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27일 토요일

읽는이를 답답하게 하는 일본 육군의 대전차전 사례 하나

2차대전 당시 일본군 보병의 빈약한 대전차전 능력은 아주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래서 유럽전선이었다면 전차들이 보병의 손쉬운 사냥감이 되었을 상황이라도 일본군은 별 볼일 없는 성과만 거뒀던 것 같습니다. 아래의 사례는 레이터 전투 당시의 일화입니다. 보시면 아시기겠지만 보병이 제대로 된 대전차 화기를 갖췄다면 그야말로 전차가 큰 피해를 봤을 상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차를 공격한 쪽이 일본군이었다는 것이죠;;;;

제763전차대대는 96보병사단에 배속되었다. 이 대대는 상륙 당일 산 호세San Jose인근에 상륙했다. 763전차대대는 보병을 지원하면서 내륙으로 수천 야드를 진격했지만 해안가 뒤로 펼쳐진 습지대에 가로 막혀 옴싹달싹 못하게 되었다. 보병들만 계속해서 전진했다.

10월 22일, C중대와 D중대의 3소대는 무르고 질척거리는 지형에 가로막혀 다시 해안으로 되돌아가 가야 했다. 이들은 해안에 도착하자 (북서쪽으로 4마일 떨어진) 피카스Pikas로 가는 길을 찾은 뒤 그곳에서 어려움에 처해 있는 383보병연대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찰스 파이페Charles G. Fyfe중위가 지휘하는 C중대의 1개 소대에 래퍼티David M. Rafferty가 지휘하는 D중대의 경전차 소대가 배속되어 이 임무를 맡게 됐다. 보병들은 이 전차 부대들이 지나가야 할 지역을 거쳐서 진격했지만 일본군을 정글에서 완전히 소탕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전차들이 지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의 오른쪽 측면의 카트몬Catmon산에는 우회하고 넘어간 일본군의 대규모 거점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차를 보호할 보병이 전혀 배속되지 않았다.

피카스로 가는 길은 상태가 나쁜데다 구불구불했고 교량은 통과 가능한 하중이 낮았다. 대열을 선도하는 중형전차가 교량을 망가트렸기 때문에 후속하던 경전차들은 전차가 건널 수 있는 얕은 여울목을 찾아야 했다. 이 때문에 경전차 소대는 다소 뒤쳐지게 되었다.

보병이 배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전차와 중형전차 모두 지나가는 길에 있는 여울, 커브길, 오르막길 마다 주의를 하며 지나갈 필요가 있었다. 경전차들이 막 한 고비를 넘기려 했을 때 도로 왼편의 덤불 속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며 갑자기 막대기에 달린 폭약을 가진 일본군 한명이 덤불속에서 튀어 나와 선두 전차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일본군 병사는 후속하던 전차의 사격에 의해 중간에 쓰러졌다. 길을 따라 수백 야드 더 전진하자 도로의 오른편에 있는 무성한 덩쿨속에서 또 다른 일본 병사가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선두 전차가 당해서 오른쪽 궤도가 파괴되었다. 전차장 래퍼티 중위는 자신의 전차를 수리하는 동안 소대의 다른 전차들에게 자신의 전차를 둘러싸고 경계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차들이 경계 대형을 취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적군이 공격해 왔다. 군도를 휘두르는 장교가 이끄는 약 30명의 일본군이 덤불 속에서 튀어나왔다. 일본군들은 고함을 지르고 사격을 퍼부으면서 전차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일본군 장교는 뭔가를 잘못 알고 있었는지 자신만만하여 마지막 전차로 달려들었고 차체의 기관총을 군도로 힘껏 내리쳐 반쪽을 내려고 했다. 그 장교는 곧바로 다른 전차의 기관총에 벌집이 되었다. 짧지만 요란한 교전이 끝나자 일본군은 후퇴했지만 계속해서 가까운 거리에서 경전차 소대를 소화기로 공격했다.

그때 중형전차 소대는 상당히 앞서가고 있었다. 래퍼티 중위는 파이페 중위에게 무전을 날려 그의 소대가 어려움에 처했다고 알렸다. 일본군의 사격 때문에 노출된 상태에서 이동하는 것이 어려웠고 경전차는 공간이 좁아서 기동불능이 된 전차의 승무원들 까지 태울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전차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파이페 중위는 경전차 소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으나 전차 한대 만을 좁은 길을 따라 돌려보낼 수 있었다. 이 전차는 불운에 처한 경전차 소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래퍼티 중위와 그의 부하들은 자신들의 전차의 탈출용 해치로 빠져나와 도랑을 따라 기어서 구출하러 온 중형 전차의 탈출용 해치로 들어갔다. 그리고 경전차 소대는 후퇴를 하려 했다.

일본군의 강력한 사격 때문에 이 기동은 매우 어려웠다. 다른 전차 한대가 막대기 폭약에 맞았다. 이동하는 것 보다는 정지해 있는 것이 덜 위험한 것으로 보였다. 파이페 중위에게 교신이 취해졌고 파이페 중위는 다시 중대장에게 알렸다. 그리고 경전차 소대는 그 위치에 남아 일본군이 모습을 드러내면 사격을 산발적으로 가했다.

마침내 C중대에서 다른 중형전차 소대가 도착했다. 일본군은 격퇴되었고 부대 전체가 중대 지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루가 꼬박 지나갔다. 조금도 진격을 할 수 없었다. 전차 한대를 상실했다. 전차들은 383보병연대에 도착하지 못했다.

Committee 16, Officers Advanced Course  The Armored School, Armor in Leyte : Sixth Army Operations, 17 Oct-26 Dec 44, (1949). pp.94~97

전차에게 불리한 정글에서, 게다가 좁은 도로를 중심으로 지원하는 보병조차 없이 고립된 경전차 1개 소대를 격파하지 못한 것 입니다. 일본군의 대전차 전력이 얼마나 빈약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같은 시기의 독일군 이었다면 763전차대대 D중대의 경전차 소대는 물론이고 구원하러 달려온 C중대의 중형전차 소대도 상당한 손실을 각오해야 했을 것 입니다. 실제로 독소전 초기 다소 빈약한 대전차 화력을 갖췄던 독일 보병들이 위에서 제시한 사례와 같은 지형에서 T-34나 KV 등의 강력한 전차를 상대로 보여준 실력을 보면 일본군은 장비만이 문제였던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전차의 성능이 보잘것 없었던 1935년의 이탈리아-이디오피아 전쟁만 하더라도 보병들이 변변한 대전차 화기 없이 경전차를 때려잡을 수 있었습니다만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 전차는 기술적으로 무서운 발전을 이뤘지요. 사실 셔먼은 그렇다 하더라도 1944년 기준으로 별볼일 없는 성능이었던 스튜어트 경전차들 조차 격파하기 어려운 상대였다니 일본 육군은 장비면에서 정말 답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2011년 8월 20일 토요일

징병제에 대한 잡상 하나

근대적인 대규모 국민동원을 처음으로 시도한 것은 혁명기의 프랑스 였지만 이것을 더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은 프로이센이었습니다. Albrecht von Roon의 군제개혁은 프로이센식의 동원체제를 확립했고 보불전쟁 이후로는 세계 각국의 모델이 되기도 했지요. 그런데 론의 군제개혁은 병력동원의 효율성에 초점을 맞춘 것 이었습니다. 징병제를 옹호하는 측에서 지지하는 "무장한 시민"의 개념과는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론의 군제개혁은 독일 자유주의자들이 1813년 독일 민족 정신의 발현으로, 그리고 "무장한 시민"의 상징으로 생각한 향토방위군Landwehr를 축소하고 그 대신 국가가 "통제"하는 현역 자원을 늘리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징병제를 옹호해야 하는 입장에서 이런 사실들은 골치아픈 진실입니다. "무장한 시민"으로서의 징병제를 옹호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채택한 징병제는 "무장한 시민"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단지 병력자원 확보에 초점을 맞춘 프로이센 방식에 가까우니 말입니다. 그리고 사실 한국의 징병제는 프로이센 지배층의 구상과 비슷한 바탕에서 움직이고 있지요;;;; 생각하면 할수록 답답한 문제인데 좀 더 정리된 글을 하나 쓰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2011년 8월 14일 일요일

더글라스 내쉬의 「잊혀진 병사」에 대한 글 중에서

지난번에 쓴 「조선족들의 한국전쟁 회고담」에서 잠깐 기 사예르의 『잊혀진 병사』에 대한 논쟁과 이 논쟁에서 기 사예르를 옹호한 더글라스 내쉬의 글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한 글은 내쉬가 Army History 1997년 여름호에 기고한 “The Forgotten Soldier : Unmasked”라는 글인데 상당히 흥미롭게 읽은 바 있습니다.
2차대전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기 사예르의 회고록은 많은 오류 때문에 1990년대에 들어와 진위여부에 대한 논쟁이 한차례 진행된 바 있습니다. 내쉬는 구술작업도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인간의 기억이 가지는 문제점, 구술자료의 장단점을 잘 파악하고 있는데 이 글에서 그 점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중 흥미로운 부분을 조금 인용해 보지요.

케네디Edwin L. Kennedy. Jr가 지적한 것 처럼 사예르의 회고록에는 많은 자잘한 오류들이 있다. 즉 화기의 구경, 차량의 명칭, 부대 그리고 용어 같은 것이다. 이런 오류 중 많은 것들은 영문판의 군사용어 번역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또한 애당초 사예르는 프랑스와 벨기에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이 책을 썼으며 번역을 하면서 독일 군사용어에 대응되는 프랑스어 어휘를 무리해서 끼워맞춘 것이 원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어로 번역된 용어들을 영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사소한 오류들을 더욱 심화시켰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예르는 초고를 연필로 썼는데 알아보기 힘든 부분 때문에 처음 출판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겼을 수도 있다. 게다가 사예르는 전쟁이 끝난 뒤 잠시 프랑스군에 복무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가 사용하는 어휘에 프랑스 군사용어가 들어가기도 했을 것이다.

한가지 더 명심해야 할 것은 사예르는 열 여섯살에 입대했다는 점이다. 사예르는 3년 뒤 전쟁 포로가 되어 독일군에서 제대했는데 이 때는 열 아홉살의 청년이었다. 사예르는 겨우 어린애를 벗어났을 뿐 아니라 독일어를 제대로 말할 줄도 몰랐으며 세부적인 군사지식에 대한 안목도 없었다. 전혀 다른 문화를 갑자기 접하게 된데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졌는데 사예르가 자신이 경험한 것 들을 뚜렷하게 기억해 낼 수 있다면 그거야 말로 더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확실한 사실은 사예르가 사소한 사실들을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긴 해도 전체적인 틀에서는 정확하다는 것이고 이점은 저자의 신뢰성을 충분히 뒷받침 해주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22년이 지난 뒤에 이런 사소한 사실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하거나 잘못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야 말로 인간답고 훨씬 믿을만 하지 않은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국인 중 수개월의 전투를 경험한 뒤 대략 25년쯤 흐른 뒤에 모든 자잘한 사실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그런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군사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이라 할 지라도 그러지는 못 할 것이다. 대학교육을 받은 군사사 전공자나 직업군인, 혹은 취미로 2차대전을 연구하는 사람이나 군복, 무기, 군장, 그리고 차량 등을 수집하는 애호가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세부적인 사실들은 사예르에게 있어서는 사소한 것 들이었으며 이 때문에 군사적인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아무렇게나, 심지어 대충 서술한 것이다.

케네디가 가장 강하게 확신하고 있는 부분은 사예르가 군복에 부착하는 표식의 위치를 잘못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사예르는 부대의 소매띠 위치를 잘못 서술하고 있다. 이 점 때문에 필자는 현재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 전우회장을 맡고 있는 퇴역 소령, 헬무트 슈페터씨와 서신을 교환하기도 했다. 케네디가 생각하기에는 이 점을 비난하는 것 만으로도 사예르의 회고록 전체가 조작이라는 딱지를 붙이기에 충분할 것이다.(케네디의 글을 인용하자면 “[소매띠의]  위치를 잘못 기억한다는 것은 납득할 수 가 없다”)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이 독일육군의 정예 부대로서 부대원들의 오른쪽 소매에 소매띠를 달도록 허가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의 소매띠는 쥐텔린Süttelin 서체로 Großdeutschland라는 글자를 수놓은 것으로 당시에는 오늘날의 레인저 부대 마크나 다른 특수부대의 상징만큼 명예로운 상징이었다. 무장친위대 사단들 또한 소매띠를 달도록 허가받았는데 이들은 왼팔에 달았다. 사예르는 그의 회고록에서 자신과 전우들이 소매띠를 받았을 때 왼팔에 달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썼는데 이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른팔에 달라고 명령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예르는 소매띠에 대해서 틀린 것이 맞다. 하지만 이 점이 뭘 입증해 준다는 것인가? 사예르의 회고록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세부적인 군사지식이 아니라 느낌과 분위기, 그리고 경험이다. 소매띠의 위치 같은 내용은 사예르가 너무나 뚜렷히 기억하고 있는 공포나 무용담과 비교하면 하잘데 없는 것에 불과하다. 사예르는 그저 소매띠를 어디에다 달았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2차대전 시기 독일군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이런 오류가 그렇게 까지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사예르는 이런 세부적인 사실에 대해 부주의한 면을 자주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세부적인 사실들을 잊어버리는 것은 참전용사들에겐 흔한 일이다. 나는 해외근무기장Overseas service stripes을 어느 쪽에 다는지 모르는 2차대전 참전용사와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있다. 필자의 조부는 1944년 6월 6일 82공수사단 소속으로 생-메르-에글리제Sainte-Mère-Église에 강하한 분인데 자신이 82공수사단 마크를 달았는지 비공인 508강하연대 마크를 달았는지 기억하지 못하셨다. 그가 노인이어서가 아니다. 단지 많은 사람들이 세부적인 지식들을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대 휘장과 같은 것들을 잘못 기억하고 있다고 해서 사예르의 이야기가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소한 것에 얽매여 큰 것을 바로 보지 못하는 짓이다.

“The Forgotten Soldier : Unmasked”, Army History No.42(Summer, 1997), pp.15~16

더글라스 내쉬는 그의 대표작 Hell's Gate: The Battle of the Cherkassy Pocket January - February 1944에서 잘 보여주었듯 전쟁을 이야기 하면서 그 속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제가 내쉬의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위에서 인용한 것 처럼 내쉬는 사예르의 회고록을 둘러싼 논쟁에서 군사적인 지식들의 오류를 근거로 비판하는 측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쉬가 구술 경험이 풍부하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한데 그는 인간의 경험과 기억이 전쟁을 어떻게 재구성하는지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인용한 조선족들의 경험담에서도 잘 나타나지만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은 관심사가 같을 수가 없고 전쟁을 대하는 태도도 근본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전쟁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행위이지만 전쟁사를 공부하다 보면 그 속의 인간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쉬와 같은 관점을 가진 역사가들은 반가운 존재입니다.

2011년 8월 7일 일요일

조선족들의 한국전쟁 회고담

한국전쟁에 참전한 조선족들의 회고담 모음집을 읽는 중인데 꽤 재미있습니다. 한국전쟁시기 중국군 수뇌부가 미군의 제공권 장악과 높은 기계화를 두려워 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일선 병사들의 기억 속에는 그런 공포가 한층 더 강하게 자리잡았던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 흥미롭게 읽은 대목을 조금 인용해 보지요.

적기의 폭격은 영화에서 보는 것 보다 훨씬 더 가렬하였다. 하늘은 타래치는 검은 연기와 뽀얀 먼지로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고막이 터질듯한 련속적인 폭발소리에 땅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고 생사를 가늠할 수 없었다. 아군부대가 마을에 들었다는 소문이 나면 폭격이 사정없이 들이닥쳤다. 폭격이 즘즉해지면 서로 부르는 소리, 우는 소리…… 동네는 처참한 정경으로 수라장을 이루었다. 폭격당할 때에는 살아남을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으나 폭격이 끝나고 보면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이 많았다.

(중략)

적기의 공습은 수시로 되였다. 우리는 보총, 기관총으로 낮게 뜨는 적기를 쏘아 떨구겠다고 무등 애를 써보았으나 맞을리가 없었고 정작 공습이 시작되면 폭탄을 피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적들의 공중우세로 하여 우리는 얼마나 많은 희생을 냈는지 몰랐다.

한번은 아군의 야전병원에 적의 전투기 네대가 날아와 기관포사격을 하고 뒤이어 폭격기가 날아와서 폭격하여 우리는 희생자 5명을 내였다. 1차 전역때 남조선에서 참군한 한 전사는 폭격에 목이 거의다 떨어졌다. 그리고 조선 평안남도에서 참군한 리무석이라는 전사는 두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는데 처음에는 정신이 말똥말똥하였다. 담가에 눕혀가지고 얼마 안가니 두 다리가 고무풍선처럼 부어나더니 조금 지나더니 눈을 감고 말았다. 조선전쟁은 전후방이 없었고 죽는데에도 군대와 백성의 구별이 없었다.

적기의 폭격은 전방과 후방을 가리지 않았고 후방에 있는 백성들도 많이 죽었다. 그때 한 전사는 된감기에 걸려 양지쪽 산비탈에 누워서 햇뱇쪼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200메터밖에서 터진 포탄파편이 그 전사의 머리를 명중하여 당장에서 즉사하였다. 한 녀성은 아이를 업고 있다가 적기의 공습을 받았는데 적기의 기관포탄알이 그녀의 뒤흉추상부로부터 복부로 관통하여 그 자리에서 죽었으나 업혀있던 아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

적의 폭격기편대가 앞에 한대, 뒤에 두대 이렇게 사람인자를 이룬 편대로 되여 날아가면 온 하늘이 떨리였다.

배태환 구술, 「정전전후」,  정협 연변조선족자치주 문사자료위원회 편, 『돌아보는 력사』(료녕민족출판사, 2002), 262~265쪽
‘비행기 사냥군조’가 미제의 공중비적을 파리 잡듯 때려잡는 북한 쪽 선전보다는 훨씬 솔직한 이야기 같습니다. 물론 조선족들의 회고담도 선전목적이 있기 때문에 무용담이 차지하는 비중이 많지만 북한쪽의 기록에 비하면 훨씬 솔직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인민군 5사단 소속으로 참전한 다른 조선족의 증언도 비슷합니다.

며칠후 상급에서는 우리 부대에 남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우리는 밤낮 걸어서 락동강반에 이르렀다. 락동강반에 이르니 우리더러 나가보라는 것 이였다. 우리 진지의 포 42문이 한방도 쏘아보지 못하고 적기의 공습에 몽땅 녹아났다. 망원경으로 내려다보니 강변에 시체가 한벌 깔려있었고 땅우에는 피가 질벅하였다. 도하하던 사람들이 실패한 것이였다. 그때에야 우리는 무엇이 전쟁이란 것을 알게 되였다. 우리는 누구나 말 없이 머리를 떨구고 돌아왔다.

김리정 구술, 「청춘도 사랑도 다 바쳐」, 위의 책 184쪽
몇몇 구술은 미군의 현대화된 무기에 대한 공포가 잘못된 지식과 결합해서 군대괴담 수준이긴 한데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습니다. 인민군 4사단 소속으로 참전한 다른 조선족은 미군의 화력과 장비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고 있습니다.

남북전쟁이 일어나 수원전투까지는 인민군과 국방군과의 싸움이였다. 그러나 평택전투부터는 전쟁의 성격이 변하였다. 유엔군이 참전하여 전쟁은 국제전쟁으로 승격하였다. 미국 태평양전선사령부는 팬프리트의 륙전대를 부산에 등륙시켰다. 평택까지 다가든 적들은 땅크와 122미리 대포로 우리와 맞섰다. 그들은 매 한메터에 포탄 하나씩 떨구었다. 미 공군도 B-29폭격기로 무차별 폭격을 가하였고 F-48(F-84의 오기인 듯) 전투기는 지면을 누비면서 소사하였다. F-48전투기가 지면을 소사할 때면 매 한메터 사이에 기관포알 하나씩 떨구었다. 적들의 화력 앞에서 우리는 머리를 쳐들 수 없었다.

(중략)

1950년 8월, 우리는 락동강반의 신반리(경상남도 의령군)까지 쳐들어갔다. 락동강전투는 가렬처절하였다. 적들은 원자무기를 제외한 모든 현대화무기를 썼다. 그들은 비행기 폭격을 한 다음 뒤이어 연막탄을 쉬임없이 던졌다. 그러면 옆의 사람마저 보이지 않아 전투를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또 세균무기를 썼다. 그러면 전사들은 세균에 감염되어 설사를 하고 토하면서 전투력을 상실하였다. 또 독가스탄을 썼는데 가스탄이 터진후 반시간 동안은 호흡을 할 수 없었다. 병력이 집중되여 있을만한 곳에는 비행기로 류산탄을 투하했다. 류산탄은 공중에서 폭발했기에 파편 쪼각들이 비오듯 쏟아졌고 그 살상력은 다단하였다. 지금도 나의 머리엔 류산탄 파편 두개가 박혀있다.

(중략)

1951년 3, 4월에 서울을 해방하고 부산까지 쳐들어갈 계획이였으나 적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특히는 적들의 공중우세로 하여 아군은 어쩔수 없었다. 우리 부대가 순천에 있을 때 적들은 운수기로 땅크를 투하하였다. 땅크는 공중에서 발동을 걸고 있었는데 땅에 떨어지자마자 앞으로 달리면서 싸울 수 있었다.

류호정 구술, 「피로 바꾸어온 평화」, 앞의 책 232~236쪽

류호정의 구술은 군사문제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잘못된 점을 쉽게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세부적인 사실에서는 틀린 것이 많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일단 낙동강 전투에 대한 회고 담에서 세균무기와 독가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이 부분은 중국이나 북한측 참전자들이 미국의 세균무기 사용을 어떻게 사실로 받아들이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러운 질병의 창궐은 전쟁터에서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주입된 여러가지 지식이 결합되면 훗날의 기억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 입니다.

“낙동강 전투 때 설사병이 돌았었지” → “미군이 항미원조전쟁에서 세균전을 했다는군” → “아하. 미군이 낙동강 전투에서 세균무기를 썼구나”

실제로 구술을 받다 보면 당시의 소문에 불과했던 것들이 개인적인 경험과 결합되어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점을 고려하면 류호정의 이상한 회고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중에서 투하되는 전차와 같은 미국의 첨단기술에 대한 이야기는 1990년대에 운동권에서 많이 읽힌 김진계의 회고록인 『조국』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을 정도로 당시 공산군이 미국의 군사기술을 어떻게 보았는지 잘 보여주는 내용입니다.(김진계의 회고록에서는 헬리콥터가 고지 정상으로 탱크를 실어 나르죠;;;;;)

체르카시 전투에 대한 걸출한 저작을 낸 군사사가 내쉬(Douglas E. Nash)는 기 사예르의 회록에 대한 논쟁에서 참전자들의 기억에 나타나는 군사지식의 오류문제에 대해 아주 재미있는 지적을 한 바 있습니다. 참전자들의 전쟁 기억은 세부적인, 혹은 전문적인 부분에서 종종 부정확하고 엉터리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조선족들의 회고담도 많은 부분에서 오류가 보이고 종종 과장된 내용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무시할 필요는 없을 것 입니다.

2011년 8월 4일 목요일

민폐

유별나게 군대와 인연(?)이 많으셨던 시인 모윤숙 여사가 5ㆍ16직후 쿠데타를 지지하는 군부대 순회강연을 다닐때의 일화랍니다.

어느 연대 마당에 이르렀을 때에는 벌써 오후가 되어 싸늘한 산바람이 일고 있을 때였다. 2~3,000명으로 헤아일 수 있는 사병이 모두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나는 준비된 사회자의 소개에 의해 연단에 올라섰으나, 도무지 마음이 편안치가 안았던 것은 내 말이 무슨 말이던 땅바닥에 앉아 듣는 사병에게는 너무 지나치는 푸대접이 아닐가 생각되어서 무엇보다 한 연대에 하나씩 속히 대강당을 지어서 그들로 하여금 안정된 자리를 마련해 줌이 옳겠다고 생각되었다.

毛允淑,「一線에 다녀와서 : 巡回講演 感想記」, 『國防』117호(1962. 1), 114쪽

군대를 다녀오신 분들이라면 이 글을 읽고 살짝 짜증이 나실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때의 군대는 극도로 열악한 복무환경을 자랑하고 있었으니 요즘 군생활과는 비교할 것도 아니겠습니다만.

쿠데타 직후 ‘군사혁명’을 지지하는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여기 저기서 터져 나왔고 우리의 모윤숙 여사도 그 중 한 분 이셨다지요. 당시 군부에서는 쿠데타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실제로 상당한 효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군대 내에서도 정훈교육을 통해 관련 교육이 이루어졌고 모윤숙과 같은 지식인들의 강연은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맨 땅바닥에 앉아서 지루한 강연을 들어야 했던 병사들은 어떤 생각이었을지 궁금하군요. 모윤숙이 불편함을 느낄 정도였으니 당사자들은 어떤 심정이었을지.

2011년 7월 30일 토요일

『도시의 승리』를 읽는 중입니다

지난주에 동네 서점에서 산『도시의 승리』를 읽는 중입니다. 아. 그런데 이거 정말 재미있네요. 번역도 잘 된 것 같지만 원서가 읽고 싶어질 정도로 재미있습니다. 아직 다 읽진 못했는데 재미있는 구절이 많군요. 지금 읽는 부분을 조금 인용해 보겠습니다.

오늘날 도시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통치하는 도시의 번영을 증명해 보여주는 것 같은 대형 건물들의 준공식에 참가해서 포즈를 취하는 것을 좋아한다. 지난 수십년 동안 미국의 연방 정부는 건축과 교통 분야에는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면서, 학교와 안전에는 그보다 훨씬 더 적은 돈을 투자함으로써 이런 경향을 더욱 심화시켰다.

도시에 거대한 건축물들을 지으면 쇠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이 바로 '거대 건축 지향주의'의 사례이다 .이것은 근사해 보이는 신축 건물이 도시의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이다. 일반적으로 성공한 도시들은 열심히 뭔가를 짓는다.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면 사람들은 기꺼이 돈을 내고 더 넓은 공간에서 생활하기를 원하고, 건축업자들은 행복하게 공간을 제공한다. 그러나 건축은 성공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따름이다. 이미 필요 이상으로 건물들이 많은 쇠퇴하는 도시에 계속해서 많은 건물을 짓는 것은 바보 같은 행위이다.

에드워드 글레이저 지음/이진원 옮김,『도시의 승리Triumph of the City』(해냄, 2011). 122~123쪽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지긋 지긋한 삽질 지상주의를 조롱하면서도 살짝 보수적인(?) 관점에서 인적 자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점이 특히나 마음에 듭니다. 어떤 일간지의 서평에서 잠깐 보고 흥미가 당기긴 했는데 이정도로 재미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웃으면서 읽는 중 입니다.

2011년 7월 28일 목요일

모범답안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미국의 안보 관련 기관들은 왜 한반도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는지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미육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50년 7월 21일, 미육군은 한국전에 대한 육군 참모총장 콜린스(J. Lawton Collins) 대장의 의회 특별 보고에 대한 문건을 작성합니다. 이 중 정보 실패에 대한 해명은 육군부 정보국장 어윈(S. LeRoy Irwin) 소장이 직접 작성했습니다. 이 문건은 총 3쪽으로 되어있는데 꽤 재미있습니다.

한반도 사태에 대한 우리 정보기관의 성과에 대해 많은 말이 오가고 있습니다. 본인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사태는 우리가 수집한 정보에 비추어 볼 때 어디서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는 점을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지난 1년 반 동안 정보기관들은 우방국들의 국경에 소련과 그 위성국의 군대가 언제든지 공세에 나설 수 있을 만큼의 병력과 물자를 배치했음을 보고해 왔습니다. 이중 일부 지역에서는 공격 행동이 임박했다는 충분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지만 현실화 되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소련이 어떤 국경에 이미 배차한 전력으로 공격 행위를 취하려 했다면 어떠한 사전 경고도 없이 공격이 가능했을 것 입니다.

한반도의 경우에는 언제든지 남한에 대해 공세를 취할 수 있는 강력한 북한군이 38선 인근에 배치되었다는 점이 모든 정보기관들을 통해 보고되었습니다. 실제로 북한군은 남한에 대해 여러차례에 걸쳐 심한 경우에는 대대급 전력으로 제한적인 공세를 감행해 왔으나 매번 교전을 계속하지 않고 철수했습니다. 이와 같은 공격(전면공격)에 대한 경보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기습이 완벽하게 가능했던 것 입니다.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모든 활동을 통제하는 것은 전적으로 주한미국대사 무초의 관할이었다는 점을 반드시 유념하셔야 합니다. 무초 대사의 군사 참모진은 한 개의 부서, 육군 무관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주한미군사고문단(KMAG)으로 알려진 한 집단의 육군 장교들로 구성된 사절단은 한반도를 통일하기 위한 국제연합의 활동이 진행되는 동안 대한민국의 국내 안보를 유지하기 위해서 남한군을 무장시키고 훈련시키는 것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주한미군사고문단은 이러한 각종 훈련 임무외에 정보 업무를 직접적으로 담당하지 않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북한의 활동과 그 의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기회나 수단이 없었습니다. 중앙정보국(CIA)이 모든 비밀 정보활동을 담당한 이래 군사고문단은 모든 형태의 첩보활동에서 배제되었으며 사실상 군사고문단원이 정보활동에 투입될 경우 고문단의 외교적 지위를 위태롭게 함으로써 정책에 위배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극동군사령관은 군수지원과 주한미국대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미국 거류민들을 철수시키는 임무 외에는 한반도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없었으나 그가 관할하는 구역의 안보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허가는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가 극동군사령관의 지휘하에 있지 않았으므로 그가 한반도의 상황을 주시할 수 있는 자체적인 수단을 확보할 기회는 상대적으로 제한되었습니다.

5월 24일에 육군 정보참모부로 부터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이 방첩 활동을 강화했기 때문에 정보의 양과 질이 심각하게 감소했으며, 많은 국가들이 자체적으로 정보 인력을 감축한 것과 미국의 경제 위축의  여파로 각 지역의 정보 인력이 감소한 점을 보고 받았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도 적절할 것 입니다. 이러한 행위로 인해 국외 정보 수집하는 것과 국내에서 정보를 분석하는 것이  심각하게 약화되었습니다. 사실 정보참모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국방 정보 기구들이 러시아의 공격을 미리 파악할 수 있다는 보장을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우며 우리의 정보력이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는 점을 고려할 때 현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본인은 이러한 보고를 받은 뒤 미국과 동맹국의 군대가 충분한 대비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경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려는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몇몇 문제점은 바로잡을 수 있었으며 그 밖의 것들은 본인의 책임 범위내에 넣을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적의 공격에 대한 경보를 때맞춰 받는 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많은 문제점들을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정보 수집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현 상황을 바로 잡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모든 정보기관들은 세계 정세로 인해 그들의 앞에 놓여진 막대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부분 동원 체제에 돌입해야 한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정보기관들이 항상 적 지휘관들의 마음을 읽어내서 적군이 이미 전개되어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적의 지휘관들이 언제쯤 공격을 결심할지 알아내길 바라는 것은 무리라는 점을 여러분께 설명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결정은 매우 빨리 이루어지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들은 어디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Tab D, Special Presentation to Congress”(1950. 7. 21), pp.1~3, RG 319, 319.12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Assistant Chief of Staff, G-2, Intelligence, 1918~78, Top Secret Correspondence, 1941~62, Entry 47, Top Secret Decimal File, 1942~52 Italy 1950 to 350.066 1950, Box 12

제목그대로 모범답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문건을 작성한 인물이 육군 정보국장인 어윈 소장인 만큼 자기 부서의 책임을 최대한 회피하려는 것이 잘 드러나있지요.

여기서 모범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몇가지 있습니다.

1. 정보 실패의 근본적인 책임을 국무부와 CIA에 돌리는 점.
2. 육군은 책임을 질 위치가 아니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점.
3. 예산 문제를 강조하는 점.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점.

물론 정보 실패의 책임이 국무부와 CIA에 있다는 주장은 문제가 많습니다. 극동군사령부는 물론 주한미군사고문단도 자체적으로 대북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지요. 문제라면 북한의 전력과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 못했다는 점인데;;;;

이 문건은 좀 궁색하긴 하지만 조직을 방어하는데 있어서는 모범적(?)인 사례가 아닐까 합니다. 실제 콜린스 장군의 의회 특별보고에 대한 기록을 찾아서 비교해 보면 더 재미있을 것 같군요.

2011년 7월 21일 목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Z-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1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2. 테렌스 주버VS로버트 폴리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4

Z. 테렌스 주버의 단행본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Z-1

S. 번외편 및 기타 사항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S-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Z-2

이번에 소개할 책은 테렌스 주버의 2004년 작, German War Planning, 1891~1914 : Sources and Interpretations입니다.

이 책은 테렌스 주버가 슐리펜 계획과 관련된 사료들을 영어로 번역해 정리한 자료집입니다. 사료집인 만큼 굳이 소개할 필요가 없을 것 같기도 하지만 연재물의 성격상 짤막하게라도 이야기는 하고 넘어가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이 책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이 쉽게 접하실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좋지요.

German War PlanningInventing the Schlieffen Plan : German War Planning, 1871~1914을 보완하는 자료집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 실린 사료들은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의 구성과 대략 비슷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German War Planning은 대략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1장으로 주버의 주 사료중 하나인 디크만의 연구를 포함한 세 건의 자료가 실려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글은 역시 디크만의 연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는 2~4장 까지로 슐리펜의 전쟁계획과 관계된 자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장은 슐리펜의 참모부연습으로 1894년, 1901년, 1902년, 1903년의 동부참모부연습과 1904년의 서부참모부연습 등 다섯건의 자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3장은 1905년 슐리펜이 실시한 워게임에 대한 논평인데 테렌스 홈즈가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지적한 것 처럼 일부 내용의 번역에 있어 논란이 있습니다. 4장은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인데 이것은 널리 알려진 자료이지요.

세 번째는 5장과 6장으로 몰트케 시기의 전쟁계획과 1차대전 초기 독일군의 실제 작전 수행을 다루고 있습니다. 5장은 1908년의 서부참모부연습을 다루고 있습니다. 6장에는 매우 중요한 사료 두건이 있는데 바로 현존하는 1차대전 초기 독일군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5군과 6군의 부대전개명령Aufmarschanweisung입 니다. 슐리펜계획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주력이었던 1군과 2군의 문서가 필요하지만 이것이 현재 전해지지 않는 만큼 5군과 6군의 문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주버는 논평을 통해 이것들이 슐리펜계획이 허구였다는 증거로 사용고 있긴 합니다만.

네 번째는 주버가 “슐리펜계획이라는 허구가 역사적 사실로 자리잡는 과정”으로 설정한 자료들입니다. 여기에는 7장과 8장이 포함됩니다. 7장은 1919년에 작성된 “1871년 부터 1914년 까지의 양면전쟁에 대한 작전개념의 발전Die Entwicklung des operativen Gedankens im Zweifrontkrieg von 1871 bis 1914”이라는 비밀연구에 대한 빌헬름 그뢰너Wihelm Groener의 논평입니다. 이 연재물의 서두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빌헬름 그뢰너는 테렌스 주버가 ‘슐리펜계획’을 조작한 인물 중 하나로 꼽는 인물입니다. 당연히 이 자료에서 빌헬름 그뢰너는 슐리펜계획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지만 주버는 이 자료가 슐리펜의 전쟁 계획에 대한 그뢰너의 이해 부족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8장은 1919년에서 1929년에 이르는 시기 독일의 전쟁계획에 대해 벌어진 논쟁에 관한 여섯편의 글을 싣고 있습니다. 슐리펜계획에 대한 논쟁을 떠나서 한스 델브뤽이 독일의 전쟁수행에 대해 비판한 1919년의 글 “1914년 독일의 선전포고와 벨기에로의 진격Die deutsche Kriegserklärung 1914 und der Einmarsch in Belgien”은 독일 군사사상의 한축을 차지하는 델브뤽의 견해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글 입니다. 델브뤽의 저작인 Geschichte der Kriegskunst im Rahmen der politischen Geschichte『병법사-정치사의 범주 내에서』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되어 있긴 하지만 근대전쟁을 제대로 다루고 있지 않다는 아쉬운 점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뛰어난 군사사상가의 근대전쟁에 대한 견해를 보여주는 이 글은 따로 일독할 가치가 있습니다.

저는 전통적인 견해를 지지하는 입장이지만 주버의 논쟁방식은 꽤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German War Planning, 1891~1914 : Sources and Interpretations은 대부분 전통적인 논지를 뒷받침하는 1차사료들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도록 영리하게 재배치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들은 앞으로 다루게 될 게르하르트 그로스Gerhard P. Groß의 “There Was a Schlieffen Plan: Neue Quellen”에서 새로운 사료들을 제시함에 따라 반박을 받게 됩니다만.

2011년 7월 19일 화요일

우연히 드라마 "계백" 예고편을 봤는데;;;;

우연히 드라마 "계백" 예고편을 봤습니다.

대사가 꽤 웃기던데 계백이 "당나라를 끌어들이고도 부끄럽지 않은가"운운하는데서 실소가 나오더군요. 유치한 민족주의 냄새가 풀풀나는데 예고편 배경음악은 또 에반게리온 사운드트랙에서 뽑아왔습니다. 할말이 없군요.

하여튼 신라가 외세를 끌여들였네 운운하는 개소리를 21세기에도 하고 있다니 참 짜증이 납니다. 아니.그럼 신라인들이 앉아서 망하기나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7세기의 신라인들이 뭘 잘못했길래 21세기에 사는 덜떨어진 인간들이 품는 망상의 희생물이 돼야 합니까.

그냥 한마디로 병신같습니다. 이런 정신나간 작품은 그냥 망하는게 나을 듯.

2011년 7월 18일 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Z-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1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2. 테렌스 주버VS로버트 폴리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4

S. 번외편 및 기타 사항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S-1


느릿느릿 연재되고 있는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입니다. 이번에 다룰 주제는 테렌스 주버가 2002년에 발표한 단행본,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 : German War Planning, 1871~1914(Oxford University Press, 2002)입니다. 이 단행본은 논쟁의 초기 단계에서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난타전이 진행되던 시기에 출간되었습니다. 이 연재물을 기준으로 하면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사이에 들어가는 저작이지요. 사실 주버와 홈즈의 논쟁 중간에 나온 단행본이기 때문에 이 논쟁의 사이에 넣는게 어떨까 생각했지만 이후 논쟁이 더 큰 규모로 전개되는 시발점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별도로 구분했습니다.

앞으로 테렌스 주버의 단행본들을 다루는 글은 Z-#으로 구분하도록 하겠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Z-1

이 단행본은 주버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포함한 기존의 논의들을 확대보강한 것이니 만큼 보강된 논의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핵심적인 논지는 주버가 1999년 War in History에 처음으로 발표했던 논문,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 실려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이 단행본은 크게 여섯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첫 번째는 1장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으로 1차대전 패배라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총참모부가 중심이 된 독일군부가 “슐리펜 계획”이라는 허상을 만들어내 전쟁 책임을 회피하려 했으며 이것이 아무런 비판없이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2장 Moltke’s Ostaufmarsch, 1871~1886으로 슐리펜의 전임자인 대몰트케 시기의 전쟁계획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3장 Fortresses, spies, and crisis, 1886~1890으로 19세기말 급변한 군사적 정세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홈즈와의 논쟁에서 지적된 19세기말의 정치군사적 정황에 대한 부분을 대폭 보강한 것 입니다. 4장 Schlieffen’s War Plan, 1891~1905는 이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5장 Moltke’s War Plan, 1906~1914는 소몰트케 시기의 전쟁 계획을 다루고 있습니다. 6장에서는 1차대전의 패배 이후 독일 군부가 패전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슐리펜 계획’이라는 허구의 계획을 조작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1차대전 종전 이후 부터 1950년대 게르하르트 리터Gerhard Ritter의 기념비적인 연구까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1장에서는 초기 논쟁에서 총참모부 비판의 중심에 있었던 군사사가 한스 델브뤽Han Delbrück에 대한 내용을 대폭 보강해 델브뤽이 클라우제비츠를 재해석하면서 소모전 전략을 옹호하는 과정과 이를 거쳐 1차대전 패배 이후 독일의 1차대전 이전 전쟁계획을 비판하게 되는 과정을 보다 밀도 있게 기술했습니다. 델브뤽은 이 과정에서 슐리펜 이전의 대 몰트케 시기의 동부전선에 주력하는 전쟁계획을 옹호했고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에서 설명한 것 처럼 독일군 총참모부 계열의 장교들이 이를 반박하는 과정에서 슐리펜의 전쟁계획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주버는 1장에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정설을 확립한 게르하르트 리터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리터가 중세사 전공자인데다 군사사도 아닌 종교개혁을 전공한 학자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새롭게 보강된 부분 중에서는 2장이 가장 재미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버는 슐리펜 계획의 배경이라는 관점에서 대 몰트케 시기를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대 몰트케의 군사적 역량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과격한 해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 몰트케가 대 게르만주의의 신봉자로서 공격적인 전략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게르하르트 리터의 고전적인 연구에서 슐리펜 계획을 공격적인 독일 군국주의의 발현으로 해석한 것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테렌스 주버는 이러한 주장을 나중에 다시 별도의 단행본, The Moltke Myth: Prussian War Planning으로 정리했습니다.
주버는 2장에서 델브뤽 등이 주장한 대 몰트케의 전쟁계획, 즉 동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해 공세로 나서는 계획은 대 몰트케가 퇴임시 까지 고수한 계획이 아니라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1882년 1월 부참모장Generalquartiermeister에 임명된 발더제Alfred von Waldersee의 존재입니다. 주버는 발더제의 군사적인 역량을 대 몰트케 보다 더 높게 평가하고 있으며 발더제의 임명되면서 대 몰트케가 입안했던 기존의 전쟁 계획이 대폭 수정되었다고 봅니다. 즉 대 몰트케 보다 발더제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 입니다. 2장에 따르면 대 몰트케의 전쟁계획은 당시의 국제정세에 따라 변경되었으며 양면전쟁을 상정한 경우에도 1877년에는 서부전선에 주력하는 계획을 세우는 등 고정적이지 않았습니다. 주버에 따르면 1879년에 이르면 서부전선 대신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펼치는 계획으로 옮겨가지만 이 계획도 발더제의 등장과 함께 폐기되었습니다. 주버는 새롭게 부참모장이 된 발더제는 대 몰트케가 기존에 입안한 계획들을 대폭 수정해 서부전선에서 공세를 감행하는 계획으로 변경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발더제나 슐리펜은 대 몰트케와 차별되는 훨씬 전문화된 장교단으로 구분함으로써 대 몰트케에 대한 군사적 재평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3장은 요새의 강화와 포병 화력 문제가 1880년대 이후 독일의 전쟁 계획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요새와 전쟁계획의 문제는 이 논쟁의 초기 단계에서 테렌스 홈즈가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를 통해 제기한 문제인데 주버는 3장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즉 3장은 홈즈와의 논쟁에서 영향을 받은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장에서는 1880년대 이후 포병화력의 발전에 따라 독일의 국경지대 요새 시설들이 사실상 구식화 되어 방어적인 가치가 떨어진 점을 지적합니다. 주버는 이것이 독일군 내에서 서부전선에서 방어를 취하는 것이 불리하다는 인식을 더욱 강하게 했다고 강조합니다. 몰트케가 퇴임직전 마지막으로 작성한 1888년의 부대전개계획은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하고 동부전선에서는 내선의 이점을 활용한 방어를 취하는 것 이었다고 정리합니다. 3장에서는 주력을 서부전선에 집중하는 계획이 이미 슐리펜의 총참모장 취임 이전에 형성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려 합니다.

4장은 슐리펜이 총참모장이 된 시기의 전쟁계획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이미 이 연재에서 다룬 바 있으니 생략하겠습니다.

5장은 소 몰트케가 총참모장이 된 이후의 전쟁계획과 1차대전 초기의 작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역시 5장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내용도 연재에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5장은 1차대전 직전의 상황을 다루고 있는 만큼 프랑스와 러시아의 전쟁계획, 특히 프랑스의 전쟁계획이 수정되는 것에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5장에서는 1차대전 직전 독일의 전쟁 계획을 지금까지 남아있는 제5군과 제6군의 부대전개명령Aufmarschanweisung에 근거해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1차대전 직전 독일의 전쟁계획은 주력을 우익의 1군과 2군에 집중하는 것은 맞지만 기본적으로 프랑스의 선제공격을 격퇴한 뒤 반격에 나서는 것 이었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벨기에를 침공한 것은 슐리펜 계획의 실행이 아니라 독일군 총참모부가 벨기에가 연합군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정보를 바탕으로 연합군이 벨기에를 방어나 공격의 거점으로 활용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 이었다고 주장합니다.

6장에서는 독일 군부가 ‘슐리펜 계획’을 조작했다는 주장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버의 이 저작은 슐리펜 계획에 대한 군사사학계의 논쟁을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대 몰트케에 대한 비판에서 잘 나타나듯 근대 유럽 군사사에 대한 전통적인 논의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야심찬 저작입니다. 주버는 이후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 하기 위해 전선을 조금씩 넓혀 나가고 이것은 논쟁을 더욱 확대시키게 됩니다.

2011년 7월 17일 일요일

『시베리아 정복사』를 구했습니다

약속 때문에 신림역에 갔다가 시간이 조금 남아서 근처의 헌책방에 들렀는데 의외의 물건을 건졌습니다. 바로 경북대학교 출판부에서 1992년에 번역해서 출간한 『시베리아 정복사Die Eroberung Sibiriens였습니다. 고등학교 때 교보문고에 갔다가 이 책을 처음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꽤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 때는 돈이 없어 나중에 돈이 생기면 사야지 하다가 결국 절판되어 구하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우연히 들른 헌책방에서 매우 상태가 좋은 것을 구하게 된 것입니다. 굉장히 즐겁군요.

원서가 1937년에 출간된 독일어 서적이다 보니 번역자가 러시아 지명들을 한국어로 옮기면서 독일식 발음에 따라 표기한것이 눈에 띄는데 이것은 제가 알아서 읽으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사료만 가지고 씌여져서 청나라와의 국경분쟁에서 조선군의 존재에 대한 서술이 없는게 아쉽습니다.

2011년 7월 12일 화요일

과대광고, 혹은 어떤 결전병기(???)

“왕자님, 유능한 장군의 휘하에 이 소총으로 무장한 6만명의 병사를 둔다면 프로이센의 국경이 어디가 되어야 할지는 국왕께서 결정하실 수 있게 될 겁니다.”
(Königliche Hoheit, 60000 mit diesem Gewehre bewaffnete Mann unter Führung eines talentvollen Generals und Se. Majestät der König werden bestimmen können, wo Preußens Grenze gehen soll.)

1840년, 드라이제 소총의 채택을 주장하던 프림Priem 소령이 빌헬름 왕자에게.

Dieter Storz, “Modernes Infanteriegewehr und taktische Reform”,  Das Militär und der Aufbruch in die Moderne 1860-1890,(Oldenbourg, 2003), s.211