륙 부대의 전개를 시작했습니다. 상륙 부대 지휘관인 카텐 보병대장은 오전 4시 30분에 상륙 개시 명령을 내렸고 상륙 부대의 제 1진인 제 138보병연대 1대대와 제 10돌격중대가 어뢰정에 탑승해 해안으로 돌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해안에 가까워 지면서 러시아군의 해안포대로 부터 공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해군은 상륙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전함으로 해안포대에 대한 제압사격을 시작해 해안포들을 제압했습니다. 상륙부대의 제 1진은 해군의 지원에 힘입어 오전 6시 18분까지 상륙과 장비 하역을 마쳤습니다.
주력 부대가 타가만에 상륙을 감행하는 동안 제 2자전거 보병여단이 주축이 된 조공 부대도 파메로트(Pamerot)에 상륙을 시작했습니다. 조공 부대의 화력지원은 전함 바이에른(Bayern)과 그로서 쿠어퓌르스트(Grosser Kurfürst)경순양함 엠덴(Emden)이 담당했습니다. 이들은 해안포대를 침묵시키는데는 성공했지만 기뢰지대에 들어가게 되어 전함 바이에른이 대파되었습니다.
교두보가 확보되자 후속 부대인 제 138보병연대 주력과 제 131보병연대가 상륙했고 그 뒤를 제 17보병연대와 255보병연대가 따랐습니다. 이 와중에 제 138연대 2대대를 실은 수송선이 기뢰와 접촉했고 이들은 수송선에서 내려 나무 보트로 상륙했습니다. 상륙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13일 저녁까지 주력 부대는 물론 조공 부대인 제 2자전거 보병여단과 18돌격중대까지 상륙을 완료했습니다.

타가만의 상륙

하지만 다음날인 13일 기상이 악화되어 야포와 차량, 마필의 하역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파고가 심해 장비를 하역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 입니다. 하지만 기상상태가 호전될 때 까지 기다리다가는 러시아군이 증원되거나 방어태세를 굳힐 수 있었습니다.

결국 에스토르프 중장은 위험하지만 과감한 결단을 내립니다. 즉 포병의 지원없이 상륙한 보병부대만 가지고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심한 것 이었습니다. 에스트로프는 제 131보병연대는 남서쪽으로 진출해 Sõrve반도를 제압하고 제 255보병연대와 제 1자전거대대, 그리고 제 65보병여단이 지휘하는 17, 138보병연대는 사레마의 가장 큰 도시인 쿠레사레(Kuressaare 독일식 지명은 아렌스부르크Arensburg)를 점령하도록 했습니다. 쿠레사레는 인구 5,000명에 사레마의 가장 큰 항구였고 또 비행장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공인 제 2자전거 보병여단과 18돌격중대는 오리사레(Orissaare, 독일식 지명은 오리사르Orrisar) 방면으로 진출해 러시아군의 퇴로를 북익에서 포위하도록 했습니다.
이 결정은 당시 상황으로 봤을 때 나쁘지 않은 것 이었지만 기상이 악화되어 이들을 지원할 항공기들이 작전을 할 수 없었습니다. 독일군은 항공기에 정찰을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이점을 제외하면 작전의 진행은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제 131보병연대는 Sõrve반도를 손쉽게 제압하고 12인치 해안포대의 러시아군을 후퇴시켰습니다. 러시아군은 해안포가 독일군에 손에 그대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포의 핵심 부품을 파괴하고 무사히 철수했습니다.
한편, 제 255보병연대는 쿠레사레로 진격하는 도중 러시아군의 1개 기병연대(?)로부터 공격받았지만 이것을 격퇴시켰고 17연대와 138연대도 러시아군 방어선과 접촉해 이것을 돌파하고 포로 1,000명을 잡는 전과를 거뒀습니다. 이날 저녁 255연대의 정찰대는 러시아군이 쿠레사레를 버리고 퇴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에스토르프 중장은 러시아군을 신속히 추격하기 위해 다음날인 14일도 보병 부대만으로 추격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에스토르프는 러시아군이 무우섬으로 퇴각하는 것을 신속히 저지하기를 바랬기 때문에 중화기 없이 보병만으로 공격하는 무리수를 두었습니다. 다행히 이것이 성공하기는 했습니다만. 하지만 14일에는 비가 내려 보병의 이동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레사레를 점령한 3개 보병연대는 강행군으로 오리사레까지 진출, 조공 부대와 함께 러시아군을 협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한편, 독일 해군은 이날 러시아 해군의 구축함대와 교전, 구축함 그롬(Гром)을 격침시켰습니다. 그 대신 독일군도 교전 도중 어뢰정 한 척을 상실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10월 15일, 오리사레에 집결한 독일군은 고립된 러시아군에게 총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서 독일군은 군함 일부를 사레마와 무우 사이의 해협으로 투입했습니다. 이미 오리사레에 도착해 있던 제 2자전거 보병여단과 18돌격중대는 무우섬에 상륙해 러시아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제 138, 255보병연대가 포위된 러시아군을 소탕했습니다. 독일군은 이 공격으로 수비대장인 이바노프와 그의 참모진, 포로 5,000명을 생포하고 야포 8문, 기관총 8정과 말 200마리를 노획했습니다.
러시아 해군은 무우의 수비대 7,000명도 포위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해상으로 철수시키고 해군 함정들도 사레마 수역에서 철수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러시아 해군은 독일 해군과의 교전으로 전노급 전함인 슬라바(Слава)가 대파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러시아 해군은 독일군의 소해정 몇 척과 어뢰정 1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지만 독일군과의 전력차가 커서 더 이상의 전투는 무리였습니다. 그리고 발틱해에서 작전 중이던 영국 해군의 잠수함 C32도 사레마 근처 해역에서 독일 해군에 의해 격침 당했습니다.

작전은 대 성공이었습니다. 독일군은 해군 쪽에서 전사 131명과 부상 60명, 육군 쪽에서는 전사 54명과 부상 141명의 피해를 입은 반면 러시아군은 제 107, 118보병사단 등 2개 사단이 완전히 분쇄되고 포로 2만명과 포 141문, 그리고 사레마의 해안포 전부를 상실하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반면 러시아 해군은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선전했다고 평가됩니다.


참고자료

Richard L. DiNardo, Huns with Web-Feet : Operation Albion 1917, War in History 2005 12
Holger Herwig, The First World War : Germany and Austria-Hungary 1914-1918, Arnold, 1997
Norman Stone, The Eastern Front 1914-17, Penguin, 1975, 1998

2008년 1월 4일 금요일

'전격전의 전설' 서평 올렸습니다.

교보문고에 서평을 올렸는데 아직 심사가 완료되지 않아 책 소개에는 뜨지 않습니다. 뛰어난 저작에 비해 서평이 충분하지 못해 걱정이 됩니다. 인터넷 교보문고에 올린 서평은 대략 이렇습니다.

1940년 프랑스 전역은 흔히 ‘1940년의 전격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전쟁사에 한 획을 그은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역사적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국내에는 이렇다 할 연구가 소개되지 않았으며 간간히 개론적인 서적이 소개될 따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번역된 ‘전격전의 전설(Blitzkrieg Legende)’은 국내에 최초로 소개되는 본격적인 작전사로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저작은 독일 연방군 산하 군사사연구소(MGFA)에서 간행되는 작전사(Operationsgeschichte)의 일환으로 출간된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인 프리저(Karl-Heinz Frieser)는 독일은 물론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작전사 분야의 대가이고 또 이 저작은 그가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데 크게 기여한 책이다. 독일은 근대적인 군사사(軍事史) 연구에 있어서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실전에 적용하기 위한 작전사 연구는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군사사의 범주가 사회사, 문화사로 확장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전사는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전격전의 전설’은 이러한 독일 군사사의 계보를 잇는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작전사’라는 특성상 이 저작은 1940년 전역의 수립과 진행 과정, 특히 핵심이었던 스당에서의 돌파 과정을 분석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독일의 일차사료는 물론 상대방인 프랑스와 영국의 시각까지 충실히 반영해 복잡한 작전의 진행과정을 객관적, 실증적으로 복원해 내고 있다. 그리고 핵심적인 지역에서의 작전은 중대, 심지어 소대 단위의 소규모 전투까지 다루고 있어 그 치밀함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특히 1940년 전역의 핵심이었던 스당 지구에서의 돌파를 분석한 장에서는 양군의 움직임과 상급 제대의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분투한 일선 전투부대들의 사투가 소설에 못지 않게 박진감 넘치게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국내에서는 단순히 잘 씌여진 ‘작전사’라는 의미 이상을 가지고 있다. 사실상 그 동안 국내에는 2차대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소개되지 못했으며 개론적인 저작들만이 간헐적으로 소개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유럽과 미국의 최신 연구성과는 반영하지 못한 저작들이 뒤늦게 소개되어 항상 아쉬움을 안겨주었다. 이 점에서 ‘전격전의 전설’은 의미를 가진다. 이 저작은 1990년대 중반까지 이뤄진 2차대전사의 연구성과를 잘 반영하고 있으며 1940년 프랑스 전역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이 연구를 능가하는 저작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즉 ‘전격전의 전설’은 사실상 2차 대전 초기 전역에 대한 가장 최신의 연구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된 것이다. 이 책이 영어판으로 번역된 것이 2005년의 일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참으로 이례적인 사례이다. 이제 ‘전격전의 전설’이 국내에 소개 됨 으로서 2차대전사에 관심을 가진 많은 분들이 지적 갈증을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으로 이 저작은 군사 문제는 물론 정치 문제에 있어서도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전쟁 초기 히틀러와 독일 고위 장성들 간의 전략적 견해 차이와 전역 수행 과정에서 있었던 히틀러의 작전 간섭 등은 민군관계에 대해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는 흥미로운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 국내에 소개된 민군관계에 대한 연구들은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주로 민간 관료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저자인 프리저는 군인 출신답게 군대의 관점에서 정치인의 군사문제 개입이 가지는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번역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번역은 뛰어나다. 번역판을 읽으면서 다른 번역서를 읽을 때 느끼는 문투의 어색함을 거의 느끼지 못해 놀랐다. 그렇다고 해서 의역이 남발된 것도 아니다. 번역자인 진중근 대위는 원 저자의 의도를 잘 살리면서도 한국의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우리말로 옮겼다. 이 방대한 저작 전체에 걸쳐 번역의 수준이 일관되게 유지되는 점에서 번역자가 얼마나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독서의 계절인 겨울에 이렇게 의미 있는 저작이 유려한 한국어로 옮겨졌다는 점에서 독자의 한 사람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이 책을 2차 세계대전에 대해 관심을 가진 분은 물론 역사와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해 지적 호기심을 가진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국내에 좀처럼 소개되기 어려운 종류의 저작이며 게다가 그 수준 또한 높은 저작이기에 앞서 언급한 분들에게 충분한 지적 자극과 독서의 즐거움을 드릴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1월 1일 화요일

'전격전의 전설'의 명사 표기 문제 몇 가지

전격전의 전설에 대한 서평은 조금 뒤에 올리고 일단은 지금까지 읽으면서 생각난 것을 조금 적어 보려 합니다. 독일어판과 대조하면서 읽고 있는지라 생각보다 속도가 안 나가는군요.

진중근 대위님을 모신 자리에서도 잠시 이야기가 나왔지만 몇 가지 명사 표기의 문제가 있습니다. 독일군 장성의 계급 표기나 특수한 부대 명칭, 장비 명칭 등에 대해서는 사실 국내에서 일관적으로 통일된 것이 없으니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고 지금까지 읽은 부분에서 나타난 가장 기본적인 명사의 표기 문제 몇 가지만 언급하려 합니다.

예를 들어 박격포(Granatwerfer, Gr.W)가 유탄발사기로 옮겨져 있었습니다. 이 표기가 서적 전체에 일관적으로 사용되고 있더군요. (물론 총류탄 발사기를 Gewehr-granatwerfer라고 부르고 있긴 합니다)
64쪽에는 경보병포(leichtes Infanteriegeschütz)와 중보병포(schweres Infanteriegeschütz)가 각각 경보병무반동총과 중보병무반동총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Infanteriegeschütz라는 단어는 서적 앞 부분에서 보병용 돌격포로 표기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번역 이후 교열 과정에서 처리가 안 된 것으로 보입니다. 또 21cm Mörser는 210mm 박격포로 되어 있는데 독일어에서 Mörser가 박격포에 해당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은 2차대전 이후의 일 입니다. 2차 대전당시의 Mörser는 대구경 공성포 종류를 지칭하는 단어이죠.
그리고 90쪽에는 35(t) 전차와 38(t) 전차를 각각 35톤 전차와 38톤 전차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서적 앞부분의 용어해설에서 t(tschechisch) : 체코의, 체코형, 체코산 으로 밝히고 있기 때문에 교열 과정에서 발생한 실수로 보입니다.
94쪽에서는 대전차포(Pak)를 대전차로켓으로 적어 놓았는데 이것 또한 교열 과정의 실수 같습니다.
101쪽(독일어판 59쪽)의 슈투카에 대한 설명에서는 ‘기관포의 명중률은 대단히 높았지만..’으로 문장이 되어 있는데 원판의 문장은 ‘Zwar erschien die Treffengenauigkeit bemerkenswert, ..’로 문맥상 급강하 폭격시 폭탄의 명중률을 말하는 것 입니다.
181쪽(독일어판 124쪽)에서는 ‘Kanisterversorgung’을 ‘드럼통 보급’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Kanister는 보통 제리캔이라고 부르는 작은 기름통이죠.

그나 저나 많은 분들이 서평을 쓰려고 대기하고 계시니 어떻게 하면 독창적인 서평을 쓸 수 있을지 고민입니다.

Dea-In-Bae aller Länder, vereinigt euch!


2008년에도 이 재미없는 블로그를 계속해서 방문해 주시는 분들과 새로 방문하시는 분들을 환영합니다. 앞으로 좀 더 재미있는 블로그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